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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생각 저런 마음/가슴에 남는글들

[스크랩] 타인을 바꾸려 하는 것

타인을 바꾸려 하는 것
 
 우리는 끊임없이 남을 바꾸려고 한다. 상대의 생각을 자기식대로 바꾸려 하는 것이다. 친구사이에도 그러하고 부모 자식간에도 그러하고 연인관계, 부부관계, 직장생활에서도 그러하다. 한쪽만 그러는 것이 아니고 쌍방이 서로 그런다. 자기들 식대로 바꾸려고 한다. 그때 무엇이 있을까? 서로의 갈등하는 생각이 있다. 누군가 다른 이의 에고를 자기 에고 식으로 바꾸려 한다면 에고의 충돌이 일어난다. 상대가 에고 없는 깨달은 이라 해도, 누군가의 틀에 맞추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것을 알아야 한다. 서로 바뀔 수 없음을,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임을.
 
 헌데 이것을 알긴 하되 이해하지 못하면, 끊임없이 상대를 자기 식대로 바꾸려고 시도하고 그로 인해 갈등하고 점점 더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된다. 오히려 친하지 않은 관계에 서 상대가 바뀌지 않는 모습을 보더라도, “그래. 내가 너를 안 보면 되지”하고는 빨리 포기하고 더 이상 바꾸려들지 않는다. 더 바꾸려드는 건 대부분 친한 사이에서다. 바꾸려 한다는 것은 꼭“이렇게 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에겐 그렇게 명령조로 이야기하겠지만 친구관게에서라면 “내가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네 생각은 어떠니?”하고 묻곤 “아냐, 이게 맞을 것 같은데”라는 식으로 돌려서 말한다. 그래도 이 역시 자기 식으로 생각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음이다. 왜 친할수록 더 그렇게 바꾸려고 할까?
 
 우선은 자기가 옳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상대가 무조건 틀렸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살아온 경험을 토대로 이건 내가 맞으니 너는 무조건 이렇게 되어라가 깔려 있는 것이다. 이걸 잘 들여다보라. 어떻게 한 개인이 살아온 경험이 절대적으로 옳을 수 있는가? 그가 깨달은 이라면 모르되, 아니 깨달을 이라면 이러한 것이 있다고 이야기만 할 뿐 자기 식이 옳다고 몰아붙이지 않는다. 상대를 바꾸려 함은 몰아붙이는 것이다. 갈등이 있음이다. 일단 자기가 절대적으로 옳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상대 또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할 것이다.

상대가 내 생각에 동조하지 않으면 이제 벌어지는 것은 “나를 무시했어?”하는 데서 기인하는 화이다. 상대가 ‘나’를 무시했다고 생각하는 것의 이면을 보자. 상대는 ‘나의 생각’을 무시한 것이다. ‘나’를 무시한 것이 아니고, ‘나의 생각’이란 ‘나’가 아니고 나‘의’이다. 나의 집, 나의 연필과 같이, 생각이 나일 수는 없다. 생각이란 ‘도구’다. 틀리기도 맞기도 하는 선택의 도구, 헌데이제 상대가 나의 생각을 무시함이 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되고 말면 화가 난다. 화가 난 생각은 대부분 졸렬하다. 그 생각은 다른 생각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는데, 바로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 순간에만 빠져 있는 생각인 셈이다. 흔히들 경험해봤을 것이다. 그 순간에만 빠져 있는 생각인 셈이다. 흔히들 경험해봤을 것이다. 화를 낼 당시에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기는 무조건 다 옳고 상대는 무조건 다 틀렸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 다시 생각해보면 그때 자기 생각이 너무 옹졸했다고 느끼는, 그런 것 말이다. 화내는 생각은 질서정연한 생각일 수가 없다. 상대가 옳을 수도 있겠지 하고 아무리 생각해보려 해도 그 순간에는 “아냐, 그래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내가 맞아”하면서, 자기 손을 들어주는 게 화난 생각이다.
 무시당했다고 여겨질 때 나는 화의 이면에는 다른 생각도 있다. 앞으로 다시는 나에게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앞으로 나한테 이렇게 하면 화낼것이니 다시는 이런 식으로 하지 말라는 것. 이는 곧 상대를 내 식으로 바꾸려 함이다. 헌데 상대 또한 그것과 다른 것을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강요한다. 우리를 바꾸려고 말이다. 이러는데 어느 한쪽 방향으로 바뀔 수 있을까? 이건 마치 이렇다. 직장에서 상사가 여직원이 타온 커피를 마시고는 “이게 뭐야? 왜 평소랑 달라? 나는 프림 한 숟갈이잖아?” 하고 화를 낸다면 그 말속에는 지금 자기를 무시했다는 생각과 다음부터는 자기 식대로 커피를 타 오게 하려는 생각이 함께 있는 것이다. 상사와 부하라는 권위의 종속관계에선 이런 상사의 요구대로 부하가 바뀔 것이다.
 
 헌데 우리는 이런 관계를 동료들에게도 바란다. 친구나 연인관계 같은 수평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 속에선 종속관계로 보고 있는 것이다. 부모 자식간은 물론이고, 누군가 우리를 종으로 본다면 기분이 좋을 수가 있을까? 더 나아가 이리 하라 저리 하라 하고 막 부린다면 기분 좋을 수 있을까? 아마도 우리는 반항할 것이다. 그 대상이 절대자라 하더라도, 그러한 것이다. 
 
 우리가 상대에게 일 바뀌어라 하고 주문하는 것은 상대에게 이리 해라 하고 종 부리듯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한 종속관계는 서로에게 스트레스를 준다. 갈등하는 마음, 분열하는 마음을 준다. 바탕마음에는 “넌 내 종이야. 내 식으로 살아야 해”가 깔려 있는 것이다. 그리곤 겉으로만 사랑한다고 말한다. 물론 그 사라 자신은 속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믿으며,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바꾸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너가 틀렸기 때문에 바로잡아주는 것뿐이라고, 흔히 이런 말은 그럴싸하게 들리나 포장용이기 쉽다. 겉모습이 중요한 게 아니다. 포장이 중요한 게 아니다. 아무리 근사하게 포장하였다 해도 보내온 선물의 내용물이 똥이라면, 포장은 ‘사랑’인데 내용물은 ‘종이 되라는 강요’라면 어느 누가 좋아라 종이 될까?
 
 우리는 이제 이 자리에서 누군가를 내 식으로 내 틀에 맞추려는 시도를 종식시켜야 한다. 이것은 폭력이다. 우리는 이렇게 지배하고 싶은 것이다. 허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영원히 모든 대상을 지배할 수 없음을.
 
 상대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모조건 바꾸라고 하지 말자. 그저 이런 것과 저런 것이 있다고 제시만 해주자. 내가 살아본 경험상 이러했을 땐 장단점이 있고 저러했을 땐 저런 장단점이 있다고 제시해주자. 세상에, 현상에 지어진 것으로서 절대적으로 옳은 건 있을 수 없다. 상대적으로 장단점이 있을 뿐이다. 그 단점도 다른 상대, 다른 상황에서는 장점이 될 수 있다. 내가 겪었던 경험의 상황과 다른 특성의 사람이 부딪힌 다른 상황이 어떻게 같을 수 있는가?
 
 부모 자식간에도 부모는 제시만 하고, 선택은 본인에게 맡기자. 잘못된 결과를 지켜봐야 하느 게 안타까워서 그렇게 놔둘 수가 없다고 하는 부모도 있을 수 있다. 부모가 백프로 옳다고 여기는 그 생각, 그것 때문에 바뀌라고 서로 싸우고 갈등하다 본말이 전도되어 종래는 자식을 미워하게 되는 부모들도 많이 봤다. 참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를 보자. 그들은 자식에게 아무 조건이 없다. 그들은 자신들은 아무것도 몰라 자식에게 해줄 게 없다고 말한다. 도 하나님의 자식이며 그저 나를 도구 삼아 보내셨을 뿐이라고도 말한다.
 
 그런 조건 없는 부모의 사랑이라야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식이 잘되면 그것으로 된것이다. 행여 자식이 잘 되면 이 다음에 늙어 뭔가 혜택을 좀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조금치라도 있다면, 이미 잘못되고 있음이다. 그런 불순한 생각에서 자식에게 하는 말이나 생각들이 순수할 리 없을 것이고, 그런 자식들이 그런 뜻을 감지 못할 리도 없다. 자식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부모란 자식이 성인이 될 때까지의 바람막이요, 돈 나오는 은행이라는, 물적 조건으로만 여긴다면 그것은 불행이다.
 
 부모의 자식사랑은 많은 경우 사람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평소에는 모르다가도 한계상황이 닥치면 종종 그리 된다. 더러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에 조건을 내세우더라도, 그것은 사회적 삶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경험된 생각일 뿐이다. 자식은 그러한 모든 것을 참주시, 참이해하여 그 스스로라도 조건 없는 부모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낳아준 부모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며, 또한 자식이 세상에 나온 뜻이다. ‘나’가 바뀌면 주위도 바뀌는 법이다. 물론 시간은 걸릴 터이지만.

 ‘나’가 바뀐다 함은, 평소에 상대가 나에게 바뀌었으면 하고 바라던 대로 나 스스로 먼저 바뀌어는 것이다. 내가 먼저 상대의 뜻대로 바뀐다면 상대도 몇 가지 정도는 내가 원하는 대로 바뀌어준다. 비록 다는 아닐지라도. 이때 명심할 것은 우선 나 스스로 먼저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스스로 바뀐 자는 이제 더 이상 상대에게 바뀌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하기에’의 사랑이란 사람 관점이 대부분이다. 사랑을 잘 모르면서도 사랑할 때의 그 뛰는 가슴상태를 맛보고는 사랑이라 말한다. 누군가를 향해 가슴이 뛰면서 그가 무작정 좋은 것, 그것사랑의 한 면이다. 그 상태를 가슴이 느낄 때 가슴은 열린다. 머리로가 아니다. 그 순간이 삼매상태에 가까움이다.
 
 이성을 사랑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 이성을 사랑함으로 인해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게 보고 스쳤던 집앞의 꽃들이 왜 그렇게도 예쁜지, 저 하늘은 또 왜 그리도 축복인지, 삶들은 어쩜 이리도 하나하나 넉넉하여 감사함뿐인지 하고 말이다. 그저 길 지나면서도 빙그레 웃는 그러한 사랑에 빠져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우주 전체와 사랑에 빠지는 느낌.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여기는 그 상태. 바로 그것이 ‘사랑’이다. 헌데 사람의 개아적인 사랑이란 상대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종종 증오로 바뀐다. 갑자기 세상이 온통 축복에서 지옥으로 바뀐다. 나무도 하늘도 새도 강물도 무엇도 바뀌지 않았다. 다만 마음만이 변해 천국에서 지옥으로 바뀐다. 개아적(個我的) 사랑과 우주적 사랑의 차이는 받고자 하는 ‘조건’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이기심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현상의 모든 것은 실상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열린 마음으로 본다면 현상의 모든 것은 실상을 가리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현상은 조건 있는 것이기에, 그 조건들을 여의고 본다면 그것이 실상의 표현인 것이다. 바탕을 조건 없는 사랑에 두자. 이익을 바라는 관게를 두고 이러하라는 말이 아니다. 비즈니스 관계에서는 정당한 이익을 구해야 한다. 대신 그 이익이 무엇을 위한 구함인지를 알아야 한다. 먹고살 만큼, 혹은 새로운 놀이를 할 만큼만 이익을 구하면 되는데, 흔히들 한 만큼 이상을 구하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한 것 이상의 이익을 구할 때 서로는 갈등하게 된다.
 
 갈등하는 순간부터 한 것 이상의 이익은 (장기적으로 볼 때) 구해지지 않는다. 혹시라도 어찌어찌하여 억지로 구한 경우에도, 그 억지로 구한 부분만큼 다른 부분(행복)에서 잃는다. 그 구한 이익을 쌓기 위해 그동안 찧고 빻던 생각만큼의 몫이 늘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잡다한 잡동사니를 마음에 쌓아놓았기에 우리에게 그만큼의 평안이 사라진다. 구하고 행하자. 허나 한 만큼만 구하자. 비즈니스를 떠난 관계라면 이익은 구하지 말자. 조건을 달지 말자. 비즈니스 관계에서도 바탕은 사랑으로, 그리고 사냥한 만큼(동물이  먹이를 사냥한다고 했을 때)의 정당한 이익만을 구하자. 허나 실은 바탕을 보아야 한다.무엇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차적인 문제다.
 
 선생들은 곧잘 모두를 사랑하라고 한다. 맞는 이야기다. 허나 모두를 무차별적으로 사랑하라도 하면 괜히 자기만 희생하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 자기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이에게 모두를 사랑하라고 하면 그게 쉬운 일이겠는가. “어떻게 남들 모두를 사랑한단 말인가?” 또 “어떻게 나를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하고 반문할 것이다.
 
 ‘사랑하라’는 맞는 말이되, 그보다 더 가까운 말은 “스스로 ‘사랑’이 되어라”이다. 흔히들 자신부터 사랑하라는 말이 이것이다. 누구를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닌, 내가 사랑이 되는 것, 내가 사랑이면 모든 것이 사랑이 된다. ‘사랑하라’의 실체는 바로, 우리가 ‘사랑 자체’가 되란 이야기이다.
 
 사랑 자체가 되면 항상 사랑하며 행복할 게 틀림없다. 이건 우리를 위해서 아주 좋은 일이다. 그리고 이제 이와 함께 사랑밖에 없으므로 모든 것이 사랑일 수밖에 없음이 벌어진다. 우리 자체가 사랑일 때, 이제 받는다든지 준다는지 하는 것들은 없어진다. 저런 수단들이 없음이다. 이제 사랑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행복의 다른 이름이다. 사랑 자체에 산다는 건 이제 우리가 무얼 하든 행복하다는 이야기다. 지난날 우리에게 행복은 없고 두려움만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 사랑은 없고 갈등만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렇다고 사랑을 무조건 베풀라 하면 대다수는 거부한다. 그걸 어떻게 하냐고, 신이나 가능한 일이라고 하면서, 그러니 우리는 사랑하려 하지 말자. 단지 우리가 사랑이 되자. 그러면 이제 사랑인 우리에게 오는 모든 대상은 그대로 사랑으로 되비추이리라. 물론 이 되비춤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도 있을 수 있다. 그의 마음이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허니, 받건 못 받건 그냥 우리는 사랑으로 있으면 된다.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이익을 구하는 것이지 사랑을 하고자 하는게 아니다. 조건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 관점에서는 그것도 사랑이라고 부르지만....... 같은 맥락에서 억지로 내 사랑을 받으라고 강요하는 것 역시 사랑이 아니다. 그저 사랑상태에 있으면서 비추어주면 될 뿐. 햇빛은 그저 비추일 뿐. 받고 싶지 않은 이는 그늘로 피하면 되는 것처럼. 억지로 주려는 강요는 또다른 이익을 구함이다. 자기의 에고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랑’이란 받으려는 것도 아니요, 주려는 것도 아니다. 그냥 사랑으로 존재함이다. 이러할 때만이 받으려는 이기심이 없이 아낌 없는 사랑을 비추일 수 있다. 사랑(사람 관점에서의 사랑이 아니다)이란 절대평등, 무의지성이며 신의 또다른 이름이다. 사랑 자체는 누구에게 무엇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요, 누군가를 어떻게 해줘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아니다. 그저 담담한 사랑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모두를 향해서, 특별히 누군가를 더 사랑하는 것은 사람관점에서의 사랑일 뿐이다. 무엇은 사랑하고 무엇은 사랑하지 않는다 함은 차별이며 무언가 바라는 마음이 내재되어 있기 쉽다. 뭘 바라는 한 그건 사랑이 될 수 없다. 계약이거나 조건일 뿐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대상에 대해서.
 
- 출처 :  이동호,  방어할 두려움 없는 자유  중에서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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