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하나님에 관하여/고대 문명

그리스

그리스


그리스와 로마는 인류 문명의 기초가 되는 중심적인 국가 입니다.
그리스와 로마가 만든 정치제도와 법 제도, 사회 시스템 등이 아직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문명은 그리스가 기초가 되었고, 그리스의 문명은 크레타와 페니키아로부터 전수 받았고,
크레타와 페니키아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문명을 이어 받았습니다.

즉,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을 계승 발전시킨 문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리스 신화는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와 이집트의 신화를 혼합해 놓은 듯한 면을 보입니다.
그리스는 다니엘이 본 우상 중 청동으로 된 넓적다리에 해당하고, 로마는 철로 된 다리에 해당합니다.

그럼 크레타, 스파르타, 그리스, 그리스 신화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크레타 (미노안 문명)

a) 역사 

크레타 섬은 그리스 남부에 지중해에 위치한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입니다.
크레타 섬의 문명은 기원 전 3,000년 경 부터 시작되었으며, 크레타 섬에 사는 미노스 칼로카이리노스 라는
상인이 찾아냈습니다.

그 후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반스가 1900년대 초 본격적으로 발굴했고, 크레타의 문명을 미노스 왕의 이름을
따서 ‘미노안(미노스의)’ 문명이라고 이름 붙혔습니다.
미노안 문명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이고 약 2,000년 간 지속됐습니다.
호메로스는 크레타에 각기 다른 다섯 종족이 있었다고 합니다.

헤로도투스는 미노스 왕이 그리스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벽화나 유골을 보아도 크레타 주민은 그리스인과는 인종이 다릅니다.
아마도 이 섬의 토착인일 것입니다.
에번스는, 크레타인이 원래 창조력이 뛰어난 데다가 항해 능력이 출중해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우수한 문명을 받아들여 독특하고 수준 높은 문명을 이룩했다고 보았습니다.

강대하고 화려했던 미노스 왕국은 하루 아침에 멸망해 땅에 묻힙니다.
에번스는 이 궁전이 폼페이처럼 화산폭발 같은 천재지변으로 어느날 갑자기 무너졌다고 추측했습니다.
그는 옥좌가 있는 방을 발굴하면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듯한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방에는 기름 그릇이 거꾸로 엎어져 있었습니다.
아마도 왕이 제사를 지내려고 그 방에 왔다가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최후를 맞이한 것 같았다.

1926년 6월26일 오전 9시45분. 에번스는 자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몸소 겪었습니다.
책을 읽고 있는데 지진이 일어나 느닷없이 땅과 벽이 크게 흔들렸습니다다.
그는 지진이 멈추자마자 밖으로 뛰어나갔더니 왕궁은 괜찮았지만,근처 마을들은 모두 폐허가 돼 있었습니다.

에번스는 거대한 미노스 왕궁을 무너뜨린 것은 밖에서 온 침략자가 아니라 바로 지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대부분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는데,1939년 그리스의 한 젊은 고고학자 스피리돈 마리나토스가
놀라운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크레타 문명을 파괴한 것이 크레타 섬에서 서북쪽으로 120㎞ 떨어져 있는 티라 섬(산토린 섬)의 화산폭발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했습니다.

마리나토스는 1883년 인도네시아 크라카타우 화산이 폭발할 때 3만6천명이 죽고,그 여파로 생긴 해일이 지구를
몇 바퀴나 돌았던 일을 상기시켰습니다.
크라카타우의 4배가 넘는 규모인 산토린 화산의 폭발이야말로 160㎞밖에 떨어지지 않은 크레타 섬과 에게 해
일대에 어마어마하게 큰 피해를 중 것이라 했습니다.
미국 지질학자들이 산토린 화산의 돌들을 조사해 보니, 그 화산은 크레타 문명이 멸망할 무렵인 기원전 1500년께
폭발했고 50년 뒤에 더 크게 폭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마리나토스는 1967년 티라 섬을 발굴해 크레타 왕국과 같은 시대에 번성했던 도시를 용암과 화산재 속에서
찾아냈습니다.
3만명이 살았던 이 도시에서 궁전과 벽화,생활용품이 많이 쏟아져 나옴으로써 미노아 문명은 산토린 섬 화산폭발로
멸망했고,그 뒤 이민족에게 정복되었으리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b) 그리스 신화 중 크레타 관련 부분

* 그리스 신화 중 크레타 문명의 탄생과 관련된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올림포스의 주신(主神) 제우스가 세계를 방랑하다가 페니키아 왕의 딸인 에우로페의
아름다움에 반했습니다.
제우스는 황소로 변해 그녀를 등에 태우고 자기가 태어난 크레타 섬으로 데려갔습니다
그 때 에우로페가 소를 타고 다닌 곳을 그녀의 이름 Europe에서 따서 ‘유럽’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황소(제우스)에 올라 탄 에우로페

 유럽 연합의 상징인 짐승을 탄 여자

제우스가 살았다는 전설이 있는 동굴


제우스와 에우로페 사이에서 세 아들이 태어났는데 첫째인 미노스가 크레타의 왕이 되었습니다.
미노스 왕은 아들 안드레게오스를 아테네에서 열리는 운동 경기에 내보냈습니다.
안드레게오스가 그리스 사람들을 물리치고 월계관을 독차지하자 화가 난 아테네 왕 아이게우스가 그를 죽였습니다.
미노스 왕은 함대를 보내 아테네를 굴복시키고, 9년마다 일곱 청년과 일곱 처녀를 바치라고 요구했습니다.

미노스 왕은 이 젊은이들을 라비린토스 궁전에 보내,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로 하여금 잡아 먹게 했습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산 미노스 왕비 파시하이는 머리는 소이고 몸은 사람인 괴물을 낳자, 미노스
왕은 회랑과 방을 복잡하게 배치해 한번 들어가면 빠져 나올 수 없는 미궁(迷宮)을 짓고 괴물을 가두어 두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 청년과 처녀를 보내야 하는 해가 돌아오자, 아테네는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러자 왕자 테세우스가 미궁의 괴물을 죽이고 젊은이들을 구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는 검은 돛을 단 배를 타고 아테네를 떠나면서, 괴물을 죽이고 살아 돌아오게 되면 검은 돛을 흰 돛으로 바꾸어
달기로 왕과 약속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은 대개 잘 생긴 청년이고 여자에게 약합니다.
크레타 왕국의 아름다운 공주 아리아드네를 본 테세우스는 곧 사랑에 빠졌습니다.
공주도 왕자에게 한눈에 반했습니다.
공주는 미궁을 지은 다이달로스를 찾아가, 미로(迷路)를 헤치고 나올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공주는 그에게 들은 대로 몰래 칼과 털실뭉치를 테세우스에게 건넸습니다.

공주가 털실의 한쪽 끝을 잡은 채 미궁 입구에서 기다리고,왕자는 실을 풀면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괴물과 싸워서 이겼습니다.
그는 털실을 되감으면서 미궁을 빠져 나오자 공주를 데리고 아테네로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흥분한 나머지 검은 돛을 흰 돛으로 바꾸는 것을 깜박 잊었습니다.
아테네 왕은 수평선에 모습을 드러낸 배가 검은 돛을 단 것을 보자 절벽에서 몸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테세우스가 자기 딸을 데리고 도망친 사실을 안 미노스 왕은 대로했습니다.
미궁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알 만한 사람은 다이달로스밖에 없었습니다.
왕은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로스를 잡아다가 미궁에 가두었습니다.
그러자 다이달로스는 새의 날개를 모아 초를 녹여 붙여서 날개를 만들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것을 달고 하늘로 날아올랐는데, 아들은 그만 너무 높이 날아 태양 근처까지 갔다가
날개를 붙인 초가 녹는 바람에 바다에 빠져 죽었습니다.
다이달로스는 무사히 바다를 건너 시칠리아 섬에 닿았습니다.
그는 왕의 마음에 들어 그곳에 숨어 살게 되었습니다.

다이달로스를 찾을 수 없자 미노스 왕은 한 가지 꾀를 내었습니다.
그는 겹겹이 잇댄 나선형의 소라껍데기에 실을 꿰는 사람에게 상을 주겠다고 선전했습니다.
다이달로스가 이름을 숨기고 그 소라껍데기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는 조그마한 구멍을 뚫고는 개미를 잡아다가 다리에 실을 묶어 소라껍데기 속으로 밀어넣었습니다.

개미는 빙빙 돌아 다른 구멍으로 기어나왔습니다.
문제는 풀었지만 다이달로스는 숨어 있던 곳을 들켰습니다.
미노스 왕이 직접 다이달로스를 잡으러 오자, 시칠리아 왕은 다이달로스로 하여금 특별한 목욕통을 만들게 한 뒤
미노스 왕을 거기에 들어가도록 유인해 죽였습니다.

 

c) 문화

크노소스는 미노안(Minoan)의 수도로 이라클리온에서 5km 떨어져 있습니다.
크노소스는 크레타의 가장 중요한 곳이며 미노안(Minoan) 궁전 가운데서 가장 크고 가장 강력하고 인상적인
곳입니다.
이 크노소스 궁전에서 신화상의 미노스 왕조(Minos Dynasty)의 후예인 미노스(Minos)가 살았습니다.

미노스는 해군의 창시자이자 법률가이며 미노안 종교의 지도자였습니다.
미노타우어 신화(myth of Minotaur)는 미노스의 전능과 아테네인들의 크레타에 대한 충성을 보여줍니다.
부가적으로 그것은 궁전의 규모와 복잡한 양식을 나타내준다.

거대한 미노스(Minos) 왕의 궁전과 대저택 그리고 묘지들이 이 크노소스 유적지에 있습니다.
B.C. 3000년 부터 2천년 동안 크노스스는 그리스와 유럽 대륙에서 가장 최초로 그리고 가장 큰 도시이었습니다.

크노소스 시민들은 부유함을 마음껏 누렸으며 오늘날의 눈으로 봐도 매우 세련된 문화를 향유하고 살았습니다.
크레타는 지금도 포도주와 올리브유를 많이 생산하지만 그 옛날에도 값비싼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화려한
무늬가 그려진 항아리에 담아 에게해 일대와 멀리 이집트·시리아·키프로스에까지 수출했습니다.
크레타는 에게해를 통틀어 가장 큰 섬으로 수도인 크노소스 항구는 온갖 배들이 모여드는 무역 중심지였습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수출한 배들은 돌아오는 길에 사치품을 사왔습니다.
주석과 구리는 이탈리아나 에게해의 다른 섬에서, 금과 은은 소아시아에서, 상아는 시리아에서 들여왔습니다.
이집트의 자수정, 아프가니스탄의 청금석, 나일강 유역의 갑충석과 타조알 껍질, 메소포타미아의 보석과 인장이
궁전의 보물창고에 수북이 쌓여있었습니다.
크노소스 궁전은 영국의 버킹엄 궁만큼 컸습니다.
그 건물의 화장실은 수세식이었고 배수구와 호사스러운 목욕탕, 환기 장치와 지하수 도랑과 하수도가 있었습니다.

백합의 왕자
백합꽃이 핀 들판을 공작털로 된 관을 쓰고 
거니는 왕자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항아리 나르는 남자들
남자 인물은 밝은 색의 자수를 놓은 요의(허리옷)를
입고 있으며 금과 은제의 벨트를 매고 은제 발찌와
팔찌를 하고 있으며 귀중한 단지를 나르고 있습니다.

남자들은 가슴을 드러내고,허리에 작은 천을 둘러 엉덩이를 가렸습니다.
그것을 작은 치마처럼 입거나, 팬티처럼 가랑이 사이에 포개어 입고, 때로는 술로 장식한 긴 치마를 입기도
했습니다.
가끔 넓은 허리띠를 찼으며,날씨가 추우면 털가죽 망토를 둘렀습니다.
크레타의 벽화에는 주로 젊은이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젊음을 중시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푸른 빛 속의 여인들
당시 유행에 따라 매우 우아하게 차려 입은 궁정의
여인들이 대화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항아리 나르는 여자들
일반 평민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자들의 화장과 옷차림 또한 세련과 사치의 극치였습니다.
그들은 입술과 볼은 물론 젖꼭지에까지 화장을 했습니다.
꽉 끼는 옷을 입어 몸의 곡선을 강조했고,앞가슴은 대담하게 파서 벌렸습니다.
긴 스커트 자락은 가볍게 퍼지게 했고,옷단에는 장식을 달았으며,색색 무늬가 있는 화려한 드레스도 입었습니다.
벽화에 나타난 한 무희는 투명한 속곳 위에다 노랑 바탕에 빨강 파랑 단을 댄 옷을 입었는데 길고 검은 머리가
어깨 위에서 물결쳤습니다.

에번스는 어느날 매우 특이한 그림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두 소녀가 날뛰는 황소의 앞뒤에서 황소를 어르고, 한 소년이 황소의 등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한 그림이었습니다.
미노타우로스에게 제물로 바쳐진 그리스 젊은이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에번스는 그것 역시 크레타
사람들이 인생을 화려하게 즐긴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이 그림에 나타난 젊은 남녀의 모습에서는 포로나 노예라는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다.
이것은 권투나 레슬링 같은 경기가 아닐까.
이 남녀 선수들은 크레타 사람 중에서 엘리트인 것 같다.
그들은 숙련과 담력을 요하는 아슬아슬한 기예를 보여주고 사람들의 환호에 흥분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발굴해도 크노소스 궁전에서는 방어벽이나 요새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옛 도시를 발굴하면서 처음 보는 일이었습니다.
이 수수께끼는 에번스가 크레타 함대의 자취를 발견함으로써 풀리게 되었습니다.

막강한 크레타의 해군함대는 에게해 출입구를 막아서서 지중해를 오가는 배들을 통제하거나, 외적을 섬에까지
들이지 않고 먼 바다에서 물리친 것은 물론, 바다를 오가며 수출입 무역에 종사했던 것입니다.
에번스가 찾아낸 기름 창고에서 올리브 기름을 담았던 큰 병과 그릇들을 놓고 계산해 보니 약 8만6,000ℓ나 되는
엄청난 기름을 저장할 수 있었습니다.
크노소스 왕궁이 얼마나 부유하고 사치했는지 짐작케 하는 증거였습니다.

 

d) 종교

미노안 문명의 종교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유물을 통해서 대략적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황소 머리 단지
검은 동석(凍石)으로 황소 머리 모양으로 조각한 헌주
(獻酒) 단지로 눈은 수정과 벽옥(碧玉)으로 상감되어
있으며, 입은 하얀 조가비로 상감되어 있고,
뿔은 금박을 입힌 목재로 만들었습니다.

뱀의 여신
구불 구불 움직이는 뱀을 휘어잡고 있는
여신상으로 가는 허리선, 노출된 가슴,
애프런을 걸친 주름 스커트를 입고 있어서
당시의 의상을 보여 줍니다.  

청동 인물상
청동으로 된 얇은 판을 망치로 두둘겨서 만든 3개의
작은 인물상으로 아폴로와 그의 누이 아르테미스와
그들의 어머니인 레토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망치로 두둘겨 조각상을 만든 최초의 청동 작품. 

앉아 있는 여신
신석기시대의 테라코타 소조각상.
크레타 이라페트라 근처의 카토 초리오에서
발굴되었고 다산(多産)의 여신을 상징합니.

 

황소를 보석으로 치장하고, 뱀을 숭배하고, 여신을 섬기는 것을 보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려하고 향락적이고 물질주의적이었던 크레타 문명은 화산폭발로 일순간에 멸망함으로써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스파냐 2/5 해변의 거민, 크렛인들의 민족에게 화 있으리라! 주의 말씀이 너희를 대적하느니라.
오 필리스티아인들의 땅 카나안아, 내가 너를 멸하리니 거기에 거민이 없으리라.

 

디도서 1/12 그들 중의 하나인, 그들 자신의 선지자조차도 말하기를 "크레테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들이고 악한

짐승들이며, 게으른 탐식가들이라." 했으니

 

 

 

 

2. 스파르타

스파르타는 아테네와 경쟁한 그리스의 도시국가로 엄격한 규율에 의한 교육이 유명한 곳입니다.
그러나 이 외에도 스파르타는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이자 금욕적인 국가였습니다.
스파르타는 그리스와 같이 원로원이 있어서 왕권을 견제했습니다.

스파르타의 리크르고스 왕은 토지 개혁을 해 부자가 가진 토지를 가난한 사람에게 분배했습니다.
또한 화폐개혁을 해 금화와 은화를 없애고 철로 만든 동전을 사용하게 했습니다.
이로써 돈의 운반과 사용이 간편해지고, 돈을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경제가 원활해지고 사치가 사라졌습니다.
남자들은 거대한 식당에 모여 공동으로 똑같은 식사를 함으로써 재물에 대한 욕망이 없게 하였습니다.

스파르타 시민의 교육은 국가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새로 태어나는 아기는 스파르타 시민으로 적절한지 여부에 대해 장로들의 검사를 받았습니다.
튼튼하고 건강한 아이들만 양육이 허가되었고 그렇지 못한 아기는 타이게투스 산에 버려져 죽게 되었습니다.
어린이는 7세 까지 집에서 양육되고 이후에는 집을 떠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7세 된 소년들은 아고개 라고 불리우는 교육기관에서 페이도노모스의 감독 아래 생활하였습니다.
이곳에서의 생활 목적은 강철 같은 기강, 명령에 대한 복종, 기아와 고통에 대한 인내심, 후퇴는 생각할 수 없는
어떠한 형태의 경쟁 혹은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인간의 육성에 있었습니다.
담력을 기르고, 화법과 음악을 배웠으며, 나라를 위해 협동하는 애국주의자로 키웠습니다.

짐내스틱은 군사훈련과 신체훈련의 기본적 의미가 되었습니다.
스파르타의 청소년들은 수영, 달리기, 격투술, 레슬링, 권투, 공놀이, 승마, 활쏘기, 투창, 투원반, 야지행군,
판크라티움(권투와 레슬링의 혼합) 등에 대해 훈련을 받았습니다.

 

체육활동은 여성에게도 권장돼 여자도 달리기나 레슬링, 창던지기를 했고,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남자와 같이
벌거 벗고 행진했습니다.
청소년들은 20세에 이르면 스파르타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고 실제 전투에 참여하였습니다.

 

 

 

 

3. 그리스

그리스는 발칸 반도에 있는 본토와 전체 영토의 약 5분의 1을 차지하는 2000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서양 문명의 바탕을 이룬 나라로 민주주의를 최초로 도입했고 철학, 과학, 예술, 체육 등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종교를 받아 들여 신화를 만들고 신전을 지었으며, 델피에서 신접행위를
함으로써 정치에 있어서 사탄의 직접적인 주관을 받았습니다.

a) 역사

1. 미케네 문명

크레타 문명이 쇠퇴하면서 그리스 본토에는 미케네 문명(Mycenaean Civilization)이 출현하였습니다.
이 문명은 B.C. 1500~B.C. 1200년 사이에 절정에 이르렀고, 이 문명의 이름은 미케네라는 고대 도시 성립 이후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중앙 집권적 권위 아래서 비교적 평화를 유지해 왔으며, 미케네 문명에서 가장 인상적인 유물은 아테네의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서 손쉽게 볼 수 있는 금 보석들과 장신구들입니다.
미케네인은 후기에는 신들을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미케네의 도시 국가들은 트로이(Troy)를 격파하고 흑해까지 그들의 무역로를 보호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습니다.
트로이는 크레타의 영향력 안에 있던 곳입니다.
그러나 미케네 문명은 B.C. 12세기에 도리스족의 침략을 받아 쇠퇴하였습니다.
 

2. 기하학 시대

기하학 시대(Geometric Age)는 B.C. 1200 ~ B.C. 800년에 해당합니다.
도리스족은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을 무너뜨리고 주민들을 노예로 잡아갔으며, 나중에는 크레타와 소아시아의
남서부 해변까지 장악하였습니다.
또한 이 때에 테살리아인(Thessalian)으로 불리는 인도 유럽 민족의 하나가 지금의 테살리아에 정착하였습니다.

도리스족은 영화를 누렸지만 그리스는 약 400년 동안 암흑의 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고전 시대 그리스인들은 미케네 문명이 비극적인 종말을 맞은 뒤부터 B.C. 8세기까지 흔히 암흑 시대라고 부르던
수백 년 동안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도리스족은 철과 기하학적인 모양의 도자기를 전해 주었으며, 다산의 여신 대신에 남성신을 숭배했고, 포세이돈,
제우스, 아폴로와 같은 미케네 시대의 신들을 받아들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B.C. 800년께 미케네 시대 형태의 도시 국가들이 재건되었고, 전제 정치 대신 민주주의적인 정부가 부유한
귀족들에 의해 영도되었습니다.
이 때 도리스족과 적대 관계에 있던 이오니아족(Ionian)이 세운 가장 유명한 도시로는 아테네가 있었습니다.
 

3. 고풍의 시대

고풍의 시대(Archaic Age)는 B.C. 800~B.C. 480년에 해당합니다.
이 때는 지방의 농업과 가축 농업이 활기를 띠었고, 그리스의 새로운 식민지가 북아프리카, 이탈리아의 시실리,
남부 프랑스와 남부 스페인에 건설되었습니다.
한편 그리스 알파벳 발명과 호머의 시, 신전의 설립 등은 여러 도시 국가 주민들에게 그리스인으로서의 공동체성을
처음으로 심어 주게 되었습니다.

도시 국가는 높은 지대에 요새화된 아크로폴리스(Acropolis)로 건설되었으며 이 곳에는 신전, 보물이 보관되었고,
외부 민족의 침입 때는 피난처로도 제공되었습니다.
성채 밖에는 아고라(Agora:시장)가 있었으며 그 뒤쪽은 거주 지역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도시 국가들은 자유로운 자치권이 있는 국가들이었지만 이로 인해 말다툼과 전쟁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도시 국가들은 전제 군주의 지배를 폐지하고 집정관이 이끄는 민주적인 형태의 정부를 가졌습니다.
 

4. 아테네와 살론

아테네 및 그 주변 지역인 아티카의 광대한 면적과 유리한 지형은 그리스의 여러 도시 국가들과는 남다른 것이었습니다.
아테네는 자체에서 물을 얻을 수 있는 훌륭한 아크로폴리스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자연적 이점들 덕분에 아테네는 일찍부터 중앙 집권 정체(政體)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아티카는 천연의 방어선을 이루는 4개의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아티카의 긴 해안선은 에게 해로 튀어 나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배를 만들려면 부족한 목재를 대량으로 수입해야 했으며, 이것은 아테네가 제국주의적 사고 방식을 갖게 된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인구가 크게 증가하자 아테네는 경작지를 얻기 위해 제국주의적 방식으로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B.C. 594년 집정관에 임명된 살론(Salon)이 지향한 사회는 여전히 상류층의 단결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계급
사회였지만 그는 좀더 공정한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살론은 빚 때문에 노예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었으며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선포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특권의 세습을 폐지하였고, 부에 근거해서 네 가지 계급으로 정치 권력을 개편하였습니다.
즉 첫번째와 두 번째 계급만이 지배자(관리인)가 될 자격이 있고, 네 가지 계급 모두 행정 장관을 선출할 자격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개혁은 민주주의의 선구적인 것이었습니다.
 

5. 스파르타

펠로폰네소스에는 여러 도시 국가가 스파르타(Sparta)라는 형태 안에서 존재하였습니다.
이것은 다섯 개 마을로 이루어진 그룹이었으며 전제 정치가 남아 있는 몇몇 도시 국가들 가운데 하나인 스파르타는
두 명의 왕이 통치하였습니다.
그들은 도리스족의 혈통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B.C. 9세기의 입법가 뤼쿠르고스(Lycurgus)에 의해 정해진 엄격한
군사적 규정에 따라 운영되었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은 검사를 받아야 했으며, 만일 허약하다고 판명되면 산 꼭대기에 갖다 버렸습니다.
7세의 소년들도 군사 훈련을 받기 위해 집을 떠나야 했으며 소녀들은 군사 훈련에서는 제외되었지만 튼튼한 아들을
낳기 위해 건강을 유지하도록 훈련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6. 페르시안 전쟁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의 대결은 B.C. 500년께 아시아 지역의 그리스 식민지에서 일어난 이오니아 반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페르시아는 반란을 지원한 아테네에 적대감을 갖고 보복을 결심했습니다.

B.C. 519년 점차 세력을 팽창하던 페르시아 제국의 왕좌에 등극한 다리우스(Darius) 1세는 아테네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스파르타에게 뒤에서 아테네를 공격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스파르타인들 역시 그리스를 정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므로 거절하였습니다.

페르시아 군대가 B.C. 490년 마라톤(Marathon)에 상륙하자 1만여 명에 불과한 아테네 병사들은 뛰어난 지략으로
페르시아 사수들과 기병대를 격파하였습니다.
페르시아가 6400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아테네군의 사상자는 192명에 불과했습니다.
마라톤 전투는 당장 신화적인 사건이 되었고, 그 당시의 모든 예술가들은 이 전투에 찬사를 바쳤습니다.

한편 다리우스 1세가 계획을 달성하기 전에 죽자 왕위는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Xerxes)에게 넘어갔습니다.
B.C. 480년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전 지역에서 장정들을 모아 육군과 해군을 조직하여 그리스를
침입했습니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us)는 이 페르시아 제국의 병사 수를 거의 500만 명으로 추산하였습니다.
초기의 전세는 그리스 쪽에 불리했습니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지원과 숙련된 기동 작전을 펼쳐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함에 따라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1년 후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스(Pausanias) 장군 밑에 있던 그리스인들은 플라테아(Plataea)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전멸시켰고,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이오니아인들의 도시 국가들도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7. 고전 시대(B. C. 480~B. C. 338)

페르시안 전쟁을 거친 후 여러 도시 국가들이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을 결성하였습니다.
이 동맹의 목적은 페르시아에 점령되어 있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구출하고, 또 다른 페르시아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대규모의 해군을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페리클레스(Pericles)의 영도 아래 아테네인들은 문화, 예술, 과학의 황금 시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그것은 대개 소아시아에 있는 이오니안 도시들 안에서 싹 텄으며 해외 무역과 함께 호화로운 물결을 타게 되었습니다.
아테네인들은 영토를 더욱 팽창하기 위해 서쪽을 관망하기 시작하였고 본토에 있는 도시 국가들에 대항하려 하였습니다.
아테네는 또한 스파르타에 의해 주도된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속해 있었던 무역 지대를 서서히 잠식해 나갔습니다.
 

8.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쟁 발발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는 아테네가 본국 도시인 코린트(Corinth)와 케르키라(Corcyra)의 논쟁에서
케르키라를 지지하자 코린트는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발발한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B.C. 431~B.C. 421년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본래 코린트와 아테네의 싸움이었고, 스파르타도 이따금 개입하였습니다.
전쟁 초기에는 아테네가 유리했지만 아테네는 육지에서 스파르타를 격파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아티카(Attica)를
넘겨 주고 해군력으로 펠로폰네소스를 봉쇄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쌍방은 분명한 활로를 찾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불안정한 정전 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아테네에게 포위를 당했던 스파르타는 B.C. 413년에 아테네 함대와 보병을 격파하면서 그 포위망을 뚫었습니다.
아테네인들의 군대와 돈과 배들은 점점 고갈되어 갔고, 서서히 굶주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시실리(시칠리아)와 그리스에서 일어난 사건을 주시하고 있던 페르시아 제국은 스파르타에 물자를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제국에게 소아시아의 이오니안 도시 국가들을 반환해 준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결국 B.C. 404년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여러 도시 국가들이 파괴되었으며 오직 스파르타만이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스파르타는 전쟁 기간 동안 아테네에 대항했던 도시 국가들에게 자유를 되찾아 준다고 약속했지만 약속을 무시하고
과두 정치를 통해 강압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에게 해의 도시 국가들은 점차 옛 힘을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스파르타에 대한 반감이 전반적으로 드높아지기 시작해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지도적 지위를
잃어버렸습니다.
B.C. 378년에 발족한 제2차 아테네 동맹은 스파르타를 주요 적국으로 규정했고, 재건된 아테네 해군이 낙소스 전투에서
스파르타를 물리친 뒤 새로운 도시들이 동맹에 가담했고, 아테네는 해양에서 주도권을 다시 장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 역사의 무대는 이제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아니라 마케도니아의 세력 부상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9. 마케도니아의 부상과 알렉산더 대왕

그리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많은 국력을 소비할 때 마케도니아는 북쪽에서 힘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마케도니아는 오랫동안 그리스의 발전에 비해 낙후되어 있었으나 육상과 해상의 통신 수단과 더불어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발전된 문화를 수용하였습니다.

한편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2세는 테베(Thebes:그리스의 도시 국가 가운데 하나)에 볼모로 잡혀 있었던 적이
있지만 에파미논다스(Epaminondas)로부터 군사 전략에 관해 충실히 배웠고, 후에 보병 부대와 창기병 부대를
효과적으로 조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서서히 그의 입지를 주변 도시 국가들로부터 강화시키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카이로네이아(Khaironeia) 전투에서 아테네와 테베의 연합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여러 도시 국가들을
연합 동맹 형태로 묶어 페르시아에 대항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336년에 암살당함으로써 페르시아를 무너뜨리려는 그의 야망은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보병대에서 중요한 책임을 맡고 있던 20세의 알렉산더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함에 따라 세계의
질서는 크게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학문적 소양이 높고 빈틈이 없으며 야심적인 알렉산더는 그의 아버지가 추구했던 사업을 계승하려 하였습니다.
그는 국내의 질서를 회복한 후 페르시아를 목표로 B.C. 334년에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소아시아로 출정하였습니다.
페르시아와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알렉산더는 시리아, 팔레스타인 그리고 이집트를 정복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파라오임을 선포하고,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라는 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왕관을 차지하려는 야망을 품고 B.C. 331년에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다리우스 3세의 군대를
격파하였습니다.
알렉산더가 페르시아 제국을 격파하는 동안 다리우스 3세는 동쪽으로 후퇴하였습니다.

또한 알렉산더는 150년 전 아크로폴리스를 약탈한 것에 대한 복수로 페르시아 궁전을 파괴했으며, 왕의 보물들을
압수하였습니다.
그 다음해 다리우스 3세는 박트리아(Bactria)인의 칼에 찔린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알렉산더는 계속해서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으로 진출하였지만 그의 병사들은 무리한 원정으로 지쳐 갔기 때문에
결국 B.C. 324년에 메소포타미아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바빌로니아에 정착해 남쪽의 아라비아(Arabia)에 대한 정복을 꿈꾸었지만 열병으로 33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10. 로마의 통치

알렉산더 대왕이 동쪽에서 거대한 제국을 만들어 내는 동안 로마인들은 서쪽으로부터 세력을 팽창시켜 그리스를
침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B.C. 168년에 마케도니아가 패하고 소아시아도 점령당하더니 결국 그리스 대부분의 지역이 로마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B.C. 31년에는 해상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 승리를 거둠에 따라 로마의 첫번째
황제로 등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후 300년 동안 로마 제국의 한 지방이 된 그리스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는 전례 없는 평화의
시대를 구가했으며,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예술, 문학 그리고 철학을 존경했기 때문에 그들의 자녀를 아테네에 있는
학교에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b) 문화, 종교

그리스의 도시 국가도 다른 고대 국가들처럼 신전을 중심으로 있습니다.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 한복판에 솟아있는 언덕으로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제사 지내는 여러 신전이 있습니다.
신전은 전쟁, 절도, 지진 등으로 황폐해졌고, 현재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크로폴리스
이 언덕에 있는 신전은 B.C.500년
전부터 세워졌고, 당시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는 성역이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
아크로폴리스 최대의 신전으로
파르테논이란 '처녀의 집'이란 뜻이고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나를 위한
곳입니다.

에렉티온 신전
아테네의 신화상의 왕인 에릭토니
우스의 이름을 딴 신전으로 아테나,
포세이돈, 에릭토니우스에게
제사한 신전입니다.

니케 신전
승리의 신 니케를 위한 신전입니다.

제우스 신전
제우스 신을 위한 신전으로 당시에는
신전 안에 황금과 상아로 만든
제우스 신상이 있었습니다.

하드리아스 문
A.D. 131년에 아테네인들이 아테네
문명을 존중한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
를 칭송하기 위해 건설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개역한글)

고린도전서 10/20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방인들이 제사하는 것은 마귀들에게 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너희가 마귀들과 교제하는 자들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아니하노라. (한글 킹제임스)

(But I say, that the things which the Gentiles sacrifice, they sacrifice to devils, and not to God: and I would not
that ye should have fellowship with devils) KJV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이 제사드리는 것은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영문성경에는 분명히 Devil(마귀)에게
제사한다고 쓰여져 있습니다.
마귀는 타락한 천사이고 귀신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기 때문에 엄연히 다릅니다.
즉, 그리스 사람들이 믿는 신들은 사탄과 마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코린트식 도자기

코린트식 기둥머리

황금문양이 있는 상아 단검

황금 반지

대리석 스핑크스

왕의 황금 데드 마스크

황금 뿔이 달린 은제 소머리상

아스클레피오스 석고 조각
지팡이에 신성한 뱀 있음.

위 사진 윗줄은 그리스의 문화적 유물이고, 둘째줄은 종교적인 상징물입니다.
스핑크스, 데드 마스크, 황소 머리, 신성한 뱀이 있는 것으로 봐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받았고,
사탄을 숭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델피 지도

신탁 장면 삽화

아폴로 신

델피 지역 (사진)

델피 지역 (그림)

아폴로 신전 (사진)

아폴로 신전 (그림)

옴파로스

플라태이아 삼각대의 기둥의 뱀


델피는 그리스에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다음으로 인기있는 고고학 유적지입니다.
그리스인들은 델피를 세계의 중심이고, 지하세계와 이 세상이 만나는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신화에서 델피는 제우스가 풀어 놓은 두 마리 독수리가 만나는 곳입니다.

제우스는 하늘 신을 반역했고, 황소로 변하고, 최고의 신으로 섬겨졌다는 점을 볼 때 사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지옥의 신 하데스, 무저갱의 신 아폴로(아바돈)가 제우스의 3명의 사령관입니다.
델피는 제우스의 아들 아폴로에 대한 숭배 장소입니다.

그러나 이 지역이 아폴로와 관련 짓기 이전부터 지구의 여신 게(Ge), 테미스(Themis), 데메터(Demeter) 그리고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 등과 같은 신들을 숭배하던 지역이었습니다.
미케네 시대의 말엽에 아폴로가 이러한 신들을 대신하였으며 신탁(Oracle)의 수호자가 되었습니다.
신탁(神託, Oracle)이란 신이 사람을 매개자로 하여 그의 뜻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델피의 신탁은 아폴로(마귀)가 사람들의 삶이나 국가사와 관계된 문제들에 대한 답을 하는 것입니다.
피티아(Pythia, 여사제)에게 질문이 가해지면 피티아가 강신술로 신접해 마귀와 연결합니다.
수천년 동안 델피에 가면 뭔가 마술 같은 기적이 있다고 사람들은 믿어서 1년에 100만의 방문객이 찾고 있습니다.

델피에의 신탁의 명성이 자자함에 따라 성역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공물을 갖다 바치는 곳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델피는 고대시대에 그리스의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이 신탁은 매우 고대적인 것으로, 전통에 따르면 신탁은 땅의 균열이 생길 때 생기며 이때 자연스런 수증기가 나오고
사람이 몽환(夢幻)의 경지에 빠져 그로 하여금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합니다.

신화에 의하면 아폴로는 제우스(Zeus)와 레토(Leto)의 아들로서 그의 탄생지인 델로스(Delos)를 떠나 델피에
왔습니다.
아폴로는 신화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게(Ge)의 성역(sanctuary)의 피톤-드래곤-수호자(Python-dragon-guardian)
와 투쟁을 벌이는 등 수차례의 어려움을 겪고 난 뒤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확보하였습니다.


피톤을 죽인 후 그 자신을 정결히 하기 위하여 아폴로는 올림푸스를 떠나 템페 골짜기(Vale of Tempe)로 스스로
부과한 망명에 들어갔습니다.
8년 동안 그는 페레스(Pheres)의 왕인 아드메토스(Admetos)의 무리를 돌보았습니다.
그의 죄값을 치러 정화한 이후에 아폴로는 델피로 돌아왔고 이를 교훈으로 인간들에게 도덕적인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신탁으로 인해 각지의 공식 사절단들이 국가사나 보통 사람들의 문제들에 대한 신의 계시를 듣기 위하여 델피에
왔습니다.
이들은 희생을 받쳤고, 결정금(determinded sum)을 내고 신의 계시를 기다렸습니다.
신의 계시는 예언 여사제인 피티아(Pythia)의 입을 통해 전달되었고, 이들의 이해할 수 없는 중얼거림은 사제들에
의해 교묘하게 해석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탁의 영향은 그리스의 정치적, 지적인 생활에 결정적이었습니다.
델피는 그리스 도시국가에 관련된 많은 이슈에 중재자로서 행동하였습니다.
간접적으로는 신탁의 발언을 통해서 또한 직접적으로는 일종의 국가 연방인 암픽티오니(Amphictyony)를 통해서
중요한 결정의 형성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초기에는 피티아는 어린 처녀였습니다.
그러나 나중 시대에 가면서 피티아는 50세 이상의 흠잡을 데 없는 여인이어야만 했습니다.
신탁의 절정기에는 피티아는 3명으로 까지 늘어났습니다.
신탁의 초기에는 응답은 1년에 한번 주어졌습니다.

즉 2월 말엽과 3월 초의 비시오(Bysios)의 달 7일(아폴로의 생일)에 응답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신탁의 전성기에는 응답은 매달 17일에 주어졌으며 예외적으로 겨울에는 세 달에 한번 있었는데,
이 때는 아폴로(Apollo)가 빛이 영원히 비추는 하이퍼보레이안스(Hyperboreians)로 가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폴로의 부재 동안에 디오니소스(Dionysos)가 숭배되었습니다.

피티아가 대답을 주기 위하여 정확한 절차가 행해져야만 했습니다.
첫째, 피티아와 사제들은 카스탈리아 샘의 물로 스스로의 몸을 깨끗이 씻고 요금(fee)을 지불합니다.
그리고 나서 동물 한 마리를 아폴로의 제단에 희생으로 바칩니다.
동물은 아무 결점이 없는 완전하고 어린것이어야만 하고, 피티아와 사제들은 그 희생 위에 찬물을 붓습니다.

만일 동물이 전율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신이 현재 같이 있고 대답이 주어질 것이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면 피티아가 월계수와 보리꽃을 영원한 불꽃이 있는 곳에서 태우기 시작하고, 그리고 난 후에 피티아는 지하
성단(聖壇)으로 내려갑니다.
이곳은 사원의 본당 회중석(會衆席, 중심부)의 바로 아래입니다.

사제들과 신탁 신청자들이 위쪽에 있는 한 방에 머물러 있다가 여기에서 신청자가 그의 질문을 큰 목소리로 외칩니다.
피티아는 카소티스 샘(Kassotis Spring)의 물을 마시고 월계수 잎을 씹고 나서는 신성의 삼각대(sacred tripod)에
앉습니다.
그녀 근처에 옴파로스(omphalos)가 있고, 피티아는 근처의 갈라진 틈에서 나오는 수증기를 들이 마십니다.

그녀가 몽환(夢幻)의 경지에 빠져 있을 때 그녀가 말을 하기 시작하고 그 말들은 사제들에 의해 글로 쓰여지고
해석되어집니다.
신탁에 의해 주어진 대답들은 주로 모호한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인들이 신화 속 신들을 섬기는 것 뿐만이 아니라 교통하였고, 정치적 결정도 마귀에게 의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옴파로스는 그리스인들이
세계의 한 가운데라고 믿었던 델피에 세워진 부조 네트워크가 조각된 대리석 원추체
(圓錐體) 입니다.
옴파로스는 이 중심을 나타내 주는 조각물이고 신들과 가장 가까운 곳이라는 표시입니다.

지옥은 지구 땅 속에 있으며, 지구에는 지옥과 통하는 영적인 문이 곳곳에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곳이 티벳과
델피입니다.


플라태이아의 삼각대는 BC479년의 플라태이아 전투에서 페르시아에 대한 그리스의 결정적인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델피에 헌납된 것입니다.
원래는 아폴로신전 앞에 서 있었는데 현재는 그 기초만 남아 있습니다.

세 기둥 가운데 하나는 세 마리의 청동 뱀으로 된 몸체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 머리 부분에 황금 삼각대가 놓여
있습니다.
뱀의 몸체에는 전투에 참여하였던 도시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삼각대는 3차 성전(Holy War) 동안에 포키안들(Phokians)에 의해 녹여졌습니다.

반면에 뱀이 서로 뒤얽혀 있는 청동 기둥은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그의 새로운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의 히포드롬
(Hippodrome)으로 옮겨졌고 오늘날까지 서 있습니다.

삼각대는 원래 피티아가 앉는 곳인데 그 기둥에 3마리의 뱀이 둘둘 말려 있다면 뭔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4. 그리스 신화

그리스 신화와 로마 신화는 거의 비슷하고 이름만 다를 뿐입니다.
그리스의 제우스가 로마의 쥬피터가 되고, 그리스의 에우로페는 로마의 비너스가 됩니다.

a) 창조 이야기

암흑과 혼돈의 세계에 대지의 여신 가이아, 밤의 여신 뉙스, 사랑의 신 에로스 등이 태어났습니다.
가이아는 하늘의 신 우라노스를 태어나게 했습니다.
가이아와 우라노스는 결합해 팔이 100개 달린 외눈박이 괴물들을 낳았는데, 우라노스는 이들이 보기 싫어 지옥에
가둡니다.
가이아와 우라노스는 또 다시 티탄신이라는 정상적인 6명의 자녀를 낳습니다.

가이아는 지옥에 갇힌 괴물들을 구하기 위해, 티탄신의 막내 크로노스를 시켜 우라노스가 잠든 사이 그의 성기를
자르게 합니다.
크로노스는 힘을 잃은 우라노스를 몰아내고 신들의 왕이 되었으나 괴물들을 지옥에서 구해주지 않습니다.
크로노스는 가이아의 저주가 두려워, 자기 자식이 반역할까봐 태어나는 대로 잡아먹습니다.

그리스의 창조신화는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창조신화 보다 훨씬 더 난잡합니다.
항상 창조의 신은 여러 명이고 질이 안 좋은 것이 고대 신화의 특성인데, 이런 거짓말은 자신의 부정을 정당화 하려는
사탄의 숨은 의도입니다.

 

b) 티탄신과 제우스의 전쟁

대지의 여신 가이아

염소젖을 먹는 제우스

크로노스를 죽이는 제우스

바다의 신 포세이돈

크로노스가 5 번째 자식까지 잡아 먹자 아내 레아는 6 번째 아기를 크레타 섬의 님프에게 키우게 하고, 아기 대신
돌을 담요에 싸서 크로노스에게 먹게합니다.
아기는 염소젖을 먹고 자라 제우스가 되고, 같은 방식으로 포세이돈과 하데스가 자라납니다.
제우스 형제는 올림푸스산에 모여 승리의 신 니케, 힘의 신 비아, 질투의 신 젤로스 등과 함께 크로노스를 비롯한
티탄신과 전쟁을 벌입니다.

제우스는 무기로 번개를 던지고, 포세이돈은 삼지창을 사용하고, 하데스는 보이지 않게 하는 투구를 사용합니다.
지옥의 괴물들의 도움을 얻은 올림푸스 신들은 마침내 승리를 합니다.
티탄신은 암흑에 가두고, 제우스는 왕이 되 하늘을 차지하고, 바다는 포세이돈이, 지옥은 하데스가 다스립니다.

항상 고대 신화에서 최고의 신은 하늘의 나쁜 신을 쫓아내 왕좌를 차지하는데, 이는 하늘에서 범죄해 쫓겨난 사탄이
오히려 자신은 하늘의 나쁜신을 혼내주는 정의의 신이라고 선전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제우스와 땅 속의 하데스와 바다 속의 포세이돈은 삼위일체를 형성하며, 실제로 이 곳은 마귀들이 왕국을
건설해 거하는 처소입니다.

 

c) 생명체의 창조와 판도라의 상자

올림푸스 신들이 권력을 잡은 후, 프로메테우스가 물과 흙을 빚어 생명체를 만들어 내면, 에피메테우스가 특징을
부여해 각종 동물을 만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었는데, 에페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줄 선물이 바닥나자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불을 훔쳐옵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니, 인간은 불을 이용해 추위를 이기고 연장을 만들어내 문명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제우스는 이 사실을 알고 대노하여 프로메테우스를 바위에 묶고 독수리가 간을 쪼아 먹는 형벌을 내립니다.
제우스는 헤파이토스를 시켜 물과 흙으로 여자를 만들게 하니, 아프로디테는 그녀에게 아름다움을 부여했고, 아테나는
바느질을 가르쳤습니다.

독수리에게 간을 뜯어 먹히는 프로메테우스

상자를 여는 판도라

상자를 여는 판도라

이렇게 아름답게 태어난 여인의 이름은 판도라였습니다.
제우스는 에피메테우스에게 판도라를 인간에게 주라고 했지만, 판도라의 아름다움에 반한 에피메테우스는 그녀를
아내로 삼습니다.
판도라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았지만 점차 무료함을 느끼게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제우스가 선물로 주었지만 절대로 열어보아서는 안된다는 상자를 호기심에 열어봅니다.
그러나 상자에서 고통, 슬픔, 질투, 욕망, 늙음, 죽음 등이 흘러나와 온 세상을 뒤덮게 되고, 이로 인해 인간들은
타락하게 됩니다.

이 내용은 창세기와 상당히 흡사한데 성경에서와 같이 신화에서도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들어 냅니다.
또한 성경에서 홍수 심판 전 천사들이 사람 여자의 아름다움에 반해 아내로 삼은 것 같이, 신화에서는 신이 여자의
아름다움에 반해 아내로 삼습니다.

성경에서 이브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고 그로 인해 고통과 늙고 죽음, 슬픔, 노역등이 생겼듯이, 신화에서도
판도라가 호기심에 상자를 열어 이러한 일들이 생기고 사람들이 타락하게 됩니다.
다른점이 있다면 성경에선 뱀(사탄)이 이브를 꼬여 타락하게 한 반면, 신화에서는 판도라가 호기심에 스스로 상자를
엽니다.

 

d) 홍수 심판

판도라가 상자를 열자 풍요롭고 평화롭던 세상에 슬픔과 고통과 질병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악해지고 서로 전쟁을 했습니다.
이들은 신들에게 경배하지 않았고 거짓과 불신이 난무했습니다.
이에 실망한 신들은 지상을 떠나 인간을 물로써 쓸어 버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제우스는 남풍의 신 노토스에게 비바람이 몰아치게 하고,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강물이 범람하게 합니다.
모든 사람이 물에 빠져 숨졌고, 신에게 경배하던 데우칼리온과 퓌라 부부만 파르낫소스산 꼭대기로 피신해
살아남습니다.

물이 빠지자 그들은 내려왔지만 모든 것이 황폐해져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신들의 지시대로 돌을 집어 등 뒤로 던지니 돌이 떨어진 곳에 인간이 생겨나 새로운 인류의 문명이
생겨났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신이 노해 홍수로 멸절시키고 의로운 한 가족만 살아남는다는 것은 성경의 홍수심판과 유사합니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서 느낀 점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와 힌두교의 신화와 닮았다는 점과 성경과도 유사하다는
점입니다.
그리스 신화는 '제우스 머리에서 완전 무장한 여신 아테나가 태어났다' 또는 '거품에서 아프로디테가 태어났다' 등
황당한 내용이 많아서 우리는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 정도로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 신화는 사실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지어낸 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쓰여졌듯이, 그리스 신화는 사탄의 계시를 받아 쓰여진 이야기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그리스 신화를 사실로 받아드리고,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에게 신전을 지어서 제사까지 드렸습니다.

모든 고대 신화는 비슷한 줄거리와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어 작자가 한 명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의 창조신은 포악해 정의로운 최고의 신(사탄)이 이를 몰아내고 왕좌를 차지해 사람을 다스린다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고대인들은 사탄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요즘 신비주의 열풍이 불어 마법을 쓰는 온라인 게임이나, 헤리포터나 반지의 제왕 같은 영화, 더불어 그리스 신화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에 심취하게 되면 비슷한 줄거리를 가진 성경도 하나의 신화로 취급하게 되고, 급기야 그리스
신화를 사실로 믿어 제우스(사탄)나 아폴로(아바돈)를 존경하고 호감을 갖게 됩니다.

 

'나의 하나님에 관하여 > 고대 문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동의신화  (0) 2007.06.09
로마  (0) 2007.02.07
페니키아  (0) 2007.02.07
이집트 문명  (0) 2007.02.07
메소포타미아 문명  (0) 2007.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