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그 이웃과의 유대관계를 맺기 위해서 의리라는 연결고리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의리란 사전에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바른 길’이라고 풀이하고 있으나
그 ‘바른 길’은 보편적으로 정의나 공의가 아닌 혈연, 지연, 학연, 등을 빌미로
이기적 유익을 도모하기 위한 인간적 도리나 신의를 지켜야 할
교제상의 도리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의는 정의 또는 공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의는 사적인 도리로서 의리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의는 사적인 도리가 아닌
공적인 도리이기에 의리가 아닌 공의로 표현합니다.
국어사전에서 공의를 찾아보면
‘선악의 제재를 공평하게 하는 하나님의 적극 품성의 한 가지’라고
아주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창 18:25 참조).
하나님은, 이웃에게는 불의하면서 하나님에게만 의로운 사람은 원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이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마 12:7)는
말씀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고 하신 말씀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50)고 하신 말씀에
하나님의 공의는 너무나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또 공의의 뜻은 ‘네가 무엇을 베풀고자 하거든 친척이나 부한 이웃에게 하지 말고
그들이 네게 보답할 수 없는 가난한 이웃이나 온전치 못한 자들에게 베풀면 네게 복이 되리라’(눅 14:12-14)고 하신 말씀에도 잘 내포되어 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25장 31-46절)에 기록된 양과 염소의 분별은
하나님의 공의의 백미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심성은 공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적 의리에 상대가 동의하지 않으면 그를 비판하고 배척합니다.
더욱이 상대가 아랫사람일 경우 그러한 태도를
윗사람에 대한 불순종으로 단정하며 심지어 배은망덕으로까지 생각합니다.
혈족의 의리는 며느리를 학대하고
부자의 의리는 가난한 자를 멸시하며
권세의 의리는 서민을 울립니다.
지연의 의리는 지역감정을 유발하고
학연의 의리는 사회적 계층의 격차를 심화시킵니다.
공의가 없는 가정,
공의가 없는 사회,
공의가 없는 민족은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없기 때문에
불행과 혼란과 분쟁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들이 하나같이 명예스러운 퇴임이 아닌
오욕의 실정을 남기고 퇴임했다고 보는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을 들 수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과감하게 인간적 의리의 꼬리를 잘라버리지 못하고
공의의 인사를 실현시키지 못한 국정 시행에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타당합니다.
일제에 맞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애국지사가,
부패와 무능을 뿌리 뽑고 민족중흥을 이루어 보겠다던 군인들이,
목숨 걸고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진보 세력들이 집권하면서
권좌에 안주하게 되자 초심을 잃고 집권 말기에 실정으로 허덕이는 원인이
바로 인간적 의리를 단절시키지 못한 데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적 의리는 그 관계가 끈끈하다는 말로 수식하고 있듯이
엄청난 구속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의리를 위하여 목숨도 아낌없이 버리는 경우를
그들의 세계에서 종종 볼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인간적 의리가
무서운 것은 그것이 불의한 줄 알면서도 끊을 수 없는 관계의 띠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러한 인간적 의리가 교회나 그리스도인의 가정에 침투하거나 남아 있을 때
하나님의 공의에 충실하려는 성도는 불성실한 자,
믿음이 부족한 자로 오해받게 되고 이단자로 낙인찍힐 수도 있으며
소외되거나 교회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심각한 문제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득권의 의리는 감당하기 어려운 힘으로 존재하면서
어떤 선의나 개혁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뜻을 바로 깨닫지 못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생활 속에 실천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그러나 공의의 뜻을 깨닫고 보면 역설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되고
자신의 온전치 못한 의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 10:34-39).
인간의 부당한 의리로 이루어진 혈육 이기주의의 화평은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는 깨어지므로 가정의 불화를 일으키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민족의 커다란 약점은 바로 이 혈육 이기주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혈육 이기주의는 씨족적, 지역적, 집단적 이기주의로 발전하게 되고
따라서 이 사회는 공의가 밀려나고 의리가 우선되는 풍조가 만연하여
온갖 사회부조리가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와 민족의 문화가 선진화되고 경제가 성장하며 도덕이 승화되려면
혈육 이기주의인 의리가 사라지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공의가 그 사회에 충만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사회상이 교육적인 측면에서나 문화적인 측면에서나
혈육 이기주의의 근시안적이고 주관적이고 배타적인 인생관과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미움과 핍박을 전혀 받지 않고 칭찬과 존경을 받고 있다면,
그리고 가정이나 교회에서 의리와 공의의 마찰로 갈등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공의가 아닌 의리를 지키며 살고 있는 까닭으로 보아도 크게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10)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생애를 바친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한 사도들
그리고 모든 선지자들의 삶은 고난과 외로움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실한 그리스도인이 핍박을 받는 것은 불의한 삶을 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적 의리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외적으로는 주색잡기를 끊고 세인들과 어울리지 않을 때
따돌림을 받는 것도,
조상의 제례를 거부하고 혈족들에게 불효자라고 지탄을 받는 것도,
사회의 온갖 부정과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불이익과 업신여김을 받는 것도
그리고 내적으로는 넓고 평탄한 길을 마다하고 좁고 험난한 길을 선택하는 것도
인간적 의리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따르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인정받기 위하여,
칭찬듣기 위하여, 상 받기 위하여,
바른 말과 옳은 행동을 유보하고 무조건 순종과 긍정적 행위만을 일삼으며,
기득권을 지키고 한층 더 평안하고 존경받는 위치를 확보하려고
공의롭지 못한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불의를 인정하면서 나약한 인간임을,
죄인임을 핑계 삼아 인간적 의리에 연연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외면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이 어찌 불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이
곧 인간적 의리를 버리라는 뜻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는 인간적 의리에 얽매이지 않고,
즉 ‘나’라는 존재를 부인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나 자신을 위한 혈연, 지연, 학연 등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다른 이웃에게 돌림으로써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비로서의 이웃사랑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언젠가 사회적 명사들이 많이 출석하는 S교회의 모 법조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는 내용이 의리에 치중하는 듯해서 매우 답답했습니다.
사연인즉 사회적 명사인 그 집사는 자신의 딸이 공교롭게도 주일날 아침,
주일예배를 앞두고 산통을 일으키면서 매우 난처하게 되었는데
마침 같은 교회의 집사인 산부인과 의사가 있었으므로
그에게 부탁하여 아이를 순산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적 명사간의 의리라고 해서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상대가 사회적 명사가 아닌 서로 교제가 없는 한 필부였다면?
과연 그 경우에도 그 의사는 그 시간에 몸소 시술이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인간적 의리는 십자가를 외면하는 교만에서 지키는 것이고
하나님의 공의는 십자가만을 붙드는 겸손에서 비롯됩니다.
의리는 양적 성장에 집착하지만 공의는 질적 성장을 갈구합니다.
의리는 등록 교인을 원하지만 공의는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을 찾습니다.
의리는 분파를 정당화하지만 공의는 교파를 초월합니다.
의리는 유명을 추구하지만 공의는 무명을 희망합니다.
의리는 직분으로 봉사하지만 공의는 직분이 없어도 봉사합니다.
의리는 받기 위하여 주지만 공의는 주는 것으로 기뻐합니다.
의리는 칭찬이 능사지만 공의는 사랑으로 권면합니다.
의리는 말이 많고 분주하지만 공의는 조용하게 실천합니다.
의리는 연락의 구실을 만들지만 공의는 절제의 방법을 찾습니다.
의리는 협력하여 범죄하지만 공의는 합심하여 선을 이룹니다.
의리는 숨겨주기를 요구하지만 공의는 의무와 책임을 다합니다.
의리는 목적을 중시하지만 공의는 과정에 최선을 다합니다.
의리는 기득권에 집착하지만 공의는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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