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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우리손에 오기까지/이슬람에 관한 상식

6 서방세계에서 보는 이슬람

무슬림 동방세계와 기독교인 서방세계는 수 세기 동안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대하고 있으면서 때로는 평화스럽고 우호적인 선린관계를 유지했지만, 또 다른 오랜시간동안 반목과 불화, 대립과 갈등 속에 있었다.

지금도 일반적으로 무슬림이나 기독교인 모두가 그들이 서로 얼마나 많은 종교적, 문화적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지적, 정신적, 물질적 영향을 서로 주고 받았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의 예언자인 무함마드가 “구약”과 “신약”에서 모세와 예수가 전해주었던 똑 같은 메시지를 인류에게 그대로 전한 매우 중요한 전달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오히려 많은 서방의 기독교인들에게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경멸스러운 혐오의 대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최근의 여러 학문적 성과물들이 이슬람에 씌워져 있던 두터운 편견과 오해의 층을 걷어내기 전까지, 서방세계는 이슬람 세계에 대해 왜곡되고 자기 중심적인 시각만을 갖고 있었다. 서방세계는 이슬람 세계에 대해 왜곡되고 자기 중심적인 시각만을 갖고 있었다. 2003년에 타계한 에드워드 사이드(Edwad Said)는 그의 훌륭한 대표적 저작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을 통해 서구학자들이 일방적인 잣대로 평가해 온 이슬람에 대한 생각을 바로 잡고자 했다.

지리적 여건과 잦은 인적 교류, 물적 교역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일찍부터 무슬림들을 ‘가짜 예언자’를 신봉하는 무지한 사람들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곳은 오랫동안 유대인들이 그들 나름의 선민사상에 따라 기독교인들을 ‘사기꾼’에 지나지 않는 예수를 신봉하고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로 보았던 것과 흡사하였다.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오해를 받은 후 몇 세기가 지난 뒤, 다시 그리스도 추종자들의 눈에는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이 그들의 신이 세워놓은 위대한 계획, 즉 ‘구원’이라는 명제에 어울리지도 않고, 결코 동조할 수도 없는 ‘신성모독자들’로 비쳐졌던 것이다.
실제로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을 인간 무함마드를 숭배하는 신앙체계로 오해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슬람과 무함마드교(Mohammedanism)를 동의어로 사용하였다. 20세기 초 네덜란드 치하의 인도네시아 정치고문이었던 휘르호로녜(E. Snouck Hurgronje)가 쓴 “모함메다니즘(Mohammedanism)”(N.Y.:Putnam, 1916)이란 책의 제목에서 보듯이 이러한 오류는 유럽에서 보편화 되어 있었다. 그 뒤 또 다른 저명한 이슬람 역사가인 기브(H.R. Gibb)도 같은 이름의 책을 출간했다가(1945년), 20여 년이 지난 뒤에야 잘못의 심각성을 깨닫고, 제목을 “이슬람(Islam)”(1968년)으로 바꾸었다. 독실함 무슬림들에게 모함메단(Mohammedan, 무함마드의 신봉자)이라고 불리는 것보다 더 큰 모욕과 잘못은 없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용서 받지 못할 가장 큰 죄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에 대한 서방의 적의와 몰이해는 매우 이른 시기부터 나타났지만, 특히 십자군 전쟁(기독교 세력이 11~12세기에 팔레스타인 땅을 침략한 사건)중에 기독교 유럽인들의 적대감이 급상승하면서 더욱 구체화되어 발전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유럽의 왕들과 카톨릭 성직자들은 무슬림들을 제거해야 하는 악마의 자식들로 묘사했고, 기독교 신부들은 이슬람을 이단으로 간주했다. 무슬림은 이교도이고 무함마드는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에 반기를 들고 반역을 꾀한 ‘사기꾼’이자 ‘배교자’였다. 십자군 원정은 실패했지만 유럽인들의 무슬림에 대한 적의는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18세기에 이르러 서구인들은 드디어 문명사회의 우열을 뒤집고 무슬림에게 복수하기 시작하였으며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이슬람 세계의 95%이상을 지배하게 된다.
단테(Alighieri Dante)는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를 그의 “신곡(La divina commedia)”의 지옥편에서 ‘가장 저급하고 흉물스러운 추문과 불화의 사나이’라는 오명과 함께, 두 동강이로 몸이 찢겨진 채 영원히 나올 수 없는 끔찍한 지옥의 수렁 속으로 던져 넣었다. 기독교인 작가들은 그 후에도 무함마드에게 더 나은 평가를 주지 않았다.

17세기 말 출간된 “무함마드의 생애(Vie de Mahomet)”라는 책에서 프리도(Prideaux)는 무함마드를 ‘비신자들, 무신론자들, 이신론자들, 방탕자들의 거울이 되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이러한 이슬람에 대한, 또는 무함마드에 대한 적의로 가득 찬 유럽인들의 태도는 중세초기부터 계몽주의 시대까지 계속 되었다. 물론 그 첫 번째 이유는 무지 때문이었다. 비종교적인 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종교적 회의론자이자 이신론(理神論), 즉 자연신교(Deism)의 예언자격인 프랑스의 볼테르(Voltaire, 1694~1778년)도 무함마드를 광신주의의 원천으로 보았다. 그러다가 아베 마라치(Abbe Maracci)에 이르러서야 다소 긍정적인 표현이 등장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꾸란” 라틴어 번역에서 “이 종교는 기독교 종교로부터 분명히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 자연의 법칙과 광명에 일치하는 자연의 진리에 대한 많은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슬람을 기독교의 한 비뚤어진 연장선상의 종교인 것 처럼 마지못해 인정하였다.

18세기와 19세기에도 이슬람을 공박하는 작업은 지속되었다. 특히 이 기간 중에는 기독교 선교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는데, 기독교 선교사들은 이슬람에 대한 폄훼와 비난을 행했다. 이슬람 종교와 이슬람의 예언자를 객관적으로 고찰해보려는 문헌작업은 거의 시도되지 않았다. 1704년 앙투안 갈랑(Antoine Galland)이 “천일야화”를 번역함으로써 이국적이고 흥미진진하고 색다른 이슬람 세계가 소개되었을 뿐이다. 18세기 후반, 웨트레흐트(Utrecht)대학의 한 네덜란드 신학교수는 “이슬람보다 더 많은 비방을 받은 종교는 없을 것이다”라고 술회하였다. 이즈음 가장 큰 업적은 영국학자 조지 세일(George Sale)이 “꾸란”의 영어 번역을 시도한 일이다.
근대에 들어서 비로소 이슬람 세계를 보는 서구인들의 시각과 태도가 폭넓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에 대한 비평을 모색하던 계몽주의 학자들이 점차 이슬람이 담고 있는 합리적인 교리와 사상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이 바로 그들의 과거 업적이었던 그리스 철학, 의학 등을 다시 유럽에 전달한, 그들보다 우월했던 문명화 된 세력이라는 것을 알아보기 시작하였고, 예언자 무함마드는 통찰력 있는 사상가인자 합리적인 종교를 창시한 인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러한 학자들의 새로운 관심과 연구는 1830년대에 이르러 본격화되었다.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의 편견과 오류를 체계적으로 밝혀내고, 아랍어, 페르시아어 등 이슬람권 언어로 된 자료와 문헌을 이용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독일의 동양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고정관념과 잘못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객관적이고 명백한 증거를 이용해 이슬람 연구를 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우호적 관점에서 이슬람을 고찰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한 예는 바일(Weil)교수의 다음 증언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무함마드)가 신앙의 광명이 아직 비쳐지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구약과 신약의 가장 아름다운 가르침을 가져온 당사자인 한, 비록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이 아닐지라도 그는 누구에게나 신의 사자 중 한 사람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헝가리 사람으로 부다페스트 대학의 신학교수였던 이그나츠 골드치어(Ignaz Goldziher), 네덜란드 학자이자 행정가였던 스노우크 휘르호로녜, 영국계 미국인 학자 맥도널드(Duncan Black MacDonald)등은 이슬람 연구의 새 지평을 열었다. 특히 골드치어는 이슬람학을 서구에서 처음으로 학문다운 수준으로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이들은 깊이 탐구한 이슬람학 연구서들을 내놓아 이슬람 전문학자의 시대를 열었다. 뒤를 이어 이슬람 신학과 신비주의 영역의 권위자로 인정받게 되는 프랑스의 루이 마티뇽(Louis Matignon), 역사학자인 영국의 해밀턴 기브(Hamilton Gibb), 미국인 마샬 호지슨(Marshall Hodgson)등이 뛰어난 통찰력으로 이슬람 신학과 역사학 분야에 족적을 남겼다. 또 저명한 동양학자들로 드 페르세르발(de Percerval), 라멘스(Lammens), 카에타니(Caetani), 무이르(Muir), 놀데케(Noldeke) 등도 꼽을 수 있는데, 모두가 예언자 무함마드와 이슬람에 대한 선구자적인 작업들을 행하였다. 그들의 저서들은 곧 후대에 권위 있는 고전적 문헌이 되었으며, 이들의 학문적 성취와 결과들을 통해 의도적으로 꾸며지고 감정적으로 적의와 편견을 쌓았던 이슬람에 대한 유럽인들의 잘못된 시가의 원인들을 파악하고 교정할 수 있었다.

사실 오리엔탈리스트(이슬람 연구에 헌신해온 서구의 동양학자들)로 불리게 된 이들은 자신들이 이슬람과 이슬람 세계를 깊이 있게 연구하였다고 자부하였고, 실제로 그들이 여러 영역에서 남긴 나름대로의 큰 공적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양학자들의 자만을 단번에 무너뜨린 책이 1978년 에드워드 사이드가 쓴 “오리엔탈리즘”이다. 예리하고 심오한 통찰력을 가진 그에게는 오리엔탈리스트들의 객관성이 문제였다. 그는 서구학자들이 그들의 잣대와 경험으로만 이슬람을 분석하여 무슬림의 실제와는 거리가 먼 이슬람 사상을 만들어 냈고, 또한 그들이 얼마만큼 이슬람의 진실을 왜곡했는지 비난 받아 마땅하다고 말하였다. 결국 그들은 이슬람 사회에 대한 서구의 우월성을 설명하려 했으며, 계속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인식의 창출에 이바지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중세 유럽은 아랍을 비롯한 이슬람 문명권으로부터 지적, 정신적 영향을 받았다. 서구의 동양학자들은 가장 집중적으로 영향을 받은 시기가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였던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때 이슬람 경전을 번역하기 위한 연구소들이 시칠리아, 바르셀로나, 톨레도, 세비야 등지에 세워졌고, 이를 통해 신학, 철학, 의학뿐만 아니라 헬레니즘 문명의 소중한 유산들과 수학, 철학, 천문학, 광학, 점성술, 화학, 자연과학, 신비주의 등 무슬림들의 다양한 성취와 업적들이 서구세계로 유입되었다. 이 모든 분야의 것들이 잠자던 중세 유럽을 깨웠고 기독교 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직물, 카펫, 금속공예, 유리제조, 세밀화법, 제본술 등이 중세와 근세초기 유럽세계의 시장과 생활상을 바꾸어 놓았고, 비단과 종이를 서구에 전한 것도 무슬림들이다. 설탕, 면화, 감귤류 재배법도 마찬가지다.
여러각도에서 이슬람을 조명하고 이슬람에 대한 객관적 고찰과 깊이 있는 학술 연구의 경향은 유럽을 거쳐 오늘날에는 미국에서 주도하고 있는 추세이다. 그렇지만 사실상 통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 세계인은 하나로 묶여 있고, 인터넷으로 인해 모든 것은 개방되고 교류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는 시공을 초월하여 지구촌 구석구석의 문화적 가치와 정신적 유산에 대한 지식을 공유할 수 있다.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카이로, 이스탄불, 탕헤르, 바그다드, 다마스쿠스, 사마르칸트 등 매혹적인 이슬람의 도시들을 마음대로 넘나들며, 학문적, 문화적, 종교적 관심들을 만족스럽게 풀어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