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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보물을 생각하며/아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

덩샤오핑 평전

덩샤오핑 평전
벤저민 양 지음/권기대 옮김
출처: 북 코스모스

 
왜 덩샤오핑인가
덩샤오핑은 92년의 긴 생애를 살며 더러는 공식적이고 더러는 그렇지 않은 여러 이름을 사용했지만, 지금 중국과 전 세계가 알고 있는 그의 이름은 바로 1920년대 말 공산주의 혁명에 가담할 때 택했던 이름이다. 중국어를 글자 그대로 옮기면 덩샤오핑(鄧小平)은 "작고 평범한 덩(鄧)씨"라는 뜻이다. 150센티미터를 간신히 넘는 키에 보통 60킬로그램이 채 안되었던 덩샤오핑의 체구는 아시아 표준으로 봐도 작았다. 평범하고 헐렁한 인민복으로 조그만 몸을 감싼 탓에 젊었을 때조차 당당한 풍채의 마오쩌둥(毛澤東)주석이나 준수한 용모의 저우언라이(周恩來)총리 등 몇몇 동료들에 필적할 수 없었다. 여기서 간단한 질문이 제기된다. "왜 덩샤오핑인가?" 대답 또한 간단하지만 아주 중요하다. 덩샤오핑은 중국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였고, 중국의 통치 정당은 중국 공산당이었고, 중국은 전 세계 토지 면적의 10분의 1을 차지했고, 전 세계 인구의 5분의 1을 갖고 있고, 조직화된 지구상 공산주의자들의 4분의 3을 차지한 중요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육십 년이 넘도록 중국 공산당에서 다양하고 역동적인 역할을 담당했고, 다른 어느 중국 공산당 지도자보다 긴 정치적 삶을 누렸다. 마오쩌둥은 이미 역사가 되었지만, 공산주의 중국의 마지막 이십여 년은 흔히 덩샤오핑 시대라고 불리며 '경제 개혁'과 '대외 개방'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덩샤오핑의 정책과 다른 요소들에 힘입어 중국 경제는 현기증 나는 속도로 성장해 왔고 일본과 미국 경제를 급속히 따라잡고 있다.

부전자전
덩의 아버지 덩원밍(鄧文明)은 1886년 농사와 수공을 업으로 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중국이 막 쇠퇴기에 접어들었을 때 자라났으며 제대로 자격을 갖춘 지역 유지들 가운데 한 명으로서 농촌 공동체의 제한된 틀 안에서 마을의 누구보다 더 활발하게 사회적 정신적 활동을 추구했다. 그는 성년이 되자 가로회(哥老會)에 가입하여 후에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동시에 오자교(五子敎)라는 종교의 열렬한 추종자이기도 했다. 덩원밍의 생활철학 또는 종교적 믿음은 여러 가지 종교의 교리에 덧붙여 개인과 가족의 세속적 삶을 점진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런 다음 가능하면 개인이 끈기있게 재주껏 노력하여 사회나 인류 전체를 개선한다는 윤리적 강령들이 결합된 것이었다. 이 부자가 공유한 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실용주의나 공리주의였으며 두 사람의 삶에서 그것이 적용하는 바는 저마다 달랐다.

덩샤오핑은 1904년 8월 22일 쓰촨(四川)성 광안(廣安)현의 파이팡(牌坊)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덩 씨 집은 마을 전체에서 가장 정교하게 지은 가옥이기도 했고, 가운데 있는 본채에는 방이 열두 칸이나 있었고, 양쪽으로 저마다 방이 다섯 칸씩 있는 별채가 날개처럼 서 있었다. 이 집은 말할 나위 없이 가문의 부와 특권을 상징했다. 덩의 유년기는 파이팡 마을, 곧 덩 씨 집안의 높은 벽돌담에 둘러싸인 세계에 국한되어 있었고,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일종의 취학 전 계발같은 것으로 가정교사에게 간단한 한자를 읽고 쓰게 개인 교습을 받았다. 1910년은 덩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해로서 그의 청년기에 여러 가지 영향을 미친다. 덩의 고향 스촨 성 전체가 엄청난 혁명(철도 보호 운동에 이어 이듬해 중국 전역에서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시작되었다)의 물결에 휩쓸린 때였고, 덩에게 어린 남동생이 생긴 때였으며, 정규 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최소 연령인 여섯 살이 되어 셰싱(協興)의 일반 소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때였다. 이후 5년간 셰싱에서 공부한 덩의 학교 성적은 그다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고, 너무 어린데다 몸집도 작아서 딴 아이들과 섞여 놀지도 못했다. 1915년 여름, 덩은 셰싱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더 많은 학문을 쌓기를 원한 부친의 뜻을 받아들여 광안(廣安)에 있는 중등학교에 다녔다. 광안의 중등학교는 서양식 이층 콘크리트 건물에 자리잡았으며, 수학, 지리, 역사, 과학, 음악, 미술, 체육에 이르기까지 거의 오늘날과 다를 바 없는 학과목을 제공하고 있었다. 덩은 집에서 농사일을 하느니 공부를 하는 편이 낫다고 친구들과 합의한 바 있고, 가능하다면 더 멀리까지 덩이 진출하도록 한 부친의 주선으로, 그의 아저씨 뻘이면서 아주 가까운 친구였던 샤오성(紹聖)과 함께 중등학교를 졸업하고 충칭(重慶)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 때, 프랑스에서 일하며 유학할 학생들을 위한 예비 학교가 신청자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자본가들이 만든 중국 공산주의자
제1차 세계대전 기간과 그 직후에도 프랑스는 노동력 부족으로 허덕이고 있었고 중국은 거대한 인구와 낮은 생활 수준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프랑스가 일꾼을 원하는 데 반해 중국에서는 유학생을 보내고 싶어했기에 양쪽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키기 위해 결국 '근면한 노동'과 '검약하는 공부'를 결합시킨 근공검학(勤工儉學)계획이 고안되었다. 1918년 해외유학을 위한 쓰촨(四川)성 최초의 예비학교가 설립되었고, 서양 정세에 호기심은 많았으나 아는 게 별로 없었던 덩은 샤오성(紹聖)과 함께 프랑스에 가서 공부하려고 충칭(重慶)예비학교에 들어갔다. 학기가 만료되었을 때 치른 자격 시험에 합격한 학생 육십 여 명이 근공검약 계획에 받아들여져 1919년 6월말 프랑스로 출발했다. 1919년과 1920년 사이 1,500명 이상의 중국 학생들이 프랑스에서 일과 공부를 병행했다. 간단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그 가운데 200명 정도가 국민당이나 공산당의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며, 스무 명 이상이 결국 공산당의 탁월한 지도자로 성장했다. 공부할 목적으로 프랑스에 갔다가 궁극적으로는 중국 정치 지도권으로 들어섰던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정말 기막힌 승률이었다.

파리에 도착한 1920년 10월에서 모스크바로 떠난 1926년 1월까지 덩이 프랑스에서 보낸 5년간은 대충 두 기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반기는 수단으로서의 노동과 목적으로서의 공부가 결합하는 근공검학 원래의 목표에 집착했던 기간이다. 그러나 프랑스와 기타 유럽 국가들은 1920년에 경제 불황으로 접어들었고,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게 되자 중국 내 근공검학 계획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덩은 근공검학이 더 이상 계속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함을 깨닫자 학문적 전망이 어두워지면서 정치적 이력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프랑스 체류 기간의 후반기, 즉 1923년 말에서 1926년 초까지 덩은 주로 파리에 살며 중국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하여 저우언라이(周恩來)와 함께 조직 기관지 <적광(赤光)>에서 일하면서 점차 정치 활동의 비중을 늘려갔다. 전반기는 '노동+학업'이었고 후반기는 '노동+정치'였던 것이다.

1924년 저우언라이가 고국에서의 혁명에 참여하기 위해 프랑스를 떠난 후, 고참들이 소련이나 고국으로 돌아가고 또 스스로 정열적으로 노력한 덕분에 덩은 실질적인 지도자 서클에 들어가게 된다. 덩은 <적광>에 짧은 글을 쓰기도 했고, 가장 활동적이고 두드러진 청년동맹 조직책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반서구적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경찰이 중국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밀착 조사를 시작하자 1926년 1월 덩과 동지들은 러시아로 떠났고 프랑스 내 중국 공산주의 운동은 그 후 사실상 죽어버렸다.

러시아에서 배우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내전과 외침에 항거하는 격심한 무력 투쟁 끝에 새로 출범한 소련 정부는 1921년 6월에 '동방대학'을 모스크바에 창설했다. 이는 동부의 소수 민족 거주 지역을 통제할 관리와 간부들을 양성하는 당 학교였으며 소수 민족 담당 차관이 이 대학의 총장을 겸임했다. 덩과 청년동맹 동지들은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중국 공산주의자 동료들에게 뜨거운 환영을 받고 얼마 후 동방대학에 들어갔다. 그는 동방대학에 들어가 몇 달간 공부하다가 푸종(傳鍾), 리줘란(李卓然)과 함께 전적으로 중국 학생들을 위해 설립된 학교 중산(中山)대학으로 옮겼다. 동방대학에서 가르쳤던 과목에 덧붙여 중산대학에서는 중국과 동아시아 혁명사를 가르치고 군사 훈련까지 시켰다. 프랑스에서 열등한 노동자 취급을 받던 중국 학생들은 모스크바에서 혁명 동지로서 동등한 대우를 받았으며 학교는 덩에게 중국 밖에서 지속적으로 교육받을 수 있는 시간을 제공했다. 덩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어법을 배웠고, 개별 구조이든 조직 구조이든 공산 혁명의 기초 지식을 어느 정도 습득했고, 나중에 밝혀지듯이 그것은 덩의 미래 정치 이력에서 꼭 필요한 것이었다.

1924년에서 1926년 사이에 중국에서는 소련의 직접 지원을 업은 국공합작(國共合作)전선이 물밀듯이 전진했다. 후일 북벌 또는 대혁명으로 불릴 사건이 곧 벌어질 참이었다. 1926년 말, 펑위샹(馮玉祥)의 요청에 따라 모스크바의 중국 공산당 지도층은 펑의 군대에서 근무할 첫 번째 그룹으로 덩을 포함한 공산주의자 이십여 명을 파견했다. 그러나, 덩이 펑위샹의 본부에 도착했을 때 국공 합작 전선은 이미 붕괴되었다. 펑은 자기 부대에 있던 공산당 대리인들을 모두 해고해 버리기로 결심하였고, 덩을 포함한 공산주의자들은 강제로 시안을 떠나게 되었다. 덩은 기차를 타고 당시 중국 공산당 중앙이 있던 우한(武漢)까지 갔다. 우한의 당의 지도 체제는 정치국 안에 새로 형성된 5인의 상임 위원회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그 다섯 중에 저우언라이, 리리산(李立山), 리웨이한(李維漢) 등은 모두 덩과 프랑스에서부터 알던 구면이었기에 덩은 당 중앙에서 직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1927년 10월부터 1929년 9월까지 덩은 상하이의 지하 당 중앙에서 직원 또는 서기로 일하면서 1928년초 모스크바 중산대학 동기로 오래 알고 지냈던 장시위안(張錫元)과 결혼했다. 모스크바에서의 교육은 공산주의 이론의 기초 지식을 제공했고, 상하이에서의 경험은 덩으로 하여금 당 지도부의 조직 기능과 개인적 관계에 익숙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불운한 광시 총독
국민당과 그 지도자 장제스(蔣介石)는 1928년 말까지 중국 내 모든 군벌들을 패주시키거나 개혁시키거나 회유시켜서 난징(南京)정부를 설립하여 합법성을 인정받았으나, 지역 군벌 사이의 끊임없는 내전과 더불어 농민들 사이에 농업 혁명에 직면하게 된다.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여러 공산당 요원들이 난닝(南寧)으로 파견되어 여러 공직을 재빨리 차지했고, 본부는 덩샤오핑을 광시(廣西)에 파견하여 이 지역 공산당 요원들의 무력 봉기에 협조시킬 것을 결정했다. 덩은 상하이를 떠나 광시로 보내져서 당 중앙의 지역 대표로서 광시 공산당 요원들과도 일하며, 당 중앙에서 파견한 총독처럼 행세하면서 곧바로 권위를 행사했다. 나아가 그는 제7,8군이 통합한 뒤 전 부대가 후난(湖南)으로 이동하여 집결하고, 공산당의 전국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제4군에 가담하도록 촉구하기도 했다. 이 스물 다섯 살짜리 총독은 정치 구호를 외치는 데는 능했지만 군사 작전을 수행하는 전문 지식과 경험은 좀 짧았고, 이것은 1930년 2월 제7, 8군이 패배를 당함에 있어 어느 정도 이유가 되었다. 홍군 제8군을 제7군과 통합시키기 위해 덩은 제8군 1여단을 직접 이끌고 쭤강(左江)을 향해 북쪽으로 갔으나 기습 공격을 당해 상당수의 사상자만 생겼다. 설상가상으로 덩이 쭤강에 이르렀을 때는 제7군 또한 전투에서 진 후 이미 떠나고 없었다. 1930년 6월에 덩은 전선위원회 서기 및 제7군 군사위원이란 직책을 맡게 되지만, 애초부터 덩이 주장한 광둥(廣東)공격이나 구이린(桂林) 공격은 너무나 대담해서 군사적으로 수행할 수 없는 작전이었으므로 실패하고 수천 명의 사상자만 냈다. 덩은 경험에서 교훈을 얻는 데 아주 민첩하여, 1931년, 제7군이 입은 엄청난 타격과 리리산(李立山)의 실각을 이유로 대도시 공격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부대가 북으로 이동할수록 날씨는 점점 더 추워져서 정치노선이나 군사 작전에 관계없이 그들의 첫번째 투쟁은 단순히 살아남는 것이었다. 덩은 충이(崇義)현에 부대를 남겨두고 작은 분대를 데리고 제바(傺浿)읍에 있던 당 요원과 접촉을 시도하다 돌아오는 길에 자기 부대가 또다시 치열한 전투 끝에 후퇴했음을 알게 된다. 수완 좋은 정치꾼인 덩은 자기 보호야말로 정치 생명과 정치 경력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위원회의 허락도 없이 자기 자신의 긴급한 결정에 따라 부대를 떠나 홍콩을 경유하여 상하이에 도착한다. 그러나 아내가 일 년 전에 세상을 떴다는 것과 몇 달 전 리리산은 재판을 받으러 모스크바로 끌려갔고 저우언라이도 권한이 크게 위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쨌건 제7군과 관련하여 덩이 스스로 세운 최초의 성과가 그의 정치 이력에서 비극적 실패였다는 데는 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장정
1931년 덩은 아진(阿金)이라고 하는 여성 공산당 요원과 함께 상하이에서 장시 중앙 소비에트로 파견되어 루이진(瑞金)에 도착하지만 제7군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중앙 소비에트 남부의 후이쉰안(會尋安) 중앙현 당서기에 임명되어 아진과 1932년 여름 후이창(會昌)에서 재혼한다. 1932년의 쉰우(尋鳥)사건(쉰우는 덩의 관할에 속한 현이자 후이쉰안 중앙현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공산당의 전반적 승리와는 대조적으로 쉰우만큼은 국민당 수중에 넘어갔기에 쉰우를 잃은 것은 기회주의적 실수라며 중앙현 당원 회의에서 이들은 크게 비난당했다)으로 1933년 덩은 당내 투쟁의 목표물이 되었다. 아내 아진이 단상으로 올라가 그의 죄목을 폭로하면서 모든 관계를 끊었고 1933년 5월 중국 공산당 장시 성 위원회는 덩과 세 명의 공범을 처벌하기로 결의했다. 덩은 당 내에서 가장 무거운 경고를 받고 즉시 모든 지도 권한을 박탈당했으나 저우언라이라는 후원자를 둔 데다 탁월한 타자 및 편집 기술까지 갖춘 덕택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다음 루이진으로 복귀하여 홍군 총정치국에서 일하게 된다.

장제스(蔣介石)는 1933년 11월에 제5차 포위 토벌전을 시작했고, 공산당 측에서는 코민테른 특사였던 오토 브라운(Otto Braun)과 보구(博古)가 전체 홍군을 지휘했다. 이들의 격렬한 접전 끝에 공산당은 제5차 반토벌(反圍剿)전쟁에 패배하여 장시 성 중앙 소비에트를 버리고 1934년 10월 서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했으며, 바로 이 후퇴가 결국에는 역사적인 대장정(長征)이 된다. 대장정이 시작될 즈음 덩은 <홍성(紅星)>편집장의 자리를 물려주고 저우언라이 휘하의 중앙사령부에 편입되었다가 당 중앙 서기장으로 임명된다. 1935년 1월 제5차 전투에서의 경험과 교훈을 평가하는 쭌이(遵義)현에서 열린 정치국 확대회의는 보구 및 브라운과 마오쩌둥이 대표하는 반대파 사이에서 치열한 권력 투쟁의 장이 되었고, 마오쩌둥과 덩과의 개인적 관계를 결정적으로 진전시켜 주기도 했다. 1935년 초 중앙 홍군은 수개월 동안 국민당과 접전을 벌였으나 전략적 성과가 없자, 양쯔 강을 건너 북으로 이동하여 쓰촨 성 서부에 있던 제4야전군과 합류했다. 여정은 험난했고 사상자도 허다했다. 덩은 몇 주일 동안 걸어서 행군해야 했다. 튼튼한 체격과 좋은 운 덕분에 덩은 1만 킬로미터가 넘는 대장정에서 부상이나 질병 없이 무사히 살아남았다. 대장정 후반기인 1936년 6월부터 10월 사이, 덩은 당과 홍군 본부를 떠나 제1군단에서 선전부 국장으로 일했고, 그 사이에 아진을 다시 만나 서로 받아들였다. 대장정의 진로는 나중에야 영광스러운 기록으로 남았을 뿐 당시에는 험난한 경험이었다.

금광이 된 전쟁터
1937년 9월 주더(朱德)와 런비스(任弼時)가 제8군 본대를 이끌고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산시(山四)성으로 향했을 때 덩도 그들을 따랐다. 이후 몇 달 동안 덩은 서류를 담당하는 중요한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제8군 사령부를 대신하여 마오(毛澤東)가 책임자로 있는 군사위원회와 장원텐(張聞天)이 책임지고 있던 당 중앙으로부터 오는 비밀 전보를 수령하는 한 사람이었다. 1938년 마오는 덩을 제129사단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자리에 앉혔는데, 이 직책으로 덩은 보통 정치 간부에서 공산당 군대의 3분의 1을 감시하는 사람이 되었다.1939년 덩은 다시 한번 전선에서 옌안(延安)으로 소환되어 정치국 확대회의에 참석했는데, 여기서 그는 두 달 이상 머물며 세번째로 줘린(卓林)이라는 여대생과 결혼하고, 당 중앙 지도층과 협의한 후에 귀대했다. 사전에 신중하게 준비한 제129사단은 1940년 국민당 장군들을 상대로 몇 차례 전투에서 승리했고, 이 승전으로 제129사단은 11만 대군을 자랑하는 부대로 컸고, 통제 구역도 총 인구가 800만이 넘는 70여 개 현으로 확장되었으며, 덩은 제129사단 정치위원뿐 아니라 타이항상(太行山) 항일 근거지의 당 서기장이라는 중요한 감투까지 쓰게 된다. 그리고 1940년 8월에서 12월까지 중국 북부에 소재한 모든 공산당 부대가 일본에 점령된 도시 및 철도에 일시 공격을 감행했던 소위 '백단대전(百團大戰)'에 덩은 적극 참여하지도 않았고 참여하지 못하도록 막지도 않으면서 교묘하게 사단의 군사적 성공이라는 영광을 함께 누리다가도 그 때문에 부정적인 정치적 결과가 생기면 비판을 회피해 나갔다.

1942년 옌안에서는 수정운동(修正運動)이 시작되어 왕밍(王明)과 러시아에서 귀환한 지도자들을 제거대상으로 당과 군 전체로 서서히 퍼져나갔다. 덩은 전투에 임했던 군사적 지위로 인해 보호되어 당내 분규가 격심했던 그 즈음 전장이 오히려 안전한 피난처였다. 어쨌든 기존 지도층은 숙청 당했고 덩의 지위는 자연스럽게 개선되었다. 1942년 말 공산당 중앙에 타이항(太行) 지국이 설립되고 덩이 제1서기로 임명되면서 그곳의 광활한 공산당 지역 내에서 덩은 군, 정부, 당의 첫 번째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1944년 초 태평양 전쟁에서 갈수록 패색이 뚜렷해진 일본은 베이징-광둥 철도를 따라 필사적으로 공격을 개시했고, 북쪽의 홍군은 농촌의 샛길을 따라 들어와 국민당군의 빈곳을 급속히 메꾸어 갔다. 덩의 모든 작전 지휘 아래 그들은 몇 차례 대담한 공격을 펼쳐 수백 개 소도시로부터 국민당 잔당과 친일 괴뢰 집단을 몰아내고 수천 개 마을에 그들의 조직을 확산시켰다. 중일전쟁이 막을 내리기 시작한 1945년 옌안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는 마오(毛澤東)와 공산당 전체에게 커다란 승리를 안겨주었고, 덩은 그의 탁월한 업적에 대한 보상과 동시에 마오의 각별한 호의로, 다수의 찬성으로 당 중앙위원회 고위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덩이 옌안에 체류할 때, 1945년 8월 일본 정부와 천황이 공식 항복했다. 마오의 첫째 반응은 일본군의 무기와 점령지를 인계받는 작업을 위해 장제스(蔣介石)와 다투는 일이었다. 양당은 내전을 종식하자는 구호를 걸고도 부지런히 내전을 준비해 왔고, 덩은 그 중에서도 가장 부지런한 사람이며, 열성적으로  내전을 주장하던 호전적인 공산당측 군사 지도자였다. 이 년에 걸친 치열한 내전 끝에 1948년 여름, 국민당 군대가 공격력을 상실하고 모든 전선에서 급속히 무너지고 있었고, 기념비적인 후이하이(淮海)전투(덩이 총전선 지휘위원회의 서기로 있는 제2,제3합동야전군은 두 달 동안 중앙군인 국민당 부대를 무려 55만이나 섬멸했다)에서 장제스의 군대는 양쯔 강 남쪽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당 정부는 완전히 생명력을 잃어, 장제스는 총통 직에서 하야해야 했고 리종런(李宗仁)이 총통 대행을 맡았다. 1949년 덩은 도강(渡江) 전투(양쯔 강을 건너 중국 북부와 중원을 완전히 공산당 수중에 떨어지게 한 전투)에서의 승리를 등에 업고, 9월 베이징에서 열린 정치자문회의에 참석하여 중앙정부 요원으로 선출되었다. 군사적 지위와 정치적 자산을 획득했다는 점에서 위험하게만 보이는 전쟁터가 덩에게는 오히려 금광이나 마찬가지였고, 덩은 이를 최대한 이용했다.

남서부의 제왕
1949년 10월, 중국 공산당 서남국(西南局)을 설립하자는 결정으로 당 중앙은 덩을 제1서기로 하여 서남국을 설립한다고 정식 선포했다. 당 중앙은 류보청(劉伯承)과 덩에게 제2야전군을 이끌고 중국 남서부 전역을 정복하는 임무를 내렸고, 그들은 이 임무를 빠르고 순조롭게 수행해 냈다. 본토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장제스는 잠시동안 충칭을 임시 수도로 삼고 중일 전쟁 때 성공한 것처럼 남서부를 최종 방어선으로 채택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으나 류-덩 부대가 충칭을 탈취함으로써 국민당 정부 인력과 생존 부대들은 타이완으로 옮겨 1949년 타이완 섬 타이베이(臺北)에서 정부 수립을 선포한다. 1949년 말까지 공산당은 티벳과 타이완과 동남 해안에서 좀 떨어진 몇 개 섬을 제외하고 중국 전역을 점령했으며 1949년 12월 제2야전군 사령부 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덩은 충칭에 입성하여 곧바로 시장 직을 맡았다. 덩을 "남서부의 제왕"이라고 불러도 그다지 과장이 아닐 만큼, 덩은 전 지역에 걸쳐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고, 제2야전군은 1949년 말부터 1950년 초까지 남서부 고원과 산악 지역에서 수없이 많은 소규모 전투를 치러 국민당 잔존 병력과 강도단을 성공리에 소탕했다. 1950년부터 1952년은 전후 복구와 재건의 시기였다. 덩은 농촌 지역 농업 개혁의 총책임을 맡아 토지가 없는 약 1억 명의 농민들을 지주로 바꾸어 놓으면서 남서 지구에서의 운동을 완료했으며, 1952년 여름 마오의 부름을 받아 베이징에서 일할 수 있게 됨으로써 구체적인 결실을 거두었다.

마오쩌둥과 함께 약진하다
마흔 여덟으로 동료들 대다수보다 젊고 능력이 출중한 덩은 베이징에 오자마자 공산당 정권 초기 중앙지도체제의 구조를 어렵잖게 파악했으며, 1953년부터 1955년 사이에 소위 가오-라오(라오수스-가오강)사건으로 덩에게 기회는 찾아왔다. 가오강(高岡) 뒤에 마오가 있기에, 라오수스(饒漱石)와 가오는 류사오치(劉少奇)를 끌어내리고 당정 구조를 갈아치우려고 시도했으나, 마지막에 마오가 류와 흥정하기 위해 베이징을 떠남으로써 가오와 라오수스는 류에 의해 성토되었다. 가오-라오의 숙청으로 인해 덩은 최고 권력을 향해 질주했고 마치 사다리를 타듯 죽죽 올라갔다. 1952년에서 1956년에 이르기까지 덩의 꾸준한 승진은 마오가 권위적인 영향력을 가졌다는 사실, 그 영향력을 덩이 재주껏 이용했다는 사실 등 주로 한두 가지 요소에 기인한다. 그리고 덩은 예전 전쟁 기간에 그랬던 것처럼 건설적인 업무가 아니라 내부 권력 투쟁을 통해 승진할 수 있었다.

마오는 흐루시초프를 한 번 만나기만 하면 곧이어 기상천외하고 대담한 조치를 중국에서 시도했다. 1957년 말 모스크바의 마오-흐루시초프 회담에 이어 '더 많이, 더 빨리, 더 좋게, 더 검소하게'라는 대약진 운동(大躍進 運動)의 총체적 구호가 터져나왔고, 1958년에는 인민공사(人民公社) 설립을 촉구함과 아울러 타이완 해협을 두고서 미국에 호전적 도전장을 던졌다. 실제로 덩과 마오의 협력은 1958년 대약진 운동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그 정점에 이르렀다. 덩은 여러 차례 마오의 대리인으로 행동했으며 마오조차 ‘이인자’나 ‘당 중앙 내 참모차장’ 들의 이름으로 그를 부르곤 했다. 하지만 마오의 권위와 정치 노선을 크게 존경했던 전쟁기간과 달리 이제 덩은 그 어느 때보다 막강한 마오의 권력을 여전히 존경하면서도 나무랄 데 없는 정책 입안자로서는 그를 더 이상 존경할 수 없었다. 믿기 힘든 대약진 운동과 그 결과로 따라온 "혹독한 3년"의 재앙은 마오에 대한 덩의 전반적 태도를 조금씩 바꾸어 놓게 된다.

반우익 분위기에 자극을 받아 잠시 되살아난 대약진 운동은 1960년 몇 달간 계속되지만, 경제 위기가 너무나 분명했을 뿐 아니라 너무나 극심해졌기 때문에 완전히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고 말았다. 1959년 “삼년대기근(三年大飢饉 )”이 시작되어 농민 3천만 명 이상이 굶어서 죽었던 것이다. 대약진 운동의 지나침이 없어지면 국가 경제는 정상 기능을 찾게 된다하여 1961년 마오는 고급 간부들을 모아 지나치게 급진적인 인민공사의 성격을 어느 정도 수정하고 농업 생산을 회복하자는 회의를 하고, 베이징을 떠나 남쪽에 머무르면서 다른 간부들로 하여금 경제 혼란을 해소하도록 맡겨 두었다. 경제 위기가 어느 정도 억제되는 대로 중국 전체는 부패하거나 ‘더럽혀진’ 간부들은 적절히 조사하여 단죄해야 한다는 ‘도시 내 사회주의 교육 운동’이라는 문제도 제기되었다. 계급 및 계급 투쟁을 강조한 마오와 경제적 관점에서 당 간부들을 판단한 류가 일치하지는 않았기에 사회주의 교육 운동의 있어 마오의 골칫거리는 류샤오치였다. 사회주의 교육 운동의 성격에 관한 마오의 논쟁 밑에는 류와 자신의 신뢰를 배신한 덩에 대한 분노가 깔려있었다. 이를 눈치채기 시작한 덩은 1863년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 관련하여 양측이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소련의 원칙에 동의한다는 회답을 보내고, 모스크바로 갔다. 그 목적은 대화나 협상이 아니라, 말싸움과 항의를 하는 것이었고, 덩의 그런 논쟁은 국제적이나 공적인 것이 아니라 마오를 즐겁게 하려는 덩의 개인적 욕망이었다.
문화 대혁명이라는 시련
1965년 상하이 <인민일보(人民日報)>는 「하이루이(海瑞)의 파직에 관해 새로이 쓰여진 역사극을 논평함」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의 제목만 보면 역사적 조사와 예술 공연에 대한 학술적 비평쯤으로 보이지만 실은 베이징 부시장 우한(吳含)을 공개적으로 지목하여 호되게 공격하는 상당히 정치적인 글이었다. 펑전(彭眞) 베이징 시장은 사전에 수도의 당 위원회에 통보하지 않고서 베이징 관리를 그토록 닦아세우는 글이 상하이 신문에 버젓이 오르는 것으로 봐서 그 뒤에는 이상한 배경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했고, 그 짐작은 맞아떨어졌다. 나중에 알려진 일은, 이 글이 발표되기 전 아홉 달에 걸쳐 마오 자신과 그의 부인 장칭(江靑)이 이 글을 작성하고 열한 차례나 정정하는 데 직접 관여했던 것이다. 우연인지, 같은 날 베이징에서는 양샹쿤(楊尙昆)이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판공실 부실장 자리에서 밀려났고, 나중에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뤄루이칭(羅瑞卿)을 대행해 양청우(楊靖宇가 임명되었다. 펑전은 중앙 정치위원회 화북국에서 류와 함께 일해왔고, 여러 해 동안 서기처에서 덩의 주요 참모였고, 부시장 우한은 덩의 브리지 게임 친구였기에, 류나 덩은 펑전을 깊이 동정했고, 이리하여 1965년 말과 1966년 초에 베이징 당 중앙과 상하이에 있던 마오 사이에 미묘한 불화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문화 대혁명 초기 단계에서 펑전은 마오가 깨뜨리기에 가장 힘들고 만만찮은 상대였으나 마오가 상하이에서 계속 압력을 증대시키자 펑전은 한층 더 벽에 몰리게 됐고, 류가 공무로 해외출장을 떠난 사이 저우와 덩까지도 마오를 지지한 이상 펑전의 운명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1969년 중․소 전쟁 때, 마오는 오직 자기 자신만이 전쟁을 선포하고 군대를 움직일 수 있다는 원칙을 린이 짓밟아 버리고 전국 비상 전투령 제1호를 선포하자 특히 분하게 여겼다. 또, 군사위원회의 린과 문혁 그룹의 장칭은 또 한 차례 당내 권력 투쟁에 휩싸이게 됐고, 린은 마오의 처벌대상이 되자 소련으로 망명을 시도했으나, 그가 탄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사망하게 된다. 정계에서 유배되어 남쪽에 떨어져 있던 덩은 1971년 린의 비행기 추락사망 소식을 듣고 마오에게 과거의 실수를 사죄하고 감상적인 편지를 썼고, 1973년 마오는 덩을 초조하게 기다리게 한 다음 비로소 2월 베이징으로 부른다.

돌아온 자본주의 추종자
1973년 3월 당 중앙 결의가 마침내 통과되어 당 조직 내에서 덩의 부총리 직위가 회복됐다. 그의 복권은 저우총리가 아니라 마오주석 덕택이었다. 4월 중순부터 덩은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냈으며 대부분은 외빈을 접견하거나 경축일 행사에 나가거나 회의에서 환영사를 하고 장례식에 참석하는 일이었다. 이 기간은 마오가 덩을 다시 훈련시키고 고위 지도부에 적합한지 다시 시험한 때였던 것이다. 덩의 시험 기간은 끝났다. 1973년 12월 마오는 정치국과 중앙군사위원회에 덩을 포함시키자고 제안했고 덩을 급속히 승진시켰다.

1974년 덩은 중국 대표단을 이끌고 뉴욕 시에서 열린 국제 연합 총회 특별회의에 참석하여 40분동안 연설하면서 광범위한 사안 '3개 세계론'을 언급했다. 덩은 오늘날 지구가 세 가지 세계로 나뉘어 있다고 주장했다. 첫째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초강대국이고, 두 번째 세계는 서구 제국이나 일본 같은 산업 선진국을 의미하며, 세 번째 세계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지의 미개발 국가 또는 개발도상국가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덩은 중국이 이 세 번째 세계에 속하며 언제나 이 나라들을 지지할 것이라고 했다. 또 중국이 그럴 수 있는 잠재력이 있음에도 절대로 또 하나의 강대국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3개 세계론'은 국제 공산주의 규범내에서 가장 큰 공헌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용(龍)의 해
1976년은 용의 해였고, 중국에서 용은 종종 자연재해와 인재(人災)를 상징한다.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베이징 병원에서 세상을 떴다. 저우의 죽음으로 덩의 직위를 빼앗아 가려는 급진자들을 가로막았던 장애물이 제거된 것도 사실이다. 주석도 총리도 없이 정부를 그냥 둘 수 없었던 마오는 덩을 점찍어 둔 것이 벌써 두 해 전의 일이므로 계승시키는 데 문제될 일을 없었지만, 놀랍게도 급진적인 장춘차오(張春橋)와 온건한 덩을 놓고 선택해야 했던 마오는 막판에 가서 정치색이 없는 화궈펑(華國鋒)을 총리 서리에 임명하고 만다.

4월 5일은 중국인들이 전통적으로 죽은 조상들을 기리고 경의를 표하는 청명절(淸明節)이다. 그날 인민영웅기념관의 저우를 위한 수천 다발의 꽃으로 인해 베이징 정부는 충격을 받았고 우더(吳德) 시장은 화환들을 모두 없애라고 명령했다. 이리하여 죽은 자를 추모하는 일이 산 자에 대한 시위로 변해 버렸고, 군중과 경찰의 대치는 폭동으로 이어졌다. 이 명절 행사가 ‘4․5사건’으로 변했으며 덩의 정치적 운명을 깡그리 뒤집어 놓고 만다. 정치국은 비상 회의를 소집했고 화궈펑은 어쩔 줄 몰랐고 급진파들은 들떴으며 이 회의는 덩을 군중 폭동의 유일한 선동자로 비판할 것을 의결했다. 4월 7일 마오의 지시에 따라 덩의 당 내외에서의 지위는 일체 박탈됐고, 화궈펑은 총리 겸 당 중앙 제1부주석으로 임명됐다.

용의 해 7월 탕산(唐山)에서 극심한 지진이 발생했고, 8월 쓰촨(四川)에서는 리히터 규모 7.2의 지진이 일어났고, 베이징-정저우(鄭州)노선의 열차 사고가 다반사로 일어나 불과 몇 달 사이에 여든 건에 이르렀다. 9월 9일 이처럼 유별난 상황에서 마오쩌둥은 죽었다.

다시 정상을 향하여
덩이 1976년 내내 베이징에 머무르는 동안 급진파들이 몰락했고, 그들의 주적이자 희생자였던 덩을 구해주는 것은 당연하고 논리적인 일이 되었다. 1977년 저우언라이 서거 1주년 기념일에는 1백만 명 이상이 톈안먼 광장에 모여 전 총리를 애도하고 일부 급진파를 비판했으며 덩의 즉각적인 복귀를 요구하는 구호를 외쳤다. 전체적으로 덩의 귀환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하나의 유행이 되었고, 화궈펑과 추종자들도 이 추세를 거부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1978년 덩은 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주석에 당선되었고, 예젠잉(葉劍英)은 전국인민대표대회 주석에 임명된다. 보이보(薄一波), 펑전(彭眞), 양상쿤(楊尙昆) 같은 덩의 예전 동료와 부하들도 당 지도부로 복귀됐고, 천윈(陳雲)은 당 부주석 겸 기율검사위원회 주석에, 후야오방(胡耀邦)은 당 총서기에 각각 임명되었다.

1979년 덩은 두번째로 미국을 방문하여 지미 카터와 그 자리에서 베트남 문제를 정면으로 언급했고 귀국하자마자 중월 전쟁을 일으켰다. 중월 전쟁은 중국군의 취약점과 상급 명령 체계의 무능만 노출시킨 꼴이었으나 정치적으로는 중국의 커다란 승리였으며 정치인으로서 덩에게는 더더욱 값진 승리였다. 덩은 최고 권력을 향한 곧은 걸음을 멈추지 않아, 1979년 덩이 직접 인도하는 가운데 1976년 4.5사건, 1966년의 문화 대혁명, 1959년의 펑더화이(彭德懷)비판 운동 등의 판결은 하나씩 뒤집혔다. 그 결과 정치 운동의 희생자들도 하나씩 누명을 벗고 당과 정부 내 요직으로 복권되었고 옛 간부들이 복권은 새 지도자들의 축출을 뜻했다. 화궈펑은 조금씩 최고 권력을 빼앗겼고, 덩이 점차 그를 대체하여 나갔다.

절정에 이른 권력
훠궈펑을 밀어내고 최고 권력을 되찾게 되자 덩은 정작 지도자의 자리를 거부했다. 그는 공식 직함보다 실질적 권력에 더 신경을 썼고, 비개인적 정책 사안 또는 공산당과 중국을 위해 좋다고 생각하는 일에 관심이 높았다. 1981년 후야오방이 화궈펑 대신 주석에 선임되고 덩이나 예젠잉, 천윈, 하궈펑은 편리하게도 당 중앙 부주석 자리로 물러앉았다. 그러나 1982년 덩의 지시로, 전통적인 당 주석 및 부주석 자리는 철폐되었고, 후야오방이 총서기로 재임명되었다. 1980년대 초에 이르러 중국 최고 지도자로서 덩의 입지는 완벽하게 구축되었고, 당 총서기 후야오방과 정부 총리 자오쯔양(趙紫陽)은 모두 그가 총애하는 부하로서 서열이나 권위 면에서 덩과는 감히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1982년 제12차 전국대표대회는 인력 배치나 정책 노선 면에서 덩이 최고 권력을 최종적으로 확립하는 계기였다. 덩은 여기서 '타이완 통합', '초강대국 패권주의에 대한 반대', '경제재건'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덩의 '농업생산책임제'라는 농촌 개혁 정책이 중국의 농업 생산이나 농촌 전반에 미친 영향은 그야말로 놀랄 만해서, 농민들의 식생활 수준은 엄청나게 개선되었다. 경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고, 도시 산업 개혁도 대단히 유망했고, 미국과의 관계는 전에 없이 최고의 수준이었고, 홍콩 문제로 영국마저 코를 납작하게 눌러줬다. 1984년 덩은 중앙 권력을 완전히 통제하기에 이르렀고 어느 누구도 그의 막강한 권위에 도전할 수 없었다. 그의 명성이 절정에 이른 한 해이다.

1984년까지 숨겨져 왔던 온갖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이념적 문제들이 1985년과 86년 사이에 점차 불거져 나왔다. 덩이 늘 자랑해 왔던 농촌 개혁조차 생각했던 것만큼 부드럽게 진행되지 못했고, 도시 개혁은 훨씬 더 어려운 일로 판명되었다. 후야오방은 비록 정식 교육도 모자라고 섬세한 성격도 아니었지만, 솔직하고 곧은 성격의 소유자라서 덩은 바로 이런 점을 좋아했다. 그러나 일단 총서기 자리에 올라 대중이 세세히 지켜보게 되자 후야오방은 실수를 많이 저질렀다. 후야오방을 조롱하고 비방하는 소문은 끊이지 않았고, 덩은 후야오방의 거친 매너와 조악한 스타일을 싫어하게 되어, 후야오방은 해고되고 덩의 추천으로 자오쯔양이 총서기 서리에 임명되었다. 자오쯔양은 공직을 수행하는데 영리하고 신중했으며 덩의 개혁 정책에도 충성을 다했고, 수시로 덩에게 보고했으며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에 관해 덩의 지시를 구했다.

톈안먼(天安門)의 비극
1989년 4월, 후야오방(胡耀邦)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기폭제가 되어, 팡리즈(方勵之) 등 지식인을 중심으로, 후야오방의 명예회복과 민주적 선거, 정치범 석방, 리펑과 기타 보수파들의 파면 등 광범위한 문제들을 요구하는 시위가 톈안먼 광장에서 계속되었다. 5월 16일 덩과 고르바초프의 회담이 회당 안에서 진행되는 가운데 바깥 톈안먼 광장에서는 성난 시위대가 있었다. 5월17일 저녁 당,정,군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리펑(李鵬)은 국무원의 이름으로 베이징 전역에 정식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령에 반대한 자오쯔양은 정치적 고통과 신병을 이유로 사직할 것을 허락해 달라고 덩에게 요청했다. 드디어 6월 3일 밤 베이징에 군은 입성했고, 군사 행동은 6월 4일 새벽까지 몇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그것은 대학살이었고, 소요는 종료되었다. 23일과 24일, 4중전회(공산당 중앙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4中全會)에서 덩은 리펑이나 차오스(喬石)가 아니라 장쩌민(江澤民)을 당 총서기로 선출하고 임명했다. 두 달 후 덩은 마지막 직위인 군사위원회 주석 직에서 물러나 장쩌민이 그의 자리를 승계하도록 추천했다.

공식 은퇴 이후 덩은 보통 가까운 가족이나 친척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인사 문제나 국제 정책에 관한 한 실무자들이 여전히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덩의 실질적 지도력은 이미 사라졌다. 1993년 말부터 1994년 초 사이에 덩은 일본 천황이나 영국 여왕처럼 점차 상징적인 인물로 변해갔고, 덩의 국위는 한없이 올라갔지만 정치적 권한은 한없이 추락했다. 1997년 2월 사망했을 때 덩샤오핑은 정략가에서 정치가로 진화해 있었다. 우리는 이제 덩의 말을 들을 수 없지만 그의 이념은 살아남을 것이다.

덩샤오핑과 중국의 21세기
아흔을 넘게 산 덩이 내딛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은 평범했지만 결과는 굉장했다. 모든 역사적 실책과 정치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덩은 위대한 정치가로 기억될 것이며, 최초이자 가장 결정적으로 경제 근대화를 이룩한 중국의 통치자로 기억될 것이다. 데이비드 굿먼의 말을 빌리면, 1970년대 이후 중국의 경제 성장을 단 한 사람의 공으로 돌리면 그는 바로 덩샤오핑일 것이다. 덩이 통치했던 20년 동안 중국의 국민 총생산은 연 평균 10퍼센트씩 성장했고, 동아시아의 이 큰 용은 빠른 속도로 세계 제3의 경제 대국에 다가가고 있다.  중국과 관련하여 최선의 상황을 만들려면, 중국이 개혁 개방이라는 덩샤오핑주의를 따라 경제 성장을 계속 추진토록 하며, 공산주의 중국이 온갖 모순과 재건으로 가득한 진화의 길을 따라가도록 하는 것이다. 
원본: 덩샤오핑 평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