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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에 관하여/구약 핵심공부

[스크랩] 하나님의 선물 8가지/언약의 선물

하나님의 선물 8가지/언약의 선물

김정우(총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그래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비록 전직 대통령이 순간적인 고독과 고통을 이기지 못 하고 자신의 인생과 화해하지 못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북한에서는 핵과 미사일 시험을 하며, 온 세계는 여전히 예측할 수 없는 경제적인 위기 가운데 소용돌이치고, 이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려움 가운데 살고 있다 할지라도, 내일 아침에도 여전히 해는 동녘에서 솟아오르고 달과 별도 밤에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은 구약시대에 가장 비극적인 포로기를 경험한 예레미야 선지자가 깨달은 말씀이었다. 그는 나라를 빼앗기고 예배드리던 성전이 불타며, 다윗의 후손 시드기야 왕이 눈이 뽑힌 채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역사의 대 혼돈 시대에 살면서도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주야로 그 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 내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깨뜨려 그에게 그의 자리에 앉아 다스릴 아들이 없게 할 수 있겠으며 내가 나를 섬기는 레위인 제사장에게 세운 언약도 파할 수 있으리라”는 말씀을 듣는다(렘 33:20-21).

  그는 한 마디를 더 덧붙인다.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야곱과 내 종 다윗의 자손을 버리고 다시는 다윗의 자손 중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다스릴 자를 택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 포로된 자를 돌아오게 하고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25-26절).

  예레미야는 어디를 보아도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창조의 언약은 여전히 유효하여 그 어떤 인간도 깨뜨릴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과 맺은 언약은 여전히 살아 있어서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징계가 끝날 때에는 포로된 나라에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것이며, 그 때 하나님께서 그들과 새로운 언약을 맺을 것을 바라보았다(렘 31:31). 즉,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에게는 하나님께서 조상들과 맺은 언약이 유일하고도 가장 확실한 희망이었다.

  언약이 희망의 원천이 되는 것은 단지 예레미야에게 뿐만이 아니다. 사실 언약은 신구약성경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기독교회에서는 지난 2000년 동안 성경전서를 각각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으로 나누어 부름으로써 언약의 관점으로 성경을 보고 있음을 증거해 왔다. 성경전서를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하는 것은 제롬의 라틴 불가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것은 신약성경의 히브리서에서 구약의 역사를 ‘첫 언약’으로 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새 언약’으로 보는 데 근거를 두고 있다(히 8:7, 13; 9:1, 15, 18). 이와 같이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맺은 언약이 신구약성경의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알고, 언약의 관점에서 두 성경의 통일성과 구원 방식의 동일성을 고백하여 왔다.

  그렇지만 언약(言約)이라는 말은 오늘날 일상생활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으며 단지 ‘말로 하는 약속’ 정도로 이해되므로, 모든 성경의 중심 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이 단어는 번역하기조차 어려워 계약(contract), 협약(pact), 조약(treaty), 약속(promise), 맹세(oath), 헌장(charter), 유언(testament)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초 고고학의 발전으로 주전 2000년대와 1000년대 고대 근동아시아의 여러 조약 비문들이 발견되었으며, 특히 힛타이트 제국(주전 1400-1200년)의 국제조약 문서들이 방대하게 발굴되고 번역됨으로써, 당대의 종주권(宗主權) 조약에는 (1) 전문(前文), (2) 역사적 서문, (3) 조약 규정들, (4) 문서 보존과 공적인 봉독 규정, (5) 증인들의 목록, (6) 축복과 저주, (7) 동물 제사를 드리는 비준 의식으로 공포되고 효력을 발생하게 됨을 알게 되었다. 즉, 구약시대의 언약은 언약을 맺는 두 당사자가 ‘피로 맹세한 상호적 헌신’이었으며, 그들은 자신의 목숨과 명예와 가문을 걸고 서로에 대한 사랑과 충성의 헌신을 다짐하였다. 이리하여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들인 신인관계, 부자관계, 부부관계, 군신관계가 이 용어로 표현되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이 네 가지 관계들은 각각 독자적인 삶의 영역을 갖고 있지만, 모두 동일한 형식을 공통분모로 갖는다. 즉, 신인관계에서 “나는 너희 하나님이며,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라는 언약형식은, 부자 관계에서 “나는 너의 아버지이며, 너는 나의 아들이다”, 부부 관계에서 “나는 당신의 남편이며, 당신은 나의 아내입니다”, 군신 관계에서 “나는 너의 왕이며 너는 나의 종이다”로 표현되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가 부자와 부부와 군신 관계의 은유로 묘사된 것은, 이 세 관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인격적이면서도 친밀하고 항구적이기 때문이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과 온 세상 및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언약관계는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로 제시될 수 있으며, 이 모든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1. 창조 언약

  구약성경을 열어주는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에는 ‘언약’(berit)이라는 용어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예레미야서에는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33:20), ‘달과 별들이 밤을 비추는 규정’(choq 31:35), 그리고 ‘주야와 맺은 언약’(berit)과 ‘천지의 법칙’(chuqot 33:25)이 나타나고 있다. 즉,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시고 밤낮의 순환을 이루도록 한 창조의 질서는 하나님께서 온 우주와 세운 언약으로서 결코 파기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것을 창조 언약이라고 부른다.


  2. 노아 언약(보존의 언약)

  노아는 “주님께 은혜를 입은 자로서 당대에 의인이며, 완전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였으므로(8-9절), 대홍수 심판에서 온 가족이 건짐을 받게 되었다. 홍수 심판이 끝났을 때 주님께서는 노아가 드린 제사를 받으시고, 다시는 사람의 죄 때문에 온 세상의 생명들을 멸하지 않고, 자연 질서를 보존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였다(9:8-11). 그리고 하늘
에 무지개를 두어 ‘언약의 증거’로 삼으시고(12-13절),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을 보존하는 영원한 언약’(16절)을 세우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근본적인 질서를 인간의 죄와 상관 없이 보존해 주시는 ‘보존의 언약’을 노아에게 세워주셨다. 여기에서 ‘무지개’는 히브리어에서 ‘화살’을 의미하므로, 만약에 다시 온 세상을 홍수로 심판한다면, 창조주께서 스스로에게 화살을 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3. 아브라함 언약(약속의 언약)

  노아 홍수 이후 바벨탑 사건으로 온 세상 사람들은 흩어지게 되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새로운 인류를 시작하기 위하여 그를 선택하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후손조차 낳을 수 없었으므로 두려움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밤의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약속의 언약’을 맺어주셨다(창 15). 주님께서는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는 언약의 전문과 역사적 서문을 친히 말씀하시며(7절; 출 20:2; 신 5:6 참조), 이어서 언약체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인 제물을 아브라함에게 준비시킨다(9절). 그런데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는 놀라운 장면이 제시된다(17절). 여기에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는 자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고대근동 아시아의 종주권 언약 체결식에서 쪼갠 고기는 속주의 생명을 상징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지나가야 했다(렘 34:18-20).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사이로 지나가심으로써,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책임지시고 이루실 것을 맹세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날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고(karat berit) 땅과 후손의 약속을 주셨다(15절).

  4. 시내산 언약(계명의 언약)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바로의 학정 아래에 종살이 하고 있을 때, 주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출 2:23-25) 모세를 통하여 그들을 구원하시며 시내산에서 공식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 때 주님께서는 주권적인 구원의 은총으로 그들을 이집트에서 건져 내셨음을 선포하시고 만약 그들이 언약을 지킨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약속하셨다(19:5-6).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그들을 통하여 온 열국이 아브라함의 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시내산 언약은 아브라함의 언약과 밀접한 연속성을 가지며,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시내산 언약에는 십계명(출 20:1-17)과 온갖 종류의 판례들(20:22-23:33)이 제시되고 있지만,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떤 도덕적 의지를 가진 존재이며, 그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 실천해야 할 사랑과 정의를 보여주고 있다.

 

  5. 다윗 언약

 

 

  다윗은 온 이스라엘을 통일한 이후에 종교적 구심점으로서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짓고 싶었지만(삼하 7:1-3), 주님께서는 거절하시고 오히려 나단을 통하여 자신이 다윗의 집을 지어주겠다고 약속하셨다(11절하). 그리고 주님께서는 다윗과 그 후손을 자신의 ‘아들’로 받아주시며, 자신은 그 가문의 아버지가 되겠다고 약속하셨다(14절상; 시 2:7). 즉, 주님께서는 다윗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여 주셨고, 다윗에게 영원토록 후손(zera')과 보좌(kisse')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12, 13절). 다윗의 언약에서 특이한 것은 다윗의 후손들이 만약 하나님께 범죄하면, 그들을 비록 징계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거두시지는 않겠다는 약속이 포함된 것이다(14절하-15절).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다윗의 언약은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이며, 영원한 은혜 언약으로 이해되었다(시 89:26-37).

 

  6. 새 언약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과 제사장 나라로 세워 열국에 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였지만, 그들의 마음은 돌처럼 굳어지고 부패하여져 하나님을 배반하고 열국의 우상을 섬김으로써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이 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장차 하나님께서 ‘새로운 언약’을 맺어 그들을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겠다는 약속을 전한다(렘 31:31-33). 이 새 언약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핵심으로 갖고 있다. 에스겔 선지자는 그들 속에 새 영과 새 마음과 성령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새 힘을 얻을 것을 새 언약 속에 포함시켰다(겔 36:27). 즉, 그들은 새로운 본성을 얻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과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주의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다.

  위에 제시된 구약성경의 여섯 가지 중심 언약들은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모두 성취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메시야로서 정의와 공평으로 온 우주에 참된 평화와 질서를 가져오심으로써 창조언약과 창조질서 보존 언약을 완성할 것이다(사 11:1-9). 예수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서 다윗이 바라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며, 시내산 언약에 부과된 모든 율법을 온전히 지키시고, 제사 제도를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완성하셨다. 또한 그는 예레미야와 에스겔 선지자가 바라본 새 언약을 자신의 피로써 세우시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엡 4:24)으로 구성된 그의 백성들에게 오순절 성령을 보내어 주심으로써 온 인류의 참된 구원자가 되셨다. 따라서 우리에겐 절망 가운데에도 소망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구원의 선물(시 130:1-8)

  ‘내게 아쉬움이 없으라’는 말씀을 남겨 주고 떠난 고 김수환 추기경의 고백처럼, 시편은 지난 수 천년 동안 모든 성도들에게 영감의 원천이었다. 초대교회 500년을 완성하고 중세 1000년을 열어준 어거스틴(354-430년)은 임종 직전에 몸이 몹시 아팠을 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시 130:4)란 말씀을 벽에 써 놓고 날마다 묵상하며 위로를 받았다. 종교개혁으로 근세의 문명을 연 마틴 루터(1483?1546년)는 동일한 시편 속에서 죄 사함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1절 말씀을 따라 ‘내가 깊은 물 속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de Profundis)라는 찬송가를 지었다. 종교개혁의 정신이 시들어 가고 있을 때 요한 웨슬레(주후 1703-1791년)는 바로 이 찬송가를 런던의 성 바울 교회당에서 처음으로 들으면서 가슴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경험을 한 후, 그의 영적인 삶은 변화되고 감리교를 창설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이끌었다.


  그렇지만, 이 시편의 중심 이미지를 이루고 있는 ‘깊은 물 속’은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상당히 낯선 느낌을 준다. 요즈음에는 스킨스쿠버 다이버들이나 깊은 물 속을 들어가 볼뿐 일반인들은 그 세계를 전혀 경험할 수가 없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구원을 설명할 때 ‘깊은 물 속에서 건짐 받는 이미지’를 중심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모세는 나일 강물에서 악어 밥이 되어 죽을 수 밖에 없었지만 건짐 받고 ‘물에서 건졌다’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출 2:10). 선지자 요나는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져졌지만’(2:3), 주님의 은총으로 고래 뱃속에서 벗어나 니느웨에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게 되었다. 다윗은 모든 원수들과 사울의 손에서 살아나게 된 것을 ‘죽음의 물살’에서 벗어난 것으로 노래한다(시 18:4). 우리의 상상을 좀 더 펼쳐보면, 인류 최초의 대홍수를 경험하고 살아난 노아도 우주적인 대혼돈의 물 속에서 일엽편주를 타고 건짐받고 새로운 인류를 시작하였음을 기억하게 된다. 그 때 ‘땅 속 깊은 곳에서 큰 샘들이 모두 터지고, 하늘에서는 홍수 문들이 열려서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비가 땅 위로 쏟아졌지만’(창 7:11-12), 노아와 그의 식구는 구원을 받고, 이후 방주에서 나와 마른 땅을 밟고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8:14-22).

  홍수와 깊은 바다에서 건짐을 받는 구원은 구약성경에서 끝나지 않고 신약성경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예수께서 한 번은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널 때 큰 광풍이 일어나 파선의 위기를 당했지만, 친히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며’ 잠잠하게 하셨다(막 4:37-39). 또한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늘의 전쟁에서 ‘큰 용 곧 옛 뱀’이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 아이를 임신한 여인’을 죽이기 위하여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죽이려고 하는데 ‘땅이 입을 벌려 강물을 삼켜’ 아이를 건진다(계 12:15-16).

   우리가 구약성경을 좀 더 자세히 읽어 보면, ‘깊은 물에서의 구원’은 창조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천지창조는 바로 태고의 심연을 가르고 마른 땅을 만들어준 사건이었다. 오늘날 창세기 1장을 읽어내려 갈 때, 먼저 ‘무(無)에서 유(有)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는 교리를 생각하게 되지만, 이 용어는 중간사 시대에 처음 만들어졌다(마카비 2서 7:28). 물론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입장은 구약성경 전체가 전제하는 신앙고백이며, 다른 성경 구절에서 명시되고 암시된다(시 148:5; 잠 8:22-27). 그렇지만, 창세기 저자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었다고”고 말한다(창 1:2). 여기의 ‘깊음’은 ‘깊은 물’이다. 즉, 천지창조는 온 세상을 뒤덮고 있던 태고의 물을 ‘하늘 위의 물’(하늘 바다)과 ‘땅 아래의 물’(바다와 지하수)로 나누는 작업이 중심을 이루며,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은 하나님께서 바로 이 물을 정복하고 사람들과 생물들에게 주신 선물이었다. 주님께서는 땅의 기초를 바다 위에 견고하게 세워주셨기 때문에 그 터전 위에서 우리는 안심하고 일하며 살게 되었다(욥 38:4; 잠 8:29). 시편의 저자들도 깊은 물을 정복하고 땅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시 74:13, 17; 24:2 참조). 

 

하나님께서 태고의 물을 정복하시고 땅을 드러내신 창조의 과정(창 1:2, 6, 9)은 이후 구약성경에서 구원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패러다임이 되며 구원역사에서 가장 먼저 출애굽에 적용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왕 바로의 학정을 벗어던지고 나왔을 때, 그들 앞에는 홍해가 가로 놓여 있었고 뒤에는 이집트의 전차부대가 추격하였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는 유유히 흐르던 홍해를 가르고 그의 백성들이 건너게 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한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으며 지나갔다. 물이 좌우에서 그들을 가리는 벽이 되었다”(출 14:22). 이것은 장엄한 장면이다. 당대 세계 최고의 제국이던 이집트에서 수백년 동안 종노릇하던 민족이 이제 제국의 압제를 끊고 나오며, 도도히 흐르던 홍해에서 모두 수장될 줄 알았는데 그곳에서 새로운 백성들로 솟아오르고 있다. 마치 정월 초하루의 태양이 바다에서 솟아나듯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다에서 솟아 오르며 땅으로 나오고 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바로 그들의 새 창조였다.

  물을 정복한 구원의 패러다임은 여호수아가 요단 강을 가르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 새롭게 이루어진다(수 3:7-17). 그 때 홍해의 사건이 반복되었다.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강 물에 닿으면 요단 강 물줄기가 끊기고 둑이 생기어 물이 고일 것이다...온 백성이 모두 요단 강을 건널 때까지 주님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강 가운데의 마른 땅 위에 튼튼하게 서 있었다”(13, 17절). 또한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예언적 영감을 전수하기 위하여 요단 강을 건너갈 때 강이 갈라지는 사건은 반복된다. “엘리야가 겉옷을 가지고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마른 땅 위로 건너더라”(왕하 2:8, 12). 모세와 여호수아와 엘리야가 경험한 바다와 강의 정복 모델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망이 되었으며, 이후 이사야 선지자는 다시 한 번 역사 속에 새로운 출애굽의 구원 역사가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았다. “바다와 깊고 넓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의 깊은 곳을 길로 만드셔서, 속량받은 사람들을 건너가게 하신, 바로 그 팔이 아니십니까?”(새번역, 51:9-10).

  이와 같이 구약성경에서는 혼돈의 물에서 건짐 받는 사건은 단지 한 개인이 체험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받는 구원 사건에 그치지 않고 온 민족 공동체의 구원 사건에 대한 모델이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사건을 세례 의식으로 설명하였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바다 가운데를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모두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고전 10:1-2). 신약시대의 세례는 원래 몸을 물 속에 집어 넣은 후 다시 올라오게 하는 의식이었다(막 1:9-10). 여기에서 ‘물 속에 넣는 의식’은 죽음을 상징하며, ‘물에서 올라오는 의식’은 새로운 생명을 상징해준다. 즉, ‘세례’는 기본적으로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의 탄생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구약성경에서 혼돈의 물속에서 건짐 받는 사건은 세례를 받는 것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즉, 구원이란 영적으로 볼 때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고통스럽고 힘든 곳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깊은 곳’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밑바닥이다. 한 번 이곳에 빠지면, 아무도 자기 힘으로 빠져 나올 수 없다. 사람들은 그 곳에서 “더 이상 이대로 살 수 없습니다. 제발 좀 벗어나게 해주십시오”라고 애절하게 부르짖는다. ‘깊은 곳’은 우리가 경험하는 질병, 불임, 파산, 기근, 전쟁, 이별, 죽음 등의 온갖 불행과 고통을 상징해 준다. 예언자들은 우리의 ‘구원자’(삼하 22:3; 시 68:19; 사 49:26)가 되신 주님께서 우리의 몸과 영혼, 개인과 공동체, 인생과 역사, 사회와 생태계의 모든 ‘탄식’에서 구원하시고 ‘정의와 평화’가 깃던 주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았다(사 11:1-9; 롬 8:20-22 참조). 구원자이신 하나님께서 장차 여자의 후손(창 3:15)과 다윗의 후손 가운데 메시야를 보내어 주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실 것이다(사 7:14; 9:6-7; 사 11:1).

  구약성경의 구원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평화(샬롬)를 이루는 것이지만, 그 평화는 죄사함의 은총으로 이루어진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도 유혹에 빠져 범죄할 수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대속죄일(욤 키푸르, 유대력 7월 10일)을 정하여 죄 씻음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여셨다(레 23:27). 이 때 대제사장은 “살아 있는 그 숫염소의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이스라엘 자손이 저지른 온갖 악행과 온갖 반역 행위와 온갖 죄를 다 자백하고 나서, 그 모든 죄를 그 숫염소의 머리에 씌운다”(레 16:21). 어떻게 양과 염소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질 수 있겠는가 마는,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사람마다 자신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양과 염소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다윗의 우리야의 아내를 취한 범죄는 너무나 중대하고 심각하였기 때문에(삼하 11장), 그는 동물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많은 자비를 좇아 주님께서 친히 그의 모든 죄를 ‘말끔히 씻어 주시고’(시 51:2), ‘우슬초로 정결케 해주시며’(7절),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시고’(10절), ‘성령을 거두어 가지 마시며’(11절), ‘자발적인 마음을 허락해 주시길’ 구하였다(12절). 선지자 이사야는 다윗의 기도가 장차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속죄양이 될 고난 받는 주의 종의 대속적 사역에 근거하여 응답될 것임을 증거하였다(사 53:6-7). 

  다윗처럼 시편 130편의 시인도 ‘깊은 곳에서’ 부르짖음을 시작하다가, 갑자기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라는 질문을 던지고(3절) 바로 이어서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4절)라고 고백한다. 이 말은 주님께서 그를 용서해주셨기 때문에 주님을 경외하겠다는 뜻이 아니고, 용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선물이므로 주님을 경외한다는 뜻이다. 기독교의 구원은 어떤 수련을 통한 깨달음이나 해탈이나 아니라,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심을 느끼는 은혜의 체험으로 이루어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인은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립니다”라는 아름다운 고백을 하고 있다(6절). 여기에 천지창조의 새로운 요소가 나타난다. 천지창조는 하나님께서 태고의 물을 정복하고 땅을 주신 은혜였을 뿐 아니라, ‘빛이 있으라’는 창조주의 명령으로 흑암으로 뒤덮인 세상에 빛을 주신 은총의 사건이었다. 깊은 물에서 건짐 받은 시인(1절)은 이제 그의 영혼에 빛이 비치길 사모한다(5절). 파수꾼 보다 더 간절한 심정으로 주님을 기다린다. 그는 그렇게 기다리던 빛을 체험하였을까?

  사도 바울은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며(고후 4:6),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빛 되심을 증거하고 있다. 화란의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였던 반 고흐는 ‘낮보다 더 찬란한 밤하늘’을 그의 화폭에 아름답게 수놓았다. 그는 폭풍한설 보다 더 쓰라린 인생을 살았지만 어둠을 햇빛 보다 더 빛나게 승화시켜 내었다.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 깊은 심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우리들을 주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우리 각자의 영혼 속에 은총의 빛을 비추어 주셔서, 우리도 죄 사함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영혼의 평화를 누리며 우리의 모든 아픔과 고통을 빛으로 승화해 낼 수 있는 능력 주시길 사모한다(고후 5:17).

창조의 선물

우리는 앞으로 8회의 연재를 통하여 구약성경의 중심 광맥을 이루는 8개의 주제인 창조, 구원, 율법, 제사(예배), 역사, 예언, 시, 지혜를 다루고자 한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온 인류와 특히 그의 백성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므로, 하나 하나 그 의미를 묵상하며 오늘날 우리의 삶에 조명해 보고자 한다.

① 창조의 선물(창 1:1-2:3)
   최희준의 대표적인 노래인 <하숙생>에 있는 가사처럼 모든 사람들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라는 궁극적인 질문을 던지고 산다.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우리가 어디에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은 자신의 근본을 알지 못할 때 참된 정체성을 가질 수 없다. 마치 해외로 입양을 간 아이가 성장한 후에 자신의 부모를 애타게 찾으며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고 싶어 고국으로 돌아오듯이, 사람은 자신의 뿌리를 알지 못하면 진정한 자존심을 가질 수 없다. 물론 우리가 수정(水晶)에 대해 알고 싶으면 수정이 만들어진 과정을 보지 않고 완성된 수정을 보아야 하며, 장미에 대해 알고 싶으면 그 씨앗이나 줄기가 아니라 활짝 핀 장미를 보아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은 보석이나 꽃처럼 완성된 모습이나 전성기의 모습으로 알 수는 없다.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전기가 말해주듯이, 사람의 진면목은 그의 조상과 성장배경을 통하여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 마치 미국의 44번째 대통령 당선자인 버락 오바마가 케냐 출신의 아버지에게 태어났고 인도네시아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으며,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젊은 시절 깊은 방황을 하였지만 그의 할머니의 헌신적 사랑으로 바른 길을 찾았다는 인생의 배경을 알게 될 때 현재 그의 인간됨을 느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모든 종교와 문명은 인간의 근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며, 각각 다양한 신화와 전설과 서사시를 통하여 우주와 인생의 근원에 대하여 설명 하려고 한다.


  세상을 동서양으로 구분해 본다면, 서양인들은 본질적으로 개체적이지만 동양인들은 우주적이다. 우리가 처음 영어를 배울 때 처음 배운 문장은 ‘I am a boy, you are a girl’이었다. 즉, 서양인들은 ‘나는 누구며 너는 누구냐?’라는 인식론적 질문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한문을 배울 때 가장 처음 배운 단어와 문장은 ‘하늘天 따地’였다. 우리는 ‘나와 너의 정체성’이 아니라, 하늘과 땅 즉, 우주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처음부터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대표적인 동양종교로 꼽을 수 있는 유교나 불교는 우주의 근원에 대한 가르침이 기독교만큼 뚜렷해 보이지 않는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선언으로 시작하는 우주 창조의 대 서사시로 경전의 문을 활짝 열고 있다. 이리하여 기독교회는 지난 2000년 동안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를 사도신경의 첫 조항으로 삼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해 왔다. 바로 이런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하여 조선 최고의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은 젊은 시절에 그의 절친한 친구인 광암(光菴) 이벽(李壁)을 통하여 처음으로 소개 받고 너무나 벅찬 감동을 느꼈으며, 이후 그의 유배지였던 다산 초당에서 <중용강의보>를 완성하면서 그 서문에서 그 때를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전한다.

 갑진년 (1784) 4월 보름에 맏형수의 제사를 마치고 나의 형제들은 이벽과 함께 같은 배를 타고 (한강) 물을 따라 내려왔다. 배 안에서 천지가 창조되는 시원이나 신체와 영혼 그리고 삶과 죽음의 이치에 관하여 들으니 놀랍고 의아하여 마치 은하수가 무한한 것과 같았다. 서울에 돌아오자 이벽을 따라가 <천주실의>와 <칠극> 등 몇 권의 책을 보고 비로소 기뻐하여 마음이 기울어졌다.
 

   젊은 시절 창조신앙을 통하여 인격적 하나님을 경험한 다산은 그의 사상 체계 전체를 수정할 수 있었고, 이후 그는 평생 동안 유교 경전 전체를 ‘유신론적 실천론’(實學)의 관점에서 재조명하며, 음양오행의 세계관을 버리고 과학적인 세계관 속에서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사상과 실천의 틀을 만들 수 있었다.
  다산이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고향집에서 서울 조정으로 가는 나루터가 있는 옥수동까지 배를 타고 오며 천지 창조 이야기 속에서 ‘하늘의 은하수가 그에게 쏟아지는’ 느낌을 받은 것처럼, 시편 8편의 시인도 밤하늘의 은하수를 바라보면서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라고 탄성을 질렀다(3-4절). 여기에서 ‘내가 보다’(我觀看 指頭所造的天 [Chinese Bible])는 동사는 시편 8편에서 시인의 (정신) 활동과 연관하여 나타나는 유일한 동사이다. 그는 원경(遠景)인 밤 하늘의 달과 별을 보고(3절), 근경(近景)인 “소떼와 양떼와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를 바라보면서(7-8절), 그를 생각해 주시고 찾아와 주시는 인격적 하나님을 경험하며 가슴이 터질듯한 감동을 느끼고 온 세상을 향한 청지기적 사명감을 받아들인다(6절).    

 

  시편의 시인들은 밤 하늘의 은하수 뿐 아니라, 춘하추동의 변화를 느끼면서 그들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아름다운 서정시로 담아 내었다. 시편 65편의 시인은 “밭이랑에 물을 넉넉히 대시고 이랑 끝을 마무르시며 밭을 단비로 적시며 움 돋는 새싹에 복을 내려 주십니다”를 노래하며 봄비의 은택을 찬양한다(10절). 84편의 시인은 “가을비로 샘물을 가득 채우시는” 주님의 은혜를 노래한다(6절). 시편 147편의 시인은 봄비를 주셔서 산에 풀이 자라 우는 까마귀 새끼를 먹이시는 주님의 자상한 은총으로 시작하여(8-9절), 가을의 아름다운 추수(14절)를 거쳐 눈과 서리와 우박으로 온 세상을 얼게 하시는 주님의 섭리와(16-17절), 다시 봄 바람이 불어 얼어붙은 온 세상을 녹이시는 주님의 지혜를 노래하고 있다(18절). 이리하여 65편의 시인은 ‘한 해를 영광스럽게 장식해 주시는’ 주님의 선하신 손길을 찬양한다(10절).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바라보며 두려움과 감격 속에 젖어 드는 모든 시인들의 시정(詩情)은 모두 창세기 첫 장(1:1-2:3)에 나오는 천지창조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이 장은 간결하고 명료한 문체로써 우주의 시원(始原)을 한 폭의 그림에 웅장하게 담아내고 있다. 아무도 태고의 천지창조를 지켜 본 사람이 없으며, ‘있으라!’는 명령을 들은 사람도 없지만, 저자는 마치 목격자의 증언처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선언으로 우주의 기원과 형성 과정에 대한 모든 토의를 종식시켜 버린다. 그는 물리학의 가장 기본 개념을 이루는 시간과 공간으로 창조의 과정을 짜임새 있게 엮어간다. 시간의 관점에서 천지창조는 삼 일을 한 쌍으로 대칭시키는 엿세에 걸쳐 창조를 완성하며(1:31) 제 칠일에 창조주의 안식과 복주심으로 마무리된다(2:3). 공간적 관점에서 저자는 ‘하늘과 땅의 창조’를 선언한 후에(1:1), 하늘에 있는 모든 것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단계를 따라 뼈대를 형성하고 내용을 채워간다. 하루 하루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둠에 쌓였던 우주의 베일은 하나씩 벗겨지고 완성되어 가며, 혼돈과 공허에 쌓였던 세상의 원래 모습(1:2)은 바다와 땅, 나무와 꽃, 동물과 인간, 해와 달과 별들로 자리를 잡아간다. 이 세상은 아래와 같이 각각 삼일을 대칭으로 완전한 질서를 이루게 된다.


1. 빛
2. 바다와 궁창
3. 땅과 채소
4. 광명
5. 어족과 조류
6. 짐승과 인간
7. 하나님의 안식



  하나님께서는 첫 삼 일에 공간적 구조를 만드시고, 둘째 삼 일에는 채우신다. 이리하여 빛과 광명, 바다와 어족, 궁창과 조류, 땅과 채소는 그 안에서 먹고 살 짐승과 인간으로 짝을 이루고 있다. 인류의 문명들이 꽃피고 사라지며, 우리가 한 평생 터전으로 살고 있는 이 세상의 근원과 구조를 이렇게 간결하면서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다른 글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창조의 과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창조주 하나님은 마치 군대의 대장군처럼 모든 존재에 대하여 ‘있으라’고 명령하시면, 모든 우주의 구성 요소들은 ‘그대로 있게 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그 지으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매일 매일의 창조에 나타나고 있다(4, 10, 12, 18, 21, 25절). 즉, 하나님이 지으신 것들은 개체 뿐 아니라 전부가 다 좋았다. 모든 창조가 완성되었을 때, 온 우주는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한다(31절). ‘심히 좋았다’는 표현은 완성된 우주(cosmos)를 보시고 하나님도 흥분하였음을 말해준다.


  천지의 창조에서 하나님은 동물들(1:22), 인간(1:28), 안식일 (2:3)에 복을 주신다. 하나님의 복주심은 이후 아담(5:2), 노아(9:1), 족장들(12:3; 17:16, 20)에게 이어지며, 창세기의 중심 주제가 된다. 하나님의 복 주심은 모두 번식하는 생물과 연관되어 생육하고 번성하는 능력을 가리키지만, ‘안식일’에 복을 주심이 특이하다. 즉, 쉼이 없이 참된 생명의 번성은 이루어질 수 없다.


  천지창조 이야기에서 우리가 놀라는 것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구별되며 자존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점이다. 그는 이 우주의 일부가 아니며 인간 상상의 산물도 아니다. 그는 시간과 공간을 만드시고 채우시는 초월적인 인격이시다. 그는 나무나 산이나 바다에 거하는 정령이 아니며, 세상의 한 영역을 책임지고 있는 하나의 신도 아니다.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주님의 것, 온 누리와 거기에 살고 있는 그 모든 것도 주의 것이다”(시 24:1). 따라서 그는 “대장장이는 도금장이를 격려하고, 마치로 고르게 하는 자는 모루를 치는 자를 격려하여 이르기를 ‘잘했다. 잘했다’ 하며, 못을 박아서 기우뚱거리지 않게 하는” 세상의 우상과 근본적으로 다른 분이시다(사 41:7). 마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하나님과 아담이 서로 손이 닿을 듯 말 듯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는 근본적인 구별이 존재한다. 이 구별이 기독인의 인식론에 근본을 이룬다. 따라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비록 불타는 용광로에 던져진다 하더라도 느부갓네살이 만든 신상에 절할 수 없었다. 욥은 “언제 태양이 빛남과 달의 명랑하게 운행되는 것을 보고 내 마음이 가만히 유혹되어 손에 입 맞추었던가?”(31:26)라며, 당대의 사람들이 천체를 신격화하고 경배할 때 자신은 그 유혹을 뿌리쳤음을 고백하고 있다. 바울은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리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라’고 권면한다(고후 10:5). 


  오늘날 우리는 이제 막 시작된 세계적인 금융 위기의 대혼돈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주식과 펀드와 부동산에 과다한 부채를 지고 투자한 가정들이 경제적인 허리케인에 휩쓸리고 있는 위기와 혼돈의 시대에 우리는 어둠 속에 있던 세상에 빛을 주시며, 혼돈의 물을 정복하시고 땅을 만들어 주신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주와 인생의 근원과 궁극적인 운명에 대하여 새로운 방향성을 설정하여야 할 것이다. 마치 옛날 이집트를 탈출하여 혼돈의 광야에서 처음으로 창조 이야기를 듣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적 세계관을 떨치고 새로운 우주관과 인생관을 가지며 새로운 영적 공동체를 이룬 것처럼, 우리들도 이 시대의 신들이 된 물질주의, 인본주의, 세속주의, 분파주의, 혼합주의 신들을 우리의 정신과 생활 속에서 다 몰아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주시는 천지의 창조주와 정감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기를 사모하게 된다.

출저:성서공의회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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