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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에 관하여/고대 문명

[스크랩] 메소포타미아 역사에서 로마역사 까지

메소포타미아 역사에서 로마역사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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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소포타미아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크게 수메르, 아카드, 앗시리아로 나뉘어 진다. 메소포타미아는 그리 스 말로 mesos과 potamos(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두 강 사이의 땅'이란 뜻으로 비옥한 반달 모양의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번영한 고대 문명이다. 바빌로니아·아시리아 문명을 가리키나 넓게는 서남 아시아 전체의 고대 문명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지리적 요건 때문에 외부와의 교섭이 빈번하여 정치·문화적 색채가 복잡하였다. 폐쇄적인 이집트 문명과는 달리 두 강 유역은 항상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국가의 흥망과 민족의 교체가 극심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 전개된 문화는 개방적, 능동적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주위의 문화적 파급과 후세의 영향을 고려해 볼 때 세계사적 의의가 크다.

 나일강 유역에서 번영한 이집트 문명, 인더스강 유역의 인더스 문명, 황하강(黃河) 유역의 황허 문명 등과 더불어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의 하나로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문명을 가리킨다. 그러나 넓게는 서남아시아 전체의 고대문명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셈족에 속하는 아카드인(人) ·아무르인 ·아시리아인 ·칼데아인 등과 인도-유럽 인종에 속하는 히타이트인 ·카사이트인 ·메디아인 ·페르시아인 및 수메르인 ·엘람인 등이 활약하였으며, 공통의 문자로서 설형문자가 사용되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18세기 후반에 탐험가와 여행가들이 이 지방에 대하여 보고를 하게 되면서 관심을 끌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조각품의 일부 또는 명문이 들어 있는 벽돌을 가지고 돌아온 사람도 있었다. 또, 구약성서에 실린 유명한 ‘바벨탑’이나 헤로도토스의 《역사》 등 고전시대의 작품을 통하여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졌다. 그런데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해명은 아시리아학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2. 메소포타미아의 역사

 

B.C 5000년경: 신석기 시대를 벗어나 채도문화가 발달

B.C4000년경: 수메르인들이 정착하여 청동기 문화가 발전하게 되는데 이들이 메소포타미아문명을 발생시킴

B.C 3000년경: UR, Lagash. Umma, Nippur, Kish같은 도시들이 발생

B.C 24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북쪽지역에 살던 아카드인(셈족)들이 주변국가를 정복하여 통일왕국을 세움. 이로서 수메르인들은 셈족의 지배를 받음

B.C 21000년경: 수메르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셈족으로 몰아내고 Dung가 왕이 되어 다스림

B.C 1900년경: Gutr족의 침입을 받아 혼란상태가 됨

B.C 1800년경: Amor인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정복하고 나라를 세움-바빌 로니아 왕국 이 시대에 함무라비왕이 바빌론市에 수도를 정하고, 성문법을 제정하여 국가의 발전에 기틀을 세웠으나, 고바빌로니아는 B.C 1600년경 카시트에 의해 멸망됨

B.C 1300년경: 앗시리아 인들이 세계전역을 통일하여 세계 대제국을 세움. 이들의 철저한 정복정치를 통해 각 지역의 상황을 감시하여 반란의 기미가 있으면 잔악하게 진압하여 속국들을 통치하였다.

B.C 625년경: 칼데아인들이 앗시리아인을 멸망시키고 바빌로니아 왕국을 계승하며 신바빌로니아 왕국을 세움

B.C 550년경: 페르시아인이 침입하여 바빌로니아왕국을 멸망시키고 페르시아 왕국을 세움. 소아시아, 이집트까지 정복하고 강력한 통치국가를 유지하였다.

B.C 330년경: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하고 헬레니즘 세계를 건설하였다.

 

메소포타미아는 여러 민족이 침략하고 지배하는 동안 여러 왕조의 교체를 통해 복합적인 문화가 형성되었고, 경제, 과학, 법 등 시대별로 각기 독특한 체계를 이룩하였다.

 

 

3.메소포타미아의 변천

 

1) 수메르 시대

 

 수메르인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동부 산악 지대에 살다가 메소포타미아 남부로 이동하였다. 그들은 원래 거주지에 있을 때부터 어느 정도 문명 단계에 들어서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는 금속과 돌을 함께 사용하는 문명이 알루바이드, 우르크 등과 같은 지역을 중심으로 상당히 발달해 있었다.

 여기에 수메르인들이 나타난 것은 B.C3500년경이었다.

정치는  왕은 신의 대리자로서 최고의 사제가 되었으며, 신권 정치가 실시되었다. 신관, 관료, 전사 등이 지배 계층이었다. 지구라트라는 큰 탑을 가진 신전이 국가의 중심이 되었다. 경제는 교역이 일어남에 따라 상인이나 공인도 나타나게 되었다. 법전은 세계 최고의 성문법인 수메르 법이 1947년부터 발굴되었다.

 

2) 아카드 시대

 

 B.C 2350년경 아카드 인이 수메르 인을 정복하고 처음으로 통일 왕국을 세웠으나 오래 지탱하지 못하였다.

 

3) 아무르 시대

 

 아무르 인들이 다시 이 지역을 통일하고 바빌론에 도읍지를 정하고 바빌로니아 왕국을 건설하였다. 함무라비 대왕은 B.C 18세기경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하고 '함무라비 법전'을 편찬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였다.

 

4) 인도 유럽 어족의 침입

 

 B.C 16세기에 오리엔트 최초의 철기 사용자인 히타이트 인이 침입해 들어와 바빌로니아 왕국을 위협한 후 카사이트 인이 진출하여 바빌로니아를 지배하였다. 그 뒤 이 지역은 오랫동안 분열과 혼란이 계속되다가 아시아아에 의해 통일되었다. (B.C 667)

 

 

4. 메소포타미아의 문화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농업상의 필요에서 역법(달력)·천문학·수학 등의 실용적인 문화가 발달하였다. 그런데 이 곳 사람들은 이집트인과는 달리 달의 운행을 바탕으로 한 태음력을 만들었다. 이 태음력은 1년 12개월, 1개월 30일로 나누고 3, 4년에 한 번씩 윤달을 둔 것으로, 후세에 널리 사용되었다. 천문학도 발달하여 일식·월식이 있는 날을 미리 알았다.

 한편 60진법(12진법)에 따른 수학이 발달하여 곱하기·나누기는 물론, 분수·대분수까지 썼다. 그들은 시간이나 각도를 재는 데에도 60진법을 응용하여 1시간을 60분, 1분을 60초, 원의 각도를 360도로 나누었다. 7일을 1주일로 정하고, 1일을 24시간으로 나눈 것도 그들에게서 비롯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도 다신교를 믿었으나, 이집트인과 같은 내세 나상은 없었고, 현세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 그쳤다. 또 그들은 해·달·별 등의 천체가 인간의 운명을 지배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천체의 움직임을 관측함으로써 앞날의 예견하려는 점성술이 크게 성행하였다. 이 점성술은 천문학과 역법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1) 메소포타미아 사회

 

 메소포타미아는 셈족의 문명이다. 특히, 수메르인의 문명이 토대가 되었고 아카드·아무르 인들의 문명이 가미되었다. 화폐는 쓰이지 않아서 물물 교환이 이루어졌다.

 

2) 종교

 

 현세적 다신교로서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점성술도 현세의 행복을 기원하는 의미로서 발전하였다.

 

3) 과학

 

 점성술, 천문학, 태음력, 7요제, 60진법, 24시간, 360도 등이 나타났다.  

 

4) 문자

 

 수메르 인은 쐐기 문자(설형문자)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점토판에 갈대로 찍어 썼는데 표음 문자로 발전했다. 페니키아 인들이 사용한 문자는 오늘날 알파벳의 시조가 되었다.

(쐐기 문자는 점토판에 새겨진 이 글자들은 가로, 세로로 쐐기를 나란히 놓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쐐기 문자라 하는데, 매우 딱딱하고 익히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나 오리엔트 지역 대부분의 국가들은 쐐기 문자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중동 지역의 역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

 

5) 건축

 

 궁전과 신전 건축에 아치와 둥근 천장이 사용되었다. 이 지역은 돌이 매우 귀했다. 그래서 수메르인들은 벽돌로 건축하였으며 그 벽돌을 이용하여 물을 끌어오기 위한 커다란 수로도 건설하였다.

 

6) 미술

 

 우루크에서 발굴된 여성 두상과  ‘하얀 신전’은 거의 같은 시대의 대리석으로 된 상으로, 감성적인 표현이 뛰어나다. 또 아스마르의 아브신전에서 발굴된 일군의 신상은 이보다 5세기 정도 뒤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같은 대리석으로 된 것으로 원뿔과 원통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기하학적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들 예배상의 거대한 눈에는 채색된 동공을 끼워 넣었으며, 이는 예배자와 눈에 의한 영혼의 교신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목재와 금박 등을 소재로 만든 조각상이나 부조는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만들어졌다. 즉, 우르 제1·2왕조의 왕묘군에서 발굴되어 현재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떨기나무에 뒷다리로 선 숫양은 그 좋은 예이다.

 이 밖에도 같은 시대 우르왕묘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황금의 투구와 식기, 조가비를 세공하여 장식한 하프, 그리고 유명한 우르의 스탠더드 등이 미술적 일품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7) 문학

 

 수메르인의 문학은 주로 신화를 토대로 한 것이었다. 여러 신화와 전설들은 각 도시의 건설자, 유명한 왕들에 관한 것이었다. 이 중 유명한 것이 우루크시의 왕이었던 '길가메쉬'에 관한 서사시이다.

 

8) 자연 환경

 

 이집트가 건조하면서도 상쾌한 날씨라면,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여름에는 무척 덥고, 습도도 다소 높은 데다가 열대성 질병이 흔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양에서 불어오는 타는 듯한 바람은, 비록 사람의 기운을 빼앗아가긴 하지만 대추야자가 열매를 맺는 계절에 맞춰 불어 풍성한 수확을 가능하게 했다. 더욱이 북부 산악 지역의 눈 녹은 물은 바빌로니아 평원에 매년 홍수를 가져왔는데, 그 결과 토양은 물기를 머금게 되었고 대단히 비옥한 진흙층이 그 위를 덮게 되었다.

 강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홍수가 물러간 지 몇 주일 뒤에는 땅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므로 비옥한 토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관개가 필수적이어서, 이 지역에서는 오래 전부터 정교한 댐과 관개용 운하가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에 이미 구축되었다.  

 

 

5.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지 - 바빌론

 

 바빌로니아라는 이름의 왕국이 들어선 것은 기원전 1830년경으로 셈족 계통의 아모리인들이 바빌론시를 중심으로 ‘고 바빌로니아’로 불리는 제1왕조를 세우면서부터다. 이들의 수도 바빌론은 이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정치와 상업의 중심지가 된다.

바빌론은 수많은 정복자들에 의해 정복, 파괴, 약탈됐지만 그때마다 다시 복원됐다. 유명한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바빌론을 사상 최대의 성곽을 가진 도시로 건설해 그 세력이 최고조에 달한다. 당시 바빌론에는 위대한 신들을 위한 신전 53개, 마르둑신을 위한 예배당 55개, 대지의 신들을 위한 예배당 3백개, 하늘의 신들을 위한 예배당이 6백개가 있었으며, 여러 신들을 위한 제단이 4백개가 있었다. 이 중에는 ‘신의 문’이라는 뜻의 바벨탑이 있었는데, 이 탑은 7층으로 높이가 90m며 8천 5백만개의 벽돌을 사용했다.

 

 

6. 메소포타미아의 지방과 이집트의 차이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모두가 강물의 범람을 이용한 효과적인 경지 정리와 대규모의 관개 사업을 통해 문명을 일으켰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세계관과 문화 예술에 있어서는 커다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이집트인에게 있어서 나일 강의 정기적인 범람은 행운이었고, 오히려 범람하지 않을까봐 걱정 할 정도였는데 반해,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불규칙적인 범람은 참혹한 재앙을 가져왔고, 개방적인 지형은 끊임없는 외적의 침입을 불렀다. 이러한 자연 환경의 차이는 메소포타미아의 정치와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집트인이 현재의 풍요로움을 연장하기 위해 인간의 불멸을 믿고 내세를 준비하였다면, 메소포타미아 인은 지극히 현세적인 삶을 꾸려 나갔고, 사후 세계에 대해서는 거의 희망을 갖지 않았다. 또한, 이집트인의 생활이 신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메소포타미아 인은 신에 대해서도 사랑보다는 두려움으로 대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메소포타미아 인은 신을 재앙을 안겨 주는 존재로 인식하였으며, 운명론적이고 현세적인 삶의 방식이 뚜렷하였다. 또 문화적으로도 이집트보다 훨씬 호전적이고, 암울하고, 비관주의적인 특징이 강하였다. 이러한 현실 중심의 가치관은 메소포타미아에 구전되던 수많은 홍수 설화와 전설 등에도 잘 나타나 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석재가 부족하여 점토판을 햇볕에 말리거나 가마에 구워 문서로 사용하였다. 점토판 문서의 크기는 매우 다양하였으며, 그 내용은 모두 쐐기 문자로 기록되었다.

 

수메르·바빌로니아·아시리아  

 

 

 

 

1. 메소포타미아 [Mesopotamia]

2. 수메르 (Sumer)

3. 바빌로니아

4. 아시리아

 

 

 

 

 

1. 메소포타미아 [Mesopotamia]

 

 서아시아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지역 일대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현재의 이라크를 중심으로 시리아의 북동부, 이란의 남서부가 포함된다.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부근을 경계로 하여 홍적대지(洪積臺地)인 북부의 아시리아와 충적평야인 남부의 바빌로니아로 나누어지며, 바빌로니아는 다시 북부의 아카드와 남부의 수메르로 나누어진다. 수메르에서 일어난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을 모체로 하여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형성되었다. 강 유역을 제외한 지역은 사막 또는 반사막이며, 연간 강수량도 200mm 이하로 건조하다. 유역 일대는 연간 300mm 이상의 강우량과 하천 관개에 의하여 쌀·밀·보리·대추야자 등이 산출된다. 북부 및 동부의 습곡(褶谷)산지는 중요한 유전지대이며, 키르쿠크와 모술이 그 중심지이다.

 

 1) 메소포타미아문명의 특색

 

 이집트문명과 메소포타미아문명의 기원과 형성기는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양쪽이 사막으로 막힌 가늘고 긴 나일 계곡과 많은 지류에 비하여 사방이 확 트이고 평탄한 메소포타미아 하상지대(河床地帶)는 그 지리적 조건이 대조적으로 다르다. 자연적인 방벽(防壁)이 거의 없는 비옥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어느 쪽으로부터도 외적이 침입할 수 있었으므로 이집트처럼 단일 지도자에 의한 통일국가 형성이라는 이상(理想)은 이루어지기가 어려웠으며, 그러한 야망이 있었던 왕일지라도 그 명맥을 오래도록 지속시켜 나갈 수는 없었다. 예컨대 수메르인 도시국가의 경우, 왕은 진짜 주권자인 각 지방신(地方神)들의 단순한 집사(執事)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들이었음이 알려져 있다. 그것은 지방신이 정치·경제·노동력·생산 등의 일체를 장악하는 이른바 <신권적 사회주의(神權的社會主義)>하의 통제사회였기 때문이며, 신전이 그 행정적인 중심지였다. 따라서 수메르의 도시국가에서는 성역(聖域)에 창고·작업장·서기(書記)의 방 등을 짓고, 그 주위에 주택을 밀집시키는 도시계획이 실현되었다. 그리고 이 성역의 중심을 이루는 높은 지대(地臺)에 신전이 건축되었다. 이러한 인공적인 고지대(高地帶)는 곧 거대한 규모로 발전하였고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견줄 만한 위용을 지니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지구라트(ziggurat)이고, 평원에 있어서의 지표적(地標的) 효과는 사막에 있어서의 피라미드라고 할 수 있지만, 그 기능과 상징하는 의미는 파라오의 분묘인 피라미드와 현저한 차이가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오랜 역사에 있어서 각 지방의 대립항쟁, 외적의 침입, 새로운 세력의 흥망 등은 예사로운 일이었으므로, 전란은 끊이지 않았다. 이와 같은 혼란에도 불구하고 메소포타미아문명은 수메르 이후 약 3000년에 이르렀고, BC539년에 신 바빌로니아왕국이 멸망될 때까지 뚜렷한 특질을 유지하면서 발전할 수 있었다. 미술에서는 수메르미술·바빌로니아미술·아시리아미술, 그리고 신 바빌로니아미술로 구별하여 각각 관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2. 수메르 (Sumer)

 

 고대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있는 지역 명이며 고대문명의 발상지로 뒤에 바빌로니아로 불리던 지방의 북쪽 반을 아카드라 하고, 페르시아만에 면한 남쪽 반을 수메트라 했다. 다만 수메트라는 호칭은 아카드인이 부르던 이름이었고, 수메르인 스스로는 키엔기라 했다. 이 지역에 언제부터 수메르인이 와서 살았는지 불분명하다.

 

1) 문자와 언어

 

 출토유물의 비교연구로 유별된 우루크기(BC3000년경∼BC2800년경)의 문화가 수메르인에 속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으나, 그것에 선행하는 우바이드기의 분화가 수메르인에 의해 형성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우루크기에 나타난 쐐기문자〔楔形文字〕의 원형인 고졸문자(古拙文字)는 수메르인이 발명한 것이며, BC50년경까지 거의 3000년에 걸쳐 고대 오리엔트 전역에서 사용되었다. 쐐기문자를 채용한 주요 민족은 아카드인·아시리인·엘람인·후르리인·히타이트인·카시트인·우라르투인 등이다. 수메르문화의 대부분은 수메르어와 쐐기문자를 통해 고대 오리엔트로 전해졌다. 수메르어는 접두사 접중사(接中辭)·접미사가 발달한 전형적인 교착어(膠着語)이나, 언어적 계통은 아직 해명되어 있지 않다. 수메르인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주권을 상실한 우르 제3왕조 이후부터 수메르어는 사어화(死語化)의 길로 접어들었으나 이후에도 일종의 문화어로서 존속하고 학습되었다. 대역(對譯)된 어휘표 등이 바빌로니아와 히타이트 엘람 우가리트에 블라에서 다수 발견되었다.

 

2) 도시국가의 형성

 

 우루크기로부터 젬데트나스르기(BC 2800년경∼BC 2700년경)에 걸쳐 도시가 출현하여 이른바 <도시혁명>이 일어나 도시국가시대 또는 초기왕조시대(BC2500년경∼BC2350년경)를 맞이했다. 이 시대의 수메르 대도시로는 라가시·움마·우르·우루크·니푸르슈루파크·에리두 등이 알려져 있다. 아카드지방의 대도시 키시도 수메르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각 도시는 저마다 수호신을 모셨으며, 군주는 수호신에게 선택된 주권의 대행자였다. 군주는 엔시(ensi) 또는 루갈(lugal)이라 불렸다. 라가시에서는 BC2500년경 우르난셰왕조가 성립되어 약 150년간 지배했다. 3대왕 에안나툼 1세의 <독수리비문>, 움마와의 경계항쟁을 기록한 5대왕 엔테메나의 <원뿔비문>, 왕위 찬탈자 우르카기나의 <개혁비문> 등은 창의적인 수메르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라가시의 행정·경제 문서에 의하면, 도시국가에는 수공업에 종사한 전문기술자(금·은·청동세공인,·목수· 보석세공인·대장장이·피혁제조인·모직공·표백인·배목수·소목·도공 등), 전업 분화한 어부(바다·담수·운하·늪·투망어부), 원거리 통상에 종사하는 상인 등이 있어서, 신전(神殿)의 분할지가 주어져 있었다. 이들은 신전 직할지의 경영에 참가하였고, 운하·지구(池溝)·제방의 개착과 수리, 성벽의 건조, 기타 공공사업에 종사했다. 가축류는 전문 목축가가 소·당나귀·양·염소·돼지 등을 사육하였다. 곡물은 보리·밀, 야채는 양파류·콩류 등을 재배했다.

 

3) 우르 제3왕조

 

 BC2350년경, 키시시(市) 출신의 사르곤이 신도시 아가데(아카드)를 세우고, 수메르의 루갈자게시를 무찌르고 사르곤왕조를 수립하였다. 이것이 수메르·아카드지방을 하나로 묶은 아카드왕국(BC2350년경∼BC2150년경)이다. 약 200년 뒤, 아카드왕국은 자그로스의 산악민족인 구티민족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고, 그 뒤 90년간 메소포타미아는 지배 하에 놓였다. BC2060년경, 우루크시의 왕 우투헤갈이 구티민족의 지배에서 수메르·아카드를 해방시켰으며, 그의 신하 우르남무가 우르 제3왕조를 수립했다. 우르남무왕은 관료조직에 의한 집권적 전제정치를 했으며, 세계 최고(最古)의 법전(수메르어로 씌어진 우르남무법전)의 제정자로서 유명하다. 아카드왕조시대에 융성해진 세계무역은 이 시대에 한층 박차가 가해졌고, 속주제에 의한 통치방식도 채용되어 국왕은 <사방 세계의 왕>이라 불렸다. 다섯 왕이 지배한 뒤, 셈계 민족 아무르인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여 수메르민족은 정치적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며, 수메르·아카드지방은 바빌로니아라 불리게 되었다. 그때까지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종의 공용어 위치에 있었던 수메르어 대신 아카드어가 사용되었는데, 수메르 문화·수메르 종교문서 등은 이 시기에 일제히 문자화되어 수메르어 학습을 위한 문법서·어휘표 등이 작성되었으며 수메르어 문서가 번역되었다. 이신라르사왕조시대(BC1950년경∼BC1700년경 ), 바빌론 제1왕조시대 (BC1830년경∼BC1530년경)에 수메르어로 씌어진 점토판 문서의 내용은 여러 가지이고 방대한 수량에 이르며, 모두 수메르 문화의 높은 수준을 나타내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도시. 현재는 이라크 남부, 바그다드 남동 약 350㎞에 있는 유적지로서, 텔무카이야르(역청의 언덕이라는 뜻)라고 불리고 있다. 《구약성서》에는 <갈대아의 우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아브라함의 고향이라고 되어 있다. 우르크와 함께 오랜 역사를 가진 수메르의 도시로서, 1854년 대영박물관의 위촉으로 이 언덕을 조사한 영국영사관의 J.E.테일러는 비문에 의하여 《구약성서》의 갈대아의 우르임을 확인하였다. 그 후 1918년에 톰슨이, 18~19년에 H.R.홀이 발굴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시굴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본격적인 발굴은 22~34년 C.L.울리경이 지휘한 대영 박물관 및 펜실베이니아대학박물관의 합동탐험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1923~24년에는 우르의 북서쪽 약 6.4㎞ 지점에 있는 알우바이드언덕에서 홀이 중단했던 발굴을 다시 시작하여, 채색토기를 특징으로 하는 이른바 우비드문화를 밝혀냈다. 여기에서 발견된 닌후르사그신전의 주춧돌에는 <우르의 왕 메스안네파다의 아들인 우르의 왕 아안네파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메스안네파다(天神 안이 선택한 영웅이라는 뜻)는 우르 제1왕조(BC 2500∼BC 2400 무렵)의 맨 처음 왕으로서, 이미 알려져 있었던 왕이었으며 신화적이라고 간주되어 왔던 왕조와 왕의 역사적 존재가 후대의 왕조표에서 실증되었다. 그 결과로 연대의 결정과 메소포타미아미술사에서 출토유물의 위치를 알았다.

 

4) 우르의 왕묘(王墓)

 

 1927∼29년에는 우르에서 <왕묘>가 발견되었는데, 그 호화스러운 출토품과 많은 인간·소의 순장(殉葬)으로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순장이 있었던 왕묘는 원통인장(圓筒印章)에 의하여 아바르기왕의 것이라고 추정되었다. 왕비 슈브아드·메스카람두그 등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에는 유명한 <우르의 스탠더드>, 황금투구, 황금주발, 큰 잔, 은제(銀製) 배〔船〕 모형, 상감 유희반과 말〔駒〕, 조가비세공(細工)한 장식판이 있는 하프, 금, 라피스라술리, 은, 조개껍데기, 빨간돌 따위의 많은 빛깔을 배합해서 만든 관목(灌木)에 뒷발로 서 있는 숫양상〔牡羊像〕, 수소머리, 그밖에 많은 것들이 있는데, 어느 것이나 높은 기술의 발달을 보여주는 정교하고 미술적으로 뛰어난 것들이다. 건축양식은 최고(最古)의 돔·아치가 채용되어, 수메르 문화의 특징이 되는 플라노콘벡스 벽돌(윗면이 소복하게 부풀어오른 曲面을 이루고 있는 벽돌)이 처음으로 사용되어 있다. 아바르기 왕묘의 순장과 같은 관습이 수메르의 다른 유적이나 문헌에는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 해석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5) 우르의 역사

 

 우르 제1왕조는 5왕, 170년으로 멸망했다. 우르는 그 후 사르곤왕조·구티움왕조의 지배를 받았지만, 우르남무왕이 다시 바빌로니아를 통일하여 우르 제3왕조(BC 2060∼BC 1950경)를 세웠다. 우르남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수메르법전의 제정자로 유명한데, 속주제(屬州制)에 의한 통치방식을 채용하여, 속주에 속하는 주요도시들에는 왕의 대리(sagub)를 두고, 관료조직에 의한 집권적 전제왕국을 건설하였다. 제3왕조는 5왕에 의하여 통치되었고, 그 말기에는 엘람인의 반란과 침공을 받고, 또 셈계 유목민족 아무르인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다. 바빌론 제1왕조의 7대 왕 사무스이르나는 치세 11년에 우르와 우르크의 성벽을 파괴하고 황폐해지게 내버려두었다. 신바빌로니아시대에 우르는 다시 부활하였는데,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우르의 신전 지규랫을 재건하였다. 그 후 우르의 이름은 거의 기록에 나타나지 않으며, BC 4세기 무렵에는 벽돌이 흩어져 폐허가 되었다고 추측된다.

 티그리스·유프라테스 두 강 사이에 있는 메소포타미아지역(현재의 이라크 대부분과 시리아 및 터키 일부)의 미술. 이 지방은 나일강 유역인 이집트와 함께 인류문명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으며 이와 함께 고대 오리엔트문명으로 고찰된다. 이 인류 최고(最古)의 양 문명은 대략 같은 때인 BC3500년∼BC3000년까지의 기간에 각각 역사시대로 접어들었다. 즉 이집트가 파라오(Pharaoh;솔로몬 왕조 시대까지의 이집트왕의 칭호)에 의하여 통일되어 갈 무렵,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수메르인에 의하여 많은 도시국가가 건설되었으며, 점토판(粘土板)에 설형문자(楔形文字)를 이용하여 기록하는 특수한 서법(書法)이 발달하였다. 티그리스강 중류와 상류지방인 북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수메르인 이전의 신석기시대에 속하는 유적이 몇몇 발견되었다. 텔할라프에서 출토된 칠무늬토기〔彩紋土器〕는 이 지방 문명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데, 신석기시대 이후 문명의 진전에 있어서는 남부 메소포타미아가 먼저 주도권을 잡았다. 텔엘우바이드·우루크 등 각지의 문명은 메소포타미아의 초기문명을 대표하고 있다. 그리고 수메르인이 건설한 각 도시국가에 왕이 탄생한 BC3000∼BC2340년에 이르는 초기 왕조시대에는 도시문명과 미술이 크게 발달하였다

 

6) 수메르미술

 

  메소포타미아란 그리스어로 두 강의 사이를 뜻하는 말로, 티그리스강(江)과 유프라테스강(江) 사이에 있는 광활한 지역을 가리킨다. 이 지역에는 수만 년 전부터 인류가 살았던 흔적이 있으며, BC 5000∼BC 4000년에는 농경생활을 영위한 정착주민도 나타나고, 이어 BC 3500∼BC 3000년에는 이미 역사시대로 접어들었다. 즉 수메르인에 의해 많은 도시국가가 건설되고 설형문자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수메르인이 건설한 도시국가에 국왕이 나타난 BC 3000∼BC 2340년에 이르는 초기 왕조시대에는 도시문명의 발달과 함께 미술 또한 고도로 발달하였지만,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건축물은 석재가 거의 산출되지 않기 때문에 수메르인은 햇볕에 말린 벽돌이나 목재로 집을 지었다. 따라서 그들 건축물은 건축물의 기초부분을 제외하고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라가시 ·우르 ·우루크 ·니푸르 ·에리두 ·키시 등의 도시 폐허가 그 좋은 예이다. 이 중 우르에서는 초기 왕조시대의 분묘 군이 발굴되고 그 곳에서 천장이 돔으로 된 지하실이 발견되었다. 지구라트[聖塔]도 오래 된 것은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우루크에는 BC 3500~BC 3000년에 건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구라트의 유적이 있으며, 그 성전 바깥벽이 백색 도료를 사용한 벽돌로 건립된 데서 하얀 신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하얀 신전은 구부러진 참배통로가 있는 수메르 종교건축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유구이기도 하다.

 조각에서도 석재의 부족을 말해 주듯 규모가 큰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신전의 예배상(像)과 봉헌상(像), 기념비적인 부조, 장식조각 등이 여러 유적에서 발굴되었다. 이 중 우루크에서 발굴된 《여성 두상(女性頭像)》는 하얀 신전과 거의 같은 시대의 대리석으로 된 상으로, 감성적인 표현이 뛰어나다. 또 아스마르(고대 이름은 에슈누나)의 아브신전에서 발굴된 일군의 신상(神像)은 이보다 5세기 정도 뒤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같은 대리석으로 된 것으로 원뿔과 원통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기하학적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들 예배상의 거대한 눈에는 채색된 동공을 끼워 넣었으며, 이는 예배자와 눈에 의한 영혼의 교신(交信)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목재와 금박 라피스라줄리[靑金石] ·조가비 등을 소재로 만든 조각상이나 부조는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만들어졌다. 곧, 우르 제1·2왕조의 왕묘군(BC 2000년대 후기)에서 발굴되어 현재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떨기나무에 뒷다리로 선 숫양[雄羊]》은 그 좋은 예이다.

 이 밖에도 같은 시대 우르왕묘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황금의 투구와 식기, 조가비를 세공해 장식한 하프, 그리고 유명한 《우르의 스탠더드》 등이 미술적 일품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3. 바빌로니아

 

 바빌로니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서남아시아의 고대문명, 또는 티그리스강(江)과 유프라테스강(江) 사이 메소포타미아 남동쪽의 지명으로, 하늘까지 닿으려던 탑과 영원한 번영을 꿈꾸던 황금성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 일찍이 세계 4대 문명의 가운데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로 알려진 곳이다.

 기원전 4천 년경부터 수메르인들은 이 지역에서 최초로 문자를 발명하고 우르, 우르크, 라가시, 키시 등의 도시를 건설하여 도시문명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이들은 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고, 지구라트라고 불리는 거대한 탑을 쌓아 올리던 사람들이다.

 이후 북서쪽에 셈족 계통의 아카드인들이 들어와 통일국가를 건설했다가 수메르인들과 아카드인, 아모리인들의 왕국이 등장하며 패권을 놓고 서로 경쟁하면서 문화를 발전시켰다.

 

1) 고 바빌로니아

 

 바빌로니아라는 이름의 왕국이 들어선 것은 기원전 1830년경에 셈족 계통의 아모리인들이 바빌론 시를 중심으로 바빌로니아 제1왕조를 열면서부터였다. 고(古) 바빌로니아로 불리는 이 왕국은 기원전 1600년경까지 남으로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 전체와 북으로 앗시리아를 포함하면서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장악했다.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은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일대의 정치, 상업의 중심지가 된다.

 고 바빌로니아는 제6대 함무라비 왕(B.C.1792∼B.C.1750) 때 전성기를 맞는다. 함무라비 왕은 엘람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지역을 평정하여 메소포타미아 세계를 통일하고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는 과학과 학문을 발전시켰으며 아카드어를 국어로 삼았고, 역법(曆法)을 통일시키는 한편 함무라비 법전이라고 불리는 282조로 구성된 법전을 정비하여 바빌론을 명실상부한 오리엔트의 중심도시로 발전시켰다. 그는 또한 수도 바빌론에 성벽을 쌓고 바빌론의 수호신이었던 마르두크(Marduk) 신을 주신으로 하고 이슈타르(Ishtar) 여신과 탐무즈(Tammus)신을 섬기는 종교를 확립했으며 각지에 이들의 신전을 세워 중앙집권제도를 확립하였다. 이때부터 마르두크는 수메르 신들 중에 주신(主神)의 자리를 획득하여 벨(바알) 마르두크라 불리는 국가적인 숭배 대상이 되었다.

 함무라비 왕이 죽은 후 고 바빌로니아는 쇠퇴하여 기원전 1531년경 히타이트의 침입으로 멸망한다. 이후 바빌로니아의 지배권은 동북부 산악지대를 차지한 카사이트족에게 넘어간다. 400여년 간의 카사이트 지배 후 도시국가 가운데 아시리아가 점점 세력을 얻는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1220년경, 바빌론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점점 판도를 확장해갔다. 강성하고도 잔학하기로 유명했던 아시리아는 군사력을 길러 기원전 7세기, 아시리아가 자립하여 제국으로 발전했다. 강대한 아시리아는 니네베(Nineveh)를 수도로 하여 북부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장악하고 한때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까지 함락시켰다. 당시 바빌로니아는 아시리아에서 임명한 부왕(副王)의 통치 하에 들어갔다.

 

2) 신 바빌로니아

 

 기원전 626년, 아시리아에 반란을 일으킨 아람계 칼데아 부족의 나보폴라사르가 바빌론에 입성하여 바빌로니아 왕조를 열었다. 역사에서는 이 왕조를 고 바빌로니아와 구분하여 신 바빌로니아라고 하며, 칼데아 부족이 세웠으므로 칼데아 왕조라고도 한다. 나보폴라사르는 메디아와 연합하여 기원전 612년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철저히 파괴해 버린다. 나보폴라사르의 후계자 네부카드네자르 2세(재위 B.C.605∼562, 개역성서의 느부갓네살)의 치세는 바빌로니아의 황금시대였다. 그는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파괴하였으며 유대인들을 바빌론에 유폐시켰다. 고대 함무라비 왕이래 몰락했던 바빌론은 다시 부흥하여 명실공히 세계 상업의 중심도시로서 성장, 유래 없는 번영을 누린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바빌론 성을 중건하였다. 왕은 수도 바빌론에 주신(主神) 마르두크를 비롯한 수많은 신들의 신전과 제단을 화려하게 만들었다. 설형문자로 기록된 당시 문서와 바빌론 성 발굴 결과를 종합해 보면 바빌론 안에는 주신 마르두크 신전 55개를 포함하여 일천 개가 넘는 신전이 있었고, 이슈타르 여신을 위한 제단만도 180개가 있었다. 마르두크 신전을 지을 때 그에 딸린 거대한 지구라트도 함께 만들어졌다. 바빌론 시의 중심부에 있는 마르두크 신의 성역 안에 화려한 청색 벽돌을 구워 탑을 쌓아올렸는데, 고대 전설 속의 바벨탑을 연상시키는 이 바벨탑은 수세기 전 아시리아인들이 파손한 것을 신 바빌로니아 왕조를 개창한 나보폴라사르 왕이 기초를 쌓고, 그 아들인 네부카드네자르가 완성하여 재건한 것이다. 탑은 약 90미터의 높이로 장려하게 건립되었지만 현재 지상에 그 토대의 윤곽만 남아 있다. 또한 네부카드네자르는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일컫는 공중정원을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번영을 구가하던 바빌로니아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사후 급속도로 몰락한다. 이후 3대째까지 왕들은 짧은 치세 후 암살되고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 바빌론 성을 함락시킨다. 신 바빌로니아의 1세기도 채 되지 못한 짧은 기간의 번영은 이로써 허무하게 사라져갔다. 페르시아 제국 초기만 하더라도 바빌론은 세계에서 가장 번창한 도시로서 번영을 이었으나 기원전 482년, 바빌론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성채와 신전들이 파괴되었다. 기원전 331년, 바빌론을 점령한 알렉산더 대왕은 바빌론을 복구하고 대제국의 수도로 만들 계획을 진행했으나 8년 후, 알렉산더 대왕이 네부카드네자르의 궁에서 사망함으로써 계획은 무산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바빌론은 1896년 로베르트 콜데바이 등 독일 고고학자들이 발굴하기까지 흙더미 속에 파묻히게 된다.

 

3) 바빌로니아의 유적

 

〔바벨탑〕

 역사학자들은 성서 속의 바벨탑을 지구라트의 하나로 보고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 일대와 현재 이란 땅에 속하는 엘람 지역에는 지구라트(ziggurat)라는 거대한 탑이 도시마다 우뚝 솟아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기원전 3000년경의 수메르 시대부터 기원전 500년경 신 바빌로니아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백 개의 지구라트가 세워졌다. 지구라트는 이 지역의 수많은 신들을 숭배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각 도시는 자체의 수호신들을 위해 지구라트를 최소 하나씩은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지구라트 가운데 하늘에 닿을 만큼의 높이로 쌓아올린 최고의 탑은 신 바빌로니아 때 재건된 에테메난키(하늘과 땅의 기초가 되는 집이라는 뜻)라 일컫는 탑이다. 이 탑은 과거 몇 차례에 걸쳐서 지어졌다가 무너지고, 최종적으로는 나보폴라사르와 그 아들 네부카드네자르가 쌓아올린 것으로, 나보폴라사르와 네부카드네자르는 실제로 주신 마르두크를 위해 하늘 끝까지, 하늘과 그 크기를 겨룰 때까지 높이 쌓겠다고 호언했다. 이를 위해 불에 구운 벽돌 8500만 개가 건축에 사용되었다. 문헌과 고고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탑의 정사각형 기저층은 가로 세로 90미터 가량이었으며 탑의 전체 높이도 90미터 가량이었다. 제1층은 높이 33미터, 2층은 18미터, 3∼6층은 각기 6미터였고 탑의 꼭대기에는 15미터 높이의 신전이 있었는데, 신전의 벽은 황금으로 꾸며 멀리서도 잘 보일 정도로 휘황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꼭대기의 신전은 마르두크를 위한 것으로 마르두크가 쉬어 가는 장소로 생각되어 여사제 한 명만에 그곳에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이 탑은 바빌론의 수호신 마르두크를 숭배하기 위한 국가적이고도 민족적인 성역이었다. 탑 옆에도 마르두크의 신전이 있었는데 이 신전에는 순금의 옥좌 위에 순금으로 된 마르두크의 신상이 앉아 있었다. 고대 역사가 헤로도투스의 묘사에 따르면 이 신상과 보좌 등의 무게(순금의 무게)는 무려 800달란트(약 22톤)나 되었다고 한다.

 네부카드네자르 왕은 이 탑을 재건하기 위해 제국 안의 온갖 백성들의 노동력을 동원했으나 신 바빌로니아의 영화는 1세기도 못 되어 끝나버렸으므로, 바빌론의 주신 마르두크의 성역인들 온전할 리 없었다. 반란으로 인해 바빌론의 탑과 성채, 신전은 벽돌더미 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철저히 파괴되었고, 이 때 금으로 만든 마르두크 신상도 녹아 없어졌다.

 

〔바빌론 성과 공중정원〕

 바빌론 성은 무너지고 황폐해진 상태로 이천여 년을 지내왔다. 1899년부터 1917년까지 이를 복원하여 바빌로니아의 찬란한 역사를 알린 사람은 로베르트 콜데바이를 비롯한 독일 고고학자들이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흙더미 속에 파묻혀 있던 거대한 도시 바빌론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바빌론을 둘러싸고 있는 이중 성곽 중 외곽 성벽은 양변이 1800미터와 130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직사각형 모양이다. 헤로도투스는 이중으로 된 바빌론 성벽 위는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가 양쪽에서 달려와도 염려할 것이 없을 정도로 넓었다고 전했는데 콜데바이의 발굴로 이 사실은 곧 입증되었다. 7미터 두께의 진흙 벽돌 성벽이 발굴되자 곧 바깥쪽으로 12미터 가량 바깥에 7.8미터 너비의 벽돌 성벽이 발굴되었다. 그 바깥에는 다시 3.3미터 너비의 벽돌 성벽이 있었고 그 성벽의 바깥으로는 도랑(호)이 파여 있어서 유사시에 물을 채울 수 있었다. 내벽의 높이는 27미터 가량으로 추정

되었다. 벽과 벽 사이는 정상까지 흙으로 채워져 있어 실제로 두 대의 마차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만큼 넓은 길이 생겼다. 바깥쪽 성벽은 전체 길이가 18킬로미터나 되었고, 유프라테스 강에 인접하였다. 강에는 120미터 길이의 다리가 놓여 있었다.

 콜데바이 일행은 행진 대로라고 이름 붙인 폭 20미터 정도의 넓은 포장도로도 발굴했다. 이 길에서 발견된 설형문자 비문에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위대한 마르두크 신의 행렬을 위해 바빌론의 도로를 포장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길 양쪽에는 푸른 타일을 붙인 벽이 있었고 그 벽면에는 2미터 길이의 사자 120마리가 새겨진 부조가 있었다. 바빌로니아에서 이 사자는 여신 이슈타르와 동일시되어 수많은 사자상이 남아 있다. 행진 대로는 도시의 외곽 성벽에서부터 내성 입구인 이슈타르의 문까지 이어지며 용과 기괴한 짐승으로 장식된 이슈타르의 문을 빠져나가면 에사길라라는 마르두크의 성역으로 통하고 있었다. 이 성역에 네부카드네자르가 중건한 마르두크의 사원과 에테메난키로 불리는 거대한 탑이 있었던 것이다.

 에사길라의 북쪽에는 왕궁이 있었고, 왕궁의 동북쪽에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유명한 바빌론의 공중정원이 있었다. 공중정원은 실제로 공중에 떠 있던 것이 아니라 높이 솟아 있던 지구라트의 계단식 테라스에 만든 옥상 정원이었다. 가로세로 각각 400m, 높이 15미터의 토대를 세우고 그 위에 계단식 건물을 세웠다. 맨 위층의 평면 면적은 60평방미터에 불과했으나 전체 높이는 105미터로 오늘날의 30층 빌딩 정도의 높이였다.

 한 층이 만들어지면 그 위에 수천 톤의 기름진 흙을 옮겨 놓고 넓은 발코니에 잘 다듬은 화단을 꾸며놓았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작은 산이 하나 있는 것 같았다고 전해진다.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이 곳에서 이렇게 큰 정원에 물을 대는 것은 여간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 정원에서는 펌프를 이용하여 유프라테스 강에서 물을 끌어올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은 정원의 맨 위에 커다란 물탱크를 만들어 유프라테스 강의 물을 펌프로 길어 올리고 그 물을 펌프로 각 층에 대어줌으로써 화단에 적당한 습기를 유지토록 하였으며 또한 그때그때 물뿌리개를 이용하여 물을 공급하도록 하였다.

 정원의 아랫부분에는 항상 서늘함을 유지하도록 아치형의 두꺼운 천장을 가진 방을 많이 만들었으며 방에 물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해 방위에는 갈대나 역청을 펴고 그 위에 납으로 만든 두꺼운 판을 놓았다. 궁에서 창 너머로 바라보는 꽃과 나무의 모습은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한다. 또한 가진 방을 두꺼운 벽으로 갈라 일곱 개씩 두 줄로 줄짓게 하고 그 옥상의 테라스를 안뜰 모양으로 둘러쌌으며 테라스 위에 계단 모양으로 흙을 북돋아 여러 가지 초목을 심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공중정원은 일명 세미라미스의 공중정원으로 불리는데, 전설적인 여왕 세미라미스가 만들었다는 일설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러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메디아에서 시집온 왕비 아미티스의 향수(鄕愁)를 달래기 위해 메디아의 산을 연상시키는 공중정원을 만들었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발굴된 성벽과 자료들은 바빌론이 중동 지역 최대의 도시였으며 난공불락의 요새였음을 입증한다. 이 바빌론 성은 지구상에 알려진 고대의 성 가운데 가장 크고 장려한 성이었다. 헤로도투스는 바빌론을 세계에서 가장 웅대한 도시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이 난공불락의 요새도 내란에는 견디지 못하고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에게 정복당했다.

 

4. 아시리아 (Assyria)

 

 19세기 중엽에 니네베 코르사바드 등의 발굴로 우선 아시리아의 제국시대(帝國時代)가 밝혀졌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신석기시대 이후의 문화도 점차 밝혀지고 있다. 원주민은 셈족(族) 계통이 아닌 스바르투인(人)이라고 한다. BC 3000년경부터 셈계(系)의 아카드인이 원주민을 대신하여 세력을 가지게 되고, 언어 풍습 신앙 등이 셈화(化)하였다. 그 중심이 된 아수르는 BC 2500년경 도시국가로 성립되었는데, 수메르 문명의 북변(北邊)의 전진기지(前進基地)이기도 하였다. 이 수메르인의 끊임없는 침입을 받는 악조건에서 강건하고 용감한 민족성을 지닌 셈계의 아시리아인이 형성되었다. 아시리아의 중심부는 티그리스강과 대(大)자브강의 합류점에 가까운 삼각형의 지역이었다. 그들은 이와 같은 지리(地利)를 이용하여 바빌로니아에서 산출되지 않는 금속·보석·목재·석재 등을 실어다 교역을 하고 점차 군사(軍事)국가로서 발전하였다.

 BC 13세기에 투쿨티니누르타 1세는 바빌로니아를 점령하였고, BC 11세기 전에는 티글라트 필레세르 1세가 히타이트의 쇠퇴를 틈타 페르시아만(灣)에서 지중해 연안, 소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였다. BC 8∼BC 7세기에 이르자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 사르곤 2세, 센나케리브, 에사르하돈, 아슈르바니팔 등의 용감한 왕들이 나와서 시리아,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이집트까지를 정복하여 일찍이 없었던 세계제국을 건설하였다. 광대한 영토는 잘 훈련된 강력한 군대, 조직화된 관료군(官僚群), 완비된 역전제도(驛傳制度) 등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특히 기병과 전차(戰車)를 구비한 군대와 중세(重稅)는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그러나 그처럼 강대하던 아시리아도 아슈르바니팔 왕이 죽은 뒤의 내분을 틈타 바빌로니아에서 독립한 나보폴라사르와 메디아인의 동맹군의 공격을 받아, BC 612년 니네베의 함락과 더불어 멸망하였다.

 아시리아의 문화적 특색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문화를 융합하여 변경지대에 전한 것이다. 또 니네베와 코르사바드 유적에서 볼 수 있듯이 도시계획이나 축성(築城)에 능하였고, 예술면에서는 석조(石造)의 환조(丸彫)와 부조(浮彫)로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다. 전투와 맹수(猛獸) 사냥 등 잔인한 행위를 주제(主題)로 한 것이 많다. 역대의 왕들은 전승(戰勝)이나 사적(事績)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연대기(年代記)도 편찬하였다. 아슈르바니팔 왕은 왕궁에 부속도서관을 짓고 각종 사료(史料)를 수집·정리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1) 아시리아미술 (Assyrian art)

 

  인류문명의 여명기에 아시리아를 포함한 북(北)메소포타미아 일대는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바빌로니아를 앞지르고 있었으나, 바빌로니아가 관개경작(灌漑耕作)에 의해서 농작물의 증산으로 번영하자 이 지방의 문화는 급속도로 진보하였고 아시리아는 오히려 뒤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BC 3000년대의 아시리아 미술은 같은 시대의 바빌로니아 수메르 아카드 미술의 지방판(地方版)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 상태는 BC 2000년대가 된 뒤에도 한참 계속되었다. 다만 조각(彫刻)은 BC 2000년대 후반이 되어 한때 아시리아를 지배했던 미타니의 영향으로 수메르 아카드 양식과는 다른 아시리아적 성격을 점차 나타내게 되었다. 즉, 일반적으로 양식이 답답하고 비례가 압축되었으며 좌우대칭을 중시하고 의상에 풍부한 장식을 좋아하는 점 등이 그렇다.

 BC 1000년대의 아시리아 미술은 이 나라의 제국주의적 발전에 힘입어 최성기(最盛期)를 맞이한다. 흔히 아시리아 미술이라 하면 그 특성이 확립된 시기요, 신(新)아시리아 미술로 불리기도 하는 BC 9세기에서 BC 7세기에 걸친 미술을 말한다.

 건축으로는 아슈르나시르팔이 세운 님루드의 궁전,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의 아르스란 타슈의 궁전, 사르곤 2세의 코르사바드의 궁전 등이 있었는데 보수적인 아시리아인은 석재를 손쉽게 입수할 수 있는 지방에서도 수메르의 전통에 따라 볕에 말린 벽돌을 주재료로 사용하였다. 다만 입구의 좌우나 바깥쪽에 인두수신(人頭獸身)의 거상(巨像)을 세우고, 방 내부에는 부조가 있는 설화석고(雪花石膏:alabaster) 등의 석판을 벽면 아랫부분에 둘러서 붙였다. 궁전에는 옥좌실(玉座室)이 있는 알현실, 왕의 거실, 왕비의 거실 등을 포함하는 일곽과 조신(朝臣)이 사는 일곽, 신전이나 지구라트[聖塔]가 있는 일곽 등이 있고, 중앙에는 정원이 있었다. 지구라트는 코르사바드에서는 7층으로 구성되어 있어 흉벽이 있는 비스듬한 길이 건물의 주위를 돌아서 정상까지 달하였다.

 조각의 유품은 주로 부조(浮彫)이다. 환조(丸彫:입체조각)는 포효하는 사자나 유익인두(有翼人頭)의 황소 또는 사자, 인상(人像)으로는 아슈르나시르팔 2세상(像)이나 나브 신상(神像) 등이 있는데 형체보다도 표면 세부묘사에 중점을 둔 부조적 표현이었다. 부조의 주제는 종교적 의식, 전쟁, 수렵 조공자(朝貢者)의 행렬 등 왕의 권위와 제국의 위력을 과시하는 것을 좋아했고 시대적인 변화는 없으나 구도와 양식에는 진전을 보였다. 즉, BC 9세기 전반의 아슈르나시르팔 2세 시대의 것은 살붙임이 얇고 인물의 비례가 답답하며 때로는 명문(銘文)이 작품의 표면을 덮기도 했다. BC 8세기 후반,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나 사르곤 2세에 와서는 살붙임이 도톰해지고 뚜렷해졌으며 작품 표면은 물론 배경에도 명문을 넣는 일은 없어졌다. 그 후의 센나케리브 시대에는 작은 인물을 많이 담은 우화적 구도가 행해졌다.

 그러나 아시리아 부조의 최고 작품은 니네베의 궁전 유적에서 출토된 아슈르바니팔왕 시대의 것으로, 살붙임도 풍부하고 기교는 소박하며 표현은 자유롭고 힘에 넘친다. 그 중에서도 사자의 방의 부조는 동물묘사가 세계적인 걸작이다. 유약(釉藥)을 끼얹은 벽돌이나 회화도 궁전 내부장식에 사용되었다. 공예품으로는 먼저 청동(靑銅) 제품으로서 사자형의 주조종(鑄造鐘), 그리고 샬마네세르 3세(BC 858~BC 824)의 사적(事蹟)을 찍어낸 문표면의 장식이었던 띠 모양의 판이 유명하다. 상아조각품으로는 부조도 있고 줄새김도 있는데 채색된 것이 가구에 장식되었으며 님루드나 아르스란 타슈 등지에서 뛰어난 작품이 출토되었다. 표현양식면에서 볼 때에는 아시리아적인 것 이외에 페니키아적인 것, 이집트적인 것이 있다. 원통인장(圓筒印章)은 주제도 양식도 모두 벽면 부조를 따랐다. 또한 BC 1000년대의 아시리아 미술은 가까운 인접제국의 미술에 다소간 영향을 끼쳤는데 그 중에서도 아케메네스왕조의 페르시아 미술의 형성에 크게 공헌했다.

  

 

 

잊혀진 제국 히타이트

 

 

 

- 서론 -

 

 히타이트는 기원전 약 1700여년부터 1200여년까지 약 500년 간 터키가 자리한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흥망성쇠의 역사를 장식한 고대의 제국이다. 히타이트는 기원전 1200년경 정체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북방 해상 민족에 의해 불타고 약탈되어 폐허가 되었다. 그리하여 한때 오리엔트의 강대 세력으로 부상한 히타이트는 역사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너무나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남겨놓은 기록물은 모두 땅 속에 묻혀버렸고 그들이 패망한 후로는 아나톨리아 땅에서 히타이트의 역사와 문화를 이어간 민족들이 한 번도 히타이트를 기억해주지 않았다. 히타이트는 정말 철저하게 인류의 머리에서 지워졌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점토판이 발견됨으로써 히타이트가 세상 속으로 나오게 되었다. 잊혀진 제국, 히타이트를 끄집어내어 그들의 찬란했던 문명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1. 잊혀진 제국 히타이트의 발견

 

 잊혀진 채 암흑 속에서 잠자고 있는 히타이트를 보고 처음으로 기록을 남긴 것은 히타이트가 패망하고 700년이 지난 후, 헤로도토스의 역사서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헤로도토스는 히타이트의 유적을 이집트 세소스트리스 3세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2000여년이 지난 17세기에 한 터키인 여행가에 의해 히타이트의 또 다른 유적이 발견되고 1887년, 이집트의 텔 엘 아마르나에서 350점이 넘는 점토판 서신들이 발견되었다. 이 점토판들은 잠들어 있던 고대 제국 히타이트의 역사를 밝혀주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점토판은 아카드어로 기록되어 있었고 아카드어는 당시 국제 외교어였다. 아카드어 설형 문자는 이미 오래 전에 해독된 상태였기 때문에 점토판을 해독하는 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점토판이 발굴된 보아즈쾨이에 대한 발굴 허가가 독일에 떨어진 후 독일 정부는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하였고 발굴에서 1만개 이상의 점토판을 발굴해내는 데 성공하였다. 히타이트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이었다.

 

2. '히타이트' 이름의 어원

 

영국인 세이스는 아나톨리아의 이즈미르에서부터 북부 시리아에 걸쳐있는 석조 부조물과 돌에 새겨진 문자들의 양태가 비슷하므로 이것은 같은 민족이 남긴 것이 틀림없으며, 이 민족은 바로 성경에 나오는 헷족(Heth)이라고 보았다. 언어 판독 학자들이 구액 및 히브리어 성서에 기록된 헷족과 히티(Hitti), 히티의 복수형인 히팀(Hittim)을 근거로 각국의 언어로 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히타이트'로 둔갑하게 되었다. 그래서 구약성서에 기록된 헷족과 히브리어 성서에 기록된 히팀은 모두 히타이트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히타이트라는 말은 구약에 나오는 헷족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기게 된 말이었다. 사실, 히타이트인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고향의 이름을 따서 자신들을 하티인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자신들을 한 번도히타이트인이라고 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히타이트인으로 둔갑하게 된 것은 순전히 성경 번역 때문이었다.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히타이트라는 말은 아예 없었던 것이다.

 

 

- 본론 -

 

1. 히타이트의 언어

 

 히타이트인은 자신들의 언어를 나쉴리, 네쉴리, 네슘릴리 등으로 불렀다. 이 단어들은 모두 네샤라는 지명에서 유래한다. 네샤는 초기 히타이트 시대의 수도 이름이며 네샤의 또 다른 이름은 카네쉬이다. 네샤에서 쓰는 말, 즉 히타이트인들이 사용한 이 언어가 왕실의 공식 언어였다.

 히타이트어는 인도·유럽 어족이다. 히타이트인들은 자신들의 말을 글로 적기 위해 먼저 쐐기같이 생긴 설형문자를 사용하였다. 히타이트 시대에 역사를 기록한 서기관들은 아카드어를 꼭 알아야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그들에게 아카드어는 필수 외국어였다. 히타이트인들은 왕실 업무와 관련된 기록은 주로 설형문자를 사용했지만 일반 백성을 상대로 한 암벽의 글은 상형 문자를 사용하였다. 히타이트인들이 사용한 상형문자는 약 400개로 알려져있다. 스위스 언어학자 에밀 포러는 히타이트인들이 남긴 점토판에 사용된 언어는 모두 여덟 가지라고 밝혔다. 여덟 개 언어란 히타이트인들이 사용한 자신들의 언어, 히타이트 이전의 하티인들이 사용한 하티어, 그리고 미탄니 왕구에서 사용한 후리어 외에도 수메르어, 아카드어, 고대 이란어, 루비어, 팔라어 등이다. 그러나 이들 언어가 모두 같은 정도로 사용되고 글로 씌여진 것은 아니다. 어떤 언어는 종교 제의적인 기록에만 쓰인 것도 있었고 또 어떤 것은 한 가지 기록의 특정 단어에만 쓰인 말도 있다. 히타이트 시대에 루비어는 아나톨리아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가장 오래 살아남은 언어이다. 루비어는 아르자와 지역에서 사용된 언어이다. 아르자와 왕국은 아나톨리아 남동부 지역 추쿠로바의 서쪽에서부터 서부 아나톨리아에 위치했다. 루비어는 기원전 1000년경에 없어지기 시작하였고, 그 자리에는 프리기아어, 리디아어 등이 차지하게 되었다. 루비어는 약 1500년간 존재하여 히타이트어와 가까운 친족 관계에 있는 언어이다.

 

2. 점토판  

 

히타이트인들이 남긴 역사 자료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점토판이다. 점토판은 한 마디로 역사와 문화를 기록한 책이다. 그런데 모든 쪽수가 갖춰진 책이 아니라 여기저기 찢겨나간 책과 같은 형태로 남아있다. 점토판은 사각형으로 앞과 뒤가 있고 쐐기 문자로 빽빽하고 정교하게 기록되어 있다. 점토판의 대부분은 주로 하투샤의 폐허에서 발굴되었다. 하투샤의 뷔윅갈레의 신전, 언덕의 집, 풍우신의 신전 등이 있는 곳에서 그간 3만개가 발굴되었고, 하투샤에서 북동쪽에 있는 마사트, 추룸 근처 오르타쾨이, 시바스의 쿠샥클리 등지에서도 발굴되었다. 점토판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고 다양하였다.

       히타이트 점토판의 전신인 수메르의 점토판

 

히타이트인들은 역사 기록뿐만 아니라 기록한 점토판을 보관하는 데에도 세심한 면을 보였다. 점토판이 땅 속 여기저기에서 발굴된 것이 아니라 문서고로 보이는 곳에 잘 정리 보관된 상태로 발굴되었다. 히타이트인들은 점토판을 보관하기 위해 선반을 만들었다. 선반은 긴 돌조각을 한 줄로 벽에다 간격을 두어 박고 그 위에 진흙을 칠한 다음, 진흙이 보이지 않도록 다시 그 위를 나무판으로 덮었다. 또한 마치 도서 목록처럼, 점토판의 내용은 무엇이며 몇 개의 점토판으로 구성되었는지, 분실되었을 경우 몇 번째 점토판이 분실되었는지를 기록해 놓았다. 원본이 파괴되거나 분실되는 상황에 대비하여 복사본도 여러 개 만들어 두었다. 점토판 한 개에 내용을 다 수록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두 번째, 세 번째 점토판에다 계속하여 기록하였는데 그럴 경우 몇 번째 점토판인지를 꼭 기록해 놓았다. 그리고 후세들을 위해 정리 보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점토판의 해독으로 히타이트 역사가 알려지게 되고, 후기 청동기 시대에 아나톨리아에서는 다양한 종족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잠토판에 기록된 왕의 업적, 칙령, 왕의 서신, 조약문, 법령, 제의문, 신화 등을 토대로 히타이트 역사가 입체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3. 행정조직

 

 히타이트 초기는 도시 국가 형태였다. 그 후 영주의 관할 아래 비자유인인 농민들이 영주에게 지대 형식으로 부역을 제공하는, 중세 유럽의 봉건 제도와 같은 체제를 가진 국가였다. 아나톨리아에는 씨족, 부족 사회의 성격을 갖는 소왕국들이 산재해 있었다. 히타이트왕은 소왕국들을 정복하여 속국으로 만들고, 속국은 왕의 측근들이 통치하도록 하였다. 속국의 왕들은 히타이트왕에게 세금을 내야 했고 출정 시에는 전차와 병사를 지원해주어야 했다. 히타이트 행정의 중심은 수도 하투샤에 있는 왕실이었다. 국가 서열의 최상위에는 대왕이 있었고 다음은 대왕비였다. 그 다음 3위는 왕위를 승계할 왕자였다. 히타이트는 그 가족을 중심으로 한 정치 세력이었다.

 히타이트 왕의 임무와 책임 중의 하나는 모든 사제들의 대표, 즉 사제장이었다. 왕의 중요한 책무는 하투샤의 풍우신과 태양의 여신을 모시는 일이었다. 사제장으로서 왕은 종교 축제나 기도일이 오면 이 행사를 주관하는 대표자가 된다.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책임이 왕에게 있었다. 하투샤와 그 속국을 보호하며 영토를 확장하고 번영한 나라를 유지하는 것도 왕의 임무였다.

그 외, 왕은 군대를 지휘하는 총사령관이자 대법관이다. 왕은 총지휘관의 자격으로 출정을 주도하고 지휘한다. 왕은 죄고 심판자의 자격으로 심판관들이 해결하지 못한 중요하고 어려운 사건을 심판한다. 왕은 중성 서약을 이행하지 않는 속국의 왕, 귀족간의 재판, 속국 간 분쟁, 사형 문제 등에 관해 심판할 수 있었다.

 히타이트 의회 기관으로 '판구'라는 귀족 의회가 있었다. 판구의 성격과 구성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점토판 자료를 통해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판구는 왕과 왕비, 원로들을 감시하고 왕의 가족 간 분쟁에 대해 심판하는 권한이 있으며 왕위 승계자를 승인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또, 원로 계층이 있었는데 원로의 장은 근위대 대장이었다. 원로에 포함될 수 있는 사람은 근위대 대장 외에 포도주 제조대 대장, 마차대 대장, 전차 기병대 대장, 헌주대 대장, 왕실 시종 대장, 점토판 기록 대장, 나무판 기록관 대장, 목동 대장, 부대 대장 등이었다.

  

4. 법

 

히타이트 법전은 혼인이 일부일처제인지 일부다처제 인지를 밝히고 있지 않다. 유일하게 알려진 사실은 왕은 공식적인 생활과 연계된 유일한 배우자이자 왕비 외에 제2의 왕비 한명과 후궁 한명을 거느렸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왕가뿐만 아니라 히타이트의 귀족들도 이 같은 왕가의 관행을 따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혼인체결의 방식은 약탈과 매매의 두 가지가 있었다고 설명되지만, 최근 이러한 견해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부모는 혼인시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히타이트법전은 부모를 운위하지만 역사적 문서에는 부(父)만이 언급되고 있다.

히타이트 법전에서 특이한 내용은 모(母)에 관한 규정이다. '결혼한 여자 중에서 과부이거나 이혼한 여자는 중대한 사유가 있는 경우 아들을 집밖으로 축출할 수가 있었고, 그를 용서해서 다시 집안으로 수용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규정은 고대 근동의 관습에는 낯선 것이었다.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는 거의 전부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과부가 아들을 축출할 수 있었다면 아버지는 더욱이나 그러한 권리를 가졌을 것이다.

혼인연령에 관하여는 언급이 없다. 결혼한 여자는 통상 남편과 동거하였으나, 친정에 남아 있기도 했다. 히타이트 시대에도 이혼 제도는 있었다. 상호 원할 경우 협의 이혼이 가능하였다. 여자에게도 재산권을 부분적으로 인정하여 남편이 사망할 경우에는 그 재산의 일부에 대하여 권리를 가졌다.

자유인과 노예, 혹은 노예와 노예가 결혼한 후 이혼하게 될 경우 재산과 자녀의 운명에 관하여는 법이 명문으로 규정하였다. 자녀는 1인을 제외하고는 아버지에게 귀속되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양육자로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이 고려되고 제3자는 전적으로 배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혼시의 자녀양육의 주된 책임자는 아버지가 된다.

이러한 규율의 구체적 이유나 사회적 배경은 추측하기 어렵지만 자녀 중 1인을 이혼시, 여자(어머니)에게 반드시 맡기도록 한 것은 이혼한 여자에게 발생할 자녀와의 결별로 인한 인간적인 고통을 덜어주려는 인간적인 배려에서 규정한 것으로 보여진다.

 

 

5. 전차와 철제무기

 

히타이트 인들은 전사 민족들이었고 그들은 훌륭한 전차로 매우 유명하였다. 군대는 전차에 의존했고 전쟁에서 주요 무기가 되었다. 전차는 세명이 탈 수 있어 한 명은 말을 통제했고 다른 한명은 창을 들고 투창을 하거나 근접전투를 했으며, 다른 한명은 활로 공격하였다. 말은 어떤 전쟁에서도 전차를 끌고 가만히 있도록 훈련되었다. 전차는 가벼웠기 때문에 기동성이 우수했다. 전차의 몸체는 가죽을 씌운 목재였다. 몸체는 목재로 된 두 개의 바퀴를 연결한 축 위에 고정시켰다. 이집트 전차와 마찬가지로 바퀴 안에는 6개의 살이 있고 전차는 두 마리의 말이 끌었다. 전차에서의 군사들은 종종 철로 된 갑옷을 입곤 했다.

              히타이트군의 전차

 

히타이트 족들은 처음으로 철을 성공적으로 무기로 이용한 민족이었다. 히타이트 족들과 교류한 아시리아와 다른 민족들이 이것을 퍼뜨리기 전까지 수세기동안 다른 민족들에 비해 히타이트인들은 철제무기로 매우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6. 종교

 

 히타이트는 제정 일치의 나라였다. 신을 숭배하고 제사 지내는 일이 곧 정치였다. 왕은 나라의 대표이면서 제사장이었다. 히타이트인들은 신들을 성스럽게 모셨으며 신들과 하나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신으로부터 왕조와 나라를 보호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농사나 목축이 잘되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신의 은총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히타이트 인들에게는 제의를 바르게 행하는 것이 나라의 안정과 번영을 가져오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들은 제의 절차를 상세한 기록으로 남겼다. 히타이트 인들에게는 제의일이나 종교 축제일이 있었다. 어떤 행사는 일년 중 정해진 날이 있는 것도 있었고, 어떤 것은 6년이나 9년 만에 한 번 돌아오는 것도 있었다. 제의 행사 중에는 왕과 왕비가 하투샤에서 치르는 '안타숨'과 '눈타리야샤'가 있었다. 하투샤에는 히타이트 속국에서 가져온 신상들이 있었기 때문에 수도에서 치르는 이 행사를 통해 히타이트 왕의 권한과 세력이 미치는 모든 속국들의 안정과 번영도 신들에게 기원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히타이트의 종교는 다양한 종족이 가진 요소를 가지고 있다. 히타이트인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종교를 다른 종족들에게 강요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에게 필요한 요소들을 모두 수용하였다. 그들은 속국들의 신도 모두 자기들의 신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종교적인 사고가 다양했다. 초기에는 히타이트인들이 믿는 신의 수가 적었으나 제국 시대에 급격히 증가해 신의 근원이나 종류도 다양해지게 되었다. 히타이트인들이 믿는 신이 수적으로도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신의 족보를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유형상으로도 다양하여, 그들은 '천의 신을 가진 사람들'이라고도 불리워지게 되었다. 태양, 달 산, 지하의 남자 신과 여자 신들은 기본이고 심지어 각종 병의 신들도 있었다. 신의 동상들은 다 자기 자리가 있었으며, 어떤 때는 신들의 신성한 동물이나 특정 물건이 신을 상징하기도 하였다. 히타이트인들이 남긴 점토판에는 무수한 신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신앞에서 기도하는 히타이트 왕

 

7. 예술

 

 히타이트인들의 예술과 근동 지역의 고대 국가들이 남긴 문화와 예술을 비교해본다면, 히타이트의 문화와 예술이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인다. 왜냐하면 히타이트인들이 남겨놓은 유물과 유적의 규모나 수가 다른 근동 국가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한적이나마 히타이트인들이 남긴 유물이나 유적을 살펴보면 히타이트인들의 예술성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얕은 양각으로 세밀하게 부조한 것이 특징이다. 얕은 양각으로 세밀하게 팠기 때문에 사람이나 신의 얼굴을 자세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히타이트인들은 큰 돌을 조각하듯이 깎아가며 형상을 만들어내는 수준 높은 석공술을 보여주었다. 하투샤의 성문에 있는 사자나 전사의 신상과 같은 형상물은 마치 거대한 돌 속에서 튀어나온 것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함으로써 살아있는 생명력과 힘을 과시하는 듯이 보인다. 히타이트의 석조 부조물은 주로 앞면의 표현에 치중하였다. 하투샤의 사자의 문에 있는 사자상이나 알라자회윅의 스핑크스 상을 예로 들 수 있다. 히타이트 부조물에 새겨진 사람이나 동물은 표현하고자 하는 중요한 부분들이 강조되어 있다. 또, 살아 움직이는 듯한 율동감과 대상물의 조화로운 배치와 구도이다.

 석조 부조물 외에도 작은 형태의 예술품으로 동물 형상으로 된 그릇과 인장이 있다. 제의 행사에 사용된 제의용 그릇은 주로 흙으로 만들어졌으나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제기는 검은색, 붉은색, 흰색을 띄고 있으며 기하학적인 구도로 만들어졌다. 히타이트 왕의 상징인, 양쪽에 날개가 달린 태양도 양쪽 대칭으로 기하학적으로 만들어졌다. 히타이트인들이 많이 남긴 것으로는 인장이 있는데, 인장의 형태는 처음에는 주로 실린더형이었으나 점차 도장형으로 바뀌었다. 조그만 돌로 만들어진 인장은 초기 왕국 시대부터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유지되어 온 예술 분야다.

 히타이트 문화도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단일 국민, 단일 종족이 이루어놓은 것은 아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아나톨리아에서 세력을 남긴 종족들이 남긴 문화의 종합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종교와 문학 부분에서는 히타이트의 것이 후리나 바빌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 확인할 수 있지만, 시각이나 조형 예술 부문에서 그 영향을 일일이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요소가 순수한 히타이트 것이며, 어떤 요소가 영향을 받은 것인지 정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히타이트인들도 루비인들이나 팔라인들과 같이 아나톨리아로 들어올 때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적 요소를 가지고 들어왔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히타이트의 사자문

인간의 머리를 한 돌로 만든 사자상

히타이트의 부조

 

 

 

- 결론 -

 

1. 히타이트의 갑작스런 멸망

 

 히타이트의 멸망은 정말 너무 갑자기 이루어졌다. 역사학자들은 히타이트를 침략한 민족을 북방민족 또는 해상 민족이라고 적고 있다. 그들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만족할만한 규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육상과 해상을 통해 침략자들이 아나톨리아 반도에 들어왔다. 이들 침략자들에 관한 기록은 유일하게 이집트에 남아있다. 히타이트가 패망한 연도는 기원전 1190년대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의 발굴 작업 결과, 하투샤는 완전히 불에 타 폐허가 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하투샤가 멸망한 이유는 한 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히타이트의 마지막 왕인 수필룰리우마 2세의 시대에 하투샤 왕실 내 사정도 불안하였다. 당시 점토판 기록관 대장이 수필룰리우마에게 충성 서약을 하면서 남겨놓은 기록을 보면 왕실에 반대하는 세력에 거세져 왕실의 권위가 세워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내부적으로는 하투샤 왕실의 불안정 상황이 계속되고 있을 때 외부에서 쳐들어오는 침략 세력에 의해 하투샤는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터키의 고고학자 에크렘 아쿠르갈은 자신의 저서에서 불확실한 히타이트의 마지막 상황을 이렇게 재현해놓았다. "아나톨리아 서쪽에 있던 트로이 6층 거주지가 기원전 1240년경 폐허가 되자, 오래 전부터 아나톨리아 땅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발칸 민족들이 아나톨리아에 발을 디디기 시작했다. 발칸 민족들은 먼저 트로이를 멸망시킨 후 난공불락인 하투샤를 그냥 둔 채 먼저 아나톨리아 남동부 쪽으로 진격하였다. 그들은 카르카므쉬를 정복하고 시리아를 넘어 아무르를 지나 이집트로 향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해상 민족이 배를 타고 알라시야(키프로스)를 점령하고, 이집트 해안으로 향했다. 홍수와도 같은 이방 민족들의 이주와 공격은 이집트까지 이르는 데 10 ~ 20년이 걸렸다. 말이 끄는 전차와 군대의 물결 속에 우마차에 탄 어린애와 여자들의 행렬도 계속되었다. 마침내 하투샤도 불질러지고 폐허가 되었다."

 

이집트 문명

 

 

 

 

서론

 

이집트문명에 대하여 알고자하여 이집트의 문명발생과 이집트의 왕조와 역사적 변천 과정과 현대의 관점으로 보아도 놀라운 피라미드의 건축기술과 로제스타와 이집트의 문자 해독과 람세스 2세의카데스전투에 대하여 말하고 싶다.

 

본론

 

  1.문명의 발생

 

  최초의 문명은 큰 강 유역에서 일어났다. 제일 먼저 문명이 일어난 곳은 서 아시아의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두 강 유역과 나일 강 유역이었다. 그리고 이보다 늦게 서북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에서도 문명이 일어났고, 동북 아시아에서는 황하 유역에서 문명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4대강 유역에서 문명이 발생한 이유는 인간생활에 유리한 아열대성 기후가 분포하며, 큰 강을 끼고 있어 어로 생활이 가능하였고, 교통도 편리하여 사람이 생활하기에 유리였기 때문이다. 정기적인 강의 범람으로 상류로부터 기름진 흙이 하류로 운반되어 비옥한 옥토가 마련됨으로써, 자연 조건에 지배되는 고대의 농업에 큰 혜택을 주었다. 강의 범람은 인간에게 커다란 시련이 되었으나 이는 오히려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을 극복하는 지혜와 능력을 길러주고, 그러는 가운데서 공동 생활과 도시 국가가 발생하는 기반을 마련하여 문명을 발생시켰다.

 

 2. 이집트의 왕조와 역사적 변천 과정

 

이집트 문화는 하안 문화(Riparian Culture)였다. 최초로 정치적인 동맹이 이루어졌을때 나일강 어귀의 삼각주 지역에 북왕국이 생겼고 멤피스와 나일강의 첫 번째 폭포 사이에 남왕국이 생겼다. 이집트의 실제 역사는 이 초기의 두 왕국의 연합과 함께 시작하는데 이 사건은 기원적 2900년경 제 1대 왕조의 메네스왕의 통치 중에 일어났다.

이집트 역사는 대개 왕조중심으로 분류하고 있다. 연대 특히 제일초기 시대의 것들은 너무 부정확하여 수백년이 틀릴 수도 있다.(이론서 마다 이집트 역사가 각기 틀리게 표기되어있음)여기에서 사용한 신왕국까지의 연대와 분류는 독일의 이집트학자인 게오르그 슈타인도르프의 것을 따르기로 하겠다.

 

구왕국(기원전 2900~2270년)은 제 1왕조로부터 제 6왕조까지 이어진다. 이 시기는 문화가 싹틀 전조의 시기이고 문화의 기초적 형태인 종교와 문자와 예술의 특색이 그 성격을 갖추었던 시기이다. 그것은 또한 기제의 피라드를 미건립한 사람들과 체옵스의 체프렌과 이게리누스 같은 대한 왕들이 시대인데 그들은 모두 제 4왕조에 속한다.

 

제 1과도기(기원전 2270~2100년)는 구왕국의 붕괴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것은 봉건제도로 넘어가는 과도기이며 멤피스에 왕의 권위가 형식적으로 남아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제1 중간기는 제 7왕조로부터 제 10왕조까지로 되어있는데 다 합해서 왕이 30명도 넘는다.

 

중기 왕국(기원전 2100~1700년)은 헤라크레오폴리트 왕들을 축출하고 다시 나라를 통일한 테베스의 군주들이 통치했던 발전의 시기를 나타낸다. 이 시대는 제 11왕조로부터 제 13왕조까지를 포함한다. 이 시대를 우리는 문화의 개화기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 때 피어난 문화양식은 한명의 아메네메트왕과 세 명의 세소스트리스라는 이름을 지닌 네 명의 군주 밑에서 완성되었던, 수없이 많은 뛰어난 건축물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두번째 과도기(기원전 1700~1500년)는 힉소스왕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힉소스 왕조는 셈족이었는데 그들은 나일의 땅에 침입하여 정복하고 한 세기 동안 지배했다. 그들은 결국 테베스의 왕들에 의해 쫓겨난다.(제 17왕조). 아주 최근까지만 해도 힉소스 왕조가 쫓겨난 것은 성경에 나오는 유태인의 춥애굽의 전설과 관련있다고 가정해왔었다. 지금 이 가설은 완전히 배제되었다.

 

신왕국(기원전 1555~1090)은 정치적으로 위세를 떨친 시대였고 제 18조부터 제 20조에 이르는 "황제 통치주의자"인 파라오들의 시대였다. 토트메스 3세의 정복은 근동과 관계를 맺게 하였다. 외국인들은 이집트에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당했고 엄청난 부가 나일의 땅으로 흘러 들어왔다. 훌륭한 건물들이 세워졌다. 아메노피스 3세는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왕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를 계승한 아메노피스4세(네페르티티의 남편)는 위대한 종교개혁자여서 오래된 종교를 태양 숭배의 양식으로 바꾸려 시도했고 그 이유에서 자신을 이크나톤 - '아톤(태양신)이 만족한 사람' - 이라 불렀다. 그는 사막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고 텔-엘-아마르나라고 불렀는다. 그것은 테베스의 경쟁상대가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종교는 내란들 속에서 와해되었고 왕의 사후까지 지속하지 못했다. 아메노피스의 사위인 투탄카멘의 통치하에서 왕궁은 다시 테베스로 옮겼다.

그렇지만 이집트는 제 19왕조의 왕들 밑에서 그 정치적인 권력이 절정에 달했었다. 후에 람세스 대왕이라 불리는 람세스 2세는 66년의 통치기간 동안 아부심벨, 카르나크, 룩소, 아비도스 그리고 멤피스에 있는 기념비적인 건축물들과 라메세움이라 불리는 테베스에 있는 보시 사원에 자신의 무한한 힘을 그대로 나타냈다. 람세스 사후 무질서가 뒤따랐으나 람세스 3세의 21년 동안 계속된 통치기간엔 평화와 질서가 회복되었다. 그 후로는 이집트는 점점 강력해지는 태양신 아멘(아문또는 아몬)의 성직자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세번째 과도기(기원전 1090~712년)는 소요와 권력의 변동이 심한 시기였다. 제 21왕조에서 제 24왕조에 이르는 왕들 중에서 세숑크 1세가 솔로몬의 사원에 뛰어들었던 예루살렘의 정복자로서 우리의 흥미를 끈다. 제 24대의 왕조 밑에서 이집트는 잠깐 동안 이디오피아의 지배를 받았다.

 

후기(기원전 712~525년)에는 제 25왕조의 에사라돈왕 치하에서 앗시리아인들에게 이집트가 정복당한 일이 있었다. 제 26왕조는 이디오피아를 잃기는 했지만 다시 한번 나라를 통일할 수 있었다. 그리스와의 동맹은 무역과 교류에 활기를 띠게 하였다. 제 26왕조의 마지막 왕인 프삼틱(프삼테크) 3세는 펠루시움의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에게 패배했다. 그 후로는 이집트는 페르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기원전 525년에 이미 이집트의 진정한 문화적 역사적 원동력은 다소 진전되었다.

이집트에 대한 페르시아의 지배(기원전 525~332년)는 캄비세스, 다리우스 1세와 크세르크세스 1세를 거쳐 다리우스 2세 하에서 붕괴했다. 이 기간 동안 이집트의 문화는 과거에 의지하여 명백을 이어 왔고 이집트는 '강자들의 전리품'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스와 로마의 지배(기원전 332년~기원후 638년)는 알렉산더 대왕의 이집트 정복과 알렉산드리아의 건설로 시작되었는데,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 대 도시 풍의 초점이 되었다. 알렉산더 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했으나 톨레미 3세에 의해 이집트는 다시 정치적인 자치권과 권력을 찾았다. 예수 탄생 이전의 두 세기 동안에는 톨레마 왕조 내에 반목이 많았다. 이집트는 점점 로마의 영향권 내로 끌려 들어갔다. 후기의 로마 황제들 밑에서 이집트는 자치권을 찾은 것 같이 보였으나 실제로는 로마의 영토이며 로마제국의 곡창이었고 약탈로 철저하게 빈곤해진 식민지였을 뿐이다.

기독교가 아주 일찍이 이집트를 장악했다. 그러나 기원 후 640년 이후로는 아라비아의 칼리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가 후에 터키의 오스만 왕조에 공물로 바쳐졌다. 이집트는 마침내 나폴레옹의 정복에 의해서 복잡한 유럽역사에 휘말려 들어갔다.

 

 

 

3. 피라미드

 

 

일반적으로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거론할 때 대부분 기자에 있는 세개의 대피라미드를 연상한다. 이들은 이집트의 제4왕조(기원전 2613-2494년)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이 피라미드만이 이집트에서 건설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피라미드에 대한 신비를 해석하는데 중요하다. 이집트에는 1백40여개의 대소 피라미드가 건설됐으며, 현재 그 위치가 확인된 것만도 80여개가 된다. 이집트 피라미드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이집트의 특이한 기후의 산물인 미라와 고대 이집트인들의 내세관을 알아야 한다. 고대 초기 이집트에서 사망한 사람을 매장하는 일은 매우 간단했다. 사막 경계 지역에서 시체를 약간 깊은 구덩이에 넣고 모래로 덮었을 뿐이다.

건조한 공기와 더운 모래의 접촉을 받은 시신에서 급속한 탈수 현상이 일어났다. 이때 수의가 썩기 전에 자연적인 방법으로 미라가 만들어지곤 했다. 이집트인들은 우연히 육신이 보존된 미라를 발견하고 내세에서 생을 영위하기 위해 미라처럼 시신이 보존돼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구덩이가 커다란 무덤으로 변하고 관이 사용되자 시신은 모래와 직접 접촉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인공적으로 미라를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한편 공들여 미라를 만들어도 끊임없이 불어 닥치는 사막의 바람이 무덤을 파손되고 재칼과 같은 동물이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훼손하곤 했다. 그러므로 무덤을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도 동시에 생각해야 했다.

  

 세계의 중심에 위치-세계 대륙을 4등분

 

 피라미드의 대명사는 이집트 쿠프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대피라미드(기원전 2천5백년 추정). 과학자들이 가장 많은 연구를 수행한 피라미드다. 대피라미드 옆에는 쿠프왕의 아들과 손자의 무덤으로 알려진 두 개의 피라미드가 우뚝 서있고, 왕비의 무덤이라는 작은 피라미드 6개가 3개씩 2줄로 배치됐다.

이 9개의 피라미드는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서남쪽 가까이에 위치한 기자지역에 있다. 흥미로운 점은 대피라미드의 위치가 여러 면에서 지리학적인 중심이라는 점이다. 먼저 대피라미드를 중심으로 수직선(동경 31도)과 수평선(북위 30도)을 그리면 전세계 대륙 면적이 거의 4등분된다. 또 나일강 삼각주 지역의 끝부분을 원호로 연결할 때 대피라미드는 원의 중심에 위치한다(그림 2). 이곳은 고대의 상(上)이집트와 하(下)이집트의 경계를 이루는 지점이기도 하다. 대피라미드가 세계의 어떤 중심이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다.

 

 

현대 기술이 손 든 정밀성-밑변을 높이로 나눈 값은 π/2

 

 대피라미드를 밖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두 번 놀란다. 먼저 대피라미드의 엄청난 규모에 일종의 신비로움을 느낀다. 그리고 이 구조물의 건축학적 정밀성을 확인하고 감탄하기에 이른다.

대피라미드의 네변 길이는 모두 2백30m 정도. 평균 2.5t의 무게와 어른 키만한 돌로 이렇게 길게 받침을 세우려면 아무래도 각 변의 길이가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소숫점 첫째 자리에서 값의 차이가 날 뿐 거의 비슷하다. 또 각 밑변이 각각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고 밑변의 각 모서리가 90도를 이루는데, 무시할 정도로 오차가 작다.

현대의 건축학자들은 이런 정밀도를 가진 거대한 건물을 짓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더욱이 밑변 하나의 길이를 높이(1백46.6m)로 나눈 값은 1.57. 원주율(3.1416)의 절반에 해당하는 이 수치까지 고려된다면 피라미드의 건축 과정은 더욱 복잡했을 것이다.

또 사람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끈 장소는 일명 ‘왕의 방’이다. 밑면에서 3분의 1 떨어진 곳에 위치해 면도날을 재생시키고 부패를 막는 등 ‘피라미드 파워’를 일으킨다는 곳이다. 이곳에는 어떤 수치들이 숨겨져 있을까. 먼저 눈에 띄는 점은 ‘왕의 방’의 가로와 세로를 비롯한 여러 가지 건축 구성 비율이1:1.618, 즉 황금비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흔히 황금비는 기원전 4세기를 전후한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 발견됐다고 알려졌는데, 이보다 훨씬 이전에 건축된 피라미드에서 나타난 것이다.

 

 지구 크기를 상징한다 - 43200의 비밀

 

 과학자들은 대피라미드에서 측정된 각종 수치들을 여러모로 연관시켜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대피라미드에 숨겨진 천문학적 수치가 드러났다.

먼저 과학자들은 피라미드가 독특한 단위를 가졌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현재 보편적으로 알려진 1피라미드 단위는 지구의 남북극 거리를 2천만으로 나눈 수다. 이 단위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밑변 하나를 이 단위로 나눈 값은 약 365. 잘 알고 있듯이 이는 1년의 날짜다.

지구의 세차 운동과 연관된 수치도 발견됐다. 지구의 적도 둘레는 약 4만75km, 반지름은 약 6천3백78km. 그런데 이를 ‘4만3천2백’으로 나눠 보니 이상한 값이 나왔다. 먼저 적도둘레를 나누면 약 9백27m가 산출된다. 피라미드 네변의 합과 거의 유사한 값이다. 또 지구 반지름을 나눈 값은 약 1백47m. 피라미드 높이에 거의 일치한다. 피라미드의 둘레와 높이가 지구의 크기를 상징하는 셈이다. 문제는 '4만3천2백’이란 값이 어떻게 산출된 것이냐는 점이다.

이 값은 세차 운동에서 발견되는 특정 값인 ‘4천3백20’을 10배한 수치다. 세차 운동은 지구 축이 약 2만6천년을 주기로 3백60도 회전하는 운동이다. 그런데 한 학자가 지구가 60도를 이동하려면 약 4천3백20년이 걸린다는 점에 주목했다. 마침 4만3천2백을 비롯해 4천3백20, 4백32와 같은 수는 고대 신화에 자주 등장해 학자들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4만3천2백’이란 수치를 피라미드 둘레와 높이가 갖는 의미를 해석하는데 사용했다.

 

 고대 이집트인의 독자기술

 

피라미드는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비록 현대인들에게 거대한 피라미드에 많은 비밀이 간직돼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인들에 의해 당시의 기술로만 건설된 것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논할 때마다 우선적으로 대두되는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신석기 후반으로 볼 수 있는 고대 이집트에서 어떻게 커다란 피라미드들을 건설했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피라미드를 만든 공구와 방법에 대해 살펴보자.

이집트인이 사용한 공구는 단단한 돌덩어리, 나무에 묶는 원형 망치나 도끼류, 날카롭게 갈은 칼과 같은 돌 종류와 동과 같은 금속류로 만든 칼이나 가위다. 구리와 같은 연한 금속의 경우 현재의 합금과 같이 몇가지 불순물을 사용해 강도를 높이는 방법을 알았을 것이라는 가정도 있지만 연장의 대부분이 단단한 석재였다고 추측된다.

일부 사람들은 이런 원시적인 공구로 대형 피라미드를 건설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또 고대 이집트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돌항아리의 숫자와 가공 기술을 근거로 특수 기술을 가진 공구가 사용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피라미드의 건설에 사용된 돌덩어리의 거의 대부분이 석회암이라는 점을 간과했다. 석회암은 석회물질이 물밑에 쌓여 굳어진 퇴적암으로, 경도가 가장 무른 활석 다음으로 가공하기 쉬운 재료다. 따라서 고대 이집트인들이 초보적인 연장으로도 능히 자신들이 원하는 규모로 재단하거나 가공할 수 있다.

 

 비탈길 타고 돌 운반

 

대형 돌들을 채석장에서 절단하는 방법론도 논란거리가 되곤 한다. 그러나 채석장에서 돌을 추출할 때 나무 쐐기를 박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쐐기의 부피가 증가해 간단하게 절단이 가능하다. 실제로 이집트의 채석장에서 수백t의 대형 돌기둥인 오벨리스크가 미완성인 채 발견됐는데, 이곳에 쐐기를 사용한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렇다면 대형의 돌은 채석장에서 어떻게 기자 지역으로 옮겨졌을까. 기자의 대피라미드 석재는 기자 지역 외에 2곳의 채석장에서 공급됐다. 피라미드 외벽용으로 사용된 매끄러운 석회석은 기자 지역 근처의 카이로에서 50km 떨어진 투라에서 채석됐다.

그리고 피라미드 내부에 사용된 화강석은 카이로에서 9백km 떨어진 나일강의 첫번째 급류 부근에 있는 아스완에서 가져왔다. 평균 중량 2.5t, 큰 것은 70t이 되는 돌덩어리를 아스완에서 운반하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문제는 나일강이 범람하는 시기에 거대한 거룻배로 돌을 운반하고, 항구에서 현장까지 썰매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대피라미드 남쪽에서 발견된 '제1 태양의 배'는 당시 이집트의 건조 능력을 보여준다. 현재 원형이 복원돼 전시되고 있는 이 배는 좌우측에 5명씩, 그리고 배 앞뒤에 1명씩 총 12명의 노젓는 사람에 의해 운행된 것으로 보인다. 배의 규모를 볼 때 총길이 42.3m, 폭 5.6m로서 한번에 약 1백50t의 물건을 운반할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피라미드 건설에 대한 가장 큰 논란거리는 어떤 방법을 사용해 원하는 높이까지 거대한 돌을 옮겼냐는 것이다.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비탈길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즉 피라미드 한쪽 옆면에 경사로를 만들고 지레를 설치해 썰매에 얹혀진 돌덩어리를 상부로 끌어당기는 방식이다.

피라미드가 높아질수록 비탈길의 길이가 길어지는데, 이때 비탈길이 주저앉지 않도록 경사각은 항상 거의 10도를 유지했다. 실제로 대피라미드에 대한 근래의 조사에서 이런 증거가 발견됐다.

  

 왕의 은밀한 무덤

 

왕들의 골짜기.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길이 500m, 너비 1㎞인 음산한 골짜기. 이집트 나일강 중류의 룩소르 서쪽에 있는 이 골짜기는 지금으로부터 3천∼4천년 전 이집트를 다스린 파라오(왕)들의 무덤이 들어찬 곳이다.

왜 왕들은 이렇듯 도읍지에서 멀리 떨  어진 음산한 골짜기의 벼랑과 바위 틈에 그들의 주검을 숨겼을까. 왕들은 처음에는 자기들이 죽은 뒤에 머무를 곳으로 피라미드를 세웠다. 또 영혼이 다시 찾아들도록 자신들의 시체를 썩지 않는 미라로 만들게 했다.

피라미드는 어떤 침략에도 견디게끔 거대하게 만들고, 도둑질 당하지 않도록 입구를 비밀에 부쳤다. 그러나 왕들의 뜻과 달리 피라미드의 보물은 도둑들에게 번번이 털렸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비밀장소에 무덤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 아이디어를 처음 낸 왕은 토트메스 1세였다. 그는 오랫동안 적당한 장소를 물색한 끝에 자기 무덤을 이 골짜기의 벼랑 틈에 숨기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무덤을 만든 장소를 비밀에 부치고자 잔인한 살육극이 벌어졌다. 왕의 신하는 전쟁포로 100여명을 데리고 무덤을 만든 뒤 그들을 모두 죽였고, 그 또한 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 뒤로 모든 파라오의 주검은 피라미드가 아니라 ‘왕들의 골짜기’에 숨겨졌다. 그리하여 파라오의 미라들은 약 3천년 동안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 이집트 왕가가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 믿었던 이 비밀장소는  안전하지 않았다.

 

 

로제타스톤

 

아주 짧은 유럽 역사와 그보다 조금 앞선 그리스·로마의 역사밖에 모르던 유럽 사람들에게 로마를 수천 년이나 앞선 이집트 문화가 던진 충격은 매우 컸다. 유럽이 아직 원시적인 떠돌이 사냥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이집트는 통일 왕국을 이루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이집트의 수천 년 유산 가운데 피라미드 하나만 해도 2t짜리 돌 250만 개로 쌓은 것이다. 유럽인들이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런데 한 가지 난처한 문제가 생겼다. 이집트의 유적과 유물을 눈으로 볼 수는 있으되 거기에 담긴 속뜻은 알 수 없었던 까닭이다. 상형문자인 것 같은 이상한 기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무덤 안의 벽화나 탑에는 물론 심지어 잉크 스탠드나 지팡이에까지도. 그런데 그것들을 단 한 가지도 해독할 수 없었다.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왕국의 문화유산을 뻔히 보면서 수백 명에 이르는 왕의 이름 하나도 알 수 없다니,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4000년이나 쓰였던 상형문자를 풀 단 하나의 열쇠로 로제타스톤이 꼽혔다. 그러나 30년이 넘도록 수백 사람이 달라붙었어도 거기에 담긴 비밀은 풀리지 않았다 .로제타스톤이란 길이 1.25m,너비 0.7m,두께 0.28m인 검은 돌이다. 이 돌은 1799년 나폴레옹 원정군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동쪽으로 60㎞ 떨어진 로제타 마을에서 요새를 쌓을 때  발견했다.

단단하고 결이 고운 검은 빛 현무암에는 반질반질한 쪽에 각기 다른 세 가지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첫째 단 14행은 이집트 상형문자로, 둘째 단 32행은 민용문자로, 셋째 단 54행은 그리스어로써 있었다.

셋째 단의 그리스어를 번역해 보니 기원전 196년에 이집트 신관들이 프톨레미 왕의 공덕을 찬양한 글이었다. 로제타스톤은 영국군에게 빼앗긴 다른 유물들과 함께 대영박물관으로 보내졌지만, 석고로 뜬 사본은 파리로 갔다. 학자들이 연구해 보니 같은 내용을 세 가지 글자로 써놓은 것이었다. 학자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스어를 아는 이상 나머지 두 가지 문자를 푸는 일은 쉬울 것이니, 이집트 문명의 수수께끼를 풀기란 시간문제라고 보았다.

언어·역사·고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모두 이 일에 매달렸다. 그들은 이집트 상형문자가 뜻글자라고 못 박고 거기서부터 실마리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천재 언어학자 존 푸랑수아 샹폴리옹이 나타나기까지 어느 누구도 이것을 풀지 못했다.

 

 현대의 이집트 문자 해독

 

오늘날 학자들은 샹폴리옹이 밝힌 이론으로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한다. 상형문자는 4,000년 동안 계속 변해 왔기 때문에 한 가지 비명을 해독했다고 해서 그 지식을 가지고 다른 것을 똑같이 풀어낼 수는 없지만, 샹폴리옹의 이론을 응용해 조금씩 조금씩 해독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이제는 한 비문을 읽을 때 첫 번째 줄은 오른쪽부터 읽고 두 번째 줄은 왼쪽부터 읽으며 세 번째 줄은 위에서 아래로 읽어야 한다는 것까지 알려져 있다.

오늘날 학자들은 샹폴리옹이 쓴 ‘이집트어 문법’을 밑거름으로 하여 옛글을 해석할 뿐 아니라 글을 쓸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집트 상형문자가 다 풀린 것은 아니다. 이집트학은 아직도 샹폴리옹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샹폴리옹은 이미 상형문자 가운데 어떤 것은 알파벳과 같은 소리(음가)를 나타내고 어떤 것은 부호 하나가 그대로 한 낱말이기도 하며 또 어떤 부호는 그 하나로 아주 복잡한 뜻(개념)을 나타내기도 한다고 밝혔다. 이 수수께끼들이 다 풀리려면 또 다른 샹폴리옹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위대한 두 제국

 

 

피라미드를 본 관광객들은 아스완의 아부심벨 신전을 보았을 때 다시 한 번 놀란다. 아스완에서 남쪽으로 320킬로미터 떨어진 돌산의 벽면을 깎아 만든 아부심멜 신전의 정면은 파라오의 모습을 한 4개의 거상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각 조상은 높이가 20미터, 얼굴의 귀에서 귀까지의 거리가 4미터, 입술의 폭이 1미터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이기 때문이다. 정면 조각 뒤로 돌산을 파서 만든 신전은 매년 춘분과 추분에 아침의 햇빛이 신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태양신과 파라오의 조상을 환하게 비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 신전을 건설한 사람은 이집트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인 제19왕조의 제3대 파라오였던 람세스 2세이다. 그가 통치하던 시대는 이집트의 최절정기로 일명 ‘제국 시대’라고 불린다.

람세스 2세 시대의 이집트 및 오리엔트 지역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력을 갖고 있던 이집트와 지금의 터키 지역에 있던 히타이트가 양분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대의 번영기를 누리던 이집트, 인류 역사상 최초로 철기를 사용한 강력한 히타이트. 두 제국 사이에 거대한 충돌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카데시 전투이다.

 

히타이트

 

   핫투사스 유적

 

19세기 중반까지 히타이트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고대의 국가였다. 히타이트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888년에서 1892년에 걸쳐서 독일의 고고학자 루우샨을 중심으로 하는 조사단이 터어키의 동남단 진지르리에서 독특한 스타일의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발굴한 데서부터 시작한다. 이곳이 바로 핫투사스라는 동서 1킬로미터, 남북     2킬로미터의 히타이트 왕국의 수도였다. 핫투사스에서 발견된 수많은 점토판이 해독되고서야 비로소 히타이트의 존재는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기원전 17세기 후반에 현 터키 지역을 통일한 핫투시리시 1세는 통일 왕국의 수도를 키질강 만곡부의 중심 지점으로 옮기고 자기의 이름을 따서 핫투사스(Hattusas)라고 명명(命名)했다. 핫투시리시 1세는 통일 왕국을 핫티 왕국이라고 불렀고 스스로를 핫티의 왕이라고 칭했지만, 역사학자들은 지명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히타이트 왕국이라고 부른다.

히타이트는 점차로 세력을 키웠고, 기원전 1530년경에는 무르실리시 1세가 군사를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남진하여 함무라비 왕의 후손이 통치하고 있던 바빌로니아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히타이트 왕실 내부에서 권력 투쟁이 일어나자 히타이트는 바빌로니아 통치를 단념하고 본국으로 철수하지만 왕은 암살된다.

그 후 1세기 반 동안 침체해 있던 히타이트는 기원전 15세기 후반부터 1세기 동안 인접 지역의 강국 미탄니와 격렬한 전투를 계속한다. 히타이트의 동쪽에 위치한 미탄니가 가장 번성할 때는 미탄니 군이 히타이트의 영토 내에 깊숙이 침입하여 간신히 수도 주변만 부지할 때도 있었다.

이때 나타난 영웅이 슛필룰리우마시 1세로 그는 수도에 거대한 성을 쌓아 본거지를 튼튼히 하고 후방 지역의 여러 소국과 동맹을 맺어 후방의 위협을 배제한 다음 미탄니를 공격했다. 이 공격은 주효하여 미탄니의 수도는 함락되었고 그곳에 친(親) 히타이트 정권을 수립하여 동부의 방위를 철저히 하였다.

이때 히타이트와 맞설 수 있는 국가는 남부의 이집트뿐이었다. 당시 이집트의 세력권은 가나안까지 미치고 있었다. 히타이트가 미탄니를 정복하자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국경에 접하게 되었고 두 대국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당시 이집트를 지배하고 있었던 람세스 2세는 통치 초기에 광대한 건축 설계에 몰두해 있었다. 그는 북쪽의 나일 강 삼각주에 있는 타니스로부터 남쪽 누비아 지방의 아부심벨에 이르기까지 이집트 전역에 걸쳐서 방대한 도시들과 기념물들을 건설하여 ‘건축의 대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세계 정세는 그를 추후에 이름이 붙는 ‘건축의 대왕’으로만 놔두지는 않았다. 그로서는 이집트와 국경을 마주보고 있는 히타이트로 하여금 어떠한 경우라도 이집트를 침략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에게 이집트가 강력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는 이집트의 국경과 마주치고 강력한 제국 히타이트와 전쟁의 대 서사시이자 기록으로 남겨진 전투 중에서 가장 오래된 카데시 전투를 벌이기 위해 재위 5년 여름에 피람세스(세티 1세가 델타 동부에 세운 도시)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했다.

 

카데시 전투

 

카데시 전투는 이집트와 히타이트, 양 대국에서 가장 많은 장병들이 참전한 대규모 전투로서 그 중요성을 갖고 있다. 이집트는 전차병을 포함하여 2만 명의 장병을 동원했고 히타이트도 3만 5천 명이나 동원했다.

람세스 2세는 직접 5천 명의 장병으로 구성된 아몬 사단을 지휘하였고 역시 각각 5천 명으로 구성된 라, 프타, 세트로 이름 지은 세 개의 사단이 뒤따르도록 했다. 각 사단은 250명으로 구성된 20개의 중대로 나뉘어져 있었다. 람세스 2세오는 카데시 남쪽에 있는 산악 지대에서 멈추었다가 북쪽에 있는 샤브투나라는 도시로 진행했다. 그 도시의 남쪽에는 오론테스 강을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이 있었다.

이때 두 명의 베두인이 람세스에게 다가와서 투항했다. 그들은 히타이트 군대가 북쪽의 아주 멀리 있는 알레포 부근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람세스 2세의 아몬 사단은 카데시를 통과한 상태였고 나머지 세 개의 사단은 매우 뒤 처져 있었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투항한 베두인의 정보로 보아 적은 매우 멀리 있었으므로 람세스 2세는 곧바로 전투태세를 갖추지 않고 진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두인은 무왓탈리시가 보낸 첩자였다. 히타이트 군대는 실제로 람세스 2세와 지척인 카데시 북동쪽 성채 안에 집결해 있었다. 그들은 우선 람세스 2세와 후발(後發) 사단을 분리시킬 계획으로 2,500대라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전차병을 투입하여 아몬 사단을 뒤따르던 라 사단을 급습하였다. 레 사단이 히타이트 군의 공격으로 궤멸되자 무왓탈리시는 곧바로 람세스 2세가 지휘하는 아몬 사단을 공격했다. 이 급작스러운 공격으로 람세스 2세의 아몬 사단 역시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람세스 2세는 곧바로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자신의 신인 ‘아몬’을 의지하여 고함을 지르면서 전투에 참가하여 직접 장병들을 격려했다. 다행하게도 지원군인 나아룬 군과 파 사단이 도착하여 꼼짝없이 사로잡히기 직전의 람세스 2세를 극적으로 구출하였다. 나아르 군은 가나안인 외인 부대 병사들로 구성된 특공대로, 이들의 도착은 람세스가 미리부터 계획해 둔 작전이었는데 절묘하게 그 시기가 맞아 들어간 것이다. 포위망에서 구출된 람세스 2세는 오히려 공격으로 나서 히타이트 전차병들을 카데시 남쪽으로 몰아낸다.

그러나 히타이트의 무왓탈리시는 자신의 군대가 쫓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만 8천 명에 달하는 주력 부대를 투입하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무왓탈리시의 이 이상한 조치를 이미 이집트 군의 일부가 궤멸되었기 때문에 협약으로 끝나는 외교를 예상하고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으로 추측한다. 즉 자신의 목적은 달성한데다가 이집트를 궤멸시킨다고 해서 이득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왓탈리시는 양국의 지리적인 위치로 보아 이집트를 점령한다고 해도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우선 현 터키 지역에서 이집트까지를 일사불란하게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히타이트의 동쪽에는 아시리아가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아시리아가 공격해 오면 전선이 길어져 양 지역을 방어하기에 힘들므로 차라리 이집트와 협정을 맺어 아시리아의 공격에 대비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최초의 국제 조약. 빈클러판에 써있다. 내용:“히타이트의 위대한 지배자는 결코 이집트 땅을 침범하지 않는다. 이집트의 위대한 왕인 람세스는 결코 히타이트의 땅을 침범하여 약탈하지 않는다”)여하튼 이 당시의 전투에 대해서는 수많은 자료가 있다. 우선 람세스 2세는 건축의 대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수많은 건축물을 건조했는데 그는 자신이 세운 건물 거의 모두, 즉 아비도스, 카르나크, 룩소르, 아부심멜, 라메세움 같은 여러 대신전과 누비아에 있는 두 개의 성소, 즉 아부심멜 대신전과 데르 대신전의 벽에 카데시 전투에 대해 기록했다. 이 벽화는 전투에 임하는 람세스 2세와 전투 상황을 자세하게 적었다.

람세스의 공적과 전사들의 전투 장면으로 활기가 넘치는 구성은 고대의 상투적인 전쟁화(戰爭畵)와 비교해 볼 때 혁신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부의 부조 벽화는 전투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하나 정교하게 기록하고 있고, 전투에 대한 독창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글도 첨가되어 있다. 내용은 당연하지만 람세스 2세가 이 전투에서 철저하게 적을 패배시키고 자신의 권력을 국제적으로 과시했다는 것으로 추후에 어느 국가에서나 있었던 개선 장군의 기록과 같다.

 

 

그리스 시대에 대해

 

 

폴리스의 성립과 발전

 

 

 

 

1. 폴리스의 성립과 발전

2. 아테네

3. 스파르타

 

 

 그리스인의 문명은 기원전 1200∼800년에 걸쳐 있었던 인도-유럽어족의 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 시대에 관한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밖에 없으므로 이 때를 '호메로스 시대' 혹은 '암흑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초기의 이동은 그리스인의 일파 이로이아족에 의한 것이며, 이밖에 아케아족은 더 남쪽으로 이동하여 미케네와 트로이를 정복하고 마침내 크레타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도리아족은 그 일부가 그리스 반도의 중아에 자리잡았으나, 대부분은 펠로폰네소스의 동쪽을 정복하면서 지중해로 진출하여 에게해의 섬들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1000년경에는 드디어 크레타의 미노스 문명의 중심인 크노소스를 점령하였다.

 고대 그리스인이 정착한 그리스 반도는 대체로 오늘날의 스위스보다 약간 큰 지역이다(57,000㎢).  이 일대에는 산악이 많고 해안선은 매우 변화가 심해서, 포르투갈보다 작은 이 나라가 스페인만큼의 해안선을 갖고 있으므로 수많은 천연항구를 개발할 수 있었다. 그리스 본토 중앙에는 핀도스(Pindos) 산맥이 있으며, 서남의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평균 해발 600미터의 높은 지대이다. 그리스의 지형은 대체로 일반곡물의 재배에 적당하지 않으며, 그 대신 올리브나 그 밖의 과일재배에는 적절하였다. 기후는 매우 온화한 편이며 아테네에는 20년 만에 한번 얼음이 어는 정도이다. 여름에는 바닷바람이 더위를 어느 정도 완화시켜 주므로 아테네인은 소박한 衣·住 생활을 할 수 있었다.

 

 

1. 폴리스의 성립과 발전

 

 그리스인은 대체로 기원전 1000년경부터 씨족 공동체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사회적 단위는 씨족(genos)-門族(phratria)-부족(phyle)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집단적 단위는 공동의 종교적·사법적·생산적 기능을 하였다. 생산은 공동으로 하고 토지경작에서 나온 생산물은 균등 분배하였다. 그러나 이윽고 이러한 자급자족의 경제형태에 변화가 와 토지는 추첨에 의해 분배되고 세습적인 사유지(kleros)로 되었다. 토지가 사유화되면서 종래의 혈연사회가 지연사회로 바뀌어 기원전 9∼8세기에는 폴리스(polis)가 성립하였다. 왕은 동방적 전제군주와 다르며 비록 사법·군사·종교를 관장하고 있었으나, 왕 아래에는 선거에 의한 각 촌락조직마다 있는 장로회의의 결정이 큰 영향을 갖고 있었다. 한 마디로 그리스의 폴리스는 그리스인의 정치·경제·사회생활의 기본적인 요소이며 배타적인 단위였다. 폴리스는 한 복판의 산언덕 위에 긴급시의 피난처로서 아크로폴리스(Acropolis)를 마련하고, 동시에 신전을 건축해 놓았다. 성벽 안에는 시민들이 살고 성벽 밖에 외국인의 거주가 허용되었다. 폴리스는 본토에 100여 개가 있었으며, 식민지까지 합쳐서 폴리스의 총수는 1000을 넘었을 것이다. 그 규모는 다양하였으며, 예컨데 인구는 수천으로부터 20∼30만 명에 이르렀는데 평균 인구는 5천명이었다. 폴리스들은 상호간에 정치적 지배관계가 전혀 없는 자주독립의 사회였으며, 상호간에 전체적인 정치적 통일성이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인은 동일한 언어·종교·생활습속을 갖고 있었으며, 자기들과 언어가 다른 민족을 바르바로이(barbaroi)라고 지칭하여 이민족을 차별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거주지를 헬라스(Hellas)라 부르고, 스스로를 헬렌(Helen)신의 후예인 헬레네인(Hellenes)이라 믿는 강한 유대의식을 갖고 있었다.

 폴리스의 식민활동 기원전 8∼7세기에 그리스의 식민운동이 활발해지고 아울러 교역도 발달되었는데, 이 양자 사이에는 상호관계가 있었다. 그리스의 식민운동의 이유는 여러 가지로 생각될 수 있다. 첫째로, 귀족층에 의해서 토지가 집중적으로 독점되어 영세농이 증가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지적될 수 있다. 그 결과 농민들은 새로운 경작지를 찾기 위해서 밖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둘째로, 폴리스 자체의 성장·발전을 들 수 있다. 인구가 많이 증가하였으므로 이주는 어느 정도 불가피하게 되었다. 셋째로, 도시는 번영하고 시장이 확대되었다. 넷째로, 폴리스 안에 정치적 분규가 일어나서 불평집단은 식민을 통해서 새로운 땅을 개척하게 되었다. 다섯째로, 모험 열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로 식민지가 수립되었던지 간에, 신설도시는 모국에 대해 정치적인 예속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자주 독립의 정치체제를 갖고 있었다. 다만 모국의 제도·관습·종교는 그대로 보존되었으며 문화적 ·종교적 유대는 유지되었다. 식민운동의 범위는 매우 광범위하여 동쪽으로는 소아시아의 밀레토스(Miletus), 서쪽으로는 남 이탈리아의 大그리스(Magna Graecia) 및 남 프랑스의 마르세이유(Massilia), 지브롤터(Gibraltar) 해협, 북쪽으로는 흑해연안, 트라키아(Thracia), 남쪽으로는 동북 아프리카 및 이집트에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기원전 600 년대까지에는 지중해와 흑해 연안에 그리스 식민지가 널리 흩어져 있었으며, 오직 페니키아 계통의 카르타고 만이 그리스의 식민운동에 맞설 뿐이었다.

 

 폴리스의 정치적 발전 폴리스는 서로 상이하고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그 정치형태는 특정의 단계적 발전을 거치는 경향이 있었다. 아티카 지방의 정치적 발전을 단순화시켜 생각한다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네 단계로 나뉘어질 수 있다.

 

(1) 왕정시대(1000∼800 BC) : '호메로스의 시대'로서 농업·목축이 주업이며 고대 동방(근동지방)과 상업적 접촉이 있었으며, 아마도 페니키아의 문자(알파벳)가 기원전 900년경 그리스에 알려졌을 것이다. 이 시기에 대한 사료는 매우 빈약하며 다만 호메로스의 2대 서사시를 통해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2) 과두정 시대(800∼550 BC) : 귀족지배가 이루어진 시대였다. 귀족과두정의 성립 이유는 첫째, 전쟁에 있어서의 기병의 역할이 점점 더 중요하게 되었다는 점, 둘째 일부에서 富를 더욱 더 많이 소유하게 되었다는 점등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시기의 두 가지 중요한 발전은 식민과 교역 및 산업의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3) 참주정 시대(660∼500 BC) : 참주는 최고의 정치권력을 불법으로 찬탈한 사람으로 독재정치를 하였다. 그러나 참주(tyrannos)는 폭군이라기 보다는 18세기적인 계몽군주에 가까웠다. 참주는 대개 귀족 출신으로 업적을 쌓아 민심을 얻어서 평민과 결탁하여 귀족세력을 억눌렀다. 참주가 출현한 이유는 부유한 중산층의 대두로 말미암은 계급투쟁과 중무장 보병의 군사적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4) 민주정 시대(500 BC  이후) : 많은 도시국가들이 최종적으로 민주정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는데, 특히 아테네의 경우가 가장 전형적이었다.

이상과 같은 정치적 발전과정은 주로 아테네에 의해 대표되는 폴리스들의 집단에서 볼 수 있다. 스파르타 및 스파르타와 같은 폴리스 계열에서는 이러한 정치체제의 변천 패턴을 따르지 않는 독특한 군사적 독재주의로서 일관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리스의 폴리스들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두 폴리스, 즉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경우를 비교함이 유익할 것이다.

 

2. 아 테 네

 

 그리스 전역에 흩어져 있던 수많은 폴리스는 그 정치적·경제적 체제에 있어서, 아티카(Attica)형과 라코니아(Laconia)형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아티카형 폴리스는 대체로 이오니아인들이 건설한 국가로서 상공업을 주로 영위하며 민주적 개방사회로 발전하였다. 이에 반하여 도리아인 계통의 라코니아형 폴리스는 농업에 의존한 보수적·과두제적 왕정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하여 아티카형 폴리스는 아테네에서, 라코니아형 폴리스는 스파르타에서 각각 가장 대표적인 사회체제의 발전과정을 나타냈다.

 

 아테네(Athens)에서는 기원전 7세기 초에 왕권을 제한하는 귀족제도가 수립되었다. 왕(basileus)은 세습제에서 선거제로 선출되다가 7세기 초에 그 통치 기간마저 10년으로부터 1년으로 줄어들어, 왕정은 실제로 폐지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원전 638년경에는 집정관(archon)을 비롯한 9명의 최고행정관들이 행정, 사법, 군사 등의 주권을 장악하였다. 이 9명의 최고행정관에는 왕(archon basileus), 군지휘관(polemarchos), 아르콘 6명의 사법관(themothetai) 등이 포함되었다. 이제 왕정시대부터 존속해온 귀족회(areopagos)가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귀족 과두제는 토지재산이 소수 귀족들에게 집중 소유되어 초래된 결과이며, 또한 이러한 체제는 토지소유를 더욱 더 집중시켰다. 포도와 올리브 등의 재배가 시작되면서 농업경영의 집중화는 한층 촉진되었다. 많은 농민들은 부채에 허덕이게 되고 유랑하게 되었다. 무장할 재력이 없는 평민은 정권참여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7세기경 리디아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화폐의 영향을 받아 상공업은 더욱더 성장하고 마침내 평민 가운데서 부유한 상공업 계급이 성장해 나왔다. 한편 전술상의 변화가 일어났다. 종래의 기병에 대신해서 중무장밀집대형(phalanx)이 채택됨으로써 보병의 중요성이 증대하였으며, 많은 평민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따라서 정치에 대한 평민의 발언권이 커지고 이것은 7세기 말의 입법에 반영되었다(Dracon 입법, 621 BC). 그러나 농민의 상태는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으며, 도시의 중산층은 정치적 민주화정책을 요구하게 되어 마침내 기원전 6세기 초에 개혁이 실시되었다(594 BC). 솔론(Solon, 639∼558 BC)은 아르콘으로 선출되어 모든 개혁의 수행을 담당하게 되었다.

 

솔론 개혁은

(1) 새 회의체, 즉 4백인회를 창설하고 중산층의 참여를 허용한 점

(2) 하층계급에게 민회참정권을 부여한 점

(3) 모든 시민에게 개방된 전체 남자시민의 선거에 의한 최고재판소(heliaia)를 설치하고 배심원 제도를 채택한 점(이 재판소는 아르콘의 결정에 대한 항소를 심리한다) 등의 정치적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경제적으로는 긴급조치로 가난한 농민의 채무를 취소하고 장차의 채무 노예제를 금지하며 토지소유의 상한을 결정하였다. 외국과의 교역에서 아테네인에게 유리하도록 새로운 화폐제도를 실시하였으며, 게으른 사람에게는 무거운 벌과금을 과하고, 영주하고자 하는 외국 출신 수공업자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솔론은 시민계층을 개산소유 정도네 따라 4계급, 즉 제1계급(pentakosiomedimnoi), 기사계급(hippies), 농민계급(zeugitai), 노동계급(thetes) 등으로 나누어 각각 정치적 지위를 규정하였다. 그러므로 솔론의 정치형태를 금권정치(timocracy)라고 말할 수 있다. 제1계급은 年收 500 medimnoi(약 110石 이상), 기사계급은 300 medimnoi(65石), 농민계급은 150 medimnoi(32石)의 年收를 올렸다. 노동계급은 빈민·노동층으로서 전시에는 운반임무를 맡는다든지 배의 漕手로 일하였는데, 페르시아 전쟁 때에 조수들의 공이 컸으므로 그 이래로 노동계급의 사회적 발언권이 증대하였다. 이러한 개혁은 비록 주목할 만한 것이라 해도 사회 각층의 불평불만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었다. 귀족층은 종래의 일부 특권이 없어진 것을 불평하였다. 중산층 및 하층 시민은 여전히 아르콘에 대한 피선거권이 없었고 귀족회의 권한이 바뀌지 않았으므로 또한 불만이었다.

 메가라(Megara)와의 전쟁의 재발을 계기로 시작된 아테네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한 페이시스트라투스(Peisistratus)는 집권한(560 BC) 후 귀족과두제 대신에 참주정을 수립하였다. 설사 참주로서의 그의 정치가 폭정이 아닌 계몽군주정이라 하더라도 이전의 아테네 시민의 자유를 대부분 탄압한 것이었다. 그는 농업을 진흥하고 문화를 장려 촉진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히피아스(Hippias)는 악의의 탄압정치를 했으므로 아테네 시민들은 그를 추방하였다(510 BC). 그 뒤에 온 혼란과 내란은 귀족출신의 클레이스테네스(Cleisthenes)에 의해 수습되었는데, 그는 평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권을 위임받았다(508 BC). 그는 종래의 혈연적인 행정조직이었던 4부족을 지연적인 10개의 부족(phyle)으로 재편성하고, 각 부족에서 50명의 대표를 추첨하여 5백인회를 조직하였다. 5백인회는 정치의 주요기관으로서 민회인준을 위한 법령의 심의 및 행정의 최고감독권을 소유하였다. 귀족회는 폐지되지 않고 전직 아르콘들로 구성되어 입법기능을 발휘하였다. 5백인회의 의원은 각 구(demos)에서 제출된 30세 이상의 남자시민 후보자 명단에서 추첨으로 선출되었다. 5백인회는 다시 50명으로 구성된 10개의 분과로 나뉘어져서 1개월 간 정치를 관장하였다. 민회(ecclesia)의 조직도 개혁되었다. 민회권한이 확대되어 5백인회에서 제출된 법령의 토의 및 가결, 선전포고, 예산할당, 퇴임 아르콘의 예산지출상황의 감사 등을 담당하였다. 도편추방제도(ostracismos)는 클레이스테네스가 창안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 제도에 의해서 국가에 해를 끼친다고 생각된 시민은 국외로 10년 동안 추방당하였다. 이 추방제도는 독재자의 출현을 막으려는데 원래의 의도가 있었다. 추방기간동안 재산권의 보호 둥과 같은 보호조치가 있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또한 군사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임기 1년의 군사위원(strategos)은 10부족에서 1명 씩 선출되어 군지휘관(polemarchos)의 사회로 회의가 열렸다.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페리클레스(Pericles, 461∼429 BC) 시대에 완성되었다. 이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민회가 법령인준권 이외에 입법권도 갖게 되었다. 또한 10명의 군사위원회가 대체로 행정집행의 최고책임을 지게되었다. 군사위원은 민회에서 선출되고 그 임기는 1년이었으나 무제한으로 재선될 수 있었다. 예컨데 페리클레스는 군사위원장으로 30년 이상이나 그 자리에 있었다. 군사위원회는 단순히 군사권 뿐 아니라 국가 최고의 주권을 행사하였다. 점차로 이 위원회는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에서 5백인회가 가진 특권의 대부분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비록 방대한 권한을 행사하였으나 그들의 정책은 민회의 감사를 받아야 했으며 임기 종료시 혹은 위법 행위시에는 고발되었으므로 군사위원의 권한은 참주의 경우와 같이 비대하게 되지 않았다. 끝으로 아테네의 법정 제도는 페리클레스 시대에 완성되었다. 판결에 대해 상소하는 항소법원은 폐지되었으나, 그 대신 모든 소송사건을 다루는 권한을 가진 일반법원이 있었다. 매년 초 추첨에 의해 각 부족에서 600명 씩 선출된 6000명의 배심원 중에서 최소 201명에서 최대 1001명으로 구성된 大小의 배심원단이 따로 구성되었으며, 다수결에 의하여 각종 재판이 행해졌다. 최고 행정관의 한사람이 이 재판에 임석했으나 판결권은 없었다. 배심원들이 곧 재판관이었으며 판결에 대한 불복항소는 없었다.

 아테네의 민주정이 근대적 민주정치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첫째로, 아테네 민주주의는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클레이스테네스 시대에는 거류외국인을 포함하여 인구의 대다수가 시민권을 가졌으나, 페리클레스 시대에는 시민권을 가진 시민은 소수였다. 그러나 제한된 범위 안에서는 아테네 민주주의가 현대 민주주의보다 더 철저하였다. 예를 들면 거의 모든 행정관의 추첨에 의한 선출, 군사위원을 예외로 한 모든 관리의 임기 및 연임의 제한, 다수결의 원칙의 철저한 준수 등은 거의 현대적 민주주의 국가들조차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보통인의 정치적 판단'을 존중한 증거였다. 둘째로, 아테네 민주제는 대의제가 아닌 직접민주주의의 이념에 입각하였다. 실상 아테네인들은 대의제 원칙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5백인회 의원의 선출에 있어서 제한된 방법으로 한 경우 이외에는 대의제를 적용하지 않았다. 아테네인들은 명성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 지배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실제정치에서 발언하는 각 시민의 확인을 얻는 것이 최대 관심사였다. 한마디로 그들의 이념은 통치의 능률에 있었다기보다 차라리 전 시민의 의사를 존중하는 민주주의에 있었다.

 

 시민권을 가진 시민들은 정치활동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주로 집회·법정·군대생활·운동장·시장에서 소일하였다. 상공업은 처음에는 거류외국인들(metikoi)에 의해 영위되었으며, 농업을 비롯하여 광업이나 제조업 등은 주로 노예들이 맡아 하였다. 시민들에 의한 직접민주주의체제는 시민들이 경제활동으로부터 벗어나서 한가한 시간을 가졌다는 점에서 비로소 가능하였다. 아테네인의 아버지는 어린아이의 양육여부를 결정하였다. 아버지가 거부한 아이는 집 밖에 방치해 두며, 노예가 데려다 기르거나 아니면 죽게되는 것이다. 특히 여자아이는 내버려지는 경향이 있어서 당시의 극작가의 말과 같이 "극빈한 가정에서도 남자아이는 키우고 부자집에서도 여자아이는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어머니가 실제로 양육을 맡았으며 여아는 결혼할 때까지 남아는 7세경까지 주부의 방에서 자랐다. 남자아이는 7세 이후에는 교사(paedagogos)에게 맡겨져서 교육받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교사에게 아이를 때리는 권한까지 주었다. 학교교육은 읽기·쓰기·셈하기·詩·노래 및 체육에 관한 것이며, 전체적으로 튼튼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여자아이는 어머니의 양육으로 시종일관하였으며, 다만 복종·정숙과 같은 덕성을 갖도록 훈육되었다. 15세에 이르면 부모가 시민계급 중 선택하는 사람과 결혼하였다. 여자는 스스로의 결혼에 대한 의견을 제시할 수 없었고 또한 결혼 전에 상대방과의 대면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결혼한 여자는 집안의 깊숙한 방을 전용하며, 남편과 양친만이 출입할 수 있는 주부방에서 종일 노예들과 함께 소일하였다. 외출이나 사교는 종교적 축제일 이외에는 거의 없었으며, 家事를 감독하여 실뽑기와 옷짜기를 하였다. 철학자 플라톤은 '법이 결혼을 강제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극작가 메난데로스는 '결혼은 필요악'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요컨데 아테네에 있어서의 부녀의 위치는 다른 도시국가에 있어서와 같이 낮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스 파 르 타

 

 그리스 전역에 흩어져 있던 수많은 폴리스는 그 정치적·경제적 체제에 있어서, 아티카(Attica)형과 라코니아(Laconia)형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아티카형 폴리스는 대체로 이오니아인들이 건설한 국가로서 상공업을 주로 연위하며 민주적 개방사회로 발전하였다. 이에 반하여 도리아인 계통의 라코니아형 폴리스는 농업에 의존한 보수적·과두제적 왕정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하여 아티카형 폴리스는 아테네에서, 라코니아형 폴리스는 스파르타에서 각각 가장 대표적인 사회체제의 발전과정을 나타냈다.

 

 스파르타(Sparta)는 순수한 도리아인(Dorians)들로 구성된 도시국가였으나 일반적인 그리스의 정치적 발전과정에 있어서 하나의 뚜렷한 예외였다. 아테네에서와 같은 민주제 대신에 스파르타는 현대의 소수자 독재와 흡사한 정치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라코니아 혹은 라케다이모니아(Lacedaemonia) 지방의 주요 도시로서 지리적으로는 비교적 고립되어 있었다. 북동쪽과 서쪽이 산악으로 막혀있고 천연양항(天然良港)이 없었으므로 외부와 직접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스파르타의 사회체제는 개성의 자유로운 발휘를 억압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자유를 위한 대중의 투쟁을 도울 수 있는 중산계층이 대두되지 않았다. 스파르타의 문화 침체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군국주의에 있었다. 스파르타 군국주의의 기원은 스파르타의 건국과정에 있었다. 라코니아 지방에 무력으로 침입한 이래 소수민족으로서 오랜 세기동안 토착민족을 지배해야 했으며, 라코니아 지방을 완전히 정복한 후에도 군국주의적 지배수법은 확고히 자리잡았다. 그 결과 다른 도시국가들이 인구문제를 식민운동에 의해서 해결했던 방면, 스파르타는 무력에 의한 정복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면, 타이게토스 산맥 서쪽에 비옥한 메세니아는 이러한 스파르타의 좋은 정복 상대였다. 기원전 8세기 초의 메세니아 정복이 성공하여 그 땅은 병합되었다. 약 반세기 후에 메세니아인들은 독립전쟁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 결과 메세니아인들의 토지는 몰수당하고 지도자들은 사형 또는 추방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스파르타인들은 지배하에 있는 민족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까 두려워했으며, 또한 위험사상이 들어올 가능성이 있는 외부와의 접촉을 금하였다. 스파르타는 보수성·폐쇄성·군국주의를 고수하려고 하였다.

 스파르타의 군국주의는 전설적인 지도자 리쿠르고스(Lycurgos)로부터 유래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특색은 이원왕정(즉, 두 가문에서 각각 한사람의 왕이 선출됨)을 시종일관 유지하는 형식 아래, 5부족에 기반을 둔 귀족과두정체의 내용을 가졌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 체제 아래에서는 임기 1년인 5명의 에포르(ephors, 최고행정관들)가 왕권을 제한하면서, (두 왕을 포함한) 30명의 원로회의(gerusia)가 스파르타 정치의 중심이었다. 원로회의는 60세 이상의 귀족들로 구성되었으며, 행정의 감독 및 민회에 제출될 법령의 기초 등을 담당하고 한편 형사소송에 관한 최소재판소의 역할도 하였다. 정부의 제3의 기관은 민회(apella)였다. 왕이 소집하는 민회는 원로회의의 제안을 인준 혹은 거부하여, 왕을 제외한 모든 관리들을 선출하였다. 전쟁과 평화, 동맹과 조약에 관한 최종적인 결정은 민회의 표결로써 이루어졌다. 그러나 민회 자체가 보편적인 대의집단이 아니었다는 점은 주목되어야 한다. 스파르타 시민의 전체가 아니라 시민들 가운데서 중무장보병으로 복무할 만한 재력이 있는 30세 이상의 남자 시민들만이 민회의 회원자격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최고권은 5명의 에포르들에게 있었다. 그들은 원로회의와 민회의 사회, 교육의 관장, 재산의 분배, 시민생활의 검열, 모든 입법에 대한 거부권 등의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신생아의 양육여부를 결정하고 원로회의 재판에서 검찰의 역할을 하며 신탁이 흉조를 가리킬 때에는 왕까지도 폐위시킬 수 있었다. 그들의 권한은 점차로 확대되었다. 귀족과두제의 핵심이 된 에포르는 민회에서 1년 임기로 선출되었지만 제한 없는 연임이 가능하였으며, 그들의 감독·통제를 받지 않는 기관이 없을 정도로 큰 권한을 갖고 있었다.

스파르타의 전 인구는 세 신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1) 스파르타 시민계급(Spartiatae) :  라코니아 지역을 정복한 원래의 정복자들의 후손으로 스파르타의 지배계급이었다. 이 계급만이 정치적 특권을 향유하였다. 가장 비옥한 농경지를 차지한 이 계급은 농업 이외의 다른 경제활동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국가소유의 토지가 스파르타인들에게 동등하게 분배되었으나, 후에는 이 분배토지의 매매와 교환이 허용되어 점차 빈부의 차가 벌어졌다. 그러나 토지의 경작은 전적으로 노예들이 하였으며, 스파르타 시민계급은 오로지 군사와 정치에만 관계하였다.

 

(2) 노예(heilotai) : 정복지역의 원주민이었던 노예들은 스파르타인들을 위해 토지경작을 하였다. 또한 그들은 국가소유이므로 개인에 의해서 매매 혹은 해방될 수 없었다. 노예는 국가에 의한 토지분배가 있을 때 동시에 스파르타인에게 할당되었으며, 따라서 토지를 떠날 수 없게 되었다.

 

(3) 페리오이코이(perioikoi) : 라케다이모니아외의 다른 도시들의 사람들로서 그들은 자유민이며, 자치제를 갖고 주로 상공업에 종사하였다. 이들의 기원은 확실하지는 않으나 한때 스파르타의 동맹시의 주민이거나, 스파르타의 지배에 자발적으로 예속된 선 주민들이라고 생각된다. 이상의 세 계급 가운데서 가장 자유스럽고 안락한 생활을 한 것은 페리오이코이였다. 지배계급인 스파르타 시민계급과 노예들은 서로 부자유스러운 생활을 한 셈이었다.

 

 지배계급으로서의 스파르타 시민의 사회생활은 대단히 토제 된 집단생활이었다. 스파르타인들은 일생을 거의 군대생활로 보냈으며, 개인의 취미가 희생되지 않을 수 없는 강제 속에서 지냈다. 국가 감독하에 신체를 강인하게 단련하며 정신적으로는 금욕적 인내를 견디면서 공동침식을 하였다. 스파르타인의 교육은 거의 전적으로 군사훈련으로 제한되었다. 출생 후 신체검사를 받아 허약한 어린이는 내다 버리게 된다. 어린이의 양육은 7세부터 국가에서 집단적으로 맡게된다. 연령에 따라 대열을 편성하고 성장과 함께 훈련은 더욱더 가혹하게 되며, 운동·체조·수렵을 비롯한 신체단련과 단식의 연습도 하였다. 30세가 넘으면 약간의 특권이 부여되지만 20세부터 60세까지의 군복무 연한동안 15명의 팀으로 된 공동식사(syssitia)를 하여 각자는 자기의 식량을 가져온다. 결혼은 강제적이며 가정생활은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남편은 병영을 가만히 빠져나올 수단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플루타르코스의 「리쿠르고스傳」에 의하면 남편은 부인의 얼굴을 낮에 보기도 전에 어린아이를 갖게되는 수가 가끔 있었다는 것이다. 결혼생활에서 질투는 금물이었고, 오직 건강한 어린아이를 낳는 것만이 중요했으므로 엄격한 일부일처제도는 2 차적인 것이었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것이 아니라 국가의 것이었다. 흔히 스파르타의 사회체제를 현대의 공산주의에 비교하는 경우가 있다. 스파르타의 체제에 의하면 생산수단인 토지와 노예가 적어도 이론상 집단적으로 소유되었으며, 스파르타의 남자시민은 공동식사를 위해 농업생산물의 일부를 기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점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타의 체제는 현대의 공산주의와 거리가 먼 것이었다. 공산주의 체제의 핵심은 모든 생산수단이 공동체의 소유이어야 하고 다른 사람의 노동을 착취해서는 아니 되며,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공동체의 복리를 위해서 일하며, 財富는 필요에 비례해서 분배되어야 한다는 이론에 있다. 스파르타의 경우 상공업은 개인들에 의해 영위되었으며, 스파르타인들은 노예노동에 의해 생계를 유지하였고, 아무런 노동을 하지 않는 세습적 귀족들에 의해서 정치적 특권이 독점되었다. 군국주의, 비밀경찰, 소수지배, 폐쇄경제를 갖고 있었던 스파르타는 공산주의보다는 현대의 파시즘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로마공화정의 발전과 개혁

 

 

  

 

 

1. 로마의 기원

 

■ 창건설화

 로마市의 창건에 관해서는 전설과 신화 이외에는 정확한 사료가 없고 베르길리우스의 「이네이아스」(Aeneid)가 건국설화의 주 원천이라 볼 수 있다. 신화의 내용을 좀 알아보면 로마인의 조상은 이네이아스로, 그는 트로이가 그리스인에게 함락되었을 때 일족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옮겨갔다고 한다. 그 자손인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가 이리의 젖을 먹고 자란 뒤 로마를 건국했는데, 그때가 기원전 753년 일이었다 . 그러므로 로마는 2세기 동안이나 사실상 에트루리아의 왕들의 지배 하에 놓여 있었으며, 로마의 건국은 이민족의 지배를 벗어남으로써 실현될 것이었다. 로마시의 발상지는 티베르강 남쪽의 저지대인 라티움 이었다. 이 지방의 주민은 농민으로서 작은 촌락들을 이루고, 비록 정치적인 유대는 없었으나 공동신인 유피테르(Jupiter)를 모두 숭배하고 있었다. 초기의 로마는 일곱 개의 언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그 발전도 점진적이었다. 로마의 사회구선의 기초는 '가구(familia)'로서 가족보다 더 광범위하게 부모·자녀뿐 아니라 노예, 예민(clientes), 사용인 및 재산과 토지 등을 포함한 것이었다(res familiaris). 이 '가구'가 중심이 되어 더 큰 집결체인 씨족과 부족으로 확대되었다.

 고대 로마의 중심이 된 이탈리아의 크기는 우리나라의 약 1.4배가되며 고대 그리스에 비해서는 약 5.3배의 반도에 불과하다. 아페닌(Appenines)산맥이 남북을 관통하고 있으나 사실상 정치적 통일에는 큰 장애가 아니었을 것이다. 산맥은 동쪽으로 치우쳐 있어 서쪽으로 경사진 계곡을 따라 강들이 대개 서남향으로 지중해로 흘러 들어간다. 북에는 알프스산맥이 높이 솟아 있으나, 고갯길이 뚫려 있어서 북방과의 교통왕래가 완전히 두절된 것은 아니었다. 포(Po)강은 동남으로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강으로서 그 지방의 평야는 매우 비옥하나 반도에는 전체적으로 지하자원이 풍부하지 않다. 남쪽으로는 반도의 허리를 가로질러 서남으로 지중해로 흐르는 티베르(Tiber)강이 있는데, 그 유역은 고대 로마의 발생지가 되었다.

 알프스산맥은 이탈리아 반도에 높은 울타리를 치고 있으나, 북방으로부터의 침입을 완전히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지는 못하였다. 구석기 시대 이래로 여러 민족들이 이동해 들어온 흔적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며, 신석기시대의 유물도 매우 풍부하게 남아있다. 또한 금석병용(金石倂容)문화의 증거가 있으며 순동과 청동의 기구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오랜 기간에 걸쳐 각종의 민족들이 이탈리아 반도에 들어와 생활하였다고 추측된다.

 

● 1차 이동

   기원전 2000년 경 인도·유럽계 민족이 중앙유럽 혹은 다뉴브 계곡을 거쳐 이탈리아로 이동하였다. 그들은 말(馬)을 사용하고 또 농경에 종사하였다. 청동기 문화를 가진 이 민족은 그때까지의 보편적인 매장관습과 대조적으로 화장형식을 취하고 있었던 것 같다(Terramara 문화).

 

● 2차 이동

  기원전 1100∼1000  내지 기원전 1000∼800의 철기시대 초기에 이루어졌으며, 이때의 민족은 역시 다뉴브강 지역을 거쳐 이탈리아로 들어왔다. 농경과 목축을 겸하면서 중부 이탈리아에까지 진출하였다. 주요성분인 라틴족은 이 시기에 티베르강 남쪽 연안에 정착하여 江口에서 조금 떨어진 지점에 로마를 건설하였다(Vilanova 문화).

 

● 3차 이동

  기원전 10세기 전후에 지중해의 동안지대에서 이동해 왔으리라고 추측되는 에트루리아人(에트루스크人이라고도 한다)에 의한 것이었다. 에트루리아인은 중앙 이탈리아 서북부까지를 점거하여 강대한 세력으로 라티움 일대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진보된 금속문명과 도시문화를 갖고 있었으며 그리스식을 모방한 문화양식을 채택하였다. 그들의 문화는 특히 뒤에 오는 로마의 건축구조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석관(sarcophagus)을 사용한 장법(葬法)은 주목되며 석굴묘 및 벽화는 매우 발달된 문화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에트루리아인과 같은 시대에 이탈리아 반도 남쪽에는 각각 그리스와 페니키아가 세운 식민지가 있었다. 그리스인들이 세운 大그리스(Magna Graecia)는 시실리섬의 시라쿠사이(Syracusae)와 반도 남쪽의 타렌툼(Tarentum)이 중심이 되어, 그리스 본토의 고도로 발전된 문화를 전래하는 근거지가 되었다. 시실리섬 남쪽 지중해 건너 하프리카 북부에는 페니키아인들이 건설한 식민지인 카르타고(Carthago)가 있었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 본국이 멸망한 오랜 후에도 계속 독립국가의 지위를 지켜서 지중해를 무대로 여러 지역과 교역하면서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 로마의 계급

 

 로마의 계급은 귀족·평민·기타로 구성되어 있다.

·귀족(Patricus)은 특권지배계급으로서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 계급의 기원은 알 수 없으나 그들은 경제적으로 강력하여 부유한 토지소유자들이었다. 상호간에만 통혼하였으며 참정권을 비롯한 여러 공권(公權)과 사권(私權)을 행사하였다. 정치상의 권리에는 선거권 및 공직권(公職權), 그리고 완전한 사법(私法)상의 권리에는 통혼권 및 사유재산권 등이 있었다. 피선거권이 honorum 이라 불린 것은 관직의 무보수·명예직을 가리키는 것으로 재산이 잇는 계급이 공직을 차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평민(Plebs)은 비특권·피지배계급으로서 시민권은 없는 대신 도리어 병역과 납세의 의무가 있었다. 잡다한 자유민, 소농(小農), 임금노동자, 수공예자 등으로 구성된 평민에게는 소유토지가 극히 적었으며, 민회참석 이외의 참정권이 없었다. 로마의 평민은 한마디로 '참정권 없는 시민'이었으나, 특정한 私法上의 권리를 갖고 있었다.

·예민(隸民, clientes-이 경우 귀족은 보호자patronus였음)은 그 밖의 사회신분으로써 귀족의 보호를 받는 신분 이였으며 귀족의 토지를 경작하여 지대를 납부하였으나, 재산권은 인정받지 못하였다. 평민이나 해방된 노예가 예민으로 격하 또는 승격되는 수가 있었다.

·노예(servus)는 주로 전쟁포로이거나 부채로 인해 자유가 박탈된 사람들이었다.

 

■ 로마사회의 가족제도

 로마사회는 아버지가 중심이 된 가부장제(patriarchal system)로서 부계(父系)는 남계친족(agnati, 男系親族)이며, 모계는 여계친족(cognati)이라 불렀다.

 남계친족은 같은 성을 유지하여 '가구'의 권위를 유지하였다. 로마의 가족과 그 이상의 대단위와의 관계는 familiae―(10) gens(씨족) (pl. gentes)―(10) curia―(3) tribus(부족)로 표시될 수 있다. 예를 들면 Marcus Tullius Cicero의 경우 Tullius는 gens를 나타내는 것이다. 부녀자는 '가구'의 장이 되지 못하며 항상 남계친족의 세력하에 놓이게 되며 결혼 후에는 남편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여자의 사회적 위치는 고대 그리스의 경우보다 월등했으며, 여성은 공식집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여지는 연회석상에서는 남편 옆에 앉았으며 가시에 있어서는 주인 역할을 하여 자녀의 양육과 교육뿐 아니라 노예에게 지시를 내리며 남편의 일처리를 도왔다. 여성은 사회적 존경을 받았으며 길거리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길을 양보할 정도였다. 여성에 대한 이러한 사회적 존경은 로마 가족에 보수주의와 안정을 가져왔는데, 이 점은 그리스보다 에트루리아인으로부터 따 온 관습이었다.

 

  

2. 로마의 발달

 

■ 포에니 전쟁

 로마는 일찍이 市 주변의 라틴 연맹과 싸우고 에트루리아인의 지배를 벗어나려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건국에 착수하였다. 그 후의 5세기 동안 로마는 이탈리아의 통일 및 지중해 세계의 지배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군사적 시도를 계속하였으므로, 실로 로마의 역사는 전쟁과 대외확장의 역사라 할 것이다. 로마市는 이웃 부족인 에트루리아 민족의 세력을 북으로 패퇴시키고 베이이(Veii)市와 오랜 싸움을 벌였으며, 동으로는 아에키(Aequi)족, 남으로는 볼스키(Volsci)족과 같은 高地민족의 물리치고 라틴연맹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다. 갈리아족이 기원전 5세기에 남침하여 한때 로마는 파괴·약탈되었으나, 4세기에 다시 침입 당하였을 때는 이를 격퇴시켰다. 남쪽의 삼니움族(Samnites)과의 여러 차례에 걸친 전쟁(기원전343∼290)에서도 로마는 위기를 극복하여, 마침내 3세기 말에는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의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기원전 270년경에는 포江 계곡일대의 켈트족(Celts)을 물리치고, 남이탈리아에서 그리스 세력을 크게 삭감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와 같이 반도를 통합한 다음 로마는 지중해로 진출하였다. 무역상의 이해를 둘러싸고 카르타고와 충돌한 전후 3차의 포에니 전쟁(기원전264∼146)의 결과, 로마는 카르타고를 완전히 굴복시켜 지중해를 제패하였다. 그 후 동방의 그리스를 정복하고(코린트의 정복 : 기원전146), 계속하여 4차례에 걸친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215∼146)을 치렀다. 페르가몬왕 아탈로스 3세(Attalos Ⅲ)는 죽을 당시(기원전133) 유토(遺土)를 로마에 헌상하여 시리아의 셀리우코스(Seleucus)왕조는 로마에 예속되었다. 그리고 로마는 시리아를 점령하였고, 마침내 고대동방의 마지막 잔존세력인 이집트를 기원전 31년에 정복하였다. 카이사르 시대에는 오늘날의 프랑스 지방인 갈리아와 영국 등을 완전히 정복하게 되었다(기원전58∼49). 이와 같은 오랜 전쟁을 통한 정복과정에서 로마가 세계제국으로서 전환하게 된 계기는 포에니 전쟁의 승리였다.

포에니 전쟁의 발단은 시실리섬에서 일어난 사건에 있었다(기원전 264). 시라쿠사市에서 해고된 용병들이 시실리섬 북쪽 끝에 있는 메시나(Massina)를 공격하였을 때, 메시나가 이탈리아 본토에 가까운 요지라고 간주한 로마는 메시나에 대한 카르타고의 군대 파견을 좌시할 수 없게 되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시라쿠사왕 아가토클레스(Agathocles)의 용병이었던 이탈리아 캄파냐(Campagna) 출신의 마메르티노(Mamertini)는 해고된 후 메시나를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주변을 공략한 후 다시 시라쿠사를 공격하였으나, 도리어 시라쿠사에게 포위를 당하는 곤경에 빠졌다. 그는 로마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카르타고 군대는 시라쿠사를 원조하였다. 밀라에(Mylae) 전투(기원전260), 에크노모스(Ecnomos) 전투(기원전256) 등에서 로마는 패전하였다. 전쟁 초기에 로마는 해군력이 약해 불리하였으나 해군력을 증강한 후 아에가테스(Aegates) 해전(기원전241)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 결과 카르타고는 시실리섬을 로마에 양도하고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로마는 시실리섬의 행정에 힘을 기울여, 그것을 최초의 속주(provincia)로 편입하여(기원전227) 행정·사법·징세를 관장하는 행정책임자를 파견하였다.

 

● 제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218∼201)

  카르타고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시실리섬·사르디니아·코르시카 등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한 카르타고는 스페인에 식민국가를 건설하고(Nova Carthago:신 카르타고), 그 곳에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던 한니발(Hannibal)은 로마의 동맹시인 사군토(Sagumtum)를 공격하였다(기원전219). 뒤이어 한니발은 이탈리아 원정의 길에 올라 보병, 전투코끼리, 기병을 거느리고 이탈리아로 향해 가면서 원정길에 있는 갈리아 여러 부족들을 정복·회유하며 反로마세력을 결속시키는데 성공하였다.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넘어, 성공리에 이탈리아 반도에 침공한 한니발은 트레비아江 부근 티키누스(Ticinus) 강변의 전투, 트라시메누스(Trasimenus) 호수 전투, 칸나에(Cannae) 전투(기원전216) 등에서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으나 점점 군사를 잃고 보급상의 곤란을 겪게 되었다. 사실 2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 민족 전체와 한니발 개인과의 거대한 싸움이 되었는데, 로마의 해로 장악으로 본국 카르타고로부터의 보급은 끊겼기 때문이며, 로마의 초토화작전으로 현지보급도 잘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니발은 16년 간 이탈리아 반도에 머물면서 로마시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을 황폐하게 만들어 놓았으며, 그 결과 로마의 중소농은 몰락하게 되었다. 이때 로마의 젊은 장군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는 전략을 바꾸어 카르타고 본토를 공격하였다(기원전204). 이 소식을 접한 한니발은 급히 귀국하여 자마(Zama) 전투에서 스키피오와 결전을 치루게 되었다(기원전202). 카르타고군은 패전하고 한니발은 소아시아로 망명하였다. 로마는 카르타고에게 가혹한 휴전조약을 강요했는데(시오노 나나미 같은 이는 이 조약의 내용이 그리 가혹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조약에 의하여 카르타고는 (1) 해외영토의 전부를 포기하게 되었으며, (2) 10척의 전선을 남기고 전투코끼리는 모두 양도하는 극단적 군비축소를 당했으며, (3) 막대한 배상금(1만 탈렌트)을 지불하며, (4) 아프리카 이외에서의 교전은 금지되고 아프리카 내에서의 전쟁행위도 사전에 로마에 통고해야 한다. 이 조약으로 카르타고는 지중해의 패권을 완전히 박탈당하고 일종의 로마 보호령과 같은 지위로 격하되어 한낱 작은 도시로 축소되고 말았다. 여기에 비해서 로마의 영토는 크게 확장되었으며, 스페인 및 아프리카 연안에까지 이르는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포에니 전쟁은 이탈리아 반도내의 농경지를 황폐하게 만들고, 중소농을 몰락시키는 것과 같은 경제적 사회적 변동을 초래하여 결과적으로 로마 공화정의 위기를 촉진하였다.

 

● 제3차 포에니 전쟁(기원전149∼146 )

  로마에 의한 일방적인 카르타고 공격이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의 결과로 각성한 카르타고인들은 합심단결하여 서둘러 재건에 성공하였다. 그러한 현저한 부흥은 로마측에 위협이 되었으므로 원로원의 일부 의원, 특히 大카토(Cato: 카이사르 시대의 그의 손자 小카토와 구별하기 위해 이름 앞에 각각 大, 小를 붙임) 처럼 항상 '카르타고는 멸망되어야 한다(Dalenda est Carthago)'를 주장하던 인물들이 주전론(主戰論)을 내세우는 구실이 되었다. 기원전 149년 카르타고의 배후 누미디아(Numidia)를 조종하여 카르타고를 공격케 하였으며 카르타고가 방어전을 펴게되자 조약위반을 내세워 로마는 파병하였다. 카르타고는 2년 동안 결사적인 방어를 하였으나 함락되고, 성은 철저히 불태워졌으며, 살아남은 주민은 포로로서 노예화하였다.

 포에니 전쟁을 끝으로 지중해의 남부는 로마의 완전한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후 기원전 1세기 후반까지에는 동부 지중해 세계도 같은 운명을 맞게 될 것이었다. 이러한 정복에 의해서 로마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시실리섬이 최초의 속주로 편입된 이래로 대부분의 새 영토는 속주로 편성되었다. 파견된 로마 총독의 직무는 첫째로 속주의 모든 징세사무의 관장, 둘째로 행정과 군사를 위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제한 없이 속주민에 대한 과세의 부과 등이었으며, 그의 임기는 보통 1년이었다. 속주에는 곧 로마의 악질적인 고리대업자와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많은 중간이익을 보는 징세청부업자(publicani)의 악덕행위가 자행되었다. 이렇게 부를 챙긴 사람들은 로마로 돌아와서는 전에 없는 새로운 부유계급을 형성하였으며, 그들의사치스런 생활은 외국무역품의 수요를 증대시켰다. 번창하는 무역과 부유한 상인층으로 인하여 많은 은행도 들어서게 되었다. 로마는 사치와 풍요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었으며 그 속에서의 체제 내적인 모순의 증폭으로 개혁적 변화의 시기를 잉태해가고 있었다.

 

3. 공화정 로마

 

 초기 로마의 왕(Rex)는 군사·사법·종교의 세가지 권한을 함께 장악하였다. 그는 전시의 군지휘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공동체의 전반적 사항에 관한 재판관이 되었으며, 종교의식을 관장하였다. 王은 왕권(imperium)에 의해 적어도 전시에는 신하들의 생사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대체로 관습법(mos)에 의한 제한을 받고 있다. 예컨데 300명의 귀족으로 구성된 원로원(Senatus)은 왕의 관습법 위반 여부를 가려내서 왕에게 처벌을 내릴 수 있었다. 로마 시민회(Populus Romanus)는 실권이 없었고, 행정관의 임명이나 전쟁과 평화의 결정에 관한 추인권 내지 거부권을 갖고 있었다. 그것조차도 원로원에 의해 다시 거부될 수도 있었다. 쿠리아회(Comitia Curiata)는 많은 씨족(gentes)으로 구성된 30개의 쿠리아로 되어있다. 각 쿠리아는 하나의 표결권을 소유하고 있었다. 로마의 史家 리비우스에 의하면 왕정은 기원전 509년에 끝났다. 귀족과 평민은 합세하여 이민족 지배자인 에트루리아王을 축출하고 공화제(Res Public Roman)를 수립하였다. 원로원은 가장 중요한 실권을 행사하는 정치기구가 되었으며, 귀족세력은 증대하여 이른바 귀족과두제가 되었다. 귀족계급에서 선출된 2명의 집정관(consul)이 왕 대신에 임기 1년의 최고권을 행사하였다. 집정관들은 군사·사법·종교 등의 국가주권을 가졌으나 두 사람의 권한은 동등하여 상호간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국가 위급시에는 절대권이 한사람의 독재관(dictator)에게 위임되었는데 임기는 6개월이었다.

 공화정 수립 후 2세기 동안 귀족과 평민간의 대립은 격화되었다. 병역과 납세의 의무가 있는 평민들은 정치적·사회적 불평등에 불만을 나타냈다. 팽창·확대하는 로마는 이민족 및 이탈리아 내의 다른 민족과의 전쟁을 수행해야 할 입장에 있었으므로 평민들의 협조는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평민층의 반란이나 무력봉기는 여러 차례 있었으나 조직화되지 않아 강력한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하였다. 그러나 워낙 인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 평민들이 복무하는 군대로서의 가치는 인정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점차로 귀족들은 양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미 공화제 수립과 동시에 공포된 발레리우스(Valerius)法에 의하면, 사형언도를 받았을 때 평민은 백인회에 상소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로마 평민층의 평등 성취과정의 하나의 획기적인 계기가 된 사건은 聖山사건이었다. 리비우스에 의하면 기원전 494년 경 대외전쟁을 위해 소집된 평민군대가 성산에서 농성하며 그들의 요구조건을 내세웠다.

 귀족들은 평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비로소 평민회(Concilium Plebis)를 창립하고 호민관(tribunus) 2명을 선출하도록 허용하게 되었다. 호민관의 수는 그 후 4명으로 증가하고 종국적으로 10명이 되었다. 그런데 한편 호민관의 신분은 절대 보장이 되었으며, 만일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나 재판 없이 사형에 처할 수 있었다. 호민관은 행정관들의 어떠한 행위이든지 금지시킬 수 있는 거부권(veto)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호민관은 행정적 기능이 없는 평민들의 권익옹호자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쳤다. 호민관의 권한은 매우 소극적인 것이었으며, 그에게는 아무런 군사적 권한이 없었고 제한된 민권(potestas)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평민회는 호민관을 선출할 뿐 아니라 평민 전체에 관한 사항에 대해 입법권을 갖고 있었는데, 여기서 인정된 표결(plebiscita)은 평민을 제약하였다. 그러나 5세기 후반(417 BC) 푸블리우스(Publilius)法에 의하여 부족회(Comitia Tributa)가 생겼는데, 이것은 평민회가 재편성하여 확대된 것이었다. 부족회는 호민관이나 집정관의 어느 쪽에 의해서든지 소집될 수 있었고 후에 법무관직이 부활되어 집정관의 직무 일부를 인계 받았을 때 법무관에 의해서고 소집될 수 있었다. 부족회는 입법권이 없었으나 백인회 및 원로원에서 인준된 법안의 가부를 결정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의 세 회의체, 즉 쿠리아회, 백인회, 부족회 중 쿠리아회는 종교적 기능으로 축소되고 백인회의 권한도 점차로 부족회로 이관되기에 이르렀다.

 5세기 중기에 이르러 귀족층의 권익을 위주로 한 관습법을 타파하고 성문법의 제정을 요구하는 평민층의 여론이 마침내 실현되었다. 아마도 로마에서는 그리스에 사람을 파견하여 드라콘, 솔론, 클레이스테네스의 법 등을 연구케 하여 성문법을 제정한 것 같다. 이것이 로마의 최초의 성문법인 12표법이다(449 BC). 평민들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의 계급적 배타성과 우월감은 12표법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예를 들면 제10표 및 11표에는 귀족·평민간의 통혼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평민의 지위는 법적으로는 점차 향상되어 귀족과의 평등을 누리게 되었다. 기원전 4세기 중기(367 BC)에 이르러 리키니우스-섹티우스法이 공포되어 집정관직이 평민층에게 개방되어 1명의 집정관이 평민 중에서 선출될 수 있게 되었다. 리키니우스와 섹티우스의 이름이 붙은 이 법은 평민 출신의 집정관을 허용하는 이외에 부채 및 토지독점에 관해 규정하였다. 부채는 이미 지불변제된 이자액을 공제하며, 잔액은 이후 3년 간에 걸쳐서 年賦償却되도록 규정되었으며 각 시민의 토지소유는 일정량, 즉 500 유게라(jugera)로 한정시키도록 규정되었다. 이미 귀족과 평민간의 통혼은 12표법이 제정된 4년 후의 법안(카눌레이아 법 445 BC)에 의해서 인정되었다. 기원전 4세기 말(300 BC)에 오굴니아 법에 의해서 평민에게 신관직(제사장)이 개방되었으며, 동시에 공직취임권도 개방되었다. 기원전 3세기 전반(287 BC)의 호르텐시우스 법(Lex Hortensia)에 의해 부족회의의 결의는 원로원의 인준 없이도 발효하게 되었으며, 평민층의 국정참여는 법적으로 최대한 인정되었다. 이로써 평등을 위한 장기간의 투쟁이 일단락 되었다.

 이와 같이 오랜동안의 평민들의 권리주장 운동은 전환기인 5세기에서 4세기까지는 완전히 그 목적이 달성되기에 이르렀다. 커다란 내란 없이 평민과 귀족과의 충돌은 해결되었는데, 이것은 정치에 있어서의 실제적 지혜와 양식을 존중하는 로마인들의 특성의 일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평민의 평등은 법적·관념상의 성취에 불과하였으며, 사실상 경제적인 유력자들만이 공직을 점유하는 현상은 해소되지 않았다. 역사가 몸젠(Theodor Mommsen)도 그의 저서 [로마사]에서 말하기를 로마인은 타르킨 왕정(에트루리아 왕정) 시대부터 그라쿠스 형제 시대에 이르기까지 '결코 민중이란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되는 것이라는 원칙을 버리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평민의 참정권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으며, 예컨데 관직취임권은 전통적인 무보수 명예직의 원칙이 끝까지 지속되었으므로 금권정치의 양상이 농후하였다. 그러므로 로마 공화정의 정치적 위기는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계속 악화되어 많은 사회악의 제거는 개혁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정치적 체제의 변화도 수반되어, 마침내 공화정의 전반적 파탄이 도래하여 帝政으로 넘어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4. 로마의 변화와 개혁

 

 지중해 세계의 제패로 인한 경제적 풍요와 헬레니즘 문화를 비롯하여 다른 문화권의 고도의 문화내용을 이식한 것은, 결과적으로 로마인으로 하여금 사치를 모방하고 극단적인 이기심을 조장시키며 전통적인 근검절약의 덕성을 상실하게 하였다. 富의 축적은 로마인의 생활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크고 많은 방을 가진 저택이 건축되었다. 로마의 전통적인 소박한 一室家(atriun)는 점차 사라지고 헬레니즘식의 열주(列柱)정원이 달리고, 식당·침실·도서실·휴게실·주방이 붙은 대저택이 세워졌다. 포에니 전쟁 후 한 세대 뒤에는 로마의 부유층은 수많은 은기(銀器)를 상용하였는데, 이것은 일찍이 전직 집정관이 약간의 은기소유로 벌금을 낸 일과 크게 대조적이었다. 부유층은 호화로운 연회를 열고 동방에서 들여온 조상(彫象)·회화(繪畵) 및 그 밖의 미술품으로 집안을 장식하였다. 수도시설·욕실 및 그 밖의 위생설비가 갖추어진 상층가정에는 타일관을 통한 열풍난방이 설치되고 다수의 노예·문지기 등이 있었다. 상층가정의 정신적 약화를 가져오는 쾌락의 풍조는 로마사회를 풍미하였다. 로마인들은 전차경기나 검투사(gladiator) 시합에 몰두하였다. 이러한 도덕적 해이는 이미 기원전 2세기 말에 카토가 경고하였으며, 또한 호라티우스도 그의 詩에서 로마인의 각성을 촉구한 바 있었다. 로마 정치인들은 주로 속주의 총독이나 그 밖의 관직 취임을 위하여 식량의 무료배급 등으로 민중의 환심을 사기도 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팽창이 가져온 가장 심각한 변동은 사회·경제면에 있었다. 먼저 로마의 농업경영에 큰 변화가 왔다. 포에니 전쟁 이후 농지는 황폐하고 중소농이 몰락하였으며 토지의 집중화 경향은 심해졌다. 이와 같이 로마귀족들의 소유욕은 토지재산의 형태를 통해서 실현되었다. 토지의 집중화에는 또 다른 요인들이 작용하였다. 시실리섬 병합 후에는 공납공물이 로마로 유입되어 곡물가격의 유지가 어렵게 되었다. 반도내에서는 곡물보다 과수재베의 경향이 뚜렷해졌으며 개량된 농경법이 도입되고, 또 많은 포로의 노동력을 이용하게 되었으므로 200년대까지는 대농장제(Latifundia)가 보편화되었다. 로마 초기사회의 핵심을 이루었던 자유신분의 중소농은 사라지고, 그 대신 소작인(colonus)제도가 출현하였다. 토지 없는 빈민층이 생기고 부채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로마의 농업적 변화는 상업의 융성으로 초래된 것이기도 하였다. 지중해, 흑해에까지 진출하는 교역활동 및 자본가적 상공업이 전통적인 농업에 대치되었으며, 신흥부유층으로서의 상인들은 중소농계층을 사회적으로 대신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로마 사회에 있어 사의 財富의 관념은 달라졌으며 사회신분층의 변화도 수반되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제도적 개혁이 시도되었다. 가장 두드러진 개혁운동은 그라쿠스 형제에 의한 것이었다(기원전)133∼121. 재무관(기원전133 )과 호민관(기원전137)을 역임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Tiberius Gracchus,기원전 163∼133)는 농업부흥을 위하여 과감한 개혁을 강행하였다. 개혁반대의 동료 호민관 옥타비우스(Marcus Octavius)를 그만두게 하였으며, 개혁안을 부족회에서 강경책으로 통과시켰다. 페르가몬왕 아탈로스 3세의 유토(遺土)를 농민들에게 재분배하였다. 일정량 이상의 공지(公地)는 국가에 반환하도록 하고 토지없는 시민들에게 재분배하였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의 개혁은 부유층의 반대에 부딪치고 폭동이 일어나 일파 수 백명이 학살되고 말았다. 가이우스 그라쿠스(Gaius Gracchus,기원전 153∼121 )는 형보다 더 과격한 입법을 통해 개혁을 추진하였다. 티베리우스의 토지법안을 다시 부활시켜 토지분할위원회에게 사법권까지 부여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러한 경제적 조치와 아울러 입법활동을 통해 시민권을 확대시켰다. 국가권력의 대부분은 원로원으로부터 부족회로 이양되고, 라틴족과 이탈리아족에게까지 시민권이 부여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부 민중과 더불어 기사계급 및 원로원의 반대에 봉착하여 암살되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달성되지 않았으나 그 후에도 개혁의 시도는 꾸준히 있었다. 마침내 민중은 개혁을 군사지도자에게 기대하게 되고, 그 결과 로마 공화정이 일인지배로 전환되는 변화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법안들이 무효로 돌아가고 정권이 부유층과 귀족계급에게 다시 장악되었으나 이즈음(기원전110∼105) 아프리카의 누미디아, 프랑스의 갈리아, 소아시아의 폰투스(Pontus)에서 반란이 일어나 로마인들의 재산을 위협하게 되었다. 그 결과 군사지도자에게 기대를 거는 민중과, 원로원 세력을 강화시키려는 귀족간의 대립은 마리우스나 술라 등의 일인정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마리우스(Gaius Marius, 기원전157∼86)는 집정관으로 선출된(기원전107) 후 강력한 군대를 재편성하여 북아프리카 및 게르마니아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그가 편성한 군부조직은 공화정 말기의 로마정치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마리우스는 군제개혁을 통해 토지없는 시민을 의용병으로 정규군에 편입시키고 제대시에는 토지를 주도록 하였다. 이 개혁으로서 로마 군인은 민병(民兵)으로부터 직업군인이 되었다. 병사들이 토지나 금전보수를 군지휘관에게 기대하게 되면서 군지휘관들의 정치권력은 증대하게 되었다.

 기원전 88년, 소아시아의 폰투스왕이 로마 총독의 악정과 징세청부업자들의 횡포로 감정이 악화된 민심을 이용하여 로마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을 때, 로마의 대책은 둘로 갈라졌다. 원로원은 귀족세력을 대변할 수 있는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기원전138∼78)에게 동방원정을 명하였다. 이에 부족회는 마리우스를 지휘관으로 내세웠으므로 두 기관이 국가최고권을 주장하며 충돌하였으며, 그 배경에는 각각 귀족과 평민이 있었다. 이 결과 첫 번째의 내란은 시작되었으나 원로원과 술라가 최종승리를 거둠으로써 끝났다. 술라는 원로원에 의해 무기한의 독재관으로 임명되었다(기원전82). 술라는 반동적으로 귀족세력을 강화하고 원로원의 권한을 증대하였다. 그는 호민관과 부족회의 권한을 크게 삭감하고 원로원의 수를 600명으로 증가시켜 국가주권을 전유하게 하였다. 반대세력을 탄압한 술라는 자신의 업적이 항구적으로 수립되었다고 자신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기원전79). 그러나 그의 은퇴 후 곧 反술라 폭동이 전 이탈리아 반도에 파급되어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로마정치의 혼란은 파벌간의 싸움과 개인의 야망을 자극해 놓았다. 집정관으로 선임된(기원전70) 폼페이우스(Gaeus Pompeius, Magnus,기원전 106∼48)는 폭동을 진압하고 평민에 접근하여 크라수스와 함께 집정관이 되었다. 파르타아를 통치한 크라수스는 전사하여(기원전53) 삼두정치에서 탈락하였다. 그는 술라시대의 제도를 개정하고 민권을 확대하는 한편 지중해의 해적을 토벌하고 소아시아를 원정하였다. 이 사이에 마리우스의 조카인 카이사르(Julius Caesar,기원전 102∼44)가 세력을 확립하였다. 그는 원로원을 억압하고 민회의지지 아래 제1차 삼두정치를 성립시켰다. 서방 및 갈리아 지방을 장악한 카이사르와 동방 및 이집트를 세력하에 둔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는 양분되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방뿐 아니라 라인강 근처를 정복하고, 브리타니아까지를 로마의 세력하에 두는데 성공하였다. 카이사르는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갈리아 戰記」(De Bello Gallico)를 저술하였는데, 그것은 로마시대의 주요한 사료 중의 하나이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과 연관시켜 볼 때 "유럽 대륙을 지중해 문명권의 통일 속으로 편입시킨 것은 카이사르의 개인적 추진력과 군사적 천재성의 덕분이다. 그것은 역사의 전 과정이 한 개인의 의지에 의해 바뀌어진 사실에 대한 놀라운 실례이다"라고 역사가 Christopher Dawson은 평하고 있다. 카이사르 스스로의 정치적 야심, 즉 동방의 폼페이우스와 대립하고자 한 노력의 부산물로서 이루어진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은 로마문화의 유럽화의 계기가 되었다. 카이사르의 세력이 커지자 폼페이우스는 원로원과 결탁하여 카이사르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통치기간은 종결되었으나(기원전50),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에 대항하려는 결심 아래 기원전 49년 루비콘(Rubincon)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하였다. 이것이 로마 공화정 말기의 두 번째의 내란이다. 폼페이우스는 에피루스(Epirus)로 도망하였으나 이집트에서 암살당하였다. 카이사르는 이집트로 진격하여 그곳을 정복하였으며, 프톨레마이오스 15세와 클레오파트라 여왕을 옹립하였는데 이는 이집트가 실질적으로 로마의 세력 아래에 굴복한 것을 의미하였다.

 카이사르는 개선 후 10년 임기로 독재관(dictator)에 취임하였으며, 다시 그 후(기원전45) 10년 임기의 집정관이 되었다. 그러나 그 후 곧 그는 종신 집정관이 되고 최고제사장(pontifex maximus)을 겸하고, 전 로마군의 지휘권·국고 처리권 등을 장악하여 임페라토르(imperator)의 칭호를 얻고 화폐에 그의 얼굴이 새겨지기까지 했다. 이와 같이 카이사르는 막강한 독재체제를 구축했으며 실질적인 군주제를 수립하였으므로, 공화제의 전통을 수호하고자 하는 공화론자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는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로원에 참석하고 있던 중 브루투스(Brutus)와 카시우스(Cassius)가 지휘하는 암살음모의 희생자가 되었다. 카이사르의 암살로서 로마공화제의 전통은 표면상 유지되는 듯 했으나, 이미 포에니 전쟁 후 만연된 로마사회의 부조리는 사라지지 않았으며 로마사회의 변질은 피할 수가 없었다. 이처럼 기원전 1세기의 로마는 대외적으로는 영토상의 팽창이 정지되었으며, 대내적으로는 공화정이 붕괴되고 제정(帝政)으로 전환되는 여러 가지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카 이사르가 암살된 후 국가질서재건 3인 위원회가 5년 임기로 구성되었다(43 BC). 그러나 국내의 공화주의자들의 세력이 거의 쇠퇴한 후 이 위원회는 제2차 3두정치로 전환되었다.

 

 

로마의 멸망요인

 

 

 

1. 서론 - 로마 멸망에 대한 생각과 두가지 전제 -

 

가. 로마는 왜 멸망하였는가에 대한 고찰

18세기 중엽 이래 역사학자들은 로마 제국의 멸망 원인에 관해서 열띤 논쟁을 벌였다. 많은 설명들이 제시되었는데, 일부는 새로운 통찰을 하게 하였고 일부는 쓰레기통에 던질 만한 것이었다. 이 주제에 관한 논쟁에서 학자들이 범한 대표적 오류는 단 하나의 원인만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사학자들은 로마 제국의 멸망과 같은 현상을 단일 원인으로 해명하려 한 것이 어리석은 시도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지중해를 감싸안은 로마 제국이 해체된 다양한 부수적인 원인과 근본적인 원인들은 면밀히 얽혀져 있으므로 하나씩 따로 구분하기는 불가능하다. 아직 최종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으나 이 주제에 대해 이전보다는 훨씬 뛰어난 이해가 존재한다.

 

나. 로마멸망에 대해 염두해둘 것 두가지

 

a.첫째 몰락이란 단어가 함축하는 것과 달리 갑작스런 로마 제국의 붕괴는 없었다는 점이다. 그에 이르기까지 경제와 정치와 문화를 점진적으로 변형시킨 기나긴 과정이 있었고 A.D. 476년의 로마 멸망은 최종 결과였다. 사실 476년도 사학자들이 설정한 것이지 당시 사람들이 이 해를 로마 멸망의 해로 인식한 것은 아니었다.

 

b.둘째는 로마 제국의 절반은 살아남아 점진적인 변형을 거쳐 비잔틴 제국이 되었고 이 제국은 1453년까지 존속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2. 본론  - 다양한 로마의 멸망 원인들 -

 

가. 타당성 없는 원인들

 

a.열등한 인종과의 혼혈

 

- 20세기 초에 인기가 있었던 이 견해는 초기의 로마인들이 동방에서 온 열등한 인종들간의 혼혈로 우수한 인종으로서의 질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 해석은 묘비들에 적힌 이름을 연구한 것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름은 인종의 기원을 알려주는 믿을만한 지표가 되지 않는데다가 보존된 묘비도 통계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만큼 적절한 분포를 이루고 있지 않다. 더구나 서로마가 멸망한 후에도 살아남은 동로마 제국은 이른바 열등한 인종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b.납 중독

 

- 로마의 지배층이 납으로 만든 상수도관을 통해 가정까지 물을 끌어다 썼으며 납 그릇으로 요리를 하여 납 중독을 일으켜 죽었다는 설이다.

이 설은 부적절하게 선정된 유골들을 분석하여 얻은 추론으로 유골들이 묻혀 있는 동안 외부로부터 납이 유골에 스며들었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극히 드문 예를 제외하고는 수도관이나 그릇 등을 통해 납이 인체에 유해할 만큼 흡수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납 중독이 있었더라도 납 주물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나 희생자가 되었을 것이다. 동로마가 살아남은 사실을 보더라도 이 설은 타당하지 않다.

 

c.토양의 황폐

 

-  일부 학자들은 로마 제국의 토양이 황폐화되었고 이에 따라 농업 경제가 쇠퇴하여 제국의 멸망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몇몇 고립된 지역에서는 토양의 황폐화 현상이 있었으나 경작가능한 토지 전체에 비하면 그 비율은 미미하였다. 토양의 황폐화가 문제였다면 로마인들이 제국 말기에 농업이 쇠퇴할 때 광활하게 남아있던 비옥한 토지를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d.기후 변화

 

- 어떤 학자들은 장기간에 걸친 기후 건조와 그로 인한 생산 감축으로 인해 로마 제국의 농업이 쇠퇴했을 것 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설은 로마 제국 말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로마와 같은 위도에서 자라고 있던 캘리포니아 삼나무들의 나이테를 연구하여 나온 결론이다.

이 연구는 캘리포니아 연안의 기후를 같은 위도의 세계 다른 지역들의 기후와 다르게 만드는 대양의 기후와 지리적 여건 등 가변 요소들을 무시한 견해다.

기후 변화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떻게 로마 제국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논의는 좀더 많은 과학적 조사가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e.계급 투쟁

 

- 계급 투쟁 혁명으로 얼룩진 근대의 역사가 일부 역사가로 하여금 로마 제국의 해체 원인을 농민 계급과 이들을 전통적으로 착취하던 도시 계급 사이의 계급 투쟁의 결과로 설명하도록 이끌었다.이 설에 따르면 로마 군대가 대부분 가난한 농민들로 구성되자 이들이 내전을 통해 도시민을 약탈하여 보복했다고 한다. 그러나 군인들은 특정 계급에 기울어지지 않았고 도시 주민을 약탈하는 것 만큼이나 자주 농촌 주민을 약탈했다.

 

f.기독교

 

- 기독교가 로마 제국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는 견해는 5세기까지 기독교를 배척하며 로마 문화를 주도한 로마 지식인들이 내놓은 견해이다. 이들은 기독교가 제국의 군사적 열의를 침체시킨 위험한 평화주의(Pacifism)을 조장했고 병력 자원을 수도원으로 빼냈고 국가를 구하는데 필요한 우수한 인재들을 교회의 성직자로 끌어들였으며 타 종교들에 불관용하여 위기 때에 국가를 지키는 데 필요한 내부의 단결을 파괴했다고 보았다.

 

나. 부수적인 원인들

 

a.우발적인 사건과 게르만 족의 침공

 

-어떤 학파는 로마의 멸망을 설명할 만한 총괄적인 원인들은 없고 다만 연속성을 갖고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들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갑작스럽게 죽었고 그를 계승한 콤모두스가 그의 원대한 게르만 정복 계획을 단행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과, 발렌스 황제가 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를 앞두고 어리석게도 증원군을 기다리지 않기로 한 것과,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어린 두 명의 남자 상속자만을 남겨 두고 죽음으로써 로마 제국을 항구적으로 분열시키는 데 기여한 것과, 서고트 족을 제압할 능력이 있었던 장군 스틸리코가 암살된 일 같은 사건들이 하나로 작용하여 로마 제국의 멸망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학파는 서기 4,5 세기에 발생한 게르만 족의 쉴새없는 침공이 제국을 해체시킨 진정한 원인이었다고 강조한다.

이 설명들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갖고 있다. 우발적인 사건들과 게르만 족의 침공이 한데 겹쳐 제국의 몰락을 초래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런 요인들만 중시하면 왜 그 사건들이 그토록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는가 하는 더 크고 중요한 문제를 놓치게 된다.

 

다. 본질적인 원인들

 

a.로마 제국의 지리적 구조

 

- 로마 제국의 지리적 구조는 제국이 4,5세기에 발생한 훈족과 게르만족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던 본질적인 원인이었다. 제국은 도우넛을 옆으로 길게 늘여놓은 것 같은 형태로 지중해가 중간에 크게 뚫린 구멍에 해당했다.

여러 면에서 그 '구멍'은 크나큰 자산이었다. 왜냐하면 지중해는 고대 세계의 가장 유용한 운송 수단을 제공했고 지중해 연안 전역을 단일 제국으로 묶어둘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제국의 이러한 지리적 구조는 육지의 국경선이 거주 가능한 영토의 면적에 비해 지나치게 길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국경 지대들이 심각한 위협을 받을 때 그 지역들을 방어하는데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이 들었으며 제국을 유지하기에 필요한 다른 중요한 활동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자원이 할애되었다. 서로마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서부 로마의 국경 지대는 로마의 동부 지역에 비해 더 길고 취약하였다. 게르만족이 라인 강과 도나우 강으로 이어지는 2400킬로미터의 국경선을 넘어 침공해 들어온 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동방이 아르카디우스(Arcadius, 재위 395~408) 황제 때 일리리쿰의 320킬로미터를 인수할 때까지 도나우 강 하류 지대를 제외한 전 지역을 방어할 책임은 모두 서방의 몫이었다. 더욱이 도나우 강 하류를 건너온 이민족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철옹성같은 방어에 가로막히면 서방으로 기수를 돌리는 경우가 많았다. 브리타니아도 하드리아누스 장벽을 넘어오려는 야만족과 해상에서 침략해오는 앵글로 색슨 족에 맞서 방어해야 할 지역이 매우 넓었고, 북아프리카 서부도 무어 족의 공세에 시달렸다. 동방의 로마는 이집트에 훨씬 안전한 국경 지대를 두고 있었고 페르시아와 가끔 전쟁을 치루기도 했으나 외교를 통해 관계를 조정할 수 있었다.

 

b.인력 부족

 

-방어할 국경 지대는 광활하고 이민족의 침입은 늘어만 가는 상황에서 후기의 로마 제국은 경제 활동과 병력 자원에 필요한 인력이 부족하였다. 로마 제국 전성기의 영토는 대략 350만 평방 킬로미터였으며, 인구는 7천만으로 추정된다. 제국의 인구가 전염병이나 그밖의 원인들로 심각하게 감소하지는 않았으며 정체 상태였다. 그러나 인력 수요가 갈수록 커지는 상황에서 인구의 정체는 군과 경제의 활력을 감소시켰다.

도시가 발달하고 인구가 많은 동방에 비해 인구가 적은 서방은 인력 부족으로 더 큰 곤란을 겪었다. 이에 따라 서방은 갈수록 강력한 게르만족 군사 지도자들에게 의존하게 되었고 결국 그들이 서로마를 차지하게 되었다.

 

c.경제의 취약성

 

-로마 제국의 경제도 4, 5세기로 갈수록 무거워져 가던 국방의 짐을 지기에는 무리였다. 과거에는 제국의 번영이 정복 전쟁을 통한 전리품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제국 후기에는 정복 전쟁으로 이익을 남길만한 곳이 없었다. 게르만 족은 가난했고 사산 조 페르시아는 너무 강했다.

로마 경제의 근간은 농업과 사치품 교역이었다. 로마의 농업은 사람의 노동력에 의존하여 노력에 비해 부가가치가 대단히 적었고 사치품 생산도 귀금속을 고갈시켰다. 귀금속 감소는 경제에 매우 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 고대의 화폐와 재정은 정화(正貨) 즉 액면상의 무게와 가치를 지닌 귀금속 주화들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이런 화폐 체계로 사업을 확대하기 위한 목돈을 조달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로마 경제는 확대재생산을 할 수 없었고 현상을 유지하는 차원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국방에 문제가 생기면 더 많은 세금을 거둘 수 밖에 없었다. 과중한 세금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몰락하였다.

제국의 서방에서 경제 문제가 더 심각하였다. 정화(正貨)의 고갈은 동방에서보다 서방에서 두드러졌다. 동방 도시의 주민들이 중국, 아프리카, 인도와의 사치품 교역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수입한 비단과 상아, 보석류 등을 가공하여 서방에 팔아 이익을 남겼으므로 제국 동부의 무역수지는 균형을 유지했다.

 

d.불안정한 정치 문화

 

-부패하고 불안정한 정치가 로마 제국 멸망의 큰 원인이다. 소중한 인력과 자원이 파괴적인 정권 쟁탈전에 소모되었고 또한 국방을 약화시켰다. 관리들은 권력을 남용하여 치부하였고 뇌물이 횡행하였다. 부자들은 돈과 권력을 이용하여 세금을 피했고 중간층 도시 주민과 가난한 농민들이 가장 큰 착취를 보아 제국의 경제 기반이 더욱 약화되었다.

 

e.귀족적 가치관

 

-귀족들은 독립된 권력을 갖춘 대지주가 되어 문화 생활을 즐기며 여생을 보내는 것이 최고의 인생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귀족들의 사고는 전 사회계층이 공유하는 것으로 생산을 위한 노동이나 상업은 노예들 같은 천한 사람이 하는 것으로 여겨 별로 가치를 두지 않았다.

교육도 이러한 사고를 반영하고 있었다. 수사학과 법학을 통하여 언변과 추상적 사고를 키웠다. 로마 귀족들은 추상적 사고를 실질적이고 생산적인 목적에 적용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들은 노동력을 절감하거나 생산성을 높이는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도시의 발달도 경제적으로 역효과를 냈다. 고대의 도시는 대개 전쟁을 통한 이익과 노예에 의한 경작으로 돈을 번 귀족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귀족들은 도시를 통하여 정치 권력을 행사하고 도시민의 후원자로서 지위를 과시했다. 그들은 과시욕으로 자기들의 도시를 웅장하게 장식하기 위한 개선문, 신전, 원형극장, 공중 목욕탕을 건설하였으나 생산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귀족들이 권력과 명예에 정신이 팔려 있어 정치 불안과 내전이 심했다. 이것은 공화정을 약화시킨 주원인이기도 하다. 황제가 된다는 것은 그 직위에 따르는 최고의 권력과 명성과 영광을 얻는 것을 뜻했다. 그러므로 외침의 위기에서도 내전을 일으키면서까지 황제가 되려는 유혹은 컸다.

반면에 권력이 황제에 집중되다보니 많은 귀족들이 공직을 포기하고 재산 축적, 사적 군대 육성, 화려한 사치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귀족들의 이러한 생활은 제국을 약화시키는데 기여했다.

출신 성분이 귀족이 아니었던 자들은 귀족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동경하고 그들처럼 되고 싶어했다. 이들은 군대나 정부의 고위직에 올라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긁어모았다. 고위직의 부패는 중간층과 하류층을 약화시키고 소외시켰다.

 

3. 제국 멸망의 결정타 - 게르만 족의 이동과 로마의 멸망

 

가 - 게르만 족의 대이동과 로마의 멸망

 

- 콘스탄티누스 사후 제국은 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 재위 337~361)가 제위를 이었고 기독교 우대 정책을 이어나갔다. 그의 치세아래 게르만족의 갈리아 침공이 다시 활발해졌다. 거듭 패배를 맛본 콘스탄티우스는 전에 제위다툼에서 죽인 사촌의 아들인 율리아누스를 사령관에 앉혔다. 전투 경험은 없고 철학공부만 한 율리아누스지만 지휘능력은 탁월하여 삽시간에 게르만족을 격퇴하였다. 예부터 무훈을 세훈 장군에 의한 권력참탈은 흔한일이었고 로마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율리아누스는 승전한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진군하여 황제가 되었다. 율리아누스는 제우스신을 섬겼으나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하지 않고 기독교가 타 종교에 빼앗은 재산을 다시 돌려주라고만 하였다. 검소한 율리아누스는 궁중의 미용사, 요리사, 환관 등을 모두 추방하였다. 그가 363년 페르시아 원정을 떠나 전사하지만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의 사후 제위는 발렌티아누스 1세(Valentianus, 364~375)와 발렌스(Valens, 364~378) 두 형제가 이었다. 이때의 로마군대는 이미 게르만족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375년 흉노족의 일파인 훈(Hun)족이 볼가강을 건너 동고트(Ostrogoth)

족을 쳤다. 이에 놀란 6만의 서고트(Vishgoth)족이 로마 영내로 피난하기를 요청하였고 발렌스황제는 이를 허락하였다. 식량문제로 인해 난민으로 들어온 서고트족과 로마는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서고트족은 폭동을 일으켰다.

378년 8월 9일 발렌스 황제가 이끄는 8만 로마군이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가까운 아드리아노플에서 고트족과 대회전을 벌였다. 역사상으로도 유명한전투로 압도적인 서고트의 기병에 중장보병으로 거의 이루어진 로마군대는 철저히 유린당으며 발렌스황제도 전사했다. 이전에도 게르만족에 로마군이 패한적은 많았으나 이번의 패배는 의미가 달랐으며 이후 제국과 게르만족사이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변하였다. 발렌스의 뒤를 이은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379~395)황제는 그들을 격퇴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제국내의 정주를 허가했다. 이리하여 대부분의 고트족은 다뉴브강 이남에, 반달(Vandal)족은 판도니아 지방에, 프랑크족은 라인강 이남에 자리잡았다. 이들은 독자적인 법과 왕을 두었으므로 사실상 로마제국안에 새로운 국가들이 생긴것과 다름없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생전에 로마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두명의 아들을 부황제로 임명하여 다스렸는데 395년 그가 사망한후 로마제국은 완전히 동서로 갈렸다. 장남인 아르카디우스(Arcadius)가 동로마황제가 되었고 차남인 호노리우스(Honorius)가 서로마황제가 되었다. 동로마제국은 요직에 앉은 게르만족을 추방하고 발칸지역에 뿌리를 둔채 1453년 오스만투르크의 침입으로 멸망할때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서로마 제국은 그러하지 못했다. 410년 족장 알라리크(Alaric)가 거느린 고트족이 로마를 점령하고 약탈하였다. B.C 378년 켈트족이 로마를 점령한지 거의 800년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고트족의 로마약탈도 453년에 있었던 반달족의 로마 약탈에 비할바는 못되었다.(영어로 Vandalisn은 약탈을 뜻한다.)마침내 최후의 로마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Odoacer)에 의해 폐위됨으로써

로마는 역사의 막을 내렸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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