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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에 관하여/성경자료 모음

[스크랩] 70인의 성경인물 연구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아담… 모든 것 잃어버린 ‘철저한 인간’  
그는 첫번째 사람이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이 그에게서 시작되었다. 우리의 유전자는 모두 그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 그는 우리의 표상이고 근본이다. 그는 모든 인간으로부터 존경받아야 마땅하고 사모의 대상이 될 만하다.

그러나 그는 유감스럽게도 인류의 타락에 대한 책임을 홀로 지고 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롬 6:19)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세상은 살인, 강도,사기에서부터 유괴,강간에 이르기까지 흉악한 범죄로 가득차 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흔히 성경의 ‘죄’와 세상의 ‘범죄’를 동일시하여 아담을 온갖 흉악한 범죄의 원흉처럼 몰아붙인다. 그의 사진이라도 있다면 수배자 전단처럼 경찰서나 교도소 담벼락에 걸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담은 사실 너무 억울한 사람이다.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태어났다. 하나님이 그를 만드셨고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는데 그곳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 하나님이 그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셔서 아담은 그것을 먹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잠에서 깨어보니 여자가 와 있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하나님이 아담에게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는 당연히 그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이미 아담의 때로부터 ‘…더라면’ 하는 욥의 탄식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사망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였더라면…”(욥 3:2∼5)

고난 중의 욥은 이렇게 자신이 태어난 날을 원망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지 않았다면 그는 오명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또 하나님이 동산 가운데 그 나무를 심어놓지만 않았더라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지만 않았어도 그것을 먹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태어남을 원망하는 욥을 꾸짖으셨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네가 내 심판을 피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 하려 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욥 40:7∼8)

하나님은 아담을 골탕먹이려고 창조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선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시 100:5)

아담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사랑이었다. 큰 외로움 가운데 계시던 하나님은 사랑하기 위해서 사람을 창조하셨던 것이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6)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아담에게 무엇이든 다 주고 싶으셨다. 그 분이 아담을 위하여 준비하신 가장 소중한 선물이 바로 ‘자유’였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창 3:16)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이 바다의 새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고 싶으셨다.(창 1:28) 그렇게 하려면 그에게도 자유에 대한 책임의 ‘마지노선’이 필요했다. 선하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겠다는 신뢰의 약속이 필요했던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창 2:17)

그러나 아담은 그 실과를 먹었다.그것은 선악을 스스로 판단하겠다는 뜻이었고 하나님과의 결별을 선언한 것이며 그가 받은 복을 거부하겠다는 의사표시였던 것이다. 그것이 선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 선하신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바로 ‘죄’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여자에게 남편을 사모하라고 말씀하신다.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

아담이 잠에서 깨었을 때 없어진 것은 갈빗대뿐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아담의 외로운 삶속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기 위해 만들어주신 여자는 흙이 아니라 한 공정을 더 거친 재료로 만들어졌고 그래서 아담보다 더 강렬한 호기심과 진취적 모험심으로 가득찬 빛나는 존재였다. 여자는 남자의 가장 소중한 것을 다 가져가 버렸던 것이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아담은 금단의 실과를 먹고 하나님의 꾸지람을 들은 후에 경황이 없었는지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지어 주었는데(창 3:20) 그 이름에는 ‘생명’이라는 뜻과 ‘생활’이라는 뜻이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여자는 아기를 낳아 인간의 생명을 이어가야 하므로(창 3:16) ‘생명’이라는 뜻은 당연한 것이었으나 아담은 경황 중에 ‘생활’까지 넘겨줌으로써 그만 경제권을 덜컥 넘겨주고 말았던 것이다.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관할하는 자는 부녀라”(사 3:12)

아담 이후로 세상에 태어난 모든 남자는 얼굴에 땀이 흐르도록 일하여 그 통장을 아내에게 맡겨두고 용돈을 타서 쓰는 신세가 되었다. 이렇게 아담은 평화도,경제권도,권위도 다 잃어버렸으나 오히려 아직 남아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닮은 ‘고독’과 사랑하는 자에게 무엇이든지 다 주어버리는 ‘그리스도의 정신’이 그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아담에게 남아있는 ‘복’의 길이었고 하나님은 여자에게 그것을 사모하라고 하셨으며 예수께서는 ‘마지막 아담’(고전 15:45)으로 오셨던 것이다.

김성일 (한세대교수)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하와… 사랑스러운 인류의 어머니  
잘 되면 내탓이고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있다.인류가 지구상에 살아오는 동안 즐겁고 행복한 일들도 있었고 슬프고 힘든 날들도 있었으나 사람들이 고통 속에 있을 때면 그것을 처음 여자 하와의 탓으로 돌린다.

“아담이 꾐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꾐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딤전 2:14)

그러나 구약성경에는 하와를 원망하는 기록이 없다.욥이 고난당하고 있을 때 찾아온 빌닷의 충고에서 여자를 비하하는 듯한 표현이 한번 나올 뿐이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욥 25:4)

그러나 이는 ‘모든 사람’을 강조하여 표현한 말일 뿐이다.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와의 문제를 거론하신 적이 없다.그런데도 바울은 타락의 원인을 제공한 자로 하와를 지목한다.자신의 신념대로 잘못된 길을 가다가 회심한 바울은 하마터면 자신을 멸망에 빠뜨릴 뻔했던 죄의 근원을 따져 올라가다가 그 끝에서 뱀의 유혹에 넘어간 하와를 발견하고 모든 문제가 거기서 비롯되었음을 깨달았던 것 같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고후 11:3)

‘이와’는 ‘하와’의 헬라어 형태다.어쨌든 뱀의 미혹을 당한 하와 때문에 바울은 여자들이 기도할 때에 머리에 무엇을 쓰라느니(고전 11:13) 머리를 길게 기르는 것이 좋다느니 까다로운 주문을 하고 있다.바울이 독신으로 살았으니 망정이지 사나운 아내라도 있었다면 그 얼굴을 할퀴어 놓았을지도 모른다.하와는 정말 그렇게 경솔하여 쉽게 잘못을 범하고 책망받아야 하는 존재였던 것일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드실 때의 정경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하나님은 그녀를 흙으로 빚으시지 않고 아담의 가슴에서 취한 갈빗대 즉 더 나은 재료로 만드셨다.‘돕는 배필’의 돕는다는 말은 구해낸다는 뜻의 ‘에셀’이다.하나님은 아담을 그의 고독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여자를 만드셨다.그래서 여자는 호기심이 강하고 모험적이며 사랑스러운 존재로 창조되었고 눈부시게 아름다왔다.

하와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배필로 주시기 위해 손수 만드신 최고의 작품이었다.그녀가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웠을 것인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모험적이고 진취적인 그녀의 관심은 당연히 ‘모든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오직…’ 먹지 말라는 그 나무에 쏠리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벼르던 뱀이 미혹하기 좋은 상대는 아담이 아니라 모험적인 하와였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너희가 죽게 될 것이라고 하셨단다”

뱀이 기회를 놓지지 않고 결정타를 날렸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와의 호기심은 죽음보다도 강했다.그녀는 목숨을 걸고 금단의 경계를 넘어서기로 했던 것이다.불순종의 저편에 비록 고통과 죽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미지의 세계를 기어코 열어보아야 하겠다는 욕망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그런 무서운 호기심을 그녀에게 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다.하나님은 일이 그렇게 될 것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그리고 그 책임을 하나님이 지시기로 했던 것이다.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창 3:15)

그것은 여자를 미혹한 뱀에게 내린 저주였다.그리고 세상이 모두 죄악에 빠지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독생자를 여자의 아들로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달리게 함으로써 하나님 자신이 아픔을 당하고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자유의 대가를 치르신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금단의 실과를 나누어 먹고 에덴동산을 나온 하와는 그 후로 많은 슬픔과 고통을 겪었다.그녀의 첫 아들인 가인이 아우 아벨을 때려죽이는 최초의 살인을 목격했고 죽은 아들에 대한 애통과 죽인 아들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그리고 그런 고통과 아픔은 그녀의 모든 자손들에게 유전되었다.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그녀에 대한 고마움보다 원망을 더 많이 하고 있다.

최후의 마지노선마저 돌파해버린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창조적 성품과 상상력으로 온갖 화려한 문화를 만들어내었다.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만들어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고 고통과 실패를 자초하기도 했으나 인간의 드라마는 그만큼 다채로웠다.르네상스 이후로 인류는 반역의 문화로 하나님을 대적했으나 그들이 없었다면 세상은 너무 적막했을지도 모른다.하와가 금단의 실과를 먹지 않았다면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나름대로 행복했을지 몰라도 모차르트나 셰익스피어는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하와에게 마음 먹은 것을 위해 목숨을 거는 진취적 성품을 주셨다.가나안 여자와 결혼한 아들이 장자권을 물려받지 못하게 목숨 걸고 저지했던 리브가의 결단과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의 탄생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마리아의 결단은 모두 그러한 하와의 성품에서 유래한 것이었다.하와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여인이었고 우리 모두의 사랑스러운 어머니였다. 하와는 금단의 실과를 먹어 죽음을 초래했으나 성경은 그녀를 죽은 자의 어머니가 아닌 산 자의 어머니로 기록했다.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창 2:20)

김성일 <한세대교수>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에녹… 하나님을 위로해드린 동행자  
성경의 창세기 6장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안목으로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기사가 실려 있다.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창 6:1∼2)

유대인들이나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는 이 기사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욥기 38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처럼 천사로 해석하여 여러 가지 신비주의적 위경들을 만들어냈다.에티오피아어와 슬라브어로 기록된 ‘에녹서’가 그런 것들이었다.그러나 후기의 신학자들은 천사가 사람의 딸들과 결혼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농업에 종사했던 ‘셋’의 자손들이며 사람의 딸이란 가인의 성에 살고 있던 타락한 자들의 딸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분한 마음에 아우를 죽인 가인은 그 후 에덴의 동쪽으로 가서 자신의 죄를 적잖게 뉘우치며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그가 아들에게 지어준 이름 ‘에녹’이 ‘바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더 이상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된 가인과 그의 자손들은 성을 쌓고 살았는데 그들의 생업은 주로 가죽을 만들고 기계를 제조하거나 악기를 다루는 등 제2,3차 산업이었다.셋의 자손은 농사가 천기의 영향을 받으므로 하나님께 매달렸으나 가인 성의 산업은 천기와 관계가 없어서인지 먼저 타락이 시작되었다.

더구나 2차 및 3차 산업은 모두가 경쟁산업이었다.그들의 고객인 셋의 자손들이 가인의 성을 방문하면 그들을 대상으로 판촉 경쟁이 벌어졌다.식사와 숙소를 제공하고 필요하면 술과 여자 접대도 서슴지 않았다.그래서 농사를 짓던 셋의 자손들은 가인 성의 딸들과 놀아나며 급속하게 타락하기 시작했던 것이다.그런 시대에 셋의 5세손인 야렛이 아들을 얻게 되었다.가인 성의 초기 인물이었던 에녹은 그래도 꽤 존경받는 인물이었던지 야렛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지어주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바로 이 대목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에녹을 부러워한다.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지막 때에 택함을 받은 자들은 하늘로 들림을 받는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에녹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길래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는지 그 힌트가 히브리서에 기록되어 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 11:5)

그는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을 위로해 드렸던 것일까?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에녹의 부친 야렛의 이름은 ‘내려간다’는 뜻이었다.이미 그 부친의 시대에 가인 성은 모두 타락했고 셋의 집안까지 상당한 타락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그런 시대에 에녹은 흔들리는 부친과 새로운 문물에 이끌리는 자녀들 사이에서 믿음을 지켜야 했다.그런 에녹에게 또 주변 사람들의 멸시와 핍박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실 것을 믿었다.

에녹의 시대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했던 것은 아벨의 사건 때문이었다.아벨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제사를 드렸다.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제사를 드리고 그가 얻은 것은 죽음뿐이었다.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그러나 이웃의 멸시와 타락한 자들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에녹은 하나님이 상 주시는 분이심을 믿었다.그분의 상급이 무엇인지는 나중에 밝혀진다.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하나님은 이렇게 열정적인 분이다.그분을 찾는 자들에게 자신을 상으로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21세기의 젊은이라 해도 감히 “나를 너에게 주겠어”라고 뜨겁게 속삭이기는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고 기록된 것과 같이 그분은 “나를 너에게 주겠다”는 한마디로 가장 열정적인 사랑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셨다.아벨은 바로 그 하나님을 송두리째 상급으로 받았던 것이다.

에녹은 그것을 알게 되었다.아벨이 받은 상급을 알아내지 못했다면 온 세상이 죄악에 빠진 절망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반드시 상 주시는 분이심을 믿을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이제 오늘날 우리는 다시 에녹의 때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믿음의 선배들조차 흔들리고 자녀들을 올바르게 가르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에녹의 경건한 삶은 이런 우리를 격려하고 있다.

“아담의 7세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유 1:14∼15).

김성일<한세대교수>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노아… 하나님의 눈에서 사랑을 보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길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재림할 때의 상황이 어떠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눅 17:26∼27)

모든 사람들이 아무런 문제없이 잘 살고 있을 때 노아는 그 식구와 함께 묵묵히 거대한 방주를 만들고 있었다.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여 하나님은 지면의 모든 사람과 생물을 다 없애버리기로 작정하셨으나 노아와 그의 식구만은 살려두시기로 하고 거대한 방주를 만들라고 명하셨던 것이다.노아는 그 무서운 심판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가족과 함께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이 말씀을 본래의 원문대로 해석하면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서 사랑을 보았더라”

사람들은 평소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다가 잘못을 범하여 그분이 진노하실 때에 비로소 떨면서 용서를 구한다.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분을 무서운 분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바로 그것이 하나님을 더 섭섭하게 한다.하나님은 그 자녀를 사랑하셔서 매를 드시는 것이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그러나 노아는 달랐다.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마음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는 하나님이 모든 생명체를 다 쓸어버리겠다고 무서운 작정을 하실 때에조차 하나님의 눈에서 사람을 향한 그분의 지극한 사랑을 발견했던 것이다.성경은 노아가 구원받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아담과 하와의 자손으로 태어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고 완전할 수 있을 것인가? 바로 노아가 그 비밀을 일러주고 있다.하나님의 본심,즉 그분의 마음을 아는 자가 의인이고 그분을 이해하는 사람이 완전한 자로 인정받는 것이다.노아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 방주도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창 6:14)

하나님께서 설계해 주신 방주의 규모는 길이 150m,너비 25m,그리고 높이가 15m이며 구조는 3 층으로 되어 있었다.노아는 세 아들과 함께 그 거대한 방주를 어떻게 건조할 수 있었던 것일까? 예나 지금이나 대형 선박을 건조하려면 건축·기계·항해기술을 아우르는 종합기술이 필요하다.그러나 당시 이 세 가지 기술은 모두 가인의 자손들이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창 4:17∼22)

노아는 방주를 만들기 위해 세 아들을 가인의 성에 보내어 필요한 기술들을 배우게 했을 것이다.홍수 이후의 문명 전개로 보아 셈은 건축기술,함은 기계기술 그리고 야벳은 항해기술을 습득했던 것으로 보인다.홍수 이후에 셈의 자손은 메소포타미아에 큰 성들을 건축했고 함의 손자 니므롯은 무기를 제작했으며 야벳의 자손들은 바닷가로 나가서 어업에 종사하며 살았기 때문이다(창 10:5∼12).

기술 문제는 해결했어도 인력을 동원하는 문제가 또 있었다.노아는 방주 건조를 비웃는 사람들에게 비싼 임금을 지불하고 그들을 고용해야 했을 것이다.그들에게 지불할 재화를 준비하기 위해서 노아와 그의 식구는 남보다 더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그리하여 방주는 완성되고 노아의 식구는 방주로 들어갔으나 방주 건조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노임만 챙기고 다 가버렸다.

“7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창 7:10)

홍수가 덮이기 7일 전에 노아의 가족과 동물들이 이미 방주로 들어가서 기다렸다는 기사는 우리에게 위안이 된다.하나님께서 환난이 있기 전에 그 택하신 자들을 미리 단속하여 방주에 들어가게 하셨기 때문이다.그러나 장차 닥쳐올 마지막 환난이 언제 시작될지 모르므로 우리는 7일전의 시점도 계산할 수 없다.그래도 성경은 때가 되면 하나님이 그 택하신 자들을 구하실 것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창 7:16)

사람의 씨를 홍수 이전의 세상에서 홍수 이후로 건너오게 하는 임무에 최선을 다 한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첫 농사를 지어 넉넉한 소출을 거두자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의 장막에서 벌거벗은 채로 잠이 들었다.둘째아들 함이 부친의 장막에 들어갔다가 그것을 보고 나와서 말하니 셈과 야벳이 옷을 들고 뒷걸음질쳐 들어가 아비를 덮어주었다.나중에 그것을 알게 된 노아가 세 아들의 장래를 예언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창 9:26-27)

함의 넷째아들 가나안의 자손들은 장사에 재능이 있어 후에 지중해 연안의 무역을 장악하는 큰 장사꾼이 되었는데 그 장사에는 ‘정보활동’이 필수적이었다.함의 결정적 실수는 자신이 획득한 정보로 부친의 프라이버시를 공개한 것이었다.이후로 함의 아들 가나안의 자손은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를 받는 존재가 되었다.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슥 14:21)

김성일<한세대 교수>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아브라함…창조주 명령에 ‘절대 순종’ 모범  
아브라함이 살았던 갈대아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땅에 있는 성읍이었다.그가 우르에 살았던 시기가 역사적으로는 수메르의 지도자 우투헤갈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한 우르남무 왕의 시대에 해당한다.당시 수메르에는 일곱 성읍의 수호신들을 비롯한 3600명의 신들이 있었다.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에 의하면 과학자였던 아브라함은 이렇게 어지러운 다신 숭배에 대하여 강력히 반발하고 있었다.

“천체가 인간의 유익에 기여하는 것은 그들을 주관하시는 창조주의 명령에 순종하기 때문이다”(유대고대사 1-7)

쿰란 문서의 하나인 ‘요벨’서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부친 데라는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어 팔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데라의 본래 고향이 하란에서 가까운 에블라 지역이었다고 한다.에블라의 지명이 데라의 6대조인 에벨의 이름에서 나왔다고 추정되고 아브라함의 친척들이 계속해서 그 부근 지역에 살았기 때문이다.지금도 하란의 서쪽에는 아브라함의 탄생기념 사원이 있다.

결국 데라는 그들의 고향 에블라가 이교도들에게 점령되자 아브라함을 데리고 유브라데 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우르에 살게 되었고 하나님을 섬기던 집안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수메르의 다신 숭배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결국 데라는 우르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들 내외와 함께 하란으로 복귀했다.그러나 아브라함은 다시 하나님의 명대로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간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게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하나님의 그 지시에는 보너스가 붙어 있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2-3)

그는 우르 땅에 살 때에 사람들이 거짓 신들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그들이 다 복을 얻을 수만 있다면 자신의 고생쯤은 감수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그러나 막상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보니 그곳에도 역시 많은 신들이 있었다.뿐만 아니라 가나안의 장사꾼들은 하나님을 ‘엘’이라는 우상으로 만들고 땅의 여신 아세라와 음란의 여신 아스다롯을 만든 장본인들이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사람들의 땅에 나그네로 살면서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려고 노력했으나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그 땅에 기근이 있어 애굽으로 가라는 뜻인 줄로 알고 내려갔다가 아내를 빼앗길 뻔하기도 했다.뿐만 아니라 조카 롯이 북방 왕들에게 잡혀갔을 때에는 그를 구하기 위해 가나안에 속하는 아모리 족속의 신세를 져야 했으니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매사에 주관이 없어보였다.아내 사라가 여종 하갈과 동침하라면 그렇게 했고 하갈과 그녀 소생의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하면 그대로 했다.그는 아마도 아내의 말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렇게 매사를 아내가 시키는 대로 살던 공처가 아브라함은 어느날 갑자기 독자적인 행동을 한다.아내와는 의논도 없이 아들을 번제로 바치기 위해 데리고 떠난 것이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의 행동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아내와는 아무 의논도 없이 아침 일찍이 일어나 아들 이삭을 데리고 사흘 길을 떠난 것이다.이치대로 한다면 아브라함은 그 명령의 진의를 타진해야 했다.

“자식을 번제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들의 우상에게나 하는 짓인데 어찌하여 하나님이 그들과 같은 명령을 하십니까?”

비록 하나님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당연히 그 내용을 재확인해야 했다.그가 혹시 잘못 들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런 질문도 없이 아들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도대체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어떤 교감이 오갔던 것일까? 모르고 따르는 것은 순종이 아니다.아브라함은 그 이유를 알았음에 틀림없다.아마도 그는 처음 하나님의 명령을 받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시 5:12)

그러나 아브라함의 시대에 의인은 없었다.소돔 성은 의인 열명이 없어서 멸망했던 것이다.그런데 하나님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했다.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자 아브라함은 자신이 아들을 속죄의 제물로 바침으로서 아픔을 당해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다.하나님 쪽에서 볼 때 그것은 아브라함의 독자와 그분의 독자를 맞바꾸자는 제의였을 수도 있다.

아브라함이 시키는 대로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산으로 올라간 이삭은 부친의 결박을 조용히 받았다.하나님의 명령이라면 피할 수 없는 일임을 알았던 것이다.그러나 아브라함이 칼로 아들을 잡으려 할 때 하나님은 그를 제지하고 예비하셨던 수양으로 번제의 제물을 대신하게 했다.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제의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분은 너무 기쁘셔서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며 말씀했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 22:18)

김성일<한세대 교수>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멜기세덱…떡과 포도주의 아브라함 축복  
구약성경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히브리’ 민족과 ‘가나안’ 민족의 전쟁사이다.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것을 명하시고 그 땅을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BC 2091년이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을 저주의 대상으로 삼으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엘 신이라는 우상으로 만들고 다시 아세라 여신을 만들어 엘 신과 결혼을 시키는가 하면 그 사이에서 태어난 바알 신을 일으켜 엘 신을 몰아내고 자신의 어머니격인 아세라 여신을 차지하게 하는 등 가증한 짓을 일삼았기 때문이었다.그러나 하나님은 가나안 징계의 일정을 400년이나 연기하신다고 아브라함에게 통고하셨다.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400년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5:13∼14)

가나안에게는 장자 시돈과 차남 헷,그리고 셋째 여부스와 넷째 아모리 등 11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아모리 족속의 두령 중 하나인 마므레의 호의로 그의 땅에서 살았다.또 그의 조카 롯이 북방 연합군에 잡혀갔을 때에도 아모리의 세 두령과 함께 적을 습격하여 롯 식구들과 약탈당한 재물을 되찾아왔다.하나님의 계획이 연기된 것은 그 아모리 족속 때문이었다.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창 15:16)

히브리 민족과 가나안 민족의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엘’로 사용한다는 사실이다.이것으로 보아 그들 두 민족이 처음에 모두 같은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가나안의 장자 시돈은 두로를 포함하는 페니키아 지역의 족속이었는데 그들은 본래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겔 28:14)

그러나 가나안 사람들은 장사하여 부자가 되면서 마음이 교만해져서 다른 신들을 만들어내고 풍요와 번영을 기원했던 것이다.

“네 큰 지혜와 장사함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인하여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겔 28:5)

그러나 가나안 족속이 다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길 때 넷째인 아모리 족속은 아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뿐만 아니라 살렘 즉 예루살렘 지역에 있던 여부스 족속도 마찬가지였다.아브라함이 롯의 식구들을 되찾고 개선하여 살렘을 지날 때 살렘 왕이며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그를 축복했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창 14:20)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가 되찾아온 것의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내놓았다.신약 성경의 히브리서는 이 멜기세덱을 그리스도의 예표로 해석했다.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히 6:20)

‘살렘’이란 곧 평화라는 뜻이다.지구상에서 전쟁을 없애고 평화를 이룩할 평화의 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것이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 7:1∼3)

그 후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애굽에 내려가 400년간 고초를 겪으며 약 200만의 민족을 이루었다.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탈출한 그들은 40년의 광야생활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진입했다.

다윗이 그 땅을 거의 다 점령하고 12지파의 왕이 된 것은 BC 1004년이었으니 하나님이 가나안 박멸의 프로젝트를 시작하신지 1087년만이었다.그러나 그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점 가나안 문화에 미혹되어 그 신들을 섬기다가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양쪽이 모두 멸망하게 된다.무력으로는 가나안을 이겼으나 문화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다.그들이 다 멸망한 때가 BC 586년이었으니 하나님께서 1000년을 고심하여 이루신 프로젝트는 400년을 겨우 넘기고 수포로 돌아갔다.그러나 그들의 멸망 후에 선지자 스가랴는 다시 진정한 평강의 왕이 오시리라고 예언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전쟁하는 영웅은 말을 타지만 평강의 왕은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선지자 스가랴가 이 말씀을 전한지 500여년이 지나서 나사렛의 예수는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다.그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그의 제자들은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받았다.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김성일<한세대 교수>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사라… 긴 인고의 세월 끝에 크게 웃다  
우리가 성경과 쉽게 가까워지기 어려운 것은 성경에 적혀 있는 내용들의 톤이 너무 어둡기 때문이다.성경의 첫장을 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멘트가 나오자마자 어둡고 침울한 분위기로 성경의 드라마가 시작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 1:2)

성경의 스토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실패로 이어지는 ‘새드 무비’이다.아담과 하와는 금단의 실과를 먹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고 가인은 아벨을 죽여 살인자가 되었고 사람들은 죄악의 관영으로 큰 홍수의 비극을 겪었으며 바벨탑을 건설하다가 서로의 언어도 알아듣지 못하게 되는 슬픔을 당했다.이스라엘 백성은 400년의 노예 생활을 한 끝에 탈출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 새 나라를 건설했으나 분단의 비극을 겪었으며 결국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양쪽이 다 멸망했다.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그분의 부활을 믿으며 복음을 전하던 수많은 사람들은 순교의 피를 뿌렸다.고난 끝에 로마 제국의 공인을 받은 기독교는 황제의 권력을 등에 업고 타락하기 시작하더니 르네상스의 물결에 떠밀려 큰 치욕을 당했다.다시 종교개혁으로 새 출발을 한 개신교도 한때 복음을 전파했던 강대국들의 타락과 횡포에 휩쓸려서 싸잡아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지식인과 젊은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결국 타락한 인류의 역사가 큰 전쟁과 함께 멸망하여 종말을 맞게 되며 이어 심판의 날이 임하리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5)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인류 역사의 드라마는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어둡고 우울한 실패의 이야기들로 이어지고 있다.그래서 성경에는 괴로워하고 슬퍼하여 우는 자는 많아도 웃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그런데 그 중에 크게 웃은 사람이 하나 등장하는데 바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그 사람이다.그녀도 실은 별로 평탄하거나 행복하게 살지 못했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더 힘든 인생을 살았다.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창 16:2)

사라가 남편에게 그렇게 권할 때 그녀의 나이는 75세였다.그 나이가 될 때까지 자식을 낳지 못하여 남편에게 다른 여인과 동침하여 자식을 낳으라고 권하는 아내의 마음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처절한 것이었다.아브라함은 그 여종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그로부터 다시 14년의 세월이 지나 사라의 나이 89세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장막을 찾아오셨다.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0)

이미 경수가 끊어진 사라는 장막 문에서 그 음성을 듣고 어이가 없어서 웃다가 하나님께 들켰다.하나님이 다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나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그 말씀을 듣고 사라가 당황하여 웃음을 감추며 변명했다.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보고 계셨던 것이다.

“아니라,네가 웃었느니라.”

과연 그 이듬해에 사라는 아들을 낳았다.하나님은 그 아들의 이름을 미리 ‘이삭’이라고 지어주셨는데(창 17:19) 그것은 ‘웃음’이라는 뜻이었다.아브라함이 100세 되던 해에 이삭을 낳은 사라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 21:6)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열살이나 연상인 그 남편을 주인이라 부르며(창 18:12) 인고의 삶을 살았으나 그 주관이 뚜렷하여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며 산 여인이었다.그는 자신의 소생이 없었으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극진하게 돌보았다.뿐만 아니라 자립한 롯이 북방의 군대에 납치되어 갔을 때 아브라함은 318명의 장정들을 이끌고 그들을 추격했는데 그들은 모두 집에서 길리운 자들이라고 되어 있다.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318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창 14:14)

그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집에서 길러낸 자들이었다.자식을 낳지 못한 사라는 그냥 신세 한탄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의지할 곳 없는 고아들을 데려다 보살피며 길렀는데 그 수가 점점 많아져서 무려 318명이나 되었던 것이다.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이 사실이 우리에게 감동적이라면 하나님도 역시 감동하시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긴 인고의 세월 끝에 크게 웃었던 사라의 웃음은 어둡고 우울한 성경의 기록을 대번에 밝고 활기찬 약속으로 뒤집어 놓는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에게 미리 ‘웃음’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다.그리고 그 이삭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했다.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눅 6:21)

김성일<한세대 교수>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이삭… 메워버린 우물 묵묵히 다시 파다  
성경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므로 구약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그래서인지 구약에 나오는 많은 인물도 그 삶의 한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예표적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이는 그 인물들이 메시아의 강림을 열망하여 부지중에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아보려고 애썼다는 증거이기도 하다.그 중에서 특별한 사람이 바로 이삭이라는 인물이다.

이삭의 일생을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닮은 점이 너무나 많다.이삭은 아브라함이 그 아내에게서 늦게 얻은 독자였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였다.이삭은 모리아 산으로 올라갈 때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나무를 지고 올라갔는데 이는 자신을 번제로 태울 나무였다.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갔는데 그것은 자신을 못박을 나무였다.

모리아 산으로 올라갈 때 이삭이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느냐고 묻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했다.그러나 아버지가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은 다음 자신을 결박하려 하자 아들은 비로소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를 깨달았다.그러나 이삭은 잠자코 그 결박을 받았다.학자들에 의하면 그때 이미 이삭은 스무살이 넘어 있었다고 하는데 반항하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42)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에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기도했다.그분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한 대로 천하만민을 구원하기 위해 어린 양이 되어 자신을 속죄의 제단에 드렸던 것이다.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실 때에 그 이름을 미리 지정해주셨다.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 17:19) 사라에게 아들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직접 행하신 일이었다.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0)

그로부터 약 2000년이 지나서 나사렛에 살고 있던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가 회임했을 때에도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그 아기가 하나님이 직접 주신 아들임을 알리고 그 이름을 미리 정해 주었다.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0∼21)

이삭이 장성한 후에 그의 부친 아브라함은 아들의 신부감을 구하기 위해 그 종을 멀리 밧단아람까지 보냈다.아브라함이 종이 그곳에서 리브가라고 하는 처녀를 구하여 돌아올 때에 이삭은 그가 살던 브엘 라헬로이에서 나와 신부를 마중했다.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약대들이 오더라 리브가가 눈을 들어 이삭을 바라보고…”(창 24:63∼64)

그런데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는 자를 그의 신부라고 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요 3:29)

예수께서는 장차 그의 사랑하는 자들을 마중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삭의 생활도 그리스도의 성품을 많이 닮았다.그는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과 다투지 않고 묵묵히 할 일을 했다.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여 부친 아브라함 때에 판 우물들을 메워버리자 그랄 골짜기로 옮겨갔는데 그들이 그곳의 우물도 다 메워버린 후였다.이삭은 묵묵히 그 우물들을 다시 팠다.유대인들이 예수를 시험하려 하자 그는 오직 아버지로부터 들은 것만 말한다고 밝히셨다.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요 8:28)

이삭이 그랄의 우물을 다시 판 후에도 그 식구들이 여러 곳의 우물들을 팠고 그럴 때마다 블레셋 사람들이 시비를 걸었다.그들이 시비를 걸어온 우물을 다툼이라는 뜻의 에섹이라 하였고 또 그들이 대적해온 곳의 이름을 대적한다는 뜻이 싯나라고 하였으며 또 다른 우물을 팔 때 그에게 질린 블레셋 사람들이 물러갔으므로 그곳의 이름을 르호봇이라고 했다.그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다.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네게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창 26:24)

그 일이 있은 후 비로소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그의 군대장관과 함께 이삭을 찾아와서 화해를 청하였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창 26:28∼29)

이것은 후일 박해를 당해가며 복음을 전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로마제국을 굴복시킨 것과 같은 일이었던 것이다.

김성일 <한세대 교수>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리브가…믿음의 종가 이은 ‘현숙한 여인’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인물 중의 하나가 바로 이삭의 아내 리브가이다.자신의 몸을 불태울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간 이삭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한다면 이삭의 신부인 리브가는 곧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교회와 성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우리에게 과연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자격이 있는가? 리브가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그 해답이 리브가에게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의 마지막 사업은 ‘좋은 며느리’를 데려오는 일이었다.아들을 잘 양육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책임이었으나 손자를 기르는 것은 아들이 할 일이었다.그러나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이 손자를 제대로 기르려면 그 아내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들을 위하여 ‘좋은 며느리’ 구하는 것을 자신이 수행해야 할 마지막 프로젝트로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 가나안 땅에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타락한 문화가 판치고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 곳의 처녀를 며느리로 맞아들여서는 안된다고 판단했다.그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고 있는 늙은 종을 불러서 아들의 신부감을 찾아내는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임명했다.아브라함의 종은 주인의 약대 열 필에 신부감을 찾았을 경우 그녀와 그 집에 줄 선물을 싣고 주인이 살던 밧단아람 지방을 향해 떠났다.나홀의 성에 도착한 그는 성 밖의 우물가에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성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섰다가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컨대 너는 물 항아리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약대에게도 마시우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인하여 주께서 나의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창 24:13-14)

밧단아람 지역의 사정을 이해하면 이 조건이 거의 불가능한 것임을 곧 알 수 있다.물이 귀한 이 지역에서는 물 근원을 찾아도 지하로 거의 30m를 파 들어가야 물을 얻을 수 있다.그래서 사람들이 공동으로 성 밖에 우물 하나를 파 놓고 성의 처녀들이 그 우물에 나가서 물을 길었던 것이다.물 항아리를 지고 30m의 계단을 내려가 길어올린 물을 좀 달라고 하는 것조차 미안한 일이었으나 나그네를 선대하는 것이 밧단아람 지역의 관습이어서 그 정도는 거의 의무 사항이었다.

그러나 약대에게까지 물을 마시우는 것은 문제가 달랐다.보통 목이 마른 약대 한 마리가 마시는 물은 약 100L 정도이므로 아브라함의 종이 이끌고 간 열 마리의 약대에게 물을 마시우려면 1000L의 물을 길어야 했다.물이나 기름의 수송에 사용하는 드럼통 하나의 용량이 200L이니 열 마리의 약대에게 물을 마시우려면 물 항아리를 지고 30m의 계단을 내려가 다섯 드럼 통의 물을 길어 올려야 하는 것이었다.아브라함의 종이 기도를 하자마자 한 처녀가 우물가로 나왔다.

“청컨대 네 물 항아리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우라”

아브라함의 종이 처녀가 우물에 내려가 항아리에 물을 채워가지고 올라오는 것을 기다려서 그녀에게 부탁하자 처녀는 선선히 대답했다.

“주여,마시소서”

그녀는 급히 등에 지고 있던 물 항아리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하고 또 말했다.

“당신의 약대도 위하여 물을 길어 그것들로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그 처녀는 얼른 물 항아리의 물을 구유에 붓고 다시 우물 아래로 내려갔다.처녀는 그 깊은 우물을 오르내리면서 열 마리의 약대가 배부르게 마시도록 무려 다섯 드럼 통에 해당하는 물을 길어올렸던 것이다.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자격이다.우리가 주일마다 교회에 출석하고 십일조를 내고 배당된 봉사 활동을 하는 것은 의무 사항이다.그러나 리브가는 나그네에게 물을 마시우는 관습적인 의무만 다 한 것이 아니라 그 1천배 이상에 해당하는 일을 했던 것이다.

“그 사람이 그를 묵묵히 주목하며 여호와께서 과연 평탄한 길을 주신 여부를 알고자 하더니…”(창 24:21)

무서운 일이었다.아브라함의 종은 그녀가 물을 길어올리는 동안 감사의 말도 칭찬의 말도 없이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었다.우리는 흔히 작은 봉사를 하고도 넘치는 칭찬을 기대하고 있다.그러나 아브라함의 종은 열 마리의 약대가 물을 다 마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비로소 금고리 한 개와 팔찌 한쌍을 그녀에게 선물로 주면서 네가 누구의 딸이냐고 물었던 것이다.그녀는 자기가 브두엘의 딸 리브가임을 밝히고 나그네를 아비의 집으로 안내했다.아브라함의 종이 그녀의 부친을 만나 모든 사연을 말하고 주인을 대신하여 청혼하자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된 리브가의 부친과 가족은 그 청혼을 받아들였다.아브라함의 종이 이튿날 일어나 리브가를 데리고 가려 하자 그녀의 가족들은 딸을 갑자기 보내기가 서운하여 며칠을 더 머물다 가라고 권했다.그러나 그가 즉시 떠날 것을 고집하므로 가족들이 리브가를 불러 지금 가겠느냐고 물었다.그녀의 대답은 부름을 받을 때에 교회가 할 응답을 생각하게 한다.

“가겠나이다.”

이렇게 해서 리브가는 가족들의 전송을 받으며 신랑이 있는 곳을 향해 떠났다.리브가의 가족들이 아쉽게 그녀를 떠나보내며 축복했다.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창 24:60)

김성일(작가·한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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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야곱…‘가로챈 장자권’ 으로 이스라엘을 열다  
이삭과 리브가에게는 에서와 야곱 두 아들이 있었다. 이삭은 사내다운 사냥꾼 에서를 좋아했으나 리브가는 얌전한 아들 야곱의 편이었다. 늙어서 눈이 어두워진 이삭이 어느날 에서에게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부탁하는 것을 리브가가 들었다. 특별한 축복의 이벤트가 있음을 눈치챈 리브가는 야곱을 불러 염소 새끼로 요리를 해 줄터이니 형으로 변장하고 들어가 장자권을 물려받으라고 일렀다.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자로 뵈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창 27:12)

소심한 야곱이 두려워하는데도 리브가는 밀어붙였다.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오라.”

야곱은 할 수 없이 어머니가 만들어 준 염소 새끼의 요리를 들고 아버지에게로 들어갔다. 이삭은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만져보고 가져온 별미를 먹은 후에 아들에게 축복했으나 속아서 한 것은 아니었다. 소심한 야곱이 대담한 짓을 한 배후에는 아내 리브가의 의도가 있으며 그것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리브가가 그것을 꾸민 데는 그 이유가 있었다. 그녀의 시아버지 아브라함은 가나안 처녀를 며느리로 들이지 않으려고 사람을 밧단아람까지 보내어 그녀를 데려왔다. 그런데 에서는 제멋대로 가나안 여자를 그것도 둘 씩이나 데려다 살고 있었으므로 그런 에서가 시댁 가문을 물려받을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아우에게 장자권을 빼앗기게 된 에서가 그를 죽이려 했으므로 야곱은 집을 떠났다. 라반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얻으라는 부친의 말대로 밧단아람에 간 야곱은 거기서 라헬을 만나 첫눈에 반하게 되었고 그 부친에게 청혼을 했다. 그러나 아우를 먼저 혼인시킬 수 없다는 말에 그 언니 레아까지 함께 받아들이게 된다.

야곱이 라헬만을 사랑하므로 하나님이 레아를 불쌍히 여겨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의 네 아들을 주시자 라헬은 남편을 여종인 빌하와 동침하게 하여 단과 납달리를 얻었다. 레아도 자신의 여종 실바를 남편에게 주어 갓과 아셀을 얻었고 또 잇사갈과 스불론을 낳았다. 그런 후에 라헬은 비로소 요셉을 낳았다.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창 37:3)

야곱이 네 아내들과 열 한명의 아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에서가 4백명을 이끌고 온다는 말을 듣고 얍복강에서 하나님께 매달려 간구했다. 그가 하도 지독하게 매달리는데 질린 하나님은 나와 겨루어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던 것이다. 그 야곱이 요셉을 편애한 것은 그가 사랑한 라헬의 소생인데다가 그녀가 열 두번째 아들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은 그를 시기하여 장사꾼들에게 팔아념겼고 요셉은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다가 전화위복이 되어 애굽 총리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야곱이 다시 찾은 아들 요셉의 초청으로 애굽에 들어간 것은 그의 나이 1백 30세 때였다. 그러나 험하고 힘든 세월을 살아온 야곱에게는 아직도 인간의 생각이 남아 있었다. 그는 요셉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할 때에 손을 어긋맞겨 에브라임의 머리에 오른 손을 얹음으로서 장자의 질서를 바꾸었다. 아마도 형의 장자권을 빼앗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또 한번 장자권 뒤집기를 반복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가 죽기 전에 열 두 아들을 축복하는 자리에서 발생했다. 야곱의 장자인 르우벤은 그 부친의 첩인 빌하와 간통하여 장자의 권리를 잃었고 둘째 시므온과 세째 레위는 그들의 누이 디나가 강간당한 일로 세겜 성 사람들에게 보복할 때 그곳 주민들을 지나치게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한 일이 있어서 제외되었다. 이제 장자권은 당연히 네째 아들 유다에게 돌아갈 차례였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그것은 분명히 장자권의 축복이었다. 유다를 축복한 후에 야곱은 스불론, 잇사갈, 단, 갓, 아셀, 납달리.......등의 장래를 말해주며 내려가다가 요셉의 차례에 이르러 다시 인간의 생각 때문에 흔들리게 되었다. 요셉은 야곱이 그렇게도 사랑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잊지 못하는 라헬의 소생이었다. 야곱이 그 요셉을 축복하기 시작했다.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창 49:24)

이것 또한 분명히 장자권의 축복이었다. 야곱의 겹치기 축복 때문에 하나님은 그 해결책을 마련하셨다. 야곱의 인간적인 생각으로 축복한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 지파에서는 현실의 구원자 여호수아가 나오게 하셨고 하나님의 뜻대로 축복한 유다 지파에서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 ‘여호수아’와 ‘예수’의 이름은 모두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의 같은 이름이었다.

그러나 야곱의 헷갈리는 축복 때문에 유다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는 오랫동안 리더십을 놓고 반목했다. 결국 이스라엘은 유다 지파의 르호보암과 에브라임 지파의 여로보암 때문에 남북으로 분단된다. 이 반목은 예수의 시대까지 계속되어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난 사마리아의 여인은 유대인 출신의 메시야를 인정할 수 없다고 대들었다. 우리 조상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렸는데 당신들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라고 그 여인이 말하자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대답하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

김성일 (한세대 교수)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모세…이스라엘 구출한 ‘해방의 지도자’  
모세는 아므람과 요게벳을 통해 평범하게 태어났다.그것도 포로생활 속에서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때에 태어났다.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모세를 선택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하나님은 모세를 선민의 지도자로 삼으려고 사람들이 판단을 할 수 없게 레위지파에서 태어나게 하셨다.더욱이 강에 버려진 모세를 공주가 발견하여 기르게 할 만큼 하나님의 섭리는 빈틈이 없으셨다.

애굽을 꺾기 위해서는 애굽을 알아야 한다.모세가 가나안 땅에서 자라나 애굽에 가서 바로와 맞섰다면 그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이나 문화에 압도되어 자기 소신껏 일할 수 없었을 것이다.그러나 바로의 궁중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를 대신하여 바로에 대항할 수 있었다.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사역을 맡기실 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자질까지 겸하여 주심을 알 수 있다.그뿐 아니라 그 사역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능력과 훈련까지 책임져 주셨다.그것이 궁궐에서의 생활과 광야를 거치는 하나님의 양육방법이었다.

모세는 쓰임받기 위해 자기만이 알고 있는 남 모르는 연단의 기회를 가졌다.신중한 하나님의 영적인 준비가 그것이다.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사귐이 우선되어야 한다.더욱이 크고 어려운 일을 담당하기 위한 영적인 훈련은 특수할 수밖에 없다.하나님의 종으로 헌신한 사람 중에 모세만큼 힘든 사역을 감당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장정만 60만명이었으므로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친다면 족히 200만명은 넘었을 것이다.이 군중을 40년동안 인도했다는 사실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가 없다.

이렇게 큰일을 감당하기 위한 정신력과 신앙,추진력은 거의 초인적인 헌신이었다.이러한 지도력을 자연스럽게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데 40년이 필요했다.우리도 일에 대해 조급한 마음을 갖기보다 준비된 사람으로 자신을 가꾸는데 더 충성된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얼마나 일을 많이 하느냐보다 누가 일을 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은혜를 많이 받는 것도 귀하지만 하나님이 쓰시기에 불편하지 아니한 사람이 되는 것은 더 중요하다.

모세는 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민12:3)고 하였다.이것은 모세가 세상 누구보다도 온유한 성품으로 자신을 가꾸었다는 말이다.하나님은 모세를 택했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가는데 성공한 사람이었다.사람은 태어날 때 가지고 오는 자질보다 살아가면서 갖추어지는 후천적인 자질이 훨씬 더 지배적이다.모세가 그만큼 영적으로 다듬어지는 데에는 그 개인만 경험했던 특수한 은혜의 과정이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물론 모세의 인격이 완벽했다는 말은 아니다.그러나 가장 어려운 사역을 끝까지 잘 감당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모세의 생애를 보면 그의 실수를 보게 된다.그가 애굽 사람을 쳐죽인 사건을 우리는 떠올릴 수 있다.성격이 급하고 과격하다해도 사람을 때려죽이기까지 한 것을 보면 그때의 모세를 짐작할 수 있다.사람은 누구나 조금만 선을 넘으면 이런 실수가 가능한 것도 함께 생각해야 하겠다.

“이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가라하시나이까”(민 11:12) 여기서는 모세가 하나님께 투정을 부리고 짜증스럽게 불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오죽 답답하고 힘들었으면 그랬겠는가?

그리스도인들 중에 상당수가 수준 높은 영적 생활을 감당하고 있지만 때때로 인간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모세도 우리와 같은 성정임에 틀림이 없다.우리에게도 갈등이 있고 흔들리고 약해질 때가 있다.그렇다 할지라도 자신을 미워하지 말자.그 일로 인해 실족하면 안 된다.모세의 갈등은 정상적이다.그런 정서를 겪으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일꾼들이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 하셨는데 반석을 두 번 쳐서 회중에게 물을 마시게 하는 실수를 범한 일도 있다.이 일로 인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우리가 하나님 사역에 크게 쓰임받고 큰일을 이루는 일도 귀하다.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까지도 우리의 공로로 덮어주시지는 않으신다.일에 대한 보상은 후하게 허락하시지만 우리의 잘못은 회개를 통해서 용서하시거나 징계를 통해서 다스리신다.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지속한다는 것은 이러한 실수나 과오를 예방하는 방법이 된다.여기서는 모세에게도 약점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한 것뿐이다.모세에게는 이보다 훨씬 많은 장점이 있었다.하나님은 그 사람의 실수나 어떤 결함보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갖가지 가능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신다.

모세에게는 남이 따를 수 없을 만한 순종심이 있었다.성막 건축에 따르는 재료를 모으는 일이나 건축의 식양을 하나님 말씀 그대로 순종한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은 그 일을 수용할 만한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 믿음을 실천해야 하는 순종이 있어야 한다.모세는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계획에 잘 적응하는 믿음의 소유자였으며 그 일을 실천하기에 충분한 순종의 사람이었다.모세에게서 찾게 되는 더 큰 순종은 비스가산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들어가지 못 한다는 하나님의 예언을 듣고 그 말씀을 그대로 따른 일이다.모세의 순종은 생사를 뛰어넘은 순종이었음을 보게 된다.

우리가 모세에게서 배워야 할 또 다른 교훈은 그의 인내심이다.모세는 힘겨운 사역을 감당할 때에 자신과의 싸움에서 자신을 다스리고 갈등을 극복하는 강한 인내심의 소유자였다.백성들의 원망이나 불순종을 40년동안 겪어야 했던 어려움도 잘 참아낸 사람이다.광야생활은 옷과 신발이 닳지 않는 은혜와 만나의 축복이 있었지만 그 외의 조건은 모두가 불편한 조건이요 힘든 여건이었다.그러나 모세는 한결같은 인내로 이 어려운 생활을 은혜롭게 감당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모세를 통해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면 그의 지도력이다.강한 사람이 아니면서도 카리스마가 있었고 큰 감동과 감화를 앞세우는 그의 지도력은 백성을 인도하는 큰 힘이었다. 강한 조직력이나 그의 웅변보다 백성이 신뢰하고 의지하는,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지도력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이런 감화력이 모세를 성공적인 사람이 되게 하였다.거기에 모세는 십부장에서 천부장에 이르는 중간지도자를 세워 자기 일과 통솔력을 분배할 줄 아는 너그러운 마음의 소유자이기도 했다.이 또한 모세의 지도력을 크게 돋보이게 한 사역 중에 하나이다.


◇모세를 통해 얻는 교훈

모세는 하나님께 쓰임받은 일꾼으로 좋은 모범을 보인 하나님의 사람이다.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모든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허락이지 우리가 성취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우리는 주어지는 환경과 주어지는 사역의 과정에 대해 충성할 뿐이다.모세가 스스로 계획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자.

모세는 말이 어눌한 사람이었고 동족을 위해 사람을 쳐죽일 만큼 과격하면서도 우직한 사람이었다.그러나 훌륭한 지도자로서 모세의 구변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그의 과격한 성격도 그를 넘어뜨릴 수 없었다.우리의 결함은 가꾸어지고 다듬어져야 할 조건이지 우리의 사역에 장애물이 될 수는 없다.자기의 약점 때문에 사역에 지장을 받아서는 안 된다.우리의 약점은 우리를 더 유능하게 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자.


◇새 필자 약력

이번주부터 작가 김성일씨에 이어 은평성결교회 이병돈 목사의 ‘성경의 인물’이 연재됩니다.이목사는 서울신대와 미국 트리니티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 서울신학대학교 이사장을 역임했습니다.오랜기간 성경의 인물에 대한 많은 연구와 집필을 해왔습니다.독자 여러분들에게 성경 속 인물들에 감추인 생생한 이야기와 교훈을 전해줄 것입니다.

이병돈 목사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아론 Aaron… 모세의 대변인으로 출애굽 함께 이끌어  
아론은 아므람과 요게벳의 장자였으며 모세의 형이었다.하나님은 모세를 선민의 지도자로 선택할 때에 모세를 도울 수 있는 가장 든든한 사람으로 아론을 함께 선택하셨다.아론은 모세가 택한 동역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붙여준 협력자였다.형과 아우 사이여서 좀 불편한 관계를 예상할 수 있었으나 아론은 아주 무난하고 만족스럽게 모세의 사역을 잘 지원한 보좌관이었다.형으로서 동생을 섬긴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었으나 아론과 모세 사이는 사정이 달랐다.성경에 표현된 내용을 살펴보면 모세가 형을 위해 배려하는 노력보다 형이 동생을 위해 섬기려는 마음이 더 지배적이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이런 면에서 아론은 일반 사람들이 따를 수 없는 훌륭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형제간은 아주 가깝고 정말 절친한 우애의 대상인 것이 사실이다.또 그래야만 한다.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훨씬 많다.그런 면에서 아론과 모세는 좋은 본을 남긴 형제이다.이들 사이에 불편한 분위기가 자주 비춰졌다면 하나님이 일하시는데 참으로 어려운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민수기 12장에 보면 아론이 미리암과 함께 모세를 비방한 일이 있다.그 일로 인해 미리암에게 한센병이 발병하여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이 일은 곧 회개하므로 병은 치료되었고 용서받았다.이런 일 외에는 그 형제간에 불목하거나 대적하거나 맞서 싸운 일이 없다.그의 일생을 통해 형제간의 우애는 아주 좋았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모세와 아론 사이에 가졌던 이 좋은 분위기가 선민을 인도하는 모세에게 보이지 않게 큰 공헌을 하였을 것이다.

형제간의 갈등이나 불화는 물질 문제나 어느 쪽이 성공할 때 질투심에 의한 감정의 대립으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그러나 아론과 모세 사이에는 이런 문제가 거의 없었다.이는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의 요소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화해와 협력 정신이 더 우세했다는 말이다.오늘날 형제간에 불화한 사람들에게 좋은 본이 됐으면 한다.서로 섬기는 마음을 가질 때 이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서로 섬기는 봉사의 삶은 겸손한 마음이 기본이다.겸손한 마음을 앞세우지 아니하면 계속 친교를 유지할 수 없고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가장 싫어하신다.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이 도울 수 없는 것처럼 교만한 사람도 하나님이 도울 길이 없다.스펄젼은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죄를 손가락으로 다루시지만 사람의 교만에 대해서는 팔을 걷어붙이고 다루신다고 하였다.이는 하나님이 교만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이런 면에서 아론은 하나님 앞에 합격한 사람이다.

아론은 평생 둘째 자리에서 충성한 사람이었다.모든 영광은 모세에게 돌아갔고 형인 아론은 섬기는 자리에만 있어야 했다.그러면서도 그 일에 충성스러웠던 것은 하나님 앞에 복 받는 조건이 되었다.모세는 모세대로 하나님과의 깊은 친교를 즐겼지만 모세 못지 않게 아론도 하나님과의 깊은 친교를 갖고 있었던 것이 그의 일생을 고고하게 만드는 영적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아론이 주는 잔잔한 교훈을 여기서 한 번 짚고 지나가자.많은 사람이 윗자리를 원하고 자기를 나타내려고 애를 쓰는 것이 현실이다.정말 작은 일에도,소수의 모임에서까지 자기를 앞세우려는 마음이 얼마나 지배적인가? 어떤 면에서는 마치 자리다툼의 노예가 된 것 같이,영적인 자책을 모르는 아쉬운 시대에 살고 있다.아론과 같이 윗자리를 남겨놓고,윗자리를 양보하고 내려앉는 훈련을 쌓아야 하겠다.빌립보서 2장 3절의 “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는 말씀에 유의하자.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은 나와 남을 해치는 무서운 죄와 같다.자리 양보는 쉬운 것 같지만 어려운 일이므로 성도들은 여기서 깊이 생각해봐야 하겠다.

이스라엘 민족이 아말렉과 싸울 때에 아론은 훌과 함께 자기 동생의 팔을 온종일 받쳐주고 있었다.이 일에 대해 전혀 다른 뜻이 있을 수 없었다.아론의 훌륭한 모습이 이런 데서 드러나고 있다.동생의 팔을 받쳐주는 일이 한두 시간이면 모르겠지만 해가 지도록 받쳐주는 일은 예삿일이 아니었다.불편한 안색이나 눈길 한번 없이 이렇게 봉사했다는 것은 아론이 칭찬받는 부분이다.

여기서 우리가 찾아볼 소중한 교훈이 있다.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나 신앙으로 감당할 영적 사역은 인간의 자존심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이다.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은 형제의 서열이나 가문의 질서보다 훨씬 우위에 있음을 기억하자.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은 모든 인간의 조건보다 우선한다.이것을 영적 질서라 한다.하나님 중심으로 살면 정말 평안하고 만족한 삶을 보낼 수 있다.날마다 감사와 찬송을 앞세워 하나님 중심으로 살면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삶 속에 소중한 현실이 자기에게 준비되어 있다.아론과 같이 흔쾌히 봉사하는 사람이 되자.

아론이 모세를 영적으로 섬기는 자리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아론에게도 유쾌한 사역이 있었다.그것은 출애굽기 4장 14절과 16절에 보면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라고 밝히고 있다.구변이나 하나님의 의견을 대변하는 데에는 모세보다 아론이 훨씬 더 앞섰다.하나님은 백성을 설득하고 군중을 통솔하며 큰 일을 설명할 때에는 그 사역을 아론에게 맡기셨다.이는 아론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부분이다.여기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자.사람은 자기 은사 대로 살아야 자족한 삶이 가능하다.또한 자기 헌신을 정확하게 할 수 있다.사람마다 달란트가 있고 사람마다 은사가 다 다르다.이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온,그 사람을 통해 이루시는,그 사람에게만 주어진 독특한 사역이다.자기 은사에 감사하자.남의 은사를 부러워하는 것도 욕심이다.자기 은사 대로 살아야 한다.또 자기 은사를 즐겨야 한다.

아론에게는 모세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사역이 있었다.그것은 대제사장직을 40년이나 감당한 일이다. 이는 누구도 범할 수 없는 성직이었다.그에게만 허락된 영적인 고귀한 헌신이었다.그가 대제사장이 된 뒤 40년이나 이 일을 실수없이 감당한 것은 그의 신앙적인 면이나 인격적인 면을 설명하는 부분이기도 하다.대제사장의 직분은 참으로 힘들고,제사의 의식도 복잡하면서 엄격했던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잘 안다.그러나 아론은 그 사명을 수십년 동안 잘 감당했다.아론과 같이 자기 사명이나 자기 헌신에 충성되어야 하겠다.맡은 일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이요,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조건이 된다.교회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세운 분이 계심을 기억하자.그리고 충성되어야 하겠다. (은평성결교회 담임)


◇아론을 통해 얻는 교훈

아론과 모세는 협력사역자로 성공한 사례이다.교회를 섬기는 데나 하나님 사역이나 선교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 협력사역이다.아무도 혼자서 하나님의 일을 다할 수 없다.또한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지도 않으신다.‘협력목회’‘협력선교’ 얼마나 은혜롭고 조화로운 표현인가? 사역을 분담하고 은사와 능력에 따라 협력할 때 훨씬 많은 결실을 거두게 된다.자리잡힌 교회가 되면 반드시 분담 목회를 해야 하고 분담 사역이 이루어져야 한다.사역을 독점하거나 교회사역을 제한하는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이 원리는 선교사역에도 마찬가지이다.교단간에 협력사역을 빨리 이룰수록 선교의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교파마다 신학교를 세우고 교파마다 한 지역에 선교사를 집중적으로 파송하고 교파마다 같은 지역에 교회를 개척한다면 인력과 재정이 얼마나 낭비되는가? 선교의 협력사역은 빠를수록 좋다.

이병돈(은평성결교회 담임목사)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비느하스… 민족타락 막아낸 ‘의로운 파수꾼’  
비느하스는 아론의 손자요 엘르아살의 아들이었다. 비느하스에게는 그의 가문만큼이나 신앙의 분위기와 영적인 감화가 물씬 풍기고 있다. 사람이 어떤 혈통으로 태어나느냐 하는 것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비느하스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가문에 태어났다. 그러나 좋은 토양이라고 아름다운 꽃과 훌륭한 과일이 절로 맺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옥토라도 잡초가 무성할 수도 있고 엉겅퀴로 채워질 수도 있다. 비느하스는 좋은 영적인 배경에 어울릴 만큼 그 자신도 신앙의 가문에 잘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께 사랑받는 대상이 되었다.

혈통이나 좋은 영적인 분위기가 거저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로봇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고 선택이나 판단의 능력을 갖고 살게 하셨다. 그런 면에서 비느하스가 하나님 편에 담대히 선 것은 그 일생을 축복된 삶이 되도록 결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비느하스를 통해 인생의 여정을 한번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싯딤에 머무를 때 모압 사람들의 초청을 받아 우상제사에 동참했고 그 제물을 먹었으며 이방 여자들과 음행하여 바알브올에게 부속되었다고 밝히고 있다(민 25:1∼3). 이로 인해 하나님의 큰 진노가 염병으로 나타났고 2만4000명이 죽는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이때에 살루의 아들 족장 시므리가 미디안 방백의 딸 고스비를 장막에 끌어들이자 비느하스가 뒤따라가서 창으로 그들의 배를 찔러 죽였다.이 사건은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게 하는 방법이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해내는 조건이 되었다.

비느하스의 공의로운 결단과 의분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정확한 방법이 되었다. 이 사건 하나만으로도 비느하스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될 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소중한 헌신이 되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세상에 태어날 때 그가 감당할 사명을 그의 삶속에 함께 포함시키셨다.

비느하스는 그 몫을 찾아서 적중하는 헌신을 하므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스럽게 풀어드렸다.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가 어떤 위기에 처해 우리를 필요로 할 때 헌신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일을 위해 우리가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 때에 자신을 위해 자기 헌신을 갖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다.

어떤 경우에는 공의로운 말 한마디나 또는 정확한 선택이나 분명한 태도 하나가 상상밖에 하나님의 큰 일을 성취할 수도 있다. 이런 때에 잠잠하면 생존의 의미를 잃는 것만큼 큰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깨어있는 사람이 되자.

또 다른 사건은 한 레위인의 아내가 베냐민 지파 사람들의 윤간으로 죽게 된 사건이다. 그 여자의 몸을 열두 토막으로 나누어 열두지파에 보내므로 이스라엘 전체와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비느하스가 이 전쟁을 지휘하였다. 결국 베냐민 지파 사람 2만5000명이 살해되고 이 전쟁은 마무리되었다.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소중하게 쓰임받은 사람이다.

시므리와 고스비를 죽인 사건이나 레위인의 아내 때문에 2만5000명의 희생자를 낸 사건은 선민으로 하여금 경각심을 일깨워 새 출발하게 하는데 소중한 목표가 있었다.우상숭배의 죄와 이방 여자들과의 혼음사건과 가나안 원주민들에게나 있는 윤간 사건 등은 강력하게 그 초기부터 뿌리를 뽑아야 하는 죄이기 때문에 비느하스를 통해 시범적인 심판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이었다.

성적인 타락은 방임하면 걷잡을 수 없이 온 국민에게 확산되기 때문에 이 일을 막기 위해 자극적으로 교훈을 남긴 것이다. 여기에 비느하스가 하나님께 쓰임받는 큰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비느하스가 갖고 있던 곧은 마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소중하게 쓰임받는 장면을 연상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나 소수의 준비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큰 의지를 진행하신다. 비느하스의 신앙이나 그의 경건심이나 그의 의는 선민을 구하고 한 시대를 건져내는데 만족스럽게 쓰임받는 조건이 되었다.

우리는 비느하스를 통해 평범하면서도 소중한 은혜를 발견하게 된다. 일마다 하나님이 직접 비느하스에게 지시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비느하스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일치되었던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누구나 마음을 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때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아야 하겠다. ‘이심전심’이라는 말이 있듯이 말과 글이 없어도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나 과거의 많은 교회의 역사 속에 많은 성도가 이 은혜에 감격해 하나님과 교회를 섬겼고 또한 지금도 그러하다. 교역자나 선지자에게 지도를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와 하나님 사이에 영적 친교를 통해 터득한 은혜일 것이다.

성령이 함께 하고 말씀을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과 하나로 묶인 이 영감까지 보태어진다면 얼마나 능력있고 힘있는 생활이 가능할까? 비느하스는 일찍이 이러한 영감에 끌려 하나님께 더 자유로운 헌신이 가능했다. 모든 봉사나 헌금이나 하나님 사랑하는 표현이 모두 이 영감을 따르면 자연스럽다.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신앙형식이 몸에 배었으면 한다.

비느하스는 그 뒤에도 1만2000명의 군인을 인솔하여 미디안 다섯 왕을 살해하고 그 지역을 점령하는 데도 공헌한 사람이 되었다. 이와 같이 비느하스는 평범한 레위인으로 출발했지만 군대의 유능한 지휘관이 되었으며 또 제사장으로 헌신하는 성직자도 되었다.

신앙에 충성되고 경건 생활이 익숙해지면 하나님이 어떤 역할이나 사역을 맡겨도 자연스럽게 대처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은 이러한 비느하스를 불러 평화의 언약을 맺었으며 비느하스의 혈통으로 제사장 직분을 이어가게 하는 특별한 은혜를 허락하셨다.

이것은 비느하스를 위해 하나님이 베푸신 크나큰 배려였다. 결국 비느하스는 레위인 중에 레위인이 되었고 레위인 중에서도 선택받은 레위인이 되었다(민25:12∼13). 하나님이 비느하스와 마주 대하여 평화의 언약을 맺을 만큼 비느하스는 각별한 대접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었다.

이 평화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한 가문과 맺은 언약으로 그 언약대로 비느하스의 후손은 영구히 제사장직을 담당하게 되었다. 비느하스의 봉사와 헌신이 하나님 마음을 얼마나 흡족하게 해드렸는지를 평화의 언약을 통해 우리는 짐작하게 된다. 비느하스는 하나님께 특별한 우대를 받은 거나 다름없다.

우리는 때때로 하늘의 상급에 대해 대화를 가질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의 상급 외에도 지상에서도 비느하스와 같이 큰 상급을 내리시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이 상급을 각자 헤아려보자. 비느하스의 상급은 특수한 것이었지만 사실은 우리에게도 많은 상급을 허락하고 있다. 우리가 건강하게 장수하는 것이나 자녀들을 양육하는 즐거움이나 평생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생업 모두가 하나님의 상급인 것이다.


◇비느하스를 통해 얻는 교훈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앞에 준비된 사람이 될 수는 있지만 자기 미래에 대한 계획을 응답 받고 시작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자기 미래에 대한 과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이다. 영적으로 충실하고 하나님께 대한 태도만 분명하면 가장 선하고 축복된 삶을 하나님이 허락하신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께 예비된 사람이 되자

비느하스는 이스라엘 백성을 패망케 하는 죄와 하나님을 거스르는 죄악을 제거하고 뿌리뽑는 데 앞장섰다.우리는 항상 과감하게 영적 개혁을 해야 한다.우리 개인과 가정과 교회를 좀먹는 죄를 온 교회가 철저히 회개하여 영적 갱신을 이루어야 한다.더 나아가서 한국 교회의 부흥과 이 민족의 장래를 가로막는 죄를 온 국민이 회개하여 하나님께 쓰임받는 나라로 세워가자.

이병돈 <은평성결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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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여호수아…‘믿음의 영도자’ 약속의 땅을 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40년동안 광야생활을 지도한 하나님의 종은 모세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과정에서의 지도자는 여호수아였다. 여호수아는 모세와 버금가는,모세를 계승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이 두 사람이 선민을 인도하는 기간에는 지도자의 결핍을 모르는 시절이었다.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이나 훌륭한 지도자를 만난다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이다. 백성이 마음놓고 살 수 있으며 안심하고 따를 수 있는 지도자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그런 면에서 우리 마음에 여러가지 생각을 갖게 한다. 우리 나라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정말 사랑하고 세월이 갈수록 존경하고 추앙할 만한 지도자를 만나지 못했다. 지도자의 빈곤만큼 국민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지도자를 위해서도 교회가 책임 있는 기도를 드려야 하겠다. 훌륭한 지도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며 깨끗한 양심과 공의로운 마음이 함께 하는 사람이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종으로 모세의 뒤를 잇게 된 것은 모세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이었다.(민 27:18) 여호수아는 성령으로 감동된 사람인 것을 하나님이 밝혀주시고 그에게 기름 붓도록 지시하셨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지배된 사람이었다. 이러한 영적인 축복이 그와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갖고 있었던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깊은 교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이 좌우한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쏟은 마음의 충심이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는 사랑의 깊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모세가 성막을 떠난 뒤에도 청년 여호수아는 성막을 떠나지 않고 기도했다는 표현 속에서 그의 영성을 읽을 수 있다.(출 33:11)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깊은 친교는 다른 방법이 없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함으로 사귐을 더하고 영감이 지배하는 대화식 기도를 통해 사귐의 깊이를 더해 가는 것이다. 여호수아의 경우 청년 시절에 이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교분이 그를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이 선민을 위한 중요한 사역을 맡길 때 누구를 택하시겠는가? 이때에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가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모세가 하나님의 큰 계획을 추진한 것처럼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큰 섭리를 진행하는 적임자였다. 이와같이 누구나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 그 나름대로 거치는 과정이 있다. 여호수아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는 원리로 생각할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쓰임 받은 모든 하나님의 종들이나 오늘날 하나님과 잘 어울려 일하는 모든 일꾼들이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다. 하나님께 자신을 영적으로 잘 적응시키는 훈련을 쌓아가자.

여호수아가 정탐꾼으로 선발되어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 신앙의 보고를 한 사건을 생각해보자. 12명 중에 10명은 불신앙의 보고를 했으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대변하는 보고를 했다. 이 사건은 그들이 평소에 갖고 있던 신앙의 실상을 그대로 밝힌 거나 같다.

여호수아가 평상시에 가셨던 하나님과의 교감이 이렇게 현실을 뛰어넘는 보고를 하게 한 것이다. 불신앙의 사람들의 보고처럼 아낙 자손에 비해 이스라엘 민족이 메뚜기 같이 보인 것이 사실이지만(민 13:33) 하나님이 함께 하므로 “그들은 우리의 밥”(민 14:9)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같은 여호수아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이렇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과 살아 있는 교제를 나누는 성도들은 무슨 일에나 어떤 경우에서건 신앙의 답을 내릴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신앙의 깊이가 되고 하나님 임재에 대한 많은 체험이 하나님께 대한 신뢰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리는 환경이 여호수아를 흔들 수 없었다.

열명의 정탐꾼이 40일동안 동행하면서 갖가지 불신앙의 이론을 통해 흔들었어도 여호수아는 결코 동요되지 않았다. 이같은 사실은 하나님과 묶여 있는 사람들이 현실에 대한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내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갈렙의 협력이 없었을지라도 자기 혼자만으로도 당당히 그 같은 신앙의 보고를 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신앙 속에 담겨있는 신앙의 담력이다. 신앙 안에서 더 큰 은혜를 경험해보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예정대로 이스라엘 열두지파에게 땅을 분배한 사건은 참으로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넓은 땅을 하나 같이 전쟁을 통해서 빼앗아야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광야 생활을 통해서는 전쟁을 연습한 일도 없고 전쟁을 위한 전투를 훈련시킨 적도 없었다.

이러한 민족을 앞세워 모든 지역을 전쟁을 통해 정복하는 일은 얼마나 부담스럽고 힘든 일이었겠는가? 그러나 여호수아는 믿음 하나로 이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여기서 한 사람의 놀라운 믿음의 결실을 확인하자.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단합된 믿음으로 얻어낸 결과가 아니었다. 백성들은 전혀 수동적이었고 여호수아 개인의 믿음이 이 큰 역사를 이루어낸 것이다. 한 사람의 믿음이 한 나라와 역사의 장래를 책임진 것이다. 하나님은 전체의 믿음을 요구하시는 때도 있지만 한 의인의 믿음을 통해 전체를 구원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한 것은 여호수아의 신앙과 그의 순종과 그의 온전한 하나님 신뢰의 결과였다.

인간적으로 볼 때 여호수아는 외롭고 고독했지만 하나님 한 분이 천만명의 지원자보다 더 큰 용기와 힘이 되어 주셨다. 그러므로 넉넉히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물론 많은 부장들이나 족장들의 협력으로 함께 이루어낸 일이지만 여호수아의 신앙과 지도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여호수아가 갖고 있던 특수한 신앙의 지도력을 우리도 배워야 하겠다.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돕는 열심이 얼마나 컸었는가 하는 것은 태양이 머물렀던 사건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심겠다(출 15:17)고 하신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해 초자연적인 방법을 동원하기까지 하셨던 것이다. 여호수아때 태양이 머물렀고 히스기야때 일영표가 뒤로 물러났던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컴퓨터를 통해 과학적으로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 두 사건의 시간은 24시간으로 인류 역사 속에서 사라진 하루인 것을 찾아내므로 성경을 증명하고 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이 이 날에 가졌던 감격을 상상해 보라! 미처 백성은 깨닫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태양아 너는 기브온에 머무르라” 이렇게 명령했던 여호수아는 말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자신의 눈앞에서 이루어지고 전쟁에서 큰 승리를 경험한 여호수아의 심경은 어떠했겠는가?

하나님과 동역하고 동사할 때 우리는 뜻밖에 큰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여호수아처럼 큰 체험은 아닐지라도 크고 작은 많은 표적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살자. 하나님 사역은 하나님이 책임져주신다. 우리는 믿고 순종하고 사역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자. 이것이 바로 신앙이다.


◇여호수아를 통해 얻는 교훈

여호수아가 이렇게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고 큰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청년때부터 성막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기도의 결과였다. 이와같이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소중한 일꾼이 되게도 하고 어떠한 하나님 사역도 감당할 수 있는 자질을 끌어내기도 한다. 이같은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안다. 그러나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아는 사람인가? 행하는 사람인가? 자신을 돌아보자.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한 것 같이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하나님이 일을 맡길 때 우리는 걷는 것 같이 일을 진행하지만 하나님은 뛰면서 우리를 도우신다. 하나님이 맡기셨고 원하는 일로 확인되었다면 주저하지도 낙심하지도 말자.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업고 마음껏 헌신하고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이병돈(은평성결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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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라합…타락의 땅에 핀 ‘믿음의 불꽃’  
여리고성은 가나안 땅을 대표하는 큰 도성 중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그에 어울릴 만큼 문화적인 혜택이나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도시이기도 했다. 이렇게 사람이 많고 발달한 지역일수록 타락하고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것이 역사의 실례이다. 이러한 도시의 기생이었다면 그의 사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라합은 자기 신분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판단력이 예민했고 신앙심도 강했다. 더욱이 하나님 신앙이 그의 마음속에 지배적이었던 사실을 보면 놀랍기까지 하다. 이런 과정을 살펴보면 그는 타락생활이나 단순한 방종으로 기생이 된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기생의 길에 들어선 것 같다.

라합의 마음속에는 어느 땐가는 이 길을 정리하고 새 출발을 갖고자 하는 의욕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사람은 생활보다 그의 의식이 일생을 지배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을 판단할 때 현재의 생업이나 그 개인의 현실을 통해 평가하면 큰 실수를 범하게 된다. 일생을 통해 여러 종류의 생업을 거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인생의 짧은 단면이 결코 그 인생의 전부일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의 현실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으로 수용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라합은 정탐꾼들과 약속할 때 자기 가족의 구원을 담보로 받아냈다. 이로 미루어봐서도 자기 가족의 형편이 열악하여 생계를 위해 기생이 됐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그의 훌륭한 뜻을 헤아려볼 수 있다.

여호수아 2장 9∼12절에 보면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고 하였다.

이 본문 속에서 기생 라합의 훌륭한 신앙고백을 보게 된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것을 안다고 하였고 여호와는 홍해를 마르게 하시는 분이요,견고한 시혼과 옥과 같은 나라도 전멸시키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다. 또한 이 소식을 듣고 간담과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다고 소개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상천하지에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다.

이 내용을 보면 라합은 오랜 세월 신앙생활한 사람과 다름없는 분명한 하나님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나 영적 축복은 지역이나 혈통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에게 허락되는 것을 기억하자. 라합은 전도를 받은 것도 아니고 복음을 들은 것도 아니었다.

더욱이 성경공부나 영성훈련을 받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건과 광야생활,요르단강 동쪽의 전쟁을 보고 마음속에 뿌리내린 신앙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과 우리 사람 사이에 허락되는 은혜는 이렇게 개별적이라는 사실을 주목하자. 전도를 받고 복음을 들으며 하나님을 영접하는 고백을 거쳐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양육자를 통해서 신앙지도까지 받는다면 아주 이상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인 과정을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거쳐야 되는 것은 아니다. 라합과 같이 전도자를 통해 복음을 들은 적이 없고 양육을 받은 적이 없어도 깨달음과 개인적인 신앙심으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성경을 보면 에녹이 그랬고 노아도 그랬으며 아브라함도 그랬고 모세도 그랬다. 하나님은 혈통이나 신분이나 지역을 가리지 않고 믿음을 갖고 하나님께 오는 자를 영접하시고 자녀로 삼으신다. 또 그에게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은혜의 세계를 허락하신다.

이와 같이 개인적인 신앙만 있으면 하나님과의 교제는 편벽이 없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넓혀가자. 이것을 개인적인 영성 계발이라고 표현한다. 자생능력이 잘 갖추어진 영적인 사람이 되자. 하나님과의 교제나 하나님 체험이나 하나님과 연합하는 깊이까지 더 갖추어나가야 하겠다.

이런 영적 성장은 아무도 범할 수 없는 개인적인 영역이다. 이러한 축복을 경험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자. 전도는 할수록 좋고 꼭 필요한 사역이며 하나님이 사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고전 1:21). 또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성경공부나 양육도 서슴지 말아야 한다.

이와 같이 기생 라합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갖고 있는 그 개인의 신앙과 종교심 그리고 영감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므로 생명을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집 옥상에 정탐꾼을 숨기는 일을 대담하게 실천할 수 있었다.

또 국적이나 종족종교나 전통까지도 포기할 수 있을 만큼 그의 결단은 대단했다.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숨긴 사실이 그의 훌륭한 모습이다. 이것은 그의 현실과 상황을 앞지르는 의지적인 선택이었다. 개인과 가족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순간이었다. 자기 일생이나 현실까지도 포기해야만 하는 결정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기회는 많은 것이 아니라 몇 차례뿐이라는 것이다. 그 현장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바뀌고 인생이 달라진다. 좋은 기회를 놓쳐버리고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고 통곡하며 후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선택의 착오가 이렇게 큰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바른 선택의 방법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 아주 쉽고 단순하다. 언제나 믿음을 앞세우자. 또한 하나님편에 서야 한다. 더 나아가서 영감에 순종하자.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어주신다.

라합은 두 정탐꾼에게 진실한 표를 받아냈다. 그것은 바로 붉은 밧줄이었다(수2:18). 붉은 밧줄을 창에 매고 그 집에 가족이 함께 있는 조건으로 맹세를 받아낸 것이다. 라합은 정신도 훌륭했고 믿음도 강했고 일 처리도 다부진 여자였다. 우리에게 항상 중요한 일이 있다.

그것은 모든 일에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는 점이다. 정확하게 하고 분명히 하자. 모든 일은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 마무리를 잘못해 전체를 그르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 개인의 삶도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 마무리를 잘못해서 평생 오점을 남기는 사람도 많다. 자기 종말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라합과 같이 마무리를 잘하는 사람이 되자.


◇ 라합을 통해 얻는 교훈

라합이 가지고 있던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다. 라합의 사생활이나 라합의 과거는 그의 신앙으로 다 묻혀졌다. 하나님은 현재의 신앙을 보시지 과거의 사생활을 기억하지 않으신다. 결국 라합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보아스의 어머니가 되어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다(마1:5). 라합과 같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앙의 사람이 되자.

라합의 집 창문에 매달린 붉은 밧줄은 그 가족들의 생명을 구해낸 징표가 되었다. 이 붉은 밧줄은 약속에 대한 증거물이었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라합과 그 가족의 목숨이 걸려있는 그리고 라합의 공로를 기억하게 하는 밧줄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우리의 일생을 통해 우리의 수고나 우리의 공로가 담겨있는, 하나님께 내 놓을만한 붉은 밧줄이 있어야 하겠다.

이병돈(은평성결교회 담임목사)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드보라…가나안 호령한 ‘사사시대 우먼파워’  
구약의 사사시대를 신정통치시대라고 일컫는다. 하나님이 세우신 모든 지도자는 다 하나님이 선택하셨다. 그러나 사사시대는 하나님의 의지가 더 크게 표현된 시대로 본다. 어느 시대나 영적인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자로 선택받았다. 하지만 사사시대만큼 하나님의 철저한 검증을 거친 때가 없었던 것 같다.

하나님은 그 개인의 영성이나 충성심이 인정될 때 그를 택하시고 들어 사용하셨다. 또한 적어도 주변 사람들에게만큼은 드러나는 신앙의 위인들이 사사가 되었다. 우리 개인의 신앙도 인정받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먼저 인정을 받자. 또한 주변 사람과 교회에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뿐 아니라 자기가 소속된 직장이나 생업을 통해서도 신앙인으로서 부끄러운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칭찬받는 사람이 되자. 더욱이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도 완전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얼마 전에 청문회가 있었다. 곤혹스러울 만큼 질문은 개인의 신상에 집중되었다. 그러므로 정책적인 청문회가 되지 못했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청문회를 거치는 당사자에 대해서도 아쉬운 점이 있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려면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책임져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중적인 질문의 대상이 되었던 몇 가지 내용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고 잘못을 모두 타인에게 떠넘기는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때문에 점수를 잃은 것 같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삶 자체가 이 시대와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검증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자기 개인의 인격이나 삶이나 자기 사역에 대해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드보라는 하나님의 검증을 통과한 사람이었다.

사사는 통치자와 선지자와 군대장관을 겸임하는 성직이었다. 이러한 힘든 사역에 랍비돗의 아내 드보라가 선택됐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갖게 된다. 한 가정의 주부요 자녀들의 어머니였던 여자의 몸으로 사사가 됐다는 사실이다. 여자들이 대접받지 못하고 발언권이나 위상이 높지 못했던 구약시대에 나라의 통치자가 됐다는 사실은 참으로 드문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성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분명한 의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실례라 하겠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인자로 여성을 택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성차별이 없었다는 것에 한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의 초기에 여자를 들어 큰 뜻을 성취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큰 영광을 거두셨다. 적어도 하나님 편에서는 사람을 등용하는 데 성별로 인해 개인이 피해를 보는 일이 없게 하셨다.

하나님은 그 개인의 영적인 자질보다 성별을 앞세우지 않으신다. 개인이 능력만 갖추고 하나님께 신임 받는 사람만 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들어 쓰시고 그를 통해 영광을 거두신다. 자랑할 만한 가문이 못되거나 천성적인 자질에 자신감이 없다고 위축되거나 소심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나치게 자만해도 안 되지만 지나치게 자기를 업신여겨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는 신앙의 사람만 되면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보다 몇 갑절 유능한 사람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드보라도 “하나님의 사람 드보라” 할 때 많은 가능성이 허락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을 뺀 드보라는 한 남편의 아내로 한 가정의 어머니로 끝나고 만다.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사람 아무개”로 평생 쓰임 받는 소중한 일꾼이 되자. 얼마나 크고 많은 일을 하느냐보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맡기시는 일에 아주 필요하고 소중하게 쓰임받는 것이 중요하다. 드보라를 통해 배워야 하겠다.

드보라는 이스라엘 군대를 지휘하는 전법에도 익숙한 지도자였다. 가나안 왕 야빈이 군대장관 시스라와 함께 이스라엘을 괴롭히자 1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바락과 함께 전쟁에 나가 가나안군대를 섬멸시켰다. 이 때에 적장 시스라가 야엘의 집에 피신하였다가 살쩍이 말뚝에 박혀 죽게 된 사건은 유명한 이야기이다(삿 4:21).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 있다. 그러나 전쟁을 이끄는 일은 사람의 몫이었다. 전력을 구비하는 일이나 군대를 통솔하는 일,장교들을 지휘하는 문제는 다 드보라의 일이었다. 그 위에 전술이 필요했고 전략도 필요했다. 한 전쟁을 치르는 일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만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많았던 것을 헤아려보자.

이런 드보라를 단순한 가정주부로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영감이 함께 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기 위한 기름을 짜는 것 같은 간절한 기도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숨은 노력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정직하게 힘쓰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보상이 언제나 같이한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시다. 이는 영감에 차등이 없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영감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역사하신다. 그러나 그 영감을 수용하는 깊이는 각양각색이다. 드보라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선택되고 자기 사명을 감당하는 데 하나님의 영감을 고스란히 받은 사람이다. 영감을 선별하지 말자. 하나님의 영감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지 말자. 순수하게 전폭적으로 영감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자. 하나님의 영감에 대한 반응이 순수해야 한다.

그런 사람은 드보라와 같이 유능한 통치자도 되고,선지자의 사역도 잘 감당할 수 있으며 전쟁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다양한 은사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장래를 위해 자신이 노력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방법이다. 자기 욕심이나 부정적인 생각으로 하나님의 영감을 제한하지 말자.

사사기 5장에 나오는 드보라의 시는 히브리인의 명시가 되었다. 이는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고백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노래이다. “이 전쟁을 도우려고 내려오신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였고 “하나님이 주의 대적을 멸망시켰으며 내가 힘있는 자를 밟았고 이스라엘의 어미가 되었다”고 노래하고 있다. 이 본문을 보면 드보라는 훌륭한 시인이기도 하다. 정치를 할 때에는 냉정하고 공의로웠으며 재판을 할 때에는 공정한 사사였고 전쟁을 통솔할 때에는 단호하고 엄격한 장군이었다.

거기에 부드럽고 여성미가 넘치는 시인을 겸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한 개인을 통해 이렇게 다양하게 역사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제멋대로 살다가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과 의논하며 살아가는 생활이 다른 점이다. 로저스 베이컨은 신앙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고 신앙에 서면 모든 것을 다 얻는다고 하였다. 드보라와 같이 신앙에 서는 사람이 되자.

◇드보라를 통해 얻는 교훈

하나님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 사람의 능력이나 가능성을 과소평가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사용한 드보라를 통해 배워야 하겠다. 또한 드보라가 하나님의 은혜로 감당한 엄청난 사역들을 묵상해 보자.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의 사역과 사명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과욕은 잘못이지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넘치는 법이 없다.

드보라는 40년동안 국정을 담당한 이스라엘의 사사였다. 참으로 긴 세월 성공적인 삶을 살다간 사람이다. 이는 그녀의 신앙을 대변하는 대목이다. 사람이 성공할 때 넘어지는 것은 교만이나 불신앙 때문이다. 그러나 40년을 하루같이 하나님의 뜻을 따른 드보라의 삶은 우리 모두에게 본보기가 된다. 성공적인 하루는 드보라의 40년 성공에 밑거름이 되었다. 이러한 삶에 도전을 받아야 하겠다.

이병돈(은평성결교회 담임목사)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기드온…우상숭배 척결한 ‘영혼의 용사’  
기드온은 요아스의 마지막 아들이자 농장과 과수원을 가진 농부의 아들이었다. 따라서 그의 소명도 농가에서 이루어졌다. 기드온도 하나님이 크게 들어 사용한 사람들처럼 그의 믿음이 그를 성공적인 사람이 되게 하였다. 이는 그의 사역이 밝혀주고 있다.

참으로 믿음은 신비한 은혜 중의 은혜이다. 믿음을 소유하기 위해 돈을 들이는 것도 아니고 큰 노동력을 바치는 것도 아니다. 더욱이 일정한 시간적 투자를 거치는 것도 아니다. 믿음은 마음의 일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마음만 열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믿음의 복을 누릴 수 있다. 또 이 믿음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갖자.

하나님을 믿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으며 예수님이 구세주인 것을 믿고 내세와 부활을 믿기는 쉽다. 이것을 믿음의 고백이라고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의 사람이 되는데 있다. 신앙 인격을 가져야 하고 생활이 신앙으로 묶여야 하고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한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여호수아나 드보라와 같은 사람들은 신앙인의 모습을 우리에게 잘 대변해주고 있다. 여기 기드온도 그런 면에서 하나님께 쓰임받고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다. 먼저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기드온이 타작마당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게 된 과정을 생각해보자.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삿 6:12)라는 말씀으로 기드온을 깨우쳐 주셨다. 하나님의 사자가 하나님이 함께 하는 큰 용사라고 소개한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고 하였고 미디안을 한 사람 치듯 하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때에 기드온은 우리집은 므낫세 중에서도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집에서도 제일 작은 자라고 소개하면서 '주인 표징'을 보여달라고 요청하였다.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이 가지고 나온 염소새끼와 무교전병과 소쿠리에 담은 고기를 반석 위에 두고 그 위에 국을 붓게 하였다. 그리곤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제물에 대니 불이 반석에서 나서 제물을 태워 하나님의 소명을 확인시켰다.

또한 미디안과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하실 때에도 양털만 이슬이 있고 땅이 마르게 한 것과 반대로 양털은 마르고 땅에 이슬이 있게 하는 표징을 통해 두 차례나 하나님의 명령을 확인하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이 기드온은 매사에 분명한 하나님의 허락을 확인하고 일을 진행하여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허락에 대해 분명한 응답을 받는다는 것은 아주 소중한 일이다. "매사에 기도의 응답이 없이는 행하지 않고 말하지 않겠다"는 어느 목회자의 말이 떠오른다. 하나님의 허락이 아니면 움직이지 말고 말까지 아끼는 태도가 참으로 필요하다. 이렇게 살기를 여러 차례 다짐하고도 말이 앞서고 일부터 벌여놓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또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면서도 이 태도를 고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기드온과 같이 변화받아야 하겠다. 일을 진행하기 전에 하나님의 동의를 받아내고 하나님의 협력을 구해야 한다. 이 일만 선행되면 시간이 좀 빠르고 더딘 것이 문제되지 않고 일의 성패에 대해서도 안심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가장 알맞은 때도 하나님이 동참하는 시기요,일의 성공을 보장받는 것도 하나님과 동역하는데 있다. 기드온은 절대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내는데 아주 신중한 사람이었다. 내 계획이나 내 설계에 하나님의 뜻을 맞추려 하지 말고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하나님의 결재를 받는 심정으로 살아야 한다.

영적인 질서만 분명하면 세상을 살기가 쉽다는 말이 있다. 일을 진행하는데 있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영적인 갈등만 없애도 미래가 보이게 마련이다. 기드온과 같이 항상 하나님의 뒤에 서는 사람이 되자.

기드온은 바알신당을 훼파하고 그 옆에 있는 아세라 목상을 찍어 장작을 만들어 번제물의 땔감으로 사용했다. 물론 그 결과 기드온을 죽이겠다고 그 지역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고 기드온을 끌어내라며 그 아버지에게 폭언을 하였다. 그때에 그 아버지의 지혜로운 대답이 유명하다. "너희가 바알을 위해 왜 쟁론하려 하느냐 바알이 기드온과 쟁론하게 하라"는 말로 그들의 분노를 잠재우게 되었다. 결국 기드온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이 사건으로 기드온을 가리켜 여룹 바알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는 그의 별명이 되었다(삿 6:32).

이 말의 뜻은 "기드온이여 네가 바알과 싸우라"는 뜻이었다. 기드온의 이같은 행적은 보통사람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러한 거사는 분명한 하나님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가져온 결과였다. 바알신당을 파괴함으로써 빚어질 결과를 내다보면서도 주저하지 않고 그 일을 진행한 것을 우리가 주목해야 한다.

이는 어떤 모험이나 용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결단이었다. 기드온은 사사가 되기 전부터 우상숭배에 대한 범죄를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이 죄악에 대해 의분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첫번째 진행한 일이 바로 이 사건이었다.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의 영적인 혁명이었다. 하나님편에 서고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려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또 다른 보호와 도움이 함께 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지켜드리거나 성경을 보호하거나 교회를 붙든다는 말은 어색하지만 이런 사상과 이러한 정신이 강하게 몸에 배어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소중하게 사용하신다. 교회나 말씀이나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에 대해서 참을 수 없을 만큼 분개한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하나님도 힘있게 그를 지원하신다.

기드온처럼 자기 가정이나 자기 공동체,우리가 처한 현실의 부정한 죄악까지 책임지고 뿌리뽑는 회개를 담당하는 사람이 되자. 하나님은 이런 사람의 수가 많아지시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가로막는 죄를 정리하는 영적인 혁명을 가져야 하겠다. 기드온은 한 시대의 죄를 책임진 사람이요,한 지역의 죄를 정리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명감을 필요로 하는 시대에 우리도 살고 있다.

마지막으로 3만2000명 중에서 300명을 선발하여 항아리 속에 숨긴 횃불로 미디안과 아말렉을 쳐서 이긴 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건이다. 기드온은 자신은 가장 약하고 작다고 생각하였으나 하나님은 가장 크고 능력있는 사람으로 들어쓰셨다.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능력과 지혜가 그 사역을 결정하는 조건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선택되면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 그 개인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도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역과 헌신이 판가름난다.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믿어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역이나 사명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주신다. 루터의 말과 같이 일을 구하기 전에 순종을 배워야 하겠다. 기드온을 본받는 사람이 되자.

◇기드온을 통해 얻는 교훈

성경에 보면 하나님 앞에 선택받고도 버림받는 사람이 있고 버림받지는 않았어도 별 볼일 없이 일생을 보낸 사람이 있다. 하나님의 선택에 어울리는 평생을 갖는다는 것은 아주 소중하다. 선택은 하나님이 하시지만 그 선택에 어울리는 삶을 사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기드온은 이런 면에서 하나님과 좋은 조화를 이룬 사람이었다. 선택의 은혜도 받고 선택에 따르는 축복도 누리는 사람이 되자.

매사에 하나님을 앞세우는 영적 질서는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 우리가 실수를 되풀이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많은 시간과 정력을 엉뚱하게 소비하는데 있다. 정확히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잘못을 되풀이하는데 우리의 힘을 낭비해서는 안되겠다. 기드온과 같이 기도의 응답을 확인하고 자신 있게 일을 진행하는 사람이 되자.

이병돈 (은평성결교회 담임목사)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삼손…굴곡진 사사의 길…뼈저린 훈계로 남아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각별한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 삼손은 아버지 마노아가 자녀가 없을 때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 예언을 받고 태어났다.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의 아내가 잉태하여 아들을 나을 것이며 그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실인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부모까지 포도주나 독주를 입에 대지 말며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도록 지시하였다.

이렇게 얻은 아들이 삼손이다. 그리고 삼손은 어릴 때 마하네단에서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함을 입어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이처럼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이 큰 관심을 갖고 그를 섭리하신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은혜에 비해 삼손은 실패한 사사가 되었다.

하나님이 쏟으신 정성에 비해 삼손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내용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선택하고 그에게 사명과 사역을 맡기신다. 또한 그의 사역에 걸 맞는 은혜와 영감과 능력을 겸하여 주신다.

그러나 그 개인의 생각이나 의지나 성향까지 하나님이 주장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고 안 되는 것은 그 개인에게 달렸다.

부모를 통해 물려받은 신앙의 감화나 그 개인이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나 영적인 축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개인과 하나님 사이의 영적인 관계이다.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하나님의 사랑과 큰 은혜를 입었지만 그러한 좋은 조건에 비해 너무나 기대에 어긋나는 일생을 보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도 깨닫게 되는 부분이다. 이스라엘만큼 하나님의 사랑이나 기적이나 특별한 선택을 입은 백성이 없다. 그들이 입은 은혜를 보면 그들이 가장 하나님을 잘 믿고 온 세상을 대표할 만큼 신앙의 본이 되어야 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을 보게 된다.

삼손이나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할 때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은혜를 사모하고 축복을 구하는 일도 좋지만 그보다 나와 하나님 사이의 영적인 바른 관계를 항상 지속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40년간이나 블레셋나라의 지배하에 억압되었던 이스라엘을 건져낼 목적으로 하나님이 삼손을 세우셨다. 그러나 사역초기부터 빗나가는 삼손의 모습을 보게 된다. 나실인으로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이방여자와의 결혼만 봐도 알 수 있다. 더욱이 기생 들릴라와의 분별없는 타락은 한심하기까지 하다.

이런 일들로 인해서 수수께끼를 통한 아스글론 사람들의 베옷과 겉옷 30벌 사건,300마리의 여우 꼬리에 불을 붙여 곡식과 감람원이 다 불타버린 일,블레셋의 다곤 신전으로 끌려가 눈이 뽑히고 맷돌을 돌리며 쇠고랑을 찬 불행한 생활 등이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자신이 뿌린 씨를 자신이 거둔 것이다. 한마디로 삼손은 하나님의 크신 은사를 남용한 사람이었다. 삼손은 힘의 근원을 외면한 어리석은 사람이요,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보다 자신감이 앞선 사람이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보다 자기 주장을 앞세운 사람이었다.

더욱이 자신에게는 실패는 없는 것으로 생각할 만큼 자만했고 자기 욕심에 자신을 내어 맡긴 사람이었다. 그 마지막이 얼마나 비참하였는가.

삼손을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기 성별을 지키지 못한 것이 이렇게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달리 표현하면 신앙의 생명은 성별이다. 사단의 유혹이나 타락된 세상에 한발 두발 양보하다 보면 전체가 허물어져버리고 만다. 삼손만큼 준비되어 출발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러한 삼손이 이렇게 비참하게 넘어진 것을 마음에 깊이 새겨둬야 하겠다.

삼손이 보여준 것처럼 요즘 우리 한국에도 위협적인 죄악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성적 타락이다. 어린이나 청소년이나 장년이나 노년을 가리지 않고 무섭게 확산되고 있다. 우상숭배나 부정부패의 죄에 못지 않은 기도의 제목이다.

이 큰 범죄를 위해 도고의 큰 회개가 교회마다 일어났으면 한다. 무분별한 성적 타락이 순결운동으로 바뀌어지도록 온 교회가 기도해야 하겠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성적 타락은 훨씬 심각한 상태이다. 이 탈선된 성범죄로 인해 병든 가정이 얼마나 많고 파괴되는 가정이 얼마나 많은가. 또한 음란사이트에 접속하는 사람들의 연령에 구분이 없다.

교회가 이 문제에 책임을 느끼고 회개와 순결운동이 일어나도록 목표를 가지고 기도하자. 하나님만 이 일을 바로잡을 수 있으시다. 하나님은 하루 아침에라도 우리 국민의 마음을 바꾸어놓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삼손은 여러 차례의 경솔한 행동을 통해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도 자기를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다시 말하면 삼손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결함은 회개할 줄 모르는데 있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초자연적인 능력을 남용하므로 수모와 시련을 겪으면서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깝다. 삼손이 조금만 일찍 회개했더라면 지난날의 잘못을 다 바로잡고 블레셋을 삼손을 통해 하나님이 정리하셨을 것이다.

삼손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자신도 불명예스럽게 일생을 보냈다. 회개에도 기회가 있다. 기회를 놓치면 용서받고도 사역의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회개는 빠를수록 유익하다. 회개하고 자기의 잘못을 보상할 만한 기회가 있어야 한다. 삼손과 같이 세상을 떠나면서 회개하면 회개의 기회를 상실한 사람이다. 부끄러운 구원만 기대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자신의 잘못을 만회할 수 있는 여유를 갖고 회개해야 한다. 회개를 미루지 말자. 하나님이 주시는 많은 기회와 권고를 묵살하지 말고 서둘러 회개하는 사람이 되자. 지난날의 부끄러움을 몇 갑절로 보답하는 사람이 되자.

삼손이 다곤 신전의 기둥을 쓰러뜨리며 블레셋 사람 3000명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삼손은 정말 실망스러운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그의 임종을 통해서라도 그의 체면을 세워주셨다. 그뿐 아니라 선민의 위상을 높이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을 수 있는 충분한 시청각 교육을 시키셨다. 이스라엘 백성과 삼손에 대해 하나님이 선택했다는 한가지 조건 때문에 쏟으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다시 한번 기억하자.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여기서도 경험하게 된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 짧게 사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은 일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주셨다. 깨어 있는 사람에겐 기회가 주어지고,사명감만 느끼면 최선의 삶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성실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야하겠다.

사람은 얼굴이 다 다르듯이 각기 다른 자신의 사명을 갖고 태어난다. 자기 사명을 정확하게 확인하고 자기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무리한 요구나 기대를 갖지 않으신다. 성실한 사람만 되면 우리는 성공적인 삶을 거두게 된다. 삼손을 돌아보며 좋은 귀감을 삼아야 하겠다.

◇삼손을 통해 얻는 교훈

삼손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을 선용하지 못한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무책임한 사람이기도 하다. 삼손이 경건한 사람으로 하나님을 사랑했더라면 얼마나 명예스러운 삶을 살았겠는가. 또한 나라와 자기 개인을 위해서도 큰 공헌을 하였을 것이다. 삼손의 만용과 흐트러진 마음이 자기 개인과 나라에 끼친 피해가 너무나 컸다. 사람은 태어날 때 사명을 갖고 온다.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삼손이 이렇게 타락하고 실수했어도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며 그를 감싸주는 하나님의 모습을 묵상해보자. 삼손은 하나님을 거역했어도 하나님은 그 뒤를 수습하고 그 체면을 세워주시는데 바쁘실 만큼 사랑과 연민을 쏟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에도 한계가 있음을 알자. 하나님의 참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이병돈(은평성결교회 담임목사)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사무엘… 간절한 기도가 낳은 ‘신앙부흥의 선지자’  
사무엘은 엘가나와 한나의 아들이다. 자녀가 없는 것에 대해 마음 아프게 생각한 한나가 하나님께 서원하여 얻은 아들이 사무엘이다. 한나는 하나님께 아들을 주시면 평생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아니하는 나실인으로 키워 하나님께 드릴 것을 서원하였다.

하나님은 한나의 서원기도를 들으시고 아들을 허락하셨는데 그가 바로 사무엘이다. 이와 같이 한나의 서원기도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통해 이루어졌다. 서원의 내용을 보증으로 내세울 만큼 다부진 마음이 한나에게 있었다. 한나는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자 서원을 실천했다. 한나의 신앙은 단순히 아들을 얻으려는 욕심에서가 아니라 그 이상의 훌륭한 뜻을 품고 있었다.

여자로서 아기를 낳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한 서원이 아니었다. 아들을 얻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보다 훌륭한 아들을 갖고자 하는 소원이 그에게 있었다. 그러므로 평생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했으며 젖을 떼면 바로 제사장에게 맡겨 양육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숨은 의지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 아들 사무엘에게 고스란히 물려지게 되었다.

사무엘이 어린 나이로 부모에게서 떨어져 성장한 대견스러운 모습을 보면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다. 젖을 빨면서 어머니 품에서 받은 신앙의 감화가 그의 평생을 지배할 만큼 사무엘에게 값진 기간이었다. 마치 모세가 어머니 품에서 젖을 빨며 받은 영적 감화로 평생을 승리한 것과 같다.

사무엘이 엘리 제사장을 통해 받은 교육도 있지만 어머니의 영향이 더 결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무엘의 일생은 어머니의 품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태교와 영아교육이 소중한 지도 모른다. 한나의 훌륭한 뜻이 사무엘에게 물려질 때 그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로 바뀌었던 것을 발견하자.

사무엘은 그 어머니와 본인과 하나님의 은혜가 잘 조화된 영적인 작품과도 같았다. 한나의 품은 단순한 아기를 안아준 가슴이 아니라 사무엘의 장래를 선도하는 영적인 요람이었다. 그러므로 사무엘이 부끄러움이 없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받을 때 사무엘 자신보다 더 기뻐했을 한나를 기억해야 하겠다. 어머니들은 어린 자녀를 양육하는 단순한 어머니 이상으로 자녀를 위해 훌륭한 스승이 되어야 하겠다. 어머니의 기도는 복중에 아기를 가졌을 때부터 해야 함을 마음에 새겨두자.

사무엘은 젖을 떼자마자 엘리 제사장에게로 보내져 성장하게 되었다. 이런 생활에 잘 적응한 것을 보면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대범한 사람이었다. 날마다 울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떼를 쓴다면 어떻게 엘리 제사장이 양육할 수 있었겠는가.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순종의 사람이었다.

이는 그가 제사장 밑에서 엄격한 지도를 잘 참아낸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또한 고되고 힘든 성직자의 훈련을 잘 감당한 것도 사무엘의 훌륭한 점이다. 그러나 1년에 한차례씩 매년 제를 드릴 때 외에는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그 부모의 지극한 관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또한 매일 사무엘을 위한 간절하고 뜨거운 기도가 이어졌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결국 한나의 신앙과 기도,정성이 사무엘이 성장하여 선지자의 생활에 들어가기까지 그를 지켰고 붙들고 있었다.

한나의 서원기도는 사무엘을 얻은 응답으로 끝나지 않고 사무엘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움을 입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영적인 자의식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사무엘은 피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부모들의 기도와 하나님의 섭리가 그를 지배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무엘의 순종과 인내가 더 돋보이는 부분이다. 사무엘이 세 번이나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엘리 제사장에게 찾아간 일이나 네번째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담을 가진 사건도 하나님이 사무엘을 찾아 만나주신 일이었다.

이와 같이 사무엘이 청년이 되어 자립 신앙을 갖기까지에는 오랜 세월 그 부모와 엘리 제사장,그리고 하나님의 협력이 있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과정도 이렇게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가족을 위한 기도나 영적인 기도에 결코 게을러선 안되겠다.

사무엘의 헌신과 평생의 성공적인 사역은 그 가정에서 대를 물려 이어진 신앙과 기도의 뒷받침으로 보아야 하겠다. 우리도 사명감을 갖고 가정과 가족,자손들을 위해 영적인 기도의 책임을 다해야 하겠다. 가족을 위한 기도를 쉽게 포기하거나 응답이 더디다고 낙담하지 말아야 한다. 도고의 지도자로 자신을 세우고 또한 가정을 책임지는 기도에 헌신자로 자신을 세워가야 하겠다. 더욱이 힘든 가족이라면 더 강한 의지의 기도가 필요하다.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요 첫번째 선지자라는데 그의 헌신의 의미를 더하게 된다. 그는 종교 개혁을 통해 아스다롯과 바알을 제거하는데 성공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더욱이 그가 가졌던 영적 부흥은 미스바 성회에서 그 절정을 맞게 된다. 그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얻은 큰 승리를 기념하여 돌을 세우고 에벤에셀의 제단을 쌓은 것은 아주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에벤에셀은 ‘도움의 돌’이라는 뜻도 되지만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는 고백으로 더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사무엘이 일으킨 영적 각성 운동이나 하나님 신앙으로 온 나라에 신앙 부흥을 일으킨 것은 영적으로 준비된 사람이 거두는 소중한 열매였다. 한 사람의 자질이나 능력은 한계가 있다. 그러나 그 한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실 때에 그 영향과 결과에는 한계가 없다.

사무엘이 바로 그 실례이다. 존 웨슬리의 부흥이 한 시대와 영국을 건졌던 것을 생각하자. 당시 영국은 한 집 걸러 한 집이 술집이고 천지가 도박판이었다. 폭력을 다스릴 수 없어 경찰도 포기한 상태였으며 성적 타락도 극심한 때였다. 이런 영국을 하나님은 웨슬리를 통해 건져내셨다. 이와 같이 훌륭한 뜻을 가진 기도의 사람이 일어나야 하겠다.

사무엘은 자신을 관리하는 데도 빈틈이 없는 사람이었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 가운데 실수 없이 세상을 마친 사람 중 한 사람이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을 대변하는 예언에도 담대한 사람이었다. 사울이 블레셋을 두려워하여 미리 번제를 드렸을 때에도 왕이 망령되이 행했다고 책망하였다.

또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전리품으로 소와 양을 가져왔을 때에도 왕을 단호하게 책망하였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였고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다고 책망하며 여호와께서 이제 왕을 버렸다고 대면하여 밝힌 일도 있다. 사무엘은 꼭 해야 할 말을 누구 앞에서건 거리낌없이 전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일에는 한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바로세워야 하겠다. 그리고 이 시대에 맡겨진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되자. 하나님의 영광이나 뜻을 위해서 죽음을 무릅쓸 만큼 담대하자. 또한 하나님의 부름에 부끄럽지 않은 평생을 가꾸자. 사무엘은 은혜를 사모하고 크게 순종하였으며 도고의 기도를 통해 성공한 사람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 일생을 통해 자기 시대에 꼭 할 일이 있다. 그 사명을 감당하자.

◇사무엘을 통해 얻는 교훈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도 자기의 사명을 처음부터 세워 사는 사람은 없다. 자라가면서 인생의 방향이 결정되고 그의 사명도 드러나게 된다. 결국 자기가 자기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이끌리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뜻에 잘 따르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가장 소중하고 유익한 평생을 섭리하신다. 이것이 정해진 우리의 사명이다.

한나와 같이 서원기도를 드릴 때에는 하나님 편에서 기도의 제목을 결정해야 한다. 또 그 서원을 허락받았다면 서원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감당해야 한다. 서원을 허락받는 것도 간절한 기도에 있다. 그러나 허락된 서원이 훌륭한 결과를 거두고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는 것도 기도로만 가능하다. 사무엘의 성공적인 평생의 사역은 그 어머니 한나의 기도가 큰 몫을 감당했다. 기도의 어머니가 되자.

이병돈<은평성결교회 담임목사>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다윗… 사랑과 인내로 무장한 ‘신앙의 전사’  
다윗은 이새의 막내 아들로 베들레헴이라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소년의 몸으로 그 가정의 전 재산이 될 만한 큰 양떼를 관리하는 목동이었다. 다윗은 건장한 사람이었고 기운도 세며 침착하고 기지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것은 양을 치다가 사자와 곰을 만났지만 그들을 쳐죽이고 양과 자신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사자같이 잔인하고 민첩한 동물과 싸워 이긴 것을 보면 다윗은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그것도 소년시절에 경험한 사건이니 말이다. 다윗은 소년이었지만 생각이나 마음가짐은 어른스러웠다.

이것은 그 가정과 가족들의 신앙심에서 물려받은 감화였을 것이다. 다윗의 어머니를 하나님의 여종으로 표현한 것을 보아서도 그 어머니의 신앙을 짐작할 수 있다(시 86:16,116:16). 이와 같이 이새의 가정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두번째 왕으로 선택받을 만한 영적인 분위기가 갖추어져 있는 가정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가 갖고 태어난 자질 위에 가정에서 받은 종교적인 감화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데 촉진제가 되었다. 한 평화로운 농촌의 가정이었지만 신앙으로 잘 다듬어지고 영적으로 잘 자리잡힌 가정이 지니고 있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준 실례이다. 한 가정이 소유하고 있는 경건성은 한 가정이나 가족에 한하지 않는다. 여기서 다윗이라는 큰 인물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다윗의 복은 그 개인이나 가정으로 끝나지 않고 그 시대와 한 나라의 국운을 좌우할 수 있었다.

한 믿음 좋은 집사가 사회생활 가운데 나름대로 실수하지 않고 살았던 이유 두 가지를 간증하는 것을 들었다. 그 첫째는 자기를 믿음 좋은 집사로 직장에서 모든 사람이 인정했기 때문에 실수할 수 없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두 남매가 대학 재학 중이었는데 자기가 만일 죄를 지으면 두 남매도 어디선가 자기와 똑같은 죄를 지을 것 같아 실수하지 않았다고 간증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작은 경계심만 가져도 자기의 사생활을 훨씬 더 훌륭하게 가꿔나갈 수 있다. 다윗의 마음에 어려서부터 자리잡은 영적인 감화는 그를 소중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였다.

다윗이 어린 소년으로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달려가서 골리앗의 칼을 빼앗아 그 머리를 쳐서 가져온 사건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다윗의 승리를 모든 주석가나 목회자들은 한결같이 신앙의 승리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힘이나 전술이나 전투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골리앗은 칼과 창과 단창을 의지해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고 한 다윗의 신앙적 고백이 두 사람의 싸움을 결판지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전체 군대가 패전을 예상하여 낙담했었고 특수한 체격과 뛰어난 전술과 능력을 지닌 골리앗을 아무도 당할 수 없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그와 맞서 싸울 것을 지원했던 다윗의 그 용기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것은 사람의 담력이 아닌 순전한 신앙의 용기였다.

다윗의 이러한 영적인 담력과 전술이 물맷돌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응답으로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불가능도 가능케 하고 없는 가운데 있는 것같이 부르기도 하고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믿음의 효력이다.

참으로 다루기 힘들고 너무 큰 시련으로 느껴지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가. 기도로 풀어가고 믿음으로 해결하기 바란다. 수학 문제를 풀 때 더해서 안되면 빼고 빼서 안되면 곱하고 곱해서 안되면 나누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모든 수학을 풀 수 있는 공식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도 더 믿고 더 의지하고 더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모든 문제를 신앙으로 해결해나가자.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고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는 군중의 환호에 자극을 받고 다윗을 미워하기 시작한 사울은 결국 다윗을 죽이려고 결심하게 된다. 그 뒤로 다윗은 아홉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거치는 등 큰 시련을 겪게 된다.

다윗은 블레셋 사람 가드왕에게 보호를 요청할 때는 몸을 대문에 그적거리고 침을 흘리며 미치광이 짓을 하기까지 하였다(삼상 21:13). 또 들과 산과 황무지의 굴을 전전하면서 겪은 피난 생활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시절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엔게디의 굴에서 사울의 옷자락만 베고 살려준 일이나 사울의 전에서 그의 막사에 들어갔다가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오고 사울의 목숨을 살려준 일들은 성경을 읽을 때마다 모든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다윗은 이렇게 13년 이상의 시련기를 거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 어려움을 잘 참은 것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방법이었다. 조급한 마음으로 자신이 왕위를 앞당기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 전해주는 신앙의 태도이다. 사람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원수를 용서하는 것만큼 어렵다. 하나님이 기름 부은 사람에 대해 결코 자기가 해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끝까지 그를 용서했던 것을 보면 다윗은 참으로 위대한 사랑의 소유자였다.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브라함이 믿음에 대한 대표적인 인물이라면 다윗은 사랑에 대한 대표적인 인물이 될 만큼 높이 평가받을 만한다. 우리들도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게 맡기라”(롬 12:19)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다윗과 같이 지키는 사람이 되자. 또한 절대 서두르지 말고 조급해하지 말자. 하나님이 세우시는 때를 기다려야 하겠다.

다윗이 10년 이상 겪은 이 고난은 외적인 고생보다 자기와의 싸움이 더 힘든 부분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끝까지 성공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자기가 예상할 수 없었던 영적인 소득을 얻게 되었다. 큰 고난을 겪을 때 남을 이해하는 마음이 넓어지고 더 겸손해지며 결코 남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게 된다. 이 고난의 기간에 다윗은 성군이 될 수 있는 영적인 자질을 구비했는지도 모른다. 시련을 잘 거치는 사람이 되자.

사람은 항상 약하고 부족한 자신에 대해서 경계심을 늦추면 안 된다. 자기가 자기를 잘 지켜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윗이 왕위에 올라 나라가 번영하고 국토를 확장하며 그 영광이 더해갈 때 다윗은 실수하게 된다. 이는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전선에서 죽게 하는 이중적인 큰 죄를 범한 것이다. 사람은 이렇게 누구도 안심할 수 없다.

더 무서운 것은 마귀가 틈을 타서 하나님의 백성을 쓰러뜨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항상 대적하고 깨어 있어야 하겠다. 그러나 다윗에게 있어 너무 소중한 또 다른 장점이 있다면 신속히 회개하고 하나님의 권고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태도였다. 나단 선지자가 와서 비유를 통해 권고할 때 다윗은 즉시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내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한다. 철저한 신앙의 사람도 범죄할 수 있다. 기도를 많이 해도 죄의 유혹에서 제외된 것은 아니다. 큰 시련을 겪었어도 온전해진 것이 아니다. 날마다 경건한 생활을 지속하는 것이 죄를 물리치는 승리의 비결이다. 또 다윗과 같이 실수하거든 지체하지 말고 회개해야 한다. 회개를 지연하는 것은 마귀의 지배를 연장하는 것과 같다. 회개하면 하나님은 한번도 죄를 짓지 아니한 사람과 같이 깨끗이 용서하신다. 철저히 회개하고 회개한 후에는 사죄의 확신을 갖자. 과거의 죄에 얽매이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하겠다.



<다윗을 통해 얻는 교훈>

다윗은 10년이 넘도록 기다려야 했던 시련의 기간이 있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고 이렇게 오랜 기간 기다리게 하셨다. 그것도 지속되는 고난으로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연단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자연스럽게 거쳐야 할 과정과 같이 잘 참는 데 성공한 사람이다. 다윗은 이 큰 시련을 통해 성군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것 같다. 인생의 과정을 잘 수용하는 사람이 되자.

사람은 실수하거나 넘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의 영적 성향이 더 중요하다. 다윗도 칠계를 범하고 살인을 계획할 만큼 큰 죄를 범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회개하는 사람이었다.시편에는 측은할 만큼 뜨겁고 간절한 다윗의 회개기도가 나타나 있다. 다윗은 바로 자신을 회복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실수할 때마다 자신을 바로 일으키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이병돈 목사(서울 은평성결교회)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나단… ‘서릿발 교훈’에 다윗왕도 회개의 눈물  
나단은 다윗시대의 선지자였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책임을 맡았다면 나단은 그 시대의 영적인 책임자로 함께 일했다. 다윗의 훌륭한 통치력이 빛을 본 것은 다윗의 신앙과 경건심을 붙들어주고 지원해준 나단의 사역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와 전쟁과 나라의 번영을 이끌어 가는 다윗은 영적으로 피곤하고 나약해지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을 지원해준 영적인 동반자가 바로 나단이었다. 그 나라의 성패나 역사의 방향은 지도자에 의해 좌우된다. 다윗을 영적으로 보살필 수 있는 훌륭한 선지자가 곁에 있었다는 것은 다윗 개인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 더없이 귀한 일이었다. 나단과 다윗은 그들의 친분이나 그들이 가졌던 교제 이상으로 한 시대에 묶여 있던 좋은 동역자였다.

그러므로 다윗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나단과 의논하고 자문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서로 의지할 수 있고 서로 붙들어줄 수 있는 신앙의 동반자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관계가 같은 영적 깊이를 가진 부부라면 얼마나 이상적이겠는가. 그렇지 못 하다면 담임목사나 구역장이나 친구라도 좋을 것이다. 마음을 터놓고 마음의 말을 나눌 수 있는 영적인 친구가 있어야 하겠다.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와 함께 사람과의 영적 사귐도 원하신다. 누구와 영적 교제를 갖느냐에 따라 그 개인의 영적 수준이 정해진다.

다윗왕은 신앙도 좋았고 인간의 시련도 크게 경험했고 잘 거친 사람이었다. 다윗은 영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가히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될 만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다윗이 나단을 존경하고 가까이 했으며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의논했던 것을 보면 나단 선지자를 다윗이 얼마나 의지했는지를 알 수 있다.

신앙의 사람은 믿음도 좋아야 하고 하나님과의 친교도 정상적이어야 하며 또한 주변 사람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를 따른 것 같이 하나님의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이 따를 수 있어야 한다. 영적인 권위는 사회적인 위치나 직분이나 성적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의 대인관계나 사생활이 결정한다. 나단과 같이 영적인 매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나단 선지자의 또 다른 훌륭한 면은 예언자로서의 정직성과 하나님을 대변하는 강한 의지였다. 당시 다윗왕이 다스린 나라는 제국을 이루는 큰 나라였으며 그의 권위는 천하를 호령할 만큼 대단했다. 그 앞에 나아가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을 죽인 일에 대해 비유를 들어 지적한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는 다윗왕을 대면하여 권고하였다. 나단은 목숨을 걸고 왕을 사랑하는 충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한 것이다. 이때 다윗왕이 그 권고를 받아들여 하나님께 회개함으로써 다윗과 나라를 구한 큰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 이 사건은 단순히 나단 선지자의 용기와 다윗의 회개로 끝나버릴 일이 아니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과 마주 대한 분위기나 상황을 연상해보자. 나단 선지자가 지녔던 신앙 인격이나 하나님의 사신으로 보여준 경건성이나 나단이 직접 대화를 통해 다윗을 점잖게 책망하는 그 영적 분위기에 흡수되어 다윗의 큰 회개가 이루어진 것이다. 다윗은 나단이 가지고 있던 영성이나 신앙심에 압도된 것이다. 지도력은 감화력이라는 말이 정말 어울리는 것 같다. 자녀들도 지도한 대로는 안 살아도 보여준 대로는 산다는 말이 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이성을 깨우치기보다 그 사람의 정서를 변화시키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다윗은 법궤를 옮겨놓고 나라가 크게 번영하자 성전을 건축할 것을 나단 선지자에게 제언하였다. 자기는 백향목궁에 거하고 하나님의 법궤는 장막에 있는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여 제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는 것을 막으셨다.

이는 그가 피를 심히 많이 흘린 사람이므로 그 아들을 통해 성전을 건축하게 하시려는 뜻이었다(삼하 7장,대상 22장). 국토를 확장하기 위한 전쟁이었지만 많은 사람을 죽인 다윗에게 성전 건축을 피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대표하는 거룩한 성전은 ‘평강의 사람’에 의해 건축되도록 지시하신 것이다. 이는 성전의 신성미나 하나님의 집에 대한 성스러움을 더하려는데 있었다.

성전을 건축하고 싶어 하는 다윗의 의욕이나 소망을 꺾고 그 아들에게 양보할 것을 권고한 일도 나단을 통해 이루어졌다. 나단 선지자는 즐거운 일이나 기쁜 일이나 영광스러운 일을 예언하기보다 다윗을 깨우치고 다윗에게 제동을 거는,또한 권면하는 사역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나단 선지자는 어려운 일을 도맡은 선지자 같이 힘든 사역들을 잘 감당한,그러면서도 존경받는 선지자였다.

평생 어렵고 힘든 일을 잘 감당한 나단은 예언자의 사명을 다한 사람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다윗과 나단 사이의 친분이나 교제에 금이 가지 않고 상처를 입지 않았던 결과에 주목해야 하겠다. 훌륭한 권면이나 꼭 필요한 충고라도 누가 하느냐가 중요하다. 이는 상대방을 돌이키고 바로잡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내가 아끼는 사람에게 권위있는 상담자가 되도록 우리 자신을 가꾸어 나가자.

나단 선지자의 또 하나의 큰 사역은 다윗왕에 이어 솔로몬을 왕이 되게 하는 일이었다. 나단 선지자는 밧세바를 권하여 다윗왕을 깨우치도록 재촉하였다. 다윗왕은 말년에 정신이 혼미하고 사리가 분명하지 못했었다. 이때에 밧세바와 협력하고 밧세바를 앞세워 솔로몬을 즉위하게 한 것은 나단의 큰 공로였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이 허약해진 틈을 타 아도니야가 다윗왕을 이어 왕위를 물려받을 준비를 하자 밧세바를 찾아갔던 것이다. 이것은 자기의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고 자기의 사람으로 솔로몬을 택한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예언과 하나님의 뜻이 바뀌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때에 나단이 염려스러운 마음과 의분에 이끌려 허겁지겁 일을 서둘러 어린 솔로몬을 왕위에 앉힌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계획속에 이미 왕으로 내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단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섭리가 밝혀졌다면 과감하게 추진해나가야 한다. 머뭇거리다가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매사에는 기회가 있다.

때를 놓치지 말자. 더 중요한 것은 군중의 여론이나 대세나 분위기 때문에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협력하면 죄를 짓는 거나 같다. 힘을 다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세워야 하고 일을 바로잡는 것이 영적인 사람들의 마땅한 본분이다. 그 일을 위해 우리를 세우셨고 그 사명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 언제나 우리를 필요로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최선을 다하자. 사람이 사욕을 버리면 정말 영적으로 자유스러운 사람이 된다.


◇나단을 통해 얻는 교훈

나단 선지자가 성전을 건축하려는 다윗의 계획을 막았던 일은 밧세바 사건을 회개시킨 일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나단 선지자는 마음으로부터 다윗을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다윗의 훌륭한 의욕을 막을 때 두 손을 잡고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진지하게 권고했을 나단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이는 나단이나 다윗이 똑같이 하나님을 사랑했고 하나님께 대한 충성된 마음 또한 같았기 때문이다.

다윗의 권력이나 영화에 조금도 때묻지 않고 끝까지 선지자로 자기 자리를 지켰던 나단이 존경스럽다. 나단 선지자의 말이라면 다윗이 무엇이든 허락하고 협력할 수 있는 처지였지만 순수한 선지자로 깨끗한 생을 살았다. 사사로운 욕심이나 제안으로 다윗왕의 마음을 조금도 흐리게 하는 일이 없었다. 이것은 나단이 다윗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랑의 표현이었다. 나단을 본받아야 하겠다.

이병돈 <서울 은평성결교회 담임목사>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솔로몬… 최고의 축복·지혜받은 ‘선택된 왕’  
솔로몬은 태어나기 전부터 다윗왕을 계승하여 왕위를 물려받을 사람으로 선택되었다. 그뿐 아니라 솔로몬이라는 이름도 미리 지어주셨고 평화의 사람으로 호칭되기도 하였다. 하나님이 솔로몬을 사랑하는 마음이 각별해서 그를 ‘여디디야’라 호칭하기도 하였다. 이는 “여호와께 사랑을 입은 자”라는 뜻이다(대상 22:9,삼하 12:35).

솔로몬은 세상에 오기 전에 이미 축복의 사람으로 선별되었던 것을 보게 된다. 이 일에 대해 주석가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총애라기보다 그 어머니 밧세바의 영향에 비중을 많이 두고 있다. 첫째,어머니의 혈통을 소중히 여기는 모계 중심사회에서의 선택이라는 점이다. 이는 다윗이 밧세바를 더 사랑한 조건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둘째,하나님은 하나님의 일꾼을 뽑으실 때 그를 양육하고 지도할 양육자를 먼저 생각하신다는 점이다.

솔로몬의 양육이 밧세바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이다. 학문이나 예절이나 궁중 생활에 대한 적응은 궁궐에서 받는 교육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의 인성이나 대인관계나 처세나 하나님 중심의 사상은 가정교육을 통한 밧세바의 지도로 봐야 하겠다.

그러기에 솔로몬이 태어나기 전부터 솔로몬의 즉위나 사역이나 축복된 삶까지 하나님이 예언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현재나 미래를 동시에 보시기 때문에 솔로몬의 장래를 성경에 밝혀 놓으셨다. 한 개인의 사역과 삶은 그 본인과 부모와 가문과 그 시대와 관련되어 있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우리는 밧세바와 같이 내 자신과 가정과 현실에 꼭 필요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자.

솔로몬은 20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일천번제의 제사를 드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할 때에 “나는 작은아이”라고 자신을 낮추면서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구하므로 하나님 마음에 맞았다고 칭찬 받았다. 또한 하나님은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과 함께 부와 영광까지 덤으로 주셨다. 솔로몬이 자신을 어린아이로 표현한 것이나 지혜를 구한 것이나 일천번제를 드린 것 모두가 하나님의 예언에 상응하는 훌륭한 태도였다.

이같은 솔로몬의 태도에 기뻐하셨을 하나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 하나님은 사람을 선택하시지 그 마음까지 주장하시지는 않으신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생활을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 솔로몬은 솔로몬대로 감격스러운 큰 제단을 가졌지만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 나라의 솔로몬 왕을 통해 천국에서도 잔치가 벌어졌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의 선택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를 통해 이룩할 사역을 위해서도 복이요,하나님의 섭리를 성취하는 데에도 복이 된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솔로몬은 자기 이전에나 이후에 그와 같은 지혜나 축복을 받은 사람이 없었다. 모든 나라가 솔로몬의 번영을 부러워하였고 모든 군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려 하였다. 사람은 하나님께 선택받는 축복도 있어야 하지만 그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지혜와 덕을 갖추어야 한다.

솔로몬은 왕위에 오르자 일천번제를 드렸으며 성전을 7년 동안 완공하고 화목제로 소 2만 2천과 양 12만 마리의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다. 이는 엄청난 제사로 다른 사람들이 따를 수 없는 헌물이었다. 이는 단순한 제물이기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이요 방법이었다. 제물을 통해 자기 과시나 환심을 생각했다면 제사의 제물 대신 잔치를 벌였을 것이다.

여기서 솔로몬이 지니고 있던 영적인 질서를 찾아볼 수 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는 말과 같이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솔로몬의 영감을 짐작할 수 있다. 솔로몬이 마음껏 하나님을 사랑한 것처럼 하나님도 솔로몬을 마음껏 사랑하였다. 이 본문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겠다. 하나님의 복을 구하기 전에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섬기자. 사역에 욕심을 부리기 전에 하나님이 맡기실 수 있는 사람이 되자.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이기 때문에 의욕이나 사역의 목표나 축복의 내용을 제한하지 않으신다.

은사나 달란트는 그 개인의 특성이지 은사로 그 개인의 가능성까지 한정시키지는 않으신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과 같이 힘쓰고 노력하고 사모하는 자에게는 하나님도 아끼지 않으신다. 아들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이신데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않겠는가.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나 하나님의 복을 제한하지 말자.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식을 가질 때에 하나님의 임재를 구름이 성전에 가득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 성전에 “내 이름을 두고 내 눈동자를 두시겠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집’이요,‘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 확실하게 성별시키셨다. 이때 솔로몬이 하나님께 드린 길고도 자상한 기도는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대표적인 기도이다.

“주의 백성이 범죄하고 주께로 돌아와서 이 전에서 간구하거든 죄를 사하시고 저희 죄로 하늘이 닫히고 비가 없을 때에도 이곳을 향하여 빌면 저희 기도를 들어주시라”고 기도하였다. “만일 온역이 생기고 깜부기가 나고 황충이 날 때에도 죄를 깨닫고 손을 펴 기도하거든 저희 죄를 사하시고 들어주시라고 간구하였다”“이방인이라도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할 때 들으시고 전쟁을 위해 성전 있는 편을 향하여 기도해도 들으시며 포로로 붙들려가서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해도 들어주시라고 간구하였다”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위해 최상의 정성을 쏟고 힘을 다해 건축하는 충성된 하나님의 종이었다. 이같은 정성과 충성된 마음에 못지 않는 그의 신앙이 우리들을 사로잡고 있다. 그가 드린 세밀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따를 수 없을 만큼 대표적인 보고를 드린 점이다. 이러한 기도의 내용이 그의 신앙의 깊이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솔로몬을 통해 빼놓을 수 없는 가슴아픈 가르침이 있다. 솔로몬도 나라의 번영과 세상의 영광과 금을 돌같이 흔하게 쓴 부요함에는 무너지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일만이천의 마병이나 일천사백이 넘는 병거나 국고성이나 병거성으로도 그의 불행을 막을 수 없었다.

후비와 빈장을 천명이나 거느린 솔로몬은 눈과 귀가 가려져 그의 생각과 뜻이 병들고 말았다. 이방 여인들을 통해 세워진 우상전각이나 우상숭배야말로 솔로몬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솔로몬은 출발도 잘했고 통치나 나라의 운영도 성공한 왕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왕에게 금한 말을 많이 두지 말고 아내를 많이 두지 말며 금을 많이 소유하지 말라는 말씀을 어기고 말았다.

결정적인 실수는 이방 여인들을 통해 하나님 신앙이 그에게서 떠나기 시작한 데 있었다. 요셉이나 다니엘과 같이 끝까지 성공한 사람으로 솔로몬이 남아주지 못한 점이 참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영적인 승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경건생활에 있다. 날마다의 규칙적인 경건훈련이야말로 그 개인을 살리는 첩경이다. 경건하게 살자.



<솔로몬을 통해 얻는 교훈>

나라의 번영이나 개인의 성공이나 큰 축복은 반드시 허락한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이룩한 것이 아니라 내려주시고 맡기신 분이 계시다. 우리는 언제나 청지기로 자신의 위치를 밝혀야 한다. 주신 분의 뜻을 따라 선용할 때에 모든 축복은 그 가치를 드러낸다. 사람들은 자기의 능력으로 성공한 줄 알기 때문에 교만하여 실패한다. 항상 주신 분을 기억해야 하겠다.

솔로몬의 실패는 그 자신도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이는 그의 신앙과 그의 지혜를 보아 알 수 있다. 그러나 죄와 타락성은 그의 지혜까지도 빼앗아갔다. 또한 세상의 향락은 그의 신앙까지 침몰시켰다. 결국 거인이 여자와 향락으로 인해 불행한 사람으로 전락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경계심을 풀고 근신하는 마음을 버리면 누구나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깨어 있어야 한다.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엘리야 - 신앙 등진 민족에 눈물의 채찍을 들다  
엘리야가 선지자로 활동했던 시대는 북조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무섭게 타락한 시대였다. 시돈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이 아합과 결혼하여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종교를 끌어들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시대였다. 왕실에서부터 우상종교를 장려하고 우상숭배를 강요하므로 온 나라가 영적으로 패역한 때였다.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가 850명이나 있을 정도였다.

궁궐에 머무르는 우상종교의 선지자가 이렇게 많았다면 모든 예식이나 의식이나 궐내 행사에 이들의 활동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을 것이다. 정치와 내정까지도 이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분위기에 대항하고 이들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 일을 맡아 북조 이스라엘을 구해내는데 결정적인 사명을 감당한 하나님의 종이다.

하나님께 소명된 사역자들은 어느 시대나 헌신과 사역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 개인의 사명에 따르는 수고와 희생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엘리야 시대와 같은 상황은 특히 아주 불리하고 힘든 시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엘리야는 자기의 책임을 다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엘리야의 개인적인 결단이나 하나님께 대한 순종심을 우리도 꼭 배워야 하겠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하나님의 종들은 자기 사역이나 사명을 스스로 계획하고 결정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이 맡겨주시는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사역의 노정을 따를 뿐이다. 택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일을 맡기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예언자의 사역도 평생의 과정 속에 포함된 사역의 일부분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맡겨지는 사역에 얼마나 충성되고 성실한가이다. 또한 예언자로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메시지나 요청되는 헌신에 대해 자기와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하겠다. 이런 부분이 엘리야가 보여준 좋은 모범이다.

엘리야는 종교적으로 그렇게 삼엄한 분위기를 무릅쓰고 아합과 이세벨 앞에 두 차례나 나아가 대면하여 하나님의 뜻을 밝히고 그들의 죄를 지적하였다. 이는 엘리야의 개인적인 용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신 영적 담력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실된 마음과 성령이 임재하는 영감이 함께 할 때 엘리야와 같은 헌신이 우리에게도 가능하다. 우리가 깊은 기도를 드릴 때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하나님의 영감에 이끌리는 경우를 경험한다. 또 나와 함께 하고 계신 성령의 임재를 너무 분명하게 느끼지 않는가. 이와 같이 성령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하겠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내 말이 없으면 수년동안 우로가 없으리라”고 선언하였고 3년 후에 다시 아합에게 나아가 바알의 선지자들과 백성들을 산에 모으게 하고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 참신을 분별하게 하였다. 두 제물을 끌어오게 하고 그 중에 하나를 택하여 장작 위에 올려놓고 불이 붙게 하는 신이 참신이라고 백성 앞에 공포하고 그들과 영적 전쟁을 벌인 것이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먼저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을 불러 불이 내리기를 기도했으나 그들은 실패했다. 다급해진 그들은 자해행위를 통해 몸에서 피를 보이면서까지 간절히 부르짖었으나 응답이 없었다. 결국 이들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는 아주 당연한 결과였다. 그 뒤에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대신하여 열두 돌로 제단을 쌓았다.

이는 북조 이스라엘에서 진행되는 사건이었으나 엘리야의 마음에는 남북조를 포함하여 온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회개의 제단을 삼은 것이다. 그 주위에 두 세아를 용납할 만한 도랑을 파고 돌 위에 나무를 놓고 그 위에 각을 뜬 제물을 올려놓았다. 불로 응답받아야 하는 제단인데 제물과 나무 위에 12통의 물을 부어서 도랑까지 물이 가득하게 되었다(왕상18:23∼35).

이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왕과 이세벨과 백성에게 분명하게 보여주려는 엘리야의 강한 신앙의 표현이었다. 또한 엘리야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의 고백이었다. 아합왕이나 백성들은 이러한 엘리야의 담대한 신앙에 압도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엘리야의 간절한 신앙은 벌써 하나님 응답을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우리는 반드시 신앙을 가져야 한다. 다음 단계는 신앙을 소유한 사람으로 그치지 말고 신앙이 몸과 마음을 지배하도록 신앙에 이끌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날마다 모든 일에 일일이 신앙을 적용하는 생활이 중요하다. 이런 면에서 엘리야의 사건은 우리에게 좋은 시범을 보여준 실례이다. 이 현장의 엘리야를 상상해보자.

바알의 선지자들에 대해서는 분노에 찬 의분이 가득했을 것이고 남북조 이스라엘을 대변하는 또 다른 감정,마음의 눈물을 흘리며 백성들의 죄를 대신 용서해주도록 도고하는 간절함이 함께 했을 것이다. 여기서 그 시대와 모든 백성의 죄를 담당하는 대표적인 해산의 수고를 감당하는 엘리야의 헌신을 볼 수 있다. 선지자나 예언자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느 시대나 그 시대를 책임지려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엘리야를 본받아야 하겠다.

이때에 엘리야가 드린 기도에 주목해보자. 엘리야는 세 가지 조건을 분명히 밝히고 기도 드렸다. 첫째는 주께서 하나님이 되심을 보여달라는 기도였고,둘째는 내가 주의 종이 됨과 셋째는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일을 행함을 알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이 기도에 하나님이 불로 응답하셨다(왕상 18:36∼38). 엘리야의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였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일하고 계신 사실을 증명하는 기도였다. 이러한 엘리야의 기도의 태도는 갈멜산의 사건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응답받기 원하는 기도에 모두 적용되어야 한다.

욕심으로 기도하거나 정욕으로 구하는 것을 하나님은 금하셨다(약 4: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자. 자녀를 위한 기도도 하나님의 영광을 앞세우자. 부모나 부부간의 기도도 하나님의 영광을 앞세우자. 우리 기도가 훨씬 담대해지고 하나님편에 서는 기도가 된다. 뿐만 아니라 언제나 정확한 기도를 드리는 비결이 된다.

자기 중심을 뛰어넘을 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영적 체험을 경험하게 된다. 엘리야의 기도는 기도에 대한 영적 원리이다. 이 원리를 따르면 기도의 내용이 정리되고 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다.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말속에는 이런 의미가 포함돼 있기도 하다. 우리의 기도를 점검해보자.

엘리야는 육신의 죽음을 거치지 않고 승천,또 하나의 큰 교훈을 남겨주었다. 구약의 에녹과 엘리야는 육신의 죽음을 거치지 않고 변화받아 영계로 옮겨갔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 의인의 부활과 살아있는 성도 중에 준비된 성도의 휴거도 있다(살전 4:16∼17). 엘리야는 이 휴거에 대한 실례를 보여 준 사람이다.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도 휴거를 믿을 수 있게 한 하나님의 자상한 배려이다. 하나님의 넓은 섭리를 헤아려보자.

이병돈 <서울 은평성결교회 담임목사>


<엘리야를 통해 얻는 교훈>

엘리야의 담대한 신앙을 본받아야 하겠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고 사람들 앞에 공개적으로 자기 신앙을 밝혔다. 요즘 교회에 출석하는 많은 성도 중에 사람들 앞에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엘리야의 모습과 이렇게 숨어서 믿으려는 사람들을 비교해볼 때 안쓰러운 생각이 든다. 믿음을 자랑하고 신앙생활을 간증하며 살아야 하겠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한다.

오늘 내용에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엘리야가 비를 주시라고 기도할 때의 땅에 꿇어 엎드렸고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했다고 소개하고 있다(왕상 18:42). 이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를 배우자. 한번 기도를 드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최선의 정성을 기울이는 믿음의 기도를 드려보자. 이러한 기도를 왜 하나님이 외면하시겠는가. 기도에도 정성과 양적인 분량이 있다. 진지하고 진실한 기도를 드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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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여호야다…우상숭배 끊으려 ‘목숨건 혁명’ 감행  
여호야다는 아하시야왕과 그 아들 요아스 왕 때의 제사상이었다. 아하시야왕의 할아버지였던 여호사밧왕이 북조 이스라엘의 아합과 가까이 함으로써 남조 유다 왕실에 불행한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는 아합의 딸 아달랴를 여호람의 아내로 맞이해 며느리를 삼았다.

이것은 남조 유다 왕실의 씻을 수 없는 실수요 아합 가문의 우상숭배와 영적인 타락을 끌어들이는 무서운 범죄와 같았다. 결국 여호람은 불치병으로 앓다 죽었고 그 자녀들은 아라비아와의 전쟁으로 다 살해되고 아하시야만 남게 되었다.

아하시야는 왕의 자질이나 능력을 검증받을 겨를도 없이 그만 살아남았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왕실의 모든 주권이 그 어머니 아달랴에게 기울어진 때였다. 그러므로 북조 아합의 후손들과의 교분을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북조 요람왕의 병문안을 갔다가 하나님이 아합의 가문을 칠 때 아하시야까지 예후에 의해 죽고 말았다. 이렇게 왕가에 비운이 겹치자 아달랴는 집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된 것이다.

결국 자신의 자리를 굳히기 위해 왕위를 넘볼 수 있는 왕족을 진멸하는 잔인한 살상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모든 역사적인 분위기와 상황이 소용돌이 칠 때 여호야다는 이 시대를 지키고 붙들어주는,하나님편에 서있던 제사장이었다. 이렇게 위급해진 나라의 장래를 위해 갓 태어난 요아스를 숨겨 기름으로써 왕가의 혈통을 보존하는데 공헌하였다.

잔인하고 포악한 시대였지만 하나님의 강한 섭리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소리없이 든든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호야다의 소중한 헌신과 위험을 무릅쓴 충성된 사역을 살펴보자. 불의하고 사악한 사람의 배후에는 사단의 지원이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선한 섭리와 뜻을 파괴하는데 성공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사단의 사역까지도 활용하여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성취하는 방편으로 삼으신다. 부정이나 불의한 계획이 성공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공의가 언제나 승리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의 손을 들어주시고 의로운 역사를 지원하신다.

여호야다가 요아스를 통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한 사실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예언과 다윗의 혈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여호야다가 보존했다는 사실이다. 여호야다와 그 아내 여호세바는 목숨을 내놓고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수고한 사람들이었다. 요아스를 6년동안 숨겨 기른다는 것은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더욱이 아달랴가 6년동안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그의 권력과 정치적 기반이 견고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위협적인 분위기에서 여호야다가 아달랴를 제거하고 요아스를 옹립하는 혁명을 성공시킨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여호야다는 먼저 백부장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일부를 혁명군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궁궐과 성전을 지키는 군인들을 안식일에 교대하는 틈을 이용하여 혁명군으로 바꾸어 놓았다. 아달랴는 감쪽같이 속고만 것이다. 결국 혁명군을 세 부대로 나누어 일부는 궁궐을 지키게 하고 일부는 궁궐 안에 있는 호위대를 강금했으며 일부는 수르문이라는 성문을 지켜 외부 군대의 지원을 철저히 차단시켰다. 그리고 또 다른 부대는 성전을 호위하게 하였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춘 뒤에 아달랴를 혁명군의 호위를 받아 성전으로 유인하는데 성공했다. 아달랴는 자기 군대로 알고 이 일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또한 성전을 혁명군들이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달랴에게 동조할 수 있는 사람의 출입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성전 안에서 여호야다가 요아스에게 기름을 붓자 백성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하며 요아스왕 만세를 불렀다. 성전 안으로 들어오던 아달랴가 이 광경을 보고 “반역이로다 반역이로다” 외치면서 성전문 밖으로 달려나가 왕궁의 말 다니는 길을 통과하다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살해되었다(왕하 11:1∼16). 아달랴가 이렇게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렇게 예고없이 진행되는 것을 기억하자. 악인의 계획이 장구할 것 같으나 덧없이 무너지고 만다.

여호야다는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와 사역에 충성함으로써 한 나라를 바로세우고 국운을 바꾸어 놓았다. 이것이 의로운 사람의 충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다. 여호야다와 같이 주어진 환경이나 사역에 성실한 사람이 되면 하나님은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큰 뜻을 성취하신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방법이요 헌신의 지혜이다. 큰 사역이나 큰 목회를 탐하지 말고 여호야다와 같이 자기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자. 환경이나 사역이나 사명은 하나님이 정하신다.

여호야다는 성직자요 제사장에 불과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과 정치혁명을 함께 성공시킨 훌륭한 인물이었다. 여호야다는 요아스를 옹립한 이후에 바알의 단을 헐고 바알 제단의 대표적인 제사장 맛단을 처형,바알의 우상종교를 쓸어버렸다.

또한 백성들과 함께 은을 헌금하여 성전을 수리하게 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다. 요아스왕도 여호야다 제사장이 사는 날 동안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전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다.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여호야다가 제사장으로 정치적인 혁명을 이루어냈다는 사실이다.

정치는 정치인이 하고 목회는 목회자가 해야 하며 병은 의사들이 치료하고 국방은 군인이 감당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여호야다는 제사장이면서 나라를 다시 세우는 혁명을 이끌어낸 사람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숨겨놓은 또 다른 은사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으로 끌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혜는 일반적인 지혜와 그 개인의 지능과 하나님이 은사로 주시는 지혜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은사의 지혜를 통해 얻게 되는 다양한 능력을 생각해보자. 여호야다가 혁명을 실수없이 완벽하게 이루어낸 부분이 바로 이 지혜의 활용이었다. 순수한 제사장이면서 군사혁명을 가능케 한 그의 또 다른 기능의 만족한 해답이 되는 지혜의 은사를 기억하자.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지혜,처세의 지혜,일을 분별하는 지혜,사건을 처리하는 지혜,사명을 수행하는 지혜,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지혜,하나님과 사람과의 사역을 조화시키는 지혜 등 많은 지혜가 있다. 여호야다는 신분은 제사장이었으나 그가 헌신하고 봉사할 수 있는 영역은 넓게 개방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이룩한 나라의 재건은 본래의 사명 위에 중간에 허락받은 또 다른 사명이었다. 우리가 우리의 사역을 제한하지 말자. 또 하나님이 주시는 특수한 사역도 주저하지 말자. 하나님은 맡기시는 일과 함께 일을 이루는 능력도 주신다. 언제든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앙 중심으로 살자. 맡은 일과 맡겨지는 일에 충성하며 하나님의 또 다른 섭리를 기대하자.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고 우리를 통해 영광받으시기를 기뻐하신다.

◇ 여호야다를 통해 얻는 교훈

사람이 성실하고 충성된 것과 지혜로운 것은 다르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지혜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부탁한 지혜는 소중한 의미가 담겨있다. 하나님은 영적인 지혜를 제한하지도 않고 지혜의 대상을 선별하지도 않으신다. 은혜 위에 지혜를 더하고 믿음 위에 지혜를 더하자. 사역을 감당하고 사명을 수행하는데 지혜는 큰 뒷받침이 된다. 지혜를 구하여 지혜를 얻자.

사람이 자연인으로서의 삶은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으로서 나에게는 다양한 헌신의 길이 열려있다. 생업과 직장과 남녀의 구별이 없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우리를 부르시고 계신다. 여호야다를 본받자. 큰 소망을 가져야 하겠다. 나 자신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나보다 훨씬 큰 것을 깨닫는 사람이 되자. 믿음을 갖고 미래를 기대하자.

이병돈 목사(서울 은평성결교회 담임목사)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사울… 뿌리약한 신앙 교만에 ‘처참한 최후’  
사울은 베냐민지파 사람으로 기스의 아들이었다. 기스는 성경에 유력한 사람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이 말은 단순한 부자라기보다 그 지역에서 인정받고 존경받는 사람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의 말이나 경제력이나 인격과 활동이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었을 것이다.

사울은 이러한 위치에 있는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사울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좋은 배경과 환경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여유 있는 집에서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을 것이다. 그 아버지가 암나귀를 잃었을 때 사울이 사환을 데리고 나귀를 찾아나선 것을 보아도 그 가정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된다. 사울은 유족한 가정에서 고생을 모르고 많은 사람의 보호와 양육 속에 순탄한 소년 시절을 보낸 셈이다.

그의 키는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가 더했고 준수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말을 보면 사울은 외모로도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다. 이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에게 왕을 구하고 있었다. 하나님과 사무엘은 왕정을 원치 않았지만 백성의 요구대로 왕을 세우도록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셨다. 그리고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삼상 9:16)고 하셨다. 사울은 이렇게 왕이 되었다.

사울은 가문도 좋았고 성장 과정도 순탄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좋은 가문,좋은 환경을 부러워하고 동경한다. 그러나 이같은 조건이 반드시 행운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다윗은 13년 이상 큰 시련을 겪고 왕위에 올랐으나 사울은 아무런 연단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왕위에 오른 것이다. 이 두 사람을 비교할 때 우리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숨겨놓은 은혜를 짚어볼 수 있다.

모든 시련과 고난은 겪을 때는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지나고 보면 하나같이 유익하고 소중한 은혜로 우리 마음에 자리잡고 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고난으로 연단을 받은 사람에게는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만 갖고 있는 영적인 보화가 있다. 어려움 속에서 겪은 연단의 소중함이나 시련을 겪고 나서 우리에게 허락되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것이다.

사울은 왕이 되었지만 비바람을 거친 들꽃과 같이 든든해 보이지 않고 온실의 꽃처럼 유약해 보이는 부문이 우리에게 전하는 교훈이다. 자녀들을 양육할 때 이러한 내용을 참고했으면 한다. 우리나라 격언에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어느 시대나 적용되는 것 같다.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유력한 집안의 아들로 준수한 사울을 왕으로 공포하기 위하여 왕을 선임하는 종교 행사를 가졌다. 그것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가까이오게 하였더니 베냐민 지파가 뽑혔고 베냐민 지파를 그 가족대로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마드리의 가족이 뽑혔고 그 중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다”(삼상 10:20,21) 그때에 사울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으나 영감을 좇아 행구(짐짝) 사이에 숨어 있는 사울을 찾아내게 된다.

이 때에 사무엘은 백성들 앞에 왕으로 공포하고 사울과 짝할 자가 없다고 하였다.그러자 백성들은 큰 환호성과 함께 “사울왕 만세”를 부르므로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이 되었다. 사울이 왕으로 즉위할 때에는 모든 면에서 왕이 되기에 큰 결함이 없었다. 사무엘의 집에 들렀을 때 기름을 붓고 왕이 될 것을 예언하자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도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삼상 9:21)한 가족이라고 소개하는 정말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큰 몸집을 가진 사람이 행구 사이에 숨은 것을 보아도 그의 겸손은 여전했고 순박하기까지 했다. 또한 그가 왕으로 공포되자 일부 비류들이 사울이 왕이 된 것을 비난하며 멸시하고 업신여겼지만 그들을 다 용서하는 관용도 보였다. 이같은 내용을 종합해보면 사울은 너그러운 사람이고 대적을 용서하는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사울은 덕스럽고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부분으로 생각이 된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좋은 자질과 훌륭한 성향과 착한 마음까지도 그 자체로는 그 개인을 유익하게 돕는 데 큰 힘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좋은 자질이라도 신앙을 통해 하나님의 영감에 붙들리지 아니하면 큰 도움이 못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그 개인의 감정이나 상황이나 사건에 따라 좌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인간의 자질이 신앙을 통해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면 감정도 상황도 사건과도 무관하게 선용될 수 있다. 아무리 훌륭한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우리를 유익하게 돕는데 일관성을 갖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다양하게 우리를 돕고 있는가를 기억하자. 결국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자질까지도 은혜에 붙들릴 때 온전해진다.

이와 같이 사울은 왕이 되기까지 좋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정치적인 보복도 없었다. 저가 왕위에 오르자 암몬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되자 어딘지 모르게 쫓기는 사람처럼 안정감을 가지고 왕으로서의 왕도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제사장 외에는 할 수 없는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를 대신한 것은 너무나 큰 잘못이었다. 그뿐 아니라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는 모든 백성과 짐승을 진멸하도록 지시하였는데 소와 양의 일부를 하나님의 제물로 드리겠다는 조건으로 끌어왔던 것 역시 하나님 앞에 큰 범죄였다. 이때에 사무엘은 두 차례나 하나님의 뜻을 전하여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하고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예언을 남긴다.

사울은 블레셋도 이겼고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소바와 아말렉을 쳐서 승리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출발도 좋았는데 사울은 크게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 앞에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한마디로 사울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므로 왕위가 뿌리째 흔들리게 된다. 인격 속에 뿌리내리지 못한 신앙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볼 수 있다. 신앙을 갖기는 쉬워도 신앙으로 길들여지는 사람이 되는데는 거쳐야 할 영적인 과정이 있다. 사울에게 있어서 큰 아쉬움이 있다면 그가 이러한 신앙의 인물이 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실수를 가진 뒤에는 사무엘이 사울을 외면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큰 종을 잃게 된 사울의 불행한 모습을 생각해보자.

정말 존경스럽고 의지할 수 있는 하나님의 종이 함께 한다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이다.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며 신앙으로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자. 결국 사울은 세 아들과 함께 길보아산에서 불행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신앙생활은 시작도 좋아야 하지만 끝이 더 좋아야 한다. 끝까지 성공적인 신앙 생활을 가져야 하겠다.



◇사울을 통해 얻는 교훈

믿는 성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좋은 자질을 타고난다고 결코 자만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좋은 자질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에 이끌리지 않으면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한다. 자질보다 중요한 것이 신앙이고 신앙은 성령의 영감이나 하나님의 은혜의 보호를 받을 때 진가를 발휘한다. 겸손한 사람으로 날마다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해가자.

사울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결함은 사람을 두려워하는데 있었다. 체면을 생각하거나 자기 위신 때문에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명령을 외면하는 일은 영적으로 무덤을 파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또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경솔한 사람이 되고 자만한 사람이 되면 참으로 불행하다.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되자.

이병돈<서울 은평성결교회 담임목사>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요압… 공로도 퇴색시킨 ‘자기중심의 순종’  
요압은 수리야의 세 아들 중 둘째였다.아비새 요압 아사헬 3형제는 장군의 기질을 가진 유능한 장사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요압은 더 뛰어난 사람으로 군대장관이 되었다. 그러므로 다윗왕에 의해 선택받아 다윗 왕과 함께 평생을 지낼 만큼 측근에서 일한 사람이다.

요압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세운 나라를 다윗이 세운 나라에 통합하여 다윗왕국을 건설하는데 크게 기여한 사람이었다. 그 후에도 에돔 암몬 수리아 라마 등을 무너뜨리고 정복하는 데에도 크게 공헌했다. 그 외에도 다윗을 도와 그림자처럼 참모로 일한 다윗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요압은 능력을 갖춘 행운아였다.

그러나 요압이 다윗에게 항복하고 귀순하여 돌아오는 아브넬을 죽인 것은 큰 잘못이었다. 아브넬은 사울 왕의 충신이었고 사울 왕이 전사하자 그의 아들 이스보셋을 마하나임에서 왕으로 세운 사람이다. 그러나 아브넬은 이스보셋의 국운이 다윗에게 기울어지고 이스보셋과의 불화가 생기자 다윗 왕에게로 돌아왔다.

그때에 요압이 아브넬을 살해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요압이 아브넬을 정적으로 여기고 또한 위협적인 인물로 생각했기 때문에 살해했다는 해석이 많다. 요압이 그런 이유에서 아브넬을 살해했다고 하면 큰 인물을 역사에서 제거시킨 큰 실수를 범한 것이다. 사람의 욕심이 역사의 흐름을 막아서도 안되고 역사의 방향을 그르쳐서도 안 된다.

우리는 선한 역사를 이루어가는 협력자가 되어야 하고 나라와 민족을 돕고 보호하는 입장에 서야 한다. 개인의 욕심을 위해 역사에 상처를 남겨도 안되고 역사를 부정하게 만들어도 안된다.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되 필요하고 소중한 인물이라면 더욱 보호해야 한다. 요즘 국회의원들의 행태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불쾌하고 섭섭하기까지 하다.

공작정치는 예사고 거짓말이라도 강하게 밀어붙이고 덮어씌우면 승리한다는,질 나쁜 방법이 국회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한심하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이 나라의 청소년들에게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고 있는 일인가.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싹트겠는가. 이 책임을 생각해봤는지 정말 양심도 없는 사람들이다. 요압과 같이 자기를 위해 남을 죽이는 일은 하지 말자.

이 사건을 통해 요압에게서 더 큰 실수를 찾는다면 다윗 왕이 용서한 아브넬을 요압이 죽였다는 사실이다. 신하가 왕에게 바치는 충성은 자기 중심의 충성이 아니라 왕이 바라는 충성에 최선을 다하는 순종이어야 한다. 요압이 생각하는 충성의 표현과 다윗이 바라는 충성의 기대가 분명 다르다.

요압은 자기 생각대로 다윗을 섬기려는 자기 주장을 앞세우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헌신이나 봉사도 이와 같다. 내 생각대로,내 판단대로 하나님을 섬겨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요구하고 소망하는 그 뜻에 자신을 잘 적응시켜야 한다. 열심히 일을 많이 한다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 될 수 없다. 어떤 목사의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목사의 생각으로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주의 일을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줄 생각했다.

그러나 “네가 좋아 네 일을 한 것이지 네가 내 일을 한 것이냐?”고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 순간 그가 깨달은 메시지는 일을 많이 하는 것보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더 원하신다는 사실이었다고 한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친교가 하나님의 일보다 그 목사에게는 더 필요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정확한 순종은 많은 사역보다 더 유익한 것을 깨닫게 된다.

다윗이 요압에게 인구조사를 명하자 요압은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보다 백배나 더하기를 원하나이다…어찌하여 이스라엘로 죄가 있게 하시나이까”(대상 21:3)라고 하였다. 이 말은 요압이 다윗 왕에게 목숨을 내놓고 권고한 참으로 위대한 사역이었다. 요압이 많은 전쟁에서 큰 전과를 거두어서 나라를 크게 번영시키는데 공헌한 만큼이나 버금가는 귀한 일이었다.

이 일로 인해 하나님은 다윗에게 선지자 갓을 보내어 3년 기근과 3개월 적에게 쫓기는 일과 3일 온역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자 다윗이 3일 온역을 택하여 7만명의 백성을 잃게 되었다. 이 큰 실수에 대한 뜨거운 회개를 통해 다윗은 자기 일생을 통해 영적으로 크게 경성하는 기회를 삼게 되었다. 이때에 하나님의 위엄 다음으로 다윗의 머릿속에 기억되는 사람으로 두고두고 다윗은 요압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러한 인연이 요압과 다윗 사이를 평생 조력자로 묶는 큰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의 일생동안 사명은 하나일지 모르지만 사역과 봉사의 방법은 다양하게 마련이다. 그 중에 요압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이나 소중하게 아끼는 사람에 대해 꼭 전해야 할 말을 전달하는 것만큼 소중한 일도 없다. 상대방이 윗사람이요,내가 크게 섬기는 사람이라도 필요한 직언은 반드시 해야 한다.

이것이 사랑의 표현이고 그를 위한 최선의 예우일 수도 있다. 더욱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받은 하나님의 음성이라면 충성되고 정직하게 충언해야 한다. 높은 지위에 있을수록 주변에서 이렇게 영감을 통해 돕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 그러나 오히려 지도자의 눈과 귀를 막고 자기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양심을 파는 사람들이 대를 잇는 것 같다.

요압이 압살롬을 환궁시키기 위해 드고아 여인의 두 아들의 비유를 든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다윗은 이 일로 인해 압살롬을 데려왔으나 압살롬의 모반으로 다윗 왕은 씻을 수 없는 정치적인 시련을 겪게 되었다. 압살롬의 난으로 전쟁중일 때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머리가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요압이 창으로 그를 찔러 죽였다.

이때에 다윗은 또 한번 아들을 잃는 마음의 큰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결국 요압의 계획대로 압살롬이 돌아왔는데 요압의 손에 압살롬이 죽게 된 결과가 되었다. 요압이 압살롬의 환궁을 계획한 것은 다윗 왕과 왕실을 위한 화해를 이루는 값진 일이었다.

그 일이 성사된 것도 요압의 분명한 공로였다. 물론 요압의 정치적 이익 때문이었은지는 알 수 없으나 다윗 왕실을 위해서 공헌한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압살롬의 생각과 그의 의도는 전혀 달랐던 것을 알아야 하겠다. 여기서 보여준 것처럼 우리의 생각을 앞세우지 말고 하나님 편에서 사람과의 친교도 분별해야 한다.

사람과 사귀는 일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생각없이 가까이 했고 영적으로 거르지 않은 채 사람을 사귀었다가 큰 실수와 피해를 입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사람을 가까이 할 때에도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한다. 내게 접근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영적인 분별력을 가져야 하겠다. 요압은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요압을 통해 얻는 교훈>

요압은 다윗에게 있어서 누가 뭐라고 해도 일등공신임에 틀림이 없다. 또한 그는 좋은 머리를 가졌고 통솔력도 좋았으며 종교적인 영감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가지 그에게 고쳐야 할 점이 있었다면 자아가 너무 강한 것이 흠이었다. 그러므로 때로는 요압이 다윗의 생각을 앞지르는 경우가 있어 문제가 되었다. 항상 하나님의 영감이나 말씀을 앞세워 따라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요압이 다윗왕에게 인구조사에 대한 잘못을 권고한 것은 참으로 존경스럽다. 사람은 친분이 두텁고 신임도가 높을수록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따라야 한다. 나를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영혼을 위해 그를 사랑하는 하나님 중심의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꼭 해줘야 할 말이나 권고를 하는 것도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병돈 <서울 은평성결교회 담임목사>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가인…시기의 화신이 된 형…살인자 되어 방랑의 길  
에덴 동산에서 추방된 아담 부부는 두 아들을 낳는다. 형 가인과 동생 아벨. 가인은 농사를 짓고 아벨은 양을 친다. 아담의 가정은 화목해보인다. 그러나 기억하라. 인류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의 열매를 따 먹은 이래 사람들의 마음속엔 죄악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날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농부인 가인은 곡식으로,목부인 아벨은 새끼 양으로 제물을 삼는다. 아담이 보기에 둘의 제사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둘의 제사는 확연히 달랐다. 가인의 제물에서는 불신앙의 역겨운 냄새가 풍겨났고 아벨의 제물에서는 믿음의 아름다운 향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시고 아벨의 제사를 기꺼이 받으셨다.

가인은 회개의 길을 거부하고 죄악의 길을 고집했다. 가인은 자신의 불신앙을 뉘우치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금 믿음의 제물을 정성껏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가인은 회개의 길이 아니라 죄악의 길을 선택한다. 그러고는 손에 돌을 집어 들고 분노와 시기로 그 돌을 내리쳐 동생 아벨을 죽인다.

가인에 의해 아벨의 피가 땅에 뿌려지던 때 땅은 아벨의 의로운 피 받기를 거부한다. 그래서 아벨의 피는 땅속으로 스며들지 않고 하늘을 향해 부르짖는다. 하나님은 이미 가인의 피 묻은 손을 보고 계셨고 이제 땅에서 들려오는 아벨의 피의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가인에게 아벨에 대해 물으신다. 그러나 가인은 회개를 거부하고 끝내 죄를 고집한다.

보라. 천형의 저주와 함께 땅을 떠도는 가인의 저주를…. 죄악의 삶을 고집했던 가인은 결국 두 손에 죄악의 피를 묻힌 채 하나님을 피해,그리고 사람을 피해 이리저리 땅을 떠도는 자가 된다. 자신이 동생을 죽인 것처럼 누군가 자신을 죽일 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땅의 이곳저곳을 숨어다니는 도망자가 되고만 것이다. 가인이 가는 길엔 안정과 평안이란 없었다.

그곳엔 오직 음습한 불안과 두려움뿐. 그 두려움을 피해 가인은 오늘도 땅위를 헤매고 있다. 두려운 삶을 울며 방황하고 있다. 아무리 숨고 숨어도,도망치고 또 도망쳐도 영원히 숨을 곳은 없는 하나님의 눈을 피해,그리고 땅의 저주를 피해 오늘도 불안한 삶의 지면을 떠돌고 있다.


◇ 땅에서 유리하는 자

김영진

아담의 두 아들

형 가인과 동생 아벨,

가인은 농사를 짓는 농부,

아벨은 양을 치는 목부라



둘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네

가인은 곡식으로 불신앙과 불순종의 연기를 피워 올리고,

아벨은 새끼 양으로 믿음과 순종의 향을 피워 올리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물리치셨네



안색이 변한 가인,

돌을 들어 동생 아벨을 쳐죽였네

들판에 흘려진 아벨의 의로운 피

소리 높여 하나님께 부르짖네

아벨의 피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

가인에게 물으셨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이 대답했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이 말에

땅이 분노하고,사람이 분노하고

하나님도 분노했네



그리하여 가인은

손에 동생의 피를 묻힌 채,

하나님을 피해

사람을 피해,땅의 저주를 피해

오늘도 지면을 이리저리 떠도네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이 시대 가인의 후예들,

그들도 하나님을 피해

땅 위를 떠도네

삶을 방황하네

◇ 김영진 시인 약력

△시인 수필가 △감리교신학대학원 졸 △한국잡지협회 회장 △월간 「새벗」 발행인 △㈜성서원 회장 △저서 '초원의 꿈을 그대들에게''나들이''책한테 길을 물어' 등

김영진(성서원 대표)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롯… 인생의 기로마다 욕망의 선택 그 최후는 불의 심판  
아비를 여읜 후 롯은 삼촌 아브라함을 따라 가나안 땅으로 함께 들어온다. 롯도 한 가정의 가장인지라 자신의 장막과 가축,하인들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롯은 대족장인 삼촌 아브라함의 보호 아래에서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아브라함의 가축들이 날로 많아지자 롯의 가축들도 늘어난다. 그에 반비례해서 가축들을 먹이기 위한 목초지는 점점 부족하게 된다. 그래서 두 집안의 목자들간에 다툼이 일어난다. 그러나 모든 권리는 족장 아브라함에게 있었다. 고대 족장사회에서 족장의 힘과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롯을 향한 아브라함의 위대한 말을 들어 보라!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네가 좌 하면 나는 우 하고 네가 우 하면 나는 좌 하리라”(창세기 13:9).

롯은 욕망의 눈으로 기름진 요단평야를 택했다. 이 위대한 양보의 아름다움 앞에 차라리 롯은 울어야 했다. 아,그러나 욕망의 눈을 가진 롯은 아브라함의 양보를 이용해 기름진 요단들판을 택한다. 거기서부터 롯의 비극은 싹튼다. 요단들판 근처에는 죄악의 도성 소돔이 있었고 소돔의 세속 문명은 롯을 유혹하여 마침내 롯을 그곳으로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어느덧 롯은 죄 가운데 살아간다.

어느날 죄악의 도시 소돔에 하나님의 불심판이 임한다. 하지만 롯은 아브라함의 끈질긴 중보 기도 덕분에 천사의 도움을 받아 소돔이 멸망하기 직전에 그곳을 겨우 빠져나온다. 모든 것을 얻으려고 들어간 그곳에서 모든 것을 잃고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아내와 두 딸과 불타는 죽음의 도시를 허우적거리며 부끄럽게 벗어난다.

그나마 세속적인 삶에 미련을 떨치지 못한 롯의 처는 천사의 명령을 어기고 소돔성을 뒤돌아보다가 그만 소금기둥이 된다. 이제 욕망의 평야,세속의 도시에서 쫓겨난 롯은 근처 산속의 작은 동굴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모든 재산을 잃고 아내를 잃은 롯. 습기 찬 동굴에 웅크리고 앉아 오늘도 욕망의 들판을 더 차지하려고 싸우는 군상들을 바라본다. 롯은 지난날 자신의 슬픈 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씁쓸한 냉소를 보낸다.


◇시

욕망의 평야를 택하다―김영진


누군들 좋은 땅을 갖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여기

삼촌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향한 이 말은

차라리 아름다웠다.

"네가 좌 하면 나는 우 하고 네가 우 하면 나는 좌 하리라"



아, 그러나

롯의 선택은 슬픔이었다

욕망의 눈을 가진 그는 인륜의 질서를 깨버리고

물이 넉넉한 요단평야를 차지해버렸다

하지만 정녕 그가 차지한 것은

소돔성의 죄악이었다

마침내 하나님의 불심판이 죄악의 도성 소돔에 임하는 날

롯은

아브라함의 덕택으로

천사의 도움으로

죽음만은 겨우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재산을 잃고

꿈을 잃은 채

부끄러운 몸으로 도망쳐 나와야 했다



그래도 세상 미련을 버리지 못한 롯의 처는

뒤를 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되어

오늘도 사막의 모래 바람을 홀로 맞으며

오고 오는 세대의 교훈이 되었다

좋은 것을 가지려는 자

모든 것을 잃고

욕망의 평야를 차지하려는 자

사막의 모래 바람을 맞을 뿐이라고



욕망의 평야에서 쫓겨나 작은 동굴로 숨어든 롯,

자신처럼 세속의 평야를 차지하려는 뭇 인간들을 바라보며

오늘도 웅크리고 앉아

슬픈 눈길을 보낸다

씁쓸한 조소를 보낸다

김영진 <성서원 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에서…동생에 팔아버린 장자권…남은 건 방황뿐  
세속의 사냥감을 좇아서
(어리석은 육체의 사람-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가문/하나님의 약속이 깃든 축복받은 집안/그 빛나는 집안의 장자로 태어난/에서.

그러나/ 장자의 명분일랑 일찌감치 잊어버리고/어제처럼 오늘도 사냥감을 쫓아/이리저리 가나안의 들판을 헤맨다/그의 기쁨은 화살통/그의 자랑은 사냥한 짐승들.

들판을 헤매다 허기진/에서/팥죽 한 그릇에/장자의 명분을 팔아넘긴다/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티켓을/휴지처럼 가나안 들판에 구겨 던진다.

야곱이 장자의 축복기도를 받는 그 순간에도/들판을 헤매던/에서/마침내 잃어버린 장자권에/목놓아 슬픈 울음을 터뜨리다.

머리를 쥐어뜯고/울며/몸부림치며/동생의 간교함에 몸을 떨었지만/그에게 주어진 것은/이슬조차 사라진 메마른 산악/약속의 땅 가나안을 슬피울며 떠나가네.

오늘,에서의 후예들/그들도 에서처럼/욕망의 화살통 둘러매고/사냥감을 찾아 세속의 들판을 이리저리 헤맨다/어리석음의 들판을/오늘도 헤매이고 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축복 받은 가문, 하나님의 약속이 깃든 믿음의 집안에 경사가 생긴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집안에 쌍둥이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먼저 세상에 나온 형은 에서, 뒤이어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온 동생은 야곱.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 한 집안의 장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정녕 축복된 일이었다.장자는 한 집안의 물질적,정신적 유산을 물려받고 그것을 이어갈 책임과 특권을 가진다. 하나님의 약속과 은총이 빛나는 언약의 가문에서 에서는 그런 소중한 장자권을 가지고 태어난다.

가나안 땅의 들판을 이리저리 헤매다가

하지만 언약 가문의 큰아들 에서는 장자의 명분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털 많은 들 사람인 에서의 관심은 온통 화살통과 사냥감에 있었다.“오늘은 좀 더 큰 놈을 사냥해야 할텐데…”하면서,오늘도 어제처럼 화살통을 둘러메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그 날은 저녁 늦게까지 사냥감을 쫓다가 배가 무척 고팠다.그때 동생 야곱을 만나고, 그에게서 팥죽 한 그릇을 얻어먹는 대가로 장자의 명분을 팔아 버린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장자권 따위는 그만큼 에서의 관심 밖이었다. 이렇게 에서는 언약 가문의 축복 티켓을 휴지 버리듯 가나안 땅의 들판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친다.

장자권을 잃고,슬피 울며 가나안 땅을 떠나가다

세월은 흐르고, 언젠가 에서가 아비 이삭으로부터 장자의 축복 기도를 받고자 했을 때, 이미 그것은 동생 야곱에게 빼앗긴 뒤였다.“내 아비여 내 아비여, 내게도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창세기 27:38)” 그야말로 방성대곡.슬피 울며 몸부림쳤지만, 에서가 받은 축복이라곤 언약의 땅 가나안에서 제외된 곳.기름진 땅과는 거리가 멀고 이슬조차 사라진 광야의 메마른 산악 지대뿐이었다.성경은 이러한 에서를 가리켜 ‘망령된 자’라고 일컫는다(히브리서 12:16).

오늘도 먹을 것을 바라고 입을 것을 바라며, 오직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욕망의 사냥감을 쫓아 세속의 들판을 이리저리 헤매는 에서의 후예들이 얼마나 많은가.그러나 세속의 들판에서 그들이 얻을 것은 후회와 눈물뿐, 잃은 것은 복음과 천국인 것이다.

김영진(시인·성서원 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갈렙… 두려움 이긴 ‘강건한 믿음’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 진취적인 믿음의 사람 - 갈렙 )

진취적인 모험 없이/ 어찌 하나님의 약속을 차지할까/ 올라가서 싸우지 않고/ 어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차지할까

하나님의 이적과 은혜로/ 가나안 땅의 남쪽 변방 가데스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들/ 열두 정탐꾼을 보내어

약속의 땅을 탐지한다/ 과연 그 땅은 기름진 땅이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이었다

그러나/ 그 곳은 거인들이 사는 땅/ 네피림의 후손,아낙의 자손들이/ 눈 부릅뜨고 지키고 있는 땅

열명의 정탐꾼들 떨며 말한다/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 메뚜기와 같도다”/ 그러나 두명의 정탐꾼은 믿음으로 말한다/ “두려워 말라,그들은 우리 밥이라”/ 가나안 정복의 주인공이었던/ 여호수아와 갈렙

출애굽 일 세대로 홍해를 건너고/ 여호수아와 더불어 요단강을 건넌 유일한 인물/ 진취적인 믿음의 사람/ 갈렙

불신앙의 세대를 살아가는 나약한 무리여/ 오늘도 가데스의 광야를 쩌렁쩌렁 울리는, /사단의 왕국을 뒤흔드는/ 갈렙의 저 소리가 들리는가/ “그 땅을 취하자,능히 이기리라”

[갈렙 - 하나님의 약속은 나의 것,가나안 땅은 나의 밥]

가나안 땅을 두루 탐지하다

시나이반도에서 북쪽으로 곧장 올라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침내 출애굽 제2년 5개월만에 약속의 땅 가나안의 남방 경계선에 이른다. 그리고 그 곳의 가데스라는 오아시스 지역에 진을 친다. 이 곳에서 모세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 정탐꾼을 파견한다. 정탐꾼은 이스라엘 12지파에서 각 1명씩,모두 12명이 선발된다. 이들은 40일동안 가나안 땅 곳곳을 정탐한다. 그 곳 주민들이 강한지 약한지,얼마나 많은지 적은지,땅은 좋은지 나쁜지,성읍의 위치는 어디고,그것은 산성인지 진영인지….

스스로 정복자 된 자,스스로 메뚜기 된 자

가나안 땅의 정탐 활동을 무사히 마친 열두 정탐꾼은 이스라엘 진영으로 귀환하여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보고한다. 열두 정탐꾼의 한결같은 결론은,과연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것(민수기 13:27)!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고 가나안 정복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정탐꾼들의 의견은 둘로 갈린다. 하나님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그들은 우리 밥이라,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머지 10명의 정탐꾼은 겁먹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 백성은 장대한 자들이라,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와 같다”라고.

광야에서 죽어간 자,가나안 땅을 취한 자

두려움은 전염성이 강한 법.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10명의 정탐꾼의 말에 선동되어 가나안 정복 전쟁을 포기하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부르짖는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 땅에도 못 들어가고 애굽 땅에도 돌아가지 못한 채 광야에서 40년동안 방랑하다가 쓸쓸히 죽어간 슬픈 무리가 되고 만다. 그러나 올라가서 가나안 땅을 취하자고 주장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믿음대로 후일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차지한다.

진취적인 믿음의 인물 갈렙은 출애굽 제1세대로서 홍해를 건넌 인물 중 여호수아와 더불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차지한 유일한 인물이 된다. 갈렙처럼 신앙의 승리자가 되고 싶은가? 사단의 왕국을 향하여 힘차게 외치는 갈렙의 저 목소리를 항상 기억하라!“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능히 이기리라”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밧세바… 장군의 아내로 다윗家 혈통을 잇다  
우리야의 처여,솔로몬의 어미여
(범죄 중에도 은총 입은 여인- 밧세바)

한 여인이 뒤뜰에서 옷을 벗는다/왕궁 옆,그 아래에서 목욕을 한다/비너스의 화신인가/목욕하는 여인,밧세바의 아름다운 자태여

한 남자가 왕궁 지붕 위를 거닌다/저 아래에서 목욕하는 알몸의 여인을 본다/영혼의 어지럼증으로 쓰러졌는가/이스라엘의 왕,다윗의 정욕의 눈길이여

사내의 품을 바라는 여인의 외로움이었나/영웅 다윗을 향한 여인의 흠모였나/아니면 절대 권력을 추구한 여인의 야심이었나

다윗의 부름에/밧세바는 미소짓고 왕궁으로 나아간다/그리하여 둘은 사랑의 불길에 온몸을 던진다/아,그러나/밧세바는 우리야의 처,다윗은 우리야의 주군/그렇게 불륜과 배신의 어둔 밤은 깊어만 가고…

밧세바여,알고 있는가/죄의 값은 죽음이란 것을/보라/전쟁터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남편 우리야의 피를/세상에 태어난 지 칠일만에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간/불륜의 어린 자식을

밧세바여,감사하고 있는가/죄보다 큰 하나님의 긍휼을/보라/그대의 아들 솔로몬에게 다윗의 왕위를 계승해 준 하나님의 은총을/영광스런 메시아의 족보에 올려져 있는 그대의 이름을

오늘날/누가 밧세바를 향하여 저주의 돌을 던지랴/다만 죄의 몸을 통해서라도 다윗 가문의 혈통을 잇게 하신/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을 찬양할 뿐!

밧세바-죄 많은 여인,은총받은 여인

우리야의 처 밧세바. 엘리암(암미엘)의 딸인 미모의 여인 밧세바는 다윗의 장수인 우리야와 결혼하여 그의 처가 된다. 어느날 해질녘 우리야의 처 밧세바는 집 뒤뜰에서 목욕을 한다. 그곳은 저 위로 왕궁이 보이는 장소. 당시 남편 우리야는 이스라엘의 장수로서 암몬과의 전투에 출전 중이었다. 해질녘 황혼의 아름다움 속에서 펼쳐지고 있는 밧세바의 목욕 장면은 육감적인 황홀한 자태를 연출했을 게 분명하다.

다윗의 아내가 된 왕후 밧세바

그때 다윗은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의 지붕 위를 한가롭게 거닐고 있었다. 당시의 나라 형편이 전쟁 중임을 생각한다면 다윗은 그때 왕궁의 지붕 위가 아니라 전장의 막사에서 지휘봉을 잡고 있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다윗이 침상에서 일어나 한가롭게 왕궁 지붕을 노닐 때부터 이미 정욕의 불씨는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한 다윗의 눈에 비쳐진 저 아래 목욕하는 아리따운 알몸의 여인. 다윗은 당장 그 여인이 누군인지 알아보게 했고 그녀가 자신의 신하 장수인 우리야의 처 밧세바인 줄 알면서도 정욕에 못이겨 그녀를 왕궁의 침실로 불러들인다.

그렇다면 우리야의 처 밧세바는 왜 다윗의 부름에 거절하지 않았는가! 여인의 외로움이었을까? 영웅을 향한 흠모였을까? 아니면 권세를 향한 야심 때문이었나? 우리는 그 이유를 알 길이 없다. 다만 그것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무서운 불륜의 죄라는 사실밖에는….

솔로몬의 어미가 되어 메시아 족보에 오른 밧세바

밧세바의 불륜은 남편 우리야를 억울하게 죽게 만들고 불륜의 씨앗인 어린 자식까지 숨을 거두게 만든다. 그렇다면 불륜의 당사자인 밧세바는 어찌 되었을까? 놀랍게도 그녀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다. 그녀의 죄보다 훨씬 더 큰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 그녀의 아들 솔로몬은 다윗의 왕위를 계승한다. 그리하여 훗날 메시아 예수의 족보에 솔로몬의 어미로서 그녀의 이름이 오른다. 하지만 이 사실에 주목하자. 하나님은 그녀가 다윗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우리야의 아내’로서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마태복음 1:6).

김영진<시인·성서원 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욥… 가진것 모두 잃고도 믿음지킨 의인  
알몸으로 나왔은 즉, 알몸으로 돌아갈지라
( 알몸 신앙의 소유자 - 욥 )

도대체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시험이고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사랑인가
너무나 정직하고 경건했기에
너무나 순전하고 악에서 떠난 자였기에
사단의 시기의 대상이 된 사람
동방의 의인
우스 땅의 부호,욥
하나님도 욥을 믿었기에
사단의 가혹한 시험 앞에 욥을 내버려두었다

그리하여
모든 재산을 잃고
모든 자녀를 잃고
아내마저 욕하며 떠나가고
친구들조차 의심하며 비난의 말을 쏟아놓네
영혼과 육체가 나날이 고통 속에 시들어갈 때
욥은 잿더미 위에서 슬피 울며 하나님을 바랐네

“어느 때까지니이까”

이렇듯 영혼의 아픔 속에
욥의 고통은 점차 깨달음이 되어 가고
육체의 무너짐 속에
영혼이 자유를 얻어 훨훨 춤추고 있네
마침내
폭풍 가운데서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을 듣네
이제는 정금같이 단련된 신앙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네
모든 것을 잃은 후에
모든 것을 배로 얻었으니,
욥의 고난은 하나님의 축복이라
하나님의 시험은 정녕 하나님의 사랑이라

[욥-육체의 고통 속에서 영혼의 깨달음을]

동방에 경건한 의인이 있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시대,곧 이스라엘의 족장시대에 동방의 우스 땅에 경건한 의인 한 명이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욥.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욥을 사단에게 자랑할 정도였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기 1:8) 욥의 이야기 속에서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욥에게 닥친 극한 고통과 시련은 그의 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결정적인 증거이기 때문이다.

사단은 욥을 시기하고,하나님은 욥을 믿으셨다.

의인 욥은 부자였고 화목한 가정을 유지했다. 사단은 이 점을 노리고 욥의 경건함을 시기하여 하나님께 고소한다. “욥의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면 정녕 주를 욕하리이다” 하나님은 사단의 간교한 의도를 알았지만 욥을 믿었기 때문에 사단으로 하여금 욥의 소유물을 치도록 허락한다. 다만 욥의 몸에는 손대지 말라는 제한과 함께. 그 결과 욥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는다. 재물,가축,하인,그리고 10명의 자녀들까지…. 하지만 욥의 저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신앙 고백을 들어 보라!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 즉 또한 알몸으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이다”(욥 1:21)

육체의 고통 중에도 욥의 영혼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깨닫는다

사단은 실패했다. 그러나 사단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다시 욥을 고소한다.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면 정녕 주를 욕하리이다” 하나님은 다시 허락하고 욥은 온몸에 악창이 나서 죽음보다 더한 육체의 극한 고통을 겪는다. “주여,어찌하여…어느 때까지니이까” 영문 모를 고통 앞에 욥은 잿더미 위에 앉아 기왓장으로 온몸을 긁으며 삶을 한탄하고 생을 통곡한다.

욥의 친구들은 인과응보의 논리를 펴면서 욥의 회개를 촉구한다. 하지만 욥은 온몸으로 울면서 오직 하나님만 바란다. 마침내 폭풍 가운데서 들려진 하나님의 음성 앞에 욥의 영혼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깨닫고 겸허하게 회개의 고백을 드린다. 미약한 피조물이 감히 창조주 하나님께 이유를 물은 죄에 대해서…. 이로써 욥은 정녕 의인이 되고 경건한 자가 된다.

김영진 <시인·성서원 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나봇…“땅은 주님주신 기업” 목숨처럼 지킨다  
이스라엘 북부에 있는 이스라엘 땅은 서쪽으로 지중해 연안을 낀 에스드렐론 평원의 비옥한 골짜기 지역이다. 그 곳에 포도원을 가진 성실하고 의로운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나봇. 그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가문의 유산 포도원을 아끼면서 성실하게 운영하고 있었다. 올해도 작년처럼 풍성한 소출을 기대하면서 열심히 땀 흘리고 있었다.

나봇의 포도원 인근에 왕의 별궁이 있었다. 그 왕의 이름은 아합. 아합 왕은 별궁 근처에 있는 그 포도원을 사서 나물 텃밭을 만들고 소일거리로 삼고 싶었다. 왕은 나봇에게 말한다. “더 좋은 포도원을 줄 수도 있고 아니면 값을 쳐 줄 테니 네 포도원을 나에게 팔라” 왕은 당연히 나봇이 자신의 제의에 응해줄 줄 알았다. 그런데 나봇의 답변은 의외였다.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열왕기상 21:3).

왕은 근심한다. 그 모습을 왕의 아내인 이세벨이 보고 비웃었다. “왕이 그까짓 일로 고민하다니”하면서. 이세벨은 당장 껄렁패들을 고용하여 나봇에게 신성 모독의 누명을 씌운 후에 돌로 쳐죽인다. 그리고 포도원을 빼앗아 아합 왕에게 준다. 물론 아합도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하고 포도원을 차지한다. “어리석은 놈,제 무덤을 스스로 판 게지” 하면서….

정말 그럴까? 나봇은 ‘그까짓’ 땅 몇 평 때문에 목숨을 잃은 것일까? 인본주의적인 헬레니즘 사상을 가진 자라면 나봇을 가리켜 미련한 자라고 평가할 것이다. “그것 팔고 더 좋은 것 사면 될 텐데”라고 말이다. 그러나 신본주의적인 헤브라이즘 사상에 기초하면 나봇은 의로운 자이다. 그 포도원이 얼마짜리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나봇에게 있어 그 포도원은 절대로 ‘그까짓’ 땅이 아니다. 그 땅 속에 담긴 의미는 목숨보다 가치 있었다. 그 땅은 하나님께 물려받은 기업으로서 열조의 땀이 배인 땅이며 이제 자신이 잘 간직하다가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언약의 땅’이었다. 그래서 모세 율법은 기업의 땅을 팔지 말라고 명했다. 나봇은 불의한 권세에 맞서 그 땅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은 정녕 의로운 사람이다. 율법의 순교자이다.

◇ 열조의 유업을 팔지 않다

열조의 유업을 사수한 의로운 신앙인 - 나봇

한 포도원이 있었네/그 주인은 이스라엘 사람 나봇

그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포도원을 사랑했네/하나님께 받은 열조의 유업을 땀 흘려 가꾸었네

그러나/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하네/권세로 압박하고/돈으로 유혹하네/"그 포도원을 내게 팔라"

하지만 나봇의 포도원은/자신의 것이 아니라 열조의 것/아니 열조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들어보라 하나님의 저 율법의 소리를/"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라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포도원을 파는 일은/나를 팔고/조상을 팔고/하나님을 파는 일

나봇은 왕의 제의를 거절하네/"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팔기를 하나님께서 금하실지로다"/왕을 거절한 대가로 율법을 지킨 대가로/나봇은 목숨을 잃고 포도원을 빼앗기고 말았네

그러나 나봇은 포도원을 지켰네/나봇이 빼앗긴 것은 세상의 땅 몇 평뿐/나봇이 지킨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천국 기업

지금 그대여,/그대의 포도원은 어디에 있는가/목숨 걸고 지켜야 할 그대의 천국 기업은 어디에 있는가/권력의 압력을 받고 돈의 유혹을 받더라도/절대로 팔지 마시오/나봇처럼

김영진(시인·성서원 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느헤미야…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  
아,슬픈 도성이여/하나님께 심판 받은 슬픈 예루살렘 도성이여/너 그렇게 파괴되고 불타서/이젠 잡초만 무성한 폐허가 되고 말았구나/그러기를 어언 백 오십 년/과연 누가 있어 너를/이전처럼 다시 우뚝 세운단 말인가

눈을 들어 저 멀리 페르시아 궁정을 보라/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 곁에 서 있는 한 인물을 보라/그는 페르시아 궁정의 고위 관리,유다지파 소속의 느헤미야/슬픈 예루살렘을 위해/하나님께서 일찍부터 준비해놓은 불굴의 민족 지도자라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예루살렘의 슬픈 소식을 듣고/마침내 느헤미야가 힘차게 일어서다/페르시아 궁정의 부귀와 안일함을 뒤로 하고서/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향해/위험과 핍박이 도사리고 있는/예루살렘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다/

떨고 있네/예루살렘의 대적들이 떨면서 느헤미야를 대적하네/조롱과 협박과 모함으로 예루살렘 건축을 방해하네/“이 미약한 유대인들이 무엇을 하려는가”/“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걸”

누가 느헤미야를 막을 수 있을까/두 눈 부릅뜨고 한 손엔 연장을/ 다른 한 손엔 병기를 잡고/불굴의 신념과/부단의 기도와/무한의 애국심으로 무장한 느헤미야를/

주야로 성 쌓기를 52일째/바빌로니아 제국의 침략으로 불타서 폐허가 된 슬픈 예루살렘/이젠 열방 위에 하나님의 기쁜 도성으로 다시 우뚝 세워졌네/우뚝 솟은 그 성곽 아래/

느헤미야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네/느헤미야의 용기와 신앙이 빛나고 있네/

느헤미야 - 한 손엔 연장을, 한 손엔 병기를

◇ 쓸쓸한 폐허로 변한 슬픈 예루살렘

한때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으로 열방 위에 우뚝 솟아있던 예루살렘. 그러나 주전 5세기 중엽 느헤미야가 살고 있을 당시에는 잡초만 무성했고 밤이면 들짐승이 어슬렁대는 쓸쓸한 폐허로 변해 있었다. 바빌로니아 군대가 성읍을 파괴한지 150여년이 다 되도록 성읍을 재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넓은 성읍에 사람은 아주 드물었고 성곽은 허물어져 군데군데 큰 돌무더기를 이루고 있었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의 조롱과 능욕거리가 되었다. 성벽은 무너지고 성문은 시꺼멓게 불탄 채 그렇게 예루살렘은 슬픈 몰골로 아프게 울고 있었다.

◇페르시아 궁정의 느헤미야

느헤미야는 바비로니아에 잡혀 간 조상에게서 태어난 유대인의 후손이었지만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고 페르시아 황제 측근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사실 느헤미야 자신은 페르시아 궁정에서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뜨거운 동포애와 불타는 애국심을 가진 자였다. 무엇보다 ‘여호와 신앙’을 가진 믿음의 사람이었다. 이런 느헤미야에게 들린 고국 예루살렘의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동족은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불타 버리고…”(느헤미야 1:3) 이 소식에 느헤미야는 울었다. 수일을 울면서 하나님께 금식기도를 드렸다.

◇예루살렘성 건축 현장의 느헤미야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 마침내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황제의 허락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페르시아 궁정의 부귀와 안일을 뒤로 한 채….

느헤미야가 유다의 총독이 되어 예루살렘성을 건축하기 위해서 귀환한다는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의 대적들은 크게 놀란다. 그리고 조롱 모함 협박 유혹 등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하여 필사적으로 예루살렘성 재건을 방해한다. 그러나 뜨거운 신앙으로,불타는 애국심으로 한 손엔 연장을 잡고 다른 한 손엔 병기를 잡은 채 두 눈을 부릅뜨고 성곽을 건축해나가는 느헤미야를 대적들은 결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렇게 밤낮으로 성곽을 쌓기 시작한지 52일째 마침내 성은 재건되고 예루살렘은 다시 옛 모습을 찾았다. 그것은 파괴된 이스라엘 공동체의 회복이었고 무너진 여호와 신앙의 재건축이었다.

김영진 (성서원 대표)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다니엘… ‘기도의 용사’ 미래를 보았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루 세 번 무릎 꿇다

( 스스로 사자 굴을 택한 신앙 절개의 인물 - 다니엘 )
유대의 왕족으로 태어났지만/망국의 슬픈 시대를 맞아/바빌로니아 제국의 포로가 된 인물,다니엘/하지만 세상의 그 누구도/그의 신앙의 절개는 꺾을 수 없었네그는 민족 자존심을 유지한 지조의 인물이었네/이방의 술과 고기로 채워진 왕의 식탁을 거절하고/푸성귀로 자신의 몸을 고결하게 지켰네

그는 누구도 두려울 게 없는 신앙의 인물이었네/“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분벽의 글씨를 보고 벨사살 왕 앞에서/당당하게 바빌로니아의 멸망을 선언했네

그는 아무도 금지시킬 수 없는 기도의 인물이었네/왕의 금령에 따라 사자 굴에 던져질 줄 알면서도/예루살렘을 향해 하루 세 번의 기도를 멈추지 않았네

그는 미래를 본 지혜의 인물이었네/꿈과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경륜을 깨달아/열국의 장래와 메시아를 예언했어라

그리하여 다니엘/하나님의 인정을 받고/왕들의 신임을 얻고/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네

보라,다니엘의 영광을!/망국의 포로 된 자로서/왕과 왕의 총리가 되어/오래도록 백성을 올바로 다스린/그 빛나는 삶을

오늘 그대여,/자신의 처지나 환경을 탓하거나 비관하지 말라 다만 울라/다니엘처럼 신앙의 절개와 영혼의 지조를 지키지 못함을,/그리고 배우라/영혼이 저리도록 아름다운 다니엘의 그 신앙 절개의 삶을….

다니엘 -기도하지 못 한다면 차라리 사자굴 속으로

왕의 식탁을 거절하다

망한 나라에서 왕의 친족처럼 슬픈 존재가 또 있을까? 다니엘이 그런 존재였다. 그는 유대 왕의 친족이라는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소년 시절에 나라가 망해 먼 이방 땅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간다(주전 605년). 하지만 무너진 것은 나라일 뿐,히브리 민족의 후예된 다니엘의 자긍심과 여호와 신앙의 꿋꿋한 의지는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바빌로니아 궁중 학교에서 왕이 제공하는 음식을 거절한 사건이다. 당시 16세 가량의 소년 다니엘은 포로가 된 일개 약소국의 가련한 왕족에 불과했지만 히브리 민족의 자긍심과 여호와 신앙의 절개로 왕이 베푸는 산해진미를 당당히 거절한다. 그것은 목숨을 내건 용기였다. 대신에 그는 채소만을 먹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의 몸을 거룩하고 윤택하게 지켜나간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 열고 기도하다

하나님의 은총 아래 고결한 인품과 탁월한 지혜를 소유한 다니엘은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바빌로니아와 페르샤의 양 제국에 걸쳐 총리직에 오르게 된다. 약소국의 포로가 이처럼 출세할 때는 간신배들의 시기와 모함이 반드시 뒤따르는 법. 그들은 다니엘에게서 다른 약점을 찾지 못하고 다만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한다. 그것은 어김없이 하루 세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한다는 것이다.

간신배들은 이것을 다니엘의 약점으로 잡아 다리오 왕을 충동질하여 왕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금령을 만들고 이를 어기면 사자굴에 던져 넣는다는 죽음의 법을 선포한다. 하지만 다니엘은 개의치 않는다. 평소 습관대로 창문을 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한다. 그 결과 다니엘은 왕의 법에 따라 사자굴에 던져진다. 그러나 천사의 도움으로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그 대신에 다니엘을 모함한 간신배들의 무리가 사자의 밥이 된다. 왕의 권세도,사자의 이빨도,기도의 사람 다니엘을 이길 수 없었다.

꿈과 환상을 해석하고 미래를 보다

다니엘은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지혜로 꿈과 환상을 해석했다.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했고 벨사살 궁전의 벽에 쓰여진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의 의미를 해석했다. 여러 환상을 통해 다니엘은 열방의 흥망성쇠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택한 백성을 향한 구속역사(救贖歷史)의 전개과정과 멀리 메시아의 도래를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본 하늘의 계시를 오는 세대에게 선포한 위대한 선지자가 되었다.

김영진 <성서원 대표>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나아만… 겸손으로 순종한 이방인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씻으라

(온 천하의 유일신,하나님을 고백한 이방의 군대장관-나아만)이스라엘 땅 저 너머 이방의 수리아에/천형의 질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그는 수리아의 군대장관,구국의 공신 나아만

부귀와 권세로 화려하게 치장했지만/그는 문둥병에 의해 나날이 살이 문드러지고 있었다/슬픈 나아만이여/그대는 그렇게 천형의 고통에 짓눌려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가

들어라,나아만이여/헛된 거드름일랑 집어치우고/네 집에 포로된 작은 히브리 계집아이의 소리에 귀기울여라/“사마리아에 계신 그 선지자가 주인의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가라,나아만이여/군대장관이라는 세상 위엄일랑 멀리 던져버리고/사마리아 땅에 살고 있는/엘리사 선지자에게로 속히 달려가라

씻어라,나아만이여/권세의 관(冠)과 교만의 옷일랑 훌훌 벗어던지고/엘리사 선지자의 말을 따라/요단강에 몸을 씻어라/일곱 번 몸을 씻어라

보라,나아만이여/그대의 문드러진 살들이 어린아이의 젖살처럼 깨끗해진 모습을,/그대의 순종이 천형의 고통을 제거했음이라

고백하라,나아만이여/너의 세상 것 모두 벗어던지고/무릎 꿇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고백하라/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이제 이스라엘 너머/네 땅 네 집으로 돌아가/높은 첨탑의 새벽 종소리처럼 길고 멀리 울려 퍼뜨려라/“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다른 신이 없다”라고

[나아만-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다른 신이 없도다]

수리아의 군대장관 나아만

때는 주전 9세기 중엽. 북왕국 이스라엘은 여호람이 다스리고 있었고 이스라엘 북쪽의 수리아는 벤하닷 2세가 통치하고 있었다. 이 시기는 수리아가 나라의 세력을 사방에 널리 떨치던 때로 이렇게 된 데에는 수리아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공이 절대적으로 컸다.

나아만은 이전에 자기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낸 구국(救國)의 공신으로 왕의 두터운 신임을 한몸에 받으며 수리아의 전 병권을 쥐고 있었다. 나아만은 부귀와 명예와 권세를 모두 누리고 있었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나아만은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몸에서 이상증세를 발견한다. 고대 세계에서 치료 불가능한 천형(天刑)의 병으로 알려진 문둥병 증세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의 상실을 의미했다. 부귀와 명예와 권세의 상실은 물론 심지어 가족에게서도 격리되어야 하는 고립과 죽음의 삶을 의미했다.

절망의 시간들을 보내던 어느날 나아만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진다. 자기 집에 있던 히브리 포로 소녀 하나가 사마리아 땅에 있다는,기적의 치유자 엘리사 선지자의 존재를 알려준 것이다. 그래서 나아만은 마지막 희망을 갖고 즉각 엘리사를 찾아 길을 떠난다. 대국 수리아의 군대장관이라는 당당한 위세와 함께 엄청난 예물을 싣고서…

영과 육의 문둥병을 치료받은 나아만

나아만은 엘리사가 자기 집에서 얼른 뛰어나와 모든 예의를 갖추면서 정성껏 치료헤줄 줄 알았다. 하지만 엘리사가 볼 때 나아만은 하나님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어린 철부지에 불과했다. 그래서 하마터면 나아만은 세상 교만과 허울 때문에 생애 최대의 기회를 잃을 뻔했다.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단지 엘리사의 사환으로부터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아만은 벌컥 화를 내면서 돌아가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아만에게도 장점이 있었다. 그것은 아랫사람의 말에 귀기울일 줄 안다는 점이다. 자기 집의 포로된 계집종의 말을 귀담아 들었듯이 이번에도 부하의 말을 듣고 엘리사가 시킨 대로 순종했다. 그 결과 나아만은 문둥병을 치료받았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발견과 깨달음이었다.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 알았도다” 이리하여 나아만은 육신의 문둥병과 함께 우상의 균들로 인해 문드러진 마음의 문둥병도 함께 치료받았다.

김영진 <성서원 대표>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라합… 들은대로 믿은 가나안 기생  
애굽을 나온 지 40년째 되던 해,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팽팽한 전운이 감돌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오랜 광야의 유랑 생활을 끝내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러 요단강 건너편에 진을 쳤기 때문이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은 주변 모든 민족들의 두려운 화제거리였다. 당시 세계 최강의 애굽 군대를 굴복시킨 일,홍해를 건넌 불가사의한 일,요단강 동편의 강력한 아모리 족속의 두 왕을 정복한 일….

이스라엘의 최종 정복 대상인 가나안 백성들은 그러한 소식에 온몸의 맥이 풀렸다.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가 그토록 위대하단 말인가!” 특히 가나안 땅의 첫 관문인 여리고 성은 두려움으로 초긴장 상태에 있었다. 바로 그 도시에서 기생이라는 비천한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던 한 여인 라합이 있었다.

그 여인의 운명은 불보듯 뻔한 것,곧 멸망뿐이었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그 여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경외심이 불타고 있었다는 사실을. 라합은 이스라엘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듣고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만이 천지간에 유일하고 참된 신인 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믿은 대로 행동한 신앙

라합이 하나님을 경외했듯이 하나님도 그러한 라합을 기억하고 있었다. 여리고 성에 잠입한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은 라합의 집에 묵게 되지만 그 사실이 발각되어 여리고 군들사의 검색을 받게 된다. 이때 라합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조국이냐,여호와냐,자기 목숨이냐,이스라엘 정탐군이냐” 이때 라합은 믿음에 따라 행동했다. 여호와 신앙으로 두 정탐꾼을 숨겨주고 여리고 군사를 따돌렸다. 후일 히브리서 기자는 라합의 이 믿음이 그녀를 멸망 중에서 건져내었다고 기록했다(히브리서 11:31).

그 신앙에 따른 축복

하나님은 목숨을 걸고 믿음에 따라 행동한 라합에게 풍성한 축복을 내려주셨다. 여리고 성이 멸망당할 때 라합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과 친지들을 모두 살려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여 유다 지파의 살몬과 결혼하도록 섭리하셨다. 그런데 보라! 라합은 살몬을 통해 룻의 남편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오벳을,오벳은 이새를,이새는 다윗을 낳았다.

말하자면 라합은 다윗의 고조 할머니가 된 것이다(마태복음 1:5∼6). 그리고 그것은 메시아 예수의 가계를 이룬 것을 의미한다. 멸망당할 도시 여리고 성,그 중에서도 비천한 일개 기생에 불과했던 라합이 이토록 큰 축복을 받은 비결은 무엇인가? 모든 세대여,귀기울여 들으라! 그것은 바로 ‘믿음’,곧 믿은 대로 실천한 ‘살아 있는 믿음’이었다.

[온 세상의 하나님]

(여리고 성의 기생-라합 )

출애굽 40년,/마침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던 해/그 땅의 첫 관문 여리고 성/그 멸망당할 죄악의 도시에서/비천한 기생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던 한 여인/과연 이 여인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가?

정녕 있었네/그녀가 고이 간직한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놓았네/멸망 속에서 구원을 건져 올렸네/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크신 능력을 전해 듣고/온 여리고 백성이 정신을 잃고 마음이 녹았을 때/이 여인만은 믿음으로 믿었네/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온 세상에 유일하신 하나님임을/그녀의 이름은 라합이라

그녀는/여호수아가 파견한 두 사람의 정탐꾼을 숨겨 주었네/그것은 조국애를 초월한 숭고한 믿음/자신의 목숨을 내건 희생의 믿음

그녀는/정탐꾼의 말에 따라 붉은 밧줄을 창문에 매달았네/그것은 자신과 온 가족을 건진 생명의 믿음/죄악과 죽음을 깨뜨리는 보혈의 믿음

보라,믿음의 축복을!/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그 믿음대로 행동한 여인을/이제 그녀는 더 이상 멸망당할 도시의 비천한 기생이 아니네/하나님의 백성/장차 메시아의 가계를 이을 사람이네

복되도다,라합이여/여리고 성의 숨은 보배여/이스라엘의 수호 천사여

김영진<성서원 대표>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룻…시어머니 신앙좇아 순종한 이방여인  
룻은 모압 여인이었지만 이스라엘로부터 모압 땅으로 이주해 온 나오미 가족과 인연을 맺는다. 하지만 결혼 십년 즈음에 집안의 남자들은 모두 죽고 세 미망인만 남는 처량한 신세가 된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시어머니인 나오미는 결심한다. 자신은 고향 땅으로 되돌아가고 두 며느리는 각각 친정으로 돌려보내기로….

몇 번의 실랑이 끝에 결국 룻의 동서는 시어머니의 권고대로 친정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룻은 시어머니의 강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나오미를 따르기로 굳게 작정한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룻기 1:16) 이같은 룻의 결심은 시어머니에 대한 효도의 의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룻은 시어머니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것이었으리라. 오직 사랑으로 하는 일만이 오래 가고 또 상대방에게 진정한 감동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향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와 룻은 당장 생계부터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룻은 베들레헴 들판에 나가서 이삭을 줍는다. 아침 일찍부터 하루종일 땀흘리며 열심히 이삭을 줍고 그것으로써 음식을 만들어 정성껏 시어머니를 부양한다. 룻의 효성이 얼마나 극진했으면 그녀가 모압에서 온 이방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베들레헴 사람들 사이에서 칭찬이 자자했을까.

특히 룻의 효성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데서 그 빛을 한층 발한다. 나오미가 며느리 룻과 보아스와의 남다른 관계를 눈치채고 룻을 보아스와 맺어주기 위해 이런저런 지시를 했을 때 룻은 “예,어머님”“예,어머님”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순종했다. 순종만큼 훌륭한 효도가 어디 있으랴.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끝까지 따르기로 굳게 결심한 데는 시어머니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순수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이다”(룻기 1:16).

시어머니로부터 영향받은 ‘여호와 신앙’이 어느새 룻의 마음 깊숙한 곳에 순수하게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룻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날개 아래로 기꺼이 찾아들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날개 아래로 찾아든 가련한 이방 여인 룻을 긍휼히 보시고 축복을 베푸셨다. 룻은 인자한 성격을 가진 부호(富豪) 보아스와 결혼하여 가문의 대를 잇고 나아가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되는 큰 영광을 누린다(룻기 4:17). 그리스도의 가계를 이룬 것이다. 이리하여 룻은 오래도록 빛나는 정녕 복된 여인이 되었다.

[갸륵한 룻이여]

( 효성스러운 모압 여인 - 룻 )

그대 비록/가련한 이방 여인일지라도/홀시어머니를 향한 지극한 사랑/온 모압 땅을 감동시켰네/"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그대 비록/가련한 이방 여인일지라도/홀시어머니를 향한 지극한 효성/온 베들레헴 마을을 감동시켰네/"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 나도 죽어,/거기 장사될 것이라"

그대 비록/가련한 이방 여인일지라도/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신앙/온 인류를 감동시켰네/"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지라"

오,갸륵한 룻이여/울며 어머니를 좇는 그 사랑이여/땀흘리며 이삭줍는 그 효심이여/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갈망하는 그 신앙이여/하나님의 복된 손길이 어찌 그대를 비켜가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어질고 부유한 남편 보아스를 만나/이새의 아비 된 오벳을 낳고/다윗의 증조모 되어/그리스도 예수의 가계를 이루니/아,이 어찌 복되지 않으리

그리하여 그대의 이야기/수천년을 흘러 인류의 마음을 울리네/오늘도 그토록 우리들 가슴에 감동으로 샘솟고 있어라

김영진(성서원 대표)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보아스… 베풀어 다윗의 조상된 부자  
성경은 보아스에 대하여 베들레헴 성읍의 “유력한 자”라고 소개하고 있다(룻기 2:1). 이 말은 많은 재산과 더불어 높은 명망을 갖춘, 그곳 지역 사회의 유지라는 말이다.

사실 그랬다. 보아스는 베들레헴에 넓은 땅을 가진 대지주였고 아랫사람들에게 따뜻한 인정을 베풀며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인정받는 유지였다. 이런 보아스의 성숙한 인품이 잘 드러난 예가 이방 여인 룻에 대한 자상하고 후덕한 배려였다.

홀로 된 시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자기 소유의 밭에 나와 이삭을 줍는 룻을 보고 보아스는 따뜻한 말로 그녀를 위로해 주었고 넉넉한 인심을 베풀었다. 실로 보아스는 사려 깊은 후덕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보아스는 룻의 시어머니인 나오미의 남편 되는 엘리멜렉의 친족이었다. 유대 사회에서 이 사실은 무척 중요하다. 친족은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지기 때문이다. ‘기업 무를 자’란 땅을 잃거나 대가 끊긴 친족을 위해 대신해서 땅을 되찾아주거나 대를 이을 아이를 낳아줌으로써 친족의 가문이 계속 유지되도록 도와주는 자를 말한다.

이런 의무는 당사자와 가까운 친족 순서로 책임을 졌다. 하지만 보아스는 나오미의 가장 가까운 친족은 아니었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었지만 그는 이런 의무를 회피했다. 사실 귀찮고 자신에게는 아무런 유익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의무는 보아스에게로 넘어왔다. 덕망있고 책임감 있는 보아스는 죽은 친족 엘리멜렉을 위해서 기꺼이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다했다. 룻을 아내로 맞아 자식 없이 죽은 친족의 가문을 이어주는 계대(繼代) 결혼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보아스와 룻의 결혼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축복된 만남으로 장차 도래할 메시아의 가계를 형성한다. 즉 보아스와 룻 사이에 태어난 오벳은 이새를 낳는데 이새가 바로 다윗을 낳았던 것이다.

이렇게 보아스는 다윗의 증조부가 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직계 조상이 되는 크나큰 축복을 누린다. 보라. 마태복음의 첫 장에 소개된 예수의 족보에 등장하는 보아스의 이름을.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마 1:5∼6) 정녕 이런 축복은 이웃에 대한 보아스의 후덕한 배려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배려이리라.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다하라

( 후덕한 신앙인 - 보아스 )

밭을 가졌네/베들레헴 들녘에 넓은 땅을 가졌네/선한 마음 가졌네/밭에서 나는 곡식으로/가난한 이웃의 넉넉한 식량을 주었네

베들레헴 땅에/유력한 대지주 보아스가 있었네/어느 날 그는/야훼의 날개 아래로 찾아든/가냘픈 여인을 보았네/자신의 밭에서 이삭 줍는/효성스런 룻을 보았다네

덕망 있는 보아스,/룻의 효성에 감동하여 호의를 베풀고/자기 발치에 누운 룻을 보고/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다했네

그리하여 룻과 결혼한 보아스,/아들 ‘오벳’을 낳으니/그가 또 이새를 낳고/이새는 다윗을 낳았네

오,복되도다 보아스여/다윗의 증조부가 되었어라/예수 그리스도의 직계 조상이 되었어라

자신의 넓은 땅만큼이나/넉넉하고 후덕한 손길로/도울 줄 알고 베풀 줄 아는 그대에게/효성스럽고 어진 여인/룻이 배필로 짝되었음은/하나님의 섭리라/하나님의 보상이라/씨 뿌린 만큼 거두었구나

김영진 <성서원 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바실래… 피신한 다윗을 순수히 돕다  
순수한 손길, 넉넉한 마음이여
( 선행을 베푼 노부호 - 바실래 )

순수하게 주는 자의 기쁨을 아는가/아낌없이 베푸는 자의 넉넉함을 아는가

다윗 왕이/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고달픈 도피 길에 지쳐 있을 때/순수하고 넉넉한 베풂으로/다윗 왕에게 나아온 자가 있었다

들판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 마를 것을 생각하고/침상과 대야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꿀과 버터와 치즈를 가지고 나와/그 요긴한 필요를 구석구석 채워준 손길이 있었다/그는 요단 동편의 길르앗 사람,/바실래였네

압살롬의 반란을 평정한 후/예루살렘 왕궁으로 돌아가던 다윗 왕은/바실래의 고마움을 잊지 못해/함께 왕궁으로 갈 것을 권했네/“나와 함께 가자/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그러나 바실래는 정중하게 사양했네/“어찌하여 종이/내 주 왕께 오히려 누를 끼치리이까”

오,바실래여/그대의 베풂은 계산이 없구나/순수하다,그 손길이여/멋지다,그 인품이여

그대여,보았는가/베풂의 기쁨으로 베푸는 그 손길을/바라지 않고 그저 주는 그 넉넉함을/계산만이 있는 이 척박한 시대에/그래서 더욱 그립구나,바실래여

바실래-순수한 마음으로 자기 창고를 열다

필요한 베풂

다윗의 아들 중 하나로 야심가였던 압살롬은 은밀하고도 오랜 준비 끝에 아버지의 왕위를 빼앗고자 반란을 일으켰다. 압살롬의 반란은 성공할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에게 민심이 많이 돌아섰고 특히 옛 사울 왕의 일족인 베냐민 사람 시므이같은 자는 예루살렘 왕궁을 떠나 도피하는 다윗을 향해 “가거라,가거라,비루한 자여!” 하면서 공개적인 저주를 퍼붓기도 했다.

자식의 반란을 지켜봐야 했던 다윗의 심정은 참담했고 다윗 왕의 뜻을 받들어 예루살렘 왕궁을 내주고 피란길에 올라야 했던 다윗의 군대는 처량했다. 이런 다윗 일행이 요단(요르단)강 너머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 도망에 도망을 거듭하느라 지치고 굶주렸던 다윗 일행에게 풍성한 원조를 베푼 손길이 있었다. 바로 길르앗 지역의 부호인 바실래였다.

그는 다윗이 꼭 필요로 할 때 꼭 필요한 물품들을 가지고 다윗을 찾아왔다. 그러한 바실래의 도움은 단순히 물질만 제공하는 도움이 아니라 다윗 일행의 필요를 세심하게 헤아린 도움이었다. 이렇게 멀고 낯선 곳에서 꼭 필요한 도움을 받은 다윗과 그의 군대는 다시금 새로운 원기를 얻어 전열을 정비한 후에 압살롬의 군대와 맞서 싸워 이길 수 있었다.

순수한 베풂

에브라임 수풀에서의 대전투를 통해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한 후 다윗은 바실래의 도움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예루살렘 왕궁으로 복귀하면서 다윗은 바실래의 미래를 보장하며 자신과 함께 동행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바실래는 팔십 노인인 자신이 다윗에게 누를 끼칠 것을 우려하여 정중히 사양했다.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오히려 누를 끼치리이까”(삼하 19:35)

이처럼 어려움과 곤경에 처한 다윗 일행에게 도움을 베푼 바실래의 선행은 조건없는 순수한 것이었다. 아무런 이해타산 없이 곤경에 처한 자에게 순수하게 자신의 창고를 열어 베풂의 기쁨으로 도움을 준 것이었다.

오늘 그 베풂을 배우자

이 시대 우리도 곤경에 처한 자들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베푼다. 하지만 그것은 곤경에 처한 자들의 입장을 깊이 헤아린 꼭 필요한 베풂이었는가? 어떤 형태로든 반대 급부적인 그 무엇을 바라지 않는,그저 베푸는 기쁨으로 베푼 순수한 것이었던가? 신문에서 TV에서 이해타산적인 베풂만이 널리 광고되고 있는 이기적인 이 시대에 바실래의 베풂은 그래서 더욱 귀하고 귀하다.

김영진 <성서회 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아벨… 인류 최초의 참된 예배자  
가인의 동생

아벨은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의 아들로 태어난다. 아마도 그가 태어난 때는 그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흐른 때였을 것이다. 아벨이 태어났을 때 위로는 형 가인이 있었다. 둘 사이의 나이 차는 알 수 없다. 둘은 자라서 형 가인은 농부가 되었고 동생 아벨은 양을 치는 목부가 되었다.
아벨이 드린 믿음의 제사

어느 해 추수 시기에 형 가인과 동생 아벨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하나님께 대한 제사는 부모에게서 듣고 배웠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제사를 드린 사건이 가인과 아벨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고 말았다. 각자의 직업을 따라 형 가인은 농산물로 제물을 삼아 제사를 드렸고 동생 아벨은 새끼 양을 제물로 삼아 제사를 드렸다. 겉으로 보기에 둘의 제사는 별로 차이가 없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셨고 아벨의 제사만을 기쁘게 받으셨다. 무슨 차이 때문일까?

혹자는 ‘제물’의 차이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은 ‘믿음’의 차이라고 밝히 말해준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히 11:4) 요컨대 하나님은 믿음이 담겨 있는 아벨의 제사는 기꺼이 받으시고 믿음이 없는 가인의 제사는 단호히 거부하셨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해 동생 아벨을 크게 질투한 가인은 어느 날 들판에서 동생을 쳐죽임으로써 최초의 살인자가 되고 이후로 땅을 떠도는 자가 된다.

아벨에 대한 성경의 평가

아벨은 ‘숨’(breath)이라는 뜻이다. 이름 뜻 그대로 아벨은 한 번의 짧은 숨처럼 젊은 날에 어이없게 형에 의해 죽음을 맞은 인물이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아벨이 차지하는 위치는 결코 작지 않다. 성경은 아벨에게 인류 최초로 의로운 피를 흘린 순교자라는 영예를 안겨 준다(마 23:35,요일 3:12). 뿐만 아니라 아벨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신 믿음의 제사를 드린 성경 최초의 인물로,모든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생생한 교훈을 가르쳐 주는 산 증인이 되었다. 사람의 가치는 그 생애의 길고 짧음에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아벨처럼 짧은 삶을 살았더라도 하나님께 인정받는 의로운 믿음의 삶을 살았다면 그는 정녕 가치 있는 삶을 산 행복한 사람이다. 아벨이 그랬다.

믿음의 제단 위에 순교의 피를 흘린 자여

( 인류 최초의 순교자- 아벨 )

타락 이후/하나님을 기쁘게 한 믿음의 제사가 있었네/하나님이 웃으며 받으실 만한/믿음의 제사//

가시덤불과 엉컹퀴가 돋아난 척박한 땅에/아담과 하와의 아들로 태어나/양을 치는 목부가 된 아벨/양의 첫 새끼를 정성껏 성별하여/신실한 마음으로/하나님께 제사의 향기를 피워 올렸네//

믿음이 담긴 아벨의 향기로운 제물을/하나님은 웃으며 열납하셨네/하지만/형 가인의 믿음 없는 제물은 거절하셨네//

그리하여/형 가인의 시기를 산 아벨/어느 날 들판에서 분노한 형에게 돌을 맞고 피를 흘렸네//

성경은 기록하였다/그 들판에 흘려진 그대의 피가/인류 최초로 흘려진 순교의 피라고//

역사는 따르고 있네/그대가 흘린 순교의 피를 이어/오늘도 믿음으로 무수히 순교의 피를 흘리며//

의인 아벨이여/스스로 제물 되어/그 들판의 제단 위에서/순결한 순교의 피를 흘린 자여//

그대는 정녕 인류 최초의/참된 예배자라/참된 순교자라//

김영진 <성서원 원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레아… 이스라엘을 낳은 여인  
◇하나님의 위로와 은총을 입은 큰딸

인류의 큰 딸―레아
야곱의 외삼촌 라반에게는/두 딸이 있었네/안력이 약한 큰 딸 레아/아름다운 미모의 작은 딸 라헬

야곱은/아름다운 작은 딸 라헬을 사랑했네/그녀를 얻기 위해 칠 년을 기쁘게 봉사했네

그러나 야곱은/외삼촌의 계략에 속아/안력이 약한 큰 딸 레아를 첫번째 아내로 맞았고/아름다운 작은 딸 라헬은 두번째 아내가 되었네

야곱의 사랑은/온통 라헬뿐/레아는 외롭고 슬픈 나날을 보냈네

슬픈 레아에게/하나님의 은총과 위로가 임했네/그녀에게 여섯 아들을 풍성히 주셨네/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레아/눈물 흘리며 감사했네/넷째 아들 ‘유다’의 이름은/“이제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는/그녀의 신앙고백

하나님도 유다를 받으셨네/유다의 혈통을 통해 다윗이 나고/다윗의 혈통을 통해 마침내 메시아 예수가 태어났네

슬픈 여인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이스라엘의 집이 세워졌구나/메시아의 가문이 일구어졌구나/하여,그대는/결코 둘째일 수 없는 인류의 영원한 큰 딸

● 레아 - 남편의 사랑을 찾아,하나님의 은총을 바라

라헬의 언니,야곱의 첫번째 아내

고향 가나안을 떠난 야곱이 하란 땅에 사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더부살이하고 있을 때,야곱은 라반의 둘째딸로서 레아의 동생인 라헬을 깊이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 외삼촌 라반을 위해 7년동안 일을 해주기로 약조를 맺는다. 7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 마침내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을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첫날밤을 보낸 후 야곱이 깨닫게 된 것은 라헬의 언니인 레아를 아내로 맞았다는 사실이었다. 외삼촌 라반으로부터 그 지방에서는 동생을 언니보다 먼저 시집보내는 일이 없다는 변명과 함께…. 라헬의 언니라는 이유로 레아는 얼떨결에 야곱의 첫째 아내가 된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불행한 여인

외삼촌 라반의 계략에 속아 레아를 첫째 아내로 맞아들이긴 했지만 야곱의 관심과 사랑은 철저하게 둘째 아내로 맞아들인 레아의 동생 라헬에게 있었다. 이같은 사실은 레아가 여자로서 견디기 힘든 설움과 소외의 세월을 보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레아는 끊임없이 남편 야곱의 사랑을 갈구한다. 그러한 노력은 그녀가 낳은 처음 세 아들의 이름을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아는 동생 라헬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외모 탓에 끝내 남편의 사랑을 얻지 못하는 불행한 여인의 삶을 살아간다.

하나님의 은총을 얻은 행복한 여인

야곱이 사랑했던 라헬에게서는 아들이 귀했던 반면 레아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여섯 아들을 낳게 된다. 이 사실은 장차 그녀가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여섯 지파의 어머니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훗날 아브라함 이래로 내려오는 가족묘지에 남편 야곱과 더불어 매장됨으로써 라헬의 언니로서,야곱의 첫째 아내로서 위상을 누리게 된다(창 49:29∼31). 이런 위상으로 인해 후손들은 그녀를 가리켜 “이스라엘 집을 세운 자”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는다(룻 4:11).

이처럼 레아의 삶이 행복하게 변화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가 넷째아들에게 지어준 이름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넷째아들의 이름은 ‘유다’인데 그 뜻은 “이제는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이다. 이것은 레아가 남편의 마음을 돌리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마음을 돌려 하나님을 의지했음을 반영한 이름이다. 하나님에게서 소망을 찾은 그녀에게 하나님은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고 풍성한 위로와 은총으로 갚아 주셨던 것이다.

김영진 <성서원 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르우벤… 장자권잃은 비운의 맏아들  
맏아들로 인정받지 못한 불행한 맏아들

( 야곱의 첫째 아들 - 르우벤 )

야곱에게는
장차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이룰
열두 아들이 있었네
그 중 르우벤은
맏아들로 태어난 정녕 축복 받은 사나이
그러나
르우벤은 장자의 명분을 상실하고 말았네
아비의 첩과 간통을 저지르는
근친상간의 돌이킬 수 없는 큰 죄를 지었네
야곱에게 사랑 받지 못한 아내 레아에게서
하나님의 선물로 태어난 맏아들
아비 야곱의 사랑에서 제외된 불행한 사나이여
어찌하여 그대는
아비의 첩과 불륜을 저질렀는가
아비의 몸을 범하여 더럽힌 죄
크고도 중하여 용서받을 길 없네
하여,
크고도 중한 장자권을 빼앗기고 말았구나
그래도
그대는 맏이라
맏이다운 행동을 보여주었구나
다른 형제들이 동생 요셉을 죽이려 할 때
아비 야곱을 생각하여
요셉의 목숨을 지켜 주었네
막내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려가야만 했을 때
아비 야곱을 생각하여
자기 두 아들의 목숨을 담보로 맡겼도다
장자로 태어났지만 장자권을 잃은 그대여
그래도 맏이답게 살아간 그대여
야곱의 슬픈 첫째 아들이여

● 르우벤 - 장자의 명분을 박탈당한 슬픈 맏아들

야곱 집안의 맏아들

야곱의 첫번째 아내인 레아에게서 첫번째 아들이 태어났다. 남편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레아를 위로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신 것이다. 그 아들의 이름은 르우벤. ‘보라,아들이다’는 뜻이다. 고대 족장 사회에서 한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난다는 것은 실로 큰 축복이었다.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의 전통과 유산을 이어받을 수 있었고 다른 형제들의 머리가 되어 그들을 통솔할 수 있는 권위가 주어졌다. 이렇게 르우벤은 하나님의 축복이 깃든 언약 가문의 집안에서 열두 아들들 중 맏이로 당당하게 태어났다.

맏아들의 권리를 박탈당한 슬픈 사나이

언약 가문의 장자인 르우벤에게는 큰 축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르우벤은 그런 축복된 권리를 단 한 번의 큰 실수로 일시에 박탈당하고 만다. 서모(庶母)와의 간통 사건이 그것이다(창 35:22). 아비의 첩인 빌하와 근친상간의 불륜을 저지른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아비 야곱의 눈밖에 난 르우벤은 야곱의 언약 축복에서 장자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언저리로 밀려난다(창 49:3∼4). 그리고 이후 이스라엘 역사는 르우벤 대신에 요셉에게 장자의 명분을 돌린다(대상 5:1). 이렇게 르우벤은 선천적으로 좋은 여건과 기회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뼈아픈 한번의 잘못으로 인해 그것을 상실하는 슬픈 자가 된다.

그래도 맏아들로 살아간 자

서모와의 간통 사건으로 아비의 눈밖에 나서 장자의 명분을 박탈당한 르우벤이지만 그래도 이후에 보여지는 그의 행동은 맏이다운 면모를 보인다. 한번은 요셉을 시기한 다른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했을 때 요셉에 대한 아버지 야곱의 남다른 사랑을 알고 있는 르우벤은 요셉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맏이다운 처신을 보인다(창 37:22). 또 한번은 가나안 땅에 큰 기근이 임하여 부득불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려가야만 하는 상황이 전개되었을 때의 일이다. 요셉이 죽은 줄 알고 모든 기쁨을 막내인 베냐민에게 두고 살아가는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 자기 자식을 담보로 잡히면서까지 베냐민의 안전을 책임지겠다고 나선 인물이 르우벤이었다(창 42:37). 이처럼 르우벤은 맏이로서 아버지 야곱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랐다. 비록 한번의 큰 잘못으로 장자의 명분을 박탈당했지만 그래도 르우벤은 장자다운 진중한 면이 있었다. 어쨌든 그는 열둘 중 첫번째로 태어난 야곱의 맏아들이 아니던가!

김영진<성서원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유다… 이스라엘 통치권을 받은자  
● 이제는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 메시아의 가문을 이룬 자-유다 )

야곱의 사랑받지 못한 아내 레아가/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그 이름을 지어준/야곱의 네번째 아들,/유다/“이제는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어미의 신앙 고백이 깃든 복된 이름이라

유다의 삶은/죄 많은 허물투성이의 삶/동생 요셉에게 질투를 느껴/동생을 미디안 상인에게 노예로 팔아 넘기고/며느리 다말과의 약속을 어기고/며느리와 근친상간의 큰 죄를 졌네

하지만 하나님은/유다의 삶 속에서 남다른 지도력을 발견했네/형제들을 설득하고/아버지를 설득하고/애굽의 총리를 설득하는 유다의 모습을

그런 유다에게 하나님은/왕권의 축복을 베푸셨네/왕의 홀과 치리자의 지팡이를/그에게 주셨네/이스라엘 중에서/영광스러운 왕의 가문으로 삼으셨네

오,놀라워라/영원한 왕이신 메시아가/왕의 가문인 유다의 혈통을 통해 오신다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죄 많고 허물 많은 인간을/은총과 긍휼로 감싸안으며/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에게/영광의 왕관을 씌워 주셨네

● 유다 -“홀(笏)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시기하기도 하고 실수하기도 하는 평범한 인물

야곱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유다는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시기하기도 하고 실수하기도 하는 일반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이며 살아간다. 그는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한몸에 받는 동생 요셉에 대해 질투를 느껴 다른 형제들과 공모하여 동생을 애굽 땅에 팔아넘기기도 했다(창 37:26∼27).

또한 자기 아들이 성장하면 계대 결혼(繼代結婚)을 시켜 주겠다고 며느리 다말과 약속하고서도 그것을 일부러 어겼다가 다말이 꾸민 계략에 걸려들어 취중에 며느리와 불륜의 관계를 맺는다. 그 결과 쌍둥이 아이까지 생겨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다(창 38장).

지도력이 탁월한 인물

하지만 야곱의 넷째 아들인 유다의 행적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야곱의 아들 중 그가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은 장자 르우벤이 서모와의 간통 사건으로 장자의 명분을 잃었고 둘째 시므온과 셋째 레위는 여동생 디나 사건에서 잔혹하게 혈기(血氣)를 부린 일로 지도력을 상실한 데 따른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 유다는 다른 형제들이 동생 요셉을 피 흘려 죽이려고 할 때 그 일을 막고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 넘기도록 했다(창 37:26∼27). 후일에 가나안 땅에 큰 기근이 닥쳤을 때에는 형제들을 대표하여 아버지 야곱을 설득하여 막내 베냐민을 애굽으로 함께 데려갔으며(창 43:8∼10) 애굽 땅에서 베냐민이 누명을 쓰고 억류당하게 되었을 때에는 역시 형제들을 대표하여 자기 희생을 무릅쓰고 애굽의 총리를 설득하는 일을 맡았다(창 44:14∼34).

왕권의 축복을 받은 인물

형제들 중 유다의 탁월한 지도력은 아버지 야곱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야곱은 임종을 앞둔 마지막 유언에서 유다에게 특별한 축복을 해주었다. 유다를 ‘사자’(獅子)에 비유하면서 홀(笏)과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왕권(王權)의 축복을 해주었다(창 49:8∼12).

이러한 축복으로 인해 과연 유다의 후손들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의 가문을 형성했으며 마침내 온 인류를 다스릴 영원한 왕이신 메시아가 유다 가문의 혈통을 타고 이 땅에 임하게 되었다. 비록 유다는 시기하고 실수하는 평범한 인간이었지만 하나님은 유다의 지도력을 높이 사서 그에게 왕권의 축복을 베푸시고 메시아(Messiah) 가문을 형성하게 하는 큰 영광을 주셨던 것이다.

김영진 <성서원 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에브라임… 민족대표된 차남… 후손들 분열 ‘오명’  
◇장자의 축복을 받은 풍성한 자
( 형보다 높임을 받은 아우-에브라임 )

애굽 땅에서 총리가 된 요셉이/두 아들을 낳았다/장자의 이름은 므낫세/차자의 이름은 에브라임

야곱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요셉과 두 아들/족장 야곱을 찾았네/언약의 축복 기도를 받기 위해서라네

그러나 어쩐 일인가/장자 므낫세의 머리 위에 올려질 야곱의 오른손이/차자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올려졌도다/이 광경에/요셉이 놀라고 당황했네

차자이면서 장자의 축복을 받은 자여/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받았도다/그 이름 그대로/‘풍성함’의 에브라임이라

장자의 축복을 받아 누린 에브라임이여/하나님을 찬양하라/풍성한 축복에 감사하라

그러나/그대의 후손들,에브라임 지파가/언약의 유다 왕국에 대항하여/예루살렘 성전을 멀리 떠나갔도다/북방 땅에 우상의 제단을 만들어 섬겼도다

차자로서 장자의 축복을 받은 자/넘치도록 풍성한 축복을 받은 자/어이하여/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배반과 불순종의 슬픈 길을 걸었는가/오늘까지 쓰라린 실패의 길을 걷고 있는가

◇에브라임-복에 복을 더하여 받은 풍성한 인물

그는 누구인가?

에브라임은 요셉의 차남이다. 애굽 땅에 노예로 팔려온 요셉이 오랜 역경 후에 마침내 뜻을 이뤄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요셉은 애굽의 유력한 제사장의 딸인 아스낫과 결혼하게 되는데, 그녀를 통해 장남 므낫세에 이어 두 번째로 낳은 아들이 에브라임이다(창 41:52).에브라임의 이름 뜻은 ‘풍성함’인데, 이것은 요셉이 모든 고생 끝에 애굽 땅에서 풍요로움을 얻었다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다. 이렇게 에브라임은 아버지의 고생으로 일군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복된 인물이다.

차자이면서 장자의 축복을 받은 인물

애굽 총리의 풍성한 집안에서 둘째 아들로 복되게 태어난 에브라임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조부(祖父)인 야곱으로부터 형 므낫세를 제치고 장자의 축복까지 받게 된다. 이어서 야곱의 아들들의 반열에까지 오르게 된다(창 48:8-20). 이것은 에브라임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 한 지파로서 당당하게 세워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후에 에브라임 지파는 정복한 가나안의 넓은 땅을 지파의 기업으로 분배받는다. 이처럼 에브라임은 더 이상 풍성해질 수 없을 정도로 복에 복을 더하여 받은, 이름 뜻 그대로 ‘풍성한’ 인물이 된다.

에브라임의 길, 패망의 길

그렇다면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크신 축복에 감사하면서 겸손한 자세로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야 했다. 받은 바 풍성함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나눠 쓰는 봉사의 삶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이후 에브라임 지파의 역사는 그렇지 못했다. 사사 시대에는 이방인의 침략을 받아 도움을 호소하는 다른 지파의 요청을 거절하는 배타성을 보였다. 솔로몬의 죽음 이후 왕국이 분열될 때에는, 왕권의 축복을 받은 유다 지파에 대항하여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북쪽 지방의 열 지파를 규합하여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워 그들의 지도적인 지파가 되었다.

이후로 에브라임 지파 중심의 북왕국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땅에 이방의 제단을 세우고 우상을 섬겼으며, 이방인들과 무분별하게 교류하는 가운데 선민의 거룩한 특성을 상실하는 등 점차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 결과, 마침내 북왕국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이방 나라로 뿔뿔이 흩어지는 추방과 패망의 길을 걷고 만다. 하나님이 주신 풍성함의 복을 배타적이고 이기적으로 사용하여 실패한 지파의 슬픈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김영진<성서원 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요게벳… 모세 길러낸 ‘현숙한 여인’  
요게벳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때 레위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특이하게도 자신과는 조카 관계에 있는 아므람과 결혼한다(출 6:20). 그리고 아므람과의 사이에서 2남1녀를 낳는데 그들이 바로 미리암 아론 모세이다(민 26:59). 요게벳(Jochebed)의 이름 뜻은 ‘여호와는 영광이시다’인데 그녀의 여호와 신앙이 잘 반영돼 있다.

용기 있고 지혜로운 여인
때는 애굽 왕이 히브리인 남아(男兒) 말살 정책을 펴던 서슬 퍼런 시기로,히브리인 가정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죽여야 한다는 애굽 왕의 엄한 명령이 있었다. 이런 시기에 사내아이를 낳은 요게벳은 애굽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아이를 석 달이나 몰래 숨겨 키운다(출 2:2). 그러나 아이가 자라 울음소리가 커지므로 더 이상 숨겨 키울 수 없게 되자 아이를 갈대상자에 넣어 나일 강에 띄운 후 큰딸 미리암에게 뒤를 따르게 하는 지혜를 발휘한다(출 2:3∼4).

그리하여 나일 강에 목욕 나온 애굽 공주의 눈에 갈대상자가 띄게 되고 그 순간 미리암이 재빨리 공주에게 다가가 친어미를 유모로 소개한다. 이같은 일련의 과정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분명 요게벳의 치밀하게 계산된 지혜 덕분이었을 것이다(출 2:5∼10). 이런 어머니의 지혜로 모세는 죽지 않고 애굽 공주의 양자가 되어 애굽 궁중에서 당대 최고의 학문을 배우며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믿음으로 자녀를 키운 어머니

아무런 소망이 없을 것 같았던 애굽 땅의 노예 백성 히브리 민족에게 한 가정이 있었고 그 가정에는 자녀들을 믿음으로 키운 한 믿음의 어머니가 있었다. 그녀가 바로 ‘요게벳’이다. 요게벳은 애굽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여호와 신앙으로 아이를 돌본 결과 장차 출애굽의 영도자가 될 모세의 생명을 지켜낼 수 있었다.

모세 뿐만 아니라 아론과 미리암 역시 믿음으로 키워 세 자녀가 장차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했다. 영광스러운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이면에는 이처럼 여호와 신앙으로 잘 무장된 한 여인의 용기와 지혜,헌신이 깃들어 있었다. 요게벳은 ‘출애굽’이라는 옥동자를 낳은 믿음의 산모(産母)였던 것이다.

■ 신앙의 젖으로 자녀를 키우다

(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의 어머니 - 요게벳 )

애굽 땅에서
노예 백성으로 살아가던 슬픈 이스라엘
그 땅에서 창성하고 번성하자
서슬 퍼런 애굽 왕의 명령이 내려졌네
"히브리 가정에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나일 강에 던져 죽여라"
가혹한 압제의 시기에
히브리 가정에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네
그 사내아이는 모세
그 어머니는 요게벳
요게벳은 갓난아이를 나일 강에 던지지 않았네
담대한 용기로 석 달을 숨겨 키웠네
석 달 후엔 믿음의 갈대상자에 넣어 나일 강에 띄웠다네
요게벳의 용기와 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오묘한 응답
나일 강에 목욕 나온 애굽의 공주
갈대상자를 발견하고
모세를 양자 삼았네
요게벳을 유모 삼았네
요게벳의 신앙의 젖
아론과 미리암이 먹고 자랐던 그 젖이
이제는 모세에게도 물려졌다네
세 자녀들이 모두 신앙으로 자랐어라
소망 없던 노예 백성 이스라엘에게
출애굽의 영광이 도래한 것은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모세가 있었기 때문
모세를 도운 아론과 미리암이 있었기 때문
오,복되다
출애굽을 일구어낸 세 자녀의 어미여
영광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낳은 산모여
'여호와는 영광'이라는 복된 이름의 요게벳이여

김영진<성서원 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아론… 이스라엘 첫 대제사장  
● 하나님께 나아가 이스라엘을 중재하라

( 이스라엘의 초대 대제사장 - 아론 )
선민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실 제

하나님은
모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시고
아론을 모세의 대언자로 삼았네
모세는 아론의 동생, 아론은 모세의 형
그러나 아론은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복종하여
모세를 도와 곁에서, 모세의 명을 받들며
민족 구원의 역사에 큰 몫을 감당하였네
아론과 그의 가문에 하나님의 은총이 임했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희생의 제사 제물로 중재를 담당하는
고귀한 제사장의 직분을 맡았어라
거룩한 예전(禮典)의 집전자가 되었어라
그러나
그대는 연약한 인간
우매한 백성들을 하나님의 율법으로 깨우쳐야 하거늘
어리석은 백성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시내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겼구나
하나님의 종 모세를 대적하는
누이 미리암의 질투를 말렸어야 했거늘
함께 동조하여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였구나
거룩한 은총으로
거룩한 기름을 부음 받은 초대 대제사장이여
먼저 스스로를 중재하라
희생 동물의 피로서 자신을 중재하라
그리고 일어나
언약궤 있는 지성소로 들어가라
영원한 십자가의 보혈로서
죄 많은 백성을 중재하라
오고 오는 세대의 어리석은 인간들을 중재하라

● 아론 - 모세를 돕고, 이스라엘 백성을 중재하고

모세의 형

아론은 레위 지파에 소속된 고핫의 손자로서, 아므람과 요게벳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다(출 6:16-20). 위로는 ‘미리암’이라는 누이가 하나 있었고, 아래로는 세 살 연하의 남동생 ‘모세’가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 역사에서 아론의 집안이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지대하다. 출애굽과 관련하여, 동생 모세는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고, 아론 자신은 초대 대제사장이 되었으며, 누이 미리암 역시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여 선지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모세의 대언자

성경 무대에서 아론이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모세의 출애굽 소명과 관련해서이다. 하나님께 출애굽의 소명을 받은 모세가 입이 둔한 사실을 내세워 소명에 응하기를 계속 거부하자, 하나님은 그의 형 아론을 기억하시고 아론을 모세의 대언자로 결정하셨던 것이다(출 7:1-2). 이런 점으로 볼 때, 분명 아론은 언변이 탁월하여 말을 힘있고 조리 있게 잘하는 사람일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으로 모세의 대언자가 된 아론은 이후 애굽 왕에게 말을 전하고, 모세의 지팡이로 이적을 베푸는 등 모세를 도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충실히 활약하게 된다. 육신적으로 볼 때 모세는 아론의 세 살 아래 동생이었지만, 지도자의 권위는 모세가 더 높았기 때문에 아론은 동생 모세를 하나님의 큰 사자로 여겨 그의 명령에 순종했다. 적어도 이것은 아론의 사람됨이 훌륭한 인격자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스라엘 최초의 대제사장

모세의 형이나 모세의 대언자로서의 아론보다, 아론의 아론됨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의 가문에 특별히 주어진 제사장 직분에 있었다. 구약 시대에는 오직 제사장만이 희생 제사를 드릴 수 있었고, 성막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를 중재할 수 있었다. 특별히 제사장의 우두머리인 대제사장만이 하나님의 지상 임재의 상징적인 처소인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 피의 속죄 의식(贖罪儀式)을 거행할 수 있었다.

아론은 이스라엘의 초대 대제사장으로 위임받은 자로서, 구약의 제사 제도를 처음으로 시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근간을 세운 인물이다. 비록 유약한 성격으로 인해 시내 산 아래에서 백성들의 뜻에 굴복하여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누이인 미리암의 주장에 동조하여 모세의 권위에 도전한 적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아론은 123세의 일기로 호르 산에서 임종하기 전까지 이스라엘 최대 대제사장으로서 지도자의 역할을 무난하게 감당해 낸 매우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

김영진 <성서원 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훌… 출애굽의 숨은 지도자  
● 이름 없이 빛도 없이

( 모세와 아론을 도운 이스라엘의 지도자 - 훌 )

출애굽 이후/메마른 광야 생활 40년동안/힘들고 지친 모세를/충실하게 도와준 빛과 같은 인물/‘빛남’이란 이름의 훌이 있었네/

언제이던가/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광야의 유랑 족속 아말렉의 기습 공격을 받았던/그때가/

민족의 사활을 걸고/여호수아는 나가 싸우고/모세는 산에 올라 하나님께 두 손 들어 기도했나니/싸움은 치열하고/하늘 향한 모세의 두 손은 점점 힘이 빠지고/

하늘 향한 모세의 손/아래로 내려오면 이스라엘이 몰리고/위로 들리면 이스라엘이 이기는도다/

아,누가 있어 지친 모세의 손을 받쳐줄 것인가!/훌,그가 있었네/그가 모세의 지친 손을 받쳤네/이스라엘은 승리의 개선가를 불렀다네/

언제이던가/모세가 율법 받으러 시내 산으로 올라간 때가/아,또 누가 있어 산 아래 남겨진 이스라엘 백성을 돌볼 것인가/훌,그가 있었네/그가 아론을 도와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았네/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에서/모세가 모세 되고/아론이 아론 됨은/이름 없이 빛도 없이/모세를 도우고 아론을 도운/훌,그가 있었기 때문이라

● 훌 ― 모세를 돕고, 백성을 이끌고

모세의 조력자

‘빛남’이란 뜻을 지닌 훌(Hur)은 출애굽 1세대의 인물이다. 즉,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노예살이하던 때에 태어나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생활을 체험한 인물이다. 성경에서 훌의 역할이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아말렉 족속의 공격을 받았을 때다. 아말렉 족속은 에서의 손자인 아말렉의 후손들(창 36:12)로,당시 팔레스타인 남부에서 시나이 반도 북부에 걸쳐 거주하면서 목초지를 찾아 이곳저곳을 유랑하던 호전적인 유목 민족이었다.

후일 모세의 회상에 의하면(신 25:17∼18),그들은 광야 여행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렬 후미(後尾)를 기습 공격했다. 그것은 강력한 공격이어서 이스라엘의 생존이 위협당할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때 모세는 여호수아를 앞세워 그들과 맞서 싸우게 한 후,자신은 아론과 훌을 데리고 근처 산꼭대기로 올라간다.

그는 아래의 전투장면을 지켜보면서 손을 들고 하나님께 도움의 기도를 드렸다. 놀랍게도 모세가 손을 위로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지쳐 손을 아래로 내리면 이스라엘이 몰리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때 아론과 함께 모세의 한쪽 팔을 붙들어 준 인물이 ‘훌’이었다. 그 결과,모세의 팔은 더 이상 내려오지 않았고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이처럼 훌은 성경 역사에서 모세의 지친 팔을 붙들어 준 모세의 조력자로 등장했다.

이스라엘의 유력한 장로

훌은 이스라엘 장로들 중의 일인으로,모세와 아론을 도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는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다. 특히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으로 올라갈 때 아론과 훌에게 뒷일을 부탁한 것을 보면(출 24:14) 훌은 장로들 중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주후 1세기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훌이 모세의 누이인 미리암의 남편일 것으로 추정했다. 그렇다면 훌은 모세의 매형 되는 사람이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출애굽 초기에 모세를 도와 그의 손을 붙들어 주고,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고 없을 땐 아론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본 일 이외에 훌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더 이상 없다. 의심할 바 없이 훌은 죽는 날까지 모세를 도왔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었을 것이다. 오늘날 훌의 존재는 훌륭한 지도자 곁에는 항상 충성스럽고 신실한 조력자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하고 있다는 소중한 진리를 일깨워준다.

김영진 <성서원 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엘르아살… 여호수아에 안수한 대제사장  
● 셋째가 첫째 되어 대제사장 직분을 잇다

( 아론을 승계한 제2대 대제사장-엘르아살 )

모세에게
초대 대제사장 아론이 있었다면
여호수아에게는
2대 대제사장 엘르아살이 있었네
엘르아살은 아론의 아들
아론의 네 아들 중 셋째,
어찌하여 두 형을 제치고
엘르아살이 영광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될 수 있었는가?
엘르아살은 충실하였네
형이 제사장 직분을 경솔히 여겨
성막에서 죄를 범하므로 하나님을 진노케 했어도
엘르아살은 제사장 직분에 충실하여
하나님께 인정 받았다네
하나님은
엘르아살에게 영적 장자권을 넘겨주셨어라
아론을 이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 대제사장으로 삼았어라
아론를 이어
대제사장이 된 엘르아살,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의 새 지도자 된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가나안 정복의 지도자로 세웠네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여호수아와 함께 전쟁에서 이기고
여호수아와 함께 기업을 분배하므로
여호수아와 함께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초석을 놓았네
어떻게 태어나든
무슨 직분을 맡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에 충실한 자는
하나님께 인정받아
‘엘르아살의 축복’을 다시 받을 수 있으리

● 엘르아살 ― 아론의 뒤를 잇고,여호수아와 함께 일하고

대제사장 아론의 후계자

모세의 형 아론에게는 아들 넷이 있었다. 출생 순서대로 나답 나비후 엘르아살 이다말이 그들이었다. 엘르아살은 아론의 셋째아들이었다. 아론의 집안이 하나님에 의해 제사장 가문으로 선택되었기 때문에 엘르아살은 아버지 아론 및 다른 형제와 함께 제사장에 임명되었다.

아론은 이스라엘의 초대 대제사장이 되어 일반 제사장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일반 제사장들과 대제사장의 차이점은 의복 등에서 구별되지만 그 중 가장 특별한 것은 오직 대제사장만이 성막의 가장 거룩한 곳인 지성소(至聖所)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속죄 의식을 치를 수 있다는 것이다.

특별한 결함이 없는 한 대제사장의 직분은 출생 순서대로 승계되기 때문에 아론이 죽으면 장자인 나답이 제2대 대제사장이 될 것이고 나답에게 문제가 있으면 차자인 아비후가 그 직분을 잇게 될 것이었다. 따라서 삼남인 엘르아살은 대제사장 직분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아론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된 인물은 엘르아살이었다.

그의 두 형인 나답과 아비후가 제사장 직무와 관련하여 하나님께 큰 죄를 짓고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엘르아살이 형들과는 달리 제사장 직무에 충실하여 자신을 성결케 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런 엘르아살을 인정하시고 그에게 영광된 대제사장 직분을 허락하신 것이다.

여호수아의 동반자

아론이 모세의 동반자였다면 엘르아살은 여호수아의 동반자였다. 아론이 죽자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된 엘르아살은 모세의 후계자로 선택된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가나안 정복의 지도자로 세웠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함께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정복 전쟁을 치르고 여호수아와 함께 제비를 뽑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가나안 땅을 분배해주었다. 이처럼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그 땅에서 이스라엘이 뿌리를 내리는 데에 엘르아살은 여호수아와 함께 초석을 놓은 인물이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자

엘르아살은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뜻이다. 이름 뜻 그대로 엘르아살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대제사장이 되어 격변의 시기에 맡은 바 직무를 성공적으로 감당한 인물이다. 제사장으로 있을 때든 대제사장이 되었을 때든 항상 자신의 주어진 직무에 충실했던 그의 삶은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만 엘르아살처럼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인지 생생한 교훈을 준다.

김영진 <성서원 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아간… 이스라엘 패배부른 ‘탐욕의 올무’  
● 탐욕의 사람이여,이스라엘의 괴로움이여

(여호와의 물건을 훔쳐 숨긴 자 - 아간 )
마침내 요단(요르단)강을 건넌 이스라엘/가나안 정복의 첫 관문 여리고 전투를 앞두고/여호와의 엄중한 명령 들었네/“여리고 성의 모든 것들을 여호와께 바치라.”

여호와의 도움으로/견고한 여리고 성 와르르 무너졌네/이스라엘이 큰 승리를 거두었다네

아,아간이여/그대는 지금 뭘 하고 있는가/그대 장막 아래 몰래 감춘 게 무엇인가/그것은 여호와께 바쳐야 할 여리고 성의 전리품/은 이백 세겔/금 오십 세겔/시날산(産)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

이스라엘에 괴로움이 닥쳤네/작은 성 아이에게 패배하여 쓰러지며 쫓기고 말았네/울며 옷을 찢고 재를 무릅쓴 여호수아/여호와께 부르짖었네/“어찌하여 이런 일이 임했나이까?”

그 이름 아간/탐욕의 눈 번뜩이며/여호와의 물건을 도적질해 숨긴 그의 범죄 때문이었네

‘괴로움’의 사람,아간이여!/이스라엘에 ‘괴로움’ 가져다준 슬픈 아간이여/그대가 훔친 은덩이와 금덩이는/돌덩이 되어 그대를 향해 날아왔고/그대가 훔친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는/돌무더기 되어 그대를 차갑게 덮고 있구나

그대가 처형된 아골 골짝 그곳은/탐욕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탐욕의 종말을 무섭도록 경고하고 있도다

●아간 ― 여호와의 물건을 훔치고 이스라엘을 곤란에 빠뜨리고

여호와의 물건을 훔친 자

마침내 40년 광야 생활을 마무리짓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요단(요르단)강을 건너 꿈에도 그리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다. 하지만 문제는 정작 지금부터였다. 가나안 땅의 일곱 족속을 쫓아내야 하는 정복 전쟁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그 첫번째 전투의 상대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당당히 자리잡고 있던 여리고 성이었다. 이렇게 중요한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승리의 확신을 주시면서 한 가지 절대 명령을 내리셨다. 그것은 여리고 성의 모든 전리품들은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이라는 것. 따라서 아무도 그것에 손을 대서는 안 되고 모조리 불살라 첫 승리의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야 했다.

아간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전리품에 욕심을 내어 시날산(産)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銀) 200세겔과 50세겔 나가는 금덩이 하나를 훔쳐 자신의 장막으로 가져가 땅 속에 몰래 감추어 두었다. 여호와의 물건을 훔친 것이었다.

이스라엘을 곤란에 빠뜨린 자

아간의 도적질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오래지 않아 범죄의 결과는 심각하게 나타났다. 크고 견고한 성읍 여리고를 쉽게 무너뜨린 이스라엘은 근처에 있는 작은 성읍 ‘아이(Ai)’쯤은 상대조차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전투 결과는 이스라엘의 대패! 여호수아는 언약궤 앞에서 옷을 찢고 머리에 티끌을 무릅쓴 채 울면서 땅에 엎드렸다.

그때 하나님은 자신의 물건이 도적 맞은 사실을 알려주었고 여호수아는 제비를 뽑아 범인을 찾았다. 제비뽑기가 계속 진행되는 동안에도 아간은 끝내 뉘우치지 않다가 결국 자신이 범인으로 판명되자 사실을 실토했다. 하지만 때는 늦었고 그와 그의 가족들은 아골 골짜기로 끌려가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다. 하나님을 능멸하고 이스라엘을 곤란에 빠뜨린 죄 때문이었다.

아골 골짜기 너머 소망의 문으로

사람들은 아간이 돌에 맞아 죽은 곳을 ‘아골 골짜기(Valley of Achor)’라고 불렀다. ‘환난의 골짜기’란 뜻이다. 아간의 범죄가 그 자신은 물론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게 큰 환난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일 호세아 선지자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줄 것이라고 말했다(호 2:15). 우리도 아간처럼 범죄할 수 있다. 하지만 회개를 통해 우리는 고통과 죽음의 아골 골짜기를 넘어 용서와 회복이라는 소망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김영진 <성서원 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오네시모…달아난 노예,바울의 ‘심복’되다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빌레몬의 달아난 노예-오네시모)

주후 1세기의 로마제국
가혹한 노예제도가 있던 그때에
주인의 재물을 훔쳐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무익한 노예라
주인에게서 달아난 노예 오네시모
골로새를 떠나 로마에 숨어들어
불안한 도피의 나날을 보내다가
로마 옥에 갇힌 바울을 만났네
바울에게서 복음을 전해들은 오네시모
회심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니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 되었네
바울의 심복이 되었네
주인에게 돌아가는 오네시모
바울의 신임을 받아
바울의 편지를 들고
죽음을 각오하고
로마를 떠나 골로새로 돌아갔네
주인의 용서를 받은 오네시모
바울에게 복음의 빚진 자된 빌레몬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자유인이 되게 하였도다
오네시모를 유익한 형제로 삼았도다
그대여
주인 되신 하나님에게서 달아난 ‘오네시모’여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돌아가라,주인 되신 하나님께로!
그대여
그대에게 상처 준 ‘오네시모’는 누구인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를 용서하고 기쁘게 형제 삼아라
오네시모-무익한 자가 변하여 유익한 자가 되고
주인에게서 도망친 무익한 노예

오네시모는 골로새에 살고 있던 빌레몬의 노예였다. 그가 어떤 이유로 노예의 몸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노예로서 로마제국의 법률에 따라 주인 빌레몬에게 충성하면서 살아가야 할 운명이었다. 하지만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에게 물질적인 손해를 끼치고 로마로 도망쳤다. 아마도 도망 다닐 때 필요한 재물을 훔쳤을 것이다.

이것은 사형에 해당되는 큰 죄였다. 당시 로마제국의 노예 수는 대략 6000만명 정도로 자유 시민의 4배에 달했다고 한다. 로마는 이처럼 많은 노예들을 효율적으로 다루기 위해 가혹하고도 철저한 노예 제도를 만들었는데 당시 로마법대로라면 오네시모의 행위는 100번 죽어 마땅한 큰 죄였다.

복음 안에서 거듭난 유익한 형제

주인의 재물을 훔쳐 제국의 수도인 로마까지 도망친 오네시모는 불안한 가운데 도피생활을 계속하던 중 바울을 찾아갔다. 그런데 당시 바울은 가이사에게 고소한 일로 인해 연금돼 있었다. 바울로부터 복음을 접한 오네시모는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했고 이후 바울의 곁에 머무르며 시중을 들면서 신실한 믿음의 삶을 살았다. 이런 오네시모를 가리켜 바울은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이제는 유익한 자’ ‘내 심복’이라고 표현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해 그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특별히 편지를 썼다. 빌레몬은 바울의 제자로 바울을 통해 복음을 전해듣고 신자가 된 후 골로새 교회를 섬기고 있던 신실한 믿음의 인물이었다. 편지에서 바울은 이제는 유익한 자가 된 오네시모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그를 믿음 안에서 형제로 받아들일 것을 정중하게 부탁했다. 바울의 부탁은 빌레몬에 의해 기꺼이 받아들여졌고 오네시모는 복음 안에서 믿음의 형제로 거듭났다.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하자

본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오네시모’였다.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세상으로 도망친,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는 무익한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로 다시금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진,큰 은혜를 입은 자들이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는 우리의 ‘오네시모’를 이제 기꺼이 용서해야 한다.

나의 용서를 필요로 하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진정한 용서를 베풀고 그를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당신의 용서를 구하는 ‘오네시모’를 결코 배척하지 말라.

김영진 <성서원 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빌레몬 - 주인 재물 훔쳐 달아난 노예 용서  
바울의 제자요,교회의 동역자

빌레몬과 바울의 만남은 에베소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3차 전도 여행 중이던 바울은 에베소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그곳의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가르치고 있었다. 한편 소아시아 지역 골로새의 부유한 지역유지인 빌레몬은 사업차 때마침 에베소를 방문했다가 바울로부터 십자가 복음을 전해듣고 개종하여 신자가 되었다. 그 후 바울의 제자로서 착실하게 복음을 배웠다. 그리고 고향 골로새로 돌아온 빌레몬은 자신의 집을 개방하여 골로새 교회를 세우고 충만한 믿음과 사랑으로 교회를 잘 양육해 나갔다.

골로새 교회의 탁월한 지도자

이처럼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직접 설립한 교회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문제 없이 교회가 주 안에서 무럭무럭 자랄 수 있었던 것은 빌레몬의 물질적인 봉사가 컸고 행정적인 지도력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훗날 로마 옥중에 갇히게 된 사도 바울은 이같은 골로새 교회의 좋은 형편을 전해듣고 빌레몬으로 인해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다고 말했다.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빌레몬서 1:7)

달아난 노예 오네시모의 주인

바울과 빌레몬의 개인적인 접촉은 ‘오네시모’ 때문에 이루어졌다. 오네시모는 빌레몬 집의 노예로 주인의 재물을 훔쳐서 로마로 달아난 자였다. 그는 그곳에서 바울을 만나 복음을 전해듣고 회심한 후 바울의 신실한 수종자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 로마법에서는 달아난 노예는 주인의 절대적인 권한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바울은 복음의 제자요,교회의 동역자인 빌레몬에게 특별한 편지를 써서 보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그를 믿음의 형제로 받아들일 것을 빌레몬에게 정중하게 부탁했다. 성경의 ‘빌레몬서’가 그 내용이다.

이후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바울의 편지를 벅찬 가슴으로 읽은 빌레몬은 복음의 스승인 바울의 부탁으로 오네시모를 기꺼이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노예에서 영원히 해방시킨 후에 다시 바울의 수종자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처럼 빌레몬은 바울의 가르침을 통해 사랑과 용서라는 복음의 도를 제대로 배웠고 배운 그대로 실천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그런 빌레몬을 이 시대의 단상에 모시고 참된 복음의 도를 겸허한 자세로 배워야 할 것이다. <성서원 회장>

오 형제여,믿음과 사랑의 형제여

믿음과 사랑이 충만한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 - 빌레몬

오,형제여!/‘사랑을 간직한 자’ 빌레몬이여/주 예수를 향한 그대 믿음/교회 성도들을 위한 그대 사랑/멀리 로마 옥중까지 퍼졌도다/오늘 우리에게까지 들려오는구나

그대 집 활짝 열어/고향 골로새에 주님의 몸된 교회 세웠네/그대의 구제로 말미암아/많은 교회 성도들이 마음의 평안을 얻었고/그대의 사랑으로/옥중의 사도 바울은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네

오,형제여/그대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서/사도 바울의 강론을 듣고/참된 믿음과 사랑의 도를 배웠고/배운 대로/주님과 교회 위해/믿음과 사랑이 풍성하도록 실천하는구나

로마 옥중의 사도 바울에게서/사랑의 편지 ‘빌레몬서’를 받고서/떨리는 감격으로/아멘의 충성으로/넘치는 순종으로/달아난 노예 ‘오네시모’를/형제로 따뜻하게 영접했네

오,형제여/오늘 이 시대 우리들의 강단에 서게 하소서/그리하여/주를 향한 믿음이 무엇인지/교회 위한 봉사가 무엇인지/형제 사랑이 무엇인지 강론하소서/메마른 우리들의 가슴을 시리도록 울리소서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디도…바울의 오른팔…‘문제교회’해결사  
믿음직한 동역자의 삶

복음 전도자 사도 바울에게는 참으로 믿음직한 동역자가 있었다. 이방 헬라 출신이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한 후 사도 바울을 도와 복음 전파에 헌신한 디도가 그였다. 모세 곁에 여호수아가 있었다면 바울 곁에는 디도가 있었다. 사도 바울은 중요하고 힘든 임무가 있으면 부담 없이 디도에게 그 일을 맡겼다.

기근을 만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거액의 구제금을 모금했을 때도 디도 편에 그것을 전달했고 교회를 세운 후에 문제가 있으면 그곳에 디도를 보내 그들을 붙들어 주었다. 디도는 바울의 기꺼운 손이요,발이었다. 기독교 박해의 차가운 바람이 매몰차게 불던 시기에도 디도는 사도 바울의 힘든 여정을 줄곧 따라 다녔고 바울이 보내는 곳이면 어디든 갔으며 바울이 부르면 언제든 달려왔다. 이렇듯 디도의 존재는 사도 바울에게 큰 힘이 되었고 많은 위안이 되었다.

충성스러운 목회자의 삶

사도 바울이 힘써 복음을 전하여 신자를 얻고 그곳에 교회를 세우면 그것으로 복음 사역이 끝난 게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 곳곳의 교회마다 이런저런 문제들이 생겨났다. 문제 있는 교회마다 바울이 직접 달려가 해결하기에는 바울의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문제가 있는 교회에 아무나 보낼 수도 없었다. 십자가 복음의 진리 위에 굳게 서서 그것을 올바로 가르쳐줄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이 있어야 했다. 그런 때 디도는 바울에게 보배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를 곳곳에 파견한다. 그리스의 고린도 교회로,지중해의 그레데 교회로,동유럽의 달마디아 교회까지…. 그리고 디도는 바울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가는 곳마다 문제가 많은 교회를 복음 진리의 터 위에 굳게 붙들어 세운다. 이처럼 디도는 어디든 달려갈 채비를 갖춘 소명 있는 목회자였고 언제든 떠날 준비를 갖춘 청렴한 목회자였다.

오고 오는 모든 주의 일꾼들에게

바울은 자신의 서신에서 디도를 열세 차례나 언급한다. 그것은 디도가 그만큼 긴요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바울은 결코 디도를 자신의 심부름꾼 정도로 가볍게 취급하지 않았다. 복음의 아들인 그를 동무처럼 사랑했고 주의 종으로서 존경했다. 위대한 바울 사도의 말을 직접 들어 보라!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나의 동역자니라”(고후 8:23) 오늘 그대여,사도 바울만을 꿈꾸지 말라. 어쩌면 그것은 소명이 아니라 스포트라이트에 매료된 교만일 수 있다. 디도처럼 믿음직한 동역자가 되어라. 주님의 교회에 꼭 필요한 손발이 되어라.

나의 동무,나의 동역자

신실한 목회자상의 길라잡이-디도

이토록 믿음직한 동역자가 또 있을까/이토록 충성스런 목회자가 또 있을까

기독교 박해의 차가운 삭풍이 불던 시대에/사도 바울이 가는 고난의 길마다/그림자처럼 동행한 믿음직한 동역자,디도

비록 헬라에서 태어난 이방인이었지만/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일찍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믿음의 용사,디도

복음의 아비 바울의 보냄을 받고/그리스의 고린도 교회로/지중해 섬의 그레데 교회로/동유럽의 달마디아 교회로/어디든지 주님의 교회를 찾아가 섬긴 충성스런 목회자,디도

복음의 스승 바울을 따라/두려움을 떨치고/위험을 무릅쓰고/예루살렘 공의회까지/로마의 감옥까지 기꺼이 동행한 신실한 복음의 제자,디도

이리하여 디도는,/고난받는 노종 바울에게/그윽한 위로와 크나큰 힘이 되었네/과연/“디도는 나의 동무요,나의 동역자”라고 말한/바울의 칭송이 어찌 헛된 것일까

디도여/신실한 복음의 동역자로서/목숨 다하는 날까지 아픈 가시밭길을 웃으며 걸은 이여,/오늘 그대는 복음의 일꾼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알려 주었다/참된 목회자상의 본을 보여 주었다/그대 가신 목회의 발자취마다 영혼을 구원하는 아름다운 꽃으로 탐스럽게 피어나라

김영진 <성서원 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디모데… 바울 도와 초대교회를 일으키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을 수 있는
가장 값진 유산은
분명 천국기업을 보장해주는 신앙이라
초대 교회 당시에
이렇게 값진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은 복된 인물 있었네
어려서부터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신앙의 교육을 받고 자란
디모데라
물려받은 신앙으로
그 또한 경건한 신앙인 되어
믿는 형제들의 칭찬을 받고
사도 바울에게서 할례를 받았네
사도 바울의 복음의 아들이자 동역자 되어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고린도 교회에서
그리고 에베소 교회에서
신실하게 주님의 교회를 돌본
아름다운 목회자의 삶을 살았네
주님의 복음을 좇아,복음의 아비 바울을 따라
병약한 몸으로
기나긴 전도 여행을 함께 하고
로마의 차가운 감옥까지 함께 들어가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을 위해
마침내 순교에까지 이른 믿음의 참 용사
신앙의 승리자가 되었네
믿음 안에서 바울의 참아들 된 디모데여
바울의 사랑하는 복음의 아들 된 디모데여
그대,조용히 가르쳐주고 있구나
조상에게 물려받아야 할 것은 신앙이란 것을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도 신앙이란 것을
오직 신앙만이
세상을 이기는 참된 힘이란 것을

[디모데-신앙의 젖을 먹고 자란 복음의 아들]

복된 신앙의 상속자

디모데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 땅 루스드라 출신이었지만 참으로 값진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고 태어났다. 유대인 모친인 유니게와 조모인 로이스에게서 ‘여호와 신앙’을 물려받은 것이다. 그래서 디모데는 어릴 적부터 신앙 교육을 가정에서 받고 자랐다.

그 결과 디모데는 경건한 신앙인으로 성장했고 인근 지역인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일대에서 모든 교회 형제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후일에 사도 바울도 디모데를 향해 “그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했다(딤후 1:5). 이렇게 디모데는 교회의 일꾼이 무척 귀했던 초대 교회에서 주님의 교회를 위해 일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경건한 젊은 목회자

디모데와 사도 바울의 만남은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 중에 루스드라를 방문했을 때 이루어졌다. 언제나 신실한 동역자가 필요했던 바울에게 준비된 복음 사역자 디모데는 간절한 기도의 응답이었다. 바울은 유대인을 향한 복음 전도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헬라인 부친을 둔 디모데에게 유대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시킨 후 그를 믿음의 아들이자 복음의 동역자로 삼아 함께 전도 여행을 했다.

그리고 바울은 젊지만 누구보다 경건했고 신앙의 뿌리가 깊은 디모데를 전적으로 신임하여 곳곳의 교회에 그를 파송했다. 디모데는 믿음의 아버지인 바울의 뜻에 순종하여 바울에 의해 파송된 데살로니가 교회에서,고린도 교회에서,그리고 에베소 교회에서 성실하고 진실하게 주님의 교회를 보살폈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경건함과 깊은 말씀의 가르침으로 교회들을 튼튼히 세워 초대 교회 목회의 선구자적 역할을 잘 감당하였다.

신앙의 승리자

디모데는 본래 몸이 약하여 이런저런 병치레를 자주 했다. 그것은 바울을 비롯한 모든 동역자의 걱정과 근심이었다. 그러나 복음의 열정은 가슴속에 뜨겁게 불타올랐고 신앙은 태산처럼 강건했다. 그리하여 약한 몸이었지만 디모데는 바울을 따라 힘든 전도 여행을 언제나 같이 다녔고 바울과 더불어 로마의 차가운 감옥에까지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는 바울의 뒤를 따라 십자가 복음을 위해 순교했다.

어릴 적부터 뿌리 내렸던 디모데의 깊은 신앙은 병약한 육체를 뛰어넘어 드넓은 복음의 세계를 마음껏 활보했다. 바울을 도와 흔들리는 교회를 찾아가 강하게 붙들어 주었고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 복음을 위해 기꺼이 순교의 피를 흘렸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바울의 권고대로 디모데는 죽는 날까지 이 세상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힘껏 싸워 최후의 신앙 승리자가 되었다. 복음의 아비인 바울과 함께 의의 면류관을 차지했다(딤후 4:7∼8).

김영진 <성서원 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뵈뵈…바울사도에 헌신…‘로마서’전달 영예  
복음은 있으나
복음을 들으려는 이 많지 않고
복음 전도자는 있으나
그들을 도우려는 이 많지 않던 때
고린도의 항구 도시 겐그레아에
맑고 빛나는 순결의 신앙으로
사도들을 돕고
성도들을 도와준
헌신과 봉사의 여집사 있었네
그녀는
‘순결’이라는 뜻의 뵈뵈
사도 바울은
그녀의 정성 깃든 도움의 손길이 너무 고마워
“그녀는 나와 여러 성도들의 보호자”라
기꺼이 불렀네
사도 바울은
그녀의 신실함에 한 점 의심 없어
그녀의 손에 ‘로마서’ 서신을 들려
로마의 성도들에게 전했다네
귀하다
뵈뵈여
생명의 서신을 든 그 손이여
복되다
주님의 일꾼을 섬기는 그 신앙이여
그대 거기 있어
거친 세파에 지친 복음
편히 쉴 수 있었고
부르튼 복음 전도자의 발
안식을 누렸네
하늘 상급 어찌 크지 않으리

[뵈뵈-그 헌신과 봉사로 대사도의 천거를 받다]

겐그레아 교회의 여집사

겐그레아는 고린도에서 동쪽으로 11㎞ 지점에 있는 항구 도시였다. 이곳은 고린도에서 나가고,고린도로 들어가는 선적의 화물을 취급하고 승선객의 승강장 역할을 감당한 고린도의 중요한 동해항이었다. 바울도 제2차 전도여행의 귀로인 이곳에서 배를 탔다(행 18:18). 이곳에는 겐그레아 교회가 있었고 그 교회에 ‘맑고 순결함’ 혹은 ‘빛남’이라는 이름을 가진 ‘뵈뵈’라는 여집사가 있었다.

사도와 성도들의 보호자

겐그레아 교회의 여집사 뵈뵈는 겐그레아 항을 지나는 성도들에게 이모저모로 많은 도움을 베풀었다. 아마도 그녀는 나름대로 지위와 재산을 갖춘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선용하여 힘껏 도움을 베푼 것이다.

제2차 전도여행 때 바울도 겐그레아 항을 지나면서 뵈뵈의 집에서 여러 날을 체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 바울은 뵈뵈의 헌신적인 도움을 많이 받았고 또한 교회 성도들에 대한 그녀의 적극적인 봉사를 보고 들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녀의 신실함을 믿고 그녀의 손에 ‘로마서’ 서신을 들려 로마 교회에 보냈다.

그 편지에서 바울은 뵈뵈를 교회의 미쁜 일꾼으로 기꺼이 천거하면서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라고 소개했다. 여기서 ‘보호자’는 ‘후원자’(helper)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그녀를 합당한 예절로 영접하라고 권면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롬 16:1∼2)

뵈뵈의 길을 따라

바울이나 베드로와 같은 위대한 사도들이 혼자서 일을 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 곁에는 이모저모로 도움을 준 후원자들이 반드시 있었다. 특히 헌신적인 봉사로 실제적인 도움을 많이 주었던 여집사들이 있었다.

베드로에게는 욥바 교회의 ‘도르가’가 있었고 바울에게는 겐그레아 교회의 ‘뵈뵈’가 있었다. 이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세상 풍파에 시달린 사도와 교회는 위로를 받고 쉼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그런 후원자의 손길을 원하고 그리워한다.

김영진 <성서원 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유두고 - 졸음에 죽었다가 이적으로 살아났다  
그의 죽음

유두고는 드로아 출신의 청년 교인으로 그의 이름은 ‘복됨’이란 뜻이다. 그는 바울의 드로아 집회에 참석하여 바울의 설교를 듣던 중 설교가 길어지자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3층 난간에서 떨어져 죽은 인물이다(행 20:7∼9). 당시 바울은 3차 전도여행(주후 53∼58년께)중이어서 에베소와 그리스를 지나 소아시아의 드로아에서 사역하고 있었다.

드로아 집회에서 사도 바울의 힘있는 설교는 밤늦도록 계속되었고 신자들로 가득 메운 집회 장소는 어느 때보다도 말씀으로 뜨거웠다. 이때 유두고라는 청년은 환기를 하려고 만들어 놓은 3층 창문의 난간에 걸터앉아 바울의 설교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오랜 시간 설교를 듣다 보니 피곤함을 이길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로 공기는 후텁지근했고 주변의 등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 등으로 청년 유두고는 졸음을 이기지 못한 채 아래로 떨어져 뜻밖의 큰 변고를 당했다.

그의 소생

유두고의 죽음은 설교 집회중 일어난 실로 어처구니없는 변고로 예배당에 모인 드로아 교인들은 크게 당황하여 심령이 낙망되었다. 따라서 은혜로웠던 집회 열기는 뜻밖의 큰 소동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뜨겁던 복음의 열기는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질 판이었다. 한마디로 큰 시험이 닥쳤다.

이때 바울은 구약의 엘리사와 엘리야 선지자가 취했던 행동처럼(왕상 17:1∼24,왕하 4:32∼37) 이미 숨이 끊어진 청년 유두고 위에 몸을 굽혀 엎드린 후에 그 몸을 끌어안고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의 능력으로 그를 다시 소생시켰다. 이처럼 뜻밖의 변고가 오히려 놀랍게 바뀌게 되자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목도한 드로아 교회 교인들은 오히려 부활의 신령한 체험을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유두고 사건을 통한 교훈

청년 유두고가 3층 창문 난간에 걸터앉아 졸다가 떨어져 죽은 것은 말씀 앞에서 진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 사건을 놓고 유두고의 행실을 나무라거나 비방하지 않았다. 오히려 졸음을 참으면서까지 늦도록 집회 자리를 지킨 청년 유두고의 변고를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유두고를 소생시켰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교인들은 쉽게 낙망하거나 상대방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사랑과 긍휼의 정신으로 서로 감싸주면서 그 문제의 선한 해결을 통해 더욱 신령한 은혜의 자리로 만들어가야 한다.

졸지 말고 깨어 있어라
(죽었다가 소생한 드로아의 청년 교인 - 유두고 )

드로아의 밤은 깊어만 가고
바울의 설교는 지칠 줄 모르네
세번째 전도 여행 때
드로아 교회를 방문한 바울은
정열을 쏟아
은혜로운 고별 설교를 하였네
유두고!
‘복되다’란 이름의 드로아 교회 청년
바울의 집회에 참석하여
삼층 난간에 걸터앉아
바울의 설교를 듣고 있었네
시간은 흐르고
밤은 깊어 가니
졸음이 유두고를 유혹하는구나
유두고야, 졸지 마라
유두고야, 깨어 있어라
어찌할까
마침내 졸음에 겨웠던 유두고
삼층 난간에서 떨어져
그만 숨이 끊어지고 말았네
사단의 방해였나
뜨겁고 은혜로운 바울의 드로아 집회는
한순간 차갑게 술렁이고
교인들은 어쩔 줄 몰라 낙망했네
그러나 보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바울의 기도로
끊겼던 유두고의 숨이 다시 돌아왔으니
부활의 놀라운 체험을 하였구나
바울의 집회는 다시 밤새 이어지고
은혜로운 말씀의 불길은
오늘토록 계속 타오른다

김영진 <성서원 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아볼로… 천막제조 무명 부부에게 복음 배워  
겸손히 복음을 배우다

아볼로는 애굽의 대도시인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 학자이다. 그는 구약성경에 능했고 언변까지 뛰어났다. 유대 광야에 세례 요한이 등장했을 때 아볼로는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되어 중근동 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유대인들의 모임 장소인 회당을 중심으로 메시아를 열심히 전하며 가르쳤다. 하지만 아볼로는 메시아의 복음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갖지 못한 채 세례 요한의 가르침 이상을 가르칠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에베소의 한 회당에서 가르칠 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게 되고 그들 부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자세히 배우게 됨으로써 마침내 복음의 진수를 깨우치게 된다. 당대의 뛰어난 학자인 아볼로가 무명의 천막 제조업자에 불과한 브리스길라 부부에게 복음의 도를 배웠다는 사실은 복음에 대한 아볼로의 열심과 겸손을 잘 보여준다.

힘있게 복음을 전하다

에베소에서 브리스길라 부부를 통해 복음의 진수를 깨우친 아볼로는 복음 증거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그래서 고린도로 가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힘 있게 전파했고 회중 앞에서 가진 변론에서 유대교도들의 말을 무력하게 하고 이겼다. 이로 인해 고린도 교회 안에서 아볼로파가 생겨나기도 했다(고전 1:12).

그 결과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파와 아볼로파가 생겨 교인들끼리 서로 다투기도 했지만 바울이나 아볼로 사이에는 아무런 불화가 없었다. 오히려 바울은 아볼로에게 극심한 분파주의자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던 고린도 교회를 돌보아줄 것을 권면했다(고전 16:12). 아무튼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아볼로파가 형성된 것으로 미뤄볼 때 아볼로는 그만큼 영향력을 갖춘 능력 있는 복음 전도자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라

아볼로는 성경에 대해 뛰어난 지식을 가진 대학자였지만 브리스길라 부부를 통해 복음의 진수를 깨닫기 전에는 참된 복음 전도자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복음을 듣고 복음의 진수를 깨달음으로써 정녕 힘 있는 복음 전도자가 될 수 있었다. 특히 대학자로 인정받던 아볼로가 한낱 천막을 제조하는 무명의 부부에게 복음을 듣고 배운 것은 자신의 사회적인 신분이나 체면 때문에 복음 듣기를 꺼려하는 많은 지식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렇지만 누구든지 복음을 깨닫고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기 전에는 참된 복음 전도자가 될 수 없다.

진리의 영원한 대변자

깊은 학문을 지닌 복음 전도자-아볼로

저 애굽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율법에 정통한 유대인 학자가 있었네/황금의 입을 가진 뛰어난 웅변가/아볼로

처음에는/세례 요한의 제자로/‘율법의 메시아’를 가르쳤지만/에베소에서/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겸손히 복음을 듣고/열심히 복음을 배워/비로소 복음을 깨달았도다

이제 아볼로/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네/‘복음의 메시아’를 힘 있게 설교하네/교회에 많은 유익을 주는구나/교인에게 풍성한 은혜를 끼치는구나

그대 강단에 올라/말씀의 사자후를 토하면/율법주의 유대교도들이 벌벌 떨었네

고린도 교회의 무지한 교인들이/‘아볼로파’를 만들어/그대를 받들어 섬기려 했지만/그대는 일생을 기울여 복음을 심고 물 주며/바울의 동역자로/그리스도의 종으로/겸손하게 복음 전도자의 길만을 걸었네

거짓과 궤변이 판치는 이 시대에/복음의 사자후를 토하던/그대가 정녕 그립다/기독교 진리의 영원한 대변자여!

김영진 <성서원 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루디아… 자신의 집 내놔 유럽 첫 교회 세워  
루디아와 바울의 만남

루디아는 빌립보의 시장에서 자줏빛 옷감을 팔던 여인이었다. 여인네 몸으로 생업의 일선에 뛰어든 것을 보면 루디아는 집안의 생계를 꾸려 나가는 고된 나날을 보내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루디아는 빌립보 시장에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열심히 옷감을 팔고 있었다.

그럴 즈음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을 하고 있었다. 사도 바울은 환상을 통해 계시를 받고 아시아로 가려던 계획을 바꿔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도 바울로서는 가슴 설레는 첫 유럽 전도여행이었다. 마케도니아 지역의 첫 관문이자 가장 큰 성인 빌립보에 도착한 바울은 기도하고 설교할 장소를 찾아 그곳의 강변을 헤매고 있었다.

그때 강변에 모여 있던 한 무리의 여인들에게 설교를 했는데 그 중에 루디아가 끼여 있었다. 이렇게 해서 교회사에 길이 남을 소중한 만남이 이루어졌다. 바로 위대한 복음 전도자 사도 바울과 빌립보의 자줏빛 옷감 장수인 루디아의 만남이었다.

루디아의 헌신과 봉사

사도 바울로부터 십자가 복음을 접한 루디아는 뜨거운 가슴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 유럽 땅 빌립보에 공식적으로 첫 교인이 탄생한 것이다. 이때부터 주님의 교회를 위한 루디아의 헌신과 봉사가 그 찬란한 빛을 발한다. 먼저 루디아는 자신의 집을 모임 장소로 제공한다. 그래서 루디아는 사도 바울과 함께 유럽 땅 마케도니아에 주님의 첫번째 교회를 세우게 된다.

말하자면 루디아의 보잘 것 없는 작은 집이 복음의 세계화를 위한 발판이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루디아는 매일의 수고에 지친 주의 종 바울을 정성껏 대접한다. 힘들고 어려운 생계였지만 루디아는 열심히 옷감을 팔아 기쁜 마음으로 교회를 위하고 주의 종을 위한다.

루디아의 길을 따라서

루디아는 가진 것이 별로 없었고 내세울 것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그저 시장 바닥에서 옷감을 파는 영세 상인에 불과했다. 게다가 고대 사회에서 많은 한계를 가진 연약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루디아가 마음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 자신의 작은 것을 주님께 바쳤을 때 모든 것이 위대한 가치를 갖게 되었다.

시장 바닥의 이름 없던 여인이 교회사에 길이 남을 유럽의 첫 신자가 되었고 삶의 궁색함이 배어 있던 그녀의 작은 집은 유럽의 첫 교회가 되었다. 유럽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위대한 전진기지가 된 것이다.

오늘 그대여,자신의 존재가 보잘 것 없고 가진 것이나 내세울 것이 없는가? 루디아를 보라. 그리고 그 길을 따라라. 자신의 존재가 어떠하든,가진 것이 무엇이든,그것이 주님께 온전히 드려진다면 그것은 주님의 손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가치를 발휘할 것이다.

헌신과 봉사의 자줏빛 옷감을 팔다

유럽 땅 마케도니아 첫 교인 - 루디아

오늘도 어제처럼/ 삶의 힘겨움을 여기 저기 펼쳐 놓고서/ 빌립보의 저잣거리에서 힘껏 목청 돋우는/ 자줏빛 옷감 장수,루디아

오늘도 내일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마케도니아 땅의 첫 성 빌립보로 들어서고 있는/ 위대한 복음 전도자,사도 바울 있었네

그리하여/ 하나님의 준비된 섭리 안에서/ 바울이 루디아를 만나고/ 루디아가 바울을 만나니

/ 유럽 땅 마케도니아에 주님의 첫 교회가 세워졌어라

복되다,루디아여/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기 위해/ 하루하루 일해야 하는 힘든 현실 속에서도/ 주님의 종을 기꺼이 영접한 아름다운 헌신이여

귀하다,루디아여/ 기도할 곳을 찾아 강변을 떠돌던 바울에게/ 자신의 작은 집을 내어 주어 교회 삼음으로/ 유럽 땅 마케도니아에 첫 교회를 세우고,/ 복음 세계화에 초석을 놓은 숭고한 희생이여

오늘도 빌립보 저잣거리에서/ 그녀가 파는 고운 자줏빛 옷감은/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헌신의 옷감,/ 주님의 일꾼을 섬기는 봉사의 옷감이라

초대교회로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곳곳마다 세워지는 교회의 역사에/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여인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음은/ 복되고 귀한 루디아의 신앙이/ 무수히 꽃 피어나는 은총의 열매라

김영진 <성서원 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로데… 순수한 믿음의 꽃으로 핀 ‘장미 소녀’  
꽃이 있었네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피어 있는
한 송이 순수한 믿음의 꽃,
‘장미’라는 이름의 로데
성도들이 있었네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모여
다 함께 마음 모은 성도들,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 드리고 있었네
박해중에 있는 교회를 위해
감옥에 갇혀 있는 베드로를 위해
놀라워라
천사의 도움으로
쇠사슬이 풀리고
옥문이 절로 열려
베드로가 살아 나왔네
쿵쿵쿵
마리아의 집 대문을 급히 두드리는 소리
장미 소녀 로데가 달려 나갔네
그 음성을 듣고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서 있는 줄 믿었네
“대문 밖에 베드로가 서 있어요.”
장미 소녀 로데의 기쁜 외침에
기도하던 성도들은 그녀를 꾸짖었네
“미쳤구나, 얘야.”
순수한 믿음의 장미 소녀 힘써 말했네
“아니예요, 참말이에요!”
참말이고말고 로데야
왜 어른들은 기도를 하고서도 그 응답을 믿지 않을까
믿음이란 그저 순수하게 믿으면 되는 것을,
작은 장미 소녀 로데처럼
로데야,
봄 여름 가을 겨울
오래도록 우리 마음 속에 순수한 믿음의 꽃으로 피어 있어라

● 로데 -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신앙으로

로데가 누구인가

로데에 관한 성경 기록은 사도행전 12장의 단 세 절뿐이다(행 12:13∼15). 그녀는 마가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집에서 이것저것 심부름과 잔일을 하는 계집아이다. ‘로데(Rhode)’라는 이름의 뜻은 ‘장미’이다. 아마도 장미처럼 아름답고 예쁘게 살아가라고 지어준 이름일 게다.

구속사(救贖史)의 무대 위에서 로데라는 장미 소녀가 맡은 역할은 아주 간단하다. 베드로가 출옥하였을 때 마리아 집 대문을 열어주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앙증맞은 장미 소녀 로데는 그 간단한 배역조차 실수하고 만다.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서서 “문 열어 다오.” 하면서 급히 문을 두드리자 대문까지 나온 로데는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면서도 도로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서 있어요.”라고 기쁘게 외친다. 하지만 정작 문을 열어 주지는 않았다. 헤롯의 군사들이 베드로를 뒤쫓고 있을지도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서 말이다.

이렇게 로데는 하나님을 놀라게 하는 실수를 했다. 그런데도 전혀 밉지 않은 성경의 앙증맞은 개구쟁이가 바로 장미 소녀 로데이다.

어른들을 부끄럽게 만든 순수한 믿음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성도들이 모인 것은 베드로의 출옥을 위해 다 함께 모여 하나님께 합심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 열심히 기도했다. 그런데 막상 베드로가 출옥하여 마리아 집 대문 앞에 섰을 때 그 음성을 듣고 아무런 의심 없이 베드로인 줄 믿은 사람은 장미 소녀 로데뿐이었다.

베드로의 출옥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던 어른들은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서 있어요.”라고 로데가 말했을 때 오히려 로데를 꾸짖었다. “네가 미쳤구나.” 하면서 말이다. 장미 소녀 로데는 어른들의 불신이 오죽 답답했을까? 그래도 기죽지 않고 힘써 말한다. “참말이에요.”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믿음을 위하여

그렇다! 로데의 말은 참말이었다. 그 시간 베드로는 천사의 구출로 감옥이 아닌 분명 마리아 집 대문 밖에 서 있었다. 그런데 그 사실이 오직 순수한 어린아이의 신앙을 가진 로데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졌다. 믿음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원대한 이상도 아니고 심오한 주제도 아니다. 그것은 아주 단순하고 명료한 것이다.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순백의 눈송이와도 같은 것이다. 장미 소녀 로데처럼 믿고 바라는 바를 그저 순수하게 믿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도 그런 믿음을 갖자. 그런 믿음으로 믿자.

김영진 <성서원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고넬료…하나님의 품에 안긴 로마군의 장교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

유대 땅 갈보리 언덕 위에서 예수란 청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던 그 즈음 유대 땅 북부의 가이사랴라는 곳에 로마 총독부가 있었다. 그리고 ‘고넬료’라는 로마군의 백부장이 그곳에 주둔군의 일원으로 파견되었다. 백부장이란 수하에 100명의 군사를 거느린 로마군의 장교였다. 그렇다! 고넬료는 정복자 로마 군대의 장교였다. 대부분 주둔군 장교가 그러하듯 그도 힘없는 식민지 백성에 대해서 한껏 거드름을 피워도 전혀 거칠 것이 없었던 대로마제국의 자랑스러운 장교였다.

유대인의 친구 고넬료

그런데 고넬료는 좀 달랐다. 아니,많이 달랐다. 그는 식민지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힘껏 도움을 베풀었고 좋은 일을 많이 했다. 주둔군 장교라는 오만함을 떨쳐버리고 유대인의 친구가 되어 그들을 형제처럼 진실하게 대했다. 이와 같은 고넬료의 행동은 위선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난 진심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고넬료에 대해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행 10:22).

아니나 다를까. 고넬료는 로마 군인으로서는 매우 특이하게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다. 자신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하나님을 정성껏 섬겼다. 그는 매일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를 드리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런 고넬료를 하나님은 모두 굽어보고 계셨다.

최초의 이방인 세례자 고넬료

어느 날 하나님은 고넬료에게 환상을 보여주셨다. 고넬료는 환상 속에서 지시 받은 대로 욥바에 있던 사도 베드로를 초청했다. 고넬료는 일가와 친구들을 모두 불러 모았고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의 가르침을 갈망했다. 베드로 역시 환상을 통해 고넬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이미 깨달았다.

그리하여 교회 역사상 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만남이 이루어졌다. 유대인 사도 베드로와 이방인 고넬료의 만남! 십자가의 예수를 전하는 베드로,마음문을 활짝 열고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고넬료! 마침내 성령이 이방인들 위에도 풍성히 임했다. 방언이 터졌고 세례가 베풀어졌다.

이 사건은 초대교회 당시의 신자들에게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증거해주는 귀중한 사건이었다. 그렇게 영광스러운 사건 현장에 이방인 고넬료가 있었다. 하나님의 크신 은총에 눈물 흘리면서….

복음에 정복당한 아름다운 정복자

최초의 이방인 세례자-고넬료

정복자 로마 군대의 말발굽이/전 세계를 휩쓸던 주후 1세기의 식민지 시대/유대 땅 가이사랴 성읍에/아름다운 정복자가 있었네

그는/가이사랴의 로마 총독부에 파견된 로마 장교,/백부장 고넬료

그는/정복자의 오만과 편견을 버리고/유대인들에게 자비와 선행을 베풀었네

그는/가이사의 종교를 따르지 않고/유대인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했네

마침내/그의 기도와 구제는 하나님 앞에 상달됐네/하나님께서 고넬료를 기억하셨네

그리하여/하나님의 환상이 이방인 장교에게 임했네/하나님의 은총이 로마 군대의 백부장에게 임했다네

베드로를 보내어/복음을 들려주시고/하늘로서 성령을 부어 주셨네/세례를 베푸셨다네

복된 고넬료여/로마 군대의 장교에서 하나님 군대의 장교로 편입한 자여/이방인으로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은 자여/이방인으로서 처음으로 성령을 받은 자여

그리스도의 복음에 정복당한/아름다운 정복자여

김영진 <성서원 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도르가…가난한 이웃 사랑의 옷을 짓다  
욥바의 신실한 여제자

욥바는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56km 지점인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유명한 항구 도시다. 그리고 오늘날의 이름도 여전히 ‘야파(욥바)’이다. 그 옛날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그리스도의 복음이 소아시아 지역에 활발하게 전파되던 초기 사도 시대에(주후 34∼37년께) 이곳에 진실한 믿음을 가진 여제자 한 명이 살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도르가’였다. 도르가라는 이름은 헬라어 이름이고 당시에 보다 널리 사용하던 아람어 이름은 ‘다비다’였다.

구제와 선행의 향기로운 삶

도르가는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참된 신앙의 삶을 살았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자기보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했고 힘껏 도움을 베풀었다. 이에 성경은 그녀에 대해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행 9:36). 이 말은 도르가가 적당히 구제와 선행의 시늉을 한 것이 아니라 아주 헌신적인 태도로 최선을 다해 구제와 선행을 베풀었다는 의미다.

그 대표적인 예가 형편이 어려운 과부들을 위해 손수 옷을 지어 입힌 일이다. 이것은 정말로 큰 애정과 수고 없이는 하기 힘든 선행이었다. 도르가는 이와 같은 일을 힘 닿는 데까지 기꺼이 했다. 정녕 그녀는 하나님께 구제와 선행의 은사를 받은, 초대 교회에서 꼭 필요한 아름다운 존재였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삶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느라 도르가는 중한 병이 들어 결국 숨을 거둔다. 숨이 완전히 끓긴 도르가의 시신을 교회 식구들은 깨끗이 씻어 다락에 뉘였다. 하지만 교인들은 끝까지 도르가를 잃기 싫어 소망을 갖고 사도 베드로를 초청하였다.

베드로가 욥바에 이르러 도르가의 시신이 있는 다락에 올라갔을 때 모든 과부들이 도르가가 손수 지어 입힌 옷을 내어 보이며 슬피 울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 모습은 도르가 생전의 삶을 보여준다.

이에 베드로도 감동을 받고 도르가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은 후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그리고 믿음으로 힘차게 외친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그 소리에 다비다는 눈을 떴고 정말로 일어나 앉았다. 죽었던 도르가가 다시 생명을 얻어 살아난 것이다.

그녀의 구제와 선행을 필요로 하던 이웃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녀를 다시 교회에 돌려주신 것이다. 이렇게 도르가의 구제와 선행은 죽음조차 감동시켰다. 그리고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그 향기를 오래도록 내뿜고 있다.

다비다여, 일어나라

구제와 봉사의 어머니 도르가

유대의 항구 도시 욥바에/아름다운 선행과 구제의 향기가 널리 퍼져 나가네/신실한 여제자 도르가가 피워 올리는 /선행 일치의 향기로운 삶이네

예수 부활 승천하신 후/‘여제자’라 칭함 받은 욥바의 도르가,/아람어로 그 이름 다비다여

그리스도의 사랑으로/가난한 이웃을 위해/외로운 이들을 위해/한땀 한땀 사랑의 옷을 지은 구제의 어머니여/구석구석 필요한 곳에 선행을 베푼 봉사의 어머니여

그러나/이웃 사랑이 너무 커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았나/아픈 도르가여, 병들어 죽음을 맞게 되었구나

그대의 죽음 앞에/온 교회가 슬피 울었다/그대가 지어준 사랑의 속옷과 겉옷은 지금도 이렇게 따스한데/어찌하여 그대의 육신은 이렇게 차가워졌는가

믿는 자에게 있어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살아도 살고, 죽어도 다시 사는/하나님의 놀라운 생명의 기적으로/사도 베드로의 간절한 기도로/죽은 다비다가 다시 눈을 떴다!/“다비다야, 일어나라.”/그리하여 다시 살아난 다비다/죽음을 통해 더 많은 영혼을 그리스도의 품으로 인도했네

오늘 이 시간,/구제와 선행이 메마른 이 땅 위에/믿음과 행함이 괴리된 우리들 마음 속에/다시 힘차게 살아나라, 다비다여!

김영진 <성서원 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실라 - 바울·베드로 사역도운 ‘특급 조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실라는 헬라파 유대인으로서 그의 로마식 이름은 ‘실루아노’이다. 사도행전에서는 ‘실라’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지만 바울과 베드로의 서신서에서는 ‘실루아노’로 소개하고 있다(고후 1:19,벧전 5:12). 그는 주후 1세기 중반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활동했는데 이방인의 구원 문제에 대한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을 안디옥 교회에 전달할 자로 특별히 택함 받아 바울 및 바나바와 함께 동행했다.

이로 볼 때 실라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신임 받는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실라는 초대 교회의 두 기둥인 베드로 및 바울과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보여진다.

바울의 동역자요,베드로의 조력자

안디옥 교회에 파송된 실라는 안디옥에서 2년간 사역하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이때 실라는 바울의 동역자가 되어 제2차 전도여행에 나섰다. 전도여행에서 실라는 바울의 유능한 동역자였다. 빌립보 전도에서는 귀신 들려 점치는 여종을 고쳐줘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히지만 그곳에서 오히려 찬양하며 주께 영광을 돌렸다(행 16:16∼24).

베뢰아 전도에서는 유대인들의 박해를 피해 아덴으로 떠난 바울을 대신해서 디모데와 더불어 사역하기도 했다(행 17:13∼14). 그리고 나중에 고린도에서 바울을 다시 만나 사역했다. 고린도에서의 공식적인 사역을 끝으로 실라는 더 이상 성경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교회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의 조력자로 계속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베드로는 자신의 편지에서 실라를 ‘신실한 형제’(벧전 5:12)로 부르고 있다.

신실한 동역자가 되어

분명 실라는 초대교회의 두 기둥인 베드로와 바울에 비교할 때 그들만큼 비중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실라의 동역이 없었다면 바울의 사역은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실라의 조력이 없었다면 말년의 베드로는 여러 가지로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오랜 교회의 역사는 복음 증거의 사역에 동역자의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주님의 교회가 튼튼히 세워지기 위해서는 주춧돌이나 대들보만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니다. 크고작은 목재와 벽돌들이 적절한 곳에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바울이 가르친 바 ‘몸의 지체 비유’에서도 강조된 사실이다(고전 12:14∼27). 그러므로 모든 시대에 주님의 교회에는 ‘실라’가 꼭 필요하고 꼭 필요한 만큼 귀한 존재이다.

김영진 시인 <성서원 회장>

돕고 도운 빛나는 조력
(복음 전도의 충실한 조력자 - 실라 )

주님의 교회에
어찌 주춧돌과 대들보만 필요할까
작은 벽돌 하나도
숨겨진 판자 하나도
어찌 귀하지 않을까
초대 교회에
사도의 조력자 되어
교회의 봉사자 되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충실히 섬긴
신실한 인물 있었네
그는 '실루아노'
곧 '실라'라
안디옥 교회에선
바나바를 도와
이방인의 구원에 대해 가르쳤네
빌립보 전도에선
바울을 도와
기도와 찬송으로 옥문을 열었네
베뢰아 전도에선
디모데를 도와
교회를 돌보았네
고린도 교회에선
아볼로를 도와
성도를 보살폈네
이뿐일까,나중에는
베드로를 도와
죽기까지 복음을 전하였네
그대,실라여
조력자 되어 묵묵히 교회를 섬긴 그대여
그대의 빛나는 조력
오늘 다시 또 그립네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바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푯대를 향하여  
교회의 핍박자, 사울

그리스도 예수가 부활 승천하신 후에 갓 태어난 초대 교회. 그 교회를 가장 위태롭게 만든 것은 유대교의 가혹한 핍박이었다. 유대교는 군중을 선동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한낱 평범한 인물 예수를 메시아로 절대 인정할 수 없었기에 예수를 메시아로 증거하는 교회를 두고 보지 않았다.

그런 정통 유대주의자 중에 ‘사울’이란 인물이 있었다. 그는 그 당시 최고의 율법학자인 가말리엘의 제자였다. 게다가 태어날 때부터 모두 부러워 하는 로마 시민권을 소유하였다. 그야말로 최고의 엘리트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믿는 정통 유대교의 명예를 걸고 저 사이비 거짓 집단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교회 핍박에 있어서 누구보다 앞장섰다. 그날도 사울은 기독교의 무리를 체포하러 유대교 공문을 들고 살기등등한 기세로 다메섹으로 향하고 있었다.

교회의 개척자, 바울

그렇게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사울은 자신이 그토록 핍박했던 예수를 만났다. “사울아,사울아,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4) 부활의 예수를 만나고 주님께로부터 이방인 전도의 소명을 받은 사울은 ‘바울’로 새롭게 태어난다.

이후로 바울은 과거 자신이 교회를 핍박했던 걸 늘 가슴 아파하면서 스스로를 ‘죄인 중에 괴수’라고 불렀다. 이렇게 겸허한 자세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 지식과 명예를 배설물처럼 버린다. 그리고 오직 복음 전파를 위해 아주 위험하고 힘든 여행을 계속하였다. 박해자 네로의 칼에 순교의 제물이 되는 그 순간까지 바울은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과 유럽의 구석구석을 부지런히 넘나들었다.

그 결과 바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힘찬 울음소리를 내며 탄생하였다. 고린도 교회, 에베소 교회,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등. 정녕 바울은 교회 개척의 선구자요.오고오는 목회자의 표상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복음에 빚진 자’이기 때문에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기독 신학의 창시자

바울의 복음 전도가 특히 귀한 이유는 그가 예수가 가르친 복음의 진수를 가장 정확하게 파악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비롯해 영지주의와 같은 각종 이단 사상이 교회 속으로 부단히 파고들 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친 정통 십자가 복음의 터 위에 굳게 서서 교회를 수호했다. 그가 각 교회에 써 보낸 13권의 서신을 보라. 그것은 기독 신학의 정수로서 오늘도 우리들에게 구원에 이르는 밝은 길을 환하게 비춰주고 있지 않은가!

나는 복음에 빚진 자라

위대한 복음 전도자요, 이방인의 대사도 바울

최고의 교법사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서/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그,/세상에서 크고 교만하도록/학문의 깊이와 가문의 명예가 이를 데 없었던 사나이/세상 열정으로 타오르고/초대 교회의 성도들을 핍박하며 부활의 예수를 배척한 그,/그는 사울이라

그러나/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예수를 만난 후/새 사람이 되었네/사울은 죽고 ‘바울’로 다시 태어나/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주의 사도 되었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요, 죄인 중에 내가 괴수요,/사도 중 지극히 작은 자.”라 고백하며 낮아졌던 바울,/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오직 복음을 위하여/세상 지식, 세상 명예 한낱 분토처럼 여기고/순교의 제물이 되기까지/맡은 바 사명을 다한/대사도 바울이여

그대 아니면/누가 있어/저 깊은 복음의 진수를,/그 기쁜 생명의 복음을/우리들의 귀에 들려줄까

아름답다 그 발이여,/생명의 복음 전하러 지중해와 유럽을 넘나들었네/귀하다 그 손이여,/구원의 진수 깨우치려 교회에 써 보낸 편지들이여

기독 신학의 창시자여/교회 개척의 선구자여

김영진 <성서원 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스데반…“주여,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위하여
주를 믿고 따르는가
스데반을 보라
스데반을 본받아라
초대교회 집사 되어
믿음과 성령 충만함으로
가난하고 병든 자를 위해 땀 흘려 봉사했네
은혜와 권능의 충만함으로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였네
지혜와 성령으로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을 능히 이겼네
천사처럼 빛나는 얼굴로
공회 앞에서도 당당하게 복음을 전했네
이를 갈며 분노한 무리 속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영광의 하나님과 그 우편의 예수를 보았네
저 무지한 무리가 돌을 들어 내리칠 때에도
기도로써 용서를 구하며 조용히 순교의 잠이 들었네
정녕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초대교회를 활짝 꽃 피웠네
스데반이여
‘면류관’의 이름을 가진 스데반이여
그대는 진정
하늘 면류관 받기에 합당한
신앙의 거인이라
오고 오는 세대를 통해
성도의 이를 데 없는 모범이라

[스데반- 주여,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교회 최초의 집사

스데반은 헬라어를 말하는 유대인,곧 이방 출신의 헬라파 유대인이다. 스데반이라는 이름의 뜻은 ‘면류관’ 또는 ‘왕관’이다. 초대교회에 성도들의 숫자가 날로 증가하자 매일의 구제에서 빠지는 헬라파 출신 과부들이 생겨났다.

그래서 이 일로 헬라파 사람들이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하는 일이 생겨났고 이에 열두 사도는 모든 성도를 불러놓고 구제 사역을 전담할 일곱 집사를 뽑기로 했다. 집사의 조건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행 6:3)이어야 했는데 이때 맨 먼저 뽑힌 인물이 바로 스데반이다. 이처럼 기독교회 최초의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으로 뽑힌 스데반은 많은 성도의 신망을 받았던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인물’(행 6:5)이었다.

기독교회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살던 시대는 기독교에 대한 유대교의 박해가 극심했던 때였다(주후 30년께). 이런 때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이적을 행했고 아울러 유대인들과의 온갖 변론도 능히 감당해낸 지혜와 성령의 인물이었다.

이처럼 스데반이 복음을 힘있게 전파하자 유대교 교사들은 스데반을 신성모독 죄목으로 고소하여 산헤드린 공회에 세웠다. 하지만 스데반은 공회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기초하여 복음을 당당히 선포했다. 그러자 마음에 찔림을 받은 유대교도들은 이를 갈며 스데반을 예루살렘성 밖에 내치고 돌로 쳤다. 이때 성령 충만한 스데반은 하늘이 열리고 예수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

동시에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무리를 보고 “주여,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한 말을 연상시키는 위대한 용서의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기독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스데반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교회 박해의 본격적인 서곡이 된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예루살렘 안에만 머물렀던 복음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퍼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 있었던 사울이 나중에 회개하여 사도 바울이 됨으로써 기독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배출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실로 스데반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은’(요 12:24) 예수님의 가르침의 산 표본이었다.

김영진 <성서원 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성령을 속이려다 혼이 떠나 죽다  
어찌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아름답다
성령 충만한 초대 교회의 모습이여
믿는 무리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물건을 제 것이라 하는 이 없네
그러나 어찌할까
어리석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여
땅을 팔아 땅 값의 얼마를 숨기는구나
주의 영을 시험하는구나
사도 베드로가 질문하였네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거짓으로 대답하네
“예,이뿐이로다.”
자신을 속이고
사도를 속이고
교회를 속이고
성령을 속이는구나
아나니아여
삽비라여
어찌 그 마음에 사탄이 가득하여
거짓으로 성령을 속이는가
우리 가진 것 모두 주의 것이니
모두 드려도 다함이 없고
온전히 섬겨도 부족하니
어찌 재물이 아까워
거짓된 혀로
주의 영을 시험하는가
그리하여 그들의 혼이
슬피 떠나갔도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 성령을 시험하다 혼이 떠나 죽다]

그들은 왜 소유를 팔았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부부로서 그리스도의 승천과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 이후 초대 교회가 막 형성되어 가던 시기(주후 30년께)인 초창기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였다. 당시 초대 교회는 성령에 충만하였다. 성도들은 자신의 집이나 토지 등의 소유물을 팔아 교회에 바쳤다. 신앙 공동체를 이루려는 열정이 불타 올랐기 때문이다(행 4:34∼35).

그리고 교회 성도들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물건을 함께 나누면서 사용했다. 이상적인 신앙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초대 교회의 뜨거운 신앙 열기 속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교회에 바치기 위해 자기 소유의 땅을 팔았다.

왜 땅값의 일부를 감추었나

초대 교회의 다른 성도들처럼 그들도 처음에는 교회에 모두 바치기 위해서 땅을 팔았다. 하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돈이 생기자 욕심을 부렸다. 그래서 땅 판 값의 일부를 자신들의 몫으로 몰래 숨겨놓기로 공모했다. 그런 다음 먼저 아나니아가 교회로 나가서 사도 베드로에게 땅 판 값을 바치면서 땅값의 전부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나니아는 성령을 속일 수 없었고 하나님께 거짓말을 한 죄로 혼이 떠나 죽고 말았다. 조금 후 이 사실을 모르고 삽비라가 교회에 들어섰을 때 베드로는 삽비라에게도 바친 것이 땅값의 전부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삽비라 역시 전부라고 거짓말을 했고 그 결과 삽비라도 남편처럼 혼이 떠나 죽고 말았다.

문제는 많고 적음이 아니라 참과 거짓이다

어찌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급사는 너무 가혹한 형벌 같다. 하지만 당시 교회는 진리의 터 위에 막 뿌리를 내리고 있던 형성기였다. 그러한 때에 거짓이 파고들면 그것은 마치 암세포처럼 조만간 전체 교회를 부패하게 만든다. 그래서 성령은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예방 차원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가혹하게 징벌한 것이다.

여기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깨닫지 못한 것이 있었다. 베드로의 말처럼 땅은 그들 부부의 소유로서 그들의 임의대로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들 부부가 신앙의 위선과 허영심 때문에 거짓으로 성령을 속이고 교회를 기만한 데 있었다. 그러므로 꼭 기억하라!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은 액수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진실과 정성이 문제라는 사실을!

김영진 <성서원 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바나바… 따뜻한 격려·구제, 신앙인의 표상  
◇ 위로의 인물

바나바는 지중해의 구브로(키프로스) 섬 출신의 레위인으로, 본명은 ‘요셉’이었다. 그가 ‘위로의 아들’ 혹은 ‘격려의 아들’이라는 뜻을 지닌 ‘바나바’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사도들에 의해서였다. 사도들은 왜 그런 이름을 지어 주었을까?

의심할 바 없이 그에게서 다른 누구보다도 ‘위로하고, 격려하는’ 뚜렷한 특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바울에 대한 따뜻하고 자상한 배려이다. 유명한 기독교의 박해자 바울이 회심하였다는 소문이 들렸을 때, 아무도 그를 선뜻 믿으려 하지 않았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과 사귀기를 무척 원했지만, 모두가 그를 경계하고 멀리했다.

바로 이때에 초대 교회에서 크게 인정받고 있던 바나바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바울의 변화 과정을 설명하고 그를 변호하며 감싸 주었다. 그 결과, 교인들은 비로소 바울을 믿음의 형제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런 면에서 ‘위로의 아들’ 바나바는 실로 바울의 발견자요, 소개자이며 교회에 자리를 잡도록 해 준 안내자였다.

◇ 구제와 양보의 인물

바나바는 구제의 인물이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일원으로서, 그는 자기 소유의 땅을 모두 팔아 사도들 앞에 아낌없이 내놓음으로써 가난한 교회 형제들을 정성껏 도와주었다. 그가 ‘위로의 아들’이란 별명을 갖게 된 데는 이처럼 말의 위로뿐 아니라 물질로도 힘껏 위로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바나바는 양보의 인물이었다. 자신이 안디옥 교회에서 성공적으로 목회하고 있을 때, 그는 멀리 다소까지 찾아가 아직 교회 안에서 자리를 못 잡고 있던 바울을 불러내 안디옥의 설교 단상에 세워 주었다. 이후로 안디옥 교회는 바울에게 있어 늘 돌아가고 싶은 고향 같은 목회 강단이었다.

◇ 전도의 인물

초대 교회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있어 바나바만큼 열심을 내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고 바울과 더불어 제1차 전도 여행을 떠났다. 이후로 바울과 헤어진 바나바는 자신의 조카인 마가를 데리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이곳저곳 계속해서 전도 여행을 다녔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바나나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행 11:24).”<성서원 회장>

◇ 위로하라 바나바여, 이 시대 이 교회를!

위로의 아들 바나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 승천하신 후/갓 태어난 초대 교회,/그 어린 교회를 보듬은 따스한 손길 있었네/‘위로의 아들’ 그 이름/바나바라

그는/밭을 판 값을 자신의 품에 두지 않고/사도들의 발 앞에 둔/구제의 인물이었네

그는/회심한 바울을 모두 멀리 할 때/바울을 위로하고 변호해 준/위로의 인물이었네

그는/타우루스 산맥 넘어 다소까지 찾아가/바울을 안디옥 강단에 세운/양보의 인물이었네

그는/바울과 함께 낯선 이방 땅 곳곳을 두루 다니며/열심히 복음을 전한/충성된 증인이었네

바나바여,/구제하고/위로하며/양보하고/증거하는 바나바여,/메마르고 이기적인/이 시대, 이 교회에 더욱 그리운 바나바여

그대의 삶,/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정녕 본받아야 할/신앙인의 표상이라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끝까지 주님 섬겨 부활 첫 증인  
일곱 귀신에게 사로잡힌 가엾은 여인

예수님의 공생애 시절에 갈릴리 서쪽의 막달라 지방에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 살고 있었다. 당시 ‘마리아’는 매우 흔한 여자 이름이었다. 성경에도 ‘마리아’란 이름을 가진 여인이 많이 등장한다. 그 중 유명한 세 마리아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그리고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곧 막달라 마리아이다.

당시 막달라 지방은 염색과 직물공업으로 유명했고 예로부터 조선과 어업 등으로 부유한 성읍이었다. 병 고침 받은 후에 자신의 소유물로 예수님을 도운 것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도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린 여인이었다. 이 말은 제 정신을 잃고 헛소리를 해대며 입에 거품을 물고 간질 증세를 보이거나 혹은 자신의 몸을 스스로 상해하는 거친 행동을 했음을 의미한다. 한 귀신도 아니고 무려 일곱 종류의 사악한 귀신에 사로잡혀 이런저런 추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막달라 마리아는 여자로서의 행실은 물론 사람의 모습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진 병든 인생을 살고 있었다.

주님께 치료받은 복 받은 여인

하지만 예수와의 만남이 막달라 마리아의 삶을 한순간에 바꾸어 놓았다. 갈릴리 전도 여행차 막달라 지방에 들른 예수는 귀신 들려 거리를 헤매는 비참한 여인을 보고 은총을 베풀었다. 그녀가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다. 일곱 귀신이 모두 물러간 막달라 마리아는 예전의 건강한 몸과 올바른 정신을 되찾았다. 그녀의 육신과 영혼에 새로운 삶이 주어진 것이다.

주님의 은총에 감사한 신실한 여인

이제 막달라 마리아 앞에는 두 길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건강한 몸으로 지금껏 누려보지 못한 세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기꺼이 후자의 길을 택했다.

이후로 그녀는 예수님을 따랐다. 감사의 마음과 헌신적인 자세로 주님을 섬겼다. 고생스러운 주님의 전도여행을 따라다니면서 자신이 가진 소유물로 정성껏 섬겼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그리고 예루살렘에서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앞까지 그녀는 항상 주님 곁에 있었다. 늘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그리하여 마침내 막달라 마리아는 이른 새벽에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나는 크나큰 영광을 누린다. 부활의 최초 증인이 된 것이다. 과거 만 가지 죄악에 사로잡혔던 그대여,주님께 구원의 은총을 받았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지금 그 은총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김영진 시인<성서원회장>

◆ 주님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은총에 감사하며 눈물로 살아간 여인 막달라 마리아

가엾은 여자 있었네/저주받은 여자 있었네/일곱 귀신에게 사로잡혀/정신과 육체가 모두 망가진 여인,/막달라 지방의 마리아

놀라운 은총 임했네/크신 구원 임했네/예수를 만나 정신과 육체가 말끔히 치유된 여인,/막달라 지방의 마리아

그 은총을 무엇으로 갚을까/그 구원에 어떻게 감사할까/그날부터/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따랐네/감사의 눈물로/헌신의 봉사로 따랐네

모든 시간 주님께 바쳐/모든 재물 주님을 위해/예수님 가시는 곳이면/어디든 따르며 정성껏 보살펴 드렸네/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예루살렘에서 빌라도 법정까지/빌라도 법정에서 갈보리 언덕까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눈물로 바라보고/임종의 순간을 고통으로 지켜보며/부활의 새벽까지 손 모아 기도했네/그리하여 막달라 마리아,/부활의 예수를 맨 처음 보고/그 기쁜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렸네

한때 저주받았던 가엾은 여인 막달라 마리아,/이제 정녕 축복받은 여인이 되어/오늘도 주님 곁을 따르고 있네/빈 무덤 앞에 서서 부활의 예수를/오고 오는 이들에게 전하고 있네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살로메… 갈릴리서 골고다까지 예수 섬겨  
그녀는 누구인가

‘살로메’는 히브리어 ‘샬롬’(Shalom)의 헬라식 표현으로 ‘평안’ 혹은 ‘평강’이라는 뜻이다. 갈릴리 호반에 살던 세베대의 아내로 예수의 가까운 두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의 모친이다. 살로메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골고다 언덕의 현장에 있었던 여인들 중 한 사람이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마 27:56), 요한복음에선 ‘그 모친과 이모’(요 19:25)로 표현되어 있다.

만일 이 표현이 동일인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살로메는 예수의 모친인 마리아와 자매지간이고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와 이종사촌 관계가 되는 셈이다. 한편 공생애 말기에 예수가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고 있을 때 살로메는 자신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을 보좌의 좌우에 앉혀 달라고 부탁한다. 이런 모습은 살로메가 자녀의 출세와 성공을 바라는 평범한 어머니임을 보여 준다.

끝까지 예수를 따른 신실한 여인

예수와 열두 제자들의 복음 전도 사역에는 신실한 믿음의 여인들이 있었는데 살로메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살로메는 예수의 공생애 초기부터 마지막 십자가 운명의 순간까지 시종 변함없이 예수 일행을 섬겼다(막 15:40∼41). 뿐만 아니라 예수가 무덤에 장사된 이후에도 시신에 바를 향품을 준비했다가 안식일 후 첫날 이른 새벽에 무덤에 찾아갔다. 그때 살로메는 천사로부터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듣고 그것을 사도들에게 증거했다(막 16:1∼8).

골고다 언덕까지 따라가는 신앙의 삶

예수가 많은 이적을 베풀면서 설교하고 당당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는 수많은 군중이 앞다투어 예수를 좇았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체포되고 빌라도에게 십자가형을 선고 받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할 때에는 아무도 예수를 따르지 않았다. 심지어 열두 제자들조차도 도망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고난의 순간에도 변치 않고 예수를 좇은 사람들이 있었다.

살로메가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특히 살로메는 예수의 초기 사역지인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좇았다. 이처럼 예수를 진정으로 믿고 따르는 자들은 갈릴리 이적의 현장에도 있어야 하지만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아래에도 있어야 한다. 살로메처럼.

김영진시인 <성서원회장>

무덤까지 따르오리다

<헌신적으로 주를 따른 여제자 살로메>

갈릴리 호반에/한 어부의 아내 있었네/남편은 세베대/두 아들은 야고보와 요한/그녀 이름은/‘평강’(Shalom)의 살로메라

복음에 겨워 예수를 믿었네/두 아들을 기꺼이 예수의 제자로 보내고/자신도 마음 다해 예수를 섬겼네

그대,살로메여/예수의 메시아 사역을 올바로 알지 못해/제자 된 두 아들을/주님 보좌 양편에 앉혀 달라고/주님께 민망한 부탁을 드렸네/그 마음 누가 탓할까/순진하고 강렬한 어머니의 사랑을

살로메,그대는/갈릴리 호수에서 골고다 언덕까지/신실하게 주님을 따랐네

고난의 주님께서/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할 때/주님의 걸음 위를 눈물로 적셨네

무덤 속의 주님께서/어둠에 누워 계실 때/향유와 향품 가지고 무덤으로 달려갔네/거기서 다시 사신 주님을 뵈옵고/주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네

샬롬!/살로메여/그대에게 영원토록 평강 있기를…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바라바…유대인이 선택한 욕망의 지도자  
그는 누구인가

바라바는 ‘아버지의 아들’이란 뜻이다. 그는 예수가 체포되어 심문당할 때 로마 당국에 의해 투옥되어 있던 거물급 죄수였다. 신약 성경의 복음서들은 그에 대해 ‘유명한 죄수’(마 27:16)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막 15:7)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눅 23:19)라고 묘사했고 요한은 단순히 ‘강도’(요 18:40)라고 소개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하여 판단하면 바라바는 로마의 압제를 떨치고 유대의 독립을 쟁취하려고 폭력으로써 민중 봉기를 주동했던 유대 열심당원의 지도자적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마태복음의 권위있는 데오도티온 역 헬라어 성서는 그를 ‘예수 바라바’로 읽고 있다(마 27:16∼17).

왜 바라바인가

로마 통치자들은 유대인들의 큰 명절인 유월절마다 유대인들이 선택하는 죄수 한 명을 석방해 줌으로써 그들을 회유하곤 해왔다. 당시 예수의 처리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로마 총독 빌라도 역시 유월절을 맞이해서 이 관례를 적용시켰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유월절 사면 후보로 선정된 두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바라바’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하나님의 메시아였고 예수 바라바는 무장 폭력으로 세상을 타도하려는 유대 열심당의 지도자였다. 예수의 무죄를 확신한 빌라도는 유대 군중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빌라도의 예상을 뒤엎고 유대 군중은 예수 그리스도 대신 예수 바라바를 선택했다. “바라바를 내어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눅 23:18)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세상적인 욕망을 충족시켜 주려는 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대, 누구를 선택하려는가

이 시대 우리들 앞에도 두 길이 놓여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과 예수 바라바의 길이다. 하나는 사랑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을 세우는 메시아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칼의 폭력으로 일시적인 세상 왕국을 세우는 자기 욕망의 길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우리를 향한 빌라도의 질문은 아주 신랄하다. “너희는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예수 바라바냐 아니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마 27:17) 그대는 정녕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예수 바라바인가,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인가

< 유명한 죄수 바라바 >

우리 앞에/두 길이 놓여 있네/예수 바라바와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

2000여년 전/유월절을 맞은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수많은 무리들이/로마 총독 빌라도를 향해 목청껏 소리쳤네/“바라바를 놓아 주소서,/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왜 바라바인가?/바라바는 폭력으로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을 저지른/유명한 죄수이거늘

왜 그리스도가 아닌가?/그리스도는 사랑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생명을 살리신/평화의 목자이거늘

그렇다!/바라바는 십자가를 져야 했고,/그리스도는 풀려나야 옳았다/하지만 세상 욕망에 눈 먼 그때 그 무리들/바라바를 택하고, 그리스도를 버렸네/불의를 사랑하고, 진리를 미워했네

오늘 그대여,/그대 앞에 두 길이 놓여 있나니/예수 바라바와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누구를 택할건가, 어느 길을 가려는가/세상의 불의인가, 하늘의 진리인가

수많은 무리들이/바라바를 택하고, 그리스도를 버렸네/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오늘도 우리 대신 골고다의 슬픈 십자가를 /홀로 지는구나

김영진 <성서원회장>
 
 

국민일보에 연재되었었던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본 "김영진" <성서원 회장>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바디매오…크게 외쳐라 “다윗의 자손 예수여”  
소망 없는 삶

수도 예루살렘의 관문 도시로서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대략 6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여리고 성. 그곳에 ‘디매오의 아들’이란 뜻을 지닌 ‘바디매오’라는 거지 소경이 있었다. 그가 날 때부터 소경이었는지 아니면 살아가던 도중에 시력을 잃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그는 시력의 상실과 함께 모든 삶의 소망을 잃고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여리고 성문 한 귀퉁이에 거적을 깔고 앉아 구걸하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해갔다. 이처럼 동정의 대가로 받는 동전 몇 닢에 위태롭게 삶을 기대고 있는 거지 소경 바디매오에게 과연 어떤 삶의 소망이 있었을까!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그러던 어느날 그에게 소망의 순간이 찾아왔다. 당시 예수님은 자신의 지상 사역을 마무리짓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북방 갈릴리 지역에서부터 요단 동편의 베뢰아 지역과 여리고 성을 지나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 예수님이 여리고 성문을 막 나가려던 그 시점에 예수님은 어디선가 크고 애타게 부르짖는 믿음의 외침을 들으셨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 소리는 예수가 여리고 성문으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은 바디매오가 사람들의 책망과 제지에도 불구하고 힘을 다해 부르짖는 외침이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당시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메시야의 별명이었다.

이렇게 바디매오는 예수를 향한 ‘메시야 신앙’을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바로 그분께 자기 삶의 모든 소망을 두고 오랜 세월을 기다려 왔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과 바디매오의 만남은 그저 운좋았던 우연한 만남이 아니라 오랜 믿음과 소망의 필연적인 결실이었다.

새로운 삶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러 가시던 비장한 순간에도 예수님은 발걸음을 멈추시고 거지 소경의 외침을 들으셨다. 그 외침 속에 깃든 바디매오의 믿음을 보셨다. 그리고 바디매오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보아라,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 10:52) 그리하여 육신의 눈을 뜬 바디매오. 그는 다시 찾은 육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구세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즉시 예수를 따랐다. 그는 영혼의 눈까지 활짝 뜬 것이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리고 성의 거지 소경 - 바디매오>

오늘도 어제처럼/여리고 성문 한 쪽에서/절망의 거적때기를 깔고 앉아/지나는 행인들에게 삶에 찌든 손 내밀고 있었네/사람들의 멸시와 천대 속에서/소망 없는 나날을 살고 있었네/그는 거지 소경 바디매오

어느 날/소망은 기적처럼 다가왔네/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던 예수님/여리고 성을 지나가게 되었네/그 소식을 들은 바디매오/소리 높여 외쳤다네/“다윗의 자손 예수여,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사람들이 꾸짖고 말렸지만/바디매오는 더욱 소리 높여 외쳤네/“다윗의 자손 예수여,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김받을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바디매오의 그 외침 들으셨네/“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주여,보기를 원하나이다.”/바디매오의 피맺힌 아픔/“보아라,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리하여 눈 뜬 바디매오/그대 큰 믿음 가졌었구나/그대가 진정 바란 것은/사람들의 멸시어린 돈 한 푼이 아니라/다윗의 후손 ‘나사렛 예수’였구나/이제 육신의 눈 활짝 떠 영혼의 길 따라가는구나

절망의 거적때기에 앉은 그대여/이 시간 외치고 더욱 외쳐라/“다윗의 자손 예수여,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진정 영혼의 눈 뜨고 소망의 길 보려니.

김영진 <성서원 회장>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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