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타고와 페니키아의 신앙
번호 : 3478 글쓴이 : KWEASSA
조회 : 273 스크랩 : 0 날짜 : 2004.12.15 13:32
카르타고 및 페니키아인들의 신앙에 대한 간략한 개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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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인, 엄밀히 말해 페니키아인들의 신은, 그들의 민족 및 그 지파가 공통적으로 뻗어나온 북부 레반트 지역의 토착신들에서 그 연고를 찾아볼 수 있다.
후기 청동기 시대의 가나안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믿었던 최고신은 "엘(El)"이다. 이후 최고신 "엘"은 페니키아인들에게 우선 "바알-샤마임"으로, 나중에는 "바알-함몬"으로 대체되었다. 카르타고인들에 있어서는 특이하게도, 전설로 전해지는 기원전 814년의 국가성립과 함께 "타니트(Tinnit 혹은 Tanit)"와 "밀카르트(Milqart 혹은 Milkert)"의 숭배가 먼저 자리잡은 이후에야 비로서 "바알-함몬"에 대한 숭배가 자리잡은 것 처럼 보인다.
카르타고인들의 국가적 수호신으로 여겨졌던 "타니트"와 "밀카르트"이외에도, 곡식의 성장과 그 수확을 주관하는 신 "다간(Dagan 혹은 Dagon)"을 숭배하였고, "바알(Baal)"은 천둥신으로써 일곱 가지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카르타고인들은 믿었다. 태양신 "라쉬메프(Rashmef)"는 후일 그리스-로마적인 의미에서 "아폴론/아폴론"과 동일시 되었으며 그 외에도 아카드인, 후리아인, 이집트인의 신들의 계보로 부터 많은 신들이 도래해왔다.
중동에서 최고신 "엘"의 배후자로 여겨졌던 "아쉐라(Asherah 혹은 Asheara)"와, "바알"의 배우자로 여겨졌던 자매신 "아스타르테(Astarte)"와 "아나트(Anath)"가 그러한 경우이다. "아쉐라"의 경우에는 고대 유대신앙에서도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으며, "아스타르테"는 중동의 "이슈탈(Ishtar)", "아나트(Anath)"는 "이난나(Inanna)"와 동일시 된다. 이러한 신들에 대한 숭배는 철기시후에도 지속되었다.
각각의 신들은 사회의 각종 계급에 의해 다른 방식으로 숭배되었다. 예컨데, 곡식의 신 "다간"은 항해자나 선원들 보다는 농사를 담당하는 하층민중들에게 훨씬 신성한 존재였으며, 반대로 천둥신 "바알" 및 기후와 기상조건을 관장하는 비슷한 부류의 하위 신들은 상업에 종사하는 민중들으게 큰 인기를 끌었다. "바알"의 일곱 가지 모습 중 하나였던 "바알-핫두(Baal-Haddu)"는 바람을 관장하는 신으로써 특히 선원들에게 신성시 되었으며, 특히 흥미로운 것은 그 격렬한 성품을 반영하는 듯 "바알"신은 외교적 문서에도 종종 등장한다는 것이다. 기원전 7세기에 앗시라아왕 에사르핫돈과 티레(혹은 '두로'라고도 함)의 왕 사이에 맺어진 외교문서에 남아있는 기록에 의하면, 서로간의 평화조약이 깨어질 경우, 평화를 깬 자는 "바알-삼멤(Baal-Samem)", "바알-말라게(Baal-Malage)", "바알-사폰(Baal-Sapon)"의 저주를 받으리라는 문장이 남아있다. 그 네 신들 모두 천둥신 "바알"의 다른 모습이었다.
카르타고 및 페니키아인들 스스로의 기록으로는 남아있지 않지만, 외부인들의 기록에 의해면 해양을 주관하는 신들 중에서 그리스에서 유래한 "포세이돈(Poseidon)" 또한 특히 크게 숭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후기의 작가들인 한노와 디오도로스는 모두 "포세이돈"의 이름으로 행해진 제사의식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으며, 기원전 5세기 카르타고 인들이 "포세이돈"의 신전을 건립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페니키아의 선원들은 폭풍이 멎은 후에는 "구원자 포세이돈신"에 대한 공양물을 바닷물에 던져넣었다고 전하고 있다.
"타니트"는 가나안 지방의 "아쉐라"와 동일시 되는 여신이었다. 로마인들의 "유노(Juno)", 그리스인들의 "헤라(Hera)"와 동일시 되기도 한다. 이 여신의 상징은 달이었으며, 항해자들과 선원에 있어서 별 못지 않게 달의 위치 또한 항법을 위해 중요했기 때문에 또한 그들로부터 많은 숭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뱀과 사자 등도 "타니트"의 상징물이었으며, 비블리아 지역에서 출토된 동전에서 그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밀카르트"의 경우에는 많은 부분이 수수께끼에 쌓여있다. 고대 문헌에 의하면 "밀카르트"는 그리스에서 유래한 "헤라클레스(Heracles)"와 동일시 되는 힘의 신이다. 페니키아인들의 경우 항구 시설물과 신전들의 많은 수를 "밀카르트"에게 바쳤다. "밀카르트"는 용감한 항해자, 혹은 방랑자의 상징으로써 날씨와는 무관하게 목적지로 무사하게 갈 수 있는 능력을 지녔으며, 그러한 특성으로 인해 특히 상업행위에 종사한 페니키아인들로부터 주신급의 위치에 오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9세기 무렵에는, "밀카르트"에 대한 숭배는 페니키아 식민지들 이외에도 이스라엘, 유대, 그리고 아람 지방까지 퍼져나갔다.
도상학적인 면에서 "밀카르트"와 종종 짝을 이루는 여신이 "아스타르테"이다. 특히, 티레(두로)인들의 경우에는 "아스타르테"를 "바알"의 배우자가 아닌, "밀카르트"의 배우자로 여겼던 흔적이 남아있다. 페니키아인들에게 있어서 "아스타르테"는 공격적인 여전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그리스의 "아르테미스(Artemis)"와 동일시 되었다. "아스타르테"에 대한 숭배의식에는 그 여제사장들에 의한 종교적 성행위가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일 유대의 일신교 확립과 함께 "아스타르테"는 중동에서 '타락'의 상징으로 가장 큰 공격을 받았던 여신 중 하나이다.(물론,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행위는 유대인들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다).
가장 먼저 지중해를 장악했던 상인이자 선원이었던 페니키아인들에게는, 육지로부터 떨어진 순간들에도 신에 대한 경건한 숭배가 크게 중요했다. 따라서, 해상의 함선위에서도 정기적인 종교의식이 치뤄졌는데, 헤로도토스는 페니키아의 함선들이 뱃전에 "아스타르테"를 조각하거나, 혹은 "포세이돈"의 성수였던 "히포캄푸스"를 조각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전한다.
함상에서 행한 숭배의식 중 많은 부분은 소, 송아지, 숫양, 새들을 제물로 올리는 전형적인 희생제였다. 육지에서는 그리스와 유사한 식의 제전시합이 펼쳐졌다는 증거가 있다. 여러 의식 중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것은 유아를 제물로 하는 인신공양의 풍습이었다. 사실, 카르타고인의 종교에서 이러한 희생제가 자주 벌어졌다는 증거는 없으나, 그것이 필요에 따라 행해진 제의식의 일부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는 듯 하다. 유아를 희생하는 인신공양제는 주로 국가의 비상사태에 치루어 졌다고 전해진다. 일반적으로 고대의 중동인들에게 있어서 수많은 제물보다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 바로 가문을 이을 장자였으며, 이러한 아이를 희생한다는 것은 지상에서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신들에 대한 최대의 공경을 표현하는 행위로 이해되고 있다. 이와같은 사실은 유대 성서의 신이 인신공양을 요구함으로써 사람을 유혹하는 모습에서도, 그리고 이집트에 내려진 재앙 중 가장 커다란 것이 모든 집안의 장자를 살해하는 행위였다는데에서 확인된다.
고대종교에 있어서, 또, 카르타고인들에게 있어서 신들에 대한 경건함은 굉장히 실용적인 모습을 띄고 있다. 성서의 요나서에서는 페니키아의 항구인 타르쉬시로 항해던 배가 폭풍을 만나자, 그 선원들이 각자 경애하는 신들의 이름을 부르짖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로마의 작가 실리우스 이탈리쿠스에 의하면, 로마의 해군과 전투에 나선 카르타고 해군의 수병이 뱃전에서 투창을 날리며 "날린 창이 로마인을 맞출 수 있도록" 기도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함선이 로마군에 의해 격파되어 가라앉기 시작하자, 그 선장은 "암몬신이여(리비아, 이집트의 "암몬"신은 페니키아의 "바알-함몬"과 동일시 된다), 우리의 패배를 보고도 모른 체 하실겁니까! 그대에게 나의 피를 바칩니다"라고 외치며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다.
고대 선원들의 묘비명에서도 현실 생활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 페니키아인들은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신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다. 고대의 선원들은 항해 중 사망하거나 바다에 빠져 실종된 동료들을 애도하며 해안가에 서서 모래를 쥐고 자신의 머리 위로 뿌렸다. 스스로의 몸에 불에 탄 재를 바르고, 머리카락을 잘라낸 후에 남루한 옷차림으로 곡을 하며 행진했다고 전한다. 이는, 배가 바다에 나가 있는 중에는 곡을 하거나 슬퍼하는 것을 금지한 고대 이래의 뱃사람들의 금기사항에서 유래된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바다 위에서는 슬퍼할 수가 없었으니, 닻을 내리고 땅에 올라간 후에는 정성을 다해 사라진 동료를 애도하는 것이다.
250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남아 있는 정보는 이 정도가 전부이다. 특히, 고대 지중해 지역의 신들에 대한 언급과 묘사는 유대교의 등장 이후 지속적으로 왜곡되고 그 유물과 전통은 조직적으로 파괴되어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앙형태가 구체적인 교리의 차이를 넘어 적어도 청동기 시대부터 유래하여 지중해의 거의 모든 지역에 비슷한 형태를 띄며 유포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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