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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에 관하여/구약 핵심공부

캄비세스 2세

캄비세스 2세 [Cambyses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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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6세기에 활동한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BC 529~522 재위, 7년간).

 

  BC 525년 이집트를 정복했다. 키루스 2세 대왕과 아케메네스 가

문의 딸 카산다네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왕(父王) 생존시

에, 캄비세스는 바빌로니아에 대한 업무를 관장했다. 그는 BC 538

년 신년행사에서 바빌로니아 왕의 의례 진행을 맡았으며, 부왕이

마지막 원정에 착수하기 전인 BC 530년에는 바빌론의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이집트의 정복은 키루스 때부터 계획되었지만 캄비세스가 이룬 주요한 업적이다. 정벌은 이집트의 프삼티크 3세 때 이루어졌다. 캄비세스는 이 원정에서 사모스의 폴리크라테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또한 이집트군에 있었던 그리스의 장군 파네스로부터 귀중한 군사정보를 얻었고, 아랍족으로부터도 시나이 사막을 횡단할 때 식수를 공급받았다.

 

  나일 삼각주에서 있었던 펠루시움 전투(BC 525)에서 캄비세스가 승리하고, 헬리오폴리스와 멤피스를 함락하자, 이집트의 저항은 끝났다. 이집트에 머물면서 캄비세스는 에티오피아와 아몬의 오아시스, 그리고 카르타고에 대한 원정을 계획했다.

 

  캄비세스는 직접 에티오피아 원정에 나섰지만, 에티오피아 북부 지방을 합병한 뒤 보급품 부족으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테베에서 출발한 파견부대는 알하리자(하르가) 오아시스를 정복했지만, 아몬의 오아시스에 도착하기 전 모래폭풍에 휘말려 전멸했으며, 카르타고는 공격해보지도 못했다.

 

  BC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캄비세스가 이집트에서 벌인 잔학행위를 미친 짓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당시 이집트측 사료에 따르면, 그러한 비난은 대부분 근거 없는 것으로 추측된다. 캄비세스는 적어도 그의 통치 초반기에는 화해정책을 추구했다.

 

  후대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1세 대왕이 남긴 비문을 보면, 캄비세스는 이집트 원정에 나서기 전에 그의 아우 바르디야를 남몰래 죽였는데(헤로도토스는 그의 아우를 스메르디스라고 불렀음), 그후 마기의 제사(祭司) 가우마타가 살해된 왕자로 분장해, BC 522년 3월 반란을 일으켜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위에 올랐다.

 

  캄비세스는 시리아에서 이 반란소식을 듣고, 이집트에 수비대를 남겨둔 채 황급히 귀국하던 도중, 시리아에서 BC 522년 여름 사고로 죽었는데,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 > 인물 > 왕·귀족 > > 페르시아

 

 

 

 

 

 

   
 [성경과 페르시아] 캄비시스(Kambuses) 2세 

 

 고레스 뒤를 이은 왕은 그의 아들 캄비시스 2세였다. 그의

이름은 그리스어식 철자법에 의한 캄부세스(Kambuses)를

영어로 옮긴 것이다. 이 단어는 다시 고대 페르시아어

캄부지야(Kambujiya)를 본 뜬 것으로, 당시에 사용되었던

엘람어와 아카드어에서는 각 언어의 음성법칙에 따라 각각

칸부지야(Kanbuziya) 혹은 캄부지야(Kambuziya)로 음역

하였다.

 

   캄비시스가 주전 530년에 치리하기 시작하였지만, 그의

공식적인 즉위 연대는 주전 529년이다.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525년 이집트를 정복하여 비옥한 초승달의 모든

국가들을 정복한 제국 건설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캄비시스는 비문을 직접 남기지 않았지만, 베히스툰 석비,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쐐기문자 토판문서들, 이집트의

상형문자 자료, 그리고 헤로도투스를 비롯한 그리스 역사가

의 사료에서, 그에 관한 이집트의 상형문자 자료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

 

 더구나, 캄비시스의 치리동안에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다. 성경에서 그의 이름이 유일하게 언급될 수

있었던 곳은 성전 재건을 반대하는 기사를 실은, 다음과 같은

 에스라 4장 4~5절이다.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바사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경영을 방해하였으며...[스 4:4~5]


 

   고레스의 아들이었던 캄비시스의 이름이 나올법도한데,

에스라 기자는 그의 이름을 생략하였다.

 이 구절에 대한 병행구절인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

11권 88쪽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소식을 듣고 쿠타인들이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렇게 불렀음- 몹시 화가 나 시리아 총독을

찾아가기 전에, 고레스왕과 캄비시스왕 때처럼

한창 진행중인 유대인들의 성전증축을 중단시키고 방해하여, 공사가 지연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요세푸스는 아닥사스다(Artaxerxes Ⅰ)를 캄비시스로

대치하여,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왜냐하면 캄비시스

 때 성전건축이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 고레스와 비교하여, 캄비시스는 유대인들의

성전 재건을 막는 등 독재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 고레스의 성공적인 치리와 비교 당하는, 일종의

콤파라치오 데테리마(comparatio deterrima)에 의해 평가

절하 당한 것이다. 사실 그는 매우 성공적인 왕이었다. 그의

아버지 고레스의 영토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조약을 맺어

페니키아를 정복함으로써, 이집트를  페르시아 제국에 합병

시킨 장본인이었다.


 

 

   캄비시스는 그의 이름을 그의 할아버지 캄비시스 1세를

본따 지었다. 그의 어머니는 파르나스페스(pharnaspes)의 딸

 카산다네(Cassandane)였다.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역사』2.1) 고레스가 자기 아내 카산다네가 죽었을 때,

 매우 슬퍼했다고 전하고 있다.

 

   캄비시스의 유년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그의 아버지 고레스가 바빌론 정복시 (주전 539) 그와 동행한

 것이 틀림없다.

   ‘고레스 실린더’(The Cyrus Cylinder)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캄비시스는 주전 538년 5월 24일부터, 신년 축제를 주관

하도록 그의 아버지 고레스는 명령을 했다. ‘나보나이더스 연대기’(The Nabonidus Chronicle)에 의하면, 캄비시스는 신년 축제때 엘람 의복을 입고 나와, 말둑신(Marduk)의 아들 나부(Nabu)를 위한 예식

에서 제사장들을 화나게 했다.


 

 우리는 고레스, 만국의 왕, 캄비시스 바빌론의 왕이란

구절이 나오는 29개의 쐐기문자 토판문서가 있다. 그러나

말둑과 나부신의 제사장들에게 미움을 산 캄비시스는, 9개월

 후 구바루(Gubaru) 반란군에 의해 대치되었다.


 



 

   이집트를 침공한 이유를, 헤로도투스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역사』3.1에 의하면 이집트의 왕 아마시스(Amasis)가 자기 딸이 아닌, 폐위된 전 왕 아프리스(Apries : 성서의 호브라)의 딸을 캄비시스의 후궁으로 보냈기 때문에 몹시 화가 났다고 전했다.
 
   둘째, 신뢰할 수는 없지만, 헤루도투스는 『역사』3.2에서 이집트의 전설에 캄비시스가 아프리스 딸의 아들이라고 전한다.

 셋째, 『역사』3.3에 의하면, 캄비시스의 어머니 카산다네가 이집트의 새 왕좌를 탐하여, 그녀의 아들 캄비시스가 이집트를 전복시켜 차지할 것이라고 전한다.

 이집트는, 전성기 시절에는 다른 나라로부터 후궁들을 받아들였지만, 자신의 공주를 다른 나라에 보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주전 1200년 이후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다른 나라로 공주들을 보냈다. 캄비시스가 아프리스의 딸과 혼인하려고 시도한 것은, 찬탈자인 아마시스를 폐위하고, 아프리스의 왕계를 이으려는 시도였는지 모른다.


 

 주전 525년 페르시아 침공시, 이집트의 왕가는 26왕가

였다. 6명의 왕이 이 시대를 치리했는데, 이 시대에 앗시리아

 제국의 멸망(주전 612), 유다의 멸망(주전 586), 그리고

 바빌론의 멸망(주전 539)이 있던 시대이다.

 

   여섯 왕들이 치리한 연대는 다음과 같다.

 

   프삼메티쿠스Ⅰ세는 앗시리아 제국의 에살르헤돈

(Esarhaddon 680-669)왕이 속신인 느고 Ⅰ세(Necho Ⅰ)의

아들이다. 그는 주전 664년에 왕이 되었지만, 656년이

되어서야 이집트 전체를 치리하였다. 왕이 된 후 그는, 그의

딸을 ‘테베에서 아눈신의 아내’로 즉위시키며 상이집트

(the Upper Egypt)를 장악하게 되었다.

 

 헤로도투스(2.152)에 의하면, 프삼메티쿠스는 리디아의

 왕 가애게스(Gyges)가 보낸 아이오니아(Ionian)와 카리안

(Carian) 용병들의 도움을 받아 이집트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앗시리아 토판문서에 의하면, 앗시리아 제국의

아수르바니팔(Assurbanipal)의 봉신이었던 가이게스가

프삼메티쿠스에로 충성을 옮긴 것이다.

 

   프삼메티쿠스가 그리스 용병을 사용하여 앗시리아 제국

으로부터 독립했다는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앗시리아 제국은 사실 누비아(Nubia) 정벌에 관심이 있었지,

 이집트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여튼 니느웨가 함락된 후 느고 2세는, 주전 609년에

메대와 칼데아인의 침공을 받아 어려움에 처한 앗시리아

제국을 구하러 등정하였다. 느고가 메대 앞길을 지나려고

하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는 실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유다의

 왕 요시아는 같은 해 목숨을 잃게 된다.

 


 주전 605년에 니고는, 느부갓네살에게 유프라데 강가에

있는 도시 칼키미쉬(Carchemesh)에서 참패를 한다.


 프삼메티쿠스 2세는 즉위 3년째 누비아를 정벌한다.

파라오 자신이 아스완(Aswan)까지 내려갔고, 그의 그리스

용병들은 누비아까지 진군하였다. 이 용병들이 현재의 이집

트와 수단사이에 있는 아부 심벨(Abu Simbel)에 있는 람세스

 2세의 동상 다리에 “킬로이(그리스 용병이름)가 왔었다.”

라는 낙서가 발견되었다.

 

 여기에 파라오는 유대인 용병들을 아스완 맞은 편의

엘레판타인(Elephatine)섬에 거주시켰다. 후에 캄비시스가

누비아로 정벌을 갔을 때, 그들을 바사 사람들의 종으로

고용하였고, 바로 이곳에서 많은 아람어(Aramaic)로 쓰여진

많은 파피루스가 발견되었다.

 

  누비아를 정벌 후 승승장구한 프삼메티쿠스 2세는 여세를

 몰아, 593년 팔레스타인지역 정벌에 나섰다. 불행하게도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예레미아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상한 갈대’같은 이집트를 의지하여 느부갓네살의 화를 초래

한다.(렘 43장)

 

 아프리스는 588년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것

을 풀기 위해 군대를 보냈지만 패하게 되었다.

 571년 파라오 아프리스(셩경의 호브라)는, 리비야에 있는

그리스 도시 구레네(Cyrene)로 진격한다. 이때 아프리스의

휘호 아래 있는 그리스 용병들의 활동을 시기하고 있던

이집트 군대가, 아프리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아마시스(Amasis)가 이끄는 반란군은 드디어 북서 삼각주의

모메피스에서, 쿠테타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아프리스군대의 그리스 군인들에 대한 민족적인

감정으로 시작했던 아마시스가, 아이러니하게도 나중에는

 필헬레네(Philhellene) 즉 “그리스 연인”이란 별명까지 얻었

다.(헤로도투스의 『역사』2.178). 이러한 친 그리스 정책으

로 아마시스는 델피 신전이 파괴 되었을 때, 신전 재건을 위

하여 자금을 보냈으며(헤로도투스의 『역사』2.180)., 그리

스의 독재자 사모스(Samos) 폴리크라테스(Polycrates)와 친

하게 지냈다. 심지어는 구레네의 그리스 여인 라디케(Ladice)

를 아내로 맞았다.

 

    아마시스는 그의 아들 프삼메티쿠스 3세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 이 프삼메티쿠스가 치리한지 반년도 지나지 않아,

바사왕국의 캄비시스가 이집트를 침공하였다. 그때

프삼메티쿠스 3세는 살려주는 대신, 그의 아들은 죽이고

그의 딸은 노예로 보냈다(헤로도투스의 『역사』3.14).

 

   그러나 그 후에 프삼메티쿠스 3세가 반란을 계획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를 처형하였다

                                      (헤로도투스의 『역사』3.15).


 

 522년 봄, 캄비스시는 그가 이집트를 정벌하는 동안,

바사제국 안에서 구테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바사로

돌아오게 된다. 헤로도투스(『역사』3.64-66)에 의하면, 그

시리아에 있는 하마스(Hanath) 부근에서 말을 타다 칼에

서 칼집이 떨어지면서, 그 칼에 사지가 찔리게 되었다.

 다리오 대왕의 베히스툰 비문에 다음처럼 그의 죽음이 묘사

되고 있다.

   이 구절에 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학자들은 이

문장이 뜻밖의 죽음이거나, 객사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죽고 난 후, 그는 3명의 여자동생이자 부인 밖에는 없었

다. 엘람인들의 풍습에 따라, 그는 자기 여동생들을 부인으

로 삼았다.

 

   그의 첫 번째 부인이자 동생은 아토사(Atossa)였다.

캄비시스가 이집트 원정 때, 그녀는 페르시아에 남았다. 그

동안 쿠테타의 주범 중에 한 명인 가우마타와 결혼을 했고,

그 후에는 다리오 대제와 결혼을 해, 성경의 아닥사스다의

어머니가 되었다.

 

   두 번째 부인은 룩산(Roxane) 혹은 메뤠(Meroe)라고 하는

데, 캄비시스에 의해 살해되었다(『역사』3.32).

 

   그의 세 번째 부인은 아르트스토네(Artystone)였다. 그

이외에도 그는 나중에 다리오왕의 신복 6명중 한 사람이었던

 파이디메(Phaidime)와도 결혼하였다.

 

   이렇게 많았던 혼인에서도 왕위를 계승할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페르시아에서는 더욱더 저마다 왕이라고 주장하는

거짓 왕들이 많아지게 되어, 본격적인 왕위 쟁탈전이 시작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