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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방언(Glossolalia / Speaking in tongues)

방언(Glossolalia / Speaking in tongues)

 

 

1. 문자적으로는 "여러 가지 말로 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고, 영적 엑스타시(Ecstasy) 상태에서 알아 듣지 못할 말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현상이고, 현재도 몇몇 오순절파 교회나 다른 교파에서 이를 성령의 직접적인 현시라고 생각하며 발전시켰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 편지에서 이 방언의 과도한 사용을 경고한 바 있다(고전 12-14장).

 

2. 이것은 원시 기독교의 놀라운 현상 가운데 하나였다.  방언은 엑스타시의 상태에서 자신이 성령에 사로잡혔다고 믿었던 기독교인들에게서 나오는 분명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이루어졌다.  기독교도들의 방언은 바울이 세운 교회들-특히 고린도 교회-에서 널리 행해졌지만, 처음 나타난 것은 그보다 앞서 교회가 역사 속에 형성되어 유대와 사마리아로 그 확장을 시작할 때였다(행 2:1-42, 10:44-48, 11:15-17, 19:2-7).

 

이 현상은 기독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고대 세계의 많은 종교에서 발견되었다.  그 현상이 어디서 나타났든 모든 공통되는 요소가 있었는데, 그것은 예배를 받는 신의 영이 예배자를 지배하며 그의 입을 통해 말하며, 그리고 종종 비정상적인 성질의 몸의 진동을 일으킨다는 믿음이었다.  그러한 엑스타시의 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음성기관이 영향을 받아 혀가 마치 주체자의 정신적 통제력을 넘어선 어떤 능력의 작용에 의한 것처럼 진동했으며 말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것은 관찰자에게는 아주 인상적인 것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었다.

 

(1) 오순절의 방언:  방언이 기독교 교회에 처음 나타난 것은 오순절이었는데, 그대 사도들과 그들의 동역자들은 많은 숙고와 기도 끝에(행 1:24) 부활한 예수가 하나니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며(행 2:36), 메시야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며(행 2:29-33) 그리고 그들이 옛 계약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모든 약속들을 유업으로 물려받은 새 계약의 백성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행 2:16-17, 3:25).

그들은 이 확신의 힘에 너무나 크게 압도된 결과 그들을 억제하던 모든 것들을 떨쳐버림과 동시에 영적인 능력의 자원들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고 영적 경험의 새로운 차원들을 창출해냈는데 이들은 비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표현되었다.  이 중대한 사건들을 묘사하는 누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더라"(행 2:4).  유사한 표현들이 계속되었으니, 즉 가이사랴와 에베소에 있는 개종자들도 성령을 받았을 때 '방언으로 말했으며'(행 10:46, 19:6), 베드로는 그 체험이 오순절의 체험과 같다고 당언했던 것이다(행 10:47).  방언은 성령의 내주하심의 확실한 증거였으며,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가장 확실한 증거였던 것 같다.  또한 막 16:17의 후대에 첨가된 몇개의 본문들 안에 '새 방언으로' 말하는 것에 대한 언급이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오순절의 방언들에 관한 몇개의 해명 내지 합리화하는 주장들이 제시되었다.

 

1) 복음전도의 목적을 위해 언어의 기적이 일어났으며, 그로 인해 청중들은 여러가지 외국어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초대교부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 견해를 주장하였다.

 

2) 군중들은 모두 희랍어나 아람어 중 어느 하나를 사용했으며, 그들 중많은 사람들이 희랍어와 아람어를 모두 사용했는데, 그들은 베드로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이해했을 것이며, 특히 여러가지 방언들을 알았던 사람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3) 사도들의 말은 오랫동안 익히 들었던 외래어 관용구와 숙어로 가득차 있었는데, 그것들이 강렬한 정서와 흥분 상태 아래서 잠재의식으로부터 자동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는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  이것을 예증하기 위하여 선례들이 인용된다.

 

4) 또 다른 견해로는 긴밀한 영적인 일치 때문에 말하는 사람의 생각과 감정이 듣는 사람에게 전해졌으며, 얘기되어진 것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모든 합리화의 시도들은 추측적이고 미심쩍은데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방언에 관해 말하는 것에 비추어 볼 때 특히 그렇다.

 

(2) 누가의 기록: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분명하다.  오순절에 말해진 '방언들'은 당혹과 경악에 빠진 군중이 알아들은 외국어들이다.  그러나 가이사랴와 에베소에서 '방언들'이 나왔을 때(행 10:46, 19:6), 베드로는 그 경험을 자신의 경험과 동등시했으나 언어의 기적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그 후로는 사도들이 그러한 기적의 이익을 보았다는 증거가 전혀 없으며 그리고 그것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는데 그것은 희랍어와 아람어가 교회의 필요에 부응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누가가 사도행전을 완성하기 오래 전에 방언의 현상은 바울이 세운 교회들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그것이 외국어를 말하는 능력으로 간주되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다.  바울은 사실 방언은 알기 쉬운 말이 아니며, 이해되지 않으며 그리고 심지어 미친 짓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단언했다(고전 14:9,23). 

 

행 2:4에 나오는 누가의 기록과 바울의 기록 사이〈?조화시킬 수 없는 차이점이 있음이 분명하다.  널리 받아들여진 견해는 두 집필자들이 모두 동일한 엑스터시의 현상을 취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그럼 누가가 한 일은 무엇인가?  몇가지 의견이 제시되었는데 한 견해에 의하면 누가는 방언에 관한 보다 오래되고 보다 믿을 수 있는 전승을 취하고-그전승에서는 술취함에 관한 언급(행 2:13)이 말해 주듯이 사도들의 무아경 및 예언하는 영의 부활(행 2:15, 3:24-25)이 주로 강조되었다-그것을 변형시켜 모든 언어로 율법을 제공하는 랍비의 전통에 따라서 그리고 기독교의 만민에 대한 호소력을 강조하는 누가 자신의 뜻에 맞추어 구체화되고 극화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견해에 의하면 누가는 바울의 영향을 받아 교회를 손상시키는데까지 이른 당시의 방언의 위세를 떨어뜨릴 목적으로 최초의 방언은사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했다는 것이다.또 누가가 방언을 글자 뜻대로 해석했다고도 하고, 방언이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올바른 조건 밑에서 그에 합당한 사람이 듣는다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의 한 형태였다는 견해를 가졌다고 한다.

 

(3) 바울이 세운 교회에 있어서의 방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와 다른 곳에서 매우 잘 알려져 있었으므로 바울은 그것을 설명하거나 서술하지 않고 다만 그것의 이해하기 어려운 엑스터시의 성격을 강조했을 뿐이다.  모국어의 차이 혹은 영적 분위기의 다양성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방언'이 있었다(고전 12:10,28).  어떤 기독교인들은 그 은사를 소유하지 못했으며(고전 12:30) 그리고 예배의 취지를 보호하기 원하는 다른 기독교인들은 그 은사를 억제시키고자 했다(고전 14:39, 골 3:16, 살전 5:19-20; 참조. 엡 5:18-20).  많은 신자들(아마 게바파의 신자들<고전 1:12>)은 그 은사가 성령을 받았다는 확신을 주는 증거라고 하여, 그에 엄청난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그 은사를 가장 귀한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열렬히 원하였다.

 

이 바울의 방언은 인간의 웅변을 넘어서 하나님이 천군들에 의해 찬양받으시는 천상의 언어, 즉 천사의 말(고전 13:1)로 설명되었고, 또 고어체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고 전문적인 언어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만이 아는 고대의 혹은 진기한 언어로서 설명되기도 했다.  이것은 무의미한 공론에 불과하다.무아경에서 터져나오는 소리들 가운데 당시 쓰이고 있던 지방어들의 말의 마디들과 단어들에 유사한 소리들은 진짜 언어라는 인상을 주었을 것은 지극히 있음직한 것이다.  그렇지 않을 수는 거의 없으며 그리고 그렇지 않았다는 증거도 거의 없다.

 

고린도 교회에서의 방언에 대한 과장된 강조 때문에 바울은 그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방언 문제를 다룸에 있어 1) 방언이 금지해서는 안될 성령의 참된 은사임을 인정하고 자신도 그 은사를 가지고 있음을 시인하며(고전 14:5,18,39), 2) 방언이 개인적인 신앙심에 도움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의 수단이며 일반적인 경로를 통해서는 출구를 전혀 발견할 수없는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기회임을 인정하며(고전 14:4; 참조. 롬 8:26-27)

3) 방언이 불신자들에게 주는 표적이요(고전 14:22), '요나의 표적'(마 12:39)과 같이 아무리 참되다 하더라도 냉혹하고 불신앙적인 냉소자들과 비판자들에게는 인전받지 못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임을 인정한다.  바울은 방언의 가치보다 그것이 실제로 쓰일 때의 위험성을 훨씬 더 분명하게 보았다.  그는 공중예배를 드릴 때 전혀 방언을 앞세우거나 권장하지 않았다(고전 14:19,28).  방언은 은사의 목록과 가치의 관점에서 마지막에 나온다(고전 12:10,30, 14:19).

그는 방언을 통제하는 방법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1)   조정의 원리를 적용한다.  영적인 은사들의 사용은 '사랑으로' 교회를 세우는데 있어서 그들이 지닌 가치에 의해 결정되어져야 한다(고전 13장,14:4-5,17-19, 골 3:14; 참조. 엡 4:16).  방언은 너무 개인주의적이고 자기중 심성과 자만심을 조장하며, 기독교적 친교의 유대를 손상시킨다(롬 12:3, 고전13:5, 빌 2:3-4).

 

2) 예배 질서를 지킨다.  교회의 건덕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  방언하는자는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자제하고 침묵해야 한다(고전 14:27-28).  예배가 이해되지 못하거나 혹은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를 쫓아버린다면 그 예배는 실패다.  질서와 고상함이 제일 중요하다(고전 14:13-19,23-33,40).

 

3) 통역의 은사를 행사한다.  방언을 통역하는 능력은 일부 사람이 받는 특별한 은사인데(고전 12:10,30, 14:28), 그 은사는 아마도 영적인 교감을 통해 효력이 생기는 사고의 전이에 의해서 방언되는 것의 내용을 듣는 사람에게 합리적으로 풀이해준다는 능력이다.  이 은사를 얻지 못한 채 방언하는 사람은 그 은사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과 교회 모두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14:13-14).

 

(4) 유사한 현상들:  위에서 서술된 바와 같은 엑스타시 상태에서의 방언은 직업화된 '네비임'인 초기 히브리 예언자들 가운데서 널리 행해졌는데, 그들은 여호와의 열광자들로서 무리를 지어 전국을 떠돌아다녔으며, 음악과 춤으로써 종교적인 열광상태에 몰입하였다(삼상 10:5-13, 19:18-24, 삼하 6:13-17, 왕상 20:35-37).  소위 nabi라는 낱말은 아마도 그들의 엑스터시 상태의 더듬거리
는 말에서 연유했을 것이며,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하지는 않지만 '예언하다'를 의미하는 그들의 'hithnabe'라는 말은 방언에 잘 부합되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헬레니즘 사회에서도 디오니소스 숭배자의 무리들이나 혹은 어떤 비의종교의 신도들은 의식이 갖는 강력한 감정적 압박을 받아 종종 광기에 가까운 엑스터시의 상태에 빠져서 입문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의사를 표시하기도 하였다.수 세기에 걸쳐서 방언현상은 기독교 집단들, 몬타누스주의자들, 카리자르파,어빙파 그리고 감정의 극단적인 상태에 몰입하는 많은 현대의 종파들 가운데서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심리학적인 측면들은 독특한 것이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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