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구르 역사 (번역자료)
◎번역
및 편집 : 김용은(ad313@softhome.net)
http://myhome.hananet.net/~ad313)
1. 들어가는 말
신장에 첫발을 내 딛은지 어느덧 5년(1996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이 문서는 5년 전 마음의 부담감을 안고서 신장을 방문하고서 다녀와서야 그곳에 관해서 알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인터넷의 자료들을 검색하던 중 오스트리아 대학의 아시아 연구실에서 정리한 위구르의 역사를 번역한 것을 지금(2001년 8월)에 와서야 정리해서 자료를 공개하는 것이다.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중앙 아시아의 역사에 관해서 서적이나 관련 글들을 한국에서 발견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더군다나 위구르 종족(투르크 종족 중 위구르 종족)에 관한 것은 발견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그곳을 향한 끊임없는 발길들이 그곳의 역사, 정치, 경제에 관해 많은 관심을 갖게 하고 그러한 관심들이 위구르에 관한 소식들을 정보화하고 있는 것 같다.
현재 위구르 역사에 관한 한글 문서들이 여러 개 있지만 이 자료가 비교적 간결하고 체계적으로 정리가 잘 되어 있기에 편집하여 공개한다. 역사나 위구르 종족에 대해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용어상의 문제나 각주에서 미숙한 부분이 있으리라 본다. 또 특별히 위구르 종족에 관한, 투르크인들의 역사에 관한 자료들이 빈약하고 사람마다 역사적 사실을 다르게 기술하고 있기에 여기의 역사기술 내용과 다른 곳의 내용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자료는 돌궐, 훈, 흉노로 대표되는 광범위한 종족의 명칭도 사용하지만 구체적으로 위구르 종족의 명칭을 가급적 모든 역사의 사건에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위구르 종족에 초점을 마춘 역사 요약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자료가 다른 자료들과 구별되는 장점을 가질 순 있겠다. 하지만 위구르 종족을 부각시키는 인용과 관점을 가지고 다루었기 때문에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다.
중국 역사와 관련이 많기 때문에 중간 중간에 중국의 역사의 자료들을 삽입하여 편집하였다. 미흡하지만 아무쪼록 위구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 위구르 역사를 읽기 전에
1) 중국이 불렀던 흉노(匈奴)와 훈족의 관계
훈족이란 중앙아시아의 스텝지대(地帶)에 거주하였던 투르크계(系)의 유목 기마민족이다.
중국 고대사에 나오는 흉노(匈奴)와도 관계가 있다고 보나, 한(漢)나라에 쫓겨 서쪽으로 간 흉노의 일부가 곧 훈족이라는 설에는 이론(異論)이 있다. 역사적으로 훈족을 흉노의 후예로 보는 까닭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군사 전술, 문화의 유사성, 흉노와 훈 두 이름의 유사성등에 기인하며, 흉노의 이름에서 '흉'이라고 불리는 종족을 중국에서 멸시의 의미에서 '노'(奴)를 붙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흉노족이란 대체 어떤 민족인가? 잠시나마 흉노족에 대해 알아보고 훈족의 이야기로 넘어가기로 하자.
흉노족의 기원에 대해서 한단고기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서기전 2177(-.-;;) 난하, 황하 북쪽 땅의 욕살(지방관리) 색정이란 사람을 약수로 유배했는데 이 사람이 흉노족의 조상이 됐다.” (-.-;), 믿거나 말거나,
어쨋든 흉노의 인종에 관해서는 투르크계(系)․몽골계(系)․아리아계(系) 등의 설이 있는데, 특히 투르크계설(系說)이 유력하다. 최근 흉노는 예니세이강 유역에 모여 살던 고대민족과 인종적 관련이 있다는 설이 제기되었으나, 이것도 확실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국가형태는 연제․호연(呼衍)․수복(須卜)․난(蘭)․구림(丘林) 등의 씨족으로 이루어진 흉노 부족을 지배층으로 하는 부족 연합체였으며, 선우의 지위는 연제씨족에게 세습되었고, 알씨(閼氏)라고 불린 황후는 원칙적으로 여타의 4씨족에서 나왔다. 국가를 구성하는 여러 부족의 족장은 1년에 세 번, 선우의 본거지에 모여 무속적(巫俗的)인 제사를 거행하였고, 동시에 국사를 의론하였다. 유목과 수렵생활로 양․말 등의 가축을 방목하고, 하영지(夏營地)와 동영지(冬營地) 사이를 이동하며 천막식 원형(圓形)가옥에 거주하였다. 또한 P.K.코즐로프 일행이 노인울라(Noinula)에서 발굴한 귀족분묘는 기원 전후의 것인 듯한데 그 곳에서 스키트-시베리아계의 문물뿐만 아니라, 견직물․칠기․옥기 등의 중국제품, 이란계의 동식물 무늬와 인물상을 수놓은 모직물 등이 출토되어 흉노의 지배층에 대한 중국․서방문화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1)
흉노족은 BC 3세기 말부터 AD 1세기 말까지 몽골고원․만리장성 지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유목기마민족(遊牧騎馬民族) 및 그들이 형성한 국가의 명칭. 주대(周代)에 중국의 북변을 위협하였던 험윤․훈육 등의 후예라고 하지만 확증은 없다.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중국을 통일하였을 무렵(BC 221) 흉노 연제(攣:虛連題) 씨족의 족장(族長) 두만(頭曼)은 몽골고원의 제족연합(諸族聯合)에 일단 성공하였으나, 그 아들 묵돌[冒頓:?~BC 174]은 아버지를 살해하고 스스로 선우[單于:북아시아의 유목국가의 군주를 가한(可汗)이라고 칭하기 이전에 사용한 칭호]2)라 칭하였다. 묵돌은 남만주의 동호(東湖), 북방의 정령(丁令), 예니세이강(江) 상류의 키르기스를 정복하고, 서방의 월지[月氏]를 격파하여, 북아시아 최초의 유목국가를 세우고, 이어 산시성[山西省] 북부에 침입하였다. 한(漢)나라의 유방(劉邦)은 북진하여 이를 요격(邀擊)하였으나, 다퉁[大同] 부근에서 포위되어 간신히 탈출한 다음, 한황실(漢皇室)의 딸을 선우에게 주어 처를 삼게 하고, 매년 많은 견직물․술․쌀 등을 흉노에게 보낼 것을 조건으로 화의(和議)를 맺었다(BC 198). 그 뒤 흉노는 오손(烏孫)이나 동(東)투르키스탄의 오아시스 제국(諸國)을 지배하였는데, 그 결과 흉노의 지배권은 동(東)은 러허[熱河]에서부터 서는 동(東)투르키스탄까지, 북은 예니세이강(江) 상류에서부터 남은 오르도스까지에 이르게 되었다. 흉노의 주요한 경제적 기지는 동(東)투르키스탄에 있었고, 군수기지는 내(內)몽골․오르도스에 있었으며, 전자(前者)로부터는 그 물산(物産)과 교통․통상보호세(保護稅)를 거두었고, 후자에서는 스키트․시베리아계(系)의 청동기, 특히 무기류(이른바 綏遠 또는 오르도스 靑銅器)를 제작하였다. 이리하여 흉노는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나, 한나라 무제(武帝:재위 BC 141~BC 87)는 자주 흉노에게 원정군을 보냄과 동시에 이를 동서로부터 협격(狹擊)하고자 장건(張騫)을 월지에 파견하였다(BC 139~BC 126). 이와 같은 무제의 정책으로 흉노는 외(外)몽골로 도피하고, 동투르키스탄은 한나라의 세력하에 들어갔으며, 또 정령․선비(鮮卑) 등의 예속제족(隸屬諸族)이 독립하였다. 더욱이 흉노는 내분이 일어 5명의 선우가 난립하였고, 이어서 질지선우와 그 아우인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東匈奴)가 대립하기에 이르렀다(BC 54). 호한야는 한나라에 항복, 그 원조하에 들었으므로 질지선우는 한나라와 호한야의 연합이 두려워 서쪽 키르기스 초원으로 옮겼으나, 한나라의 원정군에게 패하여 살해되었다(BC 36). 그 뒤 흉노는 호한야를 중심으로 다시 부흥, 한나라와의 관계도 호한야가 왕소군(王昭君:한나라 元帝의 後宮)을 아내로 맞이하는 등 일시 소강상태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재차 내분이 일어나고, 제2대 호한야선우가 후한(後漢)에 투항함으로써 호한야가 이끄는 남(南)흉노와 북(北)흉노로 분열하였다. 남흉노는 간쑤[甘肅]․산시[陝西]․산시[山西] 등에 나뉘어 살며, 중국 북변․서북변의 방위를 담당하였으나, 서진(西晉)에서 내분이 일어난 것을 틈타 반란을 일으켜 5호16국 중, 한(漢:前趙)․북량(北凉)․하(夏)를 세위, 점차 중국화(中國化)하기 시작하였다. 북흉노는 때로 중국에 침입하기도 하였으나, 선비의 공격을 받아 선우가 살해되고, 후한․남흉노 연합군이 그 본거지를 공격하게 되자 대패하였고, 그 결과 몽골고원에서 흉노가 세운 국가는 와해되었다.
흉노 제국이 AD155년 멸망된 후, 남은 세력들은 천산 산맥과 알타이 산맥을 넘어 서진하였다. 그 결과 현재의 카자흐스탄과 남 시베리아에 이르러 이 지역의 원주민을 장악하고 새롭게 세력을 구축하였다. 이후에 흉노족은 서진을 게속하여 우랄 산맥에 도달하게 되고, 이곳에서 게르만계 고트족과 만나게 된다. 이들과의 접촉은 흉노족의 우랄화를 낳게 된다.
훈족은 4세기 중엽 알란국 정복을 시작으로 374년 볼가지역에 등장했다. 훈 제국은 기마를 이용한 기동력과 전술로 동 고트를 공격 374년에 붕괴시켰고, 375년 서 고트의 왕을 불가리아 지역으로 몰아내었다. 이로 인해 게르만족의 대 이동이 시작된다. 훈족에 밀린 서고트는 395년 로마에 유입, 로마제국은 동서로마로 급격히 분리되었고, 고트족 이외에 많은 동유럽의 부족들이 로마 제국내로 유입되어 로마의 큰 위협세력이 되었다.
이후 훈족의 울드즈는 400년경 투나강 유역을 공격함으로써 서고트는 다시 이탈리아 변경으로 쫓겨났다. 바로 이때 훈족의 명성이 절정에 달하게 되는데, 훈족에 밀린 동고트와 반달족등의 게르만족이 로마를 공격하였을 때, 훈족은 로마와 연합으로 이들을 제압하게 된다. 이때, 훈 제국의 영토는 아랄 해 동부지역에서 동유럽, 발칸반도에 이르렀다.
4세기 말의 루아왕 때에는 오늘날의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일대를 지배했고, 다음의 아틸라왕 때에는 전성기를 이루었다.
아틸라는 5세기 전반의 민족 대 이동기에 지금의 헝가리인 트란실바니아를 본거(本據)로 하여 주변의 게르만 부족과 동고트족을 굴복시켜 동쪽은 카스피해에서 서쪽은 라인강에 이르는 지역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동로마를 위협하여 조공(朝貢)을 바치도록 하였으며, 갈리아에 침입하여 오를레앙을 공격하였다(451). 이에 대하여 서로마는 서고트 및 프랑크와 동맹군을 편성하여 맞아 싸우려고 하였으므로 아틸라는 철군을 개시, 돌아오는 도중 마우리아쿠스(샬롱쉬르마른의 남쪽)의 벌판에서 연합동맹군에게 패하여(카탈라우눔 전투), 서유럽의 정복을 단념하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북 이탈리아에 침입, 로마에 육박하였으나, 로마교황 레오 l세의 설득을 받아들여 철군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아틸라는 이탈리아 침입을 꾀하는 등 훈족의 위협은 계속되었으나, 453년 갑작스런 죽음으로 무적의 대제국(大帝國)도 급격히 분열 ․쇠퇴하여 훈족은 다뉴브강 하류지방으로 후퇴, 타민족과 혼혈 ․동화되어 소멸되었다.
그후 아틸라의 뒤를 이은 이르네크는 훈족을 이끌고 남부러시아로 이주하였다. 후에 이들 훈족들에 의해 헝가리와 불가리아 탄생하게 된다.
2) 타브가츠(북위)
타브가츠, 곧 위진 남북조 시대3)의 북위(北魏)는 화북지방의 16국 중 선비족(鮮卑族)4)이 중국 화북지역을 통일. 북조(北朝) 최초의 왕조(386~534). 후위(後魏)라고도 한다. 3세기 중엽 내몽골의 바옌타라[巴彦塔拉] 지방에서 세력을 넓혔으나, 4세기 초 이들의 세력을 이용하여 북쪽 변방을 지키려는 서진(西晉)으로부터 산시성[山西省] 북부의 땅을 얻음으로써, 그곳에서 세력을 신장하였다.
315년 군장(君長)인 탁발 의로(拓跋盧)는 서진의 관작을 받고 대왕(代王)으로 봉해졌다. 탁발 십익건(拓跋什翼) 때 전진(前秦)의 부견(符堅)과의 싸움에 패하여 정권이 와해되었지만, 탁발 규(拓跋珪:후의 道武帝)는부견이 비수 전투에서 패한 기회를 이용하여 나라를 재건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위(魏)라고 하였다(386). 이어 내몽골 여러 부족을 평정하고 후연(後燕)을 격파, 허베이[河北] 평야에 진출하여 도읍를 평성(平城), 즉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다퉁[大同]에 정하였다(398).
위는 중국 고래의 전통에 의한 국가 체제를 채용하기로 정하고, 화북지방을 평정하기 위하여 몽골에서 데려온 여러 유목 부족을 해산시켜 부민(部民)을 군현(郡縣)의 호적에 편입하게 하였다. 그리고 훈공이 있는 부족 중의 유력자에게는 관작을 수여하고 한족(漢族)의 명문(名門)과 똑같이 고급관리로 채용하여 귀족제의 기초를 이룩하였다. 남조(南朝)의 송(宋)을 공략하여 허난[河南]지방의 땅을 빼앗았고, 태무제(太武帝) 때 하(夏), 북연(北燕), 북량(北凉)을 멸망시킴으로써 5호 16국(五胡十六國)의 난을 종식시켜, 439년 마침내 북위는 강북지역 통일을 완성하였다. 그뒤 선비족의 한화(漢化)가 촉진되었는데, 특히 효문제(孝文帝)가 즉위하자 도읍을 뤄양[洛陽]으로 옮겨(494), 호복(胡服), 호어(胡語)를 금하고 호성(胡姓)을 한인(漢人)처럼 단성(單姓)으로 고치게 하였으며, 황족인 탁발씨도 원씨(元氏)로 개성(改姓)하였다. 효문제는 한화정책과 함께 봉록제(俸祿制), 삼장제(三長制), 균전법(均田法)등을 창시하여 북위의 국력과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북방민족 고유의 소박상무(素朴尙武)의 기풍이 쇠퇴하고, 사치스럽고 문약(文弱)한 경향이 일어났다. 그리고 나이 어린 효명제(孝明帝)를 섭정한 영태후(靈太后)가 지나치게 불교를 존숭하여, 사탑(寺塔) 건축에 국비(國費)를 낭비함으로써 국정을 어지럽게 하였다. 524년에는 북진(北鎭) 병사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난을 진압할 때 큰 공을 세운 북방 민족의 무장(武將) 세력인 우문태(宇文泰)와 고환의 대립이 격심해졌으며, 따라서 양자는 각각 북위의 종실을 천자로 옹립하여 534년 북위는 서위(西魏)와 동위(東魏)로 분열되었는데, 동위는 550년 고환의 아들 양(洋)에게 빼앗겨 북제(北齊)가 되었으며, 서위는 556년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宇文覺)에게 빼앗겨 북주(北周)가 되었다.
3)돌궐제국
돌궐제국은 스텝의 여러 민족들 중에서 최초로 자신들의 문자기록을 남긴 민족으로 평가된다. 몽골리아 북부 오르혼강 유역에서 발견된 튀르크어 비문은 당시의 상황에 대한 여러가지 역사적 자료를 제공해 준다.
돌궐족 자신과 스텝의 서쪽 국가들에 의해 쓰여진 튀르크라는 말은 6세기말 비잔틴 역사가 아가티아스의 비잔틴문서와 아랍시인 나비가트 알 주브야니의 아랍문서에서 처음 나타난다. 돌궐이라는 명칭은 중국인이 튀르크족을 북방 오랑캐라는 경멸적인 의미로 만든 조어이다.
돌궐제국은 흉노의 일파로 여겨지고 본거지는 알타이산맥의 외트켄산으로 알려져 있다. 이 부족은 원래 직업은 철공업이었고 처음에는 연연5)의 복속국이었으나 후에는 연연을 뒤엎고 제국을 건설했다. 이들이 바로 스텦 민족사상 처음으로 도시를 건설한 부족이다.
돌궐제국은 부민 혹은 투멘이라고도 하는 고대 튀르크6)의 지도자에 의해 545년 경에 건설되었다. 그는 552년 서위와 연합하여 연연을 멸망시킴으로써 스텦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553년 부민의 사망후 그의 두 아들이 동돌궐과 서돌궐로 나누어 지배하였다.
583년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었고, 돌궐은 수나라에 의해 동서돌궐이 이용당하기 시작했다. 612년 수나라의 고구려 침략실패로 멸망하자 잠시 부흥하는 듯 했지만 곧이어 등장한 당나라에 의해 반 세기 동안 지배를 받게 되었다.
683년 쿠툴루그 일테리쉬에 의해 돌궐제국은 당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하여 제의돌궐제국인 후돌궐을 세웠다. 일테리쉬는 10년간 스텦통치를 지속하다 각종 유목민족의 내분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결국 742년 바스밀부족이 위구르를 카를룰부족과 세력을 합하여 어린 나이에 카간이 된 돌궐의 마지막 왕 텡그리를 제거함으로써 돌궐제국은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그 후 바스밀과 카를룩, 그리고 위구르 사이의 세력다툼에서 위구르의 일테베르가 정권을 장악하여 자신을 카간으로 선포함으로써 위구르제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4)탈라스 전투
탈라스 전투는 대규모의 전쟁은 아니었다. 고선지가 거느린 군대는 3만명 가량이었고 사라센 군대나 돌궐족 군대도 큰 군대는 아니었을 것이다. 당 사람들이 그 싸움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긴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고선지는 그 패전으로 문책을 받지 않았다 (그는 뒤에 안록산의 군대와 싸우다가 의심을 받아 처형되었다).
그러나 탈라스 전투가 역사에 미친 영향은 크다. 먼저 그 싸움에서의 패배는 중국의 서역 경영에 치명적이었고 곧 일어난「안사지란」으로 당(唐)이 전성기에서 곧바로 쇠퇴기로 접어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서역은 중국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명(明)이 신강성 동부에 잠시 진출했던 것을 빼놓으면 18세기 중엽에 청(靑)이 진출할 때까지 중국은 서역에 발을 붙이지 못했다. 그리고 서역이 사라센의 세력 안에 들어감으로써 서역은 이슬람교 권역이 되었다. 서역은 원래 불교가 성하던 곳이었는데, 이슬람 세력의 모진 박해를 받아 불교는 급속히 쇠퇴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라센제국은 동방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원래 아라비아에서 나온터라 사라센제국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지중해지역으로 끌렸다. 그러나 718년에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다 실패했고, 732년에 투르 싸움에서 사르르 마르텔에게 패배해서 사라센제국은 유럽으로의 진출이 좌절되었다. 서역에서 뜻밖의 성공을 거두자 사라센제국의 무게 중심이 상당히 동쪽으로 움직이게 되었던 것이다. 수도가 지중해에 가까운 다마스커스에서 동쪽의 바그다드로 바뀐 것은 상징적이다.
문화적 영향이 더 크다. 사라센에게 붙잡힌 당의 주민들과 병사들 가운데는 기술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슬람세계에 중국의 문명이 많이 전파되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제지기술이었으니 막 피어나던 이슬람 문화는 그 기술에서 큰 도움을 얻게된다. 제지기술은 유럽에 전해지면서 인쇄술의 발전을 가져왔다.
탈라스 계곡의 싸움은 소규모 전투였지만 큰 사건이었다. 그것의 영향은 1천년이나 지난 지금도 신강성의 너른 땅에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위구르의 역사
1. 개요
위구르인7)들은 신강 혹은 신장(Xin Jiag) 위구르 자치구라고 알려진 동 투르키스탄(Eastern Turkystan)의 원주민이다.
가장 최근의 중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위구르 자치구엔 위구르인이 720만이 있다고 한다.8) 또한 서 투르키스탄(West turkystan)이라고 알려진 곳에는 50만의 위구르인들이 산다.9)
또 약 7만 5천명의 위구르인들은 파키스탄과 아프카니스탄, 사우디 아라비아, 터키, 유럽과 미국에 살고 있다.10)
중국 관계당국은 위구르인들이 훈족의 직계 후손이라고 말한다.11) 위구르라는 이름은 한(漢) 왕조(BC206~AD202)12) 위(魏)왕조(AD256~289)13) 당(唐) 왕조(AD618~906)14) 송(宋)왕조(AD906~960)15)의 역사에서 언급된다.16)17)
고대의 그리스, 이란 그리고 중국은 자신들의 부족으로 위구르족을 넣었는데 BC300년부터 동쪽 지역의 황하강 서쪽 기슭과 서쪽 지역의 동투르키스탄의 광대한 지역의 부족들을 그리고 북방지역의 몽골의 스텝지역에 있는 부족들과 함께 위구르를 그들의 영토로 편입시켰다.18)
2. 초기 역사
기원전 210년 이후 위구르 종족은 중앙 아시아에 세워졌던 훈 제국(BC220~AD386)19), 타브가츠(Tabgach:북위)제국(AD386~554)20) , Kok-Turk(돌궐:AD552~744)21)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22)
기원후 670년, 688년, 692년 북쪽과 북방 중앙 아시아에 있는 요세들을 정복하려고 중국이 군사정복을 할 때 위구르23), 돌궐과 Shato 종족이 티벳 군대와 연합하였다.
중앙 아시아의 Kok-Turk(돌궐)제국의 몰락 이후 위구르는 744년 오르콘 강의 기슭에 카라발가순을 수도로 삼고 최초로 나라를 세웠다.
이 위구르제국을 기초한 자는 쿠툴룩 쿨 카간24)이였다. 747년에 위구르는 다른 투르크 씨족과 다른 가문들, 연합 군주국을 평정했던 쿠툴룩 쿨 카간의 아들 대에 번영하였다. 그리고 북에서는 바이칼 호수까지 동에서는 간수 그리고 남서쪽으로는 인도까지 그 통치 범위를 넓혔다. 25)
위구르가 통일되고 강성해졌을 때 공교롭게도 중국 현종 황제의 당 왕조의(AD712~756)가 급격히 쇠퇴하고 있었다. 751년에 중국 군대는 아랍, 티벳, 위구르에 의해 탈라스 강의 전투에서 대패했다. 같은 해에 중국은 남방에서의 난차오26)에 침략했으나 역시 이들의 저지로 엄청난 손실을 입게됬다. 그리고 안록산이 이끄는 중국 군대도 북방에서 거란에게 패했다. 이 중국의 손실은 엄청난 파국의 서곡에 불과했다 주후 755년에 앞에 언급한 충직한 부하 안록산이 반역했다.(안사의 난)
위구르는 수종과 성종의 후계자가 찾아와서 중국에 군대를 파견해 도와달라고 하는 상황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후 757년에 위구르 군대는 장안과 낙양 둘 다를 탈환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위구르는 당 왕조가 진 빚의 약점을 잡았고 엄청난 약탈을 했다. 중국 황제는 위구르에 매년 조공으로 비단 2만 필을 바치는 것을 승낙했고 그의 공주의 하나와 결혼하게 되었다. 주후 744년~804년의 기간동안 위구르 카툰(비(妃))이 된 중국의 공주는 모두 3명이었는데 이 때가 그 첫 번째였다.27)
759년 모윤구 카간이 죽자 그의 아들 부구 카간이 더욱 나라를 발전시켰다. 그의 통치기간동안 위구르의 기세는 극치에 달했다. 그들은 829년 이전의 중국 사료에 빈번히 기록된 것처럼 중국 비단과 위구르인의 말과의 무역교류를 강압적으로 체결했다. 28)
779년 부구카간은 그의 첫째 사촌과 그의 수장(首將) 바가타르칸에 의해 살해되었다. 부그 카간의 소그드인 연합국과 고문들은 779년 현종 황제의 죽음과 그 파급으로 인한 정국 침체를 틈타 자국들의 이익과 중국침략에 착수하기 위해서 부구카간을 필요로 했고 부구카간도 이것에 동의를 했다. 그러나 그의 큰조카 바가 타르칸은 그 계획에 반대했다. 그리고 그는 부구카간에게 대항하며 바뀌는 대세를 보았다. 그는 부구카간을 살해하고 왕좌에 올랐다 바가 타르간은 중국이 위구르가 지배할 수 있는 무대라는 것을 믿었다. 그러나 그는 위구르인들이 만약(비록 광대하고 인구가 조밀하지만)중국을 지배하게 되면 자신들의 문화적인 정체성을 지속시킬 것이라고는 확신하지 못했다.
789년 바가카간의 사후에 특별히 790년에 쿨룽 빌지 카간이 이후에 위구르의 전성기를 지나가고 있었다.
795년 위구르 정부의 법률은 다른 부족에 의해 통과되었다. 이 새로운 가문아래 위구르는 보다 더 종교에 관심을 쏟게 되었고 완화해졌고 이전의 세대들의 위구르를 정체성 있는 문화로 발전시키는 배아역할을 했다.
이 부족의 가장 주요한 통치자는 쿠틀룩 빌게 카간이었다. 그의 통치 전과 통치의 양 기간 동안에 군사적인 수훈을 세운 그는 카라발가순의 비문29)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는 보다 많은 힘을 위구르 제국에 축적하는 것에는 성공하지 못했다.30)
805년 쿠틀룩 빌게 카간의 죽음과 함게 위구르 정부를 와해시키려는 세력들은 점차 늘어만 갔다. 전쟁이 북방의 이웃들, 강력한 키르키즈등과 함께 주변국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궁에서도 마찬가지로 음모가 왕족의 권세를 약화시켰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른 요인들도 가세했는데 위구르 정부 경제의 의존도가 높은 목축은 혹독한 겨울의 추위로 많은 가축의 손실을 냈다. 840년 키르키즈에 반역자들이 찾아갔고 약화된 정부를 공격했고 카간을 살해하고 수도를 점령했다.
위구르의 정치적 역사의 첫 번째 부분은 거의 한 세기 동안 중국 제국을 방어해준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는 실제로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중국에게 있어서 오랑케를 막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역사의 첫 부분에서처럼 그 이후에 위구르는 결코 이 때처럼 중국에 호의를 베푼 적은 없었다.
그 첫 위구르 제국의 몰락 이후 위구르인들의 한 집단이 간수에 있는 황하강의 서부 뚝에 이주해갔다. 또 다른 집단은 동 투르키스탄의 칸 텡크리31)에 또는 천산산맥의 남반부의 via Yetti su로 이주했다. 셋째집단과 가장 큰 집단은 그들의 선조들이 지금까지 살고 있는 칸 텡그리 북방32)에 이주했다.33)
3. 간수 위구르 왕국(The Kanchu Uygur Kingdom)
850년에 오늘날 중국의 간수 지방에 세워진 간수 위구르 왕국은 막강한 세력을 가진적은 없었으나 중국인들은 911년에 위구르와 티벳의 사절이 중국의 수도를 방문해을 때 간수 위구르 왕을 중국 황실이 칭송한 것을 본적이 있기에 간수 위구르 왕국을 지극히 존중한다. 이 왕국은 1228년에 서부 서하(西河)의 탕구트족34)에 흡수되었다.35)
이 위구르인들의 몇 천은 아직까지 황색 위구르 또는 유구르(Yugur)라는 이름으로 간수에 살고 있고 그들의 모국어와 그들의 조상들의 라마 불교의 황색분파를 지켜나가고 있다.
4. 카라코야 위구르 왕국(THe Karakhoja Uygur Kingdom)
동투르키스탄의 칸 텡그리(천산)의 북방에 살고 있는 위구르인들은 846년에 투르판의 현존하고 있는 도시 가까이에 카라코얀 위구르 왕국을 창건했다.36)
중국은 그들의 사절로 카라코야에 있는 981년에 황 옌 더(whang yen de)를 보낼 정도로 이 왕국을 견지했다.37) 황 옌 더는 삼년동안 카라코야에 정주했다.
5. 카라카니드 위구르 왕국
(The Kafakhanid Uygur Kingdom)
칸 텡그리의 남방부에 살고 있는 위구르인들은 카를룩같은 다른 투르크 종족, 투르기쉬(Turgish)와 바스밀 종족의 원조로 840년에 카쉬카르를 수도로 카라카니드 위구르 왕국을 창건했다.38)
934년 사축 부그라 칸의 통치 기간동안 카라카니드는 이슬람을 신봉했다. 이들 동투르키스탄지방에 두 위구르 왕국(이슬람교도인 카라카니드와 불교도인 카라코야)이 정착했다.
1397년에 이 이슬람과 불교도 위구르 왕국은 하나의 나라로 합병되었다. 그리고 1759년까지 독립국가로 남아있었다. 39)
6. 만주(淸)침략
만주40)족은 중국에 거대한 제국(淸)을 형성했다. 1759년에 동투르키스탄의 위구르를 침략했고 1826년까지 지배했다. 이 기간 동안 위구르는 그들의 독립을 얻기 위해 만주의 통치에 대항해 42회의 탈환운동을 일으켰다. 41) 1863년의 마지막 운동에서 위구르인들은 그들의 조국으로부터 청을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1864년에 독립 왕국을 다시 세웠다. 이 왕국은 오토만 제국, 러시아 그리고 대영제국에 의해 인정되었다. 42) 그러나 동투르키스탄을 향한 재정 러시아의 팽창을 우려하던 대영제국은 동 투르키스탄을 지배하려던 청을 설득했고 청이 동 투르키스탄을 침략하도록 영국은행이 자금을 댔다. 43)
1876년 동투르키스탄을 침공한 청은 그 땅을 새로운 영토 또는 새 영지라는 의미의 신강(新疆)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1884년 11월 18일에 만주 청의 영토로 합병되었다. 44)
1911년 국가주의자 중국인들은 만주 세력을 점복하였다. 그리고 공화국을 세웠다.
위구르인들은 외세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원했고 이 기간 동안에 중국 국가주의자들의 통치에 대항하여 몇 몇의 독립운들들을 계획했다. 1933년에 두 번째 운동이 있었다. 1944년 위구르인들은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으로 새로이 독립하는데 성공했다.45) 그러나 이 독립된 공화국들은 소비에트 연방의 군사적인 중재와 정치적인 음모에 의해 점복되었다. 이 기간동안 소비에트 연방이 위구르의 독립운동을 방해한 것은 이미 증명된 것이다.
1949년에 국가주의 중국인들이 중국 공산당에게 패배했다. 후에 위구르는 중국 공산당의 지배 아래에 들어갔다.
위구르 문명(Uygur Civilization)
19세기 말엽 그리고 20세기의 몇 십 년 동안 과학적으로 동 투르키스탄의 실크로드에 걸친 지역에서 고고학적인 탐사는 수많은 위구르 동굴 사원들과 수도원의 폐허들 그리고 벽하들, 조각상, 프레스코, 귀중한 필사본들, 문서들과 서적들이 있는 곳을 발견하게 했다. 대영제국, 스웨덴, 러시아, 독일, 프랑스, 일본, 그리고 미국의 이 탐사대들은 그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에 놀랐고 그에 대한 상세한 연구 보고서는 바로 전세계의 관심을 샀다. 스웨덴의 센 헤딘, 대영제국의 아우렐 스타인, 독일의 그루덴 베델 그리고 알버트 본 레콥, 프랑스의 폴 펠리어트, 미국의 랑돈 와르너, 일본의 코운트 오타니에 의해 발굴되간 풍요로운 위구르 문화적 자취들은 베를린, 런던, 파리, 도쿄, 레닌그라드 박물관에서 볼 수 있고 심지어 뉴델리의 중앙 아시아 골동품 박물관에서도 볼 수 있다.46) 동투르키스탄에서 발굴된 필사본들과 문서들과 고서들은 위구르가 매우 높은 문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47)
위구르 문자(Uygur Script)
수세기를 통하여 위구르인들은 세가지의 문자를 사용했다. 그들이 6,7세기 돌궐족들과 함께 연합했을 때, 그들은 사실 돌궐족이 고안해낸 오르콘 문자를 사용했다. 48) 후에 위구르 인들은 이 문자를 버리고 위구르 문자로 알려진 그들의 고유한 문자를 받아들였다.49) 이 문자는 위구르인들 뿐만 아니라 다른 투르크족, 몽골, 초기 중국을 지배하던 만주족들도 거의 800년 동안 사용한 것이다.50)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문자를 기지고 있지 못했기 때에 위구르 문자는 징기스칸의 제국 때에 모든 서신의 용도로 받아들여졌다.51) 위구르인은 또한 어떠한 문화와도 뒤지지 않는 몽골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다. 52)구르인들은 몽골 황실과 중국관리, 로마사절, 오늘의 이스탄불과 바그다드, 테브라즈의 철학자들과 그 군대의 상급자들의 교사로 활동했다 후에 이슬람을 종교로 받아들인 후에 위구르는 아랍문자를 사용했다.53) 그러나 아라비아 문자는 11세기에만 일반화되었다.
위구르 문학(Uygur Literature)
위구르의 초기의 문학작품은 대부분이 불교와 마니교의 종교적인 서적들이었다. 반면에 실크로드의 고고학 탐사의 기간동안에는 몇몇의 설화와 운문 그리고 음소론적인 작품들이 발굴되었다. 이 책들의 몇몇은 독일어, 영어, 러시아어, 터키어로 번역되었다. 54) 이슬람교도를 수용한 후에도 위구르는 중앙 아시아에서 그들의 문화적인 우월성을 보존해 나갔다.
이 기간동안에 위구르 철학자들의 수 백 명이 이 시대에 출현했고 명성이 있었다. 이 시기에 수작들이 수 백 권 쓰여졌는데 이 중 백 삼십 권의 작품들이 후에 발견되었다. 이 작품들 가운데서도 또한 이 시대에 쓰여진 위구르 철학자 유스푸 하집의 책 쿠타트쿠 빌리크(Kutatku billik)55), 무하메드 카쉬카르의 디바니 루가티트 투르크(Divani lugatit turk)56)는 그 당시의 투르크인들의 방언들의 자료를 현재까지 전해주고 있다. 또한 방언간의 차이점, 사회적인 교육, 그들의 관습, 또한 그들이 살았던 지역에 관한 정보들을 말해주고 있다. 백과사전에 가까운 사전을 만든 작가는 이 책을 완성하기 전에 사람들이 사는 곳(투르크 종족)을 유랑하였고 모든 자료들을 연구했고 문학적인 것을 바탕으로 하는 어감을 사용했다. 디바니 루가티트 투루크는 오늘날 투르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의 하나이다.
종교
아마도 중앙 아시아의 투르크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슬람이 있기 전에 위구르인들은 샤머니즘, 마니교 같은 종교를 믿었다. 불교는 6세기에 동 투르키스탄에 들어왔다. 그건 투르크 사람들 사이에 빠르게 퍼졌다. 그러나 그것을 중앙 아시아에 그틀을 세운 것은 위구르인들이었다. 위구르인들에 의해 건축된 밍오이 또는 천불상으로 알려진 유명한 수도원의 폐허는 지금까지도 광저우 위구르인들 혹은 황색 위구르인들이 사는 쿠차, 투르판 그리고 툰황에서 지금도 볼 수 있다.
위구르의 왕 쿨 빌게 카간(AD678~712)이 동 투르키스탄의 베이라는 도시에 불자들의 수도원을 짓도록 하였다.57) 쿠차라는 도시에는 50개 이상의 사원과 서원이 있었고 빈자들을 돕기 위한 복지 프로그램도 있었다. 58) 호텐이라는 도시에는 작은 사원들을 빼고도 14개의 대규모의 사원이 있었다.59)
762년에 위구르 왕 부구카간이 중국을 여행했을 때 그는 몇 명의 마니교 사제들을 만났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로 그를 감화시키는데 성공했고 이 사제의 4명은 카라발가숨에 그와 함께 돌아왔다. 조금 후에 부구 카간은 국교로 마니교를 책정했다.60) 이것은 정치적인 이유로 사용되었다. 그는 바로 특징적인 소그드인 종교를 받아들이므로 불교도였던 중국의 문화적인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다. 61)
위구르인들은 934년에 사투므 브그라 칸의 통치기간 동안에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그는 중앙 아시아에서 이슬람교를 수용한 첫번째 투르크족 통치자였다. 이 시기에 사원을 대신해서 모스크가 세워졌다. 대부분 300여개의 모스크가 카쉬카르에만 세워졌다. 그것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2세기에 세워진 안쯔나(Anzna) 모스크, 15세기에 세워진 이드카(Id kah)모스크 그리고 18세기에 세워진 압박호자 모스크(Appak Khoja Mosque)이다.62) 또 카쉬카르에는 또한 18개의 큰 마드라사스(Madasas:교육기관)가 있다. 또 2천명을 상회하는 학생들이 해마다 이 학교에 입회한다. 가장 평이한 시설인 이 학교(마드라사스)는 위구르 아이들의 읽기, 쓰기, 이슬람적인 주제들 만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점술, 산술, 기하학, 윤리학, 천문학, 의학 그리고 노업과 유사한 과목들을 배운다, 메수디(Mesudi) 도서관은 15세기에 지어졌고 거의 20만원의 책들이 서장되어 있다. 63)
위구르 경제
위구르 사람들은 다른 투르크족 사람들보다 더 초기부터 정착하는 생활 방식을 수용했다. 위구르인들은 3세기 이전에 경작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위구르인들은 7세기에 보다 더 발달된 형태로 농업에 종사했다. 그들은 밀, 옥수수, 기장, 감자, 참깨, 땅콩, 포도, 멜론, 목화 등을 재배했다. 이 밭은 위구르인들에 의해 축조된 카레즈(지하수로)로 먼 거리까지 물을 대어 관계했다. 이 카레즈는 오늘날 투르판 도시 근방에서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면은 상업적인 가치가 있는 지방 상품을 하나이다. 목화로 만들어진 면과 제품들은 그 지역의 이익증대에 기여한다.
다른 상업적인 가치가 있는 제품들은 카펫이다. 호텐, 카쉬카르 그리고 투르판에 있는 도시들에는 카펫트 수공 센터가 있다.
위구르 의학
위구르인들은 다양한 의학적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다. 송 왕조(AD906~960)의 사료에 보면 위구르인 의원들이 나타난다. 난토는 중국을 여행했고 중국에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종류의 의학 지식을 전달했다. 64)
또 고고학적인 탐사에서 놀라운 정도로 정밀한 인체의 스케치를 발견했다.
중국 의학의 권위자인 리 시즌(Li Shizen.,1518-1593)에 이해 집대성된 의학개론에 위구르 의술에 사용된 103가지의 다른 약초들이 기록되 있다. 타타르의 학자 라쉬트 라메티 아라트(Rashit Rahmeti Arat)는 Zur Heilkunde der Uighuren(위구르인들의 의학의 실제)라는 제목의 두권의 가치있는 책을 동투르키스탄에서 발견된 위구르 문서에 기초해서 1930년과 1932년에 독일에서 출판했다. 그 책에서 아라트는 위구르 의학과 의학적인 치료법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주고 있다. 그가 발견하고 연구한 문헌들에는 침술의 설명과 함께 매우 중요한 인체의 스케치가 있었다. 몇 몇 서구의 학자들은 그러한 침술은 중국에도 없는 것이라고 탄성을 자아냈다. 그것은 중앙 아시아인의 원조 의술이며 위구르인들의 완벽한 기술인 것이다.65) 전통적인 위구르 의술은 기록 시대를 넘어서 2,700년 이상으로 소급된다. 그것은 오늘날의 동 투르키스탄에서 여전히 실시되고 있는 의술이다.
건축, 예술, 음악, 인쇄술
건축과 예술, 음악, 그리고 인쇄 와 같은 분야에서 위구르인들은 또한 뛰어났다. 동투르키 스탄을 여행했던 학자들과 고고학자들과 중국의 사절은 종종 위구르의 높은 도시문명에 수준에 높은 평가를 해왔다.
일례로 AD981~984년 사이에 카라코자 위구르 왕국 에 중국 대사로 있었던 중국의 왕 옌 더(Wang Yen(Yan) De)는 그의 기억들을 따라 적은 것을 보면 “나는 내가 위구르 왕국에서 발견해온 광대한 도시문명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왕국의 도처에 지어지는 사원, 수도원, 담의 그림들, 조각상, 누각, 정원, 주택들 그리고 궁전의 아름다움은 다 묘사할 수 없을 정도다. 위구르인들은 금, 은, 꽃병, 도자기류의 세공에 매우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다. 몇 몇은 신이 이 사람들에게만 이러한 재능을 부어줬다고 말할 정도다.“라고 적고 있다.66)
알버트 그루엔베델
“투르판은 한점의 의심도 없이 잊혀진 아시아의 비상한 관심을 갖게하는 도시다. 그 도시의 크기는 주목할 만 하다. 내적으로 거룩한 도시이고 사원들과 궁전들로만 이루어진 도시이며 지금도 존재하는 성벽들의 가장 넓은 곳이 7천 400피트이다. 층 층으로 된 몇 백 개의 사원들과 웅장한 아치형의 건물들이 넓은 지역을 덮고 있다.”67)
프레디날드 드 샤슈어
“중앙 아시아의 보존된 언어와 기록 문명을 보존한 이들이 바로 위구르인들이다.”68)
알버트 본 레콥
“중앙 아시아에서 위구르인들의 언어와 문자는 다른 종족들의 도시문명을 더 풍족하게 하는데 기여했다. 그 당시의 유럽과 비교되는 위구르인들은 보다 진보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동투르키스탄에서 발견된 문헌들은 위구르 농부들이 계약서와 법률 전문용어를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얼마나 많은 유럽의 농부들이 그 시대에 그럴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그 당시의 위구르 문명의 정도가 어떠했는가를 보여준다.”69)
라즐로 라소니
“위구르인들은 쿠텐베르크 몇 세기 이전에 책을 인쇄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70)
볼프람 에버허드
“중세시대에 중국 시가, 문학, 극장, 음악 그리고 그림은 위구르인들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71)
러시아 학자 판투소브는 위구르인들이 그들 스스로의 악기를 만들었다고 적고 있는데 그들은 62가지의 서로 다른 종류의 악기들을 가지고 있었고 모든 위구르인들의 집에 두타(dutar)라고 불리우는 악기를 사용하곤 했다고 적고 있다. 72)
중앙 아시아를 일 천년 동안 호령하던 이 위구르의 힘과 명성과 문명은 동투르키스탄에 만주(청)의 침략 이후 그리고 민족주의자들의 통치기간과 특별히 중국의 공산당의 통치기간동안 급속도로 기울어갔다.
-끝-
2) 이 비슷한 시기에 중국의 진시왕은 자신을 ‘황제’라고 칭하였다.
3) 삼국시대 때 위나라에서는 사마 의(司馬懿)가 중심이 되어 촉(촉한)을 격퇴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사마씨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그의 아들 사마 소(司馬昭)는 263년 촉한을 멸망시킨 공적으로 진왕(晉王)에 봉해졌으며, 265년에는 그의 아들 사마 염(司馬炎)이 위제(魏帝)를 강압하여 제위를 양위받고 진(晉)나라(서진)를 세웠다. 이 사람이 서진(西晉)의 무제(武帝)이다. 무제는 280년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재차 중국을 통일했으나 내분과 혼란이 계속되자 후한이래 피 지배계급이던 흉노, 선비, 갈, 저, 강(북방 민족)에 의해 화북지방에서 16국을 세웠다.(5호 16국)
4) 선비족이라고 하지만 사실상은 반은 흉노족이다. 위진 남북조 시대의 선비족의 나라인 북위를 가르킴, 후한서에서는 기원 후 85~91년 사이, 鮮卑는 後漢조정의 부탁을 받고 南흉노, 丁零(정령:시베리아 예니세이강 유역에 살던 유목민족 국가)과 함께 北흉노 토벌에 나서 北흉노를 패퇴시켰다. 이때 10여만 落(락:한 가구를 뜻함)의 北흉노인들이 선비족으로 귀속됐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10여만 落이라면 매 落마다 5인 정도로 계산해도 50~60만명에 이르는 막대한 인구다. 이 인구는 당시 선비족의 인구보다 10만정도 많은 인구다. 즉 선비족의 반은 흉노족이었다는 결론이다.
5) 연연(記記): 북흉노제국(155년)을 멸망시키는데 중국과 연합했던 몽골계의 선비족이 몽골리아 지역에서 흉노의 역할을 담당하지 못함으로해서 몽골리아 지역은 흉노이후 약 250여년 동안 비어 있게 되었다. 이 오랜 침묵을 깨고 나온 강력한 유목민족제국이 400년 경의 연연이다. 역사에는 우연이라고도 불려지는 제국이다. 그들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는 관계로 그들의 역사를 자세하게 알기는 어렵다. 연연은 400년경 사륜이라는 지휘관이 나타나 한북지방의 고차를 멸망시키고 제국을 건설하였다고 전해진다. 북위는 429년 이후 오손과 고차등과 동맹을 맺어 연연과 싸웠다. 448년 열반과의 동맹은 연연에 커다란 타격을 주어 429년 연연의 통치자 달단이 사망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에도 연연은 계속해서 북위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었다.
6) 투르크 종족: Huns, Kazars, Sabirs, Saragurs, Kuturgurs, Barsils, Kok-Turks, Seljuk Turks.
7) 위구르 종족의 표기는 UIGHUR, UYGUR, UIGUR, UIGHUIR, UIGUIR, WEIWUER이다
8) Beijing Review, 24.12.1990
9) Kommunizim Tugi, 12.1.1989, Almaty
10) Estimates of the Eastern Turkestan Refugee Committee in Istanbul.
11) I. Kafesoglu, Turk Dunyasi El Kitabi, Ankara, 1976, p. 725.
12) 유방(劉邦)이 세운 나라
13) 삼국(三國)의 하나 조비(曺丕)가 세웠으며 지금의 황하(黃河) 지역의 각 성(省)과 호북(湖北), 안휘(安徽), 강소(江蘇) 북부, 요령(遶寧) 중부 일대에 있었음
14) 수(隨)의 뒤를 이어 오늘날의 서안(西安)인 (長安)을 수도로 하여 이연(李淵)이 세운 나라
15) 조광윤이 후주(後周))의 선위(禪位)를 받아 세운 왕조
16) Jack Cheng, Sinkiang Story, New York, 1977, p. 96.
17) 위구르라는 명칭은 북위시대에는 고차, 수대는 위흘, 당대는 회흘․회골, 송․원대에는 외오아라 불렸다. 투르크는 언어학적으로 '연맹․군집(uy+gur)'의 의미로 해석된다.
18) Riza Nur, Turk Tarihi, Istanbul 1972, p. 57; Kommunizim Tugi,13.12.1973; Kafesoglu, Ibid. p. 706-707, A. Caferoglu, Eski Turk Sozlugu, Istanbul 1968, p. 8.
19) 중국 사서에는 흉노(匈奴)라고 기입하고 있다. 한서 권94 열전(列傳)제64 흉노전(匈奴傳)에서는 동한(東漢) 시대의 역사가인 반고(班固)는 자신의 역사서에서 흉노족의 잔악함을 묘사하여 "오랑캐들은 매우 탐욕스럽게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는데, 그들의 얼굴은 비록 사람 같으나 성질은 흉악하여 마치 짐승 같다(人面獸心)"라고 기록하였다. 본시 한족(漢族)들이 흉노족들을 멸시하여 쓰던 말이었으나, 후에는 「성질이 잔인(殘忍)하고 흉악(凶惡)한 짐승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20) 위구르 역사를 읽기전 항목에서 설명했지만 다시 언급하면 위진 남북조 시대의 선비족의 나라인 북위를 가르킴, 후한서에서는 기원 후 85~91년 사이, 鮮卑는 後漢조정의 부탁을 받고 南흉노, 丁零(정령:시베리아 예니세이강 유역에 살던 유목민족 국가)과 함께 北흉노 토벌에 나서 北흉노를 패퇴시켰다. 이때 10여만 落(락:한 가구를 뜻함)의 北흉노인들이 선비족으로 귀속됐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10여만 落이라면 매 落마다 5인 정도로 계산해도 50~60만명에 이르는 막대한 인구다. 이 인구는 당시 선비족의 인구보다 10만정도 많은 인구다. 즉 선비족의 반은 흉노족이었다는 결론이다.
21) 돌궐제국
22) Lazlo Rasonyi, Tarihte Turkuk, Ankara 1971, pp. 105, 107.
23) 위구르 종족은 돌궐에 속해 있었지만 여기에서는 따로 언급하고 있다.
24) 카간: 왕, 통지자의 의미
25) Collin Mackarras, The Uighur Empire, Canberra 1968, p. 6
26) 타이족은 7C-8C에 중국 남부, 지금의 운남지방에 대리(大理)국을 세웠다. 그 후 10C-11C에 타이 족은 남조(난짜오)왕국이라는 작은 나라를 세우고 AD 750년 이후에 따리(Tail)에 수도를 정했다. 그러나 북쪽에 있던 한족의 세력이 확대되고 내부적 압박도 가중되면서 타이 족의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었다. 원래의 운남지방에 남아있는 타이 족은 장족의 뿌리가 되었고 나머지 타이 족의 일부가 서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라오스지역, 라오민족의 뿌리가 되었고 다른 일부는 미얀마 북부의 샨족의 뿌리가 되었다, 그리고 일부가 짜오프라야 강변의 짜오프라야 계곡에 정착하여 수코타이 왕조의 뿌리가 되었다. 당시 이 곳을 지배하고 있던 크메르인들은 새로 이주하여온 타이인을 싸얌(Siam)인이라고 불렀다.
27) 9. Collin Mackarras, The Uighur Empire, Canberra 1968, p. 11
28) 11. Ibid., p. 11
29) 두산세계대백과사전: 몽골 북부의 오르콘강(江) 상류 좌안(左岸)에 있는 위구르제국의 수도 유적에 있는 비문이다. 이 수도의 명칭은 오르두 발리크였다. 카라발가순이란 몽골어(語)로 ꡐ흑도(黑都)ꡑ였으나 변하여 ꡐ폐도(廢都)ꡑ를 의미한다. 도성 전체의 면적은 분명치 않지만 그 안에 동서 약 510 m, 남북 약 400 m의 궁전이 있었다. 북아시아의 유목민족이 처음으로 세운 도시이다. 마니교 사원터와 관개용수로도 발견되었으며, 1890년 보의가한(保義可汗:재위 808~821)의 기공비(紀功碑)도 나왔다. 이것이 카라발가순 비인데, 한문 ․투르크문 ․소그드문의 3서체로 씌어 있어 유목 위구르 사회속에 서방문화․중국문화를 채택하여 정착문화화한 웨이우얼의 모습과 국제적인 상인인 소그드인의 문화가 깊이 침투된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 외에도 시네우스 비문:제2대 갈륵가한(葛勒可汗:재위 747~759)의 기공비(紀功碑). 시네우스호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30) 9. Collin Mackarras, The Uighur Empire, Canberra 1968, p. 9
31) 키르키즈스와 카작의 국경지역 고지대., 이들은 카를 루크족의 땅으로 들어간 뒤의 카라한 왕조의 건설에 관계했다고 생각된다.
32) 동부 텐산산맥의 북정(北庭), 언기(焉耆), 고창(高昌)일대를 장악하였으며, 그곳을 거점으로 위구르 왕국을 건설해 동투르키스탄을 점령했다. 이 텐산북록(天山北麓) 초원과 투르판 농경지를 중심으로 하는 <텐산 위구르 왕국(서위구르 왕국)>의 내부에서 언어와 주민의 구성에서 튀르크 문화가 진전되어 종래의 한문화(漢文化)가 아리아계 문화와 혼합된 정착 위구르 문화가 형성 되었다.
33) 14. Kafesoglu, op. cit., p. 726.
34) 6세기 무렵부터 14세기경까지 중국 북서부를 중심으로 활약한 민족. 티베트계 강족(羌族)의 일족으로,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7세기 초부터 토번(吐蕃:티베트)과 칭하이[靑海] 지방의 강국 토욕혼(吐谷渾) 사이에 있는 지역에 거주하였다.
35) 14. Kafesoglu, op. cit., p. 727.
36) 16. Riza Nur, op. cit., p. 358.
37) Von Gabain, Das Leben in uighurischen Koenigreich von Qoco, Wiesbaden 1973, p. 19.
38) 18. Riza Nur, op. cit., p. 348.
39) 20. Fan Wen Lan, A Short History of China, Shanghai 1947, p. 279.
40) 퉁구스족 중에서도 청조(淸朝)를 세우고 그 지배층이 된 남방(南方) 퉁구스족에 속한다. 역사상 나타나 있는 숙신(肅愼) ․읍루(獵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진(女眞) 등은 만주족의 전신(前身) 또는 같은 계통의 종족이다. 형질(形質)은 몽골로이드계로서 키는 비교적 작고 단두형(短頭型)이 특징이다. 만주라는 명칭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문수의 음(音)이 전화한 만주(曼珠→滿住)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41) 21. M.E. Bugra, Chinese Policy, Istanbul 1954, p. 25
42) 22. I.Y Alptekin, Dogu Turkistan Davasi, Istanbul 1973, pp. 126, 127, 128
43) 23. Owen Lattimore, Pivot of Asia, Boston 1950, p. 32
44) 23. Owen Lattimore, Pivot of Asia, Boston 1950, p. 50
45) 25. I.Y Alptekin, op. cit., pp. 154, 175
46) 26. Owen Lattimore, op. cit., p. 223.
47) 27. Albert von Lecoq, Turan, Berlin 1918, p. 452
48) Emel Esin, Islamiyetten Onceki Turk Tarihi, Istanbul 1978, p. 117
49) Ibid.
50) Ibid.
51) 31. Lazlo Rasonyi, op. cit., p 112
52) Ibid.
53) Ibid.
54) 34. Bradford D. Kelleher, Along the Ancient Silk Road, New York 1982.
55)"유쑵 하쓰 아집"은 13,290줄로 쓰여진 "쿠탇구 빌릭(아는 것은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이라는 "다쓰탄(시로 쓰여진 큰 책)"을 쓴다. "유쑵 하쓰 아집"은 이 다쓰탄에서 아는 것이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이론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또, 나라를 다스리는 법과 관습을 아주 정확하면서도 작은 부분까지 세밀하게 기록했다.
56) 위대한 학자 "메흐뭍 케쉬케르"는 "위구르 돌궐"어와 "아랍어"를 비교한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작품인 "돌궐어 대 사전(Divani lugatit turk)"을 편찬한다. 이 작품에는 그 당시의 세계지도가 각종 자료들과 함께 그려져 있다. 이 지도에 한국, 일본 등의 나라가 정확하게 나타나 있다.
57) 36. Ismet Parmaksiz, Genel Tarih, Ankara 1976, p. 33
58) Denis Sinor, Inner Asia, Bloomington 1969, p. 330
59) Peter Hopkirk, Foreign Devils on the Silk Road, London, 1980, p. 25
60) Collin Mackarras, op. cit., p. 7
61) Ibid, p. 8
62) 41. S.M. Kashgarli, Akademi Mecmuasi, Istanbul, Oct. 1985, No. 4
63) Al Abudi, Shark-ul Vasta, 12.8.1983
64) Shuyl Unver, Uygurlarda Tababet, Istanbul 1936. pp. 4,5,6.
65) Yakup Bugra, Tercuman, 6.6.1984
66) Bahaeddin Ogel, Turk Kulturunun Gelisme Caglari, Istanbul 1988, p. 206
67) Along the Ancient Silk Routes: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April 3 - June 20, 1982.
68) Caferoglu, op. cit. p. 1
69) Suheyl Unver, op. cit., pp. 4-6
70) Lazlo Rasonyi,, op. cit., pp. 105-107.
71) Wolfram Eberhard, Cin Tarihi, Istanbul 1947, p. 116.
72) G. Sadvakasov, Uygur Edebiyatining Kiska Tarihi, Almaty, 1983, p.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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