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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에 관하여/세계 의 역사 속으로

수메르문명

신비의 고대문명 '수메르' [1]
48818 | 2006-06-01
추천 : 1 / 신고 : 0 | 조회 : 260  | 스크랩 : 금 지
수메르인들은 우리 동양인을 닮은 인상을 주는 사람들로서 우리말과 비숫한 교착어를 썼다.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있었던 수메르와 그 주변 산악지대가 선사시대부터 문명의 발원지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라크 북방티그리스강 상류지역 자그로스 산맥 북쪽에 '샤니다르 Shanidar 동굴'이 있었다. 오늘날 민족해방전쟁을 벌이고 있는 쿠르드족의 피난처가 되고 있는 이 동굴은 지난 10만 년 이상 인간의 거주 흔적이 시기적으로 잘 보존된 고고학적으로 귀중한 유적지이다

1957년 콜럼비아대학의 랠프 솔레키 Ralph L. Solecki 교수는 이 동굴을 조사하여 9인분의 초기 인류 유골을 발견했다( 그 중 4인은 동굴 내부에서 떨어진 낙석으로 죽은 곳으로 판명되었다.). 발굴을 계속한 결과 1만 년 전에서 멀리 10만 년~ 13만 년 전에 이르는 초기 인류의 주거 흔적이 나타났다.

그러나 연대에 따른 계통적 발굴이 진전됨에 따라 놀랍게도 인류문화는 차차 진보해 왔던 것이 아니라 반대로 퇴보해 온 사실이 드러났다. 곧 어떤 표준시대에서 시작하여 그 다음 세대들은 전보다 덜 발전된 생활을 해 왔던 것이 드러난 것이다. 특히 서기전 27000~11000년 사이에 이 퇴보가 심했고, 게다가 거주자까지 점차 사라진 듯 마지막 시기에는 거의 무인지경이 되었던 것이다.(수메르의 전승에는 당시 빙하기의 막바지로 극심한 추위와 가뭄으로 인간이 서로 잡아먹을 정도로 사나워지고 세상이 어지러웠기에 곧바로 대홍수가 닥쳐서 징벌을 당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돌연 서기전 11000년 무렵 이해할 수 없는 진보된 수준의 문명생활이 시작되었던 증거가 드러났던 것이다.

고고인류학자들은 터키 중부 차탈휘유크와 유고슬라비아의 레페스키비르와 팔레스타인의 예리코 등지에 실로 9천년 전 이전에 형성되었던 도시의 유적을 발견하고 이것들이 수메르 문명보다 앞섰던 문명의 유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들은 실제로 샤니다르 동굴이나 그 주변 '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곳에서 시작되었던 문화가 전파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게다가 이들은 지역적으로 국한된 점조직 같은 문명 유적으로, 그것들이 더 발전, 확장되었던 증거도 뚜렷하지 않다.

인류 최초의 조직적인 농업활동은 중근동의 '비옥한 초승달 Fertile Crescent 지대' 주변의 산지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 되고 있다. 연구가들이 정교한 방사성 탄소 측정법을 이용하여 밝혀 낸 결과. 보리와 야생 '엠메르 Emmer' 종의 밀이 인류가 최초로 재배한 곡물이었으며. 서서히 농업 기술을 터득하여 여러 가지 작물과 가축을 기르며 진보해 왔던 것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이런 추측은 잘못된 것 같다. 놀랍게도 샤니다르 동굴에서 채취한 아주 초기의 곡물은 이미 종으로서 고도로 특화(特化)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이것은 고도의 유전공학 지식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중근동에서는 보리와 밀과 함께 기장(millet), 라이(rye)밀, 스펠트밀(spelt)밀 같은 주식이며. 섬유를 얻고 열매로 기름을 짜는 아마(亞麻)와 갖가지 식용 과일이 열리는 관목과 과수가 빠른 속도로 펴져서 재배되었다는 증거가 드러났다. 이것들은 유럽에 알려지기 실로 몇천 년 전부터 중근동에서 재배되었던 것이다.

이 모든 놀랍고 돌연한 농업의 진보는 마치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에 의하여 중근동 지방이 일종의 식물 유전자 실험장이 되었던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또 야생포도의 재배가 북부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북부 산지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놀랄 것도 없이<창세기>실린 노아가 홍수후 첫 포도 재배업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와 일치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 지역은 인류 문명의 첫발생지였던 것이다.

사과, 배, 올리브, 무화과, 아몬드, 호도 등 과일나무도 중동이 원산지로 그곳에서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창세기>에서 '에덴'을 과수원으로 표현한 것은 결코 과장도 비유도 아닌 것이다.

가축사육은 어떠했는가?

인간이 처음으로 사귀어 가축으로 만든 동물은 개였다. 이것은 서기전 9500년 무렵의 일로, 가장 오래된 개의 뼈가 이란, 이라크 및 이스라엘에서 발굴되었다. 양과 염소는 개와 거의 동시에 사육되었으며, 서기전 9000년 무렵의 양의 유골이 샤니다르 동굴에서 출토되었다. 그 다음 돼지와 뿔 달린 가축이 길들여졌다.

이처럼 몇만 년 전에서 서기전 11000년 무렵 문명이 중근동에서 처음 시작되었던 시기까지를 학자들은 구석기 지대 Paleolithic Age라고 보고 있다(유럽에서는 이보다 약2천 년 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인간은 돌로 된 동굴집에서 살며 돌연장으로 씨를 뿌리며 동시에 가축사육자가 된 것이다. 앞서 말했던, 바위에 새겨진 고글을 쓴 '신'의 보습도 대충 이때(서기전10000년경) 만들어진 것이다.

이때부터 중석기 시대 Mesolithic Age가 대충 3천5백 년쯤 지속되었다가 서기전 7500년 무렵 신석기 시대 Neolithic Age가 도래했다. 그때 인간은 비로소 토기를 빚어 만들이 시작했다. 서기전 5000년 무렵 중동에서는 상당히 수준이 높고 세련되고 환상적인 디자인을 보여 주는 토기 제품이 출현했다.

그러나 서기전 4500년 무렵 문화가 일시적으로 퇴보한 듯한 고고학적 증거가 드러났다. 토기 제품은 전보다 단순한 것으로 변모되었고 석기가 다시금 우위를 차지했다. 토기 제작이 위축되고 제작지가 버려진 것이 유적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바로 그때, 곧 서기전 4000년 무렵 예측할 수도 없이 돌연히 중동지방에서 빛나는 문명이 출현했다. 앗시리아 학자 헨리 프랭크포트Henry Frankfort에 의하면 한마디로 '놀라운 것' 이며, 앙드레 빠로는 '돌연히 타오른 불길'이라고 표현하고, 신화학자 조셉 캠벨 Joseph Campbell은 '놀라운 돌발성…이 좁은 수메르의 진흙바닥에 세계의 고등문명의 씨앗이 발아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18세기 말까지 오랫동안 서양인들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을 자기네 무명의 기원으로 믿어왔다. 그러나 옛 그리스의 학자들은 더 앞선 문명이었던 옛 이집트에 원정했을 때 서기전 196년에 제작된 '오제타 석비' 같은 고대 유물을 발굴, 연구하여 이 옛 문명 연구에 큰 진전이 있었다. 이집트 문명은 실로 그리스 문명보다 2천 년 이상 앞선 서기전3200년 무렵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서구 문명의 시조는 옛 이집트였던가? 그리스 학자들은 이집트 문명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기기는 했지만, 그리스어는 원래 이집트가 아닌 중동에서 생겨나 그리스 문명보다 앞섰던 '미노아 Minda '(트레타) 문명과 미케네 Micenae' 문명을 거쳐 그리스 본토로 도입되었던 것임이 밝혀졌다. 서기전 1300년경 도리아인의 그리스 본토 침입과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에 침입했던 시기가 거의 동시임에 착안한 학자들은 셈족문명과 그리스 문명이 서로 닮은 것에 깊은 흥미를 느끼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메사추세츠 주 브랜다이스대학의 고고역사학자 사이러스 고든 Cyres H. Gordon 교수는 <망각된 기록: 미노아어의 증거 Forgotten Scripts : Evidence for the Minoan Language>에서 셈어로 밝혀진 초기 미노아어[선형(線型)A/Linear A 문자)를 해명하여 이 분야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그는 이로써 히브리어와 미노아문명이 서로 상당히 공통된 점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그 예로크레타가 미노아어로 'ke-re-ta'로 발음되는데, 이것은 히브리어의 'ke-re-et'('성벽의 도시')이며 셈족의 가나안의 '케레트'왕 이야기와 일치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로마자와 현대 서양문자의 근원인 그리스 알파벳도 근동에서 온 것이었다. 옛그리스인들은 '카드모스 Kadmds' ('옛날의'란뜻)라는 페니키아왕이 알파벳을 가지고 왔으며(카드모스 는 전설적인 테베시의 건설자였다.). 원래 그 수효나 순서가 히부리 문자와 같았지만 서기전 5세기경 케오스의 '시모니데스' Simonides of Keos시대에 26자로 증가했다.

옛 그리스문헌에 나타난 페르시아 왕들, 예컨대 '키루스 Cyrus'. '다리우스 Darius'. '크세르크세스 Xerxes'등은 인도-유럽어에 속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이 원래 서기전 2000년대 말기에 카스피해 근처 어디에선가 출현했던 아리안족의 한 파임이 확인되었다. 그 무리들은 각기 서쪽 소아시아로, 동남쪽으로는 성서에서 말하는 '메데아'와 '파르시'로,동쪽으로는 인도로 이주했다. 그들이 낯선 이민족이었음에도 북구하고 이상하게도《구약성서》에서는 그들을 동족의 일원인 양 호의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예컨대<에즈라서>에 의하면, 키루스왕은 그 자신을 '야훼에 의해서 기름부어진 자'로 생각했고 야훼를 '청산의 신'으로 믿었으며, 예루살렘의 신전을 재건 하라는 명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그와 그밖에 페르시아인들은 스스로 '아케메니드 Achae-menids'라고 불렀는데, 그 원어는 '하캄 acham-Anish' 로 아리안어가 아닌 완전한 셈어(히브리어)로 '현명한 인간' 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메소포타미아-유대아로 들어온 페르시아의 세력과 함께 그 신앙인 미트라 Mithra 신앙 -세계는 최종적으로 광명과 암흑의 투쟁으로 끝날 것이라는 종말관을 가진 신앙 - 의 영향으로 유대 /기독교의 의 종말론(Eschatology)이 형성된 것이다. 이것은 종교사상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

히브리인의 주인인 야훼와 아케메이드인들이 불렀던 '현명한 주님'은 여러 점에서 유사하며, 이중에서 후자는 날개 달린 구체로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다리우스왕의 문장(紋章)에 나타난 그림이다. 옛 페르지아 제국의 문자와, 종교와 역사적 근원은 그 이전의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1686년 페르시아의 옛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찾았던 엥겔베프트 캄퍼 Engelbert Kampfer는 왕들의 기념비와 문장에 나타난 이 지역 일대의 공통문자로 확인되었다. 1843년 프랑스의 폴 에밀 보타 Paul E. Botta 는 처음으로 이라크 근처에 있는 '호르사바드 Khorsabad'를 선정하여 조직적인 발굴 작업을 시작했는데, 이 곳은 원래 '두르 새루 킨 Dur Sharru Kin'으로 알려졌던 곳이었다. 이 곳은 앗시리아와 사르곤 2세의 도읍지로, 이말 자체는 셈어로 '정의로운 왕의 성곽도시' 란 의미를 가진 것이다. 이 앗시리아왕의 수도에는 중앙에 웅장한 왕궁이 있었고, 연장1마일이 넘는 부조 조각 장식이 붙어 있는 기다란 성벽이 둘러싸여 있었으며, 이 도시 전체와 왕궁 건물을 호령하듯 높은 지구라트가 세워져 있었다. 이것이 바로 신들을 위한 '천상으로 오르는 계단' 이었다.

놀랍게도 이 거대하고 웅장한 도시의 모든 것이 단 5년만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3천년 전 하나의 제국이 그토록 짧은 기간에 왕궁, 성벽과 성문, 신전, 일반 주택 등 하나의 거대 도시를 완성할 만한 국력을 가졌던 것이다. 한편 영국에서는 1850년대에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 Austen H. Layard가 호르사바드에서 10마일쯤 내려와 티그리스 강변의 '쿠윤지크 Kuyunjik'를 발견한 결과 이 곳이 성서에 나온 '니네베 Nineveh'임을 확인했다. 《구약성서》〈열왕기 하〉18:13에, "헤제키아왕 14년에 앗시리아왕 세나테리브가 유다야에 침입했으나, 야훼의 천사가 이들을 단 하룻밤 동안 전멸시키고 세나케리브는 되돌아가 니네베에 돌아갔다." 는 기록이 있듯이 니네베는 앗시리아의 마지막 세 왕 시절의 수도였다. 레이어드에 의해서 또 다시 박굴된 곳은 <창세기>에 나오는 '님르드 Nimrud'로 앗시리아의 군사본부였던 곳이다.

독일의 발터 안드레 Walter Andrae 발굴 팀은 1903년~1914년 사이에 앗시리아의 신앙의 본거지였던 '아수르 Ashur를 발굴했다. 이와 동시에 로베르트 콜데바이 Robert Koldewey 팀은 바빌론을 발굴하여 광대한 왕궁, 신전, 그리고 세계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공중 정원의 유적과 지구라트를 찾아 냈다. 이로써 남쪽의 바빌로니아와 북쪽의 앗시리아라는 두 대제국의 역사를 밝혀 줄 문헌들이 속속 발굴되고 해독 되었다.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라는 두 제국은 서기전 1900년 무렵 일어나기 시작하여 약1천 5백 년간 전쟁과 공존을 거듭하며 흥망성쇠의 역사를 누려왔다. 결국 서기전 612년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아수르와 니네베가 함락되어 앗시리아는 멸망했고, 또 바빌론도 성서의 예언대로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의 공격으로 서기전539 년 불명예스러운 종말을 맞았던 것이다. 이 두 제국은 시종 전투적인 라이벌이었지만 문화나 물질 문명은 별 다른 차이가 없었고 또 앗시리아의 주신은 ' 아수르'( '천리안을 가진신')이고 바빌론의 주신은 '마르둑'(청정한 언덕의 아들')이라고 불렀지만 두 신들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이었다

세계의 유수한 박물관들은 이들 옛 제국의 페허에서 약탈한 장식품-예컨대 의식용 성문(城門), 날개 달린 황소, 조각(bas-reliefs), 전차, 가구, 보석, 인물상 등 풍부한 유물을 자랑하고 잇지만 진정한 보물은 역사적 기록 문서들이다. 그것은 실로 몇만 장이 넘는 설형문자판들 - 우주 창생 전승, 서사시, 왕들의 역사, 신전 기록문서, 상업계약서, 혼인 및 이홍서류, 천문기록, 점성술 예언서, 수학공식집, 지리학 서적, 문법과 어휘 교과서, 신들의 존칭, 능력, 및 의무를 기록한 문서 등등 많은 기록들이다.

이 두 제국의 문화와 종교적 공통성을 이어 주는 언어는 '아카드 Akkad'어였다. 이것은 셈어로서, 히브리어, 아람어, 페니키아어 및 가나안어의 선구였다. 하지만 바빌론-앗시리아인들은 자신들이 이 언어를 고안한 것이 아니라고 했고, 그들이 남긴 많은 문서에는 전의 어떤 원어(原語) 것이라고 주(註)가 많은 문서 말미에 붙어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쐐기 문자를 최초로 고안했고 그처럼 풍부하고 자세한 어휘와 문법을 발전시켰던 것인가? <창세기>10장 27절을 보자.

"쿠쉬(키쉬)에게서 님로드가 났느데 … 세상에 처음 나타난 장사였다. … 그의 나라는 세나르(수메르) 지방인 바벨과 에렉(우르크)과 '아카드'에서 시작되었다.…그(님로드)는 그 지방을 떠나 앗시리아로 나와서 넓은 거리가 잇는 니네베를 세우고, 니네베와 '할라흐' 사이에 '레센'이라는 큰 성을 세웠다."(레센은 아직 미발굴인 곳으로, 대규모 왕실 군마 사육장이 있었던 곳 같다.)

여기에 나오는 아카드가 두 제국에 앞서 있었던 왕도였던가? 발굴된 문서에는 실제로 그 옛적에 '샤루킨 Sarrukin'('의로운 통치자')이라는 이름의 왕이 세웠던 '아카드' 왕국이 있었음을 나타냈다. 또 그는 자신의 제국이 " '엔릴'신의 은총으로 아랫 바다(페르시아만)에서 윗 바다(지중해?)까지 달하는 대제국을 세웠으며, 아카드의 부둣가에 먼 나라들에서 온 배를 정박하게 했다."고 호언하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에 학자들은 경악했다. 실로 5천 년 전인 기원전 3000년대에 메소포타미아에 놀라운 대제국이 있었던 것이다! 앗시리아의 두르샤르킨(사르곤 2세)으로부터 아카드의 사르곤(1세)왕까지 실로 2천년의 도약이 일어났다. 또 계속 발굴된 유적에도 바빌론/앗시리아보다 아주 오래 전에 빛나는 문예와 과학과 정치와 상업활동을 가졌던 문명이 존재함을 보여 주었다. 결국 바빌론/앗시리아는 이 아카드 문명이라는 큰 줄기의 가지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의 아카드의 사르곤왕의 업적과 족보를 기록한 비명(碑銘)이 발견되자 먼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수수께끼는 더욱 미궁에 빠지게 되었다. 이 비명에는 사르곤왕의 명칭이 '아카드의 왕, 키쉬의 왕' 으로 나타났는데, 그가 왕이 되기 전 '키쉬의 통차자'의 자문관으로 봉직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이 키쉬의 왕국이라는 것이 아카드에 앞서 존재했던가?

앞서 <창세기>의 구절을 보자. "쿠쉬에게서 님로드가 났는데…."학자들은 아카드의 사르곤이 이 님로드가 아닌가 하고 추측했다. 키쉬를 '쿠쉬'로 해석하기만 하면 사르곤이 말했듯 키쉬가 님로드보다 앞서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학자들은 사르곤 비명의 나머지 부분을 문면 그대로 믿기로 했다. "그는 우루크를 공격하여 그 성벽을 무너뜨렸다. …그는 '우르'의 주민과 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 그는 '라가쉬'에서 바닷가까지 모든 지역을 굴복시켰다."

성서의 '에렉'은 이 우루크와 같은 곳이었던가? 오늘날 '와르카 Warka' 라는 이라크 남부 지역을 발굴한 결과 사실 그대로 임이 드러났다. 또 우르는 바로<창세기>에 나온 아브라함의 출생지였다. 실로 발굴로 드러난 사실과 성서 기록이 서로 일치했을 뿐 아니라 서기전 3000년대 이전에 메소포타미아에 번듯한 국가와 도시와 문명이 있었음이 확인 되었다. 남은 의문은 문명이 얼마만큼 먼 고대로 소급되느냐 하는 문제뿐이었다

연구가 축적된 결과 학자들은 이윽고 성서와 히브리어이며 아카드어로 된 바빌론/앗시리아의 지명과 인명에도 각기 특정한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다[예컨대 '아브라함'은 '열국(列國)의 선조', '샤루킨' 은 '정의의 통치자'라는 뜻처럼].그런데 사르곤 이전 시대의 이름들은 전혀 무슨 뜻인지 이해할 길이 없었다. 사르곤 자신이 자문관으로 봉사했던 왕의 이름인 '우르자바바 Urzababa'라던가, 에렉의 통치자였던 '루갈자게시 Lugalzagesi' 같은 것이 그 예였다. 이에 1853년 헨리 로린슨경 Sir Henry Rawlinson은 왕립 아시아학회에서, "이러한 이름들은 셈어도 인도-유럽어도 아닌, 아직 알려지지 않은 언어 그룹이나 민족에 속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 이들 미지의 언어는 무슨 의미를 가진 것이었을까? 학자들은 아카드어 비명들을 다시금 검토해 보았다. 기본적으로 설형문자인 아카드어 문장은 음절(音節)문자로서, 각 문자 부호는 각기 하나의 완전한 음절(ab, ba, bat 따위)을 표시했다. 하지만 이 문장에는 음절이 아니면서도 '신', '도시','나라','생명', '고상한' 따위의 뜻을 가진 부호들이 광범위하게 쓰여져 있었다. 이 의문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이 부호들이 그림문자로 사용됐던 , 더 앞선 문자의 흔적인 것 같다는 점에 있었다. 그렇다면 아카드어 이전에 이집트의 그림문자를 닮은 문자가 있었던 것이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더욱 이른 시대에 문자 형태가 아닌 어떤 형태의 언어가 있었음이 명백해졌다. 학자들은 아카드어 문서에 많은 차용어가 있음에 착안했다[이것은 가령 영어의 weekend(주말)를 프랑스인들이 그대로 쓰는 것 같은 말이다.]. 특히 과학기술 용어에 이런 차용어가 많았으며, '신'과 '천계(天界)'에 관한 종교기록에도 그러했다. 또 A. H. 레이어드 경이 발굴했던 아슈르바니팔 왕 도서관에서 실로 2만 5천 장이 넘는 점토판 문서가 나왔는데, 그 중 많은 것에 '옛날의 텍스트'를 그대로 복사한 것이라는 주석이 붙어 있었다. 예컨대 23장으로 된 한 묶음의 점토판 문서에는, "23번째 판, 수메르어에서 그대로 복사함"이라는 주석이 달려 있었다. 또 다른 문서에는 아슈르바니팔 왕 자신이 기술한 수수께끼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서기(書記)들의 신께서 그의 재능의 지식의 선물을 나에게 베풀어 주셨다. 나는 기록하는 비법을 처음으로 배웠다. 나는 슈메르어 Shumerian로 된 난해한 문서를 읽을 수 있다. 나는 홍수 이전에 있었던, 돌에 새겨진 수수께끼 같은 말들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마지막 구절, 곧 '슈메르어'로 된 홍수 이전 기록을 이해했다는 이야기는 더욱 신비를 두껍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1869년 줄 오페르 Jules Oppert는 프랑스 고전학(古錢學) 및 고고학 협의회에서 전(前) 아카드 시기에 어떤 언어와 민족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 미지의 민족과 그들의 땅을 '수메르인' 및 '수메르'로 부르자고 제안했다. 실로 '슈메르'대신 '수메르'로 잘못 쓴 것을 제외하면 오페르가 옳았던 것이다. "바벨과 아카드와 에렉이 '시나르 Shin'ar'땅에 있었다."는 기록에 있는 시나르가 곧 수메르인 것이다.

이러한 결론을 받아들이자마자 연구가 급진전되었다. 아카드 기록에 인용된 '옛날 텍스트"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가 됐으며, 기다란 단어들이 이어진 점토판 문서들은 다름아니라 아카드/수메르어 사전임이 판명되었고, 이로써 바빌론/앗시리아에서 최초로 필기에 쓰여진 언어인 수메르어를 배우게 되었다.

또 이 사전의 도움으로 발굴된 방대한 점토판 서적들을 해독할 길이 트였다. 또 수메르는 반쯤 굳어진 점토판에 갈대 펜으로 씌어졌는데, 이것은 문명의 환경으로 보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곧 옛 이집트에서는 강변에 무성한 파피루스 줄기가. 중국에서는 대나무 조각(竹簡) 이나 비단이 필기 재료로 쓰여졌듯이 중동에서는 주변에 흔한 찰흙판이 종이 대용으로 사용되었고 거기에 기록하기 편하게 둥글거나 네모진 그림글자에서 쐐기형 문자로 간편하게 정형화되었던 것이다.

수메르어의 해독은 중동의 기나긴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였다 그런 이유로 북부가 아닌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굴 작업이 속속 개시되었다. 1877년 프랑스 발굴단은 처음으로 오늘날 이라크 남부에서 '텔로흐 Telloh'('언덕')하고 불리우는 '라가쉬'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 곳은 아카드의 사르곤왕이 정복했다고 호언한 도시였는데, 발굴된 물량이 너무나 엄청나서 1933년까지도 발굴이 완료되지 않았다.

이 곳은 사르곤왕의 칭호와 똑같은 수메르어 칭호 '엔시 EN. SI(정의 의 통치자)'가 다스렸던 도시로, 이 왕조는 서기전 2900년전 부터 시작되어 650년간 43인의 엔시들이 단절 없이 통치했다고 한다. 각 엔시의 이름, 족보, 재위 기간이 가지런히 기록되어 남아 있다. 또한 곡물의 순조로운 성장과 풍작을 신에게 기원하며 농토에 제대로 물을 대어 주어 곡식이 자라서 익게끔 기원하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이미 조직적인 농업과 완비된 관개시설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또 ' 곡물 창고의 감시자'인 한 여신에게 봉헌된 컵에는, 곡물의 양이 재어지고 창고에 저장되고 또 거래되었음을 기록한 그림문자 표시판이 새겨져 있다. 또 ' 에안나툼'이라는 '엔시'는 수메르의 통치자들이 신의 승인이 있어야만 권좌에 오를 수 있었음을 점토벽돌에 새겨놓았다. 또한 그가 다른 도시를 정복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는 약5천년 전인 서기전 3000년경에 이미 여러 도시가 존재하고 번성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여기에서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통치자의 정치적 정통성과 전쟁과 국방 및 외교에는 신들의 승인이 필수적인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인간인 통차자들은 신들의 집사나 마찬가지였으며, 그가 다른 도시나 나라를 정복하는 것은 다른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많은 점토판 문서를 연구한 결과 드러났다는 점이다. 이것은 거의 수메르의 멸망기인 서기전2000년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곧 수메르 시대는 한마디로 '신들'의 전권시대였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들은 또한 앞서 말한, 샤니다르 동굴에서 발견되었던 고도로 특화된 보리와 밀의 종자를 보급하여 인류의 농업혁명을 촉진시켰던 '신들' 이었던 것 같아. 수메르 전승에서는 니누르타가 바로 그런 농업의 신이었다고 한다.

[출처: 구루구루의 현자 아카데미]
[참조]-http://blog.empas.com/jinguja/688619

 타나토
감탄입니다~! 오늘 완전히 눈을 새로여는군요. 여기 싸움만 하는 줄 알았는데...... 사과드리겠습니다...... 이런 토론글들이 올라오다니..... 아~~!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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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17    고대수메르인과 한민족이 같은 뿌리라고 봅니까? [17] 네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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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18      신비의 고대문명 '수메르' [1] 진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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