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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에 관하여/성경자료 모음

[스크랩] 바리사이의 기원과 역사

바리사이의 기원과 역사 

 

 글 이은영

 

 


예수 당시에 가장 많은 지지층을 형성했었던 종파는 단연 바리사이들이다. 그리고 바리사이의 성경해석이나 구전 율법 전통 해석은 오늘날까지 유다이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쳐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다소 복잡하기는 하지만 바리사이들의 기원과 역사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고자 한다.

 


때는 바빌론 포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 전 539년,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점령한다. 기원전 537년에 키루스 대왕은 포로로 있던 유다인들이 유다 땅으로 귀환해 성전을 짓도록 허락해 준다. 성전이 기원 전 515년에 완공되지만 키루스 대왕은 왕을 세울 수 있는 군주제를 허락하지 않고 대사제가 지배적인 권위를 갖도록 한다(에즈라기 1, 2장 참조). 왕권의 견제를 받지 않게 되자 성전의 권위는 극대화된다. 이 때 사두가이들이 출현하게 되는데, 이들은 사제 그룹과 고위 엘리트 층과 연합된 관료지배층이었다. 비록 외국의 후원 아래 제 2차 성전이 건축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성전이 그 자체로서의 정통성을 갖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이 제기 되었다. 이에 대한 의문은 결국 다양한 종파들이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종파들은 각기 자신들이 주장하는 사상만이 유일한 권위를 갖고 유다이즘을 대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다른 종파 그룹과 맺어지는 사회적 친교, 가장 전형적인 예를 든다면, 즉 그들은 결혼을 기피했다.

 

 

이들 가운데 그 당시 비교적 새로운 권력 집단으로 부상한 서기관(Scribes)들과 현자(Sages)들이 바리사이들로 불린다. 바리사이(Pharisee)의 어원은 히브리어 “파루쉬( ???? , parush)”에서 왔으며, 그 뜻은 “분리되다, 구별되다(separated)”이다.

 


아마 이들은 헬레니즘 문화를 배척하거나 하스모니아 왕조에서의 사두가이들의 권력을 반대했던 분파로 보인다. 그리고 이들은 율법 학자 에즈라와 원로들을 추종하던 사람들이었다. 바빌론 포로 후기에 속하는 이 시기는 제 2차 성전 건축뿐만 아니라 산헤드린 공회에 의해 정경화된 히브리 성서인 타아낙(Tanakh)이 편집된 때였다. 그리고 토라(Torah)가 문서 가설에 의해 개정되었다. 비록 사제들이 성전과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을지라도 토라를 연구하는 일은 서기관들과 현자(“라삐, rabbi, 나의 선생님”으로 불림)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이들에 의해 개정된 토라는 왕국 시대의 성서 독서 전통에 따라 시장이 서는 날에 공적으로 읽혀졌다. 현자들은 유다나 이스라엘 왕국에서 활동했었던 예언자들의 후예였고, 시나이 산에서 받은 “거룩한 문서(Holy Writ)”즉 구전 성서전승을 유지하고 발달시켜온 이들이었다.

 


바리사이들은 그들 스스로 사두가이들의 최고 반대 세력으로 생각했다. 이 두 그룹들 간에 논쟁들이 여러 상황 아래에서 일어났지만 본격적으로 깊은 골이 형성되는 때는 헬레니즘 시기(기원 전332-152 년)였다. 왜냐하면 이 기간 동안에 유다인들이 새로운 정치적 국면을 맞이했고 거대한문화적 충돌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 두 종파들은 대략 네 가지 면에서 첨예한 갈등을 빗었다. 첫째는 부자와 가난한 이들의 계급 논쟁이었고, 둘째는 문화적 갈등이었는데, 헬레니즘 문화를 옹호하는 이들(사두가이)과 이에 대항하는 이들(바리사이)이었다. 세 번째는 성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들과 성전보다는 모세 율법과 예언자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이들의 종교 직무에 관한 갈등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들은 토라를 어떻게 유다인들의 생활에 적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성경 해석의 차이로 논쟁을 벌였다.

 


사두가이들은 성경(Tanakh)이나 율법(Torah)에 쓰여진 문자 그대로 적용시켜야 한다고 믿었고, 반면에 바리사이들은 성문화된 성경이나 율법 이외에 라삐적 해석을 덧붙여 적용시켰다. 이 두 종파를 일반적으로 정의하자면 사두가이들은 보수적, 관료적 지배 계층이었고, 이에 비하여 바리사이들은 절충 주의자였고, 대중적이고 좀 더 민주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유다 율법과 전통에 대한 집착이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바리사이들이 유다 율법의 가장 정확한 해석자였고 전문가였다고 말하고 있다.

 

 


바리사이들이 본격적으로 언제 정치 집단으로 등장했는지는 잘 알려 있지 않으나 요세푸스는 그들을 유다 마카베오의 계승자였던 요나탄(기원전 160년경)과 연관시키고 있다(유대 고대사, xiii. 5, 9). 하스모니아 왕조 시대에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은 주로 정치적 당파로 활약했다고 한다. 바리사이들은 알렉산더 얀네우스(기원 전 103-76년) 왕에게 왕과 대사제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응으로 얀네우스는 공식적으로 사두가이들을 옹호하며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면서 성전에서 제사 의식을 거행했다. 그의 이런 행동은 성전 안에서의 폭동을 일으켰고, 시민 전쟁이 일어나 바리사이들을 과도하게 진압함으로 많은 피를 흘리게 했다. 얀네우스는 그의 임종 자리에서 두 당파가 화해하도록 요청했다. 얀네우스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의 과부 살로메 알렉산드라(기원 전 76-67년)였다. 알렉산드라의 남자 형제인 시몬 벤 쉐타는 바리사이들을 이끄는 지도자였다. 그래서 그녀는 바리사이들에게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이런 호의에 힘입어 그녀의 재위 기간 동안 바리사이들은 산헤드린에서 정치적으로 큰 영향권을 행사하였다. 또한 바리사이들은 일반 평민들의 전반적인 삶에 강한 영향을 끼쳤고, 유다 율법의 규범척도를 재는 권위를 갖게 되었다. 알렉산드라의 말년에 장남 히루카누스는 바리사이들을 옹호했고, 그녀의 차남 아리스토불루스는 사두가이들을 후원했다. 이 두 형제들의 갈등은 시민 전쟁 중에 극에 달았지만 로마 장군 폼페이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하스모니아 왕가가 종말을 맺고, 유다 역사에서 로마의 시대가 열린다(기원전 63년).

 

 


필자가 이스라엘에서 살면서 보람을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국 교민을 성지에서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해외 교민들이 살고 있는 그 나라에서 갖는 애환과 고통을 나누며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순간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 감격스럽다. 문화와 관습 등 모든 것이 다른 타국에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크나큰 스트레스로 다가 오기 때문일 것이다. 먹고 살기에 바빠 자녀들과의 대화 시간조차 갖기 힘든 삶, 그래서 자녀들은 그 나라 교육을 받고 언어에 익숙해져 부모와의 의사소통의 부재로 관계가 단절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2세들은 자연스럽게 그 나라의 시민으로 그 문화에 동화되어 살아갈 것이다. 물론 한국 문화를 어느 정도 알고 익숙해져 있겠지만 그 다음 세대로 그리고 그 다음 세대로 내려 갈수록 자연히 잊혀져 갈 것이다. 만일 한인 공동체가 계속 공존하고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시켜 주지 않는다면 말이다.

 


고대에 출현했던 민족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예는 수없이 많지 않은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협하고 그 당시에 뛰어난 문화를 갖고 있었던 필리스타인 사람들이 가장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제2차 성전이 무너진 후 유다인들은 2천 년간 여러 나라에서 어떻게 그들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살아 왔을까? 그들이 야훼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며 선민 의식을 갖고 살아오도록 지탱해 준 힘의 한 가운데에는 바리사이인들의 후예인 라삐들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호에 이어 이번 호에는 로마시대부터 제 2차 성전 멸망 시기까지 바리사이인들의 역사와 사상의 흐름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바리사이인들은 폼페이가 성전산을 점령하자 하스모니아 왕조를 폐지시키고 바빌론 포로기 이전 왕국 시대의 사제직을 회복해 줄 것을 요청했다 (유세프스 플레비우스, 유대 고대사, xiv. 3. 2). 그들은 폼페이가 성전을 더럽힌 것을 사두가이들이 통치를 잘못한 것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으로 생각했다. 폼페이는 하스모니아 왕조를 더 이상 지속시키지 못하게 하고 히루카누스 왕이 가졌던 대사제의 지위는 인정해 주었지만 왕보다도 낮은 지위인 한 지방의 지도자로 세웠다.

 


그리고 6년 후에는 그의 지위를 아주 박탈해 버리고 유대아를 시리아의 속국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유대아 땅은 이두메아의 영주이며 헤로데 대왕의 아버지인 안티파테르에 의해 다스려졌다. 후에 안티파테르의 아들 파사엘(Phasael)은 유대아 땅을 다스리고, 다른 아들인 헤로데(Herod the Great)는 갈릴래아를 다스렸다. 헤로데는 마르크 안토니우스의 후원으로 로마의 원로원에서 인정을 받아 유대아의 왕이 된다(기원전 37년). 사두가이들과의 대립으로 인해 헤로데는 오히려 바리사이들에게 호의를 베풀었으나 (유대 고대사, xiv.9.4; xv.1. 1; 10. 4; 11. 5-6), 유다인들에게 로마의 꼭두각시로 인식되어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성전을 수리하고 확장을 해 주었지만 그의 가족에게 행한 잔인한 행동과 하스모니아 왕조에 대한 비우호적인 대우로 인기를 잃고 말았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그를 적대시하였으므로 헤로데 왕의 미움을 받아 결국 많은 이들이 그의 잔인성과 포악함에 희생되고 말았다(유대 고대사, xvii. 2. 4; 6. 2-4).

 

기원 전 57년에 로마의 총독 가비누스는 산헤드린(Sanhedrins, or councils)을 조직해 유다인 내부의 문제들을 처리하도록 했다. 산헤드린은 대사제를 중심으로 71명의 원로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유다 법을 해석하고 주로 제의식에 연관된 문제들을 처리했다. 그들의 특별한 권위들은 로마의 정책에 따라 여러 면에서 힘을 발휘하였다. 산헤드린의 주 구성원들은 대부분 사두가이들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로마시대에 이들은 정치 당파라기보다는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하나의 종파에 불과한 그룹이 되었다. 바리사이들도 역시 정치에 관여를 하기보다는 연구하고 가르치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하느님을 예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중적인 인기와 존경을 받고 민중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신학적 견해는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첫째는 탈출기 19, 3-6; 2 마카베오 2, 17의 “이스라엘 자손들”에 관한 해석상에서의 차이이다. 사두가이들은 자신들이 모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선택된 사제들만이라고 국한시킨 반면, 바리사이들은 토라에서 명령한 율법이 모든 유다인들에게 사제적 생활을 하도록 요청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토라의 율법은 모든 일상 생활에서 사제들뿐만 아니라 전 이스라엘 백성들도 지켜야 한다고 확대시켰다. 둘째로 바리사이들은 토라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받은 성문화된 “모세 오경(Written Torah)”이고, 다른 하나는 모세가 구전으로 받은 것을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구전 토라(Oral Torah)”가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모세 오경 자체로는 완벽하게 해석이 되지 않으므로 구전 토라를 통해 더 명확이 설명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구전 토라는 여러 차례 분석과 해석 비평을 거쳐서 후에 탈무드로 집성이 된다. 마지막으로 사두가이들과는 다르게 그들은 메시아가 오면 죽은 이들이 부활할 것인데 육신이 실제로 부활할 것이라고 믿었다.

 

 


기원 후 66년부터 유다인들은 로마에 본격적으로 반항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사제들이 바리사이들과 함께 폭동을 막아 보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카이사리아에서 이방인들이 유다인들의 회당을 모독하면서 결국 유대 대 항쟁으로 이어졌다. 기원 후 70년 로마에 의해 성전이 무너지고 유다인들은 결코 회복될 수 없는 성전과 나라를 잃는 고통을 경험해야 했다.

 


성전이 무너지면서 성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사두가이들이 사라지고, 에쎄느 사람들도 68년에 로마에 의해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성전에 남아끝까지 항쟁하다가 마싸다로 피신해 3년간 저항을 하면서 버틴 열혈당원들도 결국 자결로 그들의 끝을 맺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을 이끌었던 유명한 나지 요하난 벤 자카이(Nazi Yohanan ben Zakkai)는 산헤드린을 야브네로 옮긴다. 그곳에서 율법 학교를 세우고 그 정신을 계승시킨다. 라삐들은 사제들에게 바쳤던 십일조와 성전에 바쳤던 희생 제물 대신 구제할 것을 가르치고, 모든 유다인들은 자기가 속한 지역의 회당에서 토라를 자손들에게 가르치고 그 정신을 이어가도록 한다.

 


제 1차 성전 멸망 이후 바빌론 포로기에 회당(Beit Knesset)에서 유다인들이 기도와 회합을 가졌다. 그리고 학교(Beit Midrash)도 유다인들이 토라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회당 못지 않게 중요하였다. 에즈라 시대에 제 2차 성전이 건축되면서 성전은 유다인들의 종교 생활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러나 회당과 율법 학교도 성전보다는 못하지만 그에 보충적인 기관으로서 유다인들의 생활에도 중요했다. 더구나 타국의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던 지역에서의 회당은 그들에게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정기적으로 드릴 수 없었던 유다인들은 희생 제사 대신 회당에 모여 아침, 오후, 저녁 기도를 바쳤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 화요일, 그리고 안식일에 에즈라에 의해 제정된 주간에 읽혀질 토라를 회당에서 공식적으로 낭독을 했다(느헤 8, 1-18). 그리고 성전이 무너진 후에 회당의 역할은 더욱더 중요해졌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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