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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에 관하여/구약 핵심공부

유다 왕국 단독시대

2001/6/23(토) 19:54
27. 유다 왕국 단독 시대  

 

1. 히스기야(주전 715-686년, 대하 29:1-32:33, 왕하 18:1-20:21, 사 36:1-38:22): 반 앗수르 정책과 개혁운동

   
부왕 아하스가 남긴 연약한 정권을 인계 받은 히스기야 왕은 예루살렘에서 29년을 치리 했다(대하 29:1, 왕하 18:2). 그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였고 모세의 율법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역대기의 저자는 그를 가리켜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고 기록해 주고 있다. 그는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는 반 앗수르 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형통케 하시고 블레셋을 정복할 수 있게 해 주셨다.


 1) 종교 개혁 운동(대하 29:3-31:21)

   히스기야 왕은 위에 오르자 곧 그의 부왕인 아하스가 폐쇄하여 버렸던 성전의 문을 다시 열고 성전을 정결케 하는 데 힘썼다. 그는 유다 왕국이 하나님 앞에 돌아온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성전의 숙청이 끝난 후에 모세의 법을 따라 번제와 화목제의 큰제사를 드렸으며, 성대하게 유월절을 지킬 것을 명하였다(대하 30:1-27). 이때에 그는 북쪽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초청장을 보내어 예루살렘에서 함께 절기를 지키자고 하였으며(대하 30:1), 이때에 북쪽의 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였다(30:18). 이때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우 기뻐하였고 솔로몬 이후에 이스라엘에게 처음 있는 큰 기쁨이 있었다. 그들은 감격한 나머지 7일간 절기를 지키고 나서 또 다시 7일간 절기를 지켰다(대하 30:23). 히스기야 왕은 모든 산당들을 훼파했을 뿐만이 아니라, 모세 때부터 있어오던 놋뱀(민 21:8,9)까지도 부수고 그것을 "느후사라단"(놋조각)이라고 하였다.


 2) 앗수르 왕 사르곤과 히스기야(사 20:1-6)

   히스기야는 처음부터 그의 부왕과는 달리 반 앗수르 적이었다. 그러나 사마리아를 점령한 사르곤이 살아 있을 동안에 앗수르에게 대항하지는 않았다. 사르곤 왕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끌어가고 다른 백성들을 그 곳에 이주케 한 후에 강력한 통치권을 행사하였으며, 주전 711년에 아스돗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블레셋에 출병하여 그것을 진압해버렸다. 그때에 애굽은 아스돗을 돕기로 약속했었으나 실패하였다. 이 때 히스기야 왕은 아스돗을 도와야 할 입장에 있었으나, 지혜롭게도 그것을 피하여 사르곤의 공격을 면하게 되었는데,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권면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사 20:1-6)


 3) 산헤립 왕의 침략(대하 32:1-21, 왕하 18:13-19:37, 사 36-37장)
   사르곤이 죽게되자 그를 이어 그의 아들 산헤립이 앗수르 왕이 되었으며, 사르곤이 죽자 앗수르에 예속되었던 나라들이 하나 둘씩 독립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애굽의 후원을 얻어 두로와 아스글론과 에글론과 더불어 반 앗수르 동맹을 맺고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대하 32:5). 그는 특별히 앗수르군이 공격해 올 때에 물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려고 물을 막아 실로암 굴을 파서 물을 성내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앗수르왕 산헤립은 즉시 예루살렘을 공격해왔다. 그는 라기스를 점령하고 그 곳에 본부를 둔 후에 부하 장군인 랍사개를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히스기야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이때 이미 주변국들은 모두 다 앗수르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히스기야 왕은 라기스에 있는 산헤립에게 급히 화해를 요청하였으며, 은 3백과 금 30달란트와 함께 성전과 왕궁에 있는 은과 금을 모두 거두어 보냈다(왕하 18:13-16, 사 36:4-22). 그러나 재물로도 산헤립을 회유할 수는 없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히스기야에게 보내셔서 그에게 용기를 주고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지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곧 앗수르왕을 물러가게 하실 것이라고 예고해 주셨다. 그 날밤 이사야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심판이 앗수르 군에게 임하여 앗수르 군사 18만 5천명이 몰사했고 마침내 산헤립은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북방 이스라엘은 아모스와 호세아를 배척하여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걸었지만, 유다는 히스기야가 선지자 이사야의 말을 따라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인하여 그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다.


 4) 히스기야의 병과 바벨론 왕의 사신(대하 32:22-31, 왕하 20장, 사 38-39장)

  가. 병에 걸린 히스기야(왕하 20:1-7, 대하 32:24-26, 사 38장)
   히스기야는 전쟁 중에 병을 얻었으나 그의 간절한 기도는 그의 생명을 15년간 연장하게 하였으며,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 구원의 표징으로서 일영표가 10도를 뒤로 물러가게 하는 이적을 보여주셨다.(왕하 20:9-11)

  나. 히스기야의 실수
   그러나 히스기야 왕은 병에서 나은 후에 큰 실수를 범하였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은 히스기야의 병이 낫다는 소식을 듣고 위문의 사신을 보내었다. 왜냐하면 바벨론이 앗수르를 물리친 후에 유다와 동맹을 맺고 앗수르를 공격하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교만하게도 바벨론 사신에게 자기의 모든 보물들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부강함을 자랑했다(왕하 20:13). 이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서 그를 책망하시고 장차 왕궁의 모든 보물들이 바벨론으로 옮겨지게 될 것이라고 예고해 주셨다.



2. 므낫세(주전 686-642년, 대하 33:2-10, 왕하 21:2-16)
   므낫세는 12살 때에 부왕 히스기야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 후 그는 55년간을 예루살렘에서 통치하면서 남북 이스라엘과 유다를 통틀어 가장 오래 동안 나라를 통치한 왕이 되었다.


 1) 종교적 부패(대하 32:2-10, 왕하 21:2-16)

   므낫세는 히스기야와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그는 부왕이 헐어버린 산당들을 다시 짓고 바알의 제단을 다시 세웠으며 아세라 목상과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하였다(왕하 21:6, 대하 33:3-5). 그리고 몰렉에게 아들을 번제로 드려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였으며, 점을 치고 사술을 행할 뿐 아니라(왕하 21:6, 대하 33:6),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하였다.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므낫세가 선지자 이사야를 통속에 넣어서 톱으로 켜서 죽였다고 한다. 그는 앗수르의 호의를 얻기 위하여 앗수르의 종교와 풍속을 따랐으나, 오히려 앗수르에게 완전히 예속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2) 하나님의 징계와 회개(대하 33:11-20)

   결국 그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앗수르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포로에서 돌아온 그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기도하였고, 모든 우상들을 제거하였으며, 여호와의 단을 중수하고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섬길 것을 지시하기도 하였다.(대하 33:12-19)



3. 아몬(주전 642-640년, 대하 33:21-25, 왕하 21:19-26)
   므낫세의 뒤를 이어 아몬이 왕위에 올랐으나, 그의 2년간의 통치는 그 부왕의 타락한 정치를 재현한 데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그 부왕인 므낫세는 말기에 회개라도 하였지만 아몬은 마지막까지 회개하지 않았다. 마침내 아몬은 하나님의 징벌로 인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백성들이 일어나 아몬을 죽인 자들을 다 처형하고 그 대신 8살밖에 되지 않는 그 아들 요시야를 왕으로 삼았다.




E. 신흥 바벨론과 유다 왕국의 멸망(주전 640-586년, 대하 34-36장, 왕하 22-25장)
   요시야 왕을 계기로 하여 유다 왕국은 드디어 그 마지막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제는 앗수르의 세력도 매우 약화되었다. 앗수바니발 왕의 뒤를 이은 왕들은 그렇게 유능하지 못했으며, 앗수르는 그 수도 니느웨가 멸망할 때까지(주전 612년) 계속해서 약해져갔다. 그러자 신흥 바벨론은 이때를 이용하여 새로운 국제 질서의 주도권을 잡고 일어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요시야 왕이 통치할 시기에는 앗수르의 세력은 이미 약해져 있었으며, 바벨론이 그 세력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요시야 때의 유다는 비교적 평화로운 중에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시야 왕의 뒤를 이은 왕들은 성장해 가는 바벨론에게 계속하여 시달리다가 결국 주전 586년에 멸망을 당하고 만다.


1. 요시야(주전 640-609년, 대하 34-35장, 왕하 22:1-23:30)/ 유다 왕국 최후의 개혁/
   요시야는 8살의 어린 나이로 아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의 배후에는 경건한 신앙의 인물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요시야 왕을 충성으로 섬겼다. 그의 치리기간 31년은 참으로 크게 부흥하고 발전하던 시기로, 유다 왕국 창건이래 가장 행복했던 때였다. 그는 남방 유다만이 아니라 북방 이스라엘까지 온 이스라엘의 우상을 제거했다.

 1) 개혁 운동(대하 34:8-35, 왕하 22:3-23:25)
   요시야 왕이 위에 오른지 8년, 즉 그의 나이 16세 때에 그는 벌써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왕위에 있은 지 12년, 즉 그의 나이 20세 때에는 벌써 예루살렘과 유다와 북방 여러 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우상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정화 운동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려 6년의 세월이 걸렸다(대하 34:1-8). 이것은 유다 왕국의 역사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는데, 이러한 개혁운동은 성전을 수리하다가 발견한 율법 책으로 인하여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제사장 힐기야는 그 책을 서기관에게 주어 그것을 요시야 왕 앞에서 읽게 하였으며, 이 율법 책의 내용을 들은 요시야 왕은 그 자리에서 자기 옷을 찢으면서 회개하였고(대하 34:19), 그는 온 백성들과 함께 여호와 앞에 언약을 세워 진정으로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서약을 했다(29-33). 물론 이러한 그의 신앙의 큰 부흥은 성경을 발견하기 전에 성전을 수리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 이미 시작이 되었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발견된 율법 책을 읽으면서 더욱 더 열조의 죄를 깨닫게 되었고, 그는 즉시로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서약을 했던 것이다.

   요시야 왕의 개혁은 과거 히스기야 왕 때보다도 더 철저했다(왕하 23:13). 요시야 왕의 철저한 개혁을 통하여 남방 유다에서는 솔로몬 왕 때부터 있었던 모든 우상과, 산당들이 제거되었으며, 또한 북방 이스라엘에서도 여로보암 때에 세웠던 모든 우상의 제단들을 훼파해버렸다. 그러나 우상의 제거와 함께 그의 신앙운동이 가장 절정을 이룬 것은 모세의 율법을 따라 온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유월절을 지킨 때였다(대하 35:1-19, 왕하 23:21-23). 구약 성경은 사사 시대 이후 요시야 왕 때처럼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서 유월절을 크게 지킨 적은 없었다고 기록해 주고 있다(대하 35:18, 왕하 23:22).

 * 참고: 요시야의 종교 개혁의 영향
   요시야의 종교 개혁은 그 당시 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요시야의 종교 개혁은 말씀과 언약에 대하여 보다 더 진지한 태도를 가지게 하였다. 흔히 정부에 의해 주도되고 백성들의 호응에 의해 추진되는 개혁 운동은 불안정한 기초 위에서 진행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요시야의 종교 개혁은 왕이 직접 개혁을 주도하는 정치적인 상황에서 진행되었으며, 외국의 속박에서 벗어나 보려는 국가주의가 이에 박차를 가해 주었다.

   예레미야는 한 때 이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개혁이 점차 형식적으로 흐르게 되자 후에 그는 이에 대하여 맹렬하게 공격을 하였다. 더우기 요시야는 백성들로 하여금 예배를 예루살렘에서만 드릴 수 있게 하였는데,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그들 가운데 임재하시기 때문에 자신들의 안전이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렘 4:4,5, 7:4). 그러나 순종하지 않는 백성들에게 안전이란 있을 수 없었다. 어쨌든 예레미야는 요시야의 통치방식이 매우 훌륭했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렘 22:15-16).
   신명기의 근본적인 요지는 여호와를 신실히 경외하는 자에게는 보호와 축복이, 그리고 경외하지 않는 자에게는 고통과 불행이 주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이 원리는 국가의 번영을 비롯하여 사회의 전반적인 면에 적용되었다. 특히 신명기는 불순종할 때는 그들의 땅을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해 주고 있다(4:25-31, 8:1920, 11;1-17, 28:58-68). 요시야의 종교 개혁이 있고 난 후 이 원리에 대해 의아심을 품을 만한 고통스러운 사건들이 계속 발생하였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주전 538년에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온 이후에 당연히 모든 예배는 예루살렘에서 드려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바로 이 무렵에 동물들을 팔고 돈을 바꾸는 자들이 등장하였는데, 그들은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라고 간주된 장소(예루살렘)로 예배 드리기 위해 멀리서 오는 순레자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었다.


 2) 요시야 말기의 국제 정세와 므깃도 전쟁(대하 35:20-27, 왕하 23:28-30)
   이미 논술한 바와 같이 앗수바니팔이 죽은 후에(주전663년) 앗수르는 계속하여 유약한 자들이 그 뒤를 이었으므로 국세는 점점 쇠약해져만 갔다. 이처럼 약해진 앗수르는 바벨론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메데까지 바벨론과 연합하여 앗수르를 공격했다. 그리하여 주전 612년에 바벨론과 메데의 연합군은 앗수르의 옛 수도였던 앗수르를 점령했고, 또 2년 후에는 니느웨를 포위하였고, 그 성은 포위된지 3개월만에 점령되었다. 이러한 니느웨 성에 대한 멸망은 이미 선지자 나훔에 의하여 20년 전에 예고된 바 있었다(나훔 3:1-7, 16-19)

   그러나 앗수르는 다시 대오를 정비하여 서북부 도성인 하란에서 전쟁을 개시했으나, 주전 610년에 하란은 바벨론에게 점령을 당하고 말았다. 앗수르는 다음해인 주전 609년에 또 다시 하란 탈환 전쟁을 벌였으나 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때에 애굽의 바로 느고가 급속히 성장하는 바벨론을 견제하기 위하여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을 치려고 출정하였다. 이때에 요시야 왕은 이스라엘이 독립하기 위해서는 앗수르가 멸망해야 한다고 판단을 하고, 바벨론을 치려고 진군하는 애굽의 군대를 막으려 하였다. 요시야는 느고의 출정을 막기 위해 전쟁에 나갔다가 므깃도에서 전사하게 되었으나(왕하 23:29-30, 대하 35:23-24), 이 일로 인하여 애굽은 결국 앗수르를 돕지 못하게 되고, 하란은 바벨론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2. 여호아하스(주전 609년, 대하 36:1-4, 왕하 23:31-33)/애굽 왕에게 페위당함/
   요시야 왕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엘리야김, 여호아하스, 시드기야). 요시야 왕이 므깃도 전투로 전사한 후 백성들은 그의 둘째 아들인 여호아하스로 가장 먼저 왕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 에 불만을 가진 첫째 아들인 엘리야김이 자기 아버지인 요시야를 죽인 애굽의 바로 느고와 결탁하여 자기 동생인 여호아하스를 제거하였다. 그리하여 애굽의 바로 느고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여호아하스를 제거하였으며, 그 대신 엘리야김을 왕으로 세우고 그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고치게 하였다. 그리하여 여호아하스는 왕이 된지 3개월만에 느고에 의해 왕의 자리에서 폐위되었으며(대하 36:3), 애굽에 포로로 잡혀가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왕하 23:34). 그는 예레미야가 미리 예언한대로 죽음을 당했다(렘 23:34).

   그때에 애굽 왕 바로 느고는 유다를 속국으로 삼고, 은 100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배상금으로 내게 하였으며, 자기가 세운 여호야김 왕에게도 계속하여 은과 금을 조공으로 내도록 지시하였다. 여호야김은 이 조공을 내기 위하여 국민 각 사람의 힘대로 액수를 정하고 은과 금을 징수하였다(왕하 23:32). 여호아하스 왕이나 여호야김은 모두 심히 악한 행위를 보였다(왕하 23:32). 특별히 후일에 에스겔 선지자는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을 가리켜 "사람을 움키는 사자새끼"라고 하였다(겔 19:5-9).



3. 여호야김(주전 609-597년, 대하 36:4-8, 왕하 23:34-24:7, 렘 22:13-19, 렘 36:1-32):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신 두루마리를 태움

 1) 여호야김의 악정
   여호아하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여호야김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바로 느고의 꼭두각시에 불과하였으며, 그는 애굽에 바칠 많은 조공을 조달하기 위하여 백성들을 괴롭게 하였다. 또한 그는 사치한 생활을 하기 위해 백성들을 노력 동원시켜 더 큰 궁전을 지었고 백성들을 압박하여 많은 양민들의 피를 흘렸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와 하박국을 통하여 그의 이런 죄악들을 정죄하였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갈대아 사람들을 통하여 그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렘 22:18, 합 1:3-4).

   여호야김은 많은 의인들의 피를 흘렸다. 그는 선지자 우리야를 죽였으며(렘 26:20-23), 예레미야도 죽이려 하였으나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으로 성공하지 못했다(렘 26:24, 36:26). 그는 특히 예레미야가 받은 계시의 말씀을 불에 던져 태워버리기도 하였다(렘 36:23).

 2) 갈그미스 전투와 그 후의 여호야김
   므깃도 전쟁(주전 609년)에서 유다의 요시야 왕을 이긴 애굽의 바로느고는 하란을 점령하지는 못했지만 수리아 지역과 팔레스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러나 바벨론 왕이 병석에 누워있을 때에 그 맏아들인 느부갓네살이 군대를 이끌고 유브라테스 강을 건너서 애굽을 수리아의 북부 지방인 갈그미스에서 격퇴시켰다. 이때 애굽 군은 하맛으로 후퇴하여 대오를 다시 정비하려 했으나, 추격하는 느부갓네살의 군대에 의해 전멸되고 말았다. 이 승리로 인해 애굽은 크게 약해졌고, 바벨론은 세계를 제패하는 나라가 되었다. 바벨론은 유다의 왕인 여호야김에게 애굽 대신에 바벨론에게 조공을 드리게 하였다.

   그런데 3년 후인 주전 601년에 느부갓네살은 애굽이 다시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애굽을 다시 한번 공격하였으나, 이 전쟁에서는 양편이 모두 수많은 전사자를 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느부갓네살은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여호야김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느부갓네살을 배반하였다(왕하 24:1). 이때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야김 왕에게 가서 바벨론을 배반하지 말라고 권면하였으나 여호야김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렘 27:1-15). 왜냐하면 그는 어려움을 당할 때에 애굽이 자기를 도와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느부갓네살은 모압과 암몬인들로 보강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여호야김을 쳤으며, 갈대아 부대들을 보내어 유다를 다스리게 하였다(왕하 24:2, 렘 35:11). 기록에 의하면 바벨론의 주부대는 주전 598년 12월에 예루살렘에 진입했으나, 그 전에 벌써 여호야김은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아마도 바벨론의 환심을 사기 위한 한 신하가 그를 비밀리에 살해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여호야김은 11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많은 죄를 저질렀으며(왕하 24:3,4), 애굽을 섬기다가 또 바벨론을 섬기고 그리고 또 다시 바벨론을 배반하는 등의 불안정한 정책을 펴다가 마침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렘 22:18).



4. 여호야긴(주전 597년, 대하 36:9-10, 왕하 24:8-16): 유다의 첫 번째 포로
   주전 598년 12월에 여호야김의 뒤를 이어 여호야긴이 왕이 되었다(왕하 24:6). 그러나 그는 불과 3개월 10일 동안 통치할 수 있었다(대하 36:9). 그러나 주전 597년 3월 10일에 느부갓네살 왕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왔다. 이때에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끌어가고 그 대신 그의 숙부인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다. 그때에 그와 더불어 많은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다(왕하 24:10-17). 바벨론 군은 이때에 에스겔 선지자를 비롯하여 왕과 왕의 어머니와 아내와 내시와 유력한 사람들을 끌어갔으며, 이때 용사 7000인과 기술자 1000명을 사로잡아 가고 유대를 폐허로 만들었다(왕하 24:15). 그러나 후에 포로로 잡혀갔던 여호야긴은 감옥에서 풀려 나와 후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는 거기에서 다른 나라에서 잡혀 온 왕들보다 높임을 받았으며, 일평생을 바벨론 왕궁에서 먹으며 일용할 모든 것을 종신토록 공급받았다(왕하 25:27-30). (아마 다니엘과 같은 사람들의 간청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5. 시드기야
(주전 597-586년, 대하 36:11-21, 왕하 24:17-25:21, 렘 39:1-10): 왕국멸망
   
여호야긴이 바벨론으로 사로 잡혀 간 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그의 숙부인 시드기야를 세워 왕으로 삼고 그 이름을 시드기야(주전 597-586년)라고 불렀다(왕하 24:17). 그러나 그가 비록 유다왕국의 왕이 되기는 하였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그는 섭정자의 위치에 있었다. 왜냐하면 바벨론 왕은 포로로 잡아간 여호야긴을 그대로 유다 왕으로 대우했으며, 유다 백성들도 시드기야를 그들의 왕으로 대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왕하 25:27, 렘 52:31). 그러므로 그의 위치는 매우 약했다. 그리고 그의 통치 능력도 매우 부족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반 바벨론 파와 친 애굽 파의 압력을 받았으며 이를 못 이겨 마침내 바벨론을 배반하게 되었다(왕하 24:20).


 1) 시드기야의 반 바벨론 정책과 예루살렘의 함락(왕하 24:20-25, 대하 36:13-21)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을 배반하게 된 것은 그가 애굽의 원조를 받아 바벨론을 막아야 한다는 압력을 받았으며, 당시의 국제 정세와 거짓 선지자들의 잘못된 충동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 에돔과 모압과 암몬, 그리고 베니게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새로운 반 바벨론 동맹이 이루어졌고(렘 27:1-3, 겔21:18-23, 21:8 참고), 유다도 여기에 가담하여 달라고 요청하는 외국의 사신들이 시드기야를 찾아왔다(렘 27:3). 물론 궁중의 반 바벨론 파의 수뇌들이 시드기야에게 그것을 강권하였다. 또한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지켜 주실 것이며, 바벨론에 잡혀간 포로들은 2년이 지나기 전에 돌아오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멍에를 꺽어버리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렘 28:1-12). 이렇게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백성들에게 "평안하다"고 외쳐댔다(렘 7:4).
   그리하여 시드기야는 바벨론을 배반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 제 9년인 주전 588년에 유다를 공격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였고, 2년 후인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말았다. 느부갓네살은 도망하는 시드기야 왕을 잡아 그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이고, 그의 두 눈을 뽑아서 결박한 채로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서 죽는 날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다(렘 52:9-11, 왕하 25:6,7). 이렇게 되어 마침내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은 함락되었으며, 성전도 파괴되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에 의해 남은 백성들도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었으며, 오직 비천한 자들만이 그 땅에 남아있게 되었다(렘 25:8).

   예레미야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들이 곧 유다가 회복될 것이라고 거짓 예언을 하는 것을 보고, 끌려간 포로들에게 그 곳에 정착해 살며 그 성이 평안하기를 구하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다시 돌아오게 되기까지는 아직도 70년이 지나야 하기 때문이었다(렘 29:10). 그리고 에스겔 선지자도 포로된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같은 소망의 예언을 하였다(겔 21:27).


 2) 예루살렘 함락과 라기스의 편지
   예루살렘이 바벨론 군에게 포위되어 있을 때에 그들은 애굽 군이 와서 자신들을 도와줄 것이라는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애굽 군이 다시 퇴각되어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렘 37:7). 당시에 유다의 모든 성읍들은 다 망하였고, 예루살렘과 아세가와 라기스만이 남아 있었는데,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설명해 주는 "라기스의 편지"가 남아 있어서 당시의 유다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3) 유다 왕국의 최후(왕하 25:22-26, 대하 36:17-21, 렘 40-43장)

   바벨론 왕은 유다 백성들을 사로잡아 가고 그 남은 자들을 위하여 그달리야를 총독으로 삼았다. 그는 한때 예레미야를 숨겨주었던 아히감의 아들로서, 그의 조부인 사반은 요시야 왕의 개혁 당시에 서기관으로 있었다(왕하 22:3). 흩어진 유대인들이 그달리야가 총독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미스바로 모여들자, 그는 그들에게 바벨론을 섬기면서 살 것을 권면하였다(렘 40:9-10).

   그러나 이때에 돌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에돔이나 모압과 암몬으로 망명해갔던 사람들로서 대부분 강경한 반 바벨론파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달리야가 친 바벨론 적인 발언을 듣고 분노하여 그 두목인 이스마엘이 그달리야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죽여버리고, 바벨론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자신은 애굽으로 도망하였으며, 이때에 예레미야도 강제로 애굽으로 갔다.

   이후의 유다의 역사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더 황폐해지고 그 지역은 사마리아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지 약 1500년 후에 그의 후손들은 이제 자유인이 아닌 포로로서 다시 옛 고토인 갈대아 땅으로 끌려가게 되었고, 또 소수의 일부는 많은 수난을 겪으며 출애굽 했던 그 땅으로 다시 찾아가게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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