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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에 관해/심리학 이야기

집단의 압력,펌

"집단의 압력"

2008. 12. 30. 오전 9:48 게시자: byeonguk park

심리학자 Muzafer Sherif는 인간이 “불분명한 판단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남에게 동조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Sherif 는 규범의 형성과정에 관심을 가지고서 다음과 같은 실험을 실시하였다. 피험자를 깜깜한 암실 속에 앉게 하고 4~5m 앞에 거을을 설치했다. 거울 바로 30cm 앞에서는 손전등에서 새어 나오는 바늘 구멍만한 가느다란 불빛이 거울에 반사된다. 피험자들은 거울에 반사된 작은 불빛을 볼수 있는데, 사실 이것은 정지된 불빛이지만 암실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되는 이유는 첫째, 어둡기 때문에 그 불빛이 정지해 있는 것을 알려주는 어떤 단서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기차를 타고 있을 때 우리 옆의 기차가 움직이면 우리가 타고 있는 기차가 움직이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원리와 같다. 둘째는, 우리의 눈이 정지해 있지 않고 계속 움직이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는 불빛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자동운동효과”라 한다.

Sherif 는 실험의 첫 단계에서는 피험자을 한 사람씩 조사했다. 피험자에게 자동운동, 즉 불빛이 움직이는 방향과 거리를 판단하게 하였는데 그들의 반응은 서로 달랐다. 어떤 사람은 상하로 5~6cm 움직였다고 보고한 반면에 어떤 사람은 불빛이 좌우롷 20~30cm 움직였다고 말했다. Sherif 는 다음에 4~5명의 피험자를 한 집단으로 하여 같은 실험을 했다. 그 결과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났다. 피험자들의 자동운동판단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서 그들의 판단이 서로 엇비슷하게 되었다. Sherif 는 피험자들이 이제 규범을 만들었다고 해석하였다. 마지막으로 이들 피험자에게 다시 첫째번 실험과 같이 각자가 불빛의 움직임을 판단하게 했더니 혼자 판단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집단의 규범대로 판단을 하였다. 1년후에 재실험을 해 본 결과, 집단규범은 계속 유지되어 있었고, 또한 피험자들이 다른 집단으로 들어가면 그들은 자기가 처음에 소속해 있던 집단의 규범을 새로 만난 집단의 구성원에게 심으려 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과 히틀러의 집권에 따라 1940년대는 암울한 시기였다. 히틀러는 전쟁에 지친 독일 국민의 욕구불만을 다른 방향으로 해소시키기 위해 유태인 학살정책과 게르만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맹목적 국수주의(쇼비니즘)를 창출해냈고, 국민을 설들하고 단합하기 위한 여러 가지 선전과 설득방법을 고안했다.

인종차별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사실이 많이 나타난다. 19세기 중방에 미국에서는 대륙간 횡단철도를 건설하느라고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이 때 미국에 이민 온 중국인들이 이 철도공사에 많이 동원되었는데, 이들은 월급을 조금 받고도 아주 열심히 일을 해서 미국 사람들은 이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륙간 횡단철도 공사가 끝나고, 또 설상가상으로 남북전쟁이 끝나 출전했던 병사들이 귀향하자 미국 내에 갑자기 취직난이 가중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와 때를 맞추어 미국인 사이에 중국인에 대한 편견이 생기게 되어, 중국인들을 ‘범죄자’ ‘뻔뻔스러운 놈’ ‘교활한 놈’ ‘멍청이‘라고 놀리고 박대하기 시작했다. 즉, 미국인의 중국인에 대한 편견은 경제적인 이유로 생겨난 것으로써 당시 미국 노동자들은 중국인들이 자기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갔다고 생각하여 이들을 증오하는 편견을 갖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백인은 흑인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다. 그런데 서부 버지니아주의 석탄 광산에서 흑백인들의 상호작용을 조사한 것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사실이 나타난다. 광부들은 땅속의 갱내에서는 흑인과 백인 광부가 흑인 광부를 멸시 하지 않는다. 즉, 갱내에서는 백인광부가 흑인광부를 멸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땅 위로 올라오면 서로 갈라져서 분리된 생활을 하고 욕을 하며 업신여겼다. 왜 이런 우스꽝스러운 현상이 일어날까? 그것은 우리가 사회에 존재하는 규범을 따르기 때문이다. 즉, 땅 속에서는 백인이 인종차별을 무시해도 좋지만 일단 땅 위에 올라오면 도처에 존재하는 인종차별이라는 사회적 규범을 무시하기가 어렵게 된다. 이는 Sherif가 우리의 행동이 자신의 의도와 판단보다는 사회의 규범에 의해 보다 더 영향을 받는다고 한 내용과 같은 내용이다.

Sherif는 인간이 불분명한 판단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남에게 동조한다는 사실을 밝혔는데,이에 대해 Solomon Asch는 Sherif 의 연구에서 나타난 강한 동조경향은 올바른 반응을 하기에는 너무나 모호한 상황이기 때문에 당연하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을 준거의 틀로 삼는 것만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러한 비판을 한 후 Asch는 모호하지 않은 지각적 판단이 요청되는 일련의 연구를 통해서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집단의 압력에 굴복하게 되는가를 연구 했다. 어느 집단에 소속해 있거나 우리의 의견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의견과 다를수가 있다. 만일 우리가 대다수의 사람들이 우리 보다 더 타당한 정보를 갖고 있다고 결정한다면 우리는 생각을 바꿔서 다수의 의견에 동조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의견이 옳고 다른 사람들이 틀렸다고 확신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상상해보라. 이 경우에 당신은 사회적 압력에 굴복할 것인가? Asch가 연구하려 했던 것은 이러한 종류의 동조에 관한 것이었다.

 

 

Asch는 한 명의 피험자를 다섯 명의 다른 가짜 피험자(이들은 피험자라고 소개했으나 사실은 실험자의 조수로서 실험자의 사전지시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었다)와 함께 원형 테이블에 앉게 했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표준자극인 수직선 A를 먼저 보여주고, 다음에 길이가 다른 세 개의 수직선 B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수직선 가운데 어떤선이 먼저 보여준 A의 수직선과 똑같은 것인가를 판단하게 하였다. 모두 차례대로 대답하게 하였는데, 실제 피험자는 마지막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 판단은 아주 분명해서 (나)가 정답이었다. 첫 번째 차례가 된 가짜 피험자가 수직선을 자세히 보더니 (가)가 정답이라고 대답한다. 진짜 피험자는 속으로 깜짝 놀라서 머리를 갸우뚱한다. 다음 차례가 된 가짜 피험자도 역시 (가)가 정답이라고 말하고, 셋째 그리고 넷째 피험자도 이들과 같은 대답을 한다. 진짜 피험자는 자기 차례가 돌아왔을 때 갈등을 느끼게 된다. 그는 한참 생각하다가 드디어 자기도(가)가 정답이라고 마지못해 대답한다. Asch가 많은 피험자를 같은 상황에서 실험해 본 결과 피험자의 절반정도가 다수의 의견에 동조했음이 밝혀졌다.

정확한 답이 분명한 데도 왜 개인은 틀린 다수로부터 독립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것일까? Asch의 실험결과에 대한 한 가지 해석에 따르면 Asch의 실험에서 피험자들이 동조하도록 강력하게 힘을 발휘시키는 것은 오히려 답이 분명하다는 사실이라고 한다. 실제생활에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만장일치를 얻기 어려운 경우는 주로 어떤 경제정책이 인플레를 가장 잘 축소시키는가? 혹은, 두 그림 중 어느 것이 미적으로 우수한 것인가와 같이 어렵고 주관적인 판단을 포함하는 문제이다. 이 같은 경우에 우리는 가끔 다른 사람들과 불일치할 수 있음을 아는데, 우리는 만장일치의 집단속에서 단 하나의 소수가 되는 것이 난처하기는 하지만 가능하고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Asch의 상황은 더욱 극단적인 것이다. 여기서 각개인은 간단한 물리적 사실에 대한 완전불찬성에 부딪치는데 이것은 기묘하고 전례가 없던 것으로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피험자들은 분명히 어리둥절하고 긴장을 한다. 그들은 의심을 하여 눈을 비비고 그 선을 더욱 더 가까이 가서 보려고 일어난다. 그들은 꾸물거리고, 중얼거리며, 당황하여 킥킥 웃고, 이 미스테리에 대한 단서를 찾으려고 집단 속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유심히 쳐다본다. 조사를 한 후에 그들은 시각적 착시에 대한 자신이 없는 가설을 내놓거나 또는 첫 번째 사람이 어쩌다 한 번 실수를 했는데 그 다음 사람은 동조 압력 때문에 이를 따랐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대다수와 달리 불찬성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해 보자. 집단의 판단을 피험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피험자들은 자신들의 반대를 집단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다. 집단은 그를 능력이 없고 판단력이 없다고 평가할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만일 피험자가 계속해서 반대한다면 이것은 그 집단의 능력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 될 것이다. 이 피험자는 정답이 (나)라고 말하려 하다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내가 정답을 말하면 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은 내가 자기들을 무시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진짜 피험자는 집단에서 자기가 거부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집단에게 반대를 못하고 자기주장을 굽히는 것이다. Solomon Asch의 실험은 집단의 압력이 얼마나 큰 힘으로 작용하는가를 여실히 증명해 준 충격적인 연구였다.

실제 우리 주위에서 “집단의 압력”에 대한 실례를 흔히 볼 수 있는데, 그 예로 중국집에서 다른 사람 모두들 자장면을 시키면 자신을 짬뽕이나 볶음밥이 먹고 싶었지만, 자장면을 선택하는 경우라든지, 교회에 처음 가서 다른 사람들이 신에게 기도를 할 때 자신은 실제로 신이란 존재를 믿지도 않으면서 교회에 다니는 신자들과 같이 기도를 하거나 찬송가를 부르는 경우... 지루한 강의를 듣다가 강의시간이 다 되어서 끝날 시간이 되어서 강사가 질문을 하라고 할 때 주위를 둘러보고 사람들이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자신은 정말 궁금해서 질문해서 물어보고 싶은 내용이 있지만 질문을 하지 않는 경우...

이런 경우들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모두들 yes 라고 대답할 때 no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또 no라고 대답한 사람을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고,,,자신의 집단에 속해 있지 않다고 해서 미운오리새끼라고 여기 않았으면 좋겠다. 또 미네르바가 자신이 포함된 집단의 미운오리새끼라고 하더라도....소수의 의견이 존중되었으면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존중해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