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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에 관하여/신약 핵심공부

[스크랩] 자유 - 존 맥아더

자유 - 존 맥아더

 

 

 

  서론 - 바울은 왜 갈라디아서를 썼는가 ?

 


영적 자유의 대헌장(Magna Carta of spiritual liberty)... 유대교에 대한 기독교의 독립선언문(Christian Declaration of Independence)... 종교개혁의 선전 포고(battle cry of the Reformation)...자유의 헌장(Charter of Freedom) - 이러한 말들은 바울의 갈라디아서를 묘사하는 데 붙여진 이름들이다.

 


어떤 의미에서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갈라디아서의 주석을 썼기 때문에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그 저작에서 루터는 행위와 반대된 것으로서의 은혜와 믿음의 개념으로 이동해 갔으며, 또한 후에 개신교(protestantism)의 교리가 되었던 항변서(pro-test)를 확립했던 것이다.

 


루터는 말하기를, ”갈라디아서는 나의 서신이다. 그것이 있기에 내가 존재하고 있다. 말하자면, 나는 그 서신과 결혼한 사이다. 갈라디아서는 바로 나의 아내 캐더린(Katherine Von Bara)이다”라고 했다. 루터에게 있어 갈라디아서는 그의 아내에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소중한 것이었다. 루터는 그처럼 갈라디아서를 사랑했으며, 또한 그가 쓴 갈라디아서 주석은 종교개혁의 선언문(the manifesto of the Reformation)이 되었던 것이다.

 


테니 박사(Dr. Merill Tenney)는 ”만약 갈라디아서가 씌어지지 않았었더라면, 기독교는 단순히 유대교의 한 종파로 머물렀을지도 모르며, 또한 서구 세계의 사상은 완전히 이교화(異敎化)됐을는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갈라디아서의 멧세지는 해방(liberation)의 멧세지이다. 그것은 참된 자유의 멧세지요,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는 멧세지이다. 특히 갈라디아서는 오늘의 상황에 관련된 적절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해방운동(liberarion movements)에 관한 논의들이 무수히 많다. 서구 사람들은 쉴 새없이 ”자유”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들은 새 도덕(new morality)과 새 윤리(new ethics)에 관해 말한다. 언론의 자유, 행동의 자유, 사랑의 자유 및 권위로부터의 자유를 자랑한다. 하지만, 그들이 자유라고 주장하는 그 어떠한 것도 결코 진정한 자유(genuine freedom)라고는 할 수 없다. 그들이 자랑하는 그 자유는 여전히 포로된 상태에 놓여 있는 거짓 자유일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진정한 자유를 구한다. 세상에는 참 자유가 분명 「존재하고 있다. 」 이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자유에 이르는 그 길은 오직 진리를 통해서만 있다. 그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한, 사람은 결코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유로와질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한 가지 중요한 전제(前提) 곧, ”영적 자유는 진리를 통해 오며, 그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을 아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다”라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 갈라디아서를 썼다.

그러므로 구원은 자유의 본질이다. 사람은 죄의 종이요, 죄가 야기하는 싸움의 노예이다. 그리스도께로 나아올 때, 그는 그 진리를 찾게 되며, 또한 그때 죄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그때에 비로소 자유를 향한 그의 추구는 끝을 맺게 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거듭하여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에 사는 신자들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는 바울이 세운 두가지 주제가 있는데, 그 첫째는 ”내가 너희에게 자유에 머무르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것이요, 둘째는 ”그 자유를 누리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은,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자유에 관한 본 서신을 쓰게 했느냐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간략하게나마 본 서신의 배경을 살펴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남부 갈라디아에 몇몇 교회들을 설립했었다. 곧 주후 47년에 시작됐던 첫 전도 여행 중, 그는 수리아 안디옥에서 서쪽으로 갈라디아라 불리우는 지역까지의 수백 마일을 여행했었다. 갈라디아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터어키의 일부로서 폭 160-280 km, 길이가 약 402 km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다니면서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및 비시디아 안디옥 등의 갈라디아 주요 도시에서 복음을 전파했으며, 그곳에 교회를 설립했었다. 그 후, 그러한 지역을 다시금 차례로 되돌아보며, 그곳에서 성도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는 일을 마친 다음, 그는 수리아 안디옥에 있는 교회로 돌아갔다.

 

그 후 주후 43년, 실라와 동행한 제2차 전도 여행 중, 그는 제 1차 전도 여행 중에 설립했던 교회들을 다시금 되돌아보며, 그곳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는 일을 했었다.

바울은 개인적으로 갈라디아인들을 무척이나 사랑했었다. 그들은 그에게 속한 바, 곧 믿음 안에서 낳은 그의 자녀들이었다. 그런데 그의 두번째 방문 후 불과 얼마되지도 않아서,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은 거짓 교사들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다른 복음을 추종하게 되었고 그 소식은 바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거짓 교사들은 세 가지 면에서 그들을 공격했다. 첫째로 그들은 바울의 사도 자격을 은밀히 파괴하였고 둘째로 구원의 조건으로서 할례를 요구하였으며, 세째로 유대인의 모든 규례와 의식을 준수하라고 요구했다.

이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마도 그중의 몇몇은 예루살렘 공의회로부터 왔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이 예루살렘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을는지도 모른다(행 15:1-5참조). 그들은 ”유대주의자들”(Judaizers)이라 불리웠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유대인다움”(Juewishness)을 기독교의 기준으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유대주의자들과 비교해서 바울의 가르침을 살펴볼 때, 바울은 분명 「행위와는 상관없는」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을 말했으며, 또한 「의식과는 상관없는」 은혜 안에 거하는 삶을 가르쳤다. 따라서 바울은 갈라디아인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다음의 세 가지에 주안점을 두었다.

자신의 사도직과, 또 자신에게는 엄연히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말할 권리가 있음을 변호하는 일

은혜의 복음을 다시금 설명하는 일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격려하는 일

 


이는 갈라디아서 전체 내용을 정확히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은 1장과 2장에서 그의 사도직을 변호한다. 3장과 4장에서는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오직 은혜뿐임을 확증하며 마지막으로, 5장과 6장에서는 율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 곧 은혜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제를 가르친다.

 


자신의 편지를 통해 바울은 갈라디아의 이단을 단호히 배격하는 것 이상의 훨씬 더 큰 일을 행했으니, 곧 그는 모든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자유의 헌장을 작성했던 것이다.

 

 

 

● 갈라디아서 1:1-1

 


1. 바울과 그의 복음

 

 

 

사도 바울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 쓰든, 자신이 설립한 교회들에 편지를 쓸 때에는 통상 긍정적인 자세로 그 서두를 시작하려 애썼다. 빌립보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도 그는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라는 말로 시작했으며,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그는 온 세상에 두루 알려지게 된 로마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했다. 심지어는 그에게 숱한 걱정거리만을 안겨 주었던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조차도 그 서두를 긍정적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 밖에 그의 다른 서신들, 곧 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서, 디모데서, 디도서, 빌레몬서에서도 바울은 대개 어떤 칭찬의 말과 함께 따스하고 정감어린 어투로 그 서두를 시작하곤 했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그의 통상의 편지 양식과는 「전혀 다른」 양식으로 그 서두를 시작한다. 여기서 그는 단지 문제의 본론으로 뛰어들어, 곧 바로 그 요점에 도달한다.

 


사실, 바울은 편지를 부드럽고 온화하게 쓸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유대주의자들”이라 부르게 된 그룹이 어떤 잘못된 사상을 퍼뜨렸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은혜의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갈라디아에 여러 개의 교회를 설립했었다. 그가 전파한 은혜의 복음이란 ”구원은 사람의 죄를 위해 십자가 상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오며, 「그 외의 어떤 것도 필요치 않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를 메시야로서 믿는다”고 말했지만 구원의 필요 요건으로서, 그 어떤 것을 덧붙였으니, 곧 이방 그리스도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하며 유대인의 모든 규례와 유전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할례는 남성의 성기를 덮고 있는 표피 일부분을 잘라 내는 작은 수술로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중요한 의식이었다. 그것의 기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맺으셨던 때로 거슬러 올라갈수 있다(창세기 17장, 특히 11절 참조).

 


유대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소유하길 원했지만, 또한 유대주의의 낙인도 고수하기를 원하는 거짓(혹은 가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유대교화”하기를 원했으며, 또한 갈라디아 교회 내에 파괴와 충돌을 야기시키고 있었다. 그들이 특별히 겨냥한 표적은 이교의 신앙으로부터 그리스도께 회심한 이방인들이었는데, 일반적으로 그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이었다. 어떤 이방인 회심자들은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넘어갔고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의 주장에 저항도 했지만, 그 힘은 극히 미미한 정도에 불과했다.

 


자기가 맨처음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설립한 바로 그곳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해 들었을 때, 바울은 분개하지 않을 수없었다. 갈라디아서는 ”번득이는 칼”이라고 불리워 오는데, 바울은 타는 듯한 정열과 영혼 깊숙한 데로부터 솟아오르는 강한 확신 속에서 그 칼을 휘둘렀다.

 

 

 

사도직에 대한 바울의 자기 변호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갈 1:1-2).

 


바울은 붓을 들자마자 조금도 주저함 없이 자신의 권위를 확증하는 일에 착수한다. 이는 앞으로 그가 1장과 2장에 걸쳐 매우 상세히 취급할 중요한 문제이다.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권위를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을 독자들에게 계속 환기시키는데, 이는 갈라디아인들이 마음 한 구석에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사도적 권위는 유대주의자들에 의해 도전을 받았고, 따라서 바울은 주도면밀하게 그 자신을 소개한다.

그는 자신을 단지 ”바울”이라고만 소개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사도된 바울”(1절) 이라고 밝힌다. 자신이 사도인 것을 왜 그토록 강조해야만 했을까? 그것은 사도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권위를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자였기 때문이다.

자신은 사도를 자처하는 하루살이가 아님을 바울은 처음부터 확실히 하고자 했다. 즉, 자신의 직분은 신적 임명에 의한 것임을 밝힘으로써 그 권위와 가르침에 대한 의문을 일축한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 그가 논증해야 할 명제(thesis)는 자신에 대한 비난에 명확히 답변하는 것과 또한 그들이 품고 있던 그릇된 생각을 옳게 교정하는 것이었다.

바울이 자신을 사도라고 부른 것은 사실상 ”나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권위를 가지고 말할 위치에 있다”는 의미였다. 그는 이 명칭을 고린도전후서, 로마서, 에베소서 및 골로새서에서도 사용한다.

 

「사도」(apostle)라는 용어는 ”특사, 대리자, 혹은 대사”라는 뜻을 가진다. 유대인에게 있어 매우 친숙했던 이 용어는 특별한 사자(使者 : emissary), 곧 자신에게 임무를 맡긴 자를 대신해 행동하도록 합법적 권위를 부여받아 파송된 자를 가리킨다. 누가복음 6장 13절에서 예수께서는 이 용어를 자신의 제자들에게 적용하심으로써 그들을 향해 ”너희는 나를 대신하여 행동하라”고 분부하셨다.

바울은 사실 열 두 사도 중의 한 사람이 되는 특권을 누리지 못했다. 따라서 자신이 참 사도인 것에 대한 자의식이 강했으며, 그런 이유로 자신의 사도직을 자주 반복하여 변호한다. 고린도전서 15장 5, 8절에서 그는 베드로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던 것같이 자기도 역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노라고 역설한다.

과연 바울이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가 그리스도를 보았다면 그때는 언제인가? 사도행전 9장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눈이 멀게 된 것과 사흘 동안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다메섹에 머물렀던 것 및 다시 보게 된 후 그 곳에서 예수를 전파했던 것 등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바울의 눈이 멀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때에 그가 눈이 멀게 된 것은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바울은 특별히 사도로 택함받는 은총을 누리게 되며,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권위를 가지고 말할 수 있는 합법적인 자격, 곧 열 두제자와 한가지로 그 역시 ”사도”의 직임을 부여받게 되었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말하기를,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이라고 한다. 바울은 자신의 소명(召命)이 결코 인간에게서 온 것이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한다. 그는 하나님에게 임명을 받은 사도이다. 따라서 그는 개인이나, 교회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임명받은 자로서 본 서신을 기록한다.

2절에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를 언급하여 자신이 현재 머물러 있는 곳의 신자들 모임에서도 자신을 사도로 인정했으며, 또한 그가 사도인 것이 입증됐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이 점은 갈라디아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곧, 바울의 사도직과 가르침이 의문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지방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서 그의 사도직이 인정되고, 또한 그곳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사도적 사역에 협력하고 있다는 암시는 갈라디아인들 가운데 있는 의문과 또 신앙의 혼돈을 제거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요약컨대, 이처럼 바울이 주도면밀하게 그의 사도직을 변호하는 것은 그의 사도직이 곧 그의 가르침의 신빙성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즉, 사도로서의 그의 권위가 무너진다면, 갈라디아의 여러 지역에서 행한 그의 사역이 헛되며, 또한 그 사역의 핵심으로서의 신자들의 믿음의 근거가 되는 복음까지도 거짓된 것으로 판명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고 그의 권위를 확증하는 것이야말로 그에게 있어서나 갈라디아인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관심이었던 것이다.

 


바울의 멧세지와 그의 사역의 동기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갈 1:3-5).

바울은 이 단 두 구절에서 그의 멧세지를 확립하고, 또한 복음 전체를 함축적으로 제시한다. 3절에서 그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문안한다. 이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요?”와 같은 통상적인 인사말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은혜는 평강을 낳는다. 은혜는 위치적인(positional)것이요, 평강은 실제적인(practcal) 것으로서 아버지께로부터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4절에서 바울은 복음을 제시하고 곧 그것의 핵심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해 언급한다. 그는 세 가지 국면, 즉 그리스도의 죽음의 본질, 죽음의 목적, 죽음의 기원(起源)으로 복음을 논증한다.

 

예수께서는 좌절감에 빠진 슈퍼스타로서 죽지 않으셨다. 어떤 대의(大義) 를 위한 자기 희생의 전형(典型)으로서 죽으신 것도 아니다. 심지어 그분의 죽음은 사랑의 행위만도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를 위한 희생 제사였다. 물론 그분의 죽음에 사랑이 내포된 것은 사실이나, 무엇보다도 그것은 희생 제사였다. 예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죄가 되신 것이다(고후 5:21 참조).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목적은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 내시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분의 죽음의 본질이 희생 제사라면, 그 죽음의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실제 행위(rescue operation)라 할 수 있다. 「건져 내신다」(deliver)는 말은 ”구조한다”는 개념을 담고 있다. 이 말은 사도행전 7장 10절에서 요셉의 이야기를 다루는 데서 사용된다. 요셉은 종으로 팔렸으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가 겪는 모든 환란 가운데서 그를 「건져 내셨던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현재의 ”이 악한 세대”의 속박으로부터 구원받았다고 한다. ”이 악한 세대”라는 용어는 지금의 일시적인 세대, 곧 사단이 지배하고 다스리는 현재의 무가치하고 소멸 중에 있는 체계를 가리켜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될 때 우리는 현재의 ”이 악한 세대”로부터 구원받게 된다. 그것은 현재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세상 밖의 다른 세상에 따로 거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세상 안에 머물러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세상의 것이 아니요」 그것의 체계 안에 갇혀 있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원은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다.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다(마 26:39/행 2:22, 23 참조). 예수께서는 자신이 죽는 것이 아버지의 계획임을 인식하고 계셨다(12:27-32/ 18:10, 11/ 19:10, 11 참조). 그것은 결코 돌발적인 사고나 계획의 실패가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신 것이다.

 


1-4절에서 우리는 바울의 멧세지와 그의 사도직에 대한 주장에의 서론 부분을 살펴보았다. 5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그의 삶의 동기를 보게 된다.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말하는 그 모든 것, 내가 살며 행하는 그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한 그의 삶의 동기는 실제로 그의 삶 속에서 철저히 실현된다.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것,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제공하는 일이야말로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지고(至高)한 삶의 목적이었다.

 


거짓 교사들을 향한 저주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 1:6-9)

복음의 이 중대성에 비춰볼 때, 갈라디아인들이 복음에서 이탈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은 바울에게 있어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는 그들이 너무 쉽게 흔들리고 마는 것에 적잖이 당황했으며, 한편으로는 누군가가 복음을 혼돈케 하고 왜곡시켰을 것이라는 생각에 몹시 격분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부당하게 변질시키는 자는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간에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확언하면서 그 사실을 두 차례씩이나 되풀이하여 강조하고 있다.

 

위의 6-9절의 내용을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저주받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세상의 어떤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도록, 그분에 의해 파멸되도록 작정된 것이 있다. 그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께서 멸망시키고자 하시는 것은 모두 ”저주받는 자나 물건”을 의미하는 「아나테마」1)(anathema)로 표현된다.

 


1)이는 또한 파멸에 빠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개역한글성경의 갈라디아서 1장 8, 9절에서는 이 「아나테마」가 ”저주를 받는다”는 뜻으로 번역됐는데,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이미 파멸되기로 작정된 것”이라는 뜻을 내포한다-역자 주.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인류를 다루어 온 역사를 살펴볼 때,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파멸에 빠지도록 작정하신 어떤 것이 있음을 보게 된다.

여호수아를 일례(一例)로 들어 설명해 보겠다. 모세(Moses)가 죽은 후 여호수아는 그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책임을 부여받았다. 백성들이 여리고 성 앞에 섰을 때 여호수아는 그들을 향하여하나님께로부터의 멧세지를 전달했다.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수 6:17, 18)2)

 


2)여기서 「바친다」는 표현은 흠정역에서는 모두 ”accursed-저주받는다”로 번역했고 칠십인역에서도 이는 ”anathema-아나테마”를 사용하고 있다-역자 주.

하나님께서는 여리고를 저주하고 계셨다. 그분은 여리고가 멸망되도록 작정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그 백성들은 여리고가 제 운명대로 멸망당하도록 내버려 두어야만 했다. 그런데 아간이 하나님의 그 명령을 어기고 ”멸망당하도록 작정된 것들”을 취했고 결국 그것 때문에 그 자신과 가족들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는 벌을 받게 되었다(수 7:19 이하 참조).

신약에서 하나님은 특히 거짓 교사들을 저주하신다. 거짓 교사는 악의와 속임수에 가득한 자이다. 곧 그는 마귀의 자녀요, 의의 적이며, 또한 주님의 곧은 길을 굽게 하는 자이다.

사단은 주로 거짓 교리의 영역에서 활동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예수께서는 사단을 규정하시기를 ”거짓의 아비”라고 단순하고도 날카로운 어조로 말씀하셨다(요 8:44). 사단은 혼자서는 활동하지 않는다. 곧 그는 거짓말하는 영들, 즉 귀신들과 타락한 천사들을 거느리며 활동한다. 그들은 통상 ”사람”을 통해 역사한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은 통상 「경건한 사람들」을 통해 역사한다. 사단의 교활함이 바로 그 점에 있다. 진리를 왜곡시키기 위해서는 그 진리 안으로 파고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사단이 지극히 영적인 모습을 입고 나타나서 활동하는 이유이다.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 11:14).

 

나는 사단이 술집이나 안마 시술소 혹은 외설서적, 「플레이보이」와 같은 도색 잡지의 판매를 부추기는 일에 많은 시간을 들인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들은 사단의 부추김이 없더라도 우리의 육신의 정욕(요일 2:16)이 너무나 좋아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단이 거짓 종교 체계, 특히 기독교의 구조 안에 있는 체계들을 통하여 역사하는 일에 그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고 믿는다. 20세기에 이르러 사단은 다양한 형태의 사이비 종교와 자유주의(li-beralism) 및 현대주의를 통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고 최근에는 신비주의자들과 동방 종교들이 그의 강력한 하수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단은 그 대상이 무엇인지에 상관없이, 그가 목적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 거짓 종교 교사들을 이용한다.

 


갈라디아 지방의 여러 교회에서 활동하는 거짓 교사들은 바로 유대주의자들이었다. 모든 거짓 교사들의 일차적인 목표는 구원의 교리를 공략하는 데 있다.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진리를 흐리게 하는 것으로서, 모든 거짓 교사들이 진리를 공략하는 일에 주력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바울의 멧세지는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에 관한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 우리는 유대주의자들이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을 가르침으로써 바울의 멧세지를 손상시키려 얼마나 애썼던가를 보게 된다.

6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근본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그는 자기가 떠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들이 복음을 떠난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6절에서 「떠난다」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이탈한다”(to defect)는 뜻을 가진다. 이는 통상 변절자를 가리켜 말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따라서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그렇게 빨리 영적 변절자들이 됐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거짓 교사들의 행위를 비난하고 있지만 그들의 가르침에 맞서서 싸우려 하지도 않고 쉽사리 그들을 좇아가고 만 갈라디아인들도 용서하지 않고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다른” 복음을 받았으며, 사실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고 말한다(6, 7절). 사람들이 거짓 교사들의 속임수에 쉽게 속아 넘어간 것은 이른 바 그들이 가르치는 복음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으심을 그 내용으로 삼는 바울의 복음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들려졌기」때문이다. 즉,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의 알맹이는 그대로 놔둔 채 다만 그 처음과 끝 부분에 각각 할례와 유대인의 규례를 덧붙임으로써, 그리스도인들도 할례를 받고 유대인의 규례를 준수해야 되는 것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이는 사단이 얼마나 교활한가 하는 점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유대주의자들이 전한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 이외의 그 어떠한 복음도 결코 복음일 수 없다! 있다면 그것은 진리를 왜곡한 자들의 거짓 술책일 뿐이다.

8, 9절에서 우리는 거짓 교사들에 대한 바울의 엄중한 경고를 본다. 바울은 말하기를, 자신이 전한 이 외의 복음을 전하는 자는, 그가 바울 자신이든지 혹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말한다.

 

사도 요한은 경계하기를, 어떤 사람이 거짓 교리를 가지고 오면, 그를 집 안에 들이지도 말며, 또한 그에게 인사조차도 하지 말라고 했다(요이 10, 11절 참조). 하나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하시기를, 거짓 교사들에게서 떠나고 어떠한 경우에라도 그들에게 속하지 말라고 하신다.

 

 

 

바울의 근본적 삶의 목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였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아마도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이 대중적인 인기만을 추구하고 있다고 비난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바울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일부러 그들에 대해서는 유대인의 율법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는지도 모른다. 바울은 그러한 주장을 단호히 부정한다.

10절 초두의 ”왜냐하면”(for)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가르」(gar)3)에 해당한다.

3)gar라는 이 단어는 헬라어의 접속사로서 그것이 속해 있는 문장에서 대단히 중요한 구실을 한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를 'for' 등으로 빠짐없이 번역하나 개역한글성경에서는 문맥상 이 단어의 번역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독자들은 갈라디아 1장 10절의 초두에 본래 이 「가르」라는 단어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바란다-역자 주.

그런데, 이 「가르」라는 단어는 그 용례(用例)가 다양하므로, 그 문맥에 따라 ”실로”(yes, indeed), ”확실히”(certinly)로 번역될 수도 있고 혹은 감탄사로서 번역되기도 한다. 아마도 여기 본문에서 사용된 「가르」의 가장 적합한 의미는 ”자, 봐라!”(there)가 될 것이다.

바울은 묻기를, ”자, 봐라 ! 내가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 한다면, 그 같은 저주의 말을 감히 할 수 있겠느냐?”라고 한다. 그리고 나서, 자신은 이미 그리스도께 위탁되었음을 재차 설명한다. ”너희는 내가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을 감당해 오는 중 사람의 기쁨을 구하려 했기에 그 모든 고난과 고통과 괴로움을 달게 받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에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는지에 대해서갈라디아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거의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행 14:1-20).

그러므로 바울은 편지의 서두에 갈라디아인들을 향하여, 그가 갈라디아에서 어떠한 삶을 살았던가를 환기시키는 데 주력한다. 그 까닭은, 만약 그들이 갈라디아에서의 그의 삶을 기억한다면, 필경 그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그들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사람들의 환심을 사거나 그들로부터 인기를 얻기 위해 말하거나 행동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의 근본적인 삶의 목표는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뿐이었다.

 


● 갈라디아서 1:11-24

 


2. 외곬의 사람, 바울

 

 

 

바울이야말로 실로 외곬(single minded) 인생을 산 사람이었다. 그는 무엇을 믿든지 자기가 믿는 바대로 철저히 살았던 사람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그 당시의 이름은 사울)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그 자신을 묘사하기를,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빌 3:5)라고 말한다.

 


그렇게 전통적인 율법주의자로 부상하던 시절, 그는 당대 바리새인중의 대가인 가말리엘 문하에 속해 있었다. 그는 율법의 아주 사소한 부분 하나까지라도 준행하는 성실한 바리새인이었다. 종종 우리는 바리새인을 외식하는 자들로만 생각하는데, 바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결코 자신을 가식이나 위선의 탈로 위장하지 않았었다. 그는 율법주의, 즉 바리새적인 율법 개념에 전적으로 매여 지냈던 인물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주의의 척추에 해당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율법을 사랑했으며, 그것을 암송하고 준행하는 일에 신명을 다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러한 자들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율법의 골수분자라 할만큼 철저히 훈련받은 그 율법주의자는 여기 갈라디아서에서 은혜 외에는 아무것도 권할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바리새적인 율법주의로부터 은혜의 복음으로 사람을 그토록 급격히 변화시키는 데에는 기적이 필요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일을 행하셨다.

 


바울은 율법 아래 매인 삶과 은혜 안에 거하는 삶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한 자로서 자유의 헌장(憲章)인 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한다. 회심 이후, 그는 은혜의 투사가 되었는데 이는 그가 은혜에 대해 완전한 이해를 갖게 된 탓이었다. 그는 율법의 속박하에 있던 삶과의 대조를 통하여 은혜 안에 거하는 삶의 실재를 명확히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갈 1:11-14).

11절 이하에서 바울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근원은 유대주의자들의 멧세지에 비해 훨씬 더 월등한 것임을 알게 한다. 바울의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다(11절). 그는 유대주의자들처럼 사람들의 전통으로부터 복음을 입수하지 않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자신의 멧세지를 부여받았던 것이다(12절).

 


바울은 전통적인 종교에 속하는 사도가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그리스도교 교회에 속한 사도조차도 아니었다. 오직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도였다. 하나님께서 그를 인정하셨으며 또한 사도로 위임하신 것이다.

이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서 성경의 권위 문제와도 관련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사도들을 통해 말씀하시므로 우리는 사도들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그리스도께 우리의 삶을 순복시켜야 한다.

나는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라고 해서 그 부분만을 빨간 글씨로 인쇄한 성경을 갖고 다니는 어떤 이를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이 성경 중에 빨간 글씨로 인쇄된 부분만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그리스도에서 하신 말씀이거든요”라고 했다.

그는 잘못됐어도 여간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검정 글씨로 인쇄된 부분이 바울에 의해 씌어졌든, 베드로에 의해 씌어졌든, 혹은 그외 다른 사람에 의해 씌어졌든 그것은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셨던 빨간 글씨 부분과 똑같은 중요성을 갖고 있다. 그들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으므로, 그들의 말 역시 그분 자신의 말과 똑같은 중요성을 갖는 것이다. 나는 바울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통하여 그 모든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유대주의의 가르침은 대부분 전통, 곧 구전(口傳)에 의해 전달된 정보(information)에 근거하고 있다. 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너희가 전통을 통하여 정보를 입수하는 것같이 나의 복음을 받지 않았다”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교사가 어떤 내용을 전달하면, 학생은 그들은 것을 반복하여 말하는 소위 랍비식(rabbinic)의 교육을 받으며 자란다. 하지만,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정보가 그리스도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하여 자신에게 직접 계시하신 것임을 밝힘으로써 유대인의 통상적인 학습 방법을 전면 거부한다.

 


바울은 구원받기 이전부터 복음에 관하여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또한 그분이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전에 그렇게 증오했던 복음을 이제는 그렇게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로 증거되다시피 그러한 인간적인 지식으로는 그를 변화시키기에 충분치 않았다. 하지만 다메섹도상에서 일단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자 그는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시는 초자연적인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13, 14절에서 바울은 회심하기 이전의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다. 그에게 있어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은혜를 깨달을 길이 없었다. 그는 복음의 개념, 즉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증오했으며 언제 어디서든지 그리스도인들만 보면 핍박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은혜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행위없는 구원을 그토록 증오했던 그가 이제는 그것을 받아들이며, 또한 하나님을 믿으며 사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으로 탈바꿈된 것이었다.

요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회심하기 이전의 바울의 체험은 그가 전하는 멧세지의 근원이 결코 사람일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증거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설득으로는 그를 변화시킬 수 없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광신적(狂信的)이며 율법주의적인 의식주의자(儀式主義者)를 은혜의 전파자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리스도인들의 핍박자를 그리스도인으로, 예수를 혐오하던 자를 예수를 사랑하는 자로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흥미진진한 사건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 1:15-17).

15, 16절에서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체험을 언급하면서 바울은 자신의 멧세지가 사람들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회심을 체험하기 전, 즉 하나님께서 그를 변화시키시기 전까지 그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추구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변화시키기로 하신 것, 그것이 바로 시작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그를 변화시키신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셨다”고 한다. 그것은 바울이 잉태될 때부터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도로 성별(聖別)하셨다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사도가 되도록 택함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례(침례) 요한(눅 1:13-17 참조)을 위시하여 다른 여러 일꾼들에게도 똑같은 방법으로 역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일찌기 그분이 계획해 놓으신 대로 한 위대한 목적을 위하여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택정”하셨다. 바울은 구원받기 위하여 아무 일도, 전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다. 보다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을 향하여 가는 도중, 하나님께서 그의 눈이 멀 정도의 영광 가운데 자신의 아들을 계시하심으로써 그는 예수님과 일 대 일로 대면하게 되었다(행 3:1-21 / 26:1-18 참조).

16절의 ”그 아들을...내 속에 나타내시기...”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의도를 엿본다.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영광 가운데 계신 자신의 모습을 최초로 바울에게 드러내 보이셨다. 그리고 바울의 사는 날 동안 그리스도의 충만한 아름다우심은 줄곧 그에게, 그리고 그를 통하여 펼쳐져 보이게 되었다. 바울을 향한 그리스도의 계시는 그의 회심에서 시작되었다가 이내 끝나 버린이 아니다. 노정(路程)으로 비유하자면, 그것은 출발점이었다. 바울은 계시가 시작되었던 바로 그 날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던 그리스도에 관해 더욱 더 많은 것을 배우는 데 그의 여생을 바쳤다.

1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구원에의 부르심(a call to salvation)과 섬김에의 부르심(a call to service)을 동시에 주셨다고 한다(행 26:15-18 참조). 그리스도인은 모두 섬기기 위하여 구원받는다. 바울의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특별한 종류의 부르심이어서, 그는 구원받자마자 곧 섬기기를 시작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대체로 갓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이제 당신은 구원받았으니,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기 위하여 먼저 가르침을 받으셔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새 신자들에게 권장할 만한 정상적인 절차이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은 뭔가 특별한 일을 하셨고 바울에게도 매우 특별한 일을 맡기셨다. 바울은 회심과 동시에 사도로 부르심받아 그 사역에 종사하게 된 것이다.

16하반절에서 바울이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라고 말한 것은, 자신은 자신의 사도직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충족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지식과 사도직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적으로 온 것이었다. 그에게는 인간 교사들의 어떤 가르침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그는 「회심 이후 즉시」 다메섹의 여러 회당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벌써 그의 설교는 유대인들을 당황시킬만큼 매우 강력하고 영향력이 있는 것이었다(행 9:19-22 참조).

사도행전 9장 23절은 ”여러 날”이 지난 후에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 모의했다고 밝히고 있다. 헬라어에서 ”여러 날”이라는 구절은 2, 3년 동안의 긴 기간을 의미할 수 있다.1)

1)emerai ikanai를 직역하면 '여러 날'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형용사 ikanai는 su-fficent, great, long등의 뜻도 가지고 있어서 상당히 긴 기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단순히 ”며칠”이나 ”2, 3일” 정도의 짧은 기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역자 주.

갈라디아서 1장 17절과 사도행전 9장의 내용을 종합하여 바울의 노정을 유추해 볼 때, 바울은 회심 직후 다메섹에 잠시 머무르며 그리스도를 전파한 후 곧장 아라비아[오늘날의 아라비아가 아니라 신약시대 당시의 나바티안 아라비아(Nabatean Arabia)로 알려진 지역]로 떠났다. 나바티안 아라비아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지역으로서, 다메섹도 그곳에 속해 있었으므로 바울은 아마도 다메섹을 벗어나 그 근처의 어떤 광야에서 오랜 기간 동안을 머물러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그는 다메섹으로 되돌아와 그곳에서 다시금 그리스도를 전파하게 되었는데, 갈라디아서 1장 18절에 지적된 바와 같이 바울은 이 기간, 곧 회심 직후 다메섹 회당에서 처음 설교를 마치고 아라비아에 가서 머물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올 때까지의 기간을 통틀어서 ”그 후 삼 년만에”라고 밝혔다.

삼 년만에 바울이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 사람들이 그를 핍박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아라비아에 머무는 동안 바울은 대부분의 시간을 조용히 자신을 성찰(省察)하며 성령께로부터 교훈을 받는 일에 진력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모르긴 해도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도 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일이 다메섹으로 돌아왔을 때 그가 받은 핍박에 대한 설명이 될 것이다. 고린도후서 11장 32절을 보면, 아라비아의 왕 아레다2)의 방백이 바울을 잡으려고 성을 지키고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2)아레다 왕은 다메섹 동남 아라비아지방을 48년간이나 통치했던 아레다 4세를 가리킨다. 그의 수도는 페트라였고, 다메섹은 로마 황제 갈리굴라로부터 선물로 받은 도시였다. 그는 다메섹에 자신의 방백을 두어 다스리게 했는데, 아마도 바울은 이 아레다 왕의 통치 영역인 다메섹 근처의 어느 광야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역자 주.

아레다 왕은 바울이 그 삼 년동안 자신의 나라 안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다닌 일에 분격하였고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다메섹에서의 핍박이 시작되었거나 점차 확대되었던 것 같다.

 

 

 

바울의 맹세

 

 

 

”그 후 삼 년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 오 일을 유할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갈 1:18-20).

 


다메섹과 그 근방에서 삼 년을 지낸 후, 바울은 베드로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18절). 거기서, 그는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은 보지 못하였다(19절). 바울이 베드로를 만나 보려 했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가장 친밀하게 지냈던 자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바울은 베드로로부터 예수님의 지상 사역들에 관한 얘기들을 많이 전해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주의 동생인 야고보를 만났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야고보는 예수에 관해 베드로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바울은 예수에 관해 개인적인 지식을 갖기 원했고, 그래서 그는 베드로, 야고보와 시간을 같이 보냈을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자신의 예루살렘 방문 기간이 단지 l5일 뿐이었음을 강조하는 데 주목하라. 그가 굳이 그 기간을 명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임명에 근거한 그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확언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15일이라는 기간은 사도적 교리를 가르침 받기에는 너무나 짧은 기간이었다. 바울은 그런 종류의 가르침은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또한 자신의 사도직에 관하여 다른 사도들의 위촉을 받을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복음과 사도의 신임장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적으로 왔기 때문이다.

 


20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관하여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라고 말하는데, 전형적인 유대의 풍습에 의할 때 이러한 방식은 「매우 극단적이며 최종적인 단언」으로서, 유대인으로서 이같은 표현을 거짓되이 함부로 쓴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자초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었다. 따라서 갈라디아인들을 향해 바울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유대의 풍습에 의할 때 최상급의 법정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사도직과 그 권위를 변호함으로써 그것을 갈라디아인들에게 확신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도직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갈 1:21-24).

 


21절에서 바울은 예루살렘 방문 후,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던 사실을 계속해서 언급한다. 길리기아 지방은 바울의 고향 땅으로서, 그는 그곳의 수도인 다소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바울은 그곳 다소에 여러 해를 머물면서 교회들을 설립했었다. 우리가 아는 한에 있어서는, 그 지역에는 다른 사도들이 전혀 없었다. 바울을 제외한 나머지 사도들은 모두 유대와 사마리아 등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바울이 가진 유일한 관계는 22-24절에 언급되어 있다. 그들은 한 번도 바울을 본 적이 없었지만 그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되었다. 그것은 전에 그토록 교회를 핍박하던 그가 이제는 놀랍게도 은혜를 전파하는 권능의 설교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유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멧세지가 진리인 것을 인지(認知)했으며 바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크신 역사에 대하여 주님께 찬양을 돌리게 되었다.

여기서 바울은 성경 어느 곳에서나 발견되는 자신의 사도적 권위에 대한 강력한 논증을 마무리한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칠 권위를 가진 완전한 사도임을 주장하는 데 있어 그 근거로써 신적인 임명을 내세웠다. 실제로 그가 회심하게 된 배경 및 그의 기록들을 검토해 볼 때, 그리고 기독교의 지도자들과 평신도들이 그를 사도로서 인정했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그 사실은 명백히 입증된다. 바울은 결코 그 어떤 사도의 문하에도 속해 있지 않았지만, 사도로서의 그의 지식과 권위는 다른 사도들의 것과 동일하였다. 외곬의 바리새인이었던 그 사울은 이제 외곬의 사도인 바울로 탈바꿈되었다. 그를 변화시킨 이는 하나님이셨다. 하나님께서 그를 친히 가르치셨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사도로 임명하셨다. 그리고 그분께서 홀로 영광을 받으신 것이다!

 


● 갈라디아서 2:1-10

 


3. 사도 중의 일원인 바울

 

 

 

2장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을 향하여 자신은 결코 고립된 슈퍼스타(lone superstar)가 아니며, 분명 사도 중의 한 일원이라는 사실을 애써 주장한다. 굳이 그렇게 한 이유는 그가 자신의 사도직의 독자성(independence), 즉 자신은 복음을 다른 사도들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았음을 앞에서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갈라디아인들로부터 ”사도들과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분파주의자(sectarianist)다”라는 비난을 받게 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다른 사도들도 자신을 사도로 알고, 그것을 인정하였으며, 기꺼이 사도의 한 일원으로써 받아들였음을 입증해 보이고 싶어한다.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유

 

 

 

”십 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갈 2:1, 2).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이후, 바울과 사도들과의 접촉은 거의 전무(全無)한 상태였다. 그 후 그는 베드로를 심방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처음 방문한 지 십 사 년만에 다시 예루살렘을 찾게 되었다. 위의 두 절에서 바울은 예루살렘 방문 때의 일들을 회상하고 있다. 그가 재차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자신의 멧세지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이는 그가 지난 십 사 년 동안 독자적으로 멧세지를 전파해왔다는 데서 분명히 입증된다.

2절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때문이었다.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사건(안디옥 교회가 이방인 신자의 할례 문제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 등의 일행을 예루살렘에 파송한 일)은 바로 이 예루살렘 방문 여행과 일치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당시 안디옥 교회의 상황은 신적 지시(di-vine directive)로써만이 그들의 당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데로 의견이 기울어졌고, 결국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였다(행 15:2).

2절에서 바울은 ”계시를 인하여” 예루살렘에 가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는데 그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이유를 알아 보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다. 즉, 바울은 사도들로부터 그의 왜곡된 복음을 시정하라는 압력을 받고 온 것이 아님을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그가 예루살렘에 간 것은 영적으로 고갈 상태에 있었기 때문도 아니고 진리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가르침을 준 것은 바울 편이었다(사도행전 15:4-11 참조).

사도행전 15장 4, 5절에 보면,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그들 사역 중에 일어났던 일들을 모든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와 바나바는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했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바울과 그 일행은 교회의 회중들과 만나기 전, 교회의 지도자들을 먼저 만났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공적인 모임(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그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기 원했다. 그의 관심사는 모든 사도들이 유대주의자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울을 은혜의 복음을 가르쳤다. 그것은 여느 사도들이 전파했던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할례당(유대주의자들)이 나타나,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상당히 큰 문제거리가 되어, 바울은 이를 해결해야만 했다.

결국 바울이 예루살렘에 간 것은 자신이 가르친 교리를 시정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울은 다른 사도들도 자신의 편에 서게 하여 유대주의자들이 그를 좇아다니며 그가 행한 모든 것을 더 이상 훼방하거나 변질시키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이었다. 사도들이 바울을 대적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만일 그들이 율법주의자들에 대해 확실한 입장을 취하지 않거나 혹은 온건한 태도를 보인다면, 이방인 가운데서의 바울의 그 모든 달음질은 ”헛된 것”이 되고 말 상황이었던 것이다.

 


율법주의에 대한 힘찬 반박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갈 2:3-6).

 


디도는 본래 무할례 이방인이었지만 회심하여 구원받은 자로서 바울의 예루살렘 행에 동행했다. 무할례자로서 구원받은 이방인이 이방인 신자의 할례 문제로 열리는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구원받으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경우에서 디도를 제외시켜야 했을 것이다.

유대주의자들은 예루살렘의 사도와 교회가 구원의 조건으로서 할례를 요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디도는 앞으로의 이러한 종류의 사건의 판례(判例)가 될 중요한 인물이었다. 결국 그 공의회에서는 은혜가 의식법을 누르고 승리했다.

유대주의자들은 예루살렘의 지지를 기대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그 어떤 사도라도 예루살렘에 함께 머무르고 있는 디도에게 할례를 받도록 요구한 일이 없었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바로 이 사실을 알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예루살렘 교회(home church)의 사도들이 이방인의 할례를 요구하지 않았다면, 사도도 아닌 유대주의자들이 어떤 이유로 예루살렘 「바깥의」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결과적으로 바울은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대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회의에 참석했던 유대주의자들 때문에 그 승리는 쉽사리 획득되지는 않았다.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을 ”거짓 형제”라고 부른다(4절). NEB(New English Bible)는 그것을 ”가짜 그리스도인”(shame-christ-ians)으로 번역했으며, 필립스(Phillips)는 ”위장된 그리스도인”(pseudo-christians)으로 번역했는데, 두 가지 다 유대주의자들에 대한 매우 정확한 정의이다. 이 거짓 형제들은 참 신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구원얻기 위해 발버둥치는 율법주의자였으며, 더우기 은혜를 무시하는 자들이었다(갈 5:2 참조).

 


4절에서 바울은 거짓 형제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라고 한다.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유대주의자들이 복음의 약점들, 곧 그리스도께서 제공해 주시는 자유의 취약점을 찾아 내려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요 8:36). 하지만 예루살렘 공의회에 몰래 들어온 유대주의자들은 은혜의 복음을 불신하게 하고 그것을 근본부터 파괴하며, 또한 자신들의 주장하는 바가 최상임을 입증할 수 있는 모순점과 허점들을 어딘가에서 발견하기를 기대했었다.

결과적으로, 유대주의자들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는 너무나도 견고했고 율법주의보다 훨씬 더 월등한 것이었기에 그들은 실패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께 이르는 길, 곧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길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 죄의 형벌과 율법의 저주인 죽음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길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 율법이 요구하는 외적인 의식들로부터 자유케 되는 길이 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임하셔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안고 있는 문제는 바로 「너희 자신」이다. 내가 너희를 너희 자신에게서부터 자유케 해주겠다.” 바울은 참으로 자유케 되는 것, 즉 자아로부터의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유대주의자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이 아무 소용없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복음을 파수하는 데 있어서 바울과 바나바가 취한 이 분명한 태도 및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지도자들이 보여준 강력한 지지는, 예루살렘 교회의 유명한 지도자들의 입장도 바울이 전파하는 은혜의 멧세지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유대주의자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었다.

 


지난 17년 동안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와는 독립하여 자신의 멧세지를 전파해 왔었다. 그가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그 위대한 지도자들, ”유명하다는 이들”(6절)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바울을 가르친 적도 없었으며, 또한 그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무엇 하나 더할 만한 것을 가지지도 않았다. 바울은 동등하게 임명받고 동등한 권위를 가진, 사도 팀의 성숙한 일원이었다.

 


교제의 악수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니로 본래 힘써 행하노라”(갈 2:7-10).

 


7절에서 바울은 ”무할례자의 복음”과 ”할례자의 복음”에 관하여 말한다.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의 서로 다른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이 부분의 헬라어 원문은 우리가 목적격적 소유격(objective genitive)이라 부르는 문법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여기서 소유격으로 쓰인 명사는 보통 동작을 받는다. 그래서 7절 말씀은 ”할례받지 않은 사람에게 복음 전할 책임은 내게 맡겨졌고, 할례받은 자에게 복음 전할 책임은 베드로에게 맡겨졌다”라고 읽어야 한다.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이나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나 결국은 모두 동일한 것이었다. 다만 그것을 누구에게 전하느냐에 있어서만 차이가 있었으니,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임무는 바울에게 할당되었고, 유대인에게 전할 의무는 베드로에게 할당되었던 것이다.

8절에서 바울은 극적인 주장을 편다. 바울은 말하기를, 한 분 성령(the same Holy Spirit)께서 자신과 베드로에게 한 가지 멧세지를 전파할 능력을 주셨다고 한다. 그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사역을 하나님께 공히 인정받았고 또한 확정받았다.

9절에서 우리는 교회의 기둥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바울에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인지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와 ”교제의 악수”를 나누었다. 오늘날 우리는 어느 누구하고라도 악수를 나눈다. 오늘날의 악수에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 오른손으로 악수를 하는 행위는 약속과 신뢰 및 우정의 증표였다. 그것은 단순한 인사가 아닌, 코이노니아(ko-inoaia)의 악수였다.

코이노니아라는 말에서 파생된 인칭 명사를 우리는 ”동역자”(par-tner)로 번역한다.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인 베드로와 야고보 및 요한은 바울을 ”동역자”로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렇게 바울의 복음이 받아들여졌다면 그의 사도 자격 또한 인정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과 교제의 악수를 나누며 피차 동역자인 것을 확인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대주의자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 상상해 보라. 그들에게 있어 그 순간은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10절은 간략하지만, 중대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바울이 가르친 교리와, 사도로서 부름받은 것을 일체의 의심없이 기꺼이 받아들인 예루살렘 교회는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그에게 부탁했다.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몹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예루살렘 시내에는 궁핍한 사람의 수가 엄청나게 많았고 그 중에는 예루살렘에 오기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긁어 모아야 했던 순례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중 몇몇은 예루살렘에 체류하는 동안구원을 받고, 고향에 다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그곳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 계속 머무르기를 원했는데, 그들에게는 생계 유지 수단이 없다는게 문제였다. 결국 그들의 구제기금은 외부로부터의 도움으로 충당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바울은 그러한 일에 있어서 아주 모본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남을 돕는 일에 큰 행복을 느꼈다. 바른 교리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반드시 실제적인 사랑과 관심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지론이었다. 선교 사역 전 과정을 통해 그는 항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잃지 않았으며, 또 그러한 사람을 돌보도록 교회에게 부탁한 것을 알 수 있다(고전 16장 / 고후 9장 / 롬 15장 참조).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한 예루살렘 교회의 호소는 역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덕목으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많지만, 그러한 일에 관심을 잃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책임을 도외시하는 경향도 많이 있는 듯하다. 우리는 자신의 관심거리에만 몰두하여 바쁜 나머지 참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지, 또한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무시하고 간과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교리에는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실천적인 삶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궁핍에 처한 자들을 보고도 긍휼을 베풀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굳게 믿고 있다고 말하는 교리를 스스로 부인하는 셈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상에서처럼 우리는 갈라디아서 2장 1-10절에서 바울이 자기생애의 중심 사건, 즉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 앞에서 유대주의자들과 벌였던 ”최종 담판”(행 15장 참조)을 회고하고 있음을 볼 수있다. 이 단락에서 우리는 바울에 관한 어떤 사실, 그리고 그가 직면하고 있었던 갈등의 문제들에 대해 알게 된다. 또한 사도들이 어떠한 권위를 갖고 있었는지, 그리고 바울이 어떻게 그 권위를 충분히 누렸는지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은혜의 복음이 온전히 방어되고 변론된 것 또한 알게 된다.

 


이상의 모든 사실들로부터 우리는 신약의 일치(통일성)에 관한 아름다운 그림, 즉 바울의 신학도 아니고 베드로의 신학도 아니고 요한이나 야고보의 신학도 아닌, 이 모든 자들에게 제시된 하나님의 신학에 대한 아름다운 정경을 보게 되는 것이다.

 

 

 

● 갈라디아서 2:11-21

 


4.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체험과 초기 사역을 술회하면서,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신적(神的) 기원 및 독자성」을 천명했다(갈 1:1-24). 다음으로, 예루살렘에서 유대주의자들과 벌였던 최종 담판을 술회하면서, 그는 어떻게 교회의 최고 지도자들로부터 자신의 사도직을 공식으로 인정받게 되었는가를 밝혔다(갈 2:1-10).

 


본 단락에서 우리는 그가 사도로서 가졌던 확신을 기술해 놓은 것을 본다. 여기서 바울은 베드로와의 사이에 있었던 갈등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사도 자격을 극적으로 변론하고 있다. 바울의 이러한 논증은 자신의 사도직이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탁월한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베드로와 충돌한 바울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갈라디아서 2:11-14).

 


베드로와 바울은 둘 다 그리스도인이요, 사도였다. 그리고 둘 다 온 교회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그러한 권위를 부여받은 자들이었다. 그런데도 여기 보면, 그들 사이에 불일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1절의 ”면책하였노라”(opposed)는 말에 주목해 보도록 하자. 본래 그것은 ”반대 입장에 선다”(혹은 반대하다. to set oneself aga-inst)는 뜻으로서, 상대방이 먼저 어떤 공격을 해오면 그것을 방어하는 입장에 선다는 의미로 통상 사용된다.

바울의 눈에는 베드로가 하는 것이 은혜의 복음을 공격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사실상 베드로의 입장에서 그것은 바울이 생각했던 것처럼 은혜의 복음을 공격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다만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권위를 방어하려는 뜻으로 이 사건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베드로는 욥바에 있는 시몬의 집에서의 체험 이후(행 10장 참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일(친교를 나누는 일)을 시작했다. 갈라디아서 2장 12절의 ”먹다”(used to eat)라는 말은 동작이 계속되는 미완료 시제로 쓰여 있다. 베드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례적(異例的)으로 한 두 끼만 함께 식사한 것이 아니라, 계속 그런 습관을 가져 왔었다. 베드로는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가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막 7:19/ 행 10:9-18 참조).

과거의 유대인들은 결코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대하지 않았었다.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에 대한 구약의 규례들은 그 같은 것을 금해왔다. 또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제약들도 랍비들에 의해전수되어 역시 그 같은 일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사실, 이방인과 더불어 식사를 한 유대인은 자연스럽게 사악한 자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금지 조항을 폐하셨다.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은 무너지고 교회는 하나가 되었으니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없이 모두가 다 사랑의 애찬과 성찬(the love feast and communion)에 참예할 수 있게 되었다. 베드로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처음 안디옥에 도착했을 때 이 하나(unity)가 되는 대열에 즉시 뛰어들었던 것이다. 이는 이제 그들 모두가 한 형제이기 때문이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이며 우리 주님의 친동생인 야고보는 경건한 사람이어서, 그러한 조화가 있는 곳에 결코 혼돈을 야기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야고보가 보내서 왔다면서 안디옥에 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예루살렘에서 온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주장했지만(12절), 사실은 유대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할례자들이요, 율법 체계(legal system)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부과하려 했던 유대주의자들이었다. 지난 날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야고보에 의해 거절당한 바 있는 안건들을 제출한 자들이 바로 이 유대주의자들이었다(행 15:19 참조).

이들 유대주의자들이 안디옥에 와서 유대인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해서는 안 된다고 했을 때 이러한 요구는 베드로를 어쩐지 위축되게 만들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그 할례주의자들의 주장이 잘못임을 알면서도 두려워하여 물러나 이방인 신자들을 멀리하게 되었다. 베드로는 그 스스로의 행동에 의해 정죄를 받게 된 것이다.

자기 자신의 행동 때문에 스스로를 정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미술관에 가서 유명한 걸작을 보고 ”웬지 그림이 포근한 감이 없고 으시시하기만 한데”라고 했다 하자. 그 행동은 그 그림을 정죄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나 자신을 정죄하는 셈이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나의 언행은 예술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뚜렷이 증명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한 가지 더 들어 보자면, 어느 유명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대교향곡을 듣고 난 후 그 연주장을 빠져나오면서, ”어휴, 무슨 음악이 이렇게 시끌벅적하담”이라고 말했다면, 또 다시 나는 그 곡을 정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정죄하는 셈이 된다. 그것은, 나의 그러한 행동은 도무지 음악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나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드로의 행동은 베드로 그 자신을 정죄하였다. 그는 아마도 왜 자신이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함께 먹을 수 없는지에 대해 구구한 변명을 늘어 놓으며 그 자리를 물러났을 것이다.

12절의 ”물러가매”라는 말은 군사 훈련의 작전 용어로 쓰이는 헬라어 단어를 번역한 것으로서, 여기서는 미완료 시제로 쓰여 점차적인 후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베드로가 그 자리를 물러날 때 단호히 물러가지 않고 엉거주춤 머뭇거리며 서서히 물러간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떠나”라는 말 역시 미완료형으로서, 베드로가 우물쭈물 그 자리를 피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베드로는 이방인들로부터의 초대에 응하는 것을 중지하고, 조용히 그 자리를 빠져나간 것이다.

베드로는 무엇을 두려워했는가? 그는 유대주의자들과 반목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또한 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동지들에게 자신에 관한 나쁜 얘기를 전하는 것도 꺼려했었다. 베드로는 분명 유대인 중에서의 명성과 인기를 유지하려는데 관심을 두었고, 그러한 동기에서 그 같은 행동을 보였던 것이다.

바울은 베드로의 그 같은 행동을 은혜의 복음에 관한 심각한 공격행위로 보았다. 그때 베드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음식을 먹는 일(아마도 식사뿐만 아니라 애찬을 나누는 일이나 성찬까지라도 포함하여)을 거절하므로써 즉시 유대주의자들이 계략에 빠져들었다. 베드로의 그 같은 거부에 주의 만찬이 포함됐다는 것은 사태를 훨씬 심각하게 만들었다(고전 10:17 참조).

오늘날도 극도의 성결(Super-holy)과 성별(super-separated)을 위해 독립적인 교제를 갖기 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들이 하고 있는 행동이 그 옛날 베드로가 행했던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불일치는 세상에 대해 왜곡된 '그리스도의 몸'(the Body of Christ)의 모습을 보여 줄 뿐이다.

베드로의 이탈 결과, 안디옥 교회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베드로를 따라 위선적인 행위를 하게 되었다. 여기 13절의 「외식」(hypo-crisy)이라는 단어는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감추는 것”을 의미한다.

이 외식이라는 단어의 헬라어를 문자적으로 직역한다면 ”...아래서 대답한다”는 뜻으로서, 이는 연극 무대에서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연극 배우를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배우들은 극중 인물을 나타내는 가면을 쓰고 연기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외식하는 자”라는 단어는 자신의 진실된 생각이나 감정을 감추는 자, 즉 사기꾼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바나바조차도 위선에 빠지게 되었다(13절 참조). 바나바의 이탈은 안디옥 교회의 최후의 보루가 무너지는 격이었다. 안디옥 교회의 목회자(pastor) 중의 한 사람인 바나바도 교회가 반쪽으로 쪼개지는 일을 거들었다니! 이는 아름다운 사랑의 연합을 이룬 안디옥 교회에 발생한 지극히 슬프고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제 그들은 모두 율법주의의 외식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비록 위대한 복음의 사역자라 할지라도 심각한 실수를 범할 수가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결코 오류가 없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렇지 못하다. 이것은 인간에게 무오성(無誤性)의 옷을 입혀 주는 행위에 대한 하나의 경고이다. 우리는 베드로의 경우를 통해서, 복음을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즉, 「우리는 기꺼이 복음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바울은 은혜와 구원 및 자유의 진리를 옹호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순결을 위해서도 싸우고 있다. 14절에서 바울이 ”베드로와 그 나머지 사람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한다”고 했을 때, 그는 그들이 ”똑바른 걸음으로” 걷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진리와 같은 방향에 머물지 않았다. 베드로는 그 진리를 알았고, 또한 그것을 믿었다. 이는 사도행전 10장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자신이 진리라고 믿고 있었던 것을 그의 행위로써 스스로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가 범한 이 외식의 문제를 그들 모두 앞에 내놓고 있다. 일찌기 어거스틴은 공적으로 저지른 잘못을 은밀히 바로잡는 것은 별로 이롭지 못하다고 말했다. 어거스틴의 견해는 옳다. 공적인 죄는 공적인 기준에 근거하여 처리해야만 한다(마 18:17 / 딤전 5:20 참조). 교회의 신임성(credibility)은 행동이라는 토대 위에서 확립되어져야 한다. 만약 우리가 성결과 경건과 순결에 대해서 설교하면서도 권징(혹은 치리 : discipline)에 대한 규정을 정해 놓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하는 말을 가볍게 여길 것이다. 바울은 이 경우에 있어 교회를 위한 고무적인 본보기를 확립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인물로 부각되고 있는 한 사람의 외식의 가면을 공공연하게 벗겨 낸 것이다.

14절에서 사실상 바울은 베드로를 향하여 ”너는 분명 유대인의 율법을 버리고 이방인처럼 살고 있지 않느냐? 그런데 이제 갑자기 옛날로 되돌아가고 싶은듯 이방인들이 유대인처럼 살도록 강요하는 까닭이 뭐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의롭게 된다는 것의 의미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5, 16).

바울은 베드로가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인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가르침을 거스린 사실을 들어 책망한 후, 그것과 연관해서 15절 이하를 기록하고 있다. 15, 16절에서 바울은 그와 베드로(”우리”)는 나면서부터 유대인이요 결코 이방 죄인이 아니지만, 아무리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도 역시 놀라운 계시가 주어졌으니 곧 구원받기 위한 유일한 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이라는 사실을 천명하고 있다.

유대주의자들도 믿음을 가지는 데는 기꺼이 찬동했지만 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여전히 행위를 고집하였다. ”만일 네가 계명을 지킨다면... 할례를 받는다면...유대주의를 받아들인다면 ...금식하고, 기도하고, 또한 구제를 행한다면... 만일 네가 이 모든 것을 행한다면 너는 너의 목적하는 바를 이루게 될 것이요, 또한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그들은 말한다.

바울은 16절에서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만이 가능하며, 그것이 유일한 「하나님의 방법」임을 세 차례나 강조하고 있다. 바울의 첫번째 설명은「일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사람은 모두 똑같은 길, 즉 믿음으로 인해 의롭게 되는 길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두번째의 설명은 「개인적」(personal)인 성격을 띠고 있다.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유대인이라는 신분상의 유리한 점, 그리고 율법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베드로나 바울이라 할지라도 오직 믿음으로써만 의롭게 되어야 했다.

세번째의 그의 설명은 「보편적」(universl)인 성격을 띠고 있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시편 143편 2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 ”육체”(flesh)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한 사람도 예외가 없는 「모든 사람」(all mankind)을 언급하는 강한 어조를 띤 용어이다.

모든 세대는 수 세기 전 빌닷이 물었던 것과 똑같은 물음을 묻고 있다.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욥 25:4).

확실히 이러한 물음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심적 상처 중에는 죄의식이라는 것이 있다. 사람은 모두 죄의식을 느낀다. 그래서 이 방법, 저 방법으로 죄의식을 줄여 보려고 애를 쓴다. 어떤 이들은 자기 확신(self-confi-dense)과 적극적인 사고(positive thinking)로 그러한 죄의식을 극복하려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약물이나 술을 마심으로써, 혹은 어떤 다른 도피처를 찾아 다님으로써 그러한 죄의식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친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든지 그들은 여전히 죄의식을 느낀다.

미개한 사람들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어떤 신(神)을 달래려고 시도할지도 모른다. 문명 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은 정신 분석학(psychoanalysis)을 통해 죄의식에서 벗어날 방도를 찾으려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개인이든 문명인이든 결국은 그러한 방법이 죄의식을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고 고통스럽게 외치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사랑이 필요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용납(acce-ptance)이요, 용서(forgiveness)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기쁜 소식이 진리로 드높이 울려 퍼지는 때는 바로 그 때이다. 하나님의 목소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에게로 나오는 모든 자들에게 사랑과 용납과 용서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성경의 핵심(core)이요, 또한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나는 죄인이니 내가 어떻게 해야만 하나님께 이를 수 있을꼬?”라고 탄식하며 번민에 빠져 있는 인간들에 대한 유일한 답변이다. 베드로는 사람이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믿음으로써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왜곡하고, 혼잡케 하는 일을 저질렀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한 행동을 반격하여 나섰고 결국 그의 말은 칭의의 교리를 제시하는 것이 되었다.

 


율법에 대해 ”죽고” ...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17-21)

17-21절까지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 바울은 여전히 베드로와 바나바의 일관성 없는 태도를 언급하면서, 17절에서 보는 것처럼 그것을 통해 아주 중요한 문제를 날카롭게 꿰뚫어 보고 있다.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더 이상 분리 내지 구별되지 않고 하나로 연합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서 그 자신을 분리시킴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로 연합되는 것을 죄로 단정하는 유대주의자들에게 동조하였다. 그것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죄악의 앞잡이로 단정짓는 것과 마찬가지의 행위이다.

바울은 어떤 가능성을 가장 강력하게 부정하는 헬라어를 사용하여 17절을 끝맺고 있다.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는 ”하나님께서 금하셨다”는 말과 같다. 18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아닌 그 「자신」을 예로 들어 말함으로써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 보이고 있다. 즉, 만일 그가 율법에서 떠나 은혜를 받아들였으면서도 다시금 율법으로 되돌아가려 한다면, 그는 스스로를 범법자(the sinner)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유대주의자들이 율법에 집착하는 태도는 그들 자신을 범법자로 만들 뿐이었다. 바울은 결코 율법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그러기에 그는 깊은 확신을 갖고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19절)라고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바울은 그가 은혜에 대하여, 곧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 이르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결코 율법주의의 체계로 돌아갈 수 없음을 선언하고 있다. 만일 율법에 철저히 순종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바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율법을 앎으로써얻었던 것은 죽음뿐이었다고 그는 19절에서 말한다. 율법이 그에게 해줄 수 있었던 것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그로 하여금 깨닫게 해준 것이 전부였다. 율법은 그를 죽였던 것이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러한 생각을 좀더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는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고 선언한다. 이 말은 ”나는 죄인인고로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다음으로 로마서 7장 1절에서는 사람이 사는 날 동안 율법이 어떻게 그 사람을 지배하는가를 설명한다. 하지만 바울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이 그 자신을 주장할 수 없었다.

바울이 말하는 바를 좀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어 생각해 보기로 하자. 가령 당신이 죽을 죄를 지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율법은 당신을 유죄로 선고하고 단 한번 당신을 죽일 권한을 가지게 된다. 이제 그들이 당신을 가스실에 집어넣고 가스를 풀었다고 하자. 얼마 후 사형 집행인이 당신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문을 열고 들어와 당신의 몸을 만지려는 순간, 갑자기 당신의 몸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눈을 비비며 일어나 ”다시 살게 되다니, 이 얼마나 좋은가!”라고 말한다. 물론, 그 사형 집행인은 기절을 하고, 당신은 이제 당신에 대해 아무런 것도 주장할 수 없는 율법을 그 방에 남겨 놓고 그 방을 유유히 빠져나온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율법은 당신이 사는 동안 당신을 주장한다. 그러나 당신이 죽으면, 율법의 주장은 무효가 된다. 만약 죽음을 겪고 난 후 당신이 다시 살아난다면 율법은 더 이상 당신을 주장할 수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20절)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을 때 그(바울)도 또한 못박혀 죽었다는 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실 때에 바울도 영적으로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 그는 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게” 되었다.

 


여기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말의 시제는 완료 시제로서 과거에 완성된 동작이 현재에 그 결과로 남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그 결과 지금도 여전히 그 은혜를 힘입고 있는 것이다. 이제 사는 것은 더 이상 바울이 아니다. 바울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그리고 바울에게 일어난 이 일은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일어났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나를 통하여 그분의 신적인 삶(divine life)을 사신다니 이 얼마나 감격스러우며 신비로운 일인가! 바울이 에베소서 3장 20절에서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라고 말한 것과 베드로가 베드로후서 1장 4절에서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들이라고 말한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지만 여전히 살아 있고, 이제 내가 육체를 입고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여 나 대신 자기를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사는 삶으로 전환되었다! 바울이 골로새서 1장 27절에서 말한 것같이, 그리스도는 내 안에 살아 계시고 또한 영광에 대한 나의 소망이시다.

나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거나 애쓸 필요가 없다. 나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지 알고 있다. 그분은 내 안에 살아 계신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다는 것은 다만 내 안에 임재해 계신 그분께 무릎을 꿇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21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의로움이 하늘로부터의 선물임을 새삼 실감하는 말로써 이야기를 끝맺고 있다. 그가 의를 얻기 위하여 행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그는 그 의를 받아들인 것 뿐이었다. 만일 그가 자신의 의를 얻기 위해서 애를 썼다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했을(혹은 소멸시켰을) 것이다. 바울은 ”나는 결코 율법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만일 내가 그같이 행한다면 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요, 만일 그 같은 일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의 2대 지주(支柱)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 은혜를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실재(實在)로 만들었다. 만일 자기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교의 근본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즉,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이다.

종교 개혁의 투사 마르틴 루터는 교회의 규율(discipline)과 고해성사(penance) 및 고행(苦行)을 위한 자아부정(self-denial)에 완전한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었다.

마르틴 루터는 그 모든 것을 힘써 행했다. 채찍으로 그 자신을 때리기도 하고, 손과 무릎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거친 돌계단을 오르기도 하였다. 그는 연옥(煉獄) 행의 판결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 년 동안 분투 노력하였으며, 공로(merit)를 쌓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그는 ”의롭다 함”(justification)을 얻기 위하여 노예처럼 애써 노력했지만 행위로써는 아무 도움도 얻지 못했다. 결국 그는 절망에 빠지게 되었고, 바로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말씀을 가지고 그를 찾으셨다. 루터는 그 말씀을 믿었고, 그때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율법주의의 장벽은 무너져 내렸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살아 있고,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안에 살아계셔서 세상을 변화시킨 일을 하게 하셨다.

 

 

 

● 갈라디아서 3:1-18

 


5.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이제껏 바울은 그의 사도직의 신빙성 및 권위를 확증하는 데 주력해왔다. 이제 그는 갈라디아서의 교리편이라 할 수 있는 3장을 시작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해 얻는 구원을 정죄하였던 유대주의자들에게 완전한 대답을 주고 있다. 또한, 그는 체험적인, 그리고 성경적인 입장에 서서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를 변호한다.

 


바울은 3장을 시작하자마자 진리를 배울 기회를 활용치 못한 사람들에 대해 많은 말을 한다. 이 점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하게 적용되는 문제이다. 우리의 신앙은 감정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지성(minds) 안에서 확립되어야 한다. 그러면 감정적인 것은 자연히 그 결과로 뒤따라 온다.

 


에베소서 4장 23절에서 바울은,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고 쓰고 있다. 믿음으로써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사람임에도 성경을 고찰하며 그것의 입장에 비추어 자신들의 추구하는 바들을 비교, 검토하는 데 관심을 쏟지 않은 탓으로 율법주의적인 제도에 빠져들어가고 마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사단에게 감정을 희롱당하고 있는, 이른 바 「전문적인 부흥사」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의 토양에 뿌리내릴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우리를 거짓 교리로부터 보호하는 최적의 방편이 된다.

 


갈라디아 신자들의 체험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갈 3:1-5).

바울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말한 것은 아마도 그들의 행동에 대한 놀라움과 분노가 그들에 대한 애정과 뒤섞여서 나온 말일 것이다. ”어리석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생각하지 않는 자”를 의미한다. 필립스는 그것을 ”이 천치들아”(you dear idiots)라고 번역했다. 바울은 그들이 지능이 모자라는 것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능을 사용하지 않은 것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좀더 현대적인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갈라디아의 신자들은 멍텅구리처럼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답답하게도, 유대주의자들이 율법주의에 관해 떠드는 소리들을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도무지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을 성경에 비추어 충분히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들은 ”품질보증”(sinceriry)의 상표를 많이 갖다 붙인, 유대주의자들의 교묘한 상술에 넘어가고 만 것이다.

갈라디아 신자들이 당한 경우는 오늘날의 사람들이 사이비 종교와 거짓 교리들에 어떻게 빠져 들어가는지를 보여 주는 생생한 예가 된다. 그들은 그들의 느낌(feelings)에 의존하고, 또한 그들의 마음과 환상 및 일시적인 기분을 추구한다. 그들은 지금 자신이 추구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한 성경 연구에 관심이 없고, 자신이 생각하고 추구하는 바를 성경의 진리와 비교해 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이단들의 온갖 감언이설(甘言利說)에 현혹되어 ”저 사람들은 참으로 훌륭한 사람들이야, ... 오! 그래, 저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것들도 매우 좋은 것들임에 틀림없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당신이 교묘히 포장된 이단의 물건들을 사게 될 때, 거기에는 반드시 당신을 나꿔 챌 갈고리가 그 끝에 감추어져 있다. 전적으로 잘못된 정보, 전적인 비진리(untruth)도 그럴 듯한 포장과 유창한 상술로써 당신 앞에 제시되면, 당신을 선동하여 그릇된 결정을 내리게 하고 또한 어리석은 짓을 하게 만든다. 히틀러(Hitler)는 이 점을 알고 그러한 방법을 이용하였다. 대개 광고업자들이나 정객들도 그 같은 방법을 이용하고 있다. 날렵한 자동차를 몰고 다니며 능란한 말솜씨로 엽색행각(獵色行脚)을 일삼는 플레이보이 타입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진리에 대하여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짓말에 대해서도 역시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의 지성이 진리 가운데 굳게 서 있다면 당신은 결코 요동하지 않을 것이다. 감정을 좇지 말고 지식(head)을 좇으라.

 


1하반절에서 바울은 사람들 앞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모습의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한다. 갈라디아인들은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모습에 제시된 복음을 공공연히 보았다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갈라디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처음 전한 것은 바울 자신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생하게 전파했고,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분을 눈으로 보듯 볼 수 있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 제사를 받아들였고 자신들의 죄와 이교 신앙을 버리고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왕국에 참여하는 왕국 백성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의 시제는 완료 수동 분사이다. 이런 형태의 표현은 현재에도 그 결과가 나타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언급할 때 쓰인다. 즉, 그리스도는 역사 속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바로 그 순간 그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일이다. 십자가 사건은 현재에도 그 결과가 나타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십자가의 사건은 죄를 대속해 주는 것으로서 계속되어야 한다. 일단 그리스도를 믿으면, 십자가가 멈춘 곳에서부터 다시 무엇을 시작하기 위해 어떤 부가적인 종교 의식을 행하지 못한다. 십자가의 역사는 결코 그치지 않는다. 십자가는 사람이 그 스스로의 힘으로써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세세토록 선포하는 산 증거로서 영원히 존재한다(행 13:39 참조).

2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어떻게 성령을 받게 되었는지를 묻고 있다. 그들은 성령을 받기 위해서 아무런 영적 훈련(gymnastics)도 받지 않았다. 그들은 단순히 믿었을 뿐이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은총이 그곳에 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된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한다(롬 8:16, 17 참조). 하나님께서는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자신의 성령을 주신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께 나아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쁘게 받으셨다는 증거로서, 그리고 영원한 구원의 절대적인 보증으로서 성령을 주신다.

에베소서 1장 13, 14절에서 바울은 성령을 가리켜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라고 한다. 「보증」이라 번역된 헬라어는 ”첫 지불액, 혹은 첫번째 불입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또한 ”약혼 반지”를 언급할 때에도 이 「보증」이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당신이 구원을 얻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나는 네게 줄 유산이 있지. 자, 이제 그 보증으로 이 약혼 반지를 끼워 주마” 하시며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 그렇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장차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예할 그리스도의 신부의 지체로서(계 19:7-9) 그것의 보증인 약혼 반지, 곧 성령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율법주의를 필요로 했느냐? 아니면 성령을 받기 위해 율법주의를 필요로 했단 말이냐? 왜 머리를 쓰지 않느냐? 머리를 써서 생각 좀 해봐라!”고 요구한다. 이에 대한 대답은 자명(自明)하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성령을 받았다. 율법은 성령을 주지 못한다. 성령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만 온다.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목표(goal)가 아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삶인 원천(源泉 : source)이다.」

 


3절에서 바울은 다시 갈라디아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왜 그리도 어리석으냐?”고 꾸짖고 있다. 약간은 빈정거리는 투로, ”성령으로 출발해 놓고서 이제 마음을 바꿔 더 좋은 것이 없나 네 마음대로 찾아 나서는 그 꼴이 뭐냐?”고 그는 묻고 있다.

여기서, 구원을 얻기 위해 행위(works)를 신뢰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과의 차이를 구별짓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는 우리를 선행으로 이끈다. 율법은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네가 살리라”고 말한다. 반면, 신약은 ”생명을 얻으라! 그러면 이것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말한다. 착한 행실은 구원받았다는 데 대한 확증(確證)이다.

오늘날 착한 행실에 관해 얘기할 때 우리는 보통 착한 행위들 곧, 사람을 돕는다거나 가치있는 목적을 위해 일하는 기관이나 단체에 기부금을 내는 행위들을 생각한다. 하지만 유대주의자들은 이러한 윤리적 행동에는 관심조차 없었고, 할례와 같은 의식을 통해 행해진 율법의 행위만을 가치있는 것으로 간주했었다.

4절의 ”괴로움”(suffer)이라는 단어는 애매한 용어 ”괴로움”이라기보다는 ”체험”(expierience)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이 단어는 4절의 핵심적인 단어이다. 바울은 ”너희는 체험으로 깨달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냐?”고 말하고 있다. 갈라디아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체험했으며, 또한 충만한 성령의 은사를 체험했었다. 그런데 그 모든 체험이 이제는 필요없게 되었단 말인가?

5절에서 바울은 성령을 보내 주시고 갈라디아인들 가운데서 이적을 행사하신 분, 곧 아버지 하나님을 언급한다. ”주시고”(provided)라는 단어는 풍성히 공급하는 것을 뜻한다. ”주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흥미로운 배경을 갖고 있다. 헬라의 고전 작품들을 보면, 연극의 배경 음악을 위해 고용한 합창단에게 매우 높은 할당금(propo-sition)을 지불하는 사람을 묘사할 때 이 말이 사용되었다.

또한 바울이 살던 당시는 결혼을 약속할 때 남편될 사람이 그의 아내될 사람을 사랑한 나머지 그녀에게 주기로 약속한 지원금을 언급할 때에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모든 것을 후히 공급하며 또한 기쁘게 돌본다는 의미와 관련이 있다. 여기 갈라디아서 3장 5절의 ”주시고”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믿는 자들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그들에게 풍성히 주심을 나타낸다.

 


성경적인 증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갈 3:6-12).

 


6절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그의 논거(argument)를 입증하기 위해서 한층 더 높은 권위인 성경으로 주의를 돌리고 있다. 그때에 바울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성경은 오직 구약뿐이었고,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교리를 변호하기 위한 최고의 것으로 그것을 사용했다.

바울의 이러한 태도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구약은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일관성이 있으신 분이다. ”어느 때를 막론하고 「구원은 반드시 믿음으로써만」 받을 수 있지, 결코 의의 행위로써는 받을 수 없다.”

물론,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및 재림을 믿도록 요구받은 사실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계시하셨던 것만큼의 내용을 믿어야 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믿도록 요구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당신이 구약 시대에 살았다 해도 오늘날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당신 자신을 의롭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6-9절에서 바울은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증거하기 위해 성경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오셔서, 알지 못할 먼 목적지를 향해 떠나라고 하셨다(창 12장 참조).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75세요, 그 땅에는 그의 조상들의 뼈가 묻혀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그리하여 의롭다 함을 받게 되었다(창 15:6 참조). 후에 그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은 증표로서 할례를 받았다.

유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아브라함의 할례를 사용하였다. 그들은 구원의 궁극적인 표를 받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처럼 할례를 받으라고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고집하였다. 바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선언받은 지 14년이 지난 후에야 할례를 받았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창 15:1-6 / 17:24-26 비교). 아브라함이 할례라는 육체적인 표를 받은 갓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실 및 이스라엘과 그들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과의 구별됨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창 17:10-14 참조).

이렇게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으며, 그 결과로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선언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6절). 오직 참된 신앙(의식의 외적 증표가 아닌)을 가진 자만이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손이다(7절).

그런데 유대주의자들은 구원받기 위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데 대한 핵심적 예로 역시 아브라함의 경우를 지적하여 당치도 않은 궤변을 늘어 놓고 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로서 왔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모세가 태어나기 「수 세기 전에」 살았던 인물이었다. 아브라함의 시대에는 율법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율법에 순종했기 때문이 아니라 믿었기 때문에 그를 구원하셨던(의롭다 하셨던) 것이다.

유대주의자들이 아브라함에 관해 과제(home work)를 작성했더라면, 그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전체 논거(論據)에 약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지상에 속한 언약의 표로서의 할례의 행위는 아브라함의 지위를 변화시키거나 향상시키지 못했다. 아브라함은 할례받기 수년 전,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수 세기 전에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받았다. 사람이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할례는 다만 지상(eathy)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식별하는 표일 뿐이다. 그러나 구원은 천상(heavenly), 곧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는 백성을 식별하는 표가 된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고, 그의 삶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방식을 설명해 주는 실례가 되었다. 또한 아브라함은, 구원은 영적이고 내적인 것이며 개인적인 것이라는 점을 보여 준 가장 모본적(模本的)인 인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든 백성들의 조상이다. 이는 혈통(race)이 아니라, 오직 영적인 하나됨(oneness)에 근거한 가계(家系)이다. 유대인의 자손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오직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가 아니면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 아니다.

8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을 당시, 하나님은 이방 민족도 믿음으로써 구원받을 것을 말씀하셨다고 밝히고 있다. 그들은 구원받기 위해 유대인이 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성경은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 같은 유대인이 될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창세기 12장 3절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으로써(행위가 아닌) 의롭게됨을 의지하는 자는 모두 아브라함과 같은 반열에 위치하는 신자가 된다고 성경을 근거로 하여 적극적으로 증거함으로써 자신의 논증을 요약하고 있다. 즉, 모두가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인 것이다.

10절에서부터 바울은 이신칭의에 대한 소극적인 증거를 구약 성경으로부터 인용하기 시작한다.

 


10절에서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을 겨냥하는 듯 신명기 27장 26절을 인용하면서, 어느 누구도 율법에 의해서는 의롭게 되지 못하며, 또한 구원받기 위해 율법을 의지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다고 선언한다. 율법주의에 속하여 살려고 애쓰는 자는 그 스스로를 「온(whole) 율법」에 묶어 놓은 셈이고 그렇게 사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를 받아 영원한 저주 아래 놓일 것이다.

11절에서 바울은 「이신칭의」의 교리를 확증하기 위해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는 구약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인용하고 있다. 12절에서 바울은 레위기 18장 5절의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로 인하여 살리라”는 말씀을 인용한다. 만일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율법을 신뢰하기로 했다면, 율법의 조문(letter) 하나하나를 빠뜨림없이, 그야말로 온 율법을 완전히 이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게 되어 있고 우리는 모두 그러한 경험을 갖고 있다.

율법을 실천함으로써 구원받으려는 사람은 크고 견고한 바위에 강한 사슬(chain)로 묶여져 있는 배와 같다. 어느 날 무시무시한 폭풍우가 몰려와서 그 강한 사슬의 고리를 하나라도 끊어 놓으면 그 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바울은 율법과 믿음은 상호 배치(排置)되며 결코 조화될 수 없는 것임을 밝힘으로써 율법에 대한 소망을 모두 근절시키고 있다. 율법과 믿음은 병행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저주받으신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갈 3:13-16).

13절에서 바울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받으려는 절망적인 사람들에게 한 영광스러운 치유책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를 제거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는 여기서도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라”(신 21:23)는 구약의 말씀을 언급한다. 유대인의 율법에 따르면, 사형 언도를 받은 범죄자는 보통 돌에 맞아 죽게 되어 있다. 그러면 그의 시체는 기둥이나 나무에 매달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것을 바라보는 자에게 그 범죄자의 죄를 알림과 동시에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해서였다. 범죄자는 나무에 달려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나무에 매달리게 되었다. 즉, 유대인들은 어떤 자가 나무에 달려 있는 것을 보면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아 죽게 된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의 메시야로 믿으려 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곧 ”나무에 달린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메시야가 어떻게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유대인들은 지극히 중대한 사실 한가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으신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우리의 죄악을 그 자신의 몸에 걸머지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저주를 받아 마땅할 죄인들이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담당하셨다. 만일 당신이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기를 원했다가 그것을 지키지 못한다면, 당신은 저주 아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오셔서 당신은 저주를 감당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서야 할 자리에 자신의 아들을 대신 세우셨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셨으며, 당신이 죽을 죽음을 대신 죽으셨으며, 또한 당신이 치러야 할 형벌을 대신 치러 주셨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는 모두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이다. 그분은 모든 인간이 의롭게 되어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기 원하신다.

15-18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율법의 요구에 비해 얼마나 탁월한지 확정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무 조건없는 약속을 주셨으니, 곧 아브라함의 허리에서부터 모든 사람이 복받게 될 씨(seed)가 나오리라고 말씀하셨다.

15절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15장으로 돌아가 언약이 어떻게 맺어지고 또 어떻게 견고해졌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아브람은 자기에게는 상속자가 될 자식이 없다고 하나님께 말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아이를 얻게 될 것이며 그는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을 갖게 될 것이고 또 그를 통해서 엄청난 축복이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순수한 약속이었다. 아브람은 다만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라는 대답밖에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암소와 암염소, 수양과 산비둘기 및 집비둘기를 취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람은 그것들을 가지고 와서 계약(agreement)을 확증하기 위해 피를 흘리는 방법대로 죽였다. 동방(東方)의 관습에 따르면, 두 사람이 계약을 맺었을 때 어린 양이나 암염소를 가져다가 그것의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나서는 함께 그 쪼갠 조각 사이를 지나가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피 흐르는 조각 사이를 지나감으로써 그들의 계약을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비준(比準)하는 것이다.

창세기 15장 12절 이하를 보면,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비를 마치고는 깊은 잠에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자 연기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이 쪼갠 조각 사이로 지나갔다고 했다. 타는 횃불과 연기나는 풀무는 곧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낸다. 아브람이 아닌 하나님만이 그 사이를 지나가셨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으셨음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그 자신과 더불어 친히」 계약을 맺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피로써 한 번 세우신 그 계약은 결코 취소될 수도 없고 그 무엇이 더해질수도 없다.

15절에서 바울은 사람의 언약이라 할지라도 한 번 맺었으면 아무도 무효로 돌리거나 덧붙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바울의 이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은 언약도 그러할진대 하나님께서 친히 그 자신과 세우시고 확정하신 언약은 더더욱 취소될 수도 없고 무엇이 덧붙여질 수도 없다는 강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율법은 언약을 침범하지 못하고 무효화시키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언약은 하나님에 의해 확정되었고, 아무도 그것을 변경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1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이 결코 불변하는 것은, 그 언약이 그리스도와 직접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더욱 분명히 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자손”(seed)이요, 만물의 단 하나 유일한 상속자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상속자이시다(골 1:16-19 참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의 자손이 축복에 이르는 열쇠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이 말씀하신 자손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렇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시다.

 


그렇다면 구약 시대 성도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다는 말인가? 그렇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모세와 아브라함 및 구약 시대 모든 성도들의 죄를 걸머지고 돌아가셨다는 의미에서 보면 분명 그렇다. 그분은 십자가 사건 이후 뿐만 아니라 십자가 사건 이전에 살던 모든 자들의 죄까지도 자신의 몸에 담당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인류의 전 역사를 포함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는 십자가 사건이후 뿐만 아니라 이전에 속한 사람들의 죄도 능히 덮어 주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유일하고도 전적으로 중요한 씨,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이 지켜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1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율법이 오기 전에 이미 있었고, 율법이 온 후 그리스도 안에서 이행되었기 때문에 율법조차도 하나님의 약속을 변경시킬 수 없다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라는 터 위에서 인간을 구원해 오셨다. 구원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에게만 허락되었으며, 또한 앞으로도 그리될 것이다.

18절에서 바울은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고 간단히 말함으로써 이제껏 논의해 온 논거의 결론을 짓는다. 구원은 믿음으로도 되고 행위로도 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완전한 유업, 충만한 구원은 오직 약속에 의해서만 온 것이라는 이론을 확립한다. 약속이 그 자체로서 완전한 것이라면 굳이 율법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 즉,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게 되는 것이지, 믿음도 필요하지만 또한 그에 못지 않게 행위도 필요하다는 주장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갈라디아인들은 둘 중의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야 했다.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실 때 그분께서 택하신 길을 택하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하리라(I will ...), 내가 ... 하리라, 내가 ...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모세에게는 ”너희는 ...하라(thou shalt...), 너희는 ...하라, 너희는... 하라”고 명령하셨다.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내가 ...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은혜 및 하나님의 주도권(initiative)과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에 관해 말하고 있다. 하지만, ”너희는... 하라”는 율법은 인간의 의무와 인간의 행위, 인간의 책임 및 인간의 행동과 인간의 복종에 관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은혜와 한 편이며 우리는 다만 믿음으로써 그 약속, 그 은혜를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율법은 행위와 한 편으로서 우리에게 오직 복종만을 요구한다. 「구원은 오직 그분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써 받게 된다.」

 

 

 

● 갈라디아서 3:19-29

 


6. 율법이란 무엇인가 ?

 

 

 

지금까지 바울은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 사상과, 행위를 덧붙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사상을 논박하는 데 최선을 기울여 왔었다. 이제 그는 한 가지 흥미로운 문제에 시선을 돌린다. 그는 ”만일 율법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변경하지 않는다면..., 만일 율법이 믿음의 원(原) 언약에 아무것도 더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율법은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흥미로운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3장 19-29절에서 바울은 율법의 열등함(inferiority)과 율법의 목적 및,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지적함으로써 그 질문에 답변을 주고 있다.

 


율법이 열등한 이유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갈 3:19-22).

율법이 주어지게 된 것은 사람의 범법(transgressions)때문이라는 사실을 바울은 지적함으로써 율법의 목적에 관한 그의 추론을 시작한다. NEB(The New English Bible)는 「범법한」이란 말을 ”그릇된 행위를 위법 행위로 만드는 것”으로 번역하고 있다. 율법은 인간이 「자의적(自意的)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항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안다. 양심이 그에게 그러한 사실을 말해 준다. 인간은 그 같은 범죄함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바로 그 율법을 명백히 위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율법은 심판자인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죄의식을 민감하게 느낄 수있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는 19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로 ”(그) 자손”이다. 율법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구세주, 곧 장차 오실 구속주(Deliverer)로서의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율법의 목적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만 유효한, 일시적인 목적이었던 것이다.

교회사 전체를 통하여, 유대주의자와 같은 자들은 늘 사실을 왜곡시켜 왔다. 율법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바로 그 율법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거룩한 존재로서 입증하려 하게 만든다! 그러나 율법은 사닥다리나 엘리베이터, 혹은 우리 자신을 끌어 올리기 위한 어떤 장치가 아니다. 율법은 하나의 거울이다. 당신은 거울에 비친 당신의 모습에서 잘못되거나 더럽거나 혹은 문제가 있는 부분을 발견한다. 거울은 단지 당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줄 뿐, 그 문제점을 해결해 줄만한 것은 가지고 있지 않다.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이라는 구절은율법이 왜 하나님의 약속보다 열등한지에 관해 보다 많은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백성들에게 직접 주시지 않았다. 그분은 그것을 먼저 천사들에게 주셨고 다음으로 모세에게 주셨으며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주셨다(행 7:52, 53 /히 2:1-3 참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주실 때 아브라함과 직접적으로 상대하셨으며, 심지어 아브라함을 친구로까지 부르셨다.

율법은 세 단계를 거쳐 인간에게 왔으나 하나님의 약속은 직접 왔다. 바울은 두 단계나 거쳐서 사람에게 주어진 율법을, 아브라함에게 직접 주어진 개인적인 선물인 언약과 대체시키지 말라고 갈라디아인들에게 주의를 주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중보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20절)고 말한다. 관계되는 사람이 한사람뿐이라면 중보자는 필요치 않다. 오직 두 사람(혹은 두 편)이 관계됐을 때에만 중재해 줄 사람이 요구된다.

위의 말은, 율법이 모세와 천사라는 중보자를 가졌기 때문에 그것은 두 편의 계약이었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만일 너희가 이것을 행한다면, 내가 이것을 행하리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율법의 특성(character)이다. 중보자를 통하여 맺은 어떤 법적 계약은 양 편 다 둘 사이에 맺은 협정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율법을 신뢰하는 자들은 그와 같은 입장에 처해 있다. 그들은 축복을 받기 위해서 온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바울은 율법이 열등하다는 사실에 또 한 가지 이유를 덧붙인다.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을 충족시키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될 만한 어떠한 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21절) 바울은 1장에서 자주 사용하였던 헬라어의 가장 강한 부정의 용어,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No! No! No!)는 말로 그 자신의 물음에 답변한다. 율법과 믿음은 기능이 서로 다르다. 만일 율법의 어떤 부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 있다면 우리의 의, 곧 우리가 의롭다 칭함받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율법이 이룬 것」은 모든 사람을 감옥에 집어 넣은 것뿐이다(22절). 우리는 체포되어 보석(保釋)을 받을 수조차 없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완전한 사면(赦免)을 받을 수있다. 그것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일뿐이다.

 


율법의 참목적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3:23, 24).

지금까지 바울은 율법의 역사에 관해 말해 왔다. 이제 23절에서 그는 그 역사적인 사실을 의인화하여 말하고 있다. 그는 ”우리”라는 인칭 대명사를 채용하여 율법을 각 개인의 경험에 직접 적용시키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첫째로 유대인인 ”우리”를 의미한다. 바울은 ”수세기 동안 우리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께서최종적으로 계시될 때까지 율법 아래 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라는 말의 역사적인 배경이긴 하지만 보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인 ”우리”로 넓게 생각해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는 우리 역시 하나님의 율법에 매인 종이었다.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율법에 의해 정죄를 받은 자들이었다. 기록된 율법을 알았든지 몰랐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에 속박되어 있던 자들이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율법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어떤 사람은 종이나 돌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양심에 씌어진 하나님의 율법을 갖고 있다. 어떤 형태의 율법을 가졌든 그것에 복속되어 있기는 모두 마찬가지이다. 생의 어느 한 순간,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하고 있으며 도저히 율법에서 도피할 방도가 없음을 깨닫게 될 바로 그때, 그 사람은 그리스도를 소개받을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느 날, 주일 예배 후에 한 젊은이가 나를 찾아와 내가 설교 중에 했던 말에 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그와 함께 앉아 몇 마디 얘기를 나누는 중에 나는 그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화제를 바꾸어 복음에 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이야기했던 그 모든 것에 대한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목사님, 저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제가 그것을 믿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저는 아직 그것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목사님, 저는 지금 제 모습 그대로가 좋다고 느끼는데요.”

결국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우리는 당신을 도울 수가 없군요. 당신이 당신의 비참함을 깨닫고 절망하기 전까지는 우리가 여기서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자 그 젊은 친구는 내 말 뜻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이상야릇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다. 그 젊은이가 ”저는 아직 그것에 대해 준비를 갖추고 있지 않아요”라고 대답한 것은 정말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계율들을 주시고 또한 내가 그러한 계율들을 어겼을 때 그에 적절히 반응할 수있도록 내게 양심을 주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렇지 않았으면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지옥으로 떨어지는 길에 서게 되었을 것이다. 수 년 전, 나는 대학에서 축구(풋보올) 선수로 활약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연습 도중 무릎을 다치게 되었다. 그 상처로 인해 나는 다음의 중요한 경기에 출전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 중요한 게임에서 뛰고 싶었다. 그래서 의사를 찾아가 무릎에 몇 대의 코티손 주사를 맞고, 경기 중 상처에 뿌리기 위해서 두 병의 국소마취제를 준비하여 돌아왔다. 그 후 나는 국소마취제에 의해 ”무감각해진” 무릎을 가지고 아무런 고통없이 전 경기를 뛸 수 있었다. 경기를 마친 후, 처음에는 기분이 상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 나는 무릎 안쪽이 갈기갈기 찢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고, 일평생 고통당할 상처를 무릎에 입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설치하신, 육체적인 아픔이라는 내장(內裝)된 경고 체계를 무시하고 무리를 한 탓으로 요즘도 여전히 약한 무릎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내가 당한 경우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양심에 경고하시는 경우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양심은 우리가 잘못되어 가고 있을 때 그것을 경고해 주고 방지해 주는 하나의 체계인 것이다.

23절에서 바울은 율법을 묘사하기 위해 의미가 비슷한 두 단어, ”매인 바 되고”, ”갇혔느니라”를 사용하고 있다. 첫째로, ”매인 바 되고”는 율법이 감옥과 같은 것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매인 바 되고”라 번역된 헬라어는 보호 구치(拘置)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본래 이 단어는 그 도시의 거주민들을 외부의 적으로부터 차단하기 위해 차폐된 도시를 말할 때 사용되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율법은 사람을 생포하고 있다. 거기에는 탈출구가 없다. 자유롭게 될 방도도, 그 속박을 파기할 길도 없다.

 


둘째로, 23절의 「갇혔느니라」라고 번역된 헬라어를 문자적으로직역하면 ”에워싸다”, 혹은 ”가두다”는 뜻이다.

위의 두 동사는 둘 다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들이 사람을 탈출구가 전혀 없는 교도소에 집어 넣어 보호하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계시될 믿음”을 통하여 사면하실 날만을 기다리며 죽음의 대열에 서 있었던 자들이었다. 그 사면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오게 될 것이었다.

24절에서 바울은 율법을 묘사하기 위해서 「파이다고고스」(paidago-gos)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어떤 역본들은 이 단어를 ”학교 선생님”으로 번역했고 또 어떤 역본들은 ”가정 교사”로 번역했다. 헬라 문화에 있어서 「파이다고고스」는 교사가 아니었다. 그는 어린 소년들의 관리인이었다. 일반적으로 그는 어린 소년들에게 복종과 자기 단련(self-discipline)을 가르치고 매일 학교에도 데려다 주는 임무를 가진 노예였다. 그는 훈육관으로서, 이 점은 우리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을 시사(示唆)해 주고 있다. 「파이다고고스」는 회초리를 가지고 다니면서 소년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는 그것으로 그들을 다스렸었다. 이 점이 바로 율법의 역할과 같은 점이다. 율법은 「파이다고고스」이다. 그것은 우리를 징계하며 또한 우리의 마음이 믿음의 복음 안에 있는 자유를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키는 일을 한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소년들은 얼른 어른이 되어 「파이다고고스」의 손길에서 벗어나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는 자유를 체험해 보고 싶어한다. 「파이다고고스」와 소년들과의 이러한 관계는 우리와 율법과의 관계를 잘 나타내 준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복음을 통하여 오는 자유에 대한 욕구를 갖게 한다.

「파이다고고스」와 관련해서 든 또 하나의 아름다운 개념을 생각할 수있다. 「파이다고고스」의 의무 가운데는 소년들을 학교에 데리고 가는 일도 있었다. 바울은 이와 비슷한 형태로 율법이 우리를 대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우리로 하여금 의롭다 함을 받게 한다고 말한다. 율법은 어느 누구를 구원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율법은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로 그들을 인도하는 일만을 맡았을 뿐이다. 구약 시대의 율법, 곧 의식과 제사, 일종의 번제 및 희생제사와 제물, 절기들을 살펴보라.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표상들이다. 의식법(the ceremonial law)은 구세주가 될 수 없지만 중요성은 여전하다.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에서 존 번연(John Bunyon)은 집으로 되돌아오는 길에 있는 순례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순례자는 누더기 옷을 걸쳐 입고 등에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그는 책(하나님의 율법을 설명하고 있는) 한 권을 읽고 있었는데 그 책을 읽으면서 너무 괴로운 나머지, ”장차 나는 어찌해야 된단 말인가?”라고 크게 탄식한다.

 


그 때에 전도자(Evangelist)라고 하는 또다른 인물이 등장하여 순례자에게 ”저기 저 빛이 보입니까? 그 빛 너머에 있는 작은 문과, 그 작은 문 너머에 있는 언덕, 그리고 그 언덕 꼭대기에 있는 십자가가 보입니까? 만일 당신이 그 십자가가 있는 곳까지 이를 수 있다면 당신의 그 무거운 짐은 벗겨질 것이요, 당신은 빛과 생명과 구원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순례자를 부추켜 그가 가던 길, 곧 십자가를 향한 그 순례여정을 계속하도록 힘을 주는 말이었다. 순례자는 하나님의 율법 앞에 섰을 때, 절망 중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어찌해야 할꼬?”하고 탄식했었다. 그런데 율법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물음에의 해답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향하게 했다.

이상의 내용은, 율법이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님께 이르는 길을 가리켜 주는 길잡이임을 나타내기 위해 번연이 사용한 우의적(寓意的) 방법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미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5-29).

25절에 와서는 바울의 어조가 달라진다.

즉, 25절에서 바울은 우리로 하여금 율법에서 눈을 돌려 그리스도안에 속한 우리를 바라보게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의 가장 간단한 정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다. 당신이 지금 부처나, 공자, 혹은 마호멧의 가르침을 좇는 사람이라고 가정할 수는 있다. 하지만 부처나 공자 혹은 마호멧의 가르침을 좇는다고 해서 ”나는 부처 안에 있어”, ”나는 공자 안에 있어”, 혹은 ”나는 마호멧 안에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없다. 우리는 사람의 가르침을 좇는 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연합한 자들이다. 우리는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26절).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침례)를 받은” 자들이다(27절).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이다.

 


27절에서의바울의 주 관심사는 물세례(침례)가 아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속하는 것, 곧 그리스도 안에 잠기는 것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영적인 개념이지, 육체적인 개념이 아니다. 우리는 구원의 이적(異蹟)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된다(롬 6:1-10 /고전 6:17 참조).

하나님께서 신자를 바라보실 때, 그분은 신자 자신을 바라보시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바라보시는가? 그리스도다. 27절의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는 말은 바울 시대의 로마의 한 관습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로마의 관습에 따르면, 젊은이가 성년에 이를 때 행하는 성년례(成年禮)는 로마의 젊은이들의 생애 가운데 아주 중대한 의식이었다. 그는 그 성년례 때 이제는 어린이가 아니요, 어엿한 어른이라는 상징으로 성인복을 받는다. 이제 그는 그 성인복을 받아 입음으로써 그에 따르는 권리와 책임을 가진 성년이며, 완전한 시민으로 탈바꿈되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어린이 취급을 받지 않게 된다.

바울은 우리가 영적인 성년 예식을 통하여 그것의 상징인 성인복, 곧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 있으며, 우리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음으로써 더 이상 우리를 나타내거나 주장할 수 없는 자들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 연합 안에서 ”그의 죽음과 부활에로 세례(침례) 받은”1)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소유하신 의로 옷입는다.

 


1)헬라 원문에 보면 이 부분은 '그리스도 속으로 들어가 세례(침례)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역자 주

28절에서 바울은 그 당시로서는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사상을 전개한다.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당신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성차(性差)나 계급의 차등, 혹은 인종의 장벽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바울이 여기서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를 들어 비교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는 이러한 차별과 불평등이 그 시대에 만연된 현상이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저를 이방인이나 종이나 혹은 여자로 태어나지 않게 하심을 감사하나이다”라는 기도를 즐겨 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러한 편견을 바로잡기 위해서 유대인의 기도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인종의 차별이 없다. 사도행전 13장 1절에는 안디옥 교회 목회자의 명단이 실려 있다. 거기보면, ”니게르라고 하는 시므온”(Simeon who was called Niger)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흑인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사도행전 16장 1절에는 바울의 사랑받는 제자 디모데를 소개하고 있는데, 우리는 거기서 디모데가 혼혈아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계급의 차등이 없다. 야고보서 2장 1-9절은 만일 우리가 출세지향적인 성향을 갖고, 부자들은 환대하면서도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긴다면 그 같은 일은 죄를 짓는 일이라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성별의 차이 또한 있을 수 없다. 기독교는 여자들의 지위를 이전의 시대에는 결코 생각할 수도 없는 위치로 올려 놓았다. 즉, 그들은 영적으로 남자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다만 성경은 교회와 가정에서의 질서를 위해 남자에게는 지도할 책임을 갖도록 하고 여자에게는 그것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엡 5:21-33). 그러나 영적인 차원에 있어 남자와 여자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모든 영적인 축복을 똑같이 상속받을 자들이다.

바울은 29절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덧붙이고 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자들은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들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져서 그의 자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갈 3:16 참조).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때에,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것이 된다. 영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이다.

모든 것(만물)이 그리스도께 주어졌다. 그분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주어졌던 그 자손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 역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받게 된다. 우리가 믿음을 갖는 순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옷을 입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아 주신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도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주실 것이다.

 


영국의 학자요, 군인이요, 또한 작가인 토마스 로렌스(Thomas Lawrence)는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제 1차 세계대전의 위대한 영웅 중의 한 사람이요, 1919년에 열렸던 파리 평화 회의의 주역이었다. 파리 평화회의가 개최될 무렵, 그는 아라비아 사막 지대에 사는 여러 부족들로부터 대표가 파송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고 그리하며 몇 명의 아랍지도자들이 회의를 위해 파리에 왔다. 그들은 호화 현대식 호텔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아랍인들은 호텔의 시설, 특히 욕실의 욕조 위에 있는 큰 수도 꼭지에 큰 감명을 받았다. 작열하는 불볕의 사막에서 살아 온 그들에게 있어 많은 물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욕조 시설은 최고의 호사품으로 여겨진 것이다. 회의가 막바지에 접어들고 모든 사람들이 떠나갈 채비를 하는 동안, 로렌스는 그 아랍인들이 렌치(wrench ; 볼트나 너트 따위를 돌리는 공구-역자 주)를 가지고 욕조에 붙어 있는 그 수도 꼭지를 떼어 내려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달려가 그들에게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그 수도 꼭지를 자기네들이 사는 사막으로 떼어 가지고 가서, 거기서도 계속해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물을 즐기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로렌스는 수도 꼭지만 가지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급히 설명해야만 했었다. 수도 꼭지는 수도관에 연결돼야만 한다. 또한 그 수도관은 수도 본관(water main)에 연결되어야 하고, 그 수도 본관은 다시 저수지에 연결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저수지는 샘이나 강, 혹은 우물로부터 물을 공급받아야만 한다. 수도꼭지는 그 「근원」(sorce)에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축복도 마찬가지이다. 축복의 근원에 연결되어 있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축복을 받을 수 없다. 모든 축복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임한다. 당신이 그 「아들」과 연결될 때, 비로소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축복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 갈라디아서 4:1-20

 


7. 다시 종노릇 하려느냐 ?

 

 

 

4장에서도 바울은 계속 그리스도인의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논지를 이해시키기 위하여 인간의 육체적인 성장 과정을 유추(類推)해 내고 있다. 그는 미성년인 아들과 성인이 된 성숙한 아들을 대조시키고 있다. 바울은 율법 아래에 속한 자는 미성년인 아들과 같고, 은혜 아래 속한 자, 곧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는 성숙한 아들과 같다고 말한다.

바울의 이러한 유추는 그 당시의 독자들에게 효력이 큰 것이었다. 고대 사회에 있어서 성장 과정은 오늘날의 그것보다 훨씬 더 명확히 구분되었다. 유대 사회에서는 소년이 열 두 살의 생일을 맞이하게 되면, 그의 아버지가 그를 회당에 데리고 간다. 그곳에서 소년은 「율법의 아들」이 된다.

그의 어린 시절에 율법은 그 아들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는 그 아버지를 통하여 집행된다. 율법의 아들이 되었을 때, 그 아들은 비로소 그 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을 복종할 책임을 지게 된다.

그리이스(헬라)에서의 상황도 유대와 거의 비슷했다. 소년은 어릴적에는 부모의 보호 아래 있는다. 그러다가 18세가 되면 그 나라의일종의 사관 생도가 되어 2년 동안 국가의 어떤 지시 아래 있게 된다. 생도가 되기 바로 직전, 그는 성숙한 젊은이로 인정받는다. 그의 긴머리는 잘리워져, 성년이 됐다는 표로서 신에게 바쳐지게 된다. 다시 한 번, 어린 시절과 성년 사이의 매우 분명하고도 확실한 선이 그어지는 것이다.

로마의 관습도 역시 이와 비슷하다. 로마의 소년들은 대략 14세에서 17세를 전후해서 「자유민의 의복」(toga pretexta)을 입게 되며 자유로운 자임을 허락받게 되어 비로소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성숙한 아들이 되고 난 후, 그는 공공의 집회소(forum)1)에 갈 수 있게 되고 비로소 시민으로서의 공적 삶을 시작하게 된다.

1)본래는 시장 : a markrt-place의 뜻을 가지나 넓은 의미로 그것은 공적 사무와 상업, 정치 및 재판의 장소로도 쓰였다-역자 주.

 


이제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다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4:1-7).

1절에서 3절까지의 내용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많은 유산을 상속받게 될 한 어린이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언젠가 그 모든 유산은 상속자인 그 어린이의 것이 될 것이다. 사실 그는 이미 약속으로 그 모든 유산을 물려받은 거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는 아직경험이 미숙한 어린아이이다. 그렇게 어린 자식에게 유산을 상속시켜줄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 어린이는 분명 합법적인 상속자요, 그 모든 소유의 주인이요, 소유권자라 할 수 있다. 만일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그는 이미 정당한 권리로 그 모든 소유를 차지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린이는 종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는 어떤 명령을 내리기보다는 여전히 명령을 받아야 한다. 정당한 권리에 의한 상속자인 것은 분명하나 그는 사실상 상속자가 아니다.

고대의 가정들은 그와 같은 어린이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종들(후견인 혹은 청지기라 불리는)을 임명하였다(2절 참조). 어린이들은 여느 종들과 마찬가지로 명령을 받는 존재였다. 사실상 그들은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는 종들로부터 명령을 받았었다. 그리고 각 소년의 아버지들은 어린이가 성숙한 아들이 되는 그 특별한 날을 지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 날이 오면, 어린이들은 가정 교사와 관리인들의 권한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유산을 물려받아도 될 성숙한 아들로 선언받게 되었다.

3절에서 바울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정의하고 있다. 곧,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전, 유대인들은 기록된 율법(the written law)의 보호하에 있었으며 이방인들 역시 양심이라는 율법의 보호하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의 사람들은 모두 다 어린이와 같았다. 장차 그들의 소유가 될 유산이 있었고, 도래하게 될 구원이 있었으며, 유효한 약속(available promise)이 있었지만, 그들은 아직 그러한 것들을 상속받을 수 있을만큼 성숙한 아들들이 아니었다.

이것은 오늘날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 모두에게 적용되는 진리이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에 속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 율법에 속해 있는 어린아이요, 그가 약속된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성숙한 아들이 되는 유일한 길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이다.

3절의 ”이 세상 초등 학문”이라는 말에 주목하라. 이 구절은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어려운 구절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귀신들의 영(demon spirits)을 의미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별들과 점성학에 관계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인간 종교의 첫걸음을 가리켜 말하는 것으로 믿고 있는데, 이 견해가 가장 타당한 해석으로 여겨진다(골 2:8 참조). 이 구절은 인간 종교의 기초적인 가르침, 곧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 할 것 없이 모두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사용했던 계율(rules)들과 규칙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자유케 하실 때까지 이러한 유치한 교훈에 속박되어 있는 것이다.

4절과 5절은 지금까지 아들이 되는 준비에 대한 언급에서 그것의 현실화에 대한 묘사로 옮겨간다. 한 아버지가 그의 아들이 어린아이로부터 성숙한 아들로 선언받는 날을 정하는 것같이, 하나님께서도 그 같은 일을 행하신다. 바울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라고 말한다.

그 당시의 여러 가지 형편을 살펴보더라도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가 다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분명한 사실이었다. 우선, 종교적으로 보더라도 그 때는 메시야가 오시기에 가장 이상적인 시기였었다.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 에스라는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사본들(scrolls)을 한 데 모아 편집하였고, 그 결과 유대인들은 한 권의 「구약의 말씀」(the Word of the Old Testament)을 소유하게 되었다.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 유대인들은 회당을 이용하게 되었다. 각 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각각 그들의 도시에 세워진 회당을 중심으로 모였고, 그곳을 중심으로 하여 생활하였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종교적으로 복음의 선포를 위한 완전한 배경으로서 회당이 준비되었던 것이다.

 


문화적으로 보더라도 그 때는 그리스도가 오시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였었다. 알렉산더(Alexander)대왕은 그리이스(헬라) 세계를 건설하려고 그 결과 헬라어가 온 지역에 두루 퍼져 당시 세계의 공통 언어가 되었다. 그러므로 복음은 언어의 장벽과 혼란없이 단 시일에 전 지역에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더라도 그 때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에 가장 알맞은 시기였었다. 로마는 그 당시의 세계를 정복했었고 그것의 극대화를 꾀하기 위해 「로마의 평화」(the Pax Romana)를 주창하였다. 그 결과 복음은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전파될 수 있었다. 또한 로마는 세계로 통하는 훌륭한 도로들을 정비하고 건설하였는데, 그것은 결국 전도자들의 여행을 편리하게 만드는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율법 아래 있는 어린아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숙한 아들이 되도록 그 때, 곧 하나님의 때를 그분 자신께서 정하신 것이다!

바울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언급할 때(4절) 그는 그리스도의 본성(essence), 곧 하나님이신 그분의 본질(nature)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 바울은 성육신(成肉身)에서의 그분의 복종의 역할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때 그 아버지께 복종하셨으며,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한 목적으로 자기 스스로를 복종시키셨다(히 1:5 참조).

그러나 그분은 복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아들의 형체를 취하신 하나님만은 아니었다. 그분은 또한 ”여자에게서 나신” 분이었다. 그분은 완전한 인간이셨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또한 사람이 되셔야만 했다.

 


어둠의 영역에서부터 우리를 구해 내기 위한 능력을 소유하시기 위해서, 사단을 쳐부술 능력을 소유하시기 위해서, 죽음을 정복하기 위한 능력을 소유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왕국이 임하게 하는 능력을 소유하시기 위해서 그분은 하나님이 되셔야 했었다. 그러나 죄를 지은 것은 인간이었고 자신의 생명을 희생 제물로서 내어줘야 할 것도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분은 인간이 되셔야만 했다. 그분은 구원의 능력을 소유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되셔야 했지만, 대속의 특권을 소유하시기 위해서는 사람이 되셔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율법 아래 나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했다. 그분은 유대인이셨기에, 기록된 계시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했다. 그분은 완전케 되라는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셨다. 그리스도의 신성, 그리스도의 인성 및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우심(righteousness)은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능히 구원하실 자격을 갖추게 했다. 그러기에 그분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실 수 있었다(5절).

5절의 ”속량”(구속)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어떤 사람이 노예 시장에 가서 상인과 흥정을 하고 난 후 적당한 노예를 사서 이제 자신의 소유가 된 노예를 데리고 그 시장 바깥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런 후, 그 노예더러 ”이제 너는 자유의 몸이다. 내가 너를 자유케 한다. 네가 가고자 하는 대로 떠나거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구속”의 그림인가. 예수께서는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고, 또한 하나님께서 상속하고자 하시는 그 모든 유산을 상속할 특권을 갖게 하시려고 우리를 율법에서부터 자유케 하셨다.

바울은 6절에서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다니 ! 아들된 자들 중의 일부로 우리가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니!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당신은 구원받는다. 그것은 하나의 객관적 사실이다. 이 사실에 따르는 주된 체험은, 성령께서 당신에게로 들어와 당신이 구원받은 것이 사실임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로마서 8장 16절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바꿔 말한다면, 당신이 하나님과 관계가 있다고 느끼고 당신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에게 하듯 친근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담대히 부르짖을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은 당신이 그분의 자녀라는 데 대한 완전한 증거라는 것이다.

아람어 「아바」(abba)는 애정의 표현으로 사용되었던 애칭이다. 예수께서 그 어휘를 사용하셨기에 초대 교회에서도 그 말을 사용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불렀다. ”아바”를 오늘날의 어휘로 표현하자면, ”아빠”(Daddy)와 같은 뜻이다. ”아빠!” 이 얼마나 친근한 이름인가. 그렇다. 하나님은 멀리 떨어져 계시는 어떤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빠”이시다. ”아빠”라는 이 말보다 더 친근한 말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아들됨의 「신분」을 갖게 하시려고 그「아들」을 보내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그 아들됨의 「체험」을 확실히 깨닫게 하시려고 「성령」을 보내셨다. 성령께서 내주(內住)하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임에 대한 확증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심령 속으로 성령을 보내셨다. 이제 성령께서는 당신 안에 살고 계신다! 당신은 내재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율법 아래 있는 자는 단지 외적인 권위만을 가질 뿐이다. 그는 결코 내재적인 능력을 소유하지 못한다. 외적인 계율들은당신의 심령을 변화시킬 수 없다. 당신을 변화시키기 위한 율법의 어떠한 요구들이 있다 할지라도 당신은 결코 그대로 행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대학 시절, 100m 단거리 경주에 출전하곤 했다. 나는 그 종목의 세계 기록과 학교 기록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달렸으나 세계 기록은커녕 학교 기록조차도 갱신(更新)할 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할 수 있는 한 꼴찌를 면하기 위해서 갖은 애를 다 썼었다!

100m 단거리 경주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내가 잘 해낼 수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7절은 아들됨의 궁극적인 유익,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을 물려받으시며,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물려받는다(롬 8:17 참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가 죄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것이 된 유산에 반응하며 또한 그것을 물려받을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아들들로 삼으심으로써 우리를 영원히 부요한 자들로 만드셨다.

 


아들됨을 포기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8-11).

 


8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이방인이었던 때를 회상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었다. 그들은 전혀 신(神)이 아닌 대상들을 섬기며 살았었다.

 


몇 년 전, 나는 아내 패티와 함께 하와이를 방문하여 호놀루루에 있는 한 불교 사원을 돌아 본 적이 있다. 거기서 우리는 유령처럼 생긴 여러 종류의 작은 신상(神像)들과 아주 거대한 금부처상을 보았다. 사방에는 향이 타오르고 있었고, 몇몇의 어른들과 한 어린 소녀가 불상 앞에 꿇어 엎드려 절하면서 여러 가지 의식들을 반복적으로 행하고 있었다. 또한 그 거대한 금부처상 뒷편으로 걸어가 봤더니 거기에는 한 부인이 마치 공을 튀기듯 돌멩이들을 바닥 위에 튀기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녀는 돌멩이들이 바닥 위 어느 곳에 튀기는지 바라보면서 다시 돌멩이들을 바닥 위에 튀기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광경을 목격하면서 마음 속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부인!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집이 아닙니까? 보세요, 저 거대한 배불뚝이 부처상은 누군지도 모를 사람이 만들었잖아요? 그런데, 부인께서 그같이 하시는 까닭은 무엇인가요? 도대체 이곳에 살아 있는 것이 무엇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우리는 그 사원을 떠나오면서, 끊임없는 행위들과 의식들을 행함으로써 구원받으려는 그들, 곧 이교의 우상의 속박 안에 있는 그들에 대한 생각 때문에 거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경험해야 했었다.

지난 날에 갈라디아인들도 역시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집에 모셔진 신들을 섬겼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것을 변화시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상의 지배 아래 있는 그들에게 아들됨의 권세를 허락하시고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다. 그런데, 아들됨의 권세를 가지고 자유를 누리며 살아야 할 그들이 지금 또 다른 속박 아래에 살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헛되이 하고 있는 것이다.

9절에서 바울은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같은 일을 행할 수 있는가? 어떻게 무력하고 천하고 유치한 교훈으로 되돌아갈 수 있단 말이냐? 그런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갈라디아인들은 거꾸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무력함으로, 궁핍함으로, 끔찍한 외적 형식주의로, 즉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는 습관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10절, 골 2:16, 17 비교).

 


11절에서의 바울의 심정을 한 번 상상해 보라. 그는 갈라디아인들의 어리석음에 거의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한 진리로 되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했다.

옥스포드 대학원 시절, 목사의 아들이요, 그 자신 또한 목사였던 요한 웨슬레는 매우 정통파적인 신자였다. 그는 경건했으며 품행이 방정하고 생활이 착한 행실로 가득한 자였다. 요한과 그의 친구들은 교도소를 방문했고 빈민가의 어린이들에게 음식과 의복을 나누어 주었으며, 그들을 위해 교육까지도 실시했었다. 그들은 주일은 물론이요, 토요일도 거룩하게 지켰다. 그들은 영적 교제를 나누었고 구제에 힘썼으며, 성경을 열심으로 탐독했고, 한편으로는 금식과 기도에 힘썼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적 열심이라는 굴레 안에 그들 스스로를 가둬놓고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를 신뢰하고 있었다. 몇 해가 지난 후, 웨슬레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그분을 신뢰하게 되었다. 후일에 웨슬레는 그의 옥스포드 시절을 되돌아보며, ”그때 나는 아들의 신앙이 아닌 종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술회하였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가 자유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성숙한 아들이라는 자각과 함께, 우리 스스로를 다시금 율법의 보호 아래 두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해 힘쓰는 중에 있다면, 우리는 어린 아이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바 선물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성숙한 아들일 것이다.

 


너희의 복된 마음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갈 4:12-20).

 


지금까지 바울은 갈라디아 신자들의 문제점을 취급하는 데 있어서 조금도 감정에 치우침 없이 냉정한 입장에 서서 사도직에 대한 철저한 자기 확신과 지적 능력 및 구약에 대한 해박함을 근거로 논거를 펴왔다. 그런데 이제는 그토록 차갑고 날카로운 지성의 칼을 휘둘렀던 그의 격정은 따스한 사랑의 호소로 변하고 있다. 그의 분노의 음성은 어느 듯 부드러워졌고, 그의 좌절감은 한가닥 희망으로 변하고 있으며, 활화산같이 타오르던 그의 웅변은 인자한 믿음의 언어로 바뀌어져 가고 있다. 이제껏 냉담한 태도로 일관해 오던 딱딱한 교리적 관심이 여기서부터는 따스하고 인정있는 개인적 관심으로 옮겨지고 있다.

4장 12-20절은 바울이 사용한 말 중에서 가장 사랑이 넘치는 단어들을 사용함으로써 갈라디아인들을 향한 개인적인 관심과 애정을 아낌없이 나타내 보이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지금껏 자주 보아 왔던 성경적인 논거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교리에 대한 논리적 변호 또한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보호자로서의 그의 사랑이 군데군데 진한 감정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그와 그가 가르쳤던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호소만이 있을 뿐이다.

12절을 살펴보라.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간절히 바란다”고 갈라디아인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바울은 그가 자유로운 것같이 갈라디아 신자들도 다시금 자유로와지기를 참으로 간절히 원하고 있다. 바울은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바울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가장 높은 계열에 속한 율법주의자였다. 회심한 이후, 바울은 그 모든 율법주의를 내던져 버렸었다. 그는 율법과는 상관 없는 이방인과도 같이 갈라디아 지방에 도착했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갈라디아인들에게 은혜의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그들이 어떠한 의식이나 제사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가르쳐 왔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유대인의 율법으로 주의를 돌리고 있었다. 이방인으로서 율법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들이 여태껏 보지도 듣지도 못한 율법의 속박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바울은 몹시 애가 탔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의 말을 들어줄 것을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율법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말하는 사악한 가르침을 거부하고 그들이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알았던 자유로 다시 되돌아 올 것을 간청하고 있다.

12하반절은 13절과 연결해서 생각해야 한다. 바울은 12절 중반에서 갑자기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말로 생각을 비약시키고 있다. 그는 갈라디아 신자들과 처음 접촉을 가졌던 때를 회상하면서 감회가 서린 듯, ”그때 너희는 나를 서운케 하지 않았지”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었을 때 유대인들은 그가 하는 일에 무척 냉담하였었다. 그러나 이방인인 갈라디아인들은 그렇지 않았었다. 그들은 바울이 좀더 많은 가르침을 베풀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바울을 좇았던 것이다.

바울은 상심(傷心)해 있었다. 그는 이 사람들을 사랑했고, 그들이 지금 자신과 자신의 가르침으로부터 돌아서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을 좇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상처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심했다고 해서 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이 식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바울은 그가 갈라디아에 처음 왔던 것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음을 그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그는 병에 걸리는 바람에 그곳에 머무르게 되었던 것이다(13절 참조).

그의 병이 어떤 것이었느냐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오늘날 가장 지지를 받고 있는 견해는 그가 말라리아로 고생했을지 모른다는 추측이다. 여하튼 그 질병의 종류가 무엇이었든지간에, 그는 그 병 때문에 기동을 못하여 갈라디아에 체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14절에 기록된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바울의 병에는 별로 유쾌하지 못한 증상이 나타났던 것 같다. 바울의 질병은 그가 말한 것처럼 갈라디아인들에게는 ”시험될 만한 것”이요, ”업신여기거나 버릴 만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를 간호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요, 선뜻 맘이 내키지 않는 힘든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갈라디아인들은 어느 면에서도 그를 거부하지 않았었다.

 


14절의 ”업신여긴다”는 단어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뜻이다. ”버리다”(reject)는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침을 뱉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14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나를 아무런 쓸모없는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나를 모욕하지도 않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질병과 육체적인 연약함 및 불행을 항상 하나님의 징벌의 표시로 간주하였다(요 9:1, 2 참조). 이방인들 역시 병약함을 신들의 징벌로 생각했다(행 28:4 참조). 갈라디아 지방의 그 이방인들이 병든 바울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사실상 그들 자신이 세운 신학(theolgy)의 장벽을 뛰어넘는 행위였다. 그들은 바울을 마치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다.”

15절에서 바울은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묻고 있다. 그들은 한때 은혜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들은 믿음을 통하여 오는 기쁨을 알며, 그것을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이라도 빼어” 바울에게 줄 만큼 바울을 사랑했던 자들이었다.

눈이라도 ”빼어”의 ”빼다”(pluck)라는 단어는 ”파내다”(dug out)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바울이 그와 같은 표현을 쓴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그는 그 같은 표현을 은유(metaphor)로만 사용하고 있는 것같다. 지금까지의 인간의 제문명 속에서 눈은 가장 소중한 소유물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어떠한 것으로도 대체될수 없는 유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말은, 만일 그가 필요로했다면 그들은 자신의 가장 소중하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까지도 그에게 주었을 것이라는 말이 아닐까?

또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면, 바울이 정말 새로운 눈을 필요로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안경도 없던 그 시절, 히브리어 성경 사본을 탐독하는 일에 평생을 쏟다보니 자연히 바울은 눈의 시력이 떨어지게 되었고, 점차 심각할 정도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가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그에게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문제거리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 ”가시”가 안질이었다고 생각한다. 말라리아는 시신경(視神經)의 안와(眼窩) 부분에 발작을 일으키게 할 수 있다. 그 결과 색맹이 되거나 시신경 위축의 원인이 되기도 하며 동공(瞳孔)이 한 군데에만 고정되는 증상이 나타나기도 하며 최악의 경우 눈이 멀게도 하는 무서운 병이다. 만일 바울이 말라리아에 걸려 고통당하고 있었다면, 그것으로 인해 눈병을 앓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바울의 질병이 어떤 종류였든 간에, 요점은 갈라디아인들이 바울을 몹시 사랑했다는 사실이다. 16절에서 바울은 서글픈 어조로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라고 묻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 모든 것이 좋기만 했던 그의 첫번째 여행을 가리키고 있다. 두번째로 갈라디아를 방문했을 때에 바울은 이미 유대주의자들이 활동을 시작했음을 느꼈고, 그래서 바울도 은혜의 진리를 강조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갈라디아의 신자들이 바울에게서 돌아서서 유대주의자들을 좇기 시작한 때였다.

17절과 18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랑과 유대주의자들의 ”붙임성”(friendliness)을 대조시킴으로써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유대주의자들은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의 비위에 잘 맞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가장된 우정과 온갖 아첨의 말로 갈라디아인들을 부추기며 격려하였다. 물론 그들의 그런 행동의 동기는 갈라디아인들로 하여금 유대주의의 율법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복종하며 살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유대주의자들은 위선과 속임수를 통하여 갈라디아인들을 율법주의의 속박 아래로 잡아 두려고 했다. 17절의 ”이간붙여”(떼어 놓아 : shut out)의 헬라어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문빗장을 걸어 잠근다는 뜻이다. 유대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문빗장을 걸어 잠그고 방해한 것이다.

18절에서 바울은 동기만 훌륭하다면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유대주의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그들이 갈라디아인들에게 어떤 소행을 저질렀는지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울은 ”너희가 이미 태어났으나 나는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 나는 너희를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해 그 고통을 겪어야 했었다. 그런데 이제 너희가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 다시금 그 고통을 견디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20절에서 바울은 그들과 함께 거하면서 슬픔 대신 기쁨을 경험하기를 소망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들의 심중을 헤아려 알기를 원하면서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가슴 태우고 있다. 만일 그가 갈라디아에 이르러서 그들의 처한 형편과 사정을 자초지종 살필 수 있게 된다면 그는 그들이 진리를 되찾게 해줄 수 있었을 것이고 어조를 달리하여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갈라디아인들은 분명 구원받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유대주의자들의 꾀임에 빠져 진리에서 이탈함으로써 그들의 삶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이 풍성하게 나타나지 못했었다. 바울의 목표는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르게 함으로써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의 의미이다.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까지 나는 고통을 받는다”고 말한다.

바울은 한 가지 위대한 열망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아니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었다.

 

 

 

● 갈라디아서 5:1-12

 


8. 너희는 약속의 자녀

 

 

 

여기서 바울은 그의 격해진 감정을 일단 자제하고 이신칭의의 교리에 관한 최종적인 논증을 시작하고 있다. 이제껏 바울은 행위에 속한 옛 언약(old covenant)과 믿음에 속한 새 언약(new covenant)을 설명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믿음의 언약은 사실 새로운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약속될 때부터 있어 온 것이기 때문이다(갈 3:15-18 참조).

 


바울은 두 언약을 거듭 비교하고 있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율법과 은혜는 정반대의 개념인 것을 명백히 밝혔다. 그 둘은 서로 상대방을 무효화시키는 성질을 갖고 있어 옛 언약과 새 언약이 공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4장 21-31절에서 바울은 율법과 은혜를 최종적으로 비교하면서 종전과는 다른 논증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구약성경으로부터 한 역사적 사건을 인용하여 그것을 풍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 사건이란 아브라함의 두 아들, 곧 사라가 낳은 이삭과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에 관한 이야기이다.

 

 

 

 


두 아들의 비유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갈 4:21-23).

 


21절에서 바울은 일종의 문답식으로 서두를 꺼내고 있다. 먼저 그는 모세의 율법 아래 있고 싶어하는 자들에게 그 율법에 씌어진 것들을 충분히 알고 있는지 물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바울이 이 특별한 이야기를 인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 당시에 바울의 적이었던,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 유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구원 교리가 정당함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자신들의 이설을 추출(抽出)해 내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바울은 아버지가 누구냐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님을 그들에게 알리려 한다. 풍유적으로 말해서, 보다 중요한 것은 어머니가 누구냐의 문제인 것이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하나는 여종에게서 태어났고 다른 하나는 자유를 가진 여인에게서 태어났다(22절). 뿐만 아니라 그들은 태어난 방법 또한 달랐으니, 곧 여종의 아들은 ”육신을 따라 났고” 자유를 가진 여인의 아들은 ”약속으로 말미암아” 났던 것이다(23절). 바울이 여종의 아들은 육신을 따라 태어난 반면, 자유를 가진 여인의 아들은 약속으로 말미암아 태어났다고 말했을 때, 그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겠는가?

창세기 15장 4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상속자를 주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늙어서 잉태할 나이가 지나지만 않았다면 하나님의 그러한 약속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약속된 아이가 도무지 태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사라는 남편에게 자기 몸종인 하갈을 취하여 아이를 가지라고 제안했다(창 16:2 참조). 이는 옳지 못한 충고였다.

이윽고 아브라함은 하갈과 동침하였으며, 하갈은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을 낳았으니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86세였다. 하갈이 낳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은 인간의 육정적인 방법으로 태어난, 그야말로 정상적인 방법을 따라 태어난 아들이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이른 바 ”육정적인 원리”(flsh principle)라 할수 있는 것들을 예증한다. 곧, 하나님의 약속과 믿음의 방법을 거부하고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려고 애쓰는 자들을 말한다. 만일 당신이 이러한 육정적인 원리를 좇아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그 어떠한 것도 받지 못할 것이다. 이 얼마나 헛되고 어리석은가!

아브라함의 또 다른 아들인 이삭에 대해 살펴보자. 그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태어났다. 사라는 본래 아이를 잉태할 수 없는 여인이었다. 그녀가 아이를 잉태했다는 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100세요, 그녀의 나이는 90세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한 아이를 허락하셨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었다(롬 4:19-22 참조).

이스마엘은 율법주의와 자기 노력(self-effort)을 상징하며 이삭은 믿음을 상징하고 있다. 이스마엘은 순리대로 태어났지만, 이삭은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하여 태어났다.

이 두 아들은 영적 진리의 전형(典型)이 되고 있다. 이스마엘은 자연적인 방법으로 태어난 아들, 즉 위로부터 거듭나지 아니한 자들, 단지 자연적인 출생만을 경험하고 있는 모든 자들을 대표한다(요 3:1-8 참조). 또한 종으로 태어난 그는 율법의 속박하에 있는 자들을 상징한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과로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자로 태어난 아들이다. 그러므로 이삭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든 자들을 대표한다. 이삭은 성령으로 태어났다(spirit-born). 이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과는 다른 의미로서, 성령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육체 안에 하나님의 기적을 가져옴으로써 그의 출생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풍유적 표현에 대한 설명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갈 4:24-27).

이제 바울은 본 논거의 본론 부분으로 그의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그는 유대인이라면 어느 누구에게나 친근한 이 역사적인 사건을 다루면서, 그것의 본래적인 의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알레고리1)는 정당한 성경 해석 방법이 아니다.

 


1)allegory는 우의(寓意), 혹은 풍유(諷諭)라고 번역되며, 이는 비유(比輸)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통상 비유는 한 사물을 가지고 다른 것을 비유해서 가르치는 데 사용되나, 풍유는 어떤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이 세상의 어떤 사건을 이야기로 꾸며내는 것 곧 그 본래의 뜻은 감춰지고 가르치고자 하는 진리가 그것을 통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나 「이솝 우화」가 풍유의 좋은 예이고,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비유의 좋은 예가 된다. 엄밀히 말해서 비유와 풍유는 다르다-역자 주.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성령의 영감(靈感) 아래 알레고리의 방법을 사용하여, 아브라함의 두 아들의 이야기를 그 스스로 ”비유”(알레고리)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24절). 그러한 사례는 성경 전체에서 오직 이 한 곳에서만 볼 수 있다.

 


바울은 여기 등장과는 두 여인이 두 언약, 곧 율법의 속박에 속하는 옛 언약과 은혜 혹은 자유에 속하는 새 언약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한다(24-26절 참조). 바울은 하갈을 먼저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종이었다. 따라서 이 사실은 그녀에게서 태어난 자녀들 역시 종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종의 언약(the slavery co-venant), 즉 시내 산에서 율법을 부여받음으로써 체결된 옛 언약을 상징한다. 시내 산은 약속의 땅 「바깥」의 아라비아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그 땅에서 쫓겨나(창 21:9-21) 하갈의 자손들은 지금의 아라비아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그곳 아라비아에서 강대하고 큰 민족을 이루었으며, 유대인들과는 지금껏 원수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다(대상 5:10, 18-22 참조). 오늘날 이스라엘과 아랍의 잦은 충돌은 사실상 하갈의 침실에서부터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그들 사이의 불화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들은 서로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또한 이스라엘 땅에 대한 권리도 서로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여, 그들 사이의 반목(反目)은 깊어만 가고 있다.

25절에서 바울은 하갈이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했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 있는 예루살렘”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하갈이 그 당시의 유대주의의 상징이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그 당시의 유대주의가 율법의 속박하에서 육신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두 아내 하갈과 사라에 관한 알레고리에서 바울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그들 스스로를 시내 산 율법의 노예로 삼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구원받기 위해서 힘쓰고 있지만, 그들의 그러한 노력(행위)은 헛된 것이다. 왜냐하면 시내 산은 아라비아에 있기 때문이다. 풍유적으로 말해서, 시내 산은 약속의 땅 내에 있지조차도 않다. 이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구원과 약속의 땅에서부터 끊어진 자들임을 의미한다. 바울의 알레고리는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적용된다. 율법을 통하여 구원받기를 원하는 죄인은 연자맷돌을 어깨에 메고 있는 셈이다. 그는 하갈, 이스마엘, 시내 산, 유대주의적인 예루살렘이라는 전승(傳承) 안에 있는 종이다. 하갈과 이스마엘로 시작된 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에게도 기업을 주셨다. 하지만 그것은 약속의 땅 「바깥에」 있다. 풍유적으로 말해 그것은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예로 예수께서도 율법주의자들을 가리켜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16)고 하셨는데, 그 상이란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틀의 외부에 있는 상이다.

하갈의 경우와 대조적으로, 사라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나타내는 자로서 참된 종교와 그 근원으로서의 하늘을 말한다. 이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새 언약에 참예하는 모든 자들에게 자유를 제공하는 ”우리 어머니”인 것이다(26절).

바울의 풍유적인 용어들은 다소 이해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분명하다. 바울은 여기서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종과 율법주의로 묘사된 하갈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사라와 하늘로 묘사된 믿음의 자녀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약속을 믿는다.

하늘은 우리의 상징적인 어머니다. 하지만 시내 산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시내 산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위로부터 태어난 자들이다. 거듭남의 기적이 우리를 자유케 했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믿음으로써 야기된 하나님의 행위이다.

 


27절에서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이사야 54장 1절 말씀은 본래 바벨론의 포로 상태에 있던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었는데 바울은 그것을 사라에게 적용하고 있다. 자식이 없는 사라는 하늘의 예루살렘을 나타낸다. 옛 언약 아래서 하늘의 예루살렘은 잉태치 못하고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그러나 그 불모(不毛)한 상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을 때 종식(終息)되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인 하늘이 궁극적으로 완성되면 그 자녀의 수효는 아래 있는 예루살렘, 즉 유대 율법주의가 가진 자녀의 수효보다 훨씬 더 많게될 것이다.

바로 그것이 바울이 자신의 알레고리에서 의도하는 바였다. 아브라함은 각각 다른 어머니 하갈과 사라에게서 태어난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각각 두 언약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두 예루살렘과 상당히 닮은 점이 많다. 하갈은 옛 언약과 땅 위의 예루살렘 및 율법과 그것의 속박 아래 있는 이스마엘의 정신성(menta-lity)을 상징하고 있고 자유를 가진 여인 사라는 새 언약과 하늘의 예루살렘 및 은혜와 자유에 속한 이삭의 정신성을 상징하고 있다.

 

 

 

갈라디아인들에게 적용된 바울의 알레고리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갈 4:28-31).

바울은 아주 부드러우면서도 설득력 있는 어조로 하갈과 사라에 대한 알레고리를 갈라디아인들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바울은 그들도 이삭처럼 약속의 자녀인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는 갈라디아인들이다시금 율법으로 이탈해 감으로써 이삭의 유산을 이스마엘의 유산과 바꿀 것임을 바울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약속의 땅을 아라비아 땅과 바꿀 위험에 처해 있었다. 또한 그들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유대 율법의 지상 예루살렘과 바꿀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이삭처럼 약속의 자녀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약속의 자녀는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받아들인 자다. 그는 초자연적으로, 곧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심으로 잉태되어 태어난 자녀이다.

29절 이하에서 바울은 약속의 자녀가 됨으로써 그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세 가지의 결과를 언급하고 있다. 첫째로, 약속의 자녀는 율법주의자에게 핍박을 받는다(29절 참조). 바울은 하갈의 자녀(유대주의자)가 사라의 자녀(은혜 안에 사는 신자)를 핍박할 젓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했던 것처럼(창 21:3), 약속의 자녀로서 이삭과 같이 살기를 원하는 자들 역시 핍박을 예상할 수있다(갈라디아 신자들의 경우는 율법주의자들로부터의 핍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로, 약속의 자녀는 값을 따질 수 없을 만큼 귀중한 영적 기업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된다(30절 참조). 하갈과 사라의 예증에서 보았던 것처럼, 종의 아들인 이스마엘은 내쫓김을 당했지만 자유를 가진 여인의 아들 이삭은 약속의 자녀로서 유일한 상속자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은혜의 언약 바깥에 있는 자,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이끌림을 받지 않는 자에게는 결코 하나님께로부터의 구원이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은 이스마엘처럼 내어 쫓김을 당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은 이스마엘이 내쫓김을 당한 창세기의 기사를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거절하셨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하지만 바울은 그 기사를 풍유적으로 해석, 이스마엘의 정신성을 논함으로써율법주의자들인 유대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거절당한 것으로 본문의 내용을 역전시키고 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약속의 자녀에게는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31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는 말로 간결하게 논증의 결론을 짓고 있다. 곧 갈라디아인들은 율법주의와 의식적 율법 아래서 태어난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유의 신분으로 태어난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며 살아야 할 자들이다.

”자유를 누리며 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점에 관해서 바울은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것을 다음 장에서 보도록하자.

 


● 갈라디아서 5:1-12

 

 

 

9. 믿음 안에 굳게 서라!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자신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은 정당한 근거가 있는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세상에는 오직 두 종류의 종교가 있을 뿐이다. 곧, 인간의 공로를 위주로 하는 종교(여기서는 그것이 할례나 모세 율법주의로 묘사되고 있다)와 거룩한 은혜를 위주로 하는 종교이다. 또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공로(divine accomplishment)를 위주로 하는 종교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변호한다. 첫번째 부분(갈 1, 2장)에서는 역사적인 논거(the historical argument)를 제시하면서 자신의 체험과 다른 사람의 증거에 근거하여 율법과 반대되는 은혜에 대하여 논증하였다.

 


두번째 부분(갈 3, 4장)에서는 신학적인 논거(the theological arg-ument)를 제시하는데, 거기서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율법주의에 속하는 믿음과 행위의 체계 사이의 차이에 관해 진지하고도 강력한 논리를 구사하였다.

 


이제, 그 세번째 부분(갈 5, 6장)에서 바울은 거룩한 은혜 내에 있는 믿음을 위한 도덕적이며 실천적인 논거(the moral and pracdcal argument)를 제시하고 있다. 특히 그는 성령의 사역을 크게 강조하고있는데, 이는 믿음으로 사는 삶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음의 삶은 이전의 율법 아래 속했던 때의 삶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셨으니 자유를 누리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바울이 1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자유”는 죄수가 교도소 문을 벗어날 때 쓰는 문자적인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그러한 자유보다 훨씬 더 크고 귀한 자유, 곧 양심의 자유, 율법주의의 횡포로부터의 자유,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지키려고 애쓸 때의 절망감으로부터의 자유,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한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용납되고 승인된 자유를 말하고 있다. 그는 그런 자유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 자유는 소극적인 의미의 자유가 아니었다. 즉, 구원을 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 애쓰던 자세를 버리는 것, 그 이상을 의미하는 자유였던 것이다. 바울은 자유의 적극적인 측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성령 안에서 행하고 성령 안에서 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자유를 조금이라도 더 누리고자 했다.

헬라어 원문에서의 1절을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자유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다”로 번역할 수 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자유를 누리며 살게 하시려고 갈라디아인들을 자유롭게 하셨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보기 원했던 것은 그들이 율법주의를 버리고 다시금 믿음 안에 굳게 서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교도소에 들어가는 까닭은 그들 안에 범죄 욕구를 자제시킬 만한 그 어떤 통제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적으로 그들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외적인 통제를 받게 되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 율법은 교도소의 외적인 통제와도 같았다. 그것은 자기 자신 안에 스스로를 다스릴 만한 내적인 능력(the internal cap-acity)을 가지고 있지 않은 신자들을 율법주의라는 벽에 가두어 놓는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에도 구속됨이 없이 제멋대로 살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 그가 더 이상 ”율법의 벽”(the walls of the law)에 의해 구속받거나 통제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그는 그의 심령에 있는 성령의 역사에 의한 내적 제재 장치의 통제를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율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도덕규범들 또한 여전하다.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더 이상 외적 구속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성령에 의해 마음 내부로부터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롬 8:1-4 참조).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의 결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갈 5:2-6).

 

 

 

유대주의자들의 거짓 교리는 행위를 위주로 하는 다른 모든 종교 체계와 동일한 것이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할례는 인간의 공로를 위주로 하는 종교, 곧 「선행의 종교」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유대주의자들은 할례와 같은 의식들을 고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자신들을 구원하기에 불충분하다고 말하였다. 이에 바울은 그처럼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을 주장함으로써 생기는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 네 가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은 그리스도를 ”아무 유익이 없는” 존재로 만든다(2절). 만일 갈라디아인들이 할례를 구원에 꼭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잃는 것이었다(롬 11:6 비교). 지난날 그들이 바울로부터 그리스도에 관하여 들었을 때,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을 믿게 되었고 그들 중 몇몇은 그리스도를 막 영접하려던 참에 있었다. 바울은 만일 그들이 할례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지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보아라. 너희가 너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면서, 이제 돌아서서 너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듯이 할례를 받는다면 그것이 모순이 아니고 무엇이냐?”라고 그는 말한다. 바울의 이러한 경고는 오늘을 사는 당신에게도 해당된다. 당신은 두 종류의 종교, 곧 율법의 종교와 은혜의 종교를 혼합할 수는 없다. 당신은 그 둘 중 어느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러나 그분께서 주시는 구원은 당신이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한 아무 효력이 없다.

 


둘째로,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은 율법 전체를 지킬 의무를 갖게 만든다(3절). 만일 당신이 율법에 따라 살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그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지게 된다(약 2:10 비교). 바울은 만일 어떤 사람이 선행으로 하나님께 이르기를 원한다면, 그는 오직 선행만을 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 교리의 세번째 결과는 은혜에서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4절).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을 읽고 당황하게 된다. 그들은 구원받은 것이 취소되거나 잃게 될 수도 있겠다고 근심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확실함에 대하여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율법과 은혜를 대조시키고 있을 뿐이다. 만일 당신이 은혜와 율법을 혼합하려 한다면, 당신은 구원의 근본 원리인 은혜에서 떨어진 것이라는 것이 바울의 논리이다.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을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은혜의 영역안에서만 존재하시는데 만일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을 받으려는 자가 있다면 그리스도는 그러한 자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한다(2절 참조).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얼마든지 은혜에 의한 삶의 원리에서 떨어질 수 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조건없이 주시는 축복이긴 하지만 그것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께 순복할 때에만이 풍성히 임하게 된다. 만일 당신이 육신적인 원리를 따라 살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문을 당신 스스로 걸어 잠그는 셈이다.

”은혜에서 떨어진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장성함과 하나님의 축복, 곧 당신의 성화(聖化)에 이르는 문을 닫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거룩케 하시는 은혜(the grace of sanctification)를 무시하거나 거절한다는 것이 곧 그가 의롭다 칭하시는 은혜(the grace of justification)를 상실한다는 것은 아니다. 만일 거룩케 하시는 은혜가 중단되거나 혹은 무시될 때마다 의롭게 하시는 은혜가 상실된다면, 의롭게 하시는 은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구원이 보류되는 것은 결국 행위의 문제가 되는게 아닌가!

바울은 인간의 공로로 구원이 주어진다는 거짓 교리의 결과를 한가지 더 들고 있는데 그것은 의(義)의 소망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5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힘입어 믿음으로 의를 얻으려는 간절한 소망을 품고 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받아들였다. 의는 이제 우리의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뵈올 때 우리의 의는 충만하고 완전한 의가 될 것이다(요 3:2).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 때문에 소망을 가지고 있다. 이는 분명 차이가 있는 것이고, 그것도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6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중요한 것은 할례나 무할례가 아니라 오직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사랑은 성령으로부터 샘솟아서 믿음의 빛안에서 활동한다. 믿음은 역사한다. 그렇지만 그 역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응답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결코 의를 얻기 위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옛날에 필생의 꿈을 가지고 살던 한 예술가가 있었다. 그의 꿈은 다양한 인물들을 묘사한 대작(大作)을 조각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는 어느 부유한 독지가로부터 그와 같은 청탁을 받게 되었다. 그 조각품은 작가에게 큰 영예와 명망을 안겨줄 어느 거대한 박물관에 놓여지게 되어 있었다. 그는 열심히 작업에 임했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바뀐 그 어느 날, 그의 수고의 결정체인 걸작이 완성되었고 바야흐로 그는 세상의 찬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경악할 만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대작을 작업실 바깥으로 옮길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 거대한 작품을 부숴뜨려가면서까지 그것을 밖으로 꺼내오려 하지 않았다. 그가 행한 모든 것은 그 작품과 함께 작업실 안에 갇히고 마는 꼴이 된 것이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런데,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받으려는 자의 모습도 마치 그와 같지 않은가! 하나님께 찬사를 받기 위해 그가 이 세상에서 행한 그 모든 것들은 지구라 불리우는 그 방안에 남겨지게 된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칭찬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행위로 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다 결국 이 지구와 함께 멸망할 것이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다!

 

 

 

누가 너희를 혼란케 하느냐?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갈 5:7-12).

바울은 5장 1-6절에서 거짓 교리를 정죄하고 난 후, 이제 5장 7-12절에서는 그 같은 교리를 가르쳤던 거짓 교사들을 정죄한다. 그는 최소한 다섯 가지의 사례를 들어 거짓 교사들을 공격하고 있다.

 


첫째로, 거짓 교사들은 진리에 순종하는 것을 방해한다(7절). 바울은 사건의 진상을 묘사하기 위해 달리기의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출발이 썩 좋았다. 출발 후 그들은계속 진전해 나갔으며 경주는 성공적이었다. 그들은 잘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일이 발생했다. 잘 달리고 있던 그들의 자세가 흐트러지고 속도가 떨어지더니, 비틀거리고 넘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아예 달리기를 포기하고 트랙에서 벗어나 방황하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7절에서 바울이 언급한 ”진리”는 최소한 다음 둘 중의 하나를 의미하는 것이다. 곧, 구원의 진리(벧전 1:22, 23 / 살후 2:10) 아니면,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한 진리(요이 4절)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위의 두 종류의 진리를 모두 의미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거짓 교사들은 갈라디아인들이 구원의 진리, 그리고 은혜 아래 사는 삶의 진리를 좇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둘째로,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다. 주님은 갈라디아인들을 율법주의에로 부르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얻을 것을 명하셨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에로 부르신다. 그분은 결코 행위로 말미암는 믿음을 펴지 않으신다. 갈라디아인들이 어떤 음성을 들었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었다.

세째로, 거짓 교사들은 교회를 오염시켰다(9절). 거짓 교사들은 반죽 전체에 고루 스며 들어 그것을 부풀게 하는 누룩(효소)과 같다. 신약성경에서 누룩은 죄와 거짓 교리를 퍼뜨리는 것을 상징했다(마 16:6).

하찮게 보이는 거짓 교리가 온 교회를 오염시킬 수 있다. 유다는 이들 거짓 교사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저희는 ...너희 애찬의 암초요 ... 열매없는 가을 나무요...”(유 11, 12절). 이와 같은 사람들은 인간의 공로를 위주로 하는 종교를 좇고 있다.

네째로, 거짓 교사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10절)고 그는 말하고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백성이라면, 사단이 결코 그들을 휘어잡을 수 없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요 10:28-30).

 


그러나 거짓 교사들은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이들을 혼란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을 것이다. 여기 ”요동케”한다고 번역된 헬라어는 ”혼란 속으로 던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혼돈(chaos)과 혼란(confusion)을 일으키는 자는 누구든지 징벌을 받게 될 것이다(벧후 2장/ 유 10-16절 참조).

다섯째로, 거짓 교사들은 늘 참 신자를 핍박한다. 11절은 언뜻 보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로 생각되지만, 유대주의자들이 말하는 왜곡된 이야기의 표적이 바울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 구절의 뜻은 보다 간단해질 것이다. 그 당시에 어떤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이 아직도 구원의 수단으로서 할례를 전파한다고 주장했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근거로 그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가?

 


그들은 바울의 젊은 제자요, 그의 전도 여행 중의 조력자였던 디모데가 할례받은 것을 증거로 삼고 있다. 사도행전 16장 1-3절에 보면, 바울이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베풀었다는 기사가 나온다. 바울은 무슨 목적에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풀었는가? 그 대답은 3절에 나오는데 곧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리했다고 한다. 디모데는 헬라인인 아버지와 유대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였다. 바울은, 만일 디모데가 의도적으로 자의에 의해 할례를 받는다면, 그는 유대주의자와 동일시될 것을 알고 있었다.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디모데는 유대인들에게 더욱더 환영받게될 것이요, 또한 그들에게 더욱 효과적으로 전도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전도의 편의상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풀었던 것이다. 어떤사람을 의롭게 하거나 구원받게 하기 위하여 할례를 베푼 일은 결코 없었다. 유대주의자들은 디모데가 할례받았다는 것을 알고, 바울 역시 할례로 말미암은 구원을 가르쳤다고 주장하기 위해 그 사례를 이용하였음직하다. 그러나 바울의 반응은 참으로 빈 틈이 없다. 11절의 바울의 말은 사실상, ”만일 내가 그들과 한 패라면, 어째서 그 사람들이 날 이토록 계속해서 공격하며 두들겨 패겠느냐?”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만일 바울이 할례로 말미암는 구원을 전파했다면, 유대주의자들은 결코 그를 핍박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바울이 할례로 말미암는 구원을 전파했다면, 십자가가 그들에게 하등 문제될 것이 없었을 것이다(11절 참조).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위법 행위)이었다. 그들은 매우 그럴 듯한 이유에서 이것을 자신들이 나아가는 데 있어서의 걸림돌로 여겼다. 지난 수세기 동안 그들은 율법에 모든 것을 걸어 놓고 살아 왔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이 나타나더니 ”율법을 무시하시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그분이 행하신 일을 믿으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십자가는 모세 율법에 근거한 구원의 전 체계를 무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그것이 위법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십자가는 여전히 그와 똑같은 이유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공로를 위주로 하는 모든 종교를 거부하며, 파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아무런 의지할 것없이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 범죄한 죄인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꺼려하고 있다. 그들은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는 것이다.

 


12절에서 바울은 ”차라리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자신의 그 지체를 잘라 버렸으면 좋겠다”는 아주 극단적인 언사를 사용함으로써 거짓 교리와 거짓 교사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공격을 마무리한다. 바울은 여기, ”베어 버린다”는 말을 ”거세(去勢)한다”1)는 뜻으로 말한다.

1)castrate : 할례는 남성 성기의 표피 일부분을 잘라내는 것이지만 거세는 성기 자체를 베어 버린다는 강한 뜻이다-역자 주.

 


그 당시의 이방의 신들 중에 시빌리(Cybele: 소아시아에 있던 프리지아국의 신화에 나오는 신)라는 신이 있었다. 그 신을 좇는 사람들 - 사제들과 예배자 - 은 시빌리 신께 대한 헌신의 표로서 거세를 하는 관례가 있었다.

바울이 그와 같은 극단적인 언사로 거짓 교사들을 공격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바울은 거짓 교사들이 더 이상 헛된 짓을 하고 돌아다니지 말 것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11절에서 바울이 유대주의자들을 향해 했던 말은 차라리 욕설에 가까운 말이었다. 할례만 받을 필요없이 아예 거세까지 하고 훌륭한 이교도가 되라는 말인 것이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단 한 가지라도 무엇을 더한다면 당신은 곧 이교도가 될 뿐이다. 세상에는 오직 두 종류의 종교가 있을 뿐이다. 선택은 거룩한 은혜를 위주로 하는 신앙을 택하든지, 아니면 인간의 공로를 위주로 하는 종교를 택하든지 둘 중의 오직 하나일 뿐이다.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18장 9-14절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이것을 매우 생생하게 설명하셨다. 거기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어떠한 것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자였다. 단지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보고만 드릴 뿐이었다. 반면, 세리를 보라. 그는 멀리 떨어져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볼 생각도 못하고, 다만 자신의 가슴을 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였다. 누가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았는가? 세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긍휼과 은혜를 받아 가지고 집으로 내려갔지만, 바리새인은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한 자신의 수고 안에 갇힌 채로 머물러 있었다.

 


갈라디아서의 멧세지는 매우 단순하다. 자기 자신의 공로로 하나님께 나아온 사람은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다. 하나님의 품은 항상 열려져 있다. 구원은 오직 은혜를 통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얻을 수 있다. 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 갈라디아서 5:13-25

 

 

 

10. 성령을 좇아 행하라 !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완전히 돌아섰는가? 이세 그는 어떠한 율법도 다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가?

이제까지 율법과 자유에 대한 그의 논증을 살펴보면 자연히 이러한 물음이 나온다. 사실,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이 은혜의 복음을 전파한다고 해서 그를 반(反) 율법주의자(anti-nomianism)로 규정하여 고소했다. 갈라디아서의 여기 이 부분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적극적인 정의를 제시하는 데 주력한다. 그는 또한 기독교는 하나님의 도덕법(God's moral law)에 반(反)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 행위로 구원얻는 것을 위주로 하는 의식법(ceremonial law)에 반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일에도 힘을 쏟는다.

 


기독교가 도덕법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의식법에는 반대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차이를 설명해 보겠다.

기독교는 두 조류(stream)가 서로 교차되는 지점 위에 놓여 있는 좁은 다리와 같다. 한 쪽 조류는 수정과 같이 맑다. 그러나 그것은 급류여서 자칫 생명을 잃을 위험성을 안고 있다. 다른 쪽 조류는 오염되어 있어 더러운데다 유사(流砂)가 가득하여서 그것 역시 위험하다.

 


눈이 부실 정도로 깨끗한 첫째 조류는 율법주의이다. 당신은 거기에 잠시라도 떠 있을 수가 없다. 당신은 급류에 휘말려 곧 산산조각으로 부숴져 죽게 될 것이다. 더럽고 유사가 가득한 또 하나의 조류는 자유 사상 (liberitinism)이다(그들은 어떠한 형태의 율법도 배격한다). 그 속으로 떨어지면 당신은 늪에 잠겨 죽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두 조류 위에 놓인 좁은 다리 위에서 균형을 유지한다. 그는 어느 한 쪽으로도 뛰어내릴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3-15)

13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육체의 기회”로 삼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한다. 거기 ”육체”(flesh)라는 말은 우리의 신체(the physical body)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 곧 죄를 저지르기 쉬운 뒤틀려 있는 자아를 말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좇아 살아간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라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기 중심적인 것에서 탈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자유를 가장 잘 예증해 주는 분은 예수이다. 그분은 자유로운 분이셨지만, 이타적인 순종에의 완전한 모본(模本)이셨다. 자신의 지고한 열망은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이라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참 그리스도인의 자유도 바로 그와 같다. 진실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을 행하고, 또한 그것을 사랑하는 일에 완전히 자유로운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참 자유이다. 우리의 행동 동기(motivation)는 의무(duty)에 대해 민감하게 작용한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분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 그것이 우리의 행동 동기가 되어야 한다.

 


출애굽기 21장 1-6절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명확히 밝히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병행구이다. 거기 종에 관한 규례를 보면, 어떤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종으로 샀을 경우, 그 종은 육년동안 종살이를 하다가 제 칠 년이 되면 주인은 그에게 자유를 주어 내보내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만일 그 종이 자기는 주인을 사랑하므로 자유로운 몸이 되어 나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면, 주인은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거기에 그의 귓바퀴를 대고 송곳으로 그 귀를 뚫게 되어 있었다. 그것은 종이 계속 머물고 싶어했음을 나타내는 상징으로써 그 후 그는 죽을 때까지 그 주인의 종으로 그곳에 머물수 있었다.그 종이 처음 육년 동안 행했던 일이나 그 주인의 집에 평생 머물러 살며 행하는 일에는 별 차이가 없다. 시종일관 종은 주인을 섬기는 일을 하는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동기의 문제였다. 처음 육년은 외부의 요구(external requitement)에 의한 봉사였으나 나머지의 삶은 내부의 열망(intetnal desire)에 의한 충성스러운 봉사인 것이다.

 


이것을 영적인 일과 관련지어 생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평생을 모세의 법전과 의식들을 지키며 살아 온 한 경건한 유대인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제 그는 모세의 의식법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하지만 구약의 도덕적 진리의 법전, 곧 도덕법은 여전히 그에게 순종을 요구하였다.

그렇다면 실제에 있어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역시 동기의 차이이다. 그를 향한 도덕법의 요구는 동일했지만 그의 행동의 동기는 분명 변화한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옳은 것을 행하는데 있어 자유롭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14절에서 바울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두번째 큰 계명을 인용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무시할 자유는 갖고 있지 않다. 다만 그것을 이행하는 데 있어 자유로울 뿐이다. 바울은 자신이 유대주의의 외적인 형식에 속박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의 내부에 가치있는 어떤 것, 곧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그의 형제를 향하여 외부로 끓어오르고 있다. 바울은 ”네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번째 큰 계명으로부터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번째 큰계명이 자동적으로 흘러 넘친다는 잣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두번째 큰 계명을 여기에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삶에 뒤따르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바울에게 있어 새로운 개념이 아니었다. 사실, 그것은 율법서 중의 하나인 신명기 19장 18절에 이미 기록된 사실이다. 새로운 것이 있다면,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었다. 그리스도의 그 능력이 큰 계명을 순종하는 것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자유를 자신들이 좋을 대로 사용한다면 어떤 결과가 생길지 바울은 15절에서 밝히고 있다. 즉, 온 교회는 그 자신과의 분쟁에 휘말리고 마는 것이다. 여기 ”물다”(bite)와 ”먹다”(devour)는 본래 동물과 관련있는 단어들이다. 만일 우리가 서로에게서 먹이를 찾기 위해 돌아다닌다면, 실로 우리는 상어나 혹은 늑대처럼 ”피차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는 하나님의 도덕법을 무시하거나 혹은 우리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학대하는 것이 아니다(롬 14:1-15:6 / 고전 8장 참조).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랑의 원리에 근거하여 행동한다. 사랑을 통하여 그는 도덕법의 그 모든 요구를 성취한다. 그런데 그 사랑은 그의 내부에서부터 나오는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기통제(self-control)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랑과 하나님의 도덕법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은 첫째로 하나님을 섬기며, 둘째로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자아로부터 해방되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에로 부르심을 받았다.

 

 

 

자유를 누리는 비결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 5:16-18).

 


앞부분(5:13-15)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무엇인지 정의했다. 이제 이 본문(5:16-18)에서 그는 그 자유를 누리는 비결에 대하여 쓰고 있다.

16절에서 바울은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말하고 있다. ”행하다”(walk)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그 시제가 현재 시제로서 계속적인 동작의 상태를 나타낸다. 따라서 위의 구절은 ”성령 안에서 계속 걷는다” 혹은 ”성령 안에서의 걸음을 계속 유지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바울은 여기서 자유를 누리며 사는 삶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이요, 그것은 매일의 삶 속에서 계속되어야 할 행동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써 당신은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것이다. 성령 안에서 행한다면 당신은 당신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활력 및 힘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되 결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 또한 하나님을 거스리는 방법으로 역사하시지 않는다.

교회에 얼마나 열심히 출석하는지, 하루에 몇 시간이나 기도하는지, 하루에 성경을 몇 장이나 읽는지 등으로 그 사람의 영성(spiritu-aliry)을 판단하고 또한 그러한 외적인 것들이 곧 성결(holiness)의 정도를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학 시절, 친구 중에 바로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 학교에는 정기적인 기도 모임이 있었는데, 그 모임은 누구나 참여하고 싶은 자들만 자유로이 참석하는 모임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의 특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에 나는 그 모임에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의 그 친구가 복도에서 나를 붙잡고 다짜고짜로 ”넌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야!”라고 말했다.

「나도 알고는 있어, 그런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나는 그에게 반문하였다.

”네가 기도 모임에 참석하지 않기 때문이야!”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신령하다는 것, 곧 성령 안에서 행한다는 것을 그는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어떤 사람이냐”보다는 ”내가 어디에 참석했느냐”에 성령을 좇아 사는 삶의 근거를 두고 있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바울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기란 매우 어렵고 힘들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하여 알고 있다시피 거기에는 많은 문제와 갈등이 있다. 성령과 육체는 서로 거스리는 관계에 있어 결코 함께 할 수가 없다(17절). 따라서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은 자연적으로 내부의 싸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바울은 경고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새로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깨닫는 것 중 하나는 인생은 하나의 싸움(conflict)라는 것이다. 그는 영적으로는 ”새로운 피조물”이지만, 그의 육신에는 여전히 죄의 원리를 지니고 있다. 죄는 아직 그의 속에 있고 그는 그런 육신을 가진 사람이다. 따라서, 그에게 갈등이 있음은 당연하다(롬 7:14-25 참조).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결코 이와 같은 종류의 문제에 부딪히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갈등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육체에 거스려 싸우는 성령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17절의 ”육체”(flesh)라는 단어에 주목하라. 이 말에는 신학적인 의미가 전혀 함축되어 있지 않고 다만 인간의 신체만을 언급하는 말일 수 있다(눅 24:39). 혹은 신학적인 의미에서 그것은 죄악의 교두보(橋頭堡) 역할을 하는 인간의 저급한 본성을 언급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사단 전용의 ”활동무대”인 것이다(갈 3:3 참조). 혹은, 그것은 ”나 자신”에 근거한 성결을 이루기 위해서 갖은 애를 쓰고 있는 인간의 자기 공로(self-effort)를 의미할 수도 있다(롬 4:1 / 갈 6:12 참조).

역시 17절에서의 ”소욕”(desire)이라는 단어를 주목해 보라. 흠정역 성경은 그것을 정욕(lust)으로 번역하였다. 헬라어에서 살펴보면 이 단어는 ”간절한 바램”을 의미한다. 육신은 항상 성령을 거스린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뒤로 물러나 앉아 그 싸움을 관전하는 자가 아니다. 그는 육체의 행실을 죽이기 위해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의 구원을 이루어야만 한다(빌 2:12, 13 참조).

어떻게 육체를 죽일 수 있을까? 그 최선의 방법은 그것을 굶겨 죽이는 것이다. 유혹받을 장소에는 가지 말라. 육신적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일은 삼가라. 육신을 즐겁게 할 자리는 피하라. 할 수 있는 한언제 어디서든지 육신을 쳐 복종시키라.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살라”(Live a Christl-ike life)는 의미이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사는 삶의 양식(樣式)을 뜻한다. 자신의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기뻐하실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육체를 다스릴 수있게 할 뿐만 아니라 율법 아래 속하지 않도록 해주기도 한다(18절 참조).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육체의 소욕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율법은 육체의 소욕을 부추기며, 죄를 들추어 내는 일을 한다.

「천로역정」에 보면 어떤 사람이 해석자(lnterpreter)의 집에 들어가 온통 먼지로 뒤덮여 있는 큰 방을 발견한다. 그때 한 소녀가 비를 들고 들어와 마루를 쓸기 시작한다. 그러자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먼지 때문에 입을 막고 기침을 하는 등 소동이 일게 된다. 그 먼지를 가라앉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누군가가 방으로 들어와 물을 뿌려 주는 일이었다.

해석자는 그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루는 복음의 달콤한 은혜에 의해 한 번도 거룩케 되본 적이 없는 사람의 마음이고, 먼지는 사람을 더럽히는 원죄와 내면의 부패한 것들이다. 마루를 쓸기 시작했던 소녀는 율법이다. 율법이 할 수 있었던 일이란 먼지를 일으키는 것, 곧 죄를 들추어 내는 일 뿐이었다. 먼지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뿌렸던 물은 죄를 다스리고 영혼을 깨끗케 하는 복음이었다.

육체, 곧 인간의 죄악에의 성향(性向)은 강력한 세력이어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령을 좇아 사는 길밖에 없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육체를 극복하고자 했던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순종하기 위해 이를 갈며 끙끙거리고 신음하면서 애를 썼다. 그들은 18절에서 바울이 말한 것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하고 있었다. 유대주의자들은 육체를 좇아 살았으며 율법 아래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개인의 체험으로부터, 율법은 결코 육체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인간이 율법을 지킴으로써는 육체를 극복할 수 없을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혼자 힘으로만 그것을 성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 같은 노력은 매번 실패할 것이다.

 


여기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과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과의 차이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들이다(롬 8:14 참조). 당신은 ”성령이시여, 저를 인도하소서!”라고 기도해서는 안 된다. 지금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이미 성령께서 당신을 하나님께 인도하신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주여 당신을 좇는 방법을 알게 하소서!”가 더 좋은 기도이다.

 

 

 

두 가지의 삶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 5:19-25).

바울은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명령하였다(16절). 또한 성령과육체 간의 갈등도 기술하였다(17, 18). 이제 이 부분에서는 이 두 종류의 근본적으로 다른 삶의 방식, 곧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 대(對) 육체를 좇아 사는 삶을 비교하고 있다.

바울은 ”육체의 일”들을 모두 나열하느라고 18-21절을 거의 다 할애하고 있다. 거기에는 음행과 분쟁같이 명백하고 심각한 종류의 죄도 있고 시기와 당 짓는 것과 같이 더욱 교활한 종류의 죄도 있다.

 


자신들의 육체의 죄를 온갖 영적인 미명(美名)으로 교묘히 위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청교도 작가인 토마스 와트슨(Thomas Watson)은 그와 같은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적절히 묘사하고 있다. 곧, ”그들은 자신들의 사악함을 억제하지만 그것을 미워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마음에는 어떤 변화가 없는 것이다. 죄는 억제될 수 있을 뿐 결코 교정되거나 제거될 수는 없는 것, 사자는 쇠사슬에 매여 있어도 역시 사자인 것같이 죄는 억제되어도 역시 죄인 것이다.”

죄는 네 가지 범주로 나눠 구분할 수 있다. 곧, 성적인 것, 종교적인 것, 인간 관계에서 오는 것, 어떤 대상에 관한 관계에서 오는 것 등이다. 당신은 당신의 사악함을 위장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사악함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여전히 육체의 일의 근원이 되고 있다. 바울은 21절에서 불길한 경고를 하고 있다.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한 그리스도인이 실족했다고 가정해 보자. 가령, 부도덕한 생각을 했다든지, 혹은 누구를 질투하거나 분을 냈다든지, 지나치게 비판적이라든지.... 만일 그가 그 같은 잘못을 저지른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말을 하는 자”라는 구절에서의 ”하는”(practice)라는 헬라어는 습관적인 어떤 것, 곧 한번 행할 일을 거듭 반복해서 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일들을 습관적으로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지 못한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는 구원의 최종적인 완성(completeness)과 관련이 있다(행 28:31 참조). 바울은 그와 같은 습관적인 행위들로 특정지워지는 불신자들은 천국 시민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인이 그런 행위를 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닌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인들도 죄를 짓는다. 그러나 그들은 그 죄를 용서받는다(요일 1:9 / 2:1). 그리스도인들도 죄를 짓지만, 그들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께서 그러한 행위가 습관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제지하시는 것이다.

이제 22, 23절에 소개되고 있는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로 하자. 거기 ”성령의 열매”에서의 ”열매”라는 헬라어는 단수로 표기되어 있다. ”육체의 일”에서의 ”일”이 복수로 되어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어떤 사람이 육체를 좇아 산다고 해서 늘 그 모든 행위를 행하며 사는 것은 아니며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육체의 행위를 산출해 내는 것도 아니다. 반면, 성령은 항상 단 하나의 열매를 맺는다. 우리는 ”사랑과 희락의 열매는 있는데 오래 참음과 절제의 열매는 없다”는 식으로는 말할 수 없다. 그 모든 열매를 다 소유하고 있든지, 아니면 하나도 소유하고 있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자체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우리는 사랑, 희락, 화평을 우리 스스로는 만들어 낼 수 없다. 다만 성령을 좇아 행할 때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이 모든 일을 행하신다.”

이것이 바로 신자의 삶에서 찾아 볼 수 있어야 할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때로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에 실패할 때도 있을 것이고 그러한 삶의 방식을 어길 때도 생길 것이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열매는 그의 삶 속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실재가 되어야 한다고 바울은 강조하고 있다(요 15:1-8 참조).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열매는 극히 중요한 것이다. 성경은 신약 27권 중의 24권에서 이 열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열매는 그 사람이 구원받았음을 나타내 주는 역할을 한다. 마태복음 7장 20절은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그 모든 열매의 근원이시다. 어떤 사람의 삶에서 그 열매를 볼 수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은 그 열매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은 ”찬미하는 입술의 열매”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골로새서 1장 10절에서 열매는 ”착한 행실”로 묘사되고 있다. 요한복음 4장 27-38절에서 열매는 ”그리스도께로 인도된 사람들”로 묘사되고 있다. 성경은 열매를 여러 가지의 의로운 행동들(actions)로서 나타내 보이고 있다.

”행동의 열매”의 배후에는 ”태도의 열매”가 있다. 행동의 열매가 맺히기 위해서는 먼저 ”태도의 열매”가 맺혀야 한다. 우리의 내면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든지 그것은 반드시 밖으로 표출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혼자서는 사랑할 수 없다. 사랑에는 반드시 그 대상이 있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혼자서 기뻐할 수 없다. 기쁨은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 나누어야 한다. 심지어 선함(goodness)조차도 자기만의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행동의 열매를 맺게 하는 태도의 열매이다.

성령은 태도의 열매를 맺게 하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그것은 밖으로 표출이 된다. 태도의 열매 「없는」 행동의 열매는 율법주의요 외식이다. 참으로 열매를 잘 맺기 위해서는 성령을 의지하는 것이 요구된다. 하나님의 성령은 끊임없이 열매를 맺게 해주신다. 문제는 우리가 그러한 성령의 활동에 복종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과일 나무 위로 올라가고 당신은 나무 아래서 바구니를 들고 서 있는 것과 같다. 나무 위로 올라간 친구는 나무를 흔들어 열매를 떨어뜨릴 테니 바구니에 주어 담을 준비를 하고 있으리라 말한다. 그런데 만일 당신이 다른 일에 한눈을 팔고 있다거나 혹은 바구니를 뒤집어 놓은 채로 있다면, 결코 열매는 하나도 얻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물론 바구니를 바로 들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다가 위로부터 열매가 떨어지면 주워서 당신의 바구니에 잘 집어넣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태도의 열매는 계속해서 공급되고 있다. 곧 성령은 끊임없이 열매를 맺고 계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바구니가 어디에 있느냐다. 열매를 맺게 해주시는 성령의 역사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열매의 결실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가 모두 밖으로 표현되는 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및 우리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들이다. 본문에 나열된 성령의 열매들이 절대로 완전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아마도 바울은 이 아홉 가지 외에도 다른 은혜들을 얼마든지 언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그가 선택한 아홉 가지 열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사랑

 

 

 

바울은 여기서 가장 고차원적 형태의 사랑인 아가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아가페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희생(self-sacrifice)이다.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하여 따뜻한 감정을 가지셨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셨다”고 되어 있는가? 아니다. 그 구절은 결코 그렇게 읽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희생 제물이 되심으로써)” 우리에게 대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적인 사랑을 항상 자기 희생이라는 용어로 정의하신다(요 15:13 참조).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사랑하신 대로 사랑하라고 그분께서 희생하신 대로 희생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고 계신다. 에베소서 5장 2절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말하고 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이 사랑을 생산해 내실 수 있다. 로마서 5장 5절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증거하고 있다.

 


희락

 


바울은 하늘의 기쁨, 곧 그리스도인이 맛보는 하나님께 속한 기쁨을 언급하고 있다. 기쁨은 헬라어로 「카라」(chata)인데, 이 용어는 영적 혹은 종교적 요소들에 근거한 기쁨을 언급할 때 사용된다.

하늘의 기쁨은 우리의 일의 재미있는 정도나 잘 진행되어가는가에 좌우되지 않는다. 하늘의 기쁨은 하나님께만 근거를 두고 있다. 요한복음 16장 21절에서 예수께서는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고통을 통하여 어떤 일을 하고자 하실 때에는 그 뜻이 이뤄지도록 그 고통에 순종하자. 그리하면 반드시 기쁨이 올 것이다.

그와 같은 거룩한 기쁨은 성경적으로 ”완전한 기쁨”(fully joy)으로 정의된다. 완전한 그 기쁨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의 기쁨이요,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쁨이다(요 15:11 참조).

 

 

 

화평이 평화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근거한 마음의 평안을 의미한다. 기쁨과 마찬가지로 이는 환경과는 상관이 없는 화평이다. 화평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상관없이 나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것은 모두 옳다는 내면의 고요한 확신이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평화로운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그것을 다스리는 평화로운 마음을 소유하는 것이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 닥칠지라도 이 평화로운 마음을 잃지 말라. 그리하면 어떠한 난관도 감히 우리를 지배할 수 없을 것이다(빌 4:7 참조).

 


오래참음

 

 

 

오래참음은 아량(tolerance)과 관련을 갖는다. 인내는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대하든지에 상관없이 「그」를 향해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자비와 연관되어 생각될 때가 종종 있으며, 신자로서 추구해야 할 덕목이기도 하다(벧후 1:6 참조). 물론 그 인내의 근원은 성령이시다(골 1:11 참조).

 


자비

 

 

 

인간 성품의 나약함과 인간의 그 궁핍한 상태에 비추어 볼 때, 자비는 온유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한 특성인 이 동정적인 부드러움은 나약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다른 사람을 향하여 주의를 돌리는 것이다. 사무엘하 22장 36절에서 다윗은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온유하시고 다정하시며, 친절하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소심(小心)한 분은 아니시다. 오히려 그분의 온유하심은 강한 확신으로 포장된 온유이다. 야고보서 3장 17절에서 온유함(한글개역성경에서는 ”관용”으로 번역됨)은 위에서 오는 지혜에 수반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양선

 

 

 

선함은 도덕적 혹은 영적으로 탁월한 것을 의미한다. 로마서 5장 7절의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라는 말씀 속에는 의로움(righteousness)과 선함의 차이가 함축되어 있다. 의로운 사람들은 집세를 물지 못하는 과부를 내쫓을 수 있다. 의로움은 기준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선한 사람은 그녀를 대신하여 집세를 내줄 것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또한 선하시다.

갈라디아서 6장 10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와 같은 선함은 오직 신적(神的)인 근원에서만이 올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명령하시고 우리가 그분의 능력 안에서 활동할 때 그것을 성취하신다(살후 1:11 참조).

 


충성

 


충성은 ”신뢰할 수 있음, 충실함, 믿음이 불변함”을 의미한다. 사도행전 6장 5절을 보면 ”충성됨으로 충만한 사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믿음(충성됨)과 성령이 별개의 것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다. 믿음과 성령은 늘 한가지로 활동한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들은 충성되어 신뢰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온유

 


온유함은 성령의 열매 중에서 유일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특성이 아닌 은혜이다. 온유함이란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복종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유함이 성육신하신 「아들」의 특성인 것은 분명하다. 그 용어는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온유하심을 받는 부차적인 수단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온유하심은 「친절」에 포함되는 것이므로 나는 이 유순함을 「겸손」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신약에서 온유함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마 5:5 참조), 가르침을 잘 받는 것(약 1:21 참조), 그리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고전 4:21 참조) 등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빌립보서 2장 1-4절은 겸손 혹은 온유함이 어떻게 ”성령의 사귐”에서 유래되었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그분과 더불어 진정한 사귐을 가지면 그분께서 ”겸손한 마음”이라는 결과를 빚어 주실 것이다.

 


절제

 


절제, 혹은 자기 통제(self-control)는 자기 자신을 억제하는 능력을 말한다. 성경의 여러 가지 명령 중에는 우리의 믿음에 절제를 더하라는 것도 있다(벧후 1:6 참조). 우리가 성령 안에서 행할 때, 곧 그분께서 우리를 다스리실 때, 분명 거기에 자기 통제가 있다.

 


우리 신자들은 성령의 열매를 하나도 빠짐없이 맺는 삶을 살도록 명령받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삶에 있어 우리의 본보기가 되신다.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와같은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은혜를 공급해 주신다.

 


 율법은 죄를 억제하는 데 꼭 필요하다. 하지만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필요가 없다. 성령의 활동을 금지할 율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에게나 육체와 성령 간의 갈등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 갈등이 심각하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승리가 있음을 기억하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이다(25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의 육체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할이었다. 그분께서 그 일을 행하신 것이다(롬 8:1-9 참조).

이제 여기 우리의 역할이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25절에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이는 참으로 간단한 명령인 듯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벌을 대신 치러 주셨다. 그리고 우리의 풍성한 삶을 위하여 그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제 우리는 그분께서 허락하신 삶 속에서 그분의 뜻에 일치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 성령을 좇아 행하여야만 할 것이다.

 

 

 

● 갈라디아서 5:26-6:10

 

 

 

11. 심고 거둠의 법칙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성결」(holiness)의 문제이다. 복음 전도(evangelsm)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복음 전도는 성결함에서 비롯되는 자연적 결과이다. 이 세상에 참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신자들의 경건한 삶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제 1순위를 두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성결이다.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성결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가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목표 역시 성결이다. 우리는 우리의 각자의 삶 속에 있는 죄에 직면하여, 그것을 처리해야 한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들을 도와 그들의 삶 속에 있는 죄를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도 해야 한다.

 


바울은 본 6장에서 바로 이러한 성결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우리는 형제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5:26-6:1).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안에 두 개의 파당, 곧 성령을 좇아 행하며 성결한 생활에 힘쓰는 ”신령한” 자들과, 율법에 속하여 살고 있는 ”육적인”(carnal) 자들이 있음을 직시하고 있다. 동시에 그는, 바로 그와 같은 교회의 상황에 문제점이 잠재되어 있음을 깨닫고 있다.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육적인 자들에 대해 신령한 자들은 우월감을 느낄 소지가 있었다.

5장 26절에서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고 한 말이었다. 성령 안에서 자유롭게 된 신령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자유를 오용(誤用)할 수도 있었고 믿음이 약하고 율법주의적인 신자들 위에 군림할 위험성이 다분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넘어진 형제들을 깔보지 말고 오히려 그들이 처한 곳으로 내려가 그들을 도우라!”고 권고하고 있다.

넘어진 형제가 첫번째로 필요로 하는 것은 누군가가 ”일으켜 세워지는 것”이다. 6장 1절의 ”드러나다”라는 말은 상대방이 ”알지 못하게 조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구절은 한 그리스도인이 죄를 짓고 있는 다른 그리스도인을 발견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바울은 어떤 부수적인 증거를 가지고 범죄한 자를 색출하라고 갈라디아인들에게 말하지는 않는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발견되어야 한다.”, 곧 그의 문제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소문이나 혹은 추측이 아닌, 분명히 알려진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범죄한 일”이라는 단어는 통상적으로 ”죄”나 혹은 ”범죄”로는 번역되지 않는다(갈 3:19 참조). 여기서 이 말의 의미는 ”실책, 타락 혹은 실수”(blunder)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바울은 고의적인 죄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과오 혹은 실수”(mistake)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 당시의 몇몇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육에 속하여 유대주의의 율법을 지키려다가 그만 넘어지고 마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넘어진 자가 취해야 할 첫번째 조치는 그 스스로 자원하여 일어나려고 하는 일이다. 만일 그가 도움을 요청한다면, 그때에는 ”신령한 너희”가 나서야 할 때이다.

그렇다면 ”신령한” 자란 누구를 가리키는가? 신령한 자는 그리스도처럼 생각하는 자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늘 의식하며 그리스도의 말씀이 자기 안에 풍성히 있게 하고 또한 그 말씀을 실천하는 자이다(3:16 참조).

 


바울은 늘 신령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의 짐을 맡겼다. 그는 육적인 사람들에게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게 한 일이 없었다(롬 15:1 / 살전 5:14 참조).

그래서, 신령한 자들은 넘어진 자들을 ”바로 잡아야”한다. 여기 사용된 헬라어는 ”수선하다,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그물을 수선하거나 혹은 탈구(脫臼)된 손발을 제자리에 맞추는 것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여기 1절에서 ”바로잡다”라는 말은, 성령을 좇아 행했고 그리스도께 속한 생각만을 품고 살았던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육적으로 타락하고 말았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그러한 자를 바로잡는 데는 세 단계가 있다.

먼저, 우리는 그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평가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는 그가 하나님께 그 죄를 자백하고 회개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그가 성령을 의지하며, 그 자신의 죄악을 떠난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를 격려해야 한다.

이것은 처벌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누군가가 일으켜 세워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류의 권징(discipline)은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자를 '바로잡아' 주는 것이다.

 


이 분명한 것까지도 적당히 눈감아 주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럴 듯한 이유가 있는 듯도 하다. ”우리도 죄인인데, 우리가 누구를 판단한단 말인가? 게다가 그들이 시험을 받아 교회를 떠나가기라도 한다면 그건 더 큰 일이 아닌가?”라고 변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권징에 관하여 많이 말하고 있다. 바울은 그레데 섬 교회의 목회자인 디도에게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라”고 말했다(딛 2:15). 성경은 형제 사이의 다툼(마 18:15-17), 명령 불복종(살후 3:6), 불일치와 거짓 가르침(딛 3:9-11 / 딤전 1:20), 심각한 음행(고전 5장) 등에 대해 교회가 권징을 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마태복음 18장 15-17절에서 우리는 신자들에 대한 권징에 네가지의 단계가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는 그 당사자에게 혼자 찾아가 그와 만나야 한다.

만일 그가 듣지 않으면 우리는 두세 명의 증인을 데리고 그에게 가야 한다.

그래도 그가 여전히 듣지 않는다면, 우리는 교회에 말한다. 교회(혹은, 교회의 지도자)가 역시 그를 타이른다.

만일 그가 여전히 듣지 않으면, 그는 교회에서 내쫓김을 받는다.

 


이는 좀 지나치다고 생각되고 심지어 주제넘는 행동으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위의 네 가지 절차를 모두 거치는 비결은 그것이 「어떻게 행해지느냐」에 달려 있다.

 

 

 

이러한 단계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그 범죄한 그리스도인을 한 형제로 대하면서 충고해 주어야 한다(살후 3:15 참조). 이런 일은 ”온유한 심령으로”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1절). 신약성경에서 형제 그리스도인에 대한 권징을 권면하는 어느 구절을 보아도 그 동기는 사랑과 친절, 그리고 그를 용서하여 바로잡아 주려는 열망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 걸음 나아가, 우리는 겸손한 자세로 넘어진 형제를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곧,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 우리 역시 시험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1절). 우리는 정직해야 하며 또한 솔직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평해야 한다. 넘어진 형제를 돕는다는 것은 잔인하고 비판적이며 독선적이거나 혹은 심판적인 자세로 행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마 7:1 참조).

 


그리스도인은 죄를 꾸짖을 책임이 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자신의 죄로부터 돌아서면, 그는 바로 잡아진 셈이다. 우리도 그와 똑같은 종류의 시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들을 바로잡아 줄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온유함이 징계로 바뀌어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은 곧 그 사람이 말을 듣지 않을 때이다. 그와 같은 경우에는 권징이 있어야 한다.

 

 

 

서로 남의 짐을 지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갈 6:2-5).

 


범죄한 형제를 일으켜 세운 후에는 그가 자신의 짐을 질 수 있도록 그를 붙들어 주어야 한다(2절). 한 신자를 영적으로 압박하는 것,그가 범죄하도록 충동질하거나 혹은 그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범죄하도록 괴롭히는 것은 바로 이 짐이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똑같은 죄를 계속 저지르는 데 있어 본보기라고 해도 좋을 사람이 있다. 어느 날, 그가 나를 찾아와 도움을 구했고 우리는 그의 문제를 솔직하게 다루어 나갔다. 이윽고 그는 바로 잡아졌다. 그러나 나는 그를 그냥 보내지 않았다. 나는 그를 위해 매일 기도하겠다고 약속을 했고, 일 주일에 한두 번, 성령 안에서의 그의 삶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눌 기회를 갖자고 제의했다. 우리는 그가 다시 그 전과 똑같은 죄를 저지를 때면 그때마다 그는 내게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일치를 봤다. 그러한 약속은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그는 나와 맺은 약속으로 말미암아 계속적으로 저질러 왔던 죄에서 돌아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사랑하였고 존경하였으므로, 굳이 그에 대한 나의 관심을 무시하거나 혹은 그 죄 때문에 자신에 대한 나의 신뢰감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기독교는 흥미진진한 스포츠가 아니다. 누군가를 일으켜 세워 준다고 해서 그것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그를 계속적으로 붙들어 주어야 할 것이다. 그에게 당신의 삶을 내걸고, 그를 밑에서 받쳐 주고, 그와 함께 기도하며, 그와 더불어 계속 친밀한 만남을 유지하라. 그가 그의 짐을 질 수 있도록 도우라.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을 도울 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다(2절). 예수에서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율법이다. 내가 나의 형제에게 열중하여 그를 사랑하고, 그의 문제점들에 대해 참된 도움을 줄 바로 그때에 그리스도의 법은 성취된다.

 


3절에서 바울은 몇몇 그리스도인들이 몸을 굽혀 다른 사람들의 짐을 메어 주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가정하고 있다. 곧 그들은 그러한일을 행하는 것이 자신들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같은 일을 할 시간이 없다.” 그들은 문제를 가진 사람들보다는 자신들이 월등하다는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 기만적인 자세는 그 정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오히려 상대편 그리스도인을 영락(零落)시킬 수가 있다.

 


우월감(교만)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 평가하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그래서 바울은 4절에서 우리 자신을 넘어진 불쌍한 형제와 비교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에 비추어 우리 자신의 행위를 살펴봄으로써 과연 우리가 스스로에게 만족할 만한 이유가 있는지 알아 봐야 한다. 때때로 우리는 ”물론 나도 잘못을 저지르며 살고 있긴 하지만 그 녀석 같지는 않아”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질책을 우리의 기준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둘러보아 과연 그것이 하나님께서 점검하실 때 무사 통과할 수 있는지를 알아 봐야 할 것이다. 만일 통과될 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얼마나 나쁜 짓을 하고 있는지를 자신과 비교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장성한 정도나 이루어 놓는 일에 대해서만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은 각자 자기 몫의 짐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5절). 누구나 그 스스로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는 바울의 말은 2절에서 서로 남의 짐을 지라고 했던 말과 모순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헬라어 본문을 살펴보면 이러한 문제는 쉽게 풀린다. 바울은 그의 마음 속에 두 가지의 다른 진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서 각각 의미가 다른 용어들을 선택하고 있다. 2절에서 ”짐”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어떤 무거운 짐을 의미한다. 곧, 넘어진 형제 혼자 들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5절에서의 자기의 ”짐”은 헬라어로 가벼운 꾸러미를 의미한다. 짐 중에는 다른 어떤 사람과도 나누어 질 수없는 짐이 있다. 그것은 최후의 심판대에서 그리스도를 대면할 때 우리가 져야 할 책임감의 짐이다. 그 날에는 누구나 그 자신의 꾸러미를 메고 있어야 한다. 그 짐은 가벼운 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이다(롬 8:1 참조). 그러나 현재의 삶 속에서는 서로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서 져야만 한다. 목회자들을 위한 집회나 수련회에 참석하면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여러분께서 기억하셔야 할 사실은, 사역 중에는 어느 누구와도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그 같은 말을 정말 믿는다면, 나는 목회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와 가까와지기를 원한다. 나는 설교만을 하는 기계가 될 수는 없다. 나는 사람들을 밑에서 받쳐 주고 싶고 그들 또한 밑에서 나를 받쳐 줄 것을 원한다.

 

 

 

하나님의 좋은 것을 함께 나누라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

 


6절은 그 해석에 있어 논쟁의 여지가 있는 구절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구절을,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에게 그들의 교사들을 위해 사례(pay)를 지불하라는 교훈을 주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순리에 맞지 않는다. 전후의 문맥과 배경을 살펴볼 때 바울이 하필이면 여기서 가르치는 자의 봉급 문제를 들고 나올 까닭이 어디있는가?

 


6절을 헬라 원문에서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교훈을 받는 자는 모든 좋은 것을 교훈을 주는 자와 함께 나누게 하라”로 읽을 수 있다. 여기 「나누다」라는 말은 ”동등하게 갖는다” 혹은 ”동등하게 소유하다”라는 뜻이다. 사실 그것은 어떤 공동의 사귐(a common fellow)을 의미한다. 따라서 6절은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과 교제를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모든 좋은 것들을 서로 나누는 삶을 산다. 여기서 ”좋은 것들”(good things)이란 주로 영적으로 탁월한 것을 언급하는 말로 사용되었다(롬 10:15 /히 9:11 참조).

 


그렇게 넘어진 형제를 일으켜 세우라. 그가 당신에게 도움받고 있는가를 확인하라. 곧, 그가 자신을 도와 주는 교사와 더불어 모든 좋은 것(영적 진리)을 나누고 있는지 확인하라.

 

 

 

무시할 수 없는 법칙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7-10).

 


우주에는 자연 법칙이 있듯, 영적이며 도덕적인 법칙도 있음을 사람들은 깨달아야 한다.

 


오늘날 공립 학교와 대학가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사상은, 절대적인 것은 결코 있을 수 없고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다”라는 것이다. 세속적인 철학자들과 교수들은 절대적인 자연 법칙들이 있음을 인정은 한다. 곧, 만일 그들이 시속 100km의 속도로 차를 몰아 어떤 담벽을 향해 달려든다면, 그 결과는 극히 비참할 것이라고 그들은 굳게 믿는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이 옳은 것이냐, 그릇된 것이냐라는 물음이 생길 때면, 그들은 훨씬 더 융통성 있는 것을 택한다. 도덕적이며 영적인 물음들은 ”그 개인에게 달려 있으며” 또한 ”그것은 상황에 좌우된다”고 그들은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결과적으로 새 도덕(dle new morality)이 되었고, ”당신 자신의 것을 행하는 것”의 끊임없는 결과, 곧 마약, 비합법적인 임신, 낙태, 알콜 중독을 통하여 쓰라린 슬픔과 죽음을 거둬들이게 되었다.1)

 


1)저자가 새 도덕으로 부르고 있는 이 이론은 이른바 상황윤리(Situation Ethics)라는 것이다. 상황 윤리는 그 절대 규범으로 오직 「사랑」 하나만을 인정하고, 어떤 상황에서든 그 「사랑」의 요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실제에 있어 그 절대적 사랑의 요구는「상황」에 따라 결정된다. 그 상황이 무엇이든지,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사랑의 동기에서 행했다면, 그것은 정당한 것이다. 「상황 윤리」의 저자 플레처(Fletcher)의 견해에 따르면, 나라를 사랑하기에 매춘 행위를 하는 것, 어떤 병자가 가족들을 위해 희생적 자살을 기도하는 것 태아를 위한 어떤 이유에서 낙태를 하는 것 등은 각각 다른 상황이지만 사랑의 동기에서 행해졌기에 그것은 정당하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이때 행동의 주체는 '나 자신'이 된다. 본서의 저자는 여기서 바로 이러한 상황 윤리를 지적하고 있다-역자 주.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일을 행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절대적인 자연 법칙이 있듯, 거역할 수도 없고 또한 반박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도덕 법칙이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관점에서 절대적인 법칙에 의해 지배를 받는 세상을 지으셨다면, 당신은 도덕적이며 영적인 세상 또한 절대적인 법칙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혹 그렇잖다면 하나님은 일관성 없는 분이 되고 말 것이다. 7절에서 바울은 이러한 거역할 수 없는 법칙 중의 하나를 인용하고 있다. 그것은 곧, 너희는 너희가 심은 것을 거둔다는 것이다.

 


사람의 삶에 늘 작용하는 것은 영적 법칙이다. 그것은 결코 무시되거나 회피될 수 없다.

 


바울은 이 법칙을 갈라디아인들에게 적용한다. 이제 그는 올바로 서고자 하는 마음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는 세속적인 신자들에게 방향을 돌리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율법주의와 스스로의 노력(self-effort)에 달린 일이라는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믿으며 율법의 의식(儀式)에 매달리는 자들이다.

 

 

 

사실, 바울은 그들을 향해 ”이제 제발 좀 그만두어라! 계속하여 유대주의자들에게 속고 살 것인가? 여전히 행위와 율법주의의 길에서 방황하려느냐? 그럴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7절의 원리는 또 다른 의미에서도 역시 불신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는 말은 누구에게나 적용될수 있는 일반적인 원리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법칙을 거역할 수 있다는 그릇된 사상에 기만당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롱을 당하실 분이 아니다. 여기 ”만홀히 여김을 받는다”는 헬라어의 문자적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 코를 치켜 올린다는 의미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아주 지나칠 정도로 남용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행하든지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은 자유롭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신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행동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이 심음과 거둠의 법칙을 어기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단순한 법칙이다. 그것은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다. 당신은 당신이 심은 것을 거두는 것이다.

 


어느 해 여름, 우리는 집 뒤뜰의 꽤 큰 정원에다 옥수수와 스콰시(squash: 서양 호박), 당근과 호박에 곁들여 각종 채소를 심었었다. 그 후 상당히 긴 휴가를 보내고 돌아와 보니, 스콰시가 자라나는 한복판에 난데없이 키가 큰 해바라기들이 쑥쑥 자라나고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영문을 알지 못한 채 의아해 했다. 분명 우리는 스콰시를 심었지, 해바라기를 심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얼마 후에 나는 그 원인을 알게 되었다. 여행을 떠나고 없는 사이에 어떤 장난꾼이 몰래 들어와 스콰시를 심어 놓은 자리에다 해바라기씨들을 심었던 것이다.

 

 

 

스콰시만 자라야 할 그곳에 해바라기까지 자란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사실 우리는 해바라기를 뽑지 않고 그냥 자라도록 놓아 두었으며, 가끔 그것을 감상하는 즐거움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곧, 자기가 자기의 정원 안에 심는 것은 그대로 거둔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바로 우리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의 성격은 어릴 때의 버릇으로 결정된다. 어리석게도 자기만 알고 자신의 마음이 내키는 대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길러진 아이는, 어린 시절에는 ”영민하고 대단하게” 보일지 모르나 성장하면 어떤 인물이 되는 줄 아는가? 강퍅하기 이를 데 없고 고집세며, 항시 부루퉁하고 매사가 자기 중심적이며, 또한 생활에 절도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8절은 우리가 씨를 뿌리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두 종류의 밭이 있음을 말해 준다. 우리는 육신의 밭이나 혹은 성령의 밭에 씨를 뿌릴 수 있다. 우리가 9장에서 살폈듯이 육신은 죄의 접촉점(죄의 교두보)이다. 육신의 밭에 씨를 뿌리는 것은 성령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특별한 접촉점을 기쁘게 하는 쪽을 택하는 셈이다. 그 결과는 「썩어짐」이다. 육신의 밭에 씨를 뿌렸을 때는 죄를 거두어 들일 것이다. ”썩어진 것”이라는 단어는 「부패」와 「죽음」을 의미한다. 육신의 밭에 씨를 뿌리는 사람은 부패와 죽음을 거둔다.

 


이 일반적인 원리를 늘 기억하라. 육신의 밭에 씨를 뿌리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갖는 기쁨과 평화, 그 어느 것도 누릴수 없을 것이다. 한평생 육신의 밭에 씨 뿌리기를 계속하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현재에는 영적인 죽음을 거두며,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죽음을 거둘 것이다.

 


18세기 영문학의 천재 바이런 경(Lord Byron)은 그의 전생애 동안 육신의 밭에만 씨를 뿌렸었다. 그는 거칠었으며, 부도덕했고, 절도없는 삶을 살았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거두게 될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읊조렸다.

 


”나의 생애는 빛

바랜 저 노오란 잎새

거기 있네

사랑의 꽃

그 열매는 간 곳 없고

나의 것이라고는 오직

벌레 먹어 바스러지고 말

저 잎새의 슬픔뿐이어라.”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두렵기조차 하다. 그러나 바이런 경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법칙을 잘 알고 있었다.

 


육신에 대하여 씨를 뿌릴 때 우리는 5장 19-21절에 언급된 육신의 행위들을 거둔다. 그렇다면 우리가 ”육신에 대하여 씨를 뿌린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의 어떤 행동이 육체에 대하여 씨를 뿌리는 행동일까? 그것은 곧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에 영합함으로써 악의를 품고 사악한 것들을 생각하며, 죄스러운 행위들을 눈여겨보고 자기 연민에 빠지며 또한 육체만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육체가 과녁이 되는 장소에 있음으로써 비롯되는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육체에 대하여 씨를 뿌리면서, 어째서 좀처럼 성결이 거두어지지 않는지 궁금하게 여긴다. 그러나 성결은 성령께 대하여 씨를 뿌림으로써 거둬지는 결과이다. 우리는 육체에 대하여 씨를 뿌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령께 대하여 씨를 뿌릴 수있다. 또한 성령께 속하면 영생을 거둔다. 이는 곧 성령으로 충만한 것,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하기도한다. 육신에 영합하기보다 우리는 거룩하신 성령께 순복한다. 그 결과는 충만하고 풍성한 삶, 곧 영원한 생명이다.

 


여기서 나는 영생의 양적(量的)인 국면이 아닌 질적(質的)인 국면을 생각하고 있다. 영원한 생명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이다.

 


내가 이제껏 만났던, 가장 초라하고 비참한 사람들 중에도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죄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영원한 생명이 가지는 질적인 기쁨과 축복 및 부요함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는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상실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의 말은, 성령께 대하여 씨를 뿌리고 있을 때에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평화와 축복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은혜의 원리를 힘입어 사는 삶에서 멀어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난다.

 


따라서 성령께 대하여 씨를 뿌리는 그리스도인은 그의 새 생명이 가지는 특성들, 곧 사랑, 기쁨, 평화, 온유 및 안식을 거두어 들인다. 불신자는 성령께 씨를 뿌릴 만한 능력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는 멸망을 받는다.

 


위대한 청교도였던 존 브라운(John Brown)은 ”어린 아이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그들은 아침에 씨를 뿌리고 오후에 그 열매를 찾는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씨 뿌리는 일 자체에 싫증을 내기도 한다. 9절 말씀은 그들을 위한 말씀이다. 곧, 우리는 ”선을 행하되 낙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영적 태만(怠慢)의 문제와 싸우고 있다. 우리가 ”선을 행한다”라고 말할 때, 가장 단순한 의미에서 이는 「말」이 아닌, 「행위」의 선(善)을 의미한다. 우리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그와 같은 선한 일을 추구해야 한다. 바울을 보라, 가치있는 일을 이루기 위해 그가 얼마나 철저히 그 일에 헌신하였는가를! 그는 결코포기하지 않았었다(딤후 4:7 참조).

 


낙심하지 말라. 꾸준히 노력하라. ”피곤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좋은 때에 분명 우리는 열매를 거둘 것이다.

 


하나님의 법칙은 거역할 수 없는 것이므로, 우리는 성령께 대하여만 씨를 뿌려야 하기에, 또한 우리는 지쳐 넘어져서는 안 되므로, ”그러므로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자(10절).

 


”우리는 기회있는 대로”라는 구절을 헬라 원문에서 직역하면 ”시간을 갖자”(Let's have time)로 읽을 수 있다. 이는 형편이 좋을 때에만 좋은 일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기회를 「찾아서」 좋은 일을 행하라는 말이다. 여기서 바울은 그냥 막연히 어떤 좋은 일을 행하자고 권유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그가 이미 언급해 왔던 것 같은 좋은 일, 곧 범죄한 형제들을 바로 잡는 일과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는 일을 행하라고 갈라디아인들에게 권유하고 있다. 또한 그와 같은 일을 ”모든 이에게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말하고 있다.

 


요약컨대, 만일 당신이 불신자라면 당신의 전 생애는 육체에 대해 씨를 뿌리는 것이요, 결국 당신은 영원한 죽음을 거두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며 성령께 대하여 씨를 뿌린다면, 당신은 풍성한 축복을 거둘 것이다. 이는 ”너희는 너희가 심는 것을 거둔다”는 도덕적, 영적 법칙의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꾸준히 노력하라. 누구에게나 좋은 일을 행하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말라.

 

 

 

 


● 갈라디아서 6:11-18

 

 

 

12. 나의 자랑은 오직 십자가 !

 

 

 

갈라디아인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는 그 처음부터 끝까지 논리정연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제 그 편지의 마지막 부분인 6장 11-18절에서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다. 마지막 여덟 절(11-18절)에서 그는 그 자신과 유대주의자들을 대조하면서 그가 지금까지 말해 온 모든 것을 요약해 보이고 있다.

 

 

 

너희에 관한 나의 염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갈 6:11).

 


바울은 대개 그의 서신을 대필자들에게 구술하여 썼다. 서신의 말미에 이르면 그는 펜을 들어 자신의 손으로 직접 간단한 결론을 맺고 서명을 하곤 했다. 그가 굳이 이렇게 한 이유는 혹시 있을지도 모를 위조 서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초대 교회에는 사도들의 명의로 된 위조 서신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구술하여 대필시킨 서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울은 본 서신 전체를 자신이 직접 기록했다고 본다. 헬라어의 구조에 따라 11절을 좀더 정확히 번역하여 읽는다면, ”내가 쓴다”(I am writing)라는 구절은 오히려 ”내가 썼다”(I wrote)로 고쳐 읽어야 할 것이다. 이는, 바울이 단지 서신의 종결 부분의 결론적인 몇 마디가 아니라 그 서신 전체 부분을 가리키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11절은 문자적으로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씨로 썼음을 너희는 보고 있다”로 번역할 수 있다. 바울이 이것을 일부러 밝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시력이 낮은 사람은 글자를 크게 쓰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아마 바울도 이러한 문제 때문에 그의 서신을 큰 글씨로 썼다고 볼 수도 있겠다. 어떤 주석가들은 바울이 강조하는 부분을 큰 글씨로 썼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또 다른 주석가들은 바울이 그의 독자들을 어린 아이와 같이 취급하여, 큰글자로써 그들의 영적인 미숙함을 꾸짖었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일리는 있으나 그 근거가 희박하므로 동의할 수 없다. 내가 생각키로는 ”큰 글씨”에 대한 가장 합당한 설명은 바울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그 배경을 살펴볼 때 가능하다고 본다. 바울 당시, 헬라어에는 두 종류의 글자체가 있었다. 하나는 일반 사람들이 사용한 ”언셜 글자체”1)였으며, 다른 하나는 전문적인 서기들과 학자들이 사용한 흘린 글자체2)로서 그 모양이 아름답고 세련된 것이었다.

 


1)literary uncial : 이는 영어의 인쇄체 대문자로 기록된 글이나 혹은 한문의 해서체(楷書體)와 같이 글자 형태가 네모지고 반듯한 글자체로 생각할 수 있다 - 역자 주.

2)cursive : 이는 영어의 필기체나 한문의 초서체(草書體)와 같이 글자 사이의 간격없이 흘려 쓴 글자체로 생각하면 된다-역자 주.

 


바울이 ”언셜”문자들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가 전문적인 서기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유대의 율법으로 교육을 받았으니 아마도 바울은 세련되고 유려한 셈어3)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3)semetic languages : 노아의 아들인 셈의 후손들을 셈족(semitic)이라 부르고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셈어라 한다-역자 주.

 


그 반면, 헬라어를 쓴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아주 고된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이 참으로 갈라디아인들을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저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비록 모양이 세련되지 않고 굵은 글씨지만 그 글자 한 자까지라도 힘을 들여가며 써 내려갔던 것이다.

 

 

 

육신의 체면을 세우려는 이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갈 6:12, 13).

 


바울은 이제까지 큰 글씨로 급하게 써내려 왔던 자신의 서신을 잠시 살피면서 유대주의자들과 그 자신과의 차이점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유대주의자들은 겉치레, 곧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데에만 급급해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무엇보다도 내면의 현실을 염려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실제로 자기 글씨의 모양이 어떻게 보이든지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더욱 걱정한 것은 은혜의 자유를 알고 난 후에 율법주의의 종으로 속아 넘어가고마는 사람들에게 일어날 일이었다.

 


아무튼 바울은 여기서 유대주의자들의 죄과를 최종적으로 비난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유대주의자들은 경건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하고 또 남들도 그렇게 하도록 강요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유대주의자들은 외적인 모습에만 관심을 두고 그것을 남에게 보여 주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받고 있는 핍박을 피하고자 했었다(12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용서할 수 없는 위법 행위요, ”걸림돌”이었다(고전 1:23 참조). 자신들의 메시야가 온갖 수욕을 다 받고 처절히 피흘려가며 죽었다는 사실은 곧 그들을 넘어지게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유대인이나 혹은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십자가를 전파하는 자는 누구나 공격하고자 했다. 그들은 항상 십자가를 피한 채, 율법만을 전파했던 것이다.

 


그때, 많은 유대주의자들이 가장된 모습으로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왔었다. 그들은 겉으로는 예수를 메시야로 보았다. 그들은 십자가를 받아들였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보 조항을 붙인 것이었다. 그들은 분명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었지만 구원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인간을 구원하는 것으로서는 그리스도의 죽음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신하는 유대인들이 보는 한에 있어서는 이러한 거짓 그리스도인들(유대주의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정한 신자였으며, 그래서 그들의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유대주의자들은 이것을 알고서 불신 유대인들로부터 받는 핍박을 피할 수 있는 방도를 생각해 냈으니 그것은 곧 사람이 구원받기 위한 준비에는 할례가 덧붙여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유대주의자들은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을 전파함으로써, 곧 온 율법을 지킴으로써 유대 사회 내에서 누릴 수 있는 혜택들을 그대로 누릴 수 있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또한 유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할례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할례받지 않은 모든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할례받을 것을 고집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참된 도덕법을 지킬 수 없었을 때, 그들은 다른 이들에게 자신들의 율법주의의 의식(儀式) 제도를 짐지웠던 것이다. 종교적인 겉치레는 이렇게 부패한 것을 은폐하는데 종종 사용된다.

 


사실 유대주의자들은 유대교와 기독교 둘 사이를 반목시켜 그 중간에서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어 보려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남들에게 그리스도인들로 여겨지기를 원하면서도(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시에 그들이 유대교로의 개종자들을 얻고 있다는 것이 널리 알려지기를 원했다(불신 유대인들에게).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겉치레에 불과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포함하여 모든 이들이 자신들을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들로 보아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에게 그러셨듯이 유대주의자들의 영적 위선의 탈을 찢어 버린 것이다.

 

 

 

나의 자랑은 오직 십자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갈 6:14-16).

 


여기, 서신의 종결을 향하는 바울의 심정은 격정으로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다. 하지만 그는 복받쳐오르는 격정을 이성으로 자제하여 차분한 논조로,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십자가가 ”대분수령”인 것을 역설하고 있다. 바울은 십자가만이 우리의 큰 자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이 그 같은 말을 실제로 어떻게 할수 있는가? 십자가는 이제까지 고안됐던 것 중 가장 잔인한 형태의 사형 도구였다. 십자가보다 더 고통스러운 형벌은 없으며 그보다 더 극악무도한 고문은 없다. 참으로 그보다 더 부끄러운 죽음도 없다. 그토록 처절하고 끔찍한 것이 십자가 상의 죽음이었기에, 로마인들은 로마 시민은 어느 누구도 그 같은 사형 집행을 받지 않도록 법으로 정하기도 했었다. 유대인들 역시 십자가를 경멸하였으니, 그것을 십자가는 곧 ”저주”였기 때문이다(신 21:23 참조).

 


오늘날에도 십자가는 여전히 그들의 경멸의 대상이다. 우리 교회 근처에 있는 유대인 친구들은 그들이 성축제일(the high holy days)로 지키는 기간 동안이면 우리의 작은 예배당을 빌려 사용하곤 하였다. 우리가 그 예배당을 개축하고 그 건물 앞에 십자가를 설치하기 전까지는 그들이 예배당을 이용하는 데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후, 또 다시 집회를 준비하러 예배당에 온 그들이 십자가를 보고 두려움에 떨던 것을 나는 언제까지나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에 큰 범죄의 상징으로 보이는 그것을 가리기 위해 휘장으로 그 전체를 온통 덮어 씌워 버렸던 것이다.

 


역사를 통하여 십자가는 누구에게나 혐오의 대상이 되어 왔다. 하지만 그것은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그 처절한 죽음의 형틀은 그리스도인들의 큰 자랑이 된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이유로 십자가에 대하여 그렇게 열광할 수있는가? 기독교의 상징이 하필이면 왜 그와 같이 끔찍한 것이 되어야만 하는가?”

”1900여 년 전에 살았던 한 사람의 죽음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효력을 가지는가? 그것은 단순히 영웅적인 순교가 아니었던가? 곧, 어떤 뜻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 최상의 모범적 죽음은 아니었던가?”

”이 예수는 종교적으로 미혹된 애국 지사같은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던가? 간여해서는 안 될 일까지 경솔하게 깊이 개입했다가 결국 나라를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죽임당한 것은 아니었던가?”

”그리스도인들은 왜 목에 십자가를 매달고 다니는가? 교회의 벽이나 종탑 위에 달린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십자가에 대해 이처럼 집착하는 것은 약간 병적(病的)이지 않은가?”

 


세상은 끊임없이 그러한 물음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다음과 같이 자명하다.

 


”그 참혹한 십자가는 인간의 공로로서 할 수 없는 일을 신적(神的)공로로 이룩하기 위해 사용된 신적 행동의 도구였다.””십자가 상에서 일어난 일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영속적인 효력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한,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행하신 그 일로 말미암아 구속받지 않는 한 그에게는 결코 구원이나 혹은 하나님을 알 만한 기회가 없을 것이다.”

 


십자가는 바로 그러한 진리를 우리에게 선언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죄인임을 보여 준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면,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선행에 근거하여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면, 십자가는 우리에게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그 사람의 궁극적 운명을 결정하는 유일한 요인이었다. 그것은 신비적인 일이 아니며 단순히 상징적인 일도 아니다. 그것은 예술적인 묘사도 아니다. 십자가는 역사적이요, 실제적인 것이다.

 


본 서신에서 십자가는 적어도 네 번에 걸쳐 따로따로 언급되어 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는 십자가의 서신(the crucifixion epistle)으로 불리워져 왔다. 구원의 참 의미에 관해 어떠한 논의를 하든지 십자가는 그 논의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을 뒤따라 갈라디아로 와서 인간의 공로를 위주로 하는 종교를 그들에게 가르쳤다. 그들의 가르침은 매우 교활하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행하신 일을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할례도 받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갈라디아인들을 향한 마지막 호소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오직 한가지의 선택권만이 있다고 말했다. 곧, 육체 안에서 자랑하든지(13절) 혹은 십자가 안에서 자랑하든지(14절) 둘 중의 하나인 것이다. 인간의 공로를 위주로 하는 종교는 육체 안에서 자랑하며, 그것 자체를 찬양한다. 육체적으로 보면, ”이성”과 사람이 가지는 ”인간적 고결함”이 십자가보다 훨씬 더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의 미래」(Christus Futuras)에서 릴리 더글라스(Lily Do-uglas)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성은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어째서 사람들의 죄와 비참함을 방관만 하고 계신단 말인가? 그분은 비탄에 잠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라고 외친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가리키며 「하나님께서는 비탄에 잠기셨다」라고 말한다.

이성은 「우리를 보라. 죄와 고통 중에 태어나 그 가운데서 양육받은 우리가 아닌가? 우리가 어떻게 죄를 억제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어떤 이유로 비난을 받는단 말인가? 그 책임은 창조자에게 있지 않는가? 형벌을 받아 마땅한 자는 바로 하나님이 아닌가?」라고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아래 무릎꿇고 속삭이듯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고 형벌을 받으셨다」고 말한다.

이성은 「누가 하나님인가? 무엇이 하나님이란 말인가? 하나님이란 이름은 알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불경죄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임종하시는 그리스도의 발에 입을 맞추며 말하기를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엄위하신 왕을 경배해야 한다. 참 이성은 십자가 안에서 자랑한다」고 한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전도 대회가 열리는 동안 멜버른의 한 일간 신문에 다음과 같은 편지가 투고되었다.

”나는 비행기 상에서나 텔레비젼에서 빌리 그래함에 관해 여러 차례 듣고 보아 왔습니다. 선교에 관한 그의 보고서와 편지들도 읽어 보았지요. 하지만 나는 그 같은 유형의 종교에 식상(食傷)해 있습니다. 수단이 무엇이든지 간에, 나의 영혼과 그 밖의 누구나가 필요로 하는 것이 구원받는 것뿐이라고 고집하는 것에 나는 몹시 역겨워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의 설교가 내가 행동하는 것들을 거듭해서 꼬집었지만, 그의 말처럼 내가 죽었다거나 혹은 매일 매일을 죄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고 있다고는 느낄 수 없었습니다. 내게 실제적인 종교를 제공하여 주십시오. 온유와 관용을 가르치는 종교, 색채(color; 예를 들면 인종이나 지방, 즉위 등의 구별-역자 주)나 혹은 신조(cre-ed)의 울타리가 전혀 없는 종교, 어른을 공경하고 어린이들에게는 친절과 죄 아닌 것을 가르치는 그런 종교를 일러 주십시오. 만일 내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최근에 들었던 설교와 같은 철학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면, 차라리 나는 영원히 저주받는 길을 택하렵니다.”

 


그 편지의 투고자는 이미 선택을 내렸다(적어도 그가 그 편지를 썼을 때는). 그에게 있어 십자가는 사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그는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믿음의 복음은 단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만 자랑하지, 그 밖의 어떠한 것으로도 자랑하지 않는다. 바울을 보라. 만일 육체 안에서 자랑할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바울이었을 것이다(빌 3:4-6 참조). 하지만 그는 십자가 이외의 어떤 것 안에서의 자랑도 거절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그의 서신에서 강한 부정적인 용어를 세 번씩이나 사용하였다.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혹은 ”하나님께서 금하셨다!”고 확언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것에 대해서 ”자랑”한다는 것은 그것을 찬양하고 높이거나 혹은 경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는 신적 공로를 위주로 하는 종교의 중심이기 때문에, 자신은 십자가 이외의 것은 결코 높이지 않을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다 이루었다.” 곧 구속이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거룩하시며, 우리는 죄에 빠진 자들이었다. 우리는 죄 때문에 우리 스스로는 결코 구원을 획득할 수 없었다. 그런데 거룩하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고 우리는 말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 있는가? 그것은 곧 그분에게는 죄와 불의함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분은 완전하시며, 그분께서 거하시고 계시는 하늘나라 또한 그분이 완전하심같이 완전하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같이 우리 또한 거룩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수 없다(히 12:14 참조).

 


이것이 부당하다고 여겨지는가? 만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God is God)을 기꺼이 인정한다면, 그러한 생각은 할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곧, 그분께서는 그 모든 규례(rule)를 세우셨으며, 그것들이 파기될 때는 심판을 내리신다(사 40:12-18 참조).

 


어떤 사람들은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사랑하고 용납하며, 이해하는 하나님, 그들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하늘나라에 올라갈 수 있도록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원한다. 그들은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충분 조건으로 요구되는 하나님의 기준, 다시 말하자면, ”내가 거룩한 것같이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거절하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직 거룩케 된 자, 곧 구원받은 자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기준을 따르든지 아니면 자신의 기준을 따르든지 한 가지의 선택권만이 있다.

 


하나님의 특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는 자들은 근본적인 실책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죄 행위를 보고도 눈감아 주시는, 그저 인자하시기만 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아니다. 그분께서는 도덕적 법칙들을 규정해 놓으셨으며, 그것들을 파기하는 것은 죄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임의대로 상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특성에 따라 우리를 대하신다. 그분은 죄를 처벌하셔야만 했고, 또 실제로 그 일을실행에 옮기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용서하신다. 하나님의 공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죽으셨고 죄에 대한 형벌을 받으셨다.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었다(히 9:22 참조). 우리가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신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히신다(고후 5:21 참조). 그러나 죄가 처리되는 이 모든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십자가가 없으면 죄의 용서도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십자가와 또한 구원을 마련해 놓으신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놀랄 만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은 십자가 상에서 일어난 일로 말미암아 완전하게 구속받는다는 것을 그들이 반드시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하게 구속받거나 혹은 전혀 구속받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게 하셨다. 그러므로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맡아 주셨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못박히셨다. 그분은 우리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이다(롬 4:25 / 고전 15:3 참조).

 


그러므로 바울이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14절) 라고 말한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십자가는 바울의 삶을 변화시켰다. 그는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고 세상은 그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다(14절). 여기 ”세상”이라는 단어는 헬라어의 「코스모스」(cosmos)에 해당된다. 성경에서 이 말은 근본적으로 죄와 거짓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단의 체계를 언급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세상의 체계 속에 갇혀 무서운 고통에 직면하고 있다. 나는 전에 어떤 부인이 했던 말을 종종 생각한다. ”살기는 살아야겠지요, 하지만 그 이유는 모르겠어요” 바울 역시 그 여인과 똑같은 곤경에 처해 있었다. 바로 그때 그는 세상과 갈라서게 되었다. 사단의 지배를 받던 모든 사악한 체계는 더 이상 그의 삶을 지배할 수 없게 되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과 그리스도가 자신의 것이요, 성령께서 그의 심령 속에 내주하고 계신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두는 그 날, 우리의 위치가 달라지는 일이 발생한다. 우리는 전적으로 새로운 의식을 갖게 되며 세상의 헛된 일에 무관심하게 된다. 우리는 그 모든 사악한 체계에 대하여 죽고, 그 대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은 하늘나라에 있다(빌 3:20). 우리의 아버지가 거기 계시며, 우리의 구세주 또한 거기 계신다. 우리의 본향도 거기 있으며, 우리의 상급 또한 거기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다.

 


15절에서 바울은 할례나 무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할례와 같은 세상적인 의식들은 무의미하고 불합리하며 무엇 하나 이루지 못하는 무익한 것들이다. 사람이 자기 노력에 의하여 무엇을 성취하려고 하면 할수록, 자신은 아무것도 행할 수 없다는 좌절감에 더욱 깊이 빠지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피조물을 지으신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요 3:3 참조). 바울은 할례가 자신에게 아무것도 이뤄주지 못했지만, 예수께서는 자신을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셨다고 말한다.

 


1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기준으로서의 믿음을 따라 사는 사람들 위에 평강과 긍휼이 임하기를 바라고 있다. ”평강”과 ”긍휼” 이 두단어는 구원의 개념과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 편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참으로 감격적인 일이다. 당신은 그분의 자녀이다. 당신은 그분과 더불어 평강을 누리고 있으며 또한 그분의 긍휼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두 측면을 본다. 곧, 평강은 적극적인 측면에서의 구원이요, 긍휼은 소극적인 측면에서의 구원이다. 평강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세워 주는 것이고 긍휼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나머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회심한 유대인을 가리킨다. 참 유대인은 믿음의 원리를 따라 사는 자들이다. 그들은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된 자들이다. 바울은 이 구절을 통하여 유대주의자들에게 구원에의 길, 곧 참 유대인이 되는 길을 택하라고 진심으로 권유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갈 6:17, 18).

 


아마도 17절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해 주려고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은 줄 아느냐? 갖가지의 위험을 당하였으며, 두들겨 맞았으며, 돌에 맞기까지 하지 않았느냐? 이제는 더 이상 날 괴롭히지 말아다오. 아무쪼록 이 편지로 너희들의 문제를 해결해다오. 아, 이제는 정말 너희들의 혼미한 믿음으로 인한 말다툼을 더 이상 듣지 않게 해다오”라는 뜻으로 말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이는 비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을 향해 ”제발 날 좀 내버려두라 왜 이리 괴롭히느냐? 너희는 육신으로 상흔(할례)을 뽐내고 자랑하는데, 나를 보라. 단지 할례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상흔들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앞으로는 더 이상 나의 권위와 신실성을 의심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바울은 양쪽 모두에게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 예수의 흔적들”은 어떤 것들인가? 바울이 이제껏 그리스도인으로서 받았던 모든 타격은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겨냥되었던 것들이다. 바울은 고난받는 기쁨을 누렸다(고후 1:5 / 4:10 참조).

 


세상은 예수를 공격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분께서 계시지 않으므로 그들은 예수 대신 바울을 공격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것은 곧 예수를 핍박하는 것이다. 당신이 진리를 위하여 받는 핍박은 실상 예수 그리스도께 겨냥된 핍박인 것이다.

 


바울은 본 서신 전체의 기조(基調)를 이루고 있는 은혜에 대해서 짤막히 언급함으로써 편지를 끝맺는다.

 


그의 사신의 마지막 절인 18절에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믿음 안에서 그의 형제들과 더불어 있기를 기도한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의 중심 논조라 할 수 있는 은혜를 언급함으로써 편지를 끝 맺는 것은 그 서신에 걸맞는 최적의 마무리라 할 수 있다.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는 살인마적 율법주의자였던 바울을 사랑이 충만한 그리스도의 종으로 탈바꿈시켰다. 은혜는 율법 아래의 죄의 속박에 갇혀 살던 갈라디아인들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이제 그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그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도록 그들을 붙들어 주어야 했다.

 

 

 

존 번연의 탁월한 우화(allegory), 「거룩한 전쟁」[Holy War;에딜 바레트(Ethel Berrett)의 대 갈등(the Great Confict)을 각색한 것]의 마지막 장면은 임마누엘(Emmauel;그리스도)과 맨소울(Mansoul;당신과 나) 마을의 거주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광경을 그리고 있다. 디아볼로니안스(사단의 군대)를 격퇴하는 것을 도왔던 임마누엘은 이제 그 마을 광장에 서서 맨소울 사람들을 향하여 사단의 지역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가는 법을 강설하고 있었다.

 


임마누엘은 말한다.

”멘소울 사람들이여, 내가 얼마나 여러분을 사랑하는지 여러분은 잘아실 것입니다. 나는 삯을 치르고 여러분을 샀으니, 그것은 곧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의 피였습니다. 여러분이 나의 것이 되도록, 나의 아버지와 화해하도록 하기 위해 아낌없이 그 피를 흘렸던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믿음을 저버렸을 때, 여러분은 알아 차리지 못하였지만 나는 항시 여러분이 실패한 그 곁에 있었답니다. 여러분의 길을 어둡고 괴롭게 만든 장본인은 바로 나입니다. 경외씨(Mr. Godly-Fear)가 활동하도록 했던 것도 바로 내가 한 일입니다. 양심(Conscie-nce)과 지각(Understanding)과 의지(will)를 격려한 이도 바로 나입니다. 여러분이 나를 찾게끔 한 것도, 나를 찾음으로써 여러분 자신의 건강과 행복을 찾게 한 것도 다 내가 한 일입니다.

 


죄 이외에 그 어떠한 것도 여러분을 해칠 수 없습니다. 죄 이외에 어떠한 것도 나를 슬프게 할 것은 없습니다. 죄 이외에 그 어떠한 것도 여러분을 여러분의 적 앞에 떨어뜨리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맨소울 사람들이여, 바로 그 죄를 경계하십시다.

 


일찌기 나는 여러분에게 죄를 경계하고 그것과 맞서 싸우며 그것을 물리칠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이제 나는 여러분에게 명령합니다. 나의 사랑이 언제나 변함없이 여러분 곁에 머물고 있음을 믿으십시오.

오, 나의 맨소울 사람들이여, 내가 얼마나 여러분을 사랑하는지요, 내 마음 속에는 온통 여러분을 향한 생각뿐이랍니다.

 


그러므로 나 또한 여러분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더 이상의 슬픔도, 더 이상의 비탄도, 더 이상의 고통도 없는... 또한 결코 다시는 두려움이 없을 내 아버지의 왕국으로 내가 여러분을 이끌 때까지 결단코 흔들리지 않는, 변함없는 사랑을 보기를 원합니다.”

 


임마누엘이 마차를 타고 떠나갈 때 양심과 지각과 의지는 장래에 대해서, 또한 장차 다아볼로니안스를 저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경계해야 할 것인가를 의논했다. 샤다이 왕(King Shaddai; 아버지)과 임마누엘(아들), 대재상(大宰相; 성령)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는 한, 그들은 실패할 것이며 적의 손아귀에 빠져들고 말 것이다.

 


”어떠니 ? 네가 전에 누렸던 자유보다 이 자유는 더 좋으니?” 지각은 의지를 향하여 임마누엘이 그들의 삶 속에 오기 전 날들과 비교하여 물었다. 「우리가 전에 누렸던 자유? 음...」 의지는 적당한 말을 찾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겨우 입을 열어 대답하였다.

「... 그것은 마치 폐허가 된 집의 부서진 창문을 통하여 들락날락하는 새와 같은 것이었어, 아무데도 갈 곳이 없고 또한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저 이리저리 배회하며 날아다니는 새와 같은 것이었지.」

”네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의무감 때문에서니?” 지각의 물음은 섬세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믿고 있는 바를 다시금 묻고 대답함으로써 피차를 격려하게 굳게 해주고 있었다.

「의무감? 아니야. 내가 그분을 반드시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내게 없어.」 의지는 분명한 어조로 답변한다. 「난 자유로워. 난 그 어떤 속박에 갇혀 있지 않아. 그분이 내게 자유를 주셨지, 언제고 내가 원하는 대로 기꺼이 행할 수 있는 자유를 말이야.」

 

 

 

”그렇다면, 네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그래, 내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 그분을 사랑하기를 원하기 때문이야. 그런데」 의지는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고백하였다.「그런데 말이지, 내가 아무리 그분을 사랑한다 하여도 부족해, 그분이 날 사랑하는 것에 감히 미칠 수도 없는 초라할 것일뿐이야.」

 


이상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보냈던 편지의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역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전하는 바울의 멧세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자유롭다. 그와 같은 자유는 무엇에도 비길 수 없으며 무엇과도 바꿀 수없는 소중한 것이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그 자유, 우리의 삶을 위하여 은혜로 베푸신 그 자유를 한껏 누리자!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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