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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개에 대한 견해부터 최근 '구약폐기론'까지 김용옥 교수의 발언 하나하나에 보수 교계는 물론 신학자와 언론이 가세하고 나섰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나야말로 정통"이라는 도올 김용옥 교수(세명대 석좌)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의 요한복음 강해는 거듭된 논쟁을 몰고 오고 있다. 회개에 대한 견해부터 최근 '구약폐기론'까지 그의 발언 하나하나에 보수 교계는 물론 신학자와 언론이 가세하고 나섰다.

보수 교계 입장을 대변하는 언론단체인 한국교회언론회(대표 박봉상 목사)는 도올이 강의를 하기도 전부터 반응을 보였다. 한국교회언론회는 강의 전인 1월 30일 EBS에 공문을 보내 도올은 성경을 강의할 적임자가 아니라고 항의했다. 도올은 과거 예수를 모독하는 발언을 하여 종교 논쟁을 일으켰다는 점, 공영 방송이 특정 종교와 관련된 부분에 대하여 강의를 방영하면서 신중하지 못했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보수 교계, 제일 먼저 딴죽 걸어

한국교회언론회는 도올이 다섯 번의 강연을 EBS 홈페이지에 올린 지 이틀 뒤인 2월 8일 '도올 교수의 요한복음 강의 신학적 문제점 드러내'라는 논평을 발표했다. 한국교회언론회는 도올이 성경 구절을 충분히 설명하려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강의 여러 곳에서 신학적 오류가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도올이 주장한 회개에 대한 해석에 '딴지'를 걸었다. 도올은 제3강에서 회개를 설명하면서 예수는 회개하라고 한 적이 없었다며, 회개하라의 원어인 메타노이아는 마음의 상태를 바꾸라고 번역해야 옳다고 주장했다. 한국교회언론회는 죄에 대한 자각 없이 단지 마음을 돌이키라는 것은 포괄적인 의미를 놓친 설명이라고 반박했다. 또 복음서가 예수의 어록자료(일명 Q문서)를 기초로 쓰였다는 역사비평적 방법을 전제하는 것,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로고스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은 정통 신학 입장과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도올은 초대 교회 이단과 닮았다?

도올의 요한복음 강연을 둘러싼 논쟁에 불을 붙인 것은 구약폐기론. 도올은 2월 13일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예수의 출현으로 새로운 계약(신약)이 성립된 만큼 구약은 당연히 효력이 없다는 식으로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겨레>는, 도올이 초대 교회에서도 구약을 성경에서 떼어내자는 말이 많았으나 참고문헌으로 붙여놓았다고 주장한다고 보도했다.

보수 교계는 강하게 반발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이용규 목사는 2월 20일 기자간담회를 열어 구약성경 폐기론은 "성경에 대한 몰이해"라고 반박했다. 한국교회언론회도 "2세기에 나타났던 마르시온의 이단 사상과도 일맥상통하는 어이없는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내었다"고 비판했다. 진보신학자인 김이곤 교수(한신대)도 도올을 마르시온과 비교했다.

"구약을 비난하는 도올의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기원 후 2세기경에 일어난 마르시오니즘(Marcionism)의 마각이 그 발톱을 드러내는 것 같은 섬뜩한 느낌을 느끼게 된다. 실로, 마르시온(Marcion) 사상의 마성(魔性)이 놀랍게도 도올 선생께서 시중의 신심을 왜곡 선동하였던 그 궤변의 저의와 상응하는 것으로 판단된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반면 이영재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뉴스앤조이>에 기고한 글에서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알려면 반드시 구약성서를 읽어야 한다"며 구약폐기론을 비판하면서도, 도올을 마르시온주의자로 보는 것은 반대했다. 이 연구실장은 도올과 마르시온 두 사람의 공통점으로 예수와 교회를 사랑하며 구약을 배척한 점, 야훼 하나님을 폭력적이고 호전적인 신으로 본 점 등을 공통점으로 지적했다. 그러나 요한복음을 폐기한 마르시온과 달리 도올은 요한복음을 중심에 둔 것이 크게 다르다고 했다.

학자와 목사 신부까지 도올 비판 가세

이들 외에도 여러 신학자들이 교계 안팎의 언론에 반론을 제기했다. 천주교 신부와 학자들도 도올을 비판하는 대열에 합류했다. 신학적인 반론도 있지만, 인상비평 수준을 넘지 못한 비판도 많았다.

"도올의 성경 이해는 불행하게도 기독교의 운명을 이끌 만한 푯대이기는커녕 오히려 혼돈 속으로 몰아넣는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윤철원 서울신대 교수)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일부 교회의 문제로 전체 교회를 매도하고, 교회를 훼손하고 파괴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음모가 숨어 있다는 의구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왜 뚱딴지처럼 그가 요한복음을 강의하겠는가." (최희범 한기총 총무)

"(김 교수는) 성서 신학자도 아니면서 신학자인 척하며 교회를 비판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신앙인들이 나쁜 영향을 받을 것 같아 걱정된다." (박홍 서강대 이사장)
 
"신학교 시절에 조금 배웠다는 옅은 지식을 가지고 수십 년간 공부한 사람들의 연구 결과를 너무 경솔하게 뒤집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구약은 신약으로 도약하는 발판 역할을 했는데 그것을 없애버리는 것은 배은망덕한 행위다." (차동엽 천주교 인천교구 미래사목연구소장)

도올을 '따뜻하게' 본 신학자, 김경재

언론에 나서는 이들마다 감정적인 비판을 하기 바쁘다. 학문적 토론을 벌일 만한 교수들은 '대응하자니 어처구니가 없고 무대응하자니 선의의 신자들이 흔들릴 수 있어서 기독교 일각에서 딜레마에 빠지'거나 '학문적이지도 고상하지도 않는 논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침묵'하고 있다.

학자 가운데 도올의 의중을 알아보고 평가하는 이는 김경재 교수(한신대 명예) 정도가 눈에 띈다. 김 교수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도올은 <요한복음 강해>에서 자신의 독특한 신관을 만들었다기보다는 성서와 예수의 정신으로 돌아가고, 어느 한 집단만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 전 세계, 전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추구했던 한반도 초기 기독교인들의 마음으로 돌아가자고 촉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도올이 한국의 루터와 칼뱅이 될 수 있다는 김 교수는 김 교수와 같은 대학에서 가르친 동료 학자에게조차 "도올을 격려하는 게 아니라 도올의 인기와 대중성에 대한 아첨에 더 가깝다"는 비판을 받았다.

도올의 요한복음 강의가 진행되는 초반은 도올이 기대한 기독교와 성서에 대한 건강한 토론보다는 몇몇 주장에 대한 거친 비판과 반박, 재비판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100여 회에 달하는 긴 강연의 초반인 만큼 신학자들의 생산적인 논의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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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날 한국교회가 성경공부랍시고 하는 교재들 대부분은 성경공부가 아닌 교리 공부일 따름이다.  
 
이번 도올의 요한복음 강의에 대해 기독교계에선 자신들의 입장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도올의 강의는 정통 기독교에서 벗어났다”면서 비난에 가까운 얘기를 해댄다. 하지만 그렇게 비판하는 대부분의 논의들은 정당하고 깊은 수준에서 생산적인 신학적 토론이 되지 못하고 그저 알맹이 없이 비난에 가까운 말들만 토해내는 경우가 많다.
 
예전에 도올 김용옥이 TV에서 유교 논어를 강의하고 불교를 강의할 때만 해도 작금의 기독교계 반응처럼 이렇게 그 시작부터 방방 뜨진 않았는데, 왜 이다지도 심하게 민감하게 구는 건지 모를 일이다. 아마도 기존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교리적 잣대와 보수적 배타성이 작동된 게 아닐까 싶다. 확실히 도올이란 존재는 이미 우리 사회를 읽어내는 아이콘 중의 하나이다.

한국교회는 성경 아닌 교리공부에 치중
 
내가 보기에 적어도 지금까지 끝난 20강 강의에 대해서만이라도 얘기한다면, 한마디로 도올의 강의는 ‘엑설런트급’이라고 평하고 싶다. 왜 그런가. 솔직히 오늘날 한국교회의 참담한 현실과 위기를 생각해볼 때, 도올의 강의만큼 철학적 기반과 예수 시대 당시에 대한 배경 이해를 깔고서 하는 성경공부를 나는 보지 못했다.
 
혹자는 도올의 강의도 신학교에서 이미 다 배운 낡은 이론이 아니냐고 얘기하겠지만, 실제로 신학교에서조차 그만큼의 철학적 토대를 가지고 가르치는 데도 드물다. 내가 특히 강조하고 싶은 지점은 오늘날 한국교회 현장에서 자행되는 어처구니없을 만큼 부실한 성경공부 현실이다.
 
행여 신학교에서 잘 배웠다고 치자. 하지만 그것이 일반 대중들 특히 일반 평신도에게까지 스며들지도 못하고 그저 교리만 주입되고 있는 현실이라면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오늘날 한국교회가 성경공부랍시고 하는 교재들 대부분은 성경공부가 아닌 교리 공부일 따름이다.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그런 종류의 성경공부 교재들은 기본적으로 도올 강의와 비교 자체를 논할 수 없을 만큼 매우 유치한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교회 현장에서 쓰이는 대부분의 성경공부 교재들은 거의가 보수 근본주의의 5대 교리들인 1) 성서무오설 2) 예수의 동정녀 탄생설 3) 예수의 대속적 죽음 4) 예수의 육체적 부활 5) 예수의 재림 같은 것들을 이미 못박고서 거기에 끼워 맞추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성서는 결코 닫힌 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리적 해석만이 전통 교리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잣대 노릇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도올도 발끈했나보다. “도대체 누가 전통이냐?”라고 되묻고 있잖은가.
 
오늘날 학계에서조차 일반화되어 있고, 기독교 서점에 가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성서 비평 교재조차도 우리나라 대부분의 교회는 전혀 소개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한 현실은 한국교회가 지닌 심각한 서글픔이 아닐 수 없다. 상황이 이토록 열악하니 그 같은 도올의 강의가 어찌 고군분투로 보이지 않겠는가.

도올의 구약폐기론, 어떻게 볼 것인가
 
이번에 더욱 논란이 되었던 것은 도올의 구약폐기론인데, 나는 개인적으로 도올의 구약폐기에 동감은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일면 모순된 발언 같지만, 나로서는 도올이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점이 있기에 그러하다.
 
구약은 도올이 잘 지적한대로 매우 야만스럽고 정복적이며 피를 부르는 미개한 흔적을 자주 보이고 있다. 처절한 생존의 절박성에 놓인 약소민족이 갖는 또 다른 호전성이 야만적인 모습으로 삐져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반면에 그 속에서조차도 이를 역류하고 있는 상향의 흐름이 있다. 바로 그 상향의 흐름이야말로 진정한 기독교의 모태가 되고 있기에 하는 얘기다.
 
분명하게도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은 구약 시대의 예언자 전통과 맞닿아 있다. 알다시피 예언자 전승은 구약의 또 다른 한 켠에 있는 왕조 전승과 충돌하면서 형성되어 온 약자 해방 전통에 서 있다. 이들 예언자들이 구약의 열왕들과 이스라엘 민족의 회개와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에 대한 구원과 해방을 절절히 부르짖고 호소하면서 나중에는 상생의 세계인 하나님나라를 대망하는 메시아(새로운 왕) 사상으로 가게 된다. 그 메시아는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요, 지배하는 왕이 아닌 섬김의 도를 갖는 새로운 신왕사상이다.
 
이 상향적 흐름의 진정한 성취는 당연히 신약의 예수 사건에 있다. 생각컨대, 아마도 도올 자신도 이 점만큼은 크게 부인하진 않을 것으로 본다. 그렇기에 구약과 신약도 각각 ‘예수 이전’과 ‘예수 이후’로 놓고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구약을 읽는 진정한 맛깔스러움은 원시적인 미개함과 야만스러움 속에서조차 바로 그러한 상향적 진화의 흔적들을 읽어내는 데에 있다. 이 ‘상향’이란 도올 스스로도 백두(White Head)의 <이성의 기능>(the Function of Reason)을 번역하면서 언급했던 바로 그 상향에 대비될 수 있는 지점이다.
 
물론 나름대로 이를 잘 읽어내려면 기본적인 해석학적 훈련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신 이해부터 달리해야 하니 말이다. 즉, 구약도 세계를 이해하는 철학적 소양만 잘 갖춰진다면 얼마든지 유용할 수 있다고 본다. 어차피 성서관의 문제 역시 해석학의 문제로 귀결된다.
 
무엇보다 분명한 점은, 도올의 구약폐기 언급은 도올 요한복음 강의의 핵심이 아니다. 단지 언론 혹은 보수교계가 가십거리 혹은 트집꺼리를 잡아서 부각이 된 점이 더 크다. 내가 보기에 도올의 요한복음 강의에 전부 동의하진 않더라도 유용하게 느껴지는 내용도 아주 많아서 그 같은 구약폐기 언급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여겨진다.
 
한국교회여, 제발 도올만큼만 성경공부하라!
 
그만큼 한국교회 현실은 도올의 성경공부만큼 성서를 전혀 읽어내지도 못하고 있는 지경이다. 헬라철학이 뭔지, Q자료가 뭔지, 이러한 기본적인 이해에 해당하는 용어들조차도 신학교 가서나 들어나 볼까. 일반적인 한국교회 안에서는 전혀 나눠지지 않고 있다. 이미 한국교회 대부분의 목사들부터가 교회 성도들에겐 그런 건 별로 필요 없다고 여기는 것 같다.
 
언젠가 교회를 아주 오래 다녔다는 신자분과 얘기하던 중에, 예수가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는 사실을 말하자 매우 깜짝 놀라며 날더러 주님에게 어찌 그런 망발을 하느냐고 말했다. 예수가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는 사실은 오늘날 신약학계에선 일반화된 이해에 속하지만 한국교회를 십 수 년을 다녀도 듣도 보도 못한 얘기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같은 기본적인 이해조차도 매우 서프라이즈한 것으로 둔갑되는 한국교회 안에선 도올의 강의는 앞으로도 계속적인 비난을 받을 것이고, 그 반작용으로 도올 강의의 진가는 더욱 더 빛날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성서무오설을 얘기하고 성서문자주의를 고수하는 한, 무슨 깊은 공부가 나올까 싶다. 성경공부도 제대로 안하는데 제대로 된 내용의 설교라도 나오겠는가.
 
나 자신이 백퍼센트 도올에 대해 동의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도올 강의를 그나마 옹호하고 싶은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한국 기독교계가 도올 강의에 대해 왈가왈부하기 이전에 그 스스로부터 자숙하고 반성해야 될 산적한 문제들과 참담한 현실을 먼저 직시했으면 싶기에 하는 얘기다.
 
그러니 제발 한국교회여, 그냥 도올 만큼만 성경공부하길 바란다. 그러면 아마도 한국교회가 지금보다는 몰라보게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날이 언제 올려나 싶기도 하다. 작금의 한국교회를 위한 변혁은 그만큼이나 절실하고 요원한 것이다.

정강길/ 세계와기독교변혁을위한연대 기획실장

   
 
  ▲<기독교성서의 이해> / 김용옥 지음/통나무 펴냄/ 479쪽/ 1만 6000원.  
 
서론

최근 EBS가 2007년 2월 6일부터 도올의 영어 원전 강독 인터넷 강좌(www.ebslang.co.kr)를 개설하였는데, 저자는 이를 위해서 두 권의 책을 저술하여 자신의 강의 교재로 삼았다. 첫 번째 책이 <기독교성서의 이해>이고 두 번째 책이 <요한복음강해>다. 그의 책은 두 권이지만, 그 내용을 세부적으로 분류한다면, ‘예수와 바울과 복음서저자와 요한’, ‘한국성서수용의 주체적 역사’, ‘요한복음강해’로 나눌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자신이 믿는 기독교는 무엇인가와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설명하고자 한다.     

개요

앞서도 이야기 했듯이 저자의 두 권의 책은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필자는 첫 권을 중심으로 분석해보고자 한다. 그의 <기독교성서의 이해>는 한 가지 주제로 요약할 수 있다. 즉 기독교 역사(정경화 과정)에 나타난 예수 이해다. 저자는 기독교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해하고 그 예수가 기독교 역사 속에서 특별히 성경의 형성사 속에서 어떻게 이해되었으며 자신의 그 이해의 결정판인 요한복음을 강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 저자의 <기독교성서의 이해>는 구약에 대한 언급이 거의 전무하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의 주장을 살펴보기에 앞서서 저자의 방법론과 해석에 대한 주된 비판은 ‘신앙의 예수와 역사적 예수 사이에서의 혼돈’과 ‘열린 정경론에 대한 오해’에 주로 맞추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이론들이 그의 책 속에 순서적으로 혹은 서로 잘 얽혀져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저자의 책은 산만한 감은 없지 않으나, 읽기가 쉬워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일반대중은 실제 지식과 정보에 접근하기 어렵거나 많은 점에서 무시된다는 점을 전제로 그러한 비밀들 혹은 진리를 알리는 ‘지혜의 교사’로 저자의 글은 독자들에게 다가서고 있다.

저자의 예수관-예수는 누구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의 초두에 ‘예수의 이적’에 대한 주제가 다루어진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 주제는 모든 신앙인들의 고민거리다. 무엇이 신화(神話)고 무엇이 역사(歷史)인지,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는 신이었는지, 인간이었는지. 사실 이와 같은 논제는 아주 오래된 문제들이라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전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에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사람들로 나눌 수 있다. 물론 저자는 중간이다. 그는 역사와 신앙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예수를 다루고 있는 모든 신약성경이 역사적인 요소를 담고 있지만, 반드시 역사적일 필요가 없다거나 역사를 다루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칼 바르트와 불트만 사이에 있는 듯하다. 신정통주의적 입장에서 진리의 말씀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듯하지만 여전히 말씀에 대한 의심의 여지를 남긴다(15쪽). 그는 믿음과의 밀접한 연관성을 근거로 이적을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신앙적 예수와 결합시킨다(21쪽). 이적은 신앙적 예수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일 뿐 핵심은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교리와 교회를 복음과 예수에게서 분리해내려는 시도를 꾸준히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기독교성서의 이해>의 상당 부분을 정경론에 할애해서 논증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정경에서 배제된 예수상(像)이 어떠한가와 열린 정경으로 이해할 때(혹은 지금까지 배제된 비(非)정경들을 포함하여 볼 때) 구체적으로 어떤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다는 점이다.

기독교 정경론

기독교의 정경론에 대한 중대한 전환은 고대의 사본들을 발견한 데서 비롯된다. 쿰란 문서(사해사본)와 나그 함마디 문서(영지주의)의 발견이 그 경우다. 사마리아 오경과 70인역과 쿰란사본과 맛소라 학자들이 전수한 히브리어사본 상에 완전히 일치하는 부분이 없다는 것은 당시에 ‘닫힌 정경’(즉 하나로 고정된)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해준다고 주장한다. 나그 함마디 문서도 기독교 이해의 풍성함을 드러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교회(서방 교회)중심의 편협성 때문에 결국 이 문서들이 외경으로 낙인찍혀서 기독교의 정경 내에 들어올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영지주의는 없었다. 이것은 단지 콥틱 기독교인들의 경향성을 반영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124). 이러한 편협성과 대조시키기 위해서 헬레니즘과 이집트의 개방성 혹은 배타성의 부재를 주장하며 당시의 로마 가톨릭 교회 중심의 배타성에 대한 아쉬움을 논한다.

저자는 기독교 교회가 닫힌 정경론을 고집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정치적 요인이 크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선 기독교가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서 공인되기 이전에 받은 박해의 실상이 무엇인가를 물어보아야 한다.

네로가 진정 기독교에 대해서 사악한 황제가 아니었던가? 결과적으로 네로가 로마의 화재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씌운 것은 사실이지만, 네로가 불을 지른 것도 그로 말미암아 기독교인들이 심하게 박해받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더 정밀한 확인과 평가가 뒤따라야 할 문제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요한계시록의 배경과 메시지에 이해의 일부가 수정되어야 한다. 물론 초대 교회 시대에 박해의 시기와 관련하여 후대의 순교와 핍박에 대한 전설과 이야기들이 많이 생산된 것이 앞서 언급한 극심한 박해와 순수한 신앙의 절개라는 과장된 신화를 만들어냈을 가능성은 있다.

그 다음은 기독교가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서 공인되게 된 배경과 그 후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기독교가 공인될 무렵에 기독교와 로마제국의 관계는 과장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미 로마제국은 정치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해체와 갈등의 양상을 빚었고 이미 기독교는 체계화되고 약진하였다. 갈라진 로마제국을 통일하는 과정 속에서 콘스탄틴 황제는 밀라노 칙령(313년)으로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예전에 페르시아 제국내의 모든 종교에 자유를 선포한 고레스의 칙령과 유사하다. 그는 324년에 독존의 대제가 되었고 325년에 니케아 종교회의가 열렸다. 그런데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특히 우대하여 몰수된 교회 재산을 돌려주었고 황제의 사유재산을 교회에 기증하였으며 성직자들에게 병역이나 세금을 면제해주었다. 이와 같은 황제와 기독교와의 밀월 관계는 단순히 진리의 승리로만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이, 콘스탄틴의 개인적인 신앙의 순수성에 대한 의심과 그의 기독교 공인 이후의 삶 등을 살펴볼 때 특히 그러하다. 게다가 이때부터 기독교는 온갖 부와 권력이라는 특권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핍박받는 교회에서 핍박하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이다(79쪽).

다시 이야기는 기독론으로 돌아온다. 저자는 여기서 삼위일체 논쟁에 대한 길고 지루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 논쟁이 그것이다. 예수는 신인가 인간인가? 신이면서 인간이었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게다가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이 하나인가? 셋인가? 셋이라면 어떻게 하나인가? 저자는 교리에서의 존재론적 하나님과 성경에서의 관계론적 아버지(하나님)의 차이를 설명하며 삼위일체론 자체는 ‘비성서적인 논쟁’이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필자는 헬라철학과 세계관 속에서는 그렇게밖에 설명될 수 없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마르시온과 도올의 차이점

이제 이야기를 바울의 기독교운동으로 돌이켜본다. 바울의 선교적 맥락은 당시의 헬라파 유대인들에 대한 바른 이해에서 얻을 수 있다. 바울이 유대주의자들과 격돌하게 된 것은 그들이 기독교를 유대주의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참된 기독교는 할례와 안식일 그리고 음식법등 유대주의의 표징들을 엄격하게 지키는 데서 온다고 믿었다. 바울은 외면적인 것을 배척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의’라는 새로운 복음을 제시하였다. 물론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부터 자유를 주는 복음을 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복음 때문에 바울이 구약의 율법(의 본 뜻)으로부터 이탈하게 되었다는 것은 수용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탈유대주의적 경향은 마르시온에 이르러 극치에 다다른다.

마르시온은 참된 기독교가 되려면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구약적 요소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전혀 다르다고 주장했다. 차별성에서 비롯된 입장은 단절과 부인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은 마르시온의 정경성에 대한 왜곡은 결국 기독교 교회가 정경에 대한 심각한 숙고를 하게 만들었다. 이 부분에서부터 정경론은 저자와 기존의 교회들과 학계들 사이에 큰 차이를 보인다. 입장 차이를 여기서 논의하지 않더라도 확연한 차이점은 드러난다. 즉 마르시온은 ‘배제의 정경론’을, 김용옥은 ‘추가의 정경론’을 주장한다. 저자는 고대사본들의 차이점이나 나그 함마디 문서의 방대함은 심지어 ‘일부 서신의 정경성을 부인했던’ 루터 시대까지도 ‘열린 정경론’의 증거로 사용한다. 사실 바울의 입장을 극단적으로 전용하여 정경의 수를 줄이려 한 마르시온이나 루터의 입장과 소위 외경과 위경들도 정경의 수에 더하려고 하는 김용옥의 ‘열린 정경론’은 전혀 다른 것이다. 게다가 구약의 기독교적 수용이 기독교의 권위의 입증차원에서 행해진 것이라는 주장도 수용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다(145쪽).

물론 마르시온과 아타나시우스의 정경리스트가 교회로 하여금 정경 문제를 최종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도록 기폭작용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김용옥 선생이 이야기하듯이 전적으로 음모론이나 권력투쟁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게다가 그 이전에는 열린 정경론이었다고 주장할 만한 증거는 없다. 독자들에게 저자와 반대적인 입장을 취하는 정경론에 대한 저술들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앞서 언급한 두 사람 모두가 사도성의 측면에서 정경의 수를 제한 것이지만, 그 사도성이라는 잣대로 볼 때, 구약을 버리지 않고 포함한 일이나 나그 함마디 문서를 포함한 다양한 위경과 외경들이 포함되지 않은 것이 반드시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할만한 근거는 없다. 나그 함마디 문서들이 영지주의냐 아니냐의 문제를 떠나서 필자가 연구한 바로 볼 때도, 그것들이 복음과 기독교 진리를 포함하고 있지만, 정경적 본문 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문제 삼고 어떤 내용을 비밀스러운 지식으로 인도하는 형태를 갖는 (나그 함마디) 문서군들이 과연 정경으로서의 기독교 공동체가 받아들일만한 가치가 있을까 하는 데는 의심이 간다. 물론 김용옥 선생이 지적하는 대로 불교의 정경 기준과 기독교의 정경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불교는 첨가의 정경이고 기독교는 배제의 정경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기독교의 정경론은 대다수의 교회가 수용하는 책(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신약책), 일부 교회만 사용하고 있는 책, 그들이 정경성을 의심하는 책(히브리서·야고보서·베드로후서·유다서·요한계시록 등)으로 구분되었다. 히브리서는 저자 문제 때문에 야고보서는 행위적인 의(義) 때문에, 베드로서와 유다서는 비정경적 본문의 인용의 문제 때문에 구분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부 신약책들의 지엽적인 문제로 인한 것을 ‘열린 정경론’이나 로마 교회에 의한 음모론이나 편협한 사고방식의 탓으로 돌린 것은 저자의 너무 과도한 해석과 의미부여라고 본다. 마르시온처럼 구약 율법의 하나님 자체가 신약의 하나님과 완전히 다르다는 주장은 수용할 수 없다. 구약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구약의 외적 준수가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 구약을 멸시하거나 부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복음서에 묘사된 예수와 구약의 이해도 마르시온과 같은 구약의 폐기론을 주장할 하등이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본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은 예수와 신약성경이 철저하게 구약에 의존해 있다는 것이다.

예수, 바울, 공관 복음서, 그리고 요한복음

이제 저자는 자신이 요한복음을 강해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요한복음은 철학적이면서 신학적이다. 저자는 바울 서신이 정(正)이며 공관복음서가 반(反)이며 요한복음이 합(合)이라는 전통적인 입장을 고수한다. 그러나 사실 요한복음은 헬라철학적 기반이 없고 구약적 토대를 갖고 있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어려운 난해한 책이다. 물론 요한복음이 신학적으로 도식화되어있지만, 여전히 역사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 부분들을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반드시 저자의 정반합이론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즉 요한복음이 고도로 헬레니즘을 배경으로 하는 신학화된 예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내용상 역사와 구약과는 무관한 신학화된 예수만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김용옥 선생의 요한복음 해석의 장점은 요한복음이 내포하고 있는 헬레니즘에 대한 더 많은 관심을 갖게 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관심은 선교지의 문화 수용와 접촉의 면에서도 상당히 큰 이슈이며 우리가 저자와 같은 철학자에게서 성경을 더 많이 배워야 할 필요를 보여준다.

결론적 평가

본서를 통하여 저자는 자신이 믿는 기독교에 대한 길고 장황한 변증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고 본다. 우리는 그의 기독교와 우리의 기독교가 어떻게 다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기독교가 그의 기독교와 만날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그의 말처럼 진실과 편견 혹은 착각속의 기독교를 구분할 필요는 항상 존재한다고 본다. 우리는 기독교에 대한 선입견에 대해 옥석을 가릴 준비가 되어야 하며 진리에 대한 탐구와 추구를 쉬지 말아야 한다. 저자의 기독교는 한쪽에서 비판하는 만큼 ‘이상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주장하는 것만큼 정당하고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성기문 / 말씀발전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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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난감이다. 서평깨나 써보고, 그래서 서평 책도 갖고 있는 나로서도 도올의 책, <기독교성서의 이해>는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대개 책을 읽기도 전에 이 책은 대략 어떠하다는 감을 잡고 읽고 글을 쓰게 된다. 저자, 신문 서평, 책의 제목이나 서문, 표지의 글 등을 통해 기본적인 사전정보를 입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모티머 애들러의 말처럼 찬반을 결정하고, 그리고 결정하면서 읽고 쓰는 것이다.

난감하게 만든 것은 먼저 그가 시비를 거는 사안이 하나 둘이 아니라는 데 있다. 구약폐기론에, 유일신앙에, 삼위일체론까지. 구약폐기론에서는 야훼 하나님과 예수의 하나님 사이를 가르고 대립시키는 마르시온 냄새가 나더니,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를 대놓고 편들고, 영지주의마저도 옹호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굵직한 것들만 이렇다. 군데군데 눈에 걸리는 곳이 적지 않다.

하나같이 메가톤급 폭발력을 가진 주제들이다. 어느 하나라도 기독교에서 제하고 나면, 사실 남는 것이 없다. 장기판에서 졸은 포기할지언정, 차 떼고 포 떼고 장기를 둘 수는 없다. 구약을 폐기처분하고 예수의 신성을 포기하거나 양보하면 그건 기독교가 아니다. 도올의 기독교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만큼 예민하고 조심스레 다루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다. 그러니 도올이 이렇게 나가다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또 하나, 비평을 흐리게 하는 것은 그의 교묘한 전략이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정통 신자라고 고백했거니와 이 책 1장에서는 성서주의자라고 선언한다. “기독교는 반드시 성서의 말씀의 진실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어떠한 자연주의적 해석도 차단되어야 한다. 이것이 모든 거룩하고도 진지한 성서주의의 출발이다. 나 조선의 사상가 도올 김용옥은 이러한 성서주의의 입장을 한치도 이탈하지 않는다.”(15쪽) 그리스도인이라면 뉘라서 ‘오직 성서’를 반대할건가?

새벽마다 교회 마룻바닥에 엎드려 우시기만 하던 시온성 처녀,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단상은 읽는 이로 하여금 감상에 젖게 한다. 아들의 신대톱(신학대학 수석 입학)을 축하하며 건네준 성경전서의 뒷장 싸인에 적힌 어머니의 글귀는 그분의 신앙을, 글씨는 그분의 성격을 보여준다. 이것이 책 전체의 진정성을 확보해 주는 중요한 장치로 기능하고 있어 보인다. 도올은 단지 누천년 이어져오면서 덕지덕지 붙은 기독교 아닌 것들을 떼어내려고 할 뿐, 안티 기독교가 아니다, 오히려 순수 기독교, 오직 성서, 그냥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무지의 소치인가 해석학적 전제의 차이인가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다. 내가 가장 궁금했던 것이고 한데, 도올의 주장이 무지의 소치인지, 아니면 해석학적 전제가 달라서 그런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는 도올의 소식을 들은 나의 첫 반응이 ‘이렇게 무식한 사람 다 봤나’였기 때문이다. 도올을 두고 몰상식의 도를 넘었다고 발끈하는 가톨릭 측도 별반 나와 다르지 않다. 교회의 세속화나 권력화를 비판하는 것은 좋지만, 그런 소리는 지적으로는 무식이요, 도덕으로는 예의가 없다.

자그마치 1만 불 어치의 책을 구입했다는 말을 듣고 내심 아니 그렇게 많은 책을 사고, 읽은 사람이 고작 한다는 소리가 구약폐기라니,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대담무쌍하게 떠드는 건지 참 괴이한 일이다. 시쳇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 식의 자기 자랑과 뻥이 심한 것은 온 천하가 다 아는 것인데 그럴 만큼 잘났으니 라고 눈감더라도, 신학의 ABC에 해당하고, 기독교 뿌리를 뒤흔드는 발언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우리 시대 최고의 지식 엔터테이너가 모르고 함부로 말하지 않을 텐데, 왜 그럴까, 정말 그것이 알고 싶었다.

그의 책을 다 읽고 덮은 다음 내린 결론은 이렇다. 도올은 무식하지 않다. 예수에게서 복음서로 이행하는 과정이나 각 복음서에 대한 설명이 어지간한 신학자 못지않았고, 성서의 정경화 과정을 포함해서 정통 기독교가 배척한 영지주의 문서에 이르는 역사적 궤적을 줄줄이 꿰는 것이 보통이 아니다. 헬레니즘과 로마 문명사의 맥락에서 그것들을 읽어내고, 유교나 불교와 비교하는 대목 등에서 이것저것 읽을거리가 많다.

결국 지식의 유무가 아니라 관점의 차이가 그와 일반 기독교와 문제가 된다. 예컨대, 신자에게 성서는 이미 주어진 것인데, 도올은 이성과 역사를 배제하지 말자는 것이다. 정통 기독교를 수립하려는 아타나시우스의 지난한 여정보다는 여타의 종교나 문화에 대해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아리우스 전통에 그는 마음을 준다. 삼위일체가 확립되기까지 작용했던 로마와 교회의 얽히고설킨 정치권력 함수 관계에 그가 더 많은 방점을 찍는다면, 기독교인들은 삼위일체가 성경적이며, 성경을 읽는 해석학적 틀이며, 신자의 삶의 표준이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다름이 존재한다.

도올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면 도올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한 가지 힌트가 마르시온에 대항하는 교회의 취한 길이다. 그도 잘 지적하였거니와 교회가 신약 27서를 확정한 것도 기실 아이러니하게도 마르시온 덕분이다. 그 과정에 온갖 권력과 이해관계가 작동했어도 교회는 현명하게도 구약의 하나님과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긴장을 유지하는 책을 정경으로 포함하고 확정하였다. 이를 두고 바울이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다”(롬 5:20)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이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말은 선이 되도록 행동하라는 것이다. 교회를 향한 가혹한 탄압이 도리어 이방 선교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므로 기독교 안팎의 거센 도전을 통해 신앙 고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거친 도올의 공격이 교회와 신자의 신앙과 신학을 굳은 반석 위에 세우는 기회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것이 성서의 신앙이요, 교회사의 지혜였다. 이제 한국 교회의 미덕이 될 때가 되었다.

김기현 / 부산 수정로침례교회 목사(http://www.soojung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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