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니즘과 로마시대의 팔레스타인
제2 성전시대
북 이스라엘은 BC 722년 아시리아에 의해, 남 유다는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 각각 망하면서 구약 시대는 막을 내린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설하고 이스라엘 국가가 존재하던 시기를 보통 제 1 성전 시대, 바벨론포로 이후에 재건한 성전을 시작으로 하여 AD 70년 로마에 의해 성전이 파괴될 때까지를 제 2 성전시대라 부른다. 제 2성전시대는 정치적 사건을 기준으로 페르시아 시대(BC 516-BC 332), 헬라 시대(BC 332-BC 167), 하스몬 왕조 시대(BC 167-BC 63), 로마 시대(BC 63-AD 70)로 구분할 수 있다.
헬라 시대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은 세계사의 큰 분기점이었다.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를 통일한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공격하고, BC 332년에는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를 정복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 이후 그의 제국은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의 세 제국으로 분열되었다.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셀레우코스 왕조는 가장 큰 제국이며,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프톨레마이 왕조는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지중해 동부 연안을 다스렸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사업으로 그리스 문화와 동방 문화가 융합된 헬레니즘 시대는 이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할 것 없이 큰 세계의 한 구성원이 되는 세계주의가 강조되었다. 코이네 헬라어는 이 새로운 세계를 하나로 묶는 공통 언어로 새로운 세계의 신분증이 되었고, 종교적으로는 혼합주의의 결과로 제우스, 말둑, 바알은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하나의 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것은 유대인 공동체에게는 도전이었다. 유대인에게는 헬라 세계의 일원이 될 것인지 유대인으로 남을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해야만 할 시기가 오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의 정복자인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3세(BC 223-187)는 유대인에게 그들의 종교적 전통에 따라 사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제국 내의 경제적 위기는 모두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안티오쿠스 3세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하고(BC 190) 로마는 그에게 군대 감축과 과중한 세금을 요구했다. 부친을 이은 안티오쿠스 4세는 왕조를 다시 일으킬 야망이 있었다. 그는 왕국의 남쪽 경계에 강조를 두고 이집트를 두 번이나 공격했으며 팔레스타인은 전쟁에 시달리게 되었다. 안티오쿠스 4세는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를 해임하고 헬라 경향이 강한 그의 형제 야손을 대제사장에 임명하고, 다시 대제사장 가문 출신이 아닌 메넬라우스를 임명했다. BC 168년 이집트를 공격한 안티오쿠스는 알렉산드리아를 거의 정복하려는 순간에 그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는 로마에 의해 할 수 없이 이집트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 때에 팔레스타인에서는 안티오쿠스가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고, 쫓겨났던 야손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서 술렁이게 된다. 안티오쿠스가 이집트에서 돌아오자 예루살렘은 다시 그의 손에 넘어가고, 할례와 안식일 준수를 금하는 등 반 종교적인 정책을 실시한다. 이 종교적인 박해는 곧 반란을 불러 일으켰다.
마카비 반란
BC 167년 안티오쿠스는 안식일 준수와 할례 금지령을 내렸다. 이교 제사를 수행하라는 왕의 명령을 받은 시리아 군이 모디인에 도착하고, 한 유대인이 희생 제사를 드리려 했다. 그때에 분을 참지 못한 여호야립 가문 출신의 제사장 마타디아스는 그를 살해하고 산지로 피하자 이에 동조하는 많은 하시딤들이 그를 따랐다(마카비 1서 2:15-30). 이들의 저항 운동은 마타디아스의 세 아들, 마카비라고 불리는 유다와 요나단 그리고 시몬에 의해 계속 수행되었다. 하스몬 가문으로 불리는 이들이 이제 약 130년간 유대를 다스리게 될 것이었다. 드디어 BC 164년 유다 마카비는 이교도에 의해 더럽혀졌던 예루살렘의 성전을 되찾고 성전은 정화되었다. 이후로 성전 정화를 기념하는 하누카(수전절, 요 10:22)라는 절기를 지키게 되었다. 셀레우코스 제국과 유대 반란군간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대제사장이었던 메넬라우스는 셀레우코스에 의해 숙청되고 알키무스가 임명된다. 알키무스도 죽자(BC 169년) 몇 년간 대제사장직은 공석으로 남겨졌다. 마타디아스의 아들인 요나단은 셀레우코스 제국 내의 내분을 기회로 초막절에 대제사장직을 맡는다(BC 152년). 이제 대제사장직은 사독의 후손이 아닌 반란을 승리로 이끈 공로로 평범한 제사장 가문이 차지하기 되었다. 그는 전투에서 계속 승리를 거두어 사마리아, 에그론, 욥바를 그의 수중에 넣고 팔레스타인의 남쪽 해안에 위치한 헬라 도시까지 통치 지역을 확대해 나갔다. 요나단의 대제사장직 수행으로 그의 집안은 자연히 최고 통치 가문으로서의 위치를 굳히기 시작했다. 요나단이 시리아 군의 음모로 살해되고 그의 형제 시몬이 뒤를 이었다. 그는 데메트리오 2세와 동맹을 맺고 그동안 내던 세금을 면제받게 된다. 로마와 스파르타와도 동맹 관계를 새롭게 했다. 그는 통치 중에 유대인의 법적인 권리를 회복하는데 주력했다. BC 140년 모든 백성은 예루살렘에 모여 시몬을 '진정한 예언자가 나타날 때까지 영구적인 지도자(Nasi), 대제사장'으로 삼을 것을 선포했다(마카비 1서 14:42).
하스몬 왕조
BC 586년 예루살렘 멸망 후 처음으로 다시 독립 국가가 형성되었다. '하스몬'이라는 말은 반란의 선봉이었던 마타디아스의 선조 아사모나이오스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대사 12.265). 셀레우코스 제국은 데메드리오 계열과 안티오쿠스 계열간의 오랜 내분으로 힘이 분산되어, 유대는 셀레우코스의 세력에서 벗어났다. 하스몬 왕조는 본격적으로 주변 민족을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시키고 독립 국가의 번영을 누렸다. 민족의 지도자, 대제사장으로 추대된 시몬의 뒤를 이은 요한 힐카누스는 그리심산의 사마리아 신전을 파괴하고 이두매를 정복하여 이들을 개종시켰다. 힐카누스는 대제사장이면서 스스로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대부분의 헬라 도시는 하스몬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고 영토는 몇 배로 확대되었다. 아리스토불루스를 이은 알렉산더 야나이는 남아 있던 해안 도시를 정복한다. 그의 시대에 하스몬 왕조는 최고의 절정에 도달했다. 야나이는 바리새파를 미워하여 무려 8백 명의 바리새인을 십자가형에 처했다. 야나이는 죽을 무렵 바리새파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그의 부인 알렉산드라(샬롬 찌온으로 부르기도 함)에게 바리새파와 화해할 것을 당부한다. 여왕이 된 알렉산드라는 바리새파를 옹호하여 평화로운 시대를 누렸다. 그녀의 죽음 이후(BC 67) 나라는 두 아들의 왕위 다툼에 휩싸인다. 동생 아리스토불루스는 형 힐카누스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다. 아리스토불루스를 탐탁하지 않게 여겨 왔던 이두매 출신의 안티파테르는 나바티안의 원조를 받아 다시 왕이 되도록 도와주겠다고 힐카누스를 부추긴다.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 왕권을 차지하려는 형제간의 전쟁은 로마의 폼페이 장군이 예루살렘에 진격하여 힐카누스의 편을 들어줌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그와 함께 유대인의 독립 국가는 끝이 나고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BC 63년).
로마의 통치와 헤롯 왕조
세계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로마는 이스라엘의 전략적인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은 소아시아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하고, 주변에는 로마가 정복하지 못한 나바티안과 파르티아 왕국이 남아 있었다. 로마의 폼페이는 하스몬 왕조 치하에 있던 많은 헬라 도시를 해방시켰다. 힐카누스는 왕이라는 칭호 없이 대제사장만으로 만족해야 했으며 아리스토불루스는 로마로 잡혀갔다. 힐카누스를 도왔던 이두매 출신 안티파테르는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로마를 도와 신임을 얻게 된다.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된 안티파테르는 장남파사엘을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차남 헤롯을 갈릴리의 총독으로 임명한다(BC 47년).
헤롯왕
로마로 잡혀갔던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 안티고노스와 파르티아 왕국이 팔레스타인으로 쳐들어오자 헤롯은 급히 로마로 건너가서 원조를 청한다. 안토니와 원로원의 신임을 얻어 유대의 왕으로 임명받은(BC 40년) 헤롯은 삼 년간 그의 반대자들과 전쟁을 치르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안토니에 의해 왕으로 임명된 헤롯은 안토니가 실각하고 옥타비안이 정권을 잡자(BC 30년) 위기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로마로 건너가서 옥타비안을 만난 그는 비굴하지 않고 도리어 당당한 자세로 자신이 안토니를 위해 충성을 바쳤듯이 옥타비안을 위해서도 충성을 다하겠다는 결의를 보이고 유대의 왕위를 유지시킬 수 있었다. 헤롯은 로마의 정세가 변해도 새로운 권력자들의 신임을 얻어 낼 수 있을 만큼 민첩하고 권력에 대한 애착이 많은 인물이었다.
헤롯에 대한 유대인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는 하스몬 왕조의 찬탈자이면서 순수한 유대인이 아닌 개종한 이두매 출신이었다. 유대인 자료는 그가 하스몬의 노예였다고 경멸하기를 서슴지 않았다(바벨론 탈무드. 바바 바트라 3b). 그는 남아있는 하스몬의 후손을 하나 하나 제거해 나간다. 대제사장이었던 힐카누스, 처남이며 대제사장이었던 아리스토불루스를 제거하고, 하스몬 왕조의 마지막 왕녀이자 부인인 미리암을 누명을 씌어 살해한다. 부인 미리암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도 결국 부친의 손에 죽음을 당하고, 헤롯 자신이 죽기 며칠 전에도 아들 안티파터를 살해 할 정도로 잔인했다. 로마에서는 그를 두고 헤롯의 아들로 태어나기보다는 돼지의 새끼로 태어나는 것이 낫겠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대제사장직은 하스몬 가문에서 맡아 왔으나 헤롯은 고의적으로 하스몬 가문과 연관이 없는 바벨론 출신의 하나멜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한다. 로마는 헤롯의 로마에 대한 충성심과 능력을 인정하여 그를 유대의 왕으로 임명했다.
로마 황제를 위한 충성심은 그가 도시를 건설하고 황제의 이름을 따라 도시를 명명한 것에 잘 나타난다(카이사리아, 세바스테의 경우). 헤롯은 로마의 상류층과 특별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사위인 마르크스 아그립바와는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를 지속시켰으며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러한 관계를 적절히 이용했다. 그리하여 내국의 유대인과 헤롯의 관계는 좋지 못했으나,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는 헤롯이야말로 헬라 세계에서 유대인을 보호하는 실력자로 여겨졌다. 헤롯의 통치 기간 중에 헬라 문화의 물결은 쉽게 유대인 세계로 유입되었다.
백성들의 헤롯에 대한 적개심은 그의 강압적인 통치로 인해 비록 그의 생전에는 크게 표면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그의 다음 세대에는 반란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헤롯의 후예들
헤롯이 죽은 후(BC 4년) 그의 왕국은 세 아들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으며, 이들은 로마에 의해 분봉왕으로 인정을 받았다. 헤롯이 죽자 백성들은 과중한 세금을 경감시켜 달라는 청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소요가 발생했다. 예루살렘과 유대, 이두매, 남부 사마리아 지역을 맡은 헤롯 아켈라오는 선정을 베풀지 못한 것이 원인이 되어 로마로부터 해임당한다(주후 6년). 아켈라오의 후임을 선정하려는 때에 더 이상 헤롯 가문에서 통치자를 세우지 말기를 호소하는 유대인들로 인해 로마는 대안을 마련해야만 했다. 시리아와 합병을 시키자니 유일신 사상의 유대인과 헬라인이 화합을 하지 못할 것은 분명하고, 결국 로마는 직접 유대에 총독을 파견하여 다스리기로 결정한다. 헤롯 빌립(BC 4-AD 34)은 갈릴리 북부를 다스리며 카이사리아 필리페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그의 영토는 AD 37년 이후 아그립바 1세가 다스리게 된다. 갈릴리와 베레아는 헤롯 안티파스(BC 4- AD 39)가 통치하게 되었다. 갈릴리 호숫가에 도시를 세우고 로마 황제 티베리아스의 이름을 따라서 티베리아라고 불렀다. 남편을 버리고 안티파스와 결혼한 헤로디아스는 아그립바 1세가 로마의 신임을 얻어 빌립이 다스리던 지역을 얻게 되자, 안티파스에게 로마로 건너가 왕권을 얻어오라고 부추긴다. 마지못해 로마로 건너간 안티파스는 왕권을 얻기는커녕 반역죄로 기울로 추방당한다. 아그립바 1세는 부친인 헤롯 대왕에 의해 목숨을 잃은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이었다. 그는 로마에서 지내면서 가이우스 갈리굴라와 친분을 맺고, 칼리큘라가 로마의 황제가 된 후 아그립바 1세는 빌립의 영토를 받는다. AD 41년 칼리큘라가 암살당한 후 아그립바는 클라우디우스의 황제 즉위에 공헌하여 헤롯 대왕 이후 처음으로 분봉왕이 아닌 왕으로 임명된다. 그는 헤롯 대왕이 다스렸던 모든 영토를 손에 넣는다. 아그립바 1세가 죽을 당시(AD 44) 그의 아들 아그립바 2세는 17세에 불과했다. 로마는 어린 후계자에게 지배권을 넘겨주지 않았으나, 주후 50년 삼촌 칼키스가 죽은 후 그의 영토를 다스리게 되고 점차 빌립의 옛 왕국과 다른 영토를 얻게 된다.
로마의 총독들
아켈라오의 해임 이후 로마의 총독은 아그립바 1세가 왕으로 통치하던 시기를 제외하고 유대를 다스렸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총독을 자주 바꾸지 않았다. 아픈 사람의 상처에 앉아 피를 빨아먹는 파리는 점차 그것에 만족하지만, 만일 이 파리를 쫓아내면 새로운 파리떼가 몰려들어 더 극성을 부리게 된다는 것이 황제의 이유였다. 총독의 착취가 얼마나 심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설명인 셈이다.
유대의 대 반란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로마가 부과한 과중한 세금은 백성들로 하여금 가혹한 이방 통치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켰다. 더군다나 팔레스타인 내에 이방인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그들은 유대인보다 더 많은 권익을 누리게 된다. 하스몬 왕조 말기부터 싹트기 시작한 메시야 사상은 절정에 이르러 이방인의 압제에서 유대를 구하고 메시아가 통치하는 왕국을 고대하는 이들이 늘어나게 된다. 그즈음 로마는 빈번한 황제의 교체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AD 66년 카이사리아에서는 헬라인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유대인들이 공격을 받았다. 반란은 갈릴리 지역으로 번져 갔다.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베스파시안 장군이 갈릴리로 진격했으며, 갈릴리의 철통같은 요새 요타파타가 무너졌다. 이때 반란군의 사령관이던 요세푸스(요셉 벤 마티디아스)는 포로로 잡히고, 로마 편에서 유대인 전쟁사를 기록한다. 추종자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베스파시안이 로마로 떠나고(AD 69), 그의 아들 티도 장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한다. 반란군 유대인은 단일한 지도 체제를 유지하지 못했다. 기스갈라의 요한, 시몬,시몬 바르 기오라를 지도자로 한 반란군은 예루살렘에서 로마군과 맞서서 싸웠으나 결국 주후 70년 예루살렘은 성전과 함께 파괴된다. 이때에 도망친 일부 유대인이 마사다 요새에서 로마군과 대항하지만 3년만에 자결로 끝을 맺는다.
종파의 형성
하스몬 시대에 처음으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등장한다. 이런 종파의 등장은 요나단이 대제사장직을 맡게 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다윗 시대의 대 제사장 사독 이후 사독의 후손은 공식적인 대제사장직을 맡은 가문이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요나단이 대 제사장이 되어 끊어지게 되었고, 사독의 후손은 처음에는 대제사장직을 빼앗은 하스몬 가문을 비난했으나 결국은 기득권을 포기하고 하스몬 가문과 결탁하여 정치적 종교적인 이익을 나누는 길을 선택한다. 그러므로 사독의 후예 즉 사두개파는 사회적으로 상규 계층에 속했다. 그들은 구전(口傳)을 부인하고 오직 토라만을 신봉하는 점이 바리새파와 달랐다. 그들은 자유의지를 주장하며 천사와 부활을 믿지 않았다. 바리새파는 요한 힐카누스가 대 제사장의 자격이 없다고 공격하면서 그 첫 모습을 드러낸다. 바리새는 '분리주의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들은 사두개파의 신앙, 정치와 의견을 달리했다. 즉 분리주의자라는 이름은 그들 스스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반대자들이 붙여 준 이름이었다. 바리새파는 하시딤의 후예로 토라의 생활화를 목표로 했다. 토라뿐만 아니라 구전과 전통을 인정하고, 영혼 불멸, 부활의 신앙을 갖고 있었으며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에세네파는 도래할 메시야 사상을 가지고 모든 일원이 재산을 공동 소유하며 독특한 금욕 생활을 하는 집단이라는 점에서 동시대 헬라 로마 작가의 관심을 끌었다. 1947년 사해 부근 쿰란의 발견은 이들의 사상과 생활에 관한 새로운 많은 정보를 줄뿐만 아니라 1세기를 전후한 유대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세기말 카이로 회당에서 발견된 다메섹 계약(Damascus Covenant)은 이 종파의 기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느브갓네살왕에게 팔린 후 390년 간의 진노의 시간이 지나면(겔 4:5) 신이 남아 있는 의로운 자를 찾으신다.(BC 586 - 390 = BC 196년) 그러나 20년간은 장님처럼 어둠 속에 있었다. (BC 176년) 이 때에 신이 이들에게 찾아와 이 종파의 창시자인 '의의 교사'를 주었다. 그리고 의의 교사는 한 세대(40년)를 가르쳤다. 의의 교사가 죽은 이후 최후의 구원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40년이 지날 것이다. 이렇게 주어진 490년이라는 시간은 다니엘 9:24와도 일치한다. 이들은 자신이야말로 새 계약의 수행자이며 죄악에 물들지 않은 남아 있는 참 이스라엘이라고 여겼다. 이렇듯 이 시대는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이 충만해 있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
제 1성전이 파괴된 이후 유대인의 디아스포라는 시작된다. 제 2 성전시대의 독특한 현상 중 하나는 팔레스타인 본토에 살고 있던 유대인보다 다른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의 숫자가 더 많다는 사실이다. 제 1 성전 시대에 유대인의 역사는 이스라엘 땅(에레쯔 이스라엘)에서 이루어졌으나 이제는 에레츠 이스라엘밖에 살고 있는 유대인에게도 관심이 나누어져야 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에 대한 정보는 오순절에 각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온 순례자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들은 파르티아, 메디아, 엘람, 메소포타미아, 카파도키아, 폰투스, 브루기아, 이집트, 키레나이카, 로마, 크레데, 아라비아에서 온 유대인이었다(행 2:9-11). 모든 유대인은 일년에 세 번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절기에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해 제사를 드릴 의무가 있었으며, 이것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이러한 순례를 통해 팔레스타인과의 관계를 유지해 나갔으며 특히 예루살렘의 성전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도 심장과도 같은 중요성을 띠고 있었다. 이방인의 눈에는 반 세겔의 성전세와 헌물을 예루살렘에 보내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행동이 헬라 세계의 일원이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헬라 세계의 유대인은 조상의 율법에 따라 할례와 안식일을 지키고 이교의 제사를 거부했다. 그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율법을 지키고 주변 세계에 동화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유대인의 종교적 열심은 주위의 미움을 사기도 했으나 경건한 유대인을 보고 유대교로 개종하는 이방인도 생겨났다. 헬라 세계에 살고 있던 유대인은 각 지역에서 헬라인과 동일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했으나 유대인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통치자들은 때로는 가혹한 처사를 일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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