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5, 6장에 나오는 메대사람 다리오의 정체 | |
메대 제국의 역사적 배경과 다리오
메대 제국의 다리오 왕은 페르샤 제국의 고레스 대왕과 함께 6장의 배경을 이루고 있어, 이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다니엘의 경험과 연관짓기 전에, 메대와 다리오 왕, 그리고 이들과 불가분한 페르샤의 초기 역사와 고레스와의 관계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
다리우스: 의문에 둘러쌓인 왕 | |
역사속의 어디에서도 그사람의 이름이 언급된적이 없으며, 오직 성경과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에만 언급할뿐, 어디에도 없는 인물이 있다. 그사람이 바로 다리우스이다. 그날밤 바벨론의 차기 왕이자 당시 바벨론의 왕, 나보니두스의 장남이자 대리섭정자였던 벨사살이 페르시아의 군인에 손에 죽임을 당한다. 하지만 세속역사에서는 그 이름에 대한 언급을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었다. 다만 밝견할수 있는 것은, 몇몇 자료에서의 그의 일생에 관련된 부분적인 것들이 보여지고있다. '나보니두스연대기'라는 점토판이 밝견되면서, 다리우스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금 전해지는데 과거 어디에서 밝견할수 없었던 인물을 만나게 된것이다. 나보니두스 연대기의 내용은 이러하다. 같은 달 16일[기원전 539년 10월 5일]에 구티움을 총괄하던 총독 고브리아스(구바루)와 키루스의 군대가, 전투없이 바벨론에 진입하였다. 그의 앞에는 푸른 나뭇가지들이 펼쳐져 있었다. 바로 술무(평화)의 상태가 그 성에 임한 것이다. 키루스는 바벨론 전역에 인사말을 보냈다. 그의 총독인 고브리아스는 바벨론에 부총독들을 임명하였다.' 그렇다면 다리우스란 사람이 왜 역사속으로 사라졌으며, 그의 일생에 걸친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의문을 파해쳐보아야 할것이다.
다리우스에 대한 기록은 "메디아의 왕이었던 아하수에로의 아들이었다"는것, 그리고 "페르시아의 메디아 정복 과정 중에 아하수에로는 페르시아와 동맹에 가까운 합병"에 이르게 되었다는것이다. 이 당시 그의 아들이었던 다리우스는 왕자로 있었으며, 페르시아와 메디아간의 평화를 주장한 사람이었다. 선왕 아하수에로의 평화적인 합병에 대한 유지를 이어,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해 그는 페르시아의 키루스를 도울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키루스가 바벨론 왕의 자리에 오른것은, 바벨론성의 함락후 7년후인 B.C. 530년에 자신의 아들이었던 캄비세스 2세와 공동통치자로써 등장했을 때였다. 그것은 결국 7년이란 시간동안 바벨론을 통치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역사 기록에서는 고대로부터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은 신으로 간주되었으며 또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숭배하게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주석가들은, 다리우스의 칙령에 나오는 “청원”에 대한 제재 규정은 순전히 종교적인 성격의 청원과 관련이 있는 것이며, 일반적인 종류의 간청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있다.
또한 바빌론에 “사자 굴”이 있었다는 사실은 오리엔트 지역 통치자들에게는 흔히 야생 동물원이 있었음을 알려 주는 고대 비문들의 증거와 일맥상통하는데, "손시노 성서 책들"라는 책에서는 말하기를
“페르시아 사람들은 그러한 동물들을 동물원에서 키우는 관습을, 아시리아의 왕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니엘은 그 법에 저촉이 되었다. 다리우스는 법을 고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것으로 보여지지만, 당시 페르시아의 법은 왕의 권력으로도 법을 함부로 고치지못한다는 법령때문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다리우스는 그만큼 다니엘을 신임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다니엘은 사자굴속에서 살아남게된후 다리우스의 개혁이 보여지는데, 당시 바벨론의 신을 물리치고 유대의 신인 '여호와'를 주신으로 할 것을 공표한 것이 주목할만하다.
바빌론 신관들의 관련문서 삭제를 통해, 결국 그의 모든 기록들은 소멸되었다. 기록이 완료된 모든 문서들 또한 소멸시켜버렸다. 그의 후임자로 키루스의 맏아들이었던 캄비세스 2세가 바빌론과 페르시아의 왕으로서, 키루스와 공동 섭정자로 앉게된것이다. 이시기에 그가 죽었는지 혹은 좌천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다만 그의 바벨론통치는 7년간이었다는것은 확실하다는것이다. 군사참모이자, 한 나라의 왕, 그리고 함락된 바빌로니아의 왕으로 화려한 일생을 살아간 사람의 일대기는, 어느사이 이기적인 욕심을 품었던 사람들에 의해 사라져 버렸던 것이었다.
|
| |||
![]() ![]() | |||
역사속의 어디에서도 그사람의 이름이 언급된적이 없으며 오직 성경과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에만 언급할뿐 어디에도 없는 인물이 있다. 그사람이 바로 다리우스이다.
다리우스에 대한 기록은 "메디아의 왕이었던 아하수에로의 아들이었다"는것 그리고 "페르시아의 메디아 정복과정중에 아하수에로는 페르시아와 동맹에 가까운 합병"에 이르게 되었다는것이다. 이 당시 그의 아들이었던 다리우스는 왕자로 있었으며 페르시아와 메디아간의 평화를 주장한 사람이었다. 선왕 아하수에로의 평화적인 합병에 대한 유지를 이어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해 그는 페르시아의 키루스를 도울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가 바벨론의 왕의 자리에 오른것이 바벨론성함락후 7년후인 B.C. 530년에 자신의 아들이었던 캄비세스 2세와 공동통치자로써 등장했다. 그것은 결국 7년이란 시간동안 바벨론을 통치한 사람이 있었다는것을 알려주는것이다.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역사 기록에서는 고대로부터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은 신으로 간주되었으며 또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숭배하게 하였던것으로 알려져있다. 많은 주석가들은, 다리우스의 칙령에 나오는 “청원”에 대한 제재 규정은 순전히 종교적인 성격의 청원과 관련이 있는 것이며 일반적인 종류의 간청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있다.
또한 바빌론에 “사자 굴”이 있었다는 사실은 오리엔트 지역 통치자들에게는 흔히 야생 동물원이 있었음을 알려 주는 고대 비문들의 증거와 일맥상통하는데 "손시노 성서 책들"라는 책에서는 말하기를
“페르시아 사람들은 그러한 동물들을 동물원에서 키우는 관습을 아시리아의 왕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리우스는 그만큼 다니엘을 신임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다니엘은 사자굴속에서 살아남게된후 다리우스의 개혁이 보여지는데, 당시 바벨론의 신을 물리치고 유대의 신인 '여호와'를 주신으로 할것을 공표한것이 주목할만하다.
바빌론의 신관들의 관련문서 삭제를 통해 결국 그의 모든 기록들은 소멸되었다. 기록이 완료된 모든 문서들 또한 소멸시켜버렸다. |
'나의 하나님에 관하여 > 구약 핵심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레스 (0) | 2008.01.25 |
---|---|
다리우스 1세 (0) | 2008.01.25 |
크세르크세스 1세 (아하수에로왕) (0) | 2008.01.25 |
캄비세스 2세 (0) | 2008.01.25 |
매대와바사 (0) | 2008.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