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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주시는 하나님/성도의 생활

[스크랩] 성경에 건물 교회는 없다!

성경에 건물교회는 없다.

 

온 국민이 아파트 사고팔기에만 정신이 팔려있던 시절이 있었다. 1966년 제 3한강교 건설(한남대교)을 시작으로 강남개발을 통한 아파트 투기가 그 시발점이었다. 표면적인 개발 이유는 서울 도시 인구 과밀 억제와 혹시라도 한국 전쟁이 다시 발발할 경우, 6.25 당시처럼 서울시민이 피난가지 못했던 상황의 재연을 피하기 위함이라는 포장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1968년 착공된 경부고속도로 주변 영동지역 400만평을 구획정리하면서, 당시 실세였던 박종규, 김종필, 김정렴 등의 배후지원으로, 서울시 도시계획 실무 책임자였던 윤진우 과장이 박정희 대통령의 대선자금 마련을 위해 강남개발과 부동산투기를 동시에 계획했던 작전의 결과였다. 이후 광풍이라 해도 무색할만한 회색 아파트에 대한 잘못된 경제 가치관이 온 국민을 병들게 했고, 그 후유증이 한두 해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해 작금에 이르러서는 수많은 가정들이 부랴부랴 건전한 노동력으로 그 질병을 치유해 보려고 시도는 하고 있지만 이미 늦은지라 적지 않은 가정들이 파산신고를 끝으로 심지어 거리로 내몰리기까지 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 파탄에 대한 불의한 시작과 과정과 진단은 나라 경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 날 아름다운 건물 교회와 깊은 불륜에 빠진 대부분의 한국 목사들의 이야기기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직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말씀과 그 분의 뜻에 따라 그 분의 성품을 닮아가면서 신앙생활의 대상인 이웃을 섬기며 사랑하는 방법을 통해 각자 복음적 삶을 살아가는 독특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알고 잘 알고 있듯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도 건물 교회에 출석하고 있던 성도들을 뜻한 말이 아니라 십자가 죽음 직전까지 지상사역 때 보여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그대로 재현하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에서 시작되었다.(11:26) 그 뿐이 아니다. 예수님의 수많은 말씀 가운데 백미(白眉)라고 불러지는 산상수훈의 팔복 설교를 살펴보라. 그 소중한 말씀 한 구절 한 구절 속에 건물 교회에 대한 언급은 털끝만큼도 없다. 대신 하나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성품 변화에 대한 교훈들이다.(05:03-12) 그 뿐이랴? 성도들의 아름다운 신앙생활에 결과라고 할 수 있는 성령의 열매들을 살펴보라. 역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들의 성품 변화에 그 열매들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05:22-23)

 

여러분은 스데반 집사의 직접적인 순교 이유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성경을 자세히 읽다보면, 놀랍게도 스데반 집사는 건물 교회를 반대하다 순교 당했음을 알 수 있다.

07:48-51,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다시 말해서 스데반 집사는 건물 교회가 없음을 역설(逆說)하다 순교 당했던 것이다.

06: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스데반의 외침 요지는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된 양식에 따라 만든 성막과 솔로몬에 의해 인간이 만든 성전은 서로 관련이 없다.”는 선언이었다. 물론 그 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근거하고 있다.

14:58,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그렇다. 온 우주와 이 땅의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무한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아무리 아름답게 지었다 하더라도 사람의 손으로 만든 제한된 공간이나 건물에 사시거나 머무시는 분이 아니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스데반 집사도 그랬지만 예수님 역시 건물 성전을 모독한다는 동일한 죄목으로 정죄 당하셨다.

26:59-66,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하되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도대체 오늘 날 아무도 그 비 성경적인 사실에 항의 하지 않는 건물 교회는 어디로부터 발상(發想)된 성경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란 말인가? 성경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리고 초대 교회의 역사 기록인 사도행전을 살펴보아도 건물 교회는 성경에 존재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왜 오늘 날 이 땅 위에는 건물 교회의 첨탑 십자가가 이토록 많이 존재하게 된 것일까?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님의 방법대로만 성취되어야 한다. 자신의 뜻이 아무리 선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본래 뜻과 상충되는 것이라면 그 사람의 헌신이 아무리 아름답고 고귀해 보인다 해도 그것은 충성이 아니라 오히려 악행이 된다.

0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율법과 선지서, 즉 구약을 중심으로 유대교는 오늘 날에도 여전히 오실 메시야 출현을 신앙하면서 그 중심에 성전과 제사장과 희생 제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이미 오신 메시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대속을 통해 자신이 곧 성전이 되셨다.

0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한글 거하시매 / 영어 – be dwelling(거주하시는 상태) / 헬라어 – be tabernacled<성막이 되신 상태>

그리고 동시에 새롭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집을 이루셨다.(14:58, 07:48, 고전03:16, 고후06:16, 02:21-23, 09:24) 또한 그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역시 대 제사장으로서 새로운 제사장 제도를 성경의 예언에 따라 완성하셨다.(04:14, 05:05-06, 10, 08:01)

벧전02:0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01:0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께서 단번에 성전 제사의 영원한 희생제물이 되어 희생 제사를 완성하시고 더 이상 드리지 않게 하셨다.(07:27, 09:14, 25-28, 10:12, 벧전03:18)

07: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09:25-28,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이처럼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인해 그 전까지 존재했던 유대교의 성전과 제사장 제도, 그리고 희생 제사들조차 모두 완성된 것으로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율법에서 복음으로, 심판의 의에서 용서와 사랑으로,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예언과 그림자에서 성취와 실상으로 완성되었다. 물론 이것들은 모두 구약의 폐지를 말함이 아니라 신약으로 말미암아 완성된 구약을 말함이다. 그렇다면 이제 기독교는 성전 없는 종교요, 건물 교회 없는 교회여야만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교회에 대한 개념은 건물 교회가 아닌 주님과 함께 하는 공간적인 개념, 주님을 영접한 개인과 그들이 함께 하는 예배 처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우리 밖()이 아니라 우리 안()이다.

고전0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0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03:0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의 가르치심에 따라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그들의 신앙 고백과 그 신앙 고백의 본질이 되시는 예수그리스도 자신을 하나님의 성전이요, 교회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16:16-1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래서 신약 성경 그 어느 곳에도 교회(ekklesia)나 성전(God's temple)이나 하나님의 집(God’s house)을 건물 교회로 부른 적이 한 번도 없다. 특히 교회를 에클레시아라고 부를 때, 신약성경은 언제나 성도들의 유동적(流動的)인 모임(Meeting)을 의미했지 모임을 위한 고정적(固定的)인 장소(Place)를 의미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날 목사들도 에클레시아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으로부터 불러낸 구원받은 사람들의 무리, 곧 무형 교회라고 지금도 설교를 계속해 오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왜 설교는 참된 교회란 구원받은 성도 개개인의 무형 교회를 말하면서 건물 교회를 마치 또 하나의 교회인양 포장하고 치장하고 있는가 말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구약의 율법적 용어인 성전이 오늘 날 교회라는 주장은 물론이고, 고정된 건물 교회의 대체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는 예배당(禮拜堂)이라는 표현조차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겠다. 대신 언제든지 성도들이 함께 이동할 수도 있고, 모일 수도 있다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예배처소(禮拜處所)라는 표현이 성경적인 교회를 표현하는 가장 적당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교회(church)라는 단어 역시, 지금은 건물을 의미하는 대명사가 되어 버렸지만, 본래 주님께 속함을 의미하는 헬라어 kuriakon에서 비롯된 단어다. 그런데 이 단어가 번역 과정에서 하나님의 집(God’s house)이라는 건물 개념이 포함된 어휘가 선택됐고, 그 후 교회라는 영어 단어인 church는 아예 건물 개념으로 정착되어 버리는 최악의 불행한 사태를 맞이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 대속 사건과 부활에 대한 예언을 말씀하시면서 직접 자신이 진정한 성전이요 진정한 교회임을 밝히신 바 있다.

02:19-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뿐만 아니라 이후 진정한 교회와 예배가 무엇인지를 사마리아 지역의 수가 마을의 우물곁에서 한 여인에게 밝히 가르쳐 주신 바 있다.

04: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0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예수 그리스도로 십자가 대속 사건을 기점(起點)으로 이제는 더 이상 고정된 예루살렘 성전 같은 예배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드릴 예배의 신앙적 자세와 어디서든지 라는 예배 처소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그렇다. 더 이상 예배를 위해 특정된 거룩한 고정 장소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무소부재(無所不在)의 주님을 신앙하기에 유소가재(有所可在)의 고정된 건물 교회는 결단코 존재하지도 존재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주님의 가르치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님의 가르치심에 따라 이 후 모든 초대 성도들은 믿는 어떤 성도의 거실이나 방에서, 들이나 행각에서, 길가 어디서든 성도가 함께 모임으로서 그 때마다 교회이신 예수님을 영접한 또 다른 교회들인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예배 처소(Anytime, Anywhere)에서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교회 교단과 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다음의 실례를 주님의 가르치심과 견주어 생각해 보자.(20120704일자 기독신문 내용 중 발췌) 사랑의 교회(오정현 목사)의 새 예배당 건축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소속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예장합동 / 이기창 총회장)측이 사랑의 교회 건축을 지지하고자 기독신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광고 게재했다. "사랑의 교회 건축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사랑의 교회는 사회 섬김의 도구로 쓰임 받기를 기원한다." 성경에도 없는 건물 교회 건축의 근거를 도대체 어디에서 찾았기에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계속해서 재적 교인 09만여 명이 사용하기에 현 건축물은 너무나 협소하므로 새 건물을 지을 수밖에 없으며, 다음 세대와 통일 한국을 준비하기 위해 건축은 반드시 진행되어야 할 일이다.”라고 그 목사들은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성경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 어쩌다 이미 존재하고 있던 기존 건물을 임시로 사용했던 기록은 있다. 솔로몬 행각(03:11, 05:12)과 두란노 서원이 그 예외적인 실례다.(05:12, 19:09-10) 그러나 이 조차도 성도들이 고정 건물 교회를 지어 사용한 건물들이 아니다. 일시적인 필요에 의해, 솔로몬 행각은 예루살렘 성전에 모이던 사람들을 위한 복음 증거와 예배를 목적으로 네 기둥에 임시 천막을 덮어 놓은 정도였고, 그나마 성령 강림 이후에 솔로몬 행각 교회는 행01:08절의 말씀에 따라 흩어져 순종하지 않고 뭉쳐있던 예루살렘 교회 위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대적인 핍박으로 말미암아 모두 뿔뿔이 흩어지면서 사라지게 된다. 흩어져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주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고정 건물이나 일정한 예배 처소에 모여 있던 성도들 때문이었다.

두란노 서원 역시 에베소 지역에서 유명했던 어떤 헬라 교사(강연자)를 기념한 강당 식 건물이었는데, 이곳에서 바울은 유대교 회당 안에서의 가르침을 반대했던 자들로 인해 이방인들이 그곳에서 모이지 않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04시 같은 무더운 시간이나 강연이 없는 때에 그 장소를 활용했을 뿐이다. 이곳에서 바울은 다른 선교지와 달리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약 02-03년간 오랜 시간 성경을 가르쳤었는데, 그 이유는 이 시기에 계시록에 등장하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세워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두란노 서원에서 가까운 루커스 계곡(Lycus valley)에 골로새 교회나 라오디게아 교회 등 여러 교회들이 계속 세워지고 있던 교회 부흥의 중요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항상 건물 교회가 아니라 사람,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 중심에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힘의 제국 로마를 정복한 기독교의 힘의 정체는 무엇이었던가? 결코 어떤 집단적 모임이나 공개된 건물 교회를 통해서 로마 제국을 정복한 것이 아니었다. 힘으로였다면 기독교를 핍박했던 로마 황제 하의 군인들에 의해 세워지는 건물 교회는 그때마다 발견되어 완전 토벌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곳에나 존재했던 가정 교회, 그리고 그 각각의 소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변화된 삶을 보여주었기에, 또한 그 삶에 외인(外人)들이 선한 영향을 받았기에 결국 힘의 로마제국은 사랑의 기독교에 의해 정복될 수 있었다.

03세기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은 공개된 행사조차 변변히 치룬 바가 없다. 그들은 고작 작은 가정에서, 아니면 공동체 모임을 위해 일부 개조한 집들을 예배 처소를 임시 사용했었다. 그리고 모였던 그들이 했던 일은 오늘 날과 같은 일정한 예배 순서조차 정해지지 않은 채 이루어졌던 식사 교제 도중의 기도와 간증, 찬양과 말씀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연약한 교회(성도) 모임을 통해서 기독교는 왕성하게 부흥되었고 로마는 그 앞에서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들이 이루어 놓았던 전 세계로 통하는 길들과 언어통일은 오히려 복음을 가장 빠르게 전 세계로 증거 될 수 있도록 하는 복음 증거의 선한 수단과 방법으로 이용됐다.

 

그렇다면 성경의 가르침과 반하는 건물 교회는 언제 어디서부터 왜 시작되었는지 그 유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 마디로 건물 교회는 두 가지 잘못된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로마제국의 역사적 특징은 무엇이었는가? 세계를 정복한 힘의 제국 로마는 그 권력 지탱을 위해 왕을 신의 자리에 앉혔고, 그 자리보전과 유지를 위해 로마는 전쟁에서 죽은 전사자들을 숭배하는 미신으로 사람들을 계속 호도(糊塗)하면서 강한 군대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러한 왕의 권위와 죽음 숭배 의식을 위해 눈에 보이는 크고 화려한 건물을 통해 일반 백성에서 과시되었고 신성시하게 했다.

이후 이러한 크고 화려한 건물들을 통해 왕과 죽은 사람을 숭상하는 이교적 관습은 기독교 박해를 통해 순교당한 성도들의 죽음을 성도들이 신성 시 하면서, 어느 순간 세상과의 관습 경계선이 무너지면서 성도들이 건물 교회를 짓기 시작한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죽은 자를 숭배하는 이교 관습을 버리지 못했던 로마 황제 콘스탄틴(Constantine, 285-337)은 죽은 자신의 어머니 헬레나가 가지고 있던 신비적 사상까지 받아들이면서, 그녀를 기념한다는 명목으로 로마 곳곳에 화려한 건물 교회들을 짓기 시작했다. 이처럼 건물 교회의 태동(胎動)은 성경의 신앙적 교훈과 관계없이 신을 대신하는 왕이 있는 곳과 죽은 자를 모시는 곳을 신성시하게 함으로써 인간 통치의 수월성을 확보하려는 이교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후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건물 교회의 유래가 부끄러웠던지 언제부터인가 교회 건물의 유래를 슬그머니 구약성경에서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건물 교회 건축의 근거를 예루살렘 성전에 두었다. 요즘과 별반 다름없이 그 때도 성경이 우리를 판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필요에 따라 성경을 판단하려는 우를 그들 역시 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교회 건물 건축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구약 성경을 들먹이는 목사가 있다면 오히려 더 큰 자가당착(自家撞着)이 된다. 구약에 의한 그 어떤 신앙적 교훈들도 그 핵심은 모두 오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예언적이요 그림자 역할에 집중되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들먹이며 성전 건축이니, 교회 건축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아 건물 없는 교회(無建物), 계급 없는 교회(無階級), 의식 없는 교회((無儀式)인 에클레시아(ekklesia) 교회로 완성되었다는 성경의 기본 진리를 무시하는 것일 뿐 아니라 주님 십자가 대속 이전으로 회귀(回歸)하는 기가 막힌 어리석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목사들은 이렇게 항변한다.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건물 교회가 없었다는 것이 오늘의 현대 교회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어떤 의미와 과정을 통해 건물 교회가 유래되고 지어졌던 말건 간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편의성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말이다. 또한 더 효율적인 복음 증거와 신앙 교육을 위한 건물 공간은 유용하기에 절대 필요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랬으면 됐지 뭐 어쩌란 말인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전 목사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먼저 대답을 해보기 바란다. 성경에 기록된 효율적인 성경적 복음 증거인 성도 개인의 삶을 통한 1:1 제자교육 방식보다 오늘 날 목사들이 판단하고 결정한 건물 교회가 더 복음 증거에 효율적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대부분의 목사들이 토해내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의 패악이 아닐 수 없다!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가장 중요시 되는 성경의 본질적이고도 기본적인 진리가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단 말인가?

11:3,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올챙이는 따듯한 물에서 알을 낳는가? 아니면 차가운 물에서 알을 낳는가? 따듯한 물, 차가운 물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질문 자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알은 개구리가 낳는 것이지 새끼인 올챙이가 낳을 수 없다. 그런데, 애당초 건물 교회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성경의 진리 앞에서, 건물 교회가 복음 증거에 효율적이다 아니다를 어떻게 논할 수 없단 말인가?

 

여러분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의 차이점을 말이다.

07:24-27,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두 집은 모두 똑 같았다. 다만 집이 아닌 집의 기초만 틀렸을 뿐이다. 그렇다. 기초를 성경 외에서 잡아 놓고, 집은 다 같으니 상관없다고 어떻게 오늘 날 목사들은 건물 교회를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면 세상 교회, 세상 목사들이 다 건물 교회에서 목회하니 자신도 그리 따라 한다고 말 같지도 않은 자기 합리화, 자기변명을 궤변처럼 늘어놓을 셈인가?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건물 교회에 있지 않고 오직 친히 대속의 피로 말미암아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신 구원받은 무리들에게만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아무리 건물 교회가 화려해도 그 건물 교회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결코 기뻐하시거나 감동받거나 받으실 이유가 전혀 없으시다. 오히려 건물 교회에 절대 무관심하셨기에 유럽의 고풍스럽고 화려한 건물 교회들이 피폐(疲弊)되어져 감을 방관하셨고, 역시 그러한 수많은 건물 교회 안의 성도들이 다 사라지고 텅 비어 버렸다고 해서 안타까워하지도 않으셨다. 처음부터 주님께서는 그리하라고 말씀하거나 교훈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가 국교라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인정할 만큼 복음의 나라요 선교의 나라요, 셀 수 없이 수많은 건물 교회가 존재하는 미국조차 이제는 화려한 유럽 건물 교회의 피폐를 뒤 따르고 있음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20121010AP 통신은 다음과 같은 여론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여기에 그 기사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본다. “AP통신은 미국의 조사기관 퓨포럼이 올 0628일부터 0709일까지 진행한 조사 결과(오차범위 ±0.9%) 자신이 개신교도(Protestant)라고 밝힌 응답자(성인)48%에 불과했다고 보도했다. 이번 조사 결과는 오차 범위를 넘어 확실히 절반 밑으로 떨어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과거 특정 조사에서 개신교도 비율이 오차범위 내에서 50% 미만을 기록한 적이 있지만 오차범위 이상의 수치를 기록한 적은 없었다....”

건물 교회와 비례해서 성도 수들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 역시 요즘은 이쪽 건물 교회에서 저쪽 건물 교회로 성도들의 수평 이동만 겨우 있을 뿐이다. 아니 이제는 수평 이동에서조차 힘이 달리는지 점점 전체 성도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이 시대처럼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 기독교가 개독교니 먹사니 하면서 조롱받고 모욕당했던 때가 언제 또 있었단 말인가? 한국 교회는 지금 의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받을 핍박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한국 교회는 여전히 오늘도 복음 증거를 목적으로 이웃 사랑에 쏟아 부어야 할 소중한 성도들의 연보(헌금)을 하나님께는 전혀 관심 밖인 건물 교회 건축 비용에 대부분 쏟아 붓고 있다. 심지어 그것도 모자라 목사들은 교회 건축 또는 성전 건축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요 성도들의 축복의 기회라는 비성경적인 거짓말을 조금의 부끄럼도 없이 뱉어내고 있다. 아니 그 뿐이 아니다. 연보(헌금)도 모자라 무리한 은행 대출까지 받아 조금이라도 더 크고 화려한 건물 교회를 짓기 위해 혈안(血眼)이 되어 있다. 이 현대판 바리새인들아! 서기관들아!

03:07-09,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그렇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교회는 오직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개개인의 성도가 진정한 교회다. 안식 후 첫 날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였던 장소도 유대교의 중심이었던 성전이나 회당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유대교도들이 두려워 몰래 모인 곳의 문을 걸어 잠글 정도의 임시 예배 처소에서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자체적인 교회 건물을 소유한 적이 결코 없었지만, 주님보시기에는 가장 합당한 (모임) 교회요 귀한 쓰임을 받은, 그래서 오늘 날에도 여전히 롤 모델(Role model)이 되고 있는 가장 성경적인 초대 (모임) 교회로 기록되고 있다.

혹시라도 오늘 날 목사들이 교회 부흥을 독려하며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며 언급하는 교회가 초대 예루살렘교회라면, 그들은 제대로 된 롤 모델을 잘못된 롤 모델로 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건물이 아닌 사람, (건물) 교회가 아닌 (구원받은) 성도다. 이러한 이유에서 건물(Visible church building) 짓은 일에 무관하지 않으셨을 목수 예수님조차 건물이 아닌 복음의 말씀만을 앞세워 사람을 변화(구원)시키기 위해 가르치시고 세우시는 일(Invisible church, 제자로서의 삶)에 진력(盡力)하셨다. 그렇다. 성경에 건물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에 있는 것은 건물 교회가 아니라 오직 예배 처소다!

현대판 바리새인들아, 서기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는 임박한 진노를 어떻게 피하려는가?(03:07, 03:07) 지금이라도 결코 늦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은 늘 우리에게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이킴은 아무리 늦어도 항상 가장 빠른 법이다. 이제 오직 성경이 말씀하고 가르치는 곳으로 돌아가자!

0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신앙은 개인의 주관적인 생각에 따르는 세상과의 타협이 아니라 오직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가르침에만 따르는 타협 없는 선택, 순종과 복종일 뿐이다. 여기 넓은 문과 좁은 문, 넓은 길과 좁은 길이 있다. 그러나 이미 당신이 알고 있듯이 중간은 없다.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이제 성경에 건물 교회는 없다!”라는 성경말씀 앞에서 한국 교회와 목사들의 선택은 무엇이어야 하겠는가?

15:22,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20121017

 

Walking before My God, 이영찬

 

혹시 제 성경 지식의 부족함으로 인해 말씀을 주관적으로 해석했거나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다면, 구체적인 성구와 올바른 재해석으로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출처 : 숭사리 교회개혁포럼
글쓴이 : You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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