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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에 관하여/신약 핵심공부

[스크랩] 믿음 - 존 맥아더

믿음 - 존 맥아더



 

 

 

 

히브리서 11:1-3 / 믿음이란 무엇인가 ?


믿음의 본질(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 성구(聖句)는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의 믿음에 대한 정의(定義)는 아니다. 오히려 믿음의 여러 특성들 가운데 하나이며, 명시된 신학적 정의라기 보다는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과 같은 것인가를 나타내는 구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구절에서 사용된 ”믿음”이란 말의 헬라어는 「피스티스」(pistis)이며, 그 의미는 ”확신, 신임, 신뢰, 믿음” 등을 의미한다. 이제 이 구절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Ⅰ. ”... 바라는 것들의 실상”


당신은 ”바라는 것들은 어떠한 실상(實相)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단지 바라기만 할 뿐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바란다는 것을 의미하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을 현재적 실상으로 느끼게 한다.


1. 믿음은 하라는 것이다

1) 구약 성도들의 소망

히브리서 11장은 우리에게, 단지 하나님의 약속들에만 의지하여 산 구약의 뭇 성도들에 대하여 알려 주고 있다. 일찌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메시야가 올 것이다. 그리고 그는 너희의 죄들을 궁극적으로 사해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으며, ”이스라엘의 고토가 회복되며 메시야가 통치할 영원한 나라가 도래할 것이다”라고도 말씀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에스겔과 같은 선지자를 통해서는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36:25-26)라고도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성도들에게 약속된 땅에 들어갈 것과 그 곳에서 평강과 안위를 누리리라는 약속을 하셨다. 그리고 사실상 그들은 하나님의 그러한 약속들을 강하게 신뢰했었으며, 또한 소망했었다. 즉, 모든 유대의 어머니들은 구세주 메시야의 어머니가 되기를 소망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 대적에 의해 유린당한 후에 예루살렘이 기필코 회복될 것을 믿었고 또한 아직까지도 그들은 이스라엘의 좀더 완전한 자유와 평강의 회복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 이러한 약속들의 성취를 본 사람들은 거의 없다. 바로 이러한 것이 믿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 주는 것일 것이다. 즉, 믿음은 대단히 실제적인 소망 가운데 사는 것이며, 믿음은 그 소망을 현실의 실상으로 느끼는 것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한결같이 이러한 약속들의 성취를 보지는 못했지만 아주 현실적이고도 실제적인 소망들 가운데서 삶 전체를 그 소망들에 의지하여 살았던 것이다. 즉, 모든 구약의 약속들은 미래적인 것들이었지만, 그들은 현재 누리는 것들처럼 행동했으며,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살았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인 것이며, 또한 이 믿음은 아직 미래적인 것들을 현재의 실상으로 느끼는 믿음인 것이다.

2) 그리스도인의 소망

믿음은 어떤 것이 내일 쯤에는 이루어지겠지라고 생각하는 막연한 소망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완전하고도 분명한 확실성에 근거한 소망인 것이다. 따라서, 믿음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이따금씩 아주 정상적인 것들을 무시하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이제 그와 같은 경우들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 세상 것들을 경홀히 여김

만일 우리가 쉽사리 볼 수도 있고, 만끽할 수도 있는 세상 것들을 추구한다면, 그리고 세상의 가치 기준을 따른다면, 우리는 어렵지않게 안위와 번영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결코 보이지도 않고 들을 수도 없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것들을 따른다면, 우리는 아마 불안과, 고통, 손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박해와 죽음 등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참된 성도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게 되며, 그 이유는 뜨거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미래적 소망을 현실적 실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참된 성도들은 세상 속에서의 낙을 누리기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고난받기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세상의 것들을 경홀히 여기는 믿음인 것이다.


a. 모세의 경우: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26절에서, 모세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모세는 메시야적인 소망 속에서 살았으며, 애굽의 모든 보화와 부귀를 포기하고, 무려 천 오백 년 후에 오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기를 즐겨 했던 것이다. 즉, 그는 이러한 적극적인 소망을 가졌으며, 그는 이 소망을 현재의 확실한 실상으로 느꼈던 것이다.

b. 다니엘의 세 친구의 경우 : 다니엘서 3장 13-18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즉,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살아 있으며 당대에 강력한 권세를 가진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가라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 있었으며, 혹시라도 그들이 그 왕에게 순종치 않는다면, 평상시보다 칠 배나 뜨겁게 타는 풀무불 속으로 던져질 것이라는 내용이다. 만일 ”이러한 시험에 대해 어떤 선택을 하면 좋을까?”를 한 경험론자에게 묻는다면, 그는 ”그 문제라면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오. 당연히 눈에 보이는 왕에게 절해야 하며, 그리하여 우선은 불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오”라고 손쉽게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믿음의 사람이라면 다만, ”나는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리하여 풀무불을 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오”라고만 대답할 것이다. 이와 같이 세상의 것들을 경홀히 여기는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 인간의 감각을 경홀히 여김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가진 소망으로 인하여 때로 인간의 보편적 감각과는 등져야 할 때가 있다. 아마 보통 사람들이라면 ”당신이 원하는 것들을 취하라. 또한 당신의 후각을 자극하며, 미각을 돋구는 것들을 맘껏 맛보라. 그리고 당신의 욕구가 미치는 대로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나 손에 넣으라”는 식의 말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인(世人)들의 생각과는 달리 성경은 ”너의 감각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하고 있다.

- 현실의 쾌락을 경홀히 여김

그리스도인은 미래의 하나님의 약속들로 인하여 현실의 쾌락을 포기한다. 오래 전, 에피큐루스 학파(Epicureans)의 창시자인 에피큐루스(Epicurus)는 인생의 주된 목적이 쾌락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세속적인 쾌락주의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자신은, 사람들은 일시적이 아닌 궁극적이고도 영원한 인생의 행복을 찾기 위해 긴 안목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 이유는 대부분의 일시적 쾌락은 곧 괴로움으로 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사람의 생각은 옳았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궁극적인 행복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다. 즉, 우리들은 내세(來世)에서의 영화로운 삶을 기대하며, 이 세상에서의 작은 고통을 기꺼이 감수해 나가는 그런 사람들인 것이다.


미래의 사실들을 현재의 실상으로 느끼는 믿음


나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식의 믿음에 의해 소망하는 미래의 것들을 마치 현실의 것들로 생각하며 거기에 빠져 본 경험이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즉, 당신이 학생이나 직장인의 신분이라면, 당신은 아직 방학이나 휴가가 오기 여러 달 전에 이따금씩 그 날들을 생각하며, 풀장의 한가운데 당신 자신이 즐겁게 수영하는 모습이나 일광욕을 하는 모습, 또는 큰 강가에서 낚시를 즐기며 월척감이 되는 송어를 낚는 모습 등을 상상한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혹시 당신이 신혼 부부라면, 앞으로 낳게 될 어린 아기를 그리워하머 그 아이와 즐겁게 노는 모습을 맘껏 상상한 적도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 있어서도, 내가 어렸을 때, 다가올 크리스마스가 내 나름의 기대감(믿음)으로 실제보다도 더욱 재미있고 즐겁게 상상해 본 적이 있으며, 또한 청년이 되었을 때는 성경 지리를 공부할 때마다, 내가 결코 가 본 일이 없는 이스라엘의 한 거리를 믿음에 의하여 맘껏 거닐며 여행하던 모습을 기억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실제로는 미래지사(未來之事)의 일들을 현재 시점에서 생생하게 즐기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믿음은 단순히 미래의 사실들을 현재의 실상으로 느끼는 것이다.


2. 믿음은 실상이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나오는 ”실상”(substance)이란 말은 헬라어로는 「휘포스타시스」(hupostasis)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서 가운데 이 1절 외에도 다른 두 곳에서 쓰였다. 그 하나는 1장 3절이며, 그 곳에서 이 단어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본체”로서 묘사하기 위해 쓰여졌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3장 14절로서, 그 구절에서는 ”확실한 것”(보증금 또는 권리증서)을 말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것을 종합해 볼 때, ”실상”(實相)이란 말은 본체(본질)와 확실한 것(확신)을 함께 의미하고 있는 단어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언급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약속들이 장차 본질적으로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믿음으로 확신하게 된다는 것을 표현한 말일 것이다. 이와 같이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고, 그분을 의지하게 할 뿐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들이 본질과 내용과 실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1) 로마서 8장 24-25절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이 구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들이 실상(實相)을 가졌다는 것을 믿고 확신한다면, 우리들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자포자기하거나 불안해 하지 않고, 참을성있게 그것이 이루어질 날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 현재적 실상을 가진 미래의 사실을 믿는 믿음인 것이다.

2) 히브리서 11장 13절

이 구절에서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가 아브라함과 사라에 대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언급에 대해, ”하지만 그들은 천국도 보지를 못했을 뿐더러, 약속들도 받지 못하지 않았는가?”라고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물론 피상적으로는 그들의 반론이 옳아 보인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볼 때는 그렇지 않으며, 그들은 천국에 속했던 자로서 하나님의 약속들을 누렸다. 저들에 대해 ”우리는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10절)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미래의 것을 현재 손에 쥐고 있는, 어떤 실재의 것으로 느끼는 믿음이다. 믿음은 우리에게 미래의 소망과 확실성을 주어, 그것을 든든히 붙잡은 것과 같은 확신을 준다.


Ⅱ.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1. 믿음은 행동이다


여기에서 사용된 ”증거”(evidence)라는 말은 헬라어로 「엘렌코스」(elenchos)이며, 그 의미는 ”확신” 또는 ”신념”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확신이다. 사실 이 구절, 즉 1 하반절은 상반절보다도 그 내용이 좀더 진전했다. 즉, 자신이 소망하는 것 위에 자신의 삶을 세운다는 것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토대 위에서 사는 삶이다.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을 때, 그분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바로 이것, 즉 보지 않고 믿는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며, 이 1 하반절에서는 바로 믿음의 이러한 성격을 강조하고 있고, 더 나아가서 보이지 않는 것들에 의지하고 사는 삶이 참된 믿음의 삶이라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노아와 믿음의 양면성



노아는 하나님을 신뢰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그러한 노아에게 어느 날, ”노아야, 비가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노아 이전에는 땅에 비가 내린 적이 없었으므로, 비가 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노아에게는 범상(凡常)한 일이 아니었다. 즉, 이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이제 glep(사전에 없는 말로, 예를 들기 위해 사용했을 뿐임 - 역자 주)할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신 것과 같다. 당신은 결코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말이기 때문에 그 말에 대한 어떠한 개념을 형성하거나 상념을 떠올릴 수가 없다. 노아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노아야, 비가 올 것이다. 물이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비록 노아는 비가 오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었지만 그의 머리 속에 실상(實相)으로 자리 잡혀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것이 그에게 있어서는 실재화(實在化)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그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첫번째 단계이다. 이것은 그의 마음 속에서 ”바라는 것의 실상(實相)”이었다.

그러나 노아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방주를 만들었다(즉, 행동했다는 말임). 그는 방주를 지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진일보한 확신인 것이다. 사실, 「비가 무엇과 같을까?」해서 그 비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비에 대한 상념도 온전히 정립되지 않은 터에 「비가 오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그의 생(生)을 걸고, 무려 120년이나 넘게 불모의 땅에서 방주를 지어 나갔던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의 토대 위에 그의 생(生)을 세웠다. 아마 노아도 인간이었기 때문에 방주를 짓는 120년 동안 ”노아야!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자기 자신에게 반문을 한 적도 여러 차례 있었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 믿음에 의거하여 행동했다. 이것이 히브리서 11장 전체를 통하여 살펴볼 교훈이다 - 믿음은 믿을 뿐만 아니라 믿은 후에는 행동한다.


2. 믿음을 가진다는 것

1) 영적인 믿음

독실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토대 위에 자신의 삶을 경영하며, 그 생활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불신자들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고 영적이며, 미래적 신앙에 기초를 둔 신자들의 삶이 황당무계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들은 항상, ”그리스도인인 당신들은 하늘나라에 그 맛있는 파이(pie)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들은 입증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신뢰하고 믿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은 우리의 본향이 아니오 우리는 다만 나그네일 뿐이며, 우리의 보물은 저 천국에 있소”라고 단호하게 대답할 뿐이다.

이런 모든 것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6절에서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말하고 있으며, 1장 3절에서는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제 곧 다른 세계(世界)로 옮겨가려고 하고 있으며, 여기에 대해 세상은 우리의 머리가 돈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히 11:27)를 예배하며 우리의 삶을 이러한 믿음 위에 세운다.

이와 같이 보이는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으나 영적 내용을 지닌 것이 믿음이다. 자연인은 이러한 영적 믿음의 성격을 이해할 수없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영적인 지각(知覺)을 위한 기관(器官)이 없기 때문이다.

2) 자연적인 믿음


어떤 의미로는, 모든 사람은 자연적인 믿음의 원리에 의해 생활한다. 그 예(例)를 들어 보자.

- 물을 마시는 것

우리는 물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전혀 모르면서도 수도관에서 나오는 물을 마신다.


- 통조림 식품

우리는 우리가 사실상 신뢰하는 제조 회사의 라벨이 붙은 통조림을 먹는다.

- 돈

우리가 돈을 사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믿음에 의한 것이다. 당신은 돈이 생각하는 것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가? 1929년에 있었던 대공황을 겪은 자들은 불황을 초래했던 것은 현금 가치의 하락이 아니라, 현금에 대한 믿음의 상실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 과학적인 실험들

과학자는 자신의 화학 약품들이 올바르게 분류되었을 뿐아니라, 그것들을 혼합할 때 폭발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자연적인 믿음을 실험한다.

- 외과적(外科的)인 절차들

만일 우리가 의사를 찾아 갔는데 그가 ”선생의 다리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선생의 다리를 수술해서 무엇을 제거하고, 무엇은 고정하고, 이 주변의 것은 연결하고... 등등”이라고 말했다면, 우리 중 대부분은 의사가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도 ”그렇게 하십시오. 의사 선생님”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가 수술실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하자. 우리는 일단의 사람들이 우리 몸을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수술하고 있는 동안 무의식 상태로 조그마한 테이블 위에 누워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 도로 표지판들

우리가 운전을 할 때 우리는 사실 그 표지판들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연적인 믿음의 원리를 좇아 살아간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적인 믿음, 즉 하나님께서 주신 초자연적인 선물이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2장 8절에서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영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나, 자연적인 믿음은 출생과 함께 얻어진다.

로마서 10장 17절에선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한다. 만일 사람이 성령께서 예비하여 주신 기쁜 마음으로 듣는다면 하나님께선 그에게 응답할 믿음을 주실 것이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은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말한다. 십자가에 대한 말씀이 사람의 마음의 옥토에 떨어지게 될 때 믿음을 유발시킨다.

이와 같이 자연적인 믿음과 영적인 믿음은 별개의 것이다.


이제 총괄해서 살펴보면, 히브리서 기자는 우선 첫째로 믿음의 본질에 대해 우리에게 말한다. 즉, 믿음은 미래의 어떤 것을 실재화할 수 있으며, 그런 다음에는 거기에 기초하여 자신의 삶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불신자는 이것을 육신적인 의미로는 소유하고 있으나 영적인 의미로서는 그렇지 못하다. 오직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만이 영적인 의미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의 증거(2절)

”선진(구약의 성도)들이 이(믿음)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Ⅰ. 하나님의 인정


「증거를 얻었다」는 말은 ”칭찬을 받다” 혹은 ”인정을 받다”는 의미의 헬라어 동사에서 유래된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구약의 성도들은 믿음을 좇아 살았기에 하나님께 칭찬받고 인정을 받았다. 하나님께선 믿음으로 일하는 자들을 인정하신다.

나는 하나님 안에서 영적인 믿음을 따라 생활하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감지(感知)하는 지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당신이 하나님을 신뢰할 때의 참된 평강과 확신을 깨닫지 못하는가? 나는 우리 모두가 그분의 인정하심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곳 11장에서 구약에 나타난 믿음의 용사들을 열거하면서, 그들이 자기들의 생명까지도 내걸고 보지 못하는 것을 믿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잘 하였도다. 나도 너희를 인정하노라”고 말씀하셨음을 보여 준다. 히브리서 11장 6상반절에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당신이 무엇을 행하든지 상관치 않는다. 다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과 또한 당신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분은 기뻐하시고 당신을 인정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Ⅱ. 인간의 어리석음

믿음이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운명이라고 하는 아무런 해답도 지니고 있지 않는 벽과 마주치게 하여 쓸쓸하고 암담하며 절망적인 형편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그 어떠한 것도 믿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당신 자신이 사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너무도 황량해서 소망이 없는 그러한 세상에 당신이 살고 있으며, 당신이 이 우주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이 무가치하다고 그렇게 믿어지는가? 무한한 우주 가운데 떠돌고 있는 이 자그마한 세상 밖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한다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초점도, 목적도 없게 되며 ... 따라서 우리는 어리석은 농담에 지나지 않는 것에 속은 것이 된다!

현대인은 스스로가 궁지에 빠지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지 않을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다음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1. 이성(理性)의 수준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은 소위 일치된 지식의 영역이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인간은 실재(實在)라는 하나의 표현의 틀안에서 하나님과 역사, 그리고 과학 등등을 이해했다. 그러나, 그후 독일 합리주의(合理主義)로 알려진 철학 사조로 말미암아 거대한 변화가 초래되었다. 이 합리주의자들은 ”우리가 「하나님」이라는 이 모든 허튼 소리를 제거했다”고 말했다.

그라프(Grraff), 벨하우젠(Wellhausen), 바우어(Bauer), 스트라우스(strauss), 그리고 르낭(Renan)과 같은 합리주의자들은 이와 같이 모든 초자연적인 것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첫번째 공격대상은 성경이었으며, 그들 중 한 사람은, 조금이라도 이적적인 요소가 있는 모든 것을 일체 제거하고 성경을 본다면 성경은 단지 26구절로 구성된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합리주의는 인간을 존재의 한 수준, 즉 이성(理性)의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이제 이 합리주의의 여파는 인간이 조정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전적으로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세상에 산다는 것이며, 인간은 단지 기계에 지나지 않음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인간은 합리적이며 경험적인 것이 아닌 것은 그 어떠한 것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인간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 뜯으며 ”이건 정말 두려운 일이다. 나는 이러한 상황에 주저앉을 수 없다. 나의 영혼은 저 밖의 무엇인가를 고대하고 있다 ... 나는 무엇인가를 믿어야만 한다. 나는 아무런 궁극적인 뜻이 없이 작은 상자 속에서, 내 자신이 기계라고 생각하며 그 주위를 빙빙 돌고만 있을 수는 없다”라고 말한다.


2. 믿음의 비약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라는 사람이 나와 지식의 영역을 두 개의 수준-이성(理性)과 믿음-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당신은 그가 말하는 믿음의 수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가? 그가 말하는 믿음이란 내용이 없는 믿음인 것이다. 그가 말하는 바는 믿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당신은 무엇이든 상관할 것 없이 믿을 수 있다. 당신은 단지 믿고 있는 것을 믿을 수 있을 뿐이다. 철학자들은 이것을 ”믿음의 비약”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이성의 세계에서 살려고 했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는 비약해야만 한다”고 말하며, 믿음의 세계로 뛰어 올라 무엇인가를 믿었다.

철학의 비밀들 중 하나는 당신이 뛰어 넘은 것에 관해 아무에게도 결코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 자신의 개인적인 비약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야말로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며, 실존적인 무의미함이다. 이제 당신은 ”어떻게 인간이 그와 같은 긴장 속에서 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까지 인간이 행해 온 사상적 방황이다. 여러 해 동안 인간은 독일 합리주의의 합리적 세계 속에서 살았고, 그 결과 모든 것은 상자 속에 갇히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믿음에로 비약하기 시작했다. 인간들이 비약하기 시작하자 모든 것이 덩달아 비약했다. 다음에 그 예를 들어보자.


1) 철학

믿음의 수준 또는 상층부로의 비약의 선두 주자는 수많은 기괴한 철학들이었다.

2) 미술

한 때 미술은 합리적인 것이었다. 어떤 사람이 소나 집 혹은 여인의 그림을 그릴 때 그것은 그리려고 한 대상과 같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반 고호, 고갱, 그리고 피카소와 같은 화가들이 나와서는 어느 누구도 전에는 본 적이 없었던, 무가치하게 보이는 그림들을 그렸다. 현대 미술은 단지 인간 비약의 표현일 뿐이다.

3) 음악

음악이 비약하자 드뷔시, 죤 케이지, 비틀즈, 그리고 자신의 음악에 어떠한 리듬도 합리성도 감성도 추구하지 않는 자들에 의해 갈 데까지 다 가게 되었다.

4) 문학

문학 역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상층부로 비약했다. 그래서 딜란 토마스(Dylan Thomas)와 아더 밀러(Arther Miller)같은 사람들은 도덕성, 윤리, 사랑, 정직 등 ... 무엇이든 규범적인 것을 깨뜨려 부수는 저술을 하기 시작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모든 것을 제거해 버리고 초도덕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속이 비어있는 일종의 무(無)의 상태로 비약하자는 것이다. 진리도 도덕도 없는 상태 ... 이것이 바로 절망의 상태이다.

5) 신학

비약의 최종 주자가 신학이었다.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서 말했다. ”무엇을 생각하라는 말인가? 하나님은 이미 죽었다.” 그리하고는 모든 것이 공허한 상층부, 즉 불합리라는 세계(世界)로 비약했다.


3. 선택권의 상실

합리적 세계관이 난관에 부딪치게 되자 사람들은 불합리성(不合理性)을 추구하게 되었다. 당신은 사람들이 왜 마약을 복용하는지 아는가? 그들은 합리적 선택권을 다 행사해 버렸기 때문에 당치도 않은 곳으로 인도하는 어떤 도피처를 찾기 위해 산산이 부서진 이성(理性)의 세계를 빠져 나와 비약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환생술, 마술, 점성술, 그리고 모든 종류의 기괴한 신앙들에 사로잡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합리적인 선택권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든 것들과 함께 하나님도 제거하여 버렸다. 그리고는 모든 장소에서 실속없고 무의미한 것에 저돌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본질적 믿음의 내용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에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당신은 불합리의 세계로 뛰어들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실존하시므로 당신은 그분께 당신의 믿음을 둘 수 있다. 당신은 아무 것이나 믿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담의 때로부터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은 있어 왔으며, 그들의 생(生)은 의미와 내용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기초를 두었던 미래적 실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다음 그들의 생(生)을 마감하였을 때 ... 그들의 삶의 방식이 옳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삶의 의미를 부여해 준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은 불합리한 것에 속게 되며 생(生)에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믿음에 대한 실증(3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Ⅰ. 우리의 기원(起源)에 대한 인식

 

 

히브리서 기자는 사실상 그가 편지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말할 때는 너희가 도저히 지닐 수 없는 어떤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이미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이 세계와 우주를 만드셨다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믿음의 초보를 내딛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보이는 세계와 전체 우주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는 믿음은 믿음으로써 확신한 것이지 봄(sight)으로써가 아니다. 어느 누구도 세상의 기원(起源)을 봄으로써 아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예, 제가 그 일이 발생했던 때에 거기에 있었고 그 모든 것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았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태초에는 그 누구도 사람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주의 창조에 관하여 우리가 아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아는 것 뿐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간단히 ”믿음으로 모든 세계(ai n=존재하는 모든 것)가 하나님의 말씀(rh ma=특별한 말)으로 지어 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noe =지적으로 인식한다)”라고 말한다. 모세가 창세기에서 이것을 가르쳤고 그들은 그 모든 것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에서 믿음이 그들에게 이상한 것이 아님을 간략하게 밝혀 주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셨다고 믿었던 것이 믿음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Ⅱ. 우리의 기원(起源)에 대한 여러 견해



1. 철학자들의 견해


당신은 우주의 기원은 철학자들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철학자로서 아흔 살까지 산 버틀란드 럿셀(Bertrand Russell)은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Why I Am Not A Ch-ristian)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는 이 책에서 기독교를 와해시키기 위해 기독교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터무니 없는 몇 가지 주장을 하였다. 사실 그는 그의 대부분의 생(生)을 기독교를 와해시키려는 데에 허비했다. 럿셀은 기원에 관한 모든 종류의 대답들을 알고 있었지만 철학자로서 아흔 살까지 산 후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생(生)을 요약했다.

”철학은 나에게 있어서는 실패작으로 확인되었다.” 즉, 그는 결코 아무런 대답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럿셀은 한때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썼다.

”나는 대단히 신중하게 기독교가...세상의 도덕적 진보에 대한 주된 적(敵)이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고 말하고 싶다...하나님에 관한 모든 개념은 고대 근동의 전제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그러므로 자유인에게는 아주 무가치한 개념에 불과하다.\그는 계속하여 ”우리는 지식으로 세상을 정복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으로 90년을 허비한 후 그는 무엇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는 어떠한 것도 믿지 않았다. 그래서 골로새서 2장 8절은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고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2. 과학자들의 견해


당신은 ”하지만 과학자들은 어떻게 우주가 시작됐는지를 알고 있다. 철학자들이 비록 몰랐다 하더라도 과학자들은 알고 있다”라고 말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과학자들도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과학은 오직 관찰해서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가만을 당신에게 말해 줄 수있을 뿐이며 그것의 이유를 말해 주지는 못한다. 과학은 단순히 이미 존재하고 있는 법칙들을 발견할 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과학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간과해 버리고, 자신이 할 수 없는 일, 즉 사물이 존재하기 이전의 모습을 관찰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고 있다. 나는 과학이 그와 같은 짐을 떠맡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과학은 ”그것은 바위다”라고 말할 수가 있지만 그것이 어디로부터 왔으며, 왜 왔는지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은 관찰한 것만을 알기 때문이다.

과학은 ”왜”(why)에 대한 접근 방법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디모데전서 6장 20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을 피하라고 말했다. 건전하고 관찰 가능한 과학에 잘못된 것은 없다. 그러나 과학은 기원을 취급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철학자들도 과학자들도 당신과 내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이나 내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셨다고 아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음 X 아무 것도 없음 = 만유(萬有)

진화론은 nobody X nothing = everything이라는 교활한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진화론자들은 자신들이 말하고 있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있을 정도이다. 켈쿤(Kerkut)이라는 이름으로 상당히 인정받는 진화론자가 진화론 선집을 펴냈다. 그런데 진화에 관한 기본적인 모든 주장들을 진술한 다음에, 그는 대단히 중대한 말을 했다.

”우리는 이 주장들 중 어떠한 것도 증명할 수는 없다. 사실은 반박될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입장을 재고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는 어떤 진화론자의 말을 인용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진화론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에 의한 창조를 거부한다. 그렇다면 내가 가질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인가?”


그는 아무 대안도 가지지 못했다!

신시내티 대학의 물리학과 교수인 무어(T. L. Moote)는 ”「바다의 흙에서 아메바가, 아메바에서 자의식을 가지고 사고하는 인간이 나왔다」고 하는 진화론의 주장은 무의미하다. 진화론은 지각없는 사람들의 가장 쉬운 해결 방법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가 성경을 펼쳐 창세기 1장을 보니,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만유(萬有)를 지으셨다고 말하고 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영리한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배우지 못한 중대한 사실인 것이다.


하나님 없이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애쓰는 모든 생각은 어리석은 노력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이해한다. 믿음은 사람의 정신이 아무리 총명하여도 이해할 수 없는 바를 이해하도록 해준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은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한다.

바울 사도는 여기서 두 가지를 말하고 있다. 즉,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라는 말씀은 육신적인 인식이나 경험주의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며,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는 말씀은 철학이나 합리주의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과학으로도, 철학으로도 하나님의 진리를 알지 못한다. 그러기에 10절은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만유(萬有)의 창조를 이해하게 될 뿐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11:4 / 아벨과 믿음의 삶


서론


제임스 모팻(James Moffatt)이 ”의로운 사람의 생(生)에 있어서, 죽음은 결코 마지막 단어가 아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그가 의로운 사람이든 불의한 사람이든, 세상에 무엇인가를 남기게 된다. 그는 암이나 독과 같이 좋지 않은 어떤 것을 남길 수도 있으며, 아니면 향수의 방향(芳香)이나, 대기 중에 향기를 날리는 꽃송이 같은 무엇인가를 남길 수도 있다. 즉, 죽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침묵하지 않고 말한다. 아벨이 이러한 사람인 것이다. ”... 저가 죽었으나 오히려 말하느니라”(히 11:4)

아벨이 현재까지도 말하고 있다면, 그가 말하고 있는 내용은 도대체 무엇인가? 창조로 인간이 존재하기 시작한 이래 인간의 두번째 세대인 그가 20세기를 향하여 말해야 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땅은 새로왔고 오늘날의 형편과는 전혀 달랐던 시대에 살았던 이 사람이 우리에게 말해야만 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분명히 그의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경영은 오늘날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은 한 단어, 즉 믿음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바로 이것, 믿음의 멧세지야말로 아벨이 우리에게 들려 주려고 했던 멧세지인 것이다.


복습


앞에서 우리는 1-3절을 다루는 가운데 믿음의 네 가지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 믿음은 미래 사실을 현재의 실재(實在)로 느낀다.

- 믿음은 우리 생명을 내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확신을 공급한다.

- 믿음은 하나님의 축복과 인정을 보증한다.

- 믿음은 우리로, 세상의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이해할 수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하며, 오감(五感)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을 인지할 수 있게 하여 준다.


아담과 하와는 과연 믿음의 사람들이었는가?


엄밀한 의미에서 아담과 하와는 믿음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나는 그 이유를, 그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은 에덴 동산에서 낮에 서늘한 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닐며 대화를 나누었으며, 현실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체험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의 하나님과의 체험은 실제적인 것이었다. 에덴 동산이 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현현(顯現)을 목격했다. 타락 이전에 그들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였으며, 완전한 의미로 그분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타락 이전에는 전혀 믿음의 여지가 없었다(보지 못하는 것을 바랄 여지가 없기 때문 - 역자 주). 이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아담과 하와를 믿음의 실례(實例)로 택하여 거론하지 않는 이유이다.


이리하여 믿음에 대한 첫번째 실례로서 아벨이 언급되었다. 아벨은 에덴 밖에서 태어났으며, 따라서 그는 그의 부모들과 같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알 기회를 전혀 가질 수 없었다. 따라서 그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믿음의 실례가 되었다. 즉, 그가 첫번째 믿음의 본보기인 것이다. 아벨은 첫번째 믿음의 사람이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본문은 세 개의 점진적인 관점들로 나누어진다. 아벨의 믿음은 세 가지 일 즉, 1)더 나은 제사를 드리는 일, 2) 의롭다하심을 얻는 일, 3)죽었으나 오히려 말하는 일을 하도록 그를 이끌었다.

이 일들은 점진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믿었기 때문에 더나은 제사를 드렸으며, 그가 더 나은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그는 의롭다함을 얻었으며, 그가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에 그는 만대(萬代)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 말하는 산(living)목소리가 된 것이다. 이제 다음의 관점들을 살펴보자. 믿음으로 아벨은 더 나은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림(4 상반절)



히브리서 11장의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창세기 4장으로 돌아가서 가인과 아벨의 기사를 연구해야만 한다. 4장 1절은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고 말한다.


”가인”이란 이름은 히브리어 「카나」(Qana)에서 나온 것으로 ”얻다”라는 뜻이다. 이 1절을 다음과 같이 풀어볼 수 있다. 즉, 가인이라는 이름 대신에 그 뜻 (”얻음”)을 대체해서 읽어보면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얻음」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가 된다. 이제 당신이 ”얻음”이라는 말을 취하여 문맥상에서 그 행간의 뜻을 파악해 본다면, 하와는 사실 그 아이를 ”바로 그”(he is here)라고 명명한 것이 된다(하와가 목적어를 사용하지 않고 ”얻었다”라고 말한 것은 「항상 사모해 왔던 바로 그것」을 얻었다는 말임 - 역자 주). 하와는 ”나는 바로 그를 얻었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아마도 하와는 그 아이가 3장 15절에서 약속된 바 하나님께 돌아갈 길을 열어 줄 구원자라고 말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녀는 옳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살인자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2-4절에는 1절에 연이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Ⅰ. 하나님께서 세우신 규례가 계시됨


우리는 이곳 창세기 4장 3-4절에서 가인과 아벨이 각각 제물을 가져왔다는 기사를 읽게 된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몇 가지 시사하는 바가 있다.

1. 예배를 위한 정해진 장소가 있었다


가인과 아벨이 모두 자기들의 제물을 ”여호와께 가져왔다”(개역 한글성경에는 「드렸다」로 표기됨 -역자 주)는 사실은 여호와께서 어떤 장소를 정하셨으므로 그들이 제물을 그 곳까지, 가져와야만 했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나는 이 장소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에덴 동산으로 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화염검을 가진 천사들을 두셨던, 에덴동편에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3:24 참조). 즉, 이곳이 하나님과 만나도록 정해진 곳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구절들에는 그곳에 이미 제단이 있었다는 좋은 암시가 있다. 왜냐하면 4절은 아벨이 이미 죽은 제물을 가져왔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 동산에서 추방하셨지만, 그분께선 그들이 다시 돌아와 그분을 경배할 수 있도록 시은좌(施恩座)를 마련하셨다는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리고 이 창세기의 시은좌는 후일 이스라엘의 성막과 성전 안의 시은좌처럼 그룹들에 의해 지켜졌다(창 3;24).


2. 예배를 위한 정해진 시간이 있었다


창세기 4장 3절은 ”세월이 지난 후에...”로 되어 있다. 만일 당신이 이 구절을 히브리어 원문에 입각하여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날들의 마지막에”를 뜻하는 것이 된다. 바꾸어 말하자면, 어떤 지정된 시간의 마지막이 제사를 드리는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속죄를 위해 특별한 날을 가르쳐 주셨던 것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므로 가인과 아벨이 와서 그분께 경배할 시간을 정하셨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그들이 동시에 왔다는 사실은 그들이 모두 이 제사에 관한 공통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점들은 예배를 드리도록 지정된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고 생각한다.


3. 예배를 드리는 정해진 방법이 있었다

하나님께는 제사에 의해서만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아담과 하와의 자녀들은 제사에 정해진 장소와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그들이 제사의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가정을 믿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해 주지 않으셨다면,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리는 것에 관하여 어떠한 내용도 전혀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사의 개념은 이곳에 처음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로 함께 왔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다른 제물들을 가지고 왔다. 하나님께서 이 제물들 중 하나만을 열납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미 제물에 관한 규례를 정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Ⅱ. 하나님께서 세우신 규례에 대한 반응



1. 아벨의 반응 - 순종하는 믿음


히브리서 11장 4절은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믿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로마서 10장 17절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라고 말한다. 사람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을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듣고서 그것을 믿고 순종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에게 자신은 제사를 원한다고 말씀하셨다. 아벨은 믿었고 하나님께서 행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행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였다.


가인의 농작물 제사가 무엇이 잘못이었는가?


하나님께 온갖 종류의 과실들과 채소류, 그리고 곡물을 드리는 것이 사실상 잘못된 점은 전혀 없다. 레위기 19장 24절은 ”제 사년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에 드려 찬송할 것이며”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농작물 제사를 받으시는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첫번째로 드려지지는 않았다!

피의 제사가 항상 맨먼저 드려져야만 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기 전에 먼저 자기의 죄를 씻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물론, 피없는 소제(素祭)도 있었지만 죄를 씻기 위해서는 피의 제사가 먼저 드려져야만 했다. 아벨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행했을 때, 그는 자신의 순종을 드러낸 것이며 자신의 죄악됨을 인정했던 것이다. 가인은 불순종했으며,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4절은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라고 말씀한다. 아벨의 제사는 피의 제사였으므로 더 나은 것이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피의 제사를 지시하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았다면 아벨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아벨이 우연히 올바른 제사를 드렸던 것이라면, 무슨 권리로 그가 의롭다 일컬어질 수 있었겠는가? 만일 아벨은 자신이 양 치는 자였으므로 양을 가져왔고 가인은 토마토 재배하는 자이었기에 토마토를 가져왔다면, 무슨 독단적인 근거에서 하나님이 ”아벨아, 너는 의로운 자로다! 그러나 가인아, 너는 그렇지 못하도다!”라고 말씀하셨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마치 ”나는 양은 좋아하지만, 토마토는 나에게 맞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아벨의 제사가 열납되었다는 것은, 모든 면에서 그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듣고 그것에 순종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의(義)에 대한 기술도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선 믿음만을 열납하신다. 아벨은 하나님을 믿었고 그분께 다가가서 ”하나님, 이것은 당신께서 바라신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만일 내가이것을 가져온다면 당신께선 나의 죄를 용서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그것을 가져왔으며, 하나님 당신을 믿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지시해 주신 구속의 방법 또한 인정합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2. 가인의 반응 - 불순종의 행위


가인도 아벨이 가지고 있었던 것과 동일한 모든 공통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에 개의치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가져왔다. 그는 자기 부모의 행습을 따라,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 행했다. 가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자기 자신의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가 경작해 왔던 모든 농작물들을 거두어 모아, 그것들을 하나님께 가져와서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 이것들이 대단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규례에 대한 가인의 응답은 그를 시종 거짓 종교의 조상으로 증거되도록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거짓 종교란 하나님이 규정하신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 오려고 시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거짓종교는 ”아니다, 다른 길이 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바를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그래서 선하게 될 수도 있다. 만일 내가 충분한 만큼의 선행을 쌓게 된다면 나는 궁극적 선(善)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가인은 이러한 모든 주장들의 조상이 되었다. 하나님께선 ”내가 말한 대로 그 일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가인은 ”아닙니다. 나는 내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거짓 종교란 이러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 모든 것들의 조상이 되었다. 거짓 종교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잠언 16장 25절은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가인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둘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위하여 지시하신 것을 가져옴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고안한 계획에 의해 스스로의 공로를 가지고 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선 그를 거부하셨고 그는 여호와의 면전에서 쫓겨나 놋 땅(유리하는 것 혹은 방황하는 것을 의미함)에 거하며, 자녀들을 낳고 최초로 성(城)을 쌓았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사단의 통치하로 떨어져 버린 세상의 제도가 탄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인은 자기 길로 가기로 정했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떠났다(4:16). 가인이 불쌍하다고 유감을 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제물을 열납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 원하셨던 바를 알았지만, 그것을 자기 방식대로만 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 것은 임의로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지시하신 뜻에 대한 순종에 기초한다. 문제는 가인의 무지함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제멋대로 행하려고 하는 죄에 있었다. 아벨은 의로왔으나, 가인은 그렇지 못했다. 이것은 요한일서 3장 11-12절에 의해 지지된다. 그 구절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고 말한다. 당신은 의롭다 하시는 것이 하나님 편에서 임의로 하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불순종하는 것이 악(惡)이며 순종하는 것이 곧 의(義)이다. 문제는 이와 같이 단순한 것이다.



하나님이 언제 제사에 대해 가르치셨을까?



제사에 관한 가르침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창세기 3장 21절에 나타났다는 몇 가지 암시가 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하는 말씀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행동이 제사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던 사실에는 네 가지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 죄인들은 가려져야 할 필요가 있다.

- 그것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었다 - 그들은 이미 자기들을 위하여 무화과나무 잎으로 가릴 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아니다. 너희의 가릴 것은 내가 만들겠다”고 말씀하셨다.

- 하나님께선 자신이 직접 그것을 주셔야만(입히셔야만) 했다.

- 그것은 죽음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었다 - 즉, 짐승이 죽어야만 했다.


이와 같이 매우 한정된 방법이지만, 이것이 죄를 가리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의 중요성에 관하여 처음으로 드러난 것이었다.


Ⅲ. 하나님께서 세우신 규례에 대한 인식



1. 믿음 생활의 근거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제로 한다. 혹자는 ”나는 내가 좋아하는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혹은 어떤 이가 ”당신이 무엇을, 아니 어떤 것을 믿건 상관이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당신이 믿고자 하는 것을 믿으십시오”라고 말할 때, 「아니오! 믿음은 하나님의 표준을 전제로 하는 것이오」라고 대답해야 한다. 그런데 가인은 자신을 믿었으며, 잘못된 것을 믿었다.

히브리서 9장 22절은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다른 방법은 없다. 나는 당신이 무엇을 믿든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정하신 표준이 있기 때문이다. 레위기 17장 11절은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보여 주신 계시, 그것이 표준이다. 이것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요 절대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나에게 ”당신은 왜 그렇게 속이 좁으십니까?”라고 말한다. 물론 나도 소위 넓은 마음이 되어 거짓들을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누구를 도울 수 있단 말인가! 절대 변치 않는 하나님의 표준이 엄연히 있다. 우리가 믿음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2. 믿음 생활의 시작


믿음 생활은 죄를 위한 제사를 시작하도록 한다. 당신이 죄인이며, 죽을 수밖에 없으며, 그분의 용서가 필요하며, 그분이 계시하신 뜻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사실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누구나 하나님 앞으로 나아온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믿는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던 유일한 길은, 그가 나아올 때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그리스도라는 규정된 제사를 통하여 오는 길이다. 다른 길은 없다. 내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편협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이것이 진리이기에 말하고 있을 뿐이다!

바로 여기 창세기 4장에는 십자가를 향한 대로(大路)가 굳게 닦여 있다. 아벨의 양은 첫번째 양, 즉 한 사람을 위한 한 마리의 양으로 드려진 것이며, 그 후 유월절에는 한 가족을 위해 한 마리의 양이, 그보다 훨씬 뒤인 대 속죄일에는 한 민족을 위하여 한마리의 양이 드려졌다. 그리고 마침내는 갈보리에서 전 세계를 위하여 한마리의 양이 드려졌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곳 창세기에는, 첫번째 양과 더불어 십자가를 향한 길이 닦여지기 시작한다.

아벨은 더 나은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제사는 순종과 믿음으로 기쁘게 자신의 가장 좋은 것(양의 첫 새끼)을 드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아벨이 더 나은 제사를 드렸기에 그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었다.


의롭다함을 얻음(4 중반절)


창세기 4장 4-5상반절은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고 말한다.


Ⅰ. 아벨의 믿음의 증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감추인 어떤 면모 때문에 그를 높이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아, 나는 너를 더 좋아한다. 너희 두사람을 달아 보니 네가 더 낫다”라거나 혹은 ”아벨아, 나는 네가 걷는 길을 좋아하며 네가 네 자신을 절제하는 방법도 좋아한다. 그러나 가인아, 나는 네가 싫다. 너는 정말이지 우습게도 절둑거리며 걷는구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선 너무나 피상적이셔서 사람의 외양에만 관심을 가지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본문에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았다고 지시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모두 죄인이었다. 아벨이 의롭다함을 얻은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에게 하도록 명령하신 것을 했다는 것이며, 가인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유일한 차이점이다.


사실상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즉,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당신이 얼마나 선한 자인가에, 혹은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나은 자인가 아닌가에도 있지 않다.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방법대로 그분께로 가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의 전부이다!

아벨은 가인과 마찬가지로 죄인이었으나, 그는 하나님을 믿고 순종했다. 그 까닭에 믿음으로 그는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으며, 하나님께선 그를 열납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게 하며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게 하는 것은 순종하는 믿음이다. 참된 믿음이란 항상 순종하는 믿음임을 알아야 한다.


1. 요한복음 8장 30-31절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얼핏보면 많은 사람들이 추상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거기에 매달려 순종하는 자들만이 참으로 믿는 자들인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불순종해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순종하라.


2. 야고보서 2장 14-24절


이 구절에서 야고보는 참된 믿음은 항상 행위로 증명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믿는다고 말하면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형제를 돕지 않는다면 그의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은 항상 행위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을 바치라고 하시는 하나님께 기꺼이 순종함으로 그의 참된 믿음을 증거했던 사실을 보여준다. 24절에서 그는 요약하여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바울의 주장과는 모순이 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가시적(可視的)으로 당신의 믿음이 행위로 나타날 때만이 그 믿음은 참된 것이 된다는 뜻이다. 당신은 행위로 하나님께 도달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분께 나온 후에는 행위가 참된 믿음의 증거가 될 것이다.


3. 에베소서 2장 10절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벨은 순종함으로 자기 믿음의 견고성을 증거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가인에게 ”당신은 하나님을 믿는가?”라고 질문했었다면, 그는 「예, 물론입니다. 나는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실상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제물을 열납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사무엘상 2장 3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즉 그분의 아들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다(요 5:33).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존중히 여기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도저히 존중히 여길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이기 때문이다.


Ⅱ. 하나님의 인정하심에 대한 증거


1. 그 증거를 아벨에게 보여줌


히브리서 11장 4절은 아벨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증거, 아니 인정을 받았다고 말한다. 당신은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그것을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아벨의 이마에 번쩍이는 황금별이라도 붙여 주셨다는 말인가? 도대체 하나님께서 그에게 무슨 일을 하셨다는 것인가? 아벨이 어떻게 자신이 인정을 받았는지를 알았는가?”라고 말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오셔서 그의 제물을 불사르셨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내가 이렇게 믿는 이유는, 성경에 적어도 다섯 번에 걸쳐 하나님께서 불을 내리사 제물을 사르심으로써 그분의 인정하심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그 구절들은 바로 레위기 9장 24절, 사사기 6장 21절, 열왕기상 18장 38절, 역대상 21장 26절, 역대하 7장 1절이다. 만일 이러한 방법이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인정하시는 데에 사용되었다면, 불은 아벨의 제물 위에만 내렸으며, 가인의 제물에는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아벨이 한 일을 인정하시자, 그분께선 자신의 의(義)를 아벨에게 전가하셨다. 이것은 일종의 이적이다. 왜냐하면 아벨은 의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가운데 누구도 의롭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선 그리스도의 의(義)를 우리에게 전가시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의롭지 못하다.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하나님 앞에 서기에 올바르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義)를 전가시켜 주시는 것이다.

아벨에게 일어났던 일도 이와 동일한 것이다. 아벨도 죄된 속성을 가진 죄인의 모습으로 제단 앞에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아벨아, 네가 나에게 순종했으니 나의 의(義)를 너에게 전가시켜 주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2. 그 증거를 가인에게는 보여 주지 않음


가인은 하나님께로부터 의(義)를 전가받지 못했다. 사실 그 어떠한 가인식의 접근 방법도 지금까지 하나님의 의(義)를 전가받지 못하였다.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인정하고 죄를 인정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의(義)에서 절연된 것은 아니다(유다서 10-11절을 보라). 스코필드(C. I. Scofield)의 유다서 10-11절에 대한 주석에 의하면 ”가인은 하나님과 종교를 믿는다고 하나, 자기 자신의 의지를 따라 믿으며, 피에 의한 구속을 거절하는 종교적인 자연인의 한 사례(事例)이다.\로마서 10장 3-4절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의 의(義)를 세워 보려고 애쓰며 분주히 돌아가고 있다. 이 때 모든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믿는 일이며 그 때에 하나님께선 자신의 의(義)를 전가시켜 주시는 것이다.


Ⅲ. 가인의 불의함에 대한 증거


1. 분노함(창 4:5)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인정도 받지 못하자 몹시 격노했다. 5절은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여”라고 말한다. 종교적으로 자기 중심적인 자에겐 무시당하는 것보다 더 큰 모욕은 없다. 따라서 가인도 자기 감정을 억제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2. 하나님의 은혜를 포기함(창 4:6-7)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의 특징을 보여 주는, 하나님께서 가인을 향하여 가시는 것을 본다. 7절은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말한다. 사실 하나님께선 ”보아라 가인아,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다. 만일 네가 다시 돌아와 바르게 행하고, 순종하는 믿음으로 바른 제사를 드리면 너도 네 동생과 같이 열납되어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네가 이와 같이 아니하면 죄가, 웅크리고 있는 맹수가 너를 죽이려고 뛰어오르려 하는 것같이 네 문에서 기다릴 것이다. 너는 반드시 죄를 물리쳐야만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은혜롭게도 하나님께선 가인에게 돌아올 것을 제안하고 계신다.

이 얼마나 감사한 초대인가! 그러나 가인은 그렇게 하는 것을 원하지도, 흥미있어 하지도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았지만, 자의적으로 그것을 거절해 버렸다. 왜냐하면 그는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방식대로 처결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3. 살인을 함(창4: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여기에 인류 역사상 최초의 죽음이 있다. 나타난 대화로 보아서는 아벨은 그것을 전혀 예기치 못하고 있었다. 가인은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처음부터 살인한 자”로 언급된 사단에게 굴복하였다.


4. 거짓말함(창 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인은 하나님께 거짓말하고 자신이 행한 일을 부인할 뿐아니라 빈정대기까지 했다.



5. 회개가 없음(창 4:10-15)


10-12절에서 가인은 문책당하게 되고, 유죄로 판결되며, 저주를 받아, 자기 동생의 살인에 대한 벌을 받게 된다. 그러자 13절에서 가인은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하나님, 나는 이것을 참을 수 없습니다. 이거야말로 하나님께서 너무하시는 겁니다”라고 대꾸하는 것이다. 죄에 대한 참회나 슬픔, 은혜를 탄원하는 것이나, 바른 희생제사를 드리려는 욕구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이건 너무나 지독합니다”라는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불쌍히 여겼다. 죄인들이 얼마나 자신들을 동정하며 그것으로 하나님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는가는 항상 흥미로운 것이다.

14절에서 가인은 계속하여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가인은 슬퍼하기는 했지만 회개하지는 않았다. 양심의 가책이 있은 다음에 회개가 있다. 양심의 가책은 자신의 잘못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이며, 회개는 돌아서서 바꾸는 처신이다. 가인은 슬퍼하기는 했지만 회개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6. 배도함


16절은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라고 말한다. 가인은 첫번째 배도자였다. 그는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떠나 버렸다. 그는 은혜의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이 얼마나 서글픈 비극인가!

이렇게 아벨은 더 나은 제사를 드렸기에 그는 의롭다함을 얻을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에 그는 죽었으나 말할 수 있었다.


죽었으나 말함(4 하반절)


히브리서 11장 4절에는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죽은 사람이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아벨이 누구에게 말했을까?


Ⅰ. 하나님께



창세기 4장 10절은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말한다. 가인은 그가 자기 동생의 목소리를 그치게 하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피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는 무엇을 호소했을까? 그것은 복수였다(계 6:9-10참조).


Ⅱ. 가인에게


창세기 4장 11절은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라고 말한다. 가인이 딛고 선 모든 흙은 자기 동생의 피를 생각나게 하는 흔적을 지니고 있었다. 모든 황무지와 잡초들 그리고 먼지들, 이 모든 것이 가인의 생(生)을 통하여 그가 죽인 동생이 부르짖으며 ... 그를 고발하고 있는 목소리였던 것이다.

Ⅲ. 모든 인류에게


아벨은 모든 인류에게 다음 세 가지 요지(要旨)의 설교를 한다.

- 인간은 믿음으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행위로가 아니다.

- 인간은 자기 이성(理性)을 따라 하나님의 계시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표준을 지켜야만 하며 그것에 순종해야 한다.

- 하나님의 표준에 순종치 않는 자의 죄는 철저히 응징된다.

아벨은 ”...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히 10:38)고 하는, 시대를 초월한 설교를 하는 설교자인 것이다.



히브리서 11:5-6 / 에녹과 믿음의 발걸음


서론


히브리서 11장에서, 성령께서는 아벨로 시작하여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를 살펴 가는 가운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거나 혹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제하게 됐던 모든 사람들을 나타내 보여 주고 계신다. 하나님께선 행위를 의지해 자신께 나오도록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사람들이 믿음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께 나아올 때 받게 되는 구원 사역으로부터 행위가 솟아나오도록 하셨던 것이다. 성령께서 믿음을 중시했던 구약의 인물들에 대한 역사를 살펴가실 때, 먼저 믿음으로 말미암는 예배의 모범을 보여 주었던 아벨에 대하여 언급한 다음, 믿음의 발걸음을 증거한 에녹을 언급하신다.

창세기 5장 21-24절에서 에녹에 관하여 말씀하신 내용을 살펴보자.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아담과 하와는 날이 서늘할 때에 하나님과 함께 거닐면서 대화했었음을 기억하라(창 3:8참조). 그러나, 그들이 타락하여 동산에서 쫓겨나자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도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의 운명은 에녹이라는 사람 안에서 바뀐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즉 아담과 하와가 상실한 교제를 체험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한 본보기로서 모든 사람들 앞에 서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명백한 연속성이 있다. 믿음으로 합당한 제물을 드림으로 하나님께 다가갔던, 아벨의 믿음의 예배가 시작된 후 에녹의 믿음의 걸음이 이와 같이 계속하여 이어진다.


1. 아벨의 믿음의 예배


믿음 생활은 합당한 제사에 근거하여 시작된다. 어떤 사람이 금방 하나님께 와서 ”하나님, 저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기로 결심합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가 먼저 제사를 근거로 하나님께 온 후에야 비로소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열어 주는 유일한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이다. 아벨은 이러한 원리들의 실례(實例)이다. 그는 하나님께 와서 제사로 예배드렸던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의 다음 예(例)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한 사람을 발견케 된다. 이와 같이 먼저 죄로 인한 죽음(제물의 죽음을 말하는 것임 - 역자 주)이 있고 그 후에야 하나님과의 동행함이 있을 수 있다. 에녹은 이 점을 예증하여 준다.


2. 에녹의 믿음의 발걸음


에녹의 믿음에는 아벨의 믿음에 포함된 모든 것이 함축되었다. 나는 에녹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피흘림이 없이 사람이 하나님께 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에녹은 아벨이 행하였던 모든 것을 행하였으며 더 나아가 하나님과 동행했다. 이 원리는 오늘날도 변함이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기 전에 자신들의 죄를 돌아보아야만 했다.



에녹의 믿음의 발걸음을 살펴보자.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5-6).


그런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에녹의 믿음의 생활에는 다섯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로, 에녹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었다. 둘째로, 하나님의 상 주심을 소망하였다. 세째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네째로, 하나님 편에 서서 말씀을 전파하였다. 다섯째로, 이 모든 것의 결과로 그는 하나님의 존전에 서게 되었다. 이제 이 특성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하나님이 계심을 믿음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6 상반절).


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바탕


하나님께서는 에녹이 그분을 믿었으므로 기뻐하셨다.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것이 믿음의 발걸음이 시작되는 곳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이다. 사람은 그밖의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예를 들어보자.


1.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것


1) 제도로서의 종교

하나님께선 제도로서의 종교를 미워하신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리에 대항하려고 사단이 세운 제도이기 때문이다.

2) 민족적 우월감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씨며,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소유한 자들이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생각했다.

3) 선행

선행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며 하나님께 나오는 길이 못 된다. 로마서 3장 20 상반절에는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선 자기 방법을 하늘에 쌓으려고 하는 어떠한 사람도 기뻐하지 않으신다. 사실 스스로 옳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있어서는 가장 역겨운 것이다.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이다. 에베소서 2장 8-9절은 ”너희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말한다.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종교도 민족도 행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는 못한다. 에녹은 믿음으로 살았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사실 그는 하나님을 너무나 기쁘시게 해서, 어느 날 그와 하나님이 산책을 하던 중 계속 걸어서 하늘나라까지 곧장 가게 되었던 것이다.


Ⅱ. 믿음의 출발점


어디에서 믿음이 시작되는가? ”... 그(하나님)가 계신 것을 믿어야...” 시작된다. 이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고, 막연한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한 분이시고 참되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저는 산신령을 믿습니다” 혹은 ”저는 운수의 신(神)을 믿습니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니다! 당신은 오직 한 분이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믿어야만 한다.


1.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각성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의 길 외에는 없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보아서 알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장 18 상반절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라고 말한다. 아니다. 그들은 보지 못했다. 성경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사람이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본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 때였다. 요한복음 14장 9 중반절에서 예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나는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에 믿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의 길이지, 보아서 아는 것이 아니다.

욥기 38장 2-6절에서 하나님께선 욥에게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았었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그 주초는 무엇 위에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고 물으신다. 바꾸어 말해서, 하나님께선 ”욥아 너는 믿음으로 아는 것 말고는 아는 바가 없는 것이다. 아직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내가 너에게 주는 대답들 외에 어떠한 대답들도 가지지 못하며, 너는 단지 그것들을 믿거나 혹은 믿지 않거나 하는 것 뿐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2.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


1) 과학

나는, 당신이 하나님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는 말로부터 시작하고 싶다. 기껏해야 모든 과학적인 증거라는 것은 단순히 정황(情況) 증거일 뿐이다. 폴 리틀(Paul Little)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당신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나폴레옹을 증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 이유는 역사 자체의 본질과 과학적인 방법의 한계들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실이 과학으로 증명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이 반복되어져야만 한다. 사람들이 단 한 번의 실험을 근거로 새로운 발견이라고 세상에 발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질상 역사라는 것은 반복되지 않는다. 누구 한 사람도 만물의 시작을 재상연할 수도, 나폴레옹을 다시 데려올 수도, 링컨의 암살이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반복할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이 반복되어 증명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건의 실재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가 주장하고 있는 바는 모든 것에 과학적인 방법을 적용할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과학적인 방법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사랑이나 정의 혹은 분노도 역시 우리가 시험관에 넣을 수는 없는 것들이지만 이것들은 실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비록우리가 과학으로 하나님을 증명할 수는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지적해 줄 수 있는 과학적인 그 무엇이 분명히 있다.

- 인과의 법칙

원인이 없는 결과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거로 완전히 되돌아가 본다면 마침내 무원인의 원인(uncaused cause)이신 하나님께로 도달케 될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히브리서 3장 4절에 나타난다. 이 구절은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

엔트로피(물리학에서 물체의 열역학적 상태를 나타내는 양 - 역자 주)의 법칙에 의하면 우주는 쇠약해지고 있다. 만일 그것이 쇠약해지고 있다면 그것은 자립적인 것이 못된다. 그것이 자립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시작이 있었어야만 한다. 만일 그것의 시작이 있었다면 누군가가 그것을 시작했어야만 한다. 이와 같이 당신은 무원인의 원인(uncaused cduse)에까지 돌아가게 된다. 최초의 원인은 반드시 계시는 것이다.

- 구상(構想)의 법칙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의 능력 속에서 보여진다. 식물들이나 짐승들은 필요한 먹이를 충당하여 성장하고 재생산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혹성들, 소혹성들, 위성들, 혜성들, 유성들, 그리고 별자리들은 모두가 전 우주를 통해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거대한 원심력과 구심력에 의해 자신들의 궤도를 지키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그것들을 구상하신 분을 보여 주도록 만들어져 있다.

지구 자체가 누군가가 구상하셨다는 증거를 지니고 있다. 만일 지구가 훨씬 작았다면 대기는 형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훨씬 컸더라면 대기에는 산소가 희박하게 되었을 것이다. 지구와 태양의 거리는 너무나 정확하게 되어 있어서 거기에 약간의 변화만 있다 해도 지구는 지나치게 덥거나 혹은 춥게 될 것이다. 지축의 경

사도(23.5도)로 말미암아 사계절의 순환이 보장된다. 도대체 누가 이 모든 것을 구상하셨다는 말인가?

이와 같이 하나님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저 위에서 누군가가 빈틈없이 일하고 계시다는, 분명한 많은 증거는 있다는 것이다.


2) 이성(理性)

- 인간의 본성

로마서 1장에 의하면 사람은 날 때부터 본유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인격적이며, 도덕적이며, 사유적이며, 또한 의지적이다. 인간이 어떤 진흙 속의 아메바로부터 나왔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사람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확정해야만 했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옳고 그름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모든 사람들은 신(神)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인류학자들은 전 세계를 두루 살펴보는 가운데 그들이 어느 곳에 가든지 신(神)을 믿고 있는 족속들을 발견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개념

하나님에 대한 생각 자체가 그분이 존재하신다는 것이 사실임을 알려 준다. 즉, 인간의 정신이 하나님에 관해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러한 생각이 어디로부터인가 유래되었다는 하나의 암시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하는 방법이 있다. 당신은 그러한 것을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존재하는 수많은 것들을 통해서 결코 있을 수 없는 무엇인가를 추리할 수는 있다. 하지만 결코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누구인가가 그에게 인식의 능력을 주었다는 하나의 지적인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나타내 주는 과학적인 증거와 이성적인 주장들에 관해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그것들을 정확히 파악하게 될 때 그것들의 종착점은 결국 믿음이 된다. 사람은 결국 ”믿습니다”라고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증거는 엄밀히 말하자면 정황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 번 믿기만 한다면 갑자기 그 증거가 우리의 것이 된다. 히브리서 11장 5절은 에녹에 관하여 ”저는 옮기우기 전에 ... 증거를 받았느니라”는 말을 하고 있다.

당신은 ”어디에 그가 그 증거를 지니고 있었는가?”라고 물을지 모르겠다. 그것은 그의 마음 속이다. 로마서 8장 16절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올 때 갑자기 진실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을 알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과학적으로나 합리적으로 증명해 줄 필요가 없다. 나는 그분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그분이 계시다는 것과, 그분이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으로 시작해야만 한다. 에녹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


하나님의 상주심을 소망함


”...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믿는 것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이것 외에도 우리는 하나님은 도덕적인 하나님이시므로 자신에게로 오는 신실한자들에게 상주신다는 사실을 또한 믿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격적이시며, 사랑이 많으시며,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임을 인식해야만 한다. 에녹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거대한 우주의 무관심한 최초의 원인이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과 삼백 년 동안이나 교제하셨던 인격적이시며, 관심이 깊으시며,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라고 믿었다.

분명히 어떠한 우주적인 정신 내지는 힘이 있으나 그것은 비인격적인 것이며 알 수도 없는 것이라고 믿었던 아인슈타인과 같이 하나님을 가정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아니, 아인슈타인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하나님은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그분에게로 나오는 자들에게 상주심으로써 응답하시는, 인격적이시며 사랑이 충만하시며, 관심이 깊으시고, 도덕적인 분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만 한다.


Ⅰ. 성경상의 사례(實例)


1. 역대상 28장 9 하반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2. 시편 58편 11 상반절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3. 시편 119편 10 상반절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4. 잠언 8장 17절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5. 잠언 11장 18 하반절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

6. 예레미야서 29장 13절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Ⅱ. 상 주심의 의미



당신은 ”그렇다면 그분을 찾는 자들을 위한 상은 무엇인가?”라고 반문할 것이다. 마태복음 6장 33절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한다. 당신은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라고 물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이 우리의 상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이며, 하나님께선 그리스도에게 모든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 새로운 심령, 성령, 영생, 축복, 긍휼, 은혜, 평강, 기쁨, 사랑, 그리곤 하늘나라... 등등 모든 것을 주시는 것이다.


Ⅲ. 상 주심의 확실성


당신은 ”만일 제가 그분을 찾고 그 모든 것을 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나에게 상을 주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1. 요한복음 6장 37 하반절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단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2. 히브리서 7장 25 상반절

”그러므로 자기(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


Ⅳ. 상 주심의 표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당신은 무엇보다 먼저 그분이 계심을 믿어야 하며, 둘째로 하나님께선 도덕적인 분으로서 의(義)의 표준들을 가지고 계시며, 만일 당신이 그대로 행한다면 상이 있다는 것을 믿으며, 그분께서 요구하신 바를 따라 나와야만 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당신은 ”저는 그 일을 행하고 싶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으며 그분께 나오고 싶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그곳에 이를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질문할 것이다. 길은 하나밖에 없다.


1.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2. 사도행전 4장 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3. 요한일서 2장 23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4. 요한이서 9절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에녹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었으며 하나님의 상을 소망했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하나님께선 어떤 표준을 세우셨고, 에녹은 ”저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표준을 토대로 하나님께 나아가겠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용서와 평강과 기쁨, 하늘나라와 영생 ... 그리고 모든 것을 주신다. 하나님께 나오는 유일한 길이 있으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전심(全心)으로 그분을 찾으면 당신은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제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세번째 이유를 살펴보자.


하나님과 동행함


사람이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분이 자기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과 자신이 그분이 주시는 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믿은 후, 즉 그가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시는 대로 하나님께 나온 후... 이 모든 것들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케 될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앞에 나온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는 두 번이나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22, 24절)고 말한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구절은 70인역(septuagint)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구절과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되어 진다. 신약에서 ”걷다”(동행하다)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매일매일의 행위를 표현한다. 예를 들면, 불신자는 세상 것을 따라 걸으며 신자는 성령을 따라 걷는다. 즉, 에녹은 매일 계속하여 하나님 앞에서 행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에녹의 발걸음에는 많은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Ⅰ. 화해



아모스서 3장 3절의 ”두 사람이 의합치 못하고야 어찌 동행할 수 있는가?”란 질문의 답은 ”못한다”이다. 두 사람이 깊은 친교로 조화를 이루며 함께 동행하기 위해서는 화목과 의합을 전제로 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말할 때, 그 말에는 반역이 끝났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대항하여 공공연히 반역을 저지른다. 로마서 5장 10절은 우리가 그분의 ”원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할 때 전쟁은 끝나게 되고, 하나님의 표준들이 충족되어지며, 화해가 이루어진다.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반역성은, 바울이 우리 인간의 옛 행위를 보여 주는 에베소서 4장 17-19절에 예시되어진다.


- 자기 중심 - ”그 마음의 허망한 것.\- 무지 -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음 -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뻔뻔스러움 - ”저희가 감각없는 자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그러나, 20절에서 바울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져 있지도, 죄와 더러움 가운데에 살고 있지도 않다. 우리는 변하여져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을 시작하려면 화해가 전제로 되어야 한다. 즉, 우리가 십자가 아래에 와서 우리 죄가 용서되고, 반역이 끝나고, 우리가 하나님 편으로 갈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된다.



Ⅱ. 상호 교류하는 본성


당신은 물고기와 친구가 된 사람을 알고 있는가? 나는 그러한 사람을 알고 있지 못하다. 당신은 ”맥아더씨, 그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당신이 어떻게 물고기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주변에 연못이라도 파려고 하십니까? 당신은 물고기와 교제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당신의 말대로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이것 만큼이나 불가능한 것을 알고 있는가? 그것은 죄인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선 죄인들과는 사귈 수 없는 분이시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죄악된 인간은 하나님이 계시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하여 있다. 따라서 죄인에게는 하나님과 상호 교류가 가능한 수단이 없는 것이다. 당신은 물고기와는 산책할 수도, 혹은 거실에 앉아 대화를 나눌 수도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신이 물고기와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으며, 서로간에 교통할 수단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당신과 물고기가 각각의 영역에서 함께 동행할 수도 없다. 즉, 당신이 어항에 들어가 물고기와 말할 수 없으며, 물고기가 거실로 나와서 당신과 대화할 수도 없다는 말이다.

이와 동일한 것이 죄인과 하나님 간에도 적용된다. 인간은 자신의 본성을 근거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양자가 합할 수 있는 영역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일상 생활이 그와 같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그가 전에는 존재할 수 없었던 영역에 들어가도록 허용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야만 한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될 때 우리의 시민권은 더 이상 땅에 있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는 것이다(빌 3:20). 에베소서에 의하면 우리는 하늘나라에 거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우리가 구원받게 될 때 우리는 자동적으로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된다는 사실을 아는가? 이 일이 한 번 일어나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물고기였으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본성, 즉 하나님과 교류할 수 있는 본성을 주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본성의 변화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의 의미이다(고후 5:17).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새로운 본성을 소유해야만 한다.


Ⅲ. 도덕적 건전성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지 못한 길로는 행하지 않으신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장막을 지나가실 때에는 항상 그들에게 모든 더러운 것들을 제하여 버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길로나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길로만 행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천년왕국에서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거스리는 모든 세력들은 반드시 제거될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정결치 못한 것과는 함께 하지 못하신다(합 1:13 참조).

요약해서 말하자면,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거룩한 생활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요한일서 1장 5-10절에 의하면 거룩한 생활에는 회개와 자복이 포함된다. 지금까지 하나님과 동행해 온 이들은 자신들의 죄가 씻겨졌으며 계속하여 자복함으로써 깨끗하게 되어지는 자들 뿐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도덕적 건전성이나 거룩함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Ⅳ. 하나님의 뜻에 항복함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아무에게나 강요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자신을 나타내실 따름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아올 때 그는 자신이 오고 싶기에 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오라”(마 11:28)고 말씀하셨다. 또한 요한계시록의 끝에서도 ”오라”(계 22:17)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대변하고 있는 이사야도 ”오라”(사 1:18)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슬픔에 싸여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40)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아무에게도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오게 되면 그분은 자신에게 속한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의지에 철저히 복종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사랑에의 항복이라고 덧붙이고 싶다. 그것은 불쾌한 굴종이 아닌 사랑에의 항복인 것이다. 요한이서 6 상반절에는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라고 말한다. 이처럼 그것은 사랑이지 굴레가 아닌 것이다.


Ⅴ. 영적 교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씀은 서로가 견고하여 깨지지 않는 유대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는지 아는가? 무려 300년이다! 만일 당신이 위대한 인생(人生)에 대한 기사를 읽고자 한다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이 기사야말로 그것에 해당되는 것이다. 에녹과 하나님은 300년 간이나 계속적이며 견고하며 달콤한 결속을 다져 왔다. 어느 날엔가는 산보하던 중 곧장 하늘나라에까지 갔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1. 정의(定義)


신약에서 「성령으로 행함」(Walking in the spirit)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동행함”이라는 뜻과 같은 말이다.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시며, 신자는 성령 안에서 행해야 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성령의 앞에 있는 것처럼 행하여야만 하며, 또한 하나님의 존전에 섰다는 의식이 투철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2. 요구


갈라디아서 5장 25절은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말한다. 로마서 8장 9절에 의하면 우리는 성령 안에 거하고 있다. 이렇게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당신은 ”대체 그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는 것인가?”라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 이유는 갈라디아서 5장 16절의 말씀인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에 잘 나타난다. 이것 뿐만이 아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면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라는 특성들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좇아 행하여야만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3. 표현 사례(事例)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신약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많은 술어들로 표현되어진다.


- 진리의 행동(요삼 4절)

- 단정한 행동(롬 13:13)

- 사랑의 행동(엡 5:2)

- 빛의 행동(엡 5:8)

- 지혜로운 행동(엡 5:15)

- 선한 행동(엡 2:10)

- 합당한 행동(엡 4:1)


4. 예수님의 모범


당신은 ”저는 제가 좇을 수 있는 분명한 대상이 있었으면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의 구체적인 모범을 누구에게서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질문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당신은 에녹이나 혹은 노아(창 6:9)와 같은 사람들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나타내 보여 주신다. 요한일서 2장 6절은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범이 되신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한다면 곧 예수를 바라보라.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항상 아버지와 교제하고 계셨던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에 대한 이러한 모든 행위들보다 먼저 믿음의 행위가 있어야만 한다. 고린도후서 5장 7절은 이 점에 대하여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다”라고 간략하게 말한다. 골로새서 2장 6절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라고 말한다. 당신은 어떻게 그분을 영접했는가? 믿음으로 말미암아서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행하고 있는가? 믿음으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에녹은 하나님을 믿었다. 그는 결코 하나님을 보지 못했지만 마치 하나님이 자기 앞에 계신 것처럼 믿었던 것이다.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 편에 서서 말씀을 전파한 것이다.


하나님 편에 서서 말씀을 전파함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을 뿐아니라 그의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유다서 14-15절에서 우리는 에녹이 하나님 편에 서서 말씀을 전파한 것을 보게 된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유다는 심판을 받게 될 거짓 선생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미워하시며, 또한 항상 미워하셨던가를 증명하기 위해 유다는 하나님께서 아담의 칠세 손인 에녹에게 주셨던 예언을 인용하고 있다. 그렇게 오래 전에도 하나님께서는 거짓 선생들을 미워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도대체 에녹은 무엇에 관해 전파하였습니까? 그가 살았던 때를 보십시오, 기껏해야 첫번째 사람이 지상에 나타난 후 겨우 일곱 세대째인데 그렇게 악해질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때는 악한 세대였다. 가인 족의 문명은 이미 타락했었으며 그가 생활했던 시대는 하나님과 동행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시대였다. 에녹은 오염된 사회의 한가운데에 있었지만 그는 말씀을 전파하고 있었으며, 그들에게 예언을 하였던 것이다. 그는 그들이 불경건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임을 일깨웠다.


나는 에녹의 믿음이 자신의 마음 속으로만 느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입술에 담겨진 그 무엇이었기에 하나님께서 에녹을 기뻐하셨다고 생각한다. 그의 믿음은 적극적이었고 담대하게 불경건한 자들에 맞섰으며, ...이러한 일을 믿음으로 행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셨기에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다. 그는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으며 그러기에 믿음으로 그것을 전했다.

에녹은 믿음과 소망과 동행함과 전파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는 이 모든 것의 결과로 하나님의 면전(面前)에 서게 되었다.


하나님의 면전에 서게 됨



창세기 5장 24절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표현한다. 히브리서 11장 5절은 그것을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고 다른 방법으로 표현한다.

어떤 주석가들은 하나님께서 에녹이 세상의 잘못된 풍조들에 의해 오염되어지는 것을 원치 않으셔서 그를 데려가셨다고 말한다. 그는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너무도 신실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를 세상에 남겨 두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느끼셨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올려 가셨다. 또한 나는 하나님께서 그를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그를 올리우셨다고 믿는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도들과의 교제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아는가? 시편 116편 15절은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라고 말한다. 당신은 왜 그것이 그리도 귀중한가를 물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제 에녹의 경우에서도 그는 죽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귀히 여김을 받았던 것이다.

에녹은 우리 주(主)께서 호령과 함께 자신의 신부를 휴거시키기 위하여 공중에 강림하실 때(살전 4:16-17)에 땅 위에 거하게 될 신자들의 훌륭한 모범이다.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옮기운 것같이, 휴거 시에 살아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역시 그와같이 될 것이다. 이 고대의 휴거 장면은 하나님께서 죽음을 다스리시는 권세를 가지고 계심을 보여 주는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당신은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나아오는 자들에게 상 주심을 믿는가? 당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기로 하였는가? 당신은 하나님 편에 서서 입을 열어 말씀을 전파하였는가? 만일 그러하다면 당신이 그분의 면전(面前)에 서게 될 때가 올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히브리서 11:7 / 노아와 믿음의 순종


서론과 복습


1. 믿음의 증거


히브리서 11장에서 우리는 위대한 믿음의 실례(實例)들을 접하게 되는데 각각의 경우에 있어서 참된 믿음은 개개인의 행위로 말미암아 알려지도록 되어 있었다. 믿음은 그 자체로는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행하여진 사역들과 행위들을 통해서만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만일 내가 믿는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나의 삶 속에서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음을 지적해 주는 무엇인가를 본 후에야 비로소 나의 믿음의 진실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약 2:17 참조). 이와 같이 모든 믿음의 용사들이 열거되어 있는 이 대단한 히브리서 11장에서 우리는 그들 모두가 자기들의 삶 속에서 참으로 하나님을 믿었음을 보여 주고 있는 자신들의 행함과 일체가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2. 믿음의 진보


성령께서는 믿음에 대한 실례(實例)들을 아벨(4절)로부터 시작하여 믿음 생활의 시작을 다루시며, 그 후에는 에녹에게로 가 지속적인 믿음의 발걸음을 다루시고, 세번째로 순종하는 믿음의 사역을 예시하는 노아에까지 이르신다. 여기에는 점진성이 나타나 있다.

아벨의 기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에녹의 기사는 예배와 하나님과의 동행함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노아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을 예배했으며,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 사람을 보게 된다. 노아는 믿음에 있어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믿음이 다음과 같이 역사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즉, 하나님과 동행하기 전에 예배드릴 것이 요구되며, 믿음의 사역을 할 수 있기에 앞서 하나님과의 동행함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다. 어떤 이들은 겨우 첫번째 단계에까지만 도달한다. ... 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온다. 어떤 이들은 두번째 단계인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까지 ... 도달한다. 그리고 그 후에야 하나님을 믿고 동행할 뿐아니라 믿음에 전폭적으로 의지한 노아와 같은 이들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의 순종이다.

노아의 믿음은 굉장한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理性)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어서 정상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통찰력을 갖고 있지 않는 한, 그가 노아가 한 것과 같은 일을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멍청이 짓이 될 것이다. 루이스(C. S. Lewis)가 말했던 것처럼, 그는 감연히 바보의 대열에 섰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셨던 것이기에 행하였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그의 믿음으로 밖에는 볼수 없는 대단한 것이다. 그는 전적으로 불합리하게 보이는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행하도록 명령하신 것이기에 행하였던 것이다. 이 점으로 보아 그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 11장 7절에는 노아의 믿음이 합당하였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세 가지 증거들, 즉 노아의 믿음에 대한 세 가지 위대한 증거들이 있다.



-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했다.

- 그는 세상을 책망했다.

- 그는 하나님의 의롭다함을 얻었다.

이러한 것들이 세 가지의 전통적인 참된 믿음에 대한 지적들이다. 믿음이 진실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할 것이며, 세상을 책망하며 살게 될 것이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바 하나님의 의롭다함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함(7 상반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

Ⅰ. 그의 헌신


노아는 하나님을 믿었다. 어찌나 잘 믿었던지 그는 방주를 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무모한 짓으로 보였을 것이다. 우리는 그가 밖에서 방주를 짓고 있을 때 그의 이웃들이 그를 비웃고 조롱하는 모든 것을 눈에 선하게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노아에게 ”노아야,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 나는 물로 세상을 멸하고자 한다. 너는 방주를 짓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었다. 이에 대해 노아는 어떻게 했을까? 그는 모든 것을 차치하고 백년 이상을 방주를 짓는 데에 보냈던 것이다. 그것도 바다와는 너무나 먼, 티그리스강과 유프라데스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의 어느 한 장소에서 방주를 지었다.

당신은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나 같으면 70년이나 80년 후에는 의심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믿음을 나타내 보여 주었다. 이처럼 참된 믿음은 순종하는 데 있어서 이유를 대지 않는 것이다.



노아도 우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그가 자신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해야 할 많은 일들이 그에게 있었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그가 방주를 짓기 위해 그렇게 오랜 시간을 투자했던 것은 위대한 헌신인 것이다. 사실 그는 바다로 나가는 배들이 있던 지역에 살고 있지 않았으므로 배에 관하여는 모르는 점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듣고서는 그분께서 말씀하셨던 것에 순종하여 그것에 자신의 생(生)을 바쳤던 것이다. 그가 뛰어 나가서 재목감들을 마련한 것도 훌륭한 믿음이지만, 백년 후에도 여전히 역청을 바르고 있는 그의 모습은 상상을 초월한 믿음인 것이다. 노아는 헌신하되 계속하여 하였던 것이다.


Ⅱ. 그의 경외심


7절은 ”믿음으로 노아는...(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받아”라고 말해준다. 괄호의 ”하나님의”라는 구절은 어떤 역본들에는 나타나지 않는다(개역 한글성경에는 표기되지 않았으나 흠정역에는 표기되었다 - 역자 주). 그러나, 그것은 작은 글씨로나마 분명히 포함시켜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이셨음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아가 ”... 보지 못하는 일에(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받아”라고 할 때, 이 구절에는 그의 믿음에 대한 시험(test)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당신은 히브리서 11장 1절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말씀을 기억하는가? 노아는 물을 보지 못했었다. 또한 그는 무엇이 진행되고 있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또한 7절은 ”노아는 ...경외함으로 ...”라고 말씀한다. 그러면 당신은 ”아하! 그래서 그가 방주를 지었군요. 하나님께선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이것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일 하지 않으면 이것으로 너를 치겠다」고 말씀하셨군요”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잘못 안 것이다. ”경외하다”(fear)는 단어는 당신에게 잘못된 인상, 즉 노아가 두려움으로 인하여 행동했다는 인상을 주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단어는 헬라어(eulabeomai)로는 ”존경하다”를 뜻한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경했기에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신 바를 행했던 것이다. 그는 경건한 조심성으로 행동했었다. ”경외하다”라는 단어의 의미가 바로 경건한 조심성이다. 그는 큰 존경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멧세지를 대했고 방주를 예비했던 것이다. 노아의 믿음은 칭찬을 들었으며 그의 가정, 즉 그의 아내와 세 자녀 셈, 함, 야벳 그리고 그들의 세 아내들은 구원을 받았다. 여덟 명의 영혼들이 구원받았던 것이다.


Ⅲ. 그의 도전


창세기 6장으로 돌아가서 이 사건을 살펴보고, 이 기사에서의 흥미있는 몇 가지 내용들을 살펴보자.


1. 창세기 6장 14절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정말이지 선례(先例)가 없는 믿음에의 도전인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광야 한가운데에 거대한 배를 지으라고 하셨다면 당신은 어떻게 했겠는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믿음의 행위들 중의 하나는 노아가 팔을 뻗어 첫번째 나무를 쓰러뜨렸던 사실이다. 한층 더 나은 믿음의 행위는 첫번째 나무를 쓰러뜨리기 위하여 연장을 집어든 사실이다. 얼마나 대단한 믿음인가!


유의 사항 : 방주에는 많은 풍유와 상징이 있다. 이것의 한 가지 예는 ”역청”이라는 단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히브리어에서 역청(Pi-tch)은 속죄(Atonement)와 같은 단어이다. 레위기 17장 11절은”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피를 너의 영혼을 위해 단 위에 바르도록(pitch) 너에게 주었다. 왜냐하면 영혼을 위한 역청(pitch)으로 사용되어지는 것은 피이기 때문이다”라고 바꾸어 표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방주 안에 있으면 안전했다. 왜냐하면 역청이 밖의 물 심판을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신자의 삶에 있어서의 역청은 우리를 모든 심판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시는 그리스도의 피이다. 방주에는 역청으로 말미암아 물이 새는 곳이 있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피가 심판의 홍수로부터 신자를 감쌌으므로 결코 신자를 해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사상인 것이다!


2. 창세기 6장 15절


방주에 대한 하나님의 상세한 청사진은 다음과 같았다. 즉,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長)이 삼백 규빗 광(廣)이 오십 규빗 고(高)가 삼십 규빗이며 ...\한 규빗(cubit)이 얼마만한 길이인가에 대해서는 약간씩의 차이가 있다. 즉, 그 길이가 44-56cm가 된다고 말들을 한다. 만일 우리가 가장 짧은 것을 취한다면, 우리는 방주가 길이 132m, 폭이 22m, 그리고 높이가 13m(약 4층 건물의 높이)의 크기가 됨을 발견하게 된다. 이 방주는 3개의 갑판 (3층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임 - 역자 주)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갑판의 총 넓이는 대략 8,891평방미터(보통의 야구장 20개의 넓이보다도 넓다)이며, 방주의 총 부피는 40,917입방미터나 되는 것이었다.

자! 이것이 얼마나 거대한 배인가! 그것의 크기는 오늘날의 거대한 철제 원양 화물선들의 범주에 넣어도 무리가 아닌 수준이다. 그 모양은 우리가 최대한 잘 표현한다면, 직사각형의 바닥이 편편한 오막살이 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마치 거대한 뗏목에 윗 부분만 덮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세기 동안 사람들은 여러 용적들의 배들을 건조해 왔다. 그런데 한 번은 영국 해군의 기술자들이 드레드노트(Dreadnought: 20세기 초기의 최대 최강의 전함 - 역자 주)의 치수들에 대한 공식을 발견했다. 그 공식은 과학적으로 완전한 것임이 발견되었으므로 모든 해군 함정들은 이 공식의 비율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이 드레드노트 전함의 치수 비율과 방주의 치수 비율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배를 지으시는가에 대해 분명히 알고 계셨던 것이다.


3. 창세기 6장 17절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비가 내릴 것이며 당신께서 땅에 홍수를 일으키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믿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는 땅에 비가 내린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에, 노아는 비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2장 6절에 의하면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땅은 땅 밑에서 올라오는 안개로 적셔졌다. 그리고 아마도 안개로 말미암아 땅 전체가 감싸져 있었을 것이다(창 1:6-7). 땅을 뒤덮고 있었던 이러한 안개는 홍수 전에 사람들이 그렇게 장수했던 이유를 설명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즉, 태양의 방사선은 결코 그 안개를 통과할 수 없었고, 따라서 태양의 방사선으로 말미암는 폐해에 노출되지 알았기에 사람들은 900년 이상을 향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홍수가 일어나고 하나님께서 큰 깊음의 샘들을 터뜨리시자(창 7:11) 땅의 전체 대기(大氣)는 변화되었고 인간의 생명은 태양의 방사선에 노출됨에 따라 즉시 짧아졌던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理性)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계시하신 내용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많은 이유들이 있다.

1. 이전에 비가 내린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어떻게 대홍수를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2. 하나님의 긍휼이 공의에 의해 감추어져 버리고 그로 인하여 전 인류를 멸절하실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었다.

3. 심판은 120년이란 먼 훗날의 일이었으므로 노아는 합리적으로 생각하여 ”그래, 그것은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개혁할 많은 시간을 주시는 것임이 분명해. 그러니 사람들은 그 때까지는 아마도 정신을 차릴 거야!”라고 말할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

4. 노아가 그 멧세지를 전했을 때 아무도 그의 멧세지를 믿지 않았다. 120년 후 마침내 홍수가 찾아왔고 노아와 그의 가족들만이 방주에 들어갔다. 120년 동안이나 전파하여 왔음에도 아무 결과가 없음에 대한 자연적인 반발로 그 멧세지를 의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계속하여 전파하였던 것이다.

5. 내가 확신하건대 노아는 자기 이웃들과 마을 사람들로부터의 많은 조롱과 비웃음을 감내해야만 했을 것이다.

6. 노아가 가졌었을 한 가지 분명한 의혹은 ”만일 홍수가 닥쳐온다고 할 때, 저렇게 거대하고 더구나 온갖 종류의 동물들을 두 마리씩이나 싣고 있는 배가 어떻게 될 것인가?” 라는 것이다.

7. 또한 그 방주는 닻도 돛대도 키도 방향타도 없으며 ... 더구나 노아는 항해 방법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다!


4. 창세기 6장 18절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하나님께서는 ”노아야, 나는 모든 사람을 멸절할 것이다. 그러나 너에 대한 나의 약속을 지킬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약속은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 그것은 8절로 돌아가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에 나타난다. 그리고 9절에 의하면,그는 당대에 완전한 자였으며 하나님과 동행한 자였다.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게 될 것이었지만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던 것이다.

그런데 노아 그 자신에게서는 은혜받을 만한 어떤 것이 없었다. 은혜는 주님의 처분에 달려 있다. 은혜는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다. 죄인에게 있는 어떠한 것도 하나님의 흥미를 끌 수는 없는 것이다. 노아도 다른 아담의 후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창 9:21-22 참조).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노아의 심령 속에서 죄를 억제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악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에게 자신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그분의 특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건지셔서 그와 언약을 세우셨던 것이다.


5. 창세기 6장 19-21절


”혈육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너는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이 되리라.\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네가 방주를 지은 후 거기에 동물들을 넣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이러한 장면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노아는 이 동물들이 각처에서 오는 동안 문에서 기다렸던 것이다... 동물들이 정말로 나아왔던 것이다! 하나님 그분께서 그들을 방주로 이끌어 들이셨다는 것 외에는 이러한 모습을 설명할 방도란 아무것도 없다.


어떤 사람은 특별한 관점에서, 그 방주는 7,000종의 동물들을 쉽사리 실을 수 있었다고 계산했다. 이것은 매우 적은 수이다. 그런데 이 구절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들이 두 마리씩 방주에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동물들에는 종(species)이 있는 것이다. 종은 다양하게 분화되어 퍼져나갈 수가 있다. 그러나, 공통의 조상을 가지고 있을 시에는 분화된 각각의 동물은 같은 종이다.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양(sheep)보다 큰 지상의 포유류는 기껏 290종(species) 밖에 안 되며, 양보다 작고 고양이보다 큰 것이 약 757종, 그리고 고양이보다 작은 것이 1,359종 가량이 된다고 한다. 이 조사에 의하면 기껏해야 2,500종(species) 정도가 나타날 뿐이다. 그런데 중간 크기인 고양이 정도의 동물 한 마리는 0.2평방미터도 채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방주에서 동물들의 우리를 짓는 것은 별 문제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19-21절에서 하나님이 노아에게 주셨던 그 명령은 여전히 이상하고 기괴한 것이었다. 즉, 그 동물들은 어떻게 그곳까지 도착할 것이며, 그것들이 어떻게 함께 거할 것이며, 그것들을 어떻게 먹일 것이며, 누가 그 장소를 청소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부대적인 문제점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이 거의 1년 동안이나 방주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노아는 생각만 해도 어지러워지는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방주를 짓기 시작했던 것이다.


6. 창세기 6장 22절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노아는 놀라운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왔으며,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것이 생각만 해도 자신이 없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으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반드시 성취될 것을 믿었다.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일주일도 못되어 하나님에 대한 인내심이 말라 버리지만, 노아는 무려 120년 동안이나 거기에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노아가 보여 준 놀라운 믿음의 바탕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행하시는 분이라고 그는 믿었으며, 자기가 볼 수 없었던 것을 행함으로써 그는 하나님에 순종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으며 커다란 존경심을 가지고 그 말씀을 순종했던 것이다. 노아는 심판과 약속과 그밖의 모든 것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믿었다. 그는 짓기로 되어 있던 대로 방주를 지었으며, 말씀하신 그대로 하나님께 순종했던 것이다. 그는 그 모든 것을 감내했으며 그 모든 것을 행하였던 것이다.


스펄젼(C. H. Spurgeon)은 ”하나님께서 죄를 벌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분께서 대속의 보혈로 죄를 용서하실 것이라는 사실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약속에 관해서는 하나님을 믿으려 하지만 심판에 관해서는 그분을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노아는 이 두 가지를 모두 믿었다. 스펄젼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하나님을 고백하신 당신이 경건치 않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를 믿지 못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비록 그 경고가 당신의 피를 얼어 붙게 하며, 당신의 본성(本性)은 저항할 수없는 운명을 피하려고 할지라도 그것을 믿으십시오. 왜냐하면 만일 당신이 믿지 않는다면, 한 가지 점에 있어서 하나님을 불신하는 행위는, 계시된 진리의 다른 점들에 대해서도 당신이 불신하도록 이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그가 약속을 받게 될 것임을 믿었을 뿐아니라 전(全)세계가 멸망당하게 될 것도 역시 믿었다. 그는 모든 것을 믿었다... 즉,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던 것이다.



세상을 책망함(7 중반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Ⅰ. 설교자로서의 노아


당신은 노아가 설교자였음을 알고 있는가? 당신은 ”그가 무엇을 설교했습니까?”라고 반문할 것이다. 나는 그것에 관하여 말하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의 설교의 개요에 대해서도 말해 주려고 한다. 먼저 베드로후서 2장 4-5 상반절을 보면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설교가 무엇이었을까? 일백 이십 년 동안 배를 짓는 것, 바로 이것이 그의 설교였다. 그가 방주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보거나, 그가 나무를 쓰러뜨리는 소리를 듣거나, 혹은 그가 등에 판자들을 짊어지고 가는 것을 볼 때마다 그들은 그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라는 설교를 들었던 것이다.

그는 그의 삶으로 설교했다. 즉, 모든 쓰러진 나무들과, 톱으로 켜진 판자들, 그리고 박힌 못들이 ”심판이 다가오고 있으니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분의 보호를 받으라”고 설교했던 것이다. 120년 동안이나 그가 설교를 하였지만 응답이 없었다. 그러나 노아는 낙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믿음으로 자기 시대를 향한, 생생한 책망으로써 일관했던 것이다. 그가 세상을 책망했던 것은, 바로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꾸짖는 것이다.


Ⅱ. 노아 당시의 사회


창세기 6장을 조사해서 노아가 살고 있었던 사회의 몇 가지 특성들을 살펴보자.


1. 죄악이 관영함(5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인간의 눈은 사람들의 외부로 나타나는 악한 행실들만을 볼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심중(心中)으로 하는 일을 감찰하실 수 있는 것이다(겔 11:5 참조). 당시에는 사람의 행위가 악했을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파렴치한 상태였다.

2. 하나님을 슬프시게 함(6절)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하나님께는 의외의 일도 없으며, 실제로 자신의 마음을 바꾸지도 않으신다. 우리가 이 구절에서 대하게 되는 표현은 신인동형법(神人同形法/ Anthropomorphisn)이거나 하나님에 관한 인간언어로의 진술이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 구절은 마치 하나님께서 후회하셨던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사무엘상 15장 29절은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나, 인간이 보기에는 마치 하나님께서 그분의 계획을 바꾸시고 인간을 멸절하시기로 결정하셨던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로 노를 발하셨으나 마음으로는 슬퍼하셨음을 주목하라. 당신은 하나님께서 인격적이시며 감정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좋지 않은가?


3. 마귀에게 사로잡힘(7절)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얼마나 무서운 결단이신가! 사람들은 대개가 마귀에게 사로잡혔으며, 너무나 극도로 타락하였었기에,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까지도 멸절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나는, 사람의 딸들에게로 와서 함께 동거했던 하나님의 아들들은 다름 아닌 타락한 천사들, 즉 마귀들이었다고 믿는다(1-4절 참조). 이리하여 하나님은 그 세대를 멸절시키셔야만 했던 것이다.


4. 패괴함(12절)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하나님의 길을-흠정역) 패괴함이었더라\그들이 하나님의 길을 패괴했었다(더럽혔다)는 사실은, 그들이 그분의 길이 무엇이었던가를 알았으나 자신들의 길로 가기로 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로마서 1장 21절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고 말한다.

또한 25절은 ”...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렸고 그분의 길을 더럽혔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나님을 비난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충분히 기회를 주셨으나 그들이 자기들의 길로 가버렸음을 기억하라.


Ⅲ. 하나님의 선고



창세기 6장 13절에,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멸망의 선고를 노아에게 나타내 보여 주셨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세상은 타락했고 부패하였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그들을 멸하겠다고 노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별된 백성에게 다가오는 심판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케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아모스서 3장 7절은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분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누구에겐가 말씀하시곤 하셨으며, 이곳에서는 노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1. 하나님의 목적

어떤 사람은 ”그런데 저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세상의 모든 것을 쓸어버리시는, 어마어마하게 무서우신 분으로만 여전히 보여집니다. 정말이지 하나님은 긍휼은 뒤로 하시고 공의만이 그분을 압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생각은 옳지 못하다. 하나님의 인내하시는 시간이 끝나고, 공의의 팔을 드실 것이라는 사실은 죄악으로 저주받은 세상을 위한 단 하나의 소망인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멸망시키는 행동을 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영원히 죄와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심판하시기 위하여 오실 것이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소망인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죄가 심판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죄악되고 파렴치한 세상에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세상을 원치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해 주신 세상을 원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공정한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죄를 멸절하셔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멸망당한 것이다.



멸절시키심과 심판하심에는 긍휼이나 은혜는 없는 것이라고 호리라도 생각지 말라 - 그것은 분명히 있다! 반하우스(Donald Grey Bamhouse)는 ”지옥은 하늘나라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의 일부분이다”라고 말했다.


2. 하나님의 인내

하나님의 심판은 더디게 천천히 임한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방법으로 보여진다. 창세기 5장 21절은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라고 말한다. 당신은 ”므두셀라의 무엇이 중요합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의 이름의 뜻은 ”그가 죽을 때에 그것이 보내질 것이다”이다. 그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에녹에게 ”네가 너의 자녀를 보느냐? 그 아이가 살아 있는 동안 세상은 지속될 것이다. 그가 죽을 때에야 그것을 보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다. 그런데 무엇이 보내질 것인가? 멸절시키기 위해 오는 대홍수인 것이다. 세상은 에녹의 아들이 살아 있는 동안은 계속되었다.

베드로전서 3장 20절은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노아가 방주를 짓는 것 외에 기다리고 계셨던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께선 므두셀라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므두셀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그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심판을 하시겠노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므두셀라는 얼마 동안이나 향수했는가? 그는 인류 역사상 어떤 사람보다도 긴 969년을 향수했다. 이러한 사실이 당신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무엇인가를 말해주지 않는가? 당신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비난을 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살펴보라. 하나님은 너무도 긍휼을 베푸셔서 거의 1,000년 동안이나 사람들이 변화되기를 기다리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점점 더 멀리 떨어져 나갈 뿐이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실제로 진리를 알 기회를 가졌을까?


어떤 사람들은 당시의 세상은 진리를 결코 알지 못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결코 옳지 않다.

- 로마서 1장 19-20절은 사람들이 보이는 피조 세계를 통하여 하나님에 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이는 그들로 변명치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 그들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기 위한 약속된 여자의 후손, 즉 구속자에 대한 계시를 가지고 있었다.

O 하나님께 다가오는 방법으로서의 속죄의 제사가 아벨의 때에 주어졌으므로(창 4:4) 그들은 하나님께로 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창 8:20 참조).

- 가인에게 주어진 표는 하나님께서 죄를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를 계속 상기시켜 주는 것이었다.

- 아담은 930년을 향수했으며, 아마도 죄가 그에게 가져온 파급 효과에 관한 사실들을 사람들에게 말해 주면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냈을 것이다.

- 에녹의 설교는 경고였다(유 14-15절).

- 노아의 설교도 경고였다.

- 성령께서는 사람들과 싸우고 계셨다(창 6:3).


그러므로 노아의 세대가 진리를 알지 못했다고 말하지 말라. 그들은 알고 있었으나 마음이 강퍅하여져서 그것을 거절했던 것이다.


Ⅳ. 노아 시대와 오늘의 유사점들


마태복음 24장 37절은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고 말한다. 노아 시대의 특성들이 무엇이었으며, 그것들 중 오늘날 반복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1. 노아 시대에 사람들은 복음의 가르침을 조롱했다.

-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2. 노아 시대에는 사람들이 번성했다.

- 어떤 이들은 오늘날의 인구 폭발은 당시의 두 배에 달한다고 말한다.

3.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죄악된 세상을 인내로 대하셨다.

-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인내하며 대하신다.

4.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선 자신의 설교자들을 가지고 계셨다.

-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설교자들을 소유하고 계신다.

5. 노아 시대에 하나님의 신(神)은 사람과 싸우고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신(神)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아니하리니...”(창 6:3 상반절)라고 말씀하셨다. 그 싸움과 더불어 성령을 거두시겠다는 위협이 있었다.

-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신(神)이 사람과 싸우고 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후서 2장 6-7절의 약속에 의하면, ”막는 자”되시는 하나님의 신(神)은 떠나시게 될 것이다.

6. 노아 시대에 하나님의 멧세지는 거부되었다.

-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7. 노아 시대에 은혜를 입은 자들이 있었다.

- 오늘날에도 있다.

8. 노아 시대에 에녹은 기적적으로 옮기워졌다.

- 이것은 심판 이전에 성도들의 휴거에 관한 모습이다.

9. 노아 시대에 땅에는 마귀가 활동하고 있었다.

- 오늘날도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믿음의 사람을 본다. 우리는 그의 믿음이 참된 것이었음을 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했으며, 세상을 책망했고,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의 의롭다함을 얻었다.


하나님의 의롭다함을 얻음(7 하반절)



”노아는...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노아는 성경에서 의로운 자라고 불리워진 최초의 사람이다. 창세기 6장 9절에는 그가 ”의인”이라고 불리웠다.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는 노아를 묘사하기 위해 ”의로운”이라는 뜻의 「디카이오스」(dikaios)가 이 구절에 사용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노아가 믿음의 상속자가 되었다면, 그리고 의롭다함을 얻는 유일한 길이 믿음에 의한 것이라면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노아가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우리가 알게 되는 세번째 길은 그가 의롭다고 선언된 것에 있었다.


노아가 의롭다고 선언된 사실이, 그가 자신의 힘으로 너무도 의롭게 되었기에 하나님께선 그의 의로움을 인정하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의(義)가 그에게로 전가되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다. 로마서 3장 20절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라고 말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의(義)를 내세울 수 없다. 그러나 22절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義)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싶다. 즉, 만일 당신이 장미빛 안경을 통하여 보게 된다면 모든 것은 장미 빛을 띄게 될 것이며, 파란색 안경을 통하여 본다면 파랗게 보일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지 알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통하여 우리를 보시기 때문에 우리가 거룩하게 보여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을 나타내 주는 안경을 통하여 보고 계셨으며, 현재 모든 신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 그분과 동일하게 보고 계신 것이다.


노아는 믿음의 삶과 걸음과 사역을 모든 방면에서 예증한다. 그는 믿음의 사람의 한 모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같이 그 명령이 아무리 기괴하고 이상하며 어렵고 비정상적인 것 같을지라도 진실로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순종하는, 더 많은 남종들과 여종들을 필요로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지켜주셔서 아무리 어렵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시며, 타락한 세상을 향해 책망하는 자로 서게 하시며, 우리를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자로서 서게 하시는 것이다.



히브리서 11:8-19 / 아브라함의 믿음



서론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우리는 우리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것에 의지하여 살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도, 성령도, 하늘나라도, 지옥도, 성경 기자들도, 성경의 원본도, 또한 사람의 눈에는 실체적이지도, 보이지도 않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어떠한 것도 결코 본 일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이러한 것들 위에 우리의 삶 뿐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법이다.

그런데 나는 믿음 생활에는 몇 가지 특별한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요소들이 우리가 아브라함을 살피게 되는 이 특별한 본문에 매우 명백하게 지적되어 있다. 히브리서 11장 8-19절은 믿음의 본보기로서 아브라함을 소개하고 있다.

실제로, 아브라함의 삶은 전적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특징지워졌다. 창세기 15장 6절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義)로 여기시고”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맨처음부터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자라고 선언되었던 것이다. 그의 전생애를 통해 그는 믿음을 따라 행동했다. 그러므로 그는 믿음의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이 구절에는 우리에게 완전한 믿음의 모범을 보여 주게 될 다섯 가지 특성, 즉 믿음의 행로(行路), 믿음의 인내, 믿음의 능력, 믿음의 확신, 믿음의 증거들이 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들의 영적인 모형이 되므로 우리는 이 이야기를 영적인 의미 - 내가 믿는 바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그것을 영적으로 생각하기를 바란다 - 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이와 같이 이 다섯 가지 특성들은 믿음의 표준이 된다.


믿음의 행로(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


만일 우리에게 어떤 사람들이 그들이 어디론가 가고 있으나 어디로 가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면, 우리는 그들에 대하여 위험을 자초하는 사람들로 생각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주의깊게 진로를 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아브라함아, 일어나 이 도시를 떠나라. 나는 너를 한 민족을 세우기 위해 사용할 것이다. 너는 한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며 너를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들었다. 마침내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하여 메시야가 오셨으며 그 메시야 안에서 모든 세상이 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아, 일어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창세기 12-18장의 기록의 전부인 것이다.


Ⅰ. 하나님께 대한 그의 복종


8절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현재 분사로서, 이 구절의 ”순종하여”라는 주동사(主動詞)의 동작과 동시에 행하여지는 동작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 구절은 ”아브라함은 그가 부르심을 받자 동시에 순종했다”라고 표현될 수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즉각적인 순종이었다.

또한 8절 마지막에는 ”...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말한다. 여기서 ”알다”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는 「에피스타마이」(episramai)로서 ”...의 주의를 집중시키다, ...을 생각하다”를 뜻한다. 그러므로 8절의 마지막은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조차도 생각하지 않고 떠났다”로 표현될 수 있다. 그는 너무도 잘 순종하는 자였으므로 그가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바로 ”하나님, 당신께서 가라 하시면 저는 갈 것입니다. 제가 어디로 가느냐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것은 곧 순종의 문제였던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믿음의 행로(行路)인 것이다.


Ⅱ.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


아브라함은 대단히 죄가 관영한 세상에 살고 있었다. 그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데스강 사이의 갈대아 또는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위치해 있었던 우르(Ur)라는 도시 출신이었다. 우르는 원래 에덴 동산이 있었던 곳이 아닌가 생각되는 장소로, 후에는 거대한 바벨론 시가 세워진 풍요로운 땅이었다. 아브라함은 이교도 집안에서 성장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여호수아 24장 2절의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 다른 신들을 섬겼으며”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은 우상을 숭배하는 타락한 이교주의 문화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영광의 하나님께서는 친히 주권적으로 아브라함을 뽑아주셨으며, 그의 후손을 통하여 한 민족을 세우셨던 것이다. 이 얼마나 주권적인 은혜이신가!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응답했으며 부르심을 받음과 동시에 떠났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로운 자로 선언하셨던 것이다. 자기 고향과 자기 집과 자기 재산을 저버리고 가족들과의 유대를 끊어버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 미래의 불확실한 것을 위하여 자기의 현재 가진 모든 혜택들을 포기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의 행로인 것이다. 이것은 행하기가 몹시도 어려운 일이었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지만, 그는 이 일을 감행했던 것이다.


Ⅲ. 세상으로부터의 분리


믿음의 삶이란, 어떤 사람이 그의 전(全) 인생을 바쳐 온 우상숭배적인 제도로부터 단절됨과 더불어 시작된다고 나는 믿는다. 즉, 나는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께로 나오는 것은 이러한 점, 즉 그가 지금까지 생활하여 왔으며 몸담았던 생활 습관을 떠나서 새로운 삶으로 들어오라시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인생 행로를 따르겠다는 결단임을 말해 주고 싶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를 이교적이었던 것으로부터 분리시켰다.

구원은 분리를 요구한다. 세상으로부터의 실질적인 분리가 믿음의 삶의 시작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좋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저를 어떻게 하실는지 알지 못하지만 이 세상의 질서를 떠나 당신께서 이끄시는 대로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행로, 즉 믿음 생활의 시작인 것이다.


자신을 세상의 질서로부터 분리시켜야 할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다루고 있는 많은 구절들이 있다.


1. 로마서 12장 1-2 상반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

2. 고린도후서 6장 14-16 상반절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사단)이 어찌 조화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여기에서는 하나의 신학적인 기초, 즉 빛과 어두움이 합쳐질수 없음이 제시되어 있으며, 실제적인 권고로써 그들을 합하려고 노력하지도, 또한 합하지도 말라고 하신다.

3. 갈라디아서 1장 3-4절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구원이란 우리를 세상 질서로부터 취하여 믿음을 좇는 행로, 즉 우리가 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미지의 생활 형태 속으로 들여보내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거리끼는 요인이 된다. 나는 사람들이 ”저는 제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어 왔다.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거룩하고 죄없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성경을 읽으며, 교회에 가고 싶어한다는 등등의 말을 듣게 될 때, 그들은 대개 ”저런, 너무 부담스런 일이 많은데!” 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대단히 평범한 반응이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일단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들은 일종의 새로운 가격표를 받게 된다는 사실이다. 즉, 지금까지 가치있던 모든 것들은 무가치하게 되며, 지금까지 무가치하였던 모든 것들은 가치있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의 존재됨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4. 히브리서 13장 13-14절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당신은 기꺼이 값을 치러야 하며, 세상의 질서로부터 멀리 떠나야 하며, 예수께서 가셨던 곳으로 가야만 한다. 14절에서는 계속하여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객들이며 순례자들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세상의 질서 속에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예수와 함께 그 질서 밖으로 뛰쳐나가야 한다.

5. 야고보서 1장 27절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6. 야고보서 4장 4절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7. 베드로전서 1장 14-15절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본 삼지 말고\바꾸어 말하자면 ”이전에 너희는 무지했었으며 사욕을 제외하고는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도 알지 못했으나 이제는 너희가 그리스도께 왔으니 그것을 끊어버리라!”는 것이다. 15절은 계속하여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말한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

8. 베드로전서 4장 1-2절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9. 베드로후서 1장 4절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神)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본적인 것이다. 구원에는 분리가 따른다.


”세상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세상적이란 화투 놀이를 하는 것일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술마시는 것인가? 이것도 역시 성경의 말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면 영화관에 가는 것인가? 성경은 영화에 관하여 말하지 않는다. 당신은 ”이 모든 것들에 적용되는 어떤 원리가 있습니까? 무엇이 세상적인 것입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세상적이라는 것은 때로는 어떠한 행위이기도 하지만, 대개는 마음가짐에 관한 말이다. 그것은 당신이 무엇을 행하느냐에 있지 않고 당신이 무엇을 행하기를 원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세상적인 사람들이 세상적인 일들을 행하는 것을 억제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이 세상적이라는 사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것에 의하여 억제될 수있기 때문이다.

지위 - 어떤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책임있는 지위에 있기 때문에 세상적인 행동을 제한받는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그들은 세상적인 일들을 행할 것이다.

스스로 부과한 형식주의 -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도 싫어하는, 스스로 부과한 형식주의에 의해 제한당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바리새적인 위선자가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룩한 모양은 가지고 있으나, 마음으로는 그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싶어하는 죄로 인하여 번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체의 압력 - 예를 들면, 이러한 경우는 교회에 다니고 있거나 성경 공부반에 참석하고 있는 어떤 사람들에게서 발견될 수 있다. 이러한 곳에서는 단체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이 성경을 연구하며 영적인 것들에 관하여 말하게 된다. 그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그 무리들과 함께 보조를 맞춘다. 그러나,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는 ”나는 이런 바보짓을 더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여기를 떠나서 세상에 맞추어서 살아야만 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비록 아무것도 행하지는 않았더라도 세상적이라는 것이다.


요한일서 2장 15절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말한다. 당신은 그것들 중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면서도 그것들 모두를 사랑할 수 있으며, 혹은 그것들 모두를 가지고 있으나 그것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디모데전서 6장 10 상반절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라고 말한다. 돈이 악한 것이 아니고,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악한 것이다. 세상적이라는 것은 일종의 마음가짐인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무엇을 행하느냐가 아니라 당신이 무엇을 행하기를 원하는가에 달려 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때 그는 자신의 세상적인 욕심을 잃기 시작한다. 당신은 내가 자주 밖으로 나가 은행을 털거나 혹은 간음을 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러한 일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 이것이 영적 성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즉, 영적 성숙은, 당신이 이와 같은 일을 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일을 행하고 싶어하지도 않는 수준에까지 성숙하여 가는 과정인 것이다. 믿음의 행로는 당신 자신을 분리하는 것에 의하여 시작된다. 그리고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께 온 정신을 집중하고 성숙하기 시작함에 따라 당신은 세상적인 욕심들을 잃어가게 될 것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당신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숙도를 측정할 수 있다. 당신이 어린 그리스도인일 때, 당신은 ”저런, 저 일은 내가 꼭 해보고 싶은데 ... 그러나 나는 이제 그리스도인이니 저 일을 해선 안 되지”라고 말하고 있는 당신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당신이 성숙한 후에는 당신이 하고 싶은 일 모두가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의 방식을 통제하실 뿐아니라 당신의 생각과 욕구들의 방식까지도 그분께서 통제하시는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이 흥미진진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인 것이다.

믿음의 인내(9-10절)


Ⅰ. 모범


1. 아브라함의 일시 머무는 인생


히브리서 11장 9절은 ”믿음으로 저(아브라함)가...우거하여”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일시 머무는 생(生)을 살았다. ”우거하다”로 번역된 동사는 헬라어로 「파로이케오」(paroike )로서, 이것은 「오이케오」(oike : 거하다)와 파라(para: ... 옆에, ... 곁에)가 합쳐져 이루어 진 합성동사이다. 그러므로 「파로이케오」(paroike )는 ”...곁에 거하다”[붙여 사는 것, 즉 기류(寄留)하는 것을 말함]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9절은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기류하였으니”로 번역할 수 있다.


당신은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서 살았을 때조차도 그가 약속(약속의 성취)을 받지 못했음을 알고 있는가? 그 땅에서의 아브라함의 전 삶에서 그는 결코 그것을 소유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그에게 결코 주시지 않으셨다. 그가 ”막벨라”라고 불리우는 작은 묘지를 구입하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전부였다. 그는 그 땅에 일시 머무는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인내해야만 했다. 당신은 그가 ”하나님, 당신께서는 저를 이곳까지 데려다 놓으셨습니다. 저는 과거의 생활로부터 제 자신을 분리시켰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제가 정말로 복된 때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장막에서 떠돌게 되다니... 이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일입니다”라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대단히 아브라함과 유사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서 이끌어내셨으며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가지고 계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아직도 하늘나라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아브라함과 같이 이 세상을 통과하는 우리의 인생 행로는 때때로 거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참된 의미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보여 주었던 것, 즉 믿음의 인내를 보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7장 5절에서 스데반은 아브라함에 대하여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라고 설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그는 자식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더욱 인내해야만 했던 것이다.


당신은 자신을 이 세상에서의 객(客)으로 여기고 있는가?


히브리서 11장 9절은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우거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헬라어로 ”우거하다”는 말은 「파로이케오」(paroike )인데, 이것은 문자적으로는 ”붙여 살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시민권이 없이 그 땅에 거하고 있는 이방인을 표현하는 말이다. 아브라함은 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완전한 모형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객(客)들이며... 이 세상에서 이방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 너무 많은 것을 투자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 6:19-21)고 표현하셨다. 당신이 이곳에서 단지 객(客)이라면 참고 인내하며 이 세상에 너무 많은 것을 투자하지 말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당신이 은행 예금 구좌에 특별 배당 이자 백만원을 만드는 데에 매일매일을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생활을 하는 것보다 그 날들을 당신의 자녀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데에 사용하는 것이 훨씬 낫다. 또한 새로운 유행 의복을 보러 다니거나 레크레이션을 위해 돈과 시간을 써버리는 것보다 어린 자녀들에게 예수님에 관하여 가르치는 것으로 주일날 아침을 보내는 것이 훨씬 낫다. 즉, 당신좌 우선 순위를 결정하라는말이다. 세상적인 번영과 없어질 재물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참다운 보상을 위하여 일해야만 한다.


2. 아브라함의 시험


아브라함은 고귀한 것들을 위하여 인내로 기다렸으며 계속 하나님 앞에 충직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결코 보지 못했다. 그는 단지 기다리고 기다릴 뿐이었다.

당신이 아는 바와 같이 가장 힘든 시간들은 시작과 종국 사이에 긴 중간 과정의 시간들인 것이다. 나는, 아브라함이 처음에 우르를 떠났을 때는 대단히 신이 났을 것이며 그가 하나님의 면전에 들어간 날은 정말이지 굉장했을 것이 틀림없다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힘들었을 것임이 분명했던 것은 그 사이의 중간 과정의 나날들이다. 믿음의 인내에 대한 실제의 시험은, 당신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때, 즉 일상의 시간들이 지나가는 가운데 일하고, 기다리고, 자세히 살피는 때이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지치고 기진맥진하게 된다.

만일 주님이 다음 토요일에 오실 것이라고 알려졌다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그들이 일하는 것이 토요일까지 끝난다는 것을 알므로. 대단히 열심히 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같은 삶을 바라보기 시작하자 그들은 믿음의 인내를 잃어버렸다. 하루에 한 번씩 이 사실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믿음의 인내는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의 삶에 예시되어 있다. 그는 인도 선교사로서 35년을 보냈는데, 당신은 그가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한 사람을 한 손으로도 다 셀 수 있다. 그것이 선교 35년의 결과였다! 나 같으면 6개월 후 쯤에는 ”하나님, 당신께서는 이것이 제가 일해야 할 장소라고 믿으십니까?”라고 반문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가? 윌리암 케리 이후로 인도로 간 모든 선교사들은 그들의 선교 사역에 있어서 윌리암 케리에게 빚을 지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모든 인도의 통용어로 성경을 번역하면서 35년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수행되어진 모든 다른 선교사들의 노력은 케리의 사역에 기초하여 진행되어 온 것이다. 나는 그가 믿음의 인내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알았음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당신은 그렇지 않은가? 나는 그가 3년만에 항복하지 않았던 것으로 인해 감사드린다. 그것이 믿음의 인내인 것이다.


Ⅱ. 관련 성구(聖句)


1. 데살로니가후서 1장 4절

바울 사도는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바울은 그들이 상황이 어렵게 될 때 그것을 감내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하여 대단히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2. 히브리서 12장 1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3. 야고보서 1장 3-4절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4. 야고보서 5장 7-8, 1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당신은 ”저는 이 문제에 관하여 두 주일 동안이나 주님께 기도해 오고 있습니다. 언제쯤 그분께서는 그것을 해결해 주실까요?”라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참음으로 기다리라. 나는 어떤 일을 위하여 30년, 40년, 50년 아니 60년까지도 기도해 온 사람들을 알고 있다. 우리가 어떤 일들을 위하여 몇 년 동안 계속하여 기도해 오다가 때때로 믿음의 인내가 떨어져 버린다. 그런 다음 우리는 ”제가 생각하기로는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그 일을 결코 행하지 않으실 겁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내하라. 그것이 아브라함의 삶을 완전한 믿음의 삶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당신은, 믿음이란 의심에는 귀머거리가, 실망에는 벙어리가, 불가능에는 장님이 되는 것이므로 오직 성공뿐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Ⅲ. 아브라함의 시선(視線)


당신은 ”아브라함의 인내의 비밀은 무엇이었습니까? 어떻게 해서 그는 그렇게 인내할 수 있었지요?”라고 질문할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10절을 보라.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城)을 바랐음이니라.\당신은 아브라함이 그의 시선을 어디에 두었는지 아는가? 그는 아랫것을 바라보고 있지 않고 위엣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하늘나라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인내했던 것이다.

헬라어 성경에는 ”성”과 ”터”라는 단어 앞에 각각 정관사가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그 터가 있는 그 성을 바랐음이니라”이다. 즉, 아브라함은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았기 때문에 인내했던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인내이다.


1. 에스겔서 48장 35 하반절

”...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라 하리라.\만일 우리가 그 곳, 즉 하나님의 얼굴 앞에, 그리고 그 성(城)에 있게 될 것이라는 바로 그 사실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행해지고 있는 그 어떠한 것도 참을 수 있게 될 것이다.

2. 골로새서 3장 2절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우리의 목을 걸고 살아가는 것은 바로 우리가 땅엣 것들에 애착을 갖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말했던 이유이다. 당신이 이렇게 할 때 당신은 땅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참을 수 있게 될 것이다.

3. 창세기 13장 12절

롯은 아브라함과는 정말 대조적이었다. 아브라함은 땅에서의 쾌락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초라한 낡은 장막 안에서 생활했으며, 가나안 땅 전역을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옮겨 다녔다. 그러나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고 성경은 말한다. 롯은 세상의 좋은 것들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했다. 롯은 세상적인 것을 바랬으나 아브라함은 하늘의 것을 바랬다. 아브라함은 땅의 것에 관해서는 어떠한 관심도 갖지 않았다. 그러나 롯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만일 당신이 계속적으로 이 세상의 것들 - 고난, 어려움, 싸움, 돈, 명예, 재산, 향락 등등 - 을 바라본다면, 당신은 참을 수 없는 육신의 욕구에 몰두하게 된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하늘나라와 하나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춘다면 당신은 이 땅에서 진행되는 것에 관하여 관심조차 두지 않게 될 것이다.

4. 디모데후서 2장 3-4 상반절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그 이유는 무엇인가?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 즉, 이 말씀은 당신이 하나님의 싸움을 싸우고 있다면,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5. 히브리서 11장 27절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 참았으며.” 어떻게 모세는 광야에서 40년간이나 양을 치면서도 참을 수 있었을까? 27절은 ”...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 같이 하여”라는 단어는 헬라어 상으로는 ”...하는 동안”을 뜻한다. 따라서 모세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고 있던 동안에 참았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결코 눈을 돌리지 않았으며, 그의 주변 상황에 의해 결코 방해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즉, 그는 항상 올바른 곳에 그의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

6. 히브리서 12장 1 하반절-2 상반절

”...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 예수를 바라보자.” 우리는 예수를 바라보며 경주를 해야 한다. 당신이 경주하고 있는 동안 당신의 발을 쳐다보려고 했던 때가 있었는가? 당신은 그와 같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의 발에 걸려 넘어질 뿐아니라 다른 것들과 부딪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멀리 있는 결승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인 당신은 결승점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당신의 눈을 맞추어야만 한다. 이와 같이 할 때에만 당신은 당신의 인생이 얼마나 결승점에 가까와졌는지를 알 수있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5미터 앞을 바라보면서 경주한다면 당신은 5미터가 넘는 어떤 곳도 결코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결승점을 결코 바라보지 않는다면 당신이 거기에 도착하고 있다는 것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의 매일매일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하루하루임을 기억하고 있을 때 그 경주는 인내하며 달려가기가 쉬워질 것이다.


히브리서 10장 36절은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당신은 ”저는 오랫동안 주님을 섬겨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이익들도 손에 쥐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내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의 세계인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인내하는 사람들이다. 모든 일이 풀리지 않게 되자 ”오,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시는 거지 ? 오, 나의 세상이 무너져 가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믿음의 인내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위엣 것에 매달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때가 되어 모든 일을 하실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근심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4장 6상반절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라고 말했다.


믿음의 능력(11-12절)


믿음은 위력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볼 수 없는 것을 보며,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으며,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며, 불가능한 것을 성취시키기 때문이다. 믿음은 필수적으로 능력을 동반한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믿음은 기적을 일으켰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인간의 판단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사라는 아이를 가져본 적이 없었으며 나이는 아흔 살이었고 아브라함은 아흔 아홉이었다. 그들 모두가 자녀를 생산할 나이가 지났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2절에는 계속하여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후손의 후손을 낳았으니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그의 후손인 것이다. 이미 태어났거나 혹은 앞으로 태어날 모든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이니 ... 이 모든 것이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믿음은 능력있는 것이다!


1. 마태복음 19장 26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2. 마가복음 9장 2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3. 누가복음 18장 27절

예수께서는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불가능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을 믿는가? 당신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나 하나님을 믿었기에 기도하여 온 무엇이 있는가?

4. 마태복음 17장 19-20절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5.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6. 에베소서 3장 20절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당신은 인간 이성(理性)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기적과 같이 보이는 일들을 하나님께서는 능히 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는가? 당신은 이러한 일에 있어서 정말로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하나님께 어려운 일이란 없는 것이다. 우리가 단지 우리의 믿음을 더욱 크게만 가질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더욱 더 위대한 일들을 보게 될 것이다.


믿음의 확신(13-16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약속의 땅이 자신들의 소유가 되는 것을 결코 보지 못했다. 그러나 13-16절은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말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그들은 그들이 나온 본향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이 사람들은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있는 것이 행복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에 확실한 목적지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불리웠던 사실을 주목해 보라. ”외국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세노이」(ksenoi)이다. 고대에는 외국인의 운명이란 정말로 모진 것이었다. 외국인은 적의와 의심과 경멸의 대상이었다.

또한 그 단어는 ”망명자”를 뜻하기도 했다. 그들은 이 단어의 최악의 의미로 볼 때 ”유랑자”였던 것이다.

둘째로 그들은 ”나그네”, 즉 「파레피데모이」(ptrepidemoi)라고 불리웠다. 이 말은 일시적으로 머무는 사람을 뜻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늘 변화하는 모래 위에 있다는 것과 이 세상에서의 그들의 일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무엇인가 더 위대한 것을 추구했으며, 비록 그들이 그것을 본 적이 결코 없었지만 그들은 그것에 관해 확신하고 있었다.


Ⅰ. 우리의 안전


당신은 하늘나라를 확신하고 있는가? 정말로 확신하고 있는가? 나는 의심을 하는 몇몇 그리스도인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믿음의 확신은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하늘나라를 확신하고 있다. 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 하나님의 성령의 증거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하늘나라가 있음을 안다. 이것은 사실이며, 나는 하늘나라에 가게 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1. 시편 27편 4 상반절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라고 말했다. 이것이 믿음의 확신으로, 곧 신자의 안전이다.

2. 욥기 19장 26-27 하반절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욥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것을 허락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는 빈궁하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았던 것이다.

3. 빌립보서 1장 23절

바울 사도는 사실상 빌립보 교인들에게 ”여러분들 주위에 내가 있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나는 여러분을 대단히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서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은 훨씬 좋은 일입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안전인 것이다!


Ⅱ. 우리의 특별한 영광


16 하반절은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城)을 예비하셨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부끄러워 하시지 않는 자가 누구인가? 그분을 믿고, 믿음으로 참되게 사는 사람들인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나는 죤 맥아더의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정말로 신기하지 않겠는가? 사무엘상 2장 30 하반절에서 하나님께서는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은 ”목사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죤 맥아더의 하나님이라 불리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나는 그렇다고 확신한다.


족장들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겼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나도 저들의 하나님으로 불리우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노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무어라고 부르셨는지 아는가? 출애굽기 3장 6 상반절에서 하나님께선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후에는 그분께서 죤 맥아더의 하나님도 되셨던 것이다. 나는 믿음의 삶을 사는 것과 나에게 하나님 자신을 주기를 원하시는 그분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큰 어떠한 영광도 생각할 수없다. 이것이 믿음의 확신이다.


믿음의 증거(17-19절)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 기사(記事)는 창세기 22장 1-18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끝까지 기다린 후에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셨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아브라함아, 너는 내가 너에게 준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와 그를 번제로 바쳐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당신은 그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런데 아브라함은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응답했던 것이다. 그는 도구를 챙기고 이삭과 두 명의 젊은 사람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출발했다.


삼일 후 그들의 목적지가 보이자 아브라함은 그와 함께 있었던 두 젊은이들에게 ”너희는...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5절)고 말했다.

당신은 ”아브라함, 잠깐 중단하고 냉정하게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선 다름 아닌 당신의 아들을 제물로 요구하시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이 무조건적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음에서부터 일으키실 것을 믿었다. 히브리서 11장 19절을 보라.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이 얼마나 굉장한 믿음의 행위인가!


이것을 대단한 믿음으로 여겼던 데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다. 즉, 아브라함의 모든 꿈은 이삭에게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 사이에 어떤 혼란이 있었다. 그는 자손이 생기리라는 약속의 첫번째 표시를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 왔었기 때문에 이삭을 몹시도 사랑했다. 그는 하갈과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취소하실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기 아들을 죽이는 것을 금하셨다. 창세기 9장 6절은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라고 말했다. 이 모든 생각들이 아브라함의 머리 속을 스쳐갔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 만일 당신께서 내가 그를 죽이기를 원하신다면 저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저는 당신께서 그를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선 저에게 그가 후손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당신은 당신의 생명을 바치며 ”하나님, 저는 당신의 약속들을 믿기에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이든 행하겠습니다”라고 말할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이삭을 묶어 그를 제단 위에 눕혀 놓고 그의 아들을 베기 위하여 칼을 치켜 들었다. 그러나 그 때 여호와의 사자(使者)가 그를 불러서 멈추게 했으며, 대신 희생을 드릴 수양을 제공해 주셨던 것이다. 그 후로 이삭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한 모형이 되었다.

”...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그렇다면 믿음의 마지막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희생적인 믿음이다.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말씀하셨다.



히브리서 11:20-22 / 죽음 앞에서의 믿음


서론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록 믿음의 은혜가 우리의 삶 전체에 전반적으로 발휘되어지는 것일지라도, 우리가 죽음에 직면해서는 더욱 특별한 것이다. 믿음은 마지막에 해야 할 큰 일이 있으니, 곧 신자들이 마지막을 잘 장식하도록, 즉 주님을 위하여 죽도록 도와 주는 일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인내와 소망과 기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과 그분의 방법들이 월등하다는 것에 관한 증거를 후세에 남기기 위하여 죽음을 담대히 맞게 하는 것이다.\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이 개선의 깃발을 휘날리며 이 세상을 떠날 때에 크게 영화롭게 되신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하여야만 한다. 당당하게 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아마도 신자일 것이다. 하나님의 영(靈)이 육신을 이길 때, 하늘나라를 위하여 의식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세상을 떠날 때,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되는 영혼의 기대감과 영광을 바라볼 때, 우리는 주님께 가는 것을 기뻐하면서 죽게 된다. 여기 히브리서 11장 20-22절에서 성령께서는 죽음에 직면했을 때 믿음으로 충만했던 세 사람의 위대한 실례(實例)를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그것을 함께 살펴보자.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이 구절을 읽을 때 당신은 아마도 ”도대체 목사님은 그 구절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십니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들의 이면에는 많은 내용들을 함축하고 있으며, 이 함축된 내용들은 유대인 독자들이 그들의 역사에서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다. 유대인 독자들은 이 기사의 배경들을 이해했다. 모든 히브리서 기자가 말해야 했던 것은 단지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였고, 유대 독자들은 이것이 역사적 내용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이것의 내용을 쉽게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1. 그들의 언약


히브리서 기자가 이해시키려고 하는 점은 이 사람들(이삭, 야곱, 요셉)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지도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죽기 전에 그들은 믿음으로 그 약속을 자기들의 후손들에게 전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와 언약을 맺으셨음을 기억하라. 근본적으로 이 아브라함의 언약은 세 가지를 약속한 것이다.

1. 그 땅(팔레스틴)을 차지함

2. 큰 민족을 이루게 됨

3. 세상에 대한 영적 축복

2. 그들의 확신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또한 요셉도 이것들 중 어떠한 것도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너무도 확신하셨기에 그것들을 자기들의 후손들에게 전했던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을 언급하고 있는 히브리서 11장 13절에는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고 기록되어 있다. 죽을 때까지 그들은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후손은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 하나님께서는 항상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을 결코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었다. 그들은 실현되지 않는 꿈으로 인하여 ”오, 그것은 결코 실현되지 못했도다. 실현되지 못했도다”라고 탄식하며 죽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그것은 실현될 것이다”라고 확신하며 죽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취소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엄청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우리가 그들의 정신과 그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듣게 될 것이다.

”한 민족을 이루며 이 땅을 소유하게 된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참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파기하는 일이 결코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것을 보기까지 살수 없을지도 모르나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약속 성취에 있어 하나의 고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을 믿음의 사람들로 세우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참된 믿음으로 죽음과 직면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함께 살펴보자.

이삭(20절)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


히브리서 기자는 이삭에 관하여 여기 20절에서 대단히 간략하게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책의 독자들이 이삭에 대하여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삭이 여기에 언급된 다른 세 족장들보다 훨씬 오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창세기에서 그에 관하여 가장 적게 기록하고 있음은 흥미로운 일이다. 다른 족장들에게는 각각 스무 장 정도가 할애되었지만 이삭의 기사는 단지 두 장(창세기 26장, 27장)에 몇 가지 다른 언급들과 함께 요약되어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삭이 그들 중 가장 평범했다는 데에 있었을 것같다. 그는 대단히 평범했으며, 약간 수동적이었고, 상대적으로 조용했으며, 영적으로는 유약했다. 당신은 그가 특별한 아버지의 평범한 아들이었고 특별한 아들의 평범한 아버지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특별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 자신은 대단히 평범하게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창세기에서 그에 관해 말할 것이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생(生)을 우리가 살피려고 하는 것은, 여기에도 흥미있는 교훈들이 몇 가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Ⅰ. 그의 실패에 관한 기록(창26:2-25)


1. 불순종이 지적됨(2-6절)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그가 들어간 그랄 땅을 떠나서 그에게 거하라고 하시는 곳에 거하도록 말씀하셨다. 그러나, 6절은 우리에게 이삭의 불순종을 보여 주고 있다. ”이삭이 그랄에 거하였더니.”

2. 속임(7-11절)

이삭은 그랄 사람들에게 리브가가 자기 아내가 아니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3. 소심함(7-11절)

이삭은 겁장이였다. 그가 리브가를 그의 누이라고 거짓말했던 이유는 7절과 9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에게는 외모가 정말로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으므로 ”나는 이를 내 아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들이 나를 죽이고 그녀를 취할 거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이 자기 아내를 빼앗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살아 남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유의 사항 : 12-14절은 아브라함 언약의 무조건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비록 이삭이 때때로 저급한 특성을 나타내 보이기도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를 축복하셨고 지켜 주셨던 것이다.

4. 수동적인 체념(15-22절)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을 자기들의 땅으로부터 내어 쫓고 싶어서 그의 우물을 흙으로 메워 버림으로써 물을 공급받을 수 없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삭은 그 땅을 완전히 떠나고 싶지 않아서 새로운 장소로 가서 장막을 치고 또다른 우물을 파곤 하였고, 그가 새로운 우물을 팔때마다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그것을 메워 버리곤 했다. 실로, 이삭은 어떠한 저항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타의로 다른 장소로 가서 더 많은 우물을 파곤 했던 것이다.


마침내 23절에서 이삭은 약속된 땅의 뒷문에 도달한다. 하나님께서 그를 거기에 도착하도록 하실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블레셋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하여 그의 우물들을 메우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를 본향에 도달하게 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도달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는 마치 탕자와 같았다. 왜냐하면 그가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팔로 그를 껴안고 축복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가 적용되는 방법인 것이다.

이삭의 삶은 약하고 죄악된 것이었으나 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믿음의 명부에 올려 놓았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인생을 감싸고 있는 어떤 한 가지 위대한 행동 때문인 것이다. 어쨌든 그도 역시 그 땅의 뒷문에 돌아왔음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가 마침내 올바른 일을 하도록 자극받은 것은 모든 환경이 그가 올바른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그렇게 섭리로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잠시 후에 살펴보게 될 것이다.


Ⅱ. 그의 가족과 관련된 일(창25:21-34)

1. 기도(21절)

이삭은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이 직면했었던 것과 동일한 문제에 직면했다. 즉, 그의 아내가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삭은 리브가를 대신하여 여호와께 간구하였다.

2. 예언(22-23절)

여호와께서 이삭의 간구에 응답하심으로 리브가는 쌍동이를 잉태했다. 그리고 23절에서 여호와께서는 그녀에게 두 아들 중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당시에 이것은 맏아들이 가족의 지도권 및 상속권을 받게 된다고 명시한 장자 상속법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파기하시고 그들이 나기도 전에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고 약속하셨던 것이다.

3. 해산(24-26절)

여기서 우리는 에서와 야곱의 출생에 관한 기사를 보게 된다.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비록 에서가 장자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선 주권적으로 야곱이 에서를 지배하며 메시야의 반열에 서도록 계획하셨던 것이다. 야곱이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다는 사실은 그가 후에 에서의 장자권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의 상징이었다.


하나님의 주권


로마서 9장 11-13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하여 에서 대신에 야곱을 선택하신 사실에 관하여 말한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바꾸어 말하자면, 하나님께선 ”나는 내가 기뻐하는 자를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나는 야곱을 선택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선 그들이 나기도 전(前),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이러한 선택을 하셨던 것이다.


당신은 ”그것은 공평치 못하다!”고 말한다. 당신이 이처럼 말할 것을 이미 생각했기에, 바울은 14-15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선 자신이 원하는 바를 행하시는 것이다.

당신은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선 그렇게 하실 수없습니다. 그것은 선이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이 틀리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바울은 20-21절에서 당신의 반대 주장에 대한 해답을 보여 준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토기장이는 자기가 원하는 어떤 종류의 그릇도 만들 권리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어떠한 이의도 제기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이 혼돈 중에 있었을 때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그것을 새롭게 창조하시라거나 혹은 하시지 말라고 말할 권리를 갖고 있지 못했다. ... 어느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선 자신이 원했던 바를 행하셨다. 창조시에 무생물이 생물이 되지 않았다고 불평할 이유는 없었다. 즉, 식물이 동물이 아니라고 불평할 이유도, 동물이 사람이 아니라고 불평할 이유도, 우리의 첫번째 조상들이 천사들보다 못하게 지음받았다고 불평할 하등의 이유(히 2:7)도 없었다. 어떠한 것도 그것을 지으신 분에게 무엇을 요구할 권리가 없었다! 이와같이 인간이 무죄(無罪)했을 때에도 하나님께 요구할 권리가 없었다면 하물며 타락한 후에 무엇을 요구할 권리가 있겠는가? 절대로 그럴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인간 세계에 있어서도 내가 스스로 원하는 자에게 호의를 베풀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내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지 않는 어떤 것을 나 자신을 위하여 요구할 권한이 있는가? 우리가 그분의 은혜의 대상들인 한, 우리는 하나님 외에 감사할 대상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자신이 주권적으로 계획한 바를 행하시는 분이시다.

4. 부모의 편애(27-28절)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군인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이삭은 좋은 고기를 원하는 물질적이고 육신적이며 탐식하는 노인이었기에 에서에게 자신을 의탁했다. 그는 고기를 좋아했고 에서는 그것을 공급해 주었다.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다.” 그 이유는 그는 가정적인 사람이어서 집 주변의 사소한 일들을 처리하며 어머니의 부엌에서 요리나 했기 때문이었다.

5. 장자의 명분을 획득함(29-34절)

에서는 팥죽 한 그릇과 빵 한 조각을 위하여 자신의 장자권을 팔아버렸다. 그는 배가 고팠고 그가 원했던 것은 그의 위(胃)를 무엇인가로 채우는 것 뿐이었다. 사실 그는 자기 아버지를 너무도 닮았던 것이다. 즉, 배가 부르면 그는 행복했던 것이다. 에서는 미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순간을 위한 실용주의자였다. 그는 야곱에게 자신의 장자권을 팔았다. 그렇기에 34절은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성미가 급했으며, 충동적이었고, 자신의 감각에 즉시로 나타나지 않는 어떠한 것의 참된 가치를 측정할 수도 없었다. 즉, 그는 영적인 것보다 육적인 것을 좋아하였다. 그는 실로 망령된 자였던 것이다(히 12:16 참조).


Ⅲ. 그의 믿음이 나타남(창27:1-33)


창세기 27장에는 이삭의 최종적인 믿음의 행동으로 종결되는 극적인 정경이 나타난다. 사실 이것이 히브리서 11장 20절에 언급된 믿음의 행위인 것이다. 그것을 함께 살펴보자.


1. 이삭의 계획(1-4절)

이삭은 하나님께서 장자권이 야곱에게로 갈 것이라고 리브가에게 말씀하셨던 사실과, 에서가 그것을 이미 야곱에게 팔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에서가 장자권을 받게 되기를 원했다. 1-4절에서 우리는 이삭이 몰래 에서를 축복하려고 하며, 하나님의 예언을 방해하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가 이와 같이 행했던 때에 그는 정말로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려는 마귀의 노력이었던, 일련의 악한 일들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그것을 바꾸셔서 자신이 세우신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하셨던 것이다.

2. 리브가의 구상(5-17절)

리브가는 이삭이 에서에게 말하는 것을 몰래 듣고 즉시로 행동에 들어갔다. 당시에 그녀는 주님의 방법이 아닌 그녀 자신의 방법을 원했던, 거짓되고 자존심 강하고 이기적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하나님께 대한 전체적인 믿음의 결핍을 보여 주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선 그분 자신의 방법으로 자신의 계획을 이루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치 사라가 하갈을 주어 아브라함에게 아이가 있게 했듯이, 하나님을 자기가 도와드려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돕고 싶어한다!

그래서 리브가는 에서가 축복을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야곱과 계획을 세웠다. 먼저 그녀는 야곱을 위하여 이삭에게 바칠 별미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야곱은 이삭이 비록 눈이 어두워졌다고 해도 그가 자신의 피부를 만진다면 음식을 들고 온 자가 에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왜냐하면 에서는 털이 많았고 야곱은 매끈했기 때문이다.

야곱이 발각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리브가는 야곱이 에서처럼 느껴지게끔 그의 손과 목에 어린 염소의 털 가죽을 입히고, 또한 그에게서 에서의 체취가 나도록 에서의 가장 좋은 옷을 입혔다. 이리하여, 이삭을 위한 한 조각의 고기를 가지고 이렇게 우습게 생긴 옷으로 전신을 두른 야곱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3. 야곱의 연기(18-29절)

18-29절에 기록된 내용은 장자의 명분을 얻기 위한 야곱의 연극에 대한 것이다. 모든 거짓과 허위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침내 이삭의 축복을 받았다. 그는 장자의 명분을 얻었던 것이다.

4. 이삭의 믿음의 증거(30-33절)

야곱이 막 떠나가자 에서가 들어왔다. 이삭이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반응이 33절에 기록되어 있다.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가로되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나는 마지막 문장,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의 앞에는 오랜 침묵이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이삭의 생(生)에 있어서 하나의 위대한 믿음의 행위인 것이다. 그는 에서에 대한 자기 자신의 의지와, 자기 자신의 계획과, 자기 자신의 육신적인 도모와는 반대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축복을 베푸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옳습니다. 하나님, 그는 축복된 채로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당신께서 주장하시는 바라면 저는 받아들일 것입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다음의 사실을 기억하라. 그가 야곱을 축복했든지 아니면 에서를 축복했든지 간에, 그는 자기 두 아들 중 하나에게 전해질 아브라함의 약속을 믿었다. 이와 같이 그의 믿음은 올바른 것이었다. 그는 비록 그것이 자기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가 되었을지라도 마침내는 순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수행하고 싶어하실 때, 반드시 그것들을 수행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기가 사라지고 난 후에, 자기의 자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을 수행하시며 완수하실 것이라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한 한 사람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야곱(21절)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


야곱의 믿음의 생(生)은 그의 아버지 이삭과 같았다. 그것은 맑은 날 대기(大氣)로부터 아무런 저항도 없이 쏟아지는 태양빛과 같지 못하고, 오히려 안개가 자욱한 날 그 안개 사이로 빛을 비추기 위해 어렵게 떠오르는 태양과 같았다. 야곱은 들쑥날쑥하는 인물이었다. 때때로 그는 믿음을 좇아 행하기도 하였으나 또 다른 때에는 보이는 것을 좇아 행하였던 것이다. 그의 모든 잘못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영원하신 분에 대한 그의 관심은 높이 평가되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갈망했으며(창 28:21) 자신이 라반에게 한 말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창 31:53). 그리고 비록 그가 에서를 두려워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호와를 찾았다(창 32:9-12). 비록 그의 딛음이 그의 전생애를 통하여 유지되지는 못했으나,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인생을 마감하여 가는 시기에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 에게 전해 줄 만큼 그것을 믿었던 것이다.


창세기 48장에서 우리는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준 축복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을 함께 살펴보자.


”이 일 후에 혹이 요셉에게 고하기를 네 부친이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혹이 야곱에게 고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야곱)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그런데 히브리서는 그가 지팡이에 의지했다고 말했다. 두 가지를 합쳐서 보면, 당신은 그가 침상의 가장자리에 앉아 자기 지팡이에 의지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는 병으로 침상에 누워 있었으나, 하나님의 약속으로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할 수 있도록 일어나 앉아서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지팡이를 짚었던 것이다.


3절은 다음과 같이 계속하여 말하고 있다.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벧엘)에서 전능한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허락하여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게 하며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비록 야곱이 이러한 말씀들 중 어떠한 것도 결코 보지 못했지만, 그가 하나님을 믿었음을 당신은 아는가?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만일 그에게가 아니라면 그의 후손에게라도 성취될 것임을 믿었기에, 그는 요셉의 아들들에게 그 약속을 전했던 것이다.


5절은 계속하여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라고 말한다. 바꿔 말하자면, ”만일 그들이 너의 소생이라면 그들은 나의 것이 될 것이라”는 말이 된다. 당신은 ”그런데 어떻게 야곱이 이 두 사람을 축복해야 하는지를 알았습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그 대답은 명백하다. 즉,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것을 계시하셨으며 그는 순종했던 것이다. 여기에 그의 믿음의 행위가 있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 두 젊은이들 앞에서 이행될 것이라고 믿었다.


8절에서 그것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가로되 이들은 누구냐 요셉이 그 아비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야곱이 이 소년들을 알지도 못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 약속에 대해 가르쳐 주어야 함을 일러 주셨다.

”아비가 가로되 그들을 이끌어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이스라엘(야곱)의 눈이 나이로 인하여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비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뜻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소생까지 보이셨도다 요셉이 아비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우수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좌수를 향하게 하고 좌수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우수를 향하게 하고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축복을 베푸는 것은 오른손으로 행해졌으므로 요셉은 맏아들인 므낫세를 자신의 왼편, 즉 야곱의 오른편에 자리하도록 하였다.

”이스라엘이 우수를 펴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좌수를 펴서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맞겨 얹었더라”


15절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가로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란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로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17절에서 요셉은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였다. 비록 므낫세가 장자였으나 이곳에서 다시,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수행하고 계셨던 바, 장자로부터 손이 떠나 차자의 머리에 얹혀져 있었던 것이다.

”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당신은 ”만일 그가 그것을 알았다면 그가 왜 에브라임에게 축복했습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이 너로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너로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리라 하여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완전하게 이루실 것이라는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아버지 이삭과 마찬가지로 믿음의 사람으로 죽었던 것이다.


요셉(22절)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셉이 죽어가고 있었을 때 그는 자신의 몸이, 자기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던 애굽에 묻히게 될 것임을 알았다. 그 때는 창세기 15장 13-16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이 주어진 이래로 200년도 더 지났을 때였지만, 여전히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으나 요셉은 하나님의 약속을 강하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창세기 50장 24-26절에서 말하는 바를 살펴보자.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이 일백 십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그가 어디에 묻혔는가? 애굽에 묻혔다. 그는 믿음 가운데 죽었던 것이다.

당신은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애굽에서 그의 해골을 가지고 나오기라도 했습니까 ?”라고 물을 것이다. 바로 그렇다. 출애굽기 13장 19절에는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그들이 출애굽하여 떠날 때에 그들은 요셉이 남긴 것을 챙겨서 함께 가지고 갔던 것이다.


여기에서 당신은 죽음에 직면해서도 하나님을 믿었던 세 사람을 살펴보았다. 그들 모두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그들은 승리한 자들처럼 죽었다. 어떻게 하면 죽음에 직면해서까지도 믿음을 견지하는가 하는 것이 믿음에 있어서의 까다로운 문제이다. 만일 믿음이 견지되지 않는다면 ... 그것은 바른 믿음이 아닌 것이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두 가지 이유


자신들 때문에 -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첫번째 이유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것을 염려해서이다. 그런데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당신이 죽게 되면 당신은 주님 앞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고후5:8).

그리스도인이 죽음을 두려워할 수 있는가? 물론 그럴 수 없다. 고린도전서 15장 55절을 읽어 보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죽음을 정복하셨다. 당신은 예수께서 당신을 위하여 아버지의 집에 처소를 예비하셨음을 믿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이 두려워할 까닭이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 때문에 - 어떤 이들은 ”만일 내가 죽는다면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정말 어리석은 생각이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분의 사역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훨씬 낫소. 왜냐하면 죽음은 당신들을 행복과 하나님과 생명으로부터 분리시켜 ...지옥에 떨어지게 할 냉혹한 추수꾼이기 때문이오.” 이것은 정말 비극인 것이다.



히브리서 11:23-20 / 믿음의 결단(Ⅰ)



복습


히브리서는 유대인 개개인을 대상으로 보내 씌어졌다. 특별히 11장에서, 이 서신의 기자는 그의 유대인 독자들이 믿음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이해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중대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유대주의에 있어서는 행위가 현저한 요소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곳 11장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새언약(1-10장)은 오직 행위가 아닌 믿음에 의해서만 얻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행위나 신자인 체 꾸미는 것이나, 의식이나, 예배로 다가갈 수 없다. 그분은 어떠한 인간적인 행위들을 떠나 그분을 믿고 신뢰하는 단순한 믿음에 의해서만 가까이 할 수 있는 분이시다. 이러한 것이 그의 관점이므로, 그것은 계속적으로 믿음으로 ... 믿음으로 ... 믿음으로라고 반복되어진다.

히브리서의 독자들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생소한 말이었다. 그들은 행위를 하나님께 가는 길로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믿음에 관하여는 단계적으로 이해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이 믿음을 어떤 새로운 이교(異敎)의 한 내용으로 생각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구약의 인물들을 실례로 사용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항상 어떠한 종류의 종교적인 제도가 아닌 믿음을 근거로 일하셨으며, 따라서 「믿음」이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이미 믿음에 관한 많은 것을 증시해 왔다. 즉, 아벨은 믿음을 좇아 사는 방법을, 에녹은 믿음을 좇아 행하는 방법을, 노아는 믿음을 좇아 사역하는 방법을, 아브라함은 믿음의 모범을, 이삭과 야곱과 요셉은 죽음에 직면하여서의 믿음의 승리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에게 믿음의 결단 내지는 선택을 하는 방법에 대하여 보여 줄 모세에게까지 온 것이다.


서론


모세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시내산에서 계명을 받기 이전에도 하나님을 믿었다. 믿음은 그의 인생의 중추였다. 나는, 그가 우리에게 참된 믿음이 내려야 하는 결단들에 대한 위대한 표준을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1. 바른 결단을 내려야 하는 모든 기회들


인생은 많은 결단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당신의 첫번째 결단은 이부자리 밖으로 나갈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며, 다음 결단은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이며, 그 후에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결단해야만 한다. 이와 같이 당신은 계속적으로 결단을 하는 과정속에서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성숙된 한 가지 모습은 올바른 결단을 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계속적으로 올바른 결단들을 내리게 될 것이지만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이와는 반대가 될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해 본다면, 거룩함은 바른 결단들을 하는 것이며, 육체의 욕심은 잘못된 결단들을 하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성숙함과 거룩함이라는 견지에서 볼 때, 당신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生)은 당신이 하는 결단들에 근거하여 올라가기도 하고 또한 내려가기도 하는 것이다. 몇 가지 예(例)를 살펴보자.


1. 사단이 유혹할 때 당신은 ”아니오.!”나 혹은 ”예!”로 말하기로결단한다.

2. 전도할 기회가 생겼을 때,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할 시간을 가질 수도, 혹은 갖지 않을 수도 있다.

3. 당신이 약간의 여분의 시간들을 가지게 되며, 성경을 읽을 여분의 기회를 가지게 될 때, 당신은 그것을 읽기도 하며 혹은 읽지 않기도 한다.

4. 당신이 주일 아침에 일어났을 때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며, 교제를 갖기도 하고, 혹은 갖지 않을 수도 있다.


당신과 내가 내리는 결단들은 항상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전체 영역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태초로부터 하나님께선 그들의 삶에 영향을 끼칠 선택을 할 기회를 사람들에게 주셨다. 선택을 해야 했던 최초의 인간은 아담이었다. 불행하게도 그는 잘못된 선택을 하였고,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이 행동했던 것이다. 모든 인생의 전환점은 당신과 내가 내리는 결단들에 달려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모든 기회를 잡기도, 혹은 육체와 세상과 사단의 길을 선택함으로 그것들이 놓쳐 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2. 바른 결단을 내리라고 하는 권고


사람들이 결단하는 방법은 그들의 순간적인 운명 뿐아니라 영원한 운명까지도 결정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선택을 하도록 요구하신다.


1) 신명기 30장 19절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 여호수아서 24장 15절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3) 열왕기상 18장 21절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3. 바른 결단을 내린 사람들의 사례


1) 히브리서 11장


아벨 - 아벨은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하여 더 나은 제사를 드렸으나 그의 형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벨은 축복을 받았으나 그의 형은 저주를 받았다.

에녹 - 에녹은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하여 그분과 함께 동행했으나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노아 - 노아는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하여 그분께 순종하여 그분이 말씀하시는 바를 행하였으나,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물에 빠져 죽었다.

아브라함 -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하여 믿음의 삶을 살았으나, 그가 거했던 땅의 백성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므로 멸망받았다.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 - 이들은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하여 자신들이 볼 수 없었던 것에 대하여 하나님을 믿었으며 그로 인하여 죽음을 정복했으나, 불신자들은 믿기를 거부함으로써 죽음이 그들을 정복했던 것이다.

2) 열왕기상 19장 18절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 말씀하셨다.

3) 느헤미야서 10장 28-29절

여기서 우리는 저주로 맹세하여 ”하나님의 종 모세로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좇아 우리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라고 말한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에 대하여 계속 열거된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은 바른 선택을 했던 것이다.

4) 열왕기하 22장 2절

요시야 왕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4. 올바른 결단을 내리는 데 있어서의 적(適)


바른 선택들은 믿음을 바탕으로 해서 나오게 된다. 왜냐하면 때때로 사단이 우리 앞에 던져 놓는 것들은 육신에게는 대단히 매혹적인 것이어서 사실 우리는 그것만큼 흥미로운 어떠한 영적 대용물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단이 다가와서 ”만일 너의 사업에서 이 작은 일을 하기만 하면 너는 거의 오천만 원을 벌게 될 것이다. 뒤가 좀 켕기기는 하지만 계속해서 그것을 하라”고 속삭이면, 우리는 스스로 ”아니지, 그것은 나쁜 일이지, 내겐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행하는 편이 훨씬 나을 거야... 그런데 그렇게 하는 데 대한 보상은뭐지 ? 아마도... 약간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것밖에는 없겠지 ? 잠깐 동안의 기쁨과 오천만 원을 비교해 보면... ? 어휴! 나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한다.

때때로 우리가 그것에 관하여 생각할 때 우리의 것인 영적인 것은 다른 것들 만큼 매혹적이지 못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 저는 이 시점에 제가 정말로 다른 길로 갈수 있다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믿으려고 합니다. 저는 당신을 믿고 올바른 것을 행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 역사하는 방법이다. 당신이 한 번 이처럼 행하였다면 당신은 믿음의 방패를 갖춘 것이다(엡 6:16).


당신은 믿음의 방패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가? 그것은 믿는 것이다. 매 시간 당신이 하나님을 믿을 때 사단의 쏘는 것들이 그치게 된다. 사단이 와서 ”이것을 해!”라고 말하지만, 당신은 ”나는 그것을 하고 싶지 않아 ...하나님께선 이것을 하라고 말씀하셨어!”라고 응수할 때 믿음의 방패가 들려지게 되며, 사단의 사나운 불길들은 꺼지게 되는 것이다. 당신이 죄를 짓는 매 시간은 당신이 하나님보다는 오히려 사단을 믿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죄 짓기를 원하지 않을 때 당신은 누구를 믿기 시작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방패는 믿음이다.


모세는 믿음을 좇아 살았던 사람이었고, 그의 방패는 들려 있었다. 그런데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유대인 독자들에게는 괴상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모세는 항상 율법, 행위, 규례, 예배, 의식 그리고 율법주의와 연관지어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았다. 사실 모세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모세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출애굽기 2장에서부터 신명기 34장까지의 다섯 권의 모세 오경 가운데 네 권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구약의 인물들 중 가장 위대하고도 특출한 사람이었다. 그의 위대함은 율법주의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안에서의 그의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상황들 속에서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를 살펴볼 때, 우리가 따라야 할 위대한 표준을 제시하여 주는, 그가 내린 결단들을 보게 될 것이다.


믿음으로 거절한 것들(24-27절)


Ⅰ. 세상의 권세(24절)


”...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


모세는 바로로 말미암아 죽게 되어 있었던 한 히브리의 어린아이에서부터 애굽 사회의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갔었다. 이 기사는 출애굽기 1장 22절-2장 10절에 기록되어 있다. 바로는 이스라엘에 새로 태어나는 모든 아들들을 죽이거나 강에 던지라는 명령을 내렸었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 아므람과 요게벳은 3개월 동안 그를 숨겨 키웠다. 그러나, 그들이 더 이상 그를 숨길 수 없게 되자 그를 상자에 담아 강에 띄웠다. 그는 강을 따라 흘러서 바로의 공주가 목욕을 하고 있는 곳으로 왔다. 그녀가 이 작은 상자를 보고 열었을 때, 그속에서 모세가 발견되었고, 그녀는 모세를 자기 아들로 삼았던 것이다.


모세는 당시 고대 세계에서 가장 부강하며 진보된 문명을 가진 애굽에서 성장했다. 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었으므로 왕자였으며, 특별히 그는 언젠가는 그 땅을 다스릴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이보다 더 높은 지위를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지배자는 바로였는데, 모세가 그 반열에 있었기 때문이다.


1. 모세의 예비


1) 메시야 대망의 지식에 있어서

출애굽기 2장 9절은 ”바로의 딸이 그(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 여인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라고 말하고 있다. 요게벳은 모세가 젖을 뗄 때까지 길렀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 기간이 3-12년 정도까지 지속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 시기에 그는 유대인 가정의 모든 훈련을 받았으며 메시야 대망에 대하여 배웠고 그것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되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모세가 자기 부모의 집에 12년 가까이 있었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들이 모세에게 메시야 대망에 대하여 가르치기에 충분하리만큼 그곳에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즉 나는, 그가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에게 이어졌으며 이제는 그에게로 이어진 그 엄청난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을 소유하게 되기에 충분하리만큼,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나오게 하여 주실 뿐아니라 구원자를 보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을 알게 되기에 충분할 만큼, 그리고 큰 민족을 이루게 되며 세상이 축복을 받게 되고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알게 되기에 충분하리 만큼 그가 부모의 집에 있었다고 믿는다. 의심할 바 없이, 이 모든 것이 모세의 마음에 새겨졌던 것이다.

2) 애굽의 지식에 있어서

그의 부모의 훈련 기간이 끝난 후 그는 애굽의 왕자로서 왕궁에 다시 들어갔다. 그는 애굽이 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받을 수 있는 지위에 있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은 그의 설교 중에 이 점에 대하여 언급한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그 기간 동안 그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교육을 받았다. 그는 바로의 집안에 대하여 교육되는 최고 수준의 것들을 교육받았으며, 바로의 집안에 속한 자들에게만 가르치며 전할 수 있었던 것들을 배웠다.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우자 그는 애굽의 지식 위에 뛰어나게 되었다.

애굽의 정규 교육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즉, 상형문자 읽고 쓰기, 성직자용의 서체, 책 베껴쓰기, 가나안의 모든 언어들을 배우는 것 등등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 교육을 지도자가 되기 위하여 그에게 주신 능력을 연단시키며, 그가 구약의 맨 처음 다섯 권의 책인 오경을 기록할 수 있게 하는 데 사용하셨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교육의 모두가 그를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다. 애굽에 있는 40년 동안, 하나님께선 그를 훈련시키셨으며 대단한 인물로 만드셨으며, 그 후에는 사막에서 그를 깨뜨려 보잘것 없는 자로 돌아가게 하시는 데에 40년을 쓰셨고, 그리고 난 후에야 하나님께선 그를 40년간 사용하셨던 것이다.


2. 결단에 있어서 모세의 관점



1) 그의 소명

모세가 마흔 살이 되었을 때, 그는 대단히 중대한 결단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무조건적으로 완전한 애굽인이 되든가, 아니면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연합하든가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가 결단을 내리는 데 있어서의 열쇠가 있었으니,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이었다. 그 40년의 기간 동안에 그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 있어서 결코 망설임이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40년 동안 그는 특권과 권세와 지위와 애굽의 왕자로서의 모든 영광을 누려 왔었다. 중대한그러나,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 닥치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오셔서 무엇인가를 말씀하셨음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그의 백성에게 돌아가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약속하신 땅에까지 인도하여 내기를 바라신다고 가르치셨던 것이다. 모세는 그가 왕궁에서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노예들과 함께 살아가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잊어 버리고 그가 가진 모든 혜택을 그대로 누리고 살아가느냐 중에서 선택해야만 했던 것이다.

2) 그의 선택

-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설교에서 이것에 관하여 23-25절에서 말하고 있다.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모세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 자신을 구원할 자로 부르셨음을 알았으므로 그는 ”만일 내가 저기로 들어가 저 애굽인을 죽이면 사람들에게 내가 누구의 편인지가 증명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내가 자기들을 구원할 자임을 알게 되겠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비록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알았으며 적극적으로 그것에 응답했던 것이다.

- 왕궁의 영광을 거절함

히브리서 11장은 모세가 왕궁의 영광을 어떻게 취급했는가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는 그 모든 것을 던져버렸던 것이다! 24절은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라고 말한다.

모세는 세상의 권세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더 나은 나라와 상급을 가지고 계심을 알았다. 권세와 영광과 명예는 사람을 움직이는 것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얻게 되기를 꿈꾸며 자신들의 전 인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모세는 그 모든 것을 포기했던 것이다.


무엇이 위대한 것인가? 세상의 표준 : 하나님의 표준



세상의 표준

세상은 그 자체의 평가 방법을 가지고 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은 어떻게 영광을 얻는가? 대개는 다음의 네 가지 방법들 가운데 하나를 통해서일 것이다.


출신 가문 - 만일 당신이 권세있는 가문에서 태어난다면 당신은 영광을 받게 되며, 자동적으로 어느 정도 위대함을 지닌 것으로 대중의 눈에 비치게 된다. 그런데 당신은 조금도 그 위대함을 갖추고 있지 못할 수도 있다.

돈 - 세상이 권세와 영광을 평가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또다른 하나는 돈이다. 만일 당신이 많은 금은 보석들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세상의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나는 그것이 항상 참된 영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에 몰두하고 있다.교육 - 만일 당신이 당신의 이름 뒤에 상당한 학위명들을 지니게 된다면,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위대함의 특성이며 존중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위 - 세상이 영광을 주며 위대하다고 평가해 주는 마지막 이유는 당신이 우연히 특별한 지위에 있게 되거나 아니면 당신이 하고 있는 일, 즉 그것이 체육이든 오락이든 재정이든 사업이든 기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으로 유명한가에 달려 있다.


그러나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이들 중 어느 것 하나도 위대함에 대한 하나님의 표준과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존중히 여기시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을 근거로 하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어느 가문 출신인가, 얼마나 많은 돈을 가졌는가, 얼마나 많은 교육을 받았나, 혹은 이 세상에서 어떠한 지위에 있는가에는 관심이 없으시다. 그분은 위대함이라는 것에 있어서 이러한 것들을 조금치도 상관하지 않으신다. 나는 이것을 모세, 다윗, 아브라함, 엘리야, 혹은 다른 어떤 구약의 성도들보다 위대했던 한 사람을 당신에게 소개함으로써 증명해 보려고 한다.


하나님의 표준

하나님의 위대함에 대한 표준이 어떠한 것인가는 세례(침례)요한이라는 인물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당시까지 살았던 모든 자들 중 가장 위대한 자로 예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로 위대하게 하였는가? 우리는 그것이 그의 가문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평범한 제사장의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돈도 아니었다. 그는 사막에 살고 있었으며 낙타의 가죽으로 만든 흡사 타잔의 옷과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교육도 아니었다. 그는 아무런 교육도 받지 않았다. 그것은 지위도 아니었다. 그는 광야에 살면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

그는 평범한 가정에서 돈도 없고, 교육도 받지 못하고 초라한 옷을 입고 굶주리며 사막을 유리하고 있던 사람이었지만,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1장 11 상반절에서 ”...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느니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위대하게 만들었는가? 누가복음 1장 15-16절에는 세 가지 사실이 나타나 있다.


1. 그는 순종했다.

2. 그는 성령으로 충만했다.

3.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많은 심령을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세상과는 전적으로 다르게 위대함을 평가하신다는 사실이다. 세상 것들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겠는가? 요한일서 2장 15-17절에서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하고 있다.정말로 모세는 세상이 줄 수 있었던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사실상 세상은 당신이 주께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과 비교해 볼 때 많은 것을 줄 수 없다. 모세는 그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모세는 세상의 권력을 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낮추어 노예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가 되어 그들의 지도자가 되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모세가 거절한 두번째 것은 세상의 즐거움이다.


Ⅱ. 세상의 즐거움(25절)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나는 당신에게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행해지는 말 한 가지를 옮겨 보려 한다. ”죄는 재미있는 것이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즉, 죄란 즐길 수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라는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의 선택, 아니 결단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바를 행하거나 아니면 불순종하는 길 밖에 없다. 그런데 인간의 관점으로 보면 불순종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왕궁에서 살게 될 것이며 내가 원하는 모든 좋은 것과, 여인들과 돈과 권세와 영예를 누리게 될 것이며, 그것은 대단히 재미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노예 상태로 있는 저 사람들에게로 내려가 저들을 위하여 헌신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내가 해야 할 선택이다. 만일 내가 현실에 안주한다면 죄가 될 것이며 저들에게로 간다면 순종하는 것이 될 것이다.\그는 무엇을 선택했는가? 그의 백성에게로 가는 것이다. 그는 죄의 즐거움을 생각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애굽 궁전에서의 자기 자리를 지키려고 했었더라면 죄가 되었을 것이다.그런데 나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다른 장소로 가라고 말씀하실 때까지는 그가 애굽의 궁전에 있는 것이 죄가 아니었으나, 그 이후에는 죄가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당신은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가? 즉, 어떤 것을 소유한다거나 돈을 소유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말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하도록 요구하시는 바를 무시하기로 하지 않는 한, 세상이 주는 어떤 영광들을 소유하는 것으로 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요구를 무시한다면 그것은 죄다. 죄는 잠시 동안은 재미있는 것일 수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동안일 뿐이다.


1. 욥기 20장 5절

”악인의 이기는 자랑도 잠시요 사곡한 자의 즐거움도 잠간이니라.”

2. 욥기 21장 7-13절

욥은 하나님께 ”어찌하여 악인이 살고 수를 누리고 세력이 강한지”를 원망한다. 당신은 왜 탐욕스러운 모든 자들이 당신보다 훨씬 나은가를 하나님께 여쭈어 본 적이 있는가 ?

”씨가 그들의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그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그 수소는 영락없이 새끼를 배게 하고 그 암소는 새끼를 낳고 낙태하지 않는구나(그들은 소를 기르는 데 있어서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뜻임) 그들은 아이들을 내어보냄이 양 떼 같고 그 자녀들은 춤추는구나(그들에게는 행복하고 건강한 아이들이 있다는 뜻임) 그들이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그날을 형통하게 지내다가 경각간에 음부에 내려가느니라.\도대체 이게 무슨 말씀인가! 죄는 잠시 동안은 정말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 있다가는 사라져 버린다.

3. 시편 73편 12-19절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4. 이사야서 21장 4하반절

”... 서광이 변하여 내게 떨림이 되도다.”

5. 야고보서 5장 5절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당신은 도살되기 위하여 살찌워가는 돼지나 소를 본 적이 있는가? 야고보는 ”너희가 너희 자신을 살찌웠으며 너희가 원했던 바를 행하여서 도살의 날에 살찌고 염치없이 되었도다”라고 말한다.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 그것은 갑작스럽고 재빨리 임할 것이다. 모세는 ”죄는 재미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잠시뿐 ...너무도 잠시뿐”이라고 말했다. 가장 지고(至高)하고 오래 지속되는 기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행하는 것에 있다.


당신도 알고 있는 바지만, 나는 다윗이 밧세바와 함께 많은 즐거움을 누렸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인생의 후반기에 그는 죄 가운데서 ”...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부르짖었던 것이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자녀들이 자기의 마음을 찢어지게 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가 밧세바와 불륜을 행함으로 낳은 아이는 죽었으며 그의 아들 압살롬은 그에게 반역하여 죽음으로 끝을 맺었던 것이다. 다윗은 그의 인생에 나타나는 처참한 일들을 목격했던 것이다. 죄는 재미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윗에게 그것을 되풀이하라고 했다면, 그는 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主)께서 우리에게 주려고 하시는 것은 영원한 기쁨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것이다. 당신은 어떠한가? 모세는 자발적으로 잠시 동안의 향락을 즐기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택했으며 이것이 바로 믿음의 행위인 것이다. 실제로 그는 만일 자신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한다면 마지막에 더나은 곳에 도달하게 될 것임을 믿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거룩함, 즉 죄로부터 멀리 떨어질 것을 요구하셨다. 이것은 항상 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내려가서 집어 올리기가 쉽게, 온갖 잡동사니들을 우리의 길에 던져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하나님, 당신은 제가 옳은 일을 행하기를 원하시며, 그것으로 저를 존귀케 하실 것입니다 ... 그러므로 저는 그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만일 당신이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당신은 무엇을 행하게 되는가? 당신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과연 행할 것인가? 물론 당연히 행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두시는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당신이다! 마귀는 당신을 돌보지 않는다. 그는 오직 당신을 멸망시키고 싶어할 뿐이다(벧전 5:8). 만일 당신이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당신은 두 가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1. 당신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광을 위하여 세상의 권세를 거절할 것이다. 그리고,

2.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영원한 기쁨을 위하여 세상의 기쁨을 거절할 것이다.


다음의 2부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절한 두 가지 일과, 받아들인 세 가지 일을 더 생각해 보려고 한다.



히브리서 11:23-29 / 믿음의 결단(Ⅱ)



서론


앞의 1부에서 우리는 인생이 결단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살펴보았다. 아침에 우리가 깨어나는 시간으로부터 결단을 내리는 일련의 과정들을 시작하게 된다. 우리의 삶의 모든 전환점에서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 성령의 뜻을 이행하기도 혹은 우리 자신의 뜻으로 충만하여 성령을 무시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 결단을 내리며 인생을 살아가거나 혹은 그분을 무시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을 위하기로 하거나 아니면 그것에 대항하기로 결단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면 그 두 가지 의지가 잘 조화되게 되므로 그 결단들은 횟수가 점차로 줄어들게 된다.


모세의 생애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 우리는 믿음이 내리는 결단들에 주의를 집중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전심(全心)을 기울여 그분을 믿고 신뢰한다고 할 때, 그는 그 믿음을 기초로 어떤 결단들을 내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결단들이 그의 영원한 삶 뿐아니라 순간적인 삶까지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하여 각 세대들이 믿음이 아닌 어떤 다른것들로 하나님께 가려고 애써 왔음은 슬픈 일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자력(自力)과 일과 그들 자신이 고안한 계율적으로 성문화된 제도들과 그들 자신이 완성시킨 의식들과 그들 자신의 색다른 예배들에 의하여 하나님께 도달해 보려고 애써 왔다. 인류는 하나님께 도달해 보려는 그들의 시도에 있어서 이러한 방법들 모두를 사용하여 왔지만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은 단지 믿음을 근거로 할 때만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분을 믿으라는 것이 전부이다. 또한 그분 자신이 구원 사역을 성취하신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던 바로 그것이 그분께서 뜻하시는 바인 것이다(요 19:30). 우리가 구원을 파악해 볼 때 그것은 그분의 사역과 우리의 믿음만을 근거로 하는데, 우리의 믿음조차도 그분의 사역의 일부분인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의 논의를 믿음의 개념에 기초하여 전개하고 있는 히브리서 기자는 이제 모세의 생애로 넘어간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그것으로 거절하는 것을 살피게 된다.


복습


믿음으로 거절한 것들(24-27절)


Ⅰ. 세상의 권세(24절)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모세가 40세가 되었을 때 그는 그의 인생의 중대한 전환점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는 계속하여 모든 부(富)와 영광과 권세를 가지고 왕궁의 일원이 되든가, 아니면 그것에서 등을 돌려 자신을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하여 헌신하며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바 그들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구원할 자가 되든가를 결단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옳은 것을 선택하며, 하나님을 위하여 세상의 권세를 거절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시대의 최고의 지위를 거절하고 하나님께 순종했던 것이다.


Ⅱ. 세상의 기쁨(25절)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어느 누구도 나에게 죄가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죄는 정말로 재미있는 것이다 ... 그러나 그 재미는 잠시 뿐이다. 그 잠깐 동안의 시간이 끝나버리면 그것은 물고 쏜다.


앞의 1부에서 우리는 이러한 점을 예시하고 있는 여러 성子(聖句)들을 살펴보았다.


1. 욥기 20장 5절

2. 욥기 21장 7-13절

3. 시편 73편 12-19절

4. 이사야서 21장 4하반절

5. 야고보서 5장 5절


다른 한 구절을 더 살펴보자.

6. 누가복음 12장 19-20절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모세는 만일 그가 왕궁에 남아 있었더라면 그의 것이 되었을 애굽의 향락들을 거절하기로 하고, 대신에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고난을 받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당신은 ”왜 그가 그러한 일을 했습니까?”라고 반문할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것을 말씀하셨고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앞의 1부에서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때는 믿음의 방패를 지니게 되며 사단의 맹렬한 불길을 꺼버리게 된다는 사실에 관해 말했었다. 죄는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를 믿는 대신에 마귀의 거짓말을 믿는 데서 생긴다. 사단의 말을 듣지 않도록 하라. 그는 처음부터 거짓말장이인 것이다.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은 다만 당신을 상하게 하며 속이고, 당신의 인생을 파멸시키려는 것 뿐이다. 불행하게도 타락으로 인하여 우리는 그의 말을 경청하며, 때로는 너무도 지혜롭지 못하게, 그가 우리에게 행하라고 하는 것을 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그분을 믿을 때, 우리의 삶 속에서 죄가 자리할 곳은 없게 될 것이다.

나는 모세의 지위와 같은 데서 보았을 때 세상의 질서라는 것이 대단히 매혹적인 것이었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리나, 그는 그것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받기로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하여 이러한 종류의 선택을 할 때, 잠시후 그들이 세상 일이란 역시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고 깨닫기 시작하게 된다는 것이 나에게는 흥미로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려고 한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지면 빠질수록, 또한 당신의 인생을 구별지어 하나님의 일에만 종사하면 할수록, 세상 일이란 당신에게 있어서는 더욱더 의미를 상실해 갈 것이라고, 당신의 믿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돌려질 때, 그것은 당신에게 세상으로 가기 위해 버리고 싶어할 수 없을, 너무도 즐거운 인생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기에 그 제도는 모세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비록 하나님께서 그에게 행하기를 원하시는 바가 세상의 즐거움을 희생시키는 것을 의미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기꺼이 행했던 것이다.


세상이 이해해 주기를 기대하지 말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좇기 위하여 세상의 즐거움들을 저버린다고 할 때 세상 사람들은 결코 이해하지를 못한다. 그들은 우리가 그 길 어디에선가 우리가 좌절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가 하루 종일 교회에 있고 싶어하며 커다란 성경책을 가지고 가서 이상한 노래들을 부르며, 헌금함에 우리 돈을 넣는, 이러한 이상한 보든 일들을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항상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재미있는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이유에 대하여 질문한다.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이러한 방법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일종의 비극이지만 우리는, 그들이 그 모든 것을 즐거운 것으로 바꾸어 주시는 그리스도를 만날 때까지는, 그들이 이해해 줄 것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4장 3절은 ”너희가...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라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세상 질서가 시행되고 있던 바대로 행하였다는 것이다. 즉, 세상의 질서가 행하였던 바를 우리는 행하였으며 ...세상이 팔고 있었던 것을 샀던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들어가서 물건을 살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시장이었다. 3절은 ”음란(추잡하고 부도덕한 행위)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헬라어로 「포토이」(potoi)=술마시는 파티)과 무법한 우상 숭배 ...” 가운데서 우리가 행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모든 일들을 행하곤 하였으나, 우리가 더이상 이러한 일을 행하지 않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는가 살펴보라. 4절을 보면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라고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왜 우리가 더 이상 그러한 길을 가지 않는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당신이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닦아 놓으셨으니,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한 번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거절하고 다른 길로 가게 되는 데 그것은 오직 상처만을 남겨줄 뿐이다. 그러나, 당신이 하나님의 길 안에서 오래도록 생활하며, 하나님께서 당신이 가기를 원하시는 길로 걸어가면, 당신은 기쁨이 거기에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당신의 마음 속에 주실 수 있는 그 기쁨을 한번 맛보았다면, 당신은 세상이 줄 수 있는 어떤 것들을 위해서도 그 기쁨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모세는 고난을 받기로 자의(自意)로 선택을 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한가지 되어 정면으로 세상과 마주치게 될때 우리도 역시 고난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거부하게 될때 우리는 약간의 저항을 받게 된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서 디모데에게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했다.

모세와 같이 우리도 ”나는 하나님의 길로 가겠다. 나는 잠시 동안 재미있는 세상의 낙들을 거절하고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겠다. 그렇게 하면 결국에는 나의 인생이 정말로 그분께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자발적으로 말해야만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우리가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결국에 가서, 그것들은 가지고 있을 가치가 별로 없는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 어떠한 것도 잃게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정말로 가치있는 것으로써 백만 갑절로 보상될 것이기 때문이다.


Ⅲ. 세상의 재물(26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가 그가 원했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세상은 그에게 많은 것을 주어 왔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인은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을 조금치도 원하지 않는 것이다. 야고보서 4장 4절은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말한다. 세상은 많은 것을 준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세상의 재물을 얻기 위해 당신의 삶을 살아간다면 당신은 자신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 ”여겼으니


헬라어에서 이 단어는 문자적으론 ”판단하다” 혹은 ”고려하다”를 의미한다. 이것은 모세가 성급한 결단이나 조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는, 일종의 법률적 용어인 것이다. 그는 그것을 놓고 조심스럽게 살펴본 후에야 마침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즉, 애굽이 줄 수 있는 모든 보화를 소유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능욕을 받고 그 능욕을 재물로 여기는 것이 낫다는 결론이다. 이와 같이 그의 결단은 심사숙고한 결과였다.

2.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


1) 문제점

모세가 살고 있었을 때 그리스도는 태어나지조차도 않았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나시지도 않았었던 때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더 큰 재물로 여길 수 있었다는 말인가?

2) 가능한 해석들

그리스도[헬라어로 「크리스토스」(chlistos)]란 말은 ”메시야”를 의미하며, ”메시야”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당신은 ”히브리서 기자가 무엇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라고 반문할 것이다. 이제, 다음의 가능한 해석들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자.


- 모세가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해석(즉, 모세가 그리스도라는 해석)

26절의 그 단어는 Christ가 아닌 christ라는 것이다. 즉, 단순히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구약의 왕, 제사장, 선지자처럼-역자주) 혹은 ”하나님의 구원자”로 번역할 수가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모세는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자로서 기꺼이 능욕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 모세는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는 해석

이것은 앞의 해석보다 더 진실에 가까운 것같다. 모세는 사실 구원자되시는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 모세는 메시야께서 오시기 전에 그분을 위하여 실제로 능욕을 참았다는 해석

이 구절의 의미에 대한 앞의 두 가지 해석들 이전에 나는 이 해석이 가장 정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메시야께서 오신 이후로 그분을 거절해 왔으며, 그분이 오시기 전에도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세상은 항상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자들에게 적대적이었다. 그러므로 메시야를 위하여 받는 능욕이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의미로 그리스도 이전에도 있었던 것이다.


3) 핍박받은 사례(事例)들


- 다윗

시편 69편 9하반절에서 다윗은 ”...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당신을 핍박할 때 그들이 실제로 공격하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 아는가? 그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사람들이 당신의 믿음에 대한 선포로 인하여 당신에게 노를 발하거나 혹은 그들이 당신이 복음 전파에 대하여 신경질을 낼 때, 그들은 결코 당신에 대하여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렇게 행한 것이다.

- 바울

갈라디아서 6장 17하반절에서 사도 바울은 ”...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라고 말했다. 바울은 여기에서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계속하여 나를 쳐서 쓰러 뜨리고 있습니다”라고말했던 것이다(고린도후서 12:10 참조).

유의 사항 : 참다운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길로 행하며, 그분께 순종했던 십자가 편에 선 사람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자에게 돌려졌던. 사회로부터의 능욕을 받아야만 했었다.

- 이스라엘

메시야는 항상 그분의 백성과 동일시되어 왔다. 실제적인 의미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고통을 받았을 때 메시야도 고통을 받으셨으며 그들의 모든 괴로움 속에서 그분께서도 괴로움을 겪으셨다.

- 그분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

히브리서 13장 13절은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고 말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하나님과 연결되어 왔으며 그분을 위하여 살았고 세상의 재물을 외면하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길로 갔던 모든 사람은 실제로 하나님께로 돌려졌던 능욕을 받아 왔다. 그것은 그분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 교회

사도행전 5장 41절은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말한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장 14상반절에서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있는 자로다”라고 말했다.



3.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1) 애굽의 부(富)

애굽은 대단히 부유한 나라였다. 투탄카멘 왕의 무덤의 발굴로, 고대 애굽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것들 중 가장 큰 몇 가지 보화들이 나왔다. 모세는 바로의 궁전에 있었기 때문에 그 세계가 줄 수 있었던 모든 부(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거절하였으니,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더 크신 영원한 부(富)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도 빌립보서 4장 19절의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는 원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느 편이 나은가


「풍성함으로부터」 받는 것 : 「풍성한 대로」 받는 것


당신이 빈궁하고 곤경에 처하게 되어 한 부자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고 하자. 만일 이 부자가 5만원 짜리 수표를 써 주었다면, 당신은 그가 자신의 부유함으로부터 당신에게 주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부자가 1억원짜리 수표를 당신에게 써 주었다면 당신은 그가 자신의 부유함대로 당신에게 주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예수께서 주실 때는 자신의 부유함으로부터 주시는 것이 아니라 부유한대로 주시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부(富)


- 시편 37편 16절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 디모데전서 6장 6-11절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에 떨어지나니.\부하게 되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부하게 되기를 원하는 것은 죄다. 만일 당신이 열심히 일하며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부여하신 모든 가능한 재능을 사용하여,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그러한 방법을 따라서 부(富)를 얻었다면 ...주님을 찬양하라. 그러나, 당신의 목적이 부(富)를 얻는 것이며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면 당신은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11절은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義)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라고 말한다.

만일 당신이 어디엔가에 당신의 목적을 두고 싶다면, 그것을 이러한 것들에 두도록 하라. 당신의 인생의 목표를 거룩함에 두도록 하라.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하게 하시는 방법을 따른다면, 그것은 복된 일이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을 가난한 채로 두신다고 할지라도 그것 역시 복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다.

- 마태복음 6장 33절

예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이 아는 바와 같이 당신이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당신의 인생에서 당신이 진정 원하는 바가 무엇이냐가 문제인 것이다. 태도와 동기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4.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당신은 ”모세가 세상의 권세와 기쁨과 재물을 거절했을 때 그는 자신의 모든 꿈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고 자신의 모든 희망들을 포기했던 것입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 그는 어떤 영원한 상급에 마음을 고정시켰던 것이다. 이것이 26절의 마지막 부분이 뜻하는 바이다. 모세는 상주심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영원한 것들에 고정되었다. 믿음은 세상적인 어떠한 것들을 잃는 것이 실제로는 손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당신이 당신 자신을 위하여 보화를 하늘에 쌓아 둔다면, 그것은 영원히 완전하게 보존된다. 비록 모세의 이름이 애굽의 대차대조표에서는 사라져 버렸지만, 하늘나라에 있는 영원한 무제한의 은행 구좌에 기록되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히 훨씬 더 나은 것이다. 바울은 ”우리의 잠시 받는 환란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라고 말했다. 그리고 로마서 8장 17절에서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라고 말했다.


믿음은 세상의 권세를 원치 않으며, 세상의 즐거움이나 세상의 재물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믿음으로 물리친 또 다른 하나는 억압이다.


Ⅳ. 세상의 억압(27절)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


분명히 바로는 모세가 떠나는 것에 관하여 대단히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에게 커다란 억압이 가해졌었음이 분명하나, 그것이 모세에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모세는 왕의 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단은 당신을 억압하여 세상의 질서를 따르게 하려고 할 것이다. 그는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할 것이다. 예(例)를 들면, 사단은 당신의 친구들을 사용하여 ”이봐. 어떻게 된 거야? 왜 자네는 이렇게 하지 않나? 그게 다 무슨 부질없는 소리인가? 자네도 우리가 하는 것처럼 행하는 게 어때 ?”라는 말로 억압한다. 그런 다음엔 어떤 사람들이 다가와서 ”이봐요, 당신이 정말 저 사람들 가까이에 머물면서 그들에게 증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하는 일을 당신도 해야 하는 겁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세상의 방법을 따르는 것을 정당화시키게 되고, 그것이 그들을 그리스도께 이끌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합리화시키게 된다. 이렇게 될 때 당신은 사단의 억압에 굴복한 것이다.


당신은 또한 당신의 직장에서도 작은 거짓말을 말한다든지, 경리 장부를 가지고 약간 술수를 부린다든지, 당신의 수입세에 대하여 속인다든지 하는 정직하지 못한 일을 하도록 억압받을 것이며, 그 억압은 각 분야들로부터 들어올 것이다. 사단은 당신이 세상을 따르도록 하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노력하고 억압을 가할 것이다. 필립스(J. B. Phillips)는 로마서 12장 2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세상의 모양으로 본(本)을 뜨지 말라.\사단이 원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모세가 마주쳤던 억압들은 어떠한 것들인가 ?


- 왕궁의 안락함

- 향락

- 부(富)

- 영광- 빛(바로의 공주에 대한 것)

- 두려움

아마도 두려움이 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큰 억압이었을 것이다. 27절은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라고 말한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하는 가장 큰 억압은 두려움의 억압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북극의 강과 같이(입이 얼어 붙었음)되어, 기꺼이 자신들의 믿음을 전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평판을 잃게 되는 것이나, 쫓겨나는 것,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나 혹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이기적인 두려움이다.

그러나, 모세는 두려워하지 않고 애굽을 떠났던 것이다. ”떠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 동사 「카타레이포」(Kataleip )로서 마음으로 거부하는 것을 표현한다. 즉, 그것은 단지 육신적으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거부하는 것이었다. 모세는 하나의 질서로서 또한 삶의 방법으로서의 애굽을 팽개쳐버렸다. 사단은 사람들을 무능하게 하기 위해 두려움을 사용하지만 그것이 모세를 무능하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두려움은 성경의 다른 많은 사람들을 삼켰다.


- 두려움 앞에 무릎꿇은 자들

a. 아브라함은 두려워서 사라에 관해 거짓말을 했다.

b. 이삭은 두려워서 리브가에 대하여 거짓말을 했다.

c. 야곱은 두려워서 라반에게서 도망쳤다.

d. 아론은 두려워서 사람들에게 굴복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e.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을 정복하려는 시도를 두려워하였다.

f. 이천 명의 기드온 군대는 두려워하여 실격자로 판정되었다.

g. 다윗은 두려워서 압살롬으로부터 도망쳤다.

h. 제자들이 바다의 풍랑을 두려워하였다.

i. 베드로는 두려워서 예수를 부인했다.


j. 당신과 나는 두려워서 이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부인해 오지 않았던가? 당신이 의도적으로 말로 그리스도를 거절해 오지는 않았을지라도, 당신이 억압되어짐으로 인하여 당신을 그분과 연결할 수 있었던 어떠한 것들을 말하지 않았던 때가 있는 것이다.


두려움은 실제적인 억압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인기나 사회적인 지위의 상실에 대한 위협으로, 혹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끊어버릴까, 혹은 멸시할까, 아니면 자신들을 광신자라 칭하며 핍박할까 하는 등등의 두려움으로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되어버린다.” 마귀는 두려움을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하지만, 그것이 모세를 움직이지는 못했다.


- 두려움에서의 승리자

출애굽기 5장에서 당신은 마귀가 모세를 억압하려고 시도했던 방법을 명확히 볼 수 있다. 모세는 담대하였기에 그 억압이 그를 움직이지는 못했던 것이다. 왕이 무슨 일을 행하거나,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는 그 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세는 우리에게 중대한 교훈을 주고 있다.


믿음은 세상의 억압에도 꺾이지 않는다. 모세는 ”보이지 않으시는 분”을 보았기 때문에 꺾이지 않았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보이지 않는 지지 세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거나 어떤 일에 직면하게 될지라도 자신이 지탱되고 강해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당신이 아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로 당신이 사람들과 마주칠 기회를 지나쳐 버리는 것은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또한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정말로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기때문인 것이다. 만일 당신이 정말로 그분을 신뢰했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믿기를 중단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당신이 하나님 믿기를 중단할 때 믿음을 상실하는 것이다. 믿음이 있었다면 ”나는 하나님을 믿고 세상의 향락을 거절한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시점에 내가 하나님을 믿을 수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믿음이 없는 자로 자처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잘못된 결단이다.

우리가 세상과 사람들이 말하는 바를 두려워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엄청난 믿음의 결핍으로 인하여 비난받도록 드러내놓고 있는 것이다. 누가 우리의 하나님이신가? 당신은 정말로 그분이 자신이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신 바를 하실 수 있다고 믿는가?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을 믿어 왔으며 사람들에 관하여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세도 그와 같았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


지금까지 우리는 믿음으로 거절한 것들. 즉 세상의 권세, 세상의 즐거움, 세상의 재물, 그리고 세상의 억압을 보아 왔다. 이제는 이와 반대의 것을 살펴보자.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들(23, 28-29절)


Ⅰ. 주님의 계획(23절)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


당신은 바로가 히브리 사내 아이들을 모두 죽이라는 포고를 내렸음을 기억할 것이다(출 1:22). 만일 그 명령에 따르지 않는 가정이있다면, 그것은 그들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처사였다. 그러나, 이러한 명령이 모세의 부모 아므람과 요게벳을 겁주지 못했다. 그들은 어린 모세를 석달 동안이나 그들 집에 숨겨서 키웠다. 당신은 ”그런데, 그들은 군인들이 그 아기를 발견하여 모든 가족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물을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성경은 그들이 바로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으며, 그들의 어린 아기 모세에 관한 그분의 계획을 믿었던 것이다.


1. 모세의 부모에게 드러난 계시


23절은 모세가 ”아름다운 아이”였다고 말한다. 출애굽기 2장 2절은 그가 ”준수했다”라고 말한다. 또한 사도행전 7장 20절에서 스데반은 그 아기가 ”아름다웠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아름다웠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스테이오스 토 데오」(asteios t  the )이며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에게까지도 아름다웠다”는 의미이다. 그 아이는 하나님에게까지도 아름다웠다. 바꾸어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모세에게 자신의 사랑을 쏟으셨다는 것이다. 그의 부모들은 그가 준수한 아이였기 때문에 숨겼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를 숨기라고 말씀하셨기에 그를 숨겼던 것이다.

내가 하나님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고 믿는 까닭은 그들이 믿음으로 그를 숨겼다고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며, 믿음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이는 내가 보기에도 아름다우며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구별하였노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러기에 그들이 그 아이를 숨겨야 할 것을 알았던 것이다.


2. 모세의 부모의 응답


아므람과 요게벳은 그 아이를 희생시키고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려고도 할 수 있었으나, 그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행하는 모험을 감행하였다. 사실 그것은 결코 모험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 두려움 없이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하라고 말씀하신 대로 아이를 데리고 석달 동안 집안에서 키웠던 것이다. 우리는 석달 후 그들이 아이를 위하여 작은 광주리를 만들어 그를 강에 띄웠던 이유에 관하여 사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아마도 아기가 커감에 따라 점점 울음소리가 커져서 제한하거나 숨기는 것이 너무도 어렵게 되었을 것이다.

어떤 이유였든지 간에 그들은 그를 작은 바구니에 담아 강으로 띄워 보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의 운명에 관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음이 분명하며,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행동했던 것이다.


3. 모세의 부모에게 주어진 상급


그 아기를 석달 동안이나 숨기는 것은 강한 믿음을 필요로 하였다. 또한 그 아이를 물에 띄워 놓고 그가 떠내려 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강한 믿음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를 즉시로 되돌아오게 하셔서, 요게벳에게 그를 수유(授乳)하며, 사랑해 주며, 귀여워해 주고, 키우고, 가르치는 그러한 특권과 기쁨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믿음에 대한 보상을 해 주셨던 것이다. 그녀는 본래대로 그를 키웠으며 그에게 메시야 대망과 아브라함의 약속을 가르쳐 주었다. 모세에게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서의 모든 지질을 가르쳤던 사람은 바로 이 요게벳이었다.


그와 같이 몹시 위태로운 처지에 임하여서도 그들이 아기를 숨기며 강에 띄운 것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엄청난 분량의 믿음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거대한 믿음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한가지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분의 계획은 만일 당신이 그것에 순종한다면 항상 즉시로 이행되는 것이다. 당신은 그분께서 그 계획을 개정하시도록 할 필요도 없으며, 그렇게 하시도록 도와드릴 필요도 없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한 계획을 꾸며 하나님을 도와드리려고 하였으나, 그로 인하여 아랍 족속으로 알려진,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가시 노릇을 하는 자들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하나님을 도와드리려고 애쓰지 말고, 그분께서 그분의 계획을 이행하시게 하라. 하나님의 계획을 도우려 하는 것은 연필로 모나리자를 고쳐보려고 애쓰는 것과 같은 일이 될 것이다. 당신은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것 자체로 걸작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필요한 한 가지 일은 순종이다. 그분께서는 계획을 세우시고 우리는 그 안에서 행하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세의 부모는 믿음 생활이란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예시하고 있다. 둘째로, 참된 믿음은 주님의 예비하신 것을 받아들인다.


Ⅱ. 주님의 예비하신 것(28절)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禮)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당신은 애굽에 대한 마지막 재앙을 기억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곳에서는 생축들과 사람들의 모든 처음 난 것들이 죽게 되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나는 죽음의 사자(使者)들과 함께 그 땅을 지날 것이며 그 땅에서는 처음 난 모든 것들이 죽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당신이 아는 바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들었으며 ”그것은 제법 오묘한 일이군요!”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모세는 그것을 믿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러나 너희를 위해서는 준비가 있으리니, 너희는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를 것이며, 너희가 이렇게 하면 죽음의 사자(使者)가 그 집을 넘어가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누가 이러한 지시를 따랐는지 알고 있는가? 하나님을 믿던 백성들이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관한 적절한 예표가 되었다. 하나님의 심판은 문명 세계를 쓸어버리시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가려진 모든 사람들은 지나쳐 간다.


모세는 하나님의 예비하신 것으로 인하여 그분을 믿었다. 그것을 행한다는 것은 바보같은 짓으로 보였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하라고 말씀하셨기에 그는 그것을 하였던 것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예비하신 바를 항상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 저는 당신께서 그것에 무엇인가를 더하고 싶어하신다고 확신합니다. 우리 모두가 서너 번 그 문설주 주위를 돌고 너댓 번 좋은 행위를 더한다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묻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를 예비하셨으며, 모세는 그것에 어떠한 것도 더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그것을 행하였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을 위하여 한 가지를 예비하셨으니,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인 것이다. 이것에 어떠한 것도 더하지 말고 단지 이것을 받아들이라! 당신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때, 당신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게 될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8장 1절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말하는 이유인 것이다.

이와 같이 믿음은 하나님의 예비하신 것을 받아들인다. 이것이 믿음과 행위의 차이인 것이다. 행위는 예비 그 자체를 만들어 내려고 애쓰나, 믿음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셨으며 나는 그것을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믿음은 항상 하나님의 계획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예비하신 바를 받아들인다. 세번째로 믿음이 받아들이는 것은 주님의 약속이다.


Ⅲ. 주님의 약속(29절)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


당신은 이에 관한 기사(記事)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바로 홍해가 갈라져서 양쪽 편에 수백 미터의 높이가 되는 벽을 이루었던 것이다. 백성들이 모두 해변에 내려 서자 모세는 ”이제 우리는 저 사이로 지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아마도 어떤 자들은 ”뭐라구요! 도대체 누가 바다가 저와 같이 갈라진 상태로 있을 것이라고 보장하였습니까?”라고 물었을 것이다. 그것은 믿음을 필요로 하였다. 아마도 모세는 ”누가 보장하느냐구요? 하나님께서 보장하십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회의주의자는 잠시 동안 이것을 생각한 후에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어떤 구체적인 증거를 보이셔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옳지 못하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단지 손을 뻗으라 그리하면 바다가 갈라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그것이 이루어졌지만, 백성들은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군대들로 하여금 그들의 믿음을 고무시키셨던 것이다. 즉 그들은 머물러서 학살을 당하게 되든가, 아니면 믿음으로 건너든가 해야만 했던 것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은 승리를 얻게 하지만, 시험하는 자들은 물에 빠져 죽게 되는 것이다. 애굽 사람들은 시험하였기에 결국 물에 빠져 죽고 말았던 것이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생의 바다를 건너게 해 줄 나룻배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만일 당신이 물결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바다가 양 옆으로 쌓여 있는 그 사이의 평지를 통해,하나님께서 바다가 거기에 머물러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을 믿으며, 걸어가야만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걸어 나가는 길이다. 그분께서는 ”나는 네가 이 세상이라는 바다를 지날 때 너를 위하여 모든 것을 지원해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단지 그분을 믿으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선택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예비하시는 것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거절하여 버리는 것이다.


히브리서 11:30-40 / 믿음의 절정


서론


우리가 이 히브리서 11장의 연구에서 여러 차례 상기해 온 바와 같이 성령께서는 믿음의 덕(德)을 알리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경주하고 계신다. 성령께서는 전체적이며 완전한 믿음의 중요성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우리가 알게 되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이 믿음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단순하게 철저히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는 것으로 정의(定義)되어짐을 보아 왔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바를 믿고서 자신의 삶을 그 위에 세우고 살아가든가 아니면 자신의 삶을 자기 자신의 태도나 지식이나 이해 위에 세우고 살아가는 것이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이것들 중 하나일 뿐이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언급되어진 믿음은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다른 어떤 이유도 달지 않고서 그것이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대로 행동하는 믿음인 것이다. 참된 믿음은 어떠한 질문도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참된 믿음은, 그분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말씀하셨기에 ... 어떠한 설명도 필요없이 단순하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믿는 것이다. 사실 참다운 신뢰는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표적이나 이적이나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어떤 증거를 찾을 수 있을까 하여 주변을 돌아보는 것은 의심인 것이다. 종종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며 세상의 상도(常道)와는 다른 것을 행하는 것이다. 신앙인은 기꺼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순종한다.


복습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삶을 연구해 오고 있다.

1. 아벨

아벨은 하나님께 질문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셨으며 그것을 드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래서 아벨은 이유도 묻지 않고 그것을 행했다.

2. 에녹

에녹은 하나님께 질문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에녹아, 세상으로부터 떠나 나와 동행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는 그대로 행했다.

3. 노아

노아는 하나님께 질문하지 않았다. 그는 비록 120년 동안이나 사막가운데서 배를 지으며 보내는 것이 대단히 기괴하게 보이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했다. 그가 그렇게 하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 일을 하도록 말씀하셨으며 그것이 그가 필요로 하는 전부였기 때문이다.

4.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께서는 ”일어나 여기를 떠나라.

나는 네가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네가 결코 받지 못했던 한 약속을 너에게 주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일어나서 떠났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떠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으며 단순히 순종했다.

5.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

이 사람들은 인간사의 순탄한 과정을 거부하고, 아무런 질문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으며, 자신들의 희망을 두었던 약속을 결코 보지 못하면서도 믿음 안에서 죽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실행하실 것이라고 믿으면서 죽었다.

6. 모세

모세는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애굽의 향락과 재물을 떠나 하나님의 백성에게로 내려가서 그들을 인도하라고 말씀하셨다. 모세는 하나님께 질문하지 않고 즉시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을 행하였다.


당신은 ”이러한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께 자신들을 맡겼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그들은 그와 같이 하나님을 믿었습니까?”라고 반문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하여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 생활은 올바른 신학에 기초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행하는 것은 아마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것은 이상하거나 기묘하거나 고통을 주는 것일 수도 있으며, 세상이나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의 분리를 뜻할 수도 있으며, 당신의 인생의 모든 야망과 꿈들을 포기해야 될지도 모르며, 심지어 당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에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정말로 믿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믿음은 단순하게,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에 근거한다. 이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신뢰했던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데에 있다. 그 예로써 모세는 ”보이지 않는 자를”(히 11:27 하반절) 보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행하였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그분의 속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믿음의 용사들은 주권적이시며 사랑이 풍성하시며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그렇게도 고상하고 고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그분의 말씀대로 그분을 붙잡고, 비록 그 말씀이 종종 평범하지 못하며 그들의 상식과는 정반대가 되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삶을 그 말씀에 의지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말씀하셨다는 이유로 단순하게 그분께 순종했다. 그런데, 당신이 어떠한 것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할지라도, 당신의 믿음이 하나님께 대한 당신의 견해에 기초한다는 것만은 알아야 한다. 만일 당신의 믿음이 적합하지 못하다면, 성경으로 돌아가서 당신이 모시고 계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찾아보라. 그리할 때 당신의 믿음은 성장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에 관한 많은 것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믿음의 삶(아벨), 믿음의 발걸음(에녹), 믿음의 사역(노아), 믿음의 모범(아브라함), 믿음의 승리(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 그리고 믿음의 결단(모세)을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이 모든 것의 절정인 믿음의 용기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믿음에 대한 진짜 시험은 용기에 대한 것이다. 재난과 시련 그리고 고통과 직면해서도 믿음이 드러날 때, 비로소 그 믿음의 참된 여부가 증명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30-40절에서 믿음의 절정을 볼 수 있다. 그 정점에서 믿음은 세 가지 일을 행하는 용기를 가진다. 즉, 싸움에서승리하는 용기, 고통 가운데서도 인내하는 용기, 구원을 기대하는 용기가 그것이다. 이제 이것들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싸움에서 승리하는 용기(30-35 상반절)


신자(信者)의 삶에는 항상 싸움이 있으며, 우리가 직면하는 고통과 싸움에 도전하기 위해서 정말로 우리가 지니고 있어야 할 유일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인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승리가 30-35 상반절에서 우리에게 예시되어진다.


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들(30절)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1. 그들의 장애물


1) 성(城)

이곳에서 사용된 ”성(城)”이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테이코스」(tei-chos)로서 그 성(城)의 견고한 외벽을 뜻한다. 이 성벽은 대단히 두터워서 그 위로 두 대의 병거가 나란히 지나갈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거대한 성벽이었는가!

2) 입지 조건

여기까지 계속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에서부터 모세까지 이르는 위대한 믿음의 실례(實例)들을 연대기적인 방법으로 인용해 오고 있다. 이제 그는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에 도착했을 때 마주쳤던 첫번째 장애물이 여리고였음을 보여 준다. 여리고는 가나안 사람들이 자신들의 땅을 지키기 위하여 세운 전방의 요새였다. 그것은 요단 강을 바로 건너 남부 이스라엘의 황량한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그 성(城)의 입지 조건이 그와 같았으므로 요단 강을 건너오는 사람들은 거대한 여리고 요새로 말미암아 즉시로 차단되곤 했던 것이다.

3) 부정적인 보고

이스라엘 백성이 마주쳤던 또 다른 장애물은 그들이 가나안 백성들에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두려움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수년 전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하여 보냈던 자들에게서 받은 그 야비한 보고에 근거한 것이었다. 즉, 그들은 돌아와서 ”이 땅은 잊어버리십시오! 우리가 이 땅을 정복할 방법은 없습니다. 저 사람들은 너무나 커서 저들 앞에서 우리는 메뚜기와 같이 보입니다”(민 13:33 참조)라고 말했다. 당연히, 이러한 말은 수백 년 간이나 기다려 왔으며 40년 간이나 사막을 방랑해 온 그들에게는 너무나 실망되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제는 그들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마저 죽었고 모든 것이 비참하게만 보여졌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그들을 맡아 인도하여 요단강을 건너 약속된 땅에 들어오게 하였고 거기에서 그들이 여리고 성(城)과 마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리고는 그들이 그 땅에 들어가는 데 있어서 첫번째 중요한 장애물이었다. 그들의 믿음의 용기가 즉시로 시험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어떤 자들이 여리고 성(城)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그 땅을 정말 우리에게 주실까? 우리는 여기서 군대도...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여기에 한 무리의 보이스카우트 유년 대원들을 제거하기에도 충분하리만큼 조직되지 못한 채 40년 간이나 사막을 유랑해 온 노예 떼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그러한 모습으로 한 성(城)에 마주쳤던 것이다. 그 성(城)은 성벽이 둘려있었으며 성문을 잠그고 수비를 강화하고 있었기에, 그 성(城)을 정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보여졌다. 그러나, 여리고성(城)은 약속된 땅으로 가기 위한 관문이었으므로 그들은 그 성을 정복해야만 했다.

당신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가? 그 성(城)이 무너졌던 것이다. 게다가, 그 성(城)은 싸움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무너졌던 것이다.


2. 그들에게 하달된 명령

그들의 전투 계획은 이러하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백성들을 대열을 짓게 하여 그 성(城)을 한 바퀴 돌고 나서 그들의 장막으로 돌아오게 하여 그렇게 6일 동안 행한 후, 7일째에는 그 성(城)을 일곱 바퀴 돈 후 그들의 양각나팔을 불고 크게 소리치면 ... 그 성벽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그 계획을 말했을 때, 이스라엘 전체 진영에서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굉장했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 계획을 따르는 데에는 굉장한 믿음이 필요했다. 그 이유는 첫째로 그 계획이 전혀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는 데 있었으며, 둘째로는 가나안인들이 성벽 위에서 그들을 향하여 돌을 쏘거나 아니면 던지거나 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어리석게 보여졌다. 만일 당신이 첫째 날에 나가는 것이 힘드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면 다섯째 날이나 여섯째 날에는 얼마나 어려웠었겠는가를 상상해 보라.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행함으로써 순종했다.


유의 사항 : 성경 전체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랑을 꺾으시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가를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어리석게 보이는 방법으로 여리고 성(城)을 무너뜨리심으로써 그 성(城)의 자랑을 꺾으셨다. 한때 하나님께서는 골리앗이라는 거인을 작은 소년을 보내어 쓰러뜨리셨으며, 모든 블레셋 군사들을 도망치게 하셨던 것이다. 이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이 여리고 성(城)을 공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할 것이라고 생각했던(분명히 조금은 있었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수를 쳐서 꼼짝 못하게 하시고는 ”너희가 그 성(城) 주위를 돌기만 하면 내가 그 성(城)을 쓰러뜨리겠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 성(城)은 종이 집과 같은 것이었다.


3. 그들의 순종

그들은 사막에서 노출되어진 채 요단 강과 여리고 성(城) 사이에 끼인 채로 그 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갈 장소가 없었다. 그들이 요단 강을 건넜을 때 그들은 자신들 뒤에 남은 모든 다리들을 태워버렸으며, 그들은 철수하기 위하여 예비된 집도, 방어를 위한 요새도 없는 상태로, 즉 차단된 채로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믿음으로 살아야만 했다. 갈 수 있는 길이라고는 비록 그 장애물이 너무 커서 희망이 없는 것으로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앞으로 전진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고 그 성(城)을 6일 동안 하루에 한번씩 돌면서 행진했으며 제 7일에는 일곱번 돈후 크게 소리쳤던 것이다. 소리를 지른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 같으면 얼굴을 숙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목청을 다해서 소리쳤고 그 성벽은 무너졌다.

믿음이 역사하는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믿음은 의심없이 하나님을 받아들임으로써 장애물을 극복한다. 하나님께서 ”나는 이 일을 이러한 방법으로 행하겠노라”고 말씀하실 때,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것을 행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의 네 가지 등급


믿음에는 네 가지 등급이 있다.


받는 믿음 - 아무것도 없는 한 거지가 예수 그리스도께로 와서 구원을 얻을 때가 바로 이 경우이다(요 1:12참조).

기대하는 믿음 -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을 이루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믿음이다(딤후 1:12 참조).

위험을 무릅쓰는 믿음 - 이것은 불가능한 어떤 일을 하나님을 위하여 감행하는 믿음이다(지금 살펴보고 있는 구절).

안심하는 믿음 -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그대로 앉아 기다리는 믿음이 이것이다(시 37:7-9 참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좋은 실례(實例)를 보여 준다. 그리스도인은 여리고와 같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 속으로 뛰어들게 되는 경우가 없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을 살아가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들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있어서는 사소한 것이며, 믿음 앞에서는 죄와 같이 날아가 버릴 것이다. 당신의 여리고가 무엇이든간에 그것을 무너뜨리기 위해 하나님을 믿으라.


Ⅱ. 라합(31절)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1. 그녀의 배경


어떻게 기생이 믿음의 용사들과 함께 영예의 전당에 들어갈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은 흥미롭지 않은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행위에 의하여 구원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기생이었을 뿐아니라 이방인이었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은 그녀가 가나안사람이었다는 것이며, 또 이보다 더 나빴던 것은 그녀가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멸망시키려고 하셨던 종족 중 하나인 아모리 족속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선 얼마나 큰 은혜를 베푸셨던가! 그분의 긍휼은 그것을 받아들일 모든 이들에게 개방되어 있으며, 구약에서조차도 하나님의 백성에는 항상 이스라엘 뿐아니라 이방인도 포함되어 왔다.


2. 그녀의 거주지


31절이 ”순종치 아니한 자”라고 언급한 바를 주목하라.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여리고 성(城)의 모든 백성들인 것이다. 당신은 ”그들이 무엇을 믿지 않았습니까?”라고 반문할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당신은 ”그렇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말입니까?”라고 다시 반문한다. 물론 그들은 들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그 땅을 주셨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어떻게 그 멧세지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은 분명히 들었다. 내가 이와 같이 말하는 이유는 31절에서 그들이 ”순종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용된 헬라어는 「아페이데오」(apeithe )이다. 불순종하였다는 말은 그들이 어떤 명령을 들었으나 그것에 순종하지 않았다는것을 뜻한다. 내가 믿는 바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 땅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분께서 그들을 멸망시킬 것이지만 그분의 긍휼 가운데로 돌아서는 모든 자들은 놓임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점잖게 표현하자면, 가나안 사람들은 타락한 백성이었다. 그들은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악한 백성이었다.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 주는 바에 의하면, 그들이 건물을 지을 때 그들은 살아있는 아기들을 취하여 항아리 속에 넣고는 그 위에 벽을 쌓았다. 그들은 변태적이라서 말할 수조차도 없는, 모든 종류의 방종과 잔악한 행위들에 연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성(城)을 벌하셨던 것이다.


3. 그녀의 믿음


하나님께서는 믿었던 한 사랑스러운 여인과 그녀의 집에 속한 모든 가족을 구해 주셨다. 31절은 그녀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다”고 말한다. 이곳에서 사용된 헬라어는 「데코마이」(dechomai)로서 ”환대하며 영접하다”는 뜻이다. 이 사건에 관한 기사는 여호수아서 2장과 6장에 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여호수아는 요단 강을 건너기 전에 그 땅을 살펴보기 위하여 두 명의 정탐군을 보냈다. 그들은 여리고 성(城)에 있는 라합의 집에 머물렀다. 그들이 거기에 있는 동안 여리고 왕이 두 명의 이스라엘 정탐군이 라합의 집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잡기 위해 몇 사람을 보냈다. 그 병사들이 도착했을 때, 라합은 그들을 숨기고, 그 병사들은 엉뚱한 곳을 찾도록 한 후, 정탐군들이 안전히 피신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녀가 이와 같이 행하였던 이유가 2장 9-11절에 나온다. 이것은 그녀가 두 정탐군에게 한 말이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라합은 참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리고를 이길 수 있는 승산은, 육신적으로 말하자면, 사실상 백만분의 일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하여 말씀하셨던 사실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편에 서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 정탐군들을 숨기는 것은 용기 있는 믿음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하여 그녀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정탐군들을 믿는다는 것도 믿음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만일 너희가 나와 나의 가족을 구해 주겠다고 약속한다면 나는 너희를 보호해 줄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들이 약속을 지킬 것임을 그녀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녀는 커다란 용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4. 그녀가 받은 축복


하나님께서는 여리고의 기생을 영화롭게 하셨다. 무엇보다도 그분께서는 그녀를 구원하심으로써 영화롭게 하셨다. 또한 그녀를 메시야의 반열에 있게 하심으로써 영화롭게 하셨다. 즉, 라합은 다윗의 증조모 룻의 남편이 된 보아스의 어머니가 되었던 것이다. 기생 라합은 메시야의 반열로 완전히 옮겨졌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Ⅲ. 기드온(32절)


기드온에 관한 기사는 사사기 7장에 기록되어 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사사였는데, 하나님께선 135,000명(삿 8:10 참조)이나 되는 미디안 군대를 쓸어 버리라는 명령을 하셨다. 기드온은 그의 군사로서 32,000명을 모집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너무 많으니 수를 줄이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군대를 조금씩 줄여 가시자 거기에는 300명 ... 단지 300명만이 남게 되었다! 더구나 그들은 최고의 씨름꾼이나 강한 자나 가장 무기를 잘 사용하는 자들이기에 선택된 것이 아니었고, 물을 마시는 방법으로 말미암아 택하여졌다.


일단 기드온이 자신의 군사 300명을 모집하자 주(主)께서는 그에게 이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미디안 진지를 포위하라고 말씀하셨다(300명 정도로는 이 일도 대단한 노력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분께서는 기드온에게 각 사람은 횃불과 항아리 그리고 나팔을 각각 하나씩 그들의 ”무기”로 지니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후에는 하나님께서 ”미디안 군대가 있는 계곡 주위의 언덕에 서서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뜨리고 횃불을 비추라 그리하면 모든 미디안 군대가 도망치며 서로 죽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가? 바로 그와 같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뜨리고 횃불을 비추자 미디안 군사들은 겁에 질려 달음질하였고 서로가 서로를 죽였던 것이다(120,000명). 남은 자들은 모두 도망쳤다.


기드온이 명령받은 일은 믿음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으나... 그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는, 만일 그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맞붙어 싸울 수 없었을 어떤 것과 맞붙어 싸웠던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보는 바와 같이 믿음의 절정은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한 용기를 가지는 것이다. 어떠한 적도 이길 수 없을만큼 크지는 못한 것이다.


Ⅳ. 바락(32절)


바락에 관한 기사는 사사기 4장에 나타나 있다. 바락은 10,000명을 거느리고 가나안 연합 전차 부대의 총사령관인 시스라의 강하고 견고한 군대를 대항하여 싸우는 일을 맡았다. 승산은 거의 없었다. 사실상 바락이 시스라를 맞설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여선지이며 사사인 드보라가 바락에게 와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나안을 이기고 승리하도록 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바락은 하나님을 믿고 군사를 모아 전쟁터로 나갔다. 만일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었다면 그가 행했던 일을 행하는 것은 바보짓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었으며 전쟁에서 승리했던 것이다.


Ⅴ. 삼손(32절)


당신이 사사기 13-16장으로 돌아가서 그 기사를 읽어 보면 삼손이 위대한 신앙인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이 힘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았으나 또한 그의 힘의 근원이 하나님이심도 알았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으며 그분께서 그가 힘을 필요로 할 때마다 그 힘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을 믿었다. 이것은 그가 맨손으로 사자를 죽임으로 명백히 드러났다(삿 14:5-6).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블레셋에 대항할 이스라엘의 용사가 되도록 부르셨다.

그의 생애에서 들릴라와의 사이에 있었던 가공할 비극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여전히 위대한 믿음의 삶으로 나타난다. 그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았기 때문에 적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예(例)를 들어 보자.


1. 사사기 15장 1-5절

그는 블레셋 사람들의 밀밭을 태워버렸다.

2. 사사기 15장 6-8절

그는 자기 아내와 장인을 죽인 블레셋인들을 ”크게 도륙했다.”

3. 사사기 15장 14-16절

그는 나귀 턱 뼈로 블레셋인 1,000명을 쳐죽였다.

4. 사사기 16장 2-3절

가사 사람들이 그를 그 성(城)에 가두려고 했을 때 그는 성 문짝들과 두 설주와 빗장을 빼어 산으로 메고 갔다.

5. 사사기 16장 25-30절

그의 마지막 믿음의 승리는 눈 먼 죄수로 있었을 때 일어났다. 그는 그가 잡혀 있었던 거대한 블레셋 신전을 무너뜨림으로써 그가 살았을 때에 죽였던 것보다 더 많은 블레셋인들을 죽였다. 사사기 13장 5절에 의하면 삼손은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정복하기 위하여 자신을 부르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을 믿었으며 항상 절대적이며 완전한 용기를 가지고 블레셋 군대와 대적했던 것이다. 그의 용기는 자기 자신의 힘에서 나온 것이었던가? 그렇지 않다. 그의 용기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 일을 행하기 위한 능력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사실에 있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에 관하여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자신들의 전쟁에 나갈만큼 충분한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비극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삶이 강화될 때까지 기다리며 망설이고 있다.


Ⅵ. 입다(32절)


사사기 11장 32-33절에서 우리는 엄청난 싸움에 직면했으나 하나님을 믿고 승리를 쟁취한 입다의 용기를 보게 된다.


Ⅶ. 다윗(32절)


다윗은 엄청난 전쟁들을 마주하며 그의 전(全) 인생을 보냈다. 그 모든 것은 그가 골리앗을 대항하여 싸웠던 때로부터 시작되었다. 다윗과 같은 소년이 골리앗과 같은 거대하고 경험이 많은 전사(戰士)에 대항하여 승리를 얻을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믿었다. 그가 골리앗에게 한 말을 살펴보자.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삼상17:46).

도대체 그가 어디에서 이러한 용기를 얻었을까? 그는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다.


Ⅷ. 사무엘(32절)


사무엘은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어떠한 전쟁도 하지 않았으나 우상과 부도덕에 대한 싸움을 싸웠다. 그는 부패한 사회의 한 가운데에 서서 진리를 말해야만 했다 ...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그의 모든 백성들이 부도덕한 족속으로 전락할 때 그의 확신에 찬 용기를 보여 주어야만 했었다.


Ⅸ. 선지자들(32하반절-35상반절)


여기에는 사무엘로부터 세례(침례) 요한까지의 선지자들에 관한 묘사가 있다. 그들은 기꺼이 용기있게, 또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들을 받아들였으며, 철저하게 혼자 서서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강대한 세력들을 대적했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굴종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승리하였다. 33-35상반절에서 이 선지자들의 믿음이 증시된다.


1.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이겼다”라는 말의 헬라어는 「카타고니조마이」(katdgonizomai)로서, ”싸워서 쓰러뜨리다” 혹은 ”극복하다”를 뜻한다. 그들은 승리한 사람들이었다.

2. ”의(義)를 행하기도 하며\문자적으로는 그들이 공의를 행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압박들에 대항하여공의를 유지한 지도자들을 언급한다(삼하 8:15).

3. ”약속을 받기도 하며\하나님께서는 모든 선지자들에게 약속을 주셔서 그들에게 승리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순종하여 승리를 얻었다.

4.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이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사자굴 속에 던지워지는 것을 뜻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행하였던 다니엘을 표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셨던 것이다(단6:16-22).

5.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이것은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를 표현하는 것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바벨론의 신상에 절하기를 거절하였기에 맹렬한 풀무불 속에 던져졌던 사람들이다(단 3:8-28).

6.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다윗은 골리앗과 사울의 칼을 피했으며... 성경에는 그밖에도 많은 예(例)가 있다.

7.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와 그의 후손들이 신실하고 온순하게 그리고 의롭게 행하는 한 왕위에 오를 후손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왕상 2:4). 그런데 히스기야 왕이 죽어가고 있었을 때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는 열왕기상 2장 4절의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여 왕위를 상속할 자를 위하여 기도드리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셨으니, 히스기야는 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었고 한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던 것이다(왕하 20:1-6, 21/ 21:1 참조).

8.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이에 관한 실례(實例)는 너무도 많아서 나는 큰 전쟁에서 승리한 모든 선지자들을 열거할 수조차도 없다.

9.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엘리야는 사렙다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렸다(왕상 17:17-24). 엘리사는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렸다(왕하 4:18-37). 이 두선지자들의 믿음은 죽음으로부터 그 아이들을 도로 데려왔던 것이다.


믿음의 용기는 싸움에서 승리하는 용기 뿐아니라 고통 가운데서도 인내하는 용기도 있다.



고통 가운데서도 인내하는 용기(35 하반절 - 38절)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싸움에서 승리하게 되도록 계획하지만은 않으신다. 때로는 그 싸움이 지속되도록 계획하신다. 용기있는 믿음의 두번째 특징은 믿음의 용기가 고통 가운데서도 지속된다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믿음의 최고봉이다. 승리하는 믿음은 위대한 믿음이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도 지속되는 믿음은 더욱 위대하다. 이러한 종류의 믿음은 고통 가운데서도 한 마디 불평도 없이 오히려 그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으며 계속되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의 실례(實例)들이 35하반절에서부터 시작된다.


1. ”...악형을 받되\”악형을 받다”라는 말의 헬라어는 「툼파니조」(tumpaniz )이며 문자적으로는 ”양수차(발로 밟는 물레방아의 일종)를 가지고 고문하다”의 뜻이 있다. 이것은 바퀴 모양으로 된 틀로서 죄수들은 그 위에 눕혀진 후 곤봉으로 두들겨 맞도록 되어 있었다.

2.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을 부인하였더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텐데 그들은 오히려 고통을 택했다.

3. ”...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당신은 ”무엇이 그들에게 인내하고 자신들의 믿음을 부인하지 않는 용기를 주었습니까?”라고 반문할 것이다. 그들은 미래에 있을 어떤 영광스러운 것에 시선을 두었던 것이다. 그들은 현재라는 제단 위에 결코 미래를 희생시키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급이 충만하기를 원했기에 악형을 참았던 것이다.

4.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때때로 우리에게 닥쳐오는 가장 어려운 억압은 비판을 받는 데서 오는 심적고통이다. 예레미야는 이것을 참아내었다(렘 20:7/ 왕하2:23/ 대하 36:16).

5. ”...채찍질 뿐아니라\이것은 거친 채찍으로 채찍질하는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이것 역시 체험했다(렘 20:2).

6.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이러한 사람들의 예(例)로서 요셉(창 39:20), 미가야(왕상 22:27), 하나니(대하 16:10), 그리고 예레미야(렘 20:2/ 37:15/ 38:6)가 있다.

7. ”돌로 치는 것\돌로 침을 당했던 구약의 신앙인은 스가랴였다(대하 24:20-22).

8. ”...톱으로 켜는 것\전설에 의하면 이사야는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했다.

9. ”...시험\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하나님을 부인하라고 억압하는 고문에 대한 언급이라는 설명이 아마도 가장 타당할 것이다. 그들은 거의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을 부인하라는 시험을 받았다.

10. ”...칼에 죽는 것\문자적으로는 그들이 ”칼로 베임으로써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구약에서 신실한 몇몇 사람은 그들이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으려고 한까닭에 도륙을 당하였다.

11.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으니 ...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바꾸어 말하자면, 그들은 가난했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인하여 그들 중 몇몇은 세상이 줄 수 있었던 모든 것을 저버려야만 했다. 그들은 너무도 빈곤하게 살았다. 그들이 자신들의 몸을 감쌀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양과 염소의 가죽이었다.

12.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하나님의 백성에게 닥쳐 온 가공할 고통은 그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더해 주었으며 ... 세상은 그들과 함께 있기에 적합하지 못했다.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서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의 실상은 그들이 너무나 훌륭하여 세상에 있을 수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그것을 보상해 주실 것이다. 그들은 그곳에서는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이다.


로마서 8장 18절에서 바울은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하고 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3-4절에서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신은 베드로 당시에 자신들의 소유가 되어질 것에 대하여 즐거워하며 고난받고 있었던 신자들 가운데 몇 사람을 상상할 수 있는가? 이 세상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기 위한 믿음의 용기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감당치 못한다. 이는 그들이 너무도 훌륭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안에서 용기와 믿음을 가지고 고통을 참으며...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믿음의 절정인 것이다.


이와 같이 참된 믿음은 싸움에서 승리하며 또한 고통 속에서도 참는 용기를 지니고 있다. 세째로 참된 믿음은 구원을 기대하는 용기이다.


구원을 기대하는 용기(39-40절)


Ⅰ. 하나님의 약속(39절)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아벨로부터 사무엘까지 모든 사람은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고통이 끝나게 될 어느 날 그들을 구원해 주시며 또한 그들에게 상주실 것임을 믿었다. 그런데 39절에 언급된 약속은 무엇인가? 그것은 땅에 관한 약속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벨과 에녹에게는 그 약속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믿음의 용사들 가운데 누구 하나 받지 못했던 약속이 무엇인가? 그것은 구원자에 대한 약속이며 ...메시야에 대한 약속이며, 한 언약을 완전히 이루실수 있다는 약속이며 ...사람들을 전체로 그리고 완전하게 하나님 앞에 데려다 놓을 수 있다는 구원의 약속인 것이다. 그들은 메시야를 결코 알지 못하였으나 그분께서 오실 것을 믿었다.


베드로전서 1장 10-11절에서는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들은 언제 어떻게 구원자가 오실 것인가를 찾고 있었다는 말이다. 고통 가운데서도 그들은 구원을 기대하는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구원의 약속을 믿었으나 그것을 받지는 못했다.


Ⅱ. 하나님의 예비하심(40절)


”...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브리서에서 ”더 좋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새언약이다. 그들은 옛 언약 안에서 결코 약속을 찾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항상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으므로 완전히 하나님께 접근하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들은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제사를 드려야 했으므로 완전한 용서로부터 오는 양심의 자유를 결코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제사장들이 계속하여 죽었으므로 완전하고 높으신 제사장을 결코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좋은 것, 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할” 것을 제공하셨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들이 완전함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를 기다려야만 했다는 것이다. 새 언약은 옛 언약이 그들에게 줄 수 없었던 것을 주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 모든 사람들은 용기있게 믿음을 좇아 살았다. 그들의 믿음에 있었던 용기로 그들은 싸움에서 승리하였고, 고통 속에서도 인내하였으며, 오는 구원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결코 보지 못하였으나 하나님을 믿었고, 믿음으로 그것을 얻었던 것이다. 세상은 이 사람들을 감당하지 못했다. 나는 우리도 이와 같이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라는 말을 듣게 될 삶을 살기를 위해 기도드린다.



히브리서 12:1-4 /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서론


히브리서 12장 1-4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主)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우리는 이 간략한 본문 안에서 비유적인 표현을 발견하게 된다. 훌륭한 가르침은 비유적인 표현의 효과적인 사용으로 전해진다. 신약에서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많은 원리들을 이와같은 것을 통하여 전달하신다.


1. 전쟁(딤후 2:3/ 엡 6:10-17)

2. 씨름(엡 6:12)

3. 권투(고전 9:26 /딤후 4:7 상반절)

4. 종(갈 6:17/ 롬 1:1)

5. 농사(딤후 2:6)

6. 결혼(롬 7:4)

7.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롬 8:14-17/히 12:6-7/요일 3:1-2)

8. 경주(고전 9:24-27 /갈 5:7/ 빌 2:16/ 딤후4:7하반절)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삶은 많은 것들에 비유되어진다. 그러나 히브리서 12장 1-4절의 본문은 우리로 경주에 관한 비유를 살펴보게 한다. 이 구절을 분석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경주에 관한 여러 가지 형태를 생각해 볼 것이다. 즉 경기, 격려, 장애물, 본보기, 종결, 권면에 대한 것들이다.


경기(1 하반절)


”...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


Ⅰ. 참가자



1. 히브리서에서의 ”우리”는 누구인가?

근본적으로 이 질문은 히브리서 기자가 그리스도인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가 아니면 유대인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광범위하게 해석되어지며 유대인인 모든 독자들에 대한 표현인 것이다. 그런데 나는 히브리서의 기자가 유대인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고 생각된다. 이것 외에 많은 의심되는 점들이 있다. 나는 그가 누구였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가 유대인들에게 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서신은 히브리인들에게 보내졌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 개진은 유대주의에 대한 이해 위에 세워져 있으며, 그 기자는 기독교적인 의미에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유대주의적인 의미로 평범하게 그의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유대인 독자들을 ”형제들”이라고 칭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인들과 구분하고 싶을 때는 그들을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칭하여 분명한 구분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과 ”무리”라는 술어는 기자가 말하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포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말할 때 ”...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와 ”우리”라는 말이 그의 독자들에 관한 가능한 한 가장 포괄적인 해석과 관련된다면, 우리는 그의 독자들이 누구인가를 이해해야만 한다. 그들은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진다.


1) 유대주의로 돌아가기 시작한 진정으로 구원받은 유대인들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었던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유대인 친구들과 가족들로부터 큰 억압을 당하게 되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비록 그들이 구원받았으나 그들은 옛 관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여 옛 절기들을 지키며, 옛 제사들을 드리고, 옛 제사장들에게 매달려서 옛 성전의 규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따돌림을 받지 않기 위해 유대적인 형식들에로 다시 빠져 들기 시작했다.

히브리서는 원초적으로는 이러한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인 사람들에게 유대주의의 옛 형식에 빠지지 말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의 자리를 지키라고 말해 주기 위하여 씌어졌다. 이 서신을 통하여 그는 ”당신들은 더 좋은 언약을 가지고 있으며 더 좋은 결과들을 가져올 더 좋은 제사를 드릴 더 좋은 제사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 서신의 주된 지적인 것이다.



2) 지적(知的)으로는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확신하나 발설하기는 주저했던 유대인들

이 두번째 유대인 무리들은 복음이 진실됨과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지적(知的)으로는 확신하였으나 결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형세를 관망하며 그리스도의 편으로 넘어오기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렇게 행했던 사람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즉, 그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졌으며 유대인으로부터 배척을 받았으며 사로잡히고 배신자라고 낙인찍히게 되는 등등의 일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을 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이 서신에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촉구 문구는 관망만 하고 앉아 있는 이러한 유대인들에 대한 경고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고들은 자주 ”우리가... 할지니”(4:1, 11, 14, 16 / 6:1 / 10:22-23 참조)라는 문구로 시작된다. 그러므로 ”우리가...할지니”라는 구절이 히브리서에서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지적(知的)으로는 복음이 진실됨을 확신하나 어떤 개인적인 이유로 인하여 발설하고 싶어하지 않는 이 두번째 범주의 유대인들을 칭하는 것이다.


3) 확신하지도 구원받지도 못했던 반대파 유대인들

이러한 유대인들이 세번째 범주의 독자들에 포함된다.


2. 12장 1절에 언급된 ”우리”는 누구인가?


1) 첫째

첫째로, 나는 그것이 지적(知的)으로 확신한 유대인들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는 ”보십시오. 당신들은 그리스도께로 와야만 합니다. 경주에 참가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삶은 경주이며 당신은 그 안에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올바르게 참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와서 경주에 참가하십시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둘째

둘째로,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만일 당신이 경주하고 있다면 ...그것을 계속하십시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경주를 하다 지쳐 길바닥에 주저앉아 쉬고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으며, 그들은 계속하여 경주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첫째로 그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말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둘째로, 거기에는 믿는 자들에 대한 명령이 있다.


당신은 관망만 하며 앉아 있는가?


당신이 아는 바와 같이, 사람들이 관망하고 앉아 있기란 대단히 쉬운 일이다. 교회에 와서 앉아 경청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지적(知的)으로 그 모든 것이 진실됨을 확인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 중 몇몇은 아마도 기독교를 변증하고 있는 책을 읽음으로써 품고 있던 많은 의혹들을 제거해 왔었을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상담을 해 왔으며, 친구들과 대화해 왔을 것이고, 그것이 실제로 진리라는 것도 알고 있으나, 몇 가지 이유로 그들은 경주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들이 동료들의 억압이나 가족들의 억압을 두려워하기 때문이거나, 그들이 유대인이므로 배척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자신들이 동거하고 있는 여인을 포기해야 될까를 두려워하거나, 도덕적인 자각을 두려워하거나, 아니면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말한다면 그들의 사업에서 도덕성을 유지해야만 할 것임을 깨닫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몇 가지 이유로 인하여 관망만 하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 성령의 말씀은 때때로 이러한 사람들에게 ”경주에 참가하라!”고 하신다.


Ⅱ. 경주의 페이스(pace)


우리는 경주를 하도록 부르심을 입고 있다. 1절에서 ”경주”라는 단어를 주목하라, 이것은 헬라어로 「아곤」(ag n)인데, 여기서 영어의 agony(고통)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바로,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다. 당신은 진정 고통을 원하는가? ”예수를 따르든지” 아니면 ”고통에 참여하라.”


「아곤」이라는 단어는 단거리 경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는 100m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전속력으로 질주하고는 이내 지쳐 헐떡인다. 그러면 그들은 세미나같은 데에 참석하고는 불규칙하게 다시 나아간다. 그것에 싫증이 나면 그들은 대단한 설교를 듣고서 다시 내달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히브리서에 언급된 경주가 아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마라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는 이 마라톤이 「휘포모네」(hupomon )를 가지고 경주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휘포모네」는 ”인내”를 뜻하는 말이다. 즉, 이 경주는 인내의 장거리 경주이지 짧은 단거리 경주가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승리를 향해 인내를 가지고 경주하라는 명령을 하달받았다.


Ⅲ. 준비


인내로써 경주하기 위해서는 훈련과, 강건함, 주의력, 자기 희생과자기 부인이 요구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안연히 쾌락을 누리는 삶이 아니다. 우리는 편하게 꽃침대 위에 뒹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어려운 훈련과 연습이 요구되는 자발적인 자기 희생이 있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군인의 생활인 것이다. 바울은 그의 인생의 마지막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딤후 4:7 상반절) 라고 말했다. 그의 삶에는 위임 명령과 훈련의 의미가 있음이 분명하다. 아모스는 아모스서 6장 1상반절에서 ”화 있을진저 ...안일한 자와...”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안일하고 나른한 삶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전투성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되기 위해서는 약함과 우상 숭배와 게으름과 무지 그리고 죄와 싸우는 전투하는 그리스도인의 면모를 갖추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경주에 참가하고 있지 않다면 그리스도께로 와서 관망하는 태도를 버리고 경주에 참가하라. 당신이 이미 경주에 참가하고 있다면, 그것을 계속하라! 하나님께서는 트랙 주위에 누워 뒹굴고, 전체의 분위기를 혼탁케 하며, 문제를 혼란시키는, 벗어나기 잘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경주는 훈련을 요구하는 인내의 경주라는 것이다.


1. 고린도전서 9장 24-25절

24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나는 이기기를 원하지 않아서, 또는 자신들의 출세에 지장이 있을까봐 자신들의 능력을 다해 일하고 있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 상심하게 된다. 나는 당신에게 촉구한다. 만일 당신이 주일학교 교사라면 당신이 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교사가 되도록 하라. 만일 당신이 성경 공부를 인도하고 있다면 그것을 계속하여 승리하도록 하라. 만일 당신이 가정 주부라면 당신이 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가정 주부가 되라. 만일 당신이 직장인이라면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열심히 일하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의 자세인 것이다. 우리는 훈련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여 경기에서 이겨야만 한다.


바울은 25절에서 다음과 같이 계속 말한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이것은 그가 결코 방종하지 않았으며, 훈련 규율을 결코 깨뜨리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당신은 어떠한 일에 대하여 ”아니오!” 라고 말할수 있어야만 하며 당신 자신을 세상과 정욕으로부터 단절시킬 수 있어야만 한다. 경주를 위한 훈련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가히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바울은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라고 말한다. 우리의 경주가 얼마나 위대한 경주인가?

목회자들이 때때로 나에게 ”어떻게 하루에 4-6시간 동안이나 성경 연구를 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보기도 한다. 많은 경주자들이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하루에 4-6시간 가량을 훈련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나라는 그것보다도 더 무한히 중요한 것이다. 사실 나는 어떤 경주자들보다 더많은 시간을 드려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최선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2. 디모데후서 2장 3-4절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어떤 사람이 군대에 갈 때 그는 자신의 마음 준비와 주변을 정리하기 위해 한 주간 또는 그 이상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그후에 일단 그가 군에 있게 되면 그가 군에 있다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 이유는 군대는 이기기를 바라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살아남고 승리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격려(1 상반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


내가 어렸을 적에 누군가가 이 구절에 대하여 설교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난다. 그는 말하기를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하늘나라에 올라간 모든 구약의 성도들이 여러분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여러분은 거대한 운동장애서 여러분의 작은 경주를 경주하고 있으며 그들은 관중석에 앉아 여러분을 지켜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위의 「구름 같은 증인들」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내가 성경을 연구하면 할수록 이 견해가 더욱더 어리석은 것으로 보였다. 하늘나라에 간 사람들은 나를 바라보는 데에는 흥미가 없다. 그들의 눈은 하늘나라의 신비로운 것들에 고정되어 있다. 이 구절은 경주하라는 격려이며,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그 경주를 경주하는 것이 위대한 것임을 증거해 온 사람들을 표현한다.


Ⅰ. 증인들



당신은 1절 초두에서 ”그러므로”를 보고 있는가? 이 말은 무엇에 대한 것인가? 이 말은 우리를 11장에 되돌아 가도록 한다. 11장에서 당신은 무엇을 살펴보았는가'? 그것은 믿음으로 산 모든 성도들의명단이었던 것이다. 즉, 아벨(4절), 에녹(5-6절), 노아(7절), 아브라함(8-19절), 이삭(20절), 야곱(21절), 요셉(22절), 모세의 부모(23절), 모세(24-29절), 여호수아와 이스라엘(30절), 라합(31절), 기드온(32절), 바락(32절), 삼손(32절), 입다(32절), 사무엘(32절), 다윗(32절), 선지자들(32절) 등등이 그들이다. 이들이 바로 증인들이다.


Ⅱ. 그들의 승리에 대한 증거


11장에서 증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믿음의 삶은 승리의 삶입니다. 우리는 싸움터와, 사자 굴과, 칼과, 전쟁과, 핍박과, 계속되는 위험을 통하여 그 경주를 계속하였습니다. 그것은 승리하는 믿음의 삶이며, 우리는 당신이 인내로써 그 경주를 경주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살아있는 증인들이며, 하나님에서 마지막에는 당신을 존귀하게 하실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그들은 경주를 경주하였으며 승리에 대해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 허다한 ”구름 같은 증인들”은 우리에게 ”믿음의 삶을 경주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12장 1-2절은 단순히 11장의 연속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믿음의 삶, 즉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경주하였으며 위험을 뚫고 지나가 승리하였는가 하는 것을 기초로 한 하나의 권고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러한 증인들의 증거 위에서 경주를 경주해야만 하는 것이다.

11장에서 거론된 믿음의 선진(先進)들은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을 믿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인들에게 ”만일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관망만 하는 채로 있다면, 믿음으로 살면서 위대한 승리에 대한 생각으로 위험들을 통과했던 여러분의 선조들의 역사를 상기시켜드리지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항상 승리하실 것이므로 그들의 믿음을 하나님께 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증거로 11장의 믿음의 용사들을 들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을 느끼고, 마음에 의심을 가질 때가 바로 인내와 참음으로 경주를 경주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하시고 승리를 주셨던 사람들의 삶을 돌이켜 보아야 할 시간임을 당신은 알아야만 한다. 이것은 내 심령에 격려가 된다. 왜냐하면 어제의 하나님은 오늘의 하나님도 되시며(히 13:8),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동일한 승리를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장애물들(1하반절)


”...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당신이 경주할 때 알아야 하는 것은 가벼운 차림으로 경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습할 때에는 발목에 무거운 것을 달고서 두터운 옷을 입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주에 참가할 때에는 그것들을 모두 벗어버려야만 한다. 당신은 짐을 벗고 가장 가벼운 차림으로 경주해야 한다. 믿음의 경주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를 뒤쳐지게 할 모든 것을 벗어버려야 한다. 당신은 ”1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무거운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Ⅰ. 무거운 것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우리를 내리누르고 방해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다. 물질주의, 성적 타락, 야망같

은 것들이 분명히 경주께서 우리를 억누를 것이지만 내가 믿기로는 히브리서 기자가 생각하는 무엇이 있었던 것 같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께로 오는 것을 방해했던 가장 무거운 짐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율법주의였던 것이다.

죽은 행위들이 이 유대인들 가운데 만연하여 있었다. 그는 경주에 참가하여 경주하라고 그들에게 말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모든 율법주의와, 의식(儀式)과 제사와 관례 그리고 그들이 유대교에서 지켜 왔던 모든 규례들을 가지고 경주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모든 잡동사니들을 버리고 믿음의 경주를 경주하십시오, 믿음을 좇아 생활하며, 행위를 좇아 살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당신이 아는 바와 같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행위를 좇아 살려고 한다. 그들은 만일 그들이 어떤 일을 행하면 하나님께서는 ”오! 그것 참 기특하구나... 너는 성경 공부에 나갔고 성경을 읽었으며 교회에 나갔구나...”라고 말씀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작은 컴퓨터에 우리가 행하는 모든 사소한 선행(善行)을 기록하고 계신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저 위에서 ”만일 네가 새벽 기도를 드린다면 너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그렇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그들은, 만일 매 주일마다 교회에 가고, 개를 발로 차지 않으며, 이웃에게 친절하다면 자신들이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러한 것 모두가 좋은 것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을 구하거나, 다른 사람의 영혼을 안전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만일 이러한 일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사람의 사랑에 찬 헌신에서 넘쳐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위대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선행에 의지하고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으니, 이러한 것은 유대의 율법주의 대신에 기독교의 율법주의가 대치된 것에 불과하다.



Ⅱ. 죄


1절에서 언급된 두번째 장애물은 ”얽매이기 쉬운 죄”이다. 이 죄는 무엇인가? 도대체 믿음에 대하여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한 가지 죄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의심이다. 믿음의 삶을 망쳐버리는 죄는 의심이다. 당신은 ”오! 하나님 당신은 저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실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안절부절하게 된다면, 그 때마다 당신은 의심하는 자리에 빠지지 않는가?


의심에 대항하여 우리를 방어할 것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6절에서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라고 말한다. 로마의 커다란 방패인 「투레온」(thureon)의 크기는 폭이 0.7m에 길이가 1.4m나 되었으며 기름에 적신 두꺼운 가죽으로 치워져 있었다. 이 가죽에 박히는 어떠한 불화살(화전)도 즉시로 꺼져 버렸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방패는 믿음이다. 사단이 유혹의 불을 던질 때 우리는 믿음의 방패로 그것들을 꺼버리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는 ”사단아, 너는 엄청난 거짓말장이이다. 네가 말하는 것은 한 마디도 참된 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모두가 참된 것이니 나는 하나님을 믿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당신이 죄를 범할 때마다 당신은 하나님을 믿는 대신에 사단을 믿었던 것임을 알고 있는가? 사단이 광야에 계신 예수께 나타났을 때 예수께서는 누구를 믿으셨던가?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범죄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당신은 모든 죄는 불신앙의 행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믿음의 경주를 방해하는 한 가지 죄는, 하나님보다는 오히려 마귀를 믿는 행위인, 의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여러분의 율법주의와 의심을 버리고,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동일한 믿음의 삶을 살았으며 동일한 경주를 경주하여 승리하였음을 깨달으며, 확신을 가지고 이 경주를 경주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본보기(2 상반절)


”... 믿음의 주(主)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Ⅰ. 그리스도의 믿음


그리스도는 가장 위대한 믿음의 본보기가 되신다. 빌립보서 2장 6-8절은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종이 되셨으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던(시 16:10) 하나님을 믿으셨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셨고, 비록 예수께서 세상의 죄악을 짊어질지라도 구속자가 되어 무덤에서 일어날 것이며 세상이 있기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곳으로 돌아갈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십자가 상에서 죽으셨던 것이다.

그분은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아버지(성부)를 믿었으며, 그분의 믿음의 행위는 비견될 자가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죄를 짊어지고 아버지(성부)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 고귀하게 되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죽으셨던 것이다.

이것이 가장 위대한 믿음의 행위라고 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가장 중요한 것을 버리셨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만일 여러분이 믿음의 본보기가 필요하다면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예수께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위험을 지나시면서도 하나님을 믿고 있었기에 승리한 분이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Ⅱ. 우리의 초점


”예수를 바라보자”라는 구절을 헬라어에서 보면, ”멀리 예수를 바라보다”가 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초점을 어디에 맞추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예(例)를 들어보자.

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나에게 야구공을 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던 때를 기억한다. 아버지는 나에게 ”공에서 눈을 떼면 넌 공을 칠수가 없다”고 말씀하곤 하셨다. 또한 가끔 우리가 농구를 할 때 아버지께서는 ”농구골대에서 눈을 떼면 골인시킬 수 없다”고 말씀하곤 하셨다. 당신이 차를 운전할 때 적어도 사고를 예방하려고 한다면 ... 차의 본네트(bonnet :엔진 뚜껑-역자 주)에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당신의 눈은 계속하여 차 전방 60m정도에 초점을 맞추어야만 하는 것이다. 당신은 핸들이나 패달을 보아서는 안 되며 당신 앞쪽 멀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동일한 방법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적용된다. 당신의 초점은 반드시 당신 자신에게서 탈피해야 한다. 사실 당신이 눈을 자신으로부터 빨리 테면 뗄수록 당신은 더욱더 나은 사람이 된다. 나는 그리스도인의 자기 분석과 자기 반성에 관한 계속적인 토론에 반대한다. 그러한 장소에서는 항상 우리의 영적 문제들만 분석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피는 데 너무 열중하게 되어서 패달을 보면서 자동차를 운전하려고 애쓰는 꼴이 된다. 당신이 당신 자신으로부터 당신의 눈을 더 빨리 떼서 예수 그리스도께 더 빨리 초점을 맞추면 맞출수록, 당신은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경주를 경주하고 있는 것과 같다. 당신이 경주하고 있을 때 넘어지지 않으려면 ... 발을 쳐다보아서는 안 된다. 이와같이 우리도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완전한 본보기, 완전한 모범, 완전한 예(例)가 되시기 때문이다. 당신은 다른 경주자들을 바라볼 것 없이 ... 오로지 예수만 바라보아야 한다.


2절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믿음의 주(主)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말한다. ”주”(主)라고 번역된 말의 헬라어는 「아르케고스」(arch gos)이며 그 뜻은 ”창조자, 선구자, 지도자, 조상, 상전”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수께서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 혹은 다른 어느 곳에서 나오는 사람들보다 훨씬 위대한 믿음의 총지도자시라는 말이다. ”온전케 하시는 이”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텔레이온」(teleion)인데 ”완성하기까지 수행하다, 완전하게 혹은 철저하게 하다”를 뜻한다. 예수께서는 믿음을 완전하게 지키신 가장 중요한 실례(實例)가 되시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시작으로부터 끝까지 완전한 믿음을 좇아 사셨다.


종결(2하반절)


”...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 경주의 마지막에는 무엇이 있는가? 우리가 승리한다면 무엇을 얻게 될까? 그것은 즐거움과 승리감, 두 가지이다. 즐거움은 주관적인 것이며 승리감은 객관적인 것이다. 즐거움은 당신이 이겼다는 커다란 기쁨의 느낌이며 승리감은 하나님의 실질적인 보상인 것이다. 경주하는 자는 승리의 쾌감에 비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메달이나 트로피 ... 혹은 그밖의 어떤 다른 것이 아니라 그저 이겼다는 기쁨이며 승리의 환희인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하나님의 상급 만큼이나 승리의 기쁨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경우, 그분의 상급은 아버지의 우편에 앉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자(信者)의 경우에는 우리들의 것이 될 수 있는 다섯가지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 즉, 썩지 않는 면류관(고전 9:25), 기쁨의 면류관(살전 2:19), 의(義)의 면류관(딤후 4:8), 생명의 면류관(약 1:12), 영광의 면류관(벧전 5:4)이 그것이다. 당신은 어떨는지 모르겠으나, 만일 그분이 이러한 면류관들을 주고 계시다면 나는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그것들을 얻게 되기를 원한다.

이와 같이 그 경주의 끝에는 두가지 상(賞), 즉 즐거움과 승리감이 있다. 그러나, 나는 미래에 이러한 것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궁극적으로 진정한 기쁨과 진정한 보상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도 당신이 유혹에 대항하여 승리를 쟁취할 때의 엄청난 기쁨과 대단한 승리감을 또한 체험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마치 궁극적인 기쁨과 승리가 어떠한 것인가를 미리 맛보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권면(3-4절)


경주에 참가하여 경주하라는 강한 호소를 하고 있는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데 당신이 아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저는 저의 학급에서 눈총을 받습니다... 급우들은 저를 조롱합니다... 국민윤리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저의 믿음을 비판합니다... 우리가 말세에 가까와지고 있기에 우리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기가 점점 더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등등”이라고 말할 자들이 있을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3-4절에 있는 그의 대답,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는 ”저는 여러분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피흘리는 것을 보지 못하겠군요. 학급에서 눈총을 받는 것이나, 국민윤리 시간에 말다툼하게되는 것이 조금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으나, 여러분은 아직 제가 아는 어떤 분과 같이 십자가에 달리지는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당신은 그의 권면이 어디로부터 시작되는지 보고 있는가? 당신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그렇게 살아갈 수 없다고 느끼기 시작할 때, 자신에 대한 죄인들의 거역에도 불구하고 죽기까지 참으셨던 분을 기억하며, 당신은 아직 거기까지 가지는 못하였음을 깨닫도록 하라. 당신의 신앙 생활은 그렇게 사나운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 당신은 화형대에 매달려 불살라지지도, 참수당하지도, 양가죽을 입고 다니는 신세가 되지도, 사자에게 던지우지도 않았다. 당신은 산이나, 동굴, 혈거에 숨지도 않았으며, 이사야와 같이 톱으로 켬을 당하지도, 다니엘처럼 사자 굴에 던지우지도, 삼손처럼 두 눈이 뽑히지도 않았다.

당신이 피곤하여 낙심하기 시작할 때 죄인들의 거역한 일을 참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라. 그리고 만일 그분의 믿음의 삶이 성공과 승리를 가져왔다면 그것은 당신의 것도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우리에게 성공과 승리를 확보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경주에 참가하지 않고 있다면 와서 경주에 참가하도록 하라. 거기에는 당신을 위하여 상(賞)이 기다리고 있으니 ... 곧 즐거움과 승리감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여 ! 만일 당신이 경주에 참가하고 있다면 당신이 이미 얻은 모든 은혜를 가지고 경주를 경주하라!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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