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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에 관하여/세계 의 역사 속으로

[스크랩] 다소(Tarsus)의 바울 생가와 클레오파트라의 문

안디옥을 떠나 아다나에서 40km정도 떨어진 다소(Tarsus)로 향했다.

 

 

다소(Tarsus)는 오늘날 아다나와 메르신 등 산업 중심지들 사이에 끼여서

최소한 BC 3000년 전 부터 이어져 온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도시이다.

다소(Tarsus)는 옛 길리기아 지방의 수도였는데

이 곳 사람들은 타르수스를 처음 세운 사람이 아담의 아들 "셋'이라고 주장한다.

BC 2000년에는 히타이트 주요 도시 중 하나였고 한 때는 히타이트 도시 국가의 수도였다.

로마 시대에는 대 곡창 지대의 도시여서  키케로가 총독으로 지낼 만큼 중요한 도시였다고......

 

전쟁의 참화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과거의 흔적은 한 둘 사라졌지만

전 세계적으로 이렇게 지속적으로 인류가 거주해 온 도시는 얼마 되지 않는다.

이 다소는 그러한 몇 안 되는 오래 된 도시에 속한다.

 

이 곳은 사도 바울이 태어나서 자란 곳이며

클레오파트라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만나 유혹한 곳으로 유명하다.

바울이 자신을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성의 시민이니.....(사도행전 21:39)"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상당히 큰 도시였던 것이 분명하다.

 

다소(Tarsus)는 처음에는 항구 도시였는데 지금은 바다에서 15km나 내륙으로 들어와있고

인구는 2만명 내외로 다소의 옛 성은 현재 4~6m가량이나 땅에 묻혀 지면 저 아래에 잠들어있다.

 

 

사도 바울의 생가터를 찾아서 여름 한 낮에 찾아간 다소는 한산하고 조용한 도시였는데

생가터 앞에는 너른 광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사도 바울 생가터 앞 광장 주위의 집들.

거의 사백년은 넘은 오스만 제국 시대의 집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돌로 지어진 수백 년 된 집 위에 하얀 페인트칠이 된 집은

오스맡 제국 시대 건축 양식이라는데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어울려  조화가 잘 이루어진다.

 

 

 벽에서 오랜 풍상이 스쳐지나간 흔적이.......

 

 

티없이 맑은 하늘과  다소 엉뚱한 집의 색깔이 너무나 조화가 잘 된다.

 

 

바울의 우물 바로 옆 집이다.

한 낮이라 밖에서 들어오는 더운 기운을 막기 위해 문들이 꼭꼭 닫혀 있다.

다소의 뒷 길들은 사도 바울이 이 곳에 있었을 때 이후  변화가 거의 없다고 한다.

 

 

관리인의 의자는 얼마나 오래 된 것일까......풍상에 닳아서 색깔이 다 바래었다. 

 

 

사도 바울의 생가터와 우물터 앞.

투르키쉬 가이드 후세인 베이와 관리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바울의 생가로 추정되는 곳에 있는 '사도 바울의 우물'.

손잡이를 돌려서 두레박을 올리고 내리게 되어있다.

이 우물에 사도 바울의 우물이라고 이름을 붙인 사람들은

비잔틴인이거나 십자군 병사로 추정되는데

사람들은 이 우울물이 치료의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그 당시 집 안에 우물이 있는 집은 상당히 부유한 집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울의 집안은 역시 상당히 유복했던 환경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곳은 바울의 집터로 추정되는 발굴 현장.

옛도시의 터는 4~6m나 땅 속으로 파 묻혀 버렸다.

훼손을 막기 위해 유리로 덮어 놓아 약간 아쉬운 점이 있었다.

 

  

  

다소 시내 이 곳 저 곳의 일상적인 모습들이다.

 

 

 

 

 

 

 

 

 

군데군데 옛 도시의 흔적이 남아있다.

 

 

  

 

 

  

 

다소의 또 하나의 자랑거리는 '클레오파트라의 문'이다.

 

 

BC 41년 면세 헤택을 베풀기 위해 타르수스(다소)를 내방중이었던 로마의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여왕 프톨레미테(클레오파트라)를 소아시아 지방의 타르수스로 소환하게 된다.

안토니우스는 시저가 암살된 후 옥타비아누스,레피두스와 함께

제 2차 삼두정치를 이루어 로마를 다스리고 있는 최고의 권력자였는데

그는 삼두정치 반대파 카시우스 를 도와준 프톨레미테(클레오파트라)를 문책할 생각이었다.

당시 이집트는 로마의 동맹국이긴 하지만 사실상 속국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소환에 선뜻 응하지 않고 몇 번이나 독촉을 받은 끝에 타르수스로 향하는데

키드누스 강에서의 선상 파티에 안토니우스를 초대하게 된다.

 

그 날 저녁 클레오파트라의 배에 오른 안토니우스는 눈이 휘둥그레지는데

금은 장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배 안에는 온통 꽃들이 깔려있고

금접시와 보석 박힌 금술잔이 빛을 발하는 가운데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로 치장해 아름다움의 절정을 이루는 29살의 클레오파트라가

감미로운 선율이 흘러나오는 금빛 차양 안에 비스듬이 누워

안토니우스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토니우스가 "이런 화려한 파티에는 많은 비용이 들겠군요"라고 말하자

클레오파트라는 "지금까지 파티에 쓴 비용은 하잘 것 없는 것입니다.

이제 저 혼자 일만  세스텔치아를 써보죠...."

그러더니 시녀에게 식초를 잔에 담아 오라고 명령하였다.

 

그 때 클레오파트라는 온 몸에 값비싼 보석을 많이 달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는 양 쪽 귀에 늘어뜨린 커다란 진주 귀걸이가 가장 눈에 뜨였다.

식초잔을 받아 든 클레오파트라는 한 쪽 귀걸이를 떼내어 식초잔에 담구어 버리는데

안토니우스는 흥미롭게 이를 지켜보게 되고 식초 술잔에 들어간 진주는 서서히 녹아 버리고 만다.

진주가 다 녹자 클레오파트라는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버리고

다시 귀걸이 한 쪽을 술잔에 마져 담그려 하자

안토니우스는 그 진주의 귀함과 클레오파트라의 대범함에

문책할 마음을 철회하고 클레오파트라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이 '클레오파트라의 진주' 이야기는 로마의 학자 플리니우스가 쓴 책 '박물지'에 기록된 내용이다.

 

 

시저를 사로잡아 이집트를 지켰던 클레오파트라는 이번에도 지혜와 미모로 안토니우스를 사로잡아

BC 36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키프로스,시리아,리비아의 통치자로 선언하고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자식에게 각각 땅을 나누어 줌으로써 로마제국의 상당 부분을 넘겨주게 된다.

이 사건을 '알렉산드리아의 증여'라고 하고

클레오파트라에게는 '왕중의 여왕'이라는 칭호가 주어져 클레오파트라의 꿈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꿈은 오래 가지 못하는 것..... BC31년,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클레오파트라,안토니우스 연합군간의 전쟁인 '악티움 해전'에서 참패하게 되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영접한 키드누스 강가에 세웠다고 전해지는 문이 바로' 클레오파트라의 문'인데

혹은 '암캐의 문'이라고도 한다고.....

후에 기독교 국가가 된 비잔틴 제국은 이 문을 '바울의 문'이라고 불렀다.

문이 서있던 자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고

지금은 강이 훨씬 더 멀리 물러나가 버려 시내 한 복판에 위치하고 있는데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을 다 지켜본 '클레오파트라의 문'은 오늘날 그 일부만 남아

아무 것도 모르는 듯 무심하게 오늘도 다소의 거리를 말없이 지키고 있었다. 

 

출처 : 루비의 정원
글쓴이 : 루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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