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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주시는 하나님/성도의 생활

[스크랩] 유사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Discovered)

유사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Discovered)



 


- 매튜 미드 (Matthew Mead)

 

 

 


Ⅰ. 들어가며

#2

오늘날은 대중적인 복음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귀에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설교자가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죄와 심판과 지옥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의 예배가 무너지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가 아니라 인간 편의의 예배가 되는 실정입니다.

이것은 단지 교회의 인원을 채우는 욕심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나오고, 교회를 다니는 것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을 합니다.

구원을 스스로 인정하게 만들고, 인정해 줍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어쩌면 사데 교회처럼 “살았다고 하지만 실상은 죽은 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계시록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그래서 창피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해’라는 말이 등장한 것입니다.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세상과 구별/거룩하기 보다는 세상과 혼합되고, 아니 세상보다 더 악하게 살아갑니다.

또 어떤 교인은 창피하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을 못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말을 듣나요?

당신도 교회 다녀?

아니면 교회 다니시죠.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신앙이 어떤 상태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과연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를 시험하고 확증해야 할 것입니다. 

 

 

 

Ⅱ. 당신은 혹시 유사 그리스도인이 아닙니까?

늦기 전에 자신을 살피십시오.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고, 교회의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결국 죄 가운데 살다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장로님이 임종하면서 예수님을 욕하고 부인하며 죽는 모습은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과의 진정한 연합이 없어서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로마서>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교회를 떠나지 않고, 기도를 하며, 적당한 때 세례를 받으면,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고 진정한 연합이 없다면 마음이 변화되지 않고

행실이 여전히 더러우며 성화되지 않는다면 천국과는 거리가 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

여러분, 제가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영생을 쉽게 그리고 싼값에 살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또한 사도들은 왜 다음과 같은 명령으로 우리를 당혹하게 만듭니까?

<베드로후서>

1: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1: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구원/천국은 결코 값이 싼 것이 아닙니다.

구원/천국을 위해서 우리는 마치 값진 진주를 발견한 사람처럼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3: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아니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좁은 길을 걸으며, 우리의 구원에 합당한 삶을 굳게 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고백을 하고도 결국은 구원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4

▣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구원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 이어지는 강의를 통해 점차로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다음의 다섯 개의 조항으로 짧게 줄여서 기억할 수 있게 해 보았습니다.

 


1. 외적으로 행한 일을 은혜로 생각하여 경건의 모양에 안주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경건의 모양만 가진 사람은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그리고 환난이 그의 어리석음을 입증할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으로 사는 사람은 환난이 오면 그 신앙을 포기하고 자기의 길로 가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7: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여러분의 기초를 두십시오.

언제나 그를 바라보고 그에게 안주하십시오.

그것이 당신의 삶의 목적(하나님의 영광)과 그 기준(성경의 가르침),

그리고 삶의 방법(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에 대해 바르게 인식하는 것의 시작입니다.

 


2. 경건의 탁월한 능력과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생애를 바라보십시오.

경건의 모양과 경건의 능력은 다릅니다.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경건의 모양은 그 안에 아무런 미덕이 없습니다.

경건의 능력과 그에 따르는 실천적인 삶은 그 영혼에 유용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그렇다고 경건의 능력을 위해 경건의 모양을 무시해도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어도 능력이 없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경건의 능력이 있다면 경건의 모양은 반드시 동반됩니다.

 


경건의 모양에 탁월함을 잘 알기에 많은 위선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멋지게 꾸미고 진술합니다.

실제로는 최악인데 겉으로는 최상이라고 위장합니다.

 


3. 장차 올 것들을 바라보십시오. 마라나타/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 16:22)

불신은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들을 놓고 세상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알적인 요소입니다.

이것은 우상으로 자신의 유익에만 치중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에서만 만족을 느끼려고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고 느끼는 감각하는 것으로써 모든 것의 실제를 판단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깊이 생각하십시오.

영원은 꿈이 아닙니다.

지옥은 겁을 주기 위한 속임수가 아닙니다.

천국은 상상 속의 이상향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실제입니다.

비록 영적인 것이기에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실제적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4. 여러분의 영혼에 높은 기준을 설정하십시오.

에서를 보십시오.

그는 팥죽 한 그릇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에서와 같이 육신의 만족 때문에 자신의 영혼을 팔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며, 세상의 모든 것을 합하여도 비길 수가 없습니다.

<마가복음>

8: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당신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 중에 가장 아름답습니다.

당신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죽여서 피로 값 주고 사실 정도로 가치가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과소평가를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인생이므로 과대평가를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부족함이 없이 강한 존재입니다.

 


혹시 자신의 육신의 욕망을 사랑하면서도 영혼은 무시하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비틀거리면서 죽고 썩어갈 세상에만 관심을 두지 마십시오.

 


5. 심판 날의 엄격함과 갑작스러움을 묵상하십시오.

주님의 재림 때에 우리는 심판을 통하여 영원으로 들어갑니다.

믿음의 행실과 수고에 따라, 혹은 불신으로 인하여 나누어 질 것입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에 대해서 회계할 것입니다(재능/사명/시간/재산).

이 땅에서 여러분은 믿음으로 씨를 뿌릴 것이요, 장래에 천국에서 거둘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당신이 생각지 않은 때에 일어남으로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24:43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24:44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5

Ⅲ. 함께 공부를 하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1.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복임을 잊지 마십시오.

복음 그 자체로는 가장 위대한 은혜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들의 죄의 성향으로 그 반응이 나누어짐으로 복음의 축복이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한 사람이라도 넘어지게 하는 거침돌이 된다는 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2: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그러나 아직도 그를 믿고 있는 남은 자가 있으니 이들은 부끄러움을 당치 않는다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9: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마태복음>

11: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예수님은 당신의 인격과 사역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실족할 것을 예상하셨던 것입니다.

 


2. 또한 우리는 천국 문 앞에서 지옥으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구속의 사역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얻어지는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 믿음은 성령께서 주시며 믿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복음 아래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하고, 느끼며,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비중 있게 깊이 생각함으로써, 천국에 가깝든지, 지옥에 가깝든지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옥 문턱에서 천국으로 간 것처럼, 더 많은 사람이 천국 문에서 지옥으로 갔습니다.

자신의 종교적인 의무 수행보다 그 마음의 중심이 그리스도에게 있는지를 살피십시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한 사람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보다 더 많습니다.

 


3. 하나님 보시기에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복음을 듣고 신앙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 중에 소수만 진정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할까 봐 심히 두렵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관점에서 훌륭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하지 않았다면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사랑을 가장하여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위선자요, 사기꾼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떠난 인간의 본성에 대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이 특강을 통해서 얼마는 자신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에도 모조품(짝퉁)이 있으며,

참된 회심이 아닌데도 거창하게 신앙을 고백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귀찮게 하거나 짜증나게 함으로 실족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인 것 같은 형식적인 교인을 깨우려는 것입니다.

 

 

 

#6

Ⅳ.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과 되다 만 사람 - 논제의 제시와 입증

 


사도행전 26장에는 사도바울은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과 벨릭스 총독, 그리고 공회 앞에서

유대인들이 자신을 송사하는 일에 대해 변호하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회심에 대해서 간증을 합니다.

 

바울은 회심 전에 율법적인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죽이고 박해했지만 예수님을 만난 이후

복음을 박해하던 자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로 변했다고 간증을 합니다.

 

바울의 간증에서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의 반응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의 자신의 변호와 회심에 대한 간증에 베스도 총독은 바울을 질책합니다.

<사도행전>

26: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그러나 아그립바 왕은 바울의 말을 신뢰하게 되며 바울에게

“네가 나를 설득하여 거의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26:28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아그립바 왕이 회심하지는 않았지만 설득을 당한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새로워지지 않았지만 그의 의식에는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될 뻔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적으로 설득을 당하고 이해만 하는 거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마음과 의지까지 변화되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완전한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참된 제자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복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바보이지만 구원에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7

세상에는 거의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거의 구원받을 뻔한 자’입니다.

구원을 받을 뻔한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위선자로서 비록 그가 천국에 들어갈 소망으로 많이 즐거워했을지라도,

결국에는 지옥에 들어가고 말 것입니다.

 


성경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겨우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4: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이 말은 많은 어려움을 겪더라도 결국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는 지옥과 같은 고통과 슬픔을 많이 겪더라도 결국 천국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자, 우리는 이제 깊이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진실한 성도가 참된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자주 실패하며 넘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위선자가 은혜를 전혀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멀리까지 천국 길을 갈 수 있으며

얼마나 높은 곳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 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도는 지옥 가장 자리까지 던져질 수 있지만, 지옥에는 갈 수 없습니다.

반면 위선자는 천국의 입구까지 갈수 있지만, 천국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최악의 경우에도 결국 의인이지만, 위선자는 아무리 잘해도 결국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 특강은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고 낙심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죄인들과 외적인 신앙고백자들을 깨우치기 위함입니다.

즉, 당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기초에 서 있는지를 살피고,

바른 기초이며 반석이 되시는 그리스도 앞에 바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자신을 살피는 것에 대해 두려워 마시기 바랍니다.

최소한의 참된 은혜를 받았다면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의인은 꾸준히 자기의 길을 갈 것”이므로 그렇습니다.

최소한의 은혜는 최대한의 은혜를 얻게 할 만큼 큽니다.

그러나 자기를 살피지 않고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없이 자신의 의무를 꾸준히 행하는 사람은 위선자일 수도 있습니다.

 


#8

▣ 세상에는 거의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에 대한 성경의 증거를 가지고 입증하겠습니다.

 


1. 영생의 도리를 물었던 한 청년(막 10:17ff)

복음서에 한 청년이 천국에 이르는 길을 배우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와 묻습니다.


<마가복음>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의 대답은 계명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대답합니다.


<마가복음>

10:20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이 청년이 얼마나 나아갔습니까?

① 그는 순종했습니다.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행했습니다

<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② 모두 순종했습니다. 모든 것을 지켰습니다.

③ 그는 더 알고 싶어 행하고 싶은 열망을 고백했습니다.

 


그는 많은 순종을 했지만 예수님께 “선생님 제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가복음>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예수님이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좇으라고 하자

재물이 많은 그는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마가복음>

10: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 청년은 말씀에 순종하기를 갈망했지만, 자기의 정욕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보다는 물질에 그 중심이 더욱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2. 등불을 준비하던 열 처녀 중 어리석은 다섯 처녀

두 번째는 마태복음 25장1-13절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이중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이 그리스도를 고백하는데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5: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5:2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25: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25: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25: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25: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25: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25: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25: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25:10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25: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25:12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① 어리석은 자들도 처녀였습니다.

    처녀라는 것은 구약과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성도들에게 주어진 명칭입니다.

    그러므로 처녀들은 신자입니다. 어리석은 처녀라는 것은 신자보다는 종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② 이들도 등불을 들고 있었습니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등불은 성도가 주의 재림을 맞아 마땅히 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외형적인 신앙고백으로 볼 수 있습니다.

③ 등불에 기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믿음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확신과 믿음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앙/등불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④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도 갔습니다.

    그녀들은 의무를 이행하고 규정을 준수했으며 믿음에 진보를 보였습니다.

⑤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도 나아갔습니다.

    많은 것을 뒤에 남겨 두고 나아갔습니다. 즉 세상과 분리되었다는 것입니다.

⑥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도 지혜로운 처녀들과 함께 갔습니다.

    즉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의 동료였습니다.

⑦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도 신랑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찾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⑧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도 신랑이 온다는 말을 듣고,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하였습니다.

    이제 신랑과 함께 가기를 바라며 더욱 간절하게 그리스도를 고백하였습니다.

⑨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도 '참된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들은 “너희의 기름을 좀 나눠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등불을 준비했지만 여분의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들이 은혜를 구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면 은혜를 구하기엔 너무 늦은 것입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들처럼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때부터 은혜를 구했어야 했습니다.

 


이제, 천국 문이 닫혀 버렸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문 밖에서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고 부르짖지만,

주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은 거의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거의 구원을 받을 뻔했지만 멸망하고 만,

유사 그리스도인들 이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께 나아오지만,

회심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생명이 전혀 없습니다.

유대인의 전통은, 혼인 예식의 주인이 초청하는 사람에게 예복을 보내주어 입고 오게 하는데,

그리스도께서 종들을 보내 혼인 예식에 참석하라고 청했을 때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고 오지만,

그들은 주인이 보내준 예복을 입지 않고 온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고백하는 여러분이여, 자신의 신앙을 깊이 살펴보십시오.

우리보다 앞서 나아갔던 사람들이 천국에 미치지 못했다면,

그들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처녀이던 그들이,

예수님을 사모하고 믿음으로 고백하던 그들이,

자신의 고백에 어느 정도 믿음이 있었던 그들이,

믿음의 열매도 어느 정도 맺혔던 그들이,

그리스도를 찾는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던 그들이,

자신의 신앙고백을 향상시키며 자신을 그 고백에 맞게 연단했던 그들이,

한낱 가짜 신자, 유사 그리스도인이었다면, 주여 우리는 무엇입니까?

 


#9

Ⅴ. 신앙적인 삶에서 큰 진보를 보였는데도,

단지 유사 그리스도인일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떤 모습이 ‘온전한 그리스도인(Altogether Christian)’이고

어떤 모습이 ‘유사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인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사람이 신앙에 있어서 말씀에 순종하여 살려고 애를 쓰고, 어느 정도 축복을 받고,

영적인 삶에 많은 진보를 나타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유사 그리스도인에 불과할 수 있음을

20가지 사례를 들면서 살펴보겠습니다.

 


많은 유사 그리스도인이,

거의 그리스도인으로 보일 정도로 신앙의 삶에서 멀리까지 나아갈 수도 있음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 있어서 그렇게 멀리까지 이르렀으면서도,

유사 그리스도인에 머무는 까닭과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신앙을 고백하는 유사 그리스도인이,

거의 그리스도인은 될 뻔 했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는 것입니다.

 


#10

1. 지식의 큰 진보를 보일 수도 있음

당신이 비록 지식이 많고, 말씀을 많이 배웠다고 합시다.

즉, 당신이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대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길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을지라도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닌 유사 그리스도인일 수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는 곳에는 은혜가 없지만,

은혜가 없는 곳에도 많은 지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식의 주체는 지성이지만 거룩의 주체는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에게 지성의 빛이 비추어졌다 해도

의지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수 있고 유사 그리스도인일 수도 있습니다.

<로마서>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어떤 사람은 열정은 있지만 지식이 없습니다.

그것은 맹목적인 헌신입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지식은 있지만 열정은 없습니다.

그것은 열매 없는 사색입니다.

지식과 열정이 결합될 때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반론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복음 17:3절에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응답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지식이 우리를 영생으로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왜 멸망을 당합니까?

마귀는 타락하여 거룩함을 상실했지만 지식은 상실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에는 두 가지의 차원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지식과 구원받는 지식입니다.

일반적인 지식은 머릿속을 떠다닐 뿐, 마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이 지식은 버림받은 자들이 소유한 지식입니다.

 

반면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구원의 지식이 있습니다.

구원받는 지식은 마음의 동의와 의지의 승인을 동반합니다.

정서와 실천이 결합된 지식이 영생으로 인도하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안다는 것은 순종하는 방법을 알고 그 지식에 따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시편>

111:10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

 


#11

2. 큰 은사를 받을 수도 있음

비록 당신이 놀라운 은사, 즉 영적인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닌 유사 그리스도인일 수 있습니다.

 


1) 은사는 성령의 일반적 사역

그리스도 앞에 나온 어떤 사람이 이렇게 소리를 쳤습니다.

<마태복음>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은 은사가 아니라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① 은사는 성령의 일반적 사역으로 불신자에게도 주어질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는 은사를 받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지 못한 자도 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지 못한 자가 은혜를 받은 성도보다 더 큰 은사를 가질 수 있습니다.

기도와 여러 행함에서 탁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성실함과 정직함에서 그를 능가합니다. 

 

② 은사는 타인의 유익과 교회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은사로 다른 사람을 세우면서도 자신을 세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2)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오직 은혜입니다. 

① 은혜만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가장 위대한 은사라도 마음을 변화시키지는 못하지만,

가장 작은 은혜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② 많은 사람들이 은사를 잔뜩 가지고도 지옥으로 갔습니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그는 한때 주의 제자로 은사가 있었습니다. 복음 전도자였고 능력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은사가 있어도 그 직무를 버리고 떠납니다.

<사도행전>

1: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12

은혜와 은사는 다릅니다.

성령의 일반 사역인 은사는 구원을 줄 수 없으며, 오직 특별 사역인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멸망에 이르지 않으려면,

ⓐ 죄를 철저하게 깨닫고,

ⓑ 참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 하며,

ⓒ 은혜 언약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은사라도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에도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③ 은사는 쇠퇴하고 소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반론
 그러나 사도들은 우리들에게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은사가 구원에 소용이 없다면 왜 구하라고 했습니까?
 
응답
 은사는, 최선의 것이 아니지만 선한 것입니다.

은사는 훌륭하지만 더 탁월한 것이 있습니다. 그 내용이 곧 이어 나옵니다.

[고전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한 모금의 은혜가 한 덩어리의 은사보다 가치가 있습니다.

은사는 사람에게 대해서 부요하지만, 은혜는 ‘하나님에 대해여 부요’하게 합니다.

은사가 선하기 때문에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은사를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이루는 것은 은혜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더욱 사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은사로 다른 사람들이 더욱 발전하게 될지라도,

우리는 은혜 없이 지옥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3

3. 수준 높은 신앙고백을 할 수도 있음

당신이 비록 차원이 높은 신앙의 고백을 하고 외적인 경건의 의무를 많이 행한다고 할지라도 당신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닌 유사 그리스도인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1) 위선자도 훌륭한 신앙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신앙을 고백하고도 마음이 변하지 않고 삶이 나아지지 않았다면,

위대한 신앙 고백자라고 해도,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다 만 사람입니다.

신앙고백의 부피로 신앙의 본질을 평가하는 것과,

신앙의 의무의 크기로 은혜의 강도를 측정하는 것은 엄청난 사기입니다.

신앙을 고백했을지라도 위선으로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훌륭한 신앙고백으로도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다는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신앙고백을 하고도 마음이 변하지 않고 삶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 되다 만 사람입니다.

② 신앙고백을 하고도 위선적인 경건의 모양만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③ 관습과 처지에 따른 고백도 있습니다. 이것은 유행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남는 장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익이 보장될 때는 많은 신앙고백자들이 존재하며, 교회를 떠나는 자는 것의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것이 고난이요, 유익이 없을 때에는 진리를 버립니다.


반론
 그러나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 10:32)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버지 앞에서 시인한다는 것은 영생의 약속이 아닙니까?
 
응답
 맞습니다.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자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시인할 것입니다.

주의할 것은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시인이라는 것은 신앙 때문에 난처해지고 핍박을 받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고백은 가장된 사랑으로부터 그리스도에게 접근하는 것이지만,

시인은 뿌리 깊은 사랑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인격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고백을 하지만 시인을 하지 못한다면,

그 고백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14

4. 죄를 미워하고 대적할 수 있음

당신이 비록 천국에 가까이 가기 위해 죄를 대적할지라도 유사 그리스도인일 수 있습니다.

 


1) 죄를 자각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죄의 자각이란 영적일 뿐만 아니라 이성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죄의 자각은 성령의 효과적인 사역이 없이, 말씀을 통하여 자연적인 의식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이런 자각은 결국 사라지게 되고, 이성적인 자각이 결코 죄에서 돌아선 것이 아닙니다.

 


2) 죄에 대해 슬퍼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반론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4)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가 죄로 인하여 애통해 한다면 그는 구원과 연관된 사람이 아닙니까?
 
응답
 죄에 대해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지만, 죄에 대해 애통하는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복된 것은 아닙니다.
 

 

 


① 죄에 대한 참된 애통은 저주스러운 본성에 대한 영적인 자각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② 죄에 대한 참된 애통은 죄에서 비롯된 악보다 죄 안에 있는 악에 대하여 더 애통하는 것입니다.

    죄가 초래하는 악에 대한 애통은 결국 지옥에서 애통하는 것입니다.

    죄가 유발시키는 악으로 인해 애통하기보다는 죄의 본질로 인해 애통해야 합니다.

 


3)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충분히 죄를 고백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에게 얼마나 솔직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까?

<사무엘상>

24:17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26:21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중히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

 

가룟 유다도 충분히 고백했습니다.

<마태복음>

27: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그러나 이와 같은 죄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울과 유다를 부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고백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반론
 죄를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특성이 아닙니까?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 1:9에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죄의 고백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아닙니까?
 
응답
 죄를 고백하는 사람 중에 구원 받는 사람도 있지만, 죄를 고백하고도 멸망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15

▣ 죄를 고백하고도 멸망당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많은 사람들이 단지 습관적으로 죄를 고백할 뿐, 의식 깊은 곳에서부터 고백하지 않습니다.

② 많은 사람들이 작은 죄는 고백하지만 큰 죄는 숨깁니다.

③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인 의미(죄 없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④ 많은 사람들이 죄를 고백하더라도 곤경에 처했을 때뿐입니다.

    바로를 보십시오. 바로는 심판 때문에 억지로 고백합니다.

<출애굽기>

 10:16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급히 불러서 이르되 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와 너희에게 득죄하였으니
고백하지만 여덟 가지 재앙을 겪은 뒤였습니다. 

⑤ 죄를 고백하지만 죄를 없앨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죄를 고백하지만 죄에서 떠나지는 않습니다.

    마치 직업에 종사하는 것처럼 꾸준하게 죄를 짓고 고백하는 것을 반복합니다.

 


4) 어떤 사람이 죄를 없앨지라도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반론
 이것은 성경과 반대됩니다.

성경은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고 하셨습니다.
 
응답
 올바른 원리와 방법에 따라서 올바른 목적을 가지고 죄를 버린다면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불건전하게 죄를 버리는 일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 등장하는 마술사 시몬을 보십시오.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마법과 마술을 버리고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녔습니다.

<사도행전>

 8:9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8:10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8:11 오래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8: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8:13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8: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8:15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8: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8:17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8: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8:19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8:20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8:21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8:22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8:23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8:24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라

 


5) 불건전하게 죄를 버리는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드러난 죄는 버려도 비밀스러운 죄는 계속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피부의 상처를 치료를 받을 수 있지만 속의 종양은 치료받을 수 없습니다.

② 죄를 버릴 수 있지만 죄를 죄로서 버린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죄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는 죄를 죄로서 버린 것이 아닙니다. 

③ 죄를 버리되 또 다른 죄를 굳게 붙들기 위해서 버릴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양심에 폭풍이 일어나면, 과적된 하나의 정욕을 내던져 버리므로 다른 죄를 숨기거나 보존하려고 합니다.

④ 모든 죄를 버릴지라도 여전히 죄인일 수 있습니다.

    생활 속에 죄의 열매가 보이지 않더라도 죄의 뿌리는 마음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⑤ 죄를 떠났을지라도 아직 그 죄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감정 속에 있는 죄가 행위 속에 있는 죄보다 더 악합니다.

    그 이유는 행위 속에 있는 죄는 단지 연약함에서 짓는 것이지만,

    심정 속에 있는 죄는 그 마음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⑥ 모든 죄가 사슬에 매일지라도 여전히 마음은 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슬에 매인 개도 여전히 개입니다.

    그 사슬을 늦추면 달려들 것입니다.

    죄인도 자기의 팔에서 죄의 무기를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께 대한 적의의 마음이 품어져 있습니다.

 


6) 죄를 미워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반론
 연약해서 죄에 빠질 수 있지만 그가 죄를 미워한다면 이것은 은혜의 증거입니다. 죄를 미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 중 하나가 아닙니까?
 
응답
 죄에 대한 미움은 은혜의 증거이며, 은혜의 원리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서 은혜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이 죄를 미워하지만, 죄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이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피 흘리시는 그리스도와 슬퍼하시는 성령을 거스르는 것으로서 죄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원리로부터 죄를 미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① 죄 안에 있는 악 때문이 아니라 그에 수반되는 부끄러움 때문에 죄를 미워할 수 있습니다.

②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죄보다 다른 사람의 죄를 더 미워합니다.

    주정뱅이가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술 마시는 것을 미워하면서 자신은 여전히 술을 마십니다.

    그러나 은혜로 죄를 미워하는 자는 자신의 죄를 가장 경멸합니다.

    물론 그는 다른 사람의 죄도 미워합니다.

③ 다른 죄와 구별되는 특별한 죄만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욕과 상반되는 것은 미워하고 정죄하기도 합니다.

 


7) 죄에 대항할 목적으로 굳게 결심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이 그랬습니다.

<사무엘상>

26:21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중히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

 

 

바로도 하나님의 백성을 억류하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출애굽기>

 9:28 여호와께 구하여 이 뇌성과 우박을 그만 그치게 하라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다시는 머물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사울 왕과 바로는 모두 자신들이 죄 가운데 멸망했습니다.

그 까닭은 이렇습니다.

①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결심이나 약속은 죄를 이기지 못합니다.

    죄를 범하지 않도록 우리를 돕는 것은 새로운 결심이 아니라, 새로운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본성은 거듭나는 것으로서 성령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② 맹세하고 행하지 않는 대부분의 경우는 환난 날에 결단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평안해지면 결단한 것을 잃어버립니다.

    병상에서는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건강해지면 그 약속은 점점 상실합니다.

③ 앞으로 죄를 대적하겠다는 결심은 단지 회개할 것을 연기하게 하는 유혹일 뿐입니다.

    사탄은 사람이 좋은 결심을 하더라도 지금 그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9:57 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9:57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떤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자 이들은 각각의 이유로 잠시 유보합니다.

<누가복음>

9: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9:61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이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이런 사람을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④ 성화되지 못한 사람도 죄를 거스르는 약속과 결의를 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죄를 자각하게 하는 양심의 작용과 율법이 선하다는 판단,

    그리고 구원/내세에 대한 욕망 때문에 결의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약속할 혀를 가지고 있지만, 그 약속을 실행할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마태복음 21장에 나오는 포도원에 가겠다고 하고 가지 않은 아들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21: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1:29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21: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21: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21: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8) 사람의 내면에서 죄에 대한 전투가 진행된다고 해도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반론
 영혼 속에 죄와의 싸움이 있다면 이것이 은혜의 증거가 아닙니까?

우리의 마음속에도 이런 싸움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응답
 죄와의 싸움은 오직 은혜에서부터 나오며, 신자의 특징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닌 죄와의 싸움도 있습니다. 신자들에게는 거듭나지 못한 것과 거듭난 것의 싸움이 존재합니다. 다양한 정신적인 기능들 속에서 일어나는 죄와의 싸움이 있는데, 이것은 의지와의 싸움과 양심의 싸움입니다. 양심은 조명을 받아 지옥의 공포와 저주로 두려워 떱니다. 양심은 죄에 대항합니다. 그러나 의지와 정서는 새로워지지 못하였고 그래서 의지와 정서는 죄를 좋아합니다. 바로 이것이 죄인의 마음속에 자주 심한 다툼과 싸움이 일어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대적한다고 간주하지만 이것은 의지와 정서의 변화가 없는 자연적인 양심의 작용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 속에 있는 죄에 반하는 것을 은혜로 간주하지만

그것은 단지 자연적인 양심의 작용뿐 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 싸움이 죄와 은혜의 싸움이라고 결론을 짓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패한 의지와 정서에 대한 자연적인 양심의 투쟁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죄에 대항하는 큰 싸움의 전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유사 그리스도인에 불과합니다.

 


#16

5. 은혜를 사모할 수도 있음

당신이 비록 은혜를 사모한다고 해도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닌 유사 그리스도인일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그러했습니다.


<마태복음>

25: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사악한 자들도 천국에 들어가기를 바랄 수 있는데, 영원에 대한 갈망은 누구나 있기 때문입니다.


반론
 보통 은혜를 열망하는 것을 은혜라고 하지 않습니까? 주님도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응답
 은혜에서 나온 은혜에 대한 열망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17

1) 은혜에 대한 적절한 열망

①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자연적인 상태를 바로 인식하고 은혜를 갈망할 때

(아담의 죄로 인하여 자신도 전적인 타락과 부패한 죄인이라는 사실)

② 열망에 대한 열심에 걸맞게 구하고 노력할 때

③ 그 열망이 일정하고 변함이 없을 때

 


#18

2) 은혜에 대한 부적절한 열망

① 어떤 사람이 은혜를 사모할 수 있지만, 그 사모가 은혜 때문이 아니고 다른 것 때문일 수가 있습니다.

    즉 은혜 때문이 아니고 지옥의 두려움과 천국, 그리고 이 세상의 부유 때문입니다.

② 은혜를 구하는 데 알맞은 노력 없이 은혜를 사모할 수도 있습니다.

    바라는 것은 잘하지만 행하는 것은 못합니다.

③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 시기에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은혜 받을 때를 늦춘다는 것은 결국 축복을 상실할 것입니다.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창세기25:19~34) 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마태복음 25:1~13)가 그러했습니다.

    지금이 은혜 받을만한 때입니다.

④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 ‘쉬 없어지는 이슬처럼’ 일정하지 않으며 변덕스러우면

    은혜를 부적절하게 열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은혜를 사모하면서도 은혜 때문이 아니라면,

사모한다고 하면서 노력하지 않는다면, 너무 늦게 은혜를 사모한다면,

은혜를 사모하는 열망이 쉬 사라지고 일정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은혜를 사모한다고 해도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닌, 유사 그리스도인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19

6. 말씀을 두려워할 수도 있음

비록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떨 수도 있지만,

벽에 쓰인 글씨를 보고 떨었던 벨사살처럼

<다니엘>                                                                                                                                                            

5:5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5:6 이에 왕의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힌지라         

단지 그리스도인이 되다 만 유사 그리스도인일 수 있습니다.


반론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워 떠는 것은 은혜의 신실성과 진실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사 66:2b]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응답
 두려워 떠는 것에는 두 가지 양상이 있습니다.
 

 

 


1) 양심의 깨어남으로 인한 떨림

바울이 벨릭스 총독에게 의와 심판에 대해 전했을 때, 벨릭스 총독은 떨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사도행전>

24: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2) 하나님 말씀의 위엄으로 인한 떨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떠는 자에게 은혜를 약속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귀신들도 말씀을 믿고 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에서 가장 완고한 죄인도 두려워 떨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권고(돌아보는: 眷顧)하시는 자는 마음이 가난하며 심령에 통회하는 자입니다.

죄로 인해 상한 심령의 열매로서 두려워 떠는 것을 하나님께서 살펴보실 것입니다.

<이사야>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말씀으로 인해 떠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가난하기 때문도 아니고, 죄로 인해 심령이 상했기 때문도 아니라면,

자신이 보기에도 천하기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하심을 지각했기 때문도 아니라면,

그들은 말씀을 인하여 떤다 할지라도 아직은 그리스도인과 유사한 사람일 뿐입니다.

 


#20

7. 말씀을 기뻐할 수도 있음

당신이 비록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기뻐한다고 해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유사 그리스도인일 수 있습니다.


반론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는 것은 경건한 사람의 특징이 아닙니까?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가 복 있는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시 1:1-2).1)
 
응답
 말씀을 기뻐하는 것은 은혜로부터 흘러나오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1) 은혜에서 나오는 말씀에 대한 기쁨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말씀의 영성 때문에 말씀을 기뻐하는 사람, 즉 영적인 계명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② 말씀이 양심에 더욱 다가와 마음을 찢고 죄를 드러내도 오히려 말씀을 기뻐한다면,

    이것은 진정한 은혜의 증거입니다.

③ 로고스(λογο?)이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교제에서부터 기쁨이 생긴다면 은혜의 증거입니다.

 


2) 말씀을 거짓으로 기뻐하는 2가지

① 설교자의 화술 때문에 말씀을 기뻐합니다.

    그들은 전달되는 진리가 아니라 진리에 입혀진 옷을 기뻐합니다.

② 말씀을 듣는 것은 즐거워 하지만 말씀대로 행하는 것은 전혀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말씀의 영성보다도 설교자의 화술 때문에 말씀을 좋아한다면,

말씀을 듣는 것은 즐거워하지만 말씀대로 행하는 것은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는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21

8. 교회의 일원으로 의식에 참여할 수도 있음

당신이 비록 교회의 일원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제하며 예배하고

교회의 모든 특권에 참여한다고 해도 단지 그리스도인이 되다 만 유사 그리스도인일 수 있습니다.

다섯 처녀가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원일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의 지체는 아닐 수 있습니다.

 


#22

1)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지상교회

애굽에서 나올 때 12지파가 아닌 많은 잡족도 함께 나왔습니다.

그들은 함께 애굽에서 나왔지만 마음으로는 여전이 애굽인이었습니다.

<로마서>

 9: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복음의 그물에는 좋은 물고기뿐만 아니라 나쁜 물고기도 잡히는 법입니다.

밀과 가라지는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는 것입니다.

 


2) 알곡만 거두는 천상교회

교회가 번창할 때 많은 사람들은 교회와 함께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핍박을 받을 때 위선자들은 교회를 외면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상교회에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존재합니다.

이스라엘과 함께 출애굽을 한 잡족들처럼,

어떤 사람은 성도처럼 보일지라도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다 만 사람에 불과합니다.

 


#23

9.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도 있음

당신이 비록 천국에 대한 큰 소망과 구원받을 소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닌 유사 그리스도인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1) 참된 천국의 소망

우리에게는 튼튼하고 견고한 소망의 확실성이 있습니다. 그 소망은 결코 무산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6: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 참된 천국에 대한 소망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그 소망은 마음을 정결하게 하며 죄를 제거하는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요한일서>

 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② 그 소망은 즐거움으로 가득 차는 소망입니다.

<로마서>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③ 그 소망은 약속에 근거한 소망입니다.

    믿음은 약속을 수반하며, 소망은 그 약속의 성취를 바라봅니다.

 


#24

2) 은혜에 근거하지 않은 헛된 소망

① 은혜 없이도 큰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위선자의 소망입니다.

    그들은 신앙고백만 한, 은혜가 없는 자로서 큰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가장 큰 소망의 원인을 소유하지 못한 채, 자신의 상태에 만족해합니다.

 


② 약속을 보지 못하고도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의 능력을 바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억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는 하나님의 자비를 전달하는 은혜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3) 죄 중에서 갖는 천국에 대한 헛된 소망

① 마음을 청결하게 하거나 은밀한 죄에서 떠나지 않고도 천국의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②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있으면서 여전히 지옥의 일을 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눈은 천국에 두지만 마음은 땅에 두는 것입니다. 

<욥기>

27:8 사곡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그 영혼을 취하실 때에는 무슨 소망이 있으랴

 

 

 

그러므로 누군가 아무런 은혜도 없이, 약속을 목격하지도 못하고, 마음을 정결하게 하지 않고,

지옥의 일을 행하고 천국을 소망한다면 그는 여전히 유사 그리스도인일 수 있습니다.

 


#25

10. 크게 변화된 모습을 보일 수도 있음

당신이 비록 눈에 띄는 큰 변화를 겪고 있으며, 이 변화들이 말씀의 작용으로 일어날 수도 있지만, 당신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닌 유사 그리스도인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헤롯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며 그를 주목하였고,

또 그의 말을 듣고서 많은 일을 하였으며 기쁘게 들었습니다.

<마가복음>

6:20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사도행전의 마법사 시몬이 그 예일 것입니다. 마법사 시몬도 일종의 회심을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8:13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반론
 변화된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까?
 
응답
 변화라고 모두 그리스도인니 되게 하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변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은 지성이 인식하고, 마음이 새로워지며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26

1) 껍질만의 불완전한 변화

① 영적이며 초자연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예의 바르고 도덕적인 변화도 있습니다.

    즉 도덕적인 의미에서의 변화는 진정한 변화가 아니므로,

    그들의 본성은 여전히 세상적인 사람입니다.

② 내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외적인 변화도 있습니다.

    내적인 변화는 반드시 외적인 변화가 동반되지만,

    외적인 변화는 내적인 변화가 없이도 종종 일어날 수 있습니다.

③ 어떤 사람이 불경스러운 길에서 경건의 모양으로 돌아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이쪽에서와 저쪽에서가 여전히 같습니다.

 


#27

2) 참된 변화는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여기서 영적인 변화에 미치지 못하는 변화는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도덕적인 변화 이상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예의가 바른 것,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받는 것은 영원한 구원을 이루는 데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이르는 길을 착각하지 않고, 착각 속에서 멸망을 받지 않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마침내 어리석은 자로 발견되지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구원의 큰일, 즉 영적인 바보보다 더 어리석은 바보는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에 대해 영원에 대해 바보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심의 철저한 역사를 찾아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이 영혼에 구원하는 변화를 일으키시기를 하나님께 간청하시고,

여러분이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간청하십시오.

성령님이 주시는 구원함의 변화,

마음의 변화 이외의 다른 변화는 우리를 그리스도인이 되다 말게 할 뿐입니다.

 


#28

11. 종교적인 일에 열심일 수 있음

당신이 비록 종교적인 일에 열심을 낸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한갓 유사 그리스도인일 수가 있습니다.

 


유다 왕 예후도 하나님을 섬기지도 믿지도 않고, 하나님이 명하신 일도 행하지는 않았지만 열심은 있었습니다.

<열왕기하>

10:16 가로되 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 하고 이에 자기 병거에 태우고

10:17 사마리아에 이르러 거기 남아 있는 바 아합에게 속한 자를 죽여 진멸하였으니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이르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10:18 예후가 뭇 백성을 모으고 이르되 아합은 바알을 조금 섬겼으나 예후는 많이 섬기리라

10:19 그러므로 내가 이제 큰 제사를 바알에게 드리고자 하노니

         바알의 모든 선지자와 모든 섬기는 자와 모든 제사장들을 한 사람도 빠치지 말고 불러

         내게로 나오게 하라 무릇 오지 아니하는 자는 살리지 아니하리라 하니

         이는 예후가 바알 섬기는 자를 멸하려 하여 궤계를 씀이라

10:20 예후가 바알을 위하는 대회를 거룩히 열라 하매 드디어 공포하였더라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겁니다

<마태복음>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열심 있는 자가 천국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그 열심이 가짜인 경우도 있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를 보십시오.

그들의 열심은 거짓되고 위조된 열심이었습니다.

<레위기>

10:1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10:2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29

▣ 위조되고 거짓된 열심에 대해 일곱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 지식이 없는 맹목적인 열심은 위험합니다.

마치 바보의 손에 들린 불과 같습니다.

바울이 회심 전에 가졌던 열심입니다.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열심입니다.

<사도행전>

 26: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빌립보서>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2) 편향적 열심은 어떤 일에는 뜨겁지만, 다른 일에는 얼음처럼 차갑습니다.

하나님 사랑에는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7:9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7:10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7:11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7:12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7:13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다른 하나는, 첫 번째 면을 소홀히 여깁니다.

즉 하나님에 대해 거룩하기보다는 사람에게 인정을 받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나누는 사람은 참 성도가 아닙니다.

열심히 부분적이라면 그것은 영적으로 이상이 있음을 알려주는 징후입니다.

 


3) 잘못 놓인 열심은 가치에 대한 불이해의 결과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근실하게 드리지만

율법의 더 중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무시합니다.

<마태복음>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즉 신앙의 본질보다는 의식에 더 열심을 냅니다. 거룩한 삶보다는 거룩한 제의에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4) 이기적인 열심은 그 동기가 자신의 목적과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5) 외적인 열심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열심입니다.

그들은 손을 씻지 않고는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죄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겉과 속이 다릅니다.

<마태복음>

6: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자기중심적인 열심은 다른 사람을 향하여 흘러갑니다.

즉 다른 사람의 잘못은 보지만 정작 자신의 잘못은 보지 못합니다.   

 


7) 성경적 근거가 없는 열심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것으로

사울 왕이 아멜렉을 진멸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우양과 소를 남겨둔 것과 같습니다.

남겨둔 이유는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열심이 맹목적인 열심이거나, 편향적인 열심이거나,

이기적인 열심이거나, 외적인 열심이거나, 변론적인 열심이거나, 죄로 가득한 열심이거나,

성경적근거가 없는 열심이라면 분명히 그 사람이 신앙적인 열심을 보일지라도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유사한 그리스도인일 수가 있습니다.

 

 

 


#30

12. 기도를 많이, 열심히 할 수도 있음

당신이 비록 오랫동안 많이, 그리고 자주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닌 유사 그리스도인일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1) 열납되지 않는 기도


반론
 그러나 기도한다는 것은 신실한 마음의 증거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성도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시 24:6)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응답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도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기도는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고,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 것으로 믿음과 의지가 수반되는 기도를 드리는 자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기도에 문외한 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31

▣ 은혜가 없는 잘못된 기도

① 사람의 본성에 따라 기도할 수 있습니다. 

② 어떤 죄를 가리기 위하여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독실한 바리새인이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마 23:14 KJV]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들이 과부들의 집을 삼키며 남들에게 보이고자 길게 기도하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너희는 더 큰 심판을 받으리라.

③ 기도를 하면서도 여전히 죄를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④ 일시적인 것(육적인 것)을 위해서는 많이 기도하지만

    영적인 것들 위해서는 거의 기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⑤ 기도하면서 하나님과는 멀리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기도할 수 있지만 기도에 전혀 마음이 없을 수 있습니다.

    마음의 생각이 없이 기도하는 것은 몸에 영혼이 없는 것과 같다고 유대인들은 회당 벽에 기록해 놓습니다.

    마음이 없는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것으로 우상 앞에서 주문을 외우는 것과 같습니다.

<이사야>

29: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⑥ 어떤 사람의 기도는 거짓말일 수도 있습니다.

⑦ 사람은 외부의 곤란한 환경과 압박 때문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요나서>

1:14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그러므로 본성적으로 기도한다면, 가식으로 기도한다면,

기도할지라도 여전히 죄를 사랑한다면, 주로 일시적인 것만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기도할지라도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다면,

기도가 거짓말이거나 고통 속에서 영혼이 부르짖은 것에 불과하다면

그 사람은 많이 기도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 되다만 사람일 수 있습니다.

 


2) 진노의 표시로 주는 응답도 있음


반론
 기도의 응답을 받는 다는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아닙니까?
 
응답
 물론 기도하여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의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주 심판하여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즉 진노의 표시로 주시는 응답도 있습니다.

민수기 11장의 기브롯핫다아와의 사건을 기억하십시오.

원망과 불평을 하며 고기를 구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메추라기를 주시는데

그것은 응답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였습니다.

<민수기>

 11:31 바람이 여호와에게로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 곁 이편 저편 곧 진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11:32 백성이 일어나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십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진 사면에 펴 두었더라

 11:33 고기가 아직 잇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11:34 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칭하였으니 탐욕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반론
 사람의 감정은 기도할 때 매우 감동됩니다. 감동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참된 표지가 아닙니까?
 
응답
 에서가 축복을 구할 때도 그러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에서가 야곱에게 속아 장자권을 팔고 난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했습니다.

<히브리서>

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12:17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 좋은 생각이 머리에 떠오를 수도 있고, 좋은 말이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것처럼,

자기 자신이 한 일에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굴뚝을 통하여 날아가 버리는 연기처럼 쉬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기도하고 기도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것이 가능합니다.

기도하고 기도에 감동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32

13. 그리스도로 인해 손해를 입을 수도 있음

당신은 그리스도 때문에 재물과 명예와 인격에 손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여전히 그리스도인이 아닌 유사 그리스도인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기 어깨에 지고 간다고 해서 그의 마음/영혼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반론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대해 예수님은 축복을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마 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응답
 그리스도를 인한 고난에도 신실함의 증표인 고난이 따로 있습니다. 선한 목적으로, 선한 양심으로써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고난을 받을 때가 그러합니다. 그런 사람은 고난을 당당히 이겨냅니다.

[벧전 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33

1) 모든 고난이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아닙니다.

① 단순한 신앙고백 때문에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즉 세상이 신앙을 드러내는 것을 미워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도 값을 치러야 할 때가 있습니다.

② 잘못된 원리로 인한 고난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사랑이 없으면서도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고난의 유일하고도 고상한 근거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른 여러 가지 목적으로, 잘못된 원리로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고난을 받음으로 상급을 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헛된 영광과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가룟 유다처럼 자신의 유익을 추구할 수 있으며,

또한 소크라테스처럼 자기의 주장을 고집하며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주장하다가 죽었지만

그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고집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되 단순히 신앙고백 때문에 받는다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되 잘못된 원리로 인한 것이라면

그는 여전히 유사 그리스도인일 수 있습니다.

 


#34

14.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수도 있음

비록 당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부르심을 받아들였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유사 그리스도인일 수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가룟 유다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반응하였지만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35


반론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구원하시기로 작정된 자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응답
 어떤 의미에서 복음 아래 있는 사람은 모두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복음 아래 있는 사람이 모두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1) 성령의 특별 사역인 내적 부르심(유효한 부르심)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주관적으로 특별은혜를 주시는 것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진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을 입은 자는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2) 말씀의 사역인 외적인 부르심

외적인 부르심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 사는 사람으로 모두가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들음으로 모든 영혼이 회개하고 천국과 구원의 확실한 기초를 다지도록 부르십니다.

그러나 이런 부르심을 받은 사람 모두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① 부르심을 받지만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마치 부르심을 받고 나오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22: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22: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즉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가 없는 것입니다.

② 부르심에 반응해 나오지만 나중에 떨어져 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데마가 그랬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으로 갔습니다

<디모데후서>

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자들도 그들이 싫어하는 교훈을 가르치자 많은 사람이 떠나갔습니다.

<요한복음>

 6: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외적인 부르심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리스도께 왔지만 회심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진다면,

그는 비록 하나님의 외적인 부르심(복음의 초청)을 받았지만

그는 여전히 그리스도인이 아닌 유사 그리스도인에 불과합니다.

 


#36

15. 성령을 받을 수도 있음

당신이 비록 성령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유사 그리스도인일 수 있습니다.

 


발람은 이방 복술자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축복했을 때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주어졌습니다.

<민수기>

24:1 발람이 자기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심을 보고

       전과 같이 사술을 쓰지 아니하고 그 낯을 광야로 향하여

24:2 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거하는 것을 보는 동시에 하나님의 신이 그 위에 임하신지라

 

 

그리스도의 전도 파송을 받고 돌아온 가룟 유다도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복음>

10:17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반론
 성경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롬 8:9). 그러므로 누구든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응답
 성령을 소유하고 사는 것은 성도의 참된 표증입니다. 즉 성령께서 은혜와 성화, 거듭남의 열매를 맺게 하는 주도적인 원리가 되실 때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롬 8:26), 우리와 영원토록 동행하시는 것입니다(요 14:16).

[롬 8:26a]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37

그러나 성령을 받는 사람이 모두가 이런 방식으로 받는 것은 아닙니다.

1) 성령께서는 일시적으로 임하시지만, 거주하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성령은 오직 성도 안에만 거하십니다. 위선자는 일시적으로 성령을 보유할 수 있지만,

    성령이 영원토록 그와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2) 성령을 보유할 수 있지만(일반은총), 성령으로 태어난 것(특별 은총)은 아닙니다.

    참된 성도는 성령으로 중생합니다.

    위선자는 성령의 은사를 받을 수 있지만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조명의 방법으로 위선자 안에 계실 수 있지만 성화의 방식으로는 계시지 않습니다.

    위선자는 죄를 깨닫지만 회개의 방식으로는 아닙니다.

 


3) 종의 영으로 성령을 보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율법의 속박을 받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죄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깨닫게 하고 인식하게 하는 성령의 작용입니다.

    성령은 종종 구원하는 은혜가 없이도 임하실 수 있습니다.

    가인과 가룟 유다에게 구원의 은혜가 없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종의 영(율법의 깨달음)을 받았지만 양자의 영(구원하는 은혜)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믿음이 일시적이거나, 일반적인 것들에 근거하고 있거나,

단지 이해에 자리 잡고 있거나, 체험이 없거나, 상한 심령이 없거나, 새로운 마음이 없다면,

그가 믿음을 소유하고 ‘하늘의 은사’를 맛볼 수 있더라도

그는 여전히 유사 그리스도인에 불과합니다.

<히브리서>

6: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38

16. 믿음을 가질 수도 있음

당신이 비록 믿음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유사 그리스도인일 수 있습니다.


반론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에게는 누구든지 영생과 구원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응답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믿음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1) 구원에 이르는 믿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전 인격의 변화, 의지와 정서(감정, 마음)를 연합시키는 행위,

즉 필요 충분한 구속자에게 영혼을 전적으로 일치시키는 행위입니다.

이 믿음은 마음을 정결케 하며 깨끗케 하는 믿음입니다.

 


#39

2)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 

① 일시적인 믿음입니다.

② 일반적인 것에 근거한 믿음입니다. 일반적인 믿음의 대상은 성경 전체입니다.

     반면 특별한 믿음의 대상은 언약 안에 있는 그리스도입니다.

③ 의지에 자리 잡지 않고 이해에 자리 잡은 믿음입니다.

    많은 사람이 진리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순종하지 않습니다. 약속을 붙들고 적용하지 않습니다.

    의지는 진정한 마음에는 동반되는 행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④ 체험이 없는 믿음입니다.

    약속의 달콤함을 맛보지 못한 믿음으로, 마치 의사가 한 말은 모두 믿지만,

    의사가 처방한 약은 한 알도 먹지 않은 환자와 같습니다.

⑤ 상한 심령이 없는 믿음입니다.

    최소한의 참된 믿음은 굴복하는 의지와 상한 심령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⑥ 새 심령이 없는 믿음입니다.

    변화된 삶과 그에 따르는 열매가 없는 삶입니다.

    그는 구원을 위해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믿지만,

    믿음으로써 구원 받을 정도로 변화하려고 노력을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믿음이 일시적이거나, 일반적인 것들에 근거하고 있거나,

이해에 자리 잡고 있거나, 체험이 없거나 상한 심령이 없거나, 새로운 마음이 없다면,

그가 소유할 수도 있고, 하늘의 은사를 맛볼 수도 있지만

그는 여전히 그리스도인이 아닌 유사한 그리스도인일 수 있습니다.

 


#40

17.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할 수도 있음

당신이 비록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유사 그리스도인일 수 있습니다.

 


성도들에 대한 모든 종류의 사랑이 우리의 성도됨의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바로는 요셉을 사랑하여 2인자의 자리에 앉혔으나 여전히 사악한 자입니다.


반론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증언과는 모순되지 않습니까? 성도를 사랑하는 자는 거듭남의 확실한 증거이며 영생에 대한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형제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은혜에 따른 형제입니다.

[요일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요일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응답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연합을 이루고, 하나님의 형상/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한 성도로서 그 믿음의 성도들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거듭남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성도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죄인을 죄인으로서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의 자녀는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인도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단언하건데, 어떤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41

▣ 다른 이유에서 사랑하는 예

1) 그리스도인의 인격 때문에 존경하여 사랑합니다.

 


2) 그리스도인의 외적인 탁월함 때문에 사랑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위대한 것들 존경하고 사랑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성도가 미움과 멸시를 받는 반면, 부유한 성도는 존경과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모든 자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사실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이용 가치 때문에 사랑합니다.

① 세속적인 존경심은 영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이기적인 목적에서 생기는 자연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의 증거가 되는 사랑은 영적인 사랑입니다.

② 선별적, 제한적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사랑은 제한적이고 한계가 뚜렷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전반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사랑이 자연적인 사랑이나 세속적인 존경심에서 생겼다면,

또는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넓혀지지 않은 제한적인 사랑이라면,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할 수 있지만

아직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한갓 유사 그리스도인에 불과합니다.

 


#42

18.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킬 수도 있음

당신이 비록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순종한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닌, 한갓 유사 그리스도인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8:18절에서 한 관원이 와서 자기는 계명/율법을 잘 지켰다고 자부하면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 더 지킬 것이 없냐고 물었습니다.

<누가복음>

18:18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8:20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18: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그러나 그는 위선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8: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러자 그 관원은 결국 그리스도를 포기합니다.

18:23 그 사람이 큰 부자인 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반론
 그러나 성경은 계명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요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또한 계명을 지키는 자는 그리스도의 친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의 친구인데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습니까?

[요 15: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응답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진실한 순종은 세 가지 특성이 있는데, 순종이 복음적이고, 보편성과 지속성을 지닌 순종입니다.
 

 

 


#43

1) 복음적이고 보편성과 지속성을 지닌 순종

① 그것은 내용과 방식, 동기와 목적에서 복음적인 순종입니다.

a.순종의 내용: 그것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b. 순종의 방식: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령과 진리 안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c 순종의 동기와 목적: 그 동기는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 입니다.

<디모데전서>

1:5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그리고 그 목적은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높이는데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②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동일하게 미치는 순종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던 갈렙, 그리고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했던 다윗의 순종과 같은 것입니다.

<민수기>

14:24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시편>
119:6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이 모두 이런 순종은 아닙니다.

 


#44

2)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순종

이것은 어떤 계명에는 순종하지만 다른 계명에는 순종하지 않습니다.

일부 순종은 불순종이며 결국 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적인 순종의 모습, 즉 사마리아인들의 행위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하>

17:33 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 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3) 본성을 버리지 못한 순종

사람은 순종하면서도 옛 본성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행하는 모든 순종은 겉을 치장한 순종에 불과한 것입니다.

계명을 바르게 순종하기 전에 본성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7: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7: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17: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17:19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성도는 비록 연약한 손/능력일지라도 바른 믿음으로 하는 순종을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위선자는 활동적인 손(능력, 수완, 솜씨)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신자는 가장 신실하고 참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동반한 은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은사는 이미 주셨고 우리는 찾고 활용하면 됩니다.

 


4) 율법 수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순종

율법을 순종하면서도 율법 수여자인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참된 순종의 기초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랑이 없는 순종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5) 목적이 악한데 있는 순종

음흉하고도 이기적인 목적으로 순종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많이 금식하고, 구제하고, 기도하는 것은

그들이 사람에게 영광을 받고, 보이려고 하는 것이라고 마태복음 6장에서 말씀합니다.

행동을 정당하게 만드는 것은 목적입니다.

그러나 목적이 선하다고 해서 악한 행동을 선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한 목적이 결핍되면 선한 행동을 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계명을 부분적으로 순종하고, 옛 본성의 상태에서 순종하며,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순종의 목적이 부당하고 악한 것이라면,

그가 하나님의 계명에 많이 순종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유사 그리스도인에 불과합니다.

 


#45

19. 성화의 모습을 보일 수도 있음

비록 당신이 성화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유사 그리스도인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화가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반론
 히 2:11절은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수 있는데 그리스도인이 아닙니까?
 
응답
 내적이고도 효과적인 성화와, 외적이고도 비효과적인 성화는 서로 다릅니다.
 

 

 


#46

1) 효과적인 성화와 비효과적인 성화

참되고 효과적인 성화는 영혼 속에 작용하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이 성화는 모든 죄를 죽이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여,

‘기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두 가지 위대한 사역에는 무력한,

좀 더 일반적인 성화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성화는 죄를 억제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죄를 죽이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지를 벨 수는 있지만 뿌리에 도끼를 두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화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2) 내적인 성화와 외적인 성화

내적인 성화는 영혼과 그 기능, 이해, 양심, 의지, 기억, 그리고 정서(affection: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는 행동)를 다루는 성화입니다.

반면 외적인 성화는 생활과 행실을 다루는 성화입니다.

내/외적인 성화가 다 함께 일어나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 양자를 다 언급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47

▣ 그리스도인의 참된 성화

그러므로 내/외적으로, 즉 마음과 정서, 그리고 생활과 행실 모두가 성화되어야 온전히 거룩하게 됩니다.

외적인 성화는 내적인 성화가 없으면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또한 내적인 성화도 외적인 성화가 없으면 충분하지 않습니다.

시편 24:4절의 말씀처럼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해야”합니다.

<시편>

24: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내적인 청결은 가장 뛰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외적인 청결이 없으면 충분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고린도후서>

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즉 경건의 모양과 경건의 능력은 병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5절의 말씀은 경건의 모양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가식된 경건의 모양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경건의 능력과 모양을 모두 갖추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외적인 성화가 없이 내적인 성화에 이른 체합니다.

이것은 죄인의 가식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내적인 성화 없이 외적으로만 성화에 이른 체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외식과 불법으로 가득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같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외적인 성화에만 머물러 있고 내적인 성화가 결핍되어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유사 그리스도인에 불과합니다.

 


#48

20. 그리스도인의 외적 의무를 다할 수도 있음

당신이 비록 참된 그리스도인이 하는 외적인 의무와 예배, 이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을 행했을지라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유사 그리스도인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49

하나님의 모든 계명은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 명령은 우리의 몸과 영혼에 내려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에도 내적인 예배와 외적인 예배가 있습니다.

 


1) 예배의 내적 행위와 외적 행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내적 행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고, 기뻐하고 신뢰하는 것 등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외적 행위는 기도하는 것, 가르치는 것, 듣는 것 등입니다.

예배의 내적 행위와 외적인 행위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차이는 불건전한 그리스도인과 신실한 신자를 구별합니다.

<요한복음>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50

① 내적 행위는 행해져야 합니다.

예배의 내적 행위는 행해질 때 선합니다. 행함이 없는 행위는 위선이기 때문입니다.

② 내적 행위가 외적 행위를 선하게 합니다.

즉, 우리의 행위를 선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과 사랑, 하나님을 향한 경외입니다.

③ 하나님에 대한 내적 사랑이 거룩함을 확충시킵니다.

예배의 내적인 행위는 마음을 변혁시키며, 거룩함의 정도를 확충시킵니다.

그러나 외적인 의무로는 언제나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말씀을 많이 듣는다고 해도 거룩하거나 부드러워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면 할수록 더욱 지혜로워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는 더욱 거룩해집니다.

사랑은 성화의 완성입니다.

④ 내적 행위와 외적 의무를 겸비해야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예배의 내적인 요소에는 이와 같이 탁월함이 있습니다.

그 내적 요소에 외적인 의무를 최소한 행해도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이 모두를 함께하지 않으면 외적인 의무를 최대한 행하여도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2) 유사 그리스도인과 참된 그리스도인

유사 그리스도인은 모든 행위를 위선적으로 행할 수 있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은 신실함으로 행합니다.

 


① 위선자는 하나님을 기뻐할 수 없습니다.

위선자는 전능자께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능자를 기뻐하겠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얻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② 외적인 의무에도 충실해야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③ 참된 그리스도인은 위선자의 행보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즉 위선자들이 자신보다 뛰어나고 더 많은 의무를 행할지라도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행함은 위선이기 때문입니다.

 


3) 의무를 다하고 그리스도께 안주해야 참된 그리스도인

의무를 다함으로 안주하는 그리스도인은 유사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2:31절의 말씀처럼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신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은사를 사모하는 것은 의무 행하기를 사모하는 것이고, 기도와 말씀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의무를 행함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안주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51

지금까지의 여러 예들에 대한 질문을 하겠습니다.


질문
 천국에 이르는 길을 아주 많이 나아갔는데도 그리스도인이 되다 말 수 있을까요?
 
응답
 그렇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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