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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보물을 생각하며/아들에게

[스크랩] 생각의지도

                                        

 

생각의 지도

 

 

리처드 니스벳 지음

 


▣ 저 자  리처드 니스벳

예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를 역임했고, 현재는 미시간대학교 심리학과의 시어도어 뉴컴(Theodore M. Newcomb) 석좌 교수로 재직 중이다. 미국의 양대 심리학회인 미국심리학협회와 미국심리학회의 학술상을 수상했다. 2002년 사회심리학자로는 최초로 미국 과학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Human Inference : Strategies and Shortcomings of Social Judgement」를 비롯, 수많은 저서와 논문을 저술했다.


▣ Short Summary

고대 중국과 고대 그리스의 전통을 이어받은 동양과 서양은 서로 다른 자연환경, 사회구조, 철학사상, 교육제도로 인하여 매우 다른 사고방식과 지각방식을 가지고 있다. 동양은 좀 더 ‘종합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부분보다는 전체에 주위를 더 기울이고, 사물을 독립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그 사물이 다른 사물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하여 파악한다. 서양의 ‘분석적’인 사고방식은 사물과 사람 자체에 주의를 돌리고, 형식논리나 규칙을 사용하여 추리한다. 이처럼 동양과 서양 사이의 매우 상이한 사고 체계는 과거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왔고 지금도 그 차이가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 책에서는 역사적․철학적 증거들과 함께 민속지학, 조사연구, 실험실 연구들과 같은 현대 사회과학의 연구 결과들을 총동원했다. 1장에서는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를 동서양 사고의 전형적인 예로 들면서 고대 중국과 고대 그리스의 차이에 대하여 기술한다. 2장에서는 사회적 행위, 특히 자기 개념에서 두 문화가 어떻게 다른지 소개한다. 이 책의 핵심은 3장에서 6장인데, 실험 연구를 통해 얻은 결과들에 근거하여 현대의 동양인과 서양인이 지각하고, 사고하고, 추론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차이들을 기술하고 있다. 7장은 그러한 문화적 차이의 기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하고 8장에서는 동양과 서양의 사고 방식의 차이가 심리학, 철학, 그리고 일상 생활의 분야에 어떤 시사점을 주고 있는지에 대해 다루고 있다. 마지막으로 에필로그에서는 동서양의 사고방식의 차이가 앞으로 더 커질 것인지, 아니면 한쪽으로 통합될 것인지, 아니면 중간으로 수렴될 것인지에 대해 논하고 있다.


▣ 차 례

서론

1. 동양의 도와 서양의 삼단논법

2. 동양의 더불어 사는 삶, 서양의 홀로 사는 삶

3. 전체를 보는 동양과 부분을 보는 서양

4. 동양의 상황론과 서양의 본성론

5. 동사를 통해 세상을 보는 동양과 명사를 통해 세상을 보는 서양

6. 논리를 중시하는 서양과 경험을 중시하는 동양

7. 동양과 서양의 사고 방식의 차이, 그 기원은?

8. 동양과 서양, 누가 옳은가?

에필로그 - 동양과 서양의 사고 방식, 충돌할 것인가, 통일될 것인가?

생각의 지도

리처드 니스벳 지음/최인철 옮김

김영사/2004년 4월/248쪽/12,900원


서론

동양과 서양의 사회 구조에서의 차이, 그리고 동양인들과 서양인들의 자기 개념에서의 차이는 그들이 사고 과정과 사고 내용에서 보이는 차이와 일치한다. 즉, 동양 사회의 집합주의적이고 상호의존적인 특성은 세상을 보다 넓게 종합적으로 보는 시각, 어떤 사건이든지 수없이 많은 요인들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와 일맥상통한다. 같은 논리로, 서양 사회의 개인주의적이고 독립적인 특성은 개별 사물을 전체 맥락에서 떼어내어 분석하는 그들의 접근, 사물들을 다스리는 공통의 규칙을 발견할 수 있고 따라서 사물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그들의 신념과 통한다.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사고의 체계에서 정말로 다르다면, 태도, 신념, 가치, 선호와 같은 심리적 특성들에서 나타나는 문화 간의 차이는 단순한 차이가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는 데 사용하는 생각의 도구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불가피한 결과일 것이다. 이를 밝히기 위해, 미시간대학의 대학원생들과 중국의 베이징대학, 일본의 교토대학, 한국의 서울대학, 그리고 중국의 심리 연구소와 함께 많은 체계적인 실험 연구를 수행했다. 그 결과, 동양인과 서양인 사이에는 실제로 큰 생각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밝힐 수 있었다. 연구 증거들은 심리학 외의 분야에서 오랫동안 주장해온 것들에 대한 경험적 지지였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현상들이 많이 존재한다는 것 또한 보여주었다. 많은 조사 연구와 관찰 연구들은 사고의 차이와 맥을 같이 하는 사회 제도상의 차이도 밝혀냈다. 사회적 존재 방식과 사고 방식에서의 동서양 차이를 설명하는 우리의 이론은 그동안 교육학자, 역사학자, 과학철학자, 심리학자들에게 수수께끼와 같았던 다음과 같은 많은 의문점들에 답을 제시해줄 수 있게 되었다.


․ 과학과 수학 - 왜 고대 중국에서는 연산과 대수학은 발달했지만 기하학은 발달하지 못했을까? 어떻게 고대 그리스는 기하학에서 눈부신 진보를 보였을까? 현대의 동양인들이 서양인들보다 수학과 과학을 잘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분야에서의 최첨단 발전은 왜 서양에서 더 두드러질까?

․ 주의 과정과 지각 과정 - 왜 동양인들은 서양인들보다 사건들 간의 관련성을 잘 파악하는 것일까? 반대로 주변 환경에서 개별 사물을 분리하는 과제에서는 왜 동양인들이 서양인들보다 더 어려워할까?

․ 인과적 추리 - 왜 서양인들은 사람의 행동을 설명할 때 상황적인 요인은 무시하고 그 사람의 내부 특성만을 강조할까? 왜 동양인들은 어떤 일이 발생하고 나면 ‘내가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지’라는 후견 지명 효과를 강하게 보일까?

․ 지식의 조직화 - 왜 서양의 유아들은 동사보다는 명사를 더 빠른 속도로 배울까? 그 반대로 왜 동양의 유아들은 명사보다는 동사를 더 빨리 배울까?

․ 추론 과정 - 왜 서양인들은 일상적인 문제를 해결할 때에도 형식논리를 자주 사용할까? 왜 동양인들은 명백하게 모순되어 보이는 두 주장들을 동시에 받아들일까? 동양인들과 서양인들이 각각 특징적으로 범하는 추론의 실수는 무엇일까?



동양의 더불어 사는 삶, 서양의 홀로 사는 삶

“당신 자신에 대해서 말해보시오”라는 자기 개념(Self-concept)을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문화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미국과 캐나다인들은 주로 성격 형용사(친절하다, 근면하다)를 사용하거나, 자신의 행동(나는 캠핑을 자주 한다)을 서술한다. 이에 반해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 사람들은 주로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적 맥락을 동원하여 대답하고(예를 들어, ‘나는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직장에서 아주 열심히 일한다’), 또한 자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많이 언급한다. 인류학자인 에드워드 홀은 이러한 차이를 ‘저맥락(low context)' 사회와 ’고맥락(high context)' 사회의 구분을 통해 설명하였다. 저맥락 사회인 서양에서는 사람을 맥락에서 떼어내어서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므로, 개인은 맥락에 속박되지 않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행위자로서 이 집단에서 저 집단으로, 이 상황에서 저 상황으로 자유롭게 옮겨 다닐 수 있다. 그러나 고맥락 사회인 동양에서 인간이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유동적인 존재로서 주변 맥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이러한 차이는 그들의 언어에도 일부 반영되어 있다. 중국어에는 영어의 ‘individualism'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근접한 단어인 ’개인주의‘는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또한 사람을 의미하는 한자 ’人‘도 두 사람이 서로 기대어 있는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일본어에서는 일인칭 주어가 대화 중에 자주 생략되며, ’나‘에 해당하는 말이 맥락에 따라서, 대화 상대와의 관계에 따라서 각각 다른 용어로 표현된다. 한국어의 경우도 ’Could you come to dinner?'라는 말을 할 때, 상대에 따라 ‘you'에 해당하는 말과 ’dinner'에 해당하는 말이 달라진다. 이러한 차이는 동양인들이 더 예의를 차린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개인은 각기 다른 사람들과 상호 작용을 할 때, 각각의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사람이 된다’라는 동양인의 깊은 신념이 담겨 있다.


한편으로, 독립성과 상호의존성에 대한 훈련은 아이들의 잠자리에서부터 시작된다. 미국에서는 어린아이들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와 다른 침대에 잠을 재우지만 이는 동양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다. 아이들이 깨어 있는 시간에 나타나는 두 문화 간의 차이는 훨씬 더 심하다. 중국에서는 어린아이를 가운데 두고 어른들이 빙 둘러앉아 아이를 지켜보며 귀여워하고, 일본의 아이들은 늘 어머니와 붙어 다닌다. 일본인들은 ‘어머니와의 친밀성’을 평생 동안 유지하고 싶어한다. 서양에서는 아이들의 독립성을 키워주기 위해 어릴 때부터 매우 분명하게 훈련을 시킨다. 서양의 부모들은 자녀가 스스로 자기 일을 선택하고 결정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동양의 부모들은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자녀의 일을 자신들이 결정하려 한다.


인간관계를 강조하다 보면 다른 사람의 감정에 민감해지게 마련이다. 미국의 어머니들은 자녀와 함께 놀이를 할 때 특정 사물에 초점을 맞추고 그 사물의 속성을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반면에 일본의 어머니들은 사물의 ‘감정’에 특별히 신경을 써서 가르친다. 특히 자녀가 말을 안 들을 때에 그러하다. 예를 들어 “네가 밥을 안 먹으면, 고생한 농부 아저씨가 얼마나 슬프겠니?” 같은 말들로 꾸중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사물의 속성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훈련받은 아이들은 스스로 독립적인 행동을 하도록 교육받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훈련을 받은 아이들은 자신의 행동에 영향을 받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미리 예측하도록 교육받는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사회와 상호의존적인 사회의 특징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다르며, 이러한 차이들은 크게 다음의 네 가지 사항으로 요약된다.


․ 개인적 행위에 대한 자유 선호 대 집합적 행위에 대한 선호

․ 개인의 독특성 추구 대 집단과의 조화로운 어울림 추구

․ 평등과 성취 지위의 추구 대 위계 질서와 귀속 지위의 수용

․ 보편적 행위 규범(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행동 원리)에 대한 선호 대 특수적 행위 규범(유형과 종류와 상황에 따른 융통성 있는 행동 원리)에 대한 선호


이런 차이점들 때문에, 서로 다른 사고 방식을 가진 문화권의 사람들이 함께 일을 하게 될 때 갈등을 겪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특히 보편주의적 행동 규범에 익숙한 사람과 특수주의적 행동 규범, 즉 그때 그때의 상황을 고려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각각 다른 규범을 적용해야 한다는 규범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상호 작용할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서양인들은 보편주의와 같은 추상적인 규칙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어떤 특수한 상황 때문에 규칙을 저버리는 행위는 부도덕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동양인들의 눈에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규칙을 적용하는 것이 지나치게 고지식하고 때로는 비정하게까지 보인다. 서양 사람들의 ‘보편적인 규칙에 대한 집착’은 개인과 개인, 조직과 조직 사이의 계약에 대한 생각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계약이란 한번 맺어지면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설사 상황이 변해서 계약 내용이 한쪽에게 불리해지더라도 계약을 변경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호의존적이며 고맥락 사회인 동양에서는 상황이 변하면 계약의 내용도 바뀔 수 있다고 믿는다.



전체를 보는 동양과 부분을 보는 서양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우주를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사물들의 조합으로 생각했지만 고대 중국 철학자들은 우주를 하나의 연속적인 물질로 간주했다. 같은 나무 조각이라도 중국 철학자들에게는 하나의 연속적인 물질이었지만 그리스 철학자들에게는 미세한 입자들의 결합이었다. 고대 중국과 그리스 철학자들 사이의 이와 같은 차이는, 놀랍게도 현대 동양인과 서양인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또한 고대 중국인들은 자연 세계와 초자연 세계의 현상을 이해하는 과정에도 종합적 사고 방식을 적용했다. 그들은 땅(인간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자연계와 우주 전체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현대의 동양인들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도교 사상이나 일본의 신도 사상의 경우 모두 강한 애니미즘을 내포하고 있어서, 동물이든 식물이든, 심지어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물조차 모든 사물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자연을 등장시키는 광고는 서양에서보다 동양에서 훨씬 더 효과적이다. 일본의 닛산 자동차 회사는 ‘인피니티(Infiniti)'라는 고급 세단을 미국에서 광고할 때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계속 보여주고 맨 마지막에서야 인피니티라는 이름을 내보냈다. 예상대로 이 광고는 미국에서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인피니티 대신 나무나 바위의 판매고만 증가했다고 한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메시지는 서양인들에게는 덜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동양인들은 주변 상황에 맞추어 행동하려고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태도나 행동에 서양인보다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인다.


심리학자인 지리준, 노버트 슈워츠 그리고 저자가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중국의 베이징대학 학생들과 미국의 미시간대학 학생들을 비교해보았을 때 실제로 중국 학생들이 다른 학생들의 태도나 행동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었다. 동양인들이 사건에 대해 보다 종합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의 시각에서 바라보려고 한다는 것은 사회심리학자인 도브 코헨과 알렉스 건즈의 연구에서도 밝혀진 바 있다. 그들은 서양 학생들(주로 캐나다 학생들)과 동양 학생들에게 자신이 남들의 주목을 끌었던 10가지 상황들을 기억하게 했다. 그 결과 서양 학생들은 주로 자신의 관점, 즉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관점에서 회상한 반면, 동양 학생들은 제3자의 입장에서 기술하는 경향을 보였다. ’세상은 단순하고, 따라서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 일 자체에만 신경 쓰면 된다‘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통제 가능한곳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복잡하고 세상사는 예측할 수 없이 자꾸 바뀐다‘라고 믿는 사람에게 세상은 통제하기 어려운 곳이다.


연구에 따르면, 동양인에 비해 서양인들이 훨씬 더 세상을 통제 가능한 곳으로 여긴다. 동양인들은 환경을 바꾸기보다는 스스로를 환경에 맞추려고 한다. 사회심리학자인 베스 몰링, 시노부 기타야마 그리고 유리 미야모토는 일본과 미국의 학생들에게 스스로를 환경에 맞추어 적응했던 경험과 환경을 자신에 맞게 바꾸었던 경험을 회상하게 했다. 그 결과, 일본 학생들은 스스로를 환경에 맞추어 적응했던 경험을 더 많이 보고했고, 미국 학생들은 환경을 자신에 맞추어 변화시켰던 경험을 더 많이 보고했다. 실제로 미국 학생들은 환경에 자신을 맞추려고 노력했던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에 다소 황당해하고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불안해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사물이란 쉽게 변하지 않으며 설사 변하더라도 일정한 방향과 일정한 속도로 변한다고 믿었다. 현대 서양인들 역시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고대의 중국 철학자들과 그들의 사고를 이어받은 현대의 동양인들은 사물이란 항상 변하는 존재이며 현재 어떤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고 해서 계속 그 방향으로 변하리라고 예측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믿는다. 그들은 일이 어떤 방향으로 계속해서 진행되어 오고 있다면 그것은 곧 정반대 방향으로 바뀔 것임을 암시한다고 믿는다. ’변화‘에 대한 동서양의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세상이 얼마나 복잡한가에 대한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되며, 이 차이는 다시 전체 맥락에 주의를 기울이느냐 아니면 부분들에 주의를 기울이느냐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전체 맥락보다는 부분 부분들에 주의를 기울이면 세상은 자연히 단순한 곳으로 지각되고, 따라서 큰 변화를 예측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설사 변화가 일어난다고 해도, 그 변화가 현재의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추측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 중국의 철학자들처럼 전체 맥락에 주의를 기울이고 어떤 일의 발생 배후에 수많은 변인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믿는다면,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지각될 것이다. 어떤 변인 때문에 변화의 속도나 심지어는 변화의 방향까지도 바뀔 수 있다.



동양의 상황론과 서양의 본성론

동일한 살인 사건에 대해 미국 신문들은 범인의 인격적인 결함을 부각시키는 보도를 한 반면, 중국 신문들은 범인이 처했던 상황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번에는 한국과 미국의 대학생들이 행동의 발생 원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아래의 문장들을 제시하고 각 문장에 동의하는 정도를 점수로 매기게 했다.


① 사람의 행동은 거의 전적으로 그 사람의 성격에 의해 결정된다. 성격은 상황에 상관없이 그 사람이 특정한 방향대로 행동하게 만든다.

② 사람의 행동은 거의 전적으로 상황에 의해 결정된다. 행동에 미치는 상황의 힘은 성격의 힘보다도 훨씬 크다.

③ 사람의 행동은 항상 성격과 상황의 상호 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성격만을 강조하거나 상황만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


실험 참가자들의 반응을 분석한 결과, 성격을 중시하는 ①에 대해서는 한국인이나 미국인이나 동일한 정도로 동의했으나, 상황을 강조하는 ②와 성격과 상황의 상호 작용을 중시하는 ③에 대해서는 한국인이 미국인보다 훨씬 더 강하게 동의하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성격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들을 던졌을 때, 한국인들은 성격이 바뀔 수도 있다는 반응을 보인 반면 미국인들은 성격이 바뀌지 않는다는 반응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보였다. 성격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견해의 차이는 우주관에 대한 동양과 서양의 차이에 비추어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동양인들이 인간의 성격에 관해 서양인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거나, 사람들 간에 차이가 거의 없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동양인이든 서양인이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성격의 개념은 분명히 존재한다. 사람의 성격을 기술하는 특질의 차원에서는 큰 차이가 없으면서도 사람의 행동을 설명할 때 서양인이 동양인보다 성격 특질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동양인이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의 힘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서양인들은 동양인들에 비해 세상을 ‘덜 복잡한 곳’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적은 수의 요인들만으로도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세상은 복잡한 곳’이라는 동양인들의 생각이 어쩌면 진실에 더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서양인들은 지나치게 단순한 모델을 가지고 세상을 파악하는 약점이 있지만, 반면에 동양인들은 수없이 많은 인과적 요인들 모두에 주의를 기울이다 보니 예외적인 사건이 발생해도 그리 놀라워하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 서양인들의 단순한 세계관은 적어도 과학의 영역에서는 매우 유용한 시각이다. 왜냐하면 단순한 모델은 검증이 쉽고, 따라서 개선의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이론은 검증을 통해 대부분이 오류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중국의 물리학 이론들과는 달리 검증이 가능한 단순한 형태였기 때문에 이후 검증 과정을 통하여 올바른 물리학 원리들이 확립되는 토대가 되었다. 반면 중국인들은 ‘거리가 멀리 떨어진 곳으로도 힘이 전달될 수 있다’는 원리를 서양인보다 먼저 이해해놓고도 그것을 증명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것을 증명한 이들은 처음에는 그것을 믿지 않았던 서양인이었다. 서양인들은 ‘서로 인접해 있는 물체들 사이에서만 마치 당구공들처럼 접촉에 의해 힘이 전달될 수 있다’는 단순한 모델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떨어진 물체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의 원리를 알아냈던 것이다. 서양인들이 ‘과학에서 거둔 성공’과 ‘인과적 설명에서 범하는 오류’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 뿌리란 다름 아닌 ‘개인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모델을 만드는 자유’, 그리고 ‘그 모델을 이용하여 결과로부터 원인을 추구하는 자유’이다. 그러나 그들의 모델은 사물과 그 사물의 속성에만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는 탓에 맥락의 역할을 놓치고 있다. 따라서 맥락이 중시되는 상황에서 맥락을 무시함으로써 인간 행동의 예측 가능성을 과대평가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동사를 통해 세상을 보는 동양과 명사를 통해 세상을 보는 서양

고대 중국인들이 세상을 분류하고 범주화한 방식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방식과는 상이하게 달랐다. 그리스인들은 공통의 속성을 지닌 것들을 같은 범주로 분류했지만, 중국인은 그렇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서로 ‘공명(resonance)'을 통하여 영향을 주고받는 것들을 같은 범주에 속한 것으로 간주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오행설에 따르면 ’봄, 동쪽, 나무, 바람, 초록‘은 모두 동일한 범주에 속했다. 왜냐하면, 바람의 변화가 나머지 네 가지에 변화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에게 우주란 연속적인 물질이었기 때문에, 내적 공유 속성에만 근거하여 사물들을 개별적인 범주로 묶는 것은 그리 유용한 접근방법이 아니었다. 이런 접근은 사물 자체가 분석 단위였던 서양인들에게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고대 동양인과 서양인의 범주화에 대한 그러한 차이점은 현대인들에 있어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동양인들은 사물을 조직화할 때 범주보다는 관계성에 더 주목할까? 고대 중국의 철학자들이 범주화에 그리 관심이 없었고 대신에 ’부분-전체‘라는 각도에서 세상을 이해하려 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직접적인 이유로 동양의 어린이들은 어릴 때부터 관계성에 주목하도록 사회화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회화 요인들을 살펴보기 전에, 다시 한번 ’범주‘와 ’관계‘의 차이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범주는 명사에 의해 표현된다. 어떤 동물이 ’곰‘이라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그 동물의 특징적인 성질, 즉 커다란 몸집, 커다란 이빨과 발톱, 긴 털, 사나운 모습 등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곰‘이라는 명칭을 그 특성들과 결합하고 나면, 나중에 그런 특성을 가진 동물을 볼 때 곰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 된다. 반대로 관계는 동사에 의해 표현된다. 타동사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두 사물과 그 사물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행위를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무엇을 던진다(to throw)'는 동사에는 ‘손과 팔을 이용해서 어떤 사물을 새로운 장소로 옮긴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동사는 명사보다 상대적으로 의미가 애매하기 때문에 기억하기가 어렵다. 동사는 명사에 비해 대화의 맥락 가운데서 의미가 쉽게 변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한 말을 다시 옮기는 과정에서 의미가 변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 명사보다는 동사의 의미를 번역하기가 더 어렵다. 한편, 인지심리학자인 디드레 겐트너와 발달심리학자인 트와일라 타디프의 명사와 동사의 학습에 관한 각각의 연구결과를 종합해볼 때, 서양의 아이들은 동사보다 명사를 더 빨리 배우지만 동양의 아이들은 명사와 동사를 거의 같은 속도로 학습하며 어떤 종류의 명사에 있어서는 오히려 동사를 더 빠른 속도로 습득한다고 한다. 동양과 서양 사이에 이러한 극적인 차이가 발생하는 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 동사는 영어와 기타 유럽 언어에서보다도 동양의 언어에서 지각적으로 더 두드러진다. 중국어나 일어, 한국어에서는 동사가 문장의 처음이나 맨 마지막에 오는 경향이 있는데 그 위치들은 상대적으로 눈에 띄는 곳들이다. 반면에 영어에서는 동사가 대개 문장의 중간에 등장하기 때문에 지각적으로 그리 주목받지 못한다. 둘째, 서양의 부모들은 아이에게 명사를 가르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어떤 사물을 가리키고 그것의 이름과 특성을 가르쳐주는 것을 부모의 사명으로까지 여긴다. 그러나 동양의 부모들은 사물의 이름을 가르치는 것을 그렇게까지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셋째, 공통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사물들을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는 작업은 어린아이에게 ‘그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사물들을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있는’ 범주화 능력을 배양해준다. 그리고 그러한 범주화 습관은 사물의 이름, 즉 명사를 습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따라서 사물에 주의를 기울이고 범주화하는 서양인의 습관 때문에 그들의 아이는 명사를 쉽게 습득할 수 있는 것이다. 넷째, 영어나 다른 유럽 언어에서 ‘속명(generic nouns, 어떤 범주 자체에 대한 이름)’은 문장 구조상 확연히 구분된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는 ‘a duck', 'the duck', 'the ducks', 'ducks'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데, 이 중 마지막 표현은 속명에 해당한다. 즉, 오리 일반을 지칭하는 말이다. 영어에서는 이처럼 ’특정 오리 한 마리‘, ’특정 오리 집단‘, ’오리 일반‘ 등을 분명히 구분지어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어를 비롯한 동양어의 경우는 이러한 구분이 쉽지 않으며, 오로지 맥락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다섯째, 연구에 따르면 동양의 어린이들은 서양의 어린이들에 비해 훨씬 늦은 시기에 범주화하는 방법을 배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서양의 아이들은 동사보다 명사를 더 빨리 배우지만, 동양의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명사 못지 않게 동사도 빨리 배운다. 그렇다면, 서양의 언어가 명사를 강조하고, 동양의 언어가 동사를 강조한다는 언어적 차이가 ’범주화에서의 문화적 차이‘를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책에서 논의하고 있는 동서양의 인지적 차이와 언어적 차이에는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점이 많다. 동양과 서양의 언어 습관은 사물을 가리키고 이름을 부르는 행위의 빈도, 문장 내에서의 동사의 위치, 속명의 빈도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이들 외에도 두 언어 사이에는 의미 있는 차이들이 존재한다. 서양의 언어에서는 어떤 상황에서 속명을 사용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분명히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속명의 사용 빈도가 높다. 영어에서는 문장의 구조 자체로 어떤 명사가 범주 자체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그 범주의 특정 개체를 의미하는지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가 있다. 그러나 중국어에서는 ’다람쥐들이 나무 열매들을 먹는다(Squirrels eat nuts.)'와 ‘이 다람쥐가 그 나무 열매를 먹고 있다(This squirrel is eating the nut.)'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오직 문맥을 통하여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헌데, 영어에서는 문장 구조 자체가 어떤 명사가 범주 자체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그 범주의 개체를 의미하는지를 구분해준다. 또한, 동양의 언어는 ’맥락‘에 주로 의존한다.


동양어의 단어는 대개 다중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나 영어의 단어는 그 의미가 매우 제한적이며, 게다가 영어 사용자들은 단어를 사용할 때 가능하면 맥락의 도움 없이 이해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서양의 언어는 맥락보다는 ’대상‘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영어는 ’주어‘에 매우 집착한다. 심지어 ’비가 온다‘라는 표현을 할 때에도 ’It is raining'이라고 해서 ‘It'을 주어로 쓸 정도이다. 그러나 동양의 언어는 ’주제‘ 중심적이다. 동양의 언어 습관에서 문장의 첫 부분에는 대화의 초점이 되는 주제가 나온다. 예를 들어, ’이곳은 스키 타기에 좋다‘라는 뜻의 중국어를 영어로 표현하면 ’This place, skiing is good'이 되듯이 대화의 초점이 되는 ‘이곳’이 문장의 첫 부분에 온다. 서양에서 행위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다. 그러나 동양인에게 행위란 다른 사람과의 교감을 통해 발생하는 것이거나 주어진 상황에 자기가 적응한 결과이다. 이러한 차이가 언어에서도 잘 드러난다. 가령, 일본어나 중국어, 한국어에서는 ‘나(I)'를 표현하는 말이 주어진 상황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면,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나‘를 기술하는 말과 상사와의 관계에서 ’나‘를 기술하는 말이 다르다. 동양 언어에서 구체적인 맥락과 인간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나‘를 표현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행동의 원인에 대한 관점의 차이 또한 문법에서 잘 나타난다. 서양의 언어는 행위자 중심적이다. 따라서 ’He dropped it'과 같은 표현을 쓰지만(스페인어는 예외), 동양의 언어는 ‘It fell from him' 혹은 단순히 ’fell'이라고 표현한다. 전문적으로 동양인들은 세상을 ‘관계’로 파악하고 서양인들은 범주로 묶일 수 있는 ‘사물’로 파악한다. 이러한 차이는 아이를 양육하는 방식에서의 문화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인다. 즉, 동양의 어린이들은 관계에 주목하도록 양육되고 서양의 어린이들은 사물과 그것들의 범주에 주목하도록 양육된다. 여기에 덧붙여, 언어의 문화 차이 또한 일정 역할을 한다.



동양과 서양의 사고 방식의 차이, 그 기원은?

고대 그리스와 고대 중국 사이에 왜 그렇게도 큰 차이가 존재했는지에 대해 학자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설명을 제기하고 있다. 동시대의 어떤 문화보다도 개인의 자유, 개성, 객관적인 사고를 강조했던 그리스 문화의 특성은 그리스의 독특한 정치 형태, 즉 도시국가 형태의 정치 구조와 공회 정치에 기인한 것이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 형태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저항적인 지식인들은 한 도시를 피해서 자유롭게 다른 도시로 이동할 수 있었고, 이 덕분에 개인의 자유로운 지적 탐구가 가능했다. 실제로 어떤 도시에서 홀대받던 명망 있는 사상가들이 다른 도시의 스카우트 대상이 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의 독특성을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요인은 해안가라는 위치이다. 그리스는 해안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무역을 중요한 산업 수단으로 삼았다. 그 덕분에 자녀를 교육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지닌 상인 계층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중국에서는 교육이 부와 권력을 획득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자식을 교육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고대 그리스의 교육은 부나 권력과는 그리 관련이 없었다. 이런 측면에서 고대 그리스 상인 계층의 교육열은 주목할 만하다. 학자들은 그러한 교육열이 그리스인들의 호기심이 발현된 것이며 지식 자체를 중시하는 풍토 때문에 가능했다고 설명한다. 지리적 특성상 그들은 다른 사람, 다른 관습, 다른 사고를 자연스레 접할 수 있었다. 다른 민족, 다른 종교, 다른 정치적 체계와의 접촉은 자연히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차이, 즉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그들은 A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 그리고 그 반대인 not-A를 주장하는 사람도 빈번하게 접해야 했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고대 그리스는 형식 논리를 개발하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와는 달리 고대 중국에서는 문화적 동질성이 매우 강했다. 오늘날의 경우를 보아도 중국인의 약 95%는 한족 출신이며, 50여 개가 넘는 소수 민족들은 거의 대부분 중국의 서부에 한정되어 거주하고 있다. 따라서 서부가 아닌 지역에 사는 중국인들이 다른 풍속을 접할 기회란 거의 없었다. 중국의 인종적 동질성은 상당 부분 중국의 중앙집권적 정치 권력에서 기인한다. 그와 더불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생활하는 촌락 생활은 조화와 화목을 중시하는 행위 규범을 만들어냈다.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날 기회도 없는 데다가 남들과 다른 의견을 내세웠다가는 위로부터 혹은 동료들로부터 심한 제재를 당했던지라, 중국인들은 서로 다른 주장들 중 더 타당한 것을 결정하는 절차를 만들 필요가 거의 없었다. 대신에 불협화음을 없애고 서로 간에 합의점을 찾는, 즉 중용의 도를 찾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두 사회의 생태 환경이 경제적인 차이를 가져왔고, 이 경제적인 차이는 다시 사회 구조의 차이를 초래했다. 그리고 사회 구조적인 차이는 각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규범과 육아 방식을 만들어냈고, 이는 환경의 어떤 부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를 결정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주의 방식은 우주의 본질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민속 형이상학)를 낳고, 이는 다시 지각과 사고 과정(인식론)의 차이를 가져왔던 것이다.



동양과 서양, 누가 옳은가?

우리가 수행한 거의 모든 연구에서 동양인과 서양인은 사고 방식의 차이를 보였고 그 정도 또한 매우 큰 편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질적으로 아주 다른 방식의 행동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문화적 차이가 심리학자들에게 주는 교훈은, 지금까지 서양인들만을 대상으로 수행된 많은 연구에 근거한 ‘문화 보편성 결론’이 틀린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과연 동양과 서양 중 누구의 사고방식이 더 옳은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편리한 해답은 문화 상대주의이다. 즉, 어떤 문화권의 사고 방식이든 그 문화 사람들에게는 정당하다는 개념이다. 그러나 극단적인 문화 상대주의는 편리한 해결책이긴 하지만 최선은 아니다. 오히려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서로의 사고 방식에서 발생하는 오류를 수정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동양의 사고 방식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서양의 사고 습관 몇 가지를 정리해보겠다.


․ 형식주의(Formalism) : 서양 사상의 강점 중 하나는 형식논리이다. 과학과 수학이 형식논리에 의존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내용과 형식을 구분하고 논리적 접근법만을 강조하는 서양 사고의 이 두 가지 폐단은 학문 활동 과정에서 어처구니없는 결과들을 적잖이 만들어냈다. 심리학에서만 보더라도 내용을 고려하지 않고 형식적인 모델을 세우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하면 관심의 대상이 되는 현상 자체는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모델을 세우는 작업 자체로 학문적 기쁨을 느낄 수 있겠지만 행동을 이해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양자택일 논리 : 서양 사고에 만연한 ‘either/or' 식의 접근은 이미 많은 서양 철학자들에게 비판받았는데, 그 문제점은 동양의 ’both/and' 접근 방식과 비교하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서양인들은 행동의 배후에 ‘다른 많은 이유’가 아니라 ‘하나의 이유(a cause)'가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어서, 행동을 설명할 때 그 행동이 ’내부적 이유‘로 일어났다고 설명하거나 아니면 ’외부적 이유‘로 발생했다고 설명하는 양자택일의 방식을 취한다.


․ 기본적 귀인 오류 : 사회심리학에서 가장 잘 알려진 현상인 기본적 귀인 오류는 어떤 사람의 행동을 설명할 때 상황적 원인보다는 행위자 내부의 원인을 더 중요하게 간주하는 경향을 말한다. 연구에 따르면, 동양인들은 서양인에 비해 이 오류를 덜 범하는 경향이 있으며, 오류를 범하더라도 더 쉽게 수정한다. 이 오류의 경우에 있어서만큼은 서양인들이 틀렸고 동양인들이 옳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서양의 사고방식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동양의 사고습관들이다.


․ 모순 : 양쪽 모두에 진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순을 처음 접하게 되었을 때 유용한 대처법이 될 수 있고, 상반되는 입장을 최종적으로 통합할 때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분명 이 방법은 결코 ‘최선의 방법’은 아니다. 한국의 심리학자 최인철은 모순에 대하여 덜 민감한 사고 방식은 지적 호기심을 마음껏 발휘하는 데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과학적인 사고를 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주장한다.


․ 논쟁과 수사학 : 논쟁을 통하여 진리가 발견되고, 설사 진리의 발견에는 이르지 못한다 해도 유용한 가설들이 세워질 수 있다는 서양의 확신에 대해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서양인의 논쟁 스타일과 그런 논쟁을 장려하는 사고 방식 덕분에 서양 사회는 늘 새로운 것에 개방되어 있다. 논쟁은 또한 ‘가설-증거-결론’의 구조로 이루어진 과학과 수학의 수사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복잡성 : 한 서양 사상가는 “만일 지구가 프레첼(pretzel : 찌그러진 그물처럼 생긴 과자)처럼 생겼다면, 우리는 지구가 프레첼 모양이라는 가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프레첼’ 가설로부터 출발한다면 지구가 정말로 프레첼처럼 생기지 않은  한 그 진짜 모양을 알아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지구가 프레첼이 아닌 어떤 모양으로 생겼든 가장 합리적인 출발점은 ‘지구는 직선이다’는 단순한 가설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반복되는 검증 과정을 거쳐 이 가설을 수정해 나갈 수 있다. 동양인들의 ‘우주는 매우 복잡하다’는 믿음은 분명 옳으며, 실제 생활에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과학에 있어서만큼은 ‘모든 것들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보다는 단순한 모델을 가정하는 것이 진리를 발견하는 데에 훨씬 용이하다.



에필로그 - 동양과 서양의 사고 방식, 충돌할 것인가, 통일될 것인가?

사회과학의 많은 영역에서 많은 학자들이 문명의 미래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다.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로 대표되는 견해는 세계의 정치 구조, 경제 체제, 그리고 가치관들은 하나로 수렴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헌데 한편에서는 문화간의 차이가 계속 유지될 것이라는 반대 견해가 팽팽하게 이와 맞서고 있다. 새뮤얼 헌팅턴 교수에 의해 대표되는 이 견해는 이미 ‘문명의 충돌’이 임박했다고 주장한다. 동양, 이슬람, 그리고 서양이라는 대표적 문명들이 가치관과 세계관에서 서로 좁혀질 수 없을 정도로 벌어져 있기 때문에, 문화 간 차이가 더 심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문화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체제로 수렴할 것이라는 후쿠야마 교수의 견해는 많은 서양인들, 특히 미국인들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여러 현상들을 주변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세계 어디를 가든 사람들은 청바지에 나이키를 신고 코카콜라를 마시며 미국 음악을 듣고 미국 텔레비전 프로를 시청한다. 심지어 프랑스가 자국 TV에 방영되는 미국 프로의 비율을 25%로 줄일 정도이니 두말할 필요가 없다. 또한 동양의 학교 교육에서도 논리적 분석과 비판적 사고를 강조하는 등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서구화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세계의 문화가 서구 문화로 통합될 것이라는 견해에 대하여 헌팅턴 교수는 자민족 우월주의에 근거한 환상에 불과하다고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는 국가 간의 사회․경제적 차이는 여전히 엄청나며, 미래에 발생하게 될 모든 국가 간의 갈등은 경제나 사회적 문제보다는 ‘문화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동양과 이슬람은 서구와는 전혀 다른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동양의 지속적인 경제 발전과 이슬람의 인구 증가로 인해, 서구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감소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부합하는 증거들 또한 여기저기서 발견되고 있다.


일본은 자본주의를 수용한 지 이미 100년이 경과했기 때문에 서구적 가치인 독립성, 자유, 합리주의가 강하게 뿌리박혀 있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사회의 각 분야에서 여전히 변하지 않는 가치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 증거는 우리의 연구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가 일본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 형태는 일본 문화에 맞게 변형되었다. 예를 들어, 회사에 대한 충성심, 팀 정신, 협력적 경영 스타일 같은 일본 자본주의의 특징들은 일본의 고유한 가치에서 비롯되었다. 바로 이러한 특성들이 2차 대전 후 일본의 기적을 일으킨 원동력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문화 차의 미래에 대한 세 번째 견해는 문화적 차이가 수렴할 것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동양이 서구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와 가치관에 있어 서양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들이 서로 결합되는 상태에 도달할 것이라는 견해이다. 서양은 점점 동양적인 것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비록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코카콜라를 마시고 청바지를 입고 있지만, 서양의 요리는 이미 동양 요리를 가미한 퓨전 스타일을 지향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미국 내 중산층 유대인들의 휴양지였던 곳들에 불교 사원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미국에서 불교는 신교보다 더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또한 많은 서양 의사들이 동양 의술을 부분적으로나마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두통이나 구토 같은 증상에는 서양 의학보다 동양 의학의 치료법을 권하기까지 한다. 수많은 미국인들이 요가나 중국의 기체조를 배우고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서구의 개인주의가 인간 소외를 초래한다고 믿게 된 많은 미국인들이 이제 동양적인 공동체를 통하여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전 세계가 일본의 노사 관계를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는 데 반하여, 정작 일본에서는 교육에서 서구식 논쟁을 강조한다. 서양은 또한 ‘이것 아니면 저것(either/or)'의 논리적 구조가 아닌 새로운 논리를 시험하고 있다. 20세기의 저명한 물리학자인 닐스 보어는 양자역학에서 자신이 이룬 업적은 동양 사상을 물리학에 접목한 덕분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나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서로의 문화를 수용하여 중간쯤에서 수렴될 것이라는 이 세 번째 견해가 ’문화 차의 미래‘에 대한 가장 타당한 견해라고 믿는다. 동양과 서양은 서로의 장점을 수용하여 두 문화의 특성이 함께 공존하는 문화 형태를 만들어나갈 것이다. 마치 요리의 재료들이 각각의 속성은 그대로 지니면서도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내듯이, 두 문화는 새로운 통합을 맞이할 것이다.

출처 : ♡스위스쮜리히대학원♡
글쓴이 : 예일친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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