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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에 관하여/유대민족의 역사

[스크랩] 고대 이스라엘의 남, 북왕국의 관계

고대 이스라엘의 남, 북왕국의 관계 

임왕성


I. 서론
주전 927년 고대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으며 분열왕국 시대는 그 후 2세기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분열된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는 통일 왕국을 이루지 못한채 외세에 의해 차례로 멸망 당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타국으로 잡혀가며 추방당하는 곤경을 맛보았다.

II. 남북분열의 요인
다윗왕조와 예루살렘의 시각에서 볼 때 북왕국 이스라엘은 반역의 무리였다. 그러나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시각에서 볼 때는 다윗왕조야 말로 사울왕국을 찬탈한 반역자 였으며 각 지파들의 전통과 독자성을 제한하고 백성들의 재산과 인권을 침해한 달갑지 않은 통치자들이었다. 다윗왕조와 예루살렘의 시각에서 볼 때 남북분열이라는 사건은 하나의 반란 사건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시각에서 볼 때는 그들의 독립을 쟁취한 사건이요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회복한 사건이며 다윗왕조의 일시적인 억압에서 해방된 사건이었다. 성서에서는 다윗왕조와 예루살렘을 옹호하는 태도를 유지하면서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지만 남북왕국 중 어느 편이 정통성을 계승했느냐고 묻는다면 남북왕국 모두가 정통성을 계승 했노라고 대답하는 것이 보다 더 합리적이며 객관적인 대답이 될 것이다. 굳이 남북왕국 중 하나를 택하라면 오히려 북왕국 이스라엘을 택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유지한 왕국은 북 왕국이었으며 이스라엘이 맨처음 일어선 장소 역시 북왕국 지역인 에브라임 산지였기 때문이다.
남북분열이 일어난 시점은 르호보암 통치 시대 부터 이지만 분열의 원인은 르호보암에게서 보다 솔로몬의 실정(失政)과 그 이전의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 남북이 분열할 때 르호보암은 솔로몬에게서 왕권을 이어받아 통치를 시작하는 출발점에 있었으며 아직 즉위식도 거행하지 못한 상태였다. 성서에서는 남북분열이 마치 르호보암의 단 한번의 미숙한 판단(왕상 12:1-20) 때문에 빚어진 결과 인양 르호보암의 잘못을 강조하고 있지만 남북분열의 깊은 균열은 오랜 역사를 통해 형성된 것이며 그 균열의 외부적 모습이 솔로몬이 죽고 르호보암이 왕위계승을 하는 시점에 표출된 것 뿐이었다.

A. 국내적 요인
1. 이스라엘과 유다의 구분 -지역별 요인
사울이 네게브 지역에 있었던 아말렉과 전투하였다는 기록(삼상 15장)과 헤브론 남동쪽 갈멜에 승전비를 세웠다는 기록을 볼 때 유다도 사울의 통치 영역에 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서울 시대 때의 중심지는 기브아를 중심한 베냐민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였으며 유다 지파는 미미한 지파에 불과 했었다. 그러나 블레셋의 확장으로 사울 왕조가 몰락할 때 다윗은 자신의 고향 헤브론에서 왕위에 오를 수 있었으며 헤브론을 중심한 유다의 위상이 상승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유다 사람들"이 와서 다윗을 유다의 왕으로 기름 부었으며(삼하 2:4) 나중에 "이스라엘 장로들"이 와서 다윗과 계약을 맺고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었다(삼하 5:1-3).
이 사건들 속에서 눈여겨 볼 수 있는 것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구분이 남북 분열이 일어난 르호보암 때 부터 되어진 것이 아니라 다윗이 등장할 때 부터 이미 구분 되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윗 이전에도 지파간의 구분은 되어 있었지만 다윗의 상승으로 미미했던 유다 지파가 상대적으로 입지가 강화 되었을 때 유다는 다른 지파들과 구분될 수 밖에 없었고 다른 지파들은 이스라엘이란 하나의 집단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분명 지파의 이름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이란 단어가 성서외 문헌에서 처음 나타난 곳은 이집트의 메르넵타 비문(The merneptah Stela)으로써 적어도 주전 13세기 후반에 이스라엘이란 집단이 팔레스틴 땅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ANET 378). 이때의 이스라엘은 아마도 에브라임 산지를 중심한 에브라임 지파, 므낫세 지파, 베냐민 지파 등의 집단으로 추정되며 이 지파들은 성서에 의하면 이스라엘(야곱)이 사랑한 라헬의 아들(베냐민)과 손자들(요셉의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지파들이다. 이 이스라엘이라는 집단 명칭은 사울왕조 시대 때 더욱 확대된 개념으로, 여러 다른 지파들을 묶어서 부를 때 사용된 국가 명칭이 되었다. 다윗으로 인해 유다가 돌출하자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자연스럽게 유다외의 지파들의 총칭으로 사용 되었다.
다윗은 유다와 이스라엘로 구분된 구성원들을 이끌어 갔으며 유다와 이스라엘을 뭉쳐서 하나의 국가로 만들어 보려는 소위 통일 정책을 다음과 같이 펼쳤다.
(1) 수도를 유다와 이스라엘의 중간 지점이며 유다에게도 이스라엘에게도 속해 있지 않았던 여부스 족속의 도시인 예루살렘으로 옮겨 유다와 이스라엘을 공평하게 통치하려 애를 썼다.
(2) 야웨 종교의 상징(iconography)이며 이스라엘 지파들과 사울왕조가 존중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예루살렘을 남북종교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유다지역 출신으로 추정되는 레위인들을 지방 행정관으로 기용함으로써 다윗의 이스라엘 통치력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통일정책을 통해 다윗은 정치적으로 하나의 국가를 만들어 놓았지만 다윗 왕국에는 여전히 구분된 유다와 이스라엘이 존재해 있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환궁할 때 유다사람, 이스라엘 사람, 베냐민 사람등이 개별적으로 다윗을 영접한 것을 볼 때 적어도 유다와 이스라엘이 별개의 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삼하 19:40-43).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때 다윗은 솔로몬이 "이스라엘과 유다의"(왕상 1:35) 왕이 될 것을 선언하였고 솔로몬의 통치 영역을 묘사할 때도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왕상 4:25) 등으로 유다와 이스라엘을 구분하여 언급하였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구분은 오랜 역사를 지닌 구분이었으며 정치적인 남북 분열은 다만 이러한 구분을 표면화 시킨 것이었다.

2. 예루살렘과 지파의 구분 - 정치적 요인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것은 아도니야와 왕위 계승 투쟁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 솔로몬을 지지한 인물들을 보면, 제사장 사독, 예언자 나단, 왕비 밧세바, 용병대장 브나야 및 다윗왕 직속의 용사들 등으로 주로 예루살렘 출신 인물들과 외국인 용병들을 포함한 다윗왕의 친위부대 소속 인물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도니야를 지지한 인물들을 보면, 민병대장 요압, 아나돗 출신의 제사장 아비아달 등으로 주로 지파들을 지휘하고 지도하는 인물들이었다. 솔로몬이 왕위를 차지함으로써 예루살렘을 중심한 집단들의 위상은 한층 더 높아졌으며 지파들의 위상과 세력은 상대적으로 낮아질 수 밖에 없었고 예루살렘과 지파간의 괴리 현상은 점점 더 심화되어 갔다. 솔로몬이 즉위할 때 당연히 있어야 할 "지파들에 의한 기름부음"이 없었다는 것은 이 괴리현상을 명백히 보여주는 실례이다(왕상 1:39).
사실 이 괴리현상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그 성을 "다윗의 성"이라 불렀을 때 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 그 때까지 그 곳에 살고 있었던 여부스 족속을 그대로 남겨 두었으며 예루살렘을 다윗의 직할 성읍 내지 다윗 개인의 사유지로 만들었다. 다윗의 통치 방식은 지파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운영되었다기 보다 다윗 직속의 용병부대들의 활약을 중심한 통치 방식이었으며 많은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 시켰지만 통치는 예루살렘을 중심한 방식이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통치하였고 지파들을 소외 시켰지만, 다윗 역시 유다 지파 출신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을 우선적으로 기용한 면은 찾아 볼 수 있다. 유다지역 출신으로 여겨지는 레위인들을 영토 전역에 지방 행정관으로 파견하여 왕국의 행정을 이끌어 갔으며 예루살렘이 유다 지역에 있었으므로 당연히 유다는 다른 어느 지파보다도 친다윗의 경향을 띨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다지파도 다윗왕실을 옹호하는데 있어서는 적극적이라기 보다는 소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남북분열 때 유다지파는 다윗왕조인 르호보암 편에 섰지만 반란을 일으킨 이스라엘의 지파들과 대항한 흔적이 없고 이스라엘 지파들의 쿠테타 슬로건에도 유다를 공격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 다윗에게 우리의 분깃이 어디 있느냐? 이새의 아들에게
우리가 상속할 것이 없다. 오 이스라엘아 너희들의 장막
으로 ! 다윗이여 너는 이제 너의 집이나 돌아보라."
(왕상 12:16 [삼하 20:1] )
미미한 지파였던 유다는 유다출신인 다윗의 상승으로 다른 어느 지파보다도 다윗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으며 이로 인해 남북분열 때 소극적인 자세 였지만 다윗왕실과 보조를 같이 하였다. 남북분열로 유다왕국과 이스라엘왕국은 서로 나누어 졌지만 이스라엘은 유다에게 화살을 겨냥하지 않았고 예루살렘에 있었던 다윗왕실을 겨냥하였다. 즉 이스라엘의 지파들과 유다지파는 구분되어 있었지만 이 모든 지파들이 예루살렘과는 또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다윗왕조의 지파들과 거리를 두고 존재 해왔던 "다윗의 성 예루살렘"이라는 독특한 요인이 결국 남북분열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3. 종교적 요인
여로보암이 솔로몬 휘하에서 요셉 족속의 부역 감독관으로 있었을 때 실로 출신 예언자 아히야가 장차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10지파의 왕이 될 것이라 예언 하였고 이 예언은 공개적인 예언으로 솔로몬도 알게 되어 여로보암은 피신할 수 밖에 없었다(왕상 11:29-40). 아히야의 예언은 단순한 종교적 권면이 아니라 다윗 왕조에 대한 반역 행위를 유발 시킬 수도 있었으며 반역 행위를 지지하는 강력한 정치적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을 대변하는 역할도 하였다.
야웨 종교의 기원을 분명히 밝히기는 어렵지만 북쪽에서의 야웨 종교는 실소 성소에 있었던 법궤의 모습속에서 그 초기의 일면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울의 몰락과 다윗의 상승으로 이스라엘 지파들의 종교적 상징인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져 버렸으며 실소 성소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렘 26:9). 예루살렘에 야웨 성전이 세워지고 법궤가 예루살렘 성전에 안치됨에 따라 순례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몰려 들었고 이로 인해 지파들의 지방 성소들은 점점 종교적 세력이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레위인들이 지방 행정관으로써 또한 종교적 지도자로써 지방에서 행세를 하는 것도 지방 종교 지도자로써는 못마땅한 노릇이었다.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는 실로를 비롯한 지방성소들의 종교 지도자들은 다윗왕조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었고 급기야 아히야같은 인물이 반역의 행동을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남북 분열 이후 이스라엘에서 취한 종교정책은 철저히 예루살렘 중심의 종교권력을 분산 시키고 예루살렘에 집중되는 순례행렬을 막는 것이었다. ?엘과 단에 성소를 건축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행렬을 막고 레위 제사장들을 쫓아내고 이스라엘 지방의 제사장들이 성소들을 장악하게 하였다(왕상 12:25-33).

4. 솔로몬의 실정(失政) - 경제적 요인
다윗은 하나의 요새인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통치하였고 군대도 예루살렘에서 출동시켜 군사비 지출이 막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솔로몬은 하솔, 므깃도, 게젤 등 각 지역에 요새를 건축하였고 군사들과 전차들을 배치시켰다. 따라서 요새 건설비 뿐 만 아니라 요새에 상주해 있는 군대의 장비 구입과 유지 비용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또한 예루살렘에도 성전 건축, 왕궁 중축 등의 사업을 일으켜 건설비 지출이 많아졌다. 반면에 수입원은 다윗시대에 비해 그다지 신장되지 못하였으므로 왕국 경제가 적자 경제를 면할 수 없게 되엇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수입들을 살펴보면 관세와 통행세 정도였으며 중개 무역으로 얻는 이득은 미미한 형편이었다. 또한 다윗 시대에 있었던 전쟁에 승리하여 가져왔던 전리품으로 인한 수입도, 포로들로 인한 노동력 공급도 솔로몬 시대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부족한 재원과 노동력을 메꾸기 위해서는 백성들로 부터 세금을 과도하게 거두어 들일 수 밖에 없었고 부역을 일으켜 강제 노동을 시킬 수 밖에 없었다. 과중한 세금과 강제 노동은 백성들의 다윗왕조에 대한 불만을 고조 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솔로몬의 이러한 경제정책 실패는 두로왕 히람에게 20개의 성읍들을 양도하였다는 사건에서 명백히 확인할 수 있다(왕상 9:10-14).
다윗왕조에 대한 불만은 솔로몬의 경제 정책 실패를 계기로 결국 표출되고 말았다. 왕국분열의 결정적 역할을 한 여로보암은 솔로몬 시대 때 이미 왕에게 부역정책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시하며 항거하다가 이집트로 도피하였던 인물이었다(왕상 11:26-12:33). 솔로몬은 이 사건을 통해 백성의 부담을 경감 시키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며 그를 계승한 르호보암도 백성들의 요구를 묵살하였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지파들이 다윗왕조에 항거하여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힘"이 다윗왕조보다 우세하였기 때문이었다. 힘이 약한 르호보암은 이 반역의 무리들을 진압하지 못하였다. 지역적으로 이스라엘이 유다보다 넓은 지역이었으며 중요한 도시들이 있었고 인구도 더 많았다. 뿐만 아니라 중요한 국제 무역로가 동서남북으로 뻗쳐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역량이 유다에 비해 훨씬 우세하였다. 유다보다도 이스라엘이 "힘"이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솔로몬 치하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잠잠하였던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그들의 "힘"이 분산되었고 단결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스라엘은 면적이 넓었으므로 그만큼 다양한 집단들이 모여 있었다. 우선 각기 다른 지파의 수가 10개이며, 전통있는 상업 중심지인 도시들과, 흩어져 있었으며 농업과 목축을 하는 촌락들이 있었고 흩어져 있는 여러 성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흩어진 힘"들은 단결되지 못하였기에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과중한 세금과 부역"이라는 공통된 고통을 겪는 가운데 이스라엘 지파들은 단결하여 그 힘으로 다윗왕조의 통치를 벗어나게 된 것이었다.

B.국제적 요인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진 통일왕국은 강대국의 영향력 감소 특히 이집트 세력의 약화와 이집트와의 우호적 관계 속에서 영토도 넓힐 수 있었고 시리아-팔레스틴 지역에 유망주로 부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변 국가들, 이집트, 두로, 블레셋, 시리아, 암몬, 모압, 에돔 등의 국가들 중 그 어느 국가도 통일 왕국 이스라엘이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것을 달가와하지는 않았다.

1. 이집트
솔로몬 통치 말기의 이집트는 제22왕조의 창건자인 시삭(Sheshonk I)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는 리비아 출신으로 테베(Thebes)에서 파라오로 등극 하였고 이어 나일강 델타 지역에 분산된 도시 국가들에게 통치력을 행사하고자 하였다(ARE IV, 709-22). 따라서 외국인인 그는 통치기반이 든든하지 못한 상태였고 시리아-팔레스틴을 장악할 힘이 없었다. 솔로몬의 부하인 여로보암이 반역죄로 이집트에 피신하였을 때 시삭이 여로보암을 보호해 주었고 또한 환대해 주었다는 것은 시삭이 이스라엘의 분열을 은연 중에 바라고 있었음을 확인해 주는 사건이었다(왕상 11:40, LXX의 왕상 12:24 참조). 뿐만 아니라 다윗에게 반항한 에돔의 왕자 하닷을 이집트 왕은 환대해 주었으며 다윗이 죽은 후 그를 귀국하게 하여 솔로몬을 괴롭히게 한 사건도 이집트의 야망을 드러낸 사건이었다(왕상 11:14-22). 이집트왕 시삭이 여로보암을 보호해 주었지만 그가 바랐던 것을 북왕국 이스라엘을 응원하려는 것이 아니라 남북을 분열시키고 세력을 약화시켜 이스라엘과 유다를 침략하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자 시삭은 군대를 동원하여 르호보암 5년(922-921)에 유다와 이스라엘을 동시에 공격하여 약탈을 자행하였고 이스라엘은 유다보다 더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2. 시리아
솔로몬 시대 때 시리아왕 르손은 요단 동편 지역의 북부에서 솔로몬의 통치영역을 위협하는 존재였다(왕상 11:23-25). 시리아는 솔로몬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하였으므로 이스라엘과 유다로 남북분열이 되는 것을 누구보다도 환영하였을 것이다. 남북분열이 된 후 시리아의 왕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 바아사와 우호조약을 맺었으나 유다왕 아사의 요청으로 북왕국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영토 중 일부를 빼앗았다(왕상 15:16-20) 즉 시리아는 솔로몬 왕국이 남북으로 분열되어 그 세력이 약화 되기를 원하였을 뿐 결코 북왕국 이스라엘이 강대해지기를 원하지는 아니하였다.

3. 두로, 블레셋, 암몬, 모압, 에돔
두로는 경제 대국의 위치에서 지중해와 아카바만을 잇는 무역로가 확보되어지기를 바라는 입장이었다. 두로와 이스라엘은 솔로몬 시대 때 종주국과 봉신의 관계였으며 이스라엘 내부의 분열을 두로가 환영할 이유는 찾을 수 없다. 이스라엘이 강성하여 육상 무역로를 독점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분열되거나 약화되어 지중해와 아카바만을 연결하는 무역로가 모압이나 에돔 등에 의해 방해 받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두로왕 히람과 솔로몬 사이에 20개의 성읍을 주고 받을 때 불편한 관계였기(왕상 9:12-13) 때문에 두로가 이스라엘의 내분을 방치하였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블레셋, 암몬, 모압, 에돔 등의 약소 국가들은 다윗-솔로몬의 통치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을 쳤으며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어 그 세력이 분산되고 더욱 약화되기를 원했었다. 솔로몬 말기에 이미 이들 국가들이 솔로몬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르호보암의 방어 성읍들이 유다 산지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보아 짐작할 수 있다(대하 11:5-12, 23).

C. 요약
통일왕국이 남북으로 분열된 요인들을 살펴 볼 때 그 요인들은 이스라엘 역사의 초기 시대부터 발전되어 온 요인(이스라엘과 유다의 지역별 구분)도 있었고 정치적 요인(예루살렘과 지파의 구분) 및 종교적 요인도 있었다. 무엇보다 남북분열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은 솔론몬의 경제정책 실패로 인한 백성들의 불만 특히 북이스라엘 지파들과 도시민들의 불만이었다. 이러한 국내적 요인들이 남북분열을 무르익게 만들었을 때 이집트와 시리아 등 주변의 나라들이 이스라엘의 남북분열을 조장하거나 남북분열로 주변의 나라들이 이득을 보려하는 분위기가 합세되어 솔로몬이 죽고 르호보암이 등장했을때 남북의 분열이 일어났다. 결코 르호보암의 단 한번의 미숙한 판단 때문에 남북분열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III. 분열왕국의 남북관계
A. 분열초기의 남북관계
분열 초기에 다윗왕조는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보다 다윗왕조 편에 남아 있었던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 일부에 대한 통치권을 강화하였다. 소위 "르호보암의 방어성"(대하 11:5-12)이라 불리우는 성들을 살펴보면 그 성들이 외적의 침략을 방어할 수 있는 국경선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다 내부의 산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성들은 이미 설치된 레위성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어서 그 공백을 메꾸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르호보암의 아들들이 신축된 성의 성주로 파견되어 졌고 르호보암은 그들이 그 지역의 여자들과 결혼하도록 장려하였다(대하 11:23). 따라서 르호보암은 분열초기의 외부의 침략을 방어하는데 주력했다기 보다 유다내부를 세밀하게 장악하고 다윗왕조와 유다지파 및 베냐민 지파 등과의 유대를 공고히 하고져 하는데 힘을 쏟았던 것이다.
여로보암 역시 이스라엘이 다윗왕조와 관련되지 않는 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출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세겜과 디르사 등에 차례로 수도를 옮겨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으며 ?엘과 단에 성전을 짓고 레위 제사장들을 축출하여 종교적으로 예루살렘과 결별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정치상황은 불안정하였다. 여로보암은 그의 아들 나답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2년이 체 못되어 쿠테타를 당해 살해당하였다(왕상 15:25-27). 쿠테타에 성공한 바아사 역시 그의 아들 엘라에게 왕위를 계승시킨지 2년 만에 시므리에게 쿠테타를 당했다(왕상 16:8-10). 이스라엘의 정치는 유다에 비해 상당히 불안정하였고 왕조가 자주 바뀌는 가운데 국력을 신장 시킬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어났던 남북간의 전쟁은 전면 전쟁이기 보다 남북 서로가 자기 자리를 지키려는 방어적 전쟁이었으며 남북의 경계가 불분명한데서 야기된 국경선에서의 소규모적 충돌이라는 양상을 보여 주었다. 그 중에서 유다를 방어하기 위해 유다왕 아사가 외국 군대인 시리아 군대를 끌어들여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했던 사건은 남북의 관계를 더 한층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왕상 15:16-22).
남북왕국의 분열이후 외세의 침략은 훨씬 빈번해졌다. 이집트의 시삭(Sheshonq I)이 르호보암 제5년(왕상 14:15)에 이스라엘과 유다를 침략하여 신속하게 약탈하고 돌아 갔으며 블레셋은 이스라엘과 두번이나 깁브돈에서 전투를 벌였고 이스라엘과 유다의 영토를 잠식하였다(왕상 15:27 ; 16:15). 시리아는 유다왕 아사의 요청을 듣고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갈릴리 이북 지역을 점령해 버렸다(왕상 15:16-22 ; 대하 16:1-6). 이러한 침략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분열 및 세력 분산의 기회를 노린 외세의 침략이라 볼 수 있다.

B. 이스라엘의 봉신인 유다
쿠테타를 일으켜 왕위에 오른 오므리왕은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부상시켰으며 약소국가인 유다를 봉신으로 만들었다. 중간에 다소 변화는 있었지만 오므리(주전 879-869년)로부터 브가히야(주전 736-735년)에 이르기까지 거의 1세기 반 동안 유다는 이스라엘의 통제를 받으면서 반 독립적인 체제를 유지하였다. 이스라엘의 오므리왕조는 유다의 다윗왕조와 정략결혼 관계를 맺어 오므리왕가의 공주 아달리야는 다윗왕가의 왕인 여호람의 왕비가 되었다. 오므리왕가 출신인 아달리야가 유다의 여왕으로 즉위하기도 하였으며 아달리야의 남편이었던 여호람은 남북을 동시에 통치하는 왕, 이스라엘의 왕이며 동시에 유다의 왕으로 남북을 통치하였다.
오므리 왕조 시대의 남북의 관계는 두 왕가가 있었을 뿐 실제로는 하나의 통일된 국가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다. 외국과의 전쟁이 있을 때는 이스라엘의 깃발아래 함께 출전하였고(853 카르카르 전투) 왕실은 서로 사돈을 맺고 친밀히 교류하였다. 다윗이 유다의 왕으로 즉위하고 또 이스라엘 왕으로 즉위한 경우와 다를 바 없는 것을 여호람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다가 오므리 왕조에서부터 브가히야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봉신으로 있었다는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앗수르의 살만에셀 3세의 군대와 이를 저지하는 시리아-팔레스틴 연합군이 853년 카르카르에서 싸웠는데 이 연합군의 명단에 당연히 있어야 할 유다, 모압, 에돔 등의 이름이 빠져있다(ARAB I $ 611 ; ANET 278-79). 이 현상은 모압이나 에돔과 마찬가지로 유다도 이스라엘의 봉신으로 있었기 ?문으로 설명할 수 있다.
(2) 유다왕 아마샤와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 사이에 벌어진 벧세메스 전투는(왕하 14:8-14) 아마샤가 "우리가 서로 대면하자"(왕하 14:8)고 요아스에게 제의하였으므로 일어났다. 그런데 군사력에 있어서 이스라엘은 유다에게 10만명의 원군을 보내줄 수 있을 정도로 이스라엘이 유다보다 훨씬 더 강력하였으며(대하 25:5-13), 그 전투 장소가 유다지역이었고 전투가 요아스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 점 그리고 아마샤가 결국 살해당한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이 전투는 아마샤가 이스라엘을 정복하고자 일으킨 전쟁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부터의 독립을 시도한 아마샤를 이스라엘이 응징한 사건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아마샤의 제의 "우리가 서로 대면하자"라는 제의는 이스라엘에 대한 선전포고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유다의 동등한 위상을 확립하자는 국제회의 소집통고로써 봉신 유다의 당돌한 제의로 설명할 수 있다.
(3)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에는 일종의 봉신 계약이 성립되어 있었으리라는 것을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호사밧에 관한 전승 속에는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보존되어 있다.
" 나는 당신과 일반이요 내 백성은 당신과 일반이
요 내 말들은 당신의 말들과 일반이니이다"
(왕하 3:7 ; 왕상 22:4)
또한 이 구절은 시리아와의 전쟁(왕상 22:4)과 모압과의 전쟁(왕하 3:7) 전승에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 코간(Mordechai Cogan) 과 테드모어(Hayim Tadmor)는 이 구절이 우가릿의 봉신 니크마두(Niqmadu)왕이 종주국인 힛타이트 왕 슈필룰리우마(Shuppiluliuma)에게 보내는 서신 내용("나는 나의 주이신 위대한 왕 태양의 종입니다. 내 주의 대적은 나에게도 대적이며 주의 우군은 나에게도 우군입니다")과 유사함을 근거로 여호사밧의 말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계약을 전제로 하는 표현이라 주장하였다. 그리고 여호사밧의 표현이 봉신인 우가릿 왕의 표현과 닮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유다가 이스라엘과 봉신계약을 맺은 것으로 여겨진다.
(4) 유다가 이스라엘의 제재를 받지 않고 앗수르와 독자적인 외교관계를 맺은 때는 아하스왕 때 부터 였으며 아하스는 이스라엘과 반대되는 정책인 친앗수르 정책을 취하였다. 이 때 이스라엘왕 베가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유다의 왕으로 두로의 왕자 "타벨의 아들"(사 7:6)을 세울려고 하였다. 베가의 행동은 반란을 일으킨 봉신 아하스를 응징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아하스는 때마침 몰려오는 앗수르의 티글랏빌레셀 군대 덕택으로 독립을 획득하게 된 것이었다.
이상과 같은 근거에서 유다가 이스라엘의 봉신으로 거의 1세기 반을 지내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중간에 여호람 시대는 한 왕이 남북을 통치했으며 아달리야는 유다의 독자적 노선을 유지해 나갔으므로 이 시기는 제외해야 할 것이다.
예후가 오므리 왕조를 뒤엎고 사마리아에서 왕권을 장악했을 때 그는 이스라엘의 왕족 뿐만 아니라 유다의 왕족들도 학살하였다. 예후의 시각으로 볼 때 이스라엘 왕실과 유다의 왕실은 하나의 집단이었다. 왜냐하면 여호람이 남과 북을 동시에 통치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달리야는 유다의 왕권을 장악하려 예후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유다의 다윗왕조는 오므리 왕조 때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에후왕조에 봉신으로 되돌아갔다. 유다의 아마샤(주전 802-786[774]년)는 이스라엘로 부터의 독립을 시도하였으나 이스라엘의 요아스에 의해 좌절되었고 결국 살해당하였다. 이스라엘은 예후 왕조때 계속 친앗수르 정책을 고수하였으며 유다는 이스라엘의 봉신인 관계로 역시 친앗수르 정책을 취하며 지내었다.
그러나 유다는 아하스 왕(743-728) 때 이스라엘 왕 베가에 대해 반기를 들어 독립을 쟁취하였다. 이스라엘의 브가히야(736-735)가 베가의 쿠테타에 밀려 살해 당하고 베가(734-735)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반앗수르 정책을 취하자 유다의 아하스는 이사야의 격려를 받으며 이스라엘에 대해 독립을 선언하고 친앗수르 정책을 고수하였던 것이다.

C. 남북간의 교류
오므리 왕조와 다윗왕조가 정략결혼을 하면서 남북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분쟁과 마찰을 약화시킨 것은 표면적으로 남북통일을 위한 노력으로 보여지지만 이러한 현상은 오므리 왕조가 강력한 나라로 부상하였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었다. 다시 말하면 남북의 분쟁 감소와 평화관계 정착이라는 것은 오므리 왕조의 세력 확장의 결과로 얻어진 부산물이었다는 것이다.
오므리는 그 당시 경제 대국 이었던 두로와 시돈과 정략결혼을 통해 우호적인 관게를 수립하였고(왕상 16:31) 모압을 정복하였으며 에돔에는 섭정 왕(deputy)을 두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지중해로부터 홍해의 아카바만을 연결할 수 있는 중요한 국제 무역로를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중간에 있는 유다가 이스라엘의 의도대로 움직여 준다면 국제 무역로에 있어서 더 바랄것 없는 상황을 만들 수 있었다. 따라서 오므리 왕조는 유다와 정략결혼을 하면서 서로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실질적으로 이스라엘의 강한 힘으로 유다를 봉신의 위치로 떨어뜨리면서 유다를 이끌어 갔던 것이다. 약세인 유다는 강력한 이스라엘에게 항거할 처지도 되어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스라엘의 '힘의 우산'아래서 어느정도 경제적 이득도 취할수 있었기 때문에 크게 반발할 처지도 아니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서로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이스라엘의 우세한 힘 때문에 사실은 남북은 하나의 사회로 1세기 반 동안 지낼 수 있었다. 서로 자유롭게 왕래하였으며 엘리야, 엘리사, 아모스, 호세아 ,미가 등 예언자들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동시에 바라보면서 예언을 하였고 그들의 예언활동도 남북을 왕래하면서 할 수 있었다. 정치, 군사, 경제, 종교 등 각분야에 걸쳐 남북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기에 오랫동안 분열되어 있었으면서도 하나의 민족 하나의 공동체라는 개념을 지속시킬 수 있었다.
분열왕국 시대에 이루어졌던 남북교류를 줌더 구체적으로 각 분야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정치 및 군사적 교류
(1) 오므리왕조의 공주 아달리야(오므리/아합의 딸)와 다윗왕조의 왕자 여호람이 결혼함으로써 이스라엘과 유다의 우호관계를 더욱 공고해졌다.
(2) 853년 앗수르의 살만에셀이 침공해 왔을 때 카르카르 전투에 참전한 연합군의 명단에 유다가 없었던 것은 이스라엘의 깃발아래 유다가 참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ARAB I $ 611 ; ANET 278-79).
(3) 살만에셀은 또다시 848/847년에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 때 연합군을 이끈 주력 부대는 다메섹의 하닷에제르와 하맛의 이르훌레니 였으며(ARAB I $$ 568, 654 ; ANET 280) 이스라엘과 유다의 군대는 여호람이 지휘하였다. 여호람은 왕자인 아하시야와 함께 이스라엘과 유다의 군대를 지휘하여 시리아 왕 하사엘의 군대를 막아 내기에 힘겨운 상태였으며 여호람은 라못 길르앗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였다(왕하 8:28). 그리고 에후가 반란을 일으켰을때 여호람과 아하시야는 함께 살해 당하였고 유다의 왕자까지도 살해 당하였다(왕항 9:27-28 ; 10:12-14).
(4) 상처입은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853-852)를 위해 사마리아에 가서 아하시야를 돕던 유다의 왕자 여호람이 부친인 유다왕 여호사밧(877-853)과 함께 이스라엘-유다의 연합군을 이끌고 출전하여 반란을 일으킨 모압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왕하 3:4-9a ; 26-27)
(5) 유다왕 여호람(852-841)이 동시에 이스라엘 왕(810-840)으로 양국을 동시에 통치할 수 있었던 기간은 통일왕국에 못지 않은 남북의 정치적 군사적 화합을 이룰 수 있었던 시기였다.
(6) 유다왕 아마샤가 에돔을 공격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용사 10만명을 은 100달란트를 지불하고 용병으로 고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유다왕의 대접에 불만을 품고 유다 성읍들을 약탈하였다(대하 25:5-13). 용병을 제공해준 이스라엘은 분명 유다와 우호적인 관계였으며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유다보다 훨씬 강력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후 유다왕 아마샤가 이스라엘왕 요아스에게 유다의 독립과 주권을 인정하여 달라는 요청이 있었을 때 요아스는 봉신인 아마샤를 벧세메스에서 응징하여 아마샤를 체포하고 예루살렘의 성벽의 일부를 파괴하고 포로 및 보물을 가져갔다(왕하 14:8-14).
(7) 유다와 이스라엘이 한 지휘관 아래서 함께 사마리아(이스르엘)로 진격하는 사건이 호세아에 묘사되어 있다.
"유다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한 두목을
세우고 그 땅에서 올라올 것이라. 참으로 이스르엘의 날
이 클 것이라"(호 2:2 [개역, 호 1:11])
이 부분은 호세아의 에언이 아니며 편집자의 작품이라 보통 이해되고 있지만 이 부분이 무슨 사건을 가르키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모호한 상태이다. 그러나 볼프(H. W. Wolff)도 주장하였듯이 이 부분에서 사용된 언어는 예언자 호세아 자신의 언어가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시대적 배경도 티글랏빌레셀 3세의 시리아-팔레스틴 원정(734-732)과 관련시켜 찾아 보아야 할 것이다. 베가에 대항하여 쿠테타를 일으킨 호세아(왕)는 예후 사건과 비슷하게 티글랏빌레셀로 부터 이스라엘 왕으로 임명을 받아 베가를 축출하러 사마리아로 진격하였다 이 때 친앗수르 정책을 취하였고 베가의 시달림을 받아온 아하스도 호세아에게 원군을 보내었을 가능성이 있다. 남북의 군사적 교류가 빈번했던 점을 감안할 때 호세아를 지휘관으로 하는 남북합동 군사작전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8) 요약 - 분열왕국 시대의 이스라엘과 유다는 분열된 체 정치적 군사적 교류가 빈번하였으며 이 교류는 군사력에 있어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남북간에 군사적 충돌도 있었지만 초기의 약 40년간은 국경부근의 소규모 충돌이었으며 그 후 일어난 충돌 즉 벧세메스 전투와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을 남북의 정면대결이라기 보다 반란을 일으킨 봉신 유다를 응징하는 이스라엘의 응징 사건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유다는 남북 분열의 기간 중 대부분을 정치적 군사적으로 함께 행동했으며 서로 교류하며 지나온 것이다.

2. 경제적 교류
분열왕국 초기에는 이스라엘이 남북관계를 원치 않았으며 막으려고 한 때가 있었다.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라마에 요새를 지어 "사람이 유다 왕 아사에게 왕래하지 못하게"(왕상 15:17) 하도록 하였으나 아사의 계략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유다 왕에게 왕래하는 사람들은 주로 무역 상인들로 여겨지는데, 무역상인들의 에루살렘 출입을 봉쇄 한다는 것은 유다를 경제적으로 봉쇄하여 약화시키려는 바아사의 계획을 말한다. 아사가 시리아의 군대를 끌어 들이면서 까지 남북의 무역로를 열어 놓을려고 한 것을 보면 유다의 경제가 얼마만큼 남북교류에 의존하고 있었고 국제무역에 의존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경제 교류는 단순한 남북교류가 아니라 지중해와 아카바만 (홍해)을 연결하는 국제 무역의 흐름과 관련시켜 이해해야 한다. 지중해의 해상무역 뿐만 아니라 육상무역까지 광범위하게 그 영향력을 행사한 경제대국 두로는 지중해와 아카바만을 잇는 무역로를 황금노선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이 무역로는 이스라엘, 유다, 에돔 등을 통과하고 있었다. 또한 이스라엘과 유다는 이 국제 무역로를 잘 이용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국가의 경제가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러한 위치적 잇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경제 부흥을 이룩한 왕조는 오므리 왕조였다. 오므리 왕조는 두로뿐 만 아니라 유다와도 정략 결혼을 통해 우호적 관계를 수립하였고 에돔에는 섭정 왕(Deputy)을 세워 아카바 만까지 통행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하였다(왕상 22:47) 다른 말로 바꾼다면 이스라엘이 이 무역로를 독점하였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국력이 기울어 질 때 이 무역로 중에 에돔을 통과하는 부분이 에돔인들에 의해 방해를 받게 되었는데 그 때는 에돔에 인접해있는 유다가 나서서 에돔을 통제할 때도 있었다. 그 실례로 유다 왕 여호사밧의 홍해 진출 사건을 들 수 있다. 성서(왕상 22:47-49)에는 에시온게벨에서 선박을 건조하고 해상무역을 시도한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 아하사야가 해상무역에 참여하려는 제의를 거절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홍해로 진출하는 무역로는 유다가 개척했다기 보다 오므리 왕조 때 이스라엘이 이미 개척 했었으며 여호사밧도 오므리 왕조의 봉신으로 이 국제무역에 동참해 있었다. 다만 이스라엘의 국력이 쇠퇴함에 따라 유다가 보다 더 적극적으로 홍해의 해상무역에 개입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호사밧이 아하시야의 제의를 거절한 것은 이스라엘을 적대시 하거나 이스라엘에 반기를 드는 표시로 보기 보다 이스라엘과는 전통적 우호관계를 유지하되 국제무역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을 더 많이 확보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행동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행동은 이스라엘의 비위를 거스릴 수도 있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의 아하시야는 부상을 입었고 국력이 급속히 쇠퇴하는 시점이었으므로 유다가 아카바 만 근방의 무역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막을 처지는 아니었고 오히려 이스라엘의 부담을 경감시켜 주는 면도 있었음을 생각할 수 있다.
여호사밧 뿐만 아니라 웃시야(아자리야)도 엘랏을 건축하여 홍해 진출을 시도 하였는데(왕하 14:22) 이 때도 유다는 이스라엘의 봉신의 위치에 있었고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의 위세에 눌려 지낼 때였다. 지중해-홍해를 연결하는 국제 무역로 뿐만 아니라 해안도로(via maris)와 왕의 대로(King's highway) 및 내륙의 산간 도로 등으로 연결되는 메소포타미아-시리아-이집트의 국제 무역로에도 이스라엘과 유다가 참여하고 있었으며 이 경우 이스라엘의 역할이 유다보다 훨씬 우세하였다.
남북의 경제교류는 국제무역을 통해서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군비지출과 군사행동을 함께하고 앗수르와 같은 강대국에 조공을 바칠 막대한 금액 거출에 동참함으로써도 이루어졌다 (예; 므나헴의 조공).

3. 종교적 교류
분열왕국 초기에 여로보암은 벧엘에 성전을 건립하여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행렬을 벧엘로 유도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바아사도 라마에 요새를 건축하여 무역상인들 뿐만 아니라 짐작컨데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 행렬을 막고자 하였을 것이다(왕상 12:25-29). 그러나 남북간의 국경선은 명확히 표시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국경선을 철저히 감시하는 것도 아닌 상황 속에서 여태껏 지속되어 왔던 남북의 종교적 교류가 단절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왕상 13:1-32에는 유다에 사는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로 올라가 예언할 때 벧엘의 단이 갈라지고 단을 향해 ?던 여로보암의 손이 말랐던 일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 '하나님의 사람'이 홀로 유다로 돌아오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적어도 이 사건 가운데 한가지 확실한 것은 종교인들의 남북간 왕래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사실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예언자 엘리야도 유다의 브엘세바와 호렙을 거침없이 다니고 있었으며(왕상 19:3,8), 엘리사도 모압을 공격하는 남북연합군에 예언자로 참여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왕하 3:11-20). 주전 8세기의 예언자들 중에, 아모스는 유다 지역의 드고아 출신인데 벧엘에 가서 예언하는 모습을 불 수 있으며 호세아, 미가, 이사야 등 여로 예언자들이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하여는 조국과 외국이라는 구별을 하지 않고 하나의 백성인양 예언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IV.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
북왕국 이스라엘은 강대국 앗수르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주전 722년 마침내 멸망하여 앗수르의 영토로 편입되어 버렸다. 마지막 왕 호세아는 원래 친앗수르 정책을 취하면서 티글랏빌레셀3세로 부터 사마리아의 왕으로 임명을 받은 인물이었다.
"...나(티그랏빌레셀)는 호세아를 그들위에 왕으로 세웠다..."
(ND 4301+4305)
그러나 호세아는 주전 729년 부터 시리아-팔레스틴 거의 전지역에서 일어난 반앗수르 물결에 휩쓸려 앗수르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이 때 유다는 친앗수르 정책을 고수하였으므로 남북간의 관계는 악화될 수 밖에 없었다. 사마리아가 끝까지 앗수르에게 저항하는 가운데 북왕국의 피난민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으며 예루살렘의 인구는 급증하였다.
주전 725년 호세아는 살만에셀에게 체포되었지만 주전 724년 부터 사마리아에서 또다시 반란이 일어나 3년 동안이나 왕이 없는 상태로 앗수르에게 저항하였다. 사마리아의 반란은 주전 720년 까지 포위 당한채 앗수르에게 항복하지 않은 두로의 항거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마리아는 주전 722년 살만에셀에게 함락 당하였다. 그리고 살만에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앗수르 왕위에 오른 사르곤은 이스라엘 주민 27,280명을 추방하였고 그대신 다른 민족들을 이스라엘에 이주시켰다.
이로써 남과 북으로 분열된 고대 이스라엘은 통일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분단된 채 북왕국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영토를 앗수르에게 합병당하였다고 하여 북왕국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남왕국 유다는 기회있을 때 마다 북쪽 지역의 회복을 시도하였으며 히스기야왕은 왕자의 이름을 므낫세로 지어 잃어버린 므낫세지파 등을 상기시키기 까지 하였다.

V. 결론
이제까지 이 논문에서는 고대 이스라엘의 남북관게를 분열왕국 시대를 중심으로 하여 분열의 원인과 분열된 남북왕국이 어떻게 상호관계를 이끌어 왔는 가에 대해 살펴 보았다. 왕국이 남북으로 분열된 것은 르호보암의 판단 착오에서 빚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를 통해 형성된 요인들, 즉 지역별 요인(이스라엘과 유다의 구분), 정치적 요인(예루살렘과 지파의 구분), 종교적 요인, 경제적 요인(솔로몬의 경제정책 실패), 국제적 요인 등이 함께 작용하여 솔로몬이 죽고 르호보암에게 왕위계승을 할 때 폭발한 것이었다
남북분열이라는 사건은 유다 편에서 볼때는 반란 사건이었지만 이스라엘 편에서 볼 때는 사울왕국 까지 이어온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회복한 사건이었다. 유다라는 명칭 보다는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이 남북을 통치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어 왔다는 사실에서도 짐작 하듯이 남북관계를 유다 편에서 보기 보다는 유다와 이스라엘을 동등한 위치에 놓고 보아야 할 것이고 오히려 이스라엘 편의 시각을 중시해야 할 것이다.
분열왕국 시대동안 정치적으로 남북이 분열되었다 하더라도 두 왕국은 서로 장벽을 쌓고 외면한 것이 아니라 분열의 요인을 안은채 정치, 군사, 경제, 종교 등 각 분야에 결쳐 서로 교류하였고 또 지정학적 위치가 서로 교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상대적으로 국력이 우세한 이스라엘에게 유다가 봉신으로 있었던 기간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들 관계가 엄격한 주종 관계라기 보다 힘의 차이로 인한 차별적 협력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
남북관계가 사울-다윗-솔로몬 시대는 통일왕국이며 화해의 시대, 그리고 르호보암 이후에는 분열왕국이며 적대적 시대라는 단순하고도 도식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연구를 통해서 살펴 볼 수 있었다. 분열왕국 이전에도 분열의 요인은 있었고 분열왕국 시대에도 남북은 전반적으로 서로 교류하면서 지나왔다. 따라서 르호보암 이후를 표면적 분열시대라 본다면 르호보암 이전의 시대는 잠정적 분열시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시대에 걸쳐 남북관계가 크게 손상받지 않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전반적이고 지속적인 남북교류에 있었다. 예언자들이 남북을 왕래하면서 남북을 동시에 바라보고 남북의 백성을 향해 예언하였던 것은 야웨 종교가 남북의 공통 종교였다는 점도 있었지만 각 분야별로 남북교류에 막힘이 없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남북의 교류 덕택으로 남북은 분열되어 있으면서도 서로의 공통점을 확인하며 지낼 수 있었고 남북이 함께하는 공동체 의식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심지어 북왕국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뒤에도 민족의 공동체 의식은 사라지지 않았고 새롭게 민족화합이라는 꿈을 성숙시켜 나아갔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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