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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메소포타미야 문명의 역사

메소포타미야 문명의 역사

 

 

1. 메소포타미아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크게 수메르, 아카드, 앗시리아로 나뉘어 진다. 메소포타미아는 그리 스 말로 mesos과 potamos(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두 강 사이의 땅'이란 뜻으로 비옥한 반달 모양의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번영한 고대 문명이다. 바빌로니아·아시리아 문명을 가리키나 넓게는 서남 아시아 전체의 고대 문명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지리적 요건 때문에 외부와의 교섭이 빈번하여 정치·문화적 색채가 복잡하였다. 폐쇄적인 이집트 문명과는 달리 두 강 유역은 항상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국가의 흥망과 민족의 교체가 극심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 전개된 문화는 개방적, 능동적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주위의 문화적 파급과 후세의 영향을 고려해 볼 때 세계사적 의의가 크다.

 

나일강 유역에서 번영한 이집트 문명, 인더스강 유역의 인더스 문명, 황하강(黃河) 유역의 황허 문명 등과 더불어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의 하나로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문명을 가리킨다. 그러나 넓게는 서남아시아 전체의 고대문명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셈족에 속하는 아카드인(人) ·아무르인 ·아시리아인 ·칼데아인 등과 인도-유럽 인종에 속하는 히타이트인 ·카사이트인 ·메디아인 ·페르시아인 및 수메르인 ·엘람인 등이 활약하였으며, 공통의 문자로서 설형문자가 사용되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18세기 후반에 탐험가와 여행가들이 이 지방에 대하여 보고를 하게 되면서 관심을 끌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조각품의 일부 또는 명문이 들어 있는 벽돌을 가지고 돌아온 사람도 있었다. 또, 구약성서에 실린 유명한 ‘바벨탑’이나 헤로도토스의 《역사》 등 고전시대의 작품을 통하여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졌다. 그런데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해명은 아시리아학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2. 메소포타미아의 역사

 

B.C 5000년경: 신석기 시대를 벗어나 채도문화가 발달

 

B.C4000년경: 수메르인들이 정착하여 청동기 문화가 발전하게 되는데 이들이 메소포타미아문명을 발생시킴

 

B.C 3000년경: UR, Lagash. Umma, Nippur, Kish같은 도시들이 발생

 

B.C 24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북쪽지역에 살던 아카드인(셈족)들이 주변국가를 정복하여 통일왕국을 세움. 이로서 수메르인들은 셈족의 지배를 받음

 

B.C 21000년경: 수메르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셈족으로 몰아내고 Dung가 왕이 되어 다스림

 

B.C 1900년경: Gutr족의 침입을 받아 혼란상태가 됨

 

B.C 1800년경: Amor인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정복하고 나라를 세움-바빌 로니아 왕국 이 시대에 함무라비왕이 바빌론市에 수도를 정하고, 성문법을 제정하여 국가의 발전에 기틀을 세웠으나, 고바빌로니아는 B.C 1600년경 카시트에 의해 멸망됨

 

B.C 1300년경: 앗시리아 인들이 세계전역을 통일하여 세계 대제국을 세움. 이들의 철저한 정복정치를 통해 각 지역의 상황을 감시하여 반란의 기미가 있으면 잔악하게 진압하여 속국들을 통치하였다.

 

B.C 625년경: 칼데아인들이 앗시리아인을 멸망시키고 바빌로니아 왕국을 계승하며 신바빌로니아 왕국을 세움

 

B.C 550년경: 페르시아인이 침입하여 바빌로니아왕국을 멸망시키고 페르시아 왕국을 세움. 소아시아, 이집트까지 정복하고 강력한 통치국가를 유지하였다.

 

B.C 330년경: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하고 헬레니즘 세계를 건설하였다.

 

 

메소포타미아는 여러 민족이 침략하고 지배하는 동안 여러 왕조의 교체를 통해 복합적인 문화가 형성되었고, 경제, 과학, 법 등 시대별로 각기 독특한 체계를 이룩하였다.

 

3.메소포타미아의 변천

 

1) 수메르 시대

 

수메르인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동부 산악 지대에 살다가 메소포타미아 남부로 이동하였다. 그들은 원래 거주지에 있을 때부터 어느 정도 문명 단계에 들어서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는 금속과 돌을 함께 사용하는 문명이 알루바이드, 우르크 등과 같은 지역을 중심으로 상당히 발달해 있었다.

 

여기에 수메르인들이 나타난 것은 B.C3500년경이었다.

 

정치는 왕은 신의 대리자로서 최고의 사제가 되었으며, 신권 정치가 실시되었다. 신관, 관료, 전사 등이 지배 계층이었다. 지구라트라는 큰 탑을 가진 신전이 국가의 중심이 되었다. 경제는 교역이 일어남에 따라 상인이나 공인도 나타나게 되었다. 법전은 세계 최고의 성문법인 수메르 법이 1947년부터 발굴되었다.

 

2) 아카드 시대

 

B.C 2350년경 아카드 인이 수메르 인을 정복하고 처음으로 통일 왕국을 세웠으나 오래 지탱하지 못하였다.

 

3) 아무르 시대

 

아무르 인들이 다시 이 지역을 통일하고 바빌론에 도읍지를 정하고 바빌로니아 왕국을 건설하였다. 함무라비 대왕은 B.C 18세기경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하고 '함무라비 법전'을 편찬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였다.

 

4) 인도 유럽 어족의 침입

 

B.C 16세기에 오리엔트 최초의 철기 사용자인 히타이트 인이 침입해 들어와 바빌로니아 왕국을 위협한 후 카사이트 인이 진출하여 바빌로니아를 지배하였다. 그 뒤 이 지역은 오랫동안 분열과 혼란이 계속되다가 아시아아에 의해 통일되었다. (B.C 667)

 

4. 메소포타미아의 문화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농업상의 필요에서 역법(달력)·천문학·수학 등의 실용적인 문화가 발달하였다. 그런데 이 곳 사람들은 이집트인과는 달리 달의 운행을 바탕으로 한 태음력을 만들었다. 이 태음력은 1년 12개월, 1개월 30일로 나누고 3, 4년에 한 번씩 윤달을 둔 것으로, 후세에 널리 사용되었다. 천문학도 발달하여 일식·월식이 있는 날을 미리 알았다.

 

한편 60진법(12진법)에 따른 수학이 발달하여 곱하기·나누기는 물론, 분수·대분수까지 썼다. 그들은 시간이나 각도를 재는 데에도 60진법을 응용하여 1시간을 60분, 1분을 60초, 원의 각도를 360도로 나누었다. 7일을 1주일로 정하고, 1일을 24시간으로 나눈 것도 그들에게서 비롯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도 다신교를 믿었으나, 이집트인과 같은 내세 나상은 없었고, 현세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 그쳤다. 또 그들은 해·달·별 등의 천체가 인간의 운명을 지배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천체의 움직임을 관측함으로써 앞날의 예견하려는 점성술이 크게 성행하였다. 이 점성술은 천문학과 역법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1) 메소포타미아 사회

 

메소포타미아는 셈족의 문명이다. 특히, 수메르인의 문명이 토대가 되었고 아카드·아무르 인들의 문명이 가미되었다. 화폐는 쓰이지 않아서 물물 교환이 이루어졌다.

 

2) 종교

 

현세적 다신교로서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점성술도 현세의 행복을 기원하는 의미로서 발전하였다.

 

3) 과학

 

점성술, 천문학, 태음력, 7요제, 60진법, 24시간, 360도 등이 나타났다.

 

4) 문자

 

수메르 인은 쐐기 문자(설형문자)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점토판에 갈대로 찍어 썼는데 표음 문자로 발전했다. 페니키아 인들이 사용한 문자는 오늘날 알파벳의 시조가 되었다.

(쐐기 문자는 점토판에 새겨진 이 글자들은 가로, 세로로 쐐기를 나란히 놓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쐐기 문자라 하는데, 매우 딱딱하고 익히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나 오리엔트 지역 대부분의 국가들은 쐐기 문자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중동 지역의 역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

 

5) 건축

 

궁전과 신전 건축에 아치와 둥근 천장이 사용되었다. 이 지역은 돌이 매우 귀했다. 그래서 수메르인들은 벽돌로 건축하였으며 그 벽돌을 이용하여 물을 끌어오기 위한 커다란 수로도 건설하였다.

 

6) 미술

 

우루크에서 발굴된 여성 두상과 ‘하얀 신전’은 거의 같은 시대의 대리석으로 된 상으로, 감성적인 표현이 뛰어나다. 또 아스마르의 아브신전에서 발굴된 일군의 신상은 이보다 5세기 정도 뒤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같은 대리석으로 된 것으로 원뿔과 원통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기하학적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들 예배상의 거대한 눈에는 채색된 동공을 끼워 넣었으며, 이는 예배자와 눈에 의한 영혼의 교신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목재와 금박 등을 소재로 만든 조각상이나 부조는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만들어졌다. 즉, 우르 제1·2왕조의 왕묘군에서 발굴되어 현재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떨기나무에 뒷다리로 선 숫양은 그 좋은 예이다.

 

이 밖에도 같은 시대 우르왕묘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황금의 투구와 식기, 조가비를 세공하여 장식한 하프, 그리고 유명한 우르의 스탠더드 등이 미술적 일품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7) 문학

 

수메르인의 문학은 주로 신화를 토대로 한 것이었다. 여러 신화와 전설들은 각 도시의 건설자, 유명한 왕들에 관한 것이었다. 이 중 유명한 것이 우루크시의 왕이었던 '길가메쉬'에 관한 서사시이다.

 

8) 자연 환경

 

이집트가 건조하면서도 상쾌한 날씨라면,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여름에는 무척 덥고, 습도도 다소 높은 데다가 열대성 질병이 흔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양에서 불어오는 타는 듯한 바람은, 비록 사람의 기운을 빼앗아가긴 하지만 대추야자가 열매를 맺는 계절에 맞춰 불어 풍성한 수확을 가능하게 했다. 더욱이 북부 산악 지역의 눈 녹은 물은 바빌로니아 평원에 매년 홍수를 가져왔는데, 그 결과 토양은 물기를 머금게 되었고 대단히 비옥한 진흙층이 그 위를 덮게 되었다.

 

강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홍수가 물러간 지 몇 주일 뒤에는 땅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므로 비옥한 토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관개가 필수적이어서, 이 지역에서는 오래 전부터 정교한 댐과 관개용 운하가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에 이미 구축되었다.

 

5.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지 - 바빌론

 

바빌로니아라는 이름의 왕국이 들어선 것은 기원전 1830년경으로 셈족 계통의 아모리인들이 바빌론시를 중심으로 ‘고 바빌로니아’로 불리는 제1왕조를 세우면서부터다. 이들의 수도 바빌론은 이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정치와 상업의 중심지가 된다.

 

바빌론은 수많은 정복자들에 의해 정복, 파괴, 약탈됐지만 그때마다 다시 복원됐다. 유명한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바빌론을 사상 최대의 성곽을 가진 도시로 건설해 그 세력이 최고조에 달한다. 당시 바빌론에는 위대한 신들을 위한 신전 53개, 마르둑신을 위한 예배당 55개, 대지의 신들을 위한 예배당 3백개, 하늘의 신들을 위한 예배당이 6백개가 있었으며, 여러 신들을 위한 제단이 4백개가 있었다. 이 중에는 ‘신의 문’이라는 뜻의 바벨탑이 있었는데, 이 탑은 7층으로 높이가 90m며 8천 5백만개의 벽돌을 사용했다.

 

6. 메소포타미아의 지방과 이집트의 차이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모두가 강물의 범람을 이용한 효과적인 경지 정리와 대규모의 관개 사업을 통해 문명을 일으켰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세계관과 문화 예술에 있어서는 커다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이집트인에게 있어서 나일 강의 정기적인 범람은 행운이었고, 오히려 범람하지 않을까봐 걱정 할 정도였는데 반해,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불규칙적인 범람은 참혹한 재앙을 가져왔고, 개방적인 지형은 끊임없는 외적의 침입을 불렀다. 이러한 자연 환경의 차이는 메소포타미아의 정치와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집트인이 현재의 풍요로움을 연장하기 위해 인간의 불멸을 믿고 내세를 준비하였다면, 메소포타미아 인은 지극히 현세적인 삶을 꾸려 나갔고, 사후 세계에 대해서는 거의 희망을 갖지 않았다. 또한, 이집트인의 생활이 신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메소포타미아 인은 신에 대해서도 사랑보다는 두려움으로 대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메소포타미아 인은 신을 재앙을 안겨 주는 존재로 인식하였으며, 운명론적이고 현세적인 삶의 방식이 뚜렷하였다. 또 문화적으로도 이집트보다 훨씬 호전적이고, 암울하고, 비관주의적인 특징이 강하였다. 이러한 현실 중심의 가치관은 메소포타미아에 구전되던 수많은 홍수 설화와 전설 등에도 잘 나타나 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석재가 부족하여 점토판을 햇볕에 말리거나 가마에 구워 문서로 사용하였다. 점토판 문서의 크기는 매우 다양하였으며, 그 내용은 모두 쐐기 문자로 기록되었다.

 

수메르·바빌로니아·아시리아

 

1. 메소포타미아 [Mesopotamia]

 

2. 수메르 (Sumer)

 

3. 바빌로니아

 

4. 아시리아

 

 

1. 메소포타미아 [Mesopotamia]

 

서아시아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지역 일대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현재의 이라크를 중심으로 시리아의 북동부, 이란의 남서부가 포함된다.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부근을 경계로 하여 홍적대지(洪積臺地)인 북부의 아시리아와 충적평야인 남부의 바빌로니아로 나누어지며, 바빌로니아는 다시 북부의 아카드와 남부의 수메르로 나누어진다. 수메르에서 일어난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을 모체로 하여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형성되었다. 강 유역을 제외한 지역은 사막 또는 반사막이며, 연간 강수량도 200mm 이하로 건조하다. 유역 일대는 연간 300mm 이상의 강우량과 하천 관개에 의하여 쌀·밀·보리·대추야자 등이 산출된다. 북부 및 동부의 습곡(褶谷)산지는 중요한 유전지대이며, 키르쿠크와 모술이 그 중심지이다.

 

1) 메소포타미아문명의 특색

 

이집트문명과 메소포타미아문명의 기원과 형성기는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양쪽이 사막으로 막힌 가늘고 긴 나일 계곡과 많은 지류에 비하여 사방이 확 트이고 평탄한 메소포타미아 하상지대(河床地帶)는 그 지리적 조건이 대조적으로 다르다. 자연적인 방벽(防壁)이 거의 없는 비옥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어느 쪽으로부터도 외적이 침입할 수 있었으므로 이집트처럼 단일 지도자에 의한 통일국가 형성이라는 이상(理想)은 이루어지기가 어려웠으며, 그러한 야망이 있었던 왕일지라도 그 명맥을 오래도록 지속시켜 나갈 수는 없었다. 예컨대 수메르인 도시국가의 경우, 왕은 진짜 주권자인 각 지방신(地方神)들의 단순한 집사(執事)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들이었음이 알려져 있다. 그것은 지방신이 정치·경제·노동력·생산 등의 일체를 장악하는 이른바 <신권적 사회주의(神權的社會主義)>하의 통제사회였기 때문이며, 신전이 그 행정적인 중심지였다. 따라서 수메르의 도시국가에서는 성역(聖域)에 창고·작업장·서기(書記)의 방 등을 짓고, 그 주위에 주택을 밀집시키는 도시계획이 실현되었다. 그리고 이 성역의 중심을 이루는 높은 지대(地臺)에 신전이 건축되었다. 이러한 인공적인 고지대(高地帶)는 곧 거대한 규모로 발전하였고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견줄 만한 위용을 지니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지구라트(ziggurat)이고, 평원에 있어서의 지표적(地標的) 효과는 사막에 있어서의 피라미드라고 할 수 있지만, 그 기능과 상징하는 의미는 파라오의 분묘인 피라미드와 현저한 차이가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오랜 역사에 있어서 각 지방의 대립항쟁, 외적의 침입, 새로운 세력의 흥망 등은 예사로운 일이었으므로, 전란은 끊이지 않았다. 이와 같은 혼란에도 불구하고 메소포타미아문명은 수메르 이후 약 3000년에 이르렀고, BC539년에 신 바빌로니아왕국이 멸망될 때까지 뚜렷한 특질을 유지하면서 발전할 수 있었다. 미술에서는 수메르미술·바빌로니아미술·아시리아미술, 그리고 신 바빌로니아미술로 구별하여 각각 관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2. 수메르 (Sumer)

 

고대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있는 지역 명이며 고대문명의 발상지로 뒤에 바빌로니아로 불리던 지방의 북쪽 반을 아카드라 하고, 페르시아만에 면한 남쪽 반을 수메트라 했다. 다만 수메트라는 호칭은 아카드인이 부르던 이름이었고, 수메르인 스스로는 키엔기라 했다. 이 지역에 언제부터 수메르인이 와서 살았는지 불분명하다.

 

1) 문자와 언어

 

출토유물의 비교연구로 유별된 우루크기(BC3000년경∼BC2800년경)의 문화가 수메르인에 속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으나, 그것에 선행하는 우바이드기의 분화가 수메르인에 의해 형성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우루크기에 나타난 쐐기문자〔楔形文字〕의 원형인 고졸문자(古拙文字)는 수메르인이 발명한 것이며, BC50년경까지 거의 3000년에 걸쳐 고대 오리엔트 전역에서 사용되었다. 쐐기문자를 채용한 주요 민족은 아카드인·아시리인·엘람인·후르리인·히타이트인·카시트인·우라르투인 등이다. 수메르문화의 대부분은 수메르어와 쐐기문자를 통해 고대 오리엔트로 전해졌다. 수메르어는 접두사 접중사(接中辭)·접미사가 발달한 전형적인 교착어(膠着語)이나, 언어적 계통은 아직 해명되어 있지 않다. 수메르인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주권을 상실한 우르 제3왕조 이후부터 수메르어는 사어화(死語化)의 길로 접어들었으나 이후에도 일종의 문화어로서 존속하고 학습되었다. 대역(對譯)된 어휘표 등이 바빌로니아와 히타이트 엘람 우가리트에 블라에서 다수 발견되었다.

 

2) 도시국가의 형성

 

우루크기로부터 젬데트나스르기(BC 2800년경∼BC 2700년경)에 걸쳐 도시가 출현하여 이른바 <도시혁명>이 일어나 도시국가시대 또는 초기왕조시대(BC2500년경∼BC2350년경)를 맞이했다. 이 시대의 수메르 대도시로는 라가시·움마·우르·우루크·니푸르슈루파크·에리두 등이 알려져 있다. 아카드지방의 대도시 키시도 수메르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각 도시는 저마다 수호신을 모셨으며, 군주는 수호신에게 선택된 주권의 대행자였다. 군주는 엔시(ensi) 또는 루갈(lugal)이라 불렸다. 라가시에서는 BC2500년경 우르난셰왕조가 성립되어 약 150년간 지배했다. 3대왕 에안나툼 1세의 <독수리비문>, 움마와의 경계항쟁을 기록한 5대왕 엔테메나의 <원뿔비문>, 왕위 찬탈자 우르카기나의 <개혁비문> 등은 창의적인 수메르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라가시의 행정·경제 문서에 의하면, 도시국가에는 수공업에 종사한 전문기술자(금·은·청동세공인,·목수· 보석세공인·대장장이·피혁제조인·모직공·표백인·배목수·소목·도공 등), 전업 분화한 어부(바다·담수·운하·늪·투망어부), 원거리 통상에 종사하는 상인 등이 있어서, 신전(神殿)의 분할지가 주어져 있었다. 이들은 신전 직할지의 경영에 참가하였고, 운하·지구(池溝)·제방의 개착과 수리, 성벽의 건조, 기타 공공사업에 종사했다. 가축류는 전문 목축가가 소·당나귀·양·염소·돼지 등을 사육하였다. 곡물은 보리·밀, 야채는 양파류·콩류 등을 재배했다.

 

3) 우르 제3왕조

 

BC2350년경, 키시시(市) 출신의 사르곤이 신도시 아가데(아카드)를 세우고, 수메르의 루갈자게시를 무찌르고 사르곤왕조를 수립하였다. 이것이 수메르·아카드지방을 하나로 묶은 아카드왕국(BC2350년경∼BC2150년경)이다. 약 200년 뒤, 아카드왕국은 자그로스의 산악민족인 구티민족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고, 그 뒤 90년간 메소포타미아는 지배 하에 놓였다. BC2060년경, 우루크시의 왕 우투헤갈이 구티민족의 지배에서 수메르·아카드를 해방시켰으며, 그의 신하 우르남무가 우르 제3왕조를 수립했다. 우르남무왕은 관료조직에 의한 집권적 전제정치를 했으며, 세계 최고(最古)의 법전(수메르어로 씌어진 우르남무법전)의 제정자로서 유명하다. 아카드왕조시대에 융성해진 세계무역은 이 시대에 한층 박차가 가해졌고, 속주제에 의한 통치방식도 채용되어 국왕은 <사방 세계의 왕>이라 불렸다. 다섯 왕이 지배한 뒤, 셈계 민족 아무르인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여 수메르민족은 정치적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며, 수메르·아카드지방은 바빌로니아라 불리게 되었다. 그때까지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종의 공용어 위치에 있었던 수메르어 대신 아카드어가 사용되었는데, 수메르 문화·수메르 종교문서 등은 이 시기에 일제히 문자화되어 수메르어 학습을 위한 문법서·어휘표 등이 작성되었으며 수메르어 문서가 번역되었다. 이신라르사왕조시대(BC1950년경∼BC1700년경 ), 바빌론 제1왕조시대 (BC1830년경∼BC1530년경)에 수메르어로 씌어진 점토판 문서의 내용은 여러 가지이고 방대한 수량에 이르며, 모두 수메르 문화의 높은 수준을 나타내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도시. 현재는 이라크 남부, 바그다드 남동 약 350㎞에 있는 유적지로서, 텔무카이야르(역청의 언덕이라는 뜻)라고 불리고 있다. 《구약성서》에는 <갈대아의 우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아브라함의 고향이라고 되어 있다. 우르크와 함께 오랜 역사를 가진 수메르의 도시로서, 1854년 대영박물관의 위촉으로 이 언덕을 조사한 영국영사관의 J.E.테일러는 비문에 의하여 《구약성서》의 갈대아의 우르임을 확인하였다. 그 후 1918년에 톰슨이, 18~19년에 H.R.홀이 발굴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시굴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본격적인 발굴은 22~34년 C.L.울리경이 지휘한 대영 박물관 및 펜실베이니아대학박물관의 합동탐험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1923~24년에는 우르의 북서쪽 약 6.4㎞ 지점에 있는 알우바이드언덕에서 홀이 중단했던 발굴을 다시 시작하여, 채색토기를 특징으로 하는 이른바 우비드문화를 밝혀냈다. 여기에서 발견된 닌후르사그신전의 주춧돌에는 <우르의 왕 메스안네파다의 아들인 우르의 왕 아안네파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메스안네파다(天神 안이 선택한 영웅이라는 뜻)는 우르 제1왕조(BC 2500∼BC 2400 무렵)의 맨 처음 왕으로서, 이미 알려져 있었던 왕이었으며 신화적이라고 간주되어 왔던 왕조와 왕의 역사적 존재가 후대의 왕조표에서 실증되었다. 그 결과로 연대의 결정과 메소포타미아미술사에서 출토유물의 위치를 알았다.

 

4) 우르의 왕묘(王墓)

 

1927∼29년에는 우르에서 <왕묘>가 발견되었는데, 그 호화스러운 출토품과 많은 인간·소의 순장(殉葬)으로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순장이 있었던 왕묘는 원통인장(圓筒印章)에 의하여 아바르기왕의 것이라고 추정되었다. 왕비 슈브아드·메스카람두그 등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에는 유명한 <우르의 스탠더드>, 황금투구, 황금주발, 큰 잔, 은제(銀製) 배〔船〕 모형, 상감 유희반과 말〔駒〕, 조가비세공(細工)한 장식판이 있는 하프, 금, 라피스라술리, 은, 조개껍데기, 빨간돌 따위의 많은 빛깔을 배합해서 만든 관목(灌木)에 뒷발로 서 있는 숫양상〔牡羊像〕, 수소머리, 그밖에 많은 것들이 있는데, 어느 것이나 높은 기술의 발달을 보여주는 정교하고 미술적으로 뛰어난 것들이다. 건축양식은 최고(最古)의 돔·아치가 채용되어, 수메르 문화의 특징이 되는 플라노콘벡스 벽돌(윗면이 소복하게 부풀어오른 曲面을 이루고 있는 벽돌)이 처음으로 사용되어 있다. 아바르기 왕묘의 순장과 같은 관습이 수메르의 다른 유적이나 문헌에는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 해석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5) 우르의 역사

 

우르 제1왕조는 5왕, 170년으로 멸망했다. 우르는 그 후 사르곤왕조·구티움왕조의 지배를 받았지만, 우르남무왕이 다시 바빌로니아를 통일하여 우르 제3왕조(BC 2060∼BC 1950경)를 세웠다. 우르남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수메르법전의 제정자로 유명한데, 속주제(屬州制)에 의한 통치방식을 채용하여, 속주에 속하는 주요도시들에는 왕의 대리(sagub)를 두고, 관료조직에 의한 집권적 전제왕국을 건설하였다. 제3왕조는 5왕에 의하여 통치되었고, 그 말기에는 엘람인의 반란과 침공을 받고, 또 셈계 유목민족 아무르인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다. 바빌론 제1왕조의 7대 왕 사무스이르나는 치세 11년에 우르와 우르크의 성벽을 파괴하고 황폐해지게 내버려두었다. 신바빌로니아시대에 우르는 다시 부활하였는데,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우르의 신전 지규랫을 재건하였다. 그 후 우르의 이름은 거의 기록에 나타나지 않으며, BC 4세기 무렵에는 벽돌이 흩어져 폐허가 되었다고 추측된다.

 

티그리스·유프라테스 두 강 사이에 있는 메소포타미아지역(현재의 이라크 대부분과 시리아 및 터키 일부)의 미술. 이 지방은 나일강 유역인 이집트와 함께 인류문명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으며 이와 함께 고대 오리엔트문명으로 고찰된다. 이 인류 최고(最古)의 양 문명은 대략 같은 때인 BC3500년∼BC3000년까지의 기간에 각각 역사시대로 접어들었다. 즉 이집트가 파라오(Pharaoh;솔로몬 왕조 시대까지의 이집트왕의 칭호)에 의하여 통일되어 갈 무렵,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수메르인에 의하여 많은 도시국가가 건설되었으며, 점토판(粘土板)에 설형문자(楔形文字)를 이용하여 기록하는 특수한 서법(書法)이 발달하였다. 티그리스강 중류와 상류지방인 북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수메르인 이전의 신석기시대에 속하는 유적이 몇몇 발견되었다. 텔할라프에서 출토된 칠무늬토기〔彩紋土器〕는 이 지방 문명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데, 신석기시대 이후 문명의 진전에 있어서는 남부 메소포타미아가 먼저 주도권을 잡았다. 텔엘우바이드·우루크 등 각지의 문명은 메소포타미아의 초기문명을 대표하고 있다. 그리고 수메르인이 건설한 각 도시국가에 왕이 탄생한 BC3000∼BC2340년에 이르는 초기 왕조시대에는 도시문명과 미술이 크게 발달하였다

 

6) 수메르미술

 

메소포타미아란 그리스어로 두 강의 사이를 뜻하는 말로, 티그리스강(江)과 유프라테스강(江) 사이에 있는 광활한 지역을 가리킨다. 이 지역에는 수만 년 전부터 인류가 살았던 흔적이 있으며, BC 5000∼BC 4000년에는 농경생활을 영위한 정착주민도 나타나고, 이어 BC 3500∼BC 3000년에는 이미 역사시대로 접어들었다. 즉 수메르인에 의해 많은 도시국가가 건설되고 설형문자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수메르인이 건설한 도시국가에 국왕이 나타난 BC 3000∼BC 2340년에 이르는 초기 왕조시대에는 도시문명의 발달과 함께 미술 또한 고도로 발달하였지만,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건축물은 석재가 거의 산출되지 않기 때문에 수메르인은 햇볕에 말린 벽돌이나 목재로 집을 지었다. 따라서 그들 건축물은 건축물의 기초부분을 제외하고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라가시 ·우르 ·우루크 ·니푸르 ·에리두 ·키시 등의 도시 폐허가 그 좋은 예이다. 이 중 우르에서는 초기 왕조시대의 분묘 군이 발굴되고 그 곳에서 천장이 돔으로 된 지하실이 발견되었다. 지구라트[聖塔]도 오래 된 것은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우루크에는 BC 3500~BC 3000년에 건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구라트의 유적이 있으며, 그 성전 바깥벽이 백색 도료를 사용한 벽돌로 건립된 데서 하얀 신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하얀 신전은 구부러진 참배통로가 있는 수메르 종교건축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유구이기도 하다.

 

조각에서도 석재의 부족을 말해 주듯 규모가 큰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신전의 예배상(像)과 봉헌상(像), 기념비적인 부조, 장식조각 등이 여러 유적에서 발굴되었다. 이 중 우루크에서 발굴된 《여성 두상(女性頭像)》는 하얀 신전과 거의 같은 시대의 대리석으로 된 상으로, 감성적인 표현이 뛰어나다. 또 아스마르(고대 이름은 에슈누나)의 아브신전에서 발굴된 일군의 신상(神像)은 이보다 5세기 정도 뒤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같은 대리석으로 된 것으로 원뿔과 원통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기하학적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들 예배상의 거대한 눈에는 채색된 동공을 끼워 넣었으며, 이는 예배자와 눈에 의한 영혼의 교신(交信)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목재와 금박 라피스라줄리[靑金石] ·조가비 등을 소재로 만든 조각상이나 부조는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만들어졌다. 곧, 우르 제1·2왕조의 왕묘군(BC 2000년대 후기)에서 발굴되어 현재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떨기나무에 뒷다리로 선 숫양[雄羊]》은 그 좋은 예이다.

 

이 밖에도 같은 시대 우르왕묘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황금의 투구와 식기, 조가비를 세공해 장식한 하프, 그리고 유명한 《우르의 스탠더드》 등이 미술적 일품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3. 바빌로니아

 

바빌로니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서남아시아의 고대문명, 또는 티그리스강(江)과 유프라테스강(江) 사이 메소포타미아 남동쪽의 지명으로, 하늘까지 닿으려던 탑과 영원한 번영을 꿈꾸던 황금성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 일찍이 세계 4대 문명의 가운데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로 알려진 곳이다.

 

기원전 4천 년경부터 수메르인들은 이 지역에서 최초로 문자를 발명하고 우르, 우르크, 라가시, 키시 등의 도시를 건설하여 도시문명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이들은 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고, 지구라트라고 불리는 거대한 탑을 쌓아 올리던 사람들이다.

 

이후 북서쪽에 셈족 계통의 아카드인들이 들어와 통일국가를 건설했다가 수메르인들과 아카드인, 아모리인들의 왕국이 등장하며 패권을 놓고 서로 경쟁하면서 문화를 발전시켰다.

 

1) 고 바빌로니아

 

바빌로니아라는 이름의 왕국이 들어선 것은 기원전 1830년경에 셈족 계통의 아모리인들이 바빌론 시를 중심으로 바빌로니아 제1왕조를 열면서부터였다. 고(古) 바빌로니아로 불리는 이 왕국은 기원전 1600년경까지 남으로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 전체와 북으로 앗시리아를 포함하면서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장악했다.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은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일대의 정치, 상업의 중심지가 된다.

 

고 바빌로니아는 제6대 함무라비 왕(B.C.1792∼B.C.1750) 때 전성기를 맞는다. 함무라비 왕은 엘람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지역을 평정하여 메소포타미아 세계를 통일하고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는 과학과 학문을 발전시켰으며 아카드어를 국어로 삼았고, 역법(曆法)을 통일시키는 한편 함무라비 법전이라고 불리는 282조로 구성된 법전을 정비하여 바빌론을 명실상부한 오리엔트의 중심도시로 발전시켰다. 그는 또한 수도 바빌론에 성벽을 쌓고 바빌론의 수호신이었던 마르두크(Marduk) 신을 주신으로 하고 이슈타르(Ishtar) 여신과 탐무즈(Tammus)신을 섬기는 종교를 확립했으며 각지에 이들의 신전을 세워 중앙집권제도를 확립하였다. 이때부터 마르두크는 수메르 신들 중에 주신(主神)의 자리를 획득하여 벨(바알) 마르두크라 불리는 국가적인 숭배 대상이 되었다.

 

함무라비 왕이 죽은 후 고 바빌로니아는 쇠퇴하여 기원전 1531년경 히타이트의 침입으로 멸망한다. 이후 바빌로니아의 지배권은 동북부 산악지대를 차지한 카사이트족에게 넘어간다. 400여년 간의 카사이트 지배 후 도시국가 가운데 아시리아가 점점 세력을 얻는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1220년경, 바빌론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점점 판도를 확장해갔다. 강성하고도 잔학하기로 유명했던 아시리아는 군사력을 길러 기원전 7세기, 아시리아가 자립하여 제국으로 발전했다. 강대한 아시리아는 니네베(Nineveh)를 수도로 하여 북부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장악하고 한때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까지 함락시켰다. 당시 바빌로니아는 아시리아에서 임명한 부왕(副王)의 통치 하에 들어갔다.

 

2) 신 바빌로니아

 

기원전 626년, 아시리아에 반란을 일으킨 아람계 칼데아 부족의 나보폴라사르가 바빌론에 입성하여 바빌로니아 왕조를 열었다. 역사에서는 이 왕조를 고 바빌로니아와 구분하여 신 바빌로니아라고 하며, 칼데아 부족이 세웠으므로 칼데아 왕조라고도 한다. 나보폴라사르는 메디아와 연합하여 기원전 612년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철저히 파괴해 버린다. 나보폴라사르의 후계자 네부카드네자르 2세(재위 B.C.605∼562, 개역성서의 느부갓네살)의 치세는 바빌로니아의 황금시대였다. 그는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파괴하였으며 유대인들을 바빌론에 유폐시켰다. 고대 함무라비 왕이래 몰락했던 바빌론은 다시 부흥하여 명실공히 세계 상업의 중심도시로서 성장, 유래 없는 번영을 누린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바빌론 성을 중건하였다. 왕은 수도 바빌론에 주신(主神) 마르두크를 비롯한 수많은 신들의 신전과 제단을 화려하게 만들었다. 설형문자로 기록된 당시 문서와 바빌론 성 발굴 결과를 종합해 보면 바빌론 안에는 주신 마르두크 신전 55개를 포함하여 일천 개가 넘는 신전이 있었고, 이슈타르 여신을 위한 제단만도 180개가 있었다. 마르두크 신전을 지을 때 그에 딸린 거대한 지구라트도 함께 만들어졌다. 바빌론 시의 중심부에 있는 마르두크 신의 성역 안에 화려한 청색 벽돌을 구워 탑을 쌓아올렸는데, 고대 전설 속의 바벨탑을 연상시키는 이 바벨탑은 수세기 전 아시리아인들이 파손한 것을 신 바빌로니아 왕조를 개창한 나보폴라사르 왕이 기초를 쌓고, 그 아들인 네부카드네자르가 완성하여 재건한 것이다. 탑은 약 90미터의 높이로 장려하게 건립되었지만 현재 지상에 그 토대의 윤곽만 남아 있다. 또한 네부카드네자르는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일컫는 공중정원을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번영을 구가하던 바빌로니아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사후 급속도로 몰락한다. 이후 3대째까지 왕들은 짧은 치세 후 암살되고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 바빌론 성을 함락시킨다. 신 바빌로니아의 1세기도 채 되지 못한 짧은 기간의 번영은 이로써 허무하게 사라져갔다. 페르시아 제국 초기만 하더라도 바빌론은 세계에서 가장 번창한 도시로서 번영을 이었으나 기원전 482년, 바빌론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성채와 신전들이 파괴되었다. 기원전 331년, 바빌론을 점령한 알렉산더 대왕은 바빌론을 복구하고 대제국의 수도로 만들 계획을 진행했으나 8년 후, 알렉산더 대왕이 네부카드네자르의 궁에서 사망함으로써 계획은 무산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바빌론은 1896년 로베르트 콜데바이 등 독일 고고학자들이 발굴하기까지 흙더미 속에 파묻히게 된다.

 

3) 바빌로니아의 유적

 

〔바벨탑〕

 

역사학자들은 성서 속의 바벨탑을 지구라트의 하나로 보고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 일대와 현재 이란 땅에 속하는 엘람 지역에는 지구라트(ziggurat)라는 거대한 탑이 도시마다 우뚝 솟아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기원전 3000년경의 수메르 시대부터 기원전 500년경 신 바빌로니아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백 개의 지구라트가 세워졌다. 지구라트는 이 지역의 수많은 신들을 숭배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각 도시는 자체의 수호신들을 위해 지구라트를 최소 하나씩은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지구라트 가운데 하늘에 닿을 만큼의 높이로 쌓아올린 최고의 탑은 신 바빌로니아 때 재건된 에테메난키(하늘과 땅의 기초가 되는 집이라는 뜻)라 일컫는 탑이다. 이 탑은 과거 몇 차례에 걸쳐서 지어졌다가 무너지고, 최종적으로는 나보폴라사르와 그 아들 네부카드네자르가 쌓아올린 것으로, 나보폴라사르와 네부카드네자르는 실제로 주신 마르두크를 위해 하늘 끝까지, 하늘과 그 크기를 겨룰 때까지 높이 쌓겠다고 호언했다. 이를 위해 불에 구운 벽돌 8500만 개가 건축에 사용되었다. 문헌과 고고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탑의 정사각형 기저층은 가로 세로 90미터 가량이었으며 탑의 전체 높이도 90미터 가량이었다. 제1층은 높이 33미터, 2층은 18미터, 3∼6층은 각기 6미터였고 탑의 꼭대기에는 15미터 높이의 신전이 있었는데, 신전의 벽은 황금으로 꾸며 멀리서도 잘 보일 정도로 휘황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꼭대기의 신전은 마르두크를 위한 것으로 마르두크가 쉬어 가는 장소로 생각되어 여사제 한 명만에 그곳에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이 탑은 바빌론의 수호신 마르두크를 숭배하기 위한 국가적이고도 민족적인 성역이었다. 탑 옆에도 마르두크의 신전이 있었는데 이 신전에는 순금의 옥좌 위에 순금으로 된 마르두크의 신상이 앉아 있었다. 고대 역사가 헤로도투스의 묘사에 따르면 이 신상과 보좌 등의 무게(순금의 무게)는 무려 800달란트(약 22톤)나 되었다고 한다.

 

네부카드네자르 왕은 이 탑을 재건하기 위해 제국 안의 온갖 백성들의 노동력을 동원했으나 신 바빌로니아의 영화는 1세기도 못 되어 끝나버렸으므로, 바빌론의 주신 마르두크의 성역인들 온전할 리 없었다. 반란으로 인해 바빌론의 탑과 성채, 신전은 벽돌더미 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철저히 파괴되었고, 이 때 금으로 만든 마르두크 신상도 녹아 없어졌다.

 

〔바빌론 성과 공중정원〕

 

바빌론 성은 무너지고 황폐해진 상태로 이천여 년을 지내왔다. 1899년부터 1917년까지 이를 복원하여 바빌로니아의 찬란한 역사를 알린 사람은 로베르트 콜데바이를 비롯한 독일 고고학자들이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흙더미 속에 파묻혀 있던 거대한 도시 바빌론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바빌론을 둘러싸고 있는 이중 성곽 중 외곽 성벽은 양변이 1800미터와 130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직사각형 모양이다. 헤로도투스는 이중으로 된 바빌론 성벽 위는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가 양쪽에서 달려와도 염려할 것이 없을 정도로 넓었다고 전했는데 콜데바이의 발굴로 이 사실은 곧 입증되었다. 7미터 두께의 진흙 벽돌 성벽이 발굴되자 곧 바깥쪽으로 12미터 가량 바깥에 7.8미터 너비의 벽돌 성벽이 발굴되었다. 그 바깥에는 다시 3.3미터 너비의 벽돌 성벽이 있었고 그 성벽의 바깥으로는 도랑(호)이 파여 있어서 유사시에 물을 채울 수 있었다. 내벽의 높이는 27미터 가량으로 추정

 

되었다. 벽과 벽 사이는 정상까지 흙으로 채워져 있어 실제로 두 대의 마차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만큼 넓은 길이 생겼다. 바깥쪽 성벽은 전체 길이가 18킬로미터나 되었고, 유프라테스 강에 인접하였다. 강에는 120미터 길이의 다리가 놓여 있었다.

 

콜데바이 일행은 행진 대로라고 이름 붙인 폭 20미터 정도의 넓은 포장도로도 발굴했다. 이 길에서 발견된 설형문자 비문에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위대한 마르두크 신의 행렬을 위해 바빌론의 도로를 포장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길 양쪽에는 푸른 타일을 붙인 벽이 있었고 그 벽면에는 2미터 길이의 사자 120마리가 새겨진 부조가 있었다. 바빌로니아에서 이 사자는 여신 이슈타르와 동일시되어 수많은 사자상이 남아 있다. 행진 대로는 도시의 외곽 성벽에서부터 내성 입구인 이슈타르의 문까지 이어지며 용과 기괴한 짐승으로 장식된 이슈타르의 문을 빠져나가면 에사길라라는 마르두크의 성역으로 통하고 있었다. 이 성역에 네부카드네자르가 중건한 마르두크의 사원과 에테메난키로 불리는 거대한 탑이 있었던 것이다.

 

에사길라의 북쪽에는 왕궁이 있었고, 왕궁의 동북쪽에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유명한 바빌론의 공중정원이 있었다. 공중정원은 실제로 공중에 떠 있던 것이 아니라 높이 솟아 있던 지구라트의 계단식 테라스에 만든 옥상 정원이었다. 가로세로 각각 400m, 높이 15미터의 토대를 세우고 그 위에 계단식 건물을 세웠다. 맨 위층의 평면 면적은 60평방미터에 불과했으나 전체 높이는 105미터로 오늘날의 30층 빌딩 정도의 높이였다.

 

한 층이 만들어지면 그 위에 수천 톤의 기름진 흙을 옮겨 놓고 넓은 발코니에 잘 다듬은 화단을 꾸며놓았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작은 산이 하나 있는 것 같았다고 전해진다.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이 곳에서 이렇게 큰 정원에 물을 대는 것은 여간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 정원에서는 펌프를 이용하여 유프라테스 강에서 물을 끌어올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은 정원의 맨 위에 커다란 물탱크를 만들어 유프라테스 강의 물을 펌프로 길어 올리고 그 물을 펌프로 각 층에 대어줌으로써 화단에 적당한 습기를 유지토록 하였으며 또한 그때그때 물뿌리개를 이용하여 물을 공급하도록 하였다.

 

정원의 아랫부분에는 항상 서늘함을 유지하도록 아치형의 두꺼운 천장을 가진 방을 많이 만들었으며 방에 물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해 방위에는 갈대나 역청을 펴고 그 위에 납으로 만든 두꺼운 판을 놓았다. 궁에서 창 너머로 바라보는 꽃과 나무의 모습은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한다. 또한 가진 방을 두꺼운 벽으로 갈라 일곱 개씩 두 줄로 줄짓게 하고 그 옥상의 테라스를 안뜰 모양으로 둘러쌌으며 테라스 위에 계단 모양으로 흙을 북돋아 여러 가지 초목을 심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공중정원은 일명 세미라미스의 공중정원으로 불리는데, 전설적인 여왕 세미라미스가 만들었다는 일설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러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메디아에서 시집온 왕비 아미티스의 향수(鄕愁)를 달래기 위해 메디아의 산을 연상시키는 공중정원을 만들었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발굴된 성벽과 자료들은 바빌론이 중동 지역 최대의 도시였으며 난공불락의 요새였음을 입증한다. 이 바빌론 성은 지구상에 알려진 고대의 성 가운데 가장 크고 장려한 성이었다. 헤로도투스는 바빌론을 세계에서 가장 웅대한 도시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이 난공불락의 요새도 내란에는 견디지 못하고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에게 정복당했다.

 

4. 아시리아 (Assyria)

 

19세기 중엽에 니네베 코르사바드 등의 발굴로 우선 아시리아의 제국시대(帝國時代)가 밝혀졌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신석기시대 이후의 문화도 점차 밝혀지고 있다. 원주민은 셈족(族) 계통이 아닌 스바르투인(人)이라고 한다. BC 3000년경부터 셈계(系)의 아카드인이 원주민을 대신하여 세력을 가지게 되고, 언어 풍습 신앙 등이 셈화(化)하였다. 그 중심이 된 아수르는 BC 2500년경 도시국가로 성립되었는데, 수메르 문명의 북변(北邊)의 전진기지(前進基地)이기도 하였다. 이 수메르인의 끊임없는 침입을 받는 악조건에서 강건하고 용감한 민족성을 지닌 셈계의 아시리아인이 형성되었다. 아시리아의 중심부는 티그리스강과 대(大)자브강의 합류점에 가까운 삼각형의 지역이었다. 그들은 이와 같은 지리(地利)를 이용하여 바빌로니아에서 산출되지 않는 금속·보석·목재·석재 등을 실어다 교역을 하고 점차 군사(軍事)국가로서 발전하였다.

 

BC 13세기에 투쿨티니누르타 1세는 바빌로니아를 점령하였고, BC 11세기 전에는 티글라트 필레세르 1세가 히타이트의 쇠퇴를 틈타 페르시아만(灣)에서 지중해 연안, 소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였다. BC 8∼BC 7세기에 이르자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 사르곤 2세, 센나케리브, 에사르하돈, 아슈르바니팔 등의 용감한 왕들이 나와서 시리아,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이집트까지를 정복하여 일찍이 없었던 세계제국을 건설하였다. 광대한 영토는 잘 훈련된 강력한 군대, 조직화된 관료군(官僚群), 완비된 역전제도(驛傳制度) 등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특히 기병과 전차(戰車)를 구비한 군대와 중세(重稅)는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그러나 그처럼 강대하던 아시리아도 아슈르바니팔 왕이 죽은 뒤의 내분을 틈타 바빌로니아에서 독립한 나보폴라사르와 메디아인의 동맹군의 공격을 받아, BC 612년 니네베의 함락과 더불어 멸망하였다.

 

아시리아의 문화적 특색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문화를 융합하여 변경지대에 전한 것이다. 또 니네베와 코르사바드 유적에서 볼 수 있듯이 도시계획이나 축성(築城)에 능하였고, 예술면에서는 석조(石造)의 환조(丸彫)와 부조(浮彫)로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다. 전투와 맹수(猛獸) 사냥 등 잔인한 행위를 주제(主題)로 한 것이 많다. 역대의 왕들은 전승(戰勝)이나 사적(事績)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연대기(年代記)도 편찬하였다. 아슈르바니팔 왕은 왕궁에 부속도서관을 짓고 각종 사료(史料)를 수집·정리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1) 아시리아미술 (Assyrian art)

 

인류문명의 여명기에 아시리아를 포함한 북(北)메소포타미아 일대는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바빌로니아를 앞지르고 있었으나, 바빌로니아가 관개경작(灌漑耕作)에 의해서 농작물의 증산으로 번영하자 이 지방의 문화는 급속도로 진보하였고 아시리아는 오히려 뒤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BC 3000년대의 아시리아 미술은 같은 시대의 바빌로니아 수메르 아카드 미술의 지방판(地方版)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 상태는 BC 2000년대가 된 뒤에도 한참 계속되었다. 다만 조각(彫刻)은 BC 2000년대 후반이 되어 한때 아시리아를 지배했던 미타니의 영향으로 수메르 아카드 양식과는 다른 아시리아적 성격을 점차 나타내게 되었다. 즉, 일반적으로 양식이 답답하고 비례가 압축되었으며 좌우대칭을 중시하고 의상에 풍부한 장식을 좋아하는 점 등이 그렇다.

 

BC 1000년대의 아시리아 미술은 이 나라의 제국주의적 발전에 힘입어 최성기(最盛期)를 맞이한다. 흔히 아시리아 미술이라 하면 그 특성이 확립된 시기요, 신(新)아시리아 미술로 불리기도 하는 BC 9세기에서 BC 7세기에 걸친 미술을 말한다.

 

건축으로는 아슈르나시르팔이 세운 님루드의 궁전,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의 아르스란 타슈의 궁전, 사르곤 2세의 코르사바드의 궁전 등이 있었는데 보수적인 아시리아인은 석재를 손쉽게 입수할 수 있는 지방에서도 수메르의 전통에 따라 볕에 말린 벽돌을 주재료로 사용하였다. 다만 입구의 좌우나 바깥쪽에 인두수신(人頭獸身)의 거상(巨像)을 세우고, 방 내부에는 부조가 있는 설화석고(雪花石膏:alabaster) 등의 석판을 벽면 아랫부분에 둘러서 붙였다. 궁전에는 옥좌실(玉座室)이 있는 알현실, 왕의 거실, 왕비의 거실 등을 포함하는 일곽과 조신(朝臣)이 사는 일곽, 신전이나 지구라트[聖塔]가 있는 일곽 등이 있고, 중앙에는 정원이 있었다. 지구라트는 코르사바드에서는 7층으로 구성되어 있어 흉벽이 있는 비스듬한 길이 건물의 주위를 돌아서 정상까지 달하였다.

 

조각의 유품은 주로 부조(浮彫)이다. 환조(丸彫:입체조각)는 포효하는 사자나 유익인두(有翼人頭)의 황소 또는 사자, 인상(人像)으로는 아슈르나시르팔 2세상(像)이나 나브 신상(神像) 등이 있는데 형체보다도 표면 세부묘사에 중점을 둔 부조적 표현이었다. 부조의 주제는 종교적 의식, 전쟁, 수렵 조공자(朝貢者)의 행렬 등 왕의 권위와 제국의 위력을 과시하는 것을 좋아했고 시대적인 변화는 없으나 구도와 양식에는 진전을 보였다. 즉, BC 9세기 전반의 아슈르나시르팔 2세 시대의 것은 살붙임이 얇고 인물의 비례가 답답하며 때로는 명문(銘文)이 작품의 표면을 덮기도 했다. BC 8세기 후반,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나 사르곤 2세에 와서는 살붙임이 도톰해지고 뚜렷해졌으며 작품 표면은 물론 배경에도 명문을 넣는 일은 없어졌다. 그 후의 센나케리브 시대에는 작은 인물을 많이 담은 우화적 구도가 행해졌다.

 

그러나 아시리아 부조의 최고 작품은 니네베의 궁전 유적에서 출토된 아슈르바니팔왕 시대의 것으로, 살붙임도 풍부하고 기교는 소박하며 표현은 자유롭고 힘에 넘친다. 그 중에서도 사자의 방의 부조는 동물묘사가 세계적인 걸작이다. 유약(釉藥)을 끼얹은 벽돌이나 회화도 궁전 내부장식에 사용되었다. 공예품으로는 먼저 청동(靑銅) 제품으로서 사자형의 주조종(鑄造鐘), 그리고 샬마네세르 3세(BC 858~BC 824)의 사적(事蹟)을 찍어낸 문표면의 장식이었던 띠 모양의 판이 유명하다. 상아조각품으로는 부조도 있고 줄새김도 있는데 채색된 것이 가구에 장식되었으며 님루드나 아르스란 타슈 등지에서 뛰어난 작품이 출토되었다. 표현양식면에서 볼 때에는 아시리아적인 것 이외에 페니키아적인 것, 이집트적인 것이 있다. 원통인장(圓筒印章)은 주제도 양식도 모두 벽면 부조를 따랐다. 또한 BC 1000년대의 아시리아 미술은 가까운 인접제국의 미술에 다소간 영향을 끼쳤는데 그 중에서도 아케메네스왕조의 페르시아 미술의 형성에 크게 공헌했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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