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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주시는 하나님/성도의 생활

어떻게 살 것인가?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마태6:31-32)

성도들의 매일매일의 삶이 세상에서 사는 것인지,

아니면 믿는다는 울타리 - 제한된 영역 - 안에서 사는 것인지

분명한 선을 긋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잘 믿는 다는 것이 요즘 세상에서 어렵다는 것은 삶의 기준의 변화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삶은 나그네와 같은 것인데,

고향을 떠나 타향에 적응하기를 꾀하는 생활방식은 이방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본적 권리와 최소한의 의무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지만 땅으로부터 공중에 떠서 먹지 않고 입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먹기 위하여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먹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행을 위한 삶이 아니라 생활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여행이라야 고생도 낙이 되는 것입니다.

죽지 못해 사는 삶을 통하여 무슨 값진 일이 나오겠으며, 어떤 보람된 순간을 기대하겠습니까?

삶을 좀먹는 가장 큰 원인은 '염려'라는 독소입니다.

베드로의 삶은 염려의 연속선이었으나 성령의 다루심을 받은 후,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라 권면하기까지 되었습니다(벧전5:7).

 이는 베드로가 평생을 통하여 얻은 삶의 진리였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의 이름 앞에는 "티테디오스(Titedios)"라는 이름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 말은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는 참으로 염려에서 해방된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주요한 목적은 무엇을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되느냐'하는 존재의 문제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가에 행복의 척도를 두어야 합니다.

의식주 문제의 걱정은 믿음의 결여에서 생긴 것이며 아버지와 관계없는 외인이었기에 생긴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표가 분명하다면 나를 위해 어떻게 물질을 쓸 것인가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물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걱정을 하면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집떠난 아들이 타향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는 충실한 행동을 함으로

그 아버지를 사랑하는 증거를 보이듯이 말입니다.

마지막 날에 내가 얼마나 빌었나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를 드렸는가 하는 것,

즉 가치있는 하나님의 사역에 얼마나 참여하였는가 하는 것이 삶의 평가기준이 될 것입니다. /자료ⓒ창골산 봉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