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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우리손에 오기까지/이슬람에 관한 상식

4 이슬람은 신앙체계만이 아니다

오늘날 서방세계의 사람들이나 우리가 이슬람 세계에서 일어나는 여러 정치적, 종교적 사건들을 보면서 그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오해와 편견의 시각을 갖게 되는 가장 큰 요인은 무엇일까?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한 답 중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사회가 정교분리 사회인데 반해 이슬람 사회는 근원적으로 정교 일치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슬람과 이슬람 세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주제에 관한 논의가 무엇보다 필수적이다.

무슬림들은 이슬람을 ‘인간이 신의 뜻대로 현세를 완벽하게 살면서 내세를 준비하게 하는 신의 가르침으로, 인간존재의 모든 분야가 합일된 한 생활방식’이라고 정의한다. 이른바 이슬람은 단순한 신앙체계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인간생활 전반을 포함하여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전체 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슬람은 종교와 세속을 모두 포괄하는 신앙과 실천의 체계’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슬람교’보다는 ‘이슬람’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고, 그들은 이슬람교인이라는 말보다 무슬림이라고 불리기를 바란다.

불교와 기독교 같은 대다수 종교들이 세속의 삶보다 내세를 더 강조하고 인간 생활의 육체적인 면보다 정신적인 면을 중시하는데 비해, 이슬람은 내세와 똑같이 현세의 삶을 중시하고 인간생활과 영육(靈肉) 양 측면을 똑같이 중시한다. 이것은 보통 ‘이슬람은 정교 일치 체제’ 라는 말로 대변되고 있는데, 사실상 이같이 교회와 국가, 종교와 정치를 합일체제로 보는 것은 정교분리 사회에서 살아온 우리에게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 지구상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교회와 국가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정교분리 원칙을 토대로 국가 구성법(헌법)을 만들고, 정교분리를 정설로 받아 들이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기독교 전통에서 비롯된 서구의 정치사상이 현대 세계에 보편화 된 영향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인은 처음부터 세속의 것과 내세의 것을 갈라놓은 예수의 가르침을 신봉해왔다. 그러나 무슬림은 종교를 바탕으로 하여 그들의 첫 공동체를 세웠고, 처음부터 공동체가 교회이자 국가인 개념에서 출발하였다. 세속을 통치하고 잘 사는 일과 내세를 준비하는 일을 구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슬람 세계의 무슬림은 이슬람에 정치, 경제, 사회, 종교, 군사 등 제반 영역에 관한 고유의 사상과 이념, 원리, 제도가 다 들어 있다고 믿고 있다. 이 점이 다른 종교인에 비해 무슬림이 갖고 있는 가장 독특한 특징일 것이다.

정치권력에 대한 기독교인과 무슬림의 기본정신이 만들어지는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정치와 종교, 교회와 국가문제에 대한 두 종교의 차이를 비교해 볼 수 있고 정치권력에 대한 두 종교인들의 근본적으로 다른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신께서는 특별한 시간과 장소에서 직접적이고도 결정적으로 인류사회에 개입하셨다.” 아마도 이것은 기독교인과 마찬가지로 무슬림도 똑같이 갖고 있는 신앙의 핵심일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인류역사에 개입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직접 드러냄으로써 스스로 인간이 되셨다는 ‘신의 말씀의 육신화(incarnation)’를 믿고, 바로 이것이 그들 교리의 모체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요한은 이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표현하였다. 그렇지만 무슬림에게-유대교인도 마찬가지지만-이러한 개념은 극도로 불경한 것이다.

그것은 신의 절대적 유일성을 손상시키고 다신교적 우상숭배의 문을 열어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슬림은 신의 말씀이 모세, 다윗, 예수, 무함마드 등 신의 사자들을 통해 전달되었다고 믿는다. 예수에 뒤이어 무함마드는 신의 마지막 예언자로 선택받았다. 분명히 그는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렇지만 무슬림들 중 누구도 그가 인간 이상의 존재라거나 신의 말씀의 주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계시되는 신의 말씀을 인류에게 전달한 한 사람의 메신저였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무슬림이 스스로를 ‘무함마드 신봉자’라고 부를수 없다고 말하는 진의(眞意)이다. 그들이 믿는 대상은 오직 알라뿐이다. 그들은 신의 의지에 무조건 복종하는 사람들이고 신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이슬람은 아랍어 동사 aslama(복종, 순종하다, 몸을 맡기다)를 어근으로 한다.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이것은 신의 뜻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함마드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가 신의 말씀을 전해준 마지막 예언자라는 사실 때문이다. 무슬림의 신조는 그들의 신앙증언문인 다음 한 문장에 함축되어 있다. “라 일라하 일라 알라(일랄라) 무함마드 라술 알라(라술룰라)(알라이외에는 신이 없고 무함마드는 신의 사자이다)” 이 한 문장을 언급하는 순간부터 누구나 무슬림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유대공동체가 고통스럽게 로마제국에 합병되어 가고 있던 팔레스타인 땅에서 인류역사에 대한 직접적인 신의 개입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무슬림들은 그 후 600년이 지난 뒤 비잔틴 로마와 사산조 페르시아 두 제국이 자웅을 겨루며 동서방의 패자로 경쟁하고 있던 시대에, 아직도 미개하고 순수한 땅이었던 히자즈에서 다시 한번 결정적인 개입이 일어났다고 믿고 있다. 장소와 시간에 대한 이러한 견해 차이와, 이를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타자의 종교나 예언자의 사명 같은 것을 인정하느냐 못하느냐라는, 서로의 종교에 관한 근원적인 이해관계 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에 대한 두 종교의 교리관 형성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나자렛 예수는 공동체의 종교가 곧 민족적 독립과 직결되어 있을 때 태어났다. 마태오는 탄생한 아기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하였고 당시 로마의 앞잡이 헤롯왕이 자행한 유아대량 학살 사건을 예수의 탄생과 관련시키며 예수의 탄생 그 자체가 정치적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유대민족의 해방과 독립은 당시 거의 가망 없는 주제였다. 그리고 로마제국의 힘에 눌려 민족국가나 유대교의 부활을 위한 운동 같은 것은 재앙만을 불러올 주제였다. 그리고 예수 사후 40년이 지나면서 그러한 재앙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당시 예수는 좁게는 유대주의, 넓게는 기독교의 비정치적 해석을 설명함으로써 예수의 가르침의 정수와 본질이 종교적인 것일 뿐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는 ‘내 왕국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그는 유대교 예언자들이 앞서부터 예언해왔던 민족적 지도자 메시아가 다시 도래할 것임을 예고하면서 조직화된 정치적 반란을 통해 쟁취하는 국가보다는 오히려 믿음, 소망, 사랑을 통해 개인이 성취하는, 다가오는 세상에서의 종교적 구원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또 그는 이러한 구원은 단지 유대인에게만 예정된 것이 아님을 밝혔다. 예수는 그것이 세상 만민 모두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그래서 누가(Luke)는 예수를 ‘만민의 구세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예수 사후 사도 바울(Paul)도 이 점을 확고히 재천명하였다. 그 후 기독교는 로마제국 치하에서 고통 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후에는 더 나은 세상이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한마디로 말해 그가 목표로 삼은 왕국은 현세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쳐라”라는 가르침으로 간명하게 표현된다. 이렇게 기독교는 현세의 정치(국가)와 내세의 종교(교회)를 엄격히 구분하고 시작하였다. 그러한 연유로 기독교인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고 교회라는 개념과 국가라는 개념을 별개로 인식하며 살아 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종교와 신앙이라는 것이 개인차원의 문제이지 국가가 관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학파를 출현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 기독교 세계는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는 것을 정도(正道)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은 시작부터 국가와 종교를 구별하지 않았다. 무함마드가 세운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는 처음부터 국가로 불려야 할 것이었다. 그는 처음 메카에서 신의 말씀과 복음을 전달하는 신의 예언자로 등장했지만, 메디나 공동체와 그 정부는 비록 단순한 형태였지만, 민족, 영토, 통치권 등 국가의 구성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었다. 무함마드는 공공예배에서는 신도를 인도하였고, 전장에서는 군대를 이끄는 군사지도자였으며, 공동체내부에서는 여러분쟁을 해결하는 중재자이자 재판장이었다. 그밖에도 필요한 조약을 체결하고 규약을 제정하며 각 지역에 필요한 행정명령을 내리는 등 무함마드는 분명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원수의 지위에 있었다.
그의 뒤를 이른 칼리파(후계자)들도 움마 통치를 위해 무함마드가 행사하던 정치, 종교의 대권과 그 권위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칼리파들은 움마를 통치하는 정신적, 세속적 지도권이 당연히 그들에게 있다고 믿었다. 또 무슬림 역시 이 두가지를 구분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슬람 칼리파제도는 정치와 종교의 일을 나누었던 중세 기독교 사회의 교황-황제체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중세초반 동,서양을 대표하던 이 두 경쟁적 정치제도는 모두 신의 예정에 따라 존립하고, 계시된 신의 말씀에 따라 체제의 권위를 부여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신의 이름 아래 세계적인 권위와 권력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기독교 내에서는 황제와 나란히 교황이 존재하였다. 그리고 교황에게는 황제가 갖고 있지 않은 영적 권위와 기능이 있었다. 그는 지상에서 신의 대리인이었고 인간의 영혼을 지배하며 인도하는 자였다. 이에 비해 황제는 인간의 육신에 관계되는 사항들을 다루는 것이 임무였다.

세속통치가 주요 임무였던 것이다. 이 독립된 두 권위 사이에는 서로의 이해가 상충되어 장기간 충돌과 대립이 지속되었다. 이와 비교해 볼 때 칼리파제도는 표면적으로 ?본질적인 기능과 역할면에서는 다르지만-중세 기독교 사회에서의 교황-황제체제를 하나로 묶어 놓은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칼리파제도가 정교일체 제도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렇지만 한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전통 무슬림 사회에서 교황과 동일한 기능을 가진 존재는 결코 허용될 수 없다는 점이다. 전통 이슬람에서 오류절무(誤謬絶無)의 신성한 존재 또는 신과 인간사이의 영적 중재자와 같은 지위와 개념은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의 계시에 따라서도 이슬람의 정교일치 개념은 보증받고 있다. “꾸란”은 신에 대한 복종(종교적 복종)과 현세의 통치자에 대한 복종(정치적 복종)을 동시에 가르친 것이다.

“오, 믿는 자들아, 알라께 복종하라. 그리고 신의 사자와 너희 가운데 권위를 가진자들에게 복종하라.”

여기서 ‘권위를 가진 자’란 통치자를 뜻한다. 무슬림은 신께 복종하듯이 무함마드와 칼리파들에게도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의 신앙이다. 통치자에 대한 복종을 의무화하는 대표적인 하디스(예언자 언행)로는 “나에게 복종하는 자 누구나 신께 복종 할 것이고, 내게 거역하는 자 곧 신께 거역할 것이다. 통치자에게 복종하는 자 누구나 내게 복종하는 자이고, 통치자에게 반역하는 자 곧 내게 반역하는 자이다.”를 들 수 있다. 그렇지만 “꾸란”은 무슬림들이 이슬람 국가의 수장(首長)인 칼리파에게 부단히 충언해야 하고, 부정한 통치자의 신하가 된다거나 추종을 삼가야 한다는 것도 동시에 가르쳐주고 있다.
칼리파가 종교, 정치의 대권을 한 손에 쥔 정교 일원적 통치권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정치인이기전에 신실한 종교인이어야 하고 무슬림 신민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독실하고 종교적으로 올바른 인물만이 칼리파로서 하나님의 종복인 무슬림을 이끌고 공동체를 위해 선한 정부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예를 들면 압바스조 초기에 출현한 이슬람 정치사상가 이븐 알 무깟파아 Ibn al-Muqaffa(759년 사망)와 이슬람 법학자 아부 유수프 Abu Yusuf(798년 사망)는 국가권력이 비대해질수록 칼리파의 통치행위는 독재화할 위험이 크기 때문에 칼리파에게 요구되는 자질로는 무엇보다 독실한 신앙심과 정의임을 강조하였으며, 칼리파는 신이 맡겨놓은 양떼들을 돌보아야 하는 양치기라고 묘사하였다. 나아가 정부의 주요 기능도 “꾸란”에 명시된 대로 사람들을 신법(神法)에 확실히 복종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꾸란”을 정확히 해석해내는 일이 급선무였고, 또 무함마드가 말하였거나 실제로 행한 선례에 비추어 움마의 모든 일을 처리하고 판결하려 했다. 그러므로 “꾸란”과 예언자 무함마드가 남긴 순나(관행)는 종교적인 일, 정치적인 일의 구별없이 움마통치의 근간이 되었다. 그들은 그것이 곧 ‘신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꾸란”과 예언자 순나는 이슬람 법인 샤리아의 양대법원(兩大法源)이 된다.

이러한 연유로 만약 통치정부가 나쁘면 그것은 통치자가 통치하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통치자가 더 이상 독실하지 못하거나 종교적으로 올바르지 않아 신법인 샤리아에 복종하지 않고 등한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움마에서는 정치반란들이 항상 종교적인 이유를 내세우면 정당화되었다. 그리고 비록 정치적 변혁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 목적에 종교적 대의가 올바르게 세워져 있는 한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무함마드가 남긴 다음의 하디스로도 뒷받침된다. “나의 공동체는 오류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 내에서는 카와리지나 쉬아 같은 분파가 생겨나 끊임없이 기존 정권에 대항하는 반정운동을 전개해도 묵인될 수 있었으며, 나아가 지방에서는 권력이나 군사력이 신장되어 중앙정부에 도전하는 정치적 분열현상이 계속 일어나도 간과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1,4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현대의 이슬람 원리주의 조직들은 친서구적이고 세속화된 정권을 무너뜨리고 정교일치의 진정한 이슬람 국가의 건설을 외치고 있고, 급기야는 자신들의 정치, 종교적 가치관만이 올바른것이라는 신념 아래 극단주의의 여러 급진 문장세력을 조직하여 나름대로의 정치적, 종교적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무슬림에게는 정치적인 일이 곧 종교적인 일이며, 항상 역사에서 칼리파의 지위를 원하는 자도 칼리파를 탄핵하려는 자도 모두 “꾸란”과 예언자 순나를 내걸고 투쟁했던 것이다.
무슬림들이 공동체(국가)를 세우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꾸란”은 무슬림의 기본의무를 다음과 같이 명확히 가르쳐주고 있다.

“무슬림들은 …..예배를 행하고 자카트를 내며, 선을 실행하고 악을 금하는 그런자들이니….”

땅위에 국가를 세웠을 때 무슬림들음 먼저 예배와 자카트(종교구빈세)같은 종교적인 일을 시행해야되고 동시에 선한일을 행하고 악한일을 금하게 하는 정치적인 일을 수행해야만 한다. 무슬림들은 “올바른 일(선, 정의)을 행하고 악을 금하라”는 이 명령을 이슬람국가와 무슬림 개인 모두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첫번째 의무사항으로 생각하고 있다. 무슬림들은 이 의무의 실천을 이슬람이 제시해온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가르침과 기본원리들을 결합하고 있는 가장 결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슬림 정치학자들은 무슬림국가에서는 이 의무의 실천을 최우선으로 제도화하고, 필요하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그 실행을 강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곧 이슬람 정치의 근본임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앞의 성구를 통해 “이슬람에서는 종교와 정치를 구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된다. 왜냐하면 선을 행하고 악을 금하는 일이 곧 종교의 길이고 목표이며, 또한 종교의 일을 하는 것이 곧 정치임을 깨닫게 하기 ??문이다.
무슬림들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정교일치원리에 대한 감정은 또 다른 중요한 이슬람의 가르침인 예언자 무함마드의 다음과 같은 하디스에서 읽을 수 있다.

“너희들 중 누구든지 악행을 보는 자는 자신의 손으로 그것을 바꿔 놓아야만 하고,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혀로라도 시도해야만 하고, 만약 그렇게도 할 수 없다면, 그때는 신앙의 가장 약한 표현인 마음속으로라도 그것을 행하여야만 한다.”

이 하디스는 오늘날까지 무슬림의 국가, 사회, 개인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행동의 기본지침이 되고 있다. 불의와 악행을 보고 그냥 앉아 있는 것은 올바른 신앙인의 태도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 하디스의 마지막 구절에서 보듯이 마음으로만 실천하는 행위는 가장 신앙심이 약한자들이 가는 길이다. 정의를 위해서는 언제나 적극적인 사고와 더불어 ‘신앙의 실천주의’를 몸소 실행하여야 한다. 이 하디스는 “옳은 일을 명하고 악한 일을 금하라”는 “꾸란” 성구의 의무적 실천과 직결되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르침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무적 실천주의는 그 보편성에서 무슬림 생활의 모든 측면을 포괄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많은 무슬림들은 이 의무의 실천이야말로 무으미닌(믿는 자들)의 인격에서 필수 요소의 하나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 아마도 이 하디스는 신앙의 순결성과 실천주의를 표방하면서 우마이야조 내내 급진적 행동주의자들로 반정운동을 벌였던 카와리지 분파의 독특한 교리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20세기 이집트에서 등장한 이슬람 원리주의 그룹인 무슬림 형제단의 정치강령과 그들의 이슬람 운동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슬람의 이데올리기화를 주장하는 거의 모든 이슬람주의 운동에서도 그 정신을 찾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