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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콘스탄티노플 기원에서 멸망까지

콘스탄티노플 기원에서 멸망까지

터키 여행을 떠나기 앞서 터키 역사를 먼저 이해하고 여행을 떠난다면 후회하지 않고 의미있는 여행이 되리라..이곳 터키에 살면서 느낀 여행, 삶, 문화등을 여러분들과 함께 공유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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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럼 콘스탄티노플 기원에서 멸망까지 한번 알아볼까요??

콘스탄티노플 역사
1)콘스탄티누스(306-337년 재위)
311년 갈레리우스 황제가 사망한 다음 로마 제국 동부는 리시니우스(Licinius)와 막시미누스(Maximinus Daja)가 다스리고, 로마 제국 서부는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와 막센시우스(Maxentius)가 다스렸다. 312년 10월 28일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티베르 강변에서 막센시우스를 제압하여 홀로 제국 서부를 통치하게 되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에서 리시니우스를 만나 자기의 이복 여동생 콘스탄시아와 겨루어 이김으로써 홀로 제국 동부를 통치하게 되었다.
승리자들인 콘스탄티누스와 리치니우스 두 대제는 317년부터 사이가 벌어지더니 드디어 324년 패권 전투를 시작하여, 324년 11월 8일 비잔티움 맞은편 동쪽 포구 크리소폴리스(Chrysopolis-현재 아시아 쪽 위스퀴다르)에서의 최후 결전에서 콘스탄티누스가 리치니우스를 물리치고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로 군림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시제 아리우스가 예수의 신성을 부인함으로써 동방교회가 분열될 위기에 처하자 황제는 니케아(지금의 이즈닉) 별궁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제1차 공의회(325년 5월 20-8월 25일)를 개최했다. 300여명의 주교들이 모여 석 달 동안 논의한 끝에 아리우스와 그 일파를 단죄하고 니케아 신조를 만들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원전 7세기에 보스포러스 해협 서안에 건설된 비잔티움을 네 배로 확장한 다음, A.D 324년 9월 18일 2년 동안 비잔티움을 수도로 하는 로마제국의 재건을 계획했고 326년 11월 4일부터 시작하여 330년 5월 11일 히포드롬에서 도시 완공 식을 가지고 그 이름을 콘스탄티노플이라고 개명한 동시에 로마의 두 번째 수도로 전 세계에 공표 하였다.
그리고 도시를 둘러싼 튼튼한 성벽도 건설했다.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콘스탄티누스는 최초로 기독교를 공인했다.
그는 고지대에(지금의 톱카프 궁전 입구 왼쪽) 성 이레인 교회을 건립했는데 여기서 381년 제2차 종교회의가 열렸다.((현재의 모습은 532년 유스티니안 대제에 의해 건설된 것이다. 이 교회는 성 소피아 다음으로 큰 교회이다. 십자가 형태로 세워진 성 이레인 교회는 이스탄불에서 유일하게 내부 마당이 보존되어 있는 비잔틴 교회이다. 교회의 모자이크는 우상 타파 시대 (726-841년)의 영향을 받았다. 이 건물은 15-18세기에는 오스만에 의해 병기고로 사용되었고, 1846년부터는 고고학 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현재 성 이레인 교회는 뛰어난 음향조건 때문에 클래식 음악 콘서트 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2)데오도시우스 1세(379-395년 재위)
착실한 그리스도인인 데오도시우스 1세는 380년 11월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우스를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 발탁했다. 그리고 381년 5-7월 제 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통산 2차)를 소집하여 성령의 신성 교리를 확정하고, 예수의 인성을 약화한 시리아의 라오디게이아 주교 아폴리나리우스를 단죄했다. 공의회 회기 중에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직을 물러난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우스 후임으로 넥타리우스를 발탁했다. 390년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24m의 반암 대리석의 오벨리스크를 이집트의 카르낙 신전에 세워진 (BC 1502-1448) 4개중의 하나를 이곳으로 가져와 세웠다.
390년 데살로니카 시민들이 로마군 사령관을 살해하자 황제는 군인들에게 시민들을 엄벌하라고 명했다. 그러자 군인들은 경마를 구경하러 경마장에 모인 시민 7천명을 살육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밀라노의 대장부 주교 암브로시우스는 분개하여 감히 황제에게 공개적인 사죄를 요구했고, 황제가 마지못해 주교에게 순종했다는 일화는 감동을 자아낸다.
그의 아들 아르카디우스(Arcadius:395-408년 재위)는 동로마 제국을 다스리고 또 다른 아들 호노리우스(Honorius:395-423년 재위)는 서로마 제국(다음세기에 바바리안족[독일]에 의해 멸망[476년])을 다스림으로써 제국은 또 다시 양분되었다.
히포드롬 경기장 오벨리스크를 받치고 있는 대리석 기단에 황제 부부와 두 아들이 마차경주를 관람하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이 되어있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죽음으로써 로마 제국은 분열되어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 또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3)데오도시우스 2세(408-450년 재위)
431년 데오도시우스 2세는 에페소 공의회(통산 3차)를 개최하여, 성모마리아는 단지 인간 예수의 어머니일 뿐이라고 한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하고, 성모마리아는 '하나님이 낳으신 분(Theotokos)이라는 교리를 확정했다.

4)마르치아누스(450-457년 재위)
451년 마르치아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노플 맞은편 아시아해안 칼케돈(지금의 카드쿄이) 지역에 있는 성녀 에우페미아 성당(지금의 하이달파샤 기차역)에서 칼케돈 공의회(통산 4차)를 개최했다.
교부 600여 명이 모여서, 에우티케스가 주장한 예수의 단성론을 단죄하고 예수께는 한 위격에다 신성과 인성 두 성품이 있다는 양성론 교리를 선포했다.

5)유스티니안 대제(527-565년 재위)
유스티니안 대제는 콘스탄틴 대제 못지않게 위대한 황제였다.
그의 치적으로는 528년부터 534년 사이에 이룩한 법전편찬 4부를 들 수 있다.
그는 또한 현존하는 성 소피아 대성당을 지었는데 그 사연과 과정은 이렇다. 532년 1월 15일 청색당과 녹색당이 황제에게 반기를 들고 전에 데오도시우스 2세가 지은 성 소피아 대성당에 불을 질렀다. 이때 폭도들이 승리의 여신 니케를 외쳤다 해서 '니카 반란' 이라 한다. 이에 황제는 벨리사리우스에게 반란을 진압하라하여 약 40,000명의 반란자들을 학살함으로 진압한 다음 밀레도스 출신 이시도로스와 트랄레스 출신 안테미오스를 채용하여 532년 2월 23일 성 소피아 대성당을 신축하기 시작했다. 5년 10개월의 대역사 끝에 드디어 537년 12월 27일 축성식을 거행코자 입장하다가 황제는 너무나도 감격한 나머지 "솔로몬이여, 짐이 그대를 능가했노라!" 라고 외쳤다 한다.
이스라엘 임금 솔로몬이 기원전 1천 년에 지은 예루살렘 성전보다 성 소피아 대성당이 휠 씬 훌륭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호사다마라던가, 553년, 557년, 559년 연속된 지진으로 중앙 돔이 무너지자, 황제는 그것을 2.65미터나 더 높여 563년 지금과 같이 만들었다. 바로 크리스마스이브에 다시 한번 열었다.
중앙 돔의 높이는 55.60미터. 넓이는 31.36평방미터.
황제만이 드나들던 중앙 출입문에서 제대 뒷벽까지의 길이는 79.30미터.
대성당 전체의 길이는 100여 미터. 중앙 회중석 넓이는 32.27평방미터.
대성당 전체의 넓이는 70여 평방미터 이다.
성 소피아 대성당은 완공 후 천년 동안은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으나 지금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런던의 성 바울로 대성당,
세비야의 대성당,
밀라노의 두오모 대성당 다음으로 다섯 번째 큰 성당이다.
1453-1935년까지 이슬람 모스크로 사용하다가 1935년 2월 1일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553년 유스티안 대제는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통산 5차)를 개최하여 네스토리우스 교파는 단죄하였다.
서쪽의 로마 제국이 서기 5세기말에 죽어 신화 속의 거인처럼 잡다한 여러 부족이 유럽으로 태어나는 모태가 되었다면, 동쪽의 로마 제국은 이 모태를 굳건히 지켜주는 방패였다.

6)동방정교회와 서방 카톨릭 교회가 결별할 때까지(565-1054년)
*565년 유스티니안 황제가 사망한 다음 동로마 제국은 계속해서 쇠퇴의 길로 접어 들었다.
*673년부터 677년까지 만 4년간이나 계속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이 그것이다. 아랍은 해군력에 의지해서 보스포러스 해협을 봉쇄함으로써 비잔틴 제국의 혈관을 막으려 했고 이에 맞선 비잔틴 제국은 아무런 원군도 없이 당시 처음 모습을 보인 것으로 추정되는 '그리스의 불'에 의지하여 숱한 해전을 치렀다. 마침내 4년 세월이 흐른 끝에 누적된 피해를 감당할 수 없게 된 아랍이 자진 철군함으로써 이때의 공방전은 막을 내렸다.
*680년 콘스탄틴 4세는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통산 6차)를 열어, 예수께 오직 한 가지 의지가 있다는 단의론을 단죄하고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가 있다는 양의론 교리를 선포했다.
*본격적인 수도 공격은 717년에 시작된다. 왈리드 치하의 아랍이 페르시아 땅뿐만 아니라 북아프리카 연안 및 스페인 땅, 펀자브와 중국 국경 지대에 이르는 아시아로까지 세력을 확장시킨 뒤였다. 같은 시기에 비잔틴 제국은 고대 로마의 군인 황제 시대에 버금가는 20년간의 무정부 상태에 빠져 있다가 마침내 레오 3세 이사우리쿠스라는 새 황제를 맞아들여 급거 성벽 보수에 나섰고 불가리아쪽과 외교 접촉을 시작했다.
*717년 8월 15일에 시작되어 정확히 1년동안 계속된 포위전에는 800척의 군선과 16만 명의 병력이 동원되었다. 9월 1일과 3일, 금각만 방어사슬 밖으로 나아간 비잔틴 해군이 아랍 함대를 격파하고 일시적이나마 봉쇄를 푸는데 성공 했으나 육상과 해상의 봉쇄는 의연히 유지되었다. 하지만 겨울이 오면서 100일 동안이나 눈이 내렸고 유럽의 겨울에 익숙하지 않은 아랍인들이 수천명이나 쓰러졌다. 이 겨울 동안 레오3세는 불가리아 왕 테르벨리스와 동맹을 맺는 데 성공 했다.
*718년 봄, 추가 파병된 이슬람 함대 760척이 보스포러스 해협 봉쇄에 나서고 5만 명의 육상 예비대가 콘스탄티노플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슬람 육군은 기근 끝에 인육을 먹을 정도로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아랍의 공격이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6월에는 비잔틴 해군에 의해 이슬람 함대가 격파되었고,7월에는 아드리아노폴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불가리아에 패배하여 2만 2천 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마슬라마 휘하의 이슬람 육군은 치유하기 힘든 피해를 입었으며, 미지의 존재 프랑크족이 기독교를 수호하기 위해 육군과 해군을 무장시키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까지 했다.
*마침내 718년 8월 15일, 이슬람은 봉쇄를 풀고 자기 땅으로 돌아갔다.
*이것은 14년 뒤에 유럽의 서쪽을 확정하고 지킨 투르-푸아티에 전투와 더불어 동쪽끝을 확정한 '결정적 전투' 였다.
((누군가는 "유럽 문명의 '보존자'를 구해낸 이들 '미명시대' 의 황제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고 하고. 또 누군가는 "레오 3세는 단지 비잔틴 제국뿐만 아니라 서구 문명 전체를 구원한 것이다" 라 했다. 그 중심에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있었다))
*726년 레오 3세 황제는 칙령을 내려 성화상 공경을 금지했다.
이때부터 한 세기 이상 계속된 성화상 파괴 난리로 동방교회의 이콘, 모자이크, 벽화등 성화상이 모조리 파괴되었다.
*787년 콘스탄틴 6세가 니케아에서 개최한 제2차 니케아 공의회(통산 7차)에서 성화상 공경을 옹호하고,843년 데오도라 황태후가 성화상 공경을 허락함으로써 성화상 난리는 막을 내렸다.
*869-870년 바실리우스 1세는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제 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통산 8차)를 열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포시우스를 파문했다. 총대주교는 교황을 상대로 동방교회의 자주성을 주장하고 불가리아 교회에 대한 관할권을 요구했다.
*1054년 7월 16일 교황대사 훔베르투스 추기경은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미사 드리러 모인 동방교회 성직자들과 교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우스를 파문하는 교서를 대 성당 제대위에 놓으면서 "하나님께서 보시고 심판하시리로다"라고 외쳤다.
파문 사유인즉, 평소에 총대주교가 서방교회에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덧붙인 "성자에게서도(Filioque)를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서방교회에서 미사때 누룩을 넣지 않은 빵, 곧 무교병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 희한한 싸움으로 동방정교와 서방 카톨릭은 아주 갈라서 버렸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노플은 그리스 정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7)동로마 제국 멸망, 오스만 제국 멸망, 터키 공화국 창건(1054-1923년 까지)
*1096년에는 첫 번째 십자군들이 도시에 전혀 피해를 주지않고 통과해 갔다.
*11세기와 12세기에는 제노아 인들과 베네치아 인들이 갈라타 지역에서의 교역을 장악했다.
*제 4차 십자군은 1204년에 공격 대상을 이슬람에서 비잔틴으로 바꾸었으며 콘스탄티노플은 베네치아인들의 사흘간의 약탈에 시달려야했다. 쏟아져 나온 전리품이 너무 많아 "어느 도시에서 이보다 많은 전리품이 나온적이 있던가" 라는 탄식이 나올 정도 였다.
*제 4차 십자군은 팔레스티나 성지를 수복할 생각은 않고 1204년 콘스탄티노플을 강점하고 라틴 제국을 세웠다. ENRICO DANDALO 가 콘스탄틴 대제가 로마로부터 가져온 4개의 청동 도금된 말이 히포드롬에 있었는데 그 말들을 전리품으로 하여 베니스로 끌고 갔다.(그 말들은 지금 마르쿠스 교회의 정문 꼭대기에 서 있다)
*비잔틴 황실은 니케아(지금의 이즈닉)로 옮겨가서 1261년 콘스탄티노플을 수복(비잔틴 제국의 팔레올로고스 왕조에 의해)할 때까지 일종의 망명 정부를 세웠다.
*1360년 오스만 투르크족이 콘스탄티노플의 서부 요충지 에디르네(수도에서 228Km)까지 점령함으로써 콘스탄티노플은 사방 고립무원의 도읍이 되었다.
*1422년에는 무라트 2세(SULTAN II. MURAD: 1404-1451)에 의해 도시가 포위 당했으며,
*1452년 오스만 투르크족 군주 메흐메트 2세(SULTAN II MEHMED)는 콘스탄티노플 북부 9킬로미터 지점에 루멜리 요새를 구축하여 콘스탄티노플 공략 준비를 마쳤다.

*루멜리 히사르 성은 10,000명의 인부, 1,000명의 석공 그리고 석회석공을 동원하여 불과 4개월만에 이 튼튼한 성을 쌓은 것이다. 고위관리들이(회교장관) 이 공사를 적극적으로 도왔고, 3개의 성채(겨울본부)는 각각 건설한 회교장관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 성의 건축목적은 비잔틴 공격을 위한 오스만 터키의 포위기간동안 크리미아의 제노아인 무역중심지로부터 원조 물자가 비잔틴제국으로 운반되는 것을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전체가 요새 화한 이 튼튼한 성은 3개의 큰 탑과 13개의 작은 탑들로 구성이 되어 있다.
해안에 있는 탑이 할릴 파샤의 탑으로 12각형이고, 오른쪽에는 사루자 파샤의 탑으로 직경이 24m이고 높이는 33m이다. 왼쪽에는 자아노스 파샤 탑이며 바다로부터의 높이가 57m이다.
요새의 넓이는 남북으로 250m, 동서로 130m 이다.
여름철에 병사들은 텐트 속에서 지냈고 텐트들은 요새의 정원에 설치되었다.
성에는 그때당시 사용되였던 대포들이 남아 있다.
1953년에 콘스탄티노플 정복 500주년을 기념하여 복구되었고, 오늘날 성의 중심에 위치해있는 옛날 병사들의 모스크장소에 야외무대가 설치되어 여름에는 여기서 여러 연극이나 뮤직 콘서트가 열린다.

*마침내 1453년 5월 29일 메흐메트 2세가(이때나이 약관 21세) 거느린 오스만 투르크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다.
동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틴 11세는 최후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330년부터 1453년까지 실로 1123년 간 콘스탄티누스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은 비잔틴 제국의 수도 였지만 막을 내렸다)
메흐메트 2세는 승전 당일 제일먼저 성 소피아 대성당을 둘러보고 이슬람 사원으로 바꿀 것을 명했다. 대성당의 수많은 인물 모자이크와 벽화는 이슬람 계율에 위배되기 때문에 석회로 덧칠을 해 버리고 이슬람 문양으로 장식을 했다.
(동방 기독교의 총본산이었던 성 소피아는 이슬람 사원으로 변모하여 영국 역사가 토인비가 역사의 근저에 있다고 본 문명의 구도 '도전과 응전'을 그대로 보여준다. 즉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조우-격전이다. 이런면에서 '콘스탄티노플 함락'이야말로 세계 역사상 가장 흥미로우며 또한 많은 문제를 내포한 드라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교회들이 잇달아 모스크로 개조하고 톱카프 궁전을 명하는 한편 투르크인뿐만 아니라 그리스인과 유태인도 강제 이주시켜 투르크(오스만) 제국의 수도를 아드리아노폴리에서 이제는 이스탄불이라는 공식명을 얻은 콘스탄티노플로 옮길 준비를 착실히 진행시켰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 2년 뒤, 세르비아 공략에 성공했다.
다음해인 1456년에는 보스니아도 투르크(오스만)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로써 폴란드와 헝가리는 대투르크 전선의 최전선에 놓이게 된다.
*1460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팔레올로구스 왕가 황족들이 간신히 보존하고 있던 지역도 오스만 대군앞에 무릎을 꿇었다.
*다음해인 1461년, 역시 비잔틴 제국의 황통을 이은 나라인 트레비존드가 함락된다. 이로써 흑해 남안은 오스만의 완전한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1463년, 지금까지 육전을 주전공으로 하던 오스만군이 바다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과녁이 된 것은 에게 해에 떠 있던 레스보스 섬이었다. 대군이 상륙해서 육지에서 공격을 퍼붓자 200년 이상 제노바령이었던 이곳도 즉시 함락되고 만다.
*1470년, 에게 해 남하를 계속한 오스만은 베네치아 해군기지 네그로폰투스에 싸움을 걸어 그 해에 네그로폰투스를 점령한 데서 시작되어 이후 10년 간이나 계속된 투르크-베네치아 전쟁의 단초가 되었다.
*1473년, 페르시아 따으로 원정에 나선 오스만군은 페르시아군을 패주시키고 개선한다.
이에따라 동서로 오스만을 협공하려던 베네치아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1475년, 오스만은 대군을 흑해로 파견하여 카파를 공략한다. 이 공략에 의해 흑해는 오스만의 내해가 되었다.
카파를 근거지로 하던 제네바의 통상은 이로써 재기불능 상태가 되어 버렸다.
*1479년, 이번에는 서남쪽으로 군사를 보낸 메흐메트 2세는 당시까지 산악지방의 게릴라전으로 애를 먹어왔던 알바니아를 마침내 수중에 넣는 데 성공한다.
이제 발칸은 그리스 해안을 따라 점점이 존재하는 베네치아 기지를 빼고 나면 완전히 오스만 앞에 무릎을 꿇었다.
1480년, 이탈리아 본토가 처음으로 오스만의 공격에 직면했다.
오스만군이 남이탈리아의 오틀란토에 상륙하자, 로마 교황은 성 베드로 광장이 금세라도 이슬람교도로 메워질 것만 같은 생각에 밤잠을 설칠 정도엿다. 하지만 그 다음해에 술탄이 급사를 하면서 오스만군이 철수함에 따라 이는 악몽으로 그쳤다.
*메흐메트 2세는 1481년 5월 3일 대군을 이끌고 아시아쪽으로 건너간 직후 숨을 거뒀다. 당시 나이 마흔아홉이 원정의 목표는 시리아와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 그리고 이집트 공략이었다고 한다.
이 기독교의 적이 죽자 유럽은 횃불을 올리고 불꽃을 날리며 축하했고, 교회는 신에 감사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로 가득찼다.
'정복왕' 이라는 칭호를 얻은 메흐메트 2세의 전적이 모조리 성공으로만 색칠 된 것이 아니다.
베오그라드 공략은 실패했고, 로도스섬도 함락되지 않았다.
이 두군데는 물론이고 시리아와 이집트 공략도 그가 쌓아놓은 기반 위에 선 손자 셀림, 그리고 술레이만 대제때에 이르러 실현되었다.
오스만은 '정복왕' 사후에도 급격히 붕괴하지 않았다. 알렉산더 대왕보다 20년 정도 더 산 메흐메트 2세에게는 정복에 그치지 않고 정복지를 지배망에 확고히 편입시킬 수 있는 사회기구를 정비할 시간적 여유도 있었기 때문이다.
*1517년 오스만이 이집트를 점령한 후 이슬람교의 최고 지위인 칼리프를 오스만의 술탄들이 겸임하면서 이스탄불은 이슬람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16세기 중반 술레이만 대제 때 절정을 맞이하고 이후 18세기까지 아름다운 사원과 궁전들이 세워졌으나 일련의 지진과 화재로 도시는 상당히 많이 파괴되었다.
*19세기 제국에서 행해졌던 개혁으로 오스만의 고전주의 건축양식은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으로 바뀌었다.
*1차 세계 대전중인 1919년 3월 15일 도시는 연합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1922년 11월 1일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황제 메흐메트 6세는 돌마바체 궁전에서 영국 배를 타고 영국으로 망명했다.
*터키의 독립 전쟁 이후 술탄과 칼리프는 사라졌다.
*1923년 10월 29일 무스타파 케말 장군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터키 공화국을 선포하고 수도를 앙카라로 옮겼다.
*1935년 성 소피아 사원은 박물관으로 만들고 석회덧칠을 벗겨 모자이크와 벽화들을 드러나게 지금도 계속 복원 작업을 하고 있다.
*수도라는 명칭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탄불은 여전히 터키의 교역 및 상업 중심지로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쇼핑센터, 문화적인 건물들, 수많은 관광자원들로 인하여 오늘도 계속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쥔장

 

글쓴이 :한영진

출처:터키 길라잡이(터키민박)

출처 : ISTANBUL
글쓴이 : 혜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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