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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헬레니즘의 역사

헬레니즘의 역사

 

Hellenism

('말하다', '그리스인처럼 행동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hellenizein에서 유래)

그리스 고유의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하여 이루어진 세계주의적인 예술·사상·정신 등을 특징으로 하는 문화대계.
헤브라이즘과 함께 유럽 문화의 근간을 이룬다. 헬레니즘은 19세기초 인도의 역사가 J. G. 드로이젠에 의해 정의되었다. 세계사 속에서 헬레니즘은 고대 그리스에서 연원된 독자성을 지닌 역사적 개념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그리스 정신에서 '그리스화한' 문화까지 포함한다. 역사적으로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죽음에서 로마 제국에 의한 이집트 합병(BC 323~30)까지의 대략 3세기에 걸친 기간이며, 지역적으로는 주로 고대 그리스 본토와 알렉산드로스 3세의 뒤를 이은 여러 왕들에 의해 점령되고 지배되어 새로이 헬레니즘화한 땅에까지 이른다.
헬레니즘 문화는 한때 에게 해 주변의 전지중해 세계를 지배하고, 카르타고 등의 다른 나라에까지 확산되었으며 그 영향력이 서쪽은 영국, 동쪽은 인도의 펀자브 지방까지 뻗어갔다.

 

헬레니즘의 여러 국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와는 달리 군주정체(君主政體)가 전형적인 정치형태였다. 헬레니즘 왕국 중 3대 강국은 프톨레마이오스가 세운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 왕국, 셀레우코스가 세운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국, 안티고노스의 자손에 의해 유지된 잔존 마케도니아 왕국이었는데, 이들 3국의 건국자는 모두 알렉산드로스 3세 휘하의 대표적인 장군이었다. 헬레니즘 시대를 정치적으로는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다. 즉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룩한 제국의 분열과 일련의 새로운 여러 국가의 건설이 이루어진 BC 323~280년, 세력균형, 주변지역에 대한 그리스 문화 및 그리스적 생활양식의 확대, 철학·과학의 우위 등을 특색으로 한 창조적 국면을 이룬 BC 280~160년, 동방 및 로마 문화의 영향으로 인해 정치적 쇠퇴와 자멸을 앞둔 BC 160~30년으로 나뉜다.
사회·경제
헬레니즘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농업이 중요했음에도 불구하고 폴리스가 경제·사회 생활의 중심이었다. 토착민은 사회·경제 활동에서 제외되었으며, 헬레니즘화한 상류층만이 참여했다.
사회
'그리스인의 디아스포라'(그리스와 에게 해에서 온 많은 그리스인 이민과 소수의 마케도니아 이민)의 소수 상류층이 관리와 육군·해군 및 궁정의 높은 지위를 차지했으며,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인·상인·공인·교사·의사·예술가·기술자로 일했다. 그리스인 또는 그리스의 문화를 받아들인 마케도니아인이었던 그들은 헬레니즘화한 동방인과의 혼혈로 이어졌고, 이들이 중산층을 대표했다.
경제
경제생활이 비교적 왕정의 간섭을 받지 않는 도시에서는 제조업 및 상업 부문에서 자유기업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군주정체 국가에서는 국가에 의한 경제체제가 결정적이었다. 국왕은 행정사무와 상비군을 유지하는 데 많은 경비를 필요로 했다. 상비군은 점점 증대되어, 국왕은 많은 용병의 유지와 육군·해군의 기술적 장비에 엄청난 재원을 조달해야 했다. 이때문에 국가재정과 일반경제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 이후의 풍요한 재력은 페르시아의 재화를 유통시켜 새로운 경제적 상황을 빚어냈고, 많은 자본을 회전시킬 수 있는 무역과 상업을 증진시켰다. 그러나 BC 3세기 전반의 경제적 번영은 서서히 쇠퇴하여, BC 200년 이후에는 그리스의 빈곤화와 이집트의 통화팽창을 초래했다.
농업은 여전히 경제생활의 기반이었다. 사유지가 증가했으나, 국왕이 가장 넓은 토지의 소유자였다. 국왕이 직접 소유하지 않은 토지에 대해서는 무거운 세금이 매겨졌다. 제조업은 변함없이 소규모 작업장에서 이루어졌다. 공업화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량생산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왕은 과세와 독점에 의해 이익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소금은 왕가의 독점 품목이었으며, 이집트에서의 대표적인 독점 물자는 기름·종이·곡물이었다. 사기업은 어느 정도 발달할 여지가 있었지만, 항만(港灣)은 대상(隊商)의 통로와 마찬가지로 정부가 관리·보호했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국가경제기구가 특히 유명했으며 국왕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배자로 꼽혔다. 그러나 일반 농민의 생활은 여전히 빈곤했고, 전반적인 생활수준도 낮았다.
헬레니즘 문화의 여러 가지 양상
지방마다 지방어가 발달했지만, 통일된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어를 공통으로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교육과 문학
초기에는 그리스 고전시대의 연속이었다. 수사학은 역시 헬레니즘적 교육의 지배적인 요소였다. 고르기아스·이소크라테스 등 전시대 이론가들의 기본적인 이념은 좋은 말은 좋은 사상에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사학 교육의 복잡한 조직은 자칫 자화자찬에 빠지는 경향이 있었으며, 특히 문체가 화려하고 공허한 형식주의로 기울었다. 그러나 BC 1세기에 로도스 섬에는 건전한 수사학파가 존재해 로마의 위대한 변론가 키케로와 유명한 지도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강렬한 영향을 주었다.
문학에서는 놀이에 가까운 다양한 재능과 학식이 창조정신보다 중요시되었으며, 언어와 운율이 한층 중요시되었다. 문학과 그 관련 학문이 나란히 발달해 상호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면 테오프라스토스의 제자이며 10년 동안 아테네 귀족정치의 지배자였던 디미트리오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알렉산드리아에 무세이온이라는 연구소를 세울 때 조력했다. 그것은 유명한 도서관과 함께 고전세계에 있어 학자·작가 들의 최대 집합소가 되었으며, 이 두 기관에서 근대 도서관과 대학 및 아카데미가 생겨났다. BC 3세기의 시인으로서 제1인자였던 칼리마코스는 이 도서관의 도서목록 책임자였다. 로도스 섬의 아폴로니오스는 장편 서사시 〈아르고나우티카 Argonautica〉에서 풍부한 상상력으로 호메로스의 전설을 쇄신하려는 시도를 했다. 한편 아라토스는 별에 관한 교훈서사시 〈현상 Phaenomena〉에서 헤시오도스의 전승을 써넣었는데, 이 책은 BC 4세기의 산문으로 된 논문에 기초한 것으로서 항해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실용적 목적으로 씌어졌다. 칼리마코스와 기타 시인은 찬가인 에필리아와 특징 있는 헬레니즘적 형식의 단시(短詩)인 에피그람을 썼는데, 이것은 이미 영웅의 업적에 관한 것이 아니고 보통 사람의 삶을 서술하고 있다. 풍자시는 BC 100년경까지 성행했으며, 위대한 시인이자 편집자인 멜레아그로스의 사화집 〈스테파노스 Stephanos〉은 이 시대에 생겨났다. 이 시대에 가장 잘 알려진 시인 테오크리토스는 사실적인 대화체로 씌어진 〈미모스(mimos)〉의 작가이며 〈전원시집 Idylls〉을 저술한 전원시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문학은 독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씌어졌고, 그 요구를 만족시켜야 했다. 또 대중적인 제례나 구경거리는 헬레니즘 세계에 넘칠 만큼 많았는데, 고전극 특히 에우리피데스의 희곡이 자주 상연되었다. 그러나 연극을 지배한 형식은 새로운 희극이었으며, 여기에는 역시 종래의 등장인물과 습관적인 장면이 수반되었다. 희극은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에게 호소용으로 전락하여 생기 없는 에로티시즘과 비정상적인 개인의 감정에 필요 이상의 흥미를 나타냈다. 상연을 의도하지 않았던 일종의 극시인 헤론다스의 〈미미암비 Mimiambi〉는 풍자와 외설로 가득 찬 사실적인 대화편이었다. 로마 제국의 연극 공연물 중 가장 대중적인 형식이었던 팬터마임은 그 기원을 헬레니즘 시대에 두고 있다.
사서 편찬
알렉산드로스 3세의 공적은 전기적인 역사작가들이 선호하는 주제였으며, 그것은 사실에 입각한 작품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역사가로는 그리스의 티마이오스, 헬레니즘 시대의 폴리비오스가 있다. 폴리비오스는 정치가로서 역사의 유용성을 굳게 믿었으며, 윤리적 태도를 지켰다. 그는 로마와 아카이아 동맹의 열렬한 찬미자로, 서술에 다소 불공평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투키디데스 이후의 그리스 역사가 가운데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폴리비우스는 로마 제국의 확장을 전반적인 주제로 하여, 동시대의 역사와 동시에 세계사를 썼는데, 아무도 시도한 일이 없는 기술방법을 사용했다.
학문
폴리비우스의 역사 기술 방법은 역사학에 가깝다. 학문적인 사람은 아테네 연대기 작가이며 〈아테네 법 주석 Psephismaton synaggo〉의 편찬자인 크라테로스 같은 고전 작품 연구가였다. 알렉산드리아 사람은 많은 고전 작품을 보존하고 판독 가능한 문헌을 정확히 입증했다는 점에 공적이 있다. 이리하여 이 시대에 고전문학이 탄생했다. 고전 문학의 시조는 호메로스이며, 그 작품은 제노도토스와 아리스타르코스에 의해 편찬되었다. 알렉산드리아 사람들 역시 주석을 썼는데, 그것은 후세에 고전 주석의 자료가 되었다. 그밖에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이 후세에 남긴 업적은 아테네의 비극과 희극의 텍스트와 현존하는 선집을 편찬한 일이다. 알렉산드리아와 페르가몬의 학자는 언어와 문법연구에 업적을 남겼는데, 디오니시오스는 오늘날까지 유용한 문법용어의 대부분을 최초로 만들어냈다. 전기문학도 역시 학문의 한 분야가 되어, 어떤 파피루스 문서에는 대화체로 씌어진 사티로스의 〈에우리피데스전〉의 일부분이 남아 있다. 전기 가운데는 가십과 중상적인 욕설을 쓴 것도 많았으며, 유명인의 것으로 알려진 가짜 편지들은 논픽션적인 요소로 인해 인기를 모았다. 그 이후 시대의 저자, 즉 플루타르코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작품에 나오는 일화의 대부분은 헬레니즘 작가에게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소설 예술
형식으로서 소설의 기원은 헬레니즘 시대에 귀착된다. 〈헤로와 네안드로스〉·〈피라무스와 티스베〉·〈사포와 파온〉 등의 로맨틱한 이야기는 고전소설의 근원을 이루었다. 또한 수많은 작품이 발표되었는데, 대개는 창녀의 생애 또는 요리법·해몽법 등을 다룬 것들이었다. 이 작품들의 문학적 수준은 높지 않았지만, 그 감성적인 분위기나 특수한 정보는 여성을 포함한 많은 독자의 요구를 채워주었다.
과학
지리학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2가지 사실에 기초하여 진보했다. 첫째, 알렉산드로스 3세 원정의 순서와 관련해 원정이 행해진 동방제국(인도·아프가니스탄)의 탐험과 아시리아의 피테아스나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대서양에서 한 발견을 위한 항로이며, 둘째, 소요학파들의 학술적 연구의 전문화였다. 알렉산드로스 3세의 측량기사는 서아시아를 광범위하게 측량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디카이아르코스는 이미 판명되어 있는 지역에 대한 세계지도를 제작했다. 에라토스테네스는 그리스 연대학의 기초를 확립했는데, 그의 명성은 수리지리학의 업적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는 지구의 둘레 를 측량해 오늘날 알려진 것보다 불과 80km 짧은 수치를 얻어냈다. 또한 여러 대륙의 형상에 대해 큰 발견을 했고 기술지리학 교과서를 저술했는데, 그에게는 많은 후계자가 있었다. 포세이도니오스는 대서양을 연구하여 에라토스테네스가 처음으로 가능성 있다고 발표한 사항, 즉 서쪽으로 돌아가는 비교적 짧은 항해로써 인도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였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초기에 스트라보는 〈지리학 Geography〉을 편찬했는데, 이것은 대단히 귀중한 자료의 수집이며 문학적으로도 높이 평가 된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리'를 수학 교과서로 사용했다. 평면 및 입체 기하학의 포괄적인 이 교과서의 논리는 정의·공준(公準)·공리(公理)로 나뉜다. 이 책은 놀라운 천재의 저작으로 평가되지만, 주로 피타고라스를 비롯한 선현들의 저작을 근거로 하고 있다. 에우클레이데스 역시 중요한 수학적 연구를 했다. 그는 '순수과학'의 가치를 최초로 언명한 사람으로 꼽힌다. 한편 순수수학·응용수학을 포함해 고대 수학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수학자는 아르키메데스로서 몇 종류의 저서가 남아 있다. 그는 적분법과 관련한 방법을 사용하여 면적을 구하는 문제를 풀었으며, π의 정확한 값을 최소한의 근사치까지 구했다. 아르키메데스는 자기의 이론을 기계에 응용하여 여러 가지 정교한 장치를 발명하기도 했다. 이 시대의 기술적 업적은 이론적 업적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과대망상은 거대한 선박의 건조에 관한 위대한 기술적 업적을 성취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은 여러 가지 기계장치를 만들고 또 그에 대한 전반적인 기술을 남겼다.
천문학의 사상과 관찰은 태양계에 집중되어 있었다. 전통적인 견해는 지구중심설, 즉 태양·달·유성이 움직이지 않는 지구의 주위를 회전한다는 설이었다. 그 다음에는 지구는 자신을 축으로 하여 회전하며 금성과 수성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이론이 나왔다.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는 태양은 지구보다 크며 모든 천체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태양중심설은 거부되었고, 히파르코스는 복잡한 순환과 지구의 원주에서 원운동하는 작은 원의 조직에 기초하여 지구중심설을 부활시켰다. 그는 태음년과 태양년을 거의 정확히 계산할 수 있었다. 이것은 지구와 달과의 관계가 조수의 변화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아낸 셀레우코스의 이론과 함께 놀라운 성과로 꼽힌다. 몇몇 천문학자는 태양의 지름과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를 계산하려 시도했지만, 모두 실제보다 훨씬 작은 수치를 제시했다. 천문학에서 달성한 업적은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권위 있는 서적에 요약되어 있다.
생물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에 관한 저작과 테오프라스트스의 식물에 관한 저작이 있었는데, 이에 관해서는 몇몇 추종자밖에 없었다. 한편 의학은 크게 발전했으며, 특히 해부학과 생리학의 진전이 두드러졌다. 사체의 해부는 보편적으로 실시되었으며, 외과의술과 산아제한도 성공을 거두었다. 동물의 생체실험이 행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뇌와 신경, 동맥과 심장과의 관계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졌다. BC 2세기까지 의학자들은 의약과 독약의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다. 폼페이에서 발견된 헬레니즘 시대의 외과의술 기구는 1800년 무렵 서양의 그것에 맞먹는 것이었다. 화학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으며, 물리학·지질학에 관한 지식도 거의 없었던 듯하다.
미술과 건축
미술과 건축은 대부분 고대 그리스 미술의 계승이다. 문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아한 기능과 감정의 힘은 대개는 강렬하게 표현되었다. 건축의 발달은 수학과 공학의 진보와 궤를 같이 했다. 도시계획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어, 상수도·하수도 문제가 대두되었으며, 성벽의 건조와 요새화가 두드러졌다. 건축은 전반적으로 거대한 규모로 축조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 예로 페르가몬의 아크로폴리스 및 여러 도시의 주랑(柱廊)이 있는 시장 등이 있다.
대부분의 조각가는 BC 4세기의 거장들이 걸어온 길을 답습했지만, 새로운 양식도 대폭 발달했다. 동적인 느낌을 살려 사실적인 관능성을 표현했고, 점차 복잡한 군상의 조각이 시도되었다. 조각은 수요가 많았고 고가에 매매되었다. 초상 조각은 이 시대의 위대한 업적의 하나였다. 대표적인 조각가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상〉의 리시포스를 들 수 있으며, 그밖의 유명한 작품으로는 밀로스 섬 출토의 〈아프로디테 상〉(루브르 미술관)·〈키레네 아프로디테 상〉(로마 테르메 미술관), 로마에 있는 이른바 영웅적인 〈헬레니즘 시대의 지배자〉 등이 있다. 이들 작품들은 여성적 관능미와 근육이 왕성한 남성미를 강조했다. 부조는 한층 더 사실적인 경향을 보였는데, 그 원인은 부분적으로 원근법을 사용하여 여러 가지 깊이를 구별한 점, 조각과 회화를 조합한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회화에서는 실제로 순수한 헬레니즘 시대의 유물은 남아 있지 않다. 초기 회화의 모사(模寫)로는 폼페이에서 발견된 모자이크로 된 〈알렉산드로스〉가 있는데, 강한 힘과 구도의 정교함을 나타내고 있다. 그외의 것으로는 폼페이의 장식 벽화와 프레스코가 있다. 원근법은 빛과 그림자와 함께 헬레니즘 시대에 쓰였던 수법이지만, 이른바 색채구성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많은 실례가 아시아 미술에 대한 그리스의 영향을 나타내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예는 간다라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인도의 불상인데, 이 불상에는 확실히 그리스 기원을 나타내는 양식이 있다.
철학
더이상 독립 도시국가의 시민이 아니라는 것은 그리스 윤리의 전통적인 기반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생활의 새로운 기준을 찾으려는 요구가 높아지면서 여러 부류의 철학자가 이에 대해 고심했는데, 그들은 모두 본래는 일반 시민에게 왜 불행과 고통을 피해야 하는가를 설파한 도덕가들이었다. 그 가운데 디오게네스가 수립했던 견유학파(犬儒學派)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다. 그들은 원시적인 자기만족의 생활을 주장했다. 디오게네스는 아무 것도 써서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대개 테베의 크라테스와 같은 편력의 설교자로서 시와 산문을 썼다. 그들은 새로운 문학형식, 특히 대중을 향해 설교와 풍자문을 보통의 운문으로 썼으며, 이것을 패로디 형식으로 발전시켰다. 보리스테네스의 비온은 전자로서 명성이 높았으며, 메니포스는 후자로서 명성이 높았다. 두 사람 모두 노예였으며, 그들의 저작에는 반부르주아 경향이 명백하지만, 그 가르침은 개인을 사회의 진공지대에 버려두었다. 가장 급진적인 결론을 이끌어낸 학파는 피론이 세운 '회의파'였다. 이 일파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완전한 허무주의로 일관했다.
한편 아테네에 출현한 새로운 2개의 학파, 즉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는 이미 진리의 발견보다는 개인적 행복에 이르기 위한 인간의 모습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의 논리는 폴리스 사회의 논리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었다. 에피쿠로스의 참된 목적은 인간의 혼을 혼란하게 하지 않는 평정, 즉 '아타락시아'(ataraxia)에 있었는데 공포·고통·감정에서 해방되는 것이 그 기본이었다. 향락은 인간 행복의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인간 정신의 평정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전제하는 경우에 한했다. 자기 철학의 기초를 데모크리토스의 유물주의적 원자론에 둔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이 가지는 과학적인 면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것을 감정생활의 유물론적인 설명을 위한, 또 심신(心身)과 관련한 사실에 대한 비범한 통찰에 대한 근거로써 이용했다. 그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도덕의 기초로서의 자유의지를 믿었다. 그의 제자들의 공동체는 우정과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바탕으로 했다. 그의 이론은 실제로는 전혀 변하지 않았으며, 그 대부분은 필로데모스 또는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와 같은 열렬한 추종자들에 의해 후세에 전해졌다.
스토아 학파는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인 페니키아인에 의해 정립되었고, 그가 아테네에서 강의했던 스토아(주랑 현관)의 이름을 기념하여 그렇게 불렸다. 그것은 본질적으로는 그리스적이며 견유학파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 학파의 가장 오래된 선구자는 헤라클레이토스이며, 그의 로고스는 영원한 법칙에 의해 우주를 지배하는 섭리 또는 자연으로 재건되었다. 로고스는 물질적인 모든 것에 내재하는 '정신'(pneuma)이며 자연현상에 관한 최종적인 설명을 부여해주는 역학적 힘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또한 그것은 합리적인 심리학과 논리학의 기초가 되었다. 그 이론에 따르면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 남자와 여자, 자유인과 노예 사이에는 각각 아무런 차이도 없다. 모든 인간의 형제애라는 위대한 이념은 스토아학파에서 정점에 달했으며, 그들은 완전한 덕을 얻어 전적으로 자기충족적인 인간이 되는 힘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시대의 어떠한 철학적 종교에서도 신은 부속물과 다름없었다. 스토아 학파는 신화를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였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달리 스토아학파의 철학은 공적인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케도니아 왕 안티고노스 2세는 스토아 학파의 조언을 바탕으로 많은 사회개혁을 했다.
헬레니즘과 유대인
유대인은 주의(主義)를 가지고 그리스 문명에 반대한 유일한 민족이었는데, 양자 사이의 영향은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 BC 3세기에 대사제에 의해 지배되었던 유대의 소사회는 프톨레마이오스의 통치 아래 있었다. 그리스인은 오랫동안 유대인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다만 팔레스타인 이외의 땅에 사는 유대인의 수가 점점 증가했으므로, 일부 그리스의 작가들은 막연하게나마 유대인의 일신교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유대 왕국 내의 일부에서 그리스식 생활양식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BC 300년경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의 지배자가 되었을 때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에게 의탁했던 사람들은 이들 상류층이었다. 유대인 사회에서 헬레니즘화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대중들로부터 배척되었는데,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의 치세하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그는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을 예루살렘의 신전에서 제사했는데, 사실은 그리스풍으로 꾸민 시리아의 바루 신이었다. 유대의 지도적 귀족인 마카베오가(家)는 셀레우코스가와의 전쟁으로 유대주의를 구했지만, 당시의 독립국가는 심각하게 헬레니즘 시대의 특징을 드러냈다. 이는 이도메아 출신 헤로데 왕의 통치시대에 절정에 이르렀다.
유대 문학은 BC 2~1세기에 번영했으며, 어느 정도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면 2개의 역사서인 제1·2 마카베오서는 극단적인 국가주의를 나타내는 것이며, 제2마카베오서는 처음부터 그리스어로 씌어졌다. 이처럼 유대 문학의 대부분은 유대 지방 밖에서 씌어졌으며, 그리스의 영향은 당연히 디아스포라에서 가장 강했다. 회당을 가진 유대인 사회는 헬레니즘 사회의 곳곳에 존재했으며, 어떤 도시에서는 자치적인 정치단위로 승인되기도 했다. 대부분의 유대인은 그리스식 이름을 쓰고 그리스 양식을 모방했지만, 그들은 두드러진 특징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유대 생활의 종교적 관습이 도처에서 그리스인과의 밀접한 교류를 불가능하게 하자 반유대주의가 시작되었다. 그 원인의 일부는 경제적 경쟁에 있었지만, 대부분은 서로의 종교적 선언에 의한 것이었다. 유대인은 어떤 직업이든 독립을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유대인의 중요사회는 이 도시의 건설초부터 참여했지만 시민권은 얻지 않았다. 한편 〈비교(秘敎)의 서(書) Hermetica〉가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이집트의 신 토토의 그리스 이름)의 계시를 기록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점에서 유대인의 전통 특히 일신교 사상, 또한 그리스의 저작물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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