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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보물을 생각하며/이런 얘기 해줄께...

친구 아버지

〈시지프의 신화〉알베르 카뮈


부조리한 삶 선택권은 누구에게?

자살하는 사람이 하루 평균 36명이라니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꼭 자살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사실 모두가 가끔씩 자문하곤 한다. 아등바등 살아봐야 뭐하겠는가 왜 이토록 기를 쓰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한마디로 ‘존재의 이유’에 대한 물음이 필요할 때가 있는 것이다. 유행가 제목 같은 표현이지만 사실 꽤 심각한 얘기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철학의 핵심이라고 선언한 책이 있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실존주의 사상가인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가 바로 그것이다. 자살할 것인가 말 것인가 지은이는 책의 첫머리에서 이것이 다른 모든 철학적 문제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단언한다. 이에 비하면 물질과 정신의 관계 같은 형이상학적 주제들은 애들 장난 같은 얘기라고까지 말한다. 물론 이를 중요하게 다룬 건 그만이 아니었다. 쉬운 예로 붓다를 생각해 보라. 그러나 이 낡은 책이 여전히 돋보이는 이유는 그가 제시한 역설적 해답, 곧 “인생은 헛수고”라는 데 있다. 무거운 바위를 힘겹게 높은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면 다시 굴러 떨어지고, 그러고 나면 똑같은 노고를 운명적으로 반복해야 하는 그리스신화 속의 저주받은 영웅 시시시포스(시지프는 프랑스식 표기임)! 우리네 인생이 결국 시시포스의 도로(徒勞)에 불과하다면 삶에는 아무런 궁극적인 의미도 목적도 없다. 눈앞의 수많은 목표를 이룬다 해도 결국 붓다의 말씀대로 삶은 공(空)이고, 솔로몬의 탄식처럼 모든 것이 헛되다.

그런데 카뮈의 진짜 해답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삶은 부조리하다. 정해진 목적에 따르는 질서정연한 논리가 삶의 본질이 아니다. 전통적으로는 종교적 신앙이나 이데올로기가 그 목적과 논리를 제공해 왔고, 심지어 현대에는 유전자에서 그걸 찾으려는 시도도 있다. 하지만 실존적 삶은 부조리와 혼돈, 공허 위에 서 있으며, 정해진 게 없으므로 오히려 우리는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작은 몸짓 하나하나가 고유한 의미를 획득한다. 삶의 의미와 가치는 밖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운명적 부조리 속에서 우리 실존 내부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 곧 순간순간의 결단과 고뇌와 실천을 통해 주조되는 것이다.

고대의 스토아철학자들은 삶의 공공성이 훼손됐을 때 종종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그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는데, 그들에게는 인간이야말로 자신의 의지로써 생사를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게 중요했다. 세네카의 말처럼 “필연 속에서 사는 건 운명이지만, 삶 그 자체가 필연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중세 이후 기독교가 득세하면서 자살은 대죄가 됐고,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강조하는 동양의 유교 윤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카뮈는 우리가 잃어버렸던 삶의 선택권을 새로운 방식으로 되찾아주었다.

21세기의 눈으로 보면 실존주의는 분명 낡은 철학이다. 더구나 한국에서는 1980년대 민주화투쟁의 주역들이 선배들의 감상적 실존주의를 극복하면서 사회운동을 진일보시켰다. 그런데 요즘 그 386세대가 종종 도마 위에 오른다.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도대체 왜 사는가 실존주의는 지나간 사상이지만, 삶의 부조리가 지속되는 한 ‘실존적 고뇌’의 가치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경성대 교수·철학

맑스를 위하여


벌써 꽤 지난 일이지만 몇 달 전 서울의 어느 대학에서 ‘맑스 코뮤날레’가 열렸다. 제목도 거창했고 제법 의미심장한 행사였는데, 아쉽게도 세간의 관심은 그리 크지 않았던 것 같다. 당연한 일이다. 주지하다시피 마르크스주의가 이 땅의 지성계 한 구석을 풍미하던 시절은 다 지나갔고, 이제는 심지어 “마르크스주의는 낡은 이론”이라는 주장조차 진부해졌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그의 이름을 다시 들먹이는 건 일부 매니아()들의 향수나 고집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나 또한 그 고집에 기꺼이 동참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번에는 루이 알튀세르의 <맑스를 위하여>(이종영 옮김·백의·1997)를 소개하려고 한다.

출판 후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덧 이 분야의 고전이 되어 버린 이 책은 사실 알튀세르가 1960년에서 65년 사이에 여기저기 발표했던 8편의 글들을 모아 만든 책이다. 물론 일관된 주제의식과 문제 틀은 있다. 그에 대해서는 저자 자신이 서문에서 비교적 친절하게 해설해 놓았기 때문에, 이 책을 다 읽지 않을 독자라면 서문만이라도 잘 읽어보도록 하자.

흔히 ‘인식론적 단절’ 또는 ‘과학/이데올로기’의 이분법으로 요약되는 그의 심오한 이론에 대해 여기서 상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의 ‘과학적 이론’과 헤겔의 ‘이데올로기적 철학’을 날카롭게, 어쩌면 너무 지나칠 만큼 철저하게 구분했다는 점, 그리고 그 구분의 의미를 이해할 때에만 마르크스의 새로운 발견,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진정한 핵심을 붙잡을 수 있다고 되풀이하여 역설했다는 점만은 기억해야 한다. 우리를 주눅들게 하는 방대한 문헌자료와 현란한 논증은 뒤로 밀어놓아도 좋다. 어차피, 관련 연구자가 아니라면 새삼스레 포이어바흐와 청년 마르크스의 저작들을 뒤적이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면 구조주의와 정신분석학, 또 이름조차 생소한 프랑스 과학철학자들의 개념들까지 총동원한 이 작업이 왜 그리 중요했을까 철학을 ‘실천적 정세에 대한 이론적 개입’으로 보았던 저자 자신에게야 그 답이 분명하다. 스탈린 비판 이후의 새로운 정세 아래서 마르크스주의를 올바르게 옹호하고 마르크스의 이론에 과학적(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 또 무엇보다도 철학이 혁명적 실천으로 전화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는 것 등등! 그럼 지금의 우리에게는 1980년대 말 이른바 정통 마르크스주의만으로는 일정한 한계에 부딪쳤던 우리의 진보적 지성계에 새로운 자양분을 공급해 주었다는 것, 현대 프랑스 철학의 다양한 논의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이후의 지적 유행을 선도했다는 것 등등!

알튀세르는 뒤에 자신의 입장을 상당히 수정했고, 개인적으로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이 책이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미친 영향과 파급 효과는 적지 않았으며, 특히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철학에 대한 자기부정은 아직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철학이 주는 작은 희망은 철학에 대한 철저한 절망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는 역설!

경성대 교수·철학 김재기

 

 

호모 루덴스> 요한 호이징하

먹고살 만하니까 논다고?
인간사회의 본질은 '즐거운 삶'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인간)는 우리 종족의 공식명칭이며 ‘호모 파베르’(제작하는 인간)는 제1의 별명이다. 하지만 고전적·계몽적 이상을 상징하는 전자나, 자본주의 체제가 낳은 경제 우위의 관점을 대변하는 후자나 때론 우리의 발을 옥죄는 족쇄가 된다.

그럼 우리에게 더 어울리는 이름은 없을까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이른바 ‘문화’라는 말이 세간의 화두로 떠오르면서 인간의 본성이나 삶의 목표에 대한 인문학적 담론들 또한 커다란 변화를 겪었고, 이에 따라 ‘놀이’라든가 ‘즐거움’과 같은 낱말들도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아주 새로운 사태라고 호들갑 떨지는 말자. 헤르만 헤세가 <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게 벌써 반세기 전의 일인데, 사실 그보다도 훨씬 전에 “놀이는 문화보다 더 오래되었으며, 놀이야말로 인간 문명의 본질”이라는 선구적 통찰을 제시한 저작이 있었으니까!

네덜란드 출신의 사학자 요한 호이징하(Johan Huizinga)가 쓴 <호모 루덴스>(김윤수 옮김·까치·1981)가 바로 그것인데, 책 제목은 문자 그대로 ‘노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호이징하는 이 책 속에서 ‘놀이’(때로는 ‘게임’이나 ‘장난’까지 포함하여)와 ‘진지함’의 전통적 이분법을 비판하면서, 놀이가 단순히 유치한 현상이거나 우리 삶의 변방에 자리잡은 일종의 잉여 또는 보완물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독특하고도 의미 있는 형식, 더 나아가 사회구조 그 자체임을 설파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 사회의 중요한 원형적(原形的) 행위에는 처음부터 놀이가 스며들어 있다. 언어나 신화를 예로 들면 언어의 갖가지 비유나 신화의 상상력, 여러 가지 제의(祭儀)들은 모두 다 놀이 양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참신하고 대담한 가설이 치밀한 고증과 독창적인 분석으로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충분히 즐거운 놀이다. 그러나 이 책의 진정한 매력은 지적 딜레탕티즘에 있지 않다. ‘놀이의 존재론적 복권’은 “먹고 살 만하니까 이제 여가도 중요하다”는 식의 속류사회학을 훨씬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책장을 덮으며 스스로 물어보자. 우리는 과연 어디서 삶의 행복과 의미를 찾아야 하는가

마르크스의 사위이자 동지였던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폴 라파르그는 마르크스가 죽던 해에 아주 주목할 만한 책을 한 권 출판했는데, 그 제목은 <게으름에 대한 권리>였다. 그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의 소외된 노동에 대한 가장 준엄한 비판자였던 마르크스조차도 ‘신성한 노동’이라는 준칙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지적하면서, ‘진지함과 성실함’이라는 근대의 가면을 넘어서는 해방을 주문하고 있다. 자, 다시 물어보자. 진정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건 무엇인가 지배계급의 착취와 불평등인가 아니면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를 숨가쁘게 몰아세우고 있는 윤리적 이상의 유령인가 1960년대에 시작된 프로보(유럽의 과격파) 운동은 계급해방이 아니라 ‘즐거운 삶’을 투쟁목표로 삼았고, 그 성과는 현대적 자유의 상징 암스테르담을 낳았다. 마약조차 허용된 이 기이한 도시가 호이징하의 조국에 있다는 것은 우연일까

경성대 교수·철학

 

 

 

<야생의 사고>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근대과학에 왜곡되는 원시적 사유
우리와 '다른 것'을 '틀린 것'인가b>

“그건 이거하고 경우가 틀리죠!”

사람들이 잘못 쓰는 대표적 표현 중 하나다. “경우가 다르죠”라고 말해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틀리다’라는 말을 ‘틀리게’ 쓴다. ‘틀림’과 ‘다름’은 ‘다르며’, ‘다르다’라고 말해야 할 때 ‘틀리다’라고 말하면 ‘틀리게’ 된다. 그런데 사고가 언어로 표출될 뿐만 아니라 때론 언어가 사고를 만들기도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혼동은 매우 심각한 문제다. 우리는 은연중에 ‘우리와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여기는 데 익숙해진 것은 아닌가 또 그럼으로써 우리의 세계 이해 방식을 진위 구별과 가치 판단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고, 지식을 권력으로 만드는 놀이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개고기를 두고 심심찮게 논쟁이 벌어진다. 일부 서양인들은 개고기를 먹는 것이 야만적인, 따라서 잘못되고 틀린 풍습이라고 우긴다. 자, 이 편협하고 독선적인 문명의 논리에 어떻게 맞서야 할까 물론 답이야 간단하다. “너희하고 우린 다르다. 너희들은 개를 먹을 수 없는 동물로 분류하지만, 우리에겐 반대다”라고 외치는 수밖에!

저명한 구조주의 사상가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안정남 옮김·한길사·1996)는 이 주제와 관련된 탁월한 인류학적 업적이다. 꽤 어려운 이론에 저자 특유의 현학적 문체 탓에 쉽게 독파할 수는 없지만, 역자의 정성들인 번역 덕에 대가의 전모를 살펴볼 창구가 될 만한 책이다. 사실 제목의 ‘야생의’(sauvage)라는 표현은 ‘미개한, 야만의’라고 옮겨도 무리가 없는데, 이 책은 서양의 근대 과학문명에 의해 왜곡되고 천대받던 원시적 사유를 다룬다. 저자가 수많은 민속지학적, 인류학적 사례들을 동원하여 증명하려는 논제는 “세계에 대한 합리적·과학적 인식은 분류에서부터 시작되고, 어떤 분류라도 무질서보다는 낫다. 그런데 분류의 원칙에서 미리 결정된 공리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전제 아래서 그는 토템이나 신화 체계 등과 밀접히 연결되어 세계 이해의 기둥 구실을 해 온 원시적 사유의 특성과 구조를 차근차근 탐구하며, 이를 근대 이후의 추상적·수학적 과학과 대비하여 ‘구체의 과학’으로 재정립한다. 야생의 사고는 논리와 객관성이 결여된 덜떨어진 사고가 아니라 근대과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사유체계일 뿐이므로, 양자의 우열을 가릴 순 없다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두 과학은 병존하면서 인류의 삶에 기여해 왔다. 쉽게 말해 우린 누구나 코와 혀로 보통 된장과 청국장의 냄새와 맛을 구분하는데, 화학적 성분분석이 이것보다 절대적으로 더 과학적·합리적이라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 오히려 구체의 과학은 주관성과 객관성을 통합하고 이론적 지식이 감정이나 미학과도 양립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미건조하고 때로는 공허하기도 한 근대과학의 한계를 보완한다. 더구나 지난 수만년 동안 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후자가 아니라 바로 전자이며, 인류의 삶을 근본적으로 뒤바꿔놓은 소위 신석기 혁명도 바로 ‘구체의 과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긴 근대 과학의 역사라고 해 봐야 기껏 400년에 불과하지 않은가

경성대 교수·철학 김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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