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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주시는 하나님/성도의 생활

[스크랩] 나의 영성지수(Soul Quotient) 는 몇점쯤 될까?

나의 영성지수(Soul Quotient) 는 몇점쯤 될까?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는 "표면의식에서는 모른다고 생각되는 것도 인간의 깊은 잠재의식에서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인간에게는 본질적으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구분할 줄 아는 것은 물론, 진실과 거짓까지도 구분할 줄 아는 능력이 있다. 더 나아가 생명을 더욱 생명답게 하는 것과 생명을 낭비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인간 개개인의 마음은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에 연결된 컴퓨터 터미널과도 같다. 이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는 인류의 의식 세계 자체이다. 우리 자신의 의식은 단지 모든 인류의 공통된 의식에 뿌리를 둔 데이터베이스의 개인적인 표현일 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부정확한 통계, 정치와 언론의 압력, 개인의 편견과 기득권 등에 의해 좌우되어 왔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내린 중요한 결정은 항상 실패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이미 안고 있다.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어 나갈 뚜렷한 기준이 없으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힘 즉, 법률, 조세, 전쟁, 법칙, 교리에만 의존하면서 살아오면서 비싼 대가를 치러 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잠재력을 활용할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살아 온 것이다.

우리들은 이성에 따라 행동했다고 하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감정과 이성의 능력은 절대적이 아니다. '진실'이란 어느 특별한 관점의 견지에서 볼 때만 진실일 뿐이다.

 

 


우주 안의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프렉탈 개념으로 연결되어 있다. 의식의 에너지 장의 관점에서 보면 주체와 객체는 하나인 것이며 같은 것이다. 주체와 객체를 동일시함으로써 우리는 시간 개념의 속박성을 초월할 수 있다. 시간의 제약이야말로 삶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 커다란 장애가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기억할 수 없는 먼 옛적부터 우리는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인간 행동에서 어떤 일관성을 찾으려고 노력해 왔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그런 노력은 수많은 학설을 낳은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이해하려는' 노력이란 선형적인 것, 다시 말하자면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인생의 과정을 보면 유기체적이고 비선형적이다.

우리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의식의 무한한 차원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의 의식 안에는, 타고난 '인간성'을 발휘하도록 해주는 엄청나게 강력한 카오스 끌개 장이 존재한다. 그 거대한 끌개 장 안에는 상대적으로 연약한 에너지와 강한 힘의 장도 존재한다. 이러한 에너지 장이 번갈아 가며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고 있다. 끌개 장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상호 작용이 인류의 역사와 문명의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1. SQ수준 20 : 수치심


수치심의 수준은 위험할 정도로 죽음과 가까운 상태로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지만 자살을 할 수도 없으니 마지못해 살아간다는 식의 자세이다. 이 수준의 공통점은 죽음이라는 것을 피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체면을 잃었을 때'의 아픔이나, 모욕을 당하거나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을 때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수치심'의 단계에서는, 자기 자신이 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슬그머니 도망친다. 원시 사회에서는 수치스런 죄를 저지른 자를 추방했으며, 추방이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성폭행과 같은 어린 시절의 경험은 '수치심'을 초래하므로 이를 치유하지 않으면 그 피해가 평생 계속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수치심은 신경증을 초래한다. 또한 정서적-심리적 건강에 파괴적으로 작용하여 열등감에 사로잡혀 지내게 되며, 이로 인해 신체적 질병으로까지 발전하기 쉽다. '수치심'이 성격의 바탕이 되면 수줍음을 잘 타고 내성적이며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수치심'은 잔인성의 도구로 쓰이며, 여기에 희생된 피해자는 자기 자신들 또한 잔인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수치심'에 찬 어린이들은 동물을 학대하고, 자기들끼리도 잔인하게 굴곤 한다. 의식 수준이 단지 20대에 머무는 사람들의 행동은 아주 위험하다. 그들은 비판적이거나 피해망상적인 환상을 보기 쉽고, 정신병 환자가 되거나 엽기적인 범죄를 저지르기 쉽다.
'수치심'이 바탕이 되는 성격의 사람들은 융통성 없는 완벽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수치심을 보상하려고 하며, 무엇에 사로잡힌 것같이 자기 자신을 몰아간다. 수치심에 사로잡힌 과격한 도덕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의 무의식적인 수치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영하여 그들을 공격함으로써 자신들을 정당화시킨다.

 


2. SQ수준 30 : 죄의식


처벌과 농간의 수단으로 우리 사회에서 자주 쓰이는 '죄의식'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자기 연민이나 자기 학대, 피해의식에서 생기는 여러 증상들이 바로 그것이다. 무의식적인 죄의식은 정신 이상에 원인이 있는 신체의 질병을 초래하고, 사고를 저지르기 쉽고, 자살을 감행하기도 한다. 전 생애를 바쳐서 죄의식과 싸우는 사람들도 많고, 죄의식을 전면 부인함으로써 필사적인 도피를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역시 죄의식의 소산이다.


'죄의식'에 가득 찬 사람들은 종교단체의 선동자들에 의해 강요당하고 조종당하기 쉽다. '죄와 구원'을 파는 파렴치한들은 응징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죄의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덮어씌우는 경향이 짙다.


자학 증상이 심해지면 공공연한 동물 학살로 잔인성을 드러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죄의식은 분노를 일으키고, 살상은 이러한 분노의 표현이 된다. 사형이란, 죽이는 행위가 죄의식에 물든 사람들을 어떻게 만족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용서에 인색한 미국 사회는 그 죄인들을 언론으로 실컷 두들긴 후 형벌을 결정한다. 하지만 형벌 때문에 범죄가 억제되었다는 사례는 지금껏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3. SQ수준 50 : 무기력


이 수준은 빈곤, 절망, 자포자기로 특징지어진다. 현재와 미래가 황폐해 보이고, 비애가 인생의 주제로 보인다. 이 단계는 아무 희망이 없는 상태로서, 여기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도움이 필요하나 그 도움조차도 그들에게는 쓸모없게 느껴질 뿐이다.

 

보살펴주는 사람에 의해 외부의 에너지가 조달되지 않는 한, 무기력에 의한 죽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살려는 의욕 없이 허공을 응시하고, 자극에 무감각하며, 시선은 더 이상 사물을 좇지 않고, 주어진 음식을 삼킬만한 에너지가 없는 상태에 이른다.


집도 없이 헤매는 사람들과 사회의 낙오자가 이 수준에 속한다. 나이 든 노인들의 체념 상태이기도 하고, 또 만성 질병이나 심한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의 수준이기도 하다. 무기력한 사람들은 의지해야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들을 무거운 짐처럼 느끼기가 쉽다.


사회에서는 자원의 낭비로 보이는 이 수준의 사람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만한 동기를 갖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조차 갖기 힘든 희망의 포기 상태이다.


4. SQ수준 75 : 슬픔


이 상태는 슬픔, 상실, 낙담의 수준이다.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경험을 하지만 이 수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되는 후회와 우울함으로 인생을 살아간다. 비탄, 공허, 그리고 과거에 대한 후회가 이 수준을 지배한다.


어렸을 때의 커다란 상실은 슬픔과 비탄을 삶의 필요악인 것처럼 받아들이기 쉽게 만든다. 비탄에 빠진 사람들은 만사를 슬픔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어린이들이 자라는 것도 슬프고, 세상 만사 돌아가는 것도 슬프고, 삶 자체가 슬프다. 바라보는 모든 것이 슬픔으로 채색된다.

 

잃은 것은 영원히 채워질 수 없으며 그 기억은 영원히 사라질 수 없다는 생각이야말로 상실이 가져다주는 가장 큰 폐해이다. 그들은 하나를 잃어버렸으면서도 전부를 잃어버린 양 일반화시키고, 그리하여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이 사랑 자체의 상실이 된다. 그러한 감정적인 상실은 심각한 우울증이나 죽음을 불러오기도 한다.


'슬픔'은 인생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도 있지만 '무기력'의 상태보다는 더 많은 에너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충격받은 무기력증 환자가 울기 시작하면 그것은 회복의 조짐이다. 또 일단 울기 시작하면 무기력증에서 벗어나 음식을 먹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5. SQ수준 100 : 두려움


100의 수준에는 좀더 활발한 에너지가 보인다. 위험에 대한 두려움은 건강한 반응인 것이다. 세상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고, 그런 두려움이 인간을 활동하게 하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적에 대한 두려움, 늙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거절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사회적인 다수의 두려움은 인간 행동의 근본적인 동기가 된다.


두려움의 확산은 인간의 상상력과 마찬가지로 끝이 없다. 일단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세상이 온통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두려움은 강박관념이 되어 여러 가지 형태로 번져간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끝나는 데 대한 두려움은 질투를 유발하고, 만성 스트레스를 초래한다. 두려움은 편집증이나 신경증적인 상태로 진전될 수 있고, 전염성이 있어서 사회 전체를 지배할 수도 있다.


두려움은 개인의 성장을 제한하고 억압 상태를 초래한다. 두려움의 수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뚫고 일어설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거기에 짓눌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그보다 높은 수준으로 갈 수 없다. 그러므로 두려움의 수준에 사는 사람들은 이를 극복한 것으로 보이는 강력한 지도자를 희망하며, 그 그림자가 자신들을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주기를 기대한다.


6. SQ수준 125 : 욕망


욕망의 수준에는 더 많은 에너지가 발견된다. 경제적인 욕구를 위시한 욕망이야말로 인간 행위의 광범위한 동기로서 작용한다. 광고업자들은 본능적인 욕망을 이용하여 육감적인 유혹을 한다. 목표 달성과 보상을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고 욕망은 우리를 다그친다. 금전, 명예, 권력에 대한 욕망은 '두려움'의 수준을 벗어난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다.


욕망은 또한 집착의 수준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에서 때로는 욕망이 인생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 동기가 어디에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끊임없이 요구를 함으로써 사랑과 관심을 오히려 잃어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성적인 매혹에 대한 욕구는 화장과 패션 산업의 번영을 불러왔다.


욕망이란 축적이나 탐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욕망이란 언제나 계속되는 에너지 장이기 때문에 만족이란 있을 수 없으며, 하나를 채우고 나면 다른 무엇인가를 또 채우고 싶어진다. 백만장자들은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욕망의 수준이 무기력이나 슬픔보다는 훨씬 높은 수준인 것은 분명하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원하는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다.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사람은 성취로 가는 출발선 위에 설 수 있다.

 



7. SQ수준 150 : 분노


분노는 살인이나 전쟁으로 발전할 수도 있지만, 에너지 수준 자체는 죽음의 주위에서 맴도는 단계에서 휠씬 벗어난 상태이다. 분노는 파괴적일 수도 있고 건설적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무기력이나 슬픔에서 벗어나 두려움을 극복하는 상태에 이르면, 이제 그들은 무엇인가를 원하기 시작한다. 욕망은 좌절감을 초래하고 좌절감은 분노를 가져온다. 그런 이유로, 분노는 억압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분기점이 될 수도 있다. 사회의 부조리와 불평등, 사회에 대한 희생은 분노를 유발하고, 그것이 사회 구조에 대변혁을 가져온 커다란 사회 운동으로 발전된 경우가 적지 않다.


분노는 좌절된 욕구에서 생기므로 그 아래 수준인 욕망의 에너지 장에 기초를 두고 있다. 좌절은 지나친 욕망에서 온다. 분노는 증오로 전환되기 쉽고, 증오는 한 개인의 삶을 부식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8. SQ수준 175 : 자존심


175로 측정되는 자존심은 미국 해병대를 통솔할 만한 충분한 에너지 수준이다. 이것이 미국 국민이 대부분 동경하는 수준이다. 이 수준에 이른 사람들은 낮은 에너지 장에 있는 사람들에 비해 휠씬 긍정적이다. 자존심의 향상은 낮은 의식세계에서 그들이 경험한 모든 고통의 진통제가 되어 준다. 자존심은 삶의 행진을 계속할 수 있는 버팀목 구실을 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자존심의 팽만은 추락하기 일보직전'이라는 점이다. 자존심이 방어적이고 약점 투성이인 것은, 자존심이란 외부 조건에 의존해서 생기는 것이며 또 그것 없이는 언제라도 낮은 수준의 의식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부풀어 오른 자존심은 비난에 약하다. 자존심은 아주 쉽게 수치심의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여전히 약한 의식 수준이다.


자존심은 분열과 파벌주의를 초래하며, 그래서 큰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람들은 자존심을 위해 거꺼이 희생을 치러 왔으며, 군대는 지금도 애국심이라는 자존심 아래 서로를 죽이는 짓을 멈추지 않고 있다. 종교 전쟁, 정치적인 테러리즘,. 중동과 중유렵의 광적이고 무서운 역사는 자존심의 대가이고, 사회 전체가 치뤄야 했던 벌이었다.


자존심의 약점은 오만傲慢과 부정不定이다. 이러한 특성상 자존심에 가득 찬 사람들은 의식의 성장을 스스로 차단한다. 자존심이 있는 한 집착에서 해방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존심에 가득 찬 사람들은 감정적인 문제임에도 그것을 부인하거나, 자신의 성품이 갖고 있는 약점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정하는 문제의 근원에는 자존심이 자리 잡고 있다. 자존심은 진실한 성장과 명예를 안겨 줄 수 있는 참된 내면의 힘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인 것이다.

 

 


9. SQ수준 200 : 용기


200의 수준에서는 내면의 참된 잠재력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 수준에서 비로소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힘을 갖기 시작하며, 이 단계야말로 탐구, 성취, 인내, 결단의 영역이다. 용기의 수준에 이르게 되면 인생이 흥미롭고, 도전적이고, 자극적인 것이 된다.


용기는 우리에게 기꺼이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게 도와주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긍정적으로 전환시켜 준다. 이 수준에 이르러 우리는 비로소 인생이 우리에게 주는 기회를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이 수준에 이르면 두려움이나 성격의 결함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고, 두려움이나 결점에도 불구하고 성장할 수 있으며, 걱정하는 일이 없지는 않지만 낮은 의식 수준에서와는 달리 노력 자체를 마비시키지는 않는다. 200 이하의 사람들을 굴복시키고 마는 장애물을 만난다 할지라도 잠재력을 갖기 시작한 이 수준의 사람들은 이를 자극제로서 활용한다.


이 수준의 사람들은 자기가 흡수하여 소모하는 에너지만큼 세상에 그 에너지를 되돌려 보낸다. 반면, 낮은 수준의 사람들은 사회로 환원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하여 에너지를 흡수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수준의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성취함으로써 또 다른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힘을 얻고, 더욱 더 용기백백하게 된다. 바로 이 수준에서 비로소 생산성이 생기기 시작한다.

 



10. SQ수준 250 : 중용


이 수준이 매우 긍정적인 에너지인 것은, 낮은 수준의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편파적인 관점으로부터 해방을 뜻하기 때문이다. 250이하의 수준에서는 사물을 이원적이고 융통성 없는 관점으로 바라보며, 이 때문에 흑과 백을 분명히 가를 수 없는 복잡다단한 세상사를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편파적인 태도는 극단적인 대립을 초래하고, 대립은 분열과 반대를 낳는다.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반대와 장애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중용의 태도는 유연성과 포용력,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파악 능력을 갖게 해준다.

 

중용의 자세를 취함으로써 우리는 결과를 비교적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또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패배하거나 좌절하거나 놀라는 일도 없게 된다.


중용의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편안함을 느끼고,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자기 신뢰를 잃지 않는다. 함께 지내기가 쉽고, 친하게 지내더라도 전혀 위험하지 않다.

 

그들은 대립이나 경쟁심리, 죄책감 등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온화하고 근본적으로 정서가 안정되어 있다. 그들의 태도는 비난적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싶다는 충동도 느끼지 않는다. 중용에 다다른 사람들은 자유를 아주 중시하므로, 그들을 규제하려는 일은 아주 어렵다.

11. SQ수준 310 : 자발성


이 수준의 사람들은 성장이 빠르고, 마치 향상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럼 보인다. '자발성'이란 인생에 대한 보이지 않는 저항을 극복하고 기꺼이 참여하는 마음이다. 200 이하의 사람들은 마음이 답답하게 닫혀 있지만, 310의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은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이 수준에 있는 사람들은 실직을 해도 큰 걱정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하고, 일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들은 밑바닥 일이나 손님을 접대하는 일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또한 내면의 문제에 관심이 많으며, 배움에 장벽을 두지 않는다.

 

곤경으로부터의 회복 능력, 시련을 통한 배움을 통해 이들은 자기 스스로를 바로 세우는 수준으로 향상한다. 그들은 자존심을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결점을 기꺼이 바라보려고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기꺼이 배우려고 한다. 이들은 아주 중요한 학생들이며 또 쉽게 가르칠 수 있어서, 사회의 중요한 자원이 된다.

 

 

 


12. SQ수준 350 : 포용


이 수준에 이르면 우리 자신이 인생의 모든 경험을 창조하고 원천이 된다는 이해를 하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책임감이야말로 이 단계의 특징으로, 인생의 여러 외적인 힘에 대응하면서도 조화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200 이하의 사람들은 무기력하며, 자신들을 인생이란 폭군의 피해자로 바라보기 쉽다. 이러한 생각은 자신의 행복이나 문제의 근원이 ''에 있다고 믿는 데서 기인한다. 그러나 이 수준에 이르면 행복의 근원이 자신 속에 존재한다고 깨달음으로써 커다란 도약이 이루어진다.

 

그들은 '외부'의 그 어떤 것도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 또 사랑이란 다른 사람들에게서 오거나 그들에 의해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게 된다.


포용의 수준에 있는 사람들은 옳고 그름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문제 해결과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에 정열을 쏟는다. 어려운 과제나 일을 만나더라도 괴로워하거나 곤혹스러워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눈앞의 목표보다는 장기적인 목표가 항상 중요하고 자기 훈련과 일의 숙달이 무엇보다 우위에 있다.


포용의 수준에 이르면 대립되는 의견이나 갈등에도 극단주의를 택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똑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고 보고, 평등의 가치를 중요시한다. 저급한 수준의 사람들이 융통성 없이 경직된 사고에 사로잡히기 쉬운 반면, 이 수준의 사람들은 문제 해결 과정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형태의 대답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럼으로써 차별과 편협을 초월한다. 평등이란 다양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에 눈뜸으로써, 거부하기보다는 포용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다.


13. SQ수준 400 : 이성


이 수준에 이르면 이보다 하위 수준의 감정 단계를 벗어남으로써 지성과 이성이 삶의 전면에 떠오르게 된다. 이성의 단계에서는 광범위하고 복잡한 자료들을 처리할 능력을 갖고 있어 빠르고 정확한 판단력을 보여준다.

 

관계의 미묘함, 점진적인 변화와 분명한 차이점이 있는 것에 대한 이해력이 높아지고 추상적인 개념과 상징 체계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과학, 의학, 그리고 개념화에 대한 이해 수준이 점차 증가되는 것도 이 수준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교육과 지식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추구되고 한다. 이해와 정보가 성취의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된다는 점이, 400 수준의 가장 뚜렷한 특성이다.


이 수준의 결점은 상징과 그 상징이 뜻하는 바를 뚜렷하게 구별하지 못하고, 또 세상사에 대한 객관적-주관적인 이원론 때문에 사물의 인과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다.

 

이 수준에서는 나무에 가려 숲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쉽고, 개념과 이론의 탐닉에 의해 본질의 중요성을 찾지 못하고 지식 자체로 그치고 마는 경우가 흔하다. 이성의 수준은 본질이나 복잡한 문제의 핵심에 대한 통찰력을 갖지 못함으로써 한계를 갖게 된다.


이성만으로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성은 광범위한 지식과 문헌을 생산해 내지만, 방대한 자료와 결론 사이의 모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

 

모든 철학 이론은 저마다 그럴듯하게 들린다. 이지적인 방법론이 지배하는 현 사회에서 이성이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역설적으로 더 높은 의식세계로 나아가는 데 커다란 장애물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 수준을 초월한다는 것은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14. SQ수준 500 : 사랑


언론이나 방송에서 묘사하는 사랑은 여기서 말하는 수준의 사랑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이란 육체적 매력, 소유욕, 통제, 탐닉, 에로티시즘, 신선함 등의 격렬한 감정과 결합된 형태를 띤다.

 

그러한 사랑은 속절없이 무너지기 쉽고, 주어진 조건에 따라 파도치곤 한다. 사랑에 좌절하게 되면 그동안 숨겨졌던 노여움과 의존성이 발가벗겨져서 그 정체를 드러낸다. 사랑이 미움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같이 되어 있지만, 이러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지독한 감상주의의 소산인 것이다. 자존심에서 비롯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며, 그런 관계 속에서는 사랑이 머무르지 않는다.


500의 에너지 수준은 조건 없고 변함없고 영원한 사랑에의 눈뜸으로 특정지을 수 있다. 사랑이란 외부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내부에서 그 근원을 찾기에 이 수준에서의 사랑은 오르내림의 파동이 보이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것이 존재 자체가 된다. 사랑은 용서와 보살핌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사랑은 지적인 것도 아니고, 표면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고양시켜 주고, 그 동기의 순수성으로 인해 크나큰 성취감을 주기도 한다.


이 수준에 이르면 사물의 본질을 분별할 수 있는 역량이 증대하여 문제의 핵심을 꿰뚫을 수 있게 된다. 이성의 수준을 넘어서게 됨에 따라 문제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전후과정을 섬세하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성은 문제를 일일이 따지는 경향이 있지만, 사랑은 전체를 다룬다.

 

직감 또는 육감이라고 불리는 이 사랑의 능력은, 사물을 꼬치꼬치 따지지 않아도 즉각 알아차릴 수 있게 한다.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일어나는 현상 자체는 아주 구체적이다. 사랑의 느낌을 가지면 뇌에서는 앤도르핀이 분비된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진 바 있다.


사랑은 신분이나 입장을 초월하는 보편성을 가진다. 사랑에는 어떠한 장애물도 있을 수 없기에 '너와 나의 공존'을 가능하게 한다. 사랑이란 모든 것을 감싸 안고, 자아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켜 준다.

 

사랑은 삶의 아름다움에 눈뜨게하여 삶을 힘차게 긍정하게 한다. 사랑은 삶의 부정적인 요소를 공격하거나 부정하기보다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하여 그것을 녹여 없앤다.


이 수준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단계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도 열심히 사랑이라는 주제에 매혹당하고 있고 현존하는 모든 종교가 500 혹은 그 이상의 수치로 측정됨에도 불구하고, 세계 인구의 0.4% 만이 이러한 수준의 의식에 도달한다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15. SQ수준 540 : 기쁨


사랑에 조건이 없어지면 없어질수록 내면의 기쁨이 점차 차오르게 된다. 이 수준에서의 기쁨이란 사건의 변화에 의해서 오는 갑작스런 즐거움이 아니라, 모든 활동에 동반되는 항구적인 것이다. 기쁨이란 외부의 어딘가에 근원이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존재의 매순간마다 솟구치는 것이다. 540의 수준에서는 치유가 시작되며, 영적인 자조그룹이 이 수준에 속한다.


540 이상부터는 성인, 영적 치유자, 그리고 그 제자들의 영역이다. 이 에너지 장의 특징은 게속되는 역경 속에서도 인내하고,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수준의 특징은 이들이 갖는 자비의 마음 상태이다. 이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이들에게는 사랑과 평화를 널리 전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 수준에 이르면 창조의 정교한 아름다움과 완전함에 눈뜨게 된다. 세상 만물은 억지로 이루어진 것이 없으며,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랑과 신성의 표현이다.

 

이 세상 모든 개개인은 신의 뜻에 따라 생명을 부여받았고, 신성 안으로 녹아들어갈 것이다. 이들은 우리들이 기대하지 못하는,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기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현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 에너지 장의 잠재력이 발현된 것이지, 어느 한 개인의 힘은 결코 아니다.

 


16. SQ수준 600 : 평화


이 에너지 장은 초월이나 자아실현, 신 의식 등의 용어로 묘사되는 경험과 깊이 관련된다. 이 수준은 천만 명 중 한 명 꼴로 나타나는 아주 드문 현상이다. 이 상태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주관과 객관의 차이가, 또 특별한 관점이라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복의 상태에 잠겨 있으므로 세상일에 더 이상 흥미를 갖지 않는다. 기존 종교의 형식을 초월한 이 수준의 사람들은, 모든 종교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순수한 영성의 소유자들이다.


600이나 그 이상의 수준에서는 아무것도 멈춰 있지 않는데도, 아니 오히려 발랄하고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는 세상인데도, 세상 전체가 시간과 공간이 멈춰 서 있는 가운데 마치 슬로 모션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이 다른 사람들이 보는 세상과 다를 바가 없는데도 불구, 그들은 이 세상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무한한 가능성과 의미로 가득 찬 진화의 춤을 추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놀라운 계시는 이성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그들의 마음은 그 무엇도 개념화시키는 일이 없이 절대의 침묵에 잠겨 있다.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구분이 사라지고, 바라보는 사람이 풍경 속으로 녹아들어가 풍경과 하나가 된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지금 여기 계시는' 분에 의해 연결되어 있고, 그분의 힘은 무한하고, 끝없이 온화하고, 그러면서도 바위처럼 견고하다.


600-700의 수치로 측정되는 위대한 미술, 음악, 건축 작품 들은 잠깐 동안이나마 우리들의 의식을 더 높은 세계로 고양시켜 주며, 시간을 뛰어넘어 영감을 불어넣는 원천이 되어 준다.

 



17. SQ수준 700-1000 : 깨달음


이 수준은 영적 완성자의 단계로서, 수많은 세대를 통하여 군중들이 추종하고 따르며 영성의 원천으로 삼는다. 이 사람들은 신성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이들 자체가 신성과 동일화되기도 한다.

 

심오한 가르침은 사람들의 정신을 앙양하고 인간성의 자각에 눈뜨도록 부추긴다. 이러한 비전을 갖는 것은 '은총'이라 불리며, 이 은총에 의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한한 평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의 단계에서는 시간과 개별성을 뛰어넘게 된다. 육신인 ''에 대한 관념이 없어져서, 운명이라는 것에도 연연해하지 않는다. 육신이란 마음의 창문을 통한 의식의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몸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의사소통에 필요한 것일 뿐이다. 자아는 보다 큰 '진아'에로 녹아간다. 이 단계는 이원성을 뛰어넘는, 완전한 '하나'의 수준이다. 의식의 분화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으며, 항상 깨어있는 의식으로 살아간다.


역사에 기록된 인간으로서는 가장 높은 수준으로서, (lord)라는 칭호를 붙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분이다.

 

 

 

 

 

E.Q : [교육 지수] educational quo-tient; [ 감성지수] emotional quotient.

요약 : 미국의 심리학자 대니얼 골맨(D.Goleman)이 제창한 용어.
본문 : 지능지수로 측정되는 IQ와는 질이 다른 지능으로, 마음의 지능지수라고 할 수 있다.

         감성지수, 감정적 지능지수라고도 한다.

          

첫째, 자신의 진정한 기분을 자각하여 이를 존중하고 진심으로 납득할 수 있는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
둘째, 충동을 자제하고 불안이나 분노와 같은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는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
셋째, 목표 추구에 실패했을 경우에도 좌절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격려할 수 있는 능력.
넷째, 타인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는 공감능력
다섯째, 집단 내에서 조화를 유지하고 다른 사람들과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사회적 능력 등을 들 수 있다.

 

EQ는 자신과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과 삶을 풍요롭게 하는 방향으로 감정을 통제할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한다.

EQ가 높은 사람은 갈등 상황을 만났을 때 그 상황을 분석하고 자신의 처지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감정적 대응을 자제함과 동시에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적인 이해를 나타낸다.

골맨은 이런 태도를 ‘정서면에서의 지성’이라 하고 그 육성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미국의 교육학자들도 친구들과 잘 어울려 놀지 못하는 아이가 학교를 중퇴할 확률이 평균보다 8배나 높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유아기부터 EQ를 키우는 감정교육을 실시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IQ처럼 정형화된 EQ 테스트 방법은 정립되어 있지 않다.

 

 

 

 

영성지수(S.Q)

IQ, EQ는 많이 들어 본 이야기인데 
영적지수는 생소한 이가 많을 것 같다.

미국의 의식혁명의 저자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는 
20년 넘게 수많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 
인간의 태도와 감정을 주관하는 특정한 기준으로 17단계로 대분류하여 
영성지수를 나타내는 의식지도를 작성하였다.

가장 높은단계 '17단계'인 영성지수1000은 
완전한 깨달음의 수준으로 
석가.예수.힌두교의 신크리슈나의 성자가 이 수준에 이른다 하고
간디나 공자.노자.소크라테스.데레사수녀 정도가 
700이상의 수준으로 보면 큰 착오가 없다고 한다.
 

 

 
의인의 영성지수는 다음단계 '16단계'인 600~699이고 
이수준에 이르면 '완전한 평화'속에 잠겨있다는 것이다.  
일반사람의 영성지수는 125~200사이라 한다.
문제는 한국정치인 평균수준이 100쯤이라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마 영성지수 도표에 남의 것 '뇌물'을 탐하고도 
양심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이는 100이하로 분류하니 그런가 보다.
애완견  정도가 60정도라니 우리나라 지도층이 바뀌어야 하는 것 사실이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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