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짜로 주시는 하나님/성도의 생활

[스크랩] 믿음의 삶에 대하여

 

믿음의 삶에 대하여

C.H.매킨토쉬

 

"의인은 자기 믿음으로 살리라"

이 엄중한 진술은 하박국 예언서 제2장에 나타나 있으며, 그 동일한 구절은 성령으로 감동된 사도 바울에 의해 세 개의 서신서에서 인용되고 있는데 곧 로마서, 갈라디아서와 히브리서로서 각각 독특한 적용을 하고 있다. 로마서 1:17에서는 그 구절이 중대한 문제인 의(義)의 문제에 적용되었다. 복된 사도는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기 때문이다. 이어 갈라디아서 3장에서 사도는 하나님의 교회 중에 오류에 빠진 교회를 지적하면서 말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10장에서는 믿는 이들에게 저희 담대함을 굳게 할 것을 권면하기 위해서 말하기를,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을 의의 근거로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여정 중 출발점부터 마치는 그 시점까지 날마다 살아야 할 삶의 원천으로서의 믿음이 제시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믿음 외에 의에 이르는 다른 방법이 없듯이 믿음 외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이다.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었듯이 믿음으로 우리는 살아야 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우리가 서있는 것처럼, 믿음으로 우리는 행하여 가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충만하게(이러한 믿음의 삶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믿음으로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소수의 그리스도인만이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공급받는 일이 가능한 것으로 제한을 두는 것은 매우 큰 오류이며, 분명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되는 견해에 따르면 100명 중 99명의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사는 고귀한 특권을 빼앗기게 된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일정한 수입이 있거나 혹은 고정적인 액수의 월급을 받거나 또는 소위 세속적인 일에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 일로 자기와 가족의 생계를 위할 수는 있지만, 과연 그에게 믿음으로 사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눈에 보이는 생계의 수단없이 믿음으로 사는 일은 불가능한 것인가? 믿음의 삶이란 의식주의 문제를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온전히 맡기는 것이 아닌가?

믿음의 삶에 있어 그리스도인들을 위축시키는 것에는 생활필수품의 문제에 한하지 않는가! 의심의 여지없이 그것은 모든 일에 하나님을 신뢰하는데 있어 매우 복되고 실제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믿음의 삶은 단지 육신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 이상으로 더 높고 더 넓은 것이다. 믿음의 삶은 여하한 우리의 몸과 혼과 영에 관계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며, 모든 일에 주님께 매달리는 것이며,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며, 주님의 마르지 않는 샘에서 물을 긷는 것이며, 주님 안에서 우리의 모든 만족을 구하는 것이며, 주님을 우리 눈 가득 채우는 것이며 우리 마음을 만족케 하는 대상으로서 주님을 모시는 것이다 - 즉 모든 고난과 시험 가운데 유일한 위로로서 주님을 아는 것이다. 믿음의 삶은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주님께 전속되는 것이며, 모든 피조물과 사람에 대한 신뢰와 모든 땅에 속한 기대를 버리고 끊임없이 주님께 의존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삶이다. 우리가 이해한 바에 대해 숙고해보자. 그것은 현실적인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전혀 아닌 것이다. 단지 믿음의 삶에 대해 탁상공론하기를 원치 않을뿐더러 우리는 반드시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즉 우리 심령 깊은 곳 은밀한 것까지 주님께 아뢸 수 있도록 친밀하게 주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 마음이 실제로는 세상적인 것들을 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으로 사는 삶을 고백하며 주님의 낯을 구하는 것은 전적으로 헛된 일이며 차라리 기만적인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사람들은 어떤 필요를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글을 쓰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사실을 자신의 동료들에게 알리시므로서, 얼마나 자주 믿음의 삶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지!

내가 만일 친구에게 (개인적인 필요를 구하기 위해) 편지를 쓰거나 교회에 공고를 할 때, 어떤 필요를 위해 주님의 낯을 구하는 이 일이 근본적으로 내가 믿음의 터에서 떨어진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믿음의 고백은 다음과 같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나의 필요를 사람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알리는 것은 믿음의 삶에서 떠나는 것이며,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주님을 배반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으므로 동료들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터진 웅덩이를 찾는 것이며, 나의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세상적인 것들을 두고, 나의 영혼에게서 풍성한 축복을 빼앗고, 영광의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빼앗는 것이다.

이것은 심각한 일이며, 이 일은 우리의 진지하고 엄숙한 태도를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실제생활을 다루신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신뢰하는 심령을 낙심케 하는 일이 없으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을 신뢰해야만 한다. 우리 마음이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주님을 신뢰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거의 쓸모가 없다. "형제여,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헛된(empty) 고백은 사람의 영혼에 기만적이며 하나님께 욕을 끼치는 것이다. 참된 믿음의 삶은 중대한 현실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며 그것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만족케 해드리고 영화롭게 해드리는 일은 오직 믿음의 삶을 드리는 일 외에는 없는 것이다. "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시 31:19).

당신은 이 큰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당신은 지금 믿음의 삶을 살고 있는가? 당신은 과연,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생의 목표를 온전히 이루실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하나님은 당신에게 충분한 존재이신가? 당신은 이생과 내생에서 모든 일 곧 당신의 몸과 혼과 영과 관련한 모든 일에 대해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 혹은 여하한 방법으로 당신의 필요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습관이 있지는 않은가? 당신의 마음이 세상적인 것에 동정과 도움과 조언을 구하는 습관에 젖어 있지는 않은가?
이것들은 매우 중대한 질문들이다. 이 일들로부터 돌아서지 말 것을 권하고 싶다.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시련을 참는 것은 우리 심령에 매우 유익한 것이라 확신한다. 우리가 실제로는 사람의 도움에 의지하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의뢰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 너무 이율배반적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를 외면하실 것이요, 우리는 열매맺지 못하며, 황량한 상태에 버려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축복하시는데 세상적인 방편을 사용치 않는다는 뜻이 아님을 주의하라. 하나님은 (세상적인 방편을) 지속적으로 사용해 오셨다.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은 이러한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돕기 위해 사용하신 모든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해 마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디도의 옴으로 바울을 위로하셨다. 하지만 바울은 디도의 오는 것만을 구한 것이 아니다. 디도는 약간의 위로를 주었을 뿐이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양식을 공급하기 위해 가난한 과부를 사용하셨지만, 엘리야는 과부에게 자신을 의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했던 것이다. 믿음의 삶이란 모든 경우에 있어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는 것이다.

 

http://www.christian.or.kr/  (펌)

출처 : 복음과 삶
글쓴이 : 코람데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