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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에 관하여/구약 핵심공부

다리우스 1세

다리우스 1세 [Darius I]
 
 
별칭은 다리우스 대왕(Darius the Great).

BC 550~486.

고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위대한 왕(BC 522~486 재위).

 

                                           개요

 

 

2개의 분향대 앞에 앉아 있는 다리우스 1세, BC ...
뛰어난 행정조직과 대규모 건축 사업으로 유명하다. 몇 차례에 걸쳐 그리스 정복을 꾀했으나, BC 492년에는 폭풍으로 함대가 파괴되었으며, BC 490년에는 마라톤에서 아테네에게 패했다.

 

                         왕위등극

 

  다리우스 1세는 파르티아의 사트라프(총독)이던 히스타스페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생애에 대해 알 수 있는 주요한 당대 자료는 바로 그의 비문(碑文)인데, 특히 비시툰(베히스툰) 마을에 있는 비시툰 바위에 새겨진 비문은 3가지 언어로 되어 있으며, 다리우스가 어떻게 왕위에 올랐는지 말해준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크테시아스가 그의 즉위에 관해 쓴 글은 여러 가지 점에서 분명히 비문을 따른 글이지만 전설과 결합된 점도 있다. 예를 들면, 다리우스와 공모자들이 그들 중 누가 왕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그들의 말[馬]에게 맡겨 결정하기로 했을 때, 다리우스는 그의 마부가 속임수를 쓴 덕분에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다리우스는 젊었을 때 키루스 2세 대왕(BC 559~529 재위)으로부터 왕위를 노리는 음모를 꾸민다고 의심받았다. 그뒤 키루스의 아들이자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캄비세스 2세와 함께 왕족 경호원으로서 이집트로 갔다.

 

  BC 522년 여름 캄비세스가 죽자, 다리우스는 서둘러 메디아로 갔고, 왕위를 차지한(BC 522.3) 캄비세스의 형제 바르디야(스메르디스)를 페르시아 귀족 6명의 도움을 받아 9월에 죽였다. 비시툰 비문에서, 다리우스는 자신이 실제로 죽인 사람은 마기교도인 가우마타인데, 그는 바르디야가 캄비세스에게 비밀리에 살해되자 바르디야로 행세해왔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왕권 장악을 변명했다. 따라서 그는 자기가 아케메네스 왕조의 합법적인 왕권을 회복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리우스 자신은 왕가의 방계에 속했으며, 그가 즉위한 당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살아 있었으므로 그는 왕위계승 서열 제1인자가 될 수 없었다. 현대 일부 학자들은, 다리우스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가우마타 이야기를 지어냈으며, 살해된 왕은 키루스의 진짜 아들이라고 본다.

 

  다리우스는 처음에는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해, 강압 통치를 했다. 바르디야를 살해한 뒤 동방 속주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제국을 뒤흔들 만큼 위협적이었다. 수시아나·바빌로니아·메디아·사가르티아·마르기아나 등지에서는 대부분 키루스 집안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독립정부가 세워졌다. 바빌로니아는 2번, 수시아나는 3번이나 반란을 일으켰고, 페르시아 내에서는 바르디야로 행세한 바히아즈다타라는 인물이 상당히 지지를 받았다.

 

  다리우스의 군대는 소규모였지만, 이러한 반란들은 하나로 뭉쳐지지도 않았고 금방 수그러들었기 때문에 진압할 수 있었다. 비시툰 비문에는 열 아홉번 전투를 벌여 반란 지도자 9명을 무찔렀다고 나와 있으며, 이들은 비문에 새겨진 부조에 포로로 묘사되어 있다.

 

  BC 519년 수시아나에서 3번째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해 동방에서 왕권을 확립했고, BC 518년에는 이집트로 쳐들어가 복종하지 않던 이집트의 사트라프 아리안데스를 처형했다. 그리고 자기에게 충성하지 않던 사르디스의 사트라프인 오로이테스도 제거했다(→ 메소포타미아).

 

 

                                제국의 강화

 

  제국 내부 질서를 회복한 다음 다리우스는 국경 방비를 강화하고, 유목민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몇 차례 원정에 나섰다.

 

  BC 519년에는 카스피 해 동쪽의 스키타이족을 공격하고, 몇 년 뒤에는 인더스 강 유역을 정복했다. 동부 트라키아와 게타이를 굴복시킨 뒤, BC 513년 도나우 강을 건너 유럽에 있던 스키타이족의 땅으로 진입했으나, 스키타이 유목민들이 후퇴하면서 초토화 작전을 썼기 때문에, 그는 보급품 부족으로 원정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소아시아 사트라프들은 트라키아를 완전히 정복하고 마케도니아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에게 해에 있는 렘노스임브로스 섬을 손에 넣었다. 따라서 페르시아는 그리스로 가는 진입로를 확보했으며, 해협을 통한 흑해 곡물무역 통제권도 갖게 되어, 그리스 경제에 중대한 타격을 입혔다(→ 페르시아 전쟁).

 

  이것은 그리스 본토 사람들이 아시아에 있는 그리스 도시에 대해 간섭하는 것을 막고, 페르시아가 아시아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리스 정복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가 쓴 글에 따르면, 다리우스는 스키타이 원정 이전에 그리스 해안을 조사하려고 배를 보냈을 뿐, BC 499년이 되기까지는 다른 군사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BC 499년 페르시아의 지배에 대항해 이오니아인이 반란을 일으키고, 테베와 에레트리아가 이오니아를 지원하자, 다리우스는 이들 반란을 진압했다. 그뒤 사위 마르도니우스에게 아테네와 에레트리아 정벌을 맡겼으나, 함대가 아토스 산 근처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파괴되자(BC 492), 원정을 포기했다.

 

  BC 490년 메디아인 다티스가 지휘하는 부대가 에레트리아를 점령하고 주민을 노예로 삼았으나, 마라톤에서 아테네 군에게 패배했다(→ 마라톤 전투).

 

  다리우스는 3번째로 원정 준비를 했으나,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나 그리스 원정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고, 준비가 끝나기 전인 BC 486년에 죽었다.

 

                                           행정정책

 

  다리우스는 이전 왕들이 정복한 땅을 굳게 지키고 영토를 더욱 넓히기도 했지만, 그가 페르시아 역사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 부분은 행정에 관한 문제였다.

 

  그는 키루스 대제가 시작한 제국의 사트라프 관할구역(사트라프령) 조직을 완성했으며, 각 속주의 연공세(年貢稅)를 확정했다. 그는 또한 제국의 무역·상업을 증진시키기 위한 야심만만하고 원대한 계획들을 추진하여, 화폐와 도량형을 표준화하고, 육로와 해로를 개척했다. 카리안다의 스킬락스가 이끄는 원정대는, 인더스 강을 따라 내려가 이집트 나일 강 어귀까지 탐험했다. 다리우스는 이집트 왕 네코 1세가 시작한 듯한(BC 7세기) 나일-홍해 운하공사를 보수·완공했다.

 

  다리우스는 동일한 행정정책을 실시해, 제국 안의 다양한 민족을 단합시키기 위해 힘쓰는 한편, 키루스가 했던 것처럼 원주민의 종교적인 관습을 존중해주었다. 카르가 오아시스에 아몬 신전을 지어 에드푸 신전이란 이름을 내렸으며, 다른 성소들도 복구했다. 캄비세스 밑에서 일했던 이집트인 우드자호레스네에게, 사이스 사원에 있던 의술학교를 재건하도록 허용했으며, 사트라프들에게는 원주민 사제들과 협의해, 이집트 법률을 법전으로 만들도록 명령했다.

 

  이집트 역사에서 그는 인정 많은 왕이며, 최고 입법자로 평가받고 있다. 일찍이 키루스가 공포한 법령에 따라, BC 519년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짓도록 허락했고, 또 키루스 2세가 그리스인들의 성역에 허용했던 특권을 계속 인정해주었다. 한 페르시아 관리는, 멘더레스 강의 마그네시아 근처에 있던 아폴론 신전 사제들에게 조공과 강제노동을 강요한 죄로 질책받기도 했다.

 

  몇몇 권위있는 학자들은 다리우스의 종교적 믿음은 비문에 나타나 있듯이, 조로아스터 교리의 영향을 받았으며, 조로아스터교가 페르시아 국교가 된 것은 다리우스 때문이라고 여긴다.

 

  다리우스는 아케메네스 왕조 가운데 최대의 왕실 건축였으며, 그가 다스렸던 동안 이루어진 페르시아 건축양식은 제국이 망할 때까지도 변하지 않고 남아 있었다.

 

  BC 521년에는 수사를 행정수도로 삼고, 그곳에 요새를 복구했으며, 알현실(아파다나)과 궁전을 지었다. 궁전의 주춧돌 비문에는, 이 공사를 위해 다리우스가 제국 전역에서 어떻게 자재와 기술자들을 구해왔는가에 대해 나와 있다.

 

  초기의 수도이던 파사르가다에 대신, 그가 태어난 고장인 파르스(페르시스)의 페르세폴리스에, 새로운 국왕 거주지를 만들었다. 요새·알현실·회의실·보물창고·궁전 등은 비록 그의 생전에 완성되지 못했지만, 모두 그의 공적으로 볼 수 있고, 그밖에 엑바나와 바빌론에도 건물을 지었다.

              

 

                                                                               

                                                                                                    출처: 엠파스 백과사전

 

                                                                                 J. M. Munn-Rankin 글 | 李順珠 옮김

 

                                                               브리태니커 백과 > 인물 > 왕·귀족 > > 페르시아

 

 

 

 

 

 

 

     <성경과 페르시아 - 베이스툰 석비 1>

 

                                            -다리오 1세-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알고 있는 다리오(주전 522~486년)

는 흔히 ‘대제’라는 수식어를 붙여 부른다. 그는 파르티아의

분봉왕 히스타스페스의 아들로 주전 522년 왕좌에 올랐다.

 

  그는 왕좌에 오르기 전, 캄비스스(Cambysrs)의 이집트 정벌

때에는 그 유명한 ‘불멸의 방위대’(the Immortal Guard)의 장군

으로 활약했다.

   이전까지는 다리오 대제를 알기 위해서 해로도투스의

『역사』와『성서』의 자료를 통하여 재구성하였지만, 약

150년 전부터는 쐐기문자가 판독이 되면서, 동시대나 후대의

학자 · 서기관들에 의해 구성된 다리오 대왕에 대한 기록이

아닌, 다리오 대제 자신이 자신을 기술한 자료들에 의해

다리오 대왕의 자료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페르시아 제국의 비문들은 대개 3가지 쐐기문자들로 쓰여

졌다. 즉, 당시의 패르시아인들이 고안한 인도-유럽어의

하나인 고대 페르시사어, 수사를 중심으로 주전 3100년경

부터 쓰여져 오던 엘람어,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바빌론 제국과 앗시리아 제국의 언어였으며 셈어의 아주

오래된 형태였던 아카드어로 쓰여졌다.

   아카드어는 주전 2600년부터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쓰이던 쐐기문자로서 페르시아 제국이 바빌론 제국을 멸망

시킨 후, 자연스럽게 물려 받은 당신의 ‘고전어’였다. 엘람어

수사를 중심으로 특별히 궁중문서와 경제문서를 기록하기

위해 차용되었다. 지난 100년 동안 코코스(Caucaus)언어

또는 인도 남부의 드라비다어(Dravidian)와 연결시키려는

학자들의 주장이 있으나, 아직 결론 내지지 못한 상태이고,

오히려 수메르어(Sumerian)처럼 고립어(Languageisolate)

라는 것이 더 정설이다.

   이와 비교하여 고대 페르시아어가 인도-이란어

(Indo-Iranian)의 한 분파라는 언어 구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만, 고대 페르시아 문자의 출현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

하다. 월티 힌쯔(Walter Hinz)나 프란쯔 바이쓰바흐(Franz H.

Weissabach) 등 독일 진영 학자들은, 다리오 대제 당시에

페르시아 문자가 고안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의하면 3개

쐐기문자들로 쓰여진 베히스툰 비문(뒤에 자세히 다루겠

음)에서, 고대 페르시아 비문은 가장 나중에 첨가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베히스툰 비문의 70번째

단락은 새로운 문자의 고안 즉 고대 페르시아어를 고안한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견해는 그 후에 많은 인도-유럽어 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졌지만, 이골 디아코노프(Igor M.Diakonoff),

일야 거세비취(Ilya Gershevitch) 등 러시아계 학자들은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글자 형태는 아람어를 지칭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여튼 고대 페르시아어가 그 제국 당시에만

왕조기록을 위해서 쓰여졌기 때문에, 다리오 대왕 시절에

급히 고안된 문자 체계인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다리오 왕에 대한 고대 페르시아 비문을 60개 정도

가지고 있고, 이 분량은 나머지 모든 고대 피르시아 제국의

왕들의 문서를 다 합친 것보다 많은 숫자이다. 이 다리오의

문서 중 가장 중요한 문서가 바로 베히스툰 비문(Behistun

Inscription)이다.


 

 

 

   다리오 대왕의 베히스툰 비문은,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비문 중 가장 길고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준다. 이 비문은

바빌론, 하마단, 수사를 이으면서, 동으로는 중앙 아시아와

인도와 통하고, 서쪽으로는 터키와 그리스를 잇는 ‘비단길

(Silk Road)’의 원형이 되었던 ‘왕의 대로(Royal Road)'였던

아주 오래된 낙타 행상의 길 위에 위치해 있다.

  
   이란의 허리를 이루는 자그로스 산맥(Zagros)의 한 지산

으로, 500m 정도의 편편한 산이 오르게 되었는가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주전 521년 지상으로부터 깍은 듯한 절벽인

에 ,지상 69m위로, 가로 7m 와 세로 18m 의 비문과, 가로

3m 와 세로 55m 의 부조석상과 비문을 새겨 놓았다.

 

   다리오 왕이 이곳을 고른 이유는 우연이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첫째로, 실제적이기 때문이다.

 

    즉 비문과 부조석상을 새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평평한 바위가 필요했다. ‘왕의 대로’를 따라 있는 여느 자그로스 산맥의 산들과는 달리, 베히스툰산은 메데 왕국의 목초지를 포함하기도 한 매우 평평한 절벽을 지닌 산이었다.

 

   둘째로, 베히스툰산 아래에 메소포타미아나 이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몇 개의 샘터들이 있다.

 

    이 ‘왕의 대로’를 지나간 수많은 행상들과 병사들이 지친 몸을 달래던 쉼터였기에, 고대 근동 당시 유명했던 곳이 틀림없다.

 

   셋째로, 디오도러스의 작품(Diodorus Siculus 2.13.2)

에 의하면 이 산을 표기하는데 이 단어는 고대 페르시아

어의 'Bagastana'를 음역한 것이다.

 

    Bagastana은 직역하면 ‘신들의 장소’ 즉, 이곳은 오래 전

부터 성스러운 곳으로 이 근처에서 가로 10m, 세로 10m의

제단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네 번째로, 다리오 대제가 그가 등극할 때 최고의 정적

가우마타(Gaumata)를 잡아 처형한 곳이, 바로 이

베히스툰산 근처이다.

 

   베이스툰 비문안에서는 그 곳을 ‘메데지방, 나사야 지바의

시카유바티(Sikayubati)'라고 말하는데, 그곳이 바로 베히스툰

산 뒤로 100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그러므로

베히스툰산은, 다리오 왕이 자신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이처럼 실제적, 종교적,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장소에, 다리오 왕은 자기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베히스툰 석비’를 새기게 되었는데, 후일에 이 비문이 ‘고대

근동 비문의 여왕(Empress of Oriental Inscriptions)'이라 불리

우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베히스툰 비문과 부조상의 구성은 고대 근동의 아주 오래

된 예술사적 표현의 결정체였다. 부조상과 그 구성 그리고

비문들은 이라크와 이란의 국경 지역인 ‘사리-폴리-주합’

(Sar-i Pol-i Zuhab)에서 발견되는 룰루비(Lullubi)의 왕

아누바니니(Anu-banini)의 부조물과 아키드 왕족의 나람신

왕의 비문(Naram-Sin Stele)에서 그 영향을 받았다.

  

   사실 이것은, 파르티아(Parthia)의 왕 히스타스페스

(Hystapes)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고레스와 캠비시스

처럼 아케미니드왕조의 정통성이 결여되었던 다리오 왕이,

이 성산 베히스툰에 조로아스터의 가장 위대한 신

아후라마즈다(Ahuramazda)로부터 인정받아  왕위를 차지

하게 되었다는 자기의 정통성을 천명하게 될 때, 당시 고대

근동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사적 자료를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아누바니니 비문은, 아누바니니 왕이 새벽별의 여신

이난나(Inanna)로부터 왕권을 상징한 원형을 받고 있는 모습

을 묘사하고 있다. 그 부조에서 이난나는 2명의 발가벗은

포로를 포승줄로 묶고 있다. 아누바니니 왕은 헬맷을 쓰고

왼손에는 활과 화살을,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이 비문

의 배열은 베히스툰 비문의 배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음

틀림이 없다.

 

   베히스툰 비문에서 다리오 왕은 2명의 신하들과 서 있다.

왼쪽의 신하는 고브리야스(Gobryas)로서 페르시아 창을 들고

서 있고, 오른쪽 신하는 인타페르네스(Intaphernes)로 활을

들고 있다. 아누바니니처럼 다리오 왕은 왼발로 그의 정적

가우마타(Gaumata)를 밟고 있고, 그 뒤로 8명의 포로를 포승

줄로 목을 감은 채 연결하고 있다. 그러나 다리오 대제

스키타이 정벌에서 ‘스쿤카’(Skunkha)라는 고깔모자를 쓴

반란군을 잡은 후에, 본래 새겼던 글씨 부분을 삭제하고

스쿤카의 부조상을 첨가하였다.

 

  

   이 모든 일이 아후라마즈다의 허락으로 이루어짐을 강조

하기 위해서, 날개 달린 아후라마즈다가 손에는 왕권을 상징

하는 원형을 달고 다리오 왕을 강복하고 있다. 이처럼

다리오 왕은 그의 부조물과 비문들을 이 성스러운 산에

새겼다. 다리오 왕의 왕권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베히스툰

비문이 계속되어 새겨지게 되었고, 같은 내용이 당시의 국제

공용어인 아람어로 쓰여져 23개의 페르시아 제국의 각각

속곡에 보내지게 되었다.

 

 


 

 


  

   베히스툰 비문에서, 다리오 대제는 캄비시스를 둘러싼

정치 혼란기를 설명하고 있다.

 

  다리오 대제는 캄비시스가 그의 친동생 바르디야(Bardiya :

그리스어로는 스메르디스 Smerdis)를 살해했지만, 페르시아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고 말한다. 그 때 조로아스터교의

제사장인(a Magian priest : Magi 는 신약에서 동방 박사로

알려져 있다.) 가우마타가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여, 자신이 바르디야라고 속여 백성들로부터 왕으로 추대

받기에 이르렀다.

   그 때에 캄비시스는, 이집트 정벌 중 가우마타가 반란을

일으켜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페르시아로

돌아오다가 자기가 찬 칼에 찔려 실수로 죽게 된다. 이 모든

사건을 감지했던 다리오는, 자기가 페르시아 제국의 패권을

잡을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6명의 경호대원과 함께

신속히 가우마타와 그의 군대에 대한 정벌에 나선다. 그는

가우마타를 죽이고 6명의 경호대원의 추대로 페르시아의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이러한 기록이 베히스툰 이외의 사료에서 증빌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캄비시스가 죽은 후 반란이 일어나

페르시아가 혼란에 빠졌고, 다리오는 그것을 이용하여 왕이

되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페르시아에서의 반란은 도화선처럼 번져, 페르시아제국의

모든 나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다리오 대제는 그의

즉위 1년 동안 이런 반란들을 진압하는데 전력투구하였다.

 

  그의 첫해의 전쟁에서, 9번의 전쟁으로 9명의 반란군 대장

들을 처형하였다. 이들 반란군들의 이름과 그들의 나라명이,

베히스툰 부조물의 하단에 세가지 쇄기문자들로 자세히 기록

되어 있다. 그가 체포하여 처형한 마지막 반란군 대장은, 이

부조물의 맨 뒤에 서있는 스쿤카이다. 그는 이란의 북동쪽에

위치한 스키타이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들의 대장

이었는데, 그는 비문에서 ‘고깔 모자를 쓴 사람(tigra xauda)'

으로 묘사된다.


 

 

                                    출처 http://www.theorich.com/  한국창조사학회

                                                                                                   

 

 

 

< 다리우스 1세 궁전 >

 

relicmeso10.jpg

 

< 다리우스 1세 궁전 > - 페르세폴리스, 기원전 6∼5세기

 

    대기단의 높이를 맞추어서 다리우스 1세 궁전은 지상에서 18m

 

인 곳에 있어서 눈밑의 마르브· 다슈 평야(사진의 왼쪽)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궁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측벽에는 왕의 향연에 바치

 

는 동물, 술이 담긴 가죽부대, 식기와 잔을 가지고 가는 사람들이

 

부조되어 있다. 소를 덮치는 사자의 主題는 계단측벽의 삼각형에

 

사용되었다. 그 우측이 크세르크세스 1세의 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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