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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주시는 하나님/성도의 생활

[스크랩] 성령을 믿사오며 -김균진(연세대 교수.조직신학)

성령을 믿사오며 -김균진(연세대 교수.조직신학)   기독교사상 (1991.1)

 

 

1. 성령의 중요성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성령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만일 성령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은 2,000년 전에 일어난 과거의 사건에 불과하며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는 현재적 사건이 되지 못할 것이다. 성령의 현재적 활동으로 말미암아 2,000년 전에 일어난 십자가의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현재의 사건으로 경험된다.

 

또한 성령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주님으로 체험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2,000년 전에 오신 과거의 인물, 장차 오실 미래의 인물로 머물게 되고 지금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의 삶을 다스리는 현재적 주님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성령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피안의 세계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며, 지금 우리의 삶과 역사를 주관하는 분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새로운 개입은 불가능하게 되며,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역사에 대하여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한 과거의 존재나 미래의 존재나 피안의 존재가 되어버릴 것이다. 개인의 삶은 물론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폐기될 것이다.

 

성령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앙과 교회의 생동성과 활력이 사라질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교회가 세계사에 있어서 유례를 찿아볼 수 없을 만큼 성장한 요인도 성령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한국교회의 발전에 있어서 우리는 여러가지 다른 요인을 지적할 수 있지만 그 저변에 있어서 성령의 활동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일 성령이 없다면 신앙의 모든 확신과 생동성은 인간의 자기 확신과 감정에 불과할 것이다.

 

 

2. 성령의 위험성

 

이와 같이 성령은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구성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성령만큼 위험한 요소도 다시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여 성령에 대한 이해가 올바르지 않을 때 소위 말하는 성령의 활동은 개인과 교회의 삶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 가며 사회와 역사에 대하여 해독을 끼치게 된다. 자기의 주관적 신념이나 확신을 성령의 활동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인간의 영을 성령으로 착각하며 그리하여 인간의 모든 이기적인 생각과 이기적인 행동을 성령의 활동이라 정당화 시키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성령운동은 반지성적,반이성적 성격을 지니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태와 사물에 대한 이성적,지성적 성찰과 반성을 반성령적인 것으로 배제하고 성령께서 주시는 내적인 음성과 직관을 추구한다. 이때 인간의 자기 생각이 성령의 내적인 음성과 직관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인간의 자기 생각이나 희망이 성령께서 주시는 비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사태에 대한 이성적이며,지성적인 성찰이 결여될 때 그 사태는 호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화될 수밖에 없다. 이성적 성찰은 비신앙으로 간주되고 무식한 사람의 자기 주장이 성령이라는 미명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게된다. 성서에 대한 올바른 연구와 신학적 성찰도 배격된다. 잘못된 현상도 '성령의 역사'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면서 일체의 비판을 거부한다. 광신주의와 열광주의가 성령의 역사로 정당화 되면서 교권자들의 자기 욕심과 교회의 그릇된 방향도 성령의 역사로 정당화 된다.

 

오늘날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본질적 활동과 은사는 방언, 방언통역, 예언, 환상, 병고침, 귀신추방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러한 '성령의 은사'를 얻으려고 하며 이것들을 신앙과 구원의 기준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방언을 하는 것이 구원의 표징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성령의 활동과 은사에 대한 이러한 일방적 이해는 기독교 신앙을 일방적 방향으로 발전시킨다. 땅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 주고 가난한 사람들의 부채를 탕감하며 노예을 풀어 줌으로써 50년을 주기로 사회의 편중된 부를 재분배할 것을 요구하는 희년의 계명, 그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예수의 말씀은 사라지고 기적, 예언, 방언, 방언통역, 영분별, 병고치기, 귀신 내어쫓기가 기독교의 전부인 것처럼 교회의 삶을 결정한다.

 

혹은 물질적 부와 세속의 출세를 성령의 가장 큰 축복으로 생각하고 이것을 얻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예수의 말씀은 사라지고 소유와 출세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성령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뿐 아니라 더욱 더 조장된다. 이 세상을 섬기며 빈곤속에서도 의롭게 살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땅 위에 세우려는 창조적 정신은 약화되고 이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주어진 체제와 질서 속에서 부유하게 되고 출세하려는 사행심이 성령축복의 이름으로 미화된다.

 

이와 같이 성령은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구성적 요소인 동시에 잘못 이해될 때 고치기 어려운 문제를 남긴다. 성령은 좋은 약이 될 수도 있고 인간의 현실을 더욱 어둡게 만드는 독소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주일 에배를 드릴 때마다 사도신경을 외우면서 "성령을 믿사오며..."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대관절 우리는 어떤 성령을 믿는가? 그리스도인이 믿는다고 고백한 성령은 어떤 성령인가? 성령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올바르면 성령은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줄 수 있지만 그 이해가 올바르지 못할 때 그것은 '민중의 아편'이 될 수 있다.그러므로 성서는 성령이라 하여 무조건 믿지 말고 그것이 참성령인가를 분별하라고 권고한다.

 

 

  사랑하는 여러분은 자기가 성령을 받았노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다 믿지 말고 그들이 성령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께

  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십시오. 많은 거짓 예언자가 세상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요일 4:1  

 

 

3.거짓된 영은 어디에서 오는가

 

위의 구절에 의하면 거짓된 영, 하나님으로 부터 오지 않는 영이 존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성령충만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참성령이 아니라 다른 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참성령이 아닌 영, 곧 거짓된 영은 어디에서 오는가?

 

일반적으로 성령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우리에게 와서 활동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성령은 반드시 인간의 영을 통하여 매개된다. 성령은 직접 '어떤 사람'에게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 의하여 이해되고 수용된 다음 그 사람에게서 어떤 작용을 일으킨다. 그 사람에게 활동하는 성령은 반드시 이해의 과정을 거친다. 어떤 사람이 성령이 자기에게 직접 활동한다고 아무리 고집할지라도 객관적으로 분석할 때 성령은 그사람의 이해의 과정을 거쳐서 활동한다. 만일 성령이 이해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성령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는 성령에 대하여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령에 대한 이해의 과정속에서 성령은 인간의 영을 통하여 여과되기 마련이다. 달리 말하여 성령은 인간에 의하여 '이해된 영', '인식된 영'으로 되어버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령은 성령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이성과 정신에 의하여 이해되었고 인식된 영일 뿐이다.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였고 인식하지 않은 성령을 받은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대상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인식은 모두 다르다. 똑같은 빨간 색이라 할지라도 시력이 좋은 사람에게는 강한 빨간 색으로 인식되고, 시력이 나쁜 사람에게는 약한 빨간 색으로 인식된다. 똑같은 물체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약간 차게 느껴질 수도 있고, 어떤 어떤 사람에게는 매우 차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도 똑같은 성령이지만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인식될 수밖에 없다. 사람의 감각과 지각과 생각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 성령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비교해 보면 똑같은 생각은 없다 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한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생각도 모두 조금씩 다르다. 흑인은 피부가 새까만 하나님을 생각할 것이고 백인은 피부가 하얀 하나님을 생각할 것이다.

 

거짓된 영의 원천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성령은 한 분이지만 성령은 반드시 인간의 영을 통하여 인식된다는 여기에 있다. 인간의 영을 통하여 잘못 인식된 영이 곧 거짓된 영이라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영이 성령을 인식할 때 올바른 말씀의 가르침이 없으면 성령은 쉽게 인간의 주관적 생각이나 자기 중심적 관심을 통하여 굴절될 수 있다. 인간의 자기 생각이나 욕심이 성령의 옷을 입고 교묘하게 나타날 수 있다.

 

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무엇을 간절히 바랄 때 그 바람이 꿈속에서 하나의 현실로 나타난다. 꿈속의 현실은 진짜 현실이 아니라 우리의 주관적 기대나 희망이 투사된 것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성령에 대한 인간의 생각도 인간 자신이 미리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희망이나 관심이 투사된 것일 수 있다. 그것은 성서가 말하는 성령과 매우 다른 것일 수 있다. 바로 여기에 거짓된 영의 원천이 있다. 

 

그러므로 소위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영이 하나님의 영인지 아니면 인간의 선입관이나 자기 생각에 의하여 왜곡된 영인지를 비판적으로 질문해야 한다. 그는 교만할 수 없다. 그는 언제나 겸손한 자세로 자기 안에 있는 성령의 순수성을 질문하고 검증해야 한다. 성령은 인간에 의하여 이해되고 인식되는 과정속에서 너무도 쉽게 인간의 영을 통하여 굴절되기 때문이다. 소위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사람에게 이러한 말은 경건하지 못하며 신앙의 확신이 없는 말로 들릴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믿는 성령이 참 하나님의 영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신앙자체가 불확실한 것이 아니냐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뜨거운 성령의 체험을 한 사람일수록 더욱더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산을 옮길 만한 뜨거운 체험과 확신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이해하며 인식하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다. 흔히 "무조건 믿는다"고 말하지만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으며 인식하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없는 노릇이다. 하나님을 수염이 난 할아버지처럼 이해하고 인식하든, 여하튼 우리 인간은 자신이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을 믿는다. 이것은 성령에 대한 신앙에도 해당한다. 우리는 각자가 이해하고 인식하는 성령을 믿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해와 인식이 모두 불완전하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이다. 아무리 성령으로 충만하다 할지라도 인간은 그가 가진  사고방식과 세계관과 언어의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의 이해와 인식은 언제나 이러한 조건들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자기가 인식하고 믿는 바를 절대화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식견이 짧은 사람일수록 자기의 생각을 절대화시킨다. 그는 자기의 모든 생각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아는 바에 대하여 겸손하다. 그는 자기의 모든 지식과 생각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성령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깊은 지식을 가진 사람일수록 성령에 대한 자기의 생각이나 지식을 절대화시키지 않을 것이다. 자기의 생각이나 지식을 절대화시킬 때 자연히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지식을 정죄하게 된다. 자기의 그것이 절대적으로 옳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위 보수와 정통을 고집하는 목회자와 신학자일수록 얼굴에 교만한 표정이 나타나며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대화하지 않으려고 하는 독선적 태도를 보인다. 목소리마저 자연스럽지 못하며 이상야릇하게 인위적으로 쉬어 있는 경우도 있다.

 

 자기의 생각과 지식을 절대화시킬 때 대화의 길이 막혀버린다. 그리하여 타인에 대한 정죄, 교리적 논쟁, 교회의 분열이 일어나게 된다. 겸손의 미덕은 사라지고 자기 고집과 자기 주장,자기 절대화가 지배한다.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은 모든 것을 "부분적으로(고전 13:12) 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4.영분별의 기준 

 

그럼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성령이 참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영인가 아니면 인간의 영에 의하여 굴절되었거나 왜곡된 영인가를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어떤 기준에 따라 우리는 참영과 거짓영을 분별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성령운동을 통하여 급속히 성장한 우리나라의 교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인 동시에 답변하기가 쉽지 않은 문제이다. 이 문제는 성서 전체에 대한 조망을 필요로 하며 성서가 말하는 성령은 어떤 영인가에 따라 답변될 수 있을 것이다. 성서의 어떤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성령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러한 주장은 성서의 극히 작은 한 부분을 전체로 삼아버리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성서에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있다. 그러므로 두 성서 가운데서 어느 한 성서만을 성령에 대한 전거로 삼는 것은 위험하다. 그것은 성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한편으로 치우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서 전체의 중심이 무엇인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성서 전체의 중심인가? 창세기가 성서 전체의 중심인가, 아니면 마가복음이나 요한계시록이 성서 전체의 중심인가?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성서의 중심은 성서 안에 있는 어느 한 책이 아니라 성서 전체가 가리키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구약성서는 그 전체에 있어서 '장차 오실 그 분'을 가리키고 있으며, 신약성서는 '이미 오신 그 분'의 과거와 미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서의 중심이다.

 따라서 우리는 참성령이 어떤 영인가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찿아야 하며 여기에서 참성령과 거짓된 영을 구분하는 기준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어떤 영이 나타나는가?

 

 

1) 사랑과 공의의 영

 

흔히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가 주이시다"라고 고백하는  영은 참영이고 이것을 고백하지 않는 영은 거짓 영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참영과 거짓영을  구분하는 기준으로서 부족하다. 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면서 다른 영에 사로잡혀 그리스도의 관심사가 아니었던 일을 얼마든지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영과 거짓영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보다 더 조직적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랑이다(요일 4:8,16). 사랑이신 하나님의 영, 곧 사랑의 영의 성육신이 예수의 존재이다. 그럼 하나님의 '사랑의 영'은 예수 안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성령은 예수 안에서 가난한 자, 병든 자,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하는 자들을 자기의 친구로 삼고 그들과 연대하며 자신의 삶을 나누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수께서 지금 한국의 사회에 오신다면 그는 지금도 이렇게 행동할 것이다. 그는 부유한 자들이 모인 곳을 찿지 않고 병들고 가난한 자,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자들을 찿을 것이다. 그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예수안에서 성령은 이러한 사람들을 찿으며 그들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성령은 감상적인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성령은 인간이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환경의 조성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예수는 '주의 은혜의 해',곧 희년을 선포한다(눅 4:19). 구체적으로 말하여 땅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 주어야 한다. 소작농지는 소작농에게 주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부채를 탕감하고 노예를 해방해야 한다.

 

곧 사회의 부를 재분배하여 경제적 균등을 꾀해야 한다. 땅에 대한 착취를 중지하고 땅을 보호해야 한다. 이러한 희년의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불쌍한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형성할 것을 성령은 예수 안에서 요구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이 땅에 이룰 것을 명령한다.

 

이러한 성령의 모습은 구약성서의 율법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과 일치한다. 율법의 본래 목적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실현하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행복하게 사는 데에 있다. 달리 말하여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자기의 이웃을 자기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핵심이다.

 

이러한 율법의 정신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 곧 하나님의 정신은 자비와 공의의 영이라 말할 수 있다. 예수는 바로 이러한 영에 사로잡혀있었고 이 영과 한 몸, 곧 일체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희년의 계명을 서로 선포하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제도적 개혁, 곧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그의 말씀의 중심으로 삼은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영과 거짓영들을 구분할 수 있는 한가지 기준이 있다. 물론 하나님의 영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병을 고칠 수도 있고 방언과 방언통역을 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령은 자비와 공의의 영이시며,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새로운 세계와 질서를 추구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영은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거짓영이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이 아니라 잡귀신이다. 

 

성령의 역사로 크게 부흥한다는 한국의 교회가 과연 하나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공의의 영에 사로잡혀 있는지 아니면 다른 영에 사로잡혀 있는지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아무리 큰 성령의 감동과 은사가 있다 할지라도 자비와 공의를 추구하는 마음이 없으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마음이 없을 때,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아닌 어떤 다른 영이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달리 말하여 그리스도 안에는 '창조자의 영'이 나타난다. 성령은 본질적으로 '새 창조자'이다. 예수는 새 창조자이신 성령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의 세계 속에 새로운 삶의 질서를 세우고자 하셨고 그 사회를 새롭게 창조하고자 하셨다. 그러나 로마의 국가종교로서 로마 정치권력의 시녀가 된 기독교는 예수의 이러한 모습을 감추고 예수가 마치 개인의 사사로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온 것으로 나타내었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예수는 개인의 죄의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보다 하나님의 것과 하나님의 자비의 공의, 곧 하나님의 새로운 새 창조를 그의 말씀의 주제로 삼았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마디로 예수는 단지 죄의 용서자가 아니라 종말론적 새 창조자였다. 따라서 예수안에 나타나는 성령은 종말론적 새 창조의 영이다.

 

하나님의 새 창조는 먼저 우리 인간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며 성령안에서 거룩하게 변화됨으로써 시작한다.무엇보다 먼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새 창조'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심령만이 새 창조로 변화되기를 원하지 않고 온 세계가 새롭게 창조되기를 원한다. 온 세계가 그의 피조물이요, 온 세계가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 참영과 거짓영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개인의 심령과 생활은 물론 온 세계를 하나님의 세계로 개혁하려는 새 창조자임을 부인하는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이 아니라 다른 영이다.

 

온 세계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새로운 온 세계에 나타나야 할 구원의 종말론적, 우주론적 지평을 간과하거나 무시하고 개인의 심령의 평화, 입신출세, 물질의 축복만을 바라는 것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영이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며 매일 수천명의 어린이가 질병과 기아로 죽어가는 현실을 보면서 이세계가 하나님이 자비와 공의로 새롭게 창조되어야 함을 부인하는 것에 어찌 하나님의 영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2) 예수 그리스도는 철저히 한 인간이었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조건 속에서 생존하였다. 그는 이 세계와 관계없이 피안의 세계속에서 유아독존하지 않고 이 세계속으로 들어와 인간의 육을 입고 종된 자들의 존재로 자기를 낮추었다. 이 예수 안에서 성령은 소위 해탈과 유아독존의 존재로 나타나지 않고 세속 안으로 들어오며 종된 자들의 존재로 자기를 낮추는 자로 나타난다.

 

그러나 세계 안에 존재한 예수는 철저히 세계와 구분된 자로서 존재한다. 그는 이세계 안에 있으나 이 세계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속한다. 그는 이 세계의 법칙에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산다. 그러므로 그는 이 세계의 법칙에 역행하여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의 친구가 되며,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현재 속에 실현하고자 한다.

 

이 예수안에서 성령은 이 세계로 부터 구분된 자로 나타난다. 그는 이 세계 안에서 활동하지만 이 세계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다. 그는 이 세계로 동화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 존속하며 이 세계로 부터 자기를 구분한다.  하나님의 영의 '거룩하심'은 이 세계에로의 개입과 고난 속에 머무는 동시에 이 세계로 부터 구분되어 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가 고백하는 참영과 거짓영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나타난다. 이 세계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이 세계없이 자기 홀로  하나되어 살려고 하는 영은 하나님의 영이 아니다. 그 반면 이 세계 속에서 이 세계에 동화되어 버리는 영도 하나님의 영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 세계 안에 있으면서 이세계로 부터 구분되며, 이 세계로 부터 구분되지만 철저히 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 존속한다.

 

 이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들은 이 세계를 해탈하지 않는다. 그들은 철저히 이 세계 안에 있으면서 이 세계를 하나님의 거룩한 세계로 변화시키고자 한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이 세계에 동화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지키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존속한다. 거룩한 영을 받은 그들은 자신의 거룩한 생활을 통하여 거룩하게 되는 동시에, 이 세계를 거룩한 하나님의 세계로 변화시킴으로써 거룩하게된다. 그들의 거룩함은 속세로부터의 해탈에있지 않고  속세의 '성화'를 위한 개입과 고난에 있는 동시에 속세로부터의 구분에 있다.

 

 

 

 5. 맺는 말

 

 우리는 사도신경을 외울 때마다 '성령을 믿사오며'라고 고백한다. 이 글에서 우리는 우리가 고백하는 성령의 중요성을 밝히는 동시에 그 위험성을 기술하고 성령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인식이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기대에 따라 쉽게 굴절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다음 참성령과 거짓영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그리스도의 삶을 통하여 제시하였다.

 

이로써 기독교가 '믿사오며'라고 고백하는 성령이 어떤 영인가를 밝히고자 하였다. 이를 통하여 성령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신학적으로 바르게 수정되고 미신과 신비주의와 권위주의와 교권주의, 죄와 불의와 폭력이 팽배한 이 땅에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출처 : 한국교회개혁포럼
글쓴이 : 님이라부르리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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