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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에 관하여/유대민족의 역사

[스크랩] 페르시아 멸망과 디아스포라 이스라엘

페르시아 멸망과 디아스포라 이스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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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최고의 영화를 자랑하던 페르시아 왕국 수산성의 궁중정원 폐허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페르시아 국운을 종결지은 가우가멜라 전투”

 

기원전 6세기경 인도유럽어(야벳)족 계열의 유목민들이었던 페르시아인들은 에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인도 그리고 유라시아의 연해까지 지배한 아리안(Aryan)족의 후예들이었다.

 

이들 페르시아인들에게는 말과 기마병이 반드시 따라다녔다. 물론 에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말을 이용하였지만 이들은 말 위에 올라탄다는 생각은 하지를 못하였다.

 

페르시아인들의 초기 벽화 부조를 보면 용사들은 항상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다녔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전차를 끄는 말의 목에 장식된 멍애가 달리는 말의 기동력을 감소시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후 스키타이, 메데(메디아), 페르시아에서는 사람이 직접 말에 올라타는 기마병의 민첩성과 기동성의 전술을 발견하고 발전시켰다.

 

나아가 그들은 고원지대에 왕이 거주하는 왕궁을 건축하면서 아름다움의 극치인 건축과 자연 환경을 각종 나무들로 꾸몄다. 이것을 낙원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낙원으로 상징되는 파라다이스(Paradise)는 원래 페르시아어이다. 고대 페르시아 사람들은 아케메네즈 왕실 정원과 유원지를 이렇게 꾸미고 파라다이자(Pairidaeza)라고 불렀다.

 

고레스 대제는 제국을 평정한 지 20년의 세월이 흐른 후 바벨론을 정복하고 유민 생활을 하던 유대 민족을 예루살렘으로 귀환시켰다. 이러한 역사적 정황은 하나님의 계획된 언약(Covenant)의 성취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사 44:28; 45:1). 당시의 정황은 민족 개념이 희박하였던 관계로 페르시아의 통치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페르시아 통치자들은 엑바타나(Ecbatana)와 페르세폴리스(Perespolis), 수사(Susa) 등을 건축하고 티그리스(Tigris) 강과 인더스 강 사이의 드넓은 이란 공원 각 지역에 왕궁을 지어 도시를 형성하였고 도로를 건설하여 왕의 명령을 받은 칙령을 파발마가 신속하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또한 페르시아는 고유의 종교인 조로아스트교를 신봉하였다. 이 종교는 동양 불교 및 바빌론의 원시종교를 가미한 자연종교로서 이원론 종교를 체계화시킨 마니교의 출현을 제공하는 동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페르시아의 역사 배경 속에서 유대 공동체는 야웨니즘(Yhwhnism)이라고 일컫는 언약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바벨론 근교에서 유럽의 고고학자들은 라쌈서판들(Rassam clay barrel)을 발견하였는데 해독한 결과 그 내용은 고레스의 관용과 통치 철학에 관한 것이었다. 군사적으로 페르시아는 페니키아 수병들을 흡수합병하여 해군정예부대를 창설하고 그리이스를 침공하는데 유용하게 투입하였다.

 

고레스의 관용정책에 따라 많은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귀환하였는데 42,630명이 귀환하였고 뒤이어 7,537명이 귀환하였다(스 2:64-65). 또한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남아 있었다는 것은 그곳에서 그들은 시민권자로서 각종 혜택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해당하는 유대인 무라슈 집안의 부(富)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무라슈 집안은 약 150년 간 은행업과 모든 영역의 신탁업을 하고 있었다. 그밖에 운하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많은 농지소유자들도 있었다.

 

무라슈 집안은 보험업과 임대업을 가지고 있었고 채무 불이행으로 투옥된 자들을 위하여 보증도 서주었다. 그리고 차용금의 20%의 이윤을 받고 차용해 주기도 하였다. 무라슈 집안은 “너희는 그땅에서 집을 짓고 밭을 일구고 그 열매를 먹으라”는 예레미야 29장 28절의 말씀을 지켜나갔다. 이즈음 유대 공동체들(Communities)은 신앙생활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면서 더욱 결속된 조직적 공동체로 형성하여 나갔다.

 

반면에 말라기(Malachi)가 예언하였던 시기는 아하수에로(Xerxes Ⅰ, 486-546 BC)가 통치하였던 시기였던 것으로 추측한다. 말라기 선지자는 학개와 스가랴가 예언하던 시대를 지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종말론적 꿈도 사라져 버린 정황을 적나라하게 책망하였다. 그의 선임자들과 마찬가지로 말라기 역시 오실 메시아를 강력하게 예언하였다(말 4:2).

 

이렇게 유대 공동체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페르시아도 역사의 흐름 속에 필연적으로 닥쳐오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기원전 331년 10월 1일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336-323 BC)과 다리우스 3세(Darius Ⅲ, 336-330 BC)와의 역사의 운명을 결정할 대전투가 가우가멜라(Gaugamela)에서 일어났다. 페르시아 운명을 결정할 이 전투는 고대 도시 아르벨라(Arbela) 외곽 60km 떨어진 넓은 평원에서 펼쳐졌다.

 

가우가멜라 전투가 일어난 그 해 여름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함락한 두로(Tyros)에서 동쪽 방향으로 진군하였다. 그 사이에 다리우스 3세는 페르시아 주력군과 동쪽 총독령 군대를 지휘하며 바벨론 북쪽 아르벨라 평원까지 이동하였다.

 

이전에 알렉산더는 기원전 333년 지중해변의 이수스(Issus)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남쪽과 서쪽으로 계속 진격하였고, 오랜 포위 공격 끝에 두로 요새를 함락함으로써 이집트에서 페르시아 지배권을 박탈한 바 있었다. 이런 점에서 가우가멜라 전투는 페르시아 국운을 종결짓는 전투라 할 수 있다.

 

이 전투에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군을 패배시키고 타프사코스(Thapsacos)에서 유프라데스강을 도강하여 북동쪽 방향으로 진군하였다.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승리한 알렉산더는 예전에 페르시아가 아테네를 불태운 일에 대한 보복으로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워버렸다.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 다리우스 3세는 그의 측근에 의해 살해당했다(330 BC). 이로써 기원전 559년 찬란한 제국의 기초를 놓았던 고레스 2세 이후 대 페르시아 제국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다리오 1세가 그의 비문에서 언급했던 “소그디아를 건너 스키타이부터 에디오피아까지, 신드에서 사데까지, 이것이 내가 다스리던 왕국이다”라고 언급한 대 페르시아 제국은 역사의 전설이 되고 말았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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