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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주시는 하나님/성도의 생활

[스크랩] 록펠러! 그는 과연 십일조 영웅일까?

록펠러(1839~1937)!  그는 과연 십일조 영웅일까?

 

록펠러 - 미국의 실업가·자선사업가

석유산업계를 지배하여 미국 최초의  스탠더드 석유회사를 창설한 사람으로 독실한 침례교도였던 그는  1897년 이후로는 전적으로 자선사업에 전념했다. 그는 1892년 시카고대학교를 설립하였고, 죽을 때까지 8,000만 달러 이상을 이 학교사업에 기부했다.


아들인 존 D. 록펠러 2세는  록펠러 의학 연구소를 1901년 뉴욕 시에 세웠고 1902년에는 일반교육원을 그리고 1913년에는 록펠러 재단과 같은 주요 자선기관들을 설립했다. 일생을 통해 그가 희사한 금액은 총 5억 달러를 넘었으며 1955년까지 아들의 희사금을 합하면 총 25억 달러가 넘었다. 록펠러라 하면 미국 역사상 최고의 갑부이며 엄청난 십일조, 철저한 신앙생활 등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미국인이 존경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러나

 

신명기 23:18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록펠러를 말하려면 그 이면에  숨겨져있는 그의 불법과 악행에 대해서도  제대로 전하여야 한다 .록펠러 !!  그가 과연 누구인가?

불법으로 독과점을 하여 무수한 중소기업들을 희생시키고 노동자를 착취하여 부를 이룬 인물이다

 

그러다가 미국정부 즉 국가에서 행하여진 재판에서 불법으로 판정받아 범법자로 낙인찍혀 그의 모든 사업은 파산 하여 모두 사라지게 된다.   모두가 그가 저지른 불법과  악행에 대한 죄의 댓가라 아니할 수 없다. 록펠러라는 이름은 한때 미국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의 대명사였다. 록펠러家가 존재하는 한 평생 따라다닐 "재벌의 횡포"라는 오명과  함께 악덕기업인의 대명사로 불리워지는 불명예를 안았다 .

 

그는 뉴욕주() 리치퍼드 출생. 1859년 친구와 함께 상사회사(商事會社)를 설립하고, 1863년 부업으로 클리블랜드에 정유소(精油所)를 설립한 것이 번창, 1870년 자본금 100만 달러의 주식회사 형태를 갖추어 오하이오스탠더드석유회사가 설립되었다. 이 회사에 록펠러가 사장으로 취임, 타회사의 흡수 ·운임할려계약(運賃割戾契約) 등의 방법으로 급속히 사업을 확대하여 나갔다.

1882년 미국 내 정유소의 95%를 지배하는 스탠더드오일트러스트를 조직하였다. 1899년 오하이오의 주재판소로부터 셔먼독점금지법(반트러스트법) 위반의 판결을 받은 이 회사는 지주회사(持株會社)를 법적으로 인정하고 있던 뉴저지주()에 지주회사 뉴저지스탠더드석유회사를 설립하여 실질적으로 석유업계의 지배를 계속하여, 미국 내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유전과 정유소를 소유한 거대한 회사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911년 미국 연방최고재판소로부터 반()트러스트법 위반으로 해산명령을 받고 해체되었다. 그 후 록펠러는 재계에서 물러나 자선사업에 몰두하였다. 1890~1892년 시카고대학 설립을 위해 6,000만 달러 이상을 기부하고, 그 후에도 3억 5,000만 달러를 기부하였다. 록펠러재단 ·일반교육재단 ·록펠러의학연구소 등을 설립하였다.

 

그는 정유회사를 키워나가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경쟁자 죽이기"를 했다는 점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그의 사업 확장을 위해 불의한 방법을 총동원해서 미국전체 정유물량 90%를 독점했으며 경쟁업체 직원매수, 영업방해, 경쟁사의 전화 주문 갈취, 노동자를 협박, 경쟁사 경영진까지 매수를 했다.


더욱이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긴 일은 1913년 '러드로의 학살'이다. 록펠러가 인수한 콜로라도 석탄, 철강에서 노동쟁의를 진압과정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졌는데 당시 노동자들은 일당 1달러 68센트의 형편없는 임금을 받았고 그나마 회사상점에서만 쓸 수 있는 교환권 형태로 임금을 받았다. 노동자들은 회사 오두막에서 살다 해고통지가 오면 사흘 안에 비워야했고, 매년 2만 달러를 쓰며 탐정, 프락치 등을 고용 노조설립을 막았다.


노동쟁의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기관총을 난사해 40명이 숨지고 지하실에서 여자2명, 어린아이11명의 시체가 발견되자 더욱 커져 사태진압을 위해 연방군까지 동원해야만했다. 그때의 록펠러는 전혀 크리스천으로서 철저한 십일조를 하는 신앙으로 교육받은 모습이 아니었다."노동자에게 시혜를 베푸는 경영자들이 노동조합에 대해서는 어떤 강력한 수단을 쓰는 것도 정당하다"고 록펠러는 말했다.


은퇴 후부터 자선사업을 시작 하지만 대통령 루즈벨트가 록펠러를 향해"그 부를 갖고 얼마나 선행을 하든 상관 없지만 그 부를 쌓으려 저지른 악행을 보상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내용출처 : 다음백과사전

 

Noblesse oblige
"노블리스 오블리제"  말 그대로 고귀한 신분에는  도덕적 의무와 책임이 따른다는 것이다  그는 과연 일반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윤리적 책임을 조금이라도 솔선수범하여 이행했을까? 그는  믿는자의 신앙은 별도로 하더라도 믿지않는 자들의 기본윤리조차 지키지않았다 
 

냉혹한 사람 록펠러!!    

대체 얼마나 잔인한 사람이기에  경영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닥치는대로 다른사람의  기업들을 집어삼켰을까 ? 그는 철도 회사와 리베이트 계약을 맺어, 자사의 석유를 수송하게 해주는 대신, 다른 회사의 석유를 수송할 때는 높은 요금을 물리도록 했다. 또 경쟁사 스물 여섯 개 가운데 스물 두 개를 헐값에 인수해 정유 산업을 평정했다. 그 과정에는 협박과 압력이 동원되었다정치권 매수, 경쟁업체 협박, 문어발식 확장, 중소기업 기술 빼앗기, 주가 조작 등 악덕기업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모든 비판을 한꺼번에 받은 록펠러이다.

 

그런그가 말년에 행하였던  사회적 환원 (록펠러 재단, 록펠러 센터, 록펠러 의학연구소, 록펠러 대학(시카고 대학)... )    
으로서의 기여도에 의하여 그 모든 악행이 씻어졌다고 볼수 있을까? 부를 축적한 결과와 성공만을 얘기해서는 안된다

  부를 축적하는 방법과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할수있다  선하고 정직하게 번돈인가 ,악으로 축적한 재물인가에 따라 평가를 달리해야한다   그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악한자였음을 믿어 의심치않는다

 

하나님은 창기의 번돈이나 개같은 자의  더러운 소득은 받지 않으신다고 말씀 하셨다.과연 하나님이 록펠러의 그 더러운 소득으로 드린 십일조를  기뻐 받으셨을까?  절대 그럴리가 없으시다.성경말씀대로 그러한 불법적이고 더러운 소득은 하나님앞에 가증한 것이 될뿐이다

 

창기의 번돈과  개같은자의 소득은 받지않으신다고 하신 하나님이시기에 받으실리도없고  또한 그런 돈을 받으시고  복 내리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악한기업인으로서 더불어 불법으로 성공한 사례일뿐이다이와 같은 사실은 숨기면서  오로지 그가 습관처럼 해왔던 하나님과  뇌물로 거래한것이나 마찬가지인 십일조행위만을 드러내놓고 본받지않아야할 인물을  설교예화로 든다는 것은 대단히 부끄러워 하여야 할 것이다.

 

(뇌물기업:  십일조를 전담케하는직원만 40명이었다니  하나님께 십일조를 하여 더 많은 복을 내려주시기를 거래하는 뇌물 담당부서를 따로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독과점!   그리고 부를 이루기위하여, 자신의 사업이권을 위하여  정당한 방법인 선의의 경쟁이 아니라  경쟁사를 헐값에 사들이며 벌인  협박과 폭력의 추한 모습들...재차 말하지만 리베이트와 온갖 뇌물 증여 등 갖가지 편법을 동원하여 오직 나자신만을 위한 돈벌기에 혈안이 되었던 그는 결국 악행의 댓가인 그의 모든 사업이 미연방 최고재판소로부터 반트러스트법 위반으로 해산명령을 받고 해체되었다. 그후 말년에 그 오명을 씻기위해 사회자선사업에 많은 돈을 환원하여 노력하였지만 돈과 함께 얻었던 그 악명과 불명예를 얼마나 회복하였는지는 모른다.또한  추앙받아야할 십일조의 영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악덕기업주의 표상이라 할것이다

 

록펠러!!  

그리스도인이라면 다시한번 그의 삶을 돌아보자.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살지 않았다. 착취당한 눈물의 노동자들이 그의 이웃이었으며 불법에 무너진 경쟁자들이 그의 이웃이었다.또한 이웃이라할수있는  수많은 소비자들에게도  피해를 입히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말씀을 도외시했다

 

록펠러!!

그 자신은 돈과 함께 악덕 기업인의 오명을 함께 벌어들였으며 말년에  자선사업에 몰두하여 많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여 그 오명을 벗기를 원하였고 그의 아들또한 그 가문의 불명예와 오욕을 씻고 회복하기에 노력하였다.그러나  록펠러 의 형제들과 그의 자식들(사촌들) 까지 모두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이들 거의 모두가 정신과 치료를 받을정도로 그 가문의 사람들은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록펠러 4대에 이르러서  가문의 이름을 거부하기까지 한다.
지금의 수많은 증손자들은 자신이 록펠러家의 일원임을 오히려 낙인처럼 안고 살아간다.

 

록펠러!!
그는 자신과 아들들에게 과연 무엇을 남기고자 했을까? 

지금 '록펠러'는 과거 속으로 사라져 간 '석유왕' 정도로 회상될 뿐이다.
 몰락한 록펠러 제국의 후손들도 과거의 명성과 오명을 멀리한 채 제국의 후예가 아닌 범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것일까? 무고한 자들이 억울하게 흘린눈물을 보신 하나님께서  그 악의 열매들을  응징하시는 심판이 아니었을까? 이것이  죄값에 대한 결과가 아니고 무엇일까?

 

그들은 과연 행복했을까?

 

1세가 벌어들인 돈과 2세가 쌓은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 아래 3세 5형제는 다양한 삶을 산다. 심약한 성격의 장남 존은 동생에게 장남의 권리를 빼앗기고 방황하다가 아시아와 인구 문제의  연구자로 종사한다. 둘째 넬슨은 정계로 눈을 돌려 가문의 역량을 총동원하려다 실패했고, 셋째 로런스는 자연파괴적인 군수산업과 환경보호사업을 병행했다. 넷째 윈스롭은 유일하게 인간적 성품을 지녔지만 무능하다고 배척당해 낙향한 뒤 나중엔 주지사까지 되지만 끝까지 가문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쓸쓸히 죽어갔다. 막내 데이비드는 사업보다 외교사절 역할에 치중해 체이스은행의 경영 악화를 초래했다.

 

이 ‘형제들’의 자녀인 21명의 사촌들은 가문의 책임과 개인의 가치 사이에서 고민을 거듭했다. 록펠러라는 이름 때문에 편집증에 걸려 가문의 이름과 재산을 포기하고 은둔한 큰딸 샌드라, 가문의 그늘에서 벗어나 야채 행상을 하며 서민으로 살아가는 매리언, 자기집 하녀와 결혼하고 가문의 후계자가 되지만 사업에 회의를 느껴 신학자로 돌아선 스티븐 등은 ‘선택받은 동시에 저주받은 인간’으로 살아갔다. 거의 모든 사촌들이 정신과 치료를 받는 등 불행을 겪었다. 록펠러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권력과 명예 못지않게 그 이름에 평생 따라다닌 ‘더러운 돈’이라는 오명을 씻을 순 없었기 때문이다.

 

록펠라가의 사람들

 

록펠러-.

록펠러가 누구인지 몰라도 록펠러 재단, 록펠러 센터, 록펠러 대학 등 그의 이름을 따라 세워진 기관들의 이름은 들어봤겠지만 한때 세계 최고의 부자였다는 록펠러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는 듯하다. 정말 우리의 상상을 불허하는 막대한 재산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는 어떻게 해서 돈을 벌었고, 어떻게 살았으며, 또 어떻게 몰락했는가?

 

1998년 8월 발행된 포브스지는 미국 역사상 최고 부자로 록펠러 1세를 꼽았다. 록펠러 등장은 초강대국 미국의 등장과 시대를 함께 했다. 록펠러 가문이 2대와 3대를 거치는 동안 미국은 냉전 전략을 수립했고 제트기를 개발했다. 록펠러는 그야말로 미국의 모든 일에 구체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다. '석유왕 록펠러'에게서 시작된 록펠러가의 드라마는 그 자체로 미국 현대사였다. 드라마는 한 가문의 사사로운 역사가 아닌, 한 왕조의 역사였던 것이다.

 

밴더빌트와 제이피 모건, 듀폰, 구겐하임, 멜런, 카네기 등 남북전쟁을 전후해 등장한 이후 세계 경제질서를 자신들을 위한 체계로 구축한 여러 재벌들 가운데에서도 록펠러라는 이름은 단연 첫머리에 오른다. 록펠러는 이후 100년 넘게 미국을 지배하는 하나의 축인 '록펠러가'를 만들어냈다. 책은 가히 '왕조'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았던 이 신화적 재벌가문의 4대에 걸친 흥망성쇠 이야기다.

 

록펠러(1839~1937)는 미국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가문 록펠러가를 일으킨 사람으로 '더러운 자본가' 극단적 평가를 들었던 인물이었다. 100년 가까이 살면서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빌 게이츠의 3배가 넘는 돈을 벌었다. '록펠러가의 사람들'은 이 천문학적 돈을 바탕으로 록펠러란 한 가문이 어떻게 흥성하고 쇠락하는가를 보여준다. 동시에 사회의 중핵에 포함된 소수 동질집단을 통해 미국 근현대사를 조명하며 이 때의 기간은 4대, 1970년대까지이다.

 

록펠러는 석유산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는데, 이에 비견되는 인물로 철강의 카네기, 자동차의 포드를 들 수 있다. 살아 생전 그의 재산에는 '더러운 돈'이란 명패가 붙어다녔다. 존 데이비슨 록펠러는 어려서부터 일기 대신 회계장부를 기록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곡물위탁판매회사에 경리사원으로 입사했다. 주급 4달러. 석유산업의 발흥은 셈과 관리에 능한 그에게 도약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제 그는 은퇴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전성기에도 그가 건설한 거대한 스탠더드 트러스트는 피스크, 굴드, 밴더빌트 등의 집단처럼 무차별적인 야심과 탐욕에 지배되어 그는 주식시장의 아귀다툼과 , 위탁재산, 담보물을 날로  먹어치웠다.

 

석유산업에 투신한 뒤 현장에 밀착해 원가절감 요소를 찾아 경비를 줄이면서 생산성을 올릴 수 있는 최적지점으로 모든 경영요소를 수렴했다.  그는 그 경쟁력을 바탕으로 당시 물류를 담당하는 핵심수단인 철도를 장악했으며 경쟁자들을 압박해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모든 '더러운' 수단이 동원됐다. 결국 존 데이비슨 록펠러는 '스탠더드 트러스트'를 탄생시킨다. 미국 석유시장의 대부분을 점유한 독점기업체였다. 1911년 미 연방 대법원이 분할명령을 내리기까지 그는 엄청난 '검은 돈'을 모았다. 또한 반트러스트 법인 셔먼법에 의해 '스탠더드 트러스트'가 33개 소규모 석유회사로 나뉜 뒤에도 계속 치부할 수 있었다.

 

인류의 목을 틀어쥐고 있는 무자비한 경제 시스템의 상징적 존재로 대중에게 각인되었다. 그들이 아는 존 록펠러는 비즈니스로 먹고 사는 나라에서 새로운 형태의 경제권력, 즉 기업 '트러스트'를 발명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가 휘두르는 권력은 사회 규범을 악용하는데서  비롯되었다.

 

록펠러 1세의 외아들 존 D. 록펠러 2세(John D. Rockefeller, Jr.)는 어려서부터 가업을 이을 "황태자"로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지만, 심약한 성격으로 평생 아버지의 그림자에 가려 살아갔다. 아버지를 도와 가문의 명예를 높이려 노력하지만, 주식 투자 실패와 각종 구설수로 인해 본의 아니게 가문의 이름에 먹칠만 더한다. 사람들에게 욕먹기 쉬운 경영 일선에서 일찌감치 물러나 자선 사업에만 전념하지만, 러드로우에서 일어난 파업 노동자 학살 사건을 무마하려다가 오히려 여론을 악화시켜 의회 청문회에 불려나가 곤욕을 치렀다.

 

이후 발 빠른 행보로 경제계 및 문화계에서 유력 인사로 자리 잡고, 사람들에게 록펠러 가의 이미지를 좋게 하는 데 주력한다. 막대한 재산을 동원하여 록펠러 센터를 비롯한 각종 기관들을 설립하고, 각 부문 전문가로 구성된 측근들의 도움을 받아 정치 경제 문화계에 걸친 방대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록펠러 가문을 바야흐로 "왕조"의 수준에 올려놓게 되었다.

 

록펠러가는 3대째에 접어들며 그 폭이 더욱 넓어진 대신 쇠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동생에게 장남의 권리를 빼앗긴 록펠러 3세는 아시아 문제 전문가이자 록펠러가의 양심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다. 둘째 넬슨 록펠러는 뉴욕주 주지사 4선에다 부통령을 역임했다. 공화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3번이나 나갈 정도로 백악관을 향한 끝없는 욕망을 불태웠다.

 

넬슨은 부통령 인증 청문회에서 그때까지 비밀로 해왔던 가문의 재정관계와 비리를 낱낱이 공개했다. 1세와 2세가 평생을 바친 가문의 신화가 개인적 야망 때문에 무너졌다. 이후 4대의 록펠러가 사람들은 '개도 싫고 정승도 싫다'며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 록펠러라는 성을 버리고 숨어 사는 사람이 나타났고, 남태평양에 탐사하러 갔다가 식인종에 잡혀 먹힌 사람도 생겨났다. 저자들은 그들 가문의 여정을 훑으면서 모든 록펠러가 사람들에게 내재해 있던 선ㆍ악의 공존을 본다. 그들의 융성기에는 선이, 그들의 몰락기에 악이 따로 따로 도사리고 있던 게 아니다. 1ㆍ2ㆍ3ㆍ4대를 막론하고 록펠러가 사람들에게는  비인간적인 모습이 함께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바로 미국이란 나라의 이면이기도 하다.

 

록펠러의 십계명은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 남겼던 유언니다.

1.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섬겨라.

2.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3. 오른쪽 주머니에는 항상 십일조를 준비해라.

4. 누구도 원수를 만들지 말라.

5. 예배드릴 때에는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아라.

6. 항상 아침에는 그날의 목표를 세우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려라.

7. 잠들기 전에는 반드시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해라.

8. 남을 도울 수 있으면 힘껏 도와라.

9. 주일 예배는 꼭 본 교회에 가서 드려라.

10. 아침에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라.

 

-출처: "십일조의 비밀을 안 최고의 부자 록펠러"  44쪽, 미래사-  


미국 사람들도 잘 읽지 않는 록펠러의 전기가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인기가 있는 비결과  그 의도가 무엇인지 우리는 전부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진리는 언젠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거짓은 그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으리라.

 

 

십일조 시행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무너뜨리는 행위이다.

 

십일조 문제는 아직도 한국 개신교계에서는 뜨거운 감자같은 논란거리인 것 같다. 사실 이 문제는 서구 기독교계에서는( 카톨릭은 물론이고 개신교에서도) 이미 신학적, 신앙적 정리가 끝나서 지금은 어느 국가의 교회에서도 시행하지않는 종교행위인데, 유독 한국-특히 개신교계에서만 아직도 살아 남아서 여러가지 신앙적 혼란과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우선 이 십일조 논쟁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논란이 있어왔던 것이므로 여기서는 다만 간략히 그 논란의 요점을 한번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첫째, 십일조 헌금은 결코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십일조 헌금은 성경에 따른 것이고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이므로 신자라면 마땅히 지켜야하는 법이라고 믿고 있다. 과연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이다. 한 번 살펴보자.

1). 십일조는 하나님의 명령? ( 신명기 14장 / 26장)

하나님의 명령도 한시적인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습니다. 만일 그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시대를 초월하여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도 안식일을 지켜야 하고, 제사도 드려야하고, 오징어도 돼지고기도 먹으면 안되고, 할례도 다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런 주장은 말이 안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데 그 이유는 그런 율법들은 모두 다 한시적 율법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후, 신약시대 이후는 그런 것은 다 지나간 구시대의 법이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십일조 법도 성전과 제사제도가 존재했던 구약시대에만 필요했던 하나님의 명령이요 율법이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에는 레위 지파라는 특수 지파가 있었다. 그들은 제사임무를 위해서 따로 구별된 지파이고 그들에게는 먹고 살 땅이 없었다. 그래서 나머지 11지파가 분배받은 땅에서 난 소출중에서 10분의 1을 거둬서 그들에게 준 것이다. 이것이 십일조 법의 기본 근거인 것이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AD 70년이후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지고 모든 백성들이 다 풍지박산난 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스라엘이란 국가자체도 없어지고 성전도 제사도 없어진 마당에 당연히 레위인도 십일조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다시말하면 십일조는 그것을 거두어 나눠줄 대상이 있을 때 필요했던 한시적 율법이란 말이다. (물론 십일조 정신에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나눔의 정신이 있다.)

어떤 사람은 지금의 성직자가 레위인들 아니냐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전혀 아이다. 지금의 개신교회에는 신분상 제사장이란 직분은 없다. 목사란 똑같은 신자로서 다만 직무에 따른 구분일 뿐이지, (오히려 교리적으로 신분상 성직자를 인정하는 카톨릭조차도 십일조란 명목의 헌금은 걷지 않는다.)

2).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기에 바쳐야 한다?: (말라기 3장 8절에 대한 해석):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말라기 3장 8절)

이것도 역시 그 문맥과 의미를 세심히 살펴봐야 한다.

이 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그 당시 제사장들의 부패한 행태를 질책하고 경고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우선, '도적질하는 자들'은 과연 누구가?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일반 백성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일반백성이 아니라 십일조를 관리하고 분배하는 책임을 맡은 제사장들이다. 그 당시 그들은 그런 헌물을 그 본래의 뜻대로 잘 나눠주고 잘 쓰지않고 제멋대로 자기들 뱃속에 착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도적놈들이고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불한당인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것'이 뭐라구?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헌물'이란 의무적으로 바쳐야하는 것이 아니라 즉 헌물은 본래부터 '하나님의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저 스스로 자발적으로 바치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일단 바쳐지고 나면 그때부터는 소위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왜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실까? 그 뜻은 '하나님의 것'이란-- "곤궁한 자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따라서 가난한 백성들과 레위인들에게 마땅히 분배되어야 할 헌물들"-- 을 가리 키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점은 하나님의 "소유권"이 아니라 그것이 마땅히 쓰여져야할 데 쓰여져야만 한다는 데, 즉 "올바른 사용"을 강조하려고 "하나님의 것" 이라고 하는 것이지 쉽게 풀어보면, "그것들은 도적놈들 너희가 마음대로 먹어치워도 좋은 '너희들 것'이 아니라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바로 '내 것'이니라!" 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잘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것'이란 십일조 그 자체가 아니고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하나님 자신의 것이라고 하셨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3). 예수님이 십일조를 하라고 명하셨다? (누가 11장 42절에 대한 해석):

"화 있을 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눅 11장 42절/ 마태 23장 23절)

여기서 논란이 되는 것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우리 역시 십일조를 드려야 하다는 주장인데 과연 그런 뜻일까?

여기서도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도 그 당시 시대적인 조건을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종교 생활을 책망하기 위해 여러가지 왜곡된 신앙 행위들 중에서 특별히 십일조를 한 예로 드신 것 뿐이다. 결코 십일조를 잘하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다.

그러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라"고 하신 말씀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당시에는 아직까지 제단과 성전이 있었다. 당연히 레위인도 있었고. 또한 다른 문맥을 보면 예수님도 제단과 성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은 십일조가 필요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즉 이것 역시 그 시대에 국한된 말씀이란 뜻이다.

만일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무조건 시대를 초월하여 지켜야 한다면, 예수님이 할례를 받았으니 우리도 할례를 받아야 하고, 예수님이 성전세를 내셨으니 성전이 없는 지금도 성전세를 내야 할 것이며 그리고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으니 우리도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옳지 않을까?

그러면 전도하러 가는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대로, 지금도 전도하는 사람은 돈주머니도 두벌 옷도 두벌 신발도 없이 달랑 샌들 하나 신고 단벌 옷에 돈도없이 다녀야 하지 않을까? 또한 산상수훈의 명령들은 어떻게 지키며 과연 그대로 하고 있나?

그러나 그렇게는 하지 않으면서 왜 십일조만은 반드시 예수님의 말씀대로 드려야 한다는 것인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주장 이다. 그러므로 이런 성경구절을 들어서 십일조의 성경적 근거를 주장하는것은 너무나 웃기는 터무니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 신약시대 이후에는 십일조라는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이유는 십일조는 성전체제와 제사 제도에 종속된 것이기 때문이며 그런 제사 제도와 성전이 필요 없게 된 이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4). 십일조가 율법 이전에도 이미 있었다?

어떤 사람은 주장하기를 십일조는 이미 율법 이전부터 정해진 하나님의 법칙이라고 말한다. 그 증거로 아브라함과 야곱의 경우를 들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먼저, 아브라함은 가나안과의 전쟁 후 전리품 중 10분의 1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는데, 이는 아브라함을 멜기세덱이 축복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준 것이지 이를 율법의 십일조로 생각할 근거가 없다.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그렇게 전승자가 다른 사람에게 전리품의 10분의 1을 준 것은 다른 역사적 사건들에도 종종 있어왔던 것이라고 한다. 즉 십분의 일을 준 것은 그저 당시의 일반적인 관습에 따른 것이지 어떤 특별한 하나님의 뜻이 개입된 것으로 봐야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만일 그렇지않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율법의 십일조의 효시라면 이 사건 이후에도 아브라함이 계속해서 십일조를 드렸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은 전혀 없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행위는 단순히 감사한 마음에서 고대의 관습을 따라 십분의 일을 주었던 단회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리고 야곱은 창 28:20-22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자기 소원을 이루어주시면 십분 일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하는데 이것은 소위 '조건부 십일조'라 할 수 있는 바, 이것은 결코 올바른 행동이 아닐뿐더러 이것이 어떻게 율법의 십일조 정신에 부합될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주고 받기" 식의 거래일 뿐이지.

그리고 마찬가지로 야곱역시 그런 약속을 한 이후에 가나안으로 돌아와서도 한번도 십일조를 했다는 기록이 없다. 당연히 그것을 도대체 누구에게 바친단 말인가?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들은 아브라함과 야곱의 이와같은 행위를 가지고 십일조의 타당성을 주장하고 있으니 말도 안되는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과 야곱의 행위에서 십일조의 기원을 찾는 것은 억지일 뿐이며 절대 성경적이지 않다.

2. 둘째,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일체의 의무적 율법은 폐지 되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신 일 중에 중요한 것이 바로 율법을 폐지한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셨다 (갈 5장). 그러므로 이제는 신약시대의 신자에겐 율법적 의무란 없다. 다만 자발적 순종만이 있을 뿐이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초대교회 최초의 공의회가 열리는데 거기서 결정된 것은 할례를 포함한 일체의 율법적 의무를 폐지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유대인들에게 율법적 의무였던 십일조도 폐지된 것이다.

십자가사건 이후 모든 율법을 폐지하는 것은 당연히 십자가의 뜻을 안다면 마땅한 결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떤 율법적 규정을 존속시키려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그리스도 사건이후에 모든 율법은 없어졌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시켰다"는 말씀은 과거의 것을 폐지하고 더 좋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셨다는 말이다. 십일조도 마찬가지로 폐지하시고 더 좋은 자유로운 사랑의 구제헌금인 "연보"로 대체하신 것이다. 이 연보란 개념속에는 결코 율법이나 의무개념이 없다. 어디까지나 사랑의 자발적 헌금이다.

그런데 왜 한국교회는 안식일은 주일로, 할례는 세례로, 유월절 만찬은 성찬식으로 등등, 다른 율법들은 다 바꾸면서도 유독 십일조만은 아직도 존속시키려고 하는지 그 속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3. 셋째, 십일조 제도의 폐해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그냥 십일조 할 사람은 하고 자유롭게 놔두면 되지 않냐고..
아니다. 잘못된 것은 고쳐야한다. 왜냐하면 그런 잘못된 것들을 그냥 방치하는 것은 자칫 더 나쁜 결과를 유발시킬 가능성이 다분히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나쁜 종양은 빨리 도려내는 것이 좋듯이.. ....

십일조가 일으키는 문제점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십일조를 그냥두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다시 포기하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그것은 마치 지금도 그냥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괜찮치 않느냐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다. 복음의 본질을 훼손시키고 다시 율법적 신앙으로 회귀시키는 일이란 말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갈 2:18) 고 갈파하는 것이다.

2). 교회가 재물에 대한 잘못된 욕심으로 타락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십일조를 잘못 걷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을 제대로 쓰지않고 쌓아두거나 엉뚱하게 건물짓는데 쓴다는 둥, 하게 되면 교회가 부를 인하여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돈의 유혹을 과소평가하면 안된다. 그래서 돈과 하나님은 겸해서 섬길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사실로 현재의 한국교회의 실상을 돌아보면 자명하지 않은가?

오늘의 한국 개신교는 점점 중세의 카톨릭을 닮아가고 있다. 그 원인 중에는 교회에 돈과 권력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고 그렇게 되는 데 십일조가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돈이 쌓이면 부패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잘 모르고 십일조 하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이러한 부패를 조장시켜주는 일에 동참하는꼴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업은 무슨 돈으로 하냐구? 교회는 사업을 위한 조직이 아니다. 다만 신자들 하나 하나가 빛과 소금으로 살면 되는 것이다. 그밖의 일들은 부차적인 것이지 본질적인 일이 아니다. 이것을 구분할수 있어야 한다. 돈 없어도 교회는 존재한다. 성장할 수 있다. 부흥할 수 있다. 오히려 돈이 없을 때 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가 될 것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듯이 교회도 재산이 많아지면 본질을 잃어버리고 타락할 가능성이 훨씬 많다. 이미 중세의 기독교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3). 신자들에게 물질주의적인 신앙심을 조장하는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라기 3:10)

흔히들 이 구절을 들어 십일조 잘하면 복 받는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이것은 제사장들에게 십일조를 떼어 먹지 말고 제대로 잘 나눠주라는 말씀이지 백성들에게 십일조 잘하면 복 받는다는 말씀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지고 십일조 잘해야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다른 속셈이 있다고밖에는 보여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것을 마치 순전히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서 강조하는 것처럼 그럴듯한 말로 속이는 것이다.

목사들은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도 속이고 모르고도 속이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아무 약효도 없는 가짜약을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속여 파는것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사기치는 것이다.

또한 신자들 역시 문제이다. 신자들의 경우도 십일조를 함으로 더 많은 물질축복을 얻어내고자 하는 잘못된 욕심으로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거래하자는 것이지. 이게 말이 되는가? 그런데 실상은 많은 신자들이 십일조를 가지고 하나님과 거래하고자 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그게 지금의 교회 현실이다.

참고로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십일조를 하는 행위자체가 아니라 그 십일조를 거둬서 가난한 자들과 곤궁한 이웃을 위해서 전액 제대로 쓰여질 때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신명기 26장). 그러므로 진정 복을 받고 싶다면 그렇게 제대로 쓰는 일에 더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4). 잘못된 죄책감만 조장시키고 형식적, 외식적 신앙행태를 조장한다.

아직 신앙이 성숙하지도 않은 신자들에게 자꾸만 십일조를 강요하다시피 강조하는 것은 자칫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으로 만들 가능성이 다분하다. 아니면 그것을 제대로 못한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만들기도 한다. 결국 쓸데없는 죄의식때문에 즐거워야할 신앙생활이 잔뜩 무거운 짐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도대체 지금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이 기껏 벗겨놓으신 짐을 또다시 걸머지고 가려는 식이 아니고 무엇인가?

4. 마지막으로, 올바른 십일조 정신을 구현하는 길은 무엇일까?

구약의 십일조 법에는 과부와 고아등 그 지역안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3년마다 십일조를 거둬서 나눠주도록 되어있는데, 이 정신은 참으로 본받아야할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명기 26장)

지금도 사회의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기 위해서라면 그런 헌금의 명목은 구제금이나 사랑의 헌금 등의 명목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또 신약에 의하면 그런 것을 일컬어 "연보"라고 하고 있다. 연보의 의미는 "자기 것을 버려서 남의 부족한 것을 메꾼다"는 뜻입니다. 또 그렇게 거뒀다면 당연히 그 전액을 다 그 목적으로만 사용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늘날에도 이와같은 십일조의 정신을 살리자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발적 헌금이어야 하는 것이지 '십일조 법' 같은 어떤 종교적 의무로 규정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의무가 되어버리면 그 순수한 정신이 훼손되고 왜곡되어 외식적이고 형식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처럼. 

결론적으로, 이 십일조를 여전히 지키겠다는것은 아무리 좋게 봐도 그것은 십일조를 폐지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기도 하고, 모든 율법을 폐지하시고 새로운 사랑의 법으로 대치해 놓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며, 또한 결과적으로 교회와 신자들을 기복신앙과 물질숭배로 치닫게하는데 일조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회개혁은 바로 이 십일조 폐지운동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 : 고동엽(ikorea) 교회개혁 공간
글쓴이 : 바른교회 이야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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