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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주시는 하나님/빌려온 것 들

[스크랩] 상호의존성과 심리적 질병

상호의존성과 심리적 질병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 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이다"(창 50:20)

건강한 자아란 3가지 영역인 하나님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에서 건강한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란 영원에 대한 문제에 대해 갈급한 마음을 가지고, 그러한 갈급함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고 만날 수 있다면 매우 건강한 것입니다(시42:1).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마음의 평강, 자존감을 가지고, 교만하지 않고, 자기가 하는 일에서 의미와 보람을 가지고 산다면 건강합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타인과 쉽게 교류를 맺을 수 있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간다면 건강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타인과 교류를 맺는 것은 감정, 의지, 사고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상처입은 자아는 이웃을 향해서 닫혀진 마음을 가지고 감정이나 사고의 교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교류가 안되는 것은 자기 자신과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상처입은 자아, 은폐된 자아는 타인과 교류를 나눌 수 없고 곡해를 하게 됩니다. 건강한 자아를 가진 사람은 생각과 감정을 나누고, 그것을 수용해서 건전하게 소화하며 창조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상처입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 교류가 힘듭니다. 예를들면 "자격지심"이 강한 사람에 대해서는 교류(대화)에 있어 상당히 신경을 쓰면서 얘기해야 합니다. 자연스럽게 마음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없고 늘 신경을 쓰게 됩니다.

심리적 질병이란 상처입은 자아로 인해 건강한 반응을 하지 못하는 것, 교류를 통해 창조적으로 전환하지 못하는 것, 흐르지 못하고 늘 고여있는 것, 고여있게 될 때 충동으로 나타나고, 많은 문제를 야기 시키는 전반적인 징후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상처입은 자아를 가진 가장의 경우는 직장에서 일어난 일을 전혀 흘러보내지 못하고, 직장 마치고 술을 마시거나집에 와서 식구들에게 고인 것들을 발산해서 가정 전체를 불화를 만들어냅니다.

"내가 내 자신을 경멸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나를 경멸할 사람은 없다". 성장과정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늘 다른 사람에게 경멸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가 나를 경멸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에서 서로 주고받으며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서로 주고받는다는 것은 물건을 의미하지 않고, 서로 서로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생각, 의지, 감정의 교류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참된 교류는 참 자아' 사이의 만남에서 이루어집니다. 그 증거는 친밀함입니다(intimate). 그렇지 못할 때에 피상적인 관계에 머무르게 됩니다. 예를들면 어떤 직위로 사람을 대하거나 일을 목적으로 사람을 대할 때 친밀한 관계는 이루어지지 않고, 피상적인 관계인 이해관계, 책망, 지시, 체면을 지키려는 긴장감이 나타납니다.

상호의존적 자아는 건강한 교류를 맺어가지 못합니다. 상호의존적 자아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를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자신에 대해 희생, 순교, 억압으로 일관해 왔기 때문에 상대방의 것을 받아들여 소화시켜 갈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심리적으로 혼란가운데 있게 됩니다. 그러한 혼란스런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감추고 억압하게 됩니다.

상호의존적 관계는 거짓된 자아로 이루어진 관계를 말합니다. 이는 내면을 다 숨기고 그것을 차단해버리고 일종의 "만든 관계"를 말한다. 이는 진정한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이렇게 진정한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은데 에서 오는 혼란을 감추려고 하기 때문에 이중 삼중의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상호의존적인 사람은 인격의 경계선(boundary)이 없습니다. 이들은 그래서 문제(trouble)가 생길 때 분노와 갈등에 사로잡혀 감정들을 막 쏟아놓습니다 (퍼붓는다). 자기는 솔직하고 툭 터놓고 얘기하자고 하는데 이는 정직한 것이 아닙니다. 병적인 충동입니다. 이들은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감정과 충동에 의해 폭발합니다. 이에 대해 상대방은 역반응으로 나오고 결과는 아주 힘들고 파괴적인 상태가 되고 맙니다. 이에 반해 건강한 자아는 분명한 인격의 경계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trouble)가 생길 때 그것을 붙잡고 늘어지고 감정으로 쏟아놓지 않습니다. 지켜야 할 것은 지키고, 안 해야 할 말은 안하고 상호존중하면서 이야기합니다(경계선). 물론 이것은 상호의존적인 관계에서 전혀 말을 안하고 감추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상호의존적 자아는 겉으로는 평온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소외, 분노, 적대적 감정에 사로잡혀 있게 됩니다. 상대에게 반응할 때 자기 비하의 감정에서 상대방의 기분에 맞추려고 하든지 또는 비판과 분노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상대방의 태도를 예민하게 생각해가면서 말하기 때문에 언어의 진실성이 없어질 수 있습니다(신뢰성의 문제). 또한 자신의 감정을 바르게 처리하지 못한 가운데서 억압의 감정이 쌓이게 되고, 때때로 육체적인 질병으로도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한 점에서 육체적 질병은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상처입은 자아의 외적 징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육체적 질병을 다 그렇게 볼 수 없지만 육체적 질병이 내적인 문제와 관련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 나온 중풍병자에게 중풍병은 내적 문제의 상징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나오기 전까지 그가 가지고 있었던 내적인 문제의 결과가 중풍병입니다.

심리적 질병와 관련해서 상호관계를 사례로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례 1)
김아무개씨는 건강한 자아로 성장해서 회사의 사장으로 있고, 박아무개씨 역시 건강한 자아로 성장해서 그 회사의 사원으로 있습니다. 어느 날 사장인 김씨가 부하직원인 박씨에게 화를 내고 꾸중을 했습니다. 그 때 부하직원 박씨는 "왜 우리 사장님이 그렇게 화를 냈을까?"라고 생각을 하면서 그의 인격과 관련시키지 않고 사건에 대해 깊이 생각합니다. 부하직원 박씨는 사장인 김씨에게 화를 낸 이유를 묻고 자신의 감정을 얘기했습니다. 그 때 사장 김씨는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감정을 말합니다. 꾸지람 사건이 파괴적으로 가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고 창조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사례 2)
회사 사장인 이아무개씨는 많은 상처와 열등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하직원인 정씨 역시 어릴 때부터 상처를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사장이 문제가 있어 부하직원에게 화를 내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부하직원은 사장의 아내에게 그 사실을 다 얘기하고 고자질을 하고 화풀이를 했습니다. 사장은 아내로부터 잔소리를 듣자 그 말을 소화해내지 못하고
부하직원을 내어쫓았고, 이 사건은 아내와 관계에서 큰 상처로 남게 되었습니다.

(사례 1)은 건강한 자아의 경우로써 참된 자아로 문제를 받아들이고 소화합니다. 이들은 서로 주고 받는 가운데 생긴 문제들을 건강하게 이해해서 다시 서로 주고 받음으로써 창조적으로 나타냅니다. (사례 2)는 상처입은 자아로써 거짓된 자아로 문제를 받아들이고 이해합니다. 이들은 서로 주고받은 것이 도리어 상처가 되고 상처로 남아 있고, 상처투성이로 문제가 끝나버립니다(대화가 곧 싸움이 되는 관계 - 부부, 친구, 동료...).

상호의존적 관계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모든 문제의 원인이 다 다른 사람 때문이고(희생양을 찾아내어 방어함), 또한 문제를 격한 감정(주로 분노)로 풀어갑니다. 또한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문제를 건강하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사실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내 안의 상처를 발견하게 한 "자료를 준 사람"인데, 상처를 준 그에게 모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풀리지 않고 자꾸 꼬여가고, 자신도 곤경에 빠져들고 인간관계가 다 차단됩니다.

그러나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극복한 진정한 자아(참된 자아, 건강한 자아)를 가진 사람에게는 어떤 문제가 오더라도 창조적으로 소화합니다. 오히려 그 문제 때문에 한 단계 더 성숙합니다. 성경에서 대표적인 인물로 꼽는다면 "요셉"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는 어떤 상황, 어떤 문제 앞에서도 건강한 자아를 가지고 문제를 대처해갑니다. 자기를 노예로 팔아넘긴, 그래서 고통의 운명을 시작하게 한 형에 대한 분노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뚜렷한 인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처입은 자아를 가진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난 문제를 술로, 탐닉으로, 중독으로 대처해 가며 그 결과 자신도 파괴되고 가정, 인간관계 전체를 망가뜨립니다. 우리의 인생은 문제없이 살수 없습니다. 모두에게 다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많고 적건 간에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 소화하느냐", "극단적으로 부정적으로 반응하느냐"입니다. 문제를 소화해 낼 능력이 없는 사람은 극단적으로 자기 손상을 가하며, 자살까지 감행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인생의 문제를 긍정적으로 바꾸어서 사고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위대성입니다. "내가 예수 믿지 않았으면 이 문제 때문에 파멸할 수밖에 없는데, 예수 믿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수월하게 받아들이고 창조적으로 만들어가는구나"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 인생을 쉽게 살수 있습니다. 이 말은 기도하는 것마다 다 얻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 속에서도 안식이 있습니다. 쉼이 있습니다. 길이 있습니다. 어떤 부정적인 사건속에서도 긍정적인 희망을 보게 만듭니다. 그 희망에 동참하고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만듭니다.(창 35:18;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건강한 자아를 가질 때 이런 힘이 나옵니다. 병든 자아에게는 이런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상처입은 자아가 건강한 자아로 변하는 치유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마다 긍정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힘, 그 힘은 용서와 사랑에서 나옵니다. 부드러운 가슴입니다(빅터 플랭클). 그에게는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완고한 의식에서 해방되어 문제 자체만을 볼 수 있는 지혜가 있습니다. 한번의 실수와 그의 모든 것을 연관시켜 말하지 않습니다. 남을 용서하지 않을 때 집착하고 편집증처럼 몰두하게 되고, 문제속에 빨려 들어가며, 자기 책임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언제나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돌리고 자기는 빠져나가려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위대성은 내게 해를 가한 사람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차단될 때 용서의 힘도 차단됩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을 때 타격이 큰이유는 그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힘이 차단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의 걸림돌을 창조적으로 만들어내려면 위로부터 오는 힘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차단될 때 상처입은 자아는 꼼짝하지 못하고, 자꾸 시험에 들고, 생이 피폐해지게 됩니다. 물론 그 원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차단되어 힘의 공급을 못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려있으면 하루종일 많은 문제에 시달리더라도,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영혼의 문을 열고 하나님과의 대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기도 놀랄 정도로 그 문제에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위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힘입니다. 이 힘이 없으면 인생을 살아갈 때 허무해지고 무의미해집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것 역시 하나님과 관계에서 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관계가 차단되면 그의 삶은 허무와 무의미를 낳을뿐입니다(전도서의 주제).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공급받고 새 힘을 얻고 하면 허무와 무의미속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 한 분만으로도 만족하다고 고백합니다(합3:17). 하나님이 생의 의미요, 생의 목적입니다(아, 하나님 한 분으로도 인생은 살아갈 수 있구나!!!). 그 통로가 용서입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용서의 기도는 하나님과 교류의 창을 열어놓는 것입니다. 이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평생 분노 속에서, 한 속에서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문제의 본질을 바로 볼 수 있는 안목,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를 들을 수 있는 귀,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문제 때문에 고통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진정 물어야 할 것은 "이 문제를 창조적으로 만들어가고 있는가?"입니다. 이것은 문제를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반응하는 훈련을 통해서 쌓아 가는 은혜입니다. 치유의 과정은 이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곧 건강한 내재아를 회복시켜 줍니다. 건강한 내재아로 세워져 갈 때 우리는 문제를 창조적으로 해결해 갈 수 있습니다.

< 토의문제 >
1. 당신은 다른 사람과 관계에서 분노, 오해, 섭섭한 감정을 많이 느끼십니까? 그렇지 않 으면 상대방의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나름대로 잘 처리해가고 있습니까?


2. 당신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과 교류에 있어서 가장 힘들게 느껴지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3. 당신이 지금까지 당신 자신에게서 발생되는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볼 때, 그 원인의 대부분이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할 때와 그 원인이 자기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할 때 어느 쪽이 더 많습니까?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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