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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에 관해/심리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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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으로 신앙점검하기 Ⅰ『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수동공격』
                          

유명한 오케스트라에 객원지휘자가 왔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객원으로 온 이 지휘자는 젊고 후진국가 출신이며 지명도도 떨어진다. 그러나 단원 가운데는 오랜 경력으로 머리가 허연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연주를 거부할 수도 없다. 경영사의 메니지먼트에 의해서 조정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때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신참 지휘자를 골탕먹이는 방법은 간단하다. “어디 한번 흔들어 보시지! 얼마나 잘 하나!”하는 마음으로 연주에 수동적으로 임하는 것이다. 당연히 연주는 망치게 된다. 그리고 연주에 대한 ‘평가의 몫’은 지휘자의 것이 된다. 직장에서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직접적으로 해고통지를 보내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간접적인 방법으로 압력을 넣어 결국 사표를 쓰게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수동 공격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수동 공격은 비교적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공격을 가하는 자는 당하는 자가 서로 자각하지 못하는 수동공격은 공동체가 파괴되는 것을 방지할 방법이 없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수동적인 공격성이 가장 많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교회공동체라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의 일어나는 위장된 형태의 수동 공격들

통제를 원하는 지도자와 자유를 반납하고 통제 받기를 원하는 성도들간의 공모는 성경을 율법적으로 해석하고 경직되게 적용하면서 결국 억압적인 공동체의 구조를 만들어 내게 된다.  카리스마적인 리더쉽은 신앙 색깔의 통일을 만들어 내고 힘있는 추진력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여기에 합류하지 못하는 성도들은 도태되어 방황한다. 정당한 토론이나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믿음 없음이나 불순종으로 간주하게 될 때, 그들은 두려워 교회도 옮기지 못하고 합류도 못한다. 이런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것이 수동공격이다. 능동적이고 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공격은 교회를 옮기거나, 출석안하기 , 파벌만들기 등, 적극적으로 표현된다. 이런 공격은 눈에 보이는 것이기에 문제의 근원을 빨리 바라볼 수 있지만 수동공격은 분별이 느리기 때문에 공동체에 많은 손실을 가져오게 된다.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수동공격은 설교만 시작하면 졸기, 무엇이든 원하는 것만 들어주면 다 할 수 있다고 다짐하는 맹종, 헌금으로 다른 자신의 모든 문제를 덮어버리기등이다. 이런 신앙들은 결국 실족하여 교회를 더 크게 시험에 빠지게 한다.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 가기, 지각하기, 관계하지 않기(예배만 보고 도망가기), 앞에서는 굽신굽신하지만 뒤로는 다른 짓 하기, 침묵하기, 이러 저러한 이유로 모이기를 거부하기 등, 교묘하게 위장된 형태로 나타난다. 의식에서는 이러 저러한 핑계로 정당화 될 수 있지만 사실 자기 자신도 속으면서 이루어지는 무의식적인 현상들이다. 이러한 수동공격들은 교회공동체를 서서히 그리고 은밀하게 파괴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사단의 영향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시험들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신분석적인 관점에서 보면 인격 안에 수용되지 못한 공격성이 의식에서 떨어져 나가 무의적으로 행해지는 수동공격이다.

인격 안에서 떨어져 나간 공격성

위니컷은 공격성을 파괴적 충동이 아닌 생명의 힘으로 본다. 태아가 이미 엄마의 자궁 안에 있을 때부터 엄마의 자궁벽을 이유 없이 공격하는데 이것이 바로 태아가 󰡒나󰡓를 표현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성이 「사랑의 능력」이 되기 위해서는 인격 안에 통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아가 이유 없이 엄마의 젖가슴을 공격할 때 유아의 공격성에 아픔을 느끼면서도 보복하지 않고 그것을 수용하고 견뎌주며 유연하게 그 아픔을 표현할 때, 곧 엄마가 유아의 공격에 살아남을 때 ,이 때 유아의 공격성은 인격 안에 통합이 되고 아이의 능력이 된다는 것이다.
공격을 버텨주지 못하고 보복하게 될 때 아이의 인격에서 공격성은 억압되어 떨어져 나가게 된다. 이 때 아이는 순응하게 되고 삶의 열정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억압되고 떨어져 나간 공격성은 여러 가지 형태로 왜곡되어 나타나게 되는데 수동적인 공격 역시 이렇게 변형된 공격성들 중의 하나이다.

공격성을 인격 안에 통합시키지 못한 사람이 복음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은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안전하다고 여겨질 때 퇴행이 일어나면서, 떨어져 나갔던 공격성은 재연(再演)된다. 또한 어려서 자신의 자율성과 창의성에 침범을 받은 경험이 있는 성도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를 만날 때 수동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도 한다. 어떤 성도는 신앙생활 잘 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로 떨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수동공격이 지속되거나 양적으로 늘어날 때 공동체는 소리 없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안전한 울타리로서의 교회

건강한 가정은 아이의 공격성을 마음 것 시험케 하고 담아주면서 인격 안에 통합하게 해 준다. 교회 역시 자라지 못한 영혼들에게 엄마의 품과 같은 곳이다. 마치 품을 떠난 어린 아이가 제 세상 만난 듯 문 밖으로 뛰어나갔다가 넘어져 울며 엄마의 품으로 돌아오듯, 세상에 시달려 쓰러지고 자빠진 영혼들이 재충전하기 위하여 달려나오는 곳이다. 교회는 따뜻하고 안전한 곳이기에 성도들 안에 떨어져 나갔던 공격성이 무의식적으로 재연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교회가 현실적으로 이러한 든든한 울타리의 역할을 하기는 쉽지 않다. 든든한 울타리는 사랑의 매가 있고 거룩한 분노가 있는 곳인데 성도들이 조금만 섭섭해도 교회를 옮길 수 있는 도피처가 많기 때문이다. 결국 교회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공격을 마냥 방치하고 기도만 해야 하는 상황으로 떨어진다. 이때 교회는 그들의 공격성을 버티어주지 못하는 것이 되고 안전한 울타리는 환상이 된다. 성도의 눈에는 교회가 자신의 공격에 무너진 울타리가 되는 것이다.
또한 교회가 목사에 대한 불만, 설교에 대한 불만, 권위적인 것에 대한 불만을 수용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항상 성도를 통제하고 가두는 것이  된다. 때문에 많은 성도들은 교회의 모든 일에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구경군으로 있어야만 한다. 이것을 신앙 없음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교회는 무너진 울타리가 된다. 또 그들의 도망이 두려워 아무런 한계나 제재 없이 가식적인 환대만 한다면 역시 무너진 울타리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든든하고 안전한 울타리이다. 우리의 원망과 불평을 담아주시기도 하지만 때로 우리를 책망하시기도 하는 분이시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다. 교회는 이런 곳이어야 한다.
이런 교회에서 성도들은 따뜻한 하나님의 품을 경험할 수 있다.

나가면서

억압된 공격성은 착한 성도를 만들어 내는 것 같지만 사실 거짓자기를 발달시키게 되고 두려워 떠는 비창조적인 성도들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억압이 분출될 때는 파괴적 욕동으로 돌출 되어 교회의 분쟁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교회의 입장에서는 교회가 잠잠하고 부흥하는 것 같을 때 큰 불안을 감추기 위해 더 억압적인 구조로 가는 것은 아닌가 정검해야 한다. 성도의 입장에서는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자신의 행동 하나 하나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를 교회 안에서 재연하는 정당치 못한 수동적인 공격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통찰해야만 한다.

 

  정신분석으로 신앙정검하기 
                 -시기심을 중심으로-

이 글은 Ann and Barry Ulanov의 『신데렐라와 그 자매들』(심리치료연구소 이재훈 역)에서 핵심 개념들을 요약,참조하여 적용한 것임을 밝히는 바입니다.

시기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Melanie Klein은 자신의 이론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시기심의 보편성과 운명론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리고 시기심을 존재할 수 없음에 대한 인간의 숙명-존재(하나님)와의 분리된 인간의 실존-곧 신학적인 문제와 연관시키고 있다. 존재하지 못함이란 선함의 요소가 다른 누구엔가에게만 있고 나에게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갈등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이다. Ann and Barry Ulanov는 『신데렐라와 그 자매들』이라는 자신의 저술에서 인간은 시기심을 다루는 것을 터부시하고 그래서 이 시기심은 항상 우리의 심리 안에 어두운 부분으로 남아 있어야 하며 이 어둠이 <부정적인 자기>로 작용하면서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하고 이것이 다시 시기심의 원인이 되는 악순환을 치루게 된다고 말한다.

시기심의 심리학적 측면(파괴본능)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은 시기심을 정의하기 위해 먼저 질투(Jealousy)와 관련해 설명하고 있다. <질투>는 3자 관계로서 좋은 것을 두고 다른 것과 경쟁하는 하는 것이지만 <시기심>은 파괴자체가 목적이라고 말한다. 능동적으로 선함의 요소를 파괴하고 선한고 아름다운 것을 불쾌해 하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나쁜 것과 관계하면서 마음의 평정을 얻기까지 한다. 다른 사람의 행운에는 자신이 조롱받는다고 느끼며, 침범 받는 것으로 느낀다.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항상 다른 사람의 선함을 평가절하해야 하고 파괴해야 한다. 결국 악을 추구하고 선을 외면하게 되면서 가치의 역전이가 일어나게 되고 선함이나 좋음은 무조건 파괴되어야 하는 무엇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멜라니 클라인은 이 시기심을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의 하나로 보며 초기 유아기에 처음으로 발생한다고 이야기한다. 어머니의 사랑과 보살핌, 그리고 어머니가 주는 음식이 만족감뿐 아니라 동시에 이러한 음식, 사랑, 안락함이 자긴 바깥에 있다는 인식이 올 때 시기심의 반응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젖가슴이 유아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행복한 상황으로 변화시켜 줄 수도 있지만 젖가슴을 통해 만족을 느낄 때, 젖가슴이 그 무언가를 무한히 많이 갖고 있다고 느끼면서 풍족한 젖가슴에 대한 시기심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인 현상은 엄마의 좋고 나쁨과 관계없이 모든 아기가 보편적으로 겪어야 하는 심리과정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클라인은 결국 시기심을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원죄>와 연관시키고 있다.

시기심의 신학적인 측면(존재하지 못함의 결과)

  시기심은 존재를 떠난 인간에게 주어진 부산물이다. 때문에 신학적인 관점에서 시기심은 존재의 공허함에 기인한다. 결국 시기심은 자신에게 제공되는 모든 선함을 거절하고 빛을 외면한다. 다른 존재 안에 있는 좋음의 요소를 보지 않을 뿐 아니라 없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신학적으로 죄란 허탄한 것,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임을 감안할 때  죄의 본질은 시기심의 역동과 같은 뿌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Ann and Barry Ulanov는 시기심이 선함에 저항하지만 동시에 그 이상으로 선함에 강한 매력을 느낌으로서 긍극적으로 선함의 원천인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바울 역시 시기심의 역동이 선에 대한 역설적인 긍정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롬7장16)
시기심은 곧 선함의 근원이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 선함을 통제할 수도 소유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선을 증오하고 거절함으로 결국 삶의 현장을 떠나 스스로 지배자가 되는 영역을 세우게 되는데, 때문에 시기심은 결국 자기 안에 좋음의 요소마저도 잘라버리고 죽음을 향해 달리는 파괴본능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로마서에서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롬3장13-17절) 라고 기록하면서 자연인의 운명을 시기심으로 규정한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시기심의 형태들

목사 아들을 둔 장로님이 다른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시기심이 발동되면 설교는 들리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던 좋음이 아들의 설교에 없고 다른 목사님에게만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신앙이 한참 좋아질 무렵, 이제 한 단계 발걸음을 옮기겠구나! 이제 한 고비만 넘기면 되겠구나 생각될 무렵, 갑자기 자신을 망치며 마음의 문을 닫는 사람들을 보게된다. 자신이 좋아짐으로 그 상급이 자신을 양육한 사람에게도 돌아간다는 그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막기 위해서 자신이 망가지는 방법을 택한다. 상대방의 잘됨과 선함을 파괴만 할 수 있다면 지옥도 좋다는 식의 파괴본능으로 신앙도 포기한다. 율라노프는 이런 역동이 결국 선의 본체인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다른 성도의 믿음이 남다르게 좋아질 때 “나도 그럴 때가 있었지!” 하면서 평가절하 한다든가, 대형교회 화장실을 보고 “뭐야! 화장실이 우리 집 안방보다 좋잖아!” 라고 투덜거릴 수 있다. 교회가 부흥될 때도, 교회건물이 아름답게 올라 갈 때도 심지어 설교가 너무 좋아도 좋다는 이유 때문에 기분이 나빠지고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다. 기도가 부족했다거나 은혜가 떨어져서 그렇다고 간단히 정 죄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심의 벽을 넘지 못하는 원인을 심리학자들은 초기 유아와 엄마의 관계에서 찾는다.

지체의식과 시기심

Ann and Barry Ulanov는 시기심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전부가 되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자신 안에 있는 구멍을 그대로 가진 채 부조화와 부조리를 받아드려야 하고 내게 없는 것은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상호의존 하는 것이며 누군가는 가진 자이고 누군가는 가지지 못한 자라는 사실로 괴로워하지 않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지체의식과 같은 내용이다. <지체의식>은 내가 가진 것이 비록 작고 부족할지라도 함께 마음을 모을 때 부족함을 채우고도 넘쳐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결국 시기심은 기독교의 지체의식에 가장 반대편에 서 있게 된다. 따라서 시기심은 교회공동체를 파괴하는 가장 핵심 역동이기도 하다.

나가면서

우리는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길 원하지만 나타나는 결과는 원하는 것의 반대의 일을 할 수 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롬 7:15)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9)  동시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애통해 하면서 돌파구를 제시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8장 1,2절)
이 말은 곧 나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그것을 주님이 용납하셨다는 그 사실을 받아드림으로, 자신의 죄성을 용납하는 그것만이 시기심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의 시기심을 다루는 것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시기심이 우리의 마음 한구석 어두운 부분으로 남아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 있게 말아야 한다. 시기심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을 받아드리고 그것을 주님이 용납하셨다는 것을 받아드림으로서 우리는 내 자신 안에 있는 시기심을 볼 수 있고 다룰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시기심의 역동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선이나 아름다움은 훔칠 수도 파괴되어 질 수도 없다. 선은 어디에 있든지 항상 존재할 뿐이다. 그 선함을 핍박하거나 파괴한다고 해도 언젠가 어떤 명목으로든 부활하고야 만다(Ann and Barry Ulanov)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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