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는 모든 철학의 궁극적 물음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로 귀착된다고 했다. 진부하면서도 심오한 명언이다. 허나 너무도 포괄적이고 막연한 이 물음에 대해 어떤 답을 내놓아야 할까
인간에 관한 고전적 정의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이성적 동물’과 ‘정치적 동물’이다. 여기서 그리스어의 ‘정치적’(politikon)이란 용어는 그 의미를 고려해 볼 때 ‘사회적’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등등의 논의는 우리 관심사가 아니다. 문제는 그가 인간을 동물의 일종으로 정의했다는 점이며,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이는 이 주장이 많은 걸 시사한다.
못된 인간을 가리켜 “짐승 같다”고 욕하는 데서 잘 드러나듯이, 동서양의 많은 사상은 인간과 동물의 본질적 차이만을 강조해 왔다.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해 신비스럽고 관념적인 ‘존재의 위계질서’가 세워진 뒤로 인간은 늘 “동물+α”로 여겨져 왔으며, 이때 동물성에 덧붙여진 ‘α’야말로 인간의 본질을 밝혀주는 열쇠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토록 날카로운 분리와 대립 속에서도 동물성의 문제는 인간의 해명에서 극복하기 힘든 아포리아였다. 육체의 멸시와 극단적 심신이원론을 비롯하여 기독교의 원죄론과 구원론 등이 해답으로 제시되었지만, 이 모든 것은 근대과학의 발전, 특히 진화론의 등장으로 인해 쇠퇴한다. 인간의 조상을 원숭이류의 짐승으로 설정해 놓은 다윈의 불경과 더불어 이제 동물성이야말로 우리가 풀어야 할 진짜 비밀이 되는 것이다.
20세기의 사회생물학은 이런 풍조에 힘입어 인간의 동물성에 주목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인간이 이룩해낸 모든 것, 문화, 사회, 이념까지도 동물적 본능이나 습성들의 확장으로 해석한다. 미개했던 인류가 자연 속에서 정신을 발견했다면, 이제 현대의 과학자들은 정신 속에서 자연을 찾아내는 것이다.
영국의 동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Desmond Morris)의 <털없는 원숭이>(김석희 옮김·영언문화사·2001)는 동물학자의 눈으로 바라본 ‘인간학 개론’이며, 넓은 의미에서 사회생물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저작이다. 저자는 재치 있는 필치와 흥미로운 사례들을 통해 독자들의 머릿속에 “인간도 동물”이라는 명제를 효과적으로 각인할 뿐만 아니라, 동물성에 대한 이해 없이는 인간 이해도 불가능함을 역설한다.
모두 맞는 말이다. 게다가 이 책은 아주 재미있다. 또 전문적인 이론서가 아니면서도 통속적인 이야깃거리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에, ‘영혼의 담론’만으로 인간을 논의해왔던 이들에게 작은 충격과 커다란 교훈을 준다.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이 책이 최고의 성과를 낳는 바로 그 지점에 뿌리치기 힘든 유혹과 함정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복잡한 존재를 단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려는 환원주의는 종종 자기 영역을 넘어서서 ‘오버’한다.
인간을 둘러싼 다양한 인문학적 담론들을 실증적인 생물학적 탐구로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 사회생물학의 오만은 유전자의 해독이 모든 수수께끼를 풀어줄 것이라는 망상처럼 해롭고 위험하다. 또 그것은 성경의 자구가 모든 지적 탐구를 대신해야 한다고 믿었던 낡은 신학의 강요만큼이나 폭력적이기도 하다.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탐구는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한다. 그 어떤 진리도 한계를 벗어나면 오류가 된다는 변증법의 지침이 여기서도 필요하지 않을까
경성대 교수·철학
<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
추리소설 형식 빌린 문화비판·철학적 소설
‘책읽기’의 묘미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의 즐거움을 “고전, 문화, 지성, 아이러니, 섬세함, 행복감, 자제력, 삶의 기술인 안정감”이라고 설파한 바 있지만, 이런 거창한 주문은 괜히 평범한 독자들을 더 주눅들게 만들곤 한다. 더구나 그 책이 전문 이론으로 무장된 현학의 산물인 경우에는 더 말해 무엇하랴
사실 일반 독자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은 삶에 덧보태지는 약간의 향기, 일상을 벗어나 잠시나마 뭔가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흡인력, 그리고 책장을 덮은 뒤에 느껴지는 작은 깨달음과 그 여파로서의 흐뭇함에서 나온다. 따라서 이론서보다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소설이나 수필 등의 문예물이 인기를 끌기 마련인데, 마침 그 책이 교양의 심층을 두텁게 해 주고 지성의 촉수를 적절히 자극하며, 더 나아가 인간성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끌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에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움베르토 에코의 대표적 소설 <장미의 이름>(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1992)을 소개하려고 한다. 물론 그 동안 그의 책들이 여러 권 번역되었고 특히 이 책은 벌써 꽤 많은 독자들의 호평을 받은 바 있으므로, 이제 와서 새삼스레 이를 추천하는 것이 진부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쉬운 말로 재미와 깊이를 두루 갖춘 텍스트가 그리 흔하지 않은 현실에서 저명한 고전을 새로운 세대의 독자들에게 다시 소개하는 것도 그리 무익한 일만은 아니리라.
<장미의 이름>은 중세의 한 수도원에서 벌어진 연쇄살인 사건을 추리기법으로 다루고 있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정신의 소유자인 주인공 윌리엄 수도사는 그 사건이 수도원의 장서관에 숨겨진 비서(秘書), 곧 지금은 사라져 버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부 ‘희극론’ 때문에 일어난 것임을 밝혀낸다. 소설의 구성과 전개는 윌리엄 수도사가 연쇄 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을 기독교 성경의 ‘요한계시록’의 구성에 맞추고 있다. 여기서 돋보이는 것은 흥미진진한 사건의 전개, 윌리엄의 논리적 추리 능력, 배경으로 삽입된 중세 문화와 풍속, 정치적 상황 등에 대한 생생한 묘사로서, 독자들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지적 유희를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에코가 강조하려는 핵심은 다른 데 있다. 이 책은 사실 추리소설의 형식을 띤 ‘철학적’ 소설이며, 배경은 중세의 수도원이지만 폭넓은 문화 비판을 통해 현재적 의의를 살려 내고 있다. 이단에 대한 탄압과 신학적·형이상학적 독단, 마녀사냥, 종교재판으로 상징되는 중세의 지배질서는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탄압과 갖가지 지배이데올로기, 언론조작, 광기 어린 매카시즘 등을 통해 오늘날에도 여전히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거론되는 현대 문명의 위기와 인간성 상실은 우리에게 새로운 ‘계몽’을 요구한다. 근대의 경험적·과학적 정신이 중세의 암흑을 꿰뚫은 빛이었다면, 우리 문제를 해결해 줄 정신적 빛은 어디에서 올 것인가 그것은 결국 인간 자신에 대한 진지한 반성,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열린 자세, 독단에 빠지지 않는 합리적 탐구를 요구할 것이다. 이 소설의 화자이자 윌리엄의 제자였던 앗조가 수도원의 폐허 위에서 내뱉는 독백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아직도 사라져 버린 장미의 ‘이름’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경성대 교수·철학 김재기 <시뮬라시옹> 장 보드리아르
“좋아하는 연예인이 누구예요” 가끔씩 받는 질문이다. 난 잠시 곤혹스러워하다가 결국 “없다”고 대답한다. 질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내 곤혹스러움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실 내가 하고 싶었던 진짜 대답은 이런 거다. “나한테 연예인이란 벽에 걸린 그림 같은 것, 실재가 아니라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일 뿐이야. 난 그들을 만날 수도 없고 그들과 얘기를 나눌 수도 없고 그들을 만져볼 수도 없는데……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건 그런 이미지가 아니라 살과 피를 가지고 숨쉬는, 내 곁에 있는 진짜 인간들이야.”
간단하고 일상적인 질문 하나에 너무 앞서가는 게 아니냐고 면박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날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다. 그리고 좋아하는 연예인을 찾기 힘든 걸 보면, 아니, 연예인이라는 ‘그림’을 좋아하기 힘든 걸 보면 난 아무래도 옛날사람인가 보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연예인을 향한 일부 청소년들의 열광과 숭배는 상상을 초월한다. 아니 연예인 그 자체가 아니고, 연예인으로 대표되는 모든 종류의 이미지들, 영화, TV, 광고, 사진,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 컴퓨터 게임 등등이 그들의 영혼과 일상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그에 비하면 그들 주변에 실재(!)하는 인간들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다. 독립적 기호가 되어버린 세련된 이미지들, 끝없이 복제되고 유연하게 변형되면서 우리의 눈과 귀를 유혹하는 허상들이 굼뜨기 짝이 없고, 경직되고 투박하고 촌스러운 실재를 대체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다.
지나친 비약이 아니냐고 그렇긴 하다. 아무리 이미지와 기호와 허상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배고플 때 햄버거 그림을 먹고 목마를 때 콜라 사진을 마시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복제를 통해 무한대로 번식하는 시뮬라크르(simulacre)들의 지배는 이제 더 이상 특수하고 신기한 현상이 아니라, 어디나 존재하는 우리 삶의 기본양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또는 그것들을 통해 느끼고 사고한다. 실재는 증발하고 뒤로 밀려난다. 생각해 보라! 참과 거짓, 진짜와 가짜, 원본과 복제를 구분하는 건 인류의 오랜 꿈이자, 가장 기본적인 의무였다. 그것은 꼭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아주 값진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다 옛날얘기가 되어버렸다. 이제 많은 경우에 그런 구분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들에 관심 가진 독자들에게 프랑스의 대표적 포스트모던 사상가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시뮬라시옹>(Simulation; 하태환 옮김·1992·민음사)을 권하고 싶다. 제목이 시사하듯이 원본 없는 복제들, 실재보다 더 현실적인 시뮬라크르들에 포위되어 버린 현대의 존재론적 조건을 선구자적 통찰과 풍부한 예증을 통해 탁월하게 해명하는 책이다. 현란한 수사와 낯선 문체가 종종 편안한 독서를 방해하겠지만, <전도서>의 이름을 빌려 “시뮬라크르는 진실을 감추는 게 아니라, 진실이야말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길 뿐”이라는 묵시적 경구로 시작하는 이 책은 저자의 입장에 대한 찬반 여부를 떠나 분명 현대의 고전이 되었다. 하긴 조금 걱정스럽기는 하다. 막상 <전도서>의 말미에는 이런 경구도 있으니 말이다.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경성대 교수·철학 김재기
<이슬람문명사> 버나드 루이스
바그다드를 다녀왔다. 긴 설명이 불필요한 인류문명의 요람, 유럽인들이 암흑 속을 헤매고 있던 천년 전 세계 최고의 문명을 꽃피웠던 이슬람제국의 본거지, 천일야화의 꿈과 낭만이 서려 있는 환상의 도시, 그러나 지금은 미국의 침공으로 폐허가 되어 박물관의 유물들까지 약탈당한 패전국의 수도! ‘중동’으로 통칭되는 이 지역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이라곤 열사의 사막과 낯선 터번과 석유, 그리고 무시무시한 전쟁과 테러뿐이다. 물론 그 모든 게 다 그들을 끊임없이 침략하고 지배하고 왜곡해 온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작품일 뿐이지만!
이슬람에 대한 무지, 멋진 여행처럼 푼다
“문명사회의 발전 정도는 바로 그 사회에서 여성과 아이들이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라는 경구가 있다. 어느 유명한 페미니스트의 말이 아니고, 프랑스의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였던 푸리에의 통찰이다. 200년 전에는 생소했을 이 경구가 이젠 보편적 진리가 되었다. 그렇다! 약자와 소수자와 주변인들이 어떤 대접을 받느냐에 따라 문명의 등급이 결정된다면, 국민소득이나 인터넷 보급망뿐만 아니라 다른 문명에 대한 이해의 수준 또한 한 문명의 질을 파악하는 척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많이 다르고 멀리 떨어진 낯선 문명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아니, 얼마나 알려고 노력해 왔는가 9·11 테러와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우리 사회에도 이슬람 세계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다고 한다.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에 대한 무지를 반성하려는 움직임이라면 반가운 일이지만, 행여 제2의 중동 붐과 같은 천박한 이해타산의 소산이거나 낯선 것에 대한 일시적 호사에 불과하다면 이 또한 적잖이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한번 물어보자. 왜 우리는 아시아에 속하고 그 문명권 안에서 수천년을 살아왔으면서도 이웃이나 주변의 역사보다는 미국이나 유럽의 영혼에만, 그것도 지난 몇백년 사이에 만들어진 근대의 허상에만 얽매여 있는가 왜 우리는 이른바 기독교문명의 오만에 대해서는 지나칠 만큼 관대하면서도 서구문명의 외부에 대해서는 그토록 무지하고 무관심한 것인가 교양 있는 이들이라면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한두 번쯤은 생각해 봤을 것이다. 아니, 가끔은 술자리에서 핏대를 올려가며 우리 시야의 편협함과 지적 편식에 대해 성토하고 한탄도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디서 시작해야 할 것인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깊게 팬 무지와 무관심의 골을 메워갈 수 있을까 버나드 루이스가 쓴 <이슬람문명사>(김호동 옮김·이론과실천·1994)는 이런 고민에 대해 작은 답을 준다. 저자와 역자 모두가 이 분야의 권위 있는 전문가인 데다 간결하면서도 품격 높은 서술이 개론서로서의 가치를 높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때그때의 정치경제적 필요에 따라 피상적이고 단편적인 촌평만을 쏟아내는 서구 언론의 보고서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필자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독자라면,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지만 좋은 방법을 찾지 못해 답답했던 독자라면 꼭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지면의 제한으로 책의 상세한 내용을 소개할 수 없는 게 아쉽지만, 일단 책을 손에 든 이들은 멋진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혜초 스님이 진리를 찾아 떠났던 여행과 비슷한 대장정을! 경성대 교수·철학 김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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