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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에 관하여/유대민족의 역사

[스크랩] 이스라엘 역사(포로기 이후까지)

이스라엘 역사(포로기 이후까지)  



고대사 안에서 이스라엘 역사

 

 

 

1. 족장 시대

구약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조상의 고향은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에 위치한 우르였다(창 11:28, 15:7). 우르는 세계 최고 고대 문명 가운데 가운데 수메르 문명의 중심지였다. 수메르 문명은 주전 4000년대부터 시작되어 주전 1700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문명으로서, 고대 근동 세계에서는 최초로 문자를 사용하였고 지금까지 알려진 최초의 법전인 『우르남무 법전』(주전 21세기)을 제정하였고, 또한 지구라트와 같은 장엄한 건축물을 세우는 등 고도의 문명을 이룩하였다. 이러한 고대 문명 발상지의 중심에 살던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은 우르를 떠나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상업 도시였던 하란을 경유하여,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였다. 아브라함이 고대시대에 물질 문명의 면에서는 낙후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가나안 땅으로 이주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창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가나안 땅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게 되고, 이삭은 야곱을 낳게 됩니다. 야곱은 12 아들을 낳게 되며, 야곱의 12 아들은 곧 이스라엘 12 지파의 조상이 됩니다(야곱의 12 아들의 이름, 곧 이스라엘 12 지파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단, 납달리, 갓, 아셀, 잇사갈, 스불론, 요셉, 벤야민). 아브라함으로부터 야곱의 12 아들까지의 시대를 이스라엘 역사에서 `족장 시대'라고 부릅니다. 족장 시대가 연대적으로 어느 때인가 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 족장 시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는 연대에 관하여 구체적인 언급을 전혀 하고 있지 않기 ??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고대 근동 세계에 대한 역사적, 고고학적 연구 결과 족장 시대는 `중기 청동기 시대 제 2 기'(주전 약 2000-1550년)시대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 가나안 땅에 정착했던 야곱의 가족들은 그곳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비옥한 땅을 찾아 이집트의 델타 지역(구약에서는 "고센 땅"이라고 부른다)으로 이주하였다. 구약성경에는 야곱 가족이 `고센 땅'으로 이주했던 때가 언제였는가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다. 그러나 이 때를 고대 이집트 역사에서 `힉소스 시대'와 연계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힉소스 시대'(주전 약 1700-1550년)는 아세아 지역으로부터 이집트로 침투해 들어간 `힉소스'(`이방의 통치자'라는 뜻임)들이 말과 병거를 사용하여 이집트의 14대 왕조를 무너뜨리고, 제국을 장악했던 시대였다. 애굽 역사에서 처음으로 말과 병거를 사용하였던 힉소스들은 델타 지역에 새로운 도시 `아바리스'를 건설하여 수도를 삼았다.

- `이방의 통치자' 힉소스가 이집트를 통치하던 시대에는 요셉과 같은 가나안 출신의 사람이 이집트 조정에서 고관직에 오르는 가능성이 있었고, 또 `요셉 이야기'(창 37-50장)의 무대가 `고센 땅'(델타 지역)이며, 또한 이 이야기 안에 구약에서는 처음으로 말이 끄는 "수레"가 등장한다는 것(창 41:43, 45:19) 등은 야곱 가족이 이집트로 이주한 것이 힉소스 시대였다고 주장되는 근거들이 되기도 합니다. 약 150년간에 걸친 힉소스의 이집트 통치는 이집트 18대 왕조의 아모세 왕이 등장하여 힉소스 왕조를 고센 땅으로부터 추방함으로써 끝을 맺게 되었다(주전 약 1550년).

- 당시의 고대 이집트의 기록에 따르면, 힉소스 왕조가 추방당할 때, 많은 힉소스들은 고센 지역에 그대로 남아 있어 노예의 신분("아피루")으로 전락하였다고 합니다. 이로부터 약 250년이 지난 후, 이집트의 19대 왕조에 속하는 세티 1세(주전 약 1305-1290년)가 등장하였다. 그는 아세아 지역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아세아 지역과 가까운 델타 지역에 군사 비축 도시로서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였다. 그는 이 도시들을 건설하는데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었고, 수많은 `아피루'들이 도시 건설에 투입되었다. `아피루'란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 제일 하층 사람들을 통칭했던 말로서 전쟁 포로, 노예, 건축사업에 동원된 강제 노동자들이 이에 속하였다.

- 출애굽기 1장의 기록을 보면, 야곱의 후손은 이집트에 정착해서 그 수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으며, 12 아들의 후손, 곧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아피루'들과 함께 비돔과 라암셋 도시를 건축하는데 강제 노동자로 동원되었다. 이때가 바로 세티 1세 시대로 보는데,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강대한 이집트 제국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혹독하고 절망적인 강제 노동의 상황에서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였다. 마침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사명을 받았다고 확신한 모세가 출현하였고, 모세의 영도 밑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예의 땅, 이집트에서 벗어나 해방되는 출애굽을 경험하였다. 출애굽의 연대는 일반적으로 주전 13세기 초, 즉 1290년경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출애굽 때 이집트의 바로(고대 이집트 왕을 지칭하는 명칭)는 세티 1세의 뒤를 이은 라암셋 2세(주전 1290-1224년)였다.

- 출애굽의 역사적 사건은 이스라엘을 신앙의 공동체로서 결속시키는 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경험이었다. 그런데 출애굽은 야곱의 12 아들의 후손만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것이 아니었다. 출애굽기 12장 38절의 기록을 보면 "중다한 잡족"들도 출애굽 사건에 동참하였다. 여기서 "중다한 잡족"이란 이스라엘과 함께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던, 혈통적으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닌, `아피루'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모세의 영도 밑에서 출애굽할 때 혈통적인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함께 고난을 나누던 `아피루'들도 대거 출애굽에 동참하였던 것이다. 이들 `아피루'들도 출애굽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공동체 안에 들어옴으로써 모두가 `이스라엘'이 될 수 있었다. 출애굽은 `해방된 아피루'들이 신앙의 공동체 `이스라엘'로 결속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향해 가는 분명한 목적지가 있었다. 그곳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일찍이 그들의 조상에게 약속해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이었다. 그런데 이집트의 고센 땅(델타 지역)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생겨난 `지중해 해안길'(Via Maris)이었다. 이 `지중해 해안길'은 주전 2000년 이전부터 사용된 통로였으며, 오늘날까지도 애굽과 팔레스틴 땅을 잇는 가장 중요한 육로로써 사용되고 있다(구약성경은 이 길을 "불레셋사람의 땅의 길"이라고 부른다. 출 13:17). 그런데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데 가장 빠른 길이 되는 `지중해 해안길'을 택하지 않고, 우회하여 시내 반도를 경유하는 가장 멀고, 가장 험한 길을 택하였다. 그 이유는 `지중해 해안길'은 이집트와 아세아를 잇는 중요한 통로였기 때문에, 그곳에는 이집트의 변경 수비대가 주둔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예의 땅, 애굽을 벗어난 후 그들을 가로막았던 "바다"를 기적적으로 건너는 경험을 하였다. 구약이 기록된 히브리어로는 이 "바다"를 `얌수프'(Yam Suph, 즉 갈대 바다)라고 하였고, 히브리 구약성경을 희랍어로 번역한 `70인역'에는 "홍해"(eruthra thalassa)라고 번역하였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건넜던 "바다"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바다"까지 도달하는데 경유한 지역들, 즉 숙곳, 에담, 믹돌, 비하히롯 등의 지명이 아직까지 모두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미확인 지명들이기 때문이다. 기적적으로 "바다"를 건너 추격하는 애굽 군대로부터 구출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내산 지역과 가데스 바네아에서 오랫동안 체류한 후, 요단 강 동편 지역(구약은 "모압 평지"라고 부른다)으로 갔다. 모압 평지에서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는 죽고,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로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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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나안 정착

 
여호수아의 영도 밑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진입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책이 『여호수아서』이다. 『여호수아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수아의 영도 밑에서 3단계에 걸친 군사적인 승리를 통하여 전격적으로 가나안 땅 전체를 `정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제 1 단계는 모압 지역에서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단 강 계곡 지대에 있는 여리고를 정복하고, 북서쪽으로 진행하여 가까운 아이성을 정복하였다(여호수아 6-8장).

다음 제 2 단계는 가나안 땅 남쪽으로 진격하여 남부 지역의 다섯 도시 국가(예루살렘, 헤브론, 야르뭇, 라기스, 에글론)의 연합군과 싸워 승리하였다(여호수아 10장). 계속 여세를 몰아 남부 지역의 다른 도시들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땅의 남부 지역을 장악하였다.

다음 제 3 단계는 가나안 북부 지역의 정복이었다. 가나안 땅의 남부 지역을 정복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땅을 종단 북상하여 갈릴리 호수 북쪽에 위치한 하솔 성을 점령하였다(여호수아 11장). 하솔 성은 가나안 땅의 북부 지역에서는 최대, 최강의 도시였다. 여호수아서의 기록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솔 성을 점령함으로써 가나안 땅의 "온 땅을 다 취하였다"고 말하고 있다(여호수아 11:23). 이렇게 여호수아서의 기록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수아의 영도 밑에서 3단계에 걸친 단기간의 군사적 승리로써 온 가나안 땅을 `정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고고학적인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복하였다고 하는 가나안의 도시이(예를 들면, 벧엘, 하솔, 라기스, 에글론, 드빌 등) 주전 13세기경에 불에 타서 파괴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고고학적 증거는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기사를 뒷받침해 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호수아서의 기록은 많은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로 이 책은 가나안 땅의 제일 중요한 중심 지역이 되는 중앙 지역의 `정복'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서 24장은 가나안 땅의 중앙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세겜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모여 예배를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겜을 포함한 가나안 중앙 지역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제, 어떻게 점령한 것인가?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여호수아서의 기록은 완전히 침묵하고 있다.

또한 가나안 `정복' 이후의 시대를 기록하고 있는 사사기를 보면, 아직도 가나안 정복이 다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사사기 1:1). 또한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산지에서는 승리하였으나, 평지에서는 가나안 원주민들의 우수한 무기인 철병거 때문에 이스라엘이 승리하지 못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사사기 1:9).

이러한 여러 가지 점을 고려해 볼 때, 가나안 원주민과 비교하여 군사력에 있어서 열세에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먼저 원주민들이 살지 않는 가나안 땅의 산악 지대에 거점을 확보하였고, 이로부터 오랜 시간에 걸쳐 차츰 낮은 경작지대로 이주, 정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점령은 군사적인 정복과 함께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정착의 과정이 병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원주민들의 협조를 받기도 하였다.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도와준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여호수아 2장), 벧엘 성 안으로 들어가는 비밀 통로를 가르쳐 준 벧엘 사람(사사기 1:22-26)들을 보면, 가나안 원주민들 중에서는 "해방된 아피루"들과 함께 가나안 기성 체제를 전복시켰던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복합적인 과정을 거쳐 주전 1200년경에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이 완료되었고, 이로부터 `사사 시대'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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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사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주전 약 1200년) 왕정이 수립되기까지(주전 약 1020년)의 약 200년 동안의 기간을 `사사 시대'라고 부른다. 사사 시대는 여러 가지 점에서 고대 근동 세계에서는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특징들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특징은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점이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왕을 중심한 왕정 제도는 보편적인 정치 제도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지상의 왕을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천상의 왕'으로서 그들을 통치하신다고 하는 `신정 공동체'를 고집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기드온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으로 추대했을 때,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거부하였고(사사기 8:22-23), 아비멜렉에 의한 왕정의 시도는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사사기 9장).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은 왕정 제도를 수용하지 않았으므로, 이 시대에 이스라엘 12지파를 하나의 공동체로 결속시킨 것은 왕권과 같은 정치 권력이 아니었다. 오직 공통된 신앙, 곧 `여호와 신앙'(Yahwism)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로 결속되었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유일신 신앙은 이스라엘의 공통된 신앙이었고, 이 공통의 여호와 신앙만이 이스라엘을 하나의 신앙 공동체로 형성시키는 결속력이 되었다.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의 공통된 신앙의 상징은 "법궤"였다. 법궤는 아카시아 나무로 만든 나무상자였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계시다고 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종교적인 상징이 법궤였다. 따라서 법궤는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에 있어서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구심점이 되었고, 법궤가 있는 곳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함께 예배하는 중앙 성소가 되었다.

사사 시대에 또 하나의 특징은 이스라엘에 정규 군대가 없었다는 점이다. 중앙 집권적인 왕이 없었으므로 군대를 조직할 수 없었고, 위기의 상황에서는 민병들이 동원되어 공동의 적을 방어하였다.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사사'들이었다. 사사는 히브리어로 `쇼펫'(Shophet)으로서 `재판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사기에 기록된 사사들의 모습은 위기의 상황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구원자"로서 특별한 능력(카리스마)의 소유자들이었다. 사사기에는 모두 12명의 사사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는 드보라와 같이 여자 사사도 있었다(사사기 4-5장).

정규 군대가 없던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이 당면했던 가장 큰 문제는 외적의 침입이었다.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은 모압, 암몬, 미디안, 가나안 원주민들의 끊임없는 공격을 당하였고, 그들에게 패배하여 지배를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가장 큰 위협적인 존재는 불레셋(Philistines)이었다. 불레셋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 생활을 시작했던 때와 거의 동시대(주전 약 1200년)에 지중해로부터 배를 타고 가나안 지역으로 이주해서 지중해 해안 지역에 정착한 `해양족'들이었다. 불레셋은 지중해로부터 가나안 땅으로 이주해 왔을 때 이미 철기를 사용하였다. 철기를 사용하였던 불레셋은 그 당시까지 아직 청동기시대에 머물러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물질 문명의 면에서 한 단계 앞서 있었다. 이들은 철기의 사용을 독점하였고, 철을 사용하여 가나안 땅에서 창과 칼과 같은 철제 무기를 생산하였다(사무엘 상 13:19-23, 17:7).

이들 불레셋들은 주전 13세기 초 가나안 땅으로 이주했을 때 지중해 해안 지역의 다섯 도시를 중심으로 정착하였다(불레셋의 다섯 도시는 아스돗, 아스글론, 가사, 에클론, 가드였다). 불레셋 사람들이 정착했던 가나안 해안 지역을 "불레셋 사람들의 땅"이라는 뜻으로 "필리스티아"(Philistia)라고 부릅니다. 불레셋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필리스티아를 벗어나 차츰 가나안 땅 내륙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그렇게 되자 가나안 땅에 이미 정착해 살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내륙으로 밀고 들어오는 불레셋인 사이에는 자연히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구약성경에서는 사사 중의 한 사람이었던 삼손 이야기로부터 불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의 알력과 충돌을 기록하고 있다(삿 13-16장).

무기면에서 우세한 상황에 있었던 불레셋과 이들의 내륙 진출을 저지하려는 이스라엘 사이에 무력 충돌은 사사 시대에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에 주전 1050년경 아벡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측은 불레셋에게 크게 참패했을 뿐만 아니라,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법궤까지도 그들에게 빼앗기고 마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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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왕정의 수립

아벡 전투에서 불레셋에게 법궤까지 빼앗기는 참패를 당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의 위기 의식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스라엘의 민병들은 불레셋의 우월한 군사력 앞에서 대단히 무력한 존재였고, 법궤까지 빼앗긴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존재 자체에까지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군사적, 정치적 위기의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왕정으로 전환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중앙 집권적인 왕정을 수립하고, 정규 군대를 조직해서 효율적으로 불레셋을 방어하지 않으면 불레셋을 도저히 막아낼 수 없다는 위기감이 팽배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불레셋의 위협을 막아내는 방법으로서 이스라엘은 지상의 왕을 세우는 왕정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러한 군사적 위기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무엇보다도 `유능한 군사적 지도자'로서의 왕이었다. 그러나 한편 이스라엘 사람들은 절대적 왕권을 갖는 왕이 아니라 제한적인 왕권을 행사하는 왕정을 원하였다. 따라서 강한 지파보다는 약한 지파 출신의 사람이 적합하였다. 벤야민 지파 출신의 사울은 몇 가지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가장 약소한 벤야민 지파의 무명의 가문 출신으로서 지파나 가문을 배경으로 왕권의 확장을 시도할 위험이 적은 인물이었다(사무엘 상 9:21). 또한 그는 유능한 군사적인 지도자로서 이스라엘을 불레셋의 위기로부터 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다(사무엘 상 11장).

시대가 요청하는 인물 사울은 당시 사사 직분을 감당하였던 사무엘로부터 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고,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왕으로 등장하였다. 이렇게 불레셋의 위기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사사 시대로부터 왕정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사울왕은 이스라엘의 최초의 왕으로서 왕국의 수도를 그의 고향인 기브아로 정하였다. 기브아에서 발굴된 사울왕의 왕궁은 작은 규모에 대단히 소박한 `요새 궁전'으로서 사울왕의 제한된 왕권을 반영하고 있다. 사울왕에게 맡겨진 최대의 과제는 불레셋의 위협을 막아내는 일이었다. 약 20년간에 걸친 사울왕의 통치 기간은 불레셋과의 전쟁으로 일관하였다(사무엘 상 14:52).

그러나 사울왕에게는 불레셋과 같은 대외적 문제뿐 아니라, 그를 괴롭혔던 대내적인 문제가 있었다. 첫째로 그는 사무엘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왕으로 기름 부어 준 마지막 사사로서 이스라엘의 전통적 권위를 상징하는 사람이었다. 사무엘은, 사울이 제한된 왕권 이상으로 왕권을 확대시키려고 한다고, 사울을 의심하게 되었고(사무엘 상 13:8-15), 또 이스라엘의 성전의 전통을 무시하는 위험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사무엘 상 15장).

사무엘의 지지를 받지 못한 사울왕은 정치적으로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는 젊은 장군 다윗으로 인하여 심리적으로 병들어 가게 되었다. 유다 지파 출신의 다윗은 젊고 유능한 장군으로서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많은 전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울왕보다 다윗의 전공을 더 높이 평가하고, 다윗이 더 많은 인기를 차지하게 되자 사울왕은 다윗에 대해 질투와 경계심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고, 다윗은 도피와 망명 생활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사무엘 상 19-30장).

사울왕으로서는 사무엘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유능한 다윗을 스스로 적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울왕은 계속 공격해 들어오는 불레셋을 저지하기에는 너무도 역부족이었다. 주전 1000년경, 길보아 산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불레셋에서 참패를 당하였고 사울왕과 그의 세 아들은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사무엘 상 31장). 불레셋을 저지하기 위해서 왕이 되었던 사울왕은 결국 불레셋과의 전투에서 전사함으로써 실패한 왕으로 종말을 맞았다. 사울왕이 전사한 후, 역사적 상황은 대단히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길보아 산 전투에서 승리한 불레셋 사람들은 가나안 땅 내륙으로 깊숙이 침투하여 가나안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 맞게 된 최대의 위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울왕의 아들 이스보셋은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이 때 이스라엘 12지파 중에 10지파는 이스보셋왕을 사울 왕가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왕으로서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남쪽 지역의 유다 지파(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에 동화되어 있었다)만은 유다 지파의 영웅인 다윗을 그들의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로써 사울왕이 전사한 후 사울왕의 뒤를 이은 이스보셋왕과 유다지파가 추대해 세운 다윗왕 사이에 이스라엘은 둘로 분열되어 심각한 싸움이 일어났다(사무엘 하 3:1). 이스라엘은 불레셋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내분으로 걷잡을 수 없는 혼돈의 상태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스보셋왕은 암살을 당해 죽고 말았다. 이스보셋이 암살당해 죽게 되자 사울 왕가를 지지하던 10지파의 장로들은 할 수 없이 유다 지파의 왕 다윗을 찾아가서 그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북쪽 10지파 장로들은 계속되는 불레셋의 위협 앞에서 당시의 위기로부터 구해 줄 사람은 다윗밖에 없다는 판단을 한 것이었다. 이 때가 사울왕이 전사한 지 7년 반이 지난 후였다. 그 동안 이스라엘의 역사는 위기와 혼란 속에서 표류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주전 1000년경 다윗왕은 이스라엘 12지파 전체의 왕으로서 등장함으로써 일시적인 이스라엘의 내분과 분열은 끝나고 통일 왕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된 다윗왕은 제일 먼저 왕국의 새로운 수도를 정하였다. 유다 지파의 왕으로서 다윗은 남방에 위치한 헤브론에서 통치하였다. 그러나 헤브론은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윗왕은 그 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복하지 못하였던 난공불락의 도성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 곳을 새 수도로 정하였다. 이로써 예루살렘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고, 그 후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다윗왕은 예루살렘을 정치적인 수도와 함께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중심지로 만들기 원했다. 그리하여 불레셋에게 빼앗긴 후 방치되어 있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놓았다. 법궤가 예루살렘에 안치됨으로써, 예루살렘은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중심지가 되었다.

다음으로 다윗왕의 큰 업적은 그 때까지 이스라엘의 최대의 위협적인 존재로 되어 있던 불레셋과 싸워서 크게 승리하고 그들에게 항복을 받아 낸 것이다(사무엘 하 8:1). 이로써 다윗왕은 사사 시대 이래로 이스라엘의 생존을 가장 위협했던 불레셋 문제를 해결하였다. 또한 그는 주변의 나라들, 모압, 아람(시리아), 에돔, 암몬 나라들을 모두 정복함으로써 이스라엘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영토를 확장시켰다. 다윗왕의 군사적 승리로써 이스라엘은 주변의 나라들에게 굴종하고 수난당하던 약자의 상황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고 그들 위에 군림하는 강자로서 위치가 바뀌어지게 되었다. 변화된 역사적 상황에서 한가지 특기할 일은 이스라엘이 강자로서 위치가 바뀌어짐에 따라 이스라엘에는 나단과 같은 예언자들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다. 예언자들은 왕의 잘못까지도 질책하여, 이스라엘 왕권을 남용하거나 절대화하는 것을 경계하였고, 사회적 약자를 변호하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였다.

다윗왕 때 마련된 새로운 정치적 제도 가운데 하나는 세습적인 다윗 왕조의 기반을 확고하게 하는 왕조신학이 확립된 것이다. 그것은 예언자 나단의 입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다윗왕에게 주신 약속(언약)의 형태로 되어 있다. "네 집(=다윗 왕조)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사무엘 하 7:16). 다윗 왕조의 영속성을 약속한 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윗 계약'이라고 부릅니다. 이 다윗 계약은 유다 왕국의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다윗왕으로부터 시작된 다윗 왕조는 유다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400년 이상 계속되었다. 다윗왕이 죽게 되자(주전 961년) 그의 왕권은 솔로몬에게 계승되었다. 왕위 계승 서열이 솔로몬보다 우선하였던 아도니야와 솔로몬 사이에는 치열한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으나, 다윗이 솔로몬을 후계자로 지명함으로써 솔로몬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 솔로몬 왕의 통치 시대는 이스라엘에서는 국제화 시대였다. 다윗왕은 통일 왕국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주력하였고, 솔로몬 왕은 확립된 왕권과 신장된 국력에 기초해서 이스라엘의 문호를 개방하여 고대 근동 세계의 일원으로서 활발한 국제 교류를 이룩하였다. 첫째로 솔로몬 왕은 고대 근동 세계에서 일찍이 발달한 `지혜 운동'을 이스라엘에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지혜 운동'이란 고대 근동 세계에서 발전된 학문적, 지성적 활동을 총칭하는 것이었다. 솔로몬왕 이전의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 세계의 학문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여유나 여건이 형성되지 못하였었다. 솔로몬 때에 와서 주변 나라들의 지혜 운동과 그러한 지적 활동의 결과가 되는 지혜문학이 이스라엘에 물밀듯이 들어오게 되었고, 솔로몬왕은 지혜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열왕기 상 4:30-34), 역사적으로 `지혜의 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솔로몬왕은 가나안 땅에서 홍해로 나가는 관문이 되는 에스온 게벨에 항구를 건설하고 이곳을 통해서 활발한 국제 무역을 전개하였다(열왕기 상 9:26-28). 이러한 국제 무역은 솔로몬왕에게 많은 부를 가져다 주었다. 다음으로 솔로몬왕 때 국제화 시대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왕 자신의 국제 왕실 결혼이었다. 솔로몬왕은 주변 여러 나라들과 왕실 결혼을 통해서 국제적 유대 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특히 강대국 이집트 공주와의 결혼은 당시 이스라엘의 국제적 위치를 잘 말해 주는 것이었다(열왕기 상 11장).

이러한 많은 업적 가운데서도 솔로몬왕의 가장 큰 업적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한 것이었다(열왕기 상 6-8장). 그는 레바논 지역으로부터 백향목과 잣나무를 수입하여 7년에 걸쳐서 아름다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성전 안의 지성소에 법궤를 안치함으로써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중앙 성전이 되었고, 예루살렘은 정치적 수도일 뿐만 아니라 여호와 신앙의 중심이 되는 종교적 도시, 성도(聖都)로서 그 위치를 완전히 굳히게 되었다. 솔로몬왕은 성전만 건축한 것이 아니라, 13년에 걸쳐 화려한 궁전도 건설하였다. 이 왕궁은 대단히 사치스러운 궁전으로서 사울왕 때 기브아의 소박한 요새 궁전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 외에도 솔로몬은 건축왕으로서 많은 건축 사업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솔로몬왕은 많은 건축 사업과 사치스러운 왕실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나치게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였고, 또한 과도한 부역 동원을 강요하였다(솔로몬왕이 징수한 세금은 금 666달란트 약 22톤에 해당함 였다고 열왕기는 기록하고 있다. 열왕기 상 10:14). 또한 솔로몬은 지나치게 유다 지파 중심적인 편중된 정치를 하였고, 그 결과 유다 지파를 제외한 북쪽 10지파를 소외시켰고, 이것은 불만의 요인이 되었다(열왕기 상 4장, 9:12-13). 이러한 북쪽 10지파의 불만을 대변한 사람이 에브라임 지파 출신의 여로보암이었다.

- 솔로몬왕이 죽게 되자(주전 922년)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때 북쪽 10지파는 여로보암을 대표로 하여 르호보암왕에게 백성의 부담을 경감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요청을 듣고, 르호보암왕은 유화 정책을 주장하는 왕실의 노장파 의견을 따르지 않고, 강경책을 주장하는 소장파 의견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부담을 경감시켜 달라는 10지파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이에 여로보암은 북쪽 10지파를 규합하여 다윗 왕조로부터 분리하여 새로운 나라를 독립시켰다. 이렇게 여러보암이 분리시킨 나라는 북 이스라엘 왕국이 되었고, 그 자신은 새로운 왕국의 첫번째 왕이 되었다. 이렇게 솔로몬왕이 죽은 후 다윗 솔로몬 시대의 통일 왕국은 영원히 끝이 나고 북쪽 10지파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지파를 주축으로 하여 다윗 왕조가 이끄는 유다 왕국, 두 나라로 분열하게 되었다(주전 9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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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북 이스라엘 왕국(주전 922-722년)

- 여로보암에 의한 통일 왕국의 분열은 깊은 뿌리가 있었다. 일찍이 사울왕이 길보아 산에서 전사했을 때, 북쪽 10지파는 사울 왕가를 이스라엘의 정통성 있는 왕가로서 인정하였고 사울왕의 뒤를 이은 이스보셋을 그들의 왕으로 이의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스보셋왕이 암살당하고 계속되는 불레셋의 위협 앞에서 북쪽 10지파는 할 수 없이 다윗의 왕권을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북쪽 10지파는 다윗 왕권과 다윗 왕조에 대하여 거리감과 이질감을 계속 갖고 있었다. 솔로몬왕의 친 유다 지파 정책과 백성들에 대한 과중한 부담은 북쪽 10지파에게는 더욱 큰 불만 요인이 되었고, 마침내 솔로몬왕이 죽게 되자 북쪽 10지파는 다윗 왕조의 통치로부터 분리하여 독립된 나라를 세운 것이었다.

북 이스라엘 왕국의 여로보암왕(주전 922-901년)은 처음에는 수도를 세겜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세겜은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의 계곡 지대에 세워진 도시로서 낮은 계곡 지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의 공격을 당할 때, 방위하기가 어려운 취약점이 있었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수도를 산악지대의 도시 디르사로 옮겼다. 디르사는 그 후 약 50년간 북쪽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또한 여러보암왕은 남쪽 유다 왕국의 예루살렘 성전에 비견할 수 있는 북쪽 왕국의 성전을 단과 벧엘 두 도시에 건축하였고 특히 벧엘의 성전은 북 왕국의 중앙 성전으로서 역할을 감당하였다.

- 북 이스라엘 왕국은 남 유다 왕국과는 달리 왕조신학이 정립되지 않았다. 유다 왕국에는 다윗왕 때 이미 `다윗계약신학'이 수립되어 정치적인 안정을 가져왔다. 그러나 북왕국에서는 이러한 왕조신학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고, 따라서 정변과 왕위 찬탈이 계속되었고, 정치적으로 대단히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 여로보암왕의 뒤를 이은 나답은 왕위에 오른지 2년만에 바아사에게 암살당하고 여로보암 왕가는 몰살을 당하였다. 바아사가 일으킨 정변으로 여로보암 왕조는 2대로서 단명하게 끝을 맺고 바아사가 왕이 되었다. 이것이 북 왕국의 역사에 계속된 정변 가운데 첫번째 정변이었다. 바아사가 죽은 후, 왕위는 그의 아들 엘라에게 계승되었다. 그러나 시므리 장군이 일으킨 정변에 의해서 엘라왕은 시해당하고, 시므리가 왕이 되었다. 시므리가 혁명으로 왕위를 찬탈하자 오므리 장군은 군대를 동원하여 시므리를 공격하였고, 시므리왕은 승산이 없음을 알자 왕궁에 불을 질러 자결해 버리고 말았다. 이로써 시므리왕의 `7일 천하'는 가장 단명하게 끝이 났다.

- 시므리를 물리친 오므리 장군은 왕위에 올랐고, 오므리왕의 통치기간(주전 876-869년) 동안 북 왕국의 국력은 크게 신장되었다. 오므리왕은 유능한 왕이었으며 북 왕국의 수도를 디르사로부터 사마리아로 천도하였다. 그래서 이후로 사마리아는 북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약 150년 동안 북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오므리는 왕권을 강화하여 그의 왕위는 아합, 아하시야, 여호람으로 오므리 왕조는 이어졌다(오므리 왕조; 주전 876-842년). 그러나 여호람왕 때, 군대의 장군이었던 예후가 혁명을 일으켜서 종교적으로 부패해진 오므리 왕조를 끝나게 하였다. 예후왕이 죽은 후 왕위는 예후 왕조로 계승되었고, 예후 왕조는 북 왕국의 역사에서는 가장 오랫동안 계속되어 이 기간은 비교적 정치적 안정기였다(예후 왕조; 주전 842-745년). 그러나 예후 왕조의 스가리야가 왕위에 오른지 6개월만에 살룸이 혁명을 일으켜 예후 왕조는 끝을 맺게 되었다. 예후 왕조가 끝난 후, 북 왕국의 정치적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혼란에 빠졌고, 불과 20여 년 동안 네 번에 걸친 정변으로 왕위가 찬탈되는 혼란을 거듭하다 마침내 북 왕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여로보암왕에 의해서 북 왕국이 수립된 후, 북왕국의 역사는 앗시리아 제국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 가운데 전개되었다. 앗시리아 제국이 강력한 제국 정책을 추진했을 때 북 왕국은 상대적으로 크게 위축되었고, 반대로 앗시리아 제국의 영향력이 감소되었을 때는 이스라엘 왕국은 번성기를 맞이하였다. 북 왕국은 앗시리아 제국의 영향을 벗어나려고 아람과 동맹을 맺어 앗시리아 제국에 대항키도 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북 왕국의 마지막 호세아는 친 이집트 정책을 써서 앗시리아의 영향을 벗어나려고 하였다. 그러하여 이집트의 군사적 도움을 기대하고 앗시리아에게 바치던 조공을 중단하였다. 앗시리아 제국의 응징은 신속하였다. 앗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는 대군을 동원해서 사마리아를 공격하였다. 3년간에 걸친 포위 공격 끝에 마침내 사마리아는 함락되고 말았다(주전 722년). 이로써 200년간 계속된 북 이스라엘 왕국의 운명은 끝나게 되었다(주전 922-722년).

북 이스라엘 왕국을 정복한 앗시리아 제국은 정복지에 대한 제국 정책에 따라 북 왕국 지역 전체를 `사마리아 지역'이라고 개칭하고, 앗시리아 제국의 한 속주로 만들었다. 또한 그들의 제국 정책의 일환인 인구 교환 정책에 따라 북왕국에 속했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앗시리아 제국의 다른 정복지로 강제 이주시켰고, 다른 정복지 사람들은 `사마리아 지역'으로 이주해 살게 하였다. 그 결과 북 이스라엘 왕국의 10지파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고대 근동의 여러 지역으로 분산되게 되었고 이로써 소위 `잃어버린 이스라엘 10지파' 전설이 생겨나게 되었다. 또한 인구 교환 정책의 결과 `사마리아 지역'에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강제로 이주해 온 사람들 사이에 혼혈이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남쪽 유다 왕국에 속한 유다 지파 사람들은 `사마리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사마리아인'(The Samaritans)이라고 부르고, 이들은 혼혈된 사람들이라고 하여 차별하고, 멸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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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남 유다 왕국

예루살렘을 수도로 한 다윗 솔로몬의 통일 왕국은, 북 이스라엘 왕국이 독립하여 분리해 나간 후, 유다 왕국으로 축소되었다. 남 유다 왕국은 지형적으로 대부분 산악지대와 황무지로 되어 있어, 북 왕국보다는 경제적, 군사적으로 훨씬 열세에 있었으나, 다윗 왕조를 주축으로 한 대내적인 정치적 안정으로, 413년간이나 존속하였다.

솔로몬왕의 뒤를 이은 르호보암왕(주전 922-915년) 때는, 대내적으로 통일 왕국이 분열되는 충격적인 역사를 경험하기도 했고, 대외적으로 이집트의 왕 시삭이 이끄는 이집트 군대에게 예루살렘이 공격을 당하는 전란을 겪기도 하였다. 정치적으로 안정되었던 유다 왕국에서도 일시적으로 다윗 왕조가 중단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요람왕(주전 849-842년)은, 북 이스라엘의 아합왕의 딸 아달랴와 왕실 결혼을 하였고, 그가 낳은 아들 아하시야는 요람왕이 죽은 뒤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러나 아하시야왕은, 북 이스라엘을 방문하던 중, 예후 혁명의 와중에 휩싸여 비명에 죽고 말았다. 아하시야왕이 죽게 되자, 야심이 많던 아달랴는 다윗 왕족을 모두 죽이고 6년 동안 왕권을 장악하였다. 이때 대제사장 여호야다는 다윗 왕조 복위를 위한 정변을 일으켜서, 아달랴를 제거하고, 왕족이 살해될 때 극적으로 살아남았던 7살된 요아스 왕자를 왕으로 즉위시켰다. 아달랴가 왕권을 행사하던 6년간의 기간(주전 842-837년)은 유다 왕국의 역사상 유일하게 다윗 왕권이 중단된 기간이었다.

예루살렘은 유다 왕국의 수도로서 여러 번 적들의 공격을 당하는 수난을 경험하였다. 르호보암왕 때(주전 918년) 이집트 군대의 침공을 당한 것을 비롯하여, 아하스왕 때(주전 735년) 북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군의 공격을 당하기도 했고, 히스기야왕 때(주전 701년)는 앗시리아 제국의 산헤립왕이 이끈 군대의 포위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여러 번에 걸친 공격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적에게 함락되는 위기를 면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에서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성도(聖都)이므로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결단코 적에게 함락되지 않는다고 하는 `예루살렘신학'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유다 왕국의 종교적 상황은, 북이스라엘에 있어서 처럼, 가나안 원주민의 종교였던 바알 종교와 혼합된 혼합 종교의 양상을 띠기도 하였다. 그래서 유다 왕국에는 여러 번 종교정화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히스기야왕(주전 715-687년)의 종교 개혁과 주전 621년의 요시야왕의 종교 개혁은 대규모의 종교 개혁 운동이었다. 요시야왕의 통치 기간이었던 주전 621년에 고대 근동 역사의 큰 전환을 일으키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고대 근동 세계의 패권자로 군림하였던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느웨가 바벨로니아와 메데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함락된 것이었다. 이로써 앗시리아 제국 시대는 끝이 나고, 바벨로니아 제국 시대가 시작되었다(주전 612년).

종교 개혁을 일으켜 구약의 역사가로부터 극찬을 받았던 요시야왕은, 므깃도에서 애굽 군대와 싸우다 전사하였다(주전 609년). 요시야왕이 전사한 후, 유다 왕국의 운명은 걷잡을 수 없이 기울어지게 되었다. 요시야왕이 전사하자 여호아하스는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지 3개월만에 이집트의 왕 느고는 그를 퇴위시키고, 여호야김을 왕위에 앉히었다(주전 609년). 여호야김왕은 처음에는 이집트왕에 충성하였으나, 주전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로니아 군대가 이집트에 대하여 승리하자, 변절하여 승리자 바벨로니아쪽으로 충성을 옮기었다. 그러나 유다 조정에는 친 애굽파가 우세하였고, 주전 601년 양대 세력의 재접전에서 분명한 승리자가 없는 무승부 상태로 끝나자, 여호야김왕은 다시 변절하여 이집트쪽에 충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대왕은 여호야김왕의 배신을 응징하기 위해서 대군을 이끌고 유다 왕국으로 쳐들어 왔고, 마침내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주전 597년). 예루살렘성이 함락되기 직전 여호야김왕은 죽고, 여호야긴이 왕위에 즉위하였다. 여호야긴이 즉위한 지 3개월만에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여호야긴왕과 많은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이것을 `제 1 차 포로'라고 부릅니다(주전 597년). 이때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은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왕의 자리에 시드기야를 왕위에 앉게 하였다. 시드기야왕은 바벨론왕이 왕으로 세워 준, 바벨론 제국의 봉신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시드기야왕은 이집트왕의 사주를 받아 주변 나라들과 연합하여 바벨로니아 반항 운동을 일으켰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대왕은 유다 왕국을 더 이상 용서할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와, 1년 반에 걸친 포위 끝에 예루살렘성을 함락시켰다(주전 587년). 바벨로니아의 왕은 많은 유다 백성을 또 포로로 잡아가고(제 2 차 포로),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키고, 성전을 불태워 파괴시켰다. 이로써 다윗왕으로부터 시작된 다윗 왕조는 끝나게 되었고, 유다 왕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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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바벨론 포로 시대

예레미야서 52장의 기록을 보면, 바벨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 왕국 사람들의 수는 모두 합하여 4600명에 불과하였다(예레미야 52:28-30). 그러나 이들은 유다 왕국의 왕족, 관리, 제사장, 서기관 등 지도층 사람들이었다.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바벨론 근처의 그발 강가의 제한된 지역에 살았다. 포로민들은 그곳을 텔 아빕(Tel Abib)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런데 바벨론 정복자들은 이들 포로들을 종으로 부리기 위해서 잡아간 것은 아니었다. 정복지에서 일어날 수 있는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지도층 인사들을 잡아간 것이었다. 따라서 바벨론의 포로 생활은 육체적으로 노예의 생활은 아니었다. 오늘날 고고학적인 증거를 통해서 볼 때 그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하였고, 경제적으로도 성공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주전 539년 또 하나의 역사적 변혁이 고대 근동 세계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페르샤 제국의 고레스왕이, 바벨로니아 제국의 수도였던 바벨론을 함락시킨 것이다. 이로써 거대한 바벨로니아 제국은 쓰러지고, 페르샤 제국 시대가 시작되었다(주전 539년). 바벨로니아 제국을 멸망시킨 고레스왕은, 고대 시대의 정복자로서는 대단히 계몽적인 정복자였다. 그래서 바벨로니아 제국에게 승리를 거둔 후, 제국의 영토 내에 강제로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은 모두 해방시키는 해방령을 내렸다(주전 538년). 이것은 `고레스왕의 칙령'이라고 부릅니다. 고레스왕의 칙령은 구약성경에 3번 기록되어 있다(역대 하 36:22-23, 에스라 1:1-3, 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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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포로기 이후 시대

고레스왕의 포로 해방령으로, 포로로 잡혀가 있던 유대인들은 귀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모든 포로민들이 다 귀향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 포로민들은 포로지에서 출생한 제 2 세대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포로 해방령이 내려졌을 때, 황폐화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더 넓은 세계로 나가서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하여 포로민 유대인들은 넓은 세계로 흩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넓은 세계로 흩어져 나간 유대인들을 `디아스포라'라고 부릅니다. 나라 없이 전 세계에 흩어져 살게 된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귀향을 선택한 포로민들의 귀향은 모두 4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제일 먼저 귀향(제 1 차 귀향)은, 고레스왕의 칙령이 선포된 직후에 이루어졌다(주전 538년). 이때 귀향민의 지도자는 유다의 왕족 세스바살이었다. 그는 포로로 잡혀갔던 여호야긴왕의 아들이었다. 첫번째 귀향민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파괴된 성전을 다시 건축하는 일을 착수하였다.

두번째 귀향은 페르샤 제국의 다리우스 1세(주전 522-486년) 때 이루어 졌다. 이때 귀향민을 이끈 지도자는 제사장 예수아와 왕족 스룹바벨이었다. 이들은 귀향한 후, 그 동안 부진한 상태에 있었던 성전 재건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주전 515년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완성하였다. 이것을 "제 2 성전"이라고 부르며, 이후부터 두번째 성전이 로마 군대에게 파괴될 때까지의(주후 70년) 기간을 "제 2 성전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두번째 성전은, 포로기 이후 유대인 공동체에서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세번째 귀향은 페르샤의 아닥사스다왕 7년에 이루어졌다(주전 458년). 이 때의 지도자는 서기관 겸 제사장이었던 에스라였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으로 귀향할 때, 귀중한 두루마리책 한 권을 가지고 왔다. 이 책은 오늘날 구약성경의 핵심이 되는 5경(창세기로부터 신명기까지 5권의 책)이라고 추정됩니다. 이 5경은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과 삶의 규범이 되었다.

다음 마지막 네번째 귀향은 아닥사스다왕 20년에 페르샤 조정의 고관이 된 느헤미야의 영도 밑에 이루어졌다(주전 445년). 느헤미야는 페르샤왕으로부터 유다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을 받고 귀향해서, 12년간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많은 사회 개혁을 일으켜 포로기 이후 해이해진 사회 기강과 종교적 질서를 바로잡았다.

포로기 이후, 유대인들은 왕정이 몰락한 상황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공동체'로서 강한 주체 의식을 갖고 역사를 개척해 나갔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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