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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에 관하여/고대 문명

페니키아

페니키아

 
페니키아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받고 지중해에서 한 때 번성한 나라로 크레타와 그리스에
문화적 영향을 끼쳤으나 로마에 의해 멸망한 나라입니다.
즉, 오리엔트 문명과 유럽 문명의 다리 역할을 한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페니키아는 포에니(Phoenica) 또는 카르타고라고도 불리웠으며, 성경에서는 두로 왕국과 시돈으로 불립니다.

페니키아는 상업을 발달시켜 최초로 화폐를 사용했고, 알파벳을 개발했습니다.
그러나 프리메이슨의 원조인 히람샤리프를 배출했고, 향락적 문화를 발전시켰고, 이스라엘에 바알신을
전해줘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로 번번이 심판 받게 했고, 유아 인신제사 등 사탄숭배 7가지 요소가 모두
포함된 바빌론에 버금가는 사탄의 왕국이었습니다.

 그럼 문명 전파 과정, 역사, 성경에서 본 페니키아, 문화, 포에니 전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문명 전파 과정

페니키아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받은 문화를 계승 발전시켜 크레타와 그리스에 전해 주었지만,
크레타의 오랜 역사와 해상 활동을 놓고 볼 때 크레타 역시 직접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문화를 전수받았습니다.
그리스는 크레타와 페니키아로부터 문화를 전수 받았고, 피타고라스와 유클리드는 직접 이집트로 가서 기하학을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로마는 그리스의 문화를 그대로 받아드려 정치제도, 철학, 신화를 수용하였고, 법 제도와 군대 조직 정도만
발전시킵니다.
로마가 유럽을 지배하면서 로마의 문명이 유럽에 퍼져나갔고, 게르만족이 로마를 점령하면서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사탄의 역사가 반역의 역사이어서 그런지 역사적으로 문명을 받은 쪽은 문명을 전해준 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로마는 유럽의 게르만족에게 시달리다 멸망했고, 그리스는 로마에게 정복당했고, 크레타는 화산폭발로 자멸한 뒤
그리스의 지배를 받았고, 페니키아는 로마에게 완전히 멸망당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페르시아)는 마케도니아(그리스의 한 지방)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하고, 이집트는 페르시아에게
종속된 후 알렉산더에게 정복당했다가 로마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2. 역사

페니키아(右)와 페니키아의 식민지(左)

페니키아

페니키아는 셈족이 기원전 2000년 경에 지중해 동쪽의 시리아 중부 지방에 건설한 도시 국가입니다.
향해술이 뛰어나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였으며
북쪽은 에레우세루스에서 남쪽으로는 카르멜산 근처에 이릅니다.
정치적으로 통일된 적은 없고, 우가리트(라스 샴라) ·비블로스 ·베리토스(베이루트) ·시돈(사이다) ·티루스(티레) 등의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한 도시연맹의 형태를 취하였습니다.
페니키아인(
)은 헤브라이인 ·아람인과 함께 셈인의 가나안계()에 속하나 오래 전에 혼혈이 이루어졌습니다.

지리적으로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접점(
)에 있으며, 크레타문명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BC 3000년기(
)에는 이집트와의 통상이 활발하였으나, BC 2000년기에 들어서면서 민족이동의 영향으로 혼란이
생기고, 중간기에는 아리아계(
) ·후르리계 ·가나안계의 소도시 국가군()이 분립()하였습니다.
최고(
)의 알파벳이 성립된 것도 이 무렵이고 BC 15∼BC 13세기에는 우가리트가 번영하였습니다.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세력 아래 놓인 시기도 있었으나, 강국들 사이에서 살아 남았습니다.
BC 13세기에 ‘바다의 민족’에 의해 모든 도시가 파괴되었을 때도 티레를 중심으로 재빨리 부흥하여 각지에
식민시(
:)를 설치, 번영을 회복하였습니다.
특히 서부 지중해를 향한 진출은 중요하여, 아프리카 북안(
)에 우티카 ·카르타고와 에스파냐의 가데스 등에
식민시를 건설하였습니다.

서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카르타고는 계속해서 서방을 향하여 판도를 넓혀 갔으며, 시칠리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약 3세기에 걸쳐 그리스인과 충돌을 되풀이하였습니다.
BC 6세기에는 에트루리아인(人)과 결탁하여 그리스인과 충돌하였고 BC 540년경에는 코르시카섬에서 퍼카이아인과
싸웠으며 BC 480년에는 시칠리아 히메라의 싸움에서 시라쿠사의 겔론에게 패하였습니다.

국력의 재건을 도모한 카르타고는 BC 5세기 후반에서 BC 4세기 중엽에 걸쳐 특히 시라쿠사의 참주(僭主)
디오니시오스와의 싸움을 벌였습니다.
BC 4세기 중엽 시라쿠사의 티모레온과의 싸움에서는 패배하였고, BC 310년에는 아가토클레스에게 아프리카 본토가
침공되어 카르타고가 포위되었으나 격퇴하고 아가토클레스 사후에 마침내 시칠리아의 패권을 재차 확립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에피루스 왕 피로스의 개입으로 결국 시칠리아에 대한 완전지배권을 잃게 되었습니다.
한편 로마인과의 사이에는 오래 전부터 조약을 맺어 서로 충돌이 없었으나, 피로스전쟁 후 양자의 대립이 격화하여
BC 264∼BC 146년 사이에 3차에 걸친 포에니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약 5세기 동안을 지중해의 주인이었던 상업국가 카르타고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남하해 오는 새로운 군사 국가
로마에게 무참히, 흔적도 없이 멸망당했습니다.

 

 

3. 성경에서 본 페니키아

페니키아 최고의 신인 바알 신

바빌론의 반인반사자와 비슷한 조각

독수리가 새겨진 동전

레바논 산맥의 서쪽에 있는 지중해변에는 여러 개의 항구들이 발달했는데 우가릿 점토판이 출토되어 유명한
우가릿과 지금 레바논의 수도인 베이루트 그리고 굴지의 무역항이었던 시돈과 두로 등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시돈과 두로는 지중해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항구로 이들 두 항구는 같은 왕이 다스렸고
창세기에 의하면 시돈은 가나안의 장자였습니다.

창 10/15~18 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의 조상을 낳았더니 이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처하였더라.


헬라에서는 레바논 산맥의 서쪽 지역을 페니키아라고 불렀는데, 한글 성경에서 ‘베니게’로 표기되었고 이는 붉은빛
물감을 의미하며 셈어의 ‘가나안’이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의 거래품목 중에서 특히 붉은 옷감이 유명했기 때문이었고, 가나안이라는 말은 동시에 ‘장사꾼’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에서 페니키아 왕은 주로 두로 왕 으로 나타납니다.

에스겔 28/2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다 하도다.

두로의 수호신은 사랑의 여신 아스다롯이었습니다.
두로의 수호신 아스다롯은 크레타섬에서 헬라로 들어가 아프로디테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 이름은 거품을 의미하는 말로 그녀가 바다 가운데서 태어났음을 가리킵니다.
아프로디테는 헬라의 무역항이었던 고린도의 수호신이 되었습니다.

자유연애를 조장하는 이 음란의 여신은 두로의 장사꾼들이 만든 신이었고, 사람들을 미혹하여 사치와 허영에
빠지게 한 장사꾼의 장사를 돕는 신이었습니다.
아비를 쫓아낸 반역의 신 바알과 자유연애를 조장하는 음란의 여신 아스다롯이 주도하는 가나안 문화는 헬라로
들어갔고, 로마가 그것을 계승하였으며, 오늘날 그 바알의 반역과 아스다롯의 음란이 서양 문명의 뼈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 성경에 나타난 두로 왕국에 관한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두로는 부유하고 이집트의 곡식을 배로 운반하는 열국의 시장이었습니다. (
사23/3).

(2) 두로왕이 솔로몬 시대에 성전 건축의 목재 석재 기술자를 파견합니다. (
삼하5/11, 왕상5/9,17,18).

(3) 이스라엘의 아합왕은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시돈의 바알신과 아세라 목상이 이스라엘로
들어가 섬겨져 하나님의 진노를 삽니다. (
왕상16/31~33).

 

 

4. 문화

사르다니아와 코르시카, 이베리아 반도의 동남부 해안과 아프리카의 북서부 등지에 많은 식민을 건설한 카르타고는
그들 고유의 전통적인 항해 기술을 이용하여 대외 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주요 무역품인 주석, 청동 제조에 꼭 필요한 주석을 구하기 위해 지중해를 벗어나 멀리 브리타니아까지
배를 보냈습니다.

아프리카 서해안에서는 많은 황금과 상아를 거두었고, 내륙에서는 대규모로 밀을 경작했습니다.
후대까지 이름이 높았던 카르타고의 밀 생산량은 풍부한 식량 자원이 되었습니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지만, 고대의 무역은 뛰어난 과학 기술을 필요로 했습니다.
바다를 통한 무역을 하자면 많은 과학 기술의 바탕이 있어야 했습니다.

배를 건조할 수 있는 조선 기술, 배를 운항하는 항해술, 게다가 바다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천체를 살필 수 있어야
아무런 지표가 없는 바다에서 살아남고 항해할 수 있습니다.
고대의 유명한 페니키아 상인들은 이 삼박자를 갖추었기 때문에 그 옛날에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페니키아인은 목재 ·올리브 ·포도 ·건어(
) 등을 수출하였는데, 특히 미술 공예에도 뛰어나, 금은 ·보석 ·상아 ·
유리로 만든 공예품과 염색제품 등을 무역 루트를 통하여 오리엔트와 지중해 연안 각지에 널리 퍼뜨렸습니다.
그들에게는 인신공희(人身供犧)라는 잔혹한 종교적 풍습이 있어 신전의 앞마당에는 여신(女神) 타니트와 남신(男神)
바아르아몽에게 산 희생물로서 바쳐진 어린이들의 유해가 매장되어 있습니다.

페니키아 문자

페니키아, 그리스, 로마 문자의 비교

탈레스


a) 문자 (알파벳)

고대 페니키아인이 쓰던 문자는 22개의 자음으로 되어 있으며 오늘날 서양 문자체계의 모체입니다.
BC 17세기 무렵 북(北)셈어족 문자를 기본으로 창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BC 11∼BC 10세기에는 초기
회화문자(繪畵文字)의 특성이 희박해지고 실용적 문자로 비문 등에 널리 쓰였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페니키아문자는 BC 11세기 무렵 페니키아 비블로스(지금의 레바논)에 있는 아히람왕의 관에
새겨진 각문(刻文)입니다.

BC 11세기에 이르러 페니키아의 식민·무역 활동으로 페니키아문자는 지중해 연안지방으로 전파되어 BC 8세기
무렵에는 그리스문자와 에트루리아문자를 통하여 라틴문자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BC 약 1세기 무렵까지 페니키아 본토에서 사용되었으며 그 변형인 식민지 페니키아문자는 키프로-페니키아문자
(BC 10∼BC 2세기)와 샤르데냐문자(BC 9세기)로 분류됩니다.

 

b) 탈레스

탈레스는 소아시아연안의 밀레토스에서 활약한 고대 그리스의 최초의 자연철학자입니다.
그는 상업 민족 페니키아인의 후예이며 올리브유의 무역상인 이기도 합니다.
선진국인 이집트나 바빌로니아 등에 여행하여 많은 과학적 지식을 익혔는데, 기원전 585년 5월 28일의 일식을
예언하기도 하고, 피라미드의 높이라든가 해안에서 해상의 배까지의 거리를 계산하였습니다.
그는 이집트의 경험적·실용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최초의 기하학을 확립하였습니다. 

BC 6세기에는 아직 '철학자'(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탈레스는 신화적 요소를 철저히 버리고 세계의 기원을 순수하게 자연에 기초하여 설명한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물에서 나온다고 주장했으며 이 주장은 깊은 내륙에서 바다동물의 화석을 발견한 데 근거한
설명이었습니다.

 

 

5. 포에니 전쟁

로마 군함

코끼리를 동원한 한니발 장군

페니키아의 도시

포에니라는 말은 라틴어로 페니키아인을 가리킵니다.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둘러싸고 BC 3세기 중엽에서 BC 2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전후(
) 3차에 걸쳐 있었던
고대의 세계적 전쟁입니다.
이 전쟁을 계기로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고 전세계로 뻗어나갔고, 페니키아는 영원히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제1차(BC 264∼BC 241)】

포에니 전쟁의 발단은 시칠리아에서 일어났습니다.
시칠리아섬의 메사나를 점령하고 있던 마메르티니(군신 마르스의 아들들을 뜻함)로 불리는 이탈리아인 용병대가,
카르타고와 손잡은 시라쿠사의 왕 히에론 2세의 공격을 받고 로마에 구원을 청한 것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원병을 보낸다는 것은 카르타고와의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로마의 원로원은 알고 있었습니다.

원로원이 망설이는 구원군의 파병을 민회가 결의하였습니다.
이로써 결국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고 B.C. 264년의 일입니다.
히에론 2세가 카르타고를 배반하고 로마에 붙음으로써, 시칠리아 남부의 아그리겐툼도 로마의 손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해군력이 카르타고에 미치지 못하는 로마로서는 함대를 구축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로마는 그리스인의 원조로 군함을 건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카르타고는 5단노선(노를 5단으로 장치한 배)을 120척이나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3장선(돛대가 3개 있는 배)와 3단노선들로 구성된 뒤떨어진 함대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함대는 BC 260년에 완성되었습니다.

당시의 해전은, 먼저 배와 배를 충돌시켜 적의 군함을 격파한 다음, 적의 배에 올라 육지전에서처럼 격투를 벌이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함대는 뱃머리를 쇠로 무장하고 적함의 약한 부분에 충돌함으로써, 배를 부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항해 기술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코르부스(적교:弔橋)입니다.
밧줄로 적교를 돛대에 묶어놓았다가 적함의 갑판에 내려놓고 쇠갈고리로 고정시켜 적함과의 연결을 튼튼히 함으로써,
배의 파손 없이 적의 배에 올라 격투를 벌일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로마는 카르타고를 무찌르고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였습니다.

카르타고로 진격해 들어가는 로마군은 카르타고의 용병군을 이끈 스파르타의 크산티포스에게 크게 패하였습니다.
그는 코끼리 부대와 기병대를 활용하여 로마의 집정관 레굴루스를 포로로 잡고 로마군을 섬멸하였습니다.
게다가 살아남은 부대를 구출하러 간 350척의 로마 함대는 귀환길에 태풍을 만나 80척만 남고 모두 침몰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해를 거듭하면서 시칠리아섬의 각 도시에서 공방전이 계속되며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져 도무지 진전이 없었습니다.
로마는 커다란 손해를 거듭하기만 하였습니다.
BC 247년, 하밀카르 바르카스라는 청년 장교가 시칠리아에서 사병을 모아 이를 강훈련을 통한 정예 부대로 키워,
로마에 대항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전세는 로마에게 더욱 불리해졌습니다.
패색이 짙어지는 가운데 로마의 원로원은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이 무렵 로마의 부유한 몇 사람의 시민이 사재를 털어 함대를 마련할 군자금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200척의 함대와 6,000명의 수병을 모아 대병력을 구성한 로마군은 카르타고의 남은 함대를 전멸시켰습니다.

BC 241년의 일로 전쟁은 무려 23년 만에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카르타고는 화의를 청하였고, 거액의 배상금 외에 시칠리아를 로마에 넘기게 되었습니다.
로마는 이제 이탈리아 반도 뿐 아니라, 해외의 속령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칠리아는 로마의 첫 프로빙키아(속주)가 되었습니다.
 

【제2차(BC 218∼BC 201)】

시칠리아를 잃은 것은 카르타고에게는 큰 타격이었습니다.
하밀카르 바르카스는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가 원주민을 차례로 정복하고 은광을 개발하는 등, 점차 국가의 부를
회복해 가고 있었습니다.
바르카스의 큰 아들이 바로 유명한 한니발이었습니다.

군대의 진영에서 태어난 한니발은 곱슬곱슬한 검은 머리와 턱수염, 게다가 굉장히 검은 피부를 지녔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카르타고인은 셈족과 아프리카 흑인의 혼혈아였습니다.
한니발은 전쟁중인 군진에서 성장하였는데, 로마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이 남달랐습니다.
한니발은 원주민들로 구성된 용병대를 훌륭하게 훈련시켰습니다.

BC 220년 이베리아 반도(지금의 스페인)를 정복한 한니발은 로마를 쳐들어갔습니다.
B.C. 218년에 동부 지중해안에 있던 로마의 동맹시 사군툼에 내분이 일어났는데, 이를 기회로 한니발은 8개월 동안
포위 공격을 함으로써, 끝내 사군툼을 함락시켰습니다.
이로써 한니발 전쟁이라고도 하는 제 2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한니발은 제 2차 포에니 전쟁의 모든 국면에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는 보병 5만 명, 기병 9천 명과 40마리의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피레네 산맥을 넘고, 알프스를 넘는 고난의 행군을
이겨냈습니다.
아무도 그가 북쪽의 눈 덮인 산을 넘어 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BC 216년에는 반도 남부의 칸나에(칸네)에서, 결사의 로마군을 전멸시킨 한니발의 획기적인 전술은 명장으로서의
그의 이름을 역사에 길이 남게 하였습니다.

초반부터 대패한 로마는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으로 선출하여 한니발과 싸우게 했습니다.
파비우스는 한니발에게 싸움을 걸지 않고, 카르타고군의 자멸을 기다리자고 주장하였습니다.
파비우스의 반대파들은 그를 비겁자라고 욕하였습니다.
칸나에에서의 참패는 파비우스의 반대파가 무모하게 전쟁을 이끈 탓이었습니다.
로마군은 8만 6천 명의 군사 가운데 1만 4천 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카르타고군의 전사자는 6천 명이니 전사자 비율은 로마군이 90%, 카르타고군이 12%였습니다.

패전을 거듭했지만, 로마 국민의 조국에 대한 충성심은 오히려 더욱 깊어졌습니다.
로마의 동맹시들도 한니발에게 점령된 도시들을 제외하면, 로마를 배반한 도시는 없었습니다.
한니발은 로마가 도시 동맹 공동체기 때문에, 쉽게 와해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BC 207년 한니발의 동생 하스두르발이 원군을 거느리고 왔으나 그의 밀서가 아쉽게도 로마군의 손에 우연히 들어가게
되었고 하스두르발의 군대는 로마군에게 탐지되어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명장 한니발도 이로부터 차츰 힘을 잃기 시작하여, 점차 이탈리아의 남부로 쫓기게 되었습니다.
카르타고에게는 경제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이베리아 반도의 전선이 오랜 고전 끝에 로마에게 제압되었습니다.
BC 206년의 일로 전쟁이 시작된 지 12년이 지나서였습니다.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가 이베리아로부터 개선해 왔습니다.

그는 여론을 들뜨게 하여 스스로 사령관이 되어 단숨에 카르타고를 쳐들어갔습니다.
대승을 거둔 스키피오에게 카르타고는 화의를 요청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니발은 급히 본국으로 소환되었고 최후의 결전을 위해 방비를 튼튼히 했습니다.
한니발은 카르타고의 해상을 완벽하게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군은 우티카에 상륙하여 육로로 쳐들어 왔습니다.
한니발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제 2차 포에니 전쟁의 승패를 가른 BC 202년 자마의 전투에서 최후의 승리자는 로마였습니다.
지와 용을 겸비한 명장 한니발은 불운한 장군이었습니다.
이탈리아 반도에서 15년간을 싸웠어도, 본국에서는 원군을 보내지 않았고, 그나마 동생인 하스두르발이 원군을
이끌고 왔지만, 로마군에게 발각되어 전멸당하고 말았습니다.

만일 카르타고에서 한니발에게 지속적인 원조를 보냈다면 포에니 전쟁의 결말은 달라질 수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한니발의 불행은 패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니발은 시칠리아, 소아시아 등으로 망명하여 떠돌게 되었습니다.
후에 로마가 더욱 힘을 불려 소아시아 지역에까지 그 세력권을 넓히자, 한니발은 스스로 자살했습니다.
카르타고는 패전국으로서, 20척을 제외한 모든 선박을 로마에 양도하고, 50년 동안 해마다 200 탈렌트의 배상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의 허락이 없이는 그 어떤 경우에도 외국과 교전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는 한니발을 도운 마케도니아왕 필립 5세와의 전쟁을 통해 동부 지중해에 대한 지배권을 넓혀 나갔습니다.
BC 146년 마케도니아를 멸망시키고 로마의 속주로 삼았으며, 그리스의 오랜 도시 코린트를 격파하고 코린트 주민을
모두 노예로 팔고, 완전히 파괴해 버렸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 로마의 속주와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제3차(BC 149∼BC 146)】

카토는 집정관으로서 “카르타고는 멸망시켜야만 합니다.”라고 ‘카르타고 격멸론’을 줄기차게 주장하였습니다.
BC 174년 카토는 카르타고와 마시니시 간의 불화를 조사하기 위해 북아프리카에 파견되었습니다.
그는 포에니 전쟁에서 패하고도 카르타고가 번영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그는 카르타고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어서는 안된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제 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자, 카르타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지만, 지중해의 무역권을 놓고 로마와 맞서고
있었습니다.
그는 원로원에서 아프리카산 무화과를 보였습니다.
사람들이 그 크고 탐스러운 열매에 감탄하자, “이것은 뱃길로 사흘밖에 걸리지 않는 땅에서 난 것입니다.”라고 말을
꺼내고는 카르타고에 대한 경계심을 일깨웠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는 원로원에서 발언하게 되면, 늘 말미에 “그건 그렇다 치고, 카르타고는 마땅히 멸망시켜야만 합니다.”로
맺곤 했으니 대단한 집념이었습니다. .
그러나 카토는 평생 소원처럼 입으로 부르짖던 카르타고의 멸망을 보지 못하고, 제 3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될 무렵에
죽고 말았습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제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긴 명장이었습니다.
그는 카토의 ‘카르타고 격멸론’에 대하여 ‘카르타고 존속론’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그가 ‘카르타고 존속론’을 주장한 것은 카르타고가 있음으로 해서 로마 시민들이 경계심을 가지고 살아야 타락을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카르타고를 파괴한 것은 스키피오 일족이었습니다.

제 2차 포에니 전쟁 후에, 이베리아 반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총독은 원주민(켈트 이베리아족)들을 지나치게 착취하였습니다.
이에 원주민들은 자주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로마는 오랜 고전 끝에 BC 133년 그들의 아성인 누만티아를 공략하여 이를 불사르고 간신히 진압하였습니다.

한편 카르타고는 로마의 허락 없이 외국과 교전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던 카르타고의 옆 나라 누미디아왕 마시니사는 심심하면 카르타고의 국경을 넘나들며, 그 영토를
야금야금 빼앗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로마에는 카르타고의 잠재적 능력을 과장하여 보고함으로써, 로마가 카르타고의 군사적 대응을
막도록 하였습니다.

로마의 원로원에서는 ‘카르타고 격멸론’이 늘 주장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카르타고는 대응을 삼가했습니다.
카르타고는 참다 참다 로마의 허락 없이 누미디아와 전투를 벌였습니다.
로마는 지체없이 카르타고에 선전 포고를 해 제 3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로마와 싸울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카르타고는 사절단을 보내고 간곡히 사죄하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카르타고에 파견된 로마군은 카르타고를 완전히 무장해제했습니다.
그리고 카르타고 시민들에게 해안에서 10마일 이상 떨어진 곳으로 퇴거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카르타고를 완전히
파괴한다고 포고하였습니다.
이 포고를 들은 시민들은 “굴종의 삶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죽음을 맞자.”고 비장한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성문을 닫고, 남녀를 가리지 않고 무기를 만들고, 도시 방위를 위한 시설을 새로이 만들었습니다.
여자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쇠뇌(노포:弩砲)의 탄력받이 스프링을 만들고, 노예들은 해방되어 전선에 참여하였습니다.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우며 시작된 농성은 BC 149년부터 시작되어 장장 4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로마군은 이 지루한 농성전에 탈진할 지경이었습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손자, 즉 스키피오의 장남의 양자인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가 로마군의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대(大)스키피오라고 하고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스키피로를 작은 스키피오, 즉
소(小)스키피오라고 구별합니다.
소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에 대한 공격을 훨씬 강도 높게 퍼부었습니다.

기아와 질병에 시달린 카르타고 시민들은 1주일 동안 시가전을 벌였으나 결사적으로 저항한 카르타고도 끝내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카르타고의 주민은 총 인구의 10%도 되지 않았습니다.
처참한 결사 항전에 모든 시민이 동참하여 처절히 죽어간 것이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카르타고는 무려 17일 동안이나 불탔습니다.
카르타고 500년의 번영과 영화는 한 줌의 재로 변하였습니다.
지금의 카르타고 유적지는 그 전쟁의 잔해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로마에 멸망당한 이후 카르타고의 이름을 다시는 역사에서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로마의 잔학한 파괴는 카르타고를 완전히 멸절시키고 말았습니다.
카르타고는 이제 없어지고, 로마의 속주 아프리카만이 그 땅의 이름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오염시켰고, 사탄을 숭배했던 페니키아는 흔적도 없이 멸망함으로써 성경의 두로 왕국에 대한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사야 23/1 이것은 두로를 두고 하신 엄한 경고의 말씀이다.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울어라.
두로가 파멸되었으니, 들어갈 집도 없고, 닻을 내릴 항구도 없다. 키프로스에서 너희가 이 소식을 들었다.

아모스 1/9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투로의 서너 가지 죄과들로 인해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포로 전체를 에돔에 넘겼으며 형제의 언약을 기억하지 아니하였음이라.

악하고 교만했던 시돈도 여호와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에스겔 28/22~23 너는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시돈아, 내가 너를 치겠다.
내가 네 가운데서 내 영광을 드러내겠다. 내가 너를 심판하고, 내가 거룩함을 거기에 나타낼 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이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내가 네게 전염병을 보내고, 너의 거리에 피가 냇물처럼 흐르게 하겠다.
사방에서 적들이 몰려와서 칼로 너를 치면, 사람들이 네 한가운데서 쓰러질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많은 고을에서 기적을 보이셨으나 그들이 회개하지 않음으로 그들이 두로와 시돈처럼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하셨고, 결국 이스레엘은 로마에 의해 대부분 학살당하고, 남은 자는 노예로 끌려가고, 도시는
황폐해져 나라 자체가 없어지게 됩니다.


마태 11/21~22 고라신아, 너에게 화가 있다. 벳새다야, 너에게 화가 있다.
너희에게서 행한 기적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더 견디기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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