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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보물을 생각하며/아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

이책을 읽기를 바란다,

필사적 교육열이 인도경제 주요한 성장동력”
인도의 명문 푸네 대학(University of Pune)의 나렌드라 자다브(Narendra Jadhav·54) 총장이 서울에 왔다. 자다브 총장은 인도 중앙은행 수석 경제 보좌관을 지냈다. 인도 언론은 그를 ‘대통령감’으로 꼽는다. 그러나 이 남자는 천출(賤出)이다. 아버지가 종이었다.

13일 서울 이태원의 한 인도 식당에서 자다브 총장과 마주 앉았다. 그는 “우리 아버지처럼 카스트제도 밑에서 오랫동안 억눌린 천민(賤民)들은 결사적으로 자녀를 교육시킨다”며 “위로 치받고 올라가려는 이들의 의지가 인도 경제의 주요 성장 동력 중 하나”라고 말했다.

사실 천민도 보통 천민이 아니었다. 카스트제도는 브라만(승려)·크샤트리아(왕족·귀족)·바이샤(상인)·수드라(노예) 등 카스트 4계급으로 구성된다. 자다브 총장이 태어난 ‘마하르’ 일족은 아예 카스트 4계급에 들지 못하는 ‘아웃 카스트’다. 살갗만 스쳐도 주위를 오염시킨다는 ‘불가촉(不可觸) 천민’이다.






자다브 총장이 속한 마하르 일족은 수천 년 동안 대대로 마을 변두리에 살며 주민들 허드렛일과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마을 전체의 종’이 되는 대가로 그들은 죽은 가축의 가죽과 고기를 얻어먹고 살았다. 힌두교 사제들은 일족이 전생에 나쁜 일을 잔뜩 저질러 현생에 마하르로 태어났다고 말했다.

자다브 총장의 아버지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밥 먹을 틈도 안 주고 부역을 시키는 경찰 서장에게 대들었다가 매를 맞은 밤, 아버지는 고향을 등지고 대처 뭄바이로 밤도망을 갔다. 철도회사, 성냥공장, 세탁소, 공사판을 돌며 닥치는 대로 막노동을 했고, 그 품삯을 모아 4남2녀를 가르쳤다. 섬유 공장 절단기에 손이 끼여 엄지손가락이 잘려 나간 날도, 딱 하루 저녁 쉬고 이튿날 다시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불가촉 천민은 전체 인도 인구의 16%인 1억6500만명이다. 오지에 사는 원시부족과 함께 인도의 최하류 계층이다. 이 둘을 합친 숫자가 전체 인구의 27%다. 자다브 총장은 “푸네 대학 전교생의 30%가 불가촉 천민과 원시부족 출신”이라고 말했다. 카스트제도가 법적으로 폐지된 것은 1950년의 일이다. 그 전엔 불가촉 천민과 원시부족은 아예 학교에 입학할 권리가 없었다. 딱 반세기 만에 불가촉 천민과 원시부족은 인구 비율에 걸맞은 대학생을 생산해냈다.

기자를 만난 그는 막 한국어판이 나온 자기 책 ‘신도 버린 사람들’(김영사)을 펼쳐 들었다. 이 책은 자다브 가족의 3대에 걸친 눈물겨운 신분 상승기다.

자다브 총장의 아버지는 한평생 “노동과 자녀 교육이 나의 종교”라고 되뇌며 살았다(229쪽). 장남을 학교에 보낼 때, 교장이 “천민은 안 받는다”고 입학을 거절했다. 아버지는 무작정 교장실에 드러누워 단식 농성을 했다. 자다브 총장은 “물러날 곳이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한평생 상처를 받아도 무작정 앞으로 나아갔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열성으로 자다브 총장은 1986년 미국 인디애나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다른 인도 유학생들이 “천출이라고 괄시받을 텐데 뭐 하러 귀국 하냐” “가난한 조국에 돌아가지 말고 미국에서 돈 많이 벌며 편히 살라”고 말렸다.

“오라는 직장은 15군데나 있었어요. 그렇지만 나는 돈 많이 벌고 편히 살고 싶지 않았어요. 내겐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지요. 편견과 싸우고, 지금껏 남이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는 ‘롤 모델’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억대 연봉을 받는 인도 중앙은행 수석 경제보좌관을 거쳐 지난해 명문 푸네 대학의 총장이 됐다. 미국 명문대를 졸업한 자다브 총장의 아들(27)과 딸(22)은 아버지에게 붙은 ‘천민 학자’라는 별명을 오히려 자랑스러워 한다. 불가촉 천민으로서 인도 최고의 경제학자가 됐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자다브 총장의 아버지는 1989년 8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막내 자다브 총장이 경제학 박사가 된 지 3년 만의 일이었다. 아버지의 유품에서 깨알 같은 글씨가 적힌 육필 원고뭉치가 나왔다. 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아버지가 말년에 글을 익혀 자기 인생을 정리한 원고였다. 이 원고를 바탕으로 자다브 총장이 가족사를 재구성했다. 이 책은 1993년 인도에서 처음 출간된 뒤, 17개 언어로 번역됐다.

자다브 총장은 “카스트제도는 인도에만 있는 제도니까 남의 일이라고 느껴지기 쉽지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사실 좀 더 보편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당신이 장애물을 넘어야 할 때, 그 장애물이 엄청나게 크고 높다고 지레 짐작하지 마세요. 당장은 아득해 보여도 꿈은 꼭 이뤄집니다. 불타는 의지와 죽도록 일할 각오만 있으면.”

[김수혜 기자 goodluck@chosun.com]
[ 기사제공 ]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