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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주시는 하나님/성도의 생활

[스크랩] 두려움을 극복하는 성경적 교회의 리더십 (심 윤보)

두려움을 극복하는 성경적 교회의 리더십 (심 윤보)

 

<1> 서론 : 리더십

 

 사도들의 모델을 현재의 교회 리더들에 적용하게 되면 과도한 권위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뜻에 따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두려움의 풍경에서 벗어나야한다.

 

“4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여러분이 모여 있을 때에, 나의 영이 우리 주 예수의 권능과 더불어 여러분과 함께 있으니,

5 여러분은 그러한 자를 당장 사탄에게 넘겨주어서, 그 육체는 망하게 하고 그의 영은 주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해야 할 것입니다. “(고전 5:4~5)라는 바울의 권면은 리더뿐만 아니라 온 교회의 책임이고 빨리 교회가 조치를 취하지 않고 죄악을 용납했다는 것에 분개했고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한 바울의 권면의 내용은 거짓 메시지를 전한 이들을 거부할 책임이 교회 전체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세속적인 자격 조건을 갖춘 리더가 아니라 인품과 덕망과 말씀을 다룰 줄 아는 능력을 갖추고 삶에서 성령의 열매를 드러내는 사람을 리더로 세워야 한다.

믿음의 비밀을 간직한 사람이란 성장주의와 테크닉 중심의 사리사욕으로 양 떼를 해치는 자가 아니라 한 마리의 양이라도 돌보며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은사(카리스마)를 사용해 믿음 안에서 교회를 굳게 세우는 리더가 필요하다.

기독교는 단순히 교회에서 무엇을 얻어 낼 수 있는 지 알아보기 위해 교회에 나오겠다고 결심하는 개인주의적인 결단의 공동체가 아니다.

서로 사랑하고 돌보기를 성령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심을 예배를 통해 알며 은사로 행하는 것이다.

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 덕을 세우기 위해 노력할 때 성령의 은사가 있으며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닮은 교회의 리더십을 요구하고 있다.

지도자는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라고 명령하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28:20)라는 말씀에 따라 때로는 명령하고 결정하고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여러분에게 본을 보여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살후3:9) 처럼 완벽하지는 않지만 본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바울의 삶을 따라 교회의 리더십은 다른 사람의 본이되어야 한다.

 

각자 스스로 사역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하고 성경적 리더십의 구성은 지도하고 솔선수범하여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뒤에서 섬기는 일에 하나님의 본성을 닮은 성품을 원한다.

권위는 두려움과 성장주의에서 오는데 권위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교회의 복음이 세상 밖에서 불명예를 당하는 것을 경험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 성도를 통해 밝게 빛나고 소망과 진리의 영광스러운 빛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 준다면 교회 안에서 교회의 건강함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 할 수 있는 참 그리스도인으로 십자가의 도를 완성할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백성이 될 수 있다는 확신한다.

 

<2> 본론 : 성장위주와 테크닉 위주의 목회 사역의 문제점

 

 권위주의적 목회는 두려움 때문에 신의 대리자처럼 올라가려 하기 때문에 성도와 신학생을 자기의 두려움으로 낙인찍어 함께 교회안에서 실족한다.

성장 우선주의는 권위주의적 목회를 할 수 밖에 없다게 만들고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였고 상처를 보듬어 주는 치유 자인 것을 잊게 만든다.

권위는 상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치유된다면 자신을 오픈하고 성경의 역사 안에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목회가 건강한 목회자가 될수있다.

두려움과 열등의식을 고백하고 나가야 테크닉이 필요 없는 사역이 된다.

테크닉주의 목회자는 이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세상에 사장된다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

극복의 길은 하나님 안에서 사랑을 받고 소중한 부르심을 깨달고 하나님 안에서 나를 찾고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는 음성을 듣기를 원해야 한다.

모든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없고 진리를 향해 걸어가면 분명 적이 생긴다.

주님이 빠진 교회는 권력형과 테크닉 중심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주님 안에서 날마다 나를 찾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사역 안에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다.

 

<3> 결론 : 두려움의 유형

 

1. 권력형 교회

 

 택함 받은 목회자라는 권위는 성장주의와 테크닉위주의 객관적 지식 전달하는데 목표를 두고있는 패배자이다.

목회는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닌 관계성이 중요한데 청중이 설교를 들으려 하지 않으면 설교를 할 수 없고 삶이 모델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청중의 삶에 설교가 녹아 들어가 마음이 열려 변화될 수 있는 것이 성령으로 선포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조급증과 성장 병에 걸린 목회자들에게 양육 받는 성도는 구원에서 멀어질 수 있고 두려움을 처리 못하면 권위주의에 목회자들이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리더의 존재와 방어 기재 없이 성령의 운행으로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있다.

우상화작업과 신격화를 부추기고 있는 대형교회와 명제, 전제, 명령을 통해 설교를 하는 목회자는 권력형, 서열형 타입으로 설교자와 성도와의 관계가 단절되어 주님의 임재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테크닉과 프로그램으로 성도를 상품화하기 쉽다.

 

2. 테크닉 중심으로 무장된 세련된 교회

 

 주관적이며 프로그램화된 개인적 지식에 의존하는 교회이다.

테크닉에 의존하는 교회는 진리의 형식과 방법에 중점을 두고 있지 그릇에 관심이 없어지면 성령을 소멸하게 되어 세속적 저급한 욕망에 젖어있는 성도를 견인할 수 없다.

테크닉이나 성장주위에 빠져 있다면 감성을 표출하고 감성을 이끌어 내기 위해 고민을 해야 할 때이다.

하나님이 기름을 부어 주신다고해서 방법을 무시하면 안 된다.

성령의 임재란 우리의 준비를 일깨워주는 것이지 초자연적인 계시(신비주의)에 의존하라는 명령은 아니다.

 

(1) 비상 섭리

 

 교회안에 많은 환자와 가난한 자가 있다고 모든 환란과 고통에 반응하시는 하나님이 아니고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이 인간이 범죄와 악함에 빠져 있게 하시는 이유는 자유 의지를 빼앗지 않고 다시 성령 안에서 회복하기를 원하신다는 이야기이다.

비상 섭리가 필요할 때 분명 역사의 줄기를 바꿔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주님은 자유롭게 사랑 안에서 열정으로 나오기를 원하신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반응하는 것이 성도이다.

자해적 기도는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며 성령의 역사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

노력을 하고 준비하고 기도해야 성령이 역사한다.

성경은 기계적 영감이 아닌 유기적 영감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한 것이고 인간의 환경과 배경과 시대의 문학 양식이 포함되어 기록되어진 것이다.

 

(2) 결론

 

 성령님 안에 있는 노력이 되어야 한다.

방법론 (도구)을 하나님의 가치위에 올려놓으면 안 된다.

기독교는 모든 것들이 다 준비되었다 해도 절대 변수(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지 않으면 결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듯 24시간 말씀과 기도를 한다고 해서 늘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

1/100밖에 되지 않는 영감이라면 문제없지만 그 영감이 99가 없는 1이라면 아무 소용없다.

절대 변수이신 하나님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역할이다.

설교는 노력으로 되는 부분도 있지만 탁월한 능력을 가져야 절대 영감이 작용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믿지 않는 사역자는 테크닉에 의존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

요즘 유행하는 프로그램과 저급한 욕망에 의존하게 되면 하나님이 아닌 인간 방법론에 의존하는 것이고 테크닉을 사용할 수 있지만 의존하면 안 된다는 교훈이 고린도 교회 안에 있다.

마케팅 전략으로 소비자 중심의 교회를 꿈꾸고 있는 목회자는 광고로 이미지하여 현혹시켜 주변의 그리스도인의 즉각적인 욕구를 충족 시킬 수는 있지만 소비해야 할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지는 않는다.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저급한 욕망이 아닌 고급스러운 욕구를 향해 나가는 것이다.

즉각적인 필요가 거룩한 욕구로 변화되고 많이 가지려는 욕구는 사라진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욕구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피하시지 않았고 궁극적인 하나님의 길을 가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십자가의 길을 알면 사람들과 비교하며 저급한 상품에 의존하지 않는다.

저급한 욕구를 버리지 못하면 거룩한 욕구에 도달할 수 없다.

기쁨을 끌어안고 고난을 이겨내는 성도의 삶은 분명 성공신화에 목매인 목회자가 리더가 이끄는 교회에서 발견할 수 없다.

이 세상의 갈증은 더운 날 마신 미지근한 사이다와 같다.

십자가를 지고 가라하신 주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욕구라면 그 길을 가기 위해 노력하고 이 욕구를 알려주는 게 목회자의 사명이다.

예수 믿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욕구를 버리고 있는 것 안에서 만족하고 마땅히 해야 할 욕구를 지연시키고 저급한 욕구에서 빠져나오면 고급한 욕구를 충족 시킬 수 있다.

기다릴 줄 아는 인생이 최종적인 만족을 위해 지금 희생할 수 있는 인생이다.

성도가 원하는 교회를 만드는 목회자가 많아지고 그래서 마케팅 위주의 목회를 하고 있다.

과소비를 촉진 시켜 만족을 주려하고 실제로 그런 교회가 성장하고 있는 문제 아닌 문제속에서 어떤 방법론보다 어떤 마음이 중요하다.

세속주의에 빠져 저급한 성장을 꿈꾸고 있는 목회자에게 건강한 신앙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강렬한 비전이 있는가가 중요하다.

순결한 다짐과 각오가 있다면 어떤 방법에 의존하지 않아도 승리할 수 있고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 테크닉을 사용하는 교회는 순수함을 잃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

어떤 전략보다 복음을 우선으로 오늘 당장이라도 죽으라면 죽을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염원한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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