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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보물을 생각하며/이런 얘기 해줄께...

친구 아버지

 

 바타유의 에로티즘 


  오래 전에 봤던 B급 에로영화 중에 <훔친 사과가 맛있다>는 제목이 있었다. 유치하게 무슨 소리냐고 욕하시지 말기를! 물론 제목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한번쯤 의문을 품어볼 만하다. 왜 그럴까

  대개 금기나 규율에 의해 금지(통제)되는 경우 그 대상은 더 강렬한 욕망의 목표가 되며, 반대로 아무 방해 없이 손에 넣을 수 있을 때 그 대상은 그다지 짜릿한 자극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훔친 사과가 맛있다?는 말과 같은 뜻이지만, 표현은 반대인 속담도 생기지 않았을까 하던 지랄도 멍석 깔면 그만둔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인간의 욕망은 단순한 생리적 필요와는 다르다. 생리적 필요는 객관적 결핍에서 비롯되므로, 그 결핍이 충족되고 나면 그것에 대한 욕구도 멈춘다. 생각해 보라. 아무리 목이 말라도 무한정 물을 마실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많은 욕망들은 단순한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므로, 쉽게 멈추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어진 것을 넘어서서 무한히 팽창한다. 물론 이것을 탐욕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윤리적 훈계를 조금만 비켜서면 아주 중요한 비밀이 드러나는데, 그건 바로 ?금기 자체가 욕망을 생산한다?는 사실이다. 금기가 욕망을 생산하다니 금기란 인간의 무절제한 욕망을 통제하기 위해 필요한 게 아니던가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거꾸로 그러한 통제의 구조가 언제나 새로운 욕망들을 자극하고 생산한다. 욕망과 금기의 관계는 이처럼 기묘한 변증법으로 뒤얽혀 있다.

  조르주 바타유의 역작 <에로티즘>은 바로 이러한 변증법적 구조에 대한 탐구다. 저자는 ?에로티즘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가운데, 욕망과 금기의 대립구도를 폭넓게 확장하여 재해석한다. 도대체 무엇이 에로틱한가 왜 똑같은 나체라도 어떤 때는 에로틱하고 어떤 때는 그렇지 않은가 그 답은 엉뚱하게도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금기와 규율에 있다. 우리의 일상은 논리와 노동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수많은 금기와 규율의 통제 아래 있다. 그것은 건전하고 생산적이고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세계지만, 동시에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적이고 지루하고 답답한 세계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속에서 늘 일탈과 해방을 꿈꾼다. 자유로운 여행을 꿈꾸고, 술을 마시거나 광란의 축제를 벌이면서 잠시 이성을 잊어버리기도 하고, 가슴 설레는 사랑에 빠져보기도 한다. 이 모든 일탈과 해방은 어떤 의미에서건 주어진 삶의 틀을 깨거나 벗어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물론 가장 극단적인 일탈은 바로 죽음 그 자체이겠지만!

  저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전제로 ?에로티즘?이라는 주제를 인간 삶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들, 즉 죽음, 노동, 성, 제의(祭儀), 전쟁, 종교 등등과 연계시켜 흥미진진하게 분석한다. 과학자가 아니라 작가였던 저자의 기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에로티즘>은 과학적 엄밀함으로 무장한 책은 아니다. 오히려 상당 부분이 거대한 형이상학에 기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모두 제쳐둔다 하더라도, 주제가 갖는 흡인력과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은 독자들을 즐겁게 해 주기에 충분하다. 누가 거부할 수 있겠는가 에로틱한 것의 매력을!


경성대 교수?철학/김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