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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이란 무엇인가 종교와 세속을 포괄한 것이다. 이슬람은 종교가 아니며, 또 무하마드는 이슬람의 창시자가 아니다. 이런 말이 이슬람 교도들에게는 이단적인 말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말은 교조주의적인 이슬람 학자나 이슬람 개혁자가 교의의 기본적 성격으로서 주창하는 말과 별로 유리되어 있지 않다. 즉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슬람은 종교가 아니다. 사람들이 곡해하는 바와 같이 개인의 생활을 스스로 제한하는 것도 아니다. 이슬람은 인간이 완전하게 사는 방법이고 인간 존재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것이다. 이슬람은 세상만사에 걸친, 즉 개인 생활에서부터 사회, 물질, 도덕, 경제, 정치, 법률, 문화, 국가, 국제문제에 이르는 안내의 구실을 하는 것이다. 이 기술은 이슬람의 가장 기본적인 성격으로서 다른 <고등종교>와 어떻게 다른 것인가를 특정 짓기 위해서 이슬람교도이건, 이슬람교도가 아니건 숱하게 거듭해서 강조된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구태여 이슬람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다는 따위의 말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겠다. 이슬람은 종교, 세속 쌍방에 걸쳐 전적으로 합일된 생활방식이며, 신앙이 자세임과 동시에 예배의 방법이고, 거대하며 완전한 법체계이며 문화, 문명 그 자체이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경제 제도이며 상업의 방법이며 정체이며 통치의 방법이다. 그것은 특수한 하나의 사회인 것이며, 가족생활의 방법임과 동시에 상속, 이혼, 의복, 식사, 위생 등을 규정하는 것이다. 즉 세속, 초속양면에 있어서의 정신적 전체성이고 인간의 전체성이다. 그 당연한 귀결로서 이슬람에 있어서는 종교와 정치가 표리일체의 관계에 있다. 매우 강렬한 개성을 가진 카다피대령 (리비아 혁명의 지도자)이 아무리 특이한 정책이나 견해를 세웠다 한들 그는 완전한 이슬람 정통파일 따름이며 그는 "종교적 자각과 정치적 결정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파키스탄의 수상이던 즈르피칼 부토가 아무리 당돌한 정치적 결정을 단행했다 해도 그리고 성실하고 공정한 성명을 발표했다 해도 그가 "예언자 무하마드의 삶의 방식, 가르침은 우리 나라 외교정책, 토지, 노동,교육이나 그 밖의 많은 개혁의 초석이 되어 있다"고 이슬람 제국 수뇌회의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언제나 다름없이 이슬람의 상투적인 정치적 발언을 되풀이 한 데 불과하다. 이와 같이 전 인구의 다수가 이슬람 교도인 국가에 있어서는, 정치는 바로 이슬람의 정치다. 정치를 세속의 일이라 하여 종교와 분리하는 나라는 이슬람 국가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전투적 이슬람」이 오랜 역사의 과거만이 아니고 긴 장래를 가질 수 있다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 장래는, 모슬렘 다수파의 나라에서 아직도 「코란」의 가르침이나 이슬람 교전에 접근해 있지 않은 나라가 있는 한 앞으로도 계속되어 갈 것이다. 최후의 예언자 무하마드 이슬람은 예언자 무하마드가 일으킨 새로운 신앙은 아니다. 어떤 이슬람 개혁자가 말했던 것처럼 「이슬람이란, 무하마드가 최초로 이름을 붙인 신흥종교의 명칭은 아니다. 그러므로 무하마드가 이슬람의 창시자라고 말하지는 않는다.」무하마드는 전임자들의 신앙을 되풀이하는 최후의 예언자임을 믿고 있을 뿐이다. 몇 개 국어로 번역된 무하마드의 삶의 방식, 가르침에 관한 문헌이 나와 있으니까 우리는 그에 대한 윤곽쯤은 알아볼 수가 있다. 무하마드는 고아로 자랐다. 30대에는 종교, 상업의 중심지인 메카에서 상인으로 일단의 성공을 거둔 사람이었다. 신이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무하마드에게 계시한 가르침을 전파하도록 했는데 메카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는 622년 -이슬람력으로는 이 해가 기원이 된다-소수 지지자와 함께 오아시스가 있는 도시 메디나 사람들의 초청에 응하여 메디나로 옮겨갔다. 이를 '히지라'(성천)라고 부르는데 메디나로 성천한 후 무하마드는 10년 사이에 새로운 이슬람 공동체를 조직하여 그것을 강화했다. 메카에서 적의 공격을 물리친 그는 전쟁과 외교적 수완으로 아라비아의 광범한 부족들과 동맹을 맺고, 그들에 대한 지배권을 쥐게 된 그는 마침내 승리자, 통치자로서의 충분한 힘을 얻어 가지고 메카로 개선했다. 만년에 가서 그는 중앙 및 서부 아랍을 접하는 전 지역의, 문자 그대로 영주였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시리아, 이라크에 이르는 북방 내지 북동 방으로 군사공격을 일삼았다. 무하마드 개인에 대해서 말한 자세한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그에 대해서 말하자면 아무래도 「신의사도」라는 가르침이 전면에 강조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의 키는 평균적인 신장이었고 완강한 체구의 소유자였으며, 매부리코와 크고 검은 눈동자, 갈색 피부를 가진 사람이었다. 머리카락과 턱수염은 짙었고 입이 컸다. 그는 항상 당당했고, 걸음걸이는 내리막길을 뛰어가 듯이 급했으며 남들이 따라가기는 힘에 겨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뒤를 돌아볼 때는 얼굴이 아니고 몸 전체로 뒤를 보았다. 그는 결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빠른 어조로 빈틈없는 말을 했다. 여자나 아이들에게 다정했고 동물을 사랑했다. 향수를 좋아했고 양파나 마늘 따위 냄새를 풍기는 것에는 얼굴을 찌푸렸다. 특히 모스크에서 예배 보는 사람들의 입 냄새를 싫어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항상 자기 감정을 참고 누를 수가 있었다. 무하마드는 분명히 개인으로서의 자기와 예언자로서의 자기를 구별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들과 똑같은 사람이오. 신이 나에게 계시한 일에 대해서는 당신들이 나를 따라야 하지만 당신들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는 당신들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소. 그러므로 당신들 자신에 대한 나의 견해가 당신들을 구속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그가 아브라함, 모세, 그리스도 등과 같은 예언자에 이어서 최후의 예언자로서의 위치에 놓여진 이래로 그의 지위와 그의 가르침에 의한 신앙은 유일신, 최후의 심판과 함께 이슬람교의 3가지 기본적 신앙의 하나로 되어있다. 필연적으로 개인으로서의 무하마드의 자세와 예언자로서의 역할은 동일시되고 말았다. 무하마드가 살아간 방식은, 인간으로서의 완전한 모범으로 받아들여졌고, 신심이 깊은 이슬람교도에 있어서는 무하마드는 완전무결한 존재인 것이다. 그가 비판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고, 또 우상숭배를 금한 그의 가르침 그대로 그의 초상화가 그려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코란은 「성서」가 아니다 코란은 결코 무하마드에 의해서 씌어진 성전이 아니다. 「코란」이라는 말의 뜻은 「읽는다」는 것이고,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신이 무하마드에게 계시한 말을 그가 읽었던 것이다. 근대 이슬람 학자로서 뛰어난 사상가인 퍼즐러 라프맨은 코란에 대해서 「순수하게 신성한 말씀이며, 신이 예언자 무하마드의 마음 속 깊이 말하신 말씀이다. 그 성스러운 말씀은 예언자의 마음을 통해서 솟아난 것이지만, 예언자 자신은 한낱 인간일 따름이고 신성한 존재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코란이 아무리 신성한 것이라 하지만 그것이 「성서」일 수는 없다. 그 말씀 자체가 신성한 것이고 신격의 일부분이다.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고있는 이집트의 이슬람 개혁자 아브두는 「코란은 창조된 것이다」라고 그의 문헌에 써 놓았다. 동양학자 W.캔드엘 스미드는 「이슬람에 있어서의 코란은 그리스도교에 있어서의 바이블과 같은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교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라고 정의했다. 이처럼 코란이 성스러운 가치를 가졌음으로 해서 가장 빛나는 아랍어를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금세기까지 엄중히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30년에 케말 아타튜르크가 감히 그것을 시도하여 터키어로 공식 번역하는 추진자가 되었지만 동시에 그는 아무도 그런 일을 맡아 주겠다는 사람이 없음을 알았다. 단지 문학적 견지에서 코란을 말하자면 코란은 아랍어로 된 최고의 작품이다. 코란은 갖가지 길이의 114스라 (장)로 구성된 것인데, 정신적 내용이나 언어상으로도 가지가지 뜻이 깃들어 있다. 무하마드는 글자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그 자신이 붓을 들어 그것을 쓴 일은 없었다. 최종적인 집록은 그의 후계자 손으로 이뤄진 것이었는데, 무하마드의 사후 12년이 지나 제3대째의 후계자에 의해서 완성을 보았다. 그러한 시간적 지체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규범인 원전은 무하마드의 정신과 시간의 흐름을 충실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코란에 관해서는 이슬람교도가 아닌 이슬람 연구가들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것이 일반적으로 합의되고 있다. 즉 코란의 각 장은 거의 연대순으로 재편성된 것이고, 초기 메카 시대의 장과 후기 메디나 시대의 장 사이에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초기 것은 짧으면서 힘차고 종교적 계시로서 약동 적인 정신이 넘쳤으며 세속을 초월한 것이다. 그런데 후기의 것은 길면서 자상한 산문조의 문장이고 세속적이다. 메카 시대의 장은 경고자의 계시이고, 메디나 시대의 그것은 세상을 다스리는 자로서의 계시이다. 무하마드가 약 70명 내지 100명의 지지자들과 함께 메카에서 메디나로 천도한 후, 그는 자기자신이 아주 급속히 성장된 '운마'(공동체)의 장이 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그 때문에 메디나 시대의 계시가 전과 전혀 달라진 것이다. 그는 급속히 발달하는 공동체를 다스려야 했으므로 법률을 제정했다. 이때의 무하마드는 단순한 예언자는 아니었다. 그는 군인이었고-실제로 초기 전투에서는 그 자신이 얼굴에 부상을 입기도 했으며 적어도 1명의 적병을 죽였다고도 한다-, 재상이기도 했었다. 그는 전쟁도 했지만 평화도 이룩했다. 그러면서 그는 또 기막히게 가정적인 남자였다고도 한다. 기본적인 교의 「이슬람의 다섯 기둥」 무하마드는 소박하기보다는 차라리 야성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베드윈(유목민)사회를 건설함에 있어서 5가지 기본적인 종교상의 의무를 정했다. 그것을 이슬람의 다섯 기둥이라고 하는데 ①신앙의 고백 ②'자카드'(의무적인 회사로 내는 세금) ③1일 5회의 예배 ④단식의 달을 이행할 것 ⑤'핫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메카 순례 등이다. 신앙의 고백은 세계의 어떤 종교의 경을 외우는 것보다도 짧고 간소하다-「신은 하나이니라. 무하마드는 신의 사도이니라.」 이런 고백의 말은 이슬람교에 귀의하려는 자 모두가 외쳐야한다. 자카드는 단순히 복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만이 아니고, 메디나 시대에 있어서 수입원이 부족했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전리품이 모아질 때까지의 아주 중요한 재원이었다. 이슬람법은 자마드를 얼마쯤 징수한다는 세세한 문제까지를 정해 놓고 있었는데 우리가 여기서 그 세액을 산출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유목민족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화로 21디나로 또는 은화로 200디르함 이상을 소유한 자는 5퍼센트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는 일정한 과세 평가법칙이 있었고 근년에 와서 자카드는 이슬람 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1일 5회의 예배는(원래는 3회였다는 증거도 있다고 한다) 예배자의 마음을 24시간 신에게 향하게 한다는 의미 이외에 실제생활 면에서도 효과가 있다. 즉 예배자는 예배 전에 정해진 청정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적어도 얼굴, 손,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예배는 메카 쪽을 향해서 하는 것이데(최초에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하였다는데 그것은 그가 아브라함의 전통을 믿고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인 것이다), 1일 5회를 그런 예배를 하고 보면, 몇 억 명이나 되는 이슬람교도가 지구상의 동일지점을 향해서 예배를 하는 것이 되는데 그것은 단일사회의 단일행동과 똑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상징적인 것이 1년에 1회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메카 순례인데 그에 대해서는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다. 자기억제, 금욕으로서의 단식은 많은 종교에서 정신적인 미덕을 높이는 것으로 되어있다. 라마단(단식의 달) 중에는 일출에서 일몰까지의 사이에 식사, 수분의 섭취, 성교는 금지되어 있고, 최근에는 흡연도 금지된다. 더운 나라에서 라마단이 한여름에 실시될 때에는(이슬람력은 태양력보다 1년이 10일 내지 11일 적다) 물을 마시는 일이 금지된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시련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적으로 강제되는 것은 아니고, 야간에는 음식도 취할 수 있으며 라마단에 쓰이는 특별한 음료수와 과자가 있다. 보통 주간의 단식에서 잃은 영양분 이상의 것을 야간 식사에서 보충하는 경우도 많다. 이슬람의 단식은 유복한 자에게 굶주림의 괴로움과 가난한 자에 대한 연민의 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슬람교도의 종교생활사의 토대는 이렇듯 간소하면서도 엄격한 이슬람의 다섯 기둥에 의해서 굳혀져 왔다. 무하마드는 또 메디나의 장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인간의 통치방법을 정했다. 그러나 코란의 전체 6천절 중 겨우 5백 내지 6백 절을 가르치는 메디나의 장만으로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다. 이슬람법의 성립 무하마드의 후계자들은 그의 사후 25년 이내에 탄생된 광대한 이슬람 제국의 통치를 위하여 이슬람법의 제정을 해야만 했다. 그 때문에 예언자의 의도하는 바를 더욱 깊이 파악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을 무하마드의 친척, 친구, 초기의 지지자들의 회상록에서 찾아냈다. 이 회상을 '허디스'(전승)라고 불렀는데, 예언자가 이야기한 것과 행한 것의 두 종류로 분류된다. 그리고 그 두 가지는 '슨나'(예언자가 걸러온 길)라 하여 하나로 모아졌다. 예언자의 언행은 코란의 계시와는 달리 이슬람교도의 경건한 생활규범으로 간주되었다. 허디스는 그의 사후 약 50년 후에 기록되기 시작했는데, 본격적으로 예언자의 언동이 모아지면서부터는 다분히 의도적인 창작도 생겨났다. 따라서 여러 가지가 가미되면서, 예언자의 인물 자체 이상으로 과장되어 버렸다. 이에 대해서 9세기에는 「학식을 가진 자는 전승을 창작해서 허위를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참다운 문제를 피하는 방법으로서 창작을 하고 있다」고 하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후계자들은 7세기초의 메카, 메디나 시대의 상황과는 다른 9세기 중엽의 이슬람 제국의 수도 바그다드에 적합한 허디스를 찾아내어야 했다. 후계자들은 허디스의 이 따위 엉성한 집록을 그대로 방치해 버리지는 않았다. 870년에서 915년 사이에 사망한 몇몇 이슬람 법학자에 의해서 6종류의 허디스 선집으로 정리되었다. 그 중 붓하리와 모슬렘에 의한 두 선집은 「두 가지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지며 신뢰를 받고있다. 거기 수록된 일화나 이야기는 1명 내지 2,3명의 증언에 의해서 입증된 무하마드 자신의 언동을 바탕으로 한 문답형식으로 되어있다. 붓하리의 조사로는 60만 점의 허디스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진실이라고 간주되는 것은 7천 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학자에 의하면 신뢰도가 높은 허디스는 5백 점 정도밖에 없다고 한다. 이런 숫자가 근대 이슬람 학에서는 더욱 감소해간다. 그러나 비록 수효가 적다고 하더라도 석가나 그리스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무하마드의 성격이나 행위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 수 있다. 여기서 믿을 만한 예를 몇 가지 들어본다. 「이 세상 사람은 이방인이거나 여행자이다. 저녁에는 새벽까지 살 것을 기대하지 말고, 아침에는 저녁까지 살 것을 생각하지 말라. 질병이 그대의 건강을 망치기도 할 것이고, 죽음이 그대의 목숨을 빼앗지 않으리라고 어찌 알겠느냐」(이것은 그러므로 물질적인 부를 축적해서 무얼 하겠느냐의 뜻이고, 불교적인 체관론과는 다르다), 「좋은 이슬람교도가 되고자 하거든 자기와 관계없는 일에 관여하지 말라」,「메디나의 모스크에서 하는 예배는 다른 곳에서 하는 수천 번의 예배보다도 가치가 있다. 그러나 메카의 예배는 그보다 더 가치가 있고 다른 장소에서 하는 예배의 10만 번에 값한다. 그러나 그 보다도 더 가치 있는 예배는 신만이 알고 사람이 보지 않는 집에서 다만 무심코 신을 향해서 무릎을 꿇는 일이다」,「이웃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라. 그러면 그대는 신자가 되느니라」,「그대 자신이 바라는 일을 이웃 사람에게 베풀지어다. 그러면 그대는 이슬람의 신자가 되느니라」,「지나치게 웃지 말라. 웃음이 지나친 자는 마음을 잃는 것이니」……. 허디스의 중요성은 그것이 전기나 역사책이기 때문이 아니고 이슬람법에 있어서 코란에 이은 중요한 법이 원천이기 때문이다. 허디스는 예언자의 언행을 상세하게 이야기한 것이며 예언자가 생각한 바를 반영한 것이다. 현재로서는 그것이 성서처럼 간주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코란과 마찬가지로 허디스는 기본적인 정신을 전하는 「말씀」으로서 사용되고 있다. 이슬람 사회의 규범 우리는 여기서 이슬람의 기본적 개념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 이슬람은 한결 뛰어난 「법의 종교」라고 하겠는데, 코란과 허디스, 또는 슨나에 곁들여 '이쥬마'와 '캬스'도 이스라엘 사법의 근원을 이루는 것이다. 캬스는 과거에 있었던 사례 중에서 새로운 사상과 똑같은 케이스를 비교하는 연역적 유추법이다. 그리고 이쥬마는 그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사고방식이다. 이 말의 뜻은 미슬람 공동체=운마 전체의 합의라는 것인데, 이 원칙을 통한 이슬람식 통치는, 매우 민주주의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민중의 의식 속에 법률을 받아들이기 쉽게 함과 동시에 국가 관리의 기능으로서도 효과가 있다. 이쥬마의 사례로서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를 소개해 보겠다. 어떤 종교가가 커피를 마시는 행위는 마땅히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강력히 그에 반대했다. 종교가의 그런 주의주장은 공동체의 합의를 얻지 못하게 되고 그는 결국 커피를 마시는 행위를 인정해야만 했다. 무하마드가 그의 아내 하디자와 함께 시작한 이슬람 공동체의 건설에서 그는 상식과 올바른 마음에 터잡은 확고한 신앙을 쌓았다. 그의 가장 유명한 말의 하나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나의 공동체는 나쁜 짓에는 합의하지 않는다.」 이슬람 공동체는 다수 의견에 의해서 운영되는 국가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그 점으로는 그리스도교의 역할과는 크게 다른 점이 있고, 또 그것은 아주 중요한 점이다. 이슬람의 교의를 배운 자, 라는 것은 동시에 이슬람법을 배운 자임을 뜻하는 것인데 그런 학자를 '우라마'라고 부른다. 그들 종교적 법률가는 순수한 종교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공동체의 책임자이기도 한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들의 공적 입장으로 보아 우라마(가장 정확한 번역을 하자면 「종교인」이라는 뜻이 된다)는 목사나 승려에 가까운 존재이다. '이마무'는 단순히 모스크에서 예배를 지도하는 「도사」인데 그것은 집단예배에서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일이고 꼭 우라마가 해야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칼리파 아루라시둠'(진실을 인도하는 칼리프)이라는 전승에 터잡은 관습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이 '칼리프'라는 것은 무하마드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초대에서 제4대까지의 칼리프, 즉 초대 아브 바크르, 제2대 오마르, 제3대 오스만, 제4대 알리를 가리킨다. 이들 4명이 통치하던 기간은 632년에서 661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이 기간은 이슬람의 황금시대로서 각종 고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4명 중 2명은 암살 당하고 1명은 자택에서 코란을 읽던 중에 참살 당했다. 이슬람과 아랍 세계를 지금까지도 혼미 속에 빠뜨리고 있는 종파의 분열이 이 시대부터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대를 「황금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이슬람교가 서쪽으로는 모로코에서 동쪽으로는 인도까지 그들 세력을 확대하던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불운한 사람들이긴 했지만 영예로웠던 4명의 칼리프의 언동이 전승으로서 이슬람법의 집대성에 첨가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슬람법의 성문화는 767년에서 855년 사이에 활약한 4명의 법학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때 두 개의 큰 학파가 그들 손에서 탄생했는데, 하나는 터키, 중앙아시아, 인도에서 발생된 혁신적인 '하나피' 학파이고 또 하나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생겨난 전통적인 '한바리' 학파이다. '샤리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슬람법의 골격은 9세기 무렵까지 이루어졌는데 그에 의하면 코란은 신성하고 변할 수 없는 성전이라 하였고, 예언자의 언행에 터잡은 허디스(공인된 전승)는 성전은 아니지만 변할 수 없는 것, 그리고 초기 4대의 「정통 칼리프」(제4대까지는 이슬람 세계가 통일되어 있었지만, 제5대 째를 둘러싸고 무아우이아=우마이아조의 창설자를 지지하는 '수니파'와 알리의 일족을 옹립하는 '시아파'로 분열되어 피투성이가 되는 투쟁을 벌였다)의 전승은 비록 신성하다고 까지는 할 수 없지만 존중해야 할 것으로 되어있다. 어떤 법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명기되어 있다-「이쥬티하드의 문은 닫혔다」. '이쥬티하드'란 「독자적 판단」이라는 말인데 그것이 닫혔다는 것은, 모든 판단을 과거의 전례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으로 볼 때 '샤리아'는 서구에서 생긴 근대적인 법체계와는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그것은 「법」이라기보다는「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수니, 시아파의 원류 이슬람법이 종교와 세속의 일을 포괄하는 성격을 가졌음으로 말미암아서 이슬람 개혁자가 항상 직면해야 하는 것은 이슬람법의 전부 또는 일부를 유지해야 하느냐, 폐지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쥬티하드의 문이 닫혔다고 함으로써 절대적 권위를 갖게 된 이슬람법을, 걸핏하면 근대 이슬람 개혁자들은 격렬하게 비판한다. 그들이 의도하는 바는, 이쥬마와 이쥬티하드를 방패로 1천년 전의 옛날로부터 꼭꼭 문을 닫아걸고 있는 샤리아를 두들겨 깨려는 것이다. 제4대 칼리프, 알리의 죽음은 다수파 수니와 소수파 시아의 분열을 초래했다. 알리 이후의 정치관, 종교관은 시아파가 계승했는데 그것은 그대로 이슬람 원시 종교관이었다. 시아파는 이마무의 위치를 신과 인간의 중개역이라는데 두었고 이마무는 동시에 반신격화된 종교 권위자였다. 그러한 이마무가 지도자로서 세속 사회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한편으로 수니파는 중개자를 두지 않고 신자들 개인이 직접 신과 대치한다는 사고방식을 보이고 있다. 불교나 그리스도교에도 이와 비슷한 분열은 있다. 즉, 시아가 대승불교나 로마 카톨릭과 같은 입장이라면 수니는 소승불교나 프로테스탄트인 셈이다. 시아에서는 알리를 12대에 걸친 이마무의 초대로 보고 있으며 신성한 지도자로서 숭배하고 있다. 최후인 12대의 이마무, 무하마드 마하디는 940년에 돌연 세상에서 모습이 사라졌는데 그 후로 그를 계승하는 자는 없다. 시아는 1502년에 샤아(왕) 이스마일에 의해 건국된 신생 페르시아에서 정교가 분리되었다. 두 종파의 교의상의 차이는 다음과 같은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수니는 법률의 근원으로서 코란과 허디스, 공동체의 합의, 「전례」등을 들고 있는데, 이에 반해서 시아는 코란, 허디스, 이마무의 합의, 그리고 이마무의 판단이라는 4가지를 법의 근원으로 삼고 있다. 시아는 허디스의 독자적 집록을 가졌으며, '자파리'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학파를 가지고 있다. 시아파 교도 역시 메카 순례를 하지만 종교상의 정열적인 발로에서 이라크의 나자프와 카르바라에 있는 알리의 두 아들 핫산과 후세인의 무덤을 참배하기도 한다. '지하드'란 무엇인가 전투적 이슬람의 대표자는 이슬람의 뛰어난 점을 찬양하는 것에 너무도 정력적이었기 때문에 이슬람에 대한 다음과 같은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슬람은 칼과 '지하드'(성전)에 의해서 세력을 확대했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범죄에 대해 이슬람 경제는 비현실적이다. 이슬람은 중혼을 인정하고 여성을 차별한다.」 이런 모든 일은 사실 코란에 의해 정해진 젓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정해진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의 사우디 아라비아와 파키스탄의 정부 방침이기도 하다. 지하드라는 말 그 자체는「노력」이라는 뜻을 가진 말에 지나지 않다. 초기의 혁신적 일파인 '하리지'파는 지하드를 이슬람의 5가지 기둥에 곁들인 6번째의 기둥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하마드의 우상숭배와의 싸움이 지하드였던 것이고, 지금도 그것은 의무라고 생각하는 학파가 있다. 그러나 이슬람은 유태교, 그리스도교 등 다른 일신교 신자를 「계전의 백성」이라 하여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으며 초기의 세력 확장 시기에서도 이슬람 국가는 세금을 내기만 하면 그들의 사회를 보호했다. 서구에 이슬람이 침입하자 서구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슬람은 침략자라는 이미지가 심어지게 되었다. 근년에 와서 가장 새로운 지하드로는 1914년에 최후의 칼리프이던 터키의 스루탄이 동맹국 독일을 지원하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던 싸움이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실패로 끝났다. 아주 최근에는 주로 이스라엘에 대한 지하드가 고창되어 있지만 그것은 아직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형벌 코란에 규정된 형벌은 실제로는 실행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부정한 짓을 범한 남녀를 유죄로 규정하고 돌로 쳐죽이는 형벌에 처하기 위해서는 현장을 목격한 4명의 확실한 증인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증인을 찾기는 사실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이슬람교도가 4명의 아내를 가질 수 있다고는 하지만 4명을 공평하게 대할 수 있는 경우(금전의 분배도 포함해서)에 한해서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므로 그것은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이다. 고리대금은 금지되어 있지만 투자에 의한 경제적 수입은 인정되고 있다. 아무리 코란에 엄격한 원칙들이 있다고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7세기 아라비아 세계의 상황에서만 어울리는 것이라는 사실에 이슬람 개혁자들은 이제 동의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러나 시대착오라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이슬람교도, 그리고 운마의 일원이라고 자부하고 있어서 이슬람 규범을 굳게 지켜나가고 있다. 이러한 깊숙한 이슬람의 침투성이야말로 (인물백결』「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100명」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에서 뉴튼, 그리스도, 석가, 공자, 사도 바울보다도 무하마드가 상위에 놓여진 이유이기도 하다. 무하마드보다 6백 년 전에 지구상에 존재했던 그리스도는 분명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지만 그가 세속적인 일의 모든 면에서 영향을 끼쳤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말로써 통치권(가이사)은 종교와 관계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슬람은 통치권이 종교를 떠나서 성립하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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