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일대에 존재하는 유리묘(琉璃廟),유리창(琉璃廠),유리하(琉璃河)등에 주목하는 것은
고구려 2대왕인 유리왕과 연관되어 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유리왕 당대에 한한 것이 아니더라도 후대의 고구려인들이 그의 업적을 높이 사 추모하며
묘당을 지었 다거나, 주요 지명으로 그 이름을 차용했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유리라는 단어가 쉽게 쓸 수 있는 단어가 아님도 한 몫 한다.
고려영(高麗營)에 이어 지나에서 고구려를 찾는 또 하나의 아이콘이 된것이다.
그런데
이 "유리(琉璃).."라는 지명은 알려진 바와 같이 북경일대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산동성 서쪽 끝엔 동명현(東明縣)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동명현 치소 동쪽에 유리묘(琉璃廟)라는
지명이 있다. 밀운 서북의 유리묘에 이은 또 하나의 유리묘당지 이다.
아버지 동명성왕의 동명현과 아들 유리왕의 유리묘.
우연이라 한다면 너무 절묘하다. (이하 이미지 확대 : 클릭)
동명현의 유리묘. 미, 군용지도(1954)
하북성,하남성,산동성이 함께 접하는 지점에 위치한 동명현은 과거엔 하북성 최남단에 들어 있었다.
이 동명현과 동남쪽으로 접해 있는 조현(曹縣) 관내에는 또, 유리각(琉璃閣)이라는 지명이 있다.
유리왕과 관련된 누각이 있던 곳일 것이다.
조현의 유리각. 중,황하수리위원회 실측지도(1945). 미,군용지도(1954)
뿐만 아니라 산서성 태원의 서쪽, 수덕(綏德)의 동쪽 황하 동변에는 유리반(琉璃畔)이라는 곳이 있다.
유리반(琉璃畔)의 반(畔)은 "밭두둑 반(畔)"자로서 대단위 농경지로 해석할 수 있다.
경작되지 않는 평지를 평(坪), 일반적인 밭을 전(田), 그리고 밭과 과수목등이 혼재된 규모가 큰 농장을 반(畔)이라 칭한다.
고구려인들이 이 유리반을 중심으로 경작을 하며 일대 곳곳에 촌락을 이뤄 살았던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 이 지역의 황하 양변을 상세지도로 보면 고가산(高家山),고가평(高家坪),고가장(高家庄),고가구(高家溝)등등 고(高)씨 관련지명 천지라 할만하다.
태원 서쪽의 유리반. 중,국방부발행 지도(1943) 미,군용지도(1954)
유리지명 분포.
광범위 하게 분포하고, 더 발견될 여지가 있는 유리(琉璃) 시리즈 지명이
당(唐)나라 때에 나라가 멸망하여 유입된 고구려 유민들의 거주지 였다면 고구려 강역과는
상관이 없다.
그러나 초기 고구려 강역의 서남계가 어디 까지 였는지를 명확히 알지 못하는 현재로선
유민 거주지 였을 것이라는 판단은 매우 성급한 것이라 하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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