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의 폭력
오늘날 기독교에는 폭력이 난무합니다. 자신이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오만이 다른 이들을 향한 판단과 정죄로 이어집니다. 분명 그 사람의 생각은 무언가 옳은 것을 위해 자신이 일조를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개혁을 위해 혹은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한 당연한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칼로 찌르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느끼게 합니다. 그것이 치명적인 폭력이라는 것을 당사자는 여간해서는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경건의 폭력'이라고 표현한 어떤 분의 글을 읽고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새벽기도에 오래도록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한 집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머릿속에는 새벽기도에 빠진 목사와 장로들의 빠진 횟수와 날자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일조를 정확하게 꼬박꼬박하는 신자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머릿속에는 십일조를 빼먹거나 제대로 하지 않는 동료 신자들의 목록이 빼곡히 들어 있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다녀온 권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시선에는 '너는 왜 금식기도를 하지 않느냐'는 무언의 질타가 섞여 있습니다.
크고 건강한 교회를 다니는 성도가 무섭습니다.
그분의 말투에는 작고 별 볼일 없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이 넘쳐납니다.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신학자가 무섭습니다.
그분 앞에 서면 모든 사람들이 종류별로 차곡차곡 분류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수가 제법 되는 큰 교회 목사들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권위와 무게가 엄청난 압박으로 성도들을 찌그러트리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는 오래 된 전통입니다. 너무도 경건이 몸에 배어 스스로 자신들을 구별된 존재라고 여겼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도 모자라 울타리 율법까지 만들어 놓고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채소와 음식에 집어넣는 조미료까지 십분의 일을 구분하여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신앙의 일상화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과시의 일상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율법과 경건이 종교의 광기로 치달았습니다. 그래서 수틀리면 사람들을 돌로 쳐 죽이고자 하는 무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경직된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게 된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삶을 경이와 기쁨의 축제로 대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영혼들을 지극히 사랑하신 예수님과 달리 이웃과 형제들을 자기 잣대로 판단하고 비난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기쁨과 확신에 차 온전한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닮지 못하기 때문에 우울하고 독선적이며 남을 억압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비폭력의 길을 걸으신 예수님과 정 반대의 길인 폭력의 길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본인 자신은 느끼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상이 교회에서 벌어지게 되고 평화와 기쁨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로부터 영원히 멀어지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의 역시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예수님처럼 기쁨과 경이 그리고 축제의 삶을 사는 친절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최태선 목사 -
'공짜로 주시는 하나님 > 성도의 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방언`에 대한 이해 (0) | 2011.11.11 |
---|---|
[스크랩] 토마스 아 켐피스 작품중에서 (0) | 2011.10.26 |
[스크랩] 하나님의 전신갑주 7단계 (0) | 2011.10.20 |
[스크랩] 샤머니즘과 한국 기독교 (0) | 2011.10.20 |
[스크랩] 보디발의 처세술. (0) | 2011.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