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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에 관하여/세계 의 역사 속으로

라은성 교수의 교회사

에베소 범종교회의 ‘존 크리소스톰’ (1)
국제신대 라은성 교수의 재미있게 배우는 교회사학교 45
 
6.2.2. 에베소 범종교회의

“복잡한 3차 범종교회의를 간략하게 말씀드린다면, 네스토리우스가 430년 8월 11일 로마 종교회의에서 정죄를 받았고 그는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로부터 범종교회의에 참석하라는 소환을 받습니다.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는 공동 황제 발렌티니안 3세와 로마감독 켈레스틴과 더불어 범종교회의를 소집합니다. 430년 11월 19일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는 서신을 보내어 431년 6월 7일 오순절 에베소에서 범종교회의가 있을 것을 공포합니다.”

“6월 22일 로마 사절단과 안디옥의 존이 이끄는 동방교회 감독들이 참석하기 전에, 알렉산드리아 감독 시릴은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네스토리우스는 3차례나 참석할 것을 종용받았으나 응하지 않았습니다. 197명의 감독들은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점검하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안디옥의 존과 동방교회 감독들이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시릴이 개최한 종교회의를 인정하지 않고 따로 종교회의를 개최했습니다. 로마 사절단도 도착하였지만 그들은 시릴과 뜻을 같이하여 네스토리우스에 반대하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7월 17일에 있었던 5차 회기에서 다른 종교회의를 개최한 존과 그의 감독들을 출교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시릴이 이끈 종교회의가 범종교회의로 인준되었습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범종교회의 사회자를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대신 넥타리우스를 세웠다는 말씀을 드린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넥타리우스는 그레고리를 대신하여 16년 동안 동방교회에서 지도력을 발휘했습니다. 탁월한 행정술과 차분한 성품으로 업무를 훌륭하게 잘 이행했습니다. 397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누가 동방교회를 이끌 것인가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를 이어 동방교회 지도자로 부상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알렉산드리아 감독 데오필루스였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로마제국 황제인 아르카디우스는 ‘황금의 입술’을 가진 존 크리소스톰을 선호했습니다.”

6.2.2.1. 존 크리소스톰

▲존 크리소스톰의 모습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황금의 입술’이라는 뜻입니다. 존(347~407)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동방교회 박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태어난 정확한 일자를 알 수 없지만 344~354년 사이에 안디옥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측됩니다. 어릴 때부터 모친 안투사로부터 철저한 신앙훈련을 받았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훌륭한 모친을 둔 분들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어거스틴, 콘스탄틴, 존 크리소스톰, 그리고 바실과 그레고리 등입니다. 정말 여성들의 역할이 큽니다. 모친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존 크리소스톰은 여성들의 지도력을 인정하여 성직을 맡기곤 했습니다. 그래서 여성신학자들이 늘 참고하는 교부로서 존을 빼놓질 않습니다.”

“법률과 수사학을 배운 그는 다소의 디오도레에게서 신학을 배웠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에서 성구를 낭송하는 자로 봉사했습니다. 모친이 세상을 떠난 후 그는 복잡한 도시를 피하여 안디옥 남부의 산악지방으로 들어가 수도원적 삶을 살았습니다. 그 곳에서 그는 신학적 연구, 거룩한 묵상, 그리고 기도하는 데 행복한 6년을 보냈습니다. 수도원 제도를 통해 존은 교회의 위대한 교사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381년 부제로, 386년 사제로 수임을 받았습니다. 그 후 12년 동안 안디옥 강단에서 존은 감동적이고 웅변적인 설교를 행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황금의 입술’이라는 별명을 받게 된 것입니다.”

▲황후 유독시아를 꾸짖는 존 크리소스톰
“397년 콘스탄티노플 감독 넥타리우스가 죽자, 존은 자신의 의사와는 관련 없이 그곳의 감독으로 선출된 것을 통보받고, 멀리 도주했으나 붙잡혀 왔습니다. 다음 해 398년 알렉산드리아 감독과의 갈등 속에서 콘스탄티노플 감독이 되었습니다. 웅변적인 설교로 인해 존은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을뿐 아니라 자신의 목회 영역을 고트족에게까지 확대시켰고, 성경을 그들의 언어로 번역하여 통역자를 대동해서라도 그들에게 설교했습니다. 다뉴브 강에 살고 있는 고트족과 스킨디안족에게 선교사들을 보냈습니다. 심지어 추방을 당한 가운데서도 선교의 일에 관심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성직자들과 귀족들의 거짓되고 사악한 삶들을 개혁함으로 많은 적들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요즘도 그렇지 않습니까?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죠. 그는 성전에 있는 값비싼 물건들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을 위해 병원을 지었습니다. 스스로는 엄격한 금욕적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에게는 매우 엄격했고 타인에게는 항상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는 담대했고 헐벗고 힘이 없는 자들에게는 늘 동정을 베푸는 자였습니다. 그 어떤 잔치에도, 저녁 만찬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성경말씀대로 마음은 늘 초상집에 있었습니다. 늘 독방에서 기도하며 극단적인 단순한 삶을 살았습니다. 먹고 입는 데 사치스러운 삶을 포기하고 거리의 가난한 자들과 함께 있기를 선호했습니다. 간악한 성직자들을 훈련시켰고, 부도덕한 사제들을 올바로 살아가도록 이끌어 갔습니다.”

 

 

에베소 범종교회의 ‘존 크리소스톰’ (2)
국제신대 라은성 교수의 재미있게 배우는 교회사학교 46
 
▲추방당하는 존 크리소스톰
“타협하지 않고 곧은 성품을 가진 존 크리소스톰은 결국 주위에 적들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들 중에 황후 유독시아가 있었습니다. 남편 아르카디우스보다 인기를 독차지하는 존을 시기한 그녀는 그를 없애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대단하지요. 교회사에서 무섭고 대단한 여성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유독시아였습니다. 황후 유독시아는 사치스러운 궁궐생활만 아니라 사치스러운 자들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존은 거침없이 비판했습니다. 유독시아의 음모가 이뤄지는 401년 1월이었습니다. 에베소 성직자들과 근교 감독들의 요청을 받아 방문한 존은 지역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성직매매를 일삼는 6명의 감독들을 파직하였습니다. 그리고 존이 출타하는 동안 콘스탄티노플 감독직을 신임하여 맡긴 카발라 감독 세베리안은 황후와 함께 존에 대한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를 몰아내겠다는 심산이었죠. 그러다가 403년 알렉산드리아 감독 데오필로스가 출교시킨 몇 명의 경건한 수도사들을 위해 존이 피난처를 마련해 주자 원한은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반죄라는 혐의를 받고 존은 파직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존은 주위에 시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기에 그를 위해 시민들이 일어나자 하는 수 없이 추방 대신에 복직을 시켰습니다. 그런 후 존은 자신을 공격했던 자들의 세속적인 행사를 금했습니다.”

“존은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아내인 황후 유독시아의 동상 제막식에 열광하는 청중들을 비난하는 설교를 아낌없이 가했습니다. 그의 적들은 그의 설교들을 과장하여 황후에게 고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콘스탄티노플로부터 황후에 의해 영속적으로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수치스러운 추방이지만 이것으로도 존이 성찬식에 참여하는 못하거나 그의 귀중한 글들을 못 쓰도록 하진 못했습니다. 추방당한 가운데 407년 흑해 근교에 있는 폰투스에서 외롭게 죽었습니다.”

▲하이예 소피아 벽에 그려져 있는 시편 98:1~5와 함께 있는 존 크리소스톰
“존이 남긴 귀중한 서신들과 짧은 글들이 현존하지 못하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현존하는 몇 편의 그의 글들을 통해서라도 그의 웅변적이고 청렴한 자세와 기독교 사상에 끼친 위대한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150cm도 되지 않는 작은 체구의 존은 하나님만 두려워하면서 그 앞에서 세속적 부귀와 편의주의에 결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407년 9월 14일 추방 생활하는 가운데 세상을 떠난 존 코리소스톰은 콘스탄티니폴을 사악한 방법으로 주도하는 황후 유독시아의 음모로 인해 정죄를 받은 적이 있었지만 그의 마지막 말씀은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있기를!’이었습니다. 그의 유골은 438년 유독시아의 아들 동로마제국의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408~450)에 의해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습니다.”

“다음은 존의 모친인 안투사가 아들에게 주는 ‘이상적인 친구에 대하여’라는 글의 일부입니다. 매우 감동적입니다.”

진정한 친구는 시간과 장소에서 그를 기억한다. 광택을 가진 물체가 인접한 장소에까지 광채를 발하는 것처럼 친구들은 그들이 있는 장소에서 은혜를 서로 나눈다. 가끔 친구가 없이 혼자 있을 때는 함께 있었던 것을 떠올리며 슬픔에 빠지기도 하고 울먹이기도 한다. 친구와 함께 있음으로 얻는 기쁨을 어떻게 형언할 수 있을까? 단지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의심을 가지지 않고 호의를 부탁하면 호의를 받을 것이다. 문의를 하면, 친절하게 응답할 것이다. 부탁을 들어주는 데 망설이면 왠지 모르게 섭섭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그들의 것이 아닌 것들이 없다. 모든 세상의 일들을 싫어할지라도 친구들로 인해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빛보다도 더 우리에게 필요한 분들이다. 그렇다! 친구는 빛 자체보다도 우리에게 더 중요하다(내가 말하는 친구는 진정한 친구를 말하는 것이다). 친구보다도 태양이 우리들에게 더 중요할 수 있기 때문에 나의 표현에 불평하지 않기를 바란다. 친구가 없는 것보다 어두움에 사는 것이 더 좋다는 말이다. 내 의도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태양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어두움에 있기 때문이다. 친구들로 인해 부유한 사람들은 결코 환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우정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없는 영적 친구에 대해 나는 말하고 있다. 바울과 같은 친구이다. 부탁을 받지 않아도 그는 자신의 영혼을 친구를 위해 기꺼이 드릴 수 있었다. 형제를 위해 지옥이라도 기꺼이 떨어질 수 있었던 분이었다(로마서 9:3). 애정을 불태우는 것은 사랑에 합당한 것이다. 이것을 우정의 예로서 택해 보라. 친구들은 부친들과 아들들 보다 훨씬 중요하다…….

…친구를 갖는 것은 또 다른 자아를 갖는 것이다. 그것은 일치고 조화이다. 어떤 것도 동등한 것은 없다. 일치 안에서 한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동등하다. 두 사람이거나 열 사람이라도 더 이상 하나이지 못하다. 하지만 그들 각자는 열 사람의 능력과 가치를 지닌다. 너는 열 사람 속에서 한 사람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 속에서 열 사람을 발견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적을 맞이한다면, 그 적은 한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열 사람을 공격하는 격이 될 것이기 때문에 패배하고 말 것이다. 공격을 받아도 한 사람에게서 공격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열 사람에게서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결핍을 경험해보았는가? 그럴지라도 결코 황량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분야, 즉 남은 아홉 사람들에게서 채워질 것이기 때문에 부족한 분야가 보호받을 것이다. 작은 부분이 채워질 것이다. 그들 각자는 20개의 손들을, 20개의 눈들을, 그리고 20개의 발들을 소유하는 셈이다. 그래서 자신의 눈으로만 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눈들을 통해 볼 수 있다. 자신이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나머지 아홉 영혼들이 그를 보호하고 있다. 그들이 백 사람이라면, 동일한 일이 일어날 것이고 그것에 알맞은 능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